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3.1운동 민족대표 기념사진 1950년

1919년 당시 조선에는 조선주둔 일본 정규군 2만 3천여명, 일본 헌병경찰 1만3천3백80명, 조선 총독부 관리 2만1천3백12명, 34만명의 일본인 이주민중 무장일본이주민 2만3천3백84명등

약 8만1천76명의 무장 일본인이 있었다,

일제는 또한 본토내에 언제든지 한국에 증파할수 있는 막강한 군사가 있었고, 실제로 3.1혁명당시 국내에 증파 시켰다.

일제는 전국에 일본군 주둔소와 헌병- 경찰관 주재소를 통해 총검으로 무단통치 하고 조선총독부 행정조직으로 옭아 매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손병희, 모금운동,수련회 통해 10년간 거사 준비

(1919년 한겨레 1월30일 경성/엄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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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러 강국으로 하여금 조선일반인의

의사표시를 인정케 하기 위하여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이 손병희를 만나 상의한 데 이어, 송진우·현상윤·최린·최남선 등이 독립선언 진행방법 등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천도교·기독교·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내기로 결정한 후 서명할 인사들을 찾아나섰다. 최린,송진우,현상윤,최남선은 구한말의 대신들(윤용구,박영효,윤치호,한규설,김윤식등)을 만나 상의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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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한겨레 2월10일 경성/오승훈 기자

성과를 얻지 못해 민족대표에서 정치인들을 제외키로 했다.

한편 기독교 측은 이승훈, 천도교 측은 손병희,권동진,오세창이 각각 교섭에 나서 많은 동지를 얻었으며, 최린을 통해 이를 안 불교 측에서도 한용운·백용성 등이 가담하였다.

그당시 천주교가 민족대표에 빠진이유

유림들은 소극적이었고, 촉박한 시간과 일제의 감시 때문에 제대로 성사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기독교 측 16명, 천도교 측 15명, 불교 측 2명으로 모두 33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로 결정하고 총대표에 손병희를 추대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이 결정되었다.

1919년 3·1운동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 제작, 서명, 인쇄, 배포

독립선언서 작성은 천도교 측의 원고 지침에 따라 최남선(崔南善)이 기초를 작성하고 한용운이 공약삼장을 추가(1969년 민족대표 33인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갑성이 증언)

민족대표 33인이 서명,

천도교 직영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이 인쇄실무를 담당했다. 독립선언서 총35,000장이 인쇄되었고 각계 인사들이 사전에 배포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미국에 보내고 제암리학살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언론인 엘버트 테일러의 저택 딜쿠샤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하였으나 일제의 무력진입을 염려하여 인사동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시각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과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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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용 열사 :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1911년에 당시 6년제였던 경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민족 대표, 종교계 대표, 학생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것을 알고 약 5천 명의 학생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날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 장소를 인사동 태화관으로 옮기고 나타나지 않아 군중들이 혼란에 빠지자,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에 격앙된 수천 명의 학생과 군중들은 만세를 외치며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일로 같은 해 8월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였다. 출옥한 뒤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에 참가하여 서광신, 이기춘등과 함께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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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서울역, 정동, 이화학당, 서대문 등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는데, 이것이 전국으로 확대된 3.1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만세운동은 해외로도 확대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내가 격은 기미년 3월1일/ 박래원

http://samil100.org/webzine/?p=1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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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K/단독] 조선총독부가 만든 3.1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140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계보 형태로 그려져 있는 계보도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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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릿집 태화관을 민족대표들의 회합 장소로 선택한 데도 까닭이 있었다. 장안의 명물인 조선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은 원래 조선왕조의 순화궁(順和宮) 터였고, 이후 이완용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집이었다. 1905년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늑약 밀의, 1907년 7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 1910년 강제 병탄 조약 준비 등 대한제국을 능멸하고 없애는 행위가 모두 이 집에서 벌어졌다. 바로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매국적인 모든 조약을 무효화한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신석호, ‘(개설) 3·1운동의 전개·3·1운동 70주년 기념논집’)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3.1 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 총감부에 자수,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은게 확인되어 무죄가 되었으나 미결수로 2년구류

유여대

3.1일 태화관 참석대신 의주에서 김병조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시위를 주도하다 유여대는 일경에 체포되고 김병조는 상해로 피신함 형량 : 2년

김병조

3.1일 유여대와 의주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상해로 피신함(체포되지 않음) 불참한 대신 함태영 참석

정춘수

원산에서 만세 운동을 조직한 뒤 당일 기차편으로 상경했으나, 태화관모임이 끝나고 관련자들이 체포된 뒤였기에 자수하여 징역 1년 6개월형을 복역

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참석자 모두는 독립만세를 3창 하였다

간략하지만 장엄한 행사가 시작됐다. 일제의

잔인한 무단통치 10년 만에 숨죽여 지내오던

한민족이 세계만방에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엄숙한 시간이었다.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남측의

정자(태화정) 동쪽 처마에 걸린 태극기를 향해

근엄한 자세로 경례했다. 역사적인 장소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내건

깃발이었다.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이종일이 자신이 인쇄,

배포한 독립선언서의 일부 오자를 수정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민족대표 33인 열전 이종일편)

뒤이어 한용운이 신명을 바쳐 최후의 1인까지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하자는 취지로 인사말을

한 후, 민족대표들은

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김병조는 상해로 건너가 불참한 대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고 2선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기로 한 함태영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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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영(咸台永, 1873년 10월 22일[1] ~ 1964년 10월 24일)은 대한제국의 법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종교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3·1 운동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명으로 3년을 선고받음. 1952년8월 15일부터 1956년 8월 14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자경(子卿), 아호는 송암(松岩).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선포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171~173쪽,서문당,박은식)

일제가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을 범죄로 몰아서 처벌하는 상황에서 가중처벌을 피하기 위하여사건내용이 당시의 취조때와 법정진술 당시

일부 축소가 이루어 졌읍니다

취조당시의 내용이 참고 자료가 될수는 있지만 오직 취조때의 진술과 법정진술만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처벌후에 당사자들의 추가적인 진술이 있다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한용운의 공약삼장 추가사실과 이종일의 독립선언서 낭독등 몇몇가지에 대해서)

거사계획이 여물어가던 어느날 대표 한사람이 말을 꺼냈던것이다。

얼마전 헌병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아보니 동료들간에 서로

말이 맞지않아 애먹은 일이 있읍니다。 앞으로 우리가 구속될 경우를생각해서 미리 각본을 짜두는것이 좋지않을까요?

그러나 최린은 생각이 달랐다。우리가 민족대표로 독립을 선언한이상 비겁하게 숨길것이 없이 몇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사실대로 말해버리자고 했다。 그래서 민족대표들은 대부분

사실을 거침없이 털어놓았고 ~ (민족의 함성, 3·1운동 단면 8장-⑥옥고, 동아일보 1969년 3월 22일 3면)

[중앙일보]최린은 '신문조서'에서 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있을 때 이미 종로 쪽에서 만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태화관 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데, 대략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최린이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 사실을 통보했으며, 총독부에는 이갑성이 김윤진을 보내 통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린은 '신문조서'에서 “선언서를 배부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한용운이 인사말을 하고 일동이 만세를 부르고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오세창은 '신문조서'에서 ‘한용운이 인사말을 하고 만세를 제창했다’고 전한다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나용환, 이갑성, 최린, 김창준 등은 체포돼 갈 때 자동차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수백 장씩 군중에게 던져 주었다. 거리에 있던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을 향해 목멘 소리로 더욱 만세를 크게 외쳤다. 민족대표들은 “우리의 목표는 달성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잡혀가지만 효과는 거둔 것이나 다름없다”고 기뻐해 마지않았다.(‘묵암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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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총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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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시절 독립선언서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실제로 총독부는 예심에서 민족대표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죽일 작정도 했다.

민족의 함성, 3·1운동 단면 8장-⑥옥고, 동아일보 1969년 3월 22일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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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11화> 비폭력~<제18화> 강화도-진위대(鎭衛隊)~<제20화>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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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2의 3.1운동을 우려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을 적용했다. 거사 직후 상해로 망명한 김병조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징역 1년6개월~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양한묵 고문으로 형무소에서 순국) 독립선언서에 이름 석 자 올린 ‘죗값’을 톡톡히 치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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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출옥 장면. (동아일보, 1921.12.23)

3.1 운동은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혁명으로써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이를 계기로 같은 해 4월 11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독립운동을 체계화, 조직화, 활성화할 수 있었다

풍족한 삶 버리고 조국을 택한 이회영(李會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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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총칼에 무참히 짓밟힌 3.1운동의 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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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천도교 측 수장 이며 33인중 총대표,

딸 다섯 중 셋째 딸 손용화는 소파 방정환의 아내.

형량 :징역 3년선고 1년 8개월만에 병보석 출감후 1922년 병사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거사 하루전인 2월 28일 종단을 이끌 후계자를 정한 유시문(諭示文)을 발표한 데 이어, 이른 새벽 천도교 청년들을 소집해 마지막 훈시를 했다.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種子)를 심으러 간다. 너희들은 3개 원칙(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을 끝까지 지켜라. 오늘의 동지가 내일 배신해 해를 끼칠 자도 있으니 매사를 성실히 참고 견뎌라. 우리 국권 회복에 대해서는 차후 세계 지도의 색채가 바꾸어질 때 각 열국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시킬 날이 올 것이다.…”(이병헌, ‘내가 본 3·1운동의 일단면·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일제강점기에 싹튼, 아주 중요한 역사적 변혁의 중심에는 모두 손병희가 있었다

[민족대표33인 열전] 세계를 놀라게 한 3.1운동의 총연출가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이승훈 

개신교 측 수장이자 교육자. 사재를 털어 오산학교를 설립 운영,

오산학교의 교장이며 교사였던 조만식 선생을 포함한 교사들의 지도아래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함석헌 선생등 뛰어난 인재들을 다수 배출 하였읍니다

1911년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에 연루됨 3.1운동으로 3년 복역. 한때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했으며 그 뒤 고향인 평북 정주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1930년 67세를 일기로 작고 하였읍니다

http://naver.me/GorM2E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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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불교 대표로 독립선언서 기초에 공약삼장을 추가함(1969년 민족대표 33인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갑성이 증언)​

3.1운동으로 징역 3년을 복역하고

항일단체인 만당에 당수로 추대되는 등 각종 민족운동 및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말년에는 가난과 중풍에 시달리며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로 연명하다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작고함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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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 

1882년 일본 망명 후 1905년경(?) 천도교 입문. 3.1운동으로 3년선고, 출옥 후 1927년에는 신간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뒤에 광주 학생 운동에 관련되어 다시 1년간 수감됐다가 풀려났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신한민족당당수가 되어 우파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 증손 권혁방 씨는 33인 유족회 회장 재임.

형량 : 징역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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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덕 

1894년 손병희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 천도교 입문. 3.1운동후 천도교 감사원장, 선도사 등을 역임. 1947년 작고

형량: 징역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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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한국 최초의 목사. 3.1 운동때 서울에 늦게 도착. 총감부에 자수,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은게 확인되어 무죄가 되었으나 미결수로 2년구류, 이후 북간도에서 기독교 부흥사로 활동

무죄받은 이유 (법정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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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조 

유여대, 김병조 두 사람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나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은 의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이 민족대표들만의 행사였다면 이들 두 사람이 주도한 의주 3.1만세시위는 민족대표가 직접 민중들을 지도하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시위를 벌인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유여대는 당일 시위현장에서 체포됐으나 김병조는 상해로 피신하여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상임이사, 사료편찬위원 등을 역임. 독립혈사 간행.

광복 직후에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가했으나 반공 인사였기에 소군정과 마찰을 빚었다. 이후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거부하고 반공주의 청년들을 모아 남한의 이승만, 김구와 연락하는 한편 반소련 무장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1946년 12월 24일 겨울 체포되었다.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가 52년 봄에 그곳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유공자 포상이 안 되다가 1990년 3.1절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청산리 전투 승리에 빛나던 항일 독립군은 왜 갑자기 와해되었을까?

소련군에 속아서 몰살당한 항일 독립군들

"자유시참변"

독립군이 유일하게 승리한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고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김좌진 장군도

고려공산청년회 김신준(金信俊)에 의해

암살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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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규 

경술국치 후 천도교 입문. 3.1 운동후 천도교 도사직을 맡고 포교활동, 일제의 온갖 협박 속에서 민중 계몽운동에 전념했다.

광복후 이승만과 김구 계열이 연합하여 우익 반탁운동 단체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할때, 이때까지 생존해 있던 천도교 출신의 민족대표 33인인 오세창, 권동진 등과 함께 참가했으나 노환으로 1949년 작고함

형량 : 징역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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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개신교 측 대표. 함경북도 만세혁명주도. 해방 후 사회주의 개신교 운동 전개.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경 월북.

한국 전쟁 때 미군과 유엔군의 전쟁 범죄를 해외에서 폭로했고,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까지 지낸 뒤 애국열사릉에 묻힌 월북목사 였기에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형량 : 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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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용환 

23세 때 동학 입문. 3.1운동후 천도교 포교 사업. 1936년 병사.

형량 ; 징역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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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협 

19세 때 동학 입문. 3.1운동후 천도교 교사 활동. 1951년 병사.

형량 : 징역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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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 

개신교 측으로 3.1운동 경기 지방의 시위 주도. 출옥 후 신간회 상임감사를 지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23년 하와이로 망명해 해외 애국지사들 사이의 연락을 맡아 활동하다 1941년 병사했다.

형량 : 징역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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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불교 대표. 법명은 용성진종대사. 16세 때 출가하여 해인사 스님들의 봉기 주도. 불교 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 시내에 최초로 포교당 세움. 대각사 창건 후 60여종의 불경어록과 저술을 남겼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틈틈이 상해 임시정부를 물심양면 지원했으며, 

윤봉길을 불자에 귀의시킨 뒤 그를 임시정부로 보내 김구 밑에서 일하게 하기도 했다.

윤봉길 의거 후에는 직접 중국으로 가 장제스와 마오쩌둥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는 등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나 밀정에게 걸려 실패했으며, 실의 속에 1940년 작고함.

형량: 징역 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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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승 

전라북도 임실 출생 29세 때 천도교 입문. 3.1운동때 임실군, 남원시, 장성군 등 호남 지방 민중 봉기 주도,.

체포된 박준승 선생은 출감 이후에도 천도교의 교역자로 활동하며 재차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였다가 안타깝게도 1927년 3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작고하게 됩니다.

형량 ;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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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개신교 대표. 3.1 운동후 1938년 신사 참배 거부. 19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9년 감리회 북한 지역 총책임자로 개신교 민주당 결성. 같은 해 진남포 4.19 사건으로 북한 당국에 검거되어 1950년에 처형.

형량 : 징역 2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신홍식 

개신교 대표.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 있다 3.1운동 참가. 신사 참배 거부. 1937년 작고함

형량 : 징역 2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양전백 

평양 신학교 졸업. 목사로 있다 3.1운동 참여. 목회 사업에 전념.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에 연루 구속1년 6개월 만인 1913년 3월 무죄로 풀려남

3.1운동으로 형량; 징역 2년

1911 뮈텔 주교 밀고로 안명근 사건과 105인 사건 발생

3.1운동 100주년 특별기획 - 민족대표 33인, 양전백·길선주 목사(CTS뉴스)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양한묵 

1862년 전라남도 해남 출생

1898년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문. 1905년 헌정동지회를 만들고 구국운동.

1909년 12월 22일 매국노 이완용이 백주에 피습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이완용은 서울 종현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 추도식에 참석한 후 인력거를 타고 가던 도중 이재명(李在明) 의사의 습격을 받고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이재명은 현장에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순국하였다.

그런데 양한묵이 이 사건에 연루돼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3.1 운동으로 구속되어 재판중1919년 5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순국.

저서로는 천도교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해설한 교리서 《동경연의(東經演義)》(1907)가 있다.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오세창 

개화론자 오경석의 아들이자 천도교 신자. 한성순보 기자.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사장. 해방후 매일신보, 서울신문 사장.

예술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서예가이기도 했다.

출소후 서예, 전각, 금석학의 역사가로 활동 그와관련 여러저서를 냄

1945년 광복이후에도 독립촉성중앙회, 민주의원등에 참여하였다. 서예가로도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를 창안하여 위창체, 오세창체라 부른다. 본관은 해주, 자는 중명(仲銘), 아호는 위창(葦滄), 천도교도호는 한암(閒菴)이다.

1953년 작고함

형량 : 징역 3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오화영 

감리회 목사. 6.25 전쟁 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1962년 병사. 북한의 평양 애국 열사릉에 안치. 1989년 3.1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996년 11월 위패만 국립묘지에 안치.

형량: 징역 2년 6월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유여대 

장로교 목사로 3월 1일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됨

유여대, 김병조 두 사람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나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은 의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이 민족대표들만의 행사였다면 이들 두 사람이 주도한 의주 3.1만세시위는 민족대표가 직접 민중들을 지도하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시위를 벌인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유여대는 당일 시위현장에서 체포됐으나 김병조는 상해로 피신하여 망명하였다.

3월1일 서울과 동시에 일어난 의주만세운동은 대표적인 독립운동 사례로 꼽힌다. 2년 복역 후 교육과 선교사업을 하다 1937년 작고했다

형량 : 징역 2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이갑성

1889년 대구 출생. 개신교 신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약학을 전공하고세브란스 의학교 약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으로 근무하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음.

서대문 형무소 감방 안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던 이갑성은 한번 들어가면 1주일간 햇빛을 볼 수 없고 이부자리도 주지 않는 ‘벌감(罰監)’ 처분을 자주 당했다.  

외국인 선교사 스코필드에게 독립선언 후 만세운동이 일어날텐데 그 현장을 사진을 찍어 대외에 조선의 독립의지를 알러주기를 청했다. 그래서 스코필드의 사진이 기록으로 남아 오늘날 삼일운동의 증거로 남아있다.

1924년 세브란스병원 의약 지배인을 거쳐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 광복 후 의회 의원, 광복회장 등을 역임함.

3.1 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 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주도 등으로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지만, 1980년대에 변절했다는 주장뿐 아니라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2005년 삼일절 특집 SBS 뉴스추적에서 심층 취재한 결과 오히려 요시찰인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매일신문에서 2010년에 이 떡밥에 낚여 친일파 언급했다가 정정 기사를 냈다.#매일신문은 역사 속의 인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친일파로 매도된 억울한 '희생자'였다고 평했다.

해방 후 자유당 창당에 깊이 관여했고, 수많은 사회단체에서 중책을 맡았던 그는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1981년 작고함

형량: 징역 2년 6월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이명룡 

이명룡 장로는 1910년 2월 장로회 덕흥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었고, 기독교사상으로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사업을 벌이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됨.  이승훈의 권유를 받고 3·1 운동에 장로교 대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함

광복 후에는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김양선 목사가 정주에 세운 평동중학교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 이경선이 반공주의 운동을 벌이던 중 소련군정에 체포되어 실종되는 등 이북에서 종교인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1947년 월남하였다.

 1956년 병사.

형량 : 징역 2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이종일 

천도교 대표.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독립선언서 35,000장 인쇄. 3·1 운동으로 3년 선고받음

1922년 3월 1일 또다시 보성사팀과 같이 천도교 교인 등의 단독으로 제2의 3·1운동을 계획, 실천하던 중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가난속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1925년 아사하였다.

저서에 한국독립비사,묵암비망록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이종훈 

천도교 대표.  3·1운동으로 2년 복역하고 만주 간도 용정 등지에서 고려혁명위원회 활동을 했다. 1935년 병사했다

형량 : 징역 2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이필주

1869년 서울 출생. 22세 때 구(舊)한국군 군인으로 근무하다가 1903년 군복을 벗고 선교와 교육 사업에 종사함. 신학교를 졸업하고 정동교회 등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름. 출옥 후 수원 남양교회에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거하다가 1942년 병사. 

형량 : 징역 2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임예환 

동학혁명에 동참, 3.1운동으로 2년 복역 후 고향 평안남도에서 민족운동을 계속했다. 49년 병사함.

형량 : 징역 2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최성모 

감리회 목사. 이필주를 만나 3.1운동에 가담. 황해도 시위 주도. 출옥 후  만주로 파견되어 펑톈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형량 : 징역 2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홍기조 

22세 때 천도교 입문, 손병희와 평안도 천도교 독립운동 주도. 3.1 운동후 평안도 용강에서 독립운동. 1938년 병사.

형량 : 징역 2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홍병기 

천도교 대표. 3.1운동으로 2년 복역하고 나온 길로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한 뒤, 만주에 망명해 고려혁명당을 조직한 지사들을 만나러 가다 신의주에서 체포돼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형량 : 징역 2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박희도 

33인 중 최연소. 3.1 운동후 잡지 『생활사』 창간. 이후 여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당시 신문 가십란의 단골 스타가 되었으며 결국 친일 성향의 월간 잡지 『동(양지)광』의 창립인,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로 완전히 변절했다.

전쟁이 계속되자 전국 각지에서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으며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 평의원(1939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1940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1941년)으로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임원을 맡았고, 전시 체제 확보를 위한 친일 언론인 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했다

1948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다가 풀려났고 51년 병사

법정에 남긴말

어대까지든지 일본정부의 인도(人道)에 반한 시정에 반대사상을 안은 때문에 최후의 순간까지라도 반기를 휘날리고 싸울 결심이다 나는 조선민족의 하나로서 민족자결의 구체적 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정당한 길이라고 밋는다

형량 : 징역 2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최린

천도교. 선언문 초안 작성. 1934년 중추원 참의, 37년 총독부 조선어판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 39년 임전 보국단장을 역임하는 등 친일에 앞장섰다. 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다른 이들과 달리 그나마 눈물로 참회하는 진술을 하였다. 이때 옆에서 계속 변명해대는 이광수에게 닥치라고 했다. 6.25 때 납북되었다.

최린이 일본법정에 남긴말

나는 일본에 유학한 일이 있는데 나는 그때 일본에 대하여 호의를 가젓었다 그러나 일본은 명치 43년 8월에 우리 한국의 전토를  한국민의 지배에 이탈식히고 일본의 판도가 되지 안이치 못할 조국의 비운에 빠지게 되였다

이는 명백히 일본에 대한 우리 민족의 반감을 자아내게 한 것이며 장래동양평화에 큰 화근을 남기게 한 것이다

나는 그 후로 일본정부의 조선에 대하여 실시하고 또는 실시하려는 여려가지 정치에 찬성치안코 반대하였으며 한일 양국을 위하여 나의 의견을 개진하여 한국독립의 청원서를 당국에 제출한 일이 있다 최린 씨는 이때 흥분겨운 어조로 당당 진술하였는데 이때 재판장은『범죄사실에 관게가 없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 후 드듸어 심문에 드러갓다.

형량 : 징역 3년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정춘수

3.1 운동 당시 감리회 목사로 함경남도 원산에서 만세 운동을 지도했다. 1934년 흥업 구락부 사건으로 고문당하고 전향서를 발표.

일본군을 위한 특별 기도, 애국 헌금과 무기 제조를 위한 철문과 교회종의 헌납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으며,감리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할 때도 앞장서는 등 조선 개신교회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꼽혔다.1944년에는 그의 결정으로 태평양 전쟁에 감리교단의 이름으로 비행기를 보내게 하기 위해 감리교 내 소속 일부 교회를 팔아 비행기 3대를 구매해 헌납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두 달간 구금되기도 했다 

1949년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로마 가톨릭교회로 전향했으며, 한국 전쟁발발 후 고향에 피난해 있다가 51년사망했다

독립 유공자에서 제외, 청주시의 우암산에 조성된 삼일 공원에도 이 사람을 포함한 충청북도출신의 민족 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1996년에 시민들이 철거해서 지금은 5개다.

형량: 징역 1년 6월

청산리 전투 승리에 빛나던 항일 독립군은 왜 갑자기 와해 되었을까?

http://m.pub.chosun.com/mobile/news/view.asp?cate=C03&mcate=m1001&nNewsNumb=20160821206&nidx=21199

조선이 망한 이유 :  국민의 30%가 노예

​조선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먼저, 인구의 3할이 넘는 노비가 국가가 아닌 1할의 특권층에 봉사하다보니 인구의 절반이 세금을 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은 만성적 재정고갈로 외적의 침입을 뻔히 알면서도 대비를 못하는 극빈국으로 전락했다.

​그런데다 농(農)은 뼈빠지게 일해봤자 양반과 양반의 위세를 업은 노비의 배를 불리는 격이라 생산의욕을 잃고, 권력의 눈치를 보았다. 또한 상공(商工)은 열심히 해봤자 자식들까지 천대받는 삶에 희망을 잃고, 세상을 비관했다. 그러다보니 세계적으로 찬란했던 고려의 과학문명은 물론 문학, 예술 등 사회의 모든 분야가 급속도로 후퇴했다.

http://m.pub.chosun.com/mobile/news/view.asp?cate=C03&mcate=M1004&nNewsNumb=20180428748&nidx=28749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이황이 노비들을 양인(百姓)들과 적극적으로 맺어주려고 했던 까닭은 당시 노비와 양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천즉천’(一賤卽賤〮부모 중 한 명만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라고 합니다. 노비끼리 결혼시키는 것보다 이처럼 양천교혼(良賤交婚)을 시키면 노비를 손쉽게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은 노비들이 양인과 결혼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부귀를 경계하라"던 퇴계 이황은 어떻게 재산을 늘렸나

구한말 1890년 3월14일 프랑스인이 본

조선의 노비제도

조선의 흑역사 (약소국의 설움)

문제는 무수한 여성이 공녀로

희생됐다는 점이다.

서울 서대문구 영은문(현재 독립문)이

조공 잔혹사를 상징한다.

은혜로운 중국 사신을 영접한다는

뜻으로 세운 곳이다.

공녀 사신은 압록강 인근 의주에서부터

초호화 대접을 받는다.

정승급 관리가 안내하고, 주요 이동로마다

환영행사가 펼쳐진다.

영은문에 도착하면 왕이 직접 영접한다.

왕궁으로 가는 길 주변은 비단이나 색종이로

장식하고 광대들이 춤을 춘다.

왕은 궁에서 사신과 맞절하고 명나라

황제 칙서를 수령한다.

상당수 사신이 조선 출신 내시인데도

왕은 깎듯이 예의를 갖춘다.

칙서를 가지고 온 사신이라고 해서 칙사로

불렀다. 칙사대접의 유래다.

1~2개월 걸리는 공녀 차출 기간에 전국

혼인 금지령이 내려진다.

딸을 둔 백성은 공포에 떤다. 13~25세

미혼녀가 선발 대상이다.

당사자들은 얼굴에 생채기를 내거나 뜸으로

헐게 하는가 하면 승려가 되기도 한다.

공녀를 피하려는 고육지책이다.

신체 훼손이 적발되면 중형을 받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다.

칙사에게 꾀병을 부리다 퇴짜맞은 여인의

부친이 관직 박탈이나

귀양 처벌을 받기도 했다.

예비 심사를 통과하면 명나라 복장과

화장 테스트를 거쳐 최종 선발된다.

영빈관에서는 왕과 왕비가 나와

환송식을 연다.

이때 친인척과 구경꾼은 울음바다를 이룬다.

황제 공녀와 별도로 칙사 개인에게

끌려가는 여성도 많았다.

이들은 명나라 고관대작의 성 노리개로

상납된다.

공녀는 태종과 세종 집권기에만 공식적으로

114명이 끌려갔다.

역할은 궁녀와 무수리, 요리사, 무희 등이다.

명나라 영락제가 데려간 권 씨 등

궁녀 8명은 참극을 겪는다.

권씨는 탁월한 미모에 중국어 실력을

겸비해 총애를 받았다.

권씨는 궁궐 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했으나

3년 만에 돌연사한다.

이는 피바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동료 공녀인 여미인이 질투해 독살했다는

첩보 때문이었다.

영락제는 여미인을 불 고문으로 죽인다.

공녀 임씨와 정씨는 자살하고 황씨와

이씨는 처형됐다.

한씨는 당시에는 화를 면했으나

영락제 사망 때 순장됐다.

병에 걸린 최씨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공녀 8명 중 최씨만 살고 7명이

어린 나이에 모두 죽은 것이다.

독살설은 나중에 가짜로 밝혀진다.

명나라 궁녀가 여미인에게 동성애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데 앙심을 품고

무고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영락제는 무고 등에 가담한 모든 사람을

찾아내 처형하도록 했다.

이때 환관과 비빈 등을 합쳐 3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조공 사신의 횡포도 골칫거리였다.

요구 조건이 워낙 까다로워 뇌물로

달래야 했다.

1429년 칙사 귀국 때 뇌물 분량이

200 궤짝에 달했다고 한다.

궤짝 당 인부 8명이 따라붙었고

운반 행렬이 수 km에 달했다.

뇌물을 조달하느라 나라 곳간이 크게 훼손됐다.

사신단 수행원이 조선인을 때려죽이는

일도 있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70328111700797

조선에 많은 영향을 준 중국의 제도

(고대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경험 해야해야 할 것 6가지)

고대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경험 해야해야 할 것 6가지

[김정민 뱍사]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이유

(당시의 국제 정세와 조선의 대응)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왜 음식점인 태화관 모여서 독립선언

노예제 연구가인 경제학자 스탠리 엥거만(Stanley Engerman)

은 얼마 전 방한 당시 가졌던 한 강연에서 조선시대의 노예제도를 언급하며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특징을 지녔다”고 말한 바 있다.

이유인 즉슨 조선시대 노예가 모두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조선을 제외한 동시대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예는 주로 전쟁 포로 등 피정복지의 이방 민족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이웃 나라를 침공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노예로 쓸 수 있는 전쟁 포로나 이방 민족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학자 성현(1439~1504)은 “조선 사람 중 절반이 노비”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리 인권과 민족 감정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라고 해도 타민족들이나 천한 신분으로 삼았지, 어느 정도 동질감이 있는 같은 민족을 천한 신분으로 만드는 것은 세계적으로 꺼리는 편이었다.

노비 이외에 광대, 공장, 백정, 기생, 무당, 상여꾼, 천민, 하천배 등을 ‘상농’이라고 불렀는데, 다 합치면 그 숫자가 전 인구의 70%(실제 노비는 40%)였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노비 인구가 전체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10%를 넘지 않았는데 고려 말에는 몽골 원나라의 지배 하에서 30%까지 늘어났다. 세종 때는 전 인구의 65%가 노예였다고 한다.

이처럼 하층민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노비의 가격은 조선시대 내내 조랑말 한 마리의 절반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노비는 대를 이어 세습이 된다.

1801년 순조는 노비안을 모두 불태워버리라고 명했으나, 공노비에 한정된 것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신분제가 철폐됐지만 땅 한마지기 없는 농민은 노비나 다름없었다. 해방 이후에도 노비 계급은 사라지지 않았다.

1950년대 전라도 특히 전남 등에서는 적어도 5~10명의 노비를 거느린 양반 가문이 존재했다지만 대부분은 일제 식민지 때 노예해방이 되었고 국민 절반이던 그들이 환호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인뿐 아니라 조선시대는 국가적 차원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나라였다.

조선은 해마다 명나라와 청에 공물로 여자와 거세한 남자를 노예로 바치고 온갖 공물도 바쳤다.

조선에 있지도 않은 말 만마리를 바치라하고 잡지도 못하는 매를 공물로 바치라 했다.

심지어 왕족, 양반 여성도 명에 노예로 끌려갔다.

명에 끌려가는 날은 온 집안이 통곡 소리로 가득했다고 한다.

양반은 아버지나 남자형제가 명에 가서 자기 딸 찾아서 돈 주고 노예 된 딸을 사왔는데 이게 환향녀(화냥년)다.

신분이 높을수록 몸값이 비쌌고 낮은 신분의 여성은 평생 조선에 못 돌아왔다.

조선은 5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일제에 38년을 지배 받았다. 양국에서 독립한 것은 대한제국 13년과 대한민국 70년이다. 대한제국 13년도 러시아에 아관파천이나 하고 다녔다.

미국의 보호 아래 최초로 중국과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 대한민국 70여년 역사가 전부다.

개인과 국가가 수백년을 이어 내려오면서 노예생활을 했던 민족은 전 세계에 흔치 않다.

이런 노예근성이 한국 국민의 심성에 영향을 주어 유전적으로 후손에게 계승되었다고 본다.

노예근성이란 남이 시키는 대로 하거나 주체성 없이 남의 눈치만 보는 성질을 뜻하는데, 말 그대로 자유가 주어졌거나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저 자리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결국 노예 상태에 만족하는 정신 또는 근성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남이 그렇다면 이성적 판단이 어려워 무조건 그게 맞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또는 그것이 전체(사회)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착각하고 저항하지 않는다.

이런 성향이 짙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부와 권력을 이용하는 특권층이 출현하고 그 사회를 조종하고 통제하려든다.

결국 현재 한국의 많은 국민들이 낮은 수준이라도 평등하길 원하며 국가권력에 지배받는데 익숙하고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통제해도 저항할 줄을 모른다.

무상배급(보편복지) 좋아하고 책임감 없고 사기 잘치고 이성적 사고가 부족하여 선동 잘 당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조선인 노예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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