커플간의 화술을 서로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는 35가지 방법

  • 커플간의 화술을 서로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는 35가지 방법
    매혹 없이 ‘매혹당한 사람들’명품인 줄 알고 샀는데 짝퉁임을 확인했을 때의 기분이랄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이며 그 감독이 유명한 코폴라 패밀리의 일원이라는 정보만 믿고 기대에 차서 본 영화인데 보고 난 후 조금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글쎄 칸이 보는 관점과 필자의 시각이 달라서일까? 소피아 코폴라가 칸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필자를 설득하는데 미흡했던 것은 분명하다. 영화 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에 있던 가톨릭 여자 기숙학교 판즈워즈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치열한 전쟁 한복판에 있는 학교는 사람들이 대부분 떠나버리고 교장과 여교사 그리고 다섯 명의 학생만 남아 있다. 나무들이 잘 관리된 너른 정원과 중세풍의 우아한 흰색 건물은 이곳이 전쟁 중임을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워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그 적막한 공간에 한 남성이 침입한다. 학생 에이미(우나 로렌스)는 늘 하던 대로 버섯을 따러 정원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다리 부상을 입고 군대를 이탈한 북군 병사 존(콜린 파렐)을 발견한다. 그는 교장 마사(니콜 키드먼)의 지휘로 안으로 옮겨지고, 적군이지만 기독교적 박애 정신으로 치료받는다. 물론 그 적군은 미남으로 설정되어 있으니 여자로만 구성된 집단에서 당연히 주목받고 여자들 간에 미묘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그중에서 두드러진 관계는 많은 사연을 지닌듯한 여교사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와 선천적인 팜므파탈의 끼를 지닌 조숙한 학생 알리시아(엘르 패닝) 사이에서 벌어진다. 알리시아는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에드위나는 자기를 사랑한다는 존의 고백에 흔들린다. 마사는 마사대로 존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존은 그들과 모두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런 상황을 즐긴다.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정원을 돌보며 이곳의 일원이 되어가던 존은 어느 날 애정행각이 발단되어 운명이 한순간에 뒤바뀐다. 에드위나가 자신을 사랑한다던 존이 알리시아와 침대 위에 있는 모습을 보게 되고 변명하려던 존을 밀치자 계단에서 구르며 정신을 잃는다. 상처가 터진 모습을 본 마사는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썩어들어 간다며 그가 기절한 사이 존의 다리를 잘라낸다. 지루하게 흘러가던 영화가 이 지점부터 스릴러로 변신한다. 깨어나 다리가 잘린 것을 알게 된 존은 괴물로 변하고 격분한 남자와 일곱 여자의 대결로 치닫는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에드위나는 미친 듯이 날뛰는 존에게 다가가 사랑을 나누고 나머지 여자들은 그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그를 처음 발견했던 에이미가 독버섯을 따오고 마지막 만찬이 차려진다. 자, 여기까지 스토리는 매우 흥미진진하지만, 영화의 초점이 불분명하여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여자들 중 여교사 에드위나만이 어느 정도 심리와 욕망이 드러나 있을 뿐 마사와 알리시아의 심리는 불확실하고 행동의 개연성도 부족한 채 그저 예쁨만 있다. 더구나 존은 내면이 없이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자아가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니 전반부는 지루하고 후반부는 맥 빠진 스릴러가 되고 말았다. 원작이 그러한가 하여 관람 후 검색해 보니 원작과 많이 달라져 있고, 1971년도에 만들어진 영화와도 관점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원작에 있던 흑인 하녀도 빠져 있고, 무엇보다도 1인칭 시점으로 처럼 등장인물이 각기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인물의 깊이를 창조했던 원작과 달리 밋밋한 3인칭 시점으로 스토리를 끌고 가기에 바쁘다 보니 생긴 허점들이었다. 굳이 소피아 감독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아름다운 화면과 스타일을 중시하는 감독의 취향 때문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왔던 1971년 영화와 달리 소피아가 여성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도 이 영화가 정적인 흐름을 형성한 이유일 것이다. 다만 칸이 이런 여성적 정물화를 선호한다고 본다면 수상을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끝까지 남는 의문은 마사가 존의 다리를 자른 것이 정말 의학적 필요에서일까? 질투심에서일까?2017-09-20 15:39
  • 자식은 거울이다작년 초, 딸아이의 남자 친구가 인사를 오겠다고 해서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2주 후 현대미술관 그릴에서 마주 앉았다. 어색하고 기분이 묘했다. 노트북을 펼쳐 몇 컷으로 정리한 자신의 풀 스토리를 전하는 예비사위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래도 비교적 차분하고 진솔하게 35년의 이야기를 전하는 표정이 진지했다. 만나서 심문하듯 묻고 답하는 자리보다는 온전하게 자신을 알리는 시간을 주는 게 좋겠다 싶어 필자가 주문한 것이 ‘나를 말한다’ 브리핑 PPT였다. 우리 아이와 결혼을 원한다면 예비 장인, 장모를 설득해보라는 일종의 작은 미션이었다고나 할까. 이후 까탈스러운 장모라는 주위의 비난이 있었다고 사위에게 전하니 나름 재미있었던 이벤트였다며 집안의 가풍으로 하잔다. 양가 부모 상견례가 걱정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한 마음에 경험자들에게 물으니 형식적인 자리이니 인사 정도나 나누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 생각은 달랐다. 그동안 아들을 어떤 심정으로 키웠는지, 어떤 아이로 자라기를 소원했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지 등등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자 모두들 극구 말렸다. 그러려면 너는 아예 상견례 자리에 나가지 말라는 충정 어린 겁박(?)까지 했다. 문득 ‘사돈끼리 그렇게 어려워해야 할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귀한 자식이고 사돈끼리 사이가 좋으면 아이들도 편할 텐데 왜 형식적으로 만나라고 하는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상견례 자리에서는 남편이 주로 이야기하고 필자는 경청만 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시간의 상견례 만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에게 “입을 꼭 다물고 싸늘하게 앉아 계시니 시베리아가 따로 없었다. 겨울 왕국 지으시느라 애쓰셨다”는 원망 섞인 비난을 들어야 했다. 상견례를 마치고 나니 혼례가 실감이 났다. 남편도 딸아이가 시집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한동안 잠을 뒤척였다. 장인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이해하겠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35년 전 우리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결혼이 통과의례나 속물적인 거래가 되지 않으려면 정직하고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자신이 납득할 만한! 결혼 당사자는 내게 결혼은 무엇인지, 왜 그 사람이어야 하는지,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둘이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등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 역시 새 식구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무엇인지, 자녀가 어떤 가정을 꾸리기를 원하는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인지, 그럼에도 결정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욕심을 내려놓고 다양한 경우들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어느덧 딸아이의 결혼 1주년이 지났다. 여전히 재미있고 좋단다. 살아가면서 몇 가지 잘한 일 중 하나가 딸아이를 결혼시킨 것이다. 새 식구도 얻었지만 남편과도 변화가 생겼다. 부모이자 인생 선배로서 바람직한 부부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기 시작한 거다. 조금은 성숙하고 의젓한 장인, 장모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딸아이의 결혼으로 우리 부부를 비춰주는 거울이 생긴 것 같다. 사위가 아직도 낯설지만 결혼시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딸아이가 원하는 사람을 흔쾌히 맞아들인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어른다웠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설레는 가슴으로 함께 꿈꿔나가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아름답다.2017-09-14 19:13
  • 커플간의 화술을 서로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는 35가지 방법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생각해 보라’가깝게 지내던 권사님이 폐암에 걸렸다는 전화를 받았다. 신약을 처방 받아 먹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전화기 너머로 그녀가 직면하고 있는 두려움이 전해져 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 사회에서 암은 가장 무서운 병 중에 하나다. 죽음이 언제 다가올지 몰라 암진단을 받으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표현을 쓴다. 또 환자나 보호자는 병이 악화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고 통증과 싸워야 하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이중삼중의 고통 속에 있을 권사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 하다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를 끊고 지난 해 읽었던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다시 꺼내들었다. 서른여섯 살 젊은 의사가 암이라는 거대한 암초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의연하게 자신의 삶을 걸어갔는지를 보여준 책이다. 외과의사로서 그는 많은 죽음을 보았고 가슴 아파했다. 생사를 가르는 현장에서 의사의 책무는 무엇인지, 무엇이 의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또한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통받는 환자들의 연민을 풀어주려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가 암 진단을 받고 난 후,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에서 죽음 앞에 선 환자가 되었다.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은 환자를 치료할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는 일이 이토록 혼란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죽음을 용감하게 마주하고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생존을 향한 끝없는 분투를 통해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한 것이다. 암진단을 받고도 레지던트 생활을 마쳤고, 체외수정을 통해 아이를 낳고 길렀다. 또한 집필에 필요한 정신력을 유지하기 위해 끝까지 애썼다. 맥없이 죽어가는 모습 대신 자신의 인생을 끝까지 아름답게 그려내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폴 칼라니티가 감동을 주는 건 이런 삶이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이 걸어간 빛나는 길이라는 점 때문이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생각해 보라’는 주치의의 말에 폴은 ‘자신에게 석 달의 시간이 남아 있으면 가족과 시간을 보낼 것이고, 1년이 남아있다면 글을 쓰고싶고, 10년이 남았으면 병원으로 돌아가 환자를 치료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됐다. 평상시에 소중하다고 느껴졌던 일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사소한 일이 되버리고, 사소해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권사님을 다시 만나면 그녀의 인생에서 의미있는 일이 무엇인지 얘기해 봐야겠다. 암과 싸우고 있는 그녀는 나보다는 훨씬 단순한 것에 열정을 드러낼 것이다.2017-08-28 09:44
  • 커플간의 화술을 서로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는 35가지 방법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름답고 강한 여인 강주은 영화 에서 주인공 톰 행크스가 하얀 깃털이 인도하는 대로 평생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강주은도 최민수라는 깃털에 이끌려 전혀 예기치 못한 라이프가 되어버렸다. 처음 만난 강주은은 생각보다 날씬하고 예뻤다. TV에서의 모습은 미스코리아 출신에 상남자 최민수를 주눅 들게 하는 아줌마의 이미지도 있고 해서 크고 강해 보였는데 막상 마주한 그녀의 이미지는 부드럽고 우아했다. 강주은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집에서 나설 때 내 아내가 꽃단장을 하고 따라나섰다. 평소 TV를 보면서 강주은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아내가 나만 보낼 리 없었다. 강주은을 실제로 본 내 아내도 “생각보다 굉장히 말랐네! 내가 만약 TV에 나온다면 뚱뚱이로 비치겠어!”라면서 강주은의 몸매와 우아한 자태에 찬사를 보냈다. 참고로 강주은과 1970년 개띠 동갑인 내 아내도 아직 훌륭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지만 강주은이 자기보다 통통하리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사실 강주은과 내 아내의 이미지는 상당히 닮았다. 아내와 인사를 나눈 강주은도 “이봉규씨 와이프와 내가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다”고 특유의 과도한 제스처를 했다. 그녀와의 인터뷰는 MBN 프로그램 를 녹화하는 스튜디오에서 방송 전에 이루어졌는데 마침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함익병과 홍혜걸이 녹화를 위해 대기실에 있다가 내가 강주은과 인터뷰하는 것을 알고 쳐들어왔다. 그들 부부와 한 달에 한 번씩 댄스파티를 하고 있어서 강주은-최민수 부부도 함께하면 좋겠다고 초대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동안 여러 번 부부 동반 모임에 나갔지만 어색했다고 털어놓는다. 한국 문화에 어색했던 본인 탓도 있지만 독특한 성격의 연예인 남편과 부부 동반 파티는 쉽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부부에 관한 틈이 보이기 시작하기에 파고들었다. 결혼생활에 대한 평점을 매겨달라고 졸랐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레이드(평점)를 매길 수가 없다는 것. 불편한 결혼생활 덕분에 성장했다 “이 남자가 내 남편이라는 것이 상당한 영광이다. 남편을 통해서 내가 성장했다.” 즉 지금 방송을 하는 것, 한국말을 잘하게 된 것, 공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등 모두 최민수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불편한 결혼생활 덕분에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고 최민수가 남편이 아니면 오늘의 강주은의 성공을 이끌어낼 수 없었을 거라는 자기 진단이다. 터프하기로 소문난 최민수씨에게 얻어맞을 각오로 평가한다면? 마치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악처로 소문났기에 남편이 대철학자가 되었다는 해석이 떠올랐다. 부부 관계는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뭔가 있다. 한량 이봉규는 최민수에 대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강주은의 눈과 심장으로 보면 최민수는 100점을 넘어서서 평점을 매길 수가 없는 것이다. 최민수도 부인의 은공을 높이 평가한다. 언젠가 철학적인 고백을 강주은에게 했다고 한다. “23년을 살고 난 오늘의 최민수가 23년 전으로 돌아가 주은이를 만났어야 한다.” 이 말을 듣자마자 강주은은 “만약 그랬다면 오늘의 주은이는 아닐 것, 평범한 아내가 되었을 거다.” 철학적으로 치고받는 이 부부야말로 부창부수(夫唱婦隨)다. 삼라만상에는 항상 이면이 있기에 반전을 노리면서 파고들었다. “이혼 생각을 해본 적 있나?” “Of course!”라는 강주은의 대답이 1초도 안 쉬고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한술 더 뜬다. “결혼식장에서부터 이 결혼이 맞나? 잠깐만요! 다시 생각해봅시다!”라고 설득하면서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었다는 것. 심지어 결혼 후 한동안 캐나다행 비행기표를 지니고 다닐 정도로 매일매일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는 충격 고백을 쏟아 놓는다. 우리 부부의 사랑은 ‘다른 차원의 사랑’ 한 방송에서 “최민수가 이상형이었냐?”는 질문에 “지금은 너무 감사하게 제 이상형의 이상, 그 이상이지만 처음에 만났을 때는 상상도 못했다. 이런 인간이 세상에 있나? 싶었다. 상상 못했던 사람이다”라고 말해 스튜디오를 발칵 뒤집어놓은 적이 있다. 반전도 이 정도면 국가대표급이다. 그녀의 순수한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런 만큼 사랑하지 않는 부부가 이혼하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오히려 축하해주고 싶다고 덧붙인다. 이 같은 철학은 부부가 사랑하지 않으면 헤어지라고 평소 주장해서 ‘이혼 예찬론자’ 소리를 듣는 한량 이봉규와 맥을 같이한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억지로 사는 부부는 위선이다. 심지어 다른 파트너와 성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부부 사이는 억지로 형식적으로 이어가는 것은 대단한 반칙이라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다. 그런 관점에서 강주은은 지금도 최민수를 진정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 애잔함도 있는 듯. 항상 버림받아왔다고 생각하고 있고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남편에게서 늘 느끼고 있기에 그 마음이 더 끔찍할 수밖에 없다는 것. 아마 이 같은 감정은 동정심을 뛰어넘는 일종의 모성애 같은 것이라고 어렴풋이 판단된다. 그래도 끝까지 확인하고 싶어서 또 물고 늘어졌다. “앞으로도 이혼하지 않고 늙어갈까?”라는 나의 도발에 그녀는 “이제 이 남자를 너무 완벽하게 잘 알아서 어떤 환경에도 잘 살 것 같다. 남편을 죽을 때까지 지켜주고 싶다”고 마음을 모아 대답한다. 자신들의 사랑은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다른 차원의 사랑’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나를 잡아줄 남자는 최민수밖에 없고 마찬가지로 남편을 잡아줄 여자도 강주은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We earned that!”이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강주은의 큰 입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영화 에서 주인공 톰 행크스가 하얀 깃털이 인도하는 대로 평생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강주은도 최민수라는 깃털에 이끌려 전혀 예기치 못한 라이프가 되어버렸다는 것. 남편 따라 가다 보니 대통령도 만났고 평소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인생이 펼쳐졌는데, 앞으로도 포레스트 검프처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아무 생각 없이 배우는 자세로 살아갈 것이라고 조심스레 전망했다. 이 영화에서 바보처럼 보이는 톰 행크스의 아름답고 순수한 여정과 강주은의 인생이 너무 닮아 보인다. 그만큼 강주은은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다. 한량의 어른스런 눈빛에 순수한 영혼이 들키기 싫었는지 터프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너무 순수하게만 보이면 왠지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사춘기 때 가출한 적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량 이봉규가 듣기에 강주은의 가출사건은 가소로웠다. 사연인즉, 가출하고 몇 시간 차를 몰고 가다가 문득 어떤 시 구절이 떠올랐다는 것. “Water water everywhere but not a drop to drink(물은 어디에나 있건만 내가 마실 물은 한 모금도 없구나).” 갑자기 그 시의 구절이 떠오르자 불문학을 전공한 어머니에게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 공중전화로 그 시를 낭송하면서 펑펑 울었다는 것. 오히려 어머니가 담담하게 웃으면서 “빨리 집으로 돌아와라!” 하고 다독였다고 한다. “너는 이마가 제일 예쁜데 왜 가리니?” 고등학교 때 두 번이나 가출을 감행하는 등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이봉규에게 강주은의 가출담은 귀여울 따름이었다. 그만큼 천진난만한 영혼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다. 이봉규의 심야데이트에서 그동안 많은 여자 스타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들의 남편들 중에서 전생에 나라를 구한 인물을 몇 명 봐왔지만, 최민수처럼 처복이 많은 남자도 드물 것이다. 관상학적으로 보면 강주은도 복이 많아 보인다. 그녀의 훤하고 톡 튀어나온 이마와 높은 턱의 선은 일품이다. 때문에 결혼 전 별명이 ‘걸어 다니는 이마’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전 자신의 이마가 못마땅해서 가리고 다니기 일쑤였단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너는 이마가 제일 예쁜데 왜 가리니?”라고 충고를 하곤 했다. 그런데 최민수도 연애 시절 부모님과 똑같은 말을 하더라는 것. 그때 처음 이 남자가 부모와 똑같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구나! 하고 느꼈고, 그게 결정적으로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였다고 털어놓았다.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참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 그녀가 요즘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많이 끌고 있는 비결도 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 화면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여섯 살에 느꼈던 것을 여전히 그대로 느끼고 싶다”는 강주은의 삶은 성공했다. 그녀가 스타라서가 아니라 본인이 꿈꾸던 대로 여섯 살 어린 순수한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간한 책 를 읽으면 그녀의 순수함의 원천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2017-08-24 15:27
  • 커플간의 화술을 서로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는 35가지 방법
    [문화공감] 노장은 없다! 무대는 언제나 젊음 제2회 늘푸른연극제 평생 오로지 한길만을 걸으며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이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멋있다. 여전히 젊음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무대에 오르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연출력과 필력을 뽐내는 네 명의 연극 원로가 제2회 늘푸른 연극제에서 만났다. 바로 대한민국 연극을 대표하는 배우 오현경과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과 극작가 노경식이 올해 주인공들이다. ‘원로연극제’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늘푸른연극제’로 문패를 바꿔 달은 이 연극제는 원로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따뜻한 예술가들의 잔치였다. 8월 한 달, 평균 연령 79세 젊은 오빠(?)들의 무대로 대학로 극장가가 뜨거운 박수로 넘쳐났다. 범접할 수 없는 화술의 대가, 배우 오현경 연극계 후배들은 오현경을 ‘학 같은 배우’라 부른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후배를 꾸짖는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곧다. 화술의 대가, 그의 연기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표현이다. 국내에서 가장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배우로 통하는 오현경은 사비를 털어 ‘송백당’을 열고 후학을 위해 화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번 연극제의 개막작이자 오현경의 출연하는 연극 은 1984년 초연 때부터 오현경이 아버지 역을 맡아왔던 작품이다. 젊음을 향한 늙은 아버지의 주책스런 욕망을 해학과 능청스러움으로 표현해 초연 때부터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이번 무대에서도 또한 강단 있고 깊은 대사와 호흡으로 나이를 잊은 열연을 보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사실주의극에 시적 분위기를 불어넣는 연출가 김도훈 혹자는 연출가 김도훈을 일컬어 ‘돈과 억세게 거리가 먼 연극인’이라고 부른다. 관객의 입맛에 맞는 연극은커녕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끈질기게 고집하고 남녀의 애증과 갈등, 인간의 본질 파악에만 집중한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진지하고 무거우며 당연히 관객이 많이 들지 않는다. 대중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연출가 김도훈. 1976년 극단 뿌리 창단 이후 40년 동안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역시 그의 대표작은 이다. 남루한 집을 배경으로 한 가족이 붕괴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그린 테네시 윌리엄스의 은 1976년 첫 연출 후, 그가 가장 자주 무대에 올렸던 레퍼토리다. 이번 공연에는 국회의원을 지낸 배우 최종원이 주인공 톰으로 출연했다. 역사를 통해 현실을 환기시키는 참여적 극작가 노경식 “작가로서는 이런 자리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평생 처음으로 포스터에 나온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연극 잘 만들어서 후배나 선배들에게 부끄러움 없었으면 합니다.” 극작가 노경식 극작가 노경식은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로 등단했다. 지난해 까지 50여 년 동안, 약 40여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그가 작품을 통해 들려주고자 했던 것은 우리 한국인의 이야기였다. 늘푸른연극제의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 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협조했던 친일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부패권력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 2005년 극단 미학(정일성 연출)에 의해 초연된 바 있다. 작가 특유의 역사적 안목으로 완성된 기록극이다. 의 총연출은 극단 동양레퍼토리의 상임연출가 김성노와 협력연출 이우천이 공동으로 맡았다. 권병길, 정상철, 이인철, 김종구, 유정기 등 노련한 60대와 40~50대의 중장년 및 젊은 배우들 등 총 30여 명의 연기자들이 종횡무진 새롭게 무대를 석권하는 대형 파노라마로 꾸며졌다. 첫사랑을 찾아가는 노년을 연기하다, 배우 이호재 이호재는 1964년 를 시작으로 그동안 출연한 작품만 200여 편이 넘는다. 연극평론가 구히서는 그의 연기에 ‘연기의 교과서, 대사의 달인’이라는 별칭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의 유연성과 순발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우’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는 2007년에 초연된 작품으로 극작가 이만희가 이호재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50년 만에 만난 동창이 첫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고백하는 동창생들의 이야기다. 젊은이들이 주는 풋풋함이 아닌 시니어의 우정과 사랑의 감정을 잘 녹였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끝에서 따질 것 없이 던지는 그들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애잔하게 그려졌다. 2017-08-24 09:10
  • 커플간의 화술을 서로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는 35가지 방법
    “시각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미술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꿈입니다”‘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화가인 엄정순(57) 디렉터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이 화두였다. 보이는 것 이면에 무언가 있을 것 같은데 이해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답답함. 엄 디렉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즐거움, 그 밖의 세상에 있는 진실과 본질 등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그 생각이 ‘눈을 쓰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탐험으로 이어졌고 ‘우리들의 눈’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탄생시킨 계기가 됐다. “시각예술을 하는 작가로서 안 보이는 세계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과의 미술 작업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이는 눈과 보이지 않는 눈이 만나서 다르게 보는 눈 ‘Another Way of Seeing’이 만들어지는 것을 상상했어요.” 엄정순 디렉터가 이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지는 벌써 20년이 됐다. ‘우리들의 눈’은 시각장애인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공유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프로젝트 그룹이다.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는 눈, 보이지 않는 눈, 모두가 우리들의 눈이란 뜻이 담겨 있다. 미술에서 가장 멀리 있었던 시각장애인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각예술가들이 함께 미술 작업을 하고 서로 다른 눈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세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시각장애인들이 미술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중심이 맹학교 미술 수업이다. 예술가들이 직접 맹학교로 찾아가 시각장애 학생들과 창의적인 융·복합 수업을 하는 것이다. 드로잉, 조소 등 미술 수업 외에도 사진작가와 함께하는 사진 수업, 요리연구가와 함께하는 미각 수업, 조향사와 함께하는 후각 수업 등 학생들과 함께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되묻는, 예술적 시도를 했다. 그리고 예술적 역량을 가진 아이들을 발굴해 미술대학에도 보내고, 작가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로 시각장애인 예술가 성장도 지원하고 있다. 미술 수업에서 작가 데뷔까지 시각장애인들에게 열려 있는 미술 교육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시각장애와 미술을 주제로 한 전문 공간인 ‘우리들의 눈 갤러리’도 운영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정보와 도움을 주는 복지 차원만이 아닌 예술적 접근을 통해 서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전시, 교육, 출판, 워크숍 등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의 이미지 학습을 위한 점자촉각아트북도 제작한다. “우리 주변에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를 담고 있는 수많은 도서들이 있는데 시각장애 학생들은 그런 세계에서 너무 멀리 있어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들도 소통을 위해 공동으로 쓰는 이미지를 배우고 즐기는 다양한 통로가 필요해요.” ‘우리들의 눈’ 내의 보르헤스 도서관에서는 다양한 수작업 샘플북을 제작해 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미술 표현 중 시각은 작은 일부 ‘우리들의 눈’이 만들어지던 초기에는 시각장애학교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친다는 엉뚱한 발상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있었다. “생각의 차이는 ‘미술’이란 단어에서 나왔어요. 미술과 그림, 이미지는 보는 것과 연결되는 시각예술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어서 시각장애인은 못 보니까 시각적 표현이 불가능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거죠. 저는 미술, 즉 이미지의 시작은 상상력과 오감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각은 작은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엄 디렉터에게 미술은 시력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였던 것. 여전히 미술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미술은 잠과 사랑처럼 인간의 삶에서 소중한 한 부분이라는 의견도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미술 교육을 시킨 후 가장 큰 변화는 자신을 표현하면서 성취감, 자존감, 인간으로서의 품위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처음에 ‘너를 표현해봐라’ 그리고 ‘그것을 이미지로 보여줘라’ 하고 주문했을 때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어려워했고 제대로 못했어요. 미술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동떨어져 있던 시각장애인들은 미술은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고, 또 콤플렉스를 가장 많이 느끼게 하는 과목이었던 거죠.” 그런데 시도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안 된다’고 하고 자신도 ‘못할 거야’라고 했던 무엇을 뛰어넘는 경험이 되었다. “저는 그들이 느낀 것을 일본의 한 시각장애인이 말했던 ‘미술 수업은 인간으로 사는 품위를 알게 해주었다’는 고백으로 알 수 있었어요. 미술은 논리와 감성의 조화를 배우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게 하는 힘을 갖게 해줘요. 참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미술의 의미를 시각장애인들의 경험을 통해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미술가들과 사람들의 생각과 표현이 다른 것처럼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 같은 경우도, 이 작업을 하며 그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생겼어요. 예술가로 또는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볼 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며 놀랄 때가 많아요. 일반 예술가들과 달리 대상을 대하는 방식이 매우 적극적입니다.” 사물에 대한 선입견이 적고 촉각, 청각 등 다른 감각으로 사물을 접하다 보니 보이는 대로 이해하는 비장애인들보다 형태와 표현 면에서 창의적인 작품이 많다. “저희는 창의적 표현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을 한다고 보면 돼요. 맹학교 학생들이 만든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의 작품들도 그중 하나인데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전형적인 코끼리의 모습은 아니지만 누구라도 ‘코끼리스러움’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변화를 몰고 온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는 시각장애인과 예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코끼리를 만지고 표현하는 것을 통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창의적으로 풀어보자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다. 2009년 6월, 33명의 인천혜광학교 학생들과 15명의 티칭 아티스트들이 인천에서 광주까지 311.5km 첫 번째 코끼리 로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네 번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코끼리를 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2012년 7월에는 청주맹학교 학생 8명과 관계자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기 위해 태국 치앙마이에 다녀왔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비유잖아요.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인간을 보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한다’고 하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눈뜬 사람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메타포로 현재까지도 많이 사용되는 비유입니다.” 엄 디렉터는 이 메타포로 아트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 코끼리를 경험하게 하면서 한눈에 파악이 안 되는 거대한 무엇에 다가가는 상상력과 시각장애 학생들의 부족한 스케일 감각에 도전해보는 한편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창의적으로 풀어보려고 했다. 이 프로젝트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참여했던 맹학교 학생들이 훌쩍 성숙해졌고 ‘우리들의 눈’ 활동도 각종 방송과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더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2009년 시작된 프로젝트가 2010년 7월 TEDxSeoul에서 발표됐고 이 발표를 계기로 2013년 EBS 다큐멘터리 가 방송됐다(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 TV부문 다큐상과 한국피디협회 PD상 수상). 이어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지학사) ‘작문과 화법’에 실리기도 했다. 동물원, 동물보호단체들과의 네트워크도 생겼고, 2015년 ‘코끼리 주름 펼치다 展’으로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블루메미술관(파주 헤이리) 순회 전시도 했다. 미술 교육과 함께 진행되는 코끼리투어 프로젝트는 12개 맹학교 순회 투어를 계획중이다.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후원으로 운영 비영리 단체인 ‘우리들의 눈’은 소중한 가치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 덕에 운영되고 있다. 기업 후원을 중심으로 매월 소정의 금액을 후원하는 사람들, 매년 바자회를 열어 행사 수익금을 기부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각 분야에서 재능기부를 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20년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어려움이 생겼다. 운영비 지원이 줄어들어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도 잠정 중단 중에 있다. ‘우리들의 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는 의미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북촌에 갤러리를 열었는데 임대료 때문에 고민이다. “맹학교에서 진행되는 미술 교육 강사비, 재료비 등 비용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이 개안수술을 하거나 하면 봉사나 후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지만 시각장애인에 대한 미술 교육은 제대로 짐작되지 않아서 그런지 후원이 잘 안 되는 편이죠. 갤러리 장소 또는 후원금을 지원할 수 있는 기업들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내외적으로도 선례가 드문, 시각장애인과 미술 작업을 하는 ‘우리들의 눈’은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생활 정보를 주는 복지적 관점이 아닌 예술적 협업으로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어 오해도 많이 샀고 이해받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렸다. “장애인을 돕겠다는 착한 마음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수많은 편견과 척박한 물리적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 예술적 해법이 필요한 일이었어요. 이런 시도에 즐겁게 사심 없이 동참하는 이들을 만날 때 엄청 신이 나죠.” ‘우리들의 눈’이 창설된 지 20년째인 2016년, 그간의 활동 자료들을 정리한 자료집을 만들었다. 이 자료집을 기점으로 20년간 펼쳐졌던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이 대중들과 만나고 우리 사회 속에서 쓸모 있는 문화 예술이 소비되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 일환으로 ‘우리들의 눈’은 올해 두 권의 책 출판과 아트상품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 2017-08-08 09:54
  • 커플간의 화술을 서로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는 35가지 방법
    ‘교통부장관’을 꿈꾸는 개그우먼 반전 매력의 프리티우먼 이성미그녀는 상상했던 이미지 그대로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이었다. 내일모레가 환갑인데 이토록 귀엽다니,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희한한 여인이다. “일단 오늘 하루만 남편을 존경하자!” 그렇게 각오하고 사니 평생의 꿈이었던 현모양처가 저절로 되었다고 말하는 개그우먼 이성미. 한여름 오후의 데이트는 분명 귀여운 여인과 시작했는데 끝날 무렵에 보니 작은 거인과 앉아 있었다. 그 나이에 몸무게가 40kg도 안 나간다. 뭇 여인들에게 몰매 맞기 싫은지 실토했다. “안 먹어서 이래요~ 일할 때 많이 먹으면 졸리고 느긋해져서 집중력이 떨어져 할 수 없이 끼니를 거를 때가 많다”고 자백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이성미 또래의 여인들을 할머니로 생각했다. 지금은 필자 이봉규도 60이 되고 보니 이 또래의 보통 여인들이 할머니까지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섹시한 향기가 나는 여인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성미는 여름철 농익은 살구처럼 귀엽고 섹시하다. 날씬하고 자그마한 체구에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볼을 꼬집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다. 한량 이봉규가 잠깐 정신줄을 놓았다. 프로의식을 되찾아 몰아치듯 인터뷰를 시작했다. “100세 시대에 사랑의 이모작을 위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 이봉규의 다짜고짜 도발에 그녀는 “기운이 있어야 그런 모험이나 상상도 하죠!”라고 말한다. 한숨도 살짝 묻어나온다. 희극인답게 개그처럼 위장했지만 그 속내를 살짝 들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때는 션과 정혜영 커플이 부러웠다. 왜 나는 션 같은 남자를 못 만났을까?” 스스로 푸념도 해봤지만 결국 “내가 정혜영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고 한다. 자신에게 맞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닫고 지금의 남편에게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성미 남편은 기자 출신으로 지금은 연예기획사 웰메이드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면서 국제대학교 조교수다. 처음 만났을 당시 남편은 이성미의 열애설을 취재하러 왔다가 그녀에게 푹 빠져버렸다. 인터뷰하고 얼마 후 남편은 “결혼할 생각 없으세요?”라고 물으며 적극적으로 대시했다. 그녀의 반응을 엿본 남편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저랑 결혼할 생각 없으세요?” 하며 정신없이 파고들었다. 나름 차분한 이성미는 “연하이고 게다가 기자는 싫다”고 잘라 말했지만 싫지는 않았기에 일각의 여지는 남겼다. “부모님께 허락을 먼저 받아와라!” 하며 돌려보냈다. 몸이 후끈 달아오른 남편은 이틀 뒤 찾아와서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았다”며 “6개월과 1년 뒤 언제 결혼하고 싶냐?”고 이성미를 다그쳤다. 남편의 불도저식 박력에 이성미는 항복했고 4개월 뒤 결혼에 골인했다. 우리는 ‘묵은지 부부’ 한 이불을 덮고 산 지가 어느덧 25년이 넘었다. 한때 결혼생활이 살짝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잘 극복하고 지금은 너무나 행복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다. 권태기 시절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남편과 거리를 두기 위해 캐나다에서 7년을 살기도 했다. 두 살 연하인 남편을 약간 무시하는 교만함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후 생각을 바꿔 자신을 내려놓고 남편에게 맞추기로 마음먹었더니 부부관계가 확 달라졌다. 남편한테 전화가 오면 이성미 휴대폰에 ‘존경하는 남편’이라는 글자가 뜬다. “일단 오늘 하루만 존경하자!” 그렇게 각오하고 사니까 술술 풀리더라는 것. ‘하루살이 인생’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린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개구질 것 같은데 의외다. “아직도 방귀를 안 텄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성미의 꿈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현모양처다. ‘묵은지 부부’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냄새도 나고 매력은 없지만 깊은 맛이 있는 부부관계”라고 ‘묵은지 부부’에 관해 설명한다. 그녀의 현모양처 꿈이 이뤄진 것은 자식들의 평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엄마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뭐 같니?”라는 이성미의 질문에 아이들이 “하나님, 집, 가족”이라고 대답해서 너무 고마웠다고 술회한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평생 꿈인 ‘현모양처’가 됐구나 하며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이성미는 어린 시절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기에 현모양처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그녀를 버리고 떠나 새엄마 밑에서 컸다. 새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또 다른 새엄마와도 살았다. “엄마가 네 명이나 된다”고 웃으며 말한다. 이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이 여유로워졌지만 어릴 적 자신이 겪은 불행을 남편과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 깊은 각오가 그녀의 가족을 행복하게 이끌었을 것 같다. 아이들의 성적표를 본 적이 없다 너무 여유로워진 걸까? 가끔 자식들이 말을 안 들을 때는 개그맨답게 “이것들이 새엄마랑 안 살아봐서 이래!” 하며 다그칠 때도 있단다. 그래도 아이들이 잘 자라줘서 너무 고맙다.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고2 딸은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한다. 이성미는 “도둑질 아니면 뭐든지 자식들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은근히 지원사격이다. 그러면서 선배 입장에서 “딸의 성격이 대범해 연예인을 해도 잘할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린다(악성 댓글에도 견딜 수 있는 성품이라야 연예계에서 버틸 수 있다). 이성미가 자식들에게 무턱대고 관대한 것만은 아니다. 큰딸이 대학 1학년 때 입학을 보류시키고 1년간 알바를 시켰다고 한다.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등 이런저런 알바를 하던 중 시간당 3만원 이상을 주겠다는 고액 알바광고 전화가 걸려왔다. 자세히 물으니 “아저씨들 옆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된다”는 꼬임이었다. 세칭 룸살롱, 단란주점 같은 유흥업소로부터의 유혹이었다. 엄마와 모든 것을 숨김없이 상의하는 딸이었다. 그때도 엄마와 상의했기에 딸이 어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100% 아이들을 믿는다. 믿는 만큼 아이들도 다 얘기한다”며 딸 자랑을 하는 이성미에게 이봉규가 태클을 걸었다. “글쎄~ 진짜 다 얘기할까? 그 나이 때는 엄마에게 숨기고 싶은 일도 발생하고 상상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도발했더니 그녀는 “우리 가족은 각자 결정하는 일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다. 걱정은 지들이 하는 거지 엄마는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여태껏 아이들의 성적표를 본 적이 없다”는 충격적인 말도 한다. “흙에서 자란 아이는 용기로 크고, 아스팔트에서 자란 아이는 오기로 자란다”는 말을 20세 때 어디선가에서 듣고는 가슴에 새기고 아이들을 키울 때 금과옥조로 삼았다. 이성미의 집에는 아이들을 위한 ‘용돈 항아리’가 있다. 항상 5만원 정도 비치해놓는데 아이들이 알아서 꺼내간다. 그녀의 ‘믿음 가정교육’에 상당한 공감을 느꼈다. 귀여운 여인 그리고 작은 거인 아름다운 얘기만 하고 인터뷰를 끝낼 한량 이봉규가 아니라서 전매특허 질문을 훅~ 던졌다. “만약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면? 용서할 수 있나?” 몇 초간 정적이 흐르더니 “내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남편이 바람을 피웠을 것으로 이해해줄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금방 “그런데 아이들 때문에 바람은 피우지 않을걸!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로 맹세했거든” 하며 마무리 짓는다. 그녀의 표정에 강한 자신감이 묻어나온다. 이대로 물러날 이봉규가 아니다. “아내로서 부족한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나?”라고 묻자 의외의 답변을 한다. “다정하거나 살갑지 않다. 애교도 없고 사랑 표현도 못한다.” TV 화면에 비치는 그녀의 평소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그렇다면 이성미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몸부림치는 백조처럼 귀엽게 보이려고 엄청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인터뷰하는 동안 그녀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다는 점을 감지했다. 현모양처 이외의 앞으로의 꿈을 물으니, 교통부장관을 하고 싶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밝힌다. 뉴스를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운전이 제일 무섭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살리고 싶다고 부연 설명한다. 교통부장관이 어려우면 사복경찰이라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체구는 작지만 사회봉사에 대한 포부는 무척 크다. 지금은 ‘CH 114’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교회를 찾아주는 사이트인데 올 9월에 오픈할 예정이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한 달에 1만 명 정도나 된다니 믿기 힘들다. 이성미는 이들이 안타까워 이 같은 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어릴 시절과 젊은 시절 한때의 불행을 슬기롭게 승화시킨 이성미는 현모양처의 평생 꿈을 이룬 것을 넘어 지금은 남 도울 생각에 골몰하며 살고 있다. 인터뷰 시작 때는 귀여운 여인이었는데 끝날 무렵에는 그녀가 작은 거인으로 오버랩된다. 2017-08-03 08:42
  • 커플간의 화술을 서로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는 35가지 방법
    접합, 시간을 휘어서 맞대어 붙이면성긴 마대로 캔버스를 만들고 물감을 뒷면에서 앞으로 밀어내어, 마대 올 사이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 뒤, 앞면에서 최소한의 붓질만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사용하는 물감도 회색이나 검정, 청회색 등 단색으로 단조로우나, 보는 이들에게 고요한 명상에 잠기게 한다. 화가 하종현(河鍾賢, 1935~)은 1960년대 우리나라 앵포르멜(informal, 비정형) 추상화에서 출발해 1974년부터 2009년까지 연작을 그렸고 2010년부터는 연작을 그리며 독창적인 창작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모교 회화과 교수로 40여 년간 재직했으며 2001~2006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있을 때는 미술 행정가로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1969년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하자’는 모토 아래 전위미술가 단체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1974년 해체)를 결성한 이후 지속적으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35년간 꾸준히 작업해온 연작은 ‘전혀 의도되지 않은 우연한 순간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물감을 성긴 마대 뒤에서 밀어냄으로써 하나의 물질이 자연스럽게 다른 물질의 틈 사이로 흘러나갈 때, 그리고 흘러나간 물질들의 언저리를 느긋이 눌러놓았을 때, 가능한 한 물질 자체가 물질 그 자체인 상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캔버스 앞면에 물감을 바르고 칠하는 것이 회화라는 관념을 깨고 대항이라도 하듯,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반란(?)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회화의 틀과 양상의 변화는 세계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게 문화의 보편적 추세다. 그러나 회화에 입문한 뒤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비정형의 추상화를 견지하는 것은 작가의 깊은 철학이 없고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나라 현대 서양화의 선도자인 작가가 ‘비인기의, 그림이 잘 팔리지 않는 화가’라는 세간의 입방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절제된 고요함과 자연스러움을 녹여낸 당당함이야말로 미술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소이라고 생각한다. 4~5년 전부터 세계미술 시장에 모노크롬(mono chrome, 단색화)의 바람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다. 난해하고 현란하던 기존의 구상이나 추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상자, 즉 소비자의 욕구가 반영되고 있다는 증좌일 것이다. 하종현 작가의 연작은 캔버스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을 나이프나 손을 이용해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겼는데 마치 담벼락에 진흙을 바르던 소박함이 연상되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 그림 은 10여 년 전에 인사동 화랑에서 4개월 할부로 구입한 작품이다. 큰 작품은 부담이 되어 이 소품을 수집했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30~40호의 대작을 구입했다면 4~5배의 수익을 가져다줬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에 대한 투자는 어렵다. 그의 작품을 서재에 놓고 수시로 눈 맞추며 명상에 잠기곤 한다. 청회색 물감의 흘러내림도 유연하고, 붓으로 가다듬은 질박한 모양이 상형문자와도 같아서, 단조로움 속 정중동(靜中動)의 리듬이 활력을 주곤 한다. “전혀 무관한 일상의 사물들을 모아본다.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켰다. 낯설다.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인 정서가 교차하면서 현실도 이상도 아닌 낯선 세계에서 현실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화가 한만영(韓萬榮, 1946~)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고백의 일단이다. 1970년대 말에는 정밀묘사 기법의 연작이 대표작이고, 1980년대 초에는 포스터나 인쇄물을 이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1984년부터는 옛 거장들의 작품을 차용해 일상의 오브제(objet, 물체·객체)와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연작을 발표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성신여자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정년퇴임 후 현재까지 어떤 무리에도 참여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을 창조하고 있다. 그가 선택하는 오브제는 불상, 막대자, 도로표지판, 깃털, 핀, 새, 석고상, 병마도용, 토우, 악기 등 무척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오브제에 앵그르(Dominique Ingres, 1780~1867),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973), 정선(鄭歚, 1676~1759) 등 “동서양의 거장 화가들의 낯익은 작품의 이미지를 차용해 시간의 부딪침과 공간의 겹침을 시각화한 것이 한만영의 작품이다”라고 평론가는 말한다. 는 2009년 봄 인사동 ‘노화랑’에서 전시회 오픈 날에 200만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화랑의 문턱을 낮추되 역량 있는 작가들의 밀도 높은 작품을 소개한 야심찬 기획전시는 1999년과 2000년에열렸다가 몇 해 쉬고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왔으나, 작품가의 상승 등 여러 요인으로 올해로 그친다는 서운한 소식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돈을 마련해 작품을 고르고, 아내와 밤늦도록 감상하던 작품이 어언 10여 점에 이르니, 5월의 향기로운 추억이 되었다. 그해 한만영 작가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핵심 오브제로 삼은 작품 10점을 내놓았는데, 나는 주저 없이 이 첼로 오브제의 작품을 선택했다. 첼로를 완벽한 비례로 축소한 오브제에는 중세 서양화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이 작품 속 첼로를 꺼내어 연주하면 그림의 주인공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림을 거실에 놓고,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714~1788)의 무반주 첼로 조곡 중에서도 내가 제일 즐기는 제5번 G장조의 선율을 이탈리아 첼리스트 ‘마이나르디(Enrico Mainardi, 1890~1976)’의 느린 연주로 듣는다. 중세 프랑스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느릿한 춤곡이 바흐를 통해 되살아나고, 이미 40년 전에 작고한 마이나르디 연주가 음반을 통해 부활한다. 그리고 이렇듯 흘러간 시간을 휘어서 맞대어 붙이면, 역사의 뒤안길을 순례하는 기꺼운 상상에 잠기게 된다. 이재준(李載俊) - 1960년 경기 화성에 태어났고 아호 송유재(松由齋)로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중이다. 중학교 3학년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 천여 점을 수집해왔다.2017-08-02 10:23
  • 커플간의 화술을 서로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는 35가지 방법
    LA 무명가수 케니 김의 ‘나의 인생, 나의 노래’‘고향 떠나 긴 세월에 내 청춘 어디로 가고 삶에 매달려 걸어온 발자취 그 누가 알아주랴 두 주먹 불끈 쥐고 살아온 날들 소설 같은 내 드라마…’ -케니 김 1집 ‘내 청춘 드라마’ 케니 김(70). 그는 LA의 트로트 가수다. 한국에서 온 연예인도, 주체할 수 없는 끼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한 성격에 낯가림도 심하던 그가 무대 위에서 그것도 뽕짝을 부르는 가수가 됐다. 연매출 200만 달러의 식품회사 경영권도 아내에게 넘기고 말이다. 올해로 데뷔 7년 차. 1집 ‘노신사의 노래’에서 따끈따끈한 신곡 ‘무명가수’까지. 그의 노래 속에는 43년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5개의 직업, 불도저 케니 김 1946년 경북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의 집안은 지독히 가난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20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까지 짧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군대에 지원해 월남에 갔어요. 월남전 막바지라 참 위험했는데 나에게는 막막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구 같았습니다.” 베트남에서 처음 만난 미국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꿈을 꾸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나라,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 없어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때마침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에도 미국 이민 문호가 활짝 열렸다. 머나먼 그곳에 친척 고모 한 분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기술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고압용접 자격증을 땄다. 1973년, 스물다섯의 청년 김종길은 그렇게 고국 대한민국을 떠나왔다. 그리고 미국 땅에서 케니 김이 되어 살아온 지 어느덧 43년이다. “먼 친척 고모뻘 되는 분이 살고 있는 오하이오 주 데이톤으로 무조건 갔죠. 물론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고요. 300달러 손에 쥐고 공항에 내렸는데… 이상하게 겁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오히려 정말 원했던 것을 이뤘다는 희열을 느꼈어요. 걸리는 것은 딱 하나, 한국에 두고 온 약혼자 순이였죠(웃음).” 용접기술을 배워간 덕분에 취업도 쉬웠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작업에만 열중하는 그를 사장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인데도 말이다. 6개월 만에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약혼자에게 보냈고 꿈에 그리던 순이는 미국으로 와서 케니 김과 결혼했다. 지금의 아내, 우순이(68)씨다. 이듬해 두 사람은 뉴올리언스로 이주한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석유 시추의 선봉에 서 있었다. 시추선에서 작업하는 고압용접 기술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석유 시추선에 한 번 오르면 2주일은 그곳에 머물러야 했어요. 물론 동양인은 나 하나였죠. 그래도 일만 하면 되니까 괜찮았는데 문제는 아내였죠. 당시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거든요. 나 없을 때 아기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설마설마하던 일이 진짜 생기더라고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병원에서 아내는 홀로 아기를 낳았다. 첫딸 제인이었다. 어쩔 줄 몰라 울기만 하던 아내와 시추선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남편.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참 고단하던 시절이었다. “둘째 지나가 태어난 이후로는 정말 손이 무르도록 일만 했어요. 아내가 일했던 세탁소와 가발가게가 두 딸의 놀이터였죠. 겨우 돈을 좀 모아 자동차 바디숍을 인수했는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어요. 후에 미시시피 강에서 모래를 파 올리면 돈이 된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그해 여름 허리케인으로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갔고요. 주저앉아 울 틈이 어디 있어요? 새끼들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지요.” 시푸드 레스토랑의 성공으로 기반을 다진 부부는 1994년 지금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주한다. 이곳에서는 농사꾼이 되어 오이, 참외 등을 기르기 시작했다. 농사의 ‘농’ 자도 모르던 케니 김씨는 한국농촌진흥청까지 날아가 오이농사 비법을 배워왔고 결국은 농장 사업도 크게 성공시킨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지인으로부터 멕시코 농장 투자 사기를 당한 것. 김씨는 수십만 달러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돈도 돈이었지만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오랫동안 김씨를 괴롭혔다. “화재로 잿더미에도 앉아보고 홍수로 다 떠내려가기도 했고 사업도 수차례 망해봤지만 한 번도 좌절한 적은 없었어요. 다시 시작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믿었던 사람한테 속은 것은 정말이지… 힘들더라고요. 홀로 멕시코 시골에 틀어박혀서 1년을 지냈는데 그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가수 선언! “나도 가수다” 가발가게, 세탁소, 피자가게, 시푸드 전문점, 패스트푸드점, 야채농장, 광산개발, 부동산, 콩나물 공장… 어느 날은 부부가 작정하고 미국에서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봤다고 한다. 종사했던 비즈니스가 25가지나 되었다. 이들 부부가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는 데에는 케니 김씨의 역할이 크다. 우순이씨는 남편에게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기필코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했다.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양반이에요!” 김씨는 1998년 해조류 가공업체 ‘켈프누들’을 설립, 재기에 성공한다. 다시마를 가공해 만든 국수 ‘씨탱글’이 주력 상품이었다. 그는 에스콘디도 산자락 불모지에 공장을 지었다. 버려진 컨테이너로 공장 건물을 올리고 국수를 뽑아내는 기계는 직접 설계해 만들어냈다. 대부분 고물상에서 구입한 고철들을 용접으로 붙여가며 이루어낸 작업이었다. 이어 영어에 능통한 딸들을 불러들여 시장을 공략했는데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웰빙바람으로 ‘씨탱글’은 무섭게 팔려나갔다. 현재 켈프누들 제품은 홀푸드, 마더스 마켓 같은 미국 최대의 유기농 마켓에 납품되며 유럽 등 10개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연매출 200만 달러에 이르는 알짜배기 기업이다. 전쟁 같던 이민생활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오고 어느덧 두 딸도 짝을 만나 슬하를 떠났다.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려고 보니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젊은 시절 함께 고생하던 친구가 병을 얻어 덧없이 가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헛헛했다. 장례식을 다녀온 날 김씨는 큰 결심을 하고 가슴에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래, 나 하고 싶은 것 한번 해보자 했죠! 중학교 때 학원비 떼어먹으며 배운 기타가 내 음악 인생의 전부이지만 한 번도 가수에 대한 꿈을 저버린 적은 없었어요.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겠지만 진심으로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가장 놀란 사람은 아내 우순이씨였다. 남편의 트로트 사랑이 유별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수라니. 그것도 자기 노래를 만들어 앨범을 내는 진짜 가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고 한 번 결심하면 무슨 일이든 해내는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아내는 기분 좋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자기를 위해서는 평생 1달러도 안 쓰던 사람이에요. 야채 농사를 지어 LA로 배달을 나갈 때 왕복 4시간 운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었구나…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그래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선물을 하자.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죠. 그런데 앨범 하나로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4집까지 나왔네요. 하하하.”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과연 불도저답게 밀어붙였다. 한국에 나가 고시텔에 묵으며 직접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곡을 붙여줄 작곡가를 수소문했다. 작곡가 김준규씨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김준규씨는 1980년대 가수 주현미를 스타로 만들었던 트로트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의 제작자다. 2010년 케니 김 1집 ‘노신사의 노래’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매일 4시간씩 노래 지도를 받았고 모든 노래 가사를 직접 썼다. 케니는 따근따끈한 자신의 앨범을 훈장처럼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렇게 케니 김은 63세에 늦깎이 가수가 되었다. 당신께 바치는 노래 이때부터 아내 우순이씨는 가수 케니 김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이 됐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에 남편의 앨범을 보냈고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곧 방송을 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수 케니 김의 사연과 노래가 미 전역의 이민 1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그들 모두가 척박한 미국 땅에서 눈물과 땀을 쏟아냈던 또 다른 케니 김이고 우순이였다. 방송이 나간 후 팬이 되고 싶다는 전화와 편지들이 쏟아졌고 부부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앨범을 선물했다. 밑지는 장사였지만 케니 김은 행복했다. “애당초 음반을 팔아 돈 벌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저 힘들게 위로가 되었던 노래가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부른 노래가 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데뷔 7년. 어느덧 케니 김은 4집 앨범까지 낸 어엿한 중견가수가 됐다. 크고 작은 한인 행사에 초대가수로 불려가고 종종 한국에서 오는 가수의 공연에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돈벌이는 여전히 안 된다. 초대받은 행사에 가서 출연료는커녕 기부금까지 내고 오기 일쑤다. 몇 해 전부터는 5월 어버이 날이 되면 100여 명의 노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효도잔치를 하고 있다. 그 역시 효도를 받을 나이이지만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을 큰 기쁨이자 보람으로 생각한다. “어느 해 집 주위에 매실이며 살구가 너무 실하게 열렸더라고요. 우리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아 주위의 노인분들에게 오셔서 따가시라 했죠. 너무들 좋아하시더라고요. 미국에 살면서 나들이도 제대로 못하며 살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어요. 잔치 한번 열어드리려 한 것이 연중 행사가 되어버렸어요. 맛있는 것 실컷 먹고 노래 실컷 부르면서 즐기시는 거 보면 덩달아 기분 좋습니다. 친구 생각,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나고요. 뭐 이게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아메리칸 드림이 별거 있더냐 케니 김씨는 자신만을 위해 시작한 노래를 이제 다른 이를 위해 부르고 있다. ‘수많은 날들 비바람에도 쉬지 않고 걸어온 우리, 여보 정말 고생 많았소~’ 덤덤한 노랫말이 인상적인 ‘무지개’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노래이고, 귀에 착 감기는 미디움 템포의 ‘아메리칸 드림’은 먼 이국땅에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모든 이민자들에게 바치는 노래다. 성공을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해본 이민자 케니 김은 아메리칸 드림은 별게 아니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아메리칸 드림이요? 이루었죠!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에요. 돈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죠. 많은데도 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없어도 많은 것처럼 살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나에게 꿈과 희망이 있냐는 것입니다. 한국을 떠나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실패해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또다시 꿈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집념은 삶의 원동력이다. 열심히 바쁘게 살면 늙을 시간도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불도저 케니 김이 요즘 푹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뮤직비디오 제작이다. 아마추어 친구들이 힘을 모아 ‘아메리칸 드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훨씬 쉽게 노래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래를 부르고 듣기에도 참 좋아진 세상이에요. 저는 좋아하는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겨우 구해서 늘어질까봐 아끼고 아껴서 듣던 시절에 살았어요. 캘리포니아에 이사 오면 한국어로 라디오가 나오고 트로트를 실컷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당시엔 샌디에이고까지는 잘 안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아무튼 노래듣기에도 가수하기에도 참 편하고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지난 4월, 따끈따끈한 새 음반이 두 장이나 나왔다. 하나는 ‘쌍쌍파티’의 리메이크 앨범 ‘케니 김 주연하의 쌍쌍파티’, 또 하나는 케니 김의 4집 앨범이다. ‘쌍쌍파티’는 현재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절찬 판매중이다. 지난달 음반 판매 수익금 88만원도 받았다. 데뷔 7년 만에 처음으로 번 돈이다. 4집 앨범의 타이틀 곡은 ‘무명가수’, 흥겨운 댄스곡이다. 물론 이번에도 직접 가사를 썼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 불러요 스트레스 날리고 장단에 맞춰 박수치며 노래 불러요 행복의 바이러스 드리겠어요 나는나는 무명가수야 우리들에게 행복의 바이러스를 주겠다는 LA의 무명가수 케니 김.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꿈이 자리 잡고 있다. 장인의 노래가 18번이라는 든든한 첫째 사위와 CCM가수인 둘째 딸 지나와 함께 가족 콘서트를 여는 것이다. 딸과 함께 부르는 트로트 메들리도 멋지지 않겠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에서 이제는 의상 코디며 메이크업까지 담당하고 있는 아내는 가만히 미소짓는다. 아내의 미소는 늘 케니 김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곤 했다. 머지않아, 그의 새로운 도전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2017-07-31 11:03
  • 커플간의 화술을 서로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는 35가지 방법
    우리는 그 시간 ‘덩케르크’에 있었다문학작품을 고를 때 작가가 누군지 반드시 확인하면서 영화를 볼 때는 대부분 제목만 보고 선택해왔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영화를 봐왔으면서도 필자에게 영화는 감독의 메시지나 예술적 성취보다는 그저 한 시간 반 정도 즐기는 가벼운 문화적 소비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적어도 무더위가 절정에 오른 지난 주말까지는. 더위에 지친 날 영화를 보자는 제의는 반가웠다. 적어도 영화관은 시원한 곳이니. 게다가 모처럼 남편의 제의라 제목도 묻지 않고 따라나섰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 전쟁영화란다. 남편은 감독의 전작들을 언급하면서 그의 예술적 성취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으나 생소한 이야기였고 더욱이 전쟁영화는 필자가 선호하는 장르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이 더위를 피할 수만 있다면. 상영시간이 임박해서인지 좌석이 첫 줄밖에 없었다. 아이맥스에서 보고 싶어 했던 남편은 오히려 앞줄이라 좋단다. 우리는 그렇게 그날의 현장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포위되어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된 연합군 40만 명을 도버해협 건너 영국으로 철수시키는, 실제 있었던 기적 같은 작전을 영화로 재현한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스토리다운 스토리가 없었다. 영웅 같은 주인공도 없었다. 곳곳에서 살아남으려는 아우성만 가득했다. 그렇다고 처절한 살육 장면도 없었다. 독일군에 포위되어 있다는 설정만 있을 뿐 독일군도 보이지 않았고 본격적인 접전도 없었다. 보통 전쟁영화에서 흔히 보여주는 익숙한 장면들이 보이지 않았다. 배경만 전쟁영화일 뿐 실제로는 재난영화라고 분류해야 할 지경이었다. 감독은 이 영화를 배에 오르는 잔교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1일, 하늘에서의 1시간 등 세 가지 시퀀스로 나누어 각기 다른 서술자의 시각으로 교차해가면서 보여준다. 영화 전반부는 서로 소통되지 않는 각각의 상황에서 처절한 사투만이 이어진다. 잔교에서 하염없이 배를 기다리다 적기의 사격으로 속절없이 죽어가는 병사들. 징발된 작은 배를 몰고 전장으로 가는 이름 없는 어선들. 연료가 떨어져가는데 적기로부터 아군을 지켜야 하는 조종사. 거대한 전장을 교직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 이런 아수라장 속에 감독은 세 개의 작은 이야기를 배치한다. 수많은 병사 중 카메라는 토미(핀 화이트헤드)와 남의 이름을 도용한 깁슨(아뉴린 바나드)의 동선을 따라간다. 그들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행동하지만, 서로 돕는 인간애를 지니고 있다. 징발된 요트를 몰고 나가는 도슨 부자는 따라나선 소년 조지가 바다에서 구해준 병사의 우발적 폭력으로 죽게 되지만 임무를 완수한다. 이 모든 흐름이 하나로 합일되는 시점은 조종사 콜린스가 적기에 격추되어 바다에 추락하고 도슨 부자가 그를 구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또 이들은 서로 돕고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감독의 시선은 선악을 판정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살아남으려는 평범한 인간들일 뿐이다. 이 영화는 전쟁을 정의하려 하지도 않고 선악으로 재단하지도 않는다. 아마 감독의 보여주려고 한 메시지는 살아 돌아온 병사들을 환영하면서 한 시각장애인이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충분해”라고 한 말일 것이다. 우리를 한 시간 반 넘게 이 품격 있는 전쟁터에 몰입시킨 것은 단연코 음악이다. 시계 초침소리 등 다양한 소리들을 변주하며 줄곧 내장을 울렸던 음악이 시간과 더위를 잊게 해준 공신이었다. 이 영화는 단언컨대 감독의 영화다. 마지막 파리어(톰 하디)의 비행기가 연료가 떨어져 무동력으로 하늘을 비행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이 순간 일주일, 하루, 한 시간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의 부조화가 하나로 합일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천재다.2017-07-27 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