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글쓴이:남지심 저자소개 남지심 차례 1. 고독한 나무 어머니와 아들 고독한 가을은 공포로 다가오고 2. 사랑에 눈 뜨는 사람들 따뜻한 겨울 이야기 3.스승을 향한 우리들의 동경 선생님의 아틀리에, 그리고 따끈한 커피 4.생각하는 나날들 학교로 가는 오솔길 5.캠퍼스의 꿈과 추억 답안지에 핀 웃음꽃 6.타인을 통한 성장의 길목 눈밭 위에 켜진 촛불 7.옹달샘가의 밀어 뜨거운 아이스크림 8.별이 내리는 뜨락 아빠, 편히 가세요 고독한 나무 어머니와 아들 하얀 눈발이 날리는 시장 어귀에 조그만
손수레가 하나 초라하게 머물러 있다. 연탄 위에는 파란 불꽃이 구멍마다 솟아오르고, 그 위에는 넓은 철판이 놓인다. 그는 호떡을 먹으며
아까처럼 눈 오는 거리를 지켜보고 있다. 다 만들어진 호떡을 소년은 조그만 밥통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차곡차곡 담는다. 하얀 김이 밥통 안에 서린다. 그만큼 참새고기가 맛있다는 얘기지. 여자애들은 참새고기를 먹으면 그릇을 깬다지만, 너는 아들이니까 괜찮다. 어서 먹어라." 이러면서 구운 참새를 먹으라고 내밀었다.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호떡을 굽는다. 훈훈한 역기가 포장 안에 차오른다. 소년이 사는 곳의 이웃 언덕 밑에는 조그만 움집이 하나 있다. 정말 땅을 파서 가마니를 깔고 사는 그런 집이다. 요즘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런 움집이었다. 고독한 가을은 공포로 다가오고 9월이 되자 하늘은 한결 파랗게 보였어요. 에머랄드를 펼쳐놓은 듯한 파란 하늘을 쳐다보니, 내 피부가 가슬가슬 죄어드는 것 같았어요. 마치 은회색의 물고기 비늘이 공기 중에서 말라가는 그런 통증 비슷한 것이었지요. 그곳에는 샐비어의 빨간 꽃잎이 예쁘게 피어 있었어요. 선홍빛 꽃잎을 단 수많은 샐비어가 가을 하늘 밑에서 피를 토하듯 어우러져 피어 있었죠. 나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비발디의 사계'를 청해 들었어요. 음악의 선율은 빗방울 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입대하기
전 설악산을 한번 다녀오고 싶다고 했어요. 입대는 남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밟는 한 과정인데도 매우 서운했어요. 입대라는 걸 결정하기까지 욱은 상당히 많은 생각을 했겠지요. 그때 욱은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나는 사람같이 느껴졌어요. 욱도 나도 착잡했죠.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우리의 어깨를 붙들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우린 그 예감을 떨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간편한 복장을 하고 그를 따라
나섰지요. 가끔, 아주 가끔은 밤차를 타고 새벽녘에 내리는 곳에서 아침을 먹고, 잠시 낯선 고장의 여기저기를 쏘다니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깜깜한 밤에 서울로 돌아와 손을 흔들며 헤어지곤 했지요. 그건 신선한 활력소가 되었어요.양평은 도로를 중심으로 길게 뻗은 조그만 도시였으며,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을 갖추고 있었어요. 거의 크기가 비슷한 간판들, 버스 정류장, 학교, 상점들...그 날은 서울에서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양평에 도착하자 곧 어두워졌어요. 우린 강 쪽으로 나갔지요. 8월의 뜨거운 태양은 모래를 달구어 놓았지만, 저녁 강바람은 역시 선선했어요. 우리는 모래 위에 나란히 앉아 두 다리를 뻗었어요. 큰 바위가 암벽처럼 보이는 강 언덕에는 잡풀이 우거져 있고, 그 사이로 약간 꼬부라진 소나무가 그럴듯한 운치를 풍기며 서 있었어요. 우리 둘은 먼 길을 다녀온 나그네처럼 아주 편안하게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일몰을 황홀하게 지켜보고 있었죠.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하늘에는 별이 하나씩 나타났어요. 주위는 갑자기 고요해졌어요. 아니 그보다 이별의 순간이 왔다는 절박감 때문에 서로를 더 강하게 원한 건지도 몰라요. 그 별이 빛나는 밤에 우리는 하나가 되었어요. 우리는 꼬옥 껴안고 울었어요. 그때의 우리 감정은 한마디로 아름다움이었어요. 우리는 조금씩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지만, 이제 뗄 수 없는 튼튼한 밧줄이 우리를 묶어 주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나는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의 등을 보면서 한순간 아찔한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어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이별. 욱은 설악산에서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조난을 당했고, 끝내 시체로 변해 내 앞에 나타났어요. 욱은 영원히 이 세상 사람이 될 수 없었어요. 난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았어요. 욱이 없는 이 세상에 나 혼자 덩그라니 남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어요. 왜 나 혼자서 이 무서운 절망을 감당해야 하나요? 그것을 감당하기엔 나의 두 어깨가 너무 작아요. 내겐 그럴 만큼 큰 힘이
없어요. 그대 이름은 오빠 함박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마당을 덮고, 지붕을 덮고, 논을 덮고, 언덕을 덮고, 산을 덮고...온 천지가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가지 가득 흰 눈을 안고 하얗게 서 있다. 하얀 꽃나무, 눈꽃이 핀 하얀 꽃나무, 전서의 나라에서나 피어 있을 신비한 꽃나무, 산을 가득 메운 온 산은 한 송이의 설화. 흡사 하늘과 땅이 처음 창조된 태초의 순간처럼 순수, 완벽한 순수를 느끼게 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 망막 속에는 현란하도록 아름다운 색깔들이 아지랭이처럼 춤췄다. 진주홍, 노랑, 남색, 보라... 그 화려한 색은 감은 내 눈 속에서 윤무한다. 오빠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내 얼굴 위에 자신의 얼굴을 포갠다. 하늘이 흘러가고, 땅이 흘러가고 그 물결에 실려 우리의 몸도 흘러간다. 그 뜨거운 눈물 속에 우리의 육신이 녹아서 사라질 수 있다면...이 무심한 세월은 전에도 흘렀을까? 우리는 어찌하다 이 세월의 강기슭에서 이렇게 만나야 했을까? 외사촌 오빠, 이것도 인연인가? 인연이라면? 무슨 색깔의 인연일까? 빨간 불꽃으로 타던 담배는 재가 되었다. 만지기도 전에 사그라지는 재, 재는 형체가 없다. 나도 불꽃 속에서 타는 재가 되고 싶었다. 내 육신을 사라 허공 속으로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강릉은 꼭 햇빛 받은 모래밭처럼 맑고 밝다고 했다. 그는 나를 찾아 온 것이다. 나를, 나를. 우린 만나는 순간마다 너무도 강렬한 불꽃을 보아야 했고, 그 불꽃은 아프도록 우리의
가슴 속에서 타들어 갔다. 내 친구들은 오빠의 얼굴을 보면 햄릿 같다고 놀려댔다. 오빠는 정말 그들의 말처럼 굉장한 수재였고, 또 깊은 사색형의 햄릿이기도 했다. 고독한 엄마를 위하여 엄마, 당신은 제 가슴 깊숙이 아픔을 주는 사람입니다. 제 가슴 속의 아픔은 짙은 애정으로, 연민으로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모 대학 조교수로 있었던 남자. 결혼 생활 동안 너무 뜨겁게 사랑하였던 사람.엄마는 아름다우니까,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니까 한번쯤 그토록 행복한 사랑을 할 권리가 있어야 합니다. 엄마와 같은 학교에 계시는 양 선생님한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엄마가 가르쳐준 그 길, 다시 말하면
어둠이 아니라 빛을 향하는 그 길을 앞으로 걸어갈 것입니다. 사랑이여, 그대는 정녕 누구인고?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나는 이 법문을 속으로 외우며 관음사로 이르는 산길을 걸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괴롭고...' 너무도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은 내게 숱한 아픔을 준다. '라후라'라는 말은 '장애'라는 뜻. 태자를 얻음이 자신의 출가를 막는 장애라고 생각하였음은, 이것이 바로 애정이 아닐까? 애정이란 항상 아픈 것임을... 벌레와 산새들마저 한번도 생성의 율동을 맛보지 못한 듯 적막, 오로지 적막이 존재할 따름이다. 그 순간, 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마치 깊은 심연에서 뿜어 나오는 듯한 강렬한 눈빛. 인간의 시선이 이렇게 빛날 수가 있을까? 화석처럼, 정말 화석처럼 정지되어 있는 스님의 가슴 어딘가에 아직도 인간의 고뇌가 숨쉬고 있는 걸까. 방이 어두웠기 때문에 백자는 진짜 보름달처럼 두둥실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해탈은 무엇일까. 해탈은 무정이다. 무정이 어떻게 해탈에 이르게 할까? 완벽한 인간. 완벽한 인생, 모순까지도 완벽하게 포용했을 때 거기에서의 도약이 해탈이 아닐까?' 그 빙그레 웃는 웃음. 나는 이 웃음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내가 스님을 만나면 하려고 했던 그 숱한 말들이 실은 하잘 것 없는
언어의 유희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역시 아무런 대화가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 대화 이상의 선물을 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엄마의 딸이라는 사실과 스님 가슴 어딘가에 아직도 엄마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아무도 그 솔방울의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그것에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을 거라고 하면서 울던 이모가 내 손에다 그걸 꼭 쥐어 주었다. 네가 간직하라고 하면서 ... 나 역시 별다를 의미도 모르면서 오늘날까지 그 솔방울을 간직해 왔다. 간직해 왔다기보다 버리지 않고 그냥 묻어 뒀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다만 두 분은 지순한 애정으로 숙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스님의 가슴 속엔 지금 무엇이 남아 있을까? 이별 뒤에 오는 것 "민아! 네가 좋아하는 가을이라 그런지 나두 좋다.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난 정말 아무거나 다 좋거든." 어떻게 보면 바보 같고, 어떻게 보면 오빠 같고, 또 어떻게 보면 동생 같던 그가 오늘 너무 멀리
가버린 거예요. 언제나 그는 그 구석자리에 앉아 영어사전을 뒤적이며 나를 기다렸어요. 그날 따라 그는 어딘가 들뜬 것처럼 안정감이 없어 보였고, 무척 우울해 보였어요. 거리는 빗물로 번들거렸고, 사람들은 목을 움츠린 채 가을비를 피해서 부산히 걷고 있었어요. 사실 나는 기차를 타고 비가 내리는 가을 들판을 맘껏 달리고 싶었거든요. 내 말이 너무 심한 탓이었는지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어요. 나도 역시 그 말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흘려
버렸죠. 마스코트라고 하면서 사기로 만들어진 백곰 한 마리를 내게 주었어요. 나는 어리둥절했죠. 나도 금세 눈물이 흐르려고 하는 것을, 눈을 크게 떠서 삼켜 버렸어요. 돌아서는 순간,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확 쏟아졌어요. 나는 그에게로 달려가,"꼭 편지해 줘. 답장 꼭 할께."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만 쳐다봤을 뿐, 그에게로 달려가지 못했어요. 나는 밤새 그를 생각했고, 그 동안 단 한번도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지 못한 내가 미웠어요. 나는 그를 '바보'라고 놀려댔지만, 난 그의 진실을 알고
있었어요. 우리의 이별이 이렇게 오리라곤 생각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늘 그는 먼 나라로 날아갔고, 나는 혼자 남아 버린 거예요. 비가 내리는 이 거리 위에. 우리는 밤새 석양을 받은 갈대가 은발처럼 산등성이에서 물결치고, 들국화도 무더기 무더기 어우러져 피어 있다. 솔바람은 조금은 무시무시하고, 조금은 신비롭고, 또 조금은 감미롭기도 해. 그런 어느날 밤 뜸북새가 우는 거야. 뭐라고 할까? 애기 울음소리 같다고 할까? 어쨌든 매우 묘한 전율이 느껴졌어. 그때 들은 뜸북새의 울음소리는 매우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살아 있었어. 그리고 강렬한 분노를 느꼈어. 밀짚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새 옆에 쭈그리고 앉은 사나이를 노려봤지. 조용한 산기슭이나 논두렁 같은데서 날아다녀야 할 그 새를 인파가 득시글거리는 서울 한복판에다 잡아 가둬 놓고 앉아 있다니? 뭐, 사람 몸에 좋다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더군. 그 새는 가련하게도 잔뜩 겁에 질려 눈을 껌벅이고 있었어.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사나이의 턱을 갈긴 거야. 나는 그 새의 눈을 보는 순간 가엾은 어린애가 길 한편에 내팽개쳐진 것 같은 착각을 했거든. 그것도 사람들이 짓밟는 발길 밑에 말이야. 그 사나이와 나는 씨근거리며 한바탕 싸웠지. 지나가던 사람들은 구경을 하느라 몰려들었고, 그런데 그 사나이와 붙어서 치고 받고 하다 보니 갑자기 슬퍼지더군. 맥이 탁 풀리며 내 감정은 이상하게도 아주 맑고
순수해졌어. 나는 값을 치루고 뜸북새 두 마리를 들고 돌아섰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사나이는 따라오지 않더군. 나는 줄곧 울음을 삼키는 아이같이 나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서 안성까지 갔어. 그리고는 한참 들길을 걸었어. 산기슭 아래로 옹기종기 엉덩이를 맞대고 있는 아늑한 마을에 이르렀어. 마을 앞으로 너른 들녘이 펼쳐진 그곳에서 나는 두 마리의 뜸북새를 놓아 주었지. 뜸북새를 마구 잡는 비정한 인간들을 생각하면 더 깊은 산 속으로 피신시키고도 싶었어. 하지만 이놈들이 너무 외로워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 마을쯤에서 놓아주기로 한 거야. 창호는 그런 아이였다. 하찮은 일이 운명을 바꾼다 지난 여름방학, 고향을 다녀오는 기차 안에서 한 여학생과 '섬씽'이 이루어져 내게도 여자친구가 생기게 되었다. 우리는 가끔 만났고, 가끔 편지도 주고 받으면서 상당히 가깝게 지냈다. 우리는 대학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그때 찬호녀석이 뚱딴지같이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따름이지, 뭐니뭐니 해도 우리에게 가장 흥미 있는 화제는 역시 여자 얘기일 수밖에 없다. 비 온 후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얘기들 아냐? 틀림없는 얘기라구!" 어떻게 할까? 나는 호기심 반 망설임 반으로 주저하다가 절교편지를 써 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녕이라는 말을 나누어야 할 시간이 됐나봐. 인생은 워낙에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너를 바라볼 기력이 없어. 그럼 잘 있어."라고 끝마무리를 했다. 난 그것을 읽어보며 망설였다. 이 편지를 과연 보내야 할까? 친구를 대신 소개해 줄
수도 있다는 부분을 읽을 땐 씁쓰름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반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사흘쯤 지나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렇다고 내 진짜 마음도 모르고 다짜고짜 따지려고만 들다니. 그녀가 나를 정말 좋아한다면 내 말을 안 듣고도 내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도 그녀의 손을 잡으며, 참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와서 곰곰히 생각해 봤다. 그 애의 손을 잡고 '안녕'이라고 말한 것은 순전히 차가운 날씨와 세찬 바람 때문이었다. 엄청난 거인, 대학입시 대학입시. 이것이 사람이라면 엄청난 거인일 게다. 한 인간의 이상이나 감정쯤은 무참히 작살을 내버리는 거인. 그놈 앞에서 나는 마냥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 여학생은 단정한 용모에, 보조개가 선명한 예쁜 소녀였다. 우리는 서로 눈길이 부딪칠 때마다, 얼른 외면하며 무관심한 척 지나쳤다. 다음날은 그
여학생이 다니는 하교에서 우리 학교 운동장을 빌어 체력장 검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마침 그 날 당번이었기 때문에, 교실 청소를 끝내고 주전자와 컵을 들고 수돗가로 나갔다. 주말이나 공휴일엔 대개 햄버거집에서 만났고, 우리는 입시 이야기, 음악 이야기, 그림 이야기 등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른바 가장 아름다운 첫사랑이 우리들 가슴 속에서
꽃 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배치고사는 우리가 넘어야 할 필수 언덕이었고, 우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 언덕을 넘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우리는 약속대로 시험이 끝나는 날 그곳에서 만났다. 그때 경아는 보조개가 팬 예쁜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맞아 주었다. 그 순간, 나는 경아한테서 새색시 같은 황홀감과 어머니 같은 아늑함을 느꼈다. 그 시간은 초조한 것이었다. 배치고사 결과가 발표되고 나면, 그 결과에 따라 원서를 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점수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낮게 나왔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그녀와의 교제를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번 더 만나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글을 띄웠다. 항상 약속시간보다 늦게 나오던 경아가 그날은 삼십 분이나 먼저 나와서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장군, 내 마음을 이해해 줘. 이것만이 널 위하는 가장 바른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어." 고개를 들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우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경아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작별의 악수를 청했다. 그리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나는 학력고사에서 죽을 쑤었던 것이다. 경아도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아는 후기대학을 가겠다는 얘기도 뒤이어 들었다. 나는 재수를
결심했다. 사랑에 눈 뜨는 사람들 따뜻한 겨울 이야기 고등학교 3학년 겨울, 나는 교회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별로 말이 없고 깔끔해 보이는 그 소년은 늘 쓸쓸하고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 있었고, 별로 말이 없는 조용한 소년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조용한 음성으로 간단히 자기의 이야기를 끝내고 좀처럼 긴 대화 속에 말려 들지 않았다. 아무튼 12월 중순의 밤거리는 매우 추웠다. 파란별이 반짝이는 하늘은 싸늘하게 얼어 있었고, 우리들의 뺨도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만두, 찐빵, 라면, 우동 등을 파는 조그만 가게 안은 뻘겋게 단 무쇠 난로로 훈훈했고, 한쪽 구석에 있는 솥과 찜통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우리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마주 앉았다. 우선 춥기 때문인지 몰라도 음울한 비애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 숱한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탄생시킨 저력이었을 거야." 비애를 경험해 보지 않고 안락한 생활 속에 육신을 살아 온 사람들이 인생이니 영혼이니 하고 아무리 지껄여 봐야 그건 수박 겉핥기지. 그런 사람들이 인생을 알기에는 인무 오묘한 거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인류에게 무한한 감동을 주고 사랑을 받았던 예술품들은 모두 그것을 창조해 낸 예술가들이 가장 비참한 생애를 보냈을 때
고인 물처럼 영혼을 썩게 할 뿐이라고. 여기에서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그러고 보면 행복한 인생이란 것이 과연 축복인가 하고 반문하게 돼." 그것 자체가 하나의 숙명으로 오는 거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을 자기 자신의 지혜로 깨닫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온 인류가 다 행복을 버리고 비애 속에 살라는 얘기는 아니야. 그렇게 하지도 않겠지만, 이런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영혼을 완성시키려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지. 수도자들이 일신상의 행복을 버리고 고행의 길을 오르는 것도 그런 경우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도 수십 권의 소설을 읽었고, 또 다른 친구들보다 생각이 깊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그 날 그와 나눈 이야기는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날 밤 이후 나는 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다. 그는 우선 살아 온 환경이 우리와 다른 것 같았고, 또 앞으로의 생애도 우리와 다를 것 같았다. 그런 중에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나는 흡사 쥐 형제들에게 행복의 메시지를 전해 주는 천사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찬양대의 성가가 울려 퍼진 때문인지 온 거리 위에는 하느님의 성은이 가득 내린 것 같았다. 우리는 추워서 조금씩 떨며 처음 갔던 분식센터를 찾아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난로는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모순도 많았고, 그런데 예수님을 생각할 때는 가슴 속에서 무한한 사랑이 차오르는 걸 느껴. 그건 신으로서의 경애가 아니고 인간에 대한 경애야. 많은 고뇌와 갈등 속에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 드리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나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에서 하느님 대신에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지. 예수님은 육친으로서의 내 아버지 같애." 하지만 우리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집 골목까지 왔을 때도 우리의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많이 아쉬워하면서. 그때 우리는 왜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던지. 그 후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내가 고향에 다니러 간 사이 그는 진학관계 때문에 서울로 이사했고, 그가 남기고 간 편지는 교회에서 분실된 채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와 내가 서로의 가슴에서 잊혀지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꼭 만날 것 같다. 이별 없는 만남을 위하여 치켜라 바지, 쫄라라 허리띠, 올리자 자크, 응, 그건 다름 아니라 우리 담임 선생님의 별명이야. 내 보충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겠지? 너무 웃긴다고? 하지만 자꾸 웃지 마. 난 지금 심각한 슬픔에 빠져 있다고. 나는 담임 선생님의 길고도 긴 종례 말씀을 듣고 있는 시간만 되면 심각한 슬픔에 빠지게 돼. 왜냐하면 종례가 끝나면 나는 버스를 타야 하고,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아이 생각을 해야 되니까. 우리는 버스로 해서 만났고, 또 버스 때문에 헤어진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거든. 듣고 싶다고? 알았어. 나도 지금 들려주고 싶은
심정이댜. 모두 잠든 시간에 까만 하늘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길을 걷노라면 내가 대단한 공부벌레 같아서 말이야. 또 서쪽 하늘에 걸린 그믐달도 볼 수가 있거든. 잠꾸러기들은 결코 맛볼 수 없는 기막힌 정경들이었지. 버스 안은 나 같은 학생들이나 새벽장을 보러 가는 상인들이 몇 명 있을 뿐 휑덩그렁 비어 있었어. 내가 탄 버스가 몇 정거장쯤 갔을 때였어. 몇 사람이 내리고, 또 몇 사람이 탔어. 한데 그곳에서 탄 특별히 미남형이라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을 압도하는 그런 타입이었어. 내 옆에는 붕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앉아 있었어. 우리는 문제지를 펴놓고 열심히 공부했지. 얼마쯤 지났을까? 그 남학생이 고개를 돌리더니 나더러 볼펜을 빌려 달래. 시차가 그렇게 의심을 만들어 주었어. 버스는 이런 내 궁금증까지 싣고서 계속 달렸어. 나는 드디어 내려야 할 곳에 이르렀지. 아찔했지. 아침부터 남학생과 걷는 이 장면을 들켰다간 학원은 다 다니는 거지 뭐. 나는 잽싸게 길모퉁이의 작은 분식점으로 쑥 들어갔어. 가능하다면 유학을 갔다 와서 연구소에 근무하고 싶으며, 아이스하키 선수라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어. 그 다음부터야 계속 만났지. 매일같이 학원이 끝나면 거리를 걷기도 하고, 햄버거집에도 가고,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도 빼먹고, 또 같은 버스를
타고 돌아오곤 했어. 나는 학원에서 완전히 익히지 못한 영어문제를 별 부끄럼 없이 그에게 물어보곤 했어. 실력이 월등하게 차이 나니까 부끄러운 감정도 일지 않았었나봐. 마침 그날은 새벽부터 눈이 펑펑 쏟아졌기 때문에 우리는 강아지처럼 더욱 거리를 싸돌아다녔어. 사람의 발길에 반질반질해진 길 위에서 넘어지려고 뒤뚱거리면 서로 팔을 붙들어 주기도 하면서 말이야. 나는 앞에 섰기 때문에 먼저 버스에 올랐지. 건 내 이야기를 들었으면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음,
그건 뭔고 하니, 데이트를 할 때는 우선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는 알아두고 하시라 이거지, 뭐. 누나는 착각이 야무져요. 비 오는 날. 모처럼 음악회에 가려고 서둘러서 버스
정류장으로 나왔다. 거울에 비친 약간 다듬어진 내 모습은 예뻤다. 나는 나르시스처럼 내 모습에 스스로 황홀해져 거울 속을 자꾸자꾸 들여다봤다. 버스 정류장 앞에는 마침 유리가게가 있었고, 그 가게 입구엔 내 키보다 더 큰 견본용 거울이 하나 걸려 있었다. 1백 60센티인 나는 한참을 쳐다봐야 했다. 거기에다 오똑한 코, 선명한 입술, 그윽한 시선... 그 남학생의 옆모습은 한마디로 멋 덩어리였다. 끝없이, 끝없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렇게 걷고 싶었다. 남세스러운 만남 "얘, 얘..." 그는 미남인데다가 K고교생들 간에서는 일종의 우상으로 통했다. 거기다 대대장 후보감이고, 전국웅변대회에서 일등, 전교에서 학업성적 일등, 테니스
선수... 거기다 극장으로, 탁구장으로... 온갖 주문들이 한도 없고 끝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토요일이 돌아왔다. 숙희는 하루종일 앞 보고, 옆 보고, 뒤 보며 온갖 잔소리에 참견을
다하더니, 그러나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던 수줍은 아이였다. 동문서답하는 아이들 학원 수업이 끝난 저녁 시간이면 거리는 언제나 사람의 파도가 일렁댄다. 학교에서 새침데기로 소문난 이 몸. 갑자기 들이닥친 만남이기에 순간 맹구 눈방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 몸은 그리 비비 틀지? 할 말 있으면 어서 해보라구. 가방을 열고 "해법 수학"을 어렵게 꺼냈다. 그것을 건네 받는 내 가슴은 두근두근, 합쳐서 네 근이 되고, 드디어 다듬이 방망이질을 해댔다. 내 속셈은 산산히 부서져 허공 속으로 날아가고 말았지. 그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 꺼내 공중전화 부스 있는 곳으로 "해법 수학"을 홱 던져 버렸어. 그 전봇대는 놀란 기린새끼마냥 작은 눈을 동전처럼 동그랗게 만들더니, 더듬더듬 책을 집어들고 어적어적 가버리잖어? 뒤도 안 돌아보고 말야. 졸지에 슬프고도 창피스런 스타가 된 셈이지. 단번에 두 마리의 고기를 건지려던 계획은 여지없이 허물어졌지. 우리 함께 살게 된다면 연! 정말 싱그러운데..." 그래,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다... 밤새도록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지요. 우리 이다음에 함께 살게
된다면-. 착각은 리허설이 없다는데 등교길은 항상 즐겁다. 가로수도 싱그럽고 바람도 상쾌하다. 모든 것이 기분 좋고 흥겹다. 한데 사실은 단어를 외는 척할 뿐, 내 정신은 엉뚱한 곳에 쏠려 있다. '이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그녀가 탄다.' 그러나 그녀는 그 까만 눈을 두리번거리며 기어이 나를 찾아내고야 만다. 그리고 서슴없이 내 앞으로
달려온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그토록 따를 수는 없지. 이같은 자만심까지 가지며 나는 살맛 나는 시간을 보냈다. 오늘 오후에는 기필코 그녀를 추적해 보는
거다. 네가 좋아지는 이유 내게 항상 흰 편지 봉투를 던지던 M. 없는 정도가 아니라, 송충이가 꾸물거리는 것을 보듯, 먼발치에서도 그가 보이면, 순간 내 몸에는 소름이 쫙 끼쳤어. 어쨌든 반 년 동안
난 그의 얼굴만 생각해도 불쾌하고 견딜 수 없는 혐오감에 빠졌어. 여자의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어. 이런 것을 두고, 자기가 갖긴 싫어도 남 주긴 아깝다고들 하는가봐. 나도 별수 없는 여자란 말인가? 송충이같이 징그럽게 느껴지던 M이 일편단심 나만을 사랑해 주길 바라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건 나야. M쪽이 아냐. 그런데, 그런데도 자꾸 분한 마음이 드는 건 왜지? 내 가슴은 방망이질하기 시작했고, 피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어. 그는
이제 송충이가 아니야. 머저리도 아니구. 아주아주 멋있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엉터리 한국인 이별이란 대체 뭘까? '헤어진 다는 것'쯤이야 뻔한 상식이고, 헤어진 그 다음에 오는 쓰리고 아픈 감정이 어떤 맛인지 말해 줄 사람 있느냐구? 그대의 주소는 어디요? 여덟 시간 노동. 이건 우리 나라 노동법, 아니 국제노동법에 명시되어 있는 노동 제한시간이다. 그런데 난 지금 매우 피곤하다. 내 눈, 귀, 그리고 대뇌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나의 동료들도 지쳤는지 완전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사실 나도 보호받아야 할 만큼 피곤한 몸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기를 업은 아줌마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더니 바로 내 옆에는 아주 핸섬한 남학생이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에서 '쾅'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부턴 뒤죽박죽이 되었다. 뭐가 뭔지 모르게 뒤엉켜서 돌아갔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 심장이 물방아의 고동처럼 뛰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그 남학생이 내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또 다시 한 번 내 가슴 속에서 '쾅'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본다면 그들도 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지게 될것이다. 한참 나의 뒤를 따라왔으면 그 다음 스케줄로 넘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한데 도대체 소식이 없다. 아니야, 아니야. 이런 기회는 내 일생 단 한번뿐일 수도 있어. 그래서 살짝 미소를 지어 줘야 한다. 한데 그것도 안 될 것 같다. 스승을 향한 우리들의 동경 선생님의 아틀리에, 그리고 따끈한 커피 나이 먹은 선생님이 외출했다. 뒤카의 교향시 '마법의 제자'가 울려퍼진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화판, 이젤, 석고, 유화 물감이 묻어 있는 헝겊 조각, 와트만지, 붓을 씻는 물통, 갈대, 솔방울, 나무 뿌리, 돌 조각.. 주문을 외면 모두 일어나서 저마다의 소리로 합창이라도 불러댈 것 같은 이 요란스러운 방 안. 녹색 커튼이 대자라도 된 듯 이 모든 것을 감싸안고 있다. 내가 휴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이 속에 묻혀 음악을 들으며 선생님과 함께 작품을 제작하는 시간이면 나는 구름을 날으는 선녀가 된다. 그의 화판은 암울한 청록색 속에 엷은 보라색이 탈출을 하려는 처녀처럼 율동적으로 부각돼 있다. 나도 붓을 놓고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그런데 인간은 우주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표현시키는 것은 한 움큼의 흙으로밖에 못 나타내고 있거든." 그것은 자기 내면에 있는 우주를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지." 완전한 사람은 그야말로 우주를 표현시킨 거야. 우주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거지. 그러나 열심히 사는 사람의 경우에는 우주의 비밀을 착각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는 거지. 잘 못 알고 있는 거야. 나는 커피 두 잔을 타서 책상 위에 놓았다.
냄새가 향기롭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순수하게 가장 완벽하게 느끼고 있으니까. 선생님, 주민등록번호는요? "졸다 보니 1년, 자다 보니 1년, 깨다 보니 1년." 성함은 박금동. H대학교에서 4년간 줄곧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신 수재이십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할 수 있게 된 여러분은 정말 행운입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수업에 임하도록
하세요." 얼굴이 불그레해진 수학 선생님. 무지개에 걸린 우리들의 풍선 "난 있잖아, 그 선생님만 보면 슈베르트가 생각나 미치겠어. 달콤하고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그래서 나는 오늘따라 장미보다 더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였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물론 그 국어 선생님을 위해서이다. 아냐, 그건 오히려 역효과일 수 있어. 여자의 눈물은 결코 무기가 될 수
없어. 선생님은 아는가, 나의 마음을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다. 그는 내 가슴을 온통 사로잡고 마음 속으로 영어 선생님을 사모하지 않는 애가 있다면 그 애는 우리 학교 뱃지를 단 가짜 학생이라고 단정해도 좋다. 반마다 영어시간만, 닥치면, 거울 앞에 겹겹이 모여 서서 머리를 빗고, 핀을 고쳐 꽂고, 얼굴에 로션찍어 바르고...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 아니 잠자는 시간에도 내
머리는 그 영어 선생님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른바 '상사병'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가을 낙엽처럼 쓸쓸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영어 선생님! 우수에 찬 시선을 창 밖으로 던진 채 한 구절 한 절씩 해석할 때면, 우리는 모두 숨마저 멈추고서 심취해 버린다. 그런데 오십 분 수업 동안 한 번도 선택되지 않으면... 그땐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다. 허무하고, 보람없고, 의미없고... 꽃, 구름, 미풍, 보슬비, 태풍, 소나기, 먹구름, 강물, 돌, 바다... 이런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 들어 있어 순간순간 그것들의 속성과 서로 감응하게 된다고 여겨진다. 선생님, 쇼크 먹었어요. "아아, 오늘은 이 영옥이가 여러분에게 빅 뉴스를 한 가지 전하겠습니다." 오페라를 하고 싶었는데 전공이 바뀌었다며, 항상 음악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던 선생님. 언제나 따뜻한 말로 우리들의 가슴을 잔잔하게 어루만져 주던 선생님. 그는 감정의 굴레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를 항상 구원해 주던 고고한 남자 천사였는데. "공고" 그러면 그렇지! 내 가슴 속에서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밤을 사랑하는 나 달빛을 따라 달빛을 따라
올페우스의 빛의 새들은 잎새마다 뾰족한 밤을 머금어도 밤은 모든 물상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못나도 못난이라고 괴롭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언젠가 달동네 언덕길을 올라갈 때였습니다. 낮에는 그토록 지저분한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이것이 밤의 신비입니다. 물, 바람, 꽃잎, 풀, 강물, 어쩌면 달콤한 공기의 흐름에서까지도 저는 그들만의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지저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낮에는 사람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대니까,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모든 것이 너무 염치 없이 시끄럽게 구니까, 이런 물상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밤이 되면 인간은 잠이 드니까 그때는 가장 아름다운 만상의 소리가 곳곳에서 감미롭게 속삭이고, 또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지요. 하기에 저는 해방된 자유를 누리고 불이 밝혀진 작은 공간에서 미친 듯이 내 작업을 즐기고 있습니다. 밤. 어둠 속에서만 나는 진정한 휴식을 얻고, 그리고 창조의 즐거움과 내가 성장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건 어쩜 낮이 무서워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기양양한 돼지들, 오로지 먹을 궁리만 하는 그 탐욕스런 눈빛들, 그들이 꾸며놓은 추악한 사건들... 나는 밤으로 도망해야 합니다. 나래를 펴고 날아다니는 반짝이는 내 의식을 볼 수 있으니까요. 선생님, 한번만 더 윙크를 주름이 지고, 툭 튀어나온 눈. 한데 눈만은 영 내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 한숨만 푹 쏟아져 나왔다. 옆 짝궁이
킬킬거린다. 담징은 몇 날 며칠을 기도 드린 후,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관세음보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미 마음의 번뇌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한 가지 생각으로 얼굴에 한 점을 찍었을 때, 기막히게도 관세음보살이 완성된 것이다. 어떻게 할까? 그런데 내 짝궁 계집애는 하필이면 왜 윙크를 하라는 거야! 윙크라는 걸 아무한테나 하는 건가? 그거야말로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 같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제자에게 윙크를 할 수 있겠니? 할 수 없는 걸 시키면 안 되는 거다.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음악시간을 청구합니다. "얘들아! 음악 선생님이 새로 오셨대." 거기에다 처녀도 아닌 유부녀 선생들이 선배라는 명목으로 온 학교를 주름잡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와 격의없이 어울릴 수 있는 터울이라는 데 매력이 더 있었다. 거기다가 얼마 안 있어 독일 유학을 떠난다는 거다. 이같이 간단한 신상에서 우리들은 이미 그에게 넋을 빼앗겼다. 이런 일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현상이다. 음악 책이 다 뭔가? 이 핑계, 저 핑계 깊은 시선은 마치 호수처럼 그윽해 보였다. 우리는 숨쉬는 것조차 자제했다. 그 순간 자기 감정을 참지 못한 윤희가 꽥
소리쳤다. 고개를 들어요, 그리고 날 봐요. 늦가을이었다. 나는 바라던 한 마리의 학이 되었다. 나는 날개를 저어 교실 창을 빠져나와, 학교 건물 생각나는 나날들 학교로 가는 오솔길 우리집 뒤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그 산에는 약수터가 있다. 서울 한귀퉁이에 약수를 눈이 내리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눈이 내린다. 탐스러운 눈송이들이 소리도 없이 살그머니 내려앉아 영원한 소녀의 새벽길 멀리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리는바람결에 날아온 향내음처럼 내 가슴에 와 내려앉는다. 누나를 기다리는 소년 소년은 병약한 편이었다. 매년 봄, 가을 두 번씩 심하게 앓아야만 했으니까. 무던히도 속을 행복의 옹달샘 엊그제 언니 친구가 결혼을 했다. 시간을 먹고 사는 인생 시간만 먹고 사는 인간.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바로 제가 그런 부류의 인간이죠. 십대를 보내고 이십대를 맞이하던 날 아듀, 세월이여. 행복의 정체 행복이란? 참으로 흔한 이야기다, 진부할이만큼. 하지만 아무도 행복한 놈을 꼭 붙들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은 흐려 있었다. 하늘은 왜 흐려 있어야 했을까? 고독하십니까? "고독하십니까?" 우정, 그것은 가장 승화된 사랑 사랑.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완전한 의미가
아닐까? 캠퍼스의 꿈과 추억 답안지에 핀 웃음꽃 중간고사가 시작된 지도 이틀이 지났건만, 시험지를 받을 때마다 아는 거라곤 하얀 것은 영어시험 이렇게 답안지를 메꾸고 교실을 나서는데 내 등 뒤로 쏠리는 뭇시선들. 나의 고달픈 25시 "인경아! 너 지금 몇 신데 아직까지 자니?" 손바닥에서 별이 반짝이던 날 Long since old time. 신속, 정확, 시침 뚝! 2월 학년말 고사. 너희는 구제불능이야! 우리 학교에는 눈두덩이 몹시 돌출 됐고, 시력이 아주 나빠,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쓴 수학 "너희들은 구제불능아들이야! 구제불능..." 내가 만난 '임신중' 아침마다 콩나물 시루 속에 박힌 한 줄기 콩나물 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나의 운명. 인연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미란이는 내 짝꿍이다. 저 산너머 아득한 하늘가에 카알 부세의 시였다. 한숨 찬란한 개학날 따다거리는 엄마의 소프라노와 함께 개학날은 어김없이 개봉박두다. 성적표를 기다리는 셰퍼드 봄 방학. 해피 맨이냐, 그레이트 맨이냐? "여러분들 이 다음에 크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지요?" 타인을 통한 성장의 길목 눈밭 위에 켜진 촛불 비가 오고 있다. 바람도 분다. 철없는 예비신부들 친구가 시집을 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석달 만에. 비오는 날의 스케치 아침부터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이런 날을 두고 흔히 아침 굶은 시어머니 한 덩이의 눈, 그것을 선물로 받던 날 나는 아침마다 똑같은 길을 걸어서 직장으로 간다. 그 시간은 내게 무한한 자유를 준다. 아빠는 멋쟁이
성적! 저녁을 먹고, 텔레비젼을 보고, 모든 것은 어제와 다름없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데, 엄마가 오이야, 누명을 벗겨다오 내게 금식령이 내려졌다. 그것도 두 끼씩이나. 먹기가 취미인 내겐 분명히 푸른 하늘에서 누구를 위한 가을인가? 에, 이 가을을 맞이해 더욱 심각해질 유귀순의 늘어나는 몸무게 증가율에 대비하여 다음과 아닌게 아니라 진짜 내 몸무게는 폭발 직전에 놓여 있다. 절대로 결혼은 해야지요 '말없이 죽어가서 한 줌의 흙이 될지언정 결코 결혼 따윈 안 하겠노라'고 온 가족 앞에서 키 큰 남동생은 누나를 괴롭힌다 누나보다 더 큰 남동생. 있을 수 있는 일인 것도 같고, 있을 수 없는 일인 것도
같다. "언니의 부탁인데, 염려마유" "얘, 넌 이
장영이의 사랑스러운 동생이지?" 변덕쟁이 언니의 눈물 "남자는 모두 도둑놈이다. 결혼은 인생에 있어 가장 괴로운
지옥이야!" 가짜 편지소동 "오빠! 편지 왔어!" 영선씨. 이렇게 시작해서 깨알같이 씌어진 두 장의 편지. 읽어 내려갈수록 가슴은 흥분으로 '딱!' 아니 이
자식이! 어떤 분노 바람이 너무 차다. 찬바람은 기세 좋게 골목을 휩쓸고, 거리를 휩쓸고, 장바닥을 쌍동이여서 겪어야 하는 일들 쌍둥이. 세상에 요것처럼 묘한 관계도 있을까? 옹달샘가의 밀어 뜨거운 아이스크림 "얘 얘, 좀 밀지 마." 실습생의 하루 "미스 임, 커피 한 잔 끓여 줄래?" 재수생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나? 나는 고입 재수생이다. 정말 소개하고 싶지 않은 이력이다. 르느와르가 탄생시킨 미인 아침 등교시간. 이십 분 동안이나 내 발을 동동거리게 만들던 버스가 느릿느릿
굴러온다.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내일은 학기말 고사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이 몸이 드디어 자유를 쟁취하는 날이다 웃음을 만드는 아이 지난 일어시간. 쓸데 없는 기록 갱신 때는 5교시, 사회시간. 경험해본 사람이면 다 알 만할 거다. 이 5교시가 얼마나 괴로운
회수권과 단팥죽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어. 행복한 단식투쟁 "언니! 우리도 헌법개정 좀 하자." 친구와 친구 마지막 강의를 듣고 교문을 막 나오는데, 뜻밖에도 고교 동창 진호녀석이 그곳에 서 우정의 감격시대 '벙글벙글'은 우리 학교 앞
라면집 이름이다. 엄마의 방학 무척 덥다. 방학을 한 지도 열흘이 지났건만, 바다는커녕 수영장 구경도 못하고 이게 뭔가? 남자가 강해지는 비결 모르시나요? 아주 추운 겨울날. 따근따근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서 발장단을 치며 콧노래를 부르고 빛을 모으는 당신이여 나는 대구에 살고 있는 펜팔 친구 준을 서울역 그릴에서 처음 만났어요. 별이 내리는 뜨락 아빠, 편히 가세요. 새벽 두시. 아빠 창 밖엔 싸륵싸륵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모두가 잠든 밤, 며칠 밤을 날으리 날으리 쌀쌀한 바람을 타고 눈발이 날린다. 성글게 내리던 눈발은 질척한 진눈깨비처럼 이내 녹아 입원실 풍경 입원실 안은 비교적 넓고 아늑했다. 넓은 창으로 들어온 가을 햇볕은 하얀 벽과 천장의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하숙집
방바닥에 하얀 편지가 한 장 놓여져 있었다. 나는 순간 간호원이 링게를 바늘을 빼려고 병실로 들어왔다. 환자복 소매 속의 가늘고 하얀 동생의 슬픈 아이에 대한 기억 그 애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눈이 맑고 예쁜 그 애는 항상 눈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애의 전부다. 어쩌면 내가 표현력이 부족한 건지도 모른다. 사실 위대한 사랑을 가진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꽃이 핏기 시작한 초록빛 언덕 드뷔시는 젊은 날을 회상하며 이 곡을 작곡했습니다. 선생님은 내 연주가 끝나자,
선생님! 우리는 공평하게 태어났어요 "여보세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시다 온종일 진통에 시달리던 산모가 아들을 낳았다. 하루에도 몇 명씩 수 없이 보아 온 후기 15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1992. 7. 20. 남지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