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 무슨 개소시를 지껄이는 건지 잘모르겠네요

   

1
  <편히 쉬시옵소서>를 노래 부르며 장례 행렬은 가고 있었다. 행렬이 멈추고 나서는 노래가 다
시 시작되어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발굽 소리, 바람 부는 소리가 계속되는 것 같았다.
  길 가던 행인들이 길을 비키며 화환을 세어보기도 하고 성호를 긋기도 했다. 호기심에 못 이겨
행렬에 끼어들며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댁 장례인가요?"
  "지바고 댁이오." 누군가 대답했다.
  "어쩐지! 그래서 다르더라."
  "주인 양반이 아니고 부인이랍니다."
  "아 매한가지가 아니오. 명복을 빕니다. 참 훌륭한 장례식이군요."
  마지막 가는 순간의 하나하나가 되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온 누리가 주님의 것이니, 거기서 삶을 누리는 모든 것 또한 주님의 것이니라."
신부는 마리아 니콜라예브나의 시신 위에 십자로 흙 한  줌을 뿌렸다. 모두들 <참된 영혼>을 노
래했다. 이윽고 몹시 서두르기  시작했다. 관에 뚜껑을 덮고,  못질을 하고, 구덩이에 내려놓았다.
네 자루의 삽으로 재빨리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하자 흙이 비오듯이 관 위로 떨어져 내려갔다. 관
위에 조그만 언덕이 생겼다. 열 살 가량의 소년이 그 위로 올라섰다.
  어머니 무덤 위에서 뭔가 말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성대한 장례식이  끝나면 으레 허전하고
어정쩡한 상태가 되기 쉬운 것이다.
  소년은 고개를 쳐들고 황량한 가을 경치와 수도원의 둥근 지붕을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개발코의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목을 길게 뽑았다. 그것은 마치 승냥이 새끼가 금세 짖
기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음을 터뜨렸
다. 불어오는 비구름이 쏟아내는 차가운 빗방울이 그의 손과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팔 소매가
꼭 끼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무덤으로 다가갔다. 고인의 남동생이며, 울고 있는 소년의 외삼촌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베제나핀이었다. 그는 스스로 성직을 물러난 신부였다.
  그는 소년에게 다가가서, 소년을 묘지에서 데리고 나왔다.
    2
  니콜라이 아저씨의 안면으로 수도원의 방 하나를 빌어서  두 사람이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날은 성모제 전날 밤이었다. 다음날 그들은 볼가 강변에 있는  지방 도시로 가기 위해 멀리 남쪽
으로 여행하기로 했다. 니콜라이 아저씨는 그 도시의  진보적 지방 신문을 발행하고 있는 출판사
에서 일하고 있었다. 기차표는 미리  사두었고, 짐도 꾸려서 방에  이미 가져다 두었다. 정거장이
머지 않아서, 선로를 바꾸는 기관차의 쓸쓸한 기적 소리가 멀리 바람결에 들려왔다.
  저녁 녘에는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다. 방에는 두 개의 창문이 밖이 지면과 같은 높이에 있었다.
누런 아카시아 숲으로 울타리 쳐진 채소밭 한 귀퉁이와 멀리 뻗어 있는  한길 군데군데에 얼어붙
은 웅덩이가 보였으며, 낮에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를 배잔한 바로 그 묘지의  일부가 바라보였다.
채소밭에는 추위에 파랗게 쪼그라든 양배추 몇 이랑이 남아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바람이 불
어올 때마다 벌거숭이가 된 아카시아 숲이 춤추며 길가를 뒤덮곤 하였다.
  한밤중에 소년 유라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캄캄한 방안에 뭔가 희끗희끗 이상
한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유라는 셔츠 바람으로  창가에 달려가서 차가운 유리창에 바싹 얼굴을
들이댔다.
  눈보라가 휘몰아쳐 밖엔 한길도, 묘지도, 채소밭도 없는 듯했으며 하늘이 온통 눈보라로 뿌옇게
되어 있었다. 마치 폭풍이 유라를 보자,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자기의 힘을  과시하며 소년에게 무
서운 인상을 주려는 듯했다. 폭풍은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하면서, 소년의 관심을 끌려
고 기를 쓰고 있었다. 하얀 휘장이 연거푸 공중에서 뒤집히듯 내려와 지면에서 퍼지며 겹겹이 뒤
덮고 눈보라만이 대지를 지배하며, 거기에 대항할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가에서 물러선 유라가 생각한 것은 우선은 옷을 입고 바깥으로 달려나가서 무언가 빨리 손
을 써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수도원의 양배추는 눈에 묻혀 뽑아낼수 없게  되지나 않았을까, 들판
에 묻힌 어머니가 꼼짝 못하고 그의 손이 미치지 못할 땅속 깊이 더 멀리에 사라져버리는 것이나
아닐까,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금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아저씨는 잠이 깨자 예수님의 이야기로 소년을 위로하려 했으나
이내 하품을 하고는 무슨 생각에 잠기며 창가로 가버렸다. 날이 밝아 왔다. 그들은  옷을 입기 시
작했다.
    3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유라는 아버지가 오래  전부터 집을 떠나 시베리아나 외국을 돌아다니
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엄청난 재산을 모두 탕진해버렸다는 것은 전혀 모르
고 있었다. 유라에게는 아버지가 언제나 사업 관계로  페테르부르그에 가 계시거나 아니면 큰 시
장이 있는 곳에, 주로 이르비트 등지에 가 계신다고 얘기했었다.
  그런데 그후, 원래 병약한 어머니는 폐를 앓게 되자 남부 프랑스나 북부 이탈리아 등지로 옮겨
다니며 요양하게 되었다. 유라는 어머니의 여행에 두어 번 따라갔을 뿐, 거의 언제나 혼자 떨어져
서 낯선 사람들 손에서 자랐다. 돌보는 사람도 자주 바뀌었으며, 이러한  생활에 그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끊임없는 수수께끼에  쌓인 어수선한 가정 환경 속에서,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에도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좀더 어렸을 적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자기의 성과 같은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불려지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지바고 공장, 지바고 은행, 몇 군데에 지바고 저택 등이 있었고, 지바고 타
이 핀과 지바고 피로그라는 롬바바 비슷한 둥근 케이크까지 있었다. 그리고 한때는 모스크바에서
마부에게 "지바고 댁으로!"라고 말하기만 하면, 마치  "벽지로!" 라고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멀고
먼 왕국으로 썰매를 몰고 가는 것이었다. 저택 주변의 뜰은 마치 고요한 정원의 숙연함을 느끼게
했다. 까마귀들이 휘늘어진 전나무 가지의 고드름을 떨어뜨리며 날아와 우는 소리는 마치 나뭇가
지가 꺾이는 소리처럼 숲속을 메아리쳤다. 오솔길 저편에  새로 세운 집에서 순종 사냥개 무리가
우르르 몰려나와 숲 공지로 통하는 길을 지나 달려왔다. 그  맞은편 족에는 짙어 가는 황혼 속에
등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이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지바고 댁은 몰락해버린 것이다.
    4
  1903년 어느 여름날, 유라는 니콜라이 아저씨와 함께 타란타스를 타고 두플랑카를 향하여 들판
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이반 이바노비치 보스코보이니코프를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견
직 공장주로 콜로그리보프 예술의 적극적 후원자이며 학교 교사로서 또 일반 교양의 행설자로 알
려져 있었다.
  카잔의 성모제 날이어서 하곡 추수가 한창때였으나 마침 점심 시간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축
제일 때문인지, 밭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반쪽만 깎은  죄수의 뒤통수처럼 반쯤
만 베어낸 들판엔 타는 듯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들판 위에는 새들이 원을 그리며  날았다. 잘 영
근 밀 포기들이 꼼짝도 않고 늘어서 있었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저편에 우뚝 솟은 밀 짚단 더
미를 한참 눈 여겨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마치 토지 측량사처럼 지평선 위에서 뭔가 기록하면
서 걸어다니는 것같이 보였다.
  "여보게, 이건 지주의 밭인가, 농부의 밭인가?" 하고 니콜라이 아저씨가 파벨에게 물었다. 출판
사의 수위로 있는 파벨은 마부 석에 등을 구부리고  비스듬히 앉아서 '마부 노릇은 내가 할 일이
아니야'라는 듯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저쪽 것은 지주 어른의 밭이죠."파벨은 파이프에 불을  당겨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한참 동안
잠잠하더니 채찍 끝으로 반대쪽을 가리켰다.
  "저쪽은 농부의 밭이구요. 이랴!" 그는 압력계를 지켜보는 기관사처럼  말꼬리와 궁둥이를 유심
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말들이란 흔히 축마는 정직하게 마차를 끌고 달리지만 종마란 놈은 백조처럼 목을 구부
리는 꼴이, 보기에 흡사 제 자신의 방울 소리에 맞추어 춤출 생각밖엔 하지 않는 꾀를 부리는 게
으름뱅이로 보였다.
  니콜라이 아저씨는 토지 문제에 관한 보스코보이니코프가 저술한 원고의 교정을 부탁하러 가는
길이었다. 당국의 검열이 더욱 엄해져서 출판사  측에서는 저자에게 내용을 수정해달라고 부탁했
었다.
  "시골 사람들이 요즘 꽤 시끄러운 모양이야." 니콜라이 아저씨가 말했다. "파니콥스코예 마을에
선 상인 하나를 찔러 죽이고, 종마장을  불질러버렸다는군. 자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
마을에선 어떻게들 말하고 있지?"
  그러나 농업 문제에 관한 보스코보이니코프의 과격한 견해를 완화시키려는 검열관 이상으로 파
벨의 견해는 어둡기만 했다.
  "어떻게들 말하다뇨? 동민들은 감당할 길이 없어졌어요. 너무 풀어주었단 말입니다. 우리한테는
오히려 좋지 않게 되었답니다. 농민들을 멋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서로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할
겁니다. 그건 뻔한 이예요! 이랴, 이랴!"
  유라가 아저씨와 함께 두플랑카를 방문하기는  이것이 두 번째였다. 제딴엔  길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들판이 뒤로 물러가며 숲이  그들을 삼킬 적마다 길이 오른쪽으로 꺾이
고, 콜로그리보프의 저택이 어느덧 눈에 띄고, 10베르스타나 되는 들판과 저  멀리에 번쩍이는 강
물, 그리고 강 너머의 철도 가 이내 보이리라 생각됐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번번이 어긋나고 말
았다. 들판을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들판이 나타나고, 그것들이 다시 숲속으로 사라져갔다. 이러한
광활한 풍경의 변화는 그의 가슴에 넓은 도량을 안겨 주어 미래를 생각하고 꿈꾸게 하기도 했다.
  후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의 명성을 떨치게 한  저서는 한 권도 나오지 않았으나  이미 그의
사상은 굳어져 있었다. 그는 자기의 명성을 떨칠 날이 가까워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이내 당
대의 대표적 저술가들 속에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대학 교수나 혁명 철학가들과 비록
토론에 사용하는 용어는 같았으나, 그들의 사상과는 공통된 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어떤 도그마에 집착하여 언어의 농락이나 외관상의 멋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신부는 이미 지난 톨스토이 주의나 혁명적 이상주의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
는 변천의 진로를 분명히 제시하는 동시에 무언가 세계를 향상시키는 영감에 차 있었으면서도 보
다 구체적인, 그런 사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린애나 무지몽매한 사람에게도 번개나 천둥
처럼 자명한 사상이어야 했다. 그는 계속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있었다.
  유라는 아저씨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는 아저씨한테서 어머니를 보는 듯했다. 어머니처럼
아저씨도 자유롭고 신비한 것을 좋아했고,  삶을 누리고 있는 자는  누구나 동등하다는 귀족적인
평등감을 품고 있었으며, 무엇이든 첫눈에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마찬가
지로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그 의미와 활력이 상실되기 전에 재빨리 그것을 표현하는
천부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유라는 아저씨가 자기를 두플랑카로 데리고 가는 것이 기뻤다. 그곳은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 역시 어머니를 상기하게 했다.  어머니는 자연을 사랑했으며 시골길 산책에 자
주 유라를 데리고 다녔다. 그 밖에도 유라는 니카 두도로프와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이 기쁨이었다.
보스코보이니코프 댁에 살고 있는 중학생인 니카는 두 살쯤 위라고 유라를 좀 깔보고 있어서, 지
난번에도 니카가 악수를 할 때 유라의  손을 밑으로 힘껏 잡아당기는 바람에  머리가 숙여지면서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덮고 이마에 흘러내려 불쾌했던  일은 있었지만, 그까짓 건 문제가 아니
었다.
    5
  "빈곤 상태에 관한 문제의 생활 신경은..." 니콜라이 미콜라예비치가 수정한 원고를 읽어내려 갔
다.
  "생활 신경보다는 '요점'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 보스코보이니코프는 이렇게 말하고 교
정지에다 고쳐 써넣었다.
  두 사람은 유리 창문이 달린 어둑어둑한 테라스에서 일하고 있었다. 물뿌리개며 원예용 도구들
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망가진 의자 등받이엔 비옷이 걸려 있고,  한쪽 구석엔
방수 장화가 진 흙투성이인 채 윗등을 밑으로 마룻바닥에 늘어뜨려져 있었다.
  "한편, 출생 및 사망 통계에 의하면..."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가 읽어내려 갔다.
  "해당 연도를 삽입해야겠군."하고 보스코보이니코프는 교정지에 써넣었다.
  테라스 틈새로 바람이 가볍게 불어 들어왔다. 종이 위에는 바람에 날리지 않게 문진 대신에 대
리석 조각이 놓여 있었다.
  일이 끝나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는 급히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올 것 같은데. 곧 떠나야겠어요."
  "무슨 소리요. 그냥 보낼 줄 아시오? 함께 차나 마십시다."
  "저녁때까지 꼭 시내로 가야 하는데."
  "안 되겠소. 무슨 소릴 해도 내 귀엔 들리지 않소."
  앞뜰에서 끓이는 사모바르의 숯불 냄새가 흘러 들어와서 담배 냄새와  헬리오트로프 향기를 몰
아내 버렸다. 별채에서 유지며 딸기며 크림  빵 등을 가져왔다. 그리고 파벨이 말을  끌고 강으로
목욕을 하러 갔다는 얘기를 했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는  하는 수 없이 주저앉을 도리밖엔 없
었다.
  "마차가 준비될 때까지 강 언덕에 나가서 벤치에나 좀 앉았다 옵시다." 보스코보이니코프가 청
했다.
  그는 부호인 콜로그리보프와 친분이 있어서  별채의 관리인 방 두 개를  쓰고 있었다. 이 집은
앞뜰이 있고, 넓은 정원 한쪽 구석의  음침하고 황폐한 곳에 있었으며, 전에 차가  다니던 길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지금 이 길은 쓰레기 처리장 구실을 하는 골짜기로 쓰레기를 운반하는 데 사용
되고 있을 뿐이었다. 진보적 사상을 가진  콜로그리보프는 백만장자였으나 혁명에 대해서는 동정
적이었다. 그는 현재 아내와 함께 외국에 나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 영지 저택에는 그의 두 딸
나자와 리파 그리고 보모 외에 몇 사람의 하인들만 살고 있었다.
  관리인 집과 뜰을 갈라놓은 인목나무의 빽빽한 울타리 너머로는, 곳곳에 연못과 잔디밭이 있는
넓은 정원 한복판에 저택의  본채가 자리잡고 있었다.  보스코보이니코프와 니콜라이가 울타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참새들이 몇 마리씩 떼를 지어 거의 같은 간격으로 두 사람 앞에서 날아가고
있었다. 뒤이어 참새들은 인목 울타리에 무리가 되어서 파이프를 흐르는 물소리처럼 재잘거렸다.
  온실과 정원사 집, 그리고 전에 무엇에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석조 폐허 건물 옆을 지나서 걸
었다. 두 사람은 학문 분야의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야 물론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기는 있지요." 니콜라이가 말했다. "하지만 요즘은 무슨 모임
이나 무슨 협회라는 걸 만드는 게 크게 유행하고 있거든요. 그들이 군거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것
이 재능이 없는 인간들의 피신처이기 때문이예요. 그들이 솔로비예프에게  충실하거나, 칸트나 마
르크스에게 충실하건 다 같은 겁니다. 진리는 개인만이 구할 수 있는 거니까. 사람들은 진리를 사
랑하지 않는 자들과는 함께 어울리지  않을 테구요. 세상에 과연 충실할  수 있는 대상이 얼마나
있을까? 아주 적을 겁니다. 나는 불멸은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불멸이란  생명을 다른 말로
좀더 강하게 표현한 것이니까. 불멸에  대해선 충실해야 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충실해야 합니
다! 저런, 또 눈살을 찌푸리시는군, 안됐어. 역시 당신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으흠..." 보스코보이니코프는 헛기침을 했다. 그는 아마빛  머리에 호리호리한 미꾸라지와 같은
몸매에 링컨 시대의 미국인처럼 심통  사납게 생긴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난 아무말도 하지
않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내 생각은 전혀 달라요. 그보다도  말이 나온 김에 묻겠는데, 성직을 박
탈당했을 때 기분이 어땠소? 오래 전부터 알고 싶었소. 두렵진 않았소? 파문 당한 건 아니오?"
  "화제를 바꾸고 싶은가 보군요. 좋아요... 하지만 파문된 것은 아니오. 요즘은 그런 가혹한 짓은
안 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불쾌한 일도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을 받곤  있지만. 예를 들면, 앞으
로 꽤 오랫동안 공직을 맡을 수가 없고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그엔 못 가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만 그까짓 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러나 이제 말한 것처럼 난 그리스도에게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무신론자로서 신의 존재  여부나 존재하는 이
유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인간은 자연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살고 있으며, 오늘날의
역사는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기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역사란 무엇일까? 역사란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세기에 걸친 노력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것을 위해 인간은 교향곡을 작곡하였고, 수학
적 무한대와 전자파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정신적인 충동이 없었다면 그 방
향에로의 전진도 없었을 겁니다. 정신적  준비 없이는 지금 말한 그러한  발견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위해 복음서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준답니다. 첫째는 생명력의 최고
형태인 이웃에 대한 사랑인데, 이것이 일단 사람의  마음속에 충만 되면 넘쳐흘러서 소모되어 간
답니다. 둘째로는 근대인의 두 가지 근본적 이상 관념, 즉 이것 없이는 근대인이라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자유로운 개성이라는 관념과 또 하나 희생으로서의 인생이란 관념이지요. 아시겠어요? 이
것은 아주 새로운 사고방식이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인에겐 역사가 없었다고 할  수 있어요.
있었다면 유혈과 만행, 잔학, 노예 제도가 얼마나 악랄한 것인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곰보딱지
갈리굴라와 같은 인간들뿐이었어요. 거기엔 청동의 조상과  대리석 원주의 교만한 죽음의 영원만
이 있었지, 당시 그리스도가 출현하기 전까지 인간은 자유롭게 호흡할 수가 없었지요. 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인간은 미래를 향해 살기 시작했고, 인간은 울타리 밑의 한 길가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역사 속에서 살면서 죽음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겁니
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노력 속에서 죽어가게 되었던 거예요. 그만하지! 괜히 내가 너무 열을 올
린 것 같군! 그야말로 마이동풍 격이지!"
  "여보게, 그건 형이상학이로군. 그것은 나에게 금물이란 충고를 의사한테서 받았어요. 위장병에
해롭다는군요."
  "좋소, 당신은 가망이 없군. 그만둡시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야! 이렇게 경치가  좋은 데 살고
있으니까. 이런 경치라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 거요! 하긴 늘 여기 살고  있으면 별로
고마운 줄 모를 테지만."
  강물은 햇빛을 받아 눈에 따갑게 반사되었다. 마치 금속판처럼 늘어나기도 하며 또 줄어들기도
하면서 반짝였다. 갑자기 수면에 잔주름이 퍼졌다. 말과  짐수레, 아낙네들과 농부들을 실은 커다
란 나룻배가 건너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호, 이제 겨우 다섯 시가 되었군."  보스코보이니코프가 말했다. "저기 보시오, 스이즈라니에
서 오는 급행 열차라오. 다섯 시가 조금 지나면 여길 통과하곤 하지요."
  저 멀리 들판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노랗고 푸른  빛깔의 산뜻한 열차가 달리고 있었으며, 거
리가 멀어서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그것이 어쩐 일인지 갑자기 멈춰 섰다. 기관차  위를 흰 증기
가 솜털 모양으로 솟아오르더니, 얼마 후 경적 소리가 길게 들려 왔다.
  "이상한 일이군." 보스코보이니코프가 말했다. "무슨 사고가 난 모양이야. 저기 늪지대에서 정거
할 이유가 없는데.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났어. 자, 이젠 가서 차나 마십시다."
    6
  니카는 정원에도 집안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과는 재미가 없고 유라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해서, 니카가 어디로 숨어버렸을 것이라고 유라는 생각했다. 아저씨와 보스코보이니코프가
테라스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유라는 그냥 집 주위를 돌아다녔다.
  참 아름다운 곳이야! 수시로 노란 꾀꼬리들이 맑은 삼음부로 지저귀고, 피리 소리처럼 밝고  윤
기 있는 자기들의 노래 소리가 전원 속에 깊숙이 잦아들  때까지 한참씩 기다리곤 했다. 코를 찌
르는 꽃향기가 화단 위에서 더위에 응결된 듯이  공중으로 떠돌고 있었다. 마치 안티브나 보르디
게라와 똑같군! 유라는 정원을 정처 없이 거닐었다.  초원에서는 마치 어머니의 목소리가, 새들의
부드러운 지저귐과 벌들이 날아다니는 소리에 뒤섞여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자기의 대
답을 기다리며 여기저기서 자꾸 부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끼고 그는  후들후들 몸을 떨었
다.
  골짜기 쪽으로 가서, 언덕 위에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들을 지나 골짜기 아래에 우거진 오리나
무 덤불 숲속으로 내려갔다.
  땅위에는 바람에 쓰러진 수목과 꺾여진 나뭇가지가 흩어져 있는데다가,  어둡고 눅눅했다. 꽃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마디가 많은 쇠뜨기 줄기가 유라의 그림 성경책에 있는 이집트식 왕홀을 연
상시켰다.
  유라의 마음은 차츰 울적해졌다. 울고 싶었다. 그는 무릎을 굻고 울기 시작했다.
  "주님의 천사여, 나의 거룩한 수호신이여"하고 유나는 기도했다. "참된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만일 죽음 후의  삶이 있다면, 주여, 성인들과  의인들의 얼굴이 별처럼 빛나는
주님의 나라로 우리 어머니를 데려가  주십시오. 어머니는 아주 좋은 사람이랍니다.  죄인일 수는
없습니다. 주여, 우리 어머니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어머니가 괴로움을 받지  않게 해주십시오. 어
머니!" 그는 가슴이 터질 것같은 슬픔 속에서, 새로이 성인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부르듯 어머니
를 불렀다. 그러고는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갑자기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오래 쓰러져 있지는 않았다.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위쪽에서  자기를 부르는 아저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얼른 대답을 하고 골짜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문득 그는 자취
를 감춘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드리지 않았던  일이 생각났다. 유라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를 위
해 기도하라는 말을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순간적인 실신 상태를 지난 후여서 오히려  상쾌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홀가분한 느낌을 잃고 싶지가 않았다. 언제든  다음 기회에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리라 생각했
다. '좀 기다리시라고 해야지.' 유라는 아버지를 전혀 기억조차 못했던 것이다.
    7
  중학 2학년의 미샤 고르돈은 오랜부르그 출신 변호사인 아버지와 함께 2등 찻간에 타고 여행하
고 있었다. 미샤는 점잖게 생긴 얼굴에 크고 검은 눈을 가진 열 한 살의 소년이었다. 아버지 그리
고리 오시포비치 고르돈이 모스크바로 전근하게 되어서, 미샤 역시 전학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누
이들은 새 주택과 이삿짐을 정리하러 이미 모스크바에 가 있었다.
  소년과 아버지는 벌써 기차에서 사흘을 보내고 있었다.
  햇볕을 받아 석회같이 희고 바랜 러시아의 대지, 들판과 초원, 도시와 마을들이 뜨거운 먼지 구
름에 싸여 잇따라 차창을 스쳤다. 길에는 짐마차 행렬이 길게 뻗어 있었다. 이따금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기차에서 내다보면, 짐마차들은 멈춰 서고, 말들이 제자리에서  다리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큰 정거장에 닿으면 승객들은 미친 듯이 뛰어내려  앞을 다투어 식당으로 갈려갔다. 정거장 뜰
의 수목 뒤로 져 가는 석양이 그들의 발과 열차 바퀴 밑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보았을  땐 계획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총
체적으로 보면 그러한 움직임들은 인생의 큰 흐름 속에 합쳐져 모두가 저절로 취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하고 싸우며, 저마다 개인적인 걱정거리가 되는 메커니즘의 움직임 속에서 시간을 보
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낙천성이라는 고상하고도  근본적인 감정에 의해 늘 조정되고 있
지 않다면, 그 메커니즘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데 될 것이다. 이 낙천성은 지상의 모든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연대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인간의 생활이 서로 얽혀있다고 믿으
며, 죽은 자가 매장되는 이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의  왕국으로 알려지고 또
어떤 사람은 역사라 부르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딴 명칭으로 부르는 다른 차원에서도 모든 것
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행복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 규칙에서 볼 때, 미샤는 불행하고 괴로운 예외가 되어 있었다. 우울한 감정이 그
의 궁극적인 원동력이 되었을 뿐 낙천적인 감정 같은 것이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하거나 즐겁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 내부에 이 선천적인 특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유심히 자신의
징후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서글펐고,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남들과 똑같은 수족을 가지고 있으며 남들과 같은 언어와 생활을 가진 인간
이, 그들과는 달리 몇몇 좋아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일이 과
연 있어서 될 것인가? 철이 들면서부터 그는 한시도  이런 의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기가
남들보다 못할 경우, 아무리 고치려고 노력해도 절대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할 길
이 없었다. 유태인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일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슬픔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 자기의 이 무력한 도전은 대체 무엇으로 보상될 것이며 무엇으
로 정당화될 것인가?
  미샤는 이 문제를 아버지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러한  전제는 불합리하며 그런
식으로 문제를 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뿐, 미샤를 만족시키거나 아니면 숙명 앞에 묵묵히 머리
를 숙일 뿐 그 밖에 깊이 있는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미샤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어른들을 점차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어른들은
이런 모순을 야기시키고서도 제힘으로 그걸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깨끗이 해결하고 말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막 그 미치광이가 우리 찻간에서 복도로 달려나갈 때 아버지가 그를 뒤쫓아 나간
것이 잘못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아버지를 밀쳐내고 문을 열고
마치 수영장에서 다이빙하듯 달리는 열차에서 곤두박질로 몸을 던졌을 때, 아버지가 열차를 멈추
게 한 것이 공연한 짓이라고 말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열차가 아무 해명도 없이 이렇게 오래 멈춰 서 있게 된 원인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
리고리 오시포비치 우리 아버지가 비상 신호선을 당겼기 때문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렇게 출발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를 아는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열차를 급정거
시키다가 공기 브레이크가 터졌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열차가 급경사에서 멈췄기 때문에 뒤에서
밀어주지 않고는 기관차가 움직일 수 없다고도 했다. 그리고 또 자살자가 저명 인사여서 그와 동
행하던 고문 변호사가 조서 작성을 위해 가까운 콜로그리보프카 역까지 관리를 불러올 것을 고집
하였기 때문에 기다린다는 말도 있었다. 기관 조수가 전주에 올라간 것을 보면 관리를 태운 궤도
차가 지금 이리로 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찻간 안에는 화장실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서 향수를 뿌렸으나 악취가 약간 풍겨왔으며, 지저분
한 기름 종이에 싼 튀김 닭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잘난 듯이 지껄거리는 페테르부르그의 회색
머리 부인들이 저마다 기관차 연기와 화장이 뒤섞여 집시 여인처럼 되어 버린  얼굴에 분칠을 다
시 하고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기도 했다. 그들은 고르돈 부자의  찻간 옆을 지날 때마다 좁은 복
도를 빠져나가면서 연방 어깨에 걸친 솔을 고치며 옷맵시에 신경을 쓰곤 했다. 미샤는 그들의 오
므린 입술에서 "어때요, 우린 아주 세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죠? 우린 특별하답니다!  교양도 있구
요! 이런 건 도무지 참을 수 없어요!" 라는 말이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자살자의 시체는 제방 풀 위에  뉘어져 있었다. 이마와 눈두덩으로  흘러내린 시커먼 핏자국은
마치 그 얼굴에 가위표를 그려놓은 것같이 보였다. 말라붙은 피는 그의 피가 아니라 그와는 전혀
관계없는 반창고 조각이나 흙탕이 튀긴 자국 아니면 눅눅한 자작나무  잎사귀처럼 보이는 것이었
다.
  호기심이나 동정심을 가진 구경꾼들이 자꾸만 바뀌면서  끊임없이 시체 주위에 모여들었다. 자
살자의 친구이며 동행자였던 거만한 변호사는, 혈통 좋은 짐승처럼 건장한 몸집을 감쌌던 셔츠를
땀에 적시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 곁에 서 있었다. 그는 더위에 지쳤는지 파나마 모자로 부채
질을 하고 있었다. 질문을 받을  적마다,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깨를  흠칫거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코올 중독자요. 그래도 이해할  수 없나요? 가장 전형적인 정신착란증의  결과란 말이
오."
  모직 옷에 레이스 스카프를 쓴 깡마른 노파가 두세 번 시체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기관사로
있는 아들 둘을 가진 과부 치베르지나였다. 두 며느리를 데리고 3등차 무임 승차권으로 여행하고
있었다. 며느리들은 수녀원장 뒤를 따르는 수녀들처럼, 스카프를 이마 위로 내려쓰고 조용한 걸음
걸이로 말없이 노파의 뒤를 따랐다. 이런 일행은 존경을 받기에 족했다. 군중이 그들에게 길을 비
켜주었다.
  치베르지나의 남편도 철도 사고로 불에 타 죽었던  것이다. 노파는 시체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 사이로 들여다보면서, 자기 남편의 경우와 비교라도 하듯이 한숨을 내쉬었
다. "모든 게 팔자 소관이지"하고  노파는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어
가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이렇게 죽는 사람도 있다니까! 돈 많은 부자가 머리는 왜 돌았담!"
  시체를 한 번 보기 위해서 승객들은 하나  빠짐없이 기차에서 내려왔으나, 이내 찻간으로 돌아
간 것은 도둑을 맞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들은 철둑에 뛰어 내려 꽃을 꺾기도 하고 다리의 피로를
풀려고 가볍게 뛰어보기도 했다. 이 근방 일대가 생기를 띠게  된 것은 오직 차가 정거했기 때문
이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질퍽한 소택지도, 강 건너 언덕 위의 저 아름다운 저택과 교회당
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소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조심조심 다가오는 것과 마
찬가지로, 기울어진 광선으로 자살 현장을 조심스럽게 비추고 있는 석양조차도 한낱 무대의 소도
구와 같았으며, 하나의 순수한 시골 풍경이라고 느껴졌다.
  미샤는 이 사건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처음엔 놀라움과 가련한 생각에서 울음을 터뜨리기
도 했다. 긴 여행 중에, 이제는 죽어버린 그 사람이 여러 번 고르돈 부자의 찻간으로 찾아와서 오
랫동안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아버지의 온정과 정신적인 안정과 이해심을  알게 되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솔직하게 어음이나 재산 양도 증서 그리고 파산과 사기 등에  관한 법률 문제
를 물어보기도 했다. "참 그렇군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놀라는 것이었다."당신은 법률 해석을
그렇게 관대하게 하시는군요. 저의 변호사는 당신보다는 훨씬 비관적인 견해였습니다."
  이 신경과민의 사나이가 마음을 좀 안정시킬 때마다  그의 동행자가 1등 찻간에서 찾아와서는,
샴페인을 마시자고 식당차로 그를 데려가곤 했다. 동행인이란  바로 그 건장한 체격에 수염을 깨
끗이 깎은 멋쟁이 옷차림의 변호사였으며,  그는 지금 시체 옆에 서서  아무런 놀랄 것도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변호 의뢰인의  계속적인 흥분 상태가 그에게는 오히려 유리한
관계가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자살자는  지바고라는 유명한 갑부로서 호인이었으나  방탕한 사람이며,
이미 머리가 반쯤 돌았다는 것이다. 그는 미샤가 옆에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샤와 같은 나이
또래의 아들 얘기며 죽은 부인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여태껏 버려둔 두 번째 가족 얘기로
옮겼다. 그러다가 무슨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얼굴이 공포에 떨며 창백해지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미샤에게 말할 수 없이 상냥했던 것은, 아마 누군가  딴 사람에 대한 애정을 미샤에게 표
시하는 듯싶었다. 큰 정거장에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뛰어 내려가서는, 책이며 장난감, 도 터산물
을 파는 1등 대합실 매점에서 한아름씩 선물을 사 가지고 와서 미샤에게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쉴새없이 술을 마시면서, 자기는 석 달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잠ㅅ 제정신으로 돌아
오기만 하면 정상적인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고민에  시달린다고 호소했
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고르돈의 찻간으로 들어와  그의 손을 움켜쥐고 무슨 얘길  하려다가 말고
복도로 뛰어나가 열차에서 몸을 던졌던 것이다.
  미샤는 차실에 앉아서, 죽은 사람의 마지막 선물인  우랄 지방의 조그마한 광물 상자를 바라보
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반대쪽 선로에서  궤도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의사 한
사람과 순경 둘, 그리고 모표가 달린 모자를 쓴 예심판사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냉랭한 사무적인
말소리가 들리며, 뭔가 질문하고는 수첩에 기록하곤 했다. 순경과 차장이 부딪치고 모래에 미끄러
지기도 하면서 간신히 시체를 철둑 위로 올렸다. 어느 시골 여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승객들을 찻
간 제자리로 들여보내려 차장이 호루루기를 불어댔다.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8
  '등잔불의 기름 같은 놈이 또 왔어!' 니카는 아니꼽게 생각하며 숨으려고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밖에서 손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갈 길이 막혀  버렸다. 방에는 침대가 둘, 보스코보이니
코프의 것과 자기의 것이었다. 니카는 잠시 생각하더니 자기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밖에서 그를 찾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없어진 일이 놀라웠다.  이윽고 침실까지 들어
왔다.
  "할 수 없군." 니콜라이 아저씨가 말했다. "나가자, 유라. 네 친구는 좀 있으면 나타나겠지. 그때
함께 놀려무나." 니콜라이 아저씨와 보스코보이니코프가 거기 주저앉아서 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
바의 학생 소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니카는 무려  30분 가량이나 바보 같은 꼴로 그냥
갇혀 있어야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테라스로 나갔다.니카는 살그머니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나와 정원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한 탓으로 그는 오늘 제정신이 아니었다.  열 네 살인 니카는 자기가 어린
애라는 것이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밤새껏 한잠도 자지 못하고 새벽녘에 밖으로 빠져나왔다. 해가
떠올라 이슬에 젖었던 나무가 정원 지면에 둥그스름하게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었다. 나무 그림자
는 검지가 않고, 젖은 포제 장화 같은 짙은 잿빛이었다. 취할 듯한 아침 향기를 발산하고 있는 것
이, 소녀의 손가락 모양의 빛으로 무늬진 땅 위의 이 축축한 그림자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갑자기 아침 이슬처럼 반짝이는 은빛 줄무늬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주르르 흘렀다. 자꾸만
흐르는데도 땅에 스며들지는 않았다. 이윽고  무언가 꿈틀하며 옆으로 홰  돌더니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한 마리의 누런 구렁이였다. 니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다. 흥분했을 때 곧잘 혼잣말을 지껄이곤 했다. 어머니 흉내를 내서 고
상한 테마와 역설을 좋아했다.
  '산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항상 괴로울까?
신은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바로  나다.'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온통
흔들리고 있는 백양나무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옳지,  저 나무더러 흔들리지 말라고 명령해
야지.' 그는 미친 듯이 열중하여 온 힘을 다해서 마음속으로 '움직이지 말라!'하고  외쳤다. 그러자
백양나무는 금세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니카는 좋아서 큰 소리로 웃어대며 미역을 감
으러 강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 제멘치 두도로프는 테러리스트였으며,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황제의 칙령으로 감형
되어 지금 복역 중에 있었다. 어머니는 그루지아의 에리스토프 공작의 딸이었다.  아직 젊고 미모
의 자유 분방한 여성으로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무엇엔가 열중하고 있었는
데, 그 대상이란 폭동이니 모반이니  하는 과격한 이론이나 소동 따위였으며,  유명한 배우들이나
불행한 낙오자들과 같은 족속들이었다.
  어머니는 니카를 무척 사랑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인노켄치였으나 어머니는 인노체크니 노첸
카니 하는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운 애칭을 수없이 만들어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자기 친정인 치
플리스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를 무엇보다도 놀라게 한 것은  집 앞뜰에 가지를 뻗고
서 있는 나무였다. 이상한 모양의 열대 식물인 이 거목은  코끼리의 귀 같은 잎을 가지고 뜨거운
남국의 하늘로부터 뜰 전체를 감싸주고  있었다. 니카는 그것이 동물이  아니고 식물이라는 것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무서운 이름을 그대로 지닌다는 것은 니카에겐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보스코보
이니코프는 니카의 어머니 니나 갈라치오노브나의 동의를 얻어, 니카의 외가 쪽 성을 쓸 수 있도
록 황제에게 청원할 작정이었다. 침대 밑에 숨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도 그런 마음을 먹었다. '보스코보이니코프가 대체 뭔데 남의 일에 간섭하고 있담?  어디 두고 보
자, 혼을 내주고 말 테니.'
  게다가 나쟈는 또 뭐야! 열 다섯 살이라고  해서 콧대를 치켜들고 날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니!
고것한테도 맛을 좀 보여줘야지! '빌어먹을 것!'하고 그는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내 고
것을 죽여버릴 테다. 보트에 태워 가지고 나가서 물에 빠뜨려버려야지.'
  그리고 어머니도 보라지! 떠나가면서 나와 보스코보이니코프한테는  새빨간 거짓말을 했어. 흥,
카프카스로 간다구? 다음 정거장쯤에서 기차를 바꿔 타고는 북쪽으로, 페테르부르그로 가겠지. 난
이런 시골 구석에서 썩고 있는데, 어머니는 대학생들과 어울려 경찰한테 총질이나 하면서 싸돌아
다니겠지. 하지만 나는 멍청히 있을 줄 알아? 나쟈 고년을 물 속에 처넣고, 학교를 집어치우곤 아
버지가 있는 시베리아로 가서 폭동을 일으킬 테니 두고 봐!
  연못가에는 연꽃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보트가 삐걱거리며 꽃잎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그
것은 마치 반으로 자른 수박 위에 떠 있는 세모꼴의 쐐기처럼 보였다.
  소년과 소녀는 연꽃을 꺾기 시작했다. 고무줄 같은 줄기를 둘이서 함께  잡아당겼다. 그들은 머
리를 서로 맞부딪쳤다. 끌어당기듯이 보트가 기슭으로 끌려갔다. 그곳엔 짧은 줄기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핏줄이 가느다랗게 보이는 달걀 노른자처럼 샛노란  꽃술이 달린 흰 꽃송이가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는 다시 물을 토하며 떠오르곤 했다. 나쟈와  니카는 몸을 맞대고 보트와 함께 옆으로
누이면서 연꽃을 따고 있었다.
  "학교 다니기도 싫어졌어." 니카가 말했다. "이젠 인생을 시작할 때도 되었어. 사회에 나가서 남
들처럼 일해야지."
  "그보다도 난 너한테서 2차 방정식을 배우려고 했는데. 수학 실력이 형편없어. 하마터면 재시험
을 쳐야 할 뻔했어."
  니카는 이 말을 듣자 어떤 모욕감을 느꼈으나 일부러 태연한 체했다.
  "넌 크면 누구와 결혼하겠니?" 하고 물었으나, 거의 동시에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고 뉘우쳤다.
  "그건 장래의 이야기 아냐? 난 그런 거 아직 생각해 본 일도 없어. 아마 난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거야."
  "내가 관심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그런 왜 물었지?"
  "넌 바보야."
  말다툼이 벌어졌다. 니카는 아침에 자기가 여자를 무조건 저주했던 일이 생각나서 기분 나쁘게
굴면 연못에 던져버린다고 을러댔다. "어디 해보라지"하고 나쟈가 도전했다. 니카는 두 손으로 나
쟈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둘이 맞붙어 싸우다가 그만 몸의 중심을 잃고 함께 연못에 풍덩 빠져버
렸다.
  둘 다 헤엄을 칠 줄 알았으나 연꽃 줄기가 손발에 감겼고,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감탕에 발
이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그들은 간신히 기슭으로  기어올랐다. 신발과 호주머니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니카 쪽이 더 맥이 빠진 것 같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나란히 앉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일 지난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일시적인 흥분이 가라앉기가 무섭게 서로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하거나 한바탕 웃어
대거나 하고는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어처구니없어서 말도 못하고 숨을 죽인
채 앉아 있기만 했다. 나쟈는 잔득 화가 나서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니카는 온몸이 뻐근해 왔
다. 마치 몽둥이로 호되게 팔 다리를 얻어맞고 갈비뼈라도 부러진 것같이 온몸이 아팠다.
  한참만에 나쟈가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정신 나갔나봐!" 니카도 비슷한 어조로 대답
했다. "내가 잘못했어."
  마치 그들은 두 대의 살수차처럼 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니카가 구렁이를 본 그
근처에 뱀들이 우글거리는, 먼지투성이의 오르막길을 그들은 걷고 있었다.
  그는 어젯밤과 같은 이상한 흥분이나 아침에 자연을 자기 의사대로  복종시켰던 신비스런 힘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엔 어떤 명령을 내려볼까? 이 세상에서  가장 바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언제 다시 한 번 나쟈와 연못에  빠지는 일이다. 그런 일이 과연 다시 있을  수 있다
면, 그는 어떤 희생이라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딴 세상에서 온 소녀  
    1
일본과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딴 사건들이 생기는 바람에 전쟁은 무대
뒤로 밀려나버렸다. 혁명의 파도가 러시아에  물결쳐 와 차츰 더  높아지면서 이상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아말리아 카를로브나 기샤르는  아들 로쟈와 딸 라라를 데리고  우랄 지방에서
모스크바로 이사해왔다. 그녀는 벨기에인 기사의 미망인이며, 그녀 자신은  러시아에 귀화한 프랑
스인 이었다. 아들은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시켰고, 딸은 여학교에 넣었다. 그런데 딸은 나쟈 콜로
그리보바와 동급생이었다.
  마담 기샤르의 남편이 유산을 남겼으나, 그 유산인  주권이 처음엔 시세가 올랐으나 지금은 내
리막길에 있었다. 재산이 줄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선 뭔가 해야했다. 자그마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개선문 근처에 잇는 레비츠카야 양장점을 샀던 것이다. 가게의 권리나 단골들, 재봉
사와 견습공까지도 레비츠카야의 상속인한테서 모조리 인수받게 되었다.
  변호사 코마롭스키가 적극 권장해서 이것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남편의 친구였으나 지금은 그
녀가 기둥처럼 믿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보듯 러시아의 사업계를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냉혈적이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코마롭스키와  연락을 가지며 모스크바에 올라올 준비
를 갖췄다. 그는 정거장으로 마중을 나와 주었고, 시내 중심 가에서 좀 벗어난 오르제이느이 거리
의 체르노고리예 여관에 방을 미리 예약하고, 그녀와  아이들을 안내했다. 로쟈를 사관학교에, 라
라를 여학교에 입학시키도록 권유한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서슴없이  로쟈한테 농담을 하거나
얼굴이 붉어지도록 라라를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2
그들은 가게 이웃의 자그마한 세 칸짜리 집으로 옮기기 전에 체르노고리예 여관에서  한 달쯤 묵
었다.
  이곳은 모스크바에서도 가장 험악한 곳으로, 거리  전체가 빈민굴과 사창굴로 들어차고 건달패
들이 득실거리는 악의 소굴이었다.
  방이 지저분하고, 빈대가 있고, 가구들이 초라한 것  따위에 아이들은 놀라지도 않았다. 아버지
와 사별하고 여태껏 어머니는 항상  가난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오고 있었다.  로쟈와 라라는 금세
파멸하게 되리라는 말만 들어왔었다. 그들 자신이  거리의 애들과는 다르다는 자각하고는 있었지
만,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처럼 돈 많은 사람 앞에서 기가 죽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다.
  어머니는 이러한 공포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담 기샤르는 나이 서른 다섯 안
팎으로 금발머리에 풍만한 여인이며, 이따금  심장의 발작과 어리석은 행실이  뒤엉켜 걷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몹시 겁이 많아서 남자를 매우 두려워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공포에 질려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체르노고리예 여관에서 기샤르
네 가족은 23호실에 들었고, 24호실에는 여관이 개업한 때부터 첼로 연주자인 트이쉬케비치가 들
어 있었다. 그는 대머리를 가발로 가렸고 곧잘 땀을 흘렸으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남에게 무슨 설
득을 할 때는 기도하듯이 합장한 손을 가슴에 갖다 대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상류 사회의 파티
나 음악당에서 연주하기도 하며, 그럴 때는 으레 고개를 뒤로 젖히고 황홀한 기분에 눈알을 굴리
곤 했다. 그는 집에 있을 때가  드물었고 온종일 볼쇼이 극장이나 음악학교에 가  있었다. 이웃의
기샤르와도 사귀게 되어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아이들이 집에 있을 때 이따금 코마롭스끼가 찾아오게  되면, 마담 기샤르는 고통을 받게 되었
다. 그것을 알고 트이수케비치는 그녀에게 열쇠를  맡기고 자기 방을 쓰도록 했다. 얼마  안 가서
기샤르는 그의 친절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의 방을 노크하고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자기 후원자로부터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3
  트베르스카야 거리 모퉁이 근처에 있는 단층집이 그의 양장점이었다. 그 부근에는 브레스트 철
도와 기관고, 창고, 또 사무원들의 하숙집들이 있었다. 영리한 올랴 제미나 아가씨는 그곳에 있는
아저씨 댁에서 마담 기샤르네 양장점에 다녔다. 아저씨는 화물역의 직원으로 있었다.
  올랴는 재간 있는 견습 양재사였다. 그녀는 양장점의 전 주인한테도 인정을  받았고, 지금도 새
주인의 귀여움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라라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레비츠카야가 주인으로 있을 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피곤한 봉재사들이 밟
아대는 발이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 밑에서, 재봉틀 바퀴는 세차게 돌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직
공들이 테이블 위에 묵묵히 앉아 바느질하고 있었다. 길게 실을  꿴 바늘을 뽑을 때마다 팔이 반
원을 그리며 치켜올려진다. 마룻바닥에는 천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소란스러운 재봉틀  소리나
키릴 모제스토비치의 방울을 굴리는 것 같은 지저귀는 소리 때문에 목청을 돋우어 말을 주고받아
야 했다. 키릴 모제스토비치는 창문 가에  걸어 놓은 새장 속의 카나리아 이름이었다.  이 괴상한
이름을 붙인 사연은 전 주인 양반이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가버려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응접실에서는 아름다운 부인네들이 패션 잡지를 쌓아 놓은 테이블 주위에 모여 서서, 그림에서
본 대로 포즈를 취하며 서 있기도  하고, 낮기도 하고, 몸을 기대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다른 테이블에는 마담 기샤르의 조수이며 재단 주임인 페치소바가 앉
아 있었다. 야위고 뼈만 앙상한 그녀의 늘어진 볼에 여러 개의 사마귀가 달려  있었다. 궐련을 뼈
파이프에 끼워서 누런 이빨 사이에 물고, 코와  입으로 누르스름한 연기를 내뿜으면서 노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객의 치수나 요구 사항, 주소 등을 수첩에 기입하고 있었다.
  마담 기샤르는 양장점을 경영해본 경험은 없었다. 그래서  주인의 위신을 세울 수 있을까 걱정
했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정직한 편이었고,  페치소바도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소란스러운
세상이기 때문에 장래를 생각할 때는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마담 기샤르는 이따금 깊은 절망
에 사로잡히곤 했다.
  코마롭스키는 자주 찾아왔다. 안채로 들어가려고 양장점을 지나가고 있을 때, 가봉하러 온 멋쟁
이 부인들이 깜짝 몰라서 칸막이 뒤로 도망쳐 숨어서는 그의 음탕한 농지거리에 장난기로 응수한
다. 이럴 때 재봉사들은 밉살스럽지만 재미있다는 투로 소곤거린다. "오셨군." "마담의 기둥서방이
야." "물소야." "색마야."
  더욱이 미움을 사고 있는 것은 그의 불독개 잭이었다. 가끔 줄에 매어 데려  오기도 했지만, 개
는 무서운 힘으로 앞에서 당기는 바람에 코마롭스키는 줄을 잡은 장님처럼 두 손을 쭉 펴고 비틀
거리며 끌려 다녔다.
  언젠가 봄에, 잭은 라라의 다리를 물고 양말을 찢은 적이 있었다.
  "그 미친놈의 개새끼를 내가 처치해버려야지." 올랴는 목쉰 소리로 라라의 귀에다 속삭였다.
  "정말 미워 죽겠어. 하지만 네가 어떻게 그놈을 처치하겠다는 거니?"
  "가만, 목소리가 높아요. 어떻게 처치하는지 가르쳐줄까? 너의 어머니 장롱  위에 돌로 만든 부
활절 달걀이 있잖아..."
  "수정과 대리석으로 만든 것 말이지?"
  "그래, 바로 그거야! 좀더 가까이 귀를 갖다 대요. 그것을  돼지고기 기름에 담기는 거야-그 마
귀새끼 같은 수캐 놈이 맛있는  먹이로 알고 꿀꺽 집어삼키면  목구멍이 막혀 죽어버리고 말  거
야!"
  라라는 배를 움켜쥐고 웃어댔다. 그리고 올랴가 부럽게 느껴졌다. 올랴는 가난하게 살면서 제힘
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라는 애들은 남보다 조숙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올랴는 아직도 순
진한 아이였다. 잭에게 그 달걀을 삼키게 하다니-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그런데 왜 나의
운명은 보이는 모든 일들이 이렇게 깊은 슬픔으로만 보일까?'
    4
  '어머니는 그 사람의 말하자면...그 사람은 어머니의  ...더러운 소리야.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
어.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지? 난 어머니의 달이 아닌가.'
  라라는 이제 겨우 만 열 여섯 살이 지났지만 몸매는 벌써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열 여덟
살은 훨씬 더 넘어 보였고,  마음씨가 차분하여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용모도  뛰어나게 아름다웠
다.
  라라와 로쟈는 인생의 길이 탄탄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복한 게으름뱅이와는
달리 실생활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에 대하여 미리 이유를 내걸거나 호기심을 가지는 따위의
여유가 없었다. 천박스러운 것은 여분의 인간들이다.
  라라는 이 세상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순결한 존재였다.
  라라와 로쟈는 사물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자기들이 해온 일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잘 해내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라라는 학교에서 성적이
좋았으며, 그것은 특별히 지식에 대한 욕망이 있어서도 아니고, 다만 장학금을 받기 위한 것 때문
이었다. 공부도 잘했지만, 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양장점 일도 거들어주고 어머니의 심부름도 다녔
다. 그녀는 몸가짐도 우아하고, 날씬한 몸매와 목소리,  잿빛 눈동자와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하
며 잘 어울려보였다.
  6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휴일에는 좀 늦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머리 뒤로
받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게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 한길로 향한 창문이 열려 있었다. 승용  마차가 포석에서 전차길로
옮겨갈 때,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소리고 바뀌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이제 조금만 더 자야지 하
고 생각했다. 거리의 소음이 자장가처럼 잠을 청한다.
  라라는 육체의 두 군데, 왼쪽 어깨 끝과 오른쪽 엄지발가락까지, 잠자리  속에서 자신의 크기와
위치를 재보고 있었다. 그 밖의 모든 것도 크든 작든 그녀 자신이었으며, 그것은  육체의 윤곽 속
에 빈틈없이 자리잡고서 미래를 향해 줄달음치려는 그녀의 영혼이며 내적 존재인 것이다.
  잠이나 자야지-라라는 생각하면서, 지금쯤 카레트 시장의 번화가는 어떨까하고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마차 가게의 깨끗이 닦은 마루에 전시된 대형 마차들, 마차용 램프, 박제곰, 유복한 생활,
거리를 좀더 내려가면 즈나멘스키 부대 연병장에서는 기병들이 훈련을 받고 있겠지-장교가  빠른
걸음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말을 몰고, 병사들이 날 듯이 안장으로 뛰어올라 말을 타고 천천히.
속보로, 구보로, 모둠발로 말을 달린다.  부대 밖에서는 유모나 보모가  데리고 나온 애들이 줄을
지어서 울타리 너머로 구경하느라고 눈이 휘둥그렇다.
  이제 조금 더 내려가면- 하고 라라는 생각한다.- 페트로프카 거리다(정말 뜻밖이야, 라라! 무슨
바람이 불었지!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좀 보여주고 싶어. 바로 근처에 있으니까.).
올리가의 명명일 이었다. 그녀는 카레트에 살고 있는 코마롭스키의 친구의 어린 딸이었다. 어른들
은 댄스와 샴페인 파티를 열어서 명명일 을 축하하고 있었다. 코마롭스키는 어머니를 초대했으나,
어머니는 기분이 개운치 않아서 갈 수가 없었다. "라라를 데리고 가주세요.  당신은 늘 라라를 보
살펴주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약속대로 좀 그  애를 보살펴주어요."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것이
보살펴 주는 건가 - 참 어처구니없어!
  무슨 바보짓인지 몰라!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빙글빙글 춤추며 돌았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
안에는 소설 속의 인물처럼 시간이 흐르는 걸 모른다. 그러나 음악이 멈춘 순간,  마치 찬물을 끼
얹기라도 한 듯이, 또 자기 알몸을 남에게 보이기라도 한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물론 그 사람한
테 나긋나긋하게 굴게 된 까닭은 자기도 이젠 어른이 되었다는 걸 보이고  싶었던 허영심 탓이었
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춤을 잘 추리라고는 꿈엔들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정말 멋진 솜씨
였어, 나의 허리에다 손을 휘감아 당길 때의  그 차분한 손길! 그렇지만 그렇게 나에게  키스하는
것은, 이젠 다시 누구한테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 얼마나 오랫동안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갖다
비벼댔던지 참을 수가 없었어.
  정말, 이젠 그러한 바보짓은 하지  않아야겠다. 마치 수줍은 듯이 보이려고  하거나 킥킥거리고
웃거나, 눈을 내리뜨는 짓일랑 하지 말아야 해. 이러다간 큰일이 나겠어. 여기저기 알 수 없는 무
서운 경계선이 쳐져 있었다. 한 발 잘못 내디디는 날엔 깊은 함정 속으로 빠져들고 말 거야. 댄스
따위를 이제는 생각지도 말아야지, 그것이  악의 화근이 되니까. 단호하게 거절해야지-춤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거나 발을 삐었다고 핑계를 대면서 말이지.
    5
  그해 가을, 모스크바의 철도 노동자들 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모스크바-
카잔 선의 종업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모스크바-브레스트선 종업원들도 합류하기로  돼 있었다.
이미 파업의 결정은 내려졌으나, 파업 개시 날짜에  대해서는 아직도 파업 위원회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철도 종업원들은 파업이 곧 있으리라고 알고 있었다. 무슨 구실만 생긴다면 곧장 시
작하게 될 판국이었다.
  10월 초순이었다. 우중충하게 찌푸린 쌀쌀한 아침이었다. 그날 바로 종업원들이 임금을 타는 날
이었다. 하지만 경리과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윽고 임금 계산서와 벌과금을 공제하기 위
하여 가지고 있던 기록 서류 뭉치를 가지고, 사환이 사무실로 왔다. 출납 계원이  임금 봉투를 내
주기 시작했다. 승무원, 전철수, 철공, 창고, 기관고나  철로를 지나 관리부 건물까지 끝없이 움직
이고 있었다.
  도시의 초겨울 냄새가 풍겨온다. 발길에 짓밟힌 단풍잎과 녹아 내리는 눈, 기관차의 연기 냄새,
역 식당 지하실에서 방금 구워 낸 따끈한 검은 빵  냄새. 흔들고, 감고, 펼치고 하는 신호기에 따
라서 열차가 오가고, 노선을 바꾸고, 연결하고, 분리되곤  한다. 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울리고, 승
무원이나 전철수의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공기를  찢는다. 연기가 사닥다리 모양으로 끝없이
하늘에 치솟아 오른다. 기관차가 뜨거운 증기를 뿜어 올려 차가운 겨울 구름에 화상을 입힌다. 철
도 관구장 푸플르이긴과 역구보선 감독 파벨 페라폰토비치 안치포프는 선로를  따라 이리저리 거
닐고 있었다. 안치포프는 선로의 정비 부품의 품질이  나빠지고 있어서 거의 매일같이 정비 공장
으로 나갔다. 강철은 장력이 부족해서 부담력을 알아보는 테스트에  불합격되었다. 안치포프의 의
견에 따르면 엄동설한에는 금이 가서 터지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관리부에선 그의 의견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 계약으로 부당 이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푸플르이긴은 철도 제복인 금 쇼올을 두른 고급 슈바의 앞섶을 헤치고, 새로 맞춘 사지 양복을
내보이고 있었다. 발밑을 조심하며 노반을  걸으면서 옷깃과 곧은 주름과  멋있는 신발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본다.
  안치포프의 지껄이는 소리 따위는 한쪽 귀로 듣고는  다른 족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푸플르
이긴은 지금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방 회중 시계를 꺼내어 들여다보고 있었다.  되도록 빨리
이야기를 끝맺고 싶었던 것이다.
  "하기야 그렇지, 자네 말도 옳지만," 그는 초조한 듯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교통량이 많은 본선만이 아닌가. 자네네 선로는 뭣에 쓰는 건가, 안  그런가? 대피선과 종단
선이 아닌가. 노면에는 쐐기풀이나 민들레 천지고 말야. 그리고 드나드는 차래야  겨우 이따금 빈
차를 바꾸려는 고물 기관차뿐이란  말이야! 그런데 뭐가 불만이지?  머리가 좀 이상해졌군! 그런
곳에는 레일도 과분하지. 나무토막을 깔아도 아무 일없을 걸세."
  푸플르이긴은 회중 시계를 꺼내 보더니 뚜껑을 살짝  닫고, 노선 가까이는 지나는 도로의 저쪽
을 바라보았다. 마차 하나가  길모퉁이에 나타났다. 푸플리이긴의 마차였다.  아내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마치 유모가 말 안 듣는 아이를 꾸짖듯이  마부는 여자처럼 빽빽 소리를 지르며 철길
바로 옆에다 말을 끌어넣었다. 말은 기차를 두려워했다. 마차 안쪽 구석에  아름다운 부인이 사뿐
히 쿠션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럼, 자네 또 보세." 관구장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레일보다 더 중대한 일이 있다 고나  하듯
이 부부는 마차를 달리며 가버렸다.
    6
  그로부터 서너 시간 후 황혼이 깃들  무렵, 철길에서 좀 떨어진 들판에, 여태껏  아무도 없었던
곳에 불쑥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지면에서 솟아나더니 연신 뒤돌아보며  재빠른 걸음으로 사라져버
렸다. 그들은 안치포프와 치베르진이었다.
  "좀더 빨리 걷게." 치베르진이 말했다. "난  경찰에 붙잡히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야.  땅굴
속에서 덜덜 떨고 있는 겁쟁이들이 회의를 끝내고 나서 우리를 따라오는 것이 싫어서 그래. 놈들
의 상판때기도 보기 싫단 말이야. 그렇게 꾸물거리기만 하다니, 무슨 놈의 위원회인지 알 수가 없
어. 불장난을 시작해 놓고는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빼려는 수작이 아니야! 자네도 또 그래, 녀석들
의 편을 들다니."
  "마누라가 티푸스에 걸렸어. 병원에 데려가야 해.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네."
  "놈들은 오늘 임금을 지불한다고 했어. 난 사무실에 들러 보겠네. 만일 오늘 임금 지불이 안 될
경우, 난 자네들과는 별도로 행동하겠네. 나 자신이 결판을 내고야 말 테야. 우물쭈물할 것 없이."
  "그래 어떻게 결판을 낸다는 거지?"
  "일은 잘 되는 거지. 기관실로 내려가 지적을 울려대는 거야."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서 제각기 다름 방향으로 서류의 발길을 옮겼다.
  치베르진은 시내 쪽으로 철길을 따라 갔다. 사무실에서 임금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들과
만났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었다. 보건대, 역의  종업원 거의 전부가 임금을 받은  것 같았다.
치베르진은 보기엔 역 지역은 거의 지불이 되어 있었다.
  어둠이 짙었다. 사무실에 불이 켜 있어도, 광장에는 한가한 종업원들이 모여 있었다. 광장 입구
에 푸플리이긴의 마차가 서 있었다. 아침부터 몸도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자세로 푸플르이긴의 부
인이 안에 앉아 있었다. 봉급을 받으러 간 남편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느닷없이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부는 가죽 포장을 씌우려고 자리에서 내려와, 마차 뒤
쪽에 한 발을 얹고 단단한 지주를 잡아당겼다. 그 동안에 푸플르이긴 부인은 사무실 등불의 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진눈깨비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도 않고 꿈꾸는
듯한 눈동자는 모여 선 노동자들의 머리 너머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진눈깨비나 아지랑이처럼
종업원들의 존재도 그 눈길을 막을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치베르진은 우연히 그녀의 표정을 보고 구역질 같은 걸 느꼈다. 그는 부인에게 인사도 하지 않
고 지나쳤다. 사무소에서 그녀의 남편과 마주치게 될까봐 임금은 후에 받기로  했다. 광장을 옆으
로 지나 작업장이나 전차대의 검은 그림자가 깔려 있는 어둠 쪽으로 선로가 뻗어 있었다.
  "치베르진! 쿠프리크!" 어둠 속에서 두세 명의 목소리가  부르고 있었다. 작업장 앞에는 사람들
이 모여 있었다. 안에서는 고함 소리와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렸다. "빨리  들어가 저 애를 구해줘
요." 군중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처럼 직공장 포트르 후들레예프 노인이 견습공인 유수프카를 때리고 있었다.
  후들레예프는 본래 견습공을 괴롭히거나 술에 취해서  싸움질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젊었을 때
는 늠름한 일꾼으로서 모스크바 교외의 공업 지대의 상인이나 승려의  딸들한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무렵 교구의 승려원 학교를 졸업한 마르파는,  후들레예프의 구혼을 물
리치고 치베르진의 아버지인 기관사 사베리와 결혼하게 되었다. 치베르진의 아버지는 후들레예프
와 친한 동료였던 것이다.
  사베리의 무서운 최후(1888년의 유명한 철도  충돌 사고로 타 죽었음)로보터  5년쯤 지났을 때
후들레예프가 다시 구혼했지만, 마르파는 이번에도 또 거절했다. 그래서  후들레예프는 술과 싸움
에 몸을 망치고, 자기의 온갖 불행은 이 세상 탓이고 이 세상을 복수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유수프카는 치베르진이 살고 있
는 셋집 구역의 수위로 있는 타타르인 기마제뜨진의 아들이었다. 치베르진이 그 소년을 보호해주
었기 때문에, 그것이 더한층 후들레예프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 줄칼을 잡은 꼴이 뭐야, 이 망할 놈의 새끼야!" 후들레예프는 유수프카의 머리털을 쥐어 잡
고 목덜미를 주먹으로 쥐어박으며 호통을 쳤다. "그래 주형 하나 제대로 떼어내지 못하는 이놈아!
일을 망쳐 놓아도 분수가 있지. 이 죽일 놈의 타타르 사팔뜨기 같은 놈!"
  "이젠 다시 안 그래요, 아저씨. 다신 안 그래요! 아, 아파요!"
  "한 번 가르쳐 주면 그대로 해야지, 이건 백 번 가르쳐도 매한가지야! 굴대를 먼저 조정하고 잭
을 죄어야 하는데, 네놈은 언제나 제멋대로야. 하마터면 스핀돌을 망가뜨릴 뻔했잖아, 개새끼야!"
  "저는 스핀돌을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정말 손도 대지 않았어요."
  "왜 어린애를 때리는 거요?" 치베르진은 사람들 사이를 밀치고 들어가면서 말했다.
  "쓸데없는 참견은 말아!" 후들레예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무엇 때문에 그 앨 때리느냐 말요?"
  "어서 석 꺼지지 못해, 이 주둥이만 까진 사회주의자! 이놈은 죽여 버려도 시원치 않아. 하마터
면 내 스핀돌을 망가뜨릴 뻔했단 말이야. 여태 살려 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 난 이 녀석의 귀를
비틀어주고 머리끄덩이를 좀 잡아당긴 것뿐 이야."
  "그래, 모가지를 뽑아버려야 시원하단 말이오? 후들레예프 씨, 부끄럽지도 않소?  나이 많은 직
공장이 이게 뭐요? 머리는 허옇게 돼 가지고 아직 철이 덜 들었군."
  "병신이 되기 전에 썩 꺼져버려! 네가 날 설교할 참이냐, 이 개 아들놈 새끼야. 넌 침목 위에서
만든 놈이야. 그것도 네 애비가 보고  있는 앞에서 말이다. 네 어미를  잘 알겠지. 아무 놈하고도
붙어먹는 그 털이 빠진 암코양이 말이야!"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둘 다 묵직한 공구며  철재가 뒹굴고 있는 선반
대에서 닥치는 대로 집어들었다. 사람들이 재빨리  그들을 갈라놓지 않았다면 살인극이 벌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후들레예프와 치베르진은 목을 잔뜩 뽑아내고서, 창백해진 얼굴에 눈은 벌겋게 충
혈 되어서 이마를 맞댈 듯이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찌나 화가 치밀었던지 말도  못했다. 두 사
람 다 뒤에서 팔을 뒤틀면서 매달려 있는 동료들을 끌어당겼다. 후크와  단추가 날아가고, 윗도리
와 셔츠가 벗겨지면서 어깻죽지가 드러났다. 한참 동안이나 소란이 계속되었다.
  "저 끌! 끌을 빼앗지 않으면 큰일나겠어. 얌전히 해요, 후들레예프 씨. 안 그러면  팔을 꺾어 버
릴 테요! 이거 안 되겠어! 따로 떼어서 둘 다 가둬버려야겠어. 그럼 끝장이 날 테니까."
  치베르진은 갑자기 안간힘을 쓰더니 달라붙은 사람들을  뿌리쳐버리고 문 쪽으로 달려갔다. 사
람들이 뒤쫓았으나 그가 마음을 돌렸다는 것을 알자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는 문을 쾅 닫고는 뒤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나갔다. 어둡고 눅눅한 가을밤이 그를 삼켜버렸다.
  "나는 그들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놈들은 칼을 들고  덤벼드는군." 그는 중얼거리며 방향도 의
식하지 못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허위와 기만에 찬 이 비열한 세상에는 살찐 귀부인이 거드름부리며 노동하는 사람의 존재를 전
혀 무시하는가 하면, 이러한 욕된 희생자가 부질없이 동료를 학대하는 데서  쾌락을 찾기도 한다.
그에게는 이러한 세상이 무엇보다도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 모든 일이, 지금 뜨겁게 달아오른 자기의 머리 속같이 합리적이고 조화된 시기가 빨리 오기
를 재촉하듯이. 지난 며칠 동안의 모든 노력, 철도 노동자의 움직임,  집회에서의 연설, 파업의 결
정(아직도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중지된 것도 아니다)등은 앞에 가로놓인  위대한 길로 향
한 하나하나의 단계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너무나 흥분해서 숨돌릴 겨를도  없이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고 싶었다. 그는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으나, 그의 발은 목적 장소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치베르진이 안치포프와 함께 지하의 비밀 집회에서 나온 후에 파업위원회는  그날 밤부터 파업
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치베르진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위원회
가 그렇게 빨리 결단을 내리리라고 그는 생각지 못했다.
  그가 기관차수리장의 사이렌을 울렸을 무렵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역이나  하치장에서 시내
쪽으로 떼지어 나오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그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듯이 날카롭게
밤공기를 찢으며 울려 퍼졌으나, 얼마 후 낮은 소리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치베르진의 신호
에 따라서 연장을 던져버린 기관실의 사람들도 군중 속으로 합류되었다.
  그날 밤의 철도선의 작업이며 교통을 정지하게 만든 것이 바로 자기였다는 것을  몇 년 후까지
도 생각하고 있었다. 꽤 오랜 후에  파업 선동의 죄목이 아니라, 파업에 연루된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진상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황급히 뛰어나오며 물었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건가? 무슨 사이렌 소리지?"  "귀머거
린가?" 어둠 속에서 묻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재 경보란  말야. 우리더러 불을 끄라는 거
겠지." "아니, 어디서 불이 났는데?" "하여튼 불이 나지 않았으면 사이렌은 뭣하러 울리나."
  문이 콰다당 열리며 또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화재는  무슨 화재! 촌놈! 바보 같은 소리! 파업
이란 말이야, 알았어! 다들 일을 집어치우라고, 일을 시키려면 다른 바보  녀석들이나 찾아보라지.
이것봐, 다들 집에 돌아가자구."
  군중에 합류되어 수가 차츰 더해갔다. 철도 노동자는 파업에 들어갔다.
    7
  치베르진은 이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수염은 더부룩하게 자라고, 수면 부족으로 지쳐서 곤죽이
되었고, 뼛속까지 얼어들었다. 간밤에는 철보다 이르게 서리가 내렸는데, 치베르진은 아직 겨울옷
을 입고 있지 않았다. 대문에서 수위 기마제트진이 그를 맞았다.
  "고맙습니다, 치베르진 나으리." 그는 여러 번 되풀이했다.
  "당신이 유수프카를 구해주셨다지요.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나으리는 뭐요? 그따위 말투는 집어치워요.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구려, 난 추워서 견
딜 수가 없어요."
  "뭐가 춥습니까. 이내 몸이 녹을 겁니다. 나와 당신의 어머니는 어제 화물역에서 장작을 날라다
헛간에 하나 가득 쌓아 놓았답니다. 모두 다 잘 마른 자작나무 장작이죠."
  "그거 잘했군. 또 할 얘기가 없다면, 몸이 꽁꽁 얼었다니까."
  "오늘밤은 집에 있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숨어 있어야 해요. 경찰에서  와서 누가 오지 않았
느냐 묻더군요. '아무도 온 사람이 없어요. 나의 교대번이 왔구요, 철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왔지
요. 하지만 낯선 사람이라곤 아무도 보지 못했소.' 이렇게 난 대답했지요."
  치베르진은 독신이었고, 어머니와 장가간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의 셋집은 성삼위일체
교회의 소유였다. 이 셋집에는 몇 사람의 승려가 살았고, 고기 장수와 채소 장수  두 사람 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모스크바-브레이트 철도의 하급 종업원들이었다.
집은 석조 건물이었으나 지저분한 들이 사면을  둘러싸고 있었다. 복도에서 미끄럽고 진흙투성이
의 나무 층계가 이층으로 나 있었다. 거기서는 고양이 냄새와 절인 양배추 냄새가  풍겨 왔다. 층
계참에는 변소와 자물쇠를 잠근 광이 위태롭게 달라붙어 있었다.
  치베르진의 동생은 전쟁에 병사로  징집되어 출정했었다. 그는  바팡코우에서 부상해서 지금은
크라스노야르스크 육군 병원에서 거의 완쾌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아내와 두 딸이 그를 집으로
데려오려고 크라스노야르스크로 떠났다. 치베르진네는 대대로 철도 종업원이었고, 여행을 즐겼다.
무임 승차권을 가지고 전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지금 집안은 조용하고 텅  비게 되었다. 치베르진
과 어머니밖엔 없었다.
  치베르진네는 이층에 살고 있었다. 바깥 층계참에는  물장수가 정기적으로 물을 길어주는 물통
이 놓여 있었다. 뚜껑이 반쯤 열려 있고,  양은 컵이 얼어붙은 물통 위에 놓여  있었다. '프로프가
왔다갔군.' 치베르진이 히죽이 웃으며 생각했다. '그 사람이 물을 꿀꺽꿀꺽 마실 때는 뱃속에 불이
라도 난 모양이지.' 프로프 아파나시예비치  소콜로프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이었으며,
어머니의 친척이었다.
  치베르진은 컵을 얼음에서 떼어 물통 위에 옮기고 문의 초인종 줄을 당겼다. 훈훈한 공기가 구
수한 냄새를 싣고 훅 풍겨왔다.
  "아주 따뜻한 것 같군요, 어머니. 불을 많이 땠네요."
  어머니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상냥하게
떼어놓았다.
  "무슨 일이든 결단성이 있어야 해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모스크바에서 바르샤바까지의 우리
철도가 멎어 버렸어요."
  "알고 있어. 그래서 우는 게 아니냐. 널 찾고 있었어. 피신해야겠다."
  "어머니의 절친한 남자 친구 후들레예프 영감한테  하마터면 머리통이 박살날 뻔했어요!" 그는
어머니를 웃기려고 꺼낸 말이었으나, 어머니는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분을 놀려대면 못써요. 동정해 드려야 해."
  "안치포프가 체포되었어요. 밤중에 들이닥쳐서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아침에 끌고 갔대요. 그것
보다도 그의 처 다리아는 티푸스에 걸려서 병원에 있구요.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파샤는 귀가 들
리지 않는 고모와 함께 집에 남았을 뿐이예요. 그런데 집에서  쫓겨날 것 같으니 그 애를 우리가
맡아야겠어요. 한데 프로프는 왜 왔지요?"
  "어떻게 그걸 알았지?"
  "물통의 뚜껑이 열려 있고 컵이  있어서 틀림없이 밑빠진 프로프가 물을  들이켰구나 생각했지
요."
  "잘도 알아맞히는구나. 그래 프로프가 다녀갔다.  장작을 꾸러와서, 좀 주었다. 아이,  나 좀 봐.
바보같이 딴소리만 지껄이고 있었구나! 프로프가 전하던 소식을 깜빡 잊고 있었군. 얘야! 황제 폐
하께서 칙서를 서명하셨다는 구나. 이제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하더라. 누구나 다 사람 대접을 받
게 되고, 농민들은 토지를 받고, 우리 모두가 귀족과 대등하게 된다는  거야. 벌써 서명은 끝나고,
이제 공포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더라. 종무원에서 교회의 기도에 추가하도록 뭔가 보내왔다지 않
겠니. 감사의 기도문인지, 폐하를 위한 기도문인지는 들었어도 잊었지만."
    8
  파샤 안치포프는 아버지가 파업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구속된 데다가  어머니가 병원에 있었으
므로 치베르진네 집에 있게 되었다. 그는 아마빛  머리의 가운데에 가르마를 탄 용모가 단정하고
깔끔한 소년이었다. 머리는 언제나 단정히 빗질을 하고  교복이나 혁대에 달린 학교 휘장을 노상
바로잡곤 했다. 유머가 많고 또 대단히 관찰력이 예민하여, 보고 듣는 것은 무엇이건 곧잘 흉내를
내 보이기도 하고 잘 웃기곤 했다.
  10월 17일에 칙서가 공포되고 나서 얼마 후, 일대 시위 행진이 계획되었다. 트베르 문을 출발하
여 모스크바의 반대쪽 끝의 칼루즈스카야 거리까지 행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
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속담이 들어맞은 격이 되었다.  몇 개의 혁명 단체가 공동으로 계획했었지
만 의견 충돌이 생겼기 때문에 도중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정했던 날 아침에 군중
이 모여든 것을 보고는 황급히 대표를 파견하여 시위 행진을 지휘하도록 했던 것이다.
  치베르진이 입에 신물이 나도록 만류했지만 어머니는  시위 행진에 참가했다. 언제나 명랑하고
친절한 파샤도 함께 따라 나섰다.
  11월 초순의 조용하고 쌀쌀한 날이었다. 회색빛 하늘에서 이따금 눈송이가 천천히 날아 내려와
서는 잿빛 먼지같이 길에 깔렸다.
  거리를 다라 물밀 듯이 군중이 쏟아져  나갔다. 얼굴, 얼굴, 얼굴들의 소용돌이.  겨울 누비옷과
양털 가죽 모자. 남녀 대학생과 노인들, 아이들, 제복을 입은 노동자들,  장화를 신고 가죽 윗도리
를 입은 전차 운전사들과 전화국 종업원들, 남녀 중학생들.
  처음 얼마 동안은 <바르샤반카>라든지 <희생되어 쓰러진 사람>,<마르세예어즈> 등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행렬 선두에서 뒷걸음으로 걸으면서 지휘봉 대신 모자를 뒤흔들며 노래를 지휘하
고 있던 사나이가 갑자기 앞쪽을 돌아보더니 옆의 간부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는 이내 흐
트러지며 멎어버렸다. 얼어붙은 길 위에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카자크 기병들이 전방에서 시위하는 행렬을 대기하고 있다는 정보가 시위  동정자에 의하여 지
휘자에게 급히 전달되었다. 가까운 데 있는 약국으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상관할 것 없어." 간부들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냉철해야 돼. 이내 가까운  공공
건물을 점거하고, 군중에게 위험이 닥쳐왔다는 걸 말한 후에 해산시키기로 하자."
  그럼 적당한 건물이 어느 것인지, 입씨름이 시작되었다. 점원협회 건물이 적당하다는 사람이 있
는가 하며, 기술전문학교를 내세우는 사람도 있었고, 해외통신학교가 좋다는 사람도 있었다.
  의견의 일치를 보기도 전에 어느 중학교 건물의  모퉁이에 다다랐다. 여기가 거론되던 어느 건
물보다 적당한 피난처가 될 것 같았다.
  학교 앞에 이르자 간부들이 대오에서 벗어나  현관 앞 반원형 층계에 올라가서  행렬의 선두를
향해 정지하라고 손짓했다. 여러 개의  출입문이 일제히 열리며 사람들은  현관 홀로 밀려들어가
층계를 올라갔다.
  "강당으로, 강당으로!" 뒤에서 몇  사람이 소리쳤으나, 군중은  그냥 안으로 몰려들어 제멋대로
복도와 교실로 흩어져 들어갔다.
  간부들은 사람들을 간신히 강당으로 모아서 의자에 앉힌 후, 카자크 기병대가 전방에서 대기하
고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알리고자 했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행진을 중단하고 큰
건물로 들어온 까닭을 그들은 즉흥적으로 집회를 갖기  위한 것으로 판단했다. 사실 즉각 집회가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행진하며 노래를 부르는 데 지친 사람들은  잠시 휴식을 하면서, 누가 자기를 대신하
여 떠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연단에 나선 사람들은 한결같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혹시 사소한 의견의 차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군중은 앉아서 담배나 피워 물고 대수럽
지 않게 넘겼다.
  결국 제일 서투른 연사가 가장 열광적인 환호를  받게 되었다. 군중은 연사의 말을 이해하려고
도 하지 않고, 한마디 한마디에 무턱대고 환성을 지르곤 했다. 이렇게 방해를 받고도 그것을 탓하
려는 연사는 하나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수치를 알라!"는 구호를 외쳐대고, 또 항의 메시지를 기
초하기도 했다. 마침내 연사들의 지루한 목소리에 싫증이  난 군중은 일제히 자리를 막차고 일어
나, 생각할 틈도 없이 강당에서 뛰쳐나와 층계를 내려가서 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다시 행진이 시
작되었다.
  옥내에서 집회가 있었던 사이에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한길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차츰 눈은
더 많이 내렸다.
  기병대가 달려들었을 때 시위 행렬 뒤쪽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다. 군중은 일
제히 "우라(만세)!"를 거듭 외치며 앞에서부터 물결처럼 뒤로 퍼져왔다. "사람 살려!" "이 살인자!"
하는 몇 사람의 외치 소리가 뒤섞여 들러왔다. 이러한 찰나에, 그 고함 소리의  파도와 같이 군중
의 대오가 양편으로 싹 갈라지면서 생긴 좁다란 통로를 따라 말머리와 말갈기, 사벨을 치켜든 기
병들이 쏜살같이 내달았다.
  일개 소대의 반쯤 되는 기병이 군중 사이를 뚫고 지나  방향을 바꾸어 대형을 갖추자, 다시 행
렬의 뒤쪽을 갈라 들어왔다. 마침내 살육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 거리는 거의 텅 비어  버렸다. 사람들은 골목길로 도망쳐 들어갔다. 눈발이  좀 뜸해졌
다. 조용한 저녁거리는 마치 한 폭의 묵화와도 같았다. 이제 지붕 너머로 기울어  가는 석양이 건
물 모퉁이에서 손가락 하나를 길게 뻗어서, 기병의 모자에 달린 빨간 깃털과, 땅바닥에 뒹굴어 팔
락이는 붉은 깃발과, 눈 위에 불그스레한 피의 둥글고 긴 자국들. 길 위에  붉은 것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머리통이 깨진 사나이 하나가 신음 소리를 내며 한 길가를 기어가고 있었다. 거리 끝까지 추격해
갔던 몇 명의 기병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머릿수건이 뒤로 벗
겨져 내려간 치베르진의 어머니가 말발굽에 채일 뻔하면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큰 소리로 "파샤!
파샤!"하고 거리를 우왕좌왕하면서 부르고 있었다.
  파샤는 줄곧 어머니와 함께 있었으며 집회에서  맨 나중에 연설한 연사의 흉내를  내어 그녀를
웃기기까지 했는데, 기병대가 달려드는 속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췄던 것이다.
  기병의 채찍이 그녀의 잔등을 후려쳤다. 다행히 두터운  솜옷을 입고 있어서 아픈 줄은 몰랐으
나, 그녀는 달려가는 기병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자기와 같은 노파에게, 그것도
한길가에서 채찍에 얻어맞은 것이 분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거리 양쪽을 두리번거리더니, 다행히도 길 건너 인도에 있는 소년의
모습을 발견했다. 소년은 식료품 가게와 석조 건물 현관 사이의 우묵한 곳에 서  있었다. 기병 한
사람이 인도에 말을 몰고 올라와 말 궁둥이와 옆구리로 사람들을 쫓아서 그곳에 몰리게 되었다.
  사람들이 겁에 질려 허둥거리는 꼴이 재미있다는 듯이  그 기병은 승마 솜씨를 보이고 있었다.
뒷걸음질로 말을 사람들 사이로 몰아넣고 뒷발로 서게 하여, 마치 서커스의 곡예 모양 천천히 공
중에 말을 서게 했다. 그러는데 동료들이 되돌아온  것을 보고는 재빨리 방향을 바꾸더니 두서너
걸음으로 대오에 끼여들었다.
  모퉁이에 몰려 있던 군중들이 흩어져갔다. 겁에 질려 꼼짝 못하고 서 있던 파샤가 노파 곁으로
달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녀는 쉴새없이 욕설을 내뱉았다. "망할 놈의 살인자들  같으니! 폐하께서 자
유를 주셔서 백성들은 기뻐하고 있는데, 그놈들은 그게 못마땅한 거야. 모든 걸 다시 뒤엎어 버리
고 싶어서 저렇게 날뛰는 거야."
  노파는 기병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통틀어 저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한테도 화를 내
고 있었다. 이렇게 화가 날 때는, 최근의 모든 소동이 쿠프린카와 같은 지지리 못났으면서도 똑똑
한 체하는 녀석들 탓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못난 녀석들은 대체 무슨 짓을 한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공연히 입만 까졌다니까! 파
샤야, 아까 그 연사의 흉내나 좀 내 보려무나. 자, 어서. 어쩌면 그렇게 똑같니! 정말 잘해!"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녀는 아들한테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말 탄 고수머리 녀석이 자기
와 같은 늙은이의 궁둥이에다 채찍질을 하다니, 세상에 그런 법도 있느냐고.
  "하지만 어머니, 나한테 그러면 어떡해요! 내가 뭐 기병대장이나 헌병대장  이라도 된다는 건가
요?"
    9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는 창가에 서서 도망쳐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시위 군중
이었다고 알게 되자, 한참 동안 멀리 바라보더니 그 속에 혹시 유라나 또 아는 사람이 끼여 있지
나 않을까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유라나 그 애의 친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두도르
프의 아들 모습이 한 번 눈에 띄었을 분이다. 요 얼마 전에 왼쪽 어깨에서 총알을 뽑아냈는데, 이
제 또 저런 쓸데없는 데를 쏘다니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그해 가을에 페테르부르그에서 이곳으로 왔었다. 모스크바에는 자기 집이 없었으나
여관에서 살기도 싫어서, 먼 친척인 스벤치츠키 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2층  구석의 서재 방
을 빌려쓰고 있었다.
  스벤치츠키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으며, 고인이 된  양친이 예전에 돌고루끼 공작한테서 세를
얻었던 2층집이 너무 넓을 지경이었다. 그것은 돌고루끼 가문의 소유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
러 가지 양식의 가옥들 중의 하나였다. 돌고루끼의  소유지는 좁은 골목길로 둘러싸인 세모진 땅
이었는데, 옛날부터 무치노이소도시로 불렸으며 거기에는 안뜰 셋과 정원 하나가 딸려 있었다.
  서재에는 창문이 넷이나 있었으나 방안은 어둠침침했다. 책과 서류들, 융단과 판화 따위가 어수
선하게 놓여 있었다. 서재 쪽에 반원형 발코니가 달려  있었고 발코니의 2중 유리문은 겨울에 대
비하여 폐쇄되어 있었다.
  발코니의 유리문과 서재의 두 군데 창문에서  내려다보이는 골목길은 썰매자국이 있었고, 구부
정하게 늘어선 작은 집들과 울타리를 따라 멀리 저쪽으로 뻗어 있었다.
  정원으로부터 연한 보랏빛이 방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허옇게 서리가 덮인 나무와 녹아
내리는 촛물 모양으로 축 늘어진 나뭇가지가  서재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듯이 방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오솔길에 서서 페테르부르그에서 보낸  지난겨울을 회상하고 있었다. 가폰, 고리끼,
비떼, 그리고 그가 상면했던 현대 작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구상중인 책을 쓰려고 그 북새
통을 피해서 이 고도로 평온과 정적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여자전문학교와 종교철학협회, 적십자사와 파업위원회  기금 등을 위하여 날마다  강연을
해야 했지 때문에 차분히 앉아서 생각할 여유라곤 전혀 없었다.  마치 작은 난을 피하기 위해 큰
난중으로 뛰어든 격이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스위스의 외진 고장 같은 곳으로 가서 호수
와 산, 하늘이 맑은 대기의 고요 속에 파묻히는 것이다.
  니콜라이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누구를 방문하든지 아니면  그냥 거리를 산책하기 위하여 집을
나서고 싶었다. 그런데 톨스토이  주의자인 브이볼로치노프가 무슨  용건이 있어서 방문하겠다던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문득 조카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니콜라이는 볼가강 연안 벽지에서 페테르부르그로 옮겨갈 때, 베제냐핀, 오스트로므이슐렌스키,
셀랴빈, 미하엘리스, 스벤치츠키, 그로메코 등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는 모스크바에 유라를 데
려왔던 것이다. 처음엔 주책없는 떠버리 노인이며, 친척들간에도 폐지까라고 불리던 오스트로므이
슐렌스키에게 유라를 맡겼었다. 노인은 자기가 돌봐주던 모쨔라는 양녀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어
서, 그런 죄 많은 생활을 자기 나름으로 구질서의 파괴자이며 진보적  사상가로 자처하고 있었다.
게다가 친척들의 신의를 저버리고 유라의 양육비로 위탁한 돈을 가로채 써버리기까지 했었다. 그
래서 유라는 그로메코 교수 댁으로 옮겨 지금은 거기서 살고 있었다.
  그로메코 댁의 분위기는 유라를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유라와 유라의 친한 동급생 미샤 고르돈, 그리고 그로메코  교수의 딸 토냐. '그 애들은 재미있
는 3인조'라고 니콜라이는 생각했다. 셋이 다 <사랑의 의미>나  <크로이체르 소나타> 따위의 책
을 탐독했고, 광적으로 순결을 부르짖고 있었다. 미성년의 한때에 순결을 주장하는  것도 좋은 일
이긴 하지만 너무나 도가 지나쳤다.
  참으로 순진하면서도 괴상한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관능의 세계를 몹시 멸시하여 '천박'하다는
딱지를 붙이고, 지루하도록 이런 표현을 남발하곤 했다. 본능도 호색 문학도  마음도 육체에 관계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천박'하다고 규정했다. 얼마나 서투른 표현인가! 그리하여 이  말을 입밖에
낼 때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이었다.
  '내가 모스크바에 있었더라면'하고 니콜라이는 생각했다. '적당한 선에서 머무르게 할 수도 있었
을 텐데, 순수한 것도 좋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가 아닌가...'
  "오오, 브이볼로치노프 씨, 어서 오시오!" 니콜라이는 손님을 맞았다.
    10
  회색 루바쉬까를 널찍한 혁대로 졸라맨 뚱뚱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포제 장화를 신고 있었으며
바지의 무릎 부분이 부풀어 있었다. 그는 세상사에는 초연한 호인다운 인상을  풍겼다. 검고 널찍
한 끈이 달린 조그만 코안경이 코위에 꼴사납게 놓여 있었다.
  현관에서 외투는 벗었으나 목도리가 그냥 목에 걸린 채 방바닥에 질질 끌리고 또 둥근 펠트 모
자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그러한 것들이 방해가 되어 그는  악수를 나눌 수도 또 인사말조차 제
대로 건네지 못했다.
  "으음..."하고는 유심히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데나 놓아요." 니콜라이는 브이볼로치노프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었으나.  안식을 모르는
천재의 사상이 그 사람에게는 형편없이 자질구레한 것으로 변질되어 태평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
었다. 어떤 학교에서 열리는 정치범  구제 집회의 연사로 나와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니클라이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 학교에서는 벌써 연설을 했는데요."
  "정치범 구제를 위해서였나요?"
  "그렇지요."
  "한 번 더 해 주시오."
  니콜라이는 처음엔 망설였으나 결국은 승낙하고 말았다.
  용건은 그것으로 끝났다. 니콜라이는 손님을 굳이 있도록 만류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내 돌아가
도 무방했으나, 빨리 돌아가는 것이 멋쩍게 생각되어, 무슨 흥미 있고 자연스러운 화제로 잠시 얘
기나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데 화제는 오히려 어색하고 불쾌하게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당신은 퇴폐주의가 되었군요? 신비주의에 흘러버리게 되었단 말이지요?"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이봐요, 그건 안 되는 일이야. 우리가 젬스트보를 기억하지요?"
  "기억하고말구. 함께 선거 운동을 하지 않았소?"
  "그리고 우리는 농촌학교나 사범학교를 위해 함께 일했지 않소. 꽤 좋은 일이었어. 생각나오?"
  "물론이지. 열렬한 싸움이었지."
  "그 후 당신은 공중 위생이라든지 사회 복지에 관심을 가졌지요?"
  "그렇지, 얼마 동안은요."
  "흠, 그런데 지금은 폰이나 님프라든지 고대 그리스의  청년 시민이니,<태양처럼 되자> 따위가
인텔리 냄새를 풍겨대고 있으니,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당신같이 유머를 알고 민중을 아는
지적인 인간이 그런 소리를 하다니... 제발, 그만 해둡시다. 혹시 내가 당신의 무슨 비밀이나 건드
리지 않았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우린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요? 나의 사상도
모르면서."
  "지금 러시아가 필요한 것은 폰이나 님프가 아니라 학교와 병원이오."
  "그렇지 않다고 하지는 않았소."
  "농민은 헐벗고 굶주려 있고..."
  이렇게 대화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니콜라이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도, 상징파의 일부 작가에게 끌렸던 까닭을 설명하려 했다. 이윽고 톨스토이  사상에 화제를 돌렸
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나도 동감이지만, 인간은  미에 헌신하면 할수록 선에서 멀어진다고 톨스
토이는 말하고 있었어."
  "당신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지요? 미로써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이를테면 도스토
예프스키나 로자노프, 신 비극 따위로 말이죠?"
  "잠깐만. 내 설명부터 들어요. 난 이렇게 생각해요. 이를테면 감옥도 좋고, 내세의 응보도 좋고,
어떤 방법에 의해서건 인간 내부에 잠자고 있는 수성을 억제할 방도가 있다면, 인간성의 최고 상
징이 자기 희생적인 전도자가 아니라. 서커스의 채찍을 휘두르는 사자의 조련사가  될 것이오. 그
러나 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을 야수보다  높은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몽둥이가  아니라 마음속의
음악이오. 무엇으로도 물리칠 수 없는 진리의 힘, 본보기의 매력이오.
  복음서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도덕적인  가르침과 계율이라고 사람들은 언제나 생각해왔소.
그러나 나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일상 생활 속에서 비유를 말했다는 사실, 즉 날마
다 쓰고 있는 현실적이 말로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사라질지라도 인간들끼리의 영혼의 교감은 불멸의 것이며, 생명의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니기 때문
에 생명의 모든 것은 상징적이라 말할 수 있어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소리로군. 그런 건 책으로나 써내는 것이 좋겠소."
  겨우 브이볼로치노프가 돌아가 버렸다. 니콜라이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아무런 효과도 반응도
없는 어리석은 자에게 자기 가슴속에 깊이 간직해 온 사상의 일부를 털어놓은 데 대한 분노가 치
밀어 올라왔다. 이따금 있는 일이지만, 그의 분노는 이윽고  대상을 바꾸었다. 그는 마치 자기 습
관대로 브이볼로치노프에 대한 것은 말끔히 잊어버렸다. 그는 다른 일을 상기해 냈다.
  니콜라이는 일기를 쓰고 있지는 않았으나. 1년에 한두 번은 각별히 머리에 떠오른 사상을 두터
운 노트에 써놓곤 했다. 지금 그는 노트를 꺼내 놓고 읽기 쉬운 큼직한 글씨로 쓰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슈레진게르라는 경망스러운 여자 때문에  온종일 기분이 우울하다. 점심때까지 붙잡
고 앉아서 무려 두시간 동안이나 잠꼬대 같은 소리를 낭독하는 바람에 나중엔  짜증이 날 지경이
었다. A하는 작곡가의 <천지 개벽>교향곡을 위해 작사를 한 상징파  시인 B의 운문인데, 유성의
정령이니, 사원소의 못소리니 하는 따위의 헛소리의 나열이었다. 참고 간신히 듣고 있었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그만둬 달라고 애원하게 됐다.
설사 <파우스트> 속에 그런 말들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을 수  없도록 부자연스러운 이
유를 나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전체가  무리하게 꾸며낸 표현이어서 아무도 흥미를 느끼
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인이  우주의 수수께끼에 압도
될 때엔 헤시오도스의 시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학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그 형식이 시대 착오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또 과학이 이미 분명하게 밝혀낸  것을 땅과 하
늘의 정령들이 다시 혼란시키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도 아니다. 이 장르가 현대 예술의 정신과 본
질, 원동력과 전혀 맞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우주 진화론은 고대 세계-인간이 아직 많이 살지 않아서 자연이 인간에 의하여  밀려나지
않았던 세계인 것이다. 맘모스가 지상을 활보하고 커다란  용이나 공룡의 기억이 인간의 머리 속
에 아직도 생생했다. 자연이 인간의 눈을 사로잡고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던 그 시대에는 아직도
신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 시대는 인류 연대지의 첫 페이지가 시작되는 시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고대 세계는 로마에서 끝났다. 인구 과잉이 그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로마는 다른 나라에서 빌어온 신들과 정복당한 사람들의  이시장. 땅과 하늘의 두 층계로 이루어
진 특매장이었다. 장폐색처럼 세 겹으로 묶어져 감긴  오물덩어리였다. 다키아 사람, 헤룰리아 사
람, 스키티아 사람, 사르마티아 사람, 북쪽 여러  나라 사람들. 육중한 수레바퀴, 비곗살에 가리어
진 눈, 남색, 두 겹으로 늘어진 턱, 무지몽매한 황제들. 학식이 있는 노예의 살점을 뜯어먹고 사는
물고기. 세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이 우글거렸고, 모두 커다란 원형  투기장 통로에 빽빽
이 몰려서 처참한 꼴이 되었다.
  이윽고 이 우울한 황금과 대리석의 퇴적 속으로  휘황한 빛에 감싸이며, 인간미에 넘친 시골티
나는 갈릴리 사람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때부터는 신도 없고, 국민도 없고, 오직 한
사람-목수이며 농사 짓는 사람, 낙조에 양떼를 모는 양치기, 조금도 떨치기를 바라지 않는 이름을
가진 사람, 그러나 세상의 어머니들의 자장가로 불려지며 전세계의 화랑에 그려진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11
  페트로프카 거리는 페테르부르그의 한 모퉁이를 모스크바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았다. 길
양쪽에 늘어선 집들, 건물의 차분하고 얌전한 장식, 책방, 도서관, 지도 제작소, 고급 담배집, 고급
요리점과 커다란 외등 위에 놓인 뿌옇고 둥근 가스등과 등 사이의 전면의 문 따위  모든 것이 그
러한 인상을 주었다.
  겨울 거리를 다니는 삼들은 몹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건실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수입이 좋은 자유 직업을 가진 사람들뿐이었다.
  코마롭스키는 여기서 독신으로 살았다. 단단한 참나무 난간이 있는 2층집 호화주택이었다. 엠마
에르네스토브나는 가정부라기보다는 조용한 성의  여인이었으며, 그녀는 눈에 띄지도  않고, 말도
없이 집안 일을 빈틈없게 또 신중하게 꾸려나갔다. 주인의 생활에는, 조심스럽게  일체 간섭을 하
려 들지 않았다. 그도 역시 훌륭한 신사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품위와 예의로  그녀를 대했고, 올
드미스인 그녀의 평온한 생활에 해롭겠다고 생각되면 남녀를 불문하고 집에  초대하지 않기로 했
었다.
  집안은 항상 수도원 같이 조용했으며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고, 마치 수술실처럼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코마롭스키는 불독을 끌고 페트로프카에서 쿠즈네츠키 다리까지  천천히 산책
하면서, 이따금 네거리에서 배우며 도박사인 사타니지와 만나곤 했다.
  두 사람은 쿠즈네츼 다리를 함께 걸으며 짤막한 농담이나 의견을 나누며 세상사를 경멸하듯 나
무라기도 하고 너털웃음을 웃어대기도 했다. 그들의  높은 웃음소리는 개짓는 소리만큼 무의미하
게 공기를 뒤흔들어 놓았다.
    12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양철 홈통이나 처마끝 차양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면서 봄소식을 알리듯
지붕에서 지붕으로 물방울이 그 소식을 전했다. 해빙기였다.
  라라는 넋잃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몸에 무
슨 일이 있었는지 의식했다.
  다들 잠들어 있었다. 다시금 허탈한  마음에 사로잡혀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  앉았다. 레이스의
테가 둘린 밝은 연보랏빛 옷에,  저녁 외출을 위해 가게에서 특별히  빌어낸 기다란 베일을 걸친
꼴이 마치 가장복 같은 차림이었다.  화장대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움켜잡고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과 마주 앉았으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있었다. 이윽고 두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머니가 알면, 난 죽일 거야. 그리고 자기도 자살하고 말 거야.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이젠 다 글렀어.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지, 타락한 여자. 프랑스  소설에 흔히 나오는 여자. 더욱이 내
일도 태연한 얼굴로 학교에 나가, 나에 비하면 젖먹이 같은 다른 아이들과 나란히 앉겠지.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몇 년이 지난 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라라는 올랴에게 숨김없이 말하게 되겠지. 올랴는 그
녀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리게 되겠지.
  창밖에는 물방울 튕기는 소리와 눈 녹아 내리는 소리가 속삭였다. 길 건너에서 누군가 옆집 문
을 두들기고 있었다. 라라는 두 팔 속에 얼굴을 묻고 있을 뿐이었다. 어깨가 들먹였다. 그녀는 흐
느껴 울고 있었다.
    13
  "그건 아무래도 좋다니까, 엠마 에르네스토브나. 다 귀찮아요."
  그는 서랍을 이것저것 여닫으며 뒤지더니 커프스 단추며 칼라를 양탄자나 소파 위에 닥치는 대
로 내던졌으나, 자기 자신도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라라였다. 하지만 이번 일요일에는 만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는 우리 안에 갇힌 맹수처럼 안절부절못하고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요정 같은 그녀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매혹적인 것이었다.  그녀의 손길은 최상의 이념인 양 눈
부셨다. 호텔 방벽에 던져진 그녀의 그림자는 순결의 실루엣 그것이었다. 그녀의  속옷이 자수 틀
에 끼운 천처럼 팽팽하고 또 단순하게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
  아래 한길에서 느린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자 그는 이내 손가락으로 창문을 톡톡 두드린다. 눈
을 지긋이 감으며 "라라"하고 속삭여보았다. 그의 팔에 안겼던 그녀의 머리가 문득 눈앞에 떠올랐
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보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베개에서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 아름
다움은 연기처럼 그의 눈에 몽롱하게 스며들어 심장을 파고들었다.
  일요일 산책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코마롭스키는 잭을 데리고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섰다. 쿠즈
네츠키 다리며 사타니지와의 농지거리, 아는 사람과 마주칠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니다, 견
딜 수 없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되돌아섰다. 개는  뜻밖이라는 듯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
더니 슬슬 뒤따라왔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코마롭스키는 생각했다. '무슨 마귀가 씌운 걸
까?' 양심의 가책인가, 연민 탓일까, 후회하는 걸까? 아니면 불안감 때문인가?  아니야, 그녀는 무
사히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잊어버릴 수가 없단 말인가?
  그는 집에 돌아와서 층계를 올라가  첫 번째 층계참을 지나쳤다. 창문  네 귀퉁이의 색채 장식
무늬가 발밑에 색색의 빛 조각을 던지고 있었다. 다음 층계에서 그는 발을 멈췄다. 가슴을 짓누르
며 온몸을 죄어드는 이 불안한 기분을 극복해야 한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지 않은가. 죽은 친구의
딸, 아직도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한테 정신이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나는 자기 자신과 자기 습관에  진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코마롭스키는 층계를 힘껏 움켜쥔 채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몸을 돌려 층계를 내려갔다. 층계참의 색색의  빛 속에 그의 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밑으로 처진
아래턱에서 침을 흘리는 늙은 난쟁이처럼 얼굴을 쳐들고 그를 우러러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 개는 그 처녀를 미워하고 있었다. 언젠가 짖으며 덤벼들어 그녀의 양말을 물어뜯은 일이 있
었다. 그녀가 무슨 인정 어린 짓을 자기 주인에게 전할까봐 그녀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래. 지금 모든 것이 이전과 다를 서이 없어!  사타니지도, 농담이나 장난도. 이놈아 그래, 이
거나 먹어라, 이거나!"
  기는 단장으로 개를 때리며 발길로  찼다. 잭은 비명을 지르고 꼬리를  달달 떨면서 층계 위를
뛰어올라가, 엠마 에르네스토브나에게 알리려고 문을 긁어댔다.
  며칠이 지나고 또 몇 주일이 흘렀다.
    14
  오, 피할 길 없는 이 속박!  라라의 인생에 코마롭스키가 침입한 것이 그녀를 미움의  구렁텅이
로 빠뜨려 넣었다면, 오히려 반대로 그녀가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다.
  백발이 희끗희끗 보이는 아버지와 같은 나이의 멋쟁이  남자, 집회에서 박수를 받기도 하고 신
문에 크게 나기도 하는 남자가 그녀를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써가며 음악회나 극장에 동반하고,
그녀를 소중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지성을 향상시켜 주겠다'는 그의 태도가 라라의 마음을 사로잡
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갈색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한창 장난칠 나이였다.
코마롭스키가 마차 속에서 앞에 마부가 앉았거나 말거나,  또 극장 특석에서 남들의 이목도 아랑
곳없이 그녀에게 열을 올리는 그 대담성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잠자는 작은 악마의 눈을
뜨게 하여 그의 흉내를 내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린애 같은 불장난은  그다지 오래 갈 수가 없었다.  가슴을 저미는 절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가 차츰 뿌리를 뻗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노상 졸기만 했다.  밤이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울기만 해서 종일토록 머리가  쑤셔댔다. 학교에서 너무 공부에 열중한 탓
으로 피곤한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15
  라라는 그를 증오하며 저주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녀는 이런 생각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녀의 모든 생활이 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그의 노예가 되었
을까? 무엇으로 그녀를 정복했을까? 그리고 또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에게 몸을 허락하고, 숨길
수 없는 굴욕에 떨면서도 그의 욕정을 충족시켜 주는 것일까? 대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무엇일
까? 그의 나이일까, 또는 어머니가 그에게서 돈을 얻어 쓰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교묘하
게 그녀를 위협하기 때문일까? 아니, 절대로 그것은 아니다!
  라라가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가 얼마나 애타게  그녀를 갈망하고 있는지 그것을 그녀가 모
를 리가 없었다. 두려워할 까닭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양심만은 결백했다. 부끄럽고 두려운
것은 오히려 남자 쪽이었다. 자기가 배신을 당하게 되지나 않을까 겁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
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한테는 그 사람같이 냉혹한 데가 없었다. 그의 냉혹한 성격이야
말로 그에게 의지하려는 자와 약한 자들을 대하는 중요한 무기인 것이다.
  두 삶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인생이 온통 이처럼 무섭게 변해버린 것이
다. 무엇이 그녀의 이성의 귀를 멀게 했을까,  천둥이나 번개였을까? 아니다, 그것은 은밀한 눈길
과 속삭임이었다. 인생이란 간사하고도 아리송한 것이다. 한 가닥의 실오라기는 거미줄 마냥 가늘
지만, 그것은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더 얽혀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제 아무리 강자라 할지라도 약자나 비열한 자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16
  설사 결혼을 한들 달라질 것이 있을까?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또 자기 궤변에 빠
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따금 그곳을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는 고뇌에 젖곤 했다.
  그는 그녀의 발아래 엎드려 애원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았다. "앞으로 이대로 계속할 수는 없
어. 나와 너의 사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봐. 너는  지금 파멸로 줄달음치고 있는 거야. 어머
니한테 말하고 나와 결혼하기로 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마치 그녀가  반대라도 한 것처럼 진지하게 제의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말뿐이었다. 라라는 이런 비극적인 헛소리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는 긴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그녀를 그 몸서리치는 레스토랑 별실로 끌어들
이곤 했다. 그곳에서 웨이터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며  그녀를 더듬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
라면, 그것이 천박한 짓일까'.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자문해보았다.
  하루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땅에 묻혀 있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발끝만이 따위에 남아 있었
다. 한 포기의 풀이 왼쪽 젖꼭지에서 돋아 올랐다.  땅 위에선 사람들이 <검은 눈동자와 흰 젖가
슴>,<마샤는 냇가에 나갈 수 없다네> 따위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7
  라라는 신앙심이 두텁지 못했다. 의식 따위는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생을  참고 살아가기 위
해서는 간혹 그 어떤 내면적인 음악의 반주를 필요로 할  때가 있었다. 그러한 음악은 언제나 자
기 스스로가 작곡할 수는 없었다. 음악은 바로 인생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라라는 음악을
들으며 울기 위하여 교회에 가곤 했다.
  12월 초순의 어느 날, 라라는 마치 <뇌우>의 카체리나와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무거운 마음으
로 기도하러 갔다. 지금이라도 발밑의 땅이 꺼지고  교회당의 둥근 천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된대도 겁날 건  없었다. 그것으로 모든 일은 끝장이  나고 말 테니까. 다만
이 수다쟁이 올랴를 데리고 온 것이 후회될 뿐이었다.
  "저기 소콜로프가 있어."올랴가 라라의 귀에다 속삭였다.
  "쉿, 제발 좀 가만있어. 소콜로프가 누군데?"
  "프로프 아파나시예비치 소콜로프를 몰라? 저기서 성가를  부르고 있잖아. 나의 팔촌 아저씨뻘
되는 사람이야."
  "아아, 저 성가를 부르는 사람 말이지? 치베르진네 친척이지?  자, 이제 좀 잠자코 있어 줘. 귀
찮게 굴지 말고."
  방금 미사가 시작되었다. <내 영혼, 주를 찬송하며 나의 모든 것, 성스러운 주님의 이름으로 찬
송합니다>라는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소리는 거의 비어 있는 교회당 안에서 크게 메아리쳐 울렸다. 신자들은 제단 앞쪽에만 몰려 있
었다. 새로 지은 교회당 건물이었다. 맑은 유리 창문은 눈에 덮여 잿빛 거리와 오가는 통행인들의
모습을 희미하게 보이게 했다. 교구의 직원이 창가에 서서, 미사에는 아랑곳없이 냉랭한 창문이나
거리와도 같은 목소리로 귀머거리 여자 거지를 보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라라가 동전을 손에 쥐고 살며시 신자들의 사이를 빠져 문가로 가서 올랴와  자기 몫으로 양초
두 자루를 사 가지고 되돌아오는 사이에 소콜로프는 <산 위에서의 가르침>을 낭송했다.
  "행복할 지어다. 마음이 가난한 자여...  행복할 지어다. 슬퍼 우는  자여... 행복할 지어다. 의에
굶주려 목마른 자여..."
  라라는 흠칫 몸을 떨며 멈춰 섰다. 저건  바로 나를 위해 하는 말이야. '행복할  지어다. 짓밟힌
자에게도 할 말은 있다. 짓밟힌 자에게도 미래는 밝다. 이것이 주님의 생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뜻인 것이다.'
    18
  프레스냐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였다. 기샤르네 집은 폭동 지구에 있었다. 집에서 몇 걸음밖에
안 되는 트베르스카야 거리에는 바리케이드가 구축되고 있었다.
  거실 창문으로 그것이 내다보였다. 돌과 쓰레기를 얼음으로 굳혀서 얼음벽을 만들기 위해 사람
들은 앞뜰에서 양동이로 물을 날랐다. 이웃집 뜰은 노동자 자위대의 집합소가  되어 있었다. 그곳
은 구호소나 급식소 같은 곳이었다.
  그 집합소에 모인 소년들 가운데서 라라는 두 소년밖에는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하나는 그녀
의 동급생 나쟈의 남자 친구인 니카 두도로프였다.  자부심이 강하고 직선적이며 말수가 적은 편
이었다. 라라는 나쟈네 집에서 이 소년과  알게 되었지만, 성격상 그는 자기와 비슷한  점이 많은
그녀에게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또 한 소년은 올랴 제미나의 할머니인 치베르지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실업계 중학생 파샤
였다. 라라는 그 할머니네 집에서 파샤와 만났을 때, 자기가 이 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된 것
을 알았다. 파샤는 아직 미숙한 어린애처럼 순진해서, 마치 자작나무 숲이  있고 구름이 떠다니는
교회에 소풍하러 나온 듯이 라라와 만나게 된  들뜬 기쁨을 감추지도 않고, 웃음거리가 되리라는
두려움도 없이 그녀를 환대하는 표정을 거침없이 보였었다.
  라라는 파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여겨지는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기 시작했
다. 그러나 부드럽고 유순한 그의 성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은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두 사람의 우정이 훨씬 더 가까워져서였다. 그때 이미 파샤 자신도 라라를 죽도록 사랑하며, 그녀
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일생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두 소년은 어른들의 놀이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놀이인 전쟁판에 끼어들고 있었다. 더욱이 이
전쟁에 끼어든다는 것은 유형이나 교수형의 위험성이 많았다.  그러나 털실 모자 꼬리에 털 방울
을 달고 다니는, 아직도 부모의 품속에 있을 어린애들이었다. 라라는 어른스럽게  두 아이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들의 위험한 놀이에는 순진한 데가 있었다. 그 순진성이 엉겨 붙은 고드름이 검게
보이는, 추위가 휘몰아치는 밤에도  짙푸른 그림자에도, 소년들이 잠복하고  있는 맞은편 집에도,
무엇보다도 거기서 줄곧 들려오는 권총 소리에도 울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총을 쏘고 있구나'
하고 라라는 생각했다. 니카와 파샤뿐만 아니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 도시 전체에 대한 생각이
기도 했다. '착하고 훌륭한 아이들. 착하기 때문에, 그리고 훌륭하기 때문에 총을  쏘고 있는 것이
다.'
    19
  바리케이드에 포격을 가할지 모르니 집이 위험하리라는  소문이 번졌다. 모스크바의 다른 지역
으로 친지를 찾아 피난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이 지역은 벌써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래서 가까운 곳에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문득 체르노고리예 여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여관은 벌써 만원이
되어 있었으며 다른 곳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예전의 친분을 생각해서 침구를 넣어두는
방을 그들을 위해 하나 내 주기로 약속했다.
  커다란 트렁크 따위를 실어 나르면 남의 눈에 띄기 쉬우므로 긴요한 물건만을  보자기 세 개에
꾸렸다. 그러고서도 여관으로 옮기는 것을 하루하루 미루고 있었다.
  양장점의 고용인들은 한집 식구나 다름이 없어서 총파업이 개시된 후에도  그냥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춥고 음산한 어느 날 저녁 무렵에 한길 쪽 출입문의 초인종이  울렸다. 어떤 사람
이 들어오더니, 파업에 참가할 것을 독려하기  위해 온 것이니 현관에서 주인을 좀  보자고 했다.
현관으로 페치소바가 대신 나갔다. "얘들아, 모두 이리 오너라!" 그녀는 곧 직공들을 그곳에 모이
게 한 후 방문객을 소개했다. 그는 서투른 솜씨지만 한 사람 한 사람씩  악수를 나누고, 페치소바
한테서 무슨 다짐을 받았는지, 그냥 돌아가 버렸다.
  직공들은 작업실로 돌아가자 숄을 걸치고 좁은 털외투를 입느라고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부
산했다.
  "아니, 왜들이래?" 마담 기샤르가 황급히 달려나오며 물었다.
  "우리는 갑니다. 우리도 파업에 참가하기로 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냐?" 마담 기샤르는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섭섭히 생각진 마세요. 우리가 주인한테 유감이 있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예요. 오히려 매
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나 주인에게 있는 문제가  아니예요. 누구 나가
다, 온 세상이 다 하고 있는 일을 우리만 거역할 순 없잖아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가버렸다. 올랴와 페치소바까짇 가게를 떠났다.  페치소바는 작별 인
사를 하면서 주인과 가게를 위하여  일부러 파업을 했다고 마담  기샤르에게 소곤거렸다. 그러나
마담은 분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 내가 사람들을 잘못 봤어! 고것들이,  내가 그만큼 친절하게 대해 준
보답이 고작 이거란 말인가! 그래 좋아, 애들은 철따구니가 없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그 늙은 것까
지 나한테 이럴 줄이야!"
  "엄마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잖아요." 라라는 어머니를  위로했다. "악의가 있어서 하는 짓은
아니예요. 오히려 그 반대일 거예요. 지금 주위에서 하고  있는 일은 인도적인 일을 위해서, 약자
를 보호하며 부녀자를 위해서 하는 일이에요. 그래요, 그것은 부인하지는 마세요. 그 덕택에 언젠
가는 우리들도 잘살게 될 날이 올 테니까요."
  어머니는 도무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넌 그렇다니까." 어머니는 훌쩍였다. "내가 속이 상할 때면 넌 으레 내 속을 뒤집어 놓
는 그런 소리만 지껄이는구나. 남이 나한테 못할 짓을 하는 걸보고도, 그게 날  위해서 하는 짓이
라고 우겨대니 말이다. 정말 이러다간 미칠 것만 같구나."
  로쟈는 사관학교에 가 있었다. 라라는  어머니와 단둘이서 텅 빈 집안을  서성거렸다. 가로등이
켜지지 않은 한길이 방안을 기웃거리며, 창문이 밖을 쏘아보고 있었다.
  "여관으로 가요, 어머니. 더  어두워지게 전에." 라라가 애원했다.  "아시겠어요, 어머니. 늑장을
부리지 말고 지금 곧 가요."
  "필라프, 필라프!" 그들은 문지기를 불렀다. "우릴 체르노고리예까지 데려다 줘요."
  "예, 알았습니다."
  "보따리를 갖다 눠야겠어.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집 좀 잘 봐줘요. 그리고 카나리아한테 모이
와 물을 주는 것도 잊지 말고. 자, 이 열쇠를 받아요. 더 일러둘 말은 없을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곧 알려줘요."
  "예, 알겠습니다."
  "고맙네, 필라프.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그런 여기 좀 앉았다 떠나기로 하자."
  그들은 거리에 나왔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웠다 밖으로 나왔을 때처럼  바깥 공기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마치 선반으로 갈고 닦아 동그랗게 된  것처럼 음향이 가볍게 메아리치며 서리가 내린
상쾌한 공간을 굴러갔다. 멀리서 단발 사격과 일제 사격의 총성이 울리며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
는 것같이 쿵쾅거렸다.
  필라프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으나, 라라와 어머니는 그것이 공포 쏘는 소리라고 우겨댔다.
  "바보 같은 소리. 생각해봐요, 필라프.  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그게 공포가 아닐 리 있겠
어? 틀림없이 공포를 쏘는 걸 거야."
  그런데 네거리에서 순찰병을 만나 검문을 받았다.  카자크 순찰병들은 히죽히죽 웃으며 머리끝
에서 발끝까지 손으로 몸수색을 했다. 턱걸이 끈이 달린 둥근  모자를 모양을 부려서 한쪽 귀 쪽
으로 삐뚜름하게 쓰고 있어서 모두 애꾸눈같이 보였다.
  '참 잘됐군!' 라라는 생각했다. 이 지역이 차단되고 있는 동안만은 코마롭스키를 만나지 않을 테
니까. 어머니 때문에 그와의 관계를 끊을 수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그이와 만나지 말라고 말할 수
도 없는 일이 아닌가. 섣불리 그런 말을 했다간 모든 일이 드러나고 만다. 설사 드러나 버린다 해
도 겁날 것은 없다! 오오, 주여,  깨끗이 끝장만 낼 수 있다면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주여, 주
여! 그 생각만 하면 길거리에서 금세 기절해버릴 것만 같았다. 여기서 그녀는 지나간 일을 회상했
다. 그때 그 이상한 그림의 제목이 뭐라 하더라? 뚱뚱한 로마인의 그림이었다.  레스토랑의 그 처
음 만나던 별실에 걸려 있었다. 모든 것은 바로 그 별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자, 아니면 항아
리>였던가? 맞았어. 그런 제목을 가진 유명한 그림이었다. 그때만 해도 라라는 아직 여자가 되지
못했다. 그 값비싼 예술 작품과 자기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식탁 위에는
굉장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얘, 어딜 가려고 그렇게 달려가는 거야? 쫓아갈 수가 없구나."  마담 기샤르가 뒤에서 숨을 헐
떡이며 투덜거렸다. 라라는 무슨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무언가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자랑스러운 힘에 끌려 허공으로 껑충껑충 걷는 것 같았다.
  '얼마나 멋있는가.' 총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행복할 지어다, 짓밟힌 자여. 행복할 지
어다, 속은 자여. 하나님이 보내 주는 총소리다! 저 총소리, 저건 바로 내 마음이다!'
    20
  그로메코 형제는 시브체프 브라조크 거리와 다른 조그만 거리가 엇갈리는  모퉁이에 살고 있었
다. 알렉산드르 그로메코와 니콜라이 그로메코는 둘 다 화학 교수이며, 형은 페트롭스크 아카데미
에서, 동생은 모스크바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미혼이었지만 알렉산드르에겐 안
나 이바노브나 부인이 있었다. 안나 부인의 친정은 크류게르가인데, 제철업자인 아버지는 우랄 지
방의 유라친 근처에 큰 영지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곳에는 폐광과 채산이 맞지 않는 광산도 여
러 개 있었다.
  그로메코 댁은 2층집이었다. 위층에는 침실과 연구실,  알렉산드르 교수의 서재와 독서실, 안나
부인의 거실, 토냐와 유라의 방이 있었다. 아래층은 주로  손님 접대를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연
두색 커튼, 윤기 나는 피아노 뚜껑,  커다란 어항, 연둣빛 가구 커버, 화분에  심어놓은 해초 같은
식물들이 졸고 있듯이 움직이는 푸른 바닷속을 연상시켰다.
  그로메코네 사람들은 모두 교양이 있고 친절할 뿐만  아니라 미술과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이
따금 손님을 초대해서 실내악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서는 피아노 3중주와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4중주 같은 것이 연주되곤 했다.
  1906년 1월, 니콜라이가 해외로 여행을  떠난 후에 그로메코 댁에서는  또 이런 실내악 모임이
열릴 예정이었다. 타네예프의 제자인 젊은 작곡가의 바이올린 소나타의 첫 번째 연주와 차이코프
스키의 3중주곡이 연주될 것이다.
  준비는 전날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홀의 가구를 옮기고, 한쪽 구석에서는 피아노 조율사가 몇십
번이나 같은 화음을 쳐보기도 하고, 한꺼번에 콩을 흩뿌리듯 아르페지오를 치기도 했다. 부엌에서
는 닭의 털을 뽑고, 야채를 씻고, 샐러드 소스를 만들려고 올리브유에 겨자를 섞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안나 부인의 절친한 친구인  슈라 슐레진게르가 찾아 왔으나, 그녀는 오히
려 일에 방해가 되었다.
  슈라는 키 크고 날씬한 몸매에 용모가 단정한 여자였으나 어딘지 남자 같은 인상을 풍겼다. 더
욱이 곱슬거리는 양털 모자를 비스듬히 썼을 때는  황제의 얼굴을 연상케 했다. 손님으로 초대되
어 있는 동안 모자는 벗지 않고 핀을 꽂은 베일을 약간 쳐들 뿐이었다.
  슬픈 일이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슈라와 안나는 서로 무거운 마음을 풀어주곤 했다. 얘기는 서
로 약을 올리며 독설을 퍼부으며 점점 험악해지고 드디어 감정의 폭풍이 폭발하지만, 이내 또 울
면서 화해하게 되는 것이다. 고혈압 치료법에 거머리를  쓰는 것처럼 평소의 말다툼은 두 사람의
감정을 진정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다.
  슈라는 여러 번 결혼한 경험이 있으나, 이혼을 하자마자 남편에 대한 생각은 깨끗이 잊는 것이
었다. 그녀는 결혼하고도 독신녀에게서 엿볼 수 있는 차가운 느낌이 감돌았다.
  슈라는 접신론자였지만 러시아 정교회의 의식도 도통해서,  사제가 무아의 경지에서 의식을 진
행하는 것을 도와줄 수가 있었다. '주여 들어주시옵소서'라든지, '영원 무궁할 지어다'라든지, '거룩
한 가브리엘 천사여' 등의 말을 목쉰 소리로 연방 주워섬기는 것이었다.
  슈라는 수학과 인디아 비술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모스크바 음악대학의 저명한 교수들의 주소
를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누구한테 무슨 중요한 인생사의 문제가 생기면 중간에 끼여들
어 조종하고 처리하곤 했다.
  정해진 시간에 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젤라이다 필리포보나, 긴츠, 푸프코프 내와, 바수
르만 내외, 베르지츠키 내와, 카프카즈체르 대령  등이 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릴
때마다, 크고 작은 눈송이가 팔락이며 한군데 엉기기나 하듯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손님들은 헐렁한 방한 장화를 신고서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나타났다. 나자들은 하나같이
촌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으나, 그들의  아내는 추위에 얼굴을 붉히며  외투는 위에서 두
번째 단추까지 풀어헤치고, 숄을 뒤로 제쳐서 머리에는  물방울이 맺힌 채 손가락을 입가에 갖다
대며 교태를 짓고 있었다. 이 집에 처음으로 초대된 신인 피아니스트가 도착하자 "큐이의 조카야"
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홀에서 활짝 열린 옆문 저쪽에는 식탁이 마치 겨울 길처럼  만찬을 싣고 길게 뻗어 있었다. 빨
간 마가목나무의 과실주 병에 반사되는 불빛이 눈길을 끌었다. 은쟁반에 놓인 커트글라스의 조미
료 병들, 보기 좋게 늘어놓은 닭고기며 디저트의 접시들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피라미드형
으로 접힌 냅킨이며, 편도의 향기를 풍기는 연보라 빛의 시네라리아 꽃바구니가 식욕을 돋우어주
었다.
  지상의 양식이 주는 쾌락을 너무 미루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서둘러 정신의 양식에 달려들었다.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무미건조하고 어울리지 않고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나타는 예측한 대로였을  뿐만 아니
라, 너무나 느린 곡이었다.
  휴식 시간에 비평가 케림베코프와 그로메코 교수는 오히려 칭찬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나누기도 하고 이리저리 의자를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옆방의 화려한 식탁에 주의가 끌리자 빨리 연주회를 계속하도록 재촉했다.
  피아니스트가 곁눈으로 청중을 바라보고는 파트너들에게  시작하라는 눈짓을 했다. 바이올리니
스트인 트이쉬케비치가 활을 움직이자 구슬픈 멜로디가 흐르기 시작했다.
  유라와 토냐, 그리고 그로메코 댁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미샤 고르돈이 셋째 줄에 앉아 있었
다.
  "예고로브나가 부르고 있어요." 유라가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그로메코 교수에게 속삭였다.
  그로메코 댁의 백발의 늙은 하녀 예고로브나가 문가에  서서, 유라에게 연방 눈짓을 하여 그로
메코 교수 쪽을 보고 고개를 흔들어 보이면서 급히 주인한테 알리려고 애썼다.
  그로메코 교수는 뒤돌아 하녀를 바라보며 나무라듯 어깨를 흠칫해 보였으나 예고로브나는 물러
설 기색이 아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홀의 한쪽 끝에서 한쪽 끝으로 벙어리처럼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안나 부인은 남편을 흘겨보고 있었다.
  그로메코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뭇거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방 옆을 살며시 돌아서 하녀에
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예고로브나? 뭐가 그리 급하지?"
  예고로보나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체르노고리예가 어딘데?"
  "여관이랍니다."
  "그래서?"
  "그분더러 곧 돌아오라는 거예요. 친척 되는 분이 위급하시다구요."
  "위급하시다구? 알겠어, 그렇지만 지금은 연주도중이니까 안돼. 끝나면 그렇게 전하지."
  "여관 사람이 마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누군가 거의 죽어간다구요. 여자 분이랍니다."
  "안 된다면 안 돼요. 한 5분 정도 더 기다린다고 해서 큰일날 건 없을 테니까."
  그는 조용한 걸음으로 벽 쪽을 돌아  제자리에 가서 미간을 찌푸리고 콧등을  문지르면서 앉았
다.
  제 2악장이 끝나고 미처 박수 소리가 멈추기도 전에,  그는 연주석으로 가서 무슨 사고가 생겨
서 곧 집으로 오라는 전갈이 있으니 연주를  중지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로메코 교수
는 한 손을 흔들어 청중에게 박수를 중지시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트리오의 연주를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트이쉬케비치 씨한테 슬픈 기별이 왔
기 때문에 돌아가셔야 합니다. 참 안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그를 혼자 보낼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와 함께 가는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얘 유라, 빨리 나가서 세몬 더러 마차를 준비하도록
일러줘요. 벌써 준비가 됐을 테지만. 그럼 여러분, 다녀올 테니 그대로 계셔  주십시오, 곧 돌아오
겠습니다."
  소년들은 추운 밤길을 그로케코 교수와 함께 드라이브하고 싶어서 졸라대는 것이었다.
    21
  12월이 지나면서 폭동의 거리는 평온한 생활의 흐름을 되찾기는 했으나, 아직도 어디선가 간혹
총소리가 들리고, 평상시와 같은 화재가 발생되는 경우에도 그것이 폭동의 연장인 것처럼 생각하
게 되었다.
  소년들은 오늘밤같이 이렇게 오랫동안 마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손이 닿으리만
큼 가까운 곳이었다. 스몰렌스크와 노빈스크를  지나 사도바야 거리를 반쯤만 가면  되는 곳이다.
맹수와 같은 추위와 안개가 목적지까지의 길을 여러  토막으로 갈라놓았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
의 공간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거리의 모닥불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발걸음
소리, 썰매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어쩌면 꽤 마차를  오랫동안이나 타고 또 아직도 머나먼 곳으로
가는 도중이라는 인상을 더해주기도 했다.
  여관 앞에는 좁다랗고 멋진 썰매가 한 대 멈춰 서  있었다. 말에는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혔고
말발굽도 천에 싸여 있었다. 마부는 승객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서 목도리를 감은 머리를 따뜻이
하려고 장갑 낀 큰 두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여관의 현관 안은 따뜻했다. 수위는 출입구에서 외투  보관대로 구분되어 있는 난간 뒤에 앉아
서 코를 골고 있었다. 이따금 자기 코고는 소리에 놀라서 번쩍 눈을 떴다가는, 환풍기가도는 소리
와 페치카에서 불타는 소리, 사모바르가 끓는 소리에 취하여 다시 잠들어버리곤 했다.
  현관 왼쪽 거울 앞에는 얼굴에 짙게 분칠한 여자가 서  있었다. 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얄
팍한 털자켓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 위층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거울에 등을
돌려 대고 어깨 너머로 자기의 뒷모습의 매무새를 확인하고 있었다.
  추위에 꽁꽁 얼다시피 한 마부가 거리에서 안으로 들어왔다. 두툼하게 부풀어오른 외투는 빵집
간판에 그려져 있는 찐빵을 연상시켰고 입에서 뿜어내는 흰 입김은 더욱 그런 느낌을 주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아씨?" 그는 거울 앞의 여자에게 물었다.  "이렇게 오래 기다리다간 말이 얼
어버리고 말겠습니다."
  24호실의 사건은 여관 종업원에게는 흔히 겪는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신호 벨이 쉴새없
이 울리고 벽에 걸린 길쭉한 상자 유리에 번호가 나타나면, 어느 호실의 손님이 성가시게, 무엇을
원하는 건지 자기도 모르면서, 종업원을 들볶으려 하는지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지금 24호실에서는 의사가 그 늙은 얼간이 가사로바에게 토하는 약을  먹여 위장을 세척해내고
있었다. 여관 하녀 글라샤가 방바닥을 닦고  오물 통을 들어내고, 다시 깨끗한 물을  퍼 들여가며
부산했다. 그러나 이 소동이 벌어지기 훨씬 전에  체로쉬카가 마차로 의사와 그 가엾은 바이올리
니스트를 데려오고, 코마롭스키가 달려오고, 사람들이 방문 앞 복도를  부리나케 오가기 시작하기
훨씬 전에, 이 여관 종업원 실에서 말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날 오후에 여관 종업원 스이소이가 그릇을 가득 놓은 쟁반을 오른손에 받쳐들
고 주방에서 달려나오는 순간, 층계로  통하는 좁은 통로로 누군가  갑자기 문에서 튀어나오면서
그를 밀쳐버린 데서 일어난 것이었다. 쟁반이 날아가면서 수프를 엎지르고, 수프 접시 세 장과 얕
은 접시 한 장이 깨졌다.
  스이소이는 부딪친 접시닦이 여자가 잘못했으니까 그녀가  변상해야 한다고 우겨댔다. 이미 밤
은 열 한 시 가까이 되어서, 종업원들 반쯤은 이제  일손을 놓아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말다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노상 손발을 떨고 있고, 밤낮으로 술병을 마누라 대신 껴안고 있는 주제에 누가 떠밀었다느니,
누가 수프를 엎질렀다느니, 누가 접시를 깼다고 우겨대는 거야. 그래 누가 당신을 떠밀었다고, 사
팔뜨기 같으니, 밸 빠진 수캐 같은 게 누굴 보고 그런 허튼 소릴해?"
  "다시 말하지만, 마트로나 말조심하라구."
  "그럼, 이 소동의 장본인이 대체 누구냐구요? 접시를  깰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
니까? 그 꼴사나운 계집 때문이야! 그  여자는 갈보 퇴물이에요. 지금은 장사를 그만두고  시침을
떼고 있지만, 원래는 싸구려 갈보란 말예요. 온갖 재미 다 보다가 비소까지 마셨지. 지금은 이 체
르노고리예에 저렇게 살고 있으니까 누구도 갈보로는 보지 않을 테지."
  미사와 유라는 방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로메코  교수가 상상하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는 음악가의 생활을 맑고 무언가 우수가 깃들어 가치 있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
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소동이란 말인가. 이따위 추악한 사태인 줄 알았다면 아이들은 절대 데
려오지 말았어야 할 것을 그랬다.
  소년들은 복도에서 기다리기가 지루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도련님들." 종업원이 다가와서 다시  정중하고 조용한 말투로 권했
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부인께서는 괜찮으십니다. 이젠 다 나으셨습니다.  여기 이렇게 서 계
시면 곤란합니다. 아까도 여기서 사고가 나서 값비싼 그릇을 깨뜨렸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심부름
하느라 줄곧 다녀야 하는데, 여기 계시면 좀 비좁으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소년들은 그 말에 따랐다. 방안에는  언제나 탁자 위에 걸려 놓았던  석유 등불이 판자 칸막이
저쪽 침상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 침상에서는 빈대 냄새가 풍겨왔다. 그곳은  침실로 되어 있어서
문간이나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꾀죄죄한 포장이 드리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포장이 걷
혀서 이 북새통에 그것을 다시 드리워 놓을 겨를이 없었다. 침상 의자 위에 놓인 등불이 마치 무
대 조명등처럼 침상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접시닦이 여급이 생각했던 것처럼, 마담 기사르가 자살하려고 비소를 먹은 것이 아니라 옥도를
마셨던 것이다. 껍질이 아직 굳지 않아서 손을 대면 검은 물이  들 것 같은 덜 익은 호도의 시큼
하고 떫은 냄새가 방안에 가득차 있었다.
  칸막이 뒤에서 하녀가 방바닥을 닦고 있었다. 반나체가 된 여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물과 눈
물과 땀에 뒤범벅되었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머리를 물통에 드리운 채 엉엉  울고 있었다. 이때
소년들은 그쪽을 바라보는 것이 쑥스럽고  무례한 느낌이 들어서 얼른  외면했다. 그런데 유라는
이 짧은 순간에, 어색하고 난처한 입장에서는 긴장과 노력을 하게 되고,  여인이 조각에서 표현하
는 자세를 버리면 근육이 울퉁불퉁한 레슬러가 팬티만 입은 알몸으로 시합하러 나온 꼴과 흡사하
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윽고 칸막이 저쪽에서 누군가 포장을 드리웠다.
  "트이쉬케비치 씨, 당신의 손이 어디 있어요? 내 손 좀  잡아주세요." 여자는 간신히 눈물과 구
토를 참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무서운 의혹이 날 괴롭게 했답니다! 트이
쉬케비치 씨... 하지만 그건 공연한 생각이었어요... 어리석게도 모든 게 다  지나친 자기 환상이었
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아아, 이렇게 다행한 일이 어디 있지요! 결국... 이렇게... 이렇게 난 죽지
않았어요."
  "진정하십시오. 부인, 제발 좀 진정하세요. 이게 다 무슨 창피한 일입니까, 정말."
  "그럼 돌아갈까." 그로메코 교수는 소년들을 돌아보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몹시 당황
하면서 어두운 문간에 선 채, 눈 둘 곳을 몰라 등불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방 한 구석을 바라보
고 있었다. 벽에는 사진 몇  장이 붙어 있었고, 책꽂이에 악보가  꽂혀 있었다. 책상 위엔 서류와
앨범이 쌓였고, 실로 짠 상보를 덮은 식탁 저편의 안락의자에서 한 소녀가 앉은 채 팔을 의자 등
받이에 얹고 거기에 볼을 대고 잠들어 있었다. 이런 소란한  가운데서도 잠을 자는 걸 보면 그녀
는 몹시 지쳐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젠 돌아가자." 그로메코 교수는 또 한 번 되풀이했다. 여기에  온 것이 무의미한 일이었지만
이 이상 더 머뭇거리는 것도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었다. "이젠 트이쉬케비치 씨가 나오면 인사나
하고."
  그러나 칸막이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트이쉬케비치가 아니라 체구가 당당하고 깨끗하게 면도를
한 의젓한 남자였다. 등불을 머리 위로 치켜들자  소녀가 잠자고 있는 탁자로 다가가서 제자리에
걸어 놓았다. 불빛에 소녀는 잠이 깼다. 그녀는 사내에게 미소를 보이면서 가늘게 눈을 뜨고 기지
개를 켰다.
  미샤는 이 낯선 사람을 보자 흠칫  놀라고,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라의 팔  소매를 잡아
끄며 뭔가 말하려고 했으나 유라는 손을 뿌리치고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남 앞에서 귀엣말을 하면 안 돼.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니?"
  그러는 동안에 소녀와 사나이 사이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시선만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요술이라도 부리듯 서로의 의사를 재빨리 알아
차리고 있었다. 마치 사내는 인형극 조종자이고 소녀는  사내의 손놀림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 같
았다. 그녀 얼굴에서 엿보이는 피곤한  미소는 그녀의 눈을 반쯤 감게  하고 입술은 반쯤 벌리게
했으나, 사내의 비웃는 듯한 시선에 공모자의 교태스런 눈짓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
이 무사히 끝나게 되어 만족하였다. 그들의 비밀이 드러나지 않고, 음독자가 살아나게 된 것이다.
  유라는 뚫어지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는 등장 불빛이 환하
게 비치는 그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예가 된 소녀와 그 주인이 벌이고 있는 이 한 장면은 수수
께끼와 같았고 또 치욕스럽게 보였다. 유라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복잡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유라와 토냐와 미샤, 셋이 열띤 토론을 하며 결국은  '천박'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외던 것이 바
로 이것이었다.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이 안전한 거리
에서 말로만 제어해 오는 힘, 그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 그 힘은 유라의  눈앞에 구체적인 현
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꿈속에처럼 종잡을  수 없고 숨겨지고 무자비할 만큼 파괴적이
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처롭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라의 순진한 철학이 어떻게 여기에 대처할
것인가?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 한길로 나오자 미샤가 물었다. 생각에 골몰한 유라는 대답하려 하지
도 않았다.
  "너의 아버지를 술에 빠지게 해서 파멸하게 한  자가 바로 그 사람이야. 너의 아버지와 기차에
함께 타고 가던 변호사 말이다...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지?"
  유라는 아버지와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소녀와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추워서 말하기에도 힘들 지경이었다.
  "추워서 혼났겠군." 그로메코 교수는 마부 세몬을 위로했다. 그들은 집으로 향했다.

      3.스벤치츠키 댁의 크리스마스 파티
    1
어느 겨울에 그로메코 교수는 구식 옷장 하나를  안나 부인에게 선물로 사주었다. 우연한 기회에
사게 된 물건이었다. 검은색 향나무로 만든 굉증히  큰 옷장이어서 그것을 그대로 방아능로 들여
놓을 수 있는 문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분해해서 들여는 왔으나, 어디네  놓을 것이지
문제였다. 아래층 응접실은 넓기는 하였으나 어울리지 않았고, 위층 침실에는 장소가 비좁아서 놓
을 수가 없었다. 결국 부인의 침실이 있는 이층 조그만 홀을 치우고 거기다 놓기로 했다.
  하인 미르켈이 옷장을 조립하러 왔다. 그는 여섯 살짜리 딸 마린카를 데리고 왔다. 마린카는 엿
한 가락을 얻어 가지고 코를 훌쩍이며  엿과 끈끈한 손가락을 빨면서 아버지의  일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안나 부인의 눈앞에서 옷장이 형태를 갖
추어 갔다. 위에다 판자만 얹으면 일이 끝날 단계에 가서 안나 부인은 갑자기 마르켈을 거들어주
고 싶었다. 그녀는 깊은 옷장 안으로 들어가 받ㄱ을 딛고  섰으나 발을 헛딛는 바람에 옷장 한쪽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벽 판자는 혼에 맞춰 겨우 세워 놓았던 것이다. 마리켈이 대강 둘러 매 놓
았던 새끼줄이 풀어지면서 와르르 무너지는 판자와 함께 안나 부인이  벌렁 나자빠지면서 심하게
다쳤다.
  "아이구, 마님, 이게 어쩐 일입니까!" 마르켈이 질겁해서 달려왔다.  "어쩌자고 이런 일을 다 하
신다고? 뼈는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뼈를 한 번 만져보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뼈니까요. 살은
다쳐도 문제없습니다. 이내 낫기 마련이에요."
  "넌 왜 울고 야단이나, 이놈아! 코나 닦고 엄마한테 어서  가 봐." 그는 울고 있는 아이를 나무
랐다.
  "아아, 마님, 마님께서 거들어 주시지 않으면 혼자서 못할 줄  아셨습니까? 마님꼐서 저를 아마
그저 하인으로만 아시겠지만 실은 저는 원래가 목수였답니다.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가구를 만
들었는지 아십니까? 옷장, 찬장, 칠기 할 것 없이 호도나무나 마호가니를 써서 수없이 ㅁ나들어냈
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실례가 되겠지만, 얼마나 많은 귀부인들이 출가할  때 저를 거쳐갔는
지 아십니까. 지금 요모양 요꼴이 된 건 술 때문이에요. 모든 게 술 때문이에요."
  마르켈이 안락위자를 끌고 왔다. 안나 부인은 그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신
음 소리를 내며 다친 곳을 어루만졌다. 하인은 다시 옷장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위에
판자를 얹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문짝만 달면 전람회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안나 부인은 이 옷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크기나 모양이 마치  상여나 임금님의 관 같은 걸 연
상케 해서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옷장을 으스콜리드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자
기 주인을 죽게 한 올레그의 말과 비유해서 이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체계 없이 독서한 탓으로
제멋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안나 부인은 이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안나 부인은 폐렴 증세가 점점 더 심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2
  1911년 11월에 안나 부인은 한 달 내내 폐렴을 앓아 자리에 눕게 되었다.
  유라와 미샤 고르돈과 토냐는 이듬해 봄에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유라는  의학을, 토냐는 법
학을, 미샤는 철학을 전공했었다.
  유라는 여러 방면에 소질이 많아서  그의 머리 소겡는 잡다한 지식이  가득 차 있었으나, 그의
견해나 습관, 경향 등은 무척 독특한 것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상력이  뛰어나 독창성이 풍
부했다.
  예술과 역사에 매력을 느꼈으나 직업을 선택할 때에 주저하게 되지는 않았다. 타고난 낙천성이
나 우울증이 결코 직업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이 천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물리학과 자연과학에 흥미를 느꼈고, 인간은 실생활에서 공익성이 있는 일에 종사해
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의학을 택하기로 했던 것이다.
  4년간의 수업 기간중 첫 번째 한 학기 동안을 그는 줄곧 대학 지하실에  있는 해부실에서 보냈
다. 나선형 층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해부실에는 머리가 헝클어진 학생들이 언제나 우글거렸
다. 해골에 둘러싸여 허름한 교과서 책장을 넘기며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한
쪽 구석에서 조용히 해부에 몰두하는  학생도 있었다. 서성거리는 학생,  잡담을 하고 있는 학생,
시체실 돌바닥을 떼지어 다니는 쥐를 쫓는 학생도  있었다. 어둑어둑한 시체실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젊은 자살자, 익사한 여인의  시체 등이 알몸으로 잘 보존되어  부패한 흔적도 없이 인처럼
희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명반염을 주사하면 생기를  되찾은 듯 피부가 팽팽해져서 사람의 눈
을 속인다. 시체는 절개되고 수족이  절단되어 표본으로 만들어지지만, 아무리 잘게  토막을 내도
인간의 몸은 여전히 아름다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함석을 씌운 테이블 위에 아무렇
게나 던져진 익사자의 시체를 대할  때도, 절단된 팔이나 손을 바라볼  때도 유라는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석탄산과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지하실에는 알몸의 시체들이 경험한 운명의
수수께끼를 비롯하여 삶과 죽음 자체의 불가사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신비의 존재를 느끼게
하며, 마치 여기가 죽음의 안식처나 본거지가 된 것처럼 주검들이 이 지하실에서 고이 잠들고 있
었다.
  유라가 시체 해부에 임할 때, 들려 오는 듯한 신비한 목소리가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의 마
음을 흔드는 이러한 여러 가지 상념에 익숙해지면서 차츰 마음을 쓰지 않게 되었다.
  유라는 두뇌가 명석하고 글을 곧잘 썼다. 중학 시절부터 산문과 전기물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가
지고 있었다. 그 속에 자기가 보고  느낀 가장 인상적인 것들을, 마치 폭발물을  땅속에 묻어두듯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쓰기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 대신  시를 쓰게 되었다.
그것은 화가가 가슴 속에 구상하고 있는  거작을 준비하면서 일생 동안 스케치에  전념하는 것과
같았다.
  유라는 자기의 시가 강렬하고 독창적이기 때문에 성숙해 보이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대견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열과 독창성만이 예술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할 수 있으며,  그것을 지니지 못
한 예술이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라는 자기 성격 형성에 니콜라이 아저씨가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니콜라이 아저씨는 로잔느에 살았었다. 그의 저서 몇 권이 그곳에서 러시아어와 외국어로 출판
됐다. 저서에서 그는 역사를 제 2의 우주, 인간이 죽음의 도전을 받으면서, 시간과 기억의 도움을
받아 이룩한 또 하나의 우주라고 보는 견해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
에 자극되어 그의 견해는 새로운 예술관을 낳았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의 사사은 유라보다는 그의 친구 미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미샤가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의 영향 때문이며, 미샤는 신학 강의도 열심히 듣게 되고 나중
에는 아예 신학 아카데미에 전학할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유라는 아저씨의 영향을 받다 발전하고 그 영향에서  점차 해방되었으나, 미샤는 아주 그 영향
에 구속되어 버렸다.미샤가 그토록 열중하게 된 이유는 그의 출신 때문이라는 것을 유라는 잘 알
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극단적인 생각을 버리도록 섣불리 미샤를 설득하려 하지는 않았다.이뜨금
미샤가 좀더 인생에 접근하는 현실 주의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3
  11월 말, 어느 저녁 무렵 유라가 대학에서 늦게 돌아왔다. 그는 몹시 피곤했으며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낮에 안나 부인이 경련을 일으켜서 소동이 벌어졌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러 사람의
의사가 와서 진찰을 했다. 한때는 교회 신부를  모셔 와야겠다는 권유까지 있었으나 나중엔 보류
하게 되었다. 지금 그녀는 퍽 좋아지고 의식이  회복되어서 유라가 돌아오변 곧 자기한테 올라오
도록 일렀다.
  유라는 그 소리를 듣자 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위층 침실로 올라갔따.
  방에는 낮에 일어난 소동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간호원이 조용히 탁자 위를 치우고 있
었다. 주위에는 구겨진 냅킨과 찜질에  썼던 젖은 수건이 흩어져 있었고  대야의 물에는 토해 낸
피가 불그레한 빛으로 변해 있었으며, 쓰고 난 앰플하며 탈지면 뭉치 따위가 거기 떠 있었다.
  부인은 땀에 흠뻑 젖었고,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눅이고 있었다.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형편없
이 수척해 보였다.
  '진단이 잘못되지 않았을까?' 유라는 생각해 보았다. '엽성 폐렴 증세인데 몹시 위독한 것 같다.'
그는 인사를 한 후, 의례적인 격려의 말을 하고 간호원을 내보냈다. 그는 부인의  손을 잡고 맥을
짚어 보고 나서 호주머니에서 청진기를 꺼냈다. 부인은 소용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괴로운 듯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 성찬을 받도록... 신부님을 모셔 오려고 했어... 언제 죽을는지...몰라요... 이를 뽑을 때는,
얼마나 아플까... 겁이 나지... 단단히 각오를 하지... 그런데 이건 이가 아니야... 나의전부... 생명을
빼앗기는 거야... 그게 언떤 것인지 아무도 몰라요... 난 서글프고 두려워요."   
  부인은 말을 멈추었다. 눈물이 볼을 따라 주르륵 흘렀다.  유라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윽고 그
녀는 말을 이었다.
  "넌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어... 다른 사람과는 달라... 넌 알고 있겠지... 나한테 말해줘요... 내가
안심할 수 있도록."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 유라는 그냥 앉아 있기가 멋적었다. 슬그머니 일어나 방안을 한 바퀴
돌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내일이면 병세가 매우 좋아질 거예요. 이젠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까. 틀림없어요. 그리고 죽음이라든지, 의식이나 부활, 믿음 따위에 대한  과학자로서의 저의 의견
을 듣고 싶으십니까? 그건 후에 말씀드리지요. 아니라구요? 지금? 그럼 말씀드리지요.  하지만 갑
자기 말하기는 어렵군요." 그리하여 그는 즉석에서 일장의 즉흥 연설을 하면서 스스로 놀라는 것
이었다.
  "부활의 그 깊은 개념이 마치 약자의 위안을 위하여 있다는 것을 저는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
다. 저는 늘상 다른 의미로서,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에 걸쳐 살아온 그 많은 사람의 무리를 과연 어디에 그냥 둘 수가  있겠습니까? 우주는 그렇게
넓지는 못합니다. 하나님도 선도 의도 다 밀려날 수밖엔 없을 겁니다. 그 탐욕스러운 동물적인 혼
잡에 밟혀 죽고야 말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이며 무한하고 불변인  생명은 무수한 결합과 변형을 일으키면서
우주를 가득 채우고 끊임없이 부활되고 있습니다. 부인은 죽은 후에 과연 부활할 수 있을까, 그것
을 염려하시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죽음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
을 미처 모르고 있을 따름이지요.
  우리는 죽을 때 고통을, 육신의 조직이 붕괴되는 것을 느낄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위식할까
요? 그런데 의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생각해 봅시다.  의식적으로 잠을 청하면 반드시 불면증에
걸립니다. 의식적으로 음식을 소화시키려 들면 틀림없이 위장이 상합니다.  의식을 우리 자신에게
작용시킬 경우 의식은 독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의식은 우리의 외부로 향하는 한 줄기 빛입니
다.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우리 앞길을 밝혀주는 빛이란 말입니다. 의식은 앞으로 가고 있는 기관
차의 조명등과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 빛을 우리의 내부로 향하게 하면 사고를 일으키게 됩니
다.
  그렇다면 당신의 의식은 어떻게 될까요? 당신의 의식은 당신 자신의 것이지 다근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럼 당신 자신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자신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 자신 속에서 어느 부분이 의식
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장, 간장, 아니면 혈관인가요?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
리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외적인, 활동적이 현상뿐입니다. 예컨대 자기 자
신의 손으로, 자기 가족이나 타인들 속에서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타인들 속에 자기
자신이, 자기의 영혼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인 것이며, 우리의 의식이 한평생 호흡하며 살
고 있고 즐기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타인들 속에 있을 것이며, 타인들 속에 남게 될 것
입니다. 사람들이 후에 그것을 우리의 추억이라고 해도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영원
한 '우리'입니다. 미래의 일부가 되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긑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도 염려할 건 없습니다.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
음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런데 방금 재능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타인과 구분
이 되는 것입니다. 재능이란 우리 자신의 것이며, 우리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그리
고 폭넓고 고상한 의미에서 재능이란 곧 생명의 지혜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성요한은 말하기를 죽음은 없어질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의 논증은 간단합니다 죽음이 없어질
것이라는 것은 그것이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벌써  경험했으며, 낡고 싫
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없엊ㄹ 것이라는 뜻이며, 지금 필요한 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것이란 영원한 생명일 것입니다."
  그는 방안을 서성이며 말하고 있었다. 침대에  다가가서 부인의 이마를 짚어보고 "편히 쉬십시
오"하고 말했다. 얼마 후 그녀는 잠들기 시작했다.
  유라는 조용히 방에서 나와 예고로브나에게  간호원을 침실에 들여보내도록 일렀다.  "이거 참,
나도 돌팔이 의사가 다 되어버렸군. 주문 같은 소리를 뇌까리고 손을 얹기도 하면서..."
  다음날 부인의 병세가 좋아졌다.
    4
  안나 부인은 날이 갈수록 병이  나아가고 있었다. 12월 중순에는  자리를 걷고 일어나려고까지
했으나 아직 너무 쇠약해서 기력이 없었다. 의사들은 좀더 자리에 누워서 정양하도록 권했다.
  그녀는 가끔 유라와 토냐를 불러서 자기 어린 시절을 보내던 우랄 지방의  얘기를 몇 시간이고
늘어놓았다. 그녀는 르인바 강변에 있는 아버지의 영지인 바르이키노에서  자랐다. 유라와 토냐는
아직 한 번도 거기 가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유라는 부인의 말을 통하여 5천 제사치나가 넘는
어두운 밤처럼 검푸른 원시림이며, 그 속에 휘어진 칼날처럼 구불구불 구비쳐  흐르는 물줄기, 바
위가 깔린 강 바닥, 그리고 크류게르 댁의 영지 쪽으로 길게  뻗은 가파른 강 언덕 등을 눈 앞에
바라보듯 훤히 머리 속에 그릴 수가 있었다.
  유라와 토냐는 최근에 난생 처음으로  야회복을 주문했다. 유라는 검은 프록코트를,  토냐는 목
밑만 조금 드러나는 밝은 빛 비단 이브닝드레스를 마췄다.
  해마다 12월 27일에 스벤치츠키 댁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처음으로 그 옷을  입고 갈
예정이었다.
  양복점과 양장점에서 같은 날에 옷을  가져왔다. 유라와 토냐는 입어보고 무척  기뻐했다. 옷을
벗기 전에 예고로브나가 부인의 분부로 두 사람을 부르러왔다. 그들은  새 옷을 입은 채 부인 방
으로 갔다.
  부인은 팔꿈치를 짚고 일어나서, 옆으로 그들을 바라보고는 뒤돌아 서보라고 했다.
  "참 멋있구나. 썩 잘 맞는다. 난 벌써 옷이 다 될 줄은 몰랐다. 한  번 더 보자, 토냐... 응, 괜찮
구나. 어깨에 주름이 잡힌 줄 알았더니. 내가 왜 너희들을 불렀는지 알겠니? 우선 너한테, 유라에
게 할 말이 있단다."
  "네, 알겠어요. 편지를 보셨군요? 제가 갖다  보여드리라고 일부러 올려 보낸 거예요. 니콜라이
아저씨와 같은 의견이시겠지요. 유산  상속을 거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요? 하지만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어요. 물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겠지
만.
  첫째로 변호사들에게는 '지바고 상속 사건'이란는 게 있는 편이 좋겠지요. 아버지의 유산으로는
소송 내용이나 변호 사례금 정도는 지불할 능력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이상의 유산은 실제 남
을 것이 없습니다. 있다는 것은  부채와 분규, 그리고 추문뿐입니다.  만일 단돈 얼마라도 저한테
올 게 있다면, 전 그돈을 소송 비용으로 재판소에 바치지 않고 제 자신을  위해 쓰겠습니다. 요는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공연히  쓰레기통을 뒤적거리기보다는 있지도 않은 재
산에 대한 저의 권리를 포기하고, 상속인을 자처하고 나서는 자들에세 깨끗이 양보하겠다는 겁니
다.
  부인도 아시겠지만, 유산 청구인 중에는 마담 알리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바고의 유족이라
고 자처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파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답니다. 그
밖에도 별별 사람이 다 나타나서  아버지의 유산을 청구하고 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지만 저도
최근에야 그 얘길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  아버지는 스톨부노바 엔리츠이 공작  부인이라는 고상가인 미친
여자한테 빠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부인과의 사이에 예브그라프라는 아들까지 보았는데, 그 아
이가 지금 열 살이랍니다.
  공작 부인은 현재 옴스크 교외에 있는 자기 저택에 아들과 함께 살면서 바깥 출입을 일체 하지
않는다고 해요. 수입의 출처는 분명치 않지만, 저는 그  저택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식 창문이 다섯 개 있고  처마 밑에 멋진 원형 조각이 있는 집입니다. 최근에는 모스크바에서 수
천 베르스타나 떨어진 시베리아에서 그 집의 다섯 개 창문이 저를 불쾌한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
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조만간 악마와 같은 눈으로 저를 흘겨보게 되겠지요. 이런
판국에, 실속 없는 유산, 자칭 상속인들, 악의와 선망, 그리고 엉큼한 변호사, 이런 것들을 상대로
제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어쨌든 그것을 포기해서는 안 돼." 부인은 반대였다.  "그건 그렇고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하고 그녀는 전날에 하다가 그만둔 얘기를 다시 계속했다. "그 이름이 이제야 생각나서... 어제 얘
기한 산림 간수 말이다. 바커스라는 이름이야. 참 괴상한 이름이지? 구레나룻이 눈썹과 맞붙은 꼴
이 꼭 숲속의 시커먼 도깨비 같았어! 게다가 이름이 바커스라니! 얼굴을 상처투성이고. 곰한테 할
퀴었으나 때려잡았다는 거야. 그 고장 사람은 그런 식의 짧은 이름이 많아요. 부르기 좋고 알아듣
기 쉬우라고. 바커스, 혹은 루프, 프르스트 같은. 때로는 할아버지 사냥총에서 나는  소리 같은 이
름을 가진 사람이 오게 되면-아프크트니 프롤이니 하는 이름도 있었지-우리는 곧 아래층으로 우
르르 내려가곤 했어. 곰 새끼를 데리고 온  숯 굽는 사람, 영지 구석에서 광석 표본을  가지고 온
광산을 찾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었어. 그러면 할아버지는 전표를 끊어서 사무실로 가게 했어. 돈
을 주거나 양식을 주기도 하고 화약을  주기도 했어. 바로 창문 앞부터는 숲이었어.  그리고 눈도
많이 내렸지! 지붕 위까지 쌓였으니까." 부인은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이젠 그만하세요, 몸에 해롭습니다." 토냐와 유라가 말렸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 지금  생각이 났는데, 예고로브나의 말을 들으니  모레 파티에
갈 것인지 망설이고 있다고 하던데, 그런 바보스런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말아라! 당치도 않은 생각
이지. 유라 넌 의사가 아니냐! 가기로 했으면 아무 소리 말고 가도록 해야지. 그럼 다시 바커스의
이야기를 계속하자. 바커스는 젊어서 대장장이를 하고 있었는데, 싸움을 하게 되어 창자가 터져나
와 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무쇠로 창자를 한 벌 만들었다는 거야. 아니, 잠깐  유라. 물론 그럴 수
는 없겠지, 나도 알아요. 그 말을  그대로 들어서는 안 되지! 하지만  거기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또 기침이 나와서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이번에는 꽤 오래 계속되었다. 계속되는  시침에 숨을
돌려 쉬기 힘들었다.
  유라와 토냐는 동시에 침대 옆으로 뛰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부인은 기침을 하면
서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그것을 가지런히 포개고 한참  동안 그대로 쥐고 있었다. 이윽고 기침이
가라앉자 "내가 죽은 후에도  서로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  너희들은 천생 배필이야. 결혼하거라.
지금 여기서 내가 정혼을 한 거니까." 그녀는 말하고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5
  1906년 봄, 라라가 여학교 졸업 학년으로 진학하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코마롭스키와의 6개월
에 걸친 관계는 라라를 인내의 한계점까지 몰고 갔다. 그는 라라의 처참한 기분을 교활하게 이용
하여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녀의 수치스러운 일을 은근히 상기시켜 주곤 했다. 이런 암시는 호색
한이 여자에게 바라는 그런 혼란된 상태로 라라를  이끌어갔다. 그 결과 라라는 육욕의 악몽으로
차츰 깊이 빠져들었고, 악몽에서 깨어날 때면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곤 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의 그녀의 광기는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전도되어 있었고, 모
든 것이 논리를 벗어나 있었다. 찌르는 듯한 고통은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웃음소리로 표현되고,
저항과 거절은 곧 동의를 의미하는가 하면, 그녀의  입술은 감사의 키스가 되어 박해자의 손들을
미친 듯이 더듬고 있었다.
  이런 일이 끝없이 계속되는 듯싶었으나, 그해 봄 학기말을 앞둔 역사 수업 시간에, 라라는 학교
수업이나 숙제가 그녀와 코마롭스키와의 밀회에 지장을 주지 않을 더없이 좋은 여름 방학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고 문득 결심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폭풍이 곧 닥쳐올 것 같은  무더운 오전이었다. 열린 교실 창문으로  먼 시가지의 소음이 마치
벌통을 맴도는 꿀벌들의 날개 소리처럼 단조롭게 들려오고, 교정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
리가 들려 왔다. 사순절의 빵 굽는 냄새와 보드카 냄새  같은 흙냄새와 새로 돋아난 나뭇잎의 싱
그러운 향기에 머리가 아팠다.
  역사 선생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강의하고 있었다. 프레주스 상륙 작전을 설명하고 있을
때, 번개와 천둥소리가 시커먼 하늘을 찢으며 흙먼지를 실은 구름이 비 냄새를 싣고 교실 안으로
불어왔다. 사환에게 창문을 닫게 하려고 개구쟁이 학생 둘이 재빠르게 복도로 달려나갔다. 그들이
교실 문을 여는 순간 휙 불어닥친 거센 바람이 책상 위에 노트에서 잉크 흡인지를 모조리 날려버
렸다.
  창문이 닫혀졌다. 도회지의 먼지 끼고 더럽혀진 비가 쏟아져 내렸다. 라라는  공책에서 종이 한
장을 찢어 내어 옆자리에 앉은 나쟈 폴로그리보바에게 편지를 썼다.
  "나쟈, 난 엄마한테서 나와 살아야겠다. 가정교사 자리가  있으면 소개해 줘. 넌 부잣집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나쟈가 종이 쪽지로 회답을 보냈다.
  "마침 내 동생 리파의 가정 교사를 구하는 중이야.  우리 집에 오면 어때? 아버지 어머니도 널
좋아하고 계시는 걸 알지."
    6
  라라는 폴로그리보크 댁에서 3년을 더 살았다. 마치 요새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안전하여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고, 그녀로부터 떨어진 어머니와 오빠도 전혀 얼씬하지 못했다.
  나쟈의 아버지 콜로그리보르는 새로운 타입의 진보적인 실업가로서 재능 있고 지적인 인물이었
다. 그는 낡은 제도를 두 가지 면에서 증오하고 있었다. 그것은 국고와 맞먹을  만큼 재력을 가진
부호로서의 증오였으며, 평민 출신으로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크게 성공한 인간으로서의 증오
이기도 했다. 그는 정치범들을 자기 집에 은신시켜 주는가 하면, 그들을  위해 변호사를 주선하기
도 하고 혁명 운동에 자금 지원도 했었다. 자기 재산을 제 손으로 뺏는 일에 열중하여 자기 공장
에서 스스로 파업을 선동하고 있다는 농담까지 나오게  했다. 사냥을 즐기며 사격의 명수였던 그
는, 1905년 겨울에는 일요일마다 세레브라느이 숲이나  로시느이 섬까지 가서 혁명 운동자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치기까지 했다.
  그는 참으로 보기 드문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의 아내인 세라피마 부인은 그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라라는 그들 부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으며, 온 가족들이 그녀를 친척처럼 사랑하
고 있었다.
  걱정 없이 3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라라의 오빠 로쟈가 그녀를  방문해왔다. 로쟈는 기다란
두 다리를 뻗치고 서서 몸을 앞뒤로 흔들며 공연히 거만스럽게 콧소리를 내  말끝을 길게 끌면서
라라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사관학교 동기생들이 졸업 기념으로 교장에서 선물을 하려고 모든 돈
을 자기가 맡아오다가 그저께 도박판에서 몽땅 날려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말이 끝나자 그는 자
리에 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이 말을 들은 라라는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로쟈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어젯밤 코마롭스키를 찾아갔었지. 그 사람은 나하고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다고 거절
하면서, 만일 네가 와서 부탁을 한다면 그땐 자기도 거절할 수 없겠다는 거야... 너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있지 않지마, 그 사람한테는 여전히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라라. 제발 부탁이야...
네가 한마디 만 그 사람한테 말해주면 돼... 내가 지금 얼마나 곤경에 빠져 있는지 너도 알 게 아
니냐. 그런 수치가 어디 있겠니. 사관생도로서의 내 명예가 어떻게 되겠니!... 제발 그 사람에게 부
탁해 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니... 설마 내가 목숨으로 명예를 보상하기 바라지는 않겠지."
  "목숨으로 보상한다고? 사관생도의 명예라구요?" 라라는 화가 치밀어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
다. "그렇다면 난 사관생도가 아니니까 명예고 뭐고 없단  말인가요? 나 같은 건 무슨 짓을 시켜
도 좋다는 건가요? 오빠는 지금 나더러 무슨 일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그 사람이 오빠
에게 한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 말예요? 나는 이렇게 몇 년 동안이나 땀을 흘리고 일했는데,
오빠가 불쑥 나타나서는 내가 겨우 이룩한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다  해도 대수롭지 않다는
거군요. 오빠가 어떻게 되건 내가 알 게 뭐예요! 이제 자살을 하건  맘대로 하세요! 그래 그 돈이
얼마나 되죠?"
  "6백 90루불리 조금 더 돼."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대략해서 7백루불리쯤 되지."
  "오빠! 아니, 정신 있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7백 루불리나 되는 돈을  도박에 날리다니?
오빠!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정직하게 일해서 그만한 거액을 벌려면 몇 년이 걸리는지 아세요?"
  라라는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이윽고 아주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내가 해보겠어요. 내일 오세요.  그리고 권총을 가지고 와요,  자살할 때 쓰려던 것을.
그것은 저한테 주어야 해요. 그리고 총알도 넉넉히 가지고 와요. 알았죠?"
  라라는 콜로그리보프한테서 그 돈을 빌었다.
    7
  라라는 콜로그리보프 댁에서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여학교를 카이고 여자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성적도 우수했고, 이듬해 1912년에 졸업할 예정이었다.
  1911년 봄에는, 그녀가 가르친 리파가  여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리파는 이미  유복한 가문의
젊은 기사 프라젠단크와 약혼한 사이였다. 리파의 부모는 딸이 선택한 사윗감에 만족했지만, 딸이
너무 어려서 결혼하는 데는 반대하여 좀더 기다리라고 권했다. 집안에서 귀염둥이로 자라고 제멋
대로 굴던 리파는 부모에게 마구 대들며 울고불고 하면서 소동을 벌였다.
  이 유복한 가정에서 라라는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다. 오빠 때문에 돌려 쓴 돌을
갚으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조차 없었다. 남몰래 매달 지출되는
돈만 아니었어도 라라는 그 빚을 벌써 오래 전에 갚아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파샤한테도 숨기고 시베리아에 유형중인 그의 아버지 안치포프에게 돈을 보내고 있었으
며, 병들고 사나운 그의 어머니의 생활을 자주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파샤의 부담을 덜어주려
고 그의 숙식비의 일부를 직접 주인 여자에게 지불하곤 했다.
  라라보다 나이가 좀 아래인 파샤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으며,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
다. 실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녀의 권유에 따라 대학에 입학하려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보충하
게 되었다.
  라라의 소망은, 1년 후 두 사람이 국가 시험에 합격하여 결혼도 하고 우랄 지방의 적당한 도시
에 가서 함께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것이었다.
  파샤는 예술 극장 근처의 카메르게르스키가에 있는, 조용한  집주인이 있는 새 집에 라라가 방
을 얻어주어 살고 있었다. 1911년 여름에 라라는 마지막으로 콜로그리보프네 가족들과 함께 두플
랑카에 갔다. 그녀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으며,  오히려 그 집 가족들보다도 그 고장을  더 좋아했
다. 가족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여름에 여기에 오게 되면 으레 똑같은 광경이 되풀이되곤 하
였다. 그들 일행을 태워 온  무덥고 지저분한 기차에서 내려서 짐들을  마차에 옮겨 싣고 일행이
마차에 올라타고서, 새빨간 셔츠에 소매 없는 덧옷을  입은 두플랑카의 마부한테서 이 고장의 새
소식을 듣고 있는 사이에 라라는 넓은 전원의 향기와 정적에 흠뻑 위하며  혼자 별장까지 걸어가
는 것이었다.
  순례자와 방랑자들이 다니던 오솔길이 철길을 따라 뻗어서  숲 쪽으로 나 있었다. 라라는 걸음
을 멈춰 눈을 감으며 넓은 들판의 꽃향기를 풍기는 맑은 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마셨다. 그녀에
게 이 고장은 핏줄보다도 친근하며 애인보다도 좋고 책보다도 현명해서, 잠시나마 라라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찾게 해주었다. 나는 지상의 광란하는 유혹을 떨쳐버리고, 모든  것을 올바른 명칭으
로 부르기 위해 여기 있다. 만일에 그것이 내 힘으로 못다 할 것이라면,  인생을 사랑하는 뜻에서
나 대신에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
  그해 여름에 그녀는 자기가 짊어진 엄청난  고통을 벗어 던지기 위해 두플랑카에  오게 되었으
며, 그녀는 쉽게 기분을 전환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예전에 보지 못하던 고생티가 많아지고 걸
핏하면 흥분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 기분을 상하여 그녀의 성질을 대범하지 않게 했다.
  콜로그리보프네 사람들은 여전히 라라를  사랑하고 언제까지나 함께  살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라라 자신은 리파가 성장한 지금 자기는 이미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
는 월급을 받을 수 없다고 했으나 억지로 받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라는 돈이 필
요했으며, 달리 돈을 마련할 방도도 없었다. 이 댁에 머물러 있으면서  독립적으로 돈벌이를 한다
는 것도 이상하고 실제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라라는 자기의 입장이 난처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집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짐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 좋은 낯으로 대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시
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우선 빌어 쓴 돈부터 갚아야 했
으나 당장엔 아무데서도 그만한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마치  자기가 인질로 이 집에 잡혀 있
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오빠의 어리석은 과실 때문이며, 덧없는  절망에 가슴이 찢
기는 듯싶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녀는 모든 데서 멸시를 받는 듯했다. 콜로그리보프 댁을 방문한 친지들이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면 그녀는 자기를 가엾은  '식객'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불쾌하였고, 가만
내버려두면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우울증의 발작이 계속되기는 하였으나, 라라는  코로그리보프 댁에 많은 손님이 초대되
는 즐거운 여러 행사에는 스스로 참여했다. 그녀는 수영이나 보트 놀이에 참가하고 밤에 있는 강
변 야유회에서 남들과 함께 불꽃놀이를  하며 춤을 추었다. 그녀는  아마추어 연극에도 출연하고
사격 경기에는 더욱 열을 올렸다. 짧은 모제르  총이 사용되었으나 그녀는 오빠의 가벼운 권총을
애용했다. 사격 솜씨도 제법 능숙해졌다.
  그녀는 표적에 연습 사격을 적중시키고 나서 한바탕 농담으로 웃겼다.
  "내가 남자였으면 결투의 명수가 되었을 거예요." 그러나 명랑해지려고 애쓰면 그럴수록 더 우
울해지곤 했다. 도대체 웬일인지 자기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태는 휴가가 끝나 그녀가 도시로 돌아오자 한 충 더 심해졌다. 여기서 파샤와의 사소
한 불화가 그녀를 불쾌하게 했다. 파샤는 요즘 점차 자신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마치 그녀에게 지
시하듯 했다. 그것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라라를 못마땅하게 했다.
  파샤, 리파, 콜로그리보프네 사람들, 그리고 돈. 이런  여러 상념이 그녀의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녀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꼈으며 미칠 것만 같았다.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이미 경험한 모
든 것을 모조리 내동댕이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러한 심정으
로 1911년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그녀는 숙명적인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당장 콜로그
리보프 댁을 나가서 어떻게든 스스로 생활을 개척하자, 그러기 위해 필요한 돈은 코마롭스키한테
달라고 하자. 이렇게 결심한 것이다. 전에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로 보나 또는 그 관계를 청
산한 후 이미 몇 해라는 세월이 흘러간 사실로 보아, 그는 어떤 설명이나 요구나, 어떤 치사한 조
건을 내걸지 않고 순수한 의리에서 자기를 돕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라라는 27일 저녁에 페트로프카  거리로 향했다. 로쟈의 권총에 장탄을 하
고 안전장치를 풀어서 외투 소매 속에 지니고  갔다. 만일 코마롭스키가 거절하거나 도로 붙잡으
려 하거나 창피를 줄 경우 쏴버릴 작정이었다.
  몹시 시끄럽고 들뜬 명절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으나 주위의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생각하
는 것은 다만 일발의 총성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권총이 발사되어  있었다. 누구를
겨누었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페트로프카 거리까지 가는 동안 그녀의 귓전에는 줄곧 총성이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코마롭스키를 향해, 그녀 자신을 향해, 그녀의 운명을 향해, 드플랑카의 잔
디밭에 서 있는 참나무에 붙은 표적을 향해 발사되고 있었다.
    8
  "내 외투 소매를 건드리지 말아요!" 오오! 아아! 소리를 연발하면서 수다스럽게 외투 벗는 것을
거들어 주려고 손을 내미는 엠마 에르네스토브나에게, 라라는 이렇게  말했다. 코마롭스키는 지금
집에 없으니 돌아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난 바쁘니까. 어디 가셨죠?"
  그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청되었다는 것이었다. 파티 장소를 적은 종이 쪽지를  받아 보자, 라
라는 무늬 유리 창문이 낯익을 어둠침침한 층계를  단숨에 달려 내려왔다. 무치노이 거리의 스벤
치츠키 댁으로 향했다.
  추위가 매서웠다. 길거리는 깨진 맥주병 밑바닥처럼 두꺼운 얼음이 시꺼멓게 깔려 있었다. 공기
는 숨쉬기에도 따가웠다. 잿빛 안개가 자욱하고, 얼어붙어 빳빳해진 털외투의 회색 깃털이 그녀의
얼굴을 찌르기도 하고 간지럽히기도 했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라라는 인적이 드문 거리를 걸어갔다. 길가의 찻집과 음식점 유리문은
증기에 뿌옇게 서려 있었다. 소시지처럼 뻘겋게 언  사람의 얼굴과 수염 같은 고드름을 늘어뜨린
말과 개의 머리가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나곤 했다. 얼음과 눈이 두껍게 집집의 창문에는 크리스
마스 트리의 불빛이 화사하게 반사되고, 흥겹게 떠드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마치 환 등을 비추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카메르게르스키 거리에 이르자 라라는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구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그녀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이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파샤한테 올라가서 모든 걸
다 얘기해버리자."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육중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9
  파샤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혀끝으로 연신 볼을 내밀면서 거울 앞에 서서 면도를 하고, 칼
라나 커프스 단추를 빳빳한 셔츠에 끼우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파티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중
이었다. 아직 순진하고 경험이 없는  청년이었으므로 노크도 없이 들어온  라라에게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자기 꼴을 보이게 되어 당황했다. 그는 이내  라라가 몹시 흥분돼 있다는 것을 알아챘
다. 그녀는 서 있기조차 힘겨웠다. 그녀는 마치 여울물을 건너듯이 한 걸음마다 스카프 자락을 제
치면서 걸음을 옮겼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파샤는 재빨리 그녀를 맞아들이며 불안하게 물었다.
  "내 옆에 좀 앉아요. 그대로 앉아요, 옷 갈아입지 말고. 시간이 없어요. 곧 가야하니까. 외투 소
매에 손대지 말아요. 잠깐만 저쪽을 보고 있어요."
  그는 라라가 시키는 대로했다. 라라는 영국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외투를 벗어 못에 걸고 권총
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나서 소파로 돌아왔다.
  "이젠 됐어요. 촛불을 켜요, 그리고 전등불은 끄고."
  라라는 촛불의 어슴푸레한 불빛에서 담소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파샤는 언제나 양초를 준비
하고 있었다. 창가에 있는 촛대에 새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불꽃이 펄렁거리며 조그만 불덩이가
튀더니 곧 화살 모양으로 가늘어졌다. 부드러운 불빛이 방안에 가득 찼다.  유리창의 얼음이 촛불
높이에서 녹아 까만 동그라미가 생겼다.
  "이봐요, 파샤." 라라가 입을 열었다. "난 지금 곤경에 빠져 있어요. 날 도와주어야 해요. 그렇다
고 너무 걱정할 건 없어, 그 이유는 묻지 말고.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 그
점만은 알아둬야 해요. 나한테는 항상 위험이 뒤따르고 있어요. 이건 진정으로 하는 말이에요. 파
샤가 진실로 나를  사랑한다며, 그리고 나를  파멸에서 구하고  싶다면 우리 하루속히  결혼해요,
네?"
  "그건 오히려 내가 항상 바라지 않았소?"  파샤가 말을 가로막았다. "난 라라가 날짜만  정하면
언제든지 결혼할 생각이오. 그보다도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분명하게 얘기해줘요.  수수께끼같이
공연히 나를 괴롭히지 말고."
  그러나 라라는 말꼬리를 흘리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그들은 라라의 슬픔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꽤 오랫동안 나누고 있었다.
    10
  그해 겨울에 유라는 대학 금메달 획득 시험에 제출하기 위해 망막 신경 이론에 관한 자기 학술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일반 기초 의학 과정을 끝냈을 뿐이었지만,  안과에 관해서는 전문
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각 생리에 대한 유라의 관심은 그의 성격상의 한 측면인 창의적 소질을 말해 주었으며, 그것
은 예술에 있어서의 상상적인 것과 이념의 논리 구조에 대한 흥미와도 관련이 있었다.
  토냐와 유라는 썰매를 타고 스벤치츠키  댁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는  길이었다. 그들은 소년
시절이 끝나는 무렵에서 청년 시절 초기까지 6년 동안을 한 집에서 살아왔지 때문에 서로를 속속
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버릇까지 같고, 상대방의  농담이나 익살에 웃는 모습도 닮았다. 지
금 그들은 썰매를 타고 가면서 이따금 몇 마디 주고받을 뿐 추위에 입을 봉한  채 제각기 상념에
빠져 있었다.
  유라는 시험 기일이 다가와서 논문 작성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간 축제 기분에 들뜬
세모 거리의 혼잡에 끌렸던 상념이 다른 데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는 고르돈이 편집을 맡고 있는 등사판  학생 신문에 블로크에 관한 논문을  기고하기로 오래
전에 약속했었다. 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젊은이들은 모두 블로크에 열중해 있었으나 유라와
고르돈만은 유독 그렇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도 그의 마음을 오래 사로잡고 있지는 못했다. 유라와 토냐는 옷깃 속에 턱
을 파묻고 얼어 들어오는 귀를 연신 비비면서 제각기 딴  생각을 하며 썰매를 타고 갔다. 그러나
같은 한 가지 일에 두 사람의 생각은 합치되고 있었다.  
  며칠 전 안나 부인의 방에서 있었던 일은  그들을 아주 딴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들은 마치
처음으로 눈을 뜨고 서로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유라는 오랜 친구인 토냐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은 없었고 너무나  잘 아는 대상으로
만 여겨 왔는데, 그 토냐가 뜻밖에도 어렵고 복잡한 존재로 변해서 한 여인으로  된 것이다. 그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황제나 영웅, 예언자나 정복자로서의 자신을 머리  속에 상상해보았으나, 그녀
를 여자로 생각해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토냐는 여자라는 어렵고도 지극히 고상한 임무를 그 가냘픈 두  어깨에 지고 있었
다. 그리하여 그는 뜨거운 동정과 수줍은 호기심을 느끼며 연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유라에 대한 토냐의 태도에도 역시 똑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 외출하는 것을 단념하는 편이 좋겠다고 유라는  생각했다. 그들이 집에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외출할 채비를 마쳤을  때 안나 부인의 병세가 악화됐다는 말
을 듣고 둘이서 부인 방으로 달려갔으나, 부인은 파티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고집했었다. 유라와
토냐는 창가에 다가가서 바깥 날씨를 내다보았다. 창가에서  물러날 때 레이스로 만든 커튼 자락
이 토냐의 옷에 붙어 마치 결혼식 면사포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것을 보고 방안의 사람들이 일제
히 웃음을 터뜨렸다.
  썰매에 타고 유라는 주위를 살폈다. 그는 조금 전에 라라가 본 적과 같은  광경을 보았다. 얼어
붙은 길을 썰매는 유독히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달렸고, 그 소리는 주위의 정원이나 길가의 수목
에 크게 메아리쳤다. 등불이 비치는 성에 낀 창문들은 마치 누르스름한 황옥으로 만든 귀중품 상
자를 보는 듯했다. 그 안에서는 화려한 모스크바의 크리스마스 생활이 숨겨지고 있었다. 크리스마
스 트리에 촛불이 타고, 가장복을 입은 손님들이 술래잡기나 반지 돌리기 등 여흥을 즐겼다.
  느닷없이 유라의 머리에 생각이 떠올랐다. 블로크는 러시아 생활의 모든 영역,  이 북국의 도시
생활에서, 최신 러시아 문학에서, 별빛 찬란한 이 신식  거리에서, 20세기 객실에 놓인 불빛 찬란
한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그의 크리스마스 정신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블로크에 대한 논문 같은
건 쓸 필요도 없다. 네덜란드 사람이 그린 그림<마가의  예배>를 러시아 판으로 눈과 승냥이 떼
와 검은 전나무 숲을 배경으로 그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카메르게르스키 거리를 지날 때, 유라는 어느 한 창문의 얼음이 촛불에 검게 녹아 동그랗게 뚫
어져 보이는 것을 눈 여겨 바라보았다. 그 구멍으로 촛불은 한 길가를 내다보면서 지나가는 사람
을 살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유라는 입 속으로 혼자 중얼
거렸다. 무언가 걷잡을 수 없는 어렴풋한 것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다음 구절이 떠오르기를 바랐
으나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11
  오래 전부터 스벤치츠키 댁의 크리스마스 파티는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밤 열 시가 되
면 아이들은 흩어져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을 위해 트리에 다시 불이 켜지고 아침까지 파티가 계
속된다. 사람들은 커다란 놋쇠 고리에 매단 무거운 포장으로 홀 한쪽 구석을 막아서 만든 '폼페이
실'에서 밤새도록 카드놀이를 한다. 그리고 새벽에 모두 함께 만찬을 드는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스벤치츠키의 조카 조르즈가 아저씨 내외의 방으로 가면서 현관을 지나
다 이렇게 물었다. 유라와 토냐도 역시 주인  부처에게 인사하러 가면서 옆걸음으로 걸으며 옷을
벗고 잠시 무도실을 기웃거렸다.
  옷자락을 스치며 서로 발을 맞추어 춤추는 사람들과 춤을 추지 않고 돌아다니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 층으로 불을  켜고 뜨겁게 숨쉬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둘레를 마치 검은
벽처럼 둘러싸서 움직이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춤에 열광한 사람들이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차장 검사의 아들인
법과 대학생 코카 코르나코프의 지휘로 둘씩 짝을 짓기도하고 둥글게 원을 그리기도 하면서 춤추
고 있었다. 홀 한쪽 구석에서 " 크게 돌아요!  손을 맞잡아요!"라고 외치면 사람들은 구령대로 움
직였다. "원무곡을 쳐주시오!"하고 코카는  피아니스트에게 소리치고 자기 파트너를  첫째 원무의
선두로 리드하여 크게 선회하면서 점점 원을 좁히기 시작했다. 차츰 원무곡은 사라져가는 메아리
처럼 여운을 남기고 잠잠해졌다. 일제히 박수를 쳤다. 서로 어깨를 비벼대며 웅성거리는 손님들에
게 얼음과 차가운 음료수가 고루 돌아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젊은 남녀들이 과일과 레몬 주
스를 마시면서 떠들며 웃고 있었다.  그들이 유리컵을 쟁반에 내려놓은  후에는 장내의 떠들썩한
소리와 웃음소리는 열 배나 더 요란스러워졌다. 마치 흥분제 음료수라도 마신 것처럼.
  토냐와 유라는 홀에 들어가지 않고 곧장 주인 부처의 거실로 갔다.
    12
  스벤치츠키 부처의 거실은 홀과 응접실에서 옮겨온 가구 때문에 발 들여놓을 자리도 없을 지경
이었다. 이 방은 스벤치츠키 댁의 파티를 준비하는 마법을 요리하는 작업실이었다. 물감과 아교풀
냄새가 풍기고, 색종이 뭉치와 선물 상자 그리고 양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주인 부처는 선
불에 꽂아 넣을 타드와 만찬회  식탁 좌석 카드에 이름을 써넣는  일과, 복권에 번호를 기입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조르즈가 거들어주고 있었으나 자꾸만 숫자를 틀려서 부처의 잔소리를 들었다.
부처는 토냐와 유라가 와서 무척 반가워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여서 허물없
이 도와달라고 했다.
  "우리 집사람은 손님이 와서 파티가 있기 전에 이런 일을 다 끝마쳐야 한다는 걸 몰라요. 이것
봐 조르즈, 또 번호가 틀렸어. 설탕 졸임 과일을 테이블에 놓고 빈 상자를 소파에 놓으면 어떡해,
그건 반대가 아닌가?"
  "아네뜨가 좀 나았다니 천만 다행이다. 삐에르와 나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여보, 좋아진 것이 아니라 나빠졌다지 않소. 당신은 무엇이든지 반대로 듣는군."
  유라와 토냐는 주인 부처와 조르즈를 도우면서 파티의 절반을 무대 뒤에서 보내고 말았다.
    13
  유라와 토냐가 주인 부처와 함께 있는 동안에 라라는 줄곧 홀에 있었다. 그녀는 야회복을 입지
않았고, 여기에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몽유병자처럼 코카 코르나코프와 춤을 추기
도 하고 홀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홀 쪽을 향해 앉아 있는 코마롭스키의 눈에 띄게 되기를 바라면서 한두 번 응접실 출입문 앞에
서 서성이며 멈춰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가리듯 왼손에 들고 있는 카드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실제 그녀를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라라는 분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때 낯선 처녀가 홀에서 응접실로 들어섰다. 코마롭스키는
전에 라라에게 곧잘 던지던 바로 그런 시선을 그 처녀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처녀는 반
색을 하며 얼굴을 붉히고 살며시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라라의 얼굴은
수치심에 이마와 목까지 온통 벌겋게 달아오르고 하마터면 버럭 고함을 지를  뻔했다. '새로운 희
생자'하고 생각했다. 라라는 마치 거울을 보듯 자기와  코마롭스키와의 과거를 보는 듯싶었다. 그
러나 그와 만나서 얘기할 결심은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좀더 적당한 기회에  시도할 것을 결심하
고 설레이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다시 홀로 돌아왔다.
  코마롭스키와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있던 세 사람 중에서 바로 그 사람 옆에 앉은 사람이 멋쟁
이 전문학교 학생의 아버지였다. 라라는 그 청년과 함께 춤을 추면서 주고받은 몇 마디 대화에서
그것을 알아차렸다. 청년의 어머니는 검은 눈에 시퍼렇게 불을 켜고, 목은  뱀처럼 불쾌하게 뽑아
들었고, 얼굴빛이 검은 키 큰  여인이었다. 그녀는 홀과 응접실을 수시로  왔다갔다하면서 춤추는
아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남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우연히  알았지만, 라라의
마음에 복잡한 감정을 일으킨 그 처녀는 청년의 누이동생이었으며 라라의 상상은 전혀 근거가 없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청년은 라라에게 자기 소개를 했지만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코르나코프, 코르나코프라
고 합니다." 그는 왈츠가 끝날 때 미끄럼을 타듯 라라를  의자까지 인도하고 나서 또 한 번 자기
성을 말하고 물러갔다. 이때 비로소 그녀의 기억 속에 무언가 불쾌한 것이 떠올랐다. 차츰 그녀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코르나코프-모스크바 중앙재판소 차장 검사. 치베르진을 비롯한 철도  종업원
을 재판에 제소한 사람이었다. 라라의 부탁으로 콜로그리보프가 그를 찾아가서 관대한 조치를 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아아, 그렇군... 재미있게 됐군... 코르나코프. 코르나코프.'
    14
  자정을 지나 한 시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유라의 귀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식당에서 차
와 비스킥을 들며 잠시 휴식이 있는 후 또다시 댄스가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촛불은 다
타버렸으나 이제 바꾸어 꽂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유라는 넓은 홀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낯선 남자와 춤을 추는 토냐를 지켜보고 있었다. 토냐
는 유라 옆을 미끄러져 지나가면서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물고기처럼 야회복 꼬리를 흐느적거리며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그녀는 기분이 몹시 들떠 있었다.  휴식 시간에 식탁에 앉아서도 차를  거절하고 귤 여러 개로
갈증을 풀었다. 귤껍질을 벗기고는 조그만 손수건을 꺼내 손끝과 입 가장자리를  닦곤 했다. 웃으
며 쉴새없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연방 손수건을 꺼냈다가는 다시 허리춤이나  소매 속에 기계적으
로 꽂아 넣곤 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낯선 남자와 춤을 추며, 불쾌한 표정을 짓고  구석으로 물러 서 있는 유라의 곁을
옆으로 지나치면서 장난스럽게 그의 손을 꼭 쥐어주고는  의미 있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쥐고
있던 손수건이 유라의 손에 쥐어졌다. 그는 그것을 입술에 갖다 대며 눈을 감았다. 손수건에서 귤
향기와 열기 띤 토냐의 손  냄새가 뒤섞인 감미로운 향기가 풍겼다.  그것은 유라의 인생에 있어
새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여지껏 경험하지 못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짜릿하게 흐르는 야릇한
감정이었다. 순진한 소녀의 향기는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처럼 친밀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유라는 손수건을 잡은 손으로 눈과 입술을 가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 집안에서 총소리가 울
려 퍼졌다.
  일제히 머리를 돌려 홀에서 응접실  사이의 포장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으나 잠시 후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뛰어 다니는 사람,  코카 코르나코프의
뒤를 쫓아 총성이 울린 응접실로 달려가는 사람, 우는  사람, 고함지르는 사람, 큰 소리로 지껄이
는 사람, 그야말로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무슨 짓이야!" 코마롭스키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여보, 당신 살았수? 여보." 코르나코프 부인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드로코프 선생이 여기  오
셨다고 했는데, 그분이 어디 계시죠? 아아, 어디 계세요, 의사 선생님은? 여보, 제발 좀 가만히 있
어요. 당신은 가벼운 상처라고 하지만, 난  정말 십년 감수했어요! 당신은 가엾은 순교자예요.  그
모든 죄인들을 다스렸다고 이런 보복을 받다니!  이 인간의 쓰레기야! 네년의 눈깔을 뽑아버리겠
다! 이 능구렁이 같은 년, 자, 이년을 놓치지 말아요!  뭐라고, 코마롭스키 씨? 당신을 겨누었다고
요? 당신을 말이에요? 이런 비극에, 코마롭스키 씨, 농담을 할 때가 아니예요. 코카, 코카야! 네가
말 좀 해라! 저년이 너의 아버지를 죽이려 한 거야... 그렇지... 하지만, 하나님이 도우셨어...  코카!
코카야!"
  사람들이 응접실에서 홀로 밀려나왔다. 그 속에서  코르나코프 검사는 껄껄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손님들을 안심시켰다. 가벼운 상처를  입어 피가 흐르는 왼손을  깨끗한 냅킨으로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한쪽에서 몇 사람들이 라라의 팔을 잡고 끌고 나왔다.
  유라는 그녀를 바라보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바로 그 여자야! 또다시 이런 이상한  상황
속에서 만나다니! 그리고 이번에는 그 백발의 사나이가 나타나다니. 유라도 이번에는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알려진 변호사 코마롭스키이며 유라의  아버지 유산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인사를 할 필요도 없이 유라와 그는 서로 모르는 체했다. 그런데 저 여자는... 그러니
까 총을 쏜 것이 바로 저 여자란 말인가? 검사에게? 필시 정치적 동기겠지. 가엾게 되었어. 저 어
엿하고 아름다운 용모! 저럼 몹쓸 놈들, 마치 도둑이라도 잡듯이 팔을 비틀어 올리다니!
  그러나 곧 잘못 본 것을 알게 되었다. 라라는 서 있을 수가 없을 만큼 다리가 휘청거려서 그녀
를 부축하며 가까운 의자에 데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유라는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먼저 피해자 쪽에  관심을 표시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 코르나코프에게 다가갔다.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저는 의사입니다. 손을 보여주십시오.  아아, 다행이로군
요. 붕대를 감을 것까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옥도정기를  좀 발라둡시다. 주인 마나님께서 나오셨
으니 좀 부탁드리죠."
  스벤치츠키 부인과 토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다가와서 빨리 외투를 찾으라고 했다.
급히 집으로 돌아오라는 기별이 왔다는 것이다.
  유라는 최악이 사태를 예상하며 모든 일을 다 잊어버리고 외투를 입으려고 달려갔다.
    15
  안나 부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유라와 토냐가 허겁지겁 층계를 달려 올라가 방으
로 들어갔을 때는 숨을 거둔지 10분이 지난 후였다. 급성 폐기종에 의한 발작적인 질식이 원인이
었으며 의사의 오진이었던 것이다. 처음 몇 시간 동안 토냐는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경련을 일으
키며 흐느껴 울기도 하면서 아무도  알아보지를 못했다. 다음날은 기분이  좀 진정되기는 했으나
유라나 아버지가 말을 건네도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입을 열고 말할 듯하다가도 슬픔이 복받쳐
올라와 다시 발작을 일으키듯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추도식이 거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토냐는 관대 위에 안치된 화환에 덮인 관머리를 그 깨끗하고
길쭉한 손으로 부여잡고 돌아가신 어머니 곁에 오래도록  무릎을 끓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사
람들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혹시 누군가 가까운 사람의 시선과 마주치게 되면,  벌떡 일어나서 울
음을 참으며 위층 자기 방으로 달려 올라가 침대에 쓰러져 절망의 눈물로 베개를 적시곤 했다.
  슬픔과 몇 시간씩 서 있어야 하는 곤욕 그리고 수면 부족, 낭랑하게 들리는  찬송가 소리, 밤낮
으로 환히 타오르는 촛불, 게다가 감기까지 들어서 유라의 정신이 나른한 어지러움과 끓어오르는
비탄과 허탈에 싸이게 됐다.
  10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만 해도 유라는  아직 어린애였었다. 그때 슬프고 무서워서 떨
며 울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당시 어린 그는 자기 자신의 개성이 문제되는 것은 아
니었다. 유라라는 인물이 존재하거나, 무슨 가치나 관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외부나 주위의 모든 사물뿐이었다. 외계가 숲처럼 울창하게 사방으로부터 무
서운 힘으로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가 공포감에 휩싸인 까닭은 여
태까지 어머니 곁에 붙어 숲속에 있던 자기가 이제는 그 숲속에 혼자 외로이 남게  된 것을 발견
했기 때문이었다. 그 숲은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름, 상점의 간판, 종각의 황
금빛 지붕, 성모 마리아의 성상을 실은 마차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말 탄 사람들, 시장 상점의 진
열대, 별들이 반짝이고 하나님과 성인들이 살아 계시는 높은 밤하늘...
  그 아늑히 높은 하늘이 어린 시절에 유모가 하나님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는 유라의 방까지, 유
모의 치맛자락 높이에까지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골짜기에서 자라난 호도나뭇가지 끝처
럼 손이 닿을 만큼 가까워서 가지를 휘어잡고 호도를 딸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유라는 어렸을
때 금빛으로 도금한 대야에 몸을 담그고는 황금과 불로 목욕하였다고 생각하고 유모를 따라 자주
조그만 교회에 아침 예배나 미사에 갔었다. 교회에서는 하늘의 별이 성상 앞의 등불로 변하고, 하
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고, 크고 작은 모든 것이 저마다 적당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른들의 현실  세계였으며, 그것은 숲처럼 그의  주위를 어둡게 둘러싼
도시와도 같았다.
  이 무렵 유라는 모든 자신의 반동물적인 신앙으로서 파수꾼처럼 이 숲의 신을 믿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때와는 아주 달라졌다. 중학교와 대학에서 공부하는 12년 동안에 유라는 고전과 성서,
전설과 시인, 역사와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이런 것들은 곧 그의 가문의 기록이나 족보와 같은 것
이었다.
  지금 그는 삶도 죽음도 그 밖의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 세상의 모
든 사물이 그의 사전 속의 낱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우주와 대등한 입장에  있다고 느꼈다. 그
리하여 안나 부인의 장례식에서 어머니의 장례식 때와는  다른 감명을 받았다. 어머니의 장례 때
는 고통을 잊고 공포에 떨면서 기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전하는  , 직접 관
련된 말처럼 기도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무언가 분명한 의미가
깃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조상으로서 숭배하던  하늘과 땅의 지고한 힘에 대한 경건한
감정에는 종교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16
  "거룩하신 주님이시여, 전능하시고 거룩하시며 영원하신 주님이시여, 우리에게 자비를 내려주소
서."
  그는 어디 갔을까? 사람들이 관을 끌어내고 있는가 보다. 어서 잠을 깨워야겠다.
  새벽녘에, 다섯 시가 지나서 그는 옷을 입은 채로 소파에 쓰러져 잠에 떨어져  있었다. 아마 그
는 열이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 사람들이 집안을 온통  뒤지고 있지만 그가 도서실 구석 책꽂이
선반 뒤에 누워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유라 도련님, 유라 도련님!" 마르켈리 부르고  있었다. 발인이 시작되어 마르켈은 화환을 밖으
로 들어내는 데 유라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라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가 않아서 찾
고 있는 중에 마르켈은 화환을  쌓아둔 침실에 들어갔다가 그만 갇혀  버렸다. 복도의 옷장 문이
열려 침실 문이 닫혀버렸던 것이다.
  "마르켈! 마르켈! 어디 있어? 유라!" 아래층에서 두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마르켈은 힘을 모아
일격에 문을 간신히 박차고 나와 화환 몇 개를 들고서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거룩하신 주님이시여, 거룩하고 전능하시며, 거룩하고 영원하시며..."
  골목길로 조용히 흘러나온 목소리가 여기에 잠시 머물렀다. 부드러운 깃털을 하늘에 살짝 비질
이라도 하듯이 화환과 행인과 깃털  장식을 붙인 말머리, 신부 손에  쥔 사슬 끝에서 흔들거리는
향로 그리고 발밑의 흰 대지까지 모든 것이 흐느적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듯싶었다.
  "아아, 유라가 나왔군!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어!" 슈라 슐레진게르가 그이 어깨를 잡아 흔
들었다. "지금 발인을 할 참인데 어디서 뭘하고 있었니? 우리와 함께 가겠니?"
  "네, 가구말구요."
    17
  영결식이 끝났다. 거지들이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두 줄로 빽빽이 늘어섰다. 영구차와 화환을
실은 이륜마차, 그리고 고인의 친정인 크류게르네 마차가 장송 행렬의 선두로  자리를 옮겼다. 교
회당 옆에는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슈라 슐레진게르가 교회당에서  울면서 나오더니 눈물
젖은 얼굴에서 베일을 쳐들고 마차가 모여 선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군중 속에서 운구할
사람들을 찾아 손짓으로 불러모으고, 함께 다시 교회당으로 들어갔다.  교회당에서 사람들이 차츰
더 몰려나왔다.
  "이번엔 안나 이바노브나가 갔구만. 작별 인사를 하고 이제 머나먼 곳으로 떠나가 버렸어."
  "음, 좋은 세상 다 살았으니 이젠 쉬러 간 거지."
  "마차로 가시겠소, 아니면 걸어서 가시겠소?"
  "너무 오래 서 있었으니 다리를 좀 움직여야지. 좀 걷다가 마차를 탑시다."
  "푸브코프가 애통해하는 걸 보았소?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인의 얼굴에서 한시도 눈을 때지 않
더군. 그 옆에는 바로 남편이 있었어."
  "그 사람은 한평생 그 부인한테서 눈을 떼지 않았거든."
  사람들은 이 거리의 반대쪽 끝에  있는 묘지까지 줄지어 걸어갔다. 매서운  추위가 놈 풀린 것
같았다. 조용하면서도 음산한 날씨였다. 추위와 함께 인생도  퇴장한 것이다. 장례를 치르기엔 알
맞은 날씨였다. 땅 위에 더렵혀진 눈은 검은 비단 천을 덮은 듯 탁하게 보이고, 교회 부속 묘지의
울타리 안의 전나무들은 젖어서 변색한 은처럼 거무칙칙한 것이 흡사 상복이라도 입은 것처럼 보
였다.
  유라의 어머니도 바로 이 묘지에 모시고 있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한 번도 찾아와 보지를 못
했었다. 유라는 멀리서 어머니 무덤 쪽을 바라보며 옛날처럼 "엄마"하고 입 속으로 불로 보았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말끔히 청소된 좁다란 길을 따라 묵묵히 흩어져 갔다. 구불구불한
좁은 길은 슬픔에 잠김 사람들의 발걸음과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로메코 교수는 토냐를 부축하
면서 걸었다. 크류게르 댁의 가족들이 그 뒤를 따랐다. 토냐에게는 검은 상복이 잘 어울렸다.
  둥근 지붕에서 십자가를 내려 드리우고 있는 쇠사슬이나 수도원의 분홍색  벽에는 성에가 허옇
게 곰팡이처럼 끼어 있었다. 수도원 앞뜰 한쪽 구석 별  사이에 매 놓은 빨랫줄에는 빨래가 걸려
있었다. 젖은 소매가 축 늘어진 셔츠, 크림빛 상보, 제멋대로 짜서 삐뚜름하게 걸린 시트. 새 건물
이 들어서서 지금은 달라 보이지만, 그래도 오래  전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라는 남들보다 앞서서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이 따라오기를 기
다리곤 했다.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안겨다 준 그 서글픔에 보상이라도 하
듯이, 그는 명상하고 사색하고 새로운  형식으로 미를 창조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하류를 향해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강물처럼 무슨 힘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강한 욕망이었다. 이
제 그는 예술에는 언제나 두 가지의 끊임없는 관심사가 있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예술은 항상 죽
음을 상상하며 또 이것으로 항상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위대하고 참된 예술은 요한 묵시록
과 같은 것이며, 그것을 이어받은 데 지나지 않는다.
  유라는 즐거운 기대를 품고, 하루나 이틀 대학과 집을 떠나 혼자서 조용히 안나 부인을 추도하
는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던져준 여러 가지 일들. 안나 부인의 뛰어난  성품의 몇 가
지 서사문을 쓰며, 상복을 입은  토냐, 장례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생긴  일, 먼 옛날 소년 시절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바라보며 그가 울던 곳에 걸려 있던 세탁물들, 이런 것들을 시로 쓰고 싶었
다.
      4.피할 길 없는 운명
    1
  라라는 반쯤 실신한 상태로 스벤치츠키 부인 침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주인 부처와 의사 드
로코프와 하인들이 숙덕거리고 있었다.
  저택 안은 텅 비었으며 어두컴컴했다. 다만 작은 응접실 처마 끝에 걸어놓은 등불만이 길게 늘
어선 방들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코마롭스키는 여기가 마치 제집이나 되는 것처럼 당당한 걸음걸이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
다. 그는 소식을 알려고 침실을 기웃거리는가 하면, 반짝이는 장식을 매단  크리스마스 트리 옆을
지나 식당을 빠져서 되돌아가곤 했다. 식탁에는 손도 대지 않은 요리 접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마차가 창가를 지나갈 때마다 파르스름한 유리 술잔들이 짤그락 소리를 냈다. 생쥐 한 마리가 접
시 사이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코마롭스키는 몸둘 곳을 몰라 안절부절했다. 서로 엇갈리는 감정이 그의 가슴에 조여들었다. 이
런 수치스런 일이 어디 있담!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의 사회적  지위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평판이 땅에 떨어질는지 모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화제거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소문이 벌써 돌리 시작했다면 더 퍼지기 전에 싹부터 잘라버려야 한다.
  그 밖에도 그가 흥분하는 다른 이유는 그 모험적이고 광적인 처녀가 어딘가  또다시 마음에 끌
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눈에 그녀는 다른 여자와는 달랐다. 그녀가  보통 여자와 다르다는
건 전부터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딘가 비범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그토록 깊고
아픈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단 말인가! 그리고 반항적으로 난폭하게 자기 운명의 타개를 위
해, 인생의 재출발을 위해 행동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그녀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방부
터 얻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아니, 그녀 앞에 얼
씬하지 말고 멀찍이 물러나서 방관만 해야 한다.  원래가 격하기 쉬운 성질이기 때문에 잘못했다
가는 또다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큰일이야! 이런 사건은 결코 불문에 붙일 수는 없지 않는가! 당국에서 눈감
아 줄 리가 없었다. 아직 날도 밝지 않았고 사건 후 두 시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경찰이 두 번
이나 찾아왔었다. 코마롭스키는 주방으로 가서 경찰관들을  만나 변명을 늘어놓고 그들을 무마하
기에 진땀을 뺐다.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모든 일이 더욱더 복잡해질  것이다. 라라가 코르나코프 검사를 겨눈 것
이 아니라 코마롭스키를 쏘려 했다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일이 못 된다. 혐의의 일부가 해소될 뿐, 역시 그녀는 기소를 면치 못할 것이다.
  물론 그로서는 그녀가 기소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재판을 받게 될 경우,
그녀가 총을 쏘았을 때는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는 전문가의 증언
을 정신과 의사한테서 받아서 공소를 기각시키도록 해야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코마롭스키는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게 되었다.  밤이 지났다. 빛줄기가
방마다 기어들어, 도둑이나 집다리처럼 의자와 테이블 밑을 기웃거렸다.
  다시 한 번 침실에 들러 라라가 여전히 정신이 들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코마롭스키는 스벤
치츠키 댁을 떠나 전부터 친분이  있는 루피나 오니시모브나를 찾아갔다.  그녀는 국외로 도피한
정치 망명가의 아내로 변호사였다. 방이 여덟 개나 있는 아파트가  그녀에게 너무 커서 방 두 개
를 세놓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요새  비어 있어서 그는 라라를 위해서 그것을 얻기로  했다. 몇
시간 후에, 급성 뇌척수막염 때문에 신경성 고열로 혼수 상태에 있는 라라를 그리로 옮겼다.
    2
  루피나 오니시모브나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으며 편견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리고 '긍정적이고 긴요한 것'이라고 그녀가 생각한 것은 무엇이건 동조하는 여성이었다.
  장농 위에는 저자 자신의 헌시가  씌어진 에르푸르트 강령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녀의 남편
'나의 선량한 보이트'가 스위스의 유원지에서 플레하노프와 함께  찍은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두 사람 다 알파카제의 자켓에 파나마 모자를 쓰고 있었다.
  루피나 부인은 자기 집에 새로  세든 환자가 첫눈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라가 꾀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열이 심해서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라
라가 토굴 속에서 미친 그레에트헨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라라에 대한 경멸을 표시하느라고 유난히도 성가시게 움직였다. 그녀는 문을 쾅쾅 여닫
기도 하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집안을  쏘다니는가 하면 온종일
방의 창문을 열어젖뜨리기도 했다.
  그녀의 아파트는 아르바트거리에 있는 큰  건물의 맨 위층에 있었다.  동지가 지나면 범람하는
강처럼 푸르고 맑고 넓은 하늘이  창문마다 가득 찼다. 겨울이 반쯤  지나면 다가올 봄의 징후와
예고가 벌써 방안에 흘렀다.
  열린 창문으로 따뜻한 남풍이 불어왔다. 멀리 철도역에서 기관차들이  해태처럼 짖어댔다. 라라
는 병상에 누워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아직 철이 덜 들었던 7,8년 전에 우랄 지방에서 모스크바로  올라온 첫날 저녁의 일을 자주 상
기하고 있었다.
  정거장에서 마차를 타고 모스크바 시내의 반대쪽에 있는 여관을 향해 침침하고 좁은 거리를 몇
개나 지나왔었다. 가로등이 간간이 나타나 마부의 꼽추  같은 그림자를 길가의 건물 벽에 비치곤
했다. 그 그림자는 점점 커지면서 마치 거인처럼 지붕까지 퍼져 올라갔다가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간 다시 처음부터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머리 위 어둠 속에서는 모스크바 시내의 무수한  교회당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거리에는 전차
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달렸다. 그러나 화려하게 장식한 진열장이며 눈부신 전등불까지도 종소
리나 전차 바퀴처럼 제각기 자기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라라의 귀를 어지럽게 했다.
  여관방에서는 엄청나게 큰 수박을 보고 놀랐다.  그것은 코마롭스키의 환영 선물이었으나 라라
한테는 부와 권세의 상징으로 보였다. 코마롭스키가  이 수박에 칼을 꽂아, 짙은 녹색  공이 둘로
쪼개지며 달콤하고 차가운 붉은 속살이 보일 때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랐으나, 그 한 조각을 거절
하지는 못했다. 향기로운 과육이 목에 걸리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삼켰다.
  그때 값비싼 음식이나 모스크바의 밤 풍경에 위협을 느꼈던 것처럼  그녀는 후에 코마롭스키에
게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모든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코마롭스키는  아주 딴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그녀와의  과거를 들먹이지도 않았거니와
그녀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항상 멀찍한 거리에서 아주 점잖게 도움을 제의해오는 것이다.
  콜로그리보프의 방문은 전혀 문제가 달랐다. 그의 방문은 라라에게 무척 반가웠다. 그는 훤칠한
키에 호남이었으며 활기와 재치에 넘쳐서 빛나는 눈동자에 지적인 미소를 띄고 있는 이 방문객은
그녀의 방을 통째로 차지해버린 것처럼 방안이 어쩐지 좁아진 느낌이었다.
  그는 이따금 손바닥을 비비며 라라의 침대 곁에  앉았다. 페테르부르그 국무 회의에 그가 초청
되어 원로 의원들과 담소할 때는 마치 그들을 학생 다루듯이 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 그는 눈앞
에서 최근까지 자기 가족의 일원으로  친딸처럼 지내던 처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식구한테
그랬듯이 그는 이 처녀한테도 담담하게 이야기하면서  자상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라라를
어른처럼 뚝뚝하고 무관심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떻게 말하는 것이 그녀의 감정을 건드
리지 않게 될지를 잘 몰라서,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쩌자고 그
런 짓을 했지? 그런 멜로드라마는 누구한테 필요하지?"
  그는 입을 다물고 습기로 얼룩진 벽과  천장을 휘둘러보며 고개를 나무라듯 가로  저으며 말을
이었다.
  "듀셀리도르프에서 회화와 조각, 원예의 국제 전람회가 열려요. 그래서 나도 구경갈 참이야. 그
런데 이 방은 습기가 많군. 그리고 어디에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지, 이렇게 떠돌이로만 지내서 되
나? 우리가 알기엔, 이 집주인 루피나는 좋은 여자가 못 돼요. 옮기는 게 어떨까? 이 기회에 거처
를 바꾸고 공부를 계속해서 학교도 마치도록 해야지. 내가 아는 화가 한 사람이 있는데, 2년 예정
으로 투르키스탄 지방에 여행하기로 돼 있어. 아틀리에에 딸린 방이 있는데,  독립된 아파트나 다
름없지.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가구까지 그대로 다 빌려주겠다는 거야. 내가 말해 줄 테니 그리로
옮기면 어떨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용건이 있는데, 다름 아니라... 전부터 생각해  오던 나의 신성
한 의무로... 여태껏 리파에 대한... 리파가 졸업을  했으니... 적은 돈이지만 리파의 졸업 기념으로
주는 것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어요... 아니,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고... 이건 꼭 받아줘야
겠어... 부탁이야..."
  라라가 눈물을 흘리며 완강히 거절했지만, 그는 1만  루불리짜리 수표를 억지로 떠맡기고 돌아
갔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녀는 콜로그리보프가  알선해준 새로운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스몰렌스크
시장 가까이 있는 자그마한 구식 2층  석조 건물 위층이었다. 아래층은 창고로  쓰이고 있었는데,
짐마차꾼들이 살았다. 자갈이 깔린 뜰에는 언제나 귀리와 건초가 흩어져 있었다. 비둘기들이 구구
거리며 돌아다니다가는 포석 사이를 쥐들이 지나갈 때마다 라라의 방문  높이까지 푸드득 푸드득
날아오르곤 했다.
    3
  파샤는 라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지냈다.  그녀가 중태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만나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는 이번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가 보기엔 라라는 그저
아는 사람밖에 안 되는 사나이를 죽이려 했으나, 뜻밖에도 살인 비수의 상대자였던 그 사람이 사
건 후 오히려 그녀를 보호하여 손을 써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건이 일어난 것은 크리스마스날
밤 타오르는 촛불 앞에서 그녀와 잊을 수 없는 대화를 가진 직후의 일이 아닌가! 만약 그 사람이
손을 써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 사나이 덕분으로 그녀
는 형벌을 면하고 무사히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파샤는 이러한 사정들을 도무지 이
해할 수가 없어서 더욱 고민하게 되었다.
  건강이 회복되자 라라는 파샤를 불러서 말했다.
  "난 나쁜 여자예요. 당신은 내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고 있어요. 언젠가는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안돼요. 그걸 얘기하려면 울음부터 터져나와서 안돼요.  그보다도 날 잊어줘요. 나는 당신
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예요."
  이런 가슴 아픈 장면이 자주 되풀이되었으며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라라가 아
르바트 거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있었던 일이었다.  집주인 루피나는 복도에서 눈이 벌겋게 부
어오른 파샤의 얼굴을 보고는 제 방으로 달려들어가 소파에 쓰러져 배를 움켜쥐고 웃어댔다. "아
아, 정말 참을 수 없는 노릇이야! 그야말로 비극의 여주인공이로군! 아하하하."
  파샤를 떳떳치 못한 애착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아예 단념하게 함으로써 그의
고민에 종지부를 찍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라라는 파샤에게 선언했다. 자기는 그를 사랑하지 않으
므로 헤어지기로 결심했다고. 그러나 이런  말을 하면서도 흐느껴 쏟아지는  눈물은 파샤에게 그
말을 믿을 수 없게 했다. 그는 라라가 죽을 죄를 범한 것이나 아닐까 의심하게 되어서, 그녀의 말
은 믿지 않게 되었고 그녀를 저주하며 증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칠 듯이 그녀를 사
랑하여, 그녀가 생각하는 일에까지, 심지어는 그녀의 머리 밑의 베개까지에도 질투를 느끼는 것이
었다. 이대로 가다간 양쪽 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시바삐  결단을 내려서 행동해야만 했다.
그래서 졸업 전이라도 곧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부활제  다음 주 월요일에 식을 올릴 예정이었으
나 라라의 청에 따라 다시 연기되었다.
  성신강림제 다음 주 월요일에 그들은 드디어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그때 이미 그들의 졸업
시험 합격이 확실해지고 있었다. 결혼식의 모든  절차는 류드밀라 체푸르코가 도맡아서 처리해주
었다. 류드밀라는 라라의 동창인 뚜샤의 어머니로서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가슴이 풍만하고 낮
은 음성으로 말하며 노래를 잘 부르는 수다쟁이  여자였다. 그 밖에도 그녀는 실제의 얘깃거리나
미신 따위의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류드밀라는 라라가 결혼식장으로 떠나기 전에 라라를 거들어주면서 마치 집시  같은 낮은 목소
리로 결혼이란 '제단으로 인도되는' 것이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날 시내는 굉장히 무더운 날씨
였다. 교회당의 황금빛 둥근 지붕과 새로 모래를 깐 정원의 좁다란 길이 누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성신강림제 전날 밤에 잘라낸 푸른 자작나무 가지가 불에 그을린 것처럼 먼지투성이 잎사귀를 돌
돌 말고 교회당 난간 밑으로 축 늘어뜨려져 있었다. 이글거리는 햇빛이 숨을 콱콱 막히게 했으며
눈에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날은 수천 쌍의 결혼식이 일제히 거행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
가씨들은 모두들 신부처럼 밝은 빛 옷을 입었고,  청년들은 축제일답게 머리 그름을 바르고 검은
양복을 입고 맵시를 부리고 있었다.  모두들 더위에 웅성거렸다. 라라가 카페트  위를 걸어나가자
또 다른 친구의 어머니 라고지나가 그들의 앞날의 부귀영화를 빌면서 은전 한 줌을 발 앞에 던졌
다. 이러한 류드밀라의 미신은 라라에게, 주례가 혼례관을 머리 위에 씌워줄  때 맨손으로 성호를
긋지 말고 베일의 자락이나 레이스의 깃으로 손가락을 감싸듯 하라고 가르쳐주기도 했다. 라라는
자기의 장래를 파샤를 위해 바칠  각오였으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촛불을 낮추어 들었다. 그러나
파샤가 더욱 낮게 드는 바람에 결국은 그녀의 촛불이 높아져서 소용이 없었다.
  교회에서 곧장 그녀의 거처인 아틀리에로 돌아와  피로연을 베풀었다. 손님들이 "써서 마실 수
없구나!"하고 소리치면, 또 다른 한 패가 "좀 달게 하라구!"하고 호응했다. 신란 신부는 수줍게 미
소를 지으며 키스를 했다. 류드밀라가  축하의 노래로 <포도밭>을 부르고  '하나님은 그대들에게
사랑과 지혜를 주시도다'라는 후렴을 되풀이하고 나서, 다시 <묶었던 머리를 풀어 아름다운 머리
카락으로>를 불렀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단둘이 남게 되자 파샤는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오히려 불안을 느
끼게 되었다. 한길 저쪽에 가로등이 환하게 비치고 있어서, 라라가 아무리  커튼을 당겨도 좁다란
판자쪽 같은 한 줄기 불빛이  방안으로 흘러들었다. 파샤는 그 빛을  따라 누군가 엿보고 있기나
하는 것만 같아서 좀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는 라라나 자기  자신이나 또 그녀에 대한
자기의 애정보다도 가로등 불빛에 대해 더 신경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영원처럼 계속되는 이 한밤에 파샤 안치포프는 희열의 절정에서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져 버렸
다. 그의 의혹과 추측은 라라의 고백과 엇갈렸다. 그의 물음에 그녀가 대답할 때마다 그의 가슴은
마치 단애 속으로 나는 것  같았다. 그의 상처입은 상상력은 그녀의  새로운 고백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아침까지 이야기로 지샜다. 파샤의 생애를  통해 그의 마음에 이 밤처럼 감동적이며
급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던 적은 없었다. 여전히 자기가 파샤 안치포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아침에 그는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
    4
  열흘 후에 친구들이 파샤와 라라의 그 방에서 송별회를 열었다. 파샤와 라라 둘다 우수한 성적
으로 졸업하여, 우랄 지방의 같은 도시로 취직되어 그 이튿날 출발할 예정이었다.
  다시 그들은 마시고 노래부르며 떠들어댔으나 이번엔 노인이 없이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손님들이 모여 있는 아틀리에와 침실 사이의 칸막이 뒤에는 커다란 고리짝과 라라의 조그만 바
스켓, 트렁크, 식기 등을 넣은 궤짝 한 개,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여행용 가방이 몇 개 놓여 있었
다. 이삿짐은 꽤 많은 편이었다. 일부는 이튿날 아침에  수하물로 부칠 작정이었다. 짐은 거의 다
꾸린 셈이지만 아직 궤짝과 바스켓은 열린 채 얼마간의 여유가 있었다. 라라는 빠뜨린 물건을 생
각 해내며 연방 바스켓에 쑤셔 넣기도 하고 짐을 다시 꾸리기도 했다.
  라라가 학교 교무실에서 출생 증명이나 기타  서류를 떼어 가지고 돌아왔을 때  파샤는 집에서
벌써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수위가 짐 꾸릴 포대와 든든하고 굵은 밧줄을
들고 들어왔다. 수위를 돌려보내고 나서  라라는 악수와 키스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칸막이
뒤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그녀가 다시 아틀리에에 나타나자 손님들은 박수로 그녀를 맞이
하고 제각기 자리에 앉았다. 며칠 전 결혼식 때와 같이 떠들썩한 연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스스로
나서서 옆사람 술잔에 보드카를 따라주기도 하며  식탁 중앙의 빵과 디저트 그리고  요리 접시를
향해 포크를 쥔 손들이 뻗기 시작했다. 일장 연설과 건배가 되풀이되고 농담과 익살이 오갔다. 이
젠 술에 취한 사람도 있었다.
  "난 피곤해 죽겠어요." 남편 곁에 앉아 있던 라라가 말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당신이 원하던
대로 된 셈이군요?"
  "응."
  "하여튼 유쾌한 기분이에요. 난 정말 행복해요. 당신은요?"
  "나도 역시 좋아. 그러나 아직 할 얘기가 많아."
  이 젊은이들끼리의 송별회에 코마롭스키가 예외적으로 참석하도록 허락되었다. 연회가 끝날 무
렵에 그는 이제 두 젊은 친구가, 모스크바를 떠나면 자기는 무척 쓸쓸할 것이며 모스크바는 사하
라 사막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말을 시작하다가 그만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 울음이 치밀어 오르는
바람에 송별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그들이 그리워질 때에는 그들이 자리잡게 될 유라친으로 편지를 내거나 찾아가도 좋으냐
고 파샤의 의사를 물었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어요." 라라는 큰 소리로 냉정하게 대꾸했다. "편지를 쓴다거나 사하라 자
막 같다는 말은 모두 쓸데없는 소립니다. 거기까지 찾아올 생각은 꿈에도  마세요. 우리가 없어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예요. 우린 그렇게까지 중요한 존재는 아니니까요. 아마  당신은 곧 다
른 젊은 친구들을 발견하게 되겠죠. 그렇지요, 파샤?"
  자기가 지금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조차 아주 잊어버리고 라라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 칸막이 안의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고기 다지는 기구를 분해
하여 식기 궤짝 구석에 넣고 그 위에다 밀짚을 치웠다.  그러다가 궤짝 뾰족한 모서리에 긁혀 하
마터면 손을 다칠 뻔했다.
  그러다가 칸막이 바깥에서 갑자기 함성을 터뜨리는 소리에 라라는 문득 손님들이 와 있다는 것
을 상기했다. 사람들은 취기가 좀 돌게 되면 아주 취한 척하기를 좋아하며 취하면 취할수록 더욱
취한 체하게 되는가 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때 열린 창문을 통해 마당에서 아주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
다보았다.
  두 발이 묶인 말이 절룩거리며 마당에서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누구의 말인지 모르지만 어떻
게 잘못되어 이 집 마당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지만 벌써 밖은 훤히 밝았
다. 잠에 취한 도시는 죽은 듯 새벽의 푸르무레한 잿빛 냉기에 잠겨 있었다. 라라는 눈을 감았다.
발 묶인 말의 이상한 말발굽 소리는 어딘가  멀고 먼 시골의 아름다운 마을로 그녀를  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가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다. 라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러 나갔다. 나쟈가 온 것이다! 라라는 급히  친구를 맞으러 달려나갔다. 나쟈는 정거장에서
곧장 이리로 온 모양인데 신선한 매력에 넘쳐 있었으며, 마치 두플랑카 계곡에 피어난 백합꽃 향
기를 그대로 날라온 듯싶었다. 라라와 나쟈는 한동안 할 말을  잊은 듯 서 있더니 부모가 보내는
값비싼 선물을 가져왔다. 여행 가방에서 보석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목걸
이를 라라 앞에 내놓았다.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나왔다. 취기가 좀 가신 손님 하나가 말했다.
  "장미빛 히야신스로군, 그래 장미빛이야. 놀랍군. 이건 다이아몬드 못지 않게 귀한 보석이지."
  그러나 나쟈는 황색 사파이어라고 정정했다.
  라라는 나쟈를 자기 옆자리에 앉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놓고도 접시  곁에 놓인 목걸이에
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석은 자주빛 바탕의 상자 가장자리로  굴러가서는 이슬처럼 빛나는가 하면  조그만 포도송이
같이 보이기도 했다.
  술이 깬 손님들이 나쟈를 상대로 또 마시기 시작했다. 나쟈는 곧 취하고 말았다.  얼마 안 있어
모두들 잠들어버렸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아침에 라라와  파샤를 정거장까지 배웅하려고 그냥 머
물렀던 것이다. 반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쪽 구석에서 되는대로 누워서 코를 골고 있었다. 라라
자신도 동창생인 이라 라고지나가 잠든 소파에 기대어 어떻게 깜박 잠이 들었는지 생각나지 않았
다.
  라라는 귓가에서 떠들썩한 말소리에 문득 잠을 깼다.  말을 찾으러 거리에서 마당에 들어온 낯
선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눈을 뜨자 그녀는 '무엇 하느라고 파샤는 잠도 자지 않고 저렇게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때 그녀 쪽으로 돌려진 파샤라고  생각했던 얼굴은 이마에
서 턱밑까지 얽은 곰보였다. 도둑이 든 것을 알고 소리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갑자기 목걸이 생각이 나서 살그머니 몸을 일으켜 아까 놓아두었던 식탁 쪽을 살펴보았다.
  목걸이는 빵조각과 먹다 남은 캐러멜 사이에 그대로  있었다. 식탁 위가 어수선하여 도둑은 미
처 발견하지 못하고 라라가 애써 챙겨 놓은 옷을 마구  휘젓고 흩으러 놓았다. 몽롱하고 잠을 덜
깬 그녀는 어렴풋이 자기가 해놓은 일이 허사가 된다는 생각에 미쳤다. 화가 나서 고함을 치려고
했으나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무릎으로 옆에서 잠자고 있는 이 라의 배를 힘껏
찔렀다. 이라가 비명을 울리는 순간 라라도 목이 터져라고 함께 소리를 질렀다. 도둑은 질겁을 하
고 훔친 물건을 버린 채  방에서 뛰어나가 달아나 버렸다. 남자들이  벌떡 일어나 영문도 모르고
뒤쫓아 달려나갔으나 도둑은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소동 때문에 손님들은 모두 잠에서 깼다. 남아 있던 취기가 말끔히 가셔버린 라라는 그들이
다시 졸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얼른 커피를 끓여 대접했다. 그리고 손님들은  일단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가 정거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사람들이 가버리고 나자 일이 많아졌다. 라라는 재빠른 솜씨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스켓
과 홑이불을 챙기고 수하물을 가죽끈으로 묶고 밧줄로 동여매면서, 파샤와 수위 마누라더러 오히
려 방해가 되니 도우려 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일이 제시간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들 안치포프 부처는 시간에 맞춰 정거장에 나갔다.
배웅하는 친구들의 모자를 바람에 날려보내듯 기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자를 흔들다
말고 세 번쯤 "우라(만세)!"를 외쳤을 무렵에 기차는 더욱 속력을 내고 있었다.
    5
  구질구질한 날씨가 사흘째나 계속되었다. 전쟁 2년째의 가을이었다. 첫해 승리를 거둔 이후에는
패전하기 시작했다. 브루실로프 장군 휘하의 러시아 제8군은 카르파치아에 집결하여 경사지를 따
라 헝가리로 밀고 내려갈 준비를 하였으나, 동부  전선 전체의 총퇴각으로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은 전쟁 초기에 점령했던 갈리시아 지방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의사 지바고는 최근까지 유라라고 불리었으나, 이제는  자주 유리 안드레예비치라고 불리게 되
었다.
  그는 방금 아내인 토냐를 입원시키고 나서, 아내와  작별 인사를 할 조산원을 기다리면서 산부
인과 병동 분만실 앞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필요할 경우에 연락할 장소를 일러두고, 또한 이
쪽에서 간호원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시간이 없었다. 두 군데 왕진을 갔다가 급히 자기 병원에 돌아가 봐야 할 텐데, 지금 이렇
게 폭풍이 휘몰아치는 옥수수 밭처럼 가을 바람에 비스듬히 뿌리는 빗줄기를 내다보며 귀중한 시
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그다지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병원 뒤뜰에 있는 간호원 숙소의 유리창이 달린 테라스와
병원 지역에서 어둠속으로 뻗어 간 지선등이 바라다보였다.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데도 빗줄기는 심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대로 단조롭게 내리고 있었
다. 바람은 비가 무심하다고 화가 났었는지, 어느 집 테라스 앞의 덩굴나무를 뿌리째 뽑으려고 공
중으로 말아올렸다가 걸레조각 내던지듯 홱 던져버렸다.
  두 대의 트레일러를 연결한 트럭이 테라스 앞을  지나 병원 입구로 다가왔다. 부상병을 병실로
운반해 옮기기 시작했다.
  더욱이 루츠크 전투 후에는 모스크바의 병원들이  어디나 초만원이었다. 부상병은 복도나 홀까
지 차지하게 되었다. 시내 병원 전체의 혼잡은 산부인과 병동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바고는 지쳐서 하품을 하며 창가에서 물러났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자 그
가 일하고 있는 성십자 병원에서의 일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며칠 전에 여자 환자 한 사람이
외과 병실에서 사망했는데, 지바고는 처음에 간장  포총이란 진단을 내렸으나 모두들 오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시체를 해부하게 되어 진실이 드러날 것이지만, 해부를  맡은 의사가 형편
없는 만성 주정뱅이여서 과연 제대로 밝혀낼지는 의문이었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창 밖에는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마술 지팡이라도 휘
두른 듯이 창문마다 일제히 불이 켜졌다.
  산부인과 과장이 토냐의 입원실에서 작은 대기실을 통해서 복도로 나왔다. 무얼 물어도 언제나
어깨만 흠칫해 보이며 천장을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친구였다. 그  과묵한 몸짓은 '아
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이 세상에는 과학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말을 의미하는 듯
싶었다.
  그는 지바고 앞을 지나며 미소짓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듯
이 두툼한 손을 두어 번 흔들고는 담배 한 대 피우려고 휴게실 쪽으로 가 버렸다.
  뒤따라 그의 조수인 여의사가 나왔다. 과장이 말수가 적은 것과는 반대로 말이 많은 여자였다.
  "이젠 돌아가시는 게 좋을 텐데요. 내일 성십자 병원으로 제가 전화 연락드릴께요. 그때까지 아
마 별일 없을 거예요. 내가 보기엔 자연 분만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외과 의사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겠지요. 골반이 좁아서 태아의 머리가 뒤에 위치해 있고 진통이 없어서 약간 염려
되기는 하지만, 아직은 뭐라고 단언할 순 없군요. 해산하기 시작하면서 '진통 여하'에 달려 있으니
까. 하지만 그건 그때에 가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에요..."
  다음날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를 받은  병원 수위가, 가서 물어보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고는 10분 동안이나 지바고의 애를 태우고 나서 기껏 하는 소리가 "부인을 너무 일찍 입원시
켰으니 댁으로 도로 모셔 가는 게 좋겠다는군요."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지바고는 당장 간호원을 전화통에 불러 대라고 호통을 쳤다.
  "징후가 잘못 나타난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이틀 더 기다리면 알게 되겠죠"하고 간호원이
대답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 지바고는 연락을 받았다. 간밤부터 진통이 시작되어 새벽녘에 양수가 터졌고
아침부터 짧은 간격으로 심한 진통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 복도를 걸어 들어갔을 때 반쯤 열린 병실 문 사이로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토냐의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마치 기차 바퀴에  손발이 으스러져 수술대에
운반된 철도 사고 희생자의 비명과 흡사했다.
  그에게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손가락 끝을 피가 배어나올 만큼 깨물며  창가로 다가갔다. 밖
에는 어제와 그제처럼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간호원이 병실에서 나왔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사했군. 무사했어." 지바고는 기쁨에 못 이겨 중얼거렸다.
  "아드님이에요. 순산을 축하합니다." 간호원이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들어가실 수 없지
만 나중에 아기를 보여드릴 테니 좋은 선물을 주셔야 해요. 초산이어서  무척 고생하셨답니다. 초
산은 누구나 힘든 법이니까요."
  '무사했구나, 무사했어.' 지바고는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간호원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간호
원이 자기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역할을 한 것같이 축하 인사
에 포함시키는 이유를 몰랐다. 사실 내가 한 일이 무엇인가? 아버지와 아들.  아무런 노력도 없이
획득한 아버지의 지위를 자랑스럽게 여길 하등의 근거가  없었다. 이 아이는 기대하지 않던 뜻밖
의 선물인 것만 같이 여겨졌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토냐였다. 무서운  위험에 직면했던 토냐가
다행히도 무사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병원 근처에 살고 있는 환자가 있어서 왕진을 하고 30분쯤 지나서 되돌아왔다. 이번에도 대
기실과 병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지바고는 저도 모르게 대기실 안으로 슬그머니 발을 들여놓
았다.
  커다란 몸집에 흰 가운을 걸친 산부인과  과장이 마치 땅에서 솟아나듯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
다.
  "어딜 들어오려는 겁니까?" 산모가 듣지 못하게 숨을 죽이고 속삭이듯 낮은 못소리로 말했다.
  "제정신이 있나요? 심리적 쇼크는 고사하고라도 출혈이 많은데다 패혈증의 위험까지 있단 말예
요! 참! 당신도 의사라면서."
  "아니, 그게 아니라... 그저 문틈에서 한 번 보고 싶어서..."
  "그렇다면 좋아요. 하지만 부인을 만났다가는 내가 당신을 그냥 두지를 않겠소."
  병실 안에는 흰 가운을 입은 여자 둘이 출입문 쪽으로 잔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조산원과 간
호원이었다. 간호원의 손바닥 위에서 검붉은 고무덩어리처럼 늘어났다 오므라들었다 하면서 작은
귀여운 생명이 울고 있었다. 조산원이 탯줄을 절단하기 위해 실을 매고 있었다. 방 중앙에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분만용 침대 위에 노탸가 누워 있었다. 침대는 꽤 높이  올려져 있었다. 지바고는
흥분한 탓으로 모든 것이 확대되어 그 높이가 서서 글 쓰는 책상만큼 되리라 짐작되었다.
  흔히 죽은 시신보다도 높게 천장 가까운 곳에  토냐는 다 타버린 고통의 구름에 싸인  채 지칠
대로 지쳐서 병실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마치 범선과도 같았다. 항구에 입항하여 짐을 다
부리고 나서 항구에서 쉬고 있는 범선인 것이다. 새로운 영혼을 싣고 죽음의 바다를 지나 보지도
못하던 나라, 생명의 대륙을 내왕하는 범선이었다.  이 한 영혼을 부두에 내려놓고 지금  빈 배로
조용히 정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국의 항구들, 대양의 횡당, 샹륙 등의 추억을 말끔히 털어버리고
긴장했던 마스트며 선체가 모두 휴식에 잠겨 있었다.
  그리하여 그 배가 달고 있는  깃발이 어떠한 나라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또 그배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언어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자기 병원에 돌아온 지바고는 동료들로부터 축
하를 받았다.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질까! 그는 놀랐다. 쓰레기통이라고 불리고 있는 의사 대기실
로 들어섰다. 병원이 초만원 상태여서 외래인 탈의실을 겸하고 있었다. 눈덧신을  신은 채 들어오
는 사람도 있었고, 구석에는 잊어버리고 간 꾸러미들이 뒹굴고 마룻바닥에는 휴지 조각이나 담배
꽁초가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잡힌 해부 담당 조수가 창가에  서서 뿌연 액체가 든 유리병을 빛에  대고 안경
너머로 살펴보고 있었다.
  "축하하오."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들여다보면서 지바고의 진단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
다.
  "감사합니다. 수고를 끼쳐드려서 미안합니다."
  "천만에, 난 상관없어요. 해부는 피추스킨이 했으니까. 역시 간장 포충이었어! 당신의 진단이 정
확한 데 모두들 놀라고 있었어."
  이때 원장이 들어오면서 인사를 했다.
  "이건 뭐야? 돼지 우리와 다를 데가 없군 그래.  그보다도 지바고, 그건 포충이 틀림없었어! 우
리들의 판단이 잘못이었지. 축하하네. 그리고 또 한가지 딴 얘긴데, 두통거리가 생겼어. 병역 면제
자 명부를 또 조사중에 있어요. 이번엔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구만. 군의관이 엄청나게 부족하다
는 거야. 자네도 멀지 않아 화약 냄새를 맡게 될지도 몰라."
    6
  안치포프 부처는 유라친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정착하게 되었다. 라라의 친정이 기샤
르네가 이 고장에서 평이 좋았기 때문에 라라는 이 새 고장에서 자리를 잡는 데  곤란을 덜게 된
셈이다.
  라라는 무척 이도 많고 바빴다. 집안 살림과 세 살짜리 딸 카첸카를 보살펴주어야 했다. 마르푸
트카라는 빨간머리 하녀는 열심히 일하기는 했으나 라라가 거들어 주지 않으면 혼자서 아무 일도
못했다. 라라는 남편이 흥미를 가지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거들었다.  그녀는 여자중학교에서 교편
을 잡았다. 쉴새없이 일하면서 행복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꿈꾸던 생활이었던 것이다.
  라라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 유라친이 좋았다. 그곳은 강 중류와  하류에 배가 다닐 수 있는 르
인바 강이 흐르고 있으며 우랄 철도가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유라친에서는 겨울이 가까워지면 보트의 임자들이 우선 겨울을 먼저 알린다. 그들은 모트를 강
에서 끌어올려 마차에 실어서 시내로 가져와 자기 집 뜰안에다 보관한다. 보트는 밖에 놓여져 봄
까지 겨울을 지낸다. 유라친에서는 뜰안 땅바닥에 흰배 밑창을 위로 향하게 엎어 놓게 되면, 다른
고장에서 황새가 날거나 첫눈이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겨울이 닥쳐오는 것이다. 안치포프 부부
가 세든 집 뜰안에도 보트가 놓여 있었다. 카첸카가 정자 대신 흰색을 칠한 배 밑창이 지붕이 죄
어 그 밑으로 기어들어가 놀곤 했다.
  라라는 솔직이 말해서 변강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이 지방의 고유한 사투리하며 포제 장화
에 소매 없는 융으로 만든 잿빛 웃옷을  즐겨 입는 이곳 지식칭의 순진하고 소박한  성격이 좋았
다. 라라는 이 지방 풍토와 서민 생활에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의 아들인  파샤는 완고한 도시인이었다. 그는 유라친
사람들을 라라보다 냉정하게 대했다. 파샤는 그들이 미개하고 무지한데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에게는 책을 빨리 읽고 여기저기서 얻은 지식을 고스란히 축척하는 비상한 능력을 지니고 있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라의 영향도 있었지만 전에도 그는 무척 많은 책을  읽었다. 시골에 온
후 몇 년 동안 다방면의 독서는 이제 라라의 지식이 그에게 미칠 수 없을 만큼 그는 성장하게 되
었다. 그는 동료 교사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그래서 그들과
는 숨통이 말힐 것만 같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전시에 동료들의 평볌한 사고방식
이나 곰팡이 냄새가 나는 애국심 따위가, 조국에 대해 훨씬 복잡한 감정을 지닌 파샤에게는 전혀
공감을 줄 수 없었다.
  파샤는 고전학을 전공했었다. 중학에서는 라틴어와  고대사를 담당했다. 그러나 중학  시절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순수과학인 물리학과 수학에 대한 동경이 잠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 갑자기
소생하게 되어 독학으로 대학 수준에 도달할만큼 공부했던 것이다. 앞으로 학위를 획득하고 수학
의 한 분야를 전공하여 가족과 함께 페테르부르그로  진출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지나치게 밤늦
게까지 공부하느라 건강을 해치고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내와의 사이는 좋았으나 좀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라라가 무엇이든 그를 따뜻이 보살펴주
면, 그는 오히려 마음의 부담이 되었으며, 무심코 한 ㅁ라을 그녀가 자기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
이지나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일체 비평을 삼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라라가 자기보다 좋은 집안
에서 자랐다거나, 또는 그녀가 전에 딴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든지 하는 따위를 암시하는 것으로
라라가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혹시 자기가 그녀를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고, 그
녀가 오해할까봐 항상 신경을 써왔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생활에는 일종의 어색한 분위기가 감
돌게 되었다. 더욱이 두 사람 다 상대방에게 관대하려는 경쟁이 오히려 사태를 한층 복잡하게 했
던 것이다.
  하루는 부부가 손님을 초대했었따. 라라네 학교 교장과 파샤의 동료 교사 몇 사람과, 그리고 최
근에 파샤가 간여하고 있는 조전재판소  판사와 그 밖의 몇  사람들이었다. 파샤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은 모두가 꽉 막힌 바보들이었다. 그는 라라가 진심에서 그 누구 하나 환대하지 않으면서 극
진한 호의를 보여주는 그녀의 태도에 놀랐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라라는 실내 환기를 시키고 총
소도 하고 마르푸트카와 부엌에서 접시를  닦기도 하며 오랫동안 일했다.  그러고 나서 카첸카와
남편이 잠자리를 바로하면서 얼른 옷을 벗고 불을 끄고 얘기가 어머니 품속으로 기어들어가듯 자
연스럽게 그의 곁에 가서 누웠다.
  그러나 파샤는 잠든 체했으나 잠들고 있지는 않았다. 요새 그는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으며,
이 밤도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적어도  서너 시간 안에는 잠을 못자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방안에 남은 담배 연기를 피할 겸 잠을 청하기 위하여 산책을 하려고 살그머니 일어나 잠옷 위에
슈바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맑고 싸늘한 가을밤이었다. 발밑에서 얄팍한 얼음장이 부서졌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얼어붙
은 검은 진흙땅 위에 타오르는 알콜 램프의 불꽃처럼 파란빛을 던지고 있었다.
  안치포프네 집은 거리 끝에 있었으며  강 나루터의 건너편 쪽이었다.  그 뒤쪽으로 철도가놓여
있는 평야가 있었다. 철길 근처에는 파수막이 있었고 철로에는 건널목이 놓여져 있었다.
  파샤는 엎어놓은 보트에 걸터앉아서 별들을 바라보았다. 지난  몇 해 동안 줄곧 가까이서 맴돌
던 샹념이 불현 듯 무서운 힘으로 엄습해왔다. 조만간 결말을  지어야 할 것이라면 지금 당장 짓
는 편이 좋지 않은가.
  언제까지 이대로 질질 끌고 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작부터, 결혼하기  이전에 일이 이렇
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했어야 했다. 철들기 전부터 나는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 나는 결혼하기  전해 겨울에 그녀가 잊어달라고
했을 때 깨끗이 단념하지 못했을까?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대상으로 제멋대로
정한 고상한 순정이며, 그녀 자신의 순정의 변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고
상하고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녀의 사명이 현실의 가정 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어리석
게도 나는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하고 았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미칠 듯이  좋았다. 그렇지만 그것
이 곧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아름다움과 대범한 마음씨에 감사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그것을 누가 판별할 수 있단 말인가! 귀신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럼 나는 어떡하면 좋은가? 이 위선에서 카첸카와 라라를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은 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혼을? 투신 자살을? 무슨 실없는 생각일
까! 그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갑갑해왔다. 난 절대로 그따위 짓을 할  순 없어! 그런데 어떻게 그
런 엄청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몰랐다.
  그는 마치 대답을 구하듯 별들을 쳐다보았다. 별들은 작게  크게, 빠르게 또 천천히, 푸르고 또
무지개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갑자기 별빛이 사라지고, 누군가 횃불을 휘두르며 들에서 대문 쪽
으로 달려오기라도 하듯, 거칠고 빠른 불빛이 집 뜰안 보트  위에 앉은 파샤의 모습을 뚜렷이 비
추었다. 군용 열차가 불꽃을 내뿜으며 누런 연기를  하늘로 올리면서 건널목을 지나 서쪽으로 달
리고 있었다. 지난 해부터 시작하여 밤낮으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었다.
  파샤는 미소를 지으며 보트에서 일어나 잠자러 갔다. 그는 희망의 돌파구를 발견해냈던 것이다.
    7
  파샤가 자기 결심을 말할 때, 라라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처음엔 자기 귀를 의심했었다. '쓸
데없는 소리. 공연히 한 번 해보는 소리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모르는 체하고 있으면 잊어버리
고 말 테지.'
  그러나 남편은 이미 두 주일  전부터 필요한 수속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병무청에 지원서를 제출했으며, 학교에선 후임 교사를 채용했다. 옴스크에  있는 군사학교에서 입
학 허가서를 보내 왔다.
  라라는 시골 아낙네마냥 울부짖으며 파샤의 두 손을 움켜잡고 그의 발밑에 몸을 던졌다.
  "파샤, 여보, 가지 말아요. 나와 카첸카를 누구한테 남기고 가요? 제발 가지  말아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내가 손을 쓸 테니까. 당신은 아직 정식으로 신체검사도 받지 않았으니까. 심장이 약한
당신이, 무모한 짓이에요. 결심을 번복하기가 부끄러운가요? 정신나간 짓 때문에 가족이 희생되는
건 부끄럽지 않구요? 군대에 자원을 하다니, 이해할 수 없어요! 우리 오빠를 그토록 비웃고, 이제
그것이 부러워졌단 말예요? 장교복에 긴 칼을 차고, 한 번 거드럭거리고 싶단 말이죠? 당신이 정
말 그럴 줄은 몰랐어요. 왜 갑자기 사람이 그렇게 변하지요? 제발 솔직히  말해줘요. 러시아가 필
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건가요?"
  문득 그녀의 원인이 전혀 딴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대략
은 알 것 같았다. 파샤는 그녀의 태도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생을 통해  파샤에게 향한 그
녀의 아름다운 애정인 모성애에 그는  반발하고, 그러한 애정이 이성간의  평범한 사랑보다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매맞고 난  사람처럼 아무 말 없이 눈물을  삼키며 묵묵히 남편의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파샤가 떠나가 버리자 온 시내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하늘을 날던  까마귀마저 적어진 느낌이었
다. 라라가 넋을 잃고 있는 것을 보고 하녀 마르푸트카는 실없이 "마님!마님!"하고 불러대고, 카첸
카는 엄마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엄마,엄마!"하고 한없이  불렀다. 그녀의 일생을 통해 이것이 가
장 큰 패배였다. 그녀의 밝고 가장 보람찬 희망이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보내 오는 남편의 편지를 통해 라라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얼마 안 가
서 자기의 잘못을 알게 되고 남겨두고 온 처자를 무척 그리워했다. 몇 달 후에 그는 교육 기간을
채우기도 전에 소위보로 임관되었고 곧 전선 부대로  배속되었다. 부임 도중에 유라친에 들를 수
도 없었고 모스크바에도 단시간 머물렀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보지 못했다.
  전선에서 보내 오는 편지는 옴스크의 군사학교 시절의 우울한 내용보다는 한결 명랑했다. 그는
전공을 세워 공로 포상으로나, 아니면 가벼운 부상이라도  입어서 위로 휴가차 가족과 만나게 되
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내 그러한 기회가  눈앞에 다가왔다. 브루실로프 휘하의 제  8군이 적군의
전선을 돌파하여 공격중에 있었다. 파샤한테서 서신 연락이 두절되었다. 처음에 라라는 별로 염려
하지 않았다. 파샤의 침묵을 그녀는 군사 작전과  이동 도중이어서 편지를 쓰지 못하겠거니 생각
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러시아군 부대들은 진격을 멈추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샤
한테서는 전혀 소식이 없었다. 라라는 걱정이 되어 우선 유라친에서 조회해보았고 다음에는 모스
크바와, 이전에 편지를 주던 야전 부대의 주소에다  편지로 문이해 보았으나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
  지방의 다른 부인들처럼 라라도 전쟁 초부터 유라친 시립 병원에 부설된 위수병원에 다니며 일
을 도왔다.거기서 그녀는 열심히 훈련을 받아 간호원 자격을 받은 후 근무처인 학교에서 6개월간
의 휴가를 얻었다. 살던 집은 마르푸트카에게 맡기고 카첸카를 데리고 가서  리파에게 맡겼다. 리
파의 남편 프리젠단크는 독일 국적이었으므로 다른 적국인과 함께 우파 시에 억류되어 있었다.
  서신으로는 아무리 알아 보아도 남편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고 깨닫고, 그녀는 자기가 직접 파
샤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녀는  리스키시를 경유하여 헝가리 국경의 메조라보르치
로 향하는 병원 열차에 간호원으로 들어갔다. 메조라보르치는 파샤에게서 받은 마지막 편지의 주
소지였던 것이다.
    8
  타치야나상병 원호위원회가 모금한 기금으로 이루어진 적십자 열차가 전선에 있는 사단 본부에
도착했다. 대부분은 길이가 짧고 낡은 화물차를 연결한 기다란 열차였다.  그중 1등차에는 장병에
게 줄 위문품을 가지고 온 모스크바의 저명 인사들이 타고 있었다.고르돈도  일행에 끼여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친구인 지바고가 바로 이 사단 소속 야전 병원에 배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병원이 가까운 촌락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전선 지구까지 여행할 수 있는 허가
를 얻어서 그 마을로 가는 보급 마차에 편승했었다.
  마부는 서투른 러시아 말로  지껄이는 것으로 보아  백러시아인이 아니면 리트바니아인이었다.
모두들 적의 간첩 소동이 심해서인지 마부는 지루하도록 판에 박은 듯한 말만 했다. 일부러 온건
한 사상을 나타내려는 말투가 대화를 부자연스럽게 했다.  가는 길의 대부분을 마부는 입을 봉하
고 있었다. 부대 이동에 익숙해진 사단본부에서는 거리를  백 단위로 말하는 습관이 붙어 있어서
야전 병원이 있는 마을도 바로 이웃에  있는 것처럼 20베르스타나 25베르스타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고 말했다. 사실은 그곳까지 80베르스타가 더 되는 거리였다. 도중에 좌측  지평선 쪽에서 줄
곧 적의에 찬, 쿵쿵거리는 소리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르돈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지
진을 경험한 적이 없었지만, 멀리서 울려오는 적의  포화 소리가 화산이 진동하는 소리와 흡사하
리라 생각했다. 해질 무렵에 먼 지평선에서 갑자기 장미빛 불꽃이 솟아 오르더니 날이 샐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고르돈이 탄 마차는 파괴된 촌락들을 통과했다. 어떤 마을은 주민이 모두 떠나서 텅 비어 있었
다. 또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깊게 땅굴을 파고 들어가 살고 있었따. 전에 집이 서 있던 자리
에는 부서진 기왓장이며 쓰레기더미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불타버린 마을이 불모의 사막처럼
한눈에 바라다보였다. 노파들이 폐허가 된 잿더미를 파헤쳐 무언가 찾아내어 거두고 있었다. 주위
엔 아직도 벽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낯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따.
노파들은 마차 위의 고르돈을 쳐다보았다.  언제 이 세상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평화롭고 질서
있는 생활로 될 것인지 묻고 있는 것만 같았따.
  날이 어두워진 후에 정찰대를 만나 마차를 큰길에서  딴 길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받았다. 마부
가 그 길을 몰라서 두  시간 동안이나 헤매고 있었따. 새벽녘에  그들이 찾는 마을에 당도했으나
야전 병원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같은 이름의 마을이  또 하나 있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아침에야 겨우 목적지인 마을을 찾았다. 소독약과 요도포름 냄새가 풍겨오
는 마을길을 마차로 달리면서, 고르돈은 오후까지만 지바고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일행
이 기다리는 정거장으로 되돌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는  부득이 여기서 한 주일도 더 머물
러 있게 되었다.
    9
  그 무렵 전선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갑작스런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르돈
이 방문한 마을 남쪽에서 우리의 군부대들은 적의견고한 진지를 성공적으로  돌파하여 깊숙이 뚫
고 들어갔다. 후속 부대가돌파구를 확대하면서 그 뒤를 계속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선봉 부대는
후방이 차단되어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 포로들 주에 안치포프 소위가  끼여 있었다. 그의소대가
모두 투항하는 바람에 그도 하는 수 없이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안치포프 소위에 관해서는 사실과는 다르게 소문이 돌고 있었다. 적의 포탄이 터질 때 그 파편
에 맞고 흙에 묻혀버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의 친구이며 같은 연대 소속이었던 갈리울린
중위가 직접 목격했다는 것이다. 갈리울린  중위는 안치포프가 병사들과 함께  공격하고 있을 때
관측소에서 쌍안격으로 그의 전사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갈리울린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공격 부대의전진하는 광경이었다. 마른 금작화
가 바람결에 흔들리며, 움직임 없는 골짜기가 있는  가을 들판의 무인지대를 병사들이 무리가 되
어 쏜살같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을 참호에서 쫓아내  백병전을 벌이던지, 아니
면 수류탄을 던져 섬멸하기 위해서였다. 달리고 있는  병사들에겐 그 들판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
는 것만 같았다. 발밑의 땅은  진구렁처럼 미끄러웠다. 그들을 지휘하던 소위가  처음에는 선두에
서, 다음엔 그들과 나람히  달리고 있었따. 권총을 머리  위에 휘두르며 입이 귀까지  찢어지도록
'우라'를 외치고 있지만, 자기 귀에나 병사들의  귀에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소대는
땅바닥에 엎드렸다가는 도 일제히 일어나 함성을 지르며  내달았다. 그럴 적마다 한두 사람이 적
탄에 맞아 밑둥이 잘린 나무처럼 뻣뻣이 쓰러지고는 다시일어나지를 못했다.
  "사격이 너무 원거리군. 전화로 포병대를  불러라." 갈리울린은 불안한 얼굴로  옆에 있는 포병
장교에게 말했다. "아니, 그만두시오. 이번엔 괜찮아."
  이때 공격 부대는 적과 교전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전진했다. 포 사격이 멎었다.  갑자기 찾아든
고요함 속에서 관측하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가 마치 적의 참호 바로 앞까지  부하를 이끌고 들어
가, 이 몇 분 동안 기민성과 용기로 기적을 보이려는  안치포프가 된 것처럼 가슴이 설레이고 있
었다. 그 순간 독일 16인치 포탄 두  발이 공격 부대 바로 앞에서 터졌다. 연기와  흙먼지가 검은
구름처럼 모든 것을 뒤덮어버렸다. 안치포프 소위와 그 부하들이 전사했다고 생각한 갈리울린 중
위는 창백해진 입술고 "큰일 났구나! 이젠 틀렸어! 당했어!"하고 중얼거렸다. 다른 포탄 하나가 바
로 관측소 옆에까지 날아왔다. 관측자들이 몸을 움츠리고 안전한 거리로 급히 물러났다.
  갈리울린은 안치포프와 한 엄폐호에 기거하고 있었따.  후에 안치포프의 동료들이 그가 전사한
것으로 단념하자 친구인 갈리울린이 미망인에게 전할 유품을  맡게 되었다. 그 속에는 아내의 사
진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기계공 출신인 갈리울린은 중위로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치베르진네 셋집 수위 기
마제트진의 아들로서, 옛날에 젼습공으로 있을 때 직공장인 후들레예프한테 매맞던 바로 그 유수
프카였다. 그가 진급하게 된 것은 옛날에 그를 학대한 사람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위로 임관된 갈리울린은 무슨 영문인지 자신의 희망과는 달리 후방  소도시 경비대의 한가한
직책에 보직되었었다. 그는 반병자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역시 늙어빠진 교관들이 아침마다 그
들에게 다잊어버린 교련을 실시하고 있었따. 갈리울린의  일이라고는 부관실 앞의 위병을 교대시
키는 일이었다. 그 밖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무사안일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모스크
바에서 그의 부대로 전입되어 온 늙은 보충병들 속에 너무나도 낯익을 얼굴이 끼여 있었다. 다름
아닌 후들레예프 노인이었다.
  "오호, 알 만한 노인이군!" 하고 갈리울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장교님."
  후들레예프는 부동 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붙였다.
  이 정도로 끝날 수는 없었다. 갈리울린은 병사  후들레예프가 교련에서 잘못한 것을 보기가 무
섭게 호통을 쳤으나, 부하가 자기를 바로 쳐다보지 않고 곁눈질하는 것 같아서 주먹으로 턱을 한
대 쥐어박고 영창에 넣어 이틀을 빵과 물만 먹였다.
  그 후부터 갈리울린의 일거 일동은 옛일에 대한 보복의 내새가 짙게 풍겼따. 그러나 이것은 장
교와 병사라는 상하 관계로 보나 곤봉에 의해 강제되는 군율이라  할지라도 갈리울린으로서는 비
열하게 생각되었다. 어쩌면 좋을까? 더 이상 두 사람이 같은 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장교
로서 자기 부하를 다른 부대로 전출시키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징계 이외의
이유로는 아무 데라도 보낼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 전출을 요청할  구실은 없을까?
갈리울린은 경비대 근무가따분하고 보람 없다는 것을 이유로 전선 근무를 자청하게 되었다. 이것
으로 그는 오히려 좋은 인상을 받게 된 셈이다. 그리고  최초의 전투에서 또 다른 장점을 발휘함
으로써 그는 우수한 장교로서의 소질을 인정받았고, 이내 중위로 승진하게 되었다.
  갈리울린이 안치포프와 처음 사귄 것은 1905년의 일이었다. 이 무렵 파샤 안치포프는 반 년 가
량 치베르진네 집에 신세를 지고 있어서 갈리울린을  일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놀곤 했었다. 거
기서 라라와도 한두 번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전혀 소식을 몰랐다. 인치포프가 유라
친에서 연대에 부임해 왔을 때 갈리울린은 옛 친구가 딴사람처럼 변해버린데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수줍은 응석꾸러기며 계집애 같던 그 소년이 거만하고 아는 체하며,  남과 사귀기를 싫어하
는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안치포프는 지적이며 매우 용감하고 과묵하면서도 항상 조소적인 데가
있었다. 이따금 갈리울린은 안치포프를 바라볼  때, 마치 창문에서 안을 들여다보듯이  그의 슬픈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확고한 사상이 보이는 듯했다. 아마도 그것은 딸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안치포프는 동화  속에 나오는 마술에 홀린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제 그는 가고, 갈리울린의 손에는 그의 서류와 사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변신인 수수
께끼만이 남겨진 것이다.
  결국 남편의 행방을 문의하는 라라의 편지가  갈리울린에게 이첩되었다. 그는 라라에게 회답을
보내려고 했으나 시간이 없어 자세한 편지를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라라의 상처를 조금이라
도 덜어주고 싶었다. 상세하고 긴 편지를 쓰는  것을 하루 이틀 미루어오다가 라라가 간호원으로
전선 어딘가에 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제는 편지를 쓰려 해도 주소를 몰랐다.
    10
  "그래 오늘은 말을 구할 수 있겠어?" 고르돈이 점심 시간에  숙소로 돌아오는 지바고에게 물었
다. 그들은 갈리시아의 한 농가에 숙소를 정하고 있었다.
  "그래 말이 어디 있나? 그보다도 남쪽과 북쪽이 다  막혀서 아무데도 갈 수가 없어. 아주 혼란
한 상태에 있어.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돼가는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남쪽에서  아군은 몇 군데
서 독일군 전선 측면을 우회하거나 돌파한 모양이지만  그 일부는 거꾸로 포위당했다는 거야. 북
쪽에서는 도강이 불가능하다던 지점에서 독일군이 스벤타 강을  건너왔다네. 그것은 1개 군단 병
력의 기병 부대로서 철도를 폭파하고 병참 기지를 습격하고 있다는 거야.  내가 알기에는, 우리를
포위하려는 모양일세. 이런 형편인데 자넨 말을 얻어서  어떡하겠다는 건가? 이봐, 까르펜코!" 하
고 위생병을 불렀다. "빨리 식사를 준비해. 뭔가 오늘은? 양고기? 거좋군."
  야전 병원은 의무 부대와 부속 시설을 가지고  있어서, 지적적으로 무사했던 온 마을에 분산되
어 있었다.집집마다 서구식 창살문 벽이 반짝이고 유리 한 장 부서지지 않았다.
  마지막 더위가 남아 있는 황금빛  가을은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낮에 군의관과 장교들은
창문을 열어놓고, 창틀과 낮은 천장에 우글거리는 파리를 잡기도 하고, 군복이나  가운 단추를 끄
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혓바닥이 델 정도로 뜨거운 야채국이나 차를 마시기도 했다. 밤에는 페
차카 앞에 주저앉ㅇ 매운 연기에 눈을 껌벅이고  자꾸만 꺼지려는 눅눅한 장작을 입김으로 불며,
불을 제대로 피우지도 못한다고 위생병들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조용한 밤이었다. 고르돈과 지바고는 양쪽 벽  옆에 놓인 침상에 서로 마주 보고  누워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식탁과 벽면에 길쭉하고 좁다란 창문이 있었다. 불을 많이 때서 방안은 후덥지
근하게 더웠고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그들은 양쪽 창문을 열어놓고 가을밤의 신선한 공기가 흘러
들어오게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이날 밤에도 그드른 서로 이야기를 나눴고, 또  여느 때처럼 전방
쪽 지평선 위에 장미빛 불꽃이 번쩍이고 있었다.  쉴새없이 톡탁거리듯 들려 오는 총소리를 제압
하듯, 마치 철판을 씌운 묵직한 트렁크를 마룻바닥에 마구 끌 때처럼 지축을 뒤흔드는 둔탁한 굉
음이 울려오자 지바고는 그 소리에 경의라도 표하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저건 베르타라고 부르는 독일군의 16인치 포일세. 60파운드나 되는 포탄을 쏘아대거든."
  이렇게 말하며 다시 대화를 계속하려 했으나 화제가 무엇이었는지 이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을에 풍기는 이 냄새가 대체 뭔가?"  고르돈이 물었다. "여기 도착하면서 구역질이 날  만큼
코를 찌르는 냄새야, 쥐 냄새 같기도 하고."
  "그래, 그건 대마 냄새야. 여기는 대마의  산지니까. 대마 자체가 고기 썩는  냄새를 풍기지. 그
밖에도 전투 지구에서는 전사자의 시체가 대마밭 속에 방치되어 있어서 그것이 썩는 냄새가 나는
거야. 시체 냄새가 사방에서 나는 것도 당연하지. 저 소리 들리나? 또 베르타를 쏘아대는군."
  지난 며칠 동안 그들은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르돈은 전쟁과 시대 의식에
대한 친구의 견해를 들었다. 상호 살육의 피비린내나는 논리를 받아들이며, 부상자에 익숙해지며,
더욱이 현대 전투 기술이 가져온 괴의한  살덩어리로 변한 몸서리나는 새로운 형태의  부상을 입
고, 살아 남은 불구자의 모습에 익숙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지바고는 친구에게 이야기
했다.
  고르돈 역시 날마다 지바고와 행동을 같이하며 그런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타인
의 용감성을 구경거리로 바라보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남들은 초인적인 노력으
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한탄만 하고 있다면 그건 더욱 부도덕한 일인 것  같았다. 그는 인생에서 자기가 처한 환경
에 따라 솔직하고 성실하게 행동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선 바로 후방의 이동 적십자대 응급치료소를 방문했을  때, 부상자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기
절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그는 체험했다.
  그들은 포탄 세례를 받고 반쯤 피해를 입은 넓은 숲  속의 공지에 마차로 도착했다. 망가진 포
차가 나무 밑 덤불 위에 거꾸로 뒹굴고 있었다. 나무에 승마용 말 한 필이 매여 있었다. 숲속으로
더 들어간 곳에 산지기의 오두막이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지붕이  반쯤 날아가고 없었따.
바로 그 오두막이 응급 치료소였고,길 건너편에는 큼직한 잿빛 천막이 두 개 쳐져 있었다.
  "자네를 여기에 오게 하는 게 아닌데." 지바고가  말했다. "1베르스타나 2베르스나쯤 가면 참호
가 있고, 우리 포대가 바로 거기 숲 뒤에 있다네. 무슨 소리가 들리지? 자네가  아무리 태연한 체
해도 난 믿지 않아. 자넨 지금 간이 콩알만할 걸세. 하긴 그게 당연하지.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달
라질 수가 있네. 여기까지 포탄이 날아올지도 몰라."
  투박한 장화를 신고 흙투성이가 된 군복 앞가슴과 잔등이 온통 땀투성이가 된  지친 젊은 병사
들이 숲 옆의 길가에서 엎드려 축 늘어져 있었다. 나흘  주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전사자
를 내고 전선에서 물러나온 부대의 생존자들이었다. 단기간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후방으로 가
는 길이었다. 이제는 웃어대거나 욕지거리를  할 기력조차 없이 돌처럼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여러 대의 짐마차가 치료소를 향해  도로를 요란하게 달려왔어도 아무도  고개를 쳐들지 않았다.
스프링이 없는 탄약 운반용 마차에다  지금 부상병들을 싣고 오는  길이었다. 마차가 덜거덕거릴
때마다 부상병들의 뼈를 뒤흔들어 놓고 창자가 뒤틀렸다. 치료소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급한 부상
병은 수술대로 옮겨졌다. 반 시간  전에 포격이 잠시 멎은 사이에  참호 앞 전투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부상병이 운반되어 나온 것이었다.
  마차가 응급 치료소 앞에 와서 멎자 들 것을 들고 나온 위생병들이  층계를 내려와 부상병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간호원 하나가 천막  출입구의 포장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비번인
모양이었다. 천막 뒤 숲속에서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다투고 있었다. 울창한 숲은  그들의 고함 소
리를 쩡쩡 울렸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환자를  운반해 왔을 때 다투던 두 사람
이 치료소를 향해 길로 나왔다. 그  중 흥분한 젊은 중위가 적십자대의 군의관에게,  여기 숲속에
전에 있었던 포대가 지금 어디로 이동했느냐고 캐묻고  있었다. 군의관은 알지도 못하고 또 알바
아니라는 것이었다. 군의관이 이 장교에게, 부상병들이 와서 바쁘니 언제까지나 그를 상대하고 있
을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중위는 적십자대건 포병대건  할 것없이 닥치는 대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지바고가 군의고나한테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함께 치료소로 들어갔다. 중
위는 다소 타타르 악센트가 섞인 말투로, 연전히 큰 소리로 욕을 하며 나무에 매어놓았던 말고삐
를 풀어 안장에 뛰어 오르더니 도로를 따라 숲속으로 달려갔다. 간호원은 시종 밖을 내다보고 있
었다.
  갑자기 간호원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당신들은 무슨 짓을 하는 거죠? 정신이 나갔군요?" 하고 외치며 그녀는 들 것 옆을 가고 있는
두 명의 경상자가 있는 길가로 달려나갔다.
  들 것 하나에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중상을 입은 환자가 누워 있었다. 커다란 포탄
파편으로 얼굴이 짓이겨지고 혀와 입술이 시뻘겋게 뭉크러졌으머, 한쪽 볼이 달아나고 아래턱 뼈
에파편이 박혀 있었다. 사람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목숨을 끊어서 이 무서운 고통에 종지부를 찍어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들것 옆을 지나가고 있던 두 경상자는 이  처절한 소리에 마음이 움직여 맨 손으로  이 무서운
파편을 잡아 빼려고 하는 것같이 간호원의 눈에 비쳤던 것이다.
  "안 돼요, 안 돼! 그건 외과 군의관이 특수한 기구로써 해야 돼요. 물론 뺄 필요가 있다며."
  그순간 들것에 실려 층계를 올라가던 환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부르르 몸을 떨고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 죽은 병사는 늙은 보충병 기마제트진이었으며,  숲속에서 흥분하여 소리치던 젊은 장교는
그 아들인 갈리울린 중위, 간호원은 라라였다. 지바고와 고르돈은 이 정경의 목격자였다.
  이 사람들은 이곳 한 자리에 모였지만 서로가 알아보지는 못했고, 또 서로 모르는 사람도 있었
다. 그리고 그 후 다시 만날 때까지는 이  일을 모르고 지냈고, 또 영원히 알 수 없게  된 사람도
있었다.
    11
  이 근처의 마을들은 기적적으로 무사히 남아 있었다.황폐한  바다 한가운데 홀로 성하게 떠 있
는 불가사의한 섬과도 같았다.
  하루는 해질 무렵에 고르돈과 지바고가 마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 마을에서 젊
은 카자크 청년이 떠들썩하게 웃어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동정을  공중에 던지고는 허옇
게 수염을 기르고 기다란 카프탄을 입은 유태인 노인더러 그것을 받게 하고 있었다. 유태 노인은
두 손바닥 사이를 빠져 흙탕  속에 떨어져 버렸다. 노인이 동전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힐 때마다
카자크 청년은 노인의 궁둥이를 때리고 있었다.이렇게 해서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런 장난이 악의가 없었으나 그러다가 무슨 큰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의 아
내가 맞은편 농가에서 연신 한길로 달려나와 남편 쪽으로 두 주먹을 휘두르며 뭐라고 소리치다가
는 다시 두려운 듯이 집 안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창문 너머로 두 손녀 아이가 울면서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부는 무척 흥미를 느꼈는지 마차의 속력을 늦추고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구경을 시키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바고는 카자크를 가까이 불러서 끄짖고, 노인을 놀려대는 짓을 그만두도록 명령했다.
  "예, 알겠습니다."하고 카자크는  순순히 응했다. "악의헤서  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웃음거리
로..."
  고르돈과 지바고는 나머지 길을 묵묵히 가고 있었다.
  "참으로 가공할 일이야."
  숙소가 있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에야 지바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전쟁으로 유태인들이 얼마나 처참한  일을 당했는지 자넨 상상도  할 수 없을거야. 유태인
부락에서 전투가 있을 때면 가혹한 현물 공출과 재산의 파괴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학살하고 능욕
하고 또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을 퍼부어댔어. 하지만  유태인들이 애국심을 지녀야 할 이유가 어
디 있을까? 적의치하에서는 유태인들도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만, 우리는 그들을 박해하고 있을 /
뿐이 아닌가. 유태인에 대한 중오에는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도 없어요. 유태인들의 빈궁, 단칸방
에서 우글거리며 살아야 하는 비좁은 생활, 호소할 데가 없는 그들의 무력함. 당연히 동정을 ㅂ다
아야 하고 그들의 이런 불행 자체가 오히려 중오의 근원이 되고 있어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야.
피할 수 없는 어떤 운명일지도 모르지."
  고르돈은 대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12
  밤이 되었다. 그들은 좁고 길쭉한 창문 양쪽에  놓인 침상에 누워서 다시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다.
  지바고는 고르돈에게 전선에서 한 번 황제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얘기를 해주었다.
  그것은 전선에서 처음 맞이하는 어느 봄날이었다.그가 소속한 연대 본부는 카르파차 산맥의 깊
숙한 계곡에 위치했었다. 그곳은 헝가리 평원으로부터의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골짜기 밑엔 정거장이 하나 있었다. 지바고는 그곳의 풍경을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했다. 아름드
리 전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산봉우리엔 솜구름이 걸려  있고, 숲속에 두꺼운 털가죽을 대고 붙
인 것처럼 여기저기에 잿빛 편암과 흑연의 벼랑이 눈에 띈다. 눅눅하고 우중충한 4월의 아침이었
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어 조용하고 무더웠다. 골짜기에는 안개가자욱하며, 모든 것이 김을 토
해서 서서히 하늘로 날아오른다. 정거장의 기관차 연기, 들판의 회색빛 아지랑이, 잿빛 산줄기, 검
푸른 숲 그리고 검은 구름.
  그 당시 황제는 갈리시아 지방을 순시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지바고네 연대를 방문한다는 통보
가 있었다. 황제는 이 연대의 명예 연대장이었다.
  어느 시각에 도착할는지 알 수 없었다. 정거장 플랫폼에 의장대가 정렬해 섰다. 숨막히는 두 시
간이 지났다. 이윽고 수행원들을 태운 열차가 하나, 또  하나가 재빨리 통과했다. 잠시 후에 황제
의 전용 열차가 도착했다.
  황제는 니콜라이 대공을 거느리고 의장대를 사열했다.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치하의 인사를 할
때마다 우렁찬 "우라"의 함성이 터져나와,  흔들리는 물통에서 튕겨나오는 물처럼 메아리에  다시
메아리쳤다.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는 황제는 루불리 지폐나 훈장에 그려진 그의 초상보다 훨씬 늙고 지
쳐보였다. 그의 얼굴은 주름이 많았고  좀 우울해보였다. 그는 어찌할바를 몰라  겸연쩍은 눈으로
흘금흘금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공손히 등을  굽히고 말보다는 눈썹이나 어깨의 움직임으로
당황하는 황제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 계곡에서의 따뜻한 잿빛 아침에  지바고는 황제가 가엾게 여겨졌다.  한편 그토록 자신없고
소심한 것이 박해자의 근본 성격이었으머, 이렇게 나약한 인물이 사람을 투옥하고 교수대에 끌어
올리고, 때로는 감형하기도 하는 그 모순을 도조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장 연설이 마땅히 있어야 했어. 독일  황제 카이제르처럼 '짐은, 짐의 용맹스러운 군사
들과 짐의 충성스러운 백성들...' 하는 식으로 말이야. '충성스러운 백성'에 대해선 꼭 언급이 있어
야 했어. 하지만 그는 순 러시아식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웠어. 비극적이라 할 만큼 그런 진부한 격
식을 초월했다고 할까. 하긴 그따위 연극은 우리 러시아에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결국 그
따위 제스처는 연극에 불과하지 않을까? '충성스러운 백성'이란 시저 통치하에도 갈리아인이나 스
키티아인이나 이탈리아인에게도 마찬가지였지. 그러나 옛날부터 '충성스러운 백성'이란 하나의 허
구였어. 황제나 정치가들의 연설 제목에 지나지 않았어. '짐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이여' 하는 식으
로 말이야."
  "그건 그렇고, 지금은 신문 잡지 기자들이 전선에 떼지어  몰려다니고 있어요. 그들은 부상자들
을 방문하고 '견문기'따위를 쓰면서 민중의 영혼에 관해  새로운 이론을 만들었어요. 달리이 신판
이라고나 할까. 떠버리 언어 기록광에  지나지 않아. 이것도 하나의  타입이지만, 또 다른 타입이
있어요. 짤막하게 끊은 문장, 소묘, 회의주의와 염세. 어느 날 내가 읽은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었
어. '어제와 같은 잿빛 하늘이다. 아침부터 비와 진구렁이다. 창 너머로 한길을 본다. 끝없이 계속
되는 포로의 행렬. 부상병을 운반한다. 대포가 발사된다. 어제처럼 오늘도 발사. 내일은 또 오늘처
럼 발사되겠지. 매일 매시간 그치지 않고.' 어딘가, 그럴 듯하고 기지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무엇
때문에 대포는 들먹이는 걸까? 대포한테도  변화를 기대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얘기가 아닐
까? 어째서 그들은 자기 자신을 관찰하지 못할까? 매일같이 똑같은 문구,  똑같은 구두점, 똑같은
사실을 나열하면서 벼룩이 뛰듯이 재빠르게 저널리즘의 박애주의 탄막을 쏘아대고  있는 자기 자
신을 말이야! 또같은 반복을 집어치워야  될 일은 대포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라는 걸 왜 깨닫지
못할까? 제 아무리 자기 수첩 속에  기록해 봐야 거기서 가치 있는  것이 나올 리는 만무하니까.
인간이 사실에다가 자기 자신의 어떤  독창적인 것, 예술적인 툭성을  주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사실로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왜 알지 못할까?"
  "그건 옳은 말이야." 고르돈이 말을 받았다. "그럼 이젠 우리가 오늘 본 그 서건에 대한 감상을
얘기해보세. 그 카자크 청년은 가엾은 유태 노인을 괴롭히고 있었지만, 그런  일들은 수없이 있었
어. 물론 비열한 짓인 이따위에 철학까지  끌어다 댈 팰요는 없을 거야. 당장에  주먹으로 그놈의
쌍통을 한 대 갈겨주면 끝나는 일이지. 그러나 유태인 문제를 청체적으로 다룰 때는 철학이 필요
하게 되고, 또 예기치 않던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새로운 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닐세. 우린 다 자네 아저씨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왔으니까.
  '민족이란 대체 뭘까?'하고 자네가 물어봤었지. 민족을 입으로만 들먹이는 자와, 그것을 별로 의
식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행동이나 어엿한 행위로 국민의 보편성을 높이고  명성과 불멸성을 부
여하는 자와, 어느 쪽이 더 모든 민족에게 이바지하는 걸까? 대답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 그리고
그리스도 이후의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단순한 민족은 아니야, 개심한 민족, 변모한 민
족일세. 문제의 핵심은 낡은 원칙에 충실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바로 이 개념과 변모에 있다고
나는 생각해. 복음서에는 어떻게 적혀  있지? 첫째로, 복음서는 '그렇다'라고 딱  잘라 ㅁ라하지는
않았어. 소박하고 은근하게 '아주 새롭게 살기를 원합니까? 마음의 행벅을 원합니까?'라고 권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나 모든 사람이 권고를 받아들여 몇천 년 동안 거기에 열중해오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유태인도 고대 그리스인도 없다고 복음서는 말하고 있는데, 그건 단지 하
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뜻일까? 아니야, 그 정도의 것이라면 굳이 복음서를 끌어댈 것도
없겠지. 그만한 것은 그리스의 철학자나 로마의 도학자도 이미 갈파한 것이니까. 복음서에는 이렇
게 적혀 있었어. '하나님 나라라고 불리는 새로운 생활 양식이나 새로운  형태의 사회에서는 민족
이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개성만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그 사실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자네는  말했었지. 옳은 말이야.
기독교 정신, 즉 개성의 신비야말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
  인생이나 세계에 대해 아무런 할 말도 없는  하찮은 문필가들의 얘기가 나왔지만 말이야. 그자
들은 어떤 민족-그것도 소수 민죽이나 약소 민족이라면  더욱 좋고-이 논점이 되었을 때 신바람
이 나는 거야. 왜냐하면 자기들의 명석한 생각과 수완을 발휘하여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
회가 되니까. 이러한 심리 상태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실질적인 표본이  바로 유태인이야. 유태인
들의 민족 관념은 여러 세기를 통해서 유태인들에게 민족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
요해왔던 것이지. 유태인이 이렇게 민족에 얽매이고 사는  동안에 딴 세계는 자기들 사이에서 자
라난 새로운 힘에 의해 해방되고 있었다. 이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야! 자넨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
는가? 생각해 보라! 이 경사, 평시의 저주에서 해방되는 날,  따분한 것들을 뛰어넘는 비약- 이것
은 애초 유태인의 땅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유태인의 언어로 선언되었으며 유태인에게  속해 있지
않았던가! 유태인은 실제 그것을 보고 들었음에도 어쩌다 그만 그것을 놓쳤단 말인가? 어쩌다 이
토록 지니고 있던 힘과 미의 영혼이 떠나가는 것을 묵과하고, 그것이 승리하여 지배를 확립한 후
에도 그들이 거부했던 그 기적의 빈 껍데기 속에 파묻혀  있다는 거야. 그들의 이러한 자기 희생
은 도대체 누구를 이롭게 했으며, 누구의 이익을 위하고,  그 순진한 노인과 아녀자들, 그 연약하
고 선량한 인간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우롱과 박해와 구타를 당하면서 살아온 것은 대체 무엇 때
문일까! 그리고 소위 민중 편이라던 문필가들이 하나같이 무능한 탓은 또 무엇일까? 유태인의 정
신적 지도자를 자처하는 자들이 온순한 염세주의와 시니컬한 지혜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설사 사명감의 압력으로 보일러처럼 폭발할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무엇을 위
한 전쟁인지도 모르면서 살상을 계속하고 있는 이 군대를 왜 해산시켜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왜
군대를 향해 외치지 못하는가 말일세. 정신을  차려라. 그만하라, 이젠 됐어. 이전처럼  말하지 말
라. 한데 뭉치지 말고, 분산하라. 남들처럼 되라.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최초의  또 훌륭한 그리스
도교도인 것이다. 너희들은 가장 악랄하고 가장 취약한 자기를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

      13
  이튿날 지바고는 점심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자넨 여길 떠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모양인데, 드디어 자네  소망이 이루어졌네. 하지만 다행
이라고 말할 순 없어. 다시 우릴 만날 수 있게 할지 모르니까. 아직 동쪽으로는 길이 통해 있지만
서부는 밀리고 있어요. 우리 의무부대는 전원 후퇴  명령을 받고 내일이나 모레 출발할 예정이지
만 어디로 갈 것인지 나도 몰라. 카르페코가 자네 내의를 아직 안 빨았을  거야. 언제나 그렇다니
까! 저 녀석을 늘 제 계집한테 빨래를 맡겼다고 하지만, 그 계집이 누구며 어디 살고 있느냐고 물
으면 대답을 못하는 바보 녀석이야!"
  카르펜코는 변명을 늘어놓았고, 고르돈은 지바고의 셔츠를 꺼내 입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
나 지바고는 그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말만 계속했다.
  "제기랄, 군대 생활이란 마치 짚시의 유목민  생활과 같네. 여기 처음 왔을 땐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 방안은 더럽고 천장이 낮아 환기가 잘 안 되는데다가 페치카도  여기에 있지 않고...
그런데 지금은 내가 전에 살던 방이 어떻게 생긴 방이었는지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으니 말이야.
이젠 여기서 한평생 살수도 있을 것 같아. 햇빛이 타일 바닥에 비치고, 길가의  나무 그림자가 비
친 구석의 페치카를 바라보면서 말일세."
  그들은 천천히 짐을 구리기 시작했다. 밤중에 그들은 고함 소리, 총소리, 부산한 발자국 소리에
잠이 깼다. 마을 하늘이 불길한 불빛에 타고 있었다. 창밖에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분주히 오갔다.
옆방에서 집주인 내외가 잠이 깨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지바고는 위생병에게 명령했다.
  "카르펜코, 빨리 밖으로 달려나가서 왜  이렇게 야단인지 알아보고 와."  지바고는 재빨리 옷을
챙겨 입고 야전 병원으로 달려가 사실을 확인했다. 독일군의 전선을 돌파했다는  것이다. 아군 방
어선이 이 마을 근처로 물러났기 때문에 마을에까지 적의 포탄이 날아왔다. 후퇴 명령을 들을 것
없이 야전 병원은 즉각 철수를 개시했다. 날이 새기 전까지 모든 일이 끝나야 했다.
  "자넨 선발대와 함께 가게. 막 떠나려는 마차를 잡아놨어. 그럼  잘 가게. 마차까지 배웅하겠네.
자네가 마차에 타는 걸보고 싶어요."
  그들은 등을 굽히고 집 옆을 뛰어서 부대가  포진하고 있는 마을 어귀까지 달려갔다. 거리에는
탄환과 포탄이 날고 있었다. 마을 앞 들판의 십자로 쪽에서  유산 탄이 화염의 우산을 펴듯 작렬
했다.
  "자넨 어떡하겠나?" 뛰어가면서 고르돈이 물었다.
  "다음 제2진과 함께 떠나가겠네. 숙소에 돌아가서 짐을 가져가야 하니까."
  마을 어귀에서 그들은 헤어졌다. 선발대를  이루는 몇 대의 마차가  출발하고 서로 부딪치면서
차츰 대오를 만들고 있었다. 지바고는 떠나가는 친구에게 손을 흔들었다. 타오르는 헛간의 불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다시 집 옆과 엄폐된 모퉁이를 따라 지바고의  발길은 숙소로 달음질쳤다. 숙소에 거의 가까워
졌을 때 유산탄이 작렬했다. 그는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은 채 한복판에 쓰러졌다.
    14
전선 사령부에서 얼마 안 되는 철도변의 서쪽 조그마한 도시로 철수한 야전  병원 장교 병실에서
지바고는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월 하순의 따뜻한 날씨였다.  침대에 가까운 창문
은 그의 청에 따라 열려 있었다.
  점심 시간이 되기까지 환자들은 제각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병원에 새로 배속되어
온 간호원이 오늘 이 병실을 돌 것이라는  말이 전해졌다. 지바고의 맞은편 침대에서 갈리울린이
방금 받은 <레치>와 <루스코예 슬로보>를 뒤적거리며, 검열에 걸려 공백으로 나온 기사 부분을
발견하고 격분하고 있었다. 지바고는 야전 우편국에서 한꺼번에 배달된 토냐의 편지 뭉치를 읽고
있었다. 바람결에 편지와 신문이 살랑거리고,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바고는 편지에서
눈을 들었다. 병실에 들어온 사람은 라라였다.
  지바고도 갈리울린 중위도 이내 라라를 알아보았으나 서로 다 그녀를 아는 사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는 못했다. 라라는 두 사람 다 알아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창문은 왜 열어놓았죠? 춥지 않나요?" 그녀는 갈리울린 쪽으로 다가갔다.
  "기분이 어떠세요?"하고 물으면서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맥을 짚어보더니, 이내 손을 놓고 침
대 옆 의자에 앉아서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참 뜻밖입니다. 라라 부인!" 갈리울린이 말했다.  "난 당신의 주인 안치포프와 같은 연대
에 근무했고 그를 잘 압니다. 당신한테 전할 물건을 맡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어요?" 그녀는 되풀이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어디 있어! 그래 당신
은 그이를 알아요? 사실대로 빨리 말해주세요. 그이는 포탄에  맞아 그 흙에 묻혀버렸다구요? 하
나도 숨기실 건 없어요. 전 다 알고 있으니까."
  갈리울린은 소문을 그녀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으며 거짓말로 그녀를 위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안치포프는 포로가 된 거예요." 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공격시에 부하를 지휘하며 너무 앞으
로 전진한 탓으로 그만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포로가 될 수밖엔 없었습니
다."
  그러나 라라는 갈리울린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이  뜻하지 않았던 상봉에 그녀는 흥분돼 있
었다. 낯선 사람 앞에 눈물을 보이고 싶지가 않아서 복도로 뛰쳐나가 버렸다.
  잠시 후 그녀는 병실로 되돌아왔다. 겉으론 침착한 태도였다. 갈리울린과 다시 이야기를 진전시
켰다가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일부러 그쪽엔 시선을 피하고 지바고의 침대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디가 불편하시죠?" 얼빠진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물었다.
  지바고는 그녀의 흥분과 눈물을 바라보면서 묻고 싶었다. 전에 두 번이나, 중학 시절과 대학 시
절에 그녀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치근덕거린다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문득 관 속의 안나 부인의 얼굴과 목놓아 울던 토냐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맙소. 난 의사니까, 내 힘으로 치료할 수 있어요. 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겠소."
  '나에게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을까?'하고 생각하며, 라라는 놀란 표정으로 이 주먹코에 특이
한 얼굴의 낯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후 며칠간 날씨는 변덕스럽게 변해서 밤에는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고 눅눅한  흙 냄새를 풍
겨주었다.
  그 무렵 전선 사령부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고향에서도 불안한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다.
페테르부르그와의 통신이 종내 두절되고 말았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정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간호원 라라는 아침저녁으로 두 차례 병실을 돌면서 갈리울린과 지바고를  비롯한 모든 환자들
을 두루 살피곤 했다. '뭔가 좀 이상하게 호기심을 끄는 사람이야.' 라라는 생각했다. '젊은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퉁명스러울 수가 있을까. 들창코가 미남일  수는 없지만 말하는 품이 아주 지적인
데가 있고, 발랄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지혜를 가졌어. 하지만 그까짓  건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일은 빨리 이곳을 떠나 카첸카가 있는 모스크바로  가는 일이야. 그리고 모스크바에 가면 간호원
은 그만 두고 유라친으로 돌아가서 다시 중학교  교사로 복직해야지. 가엾은 파샤의 소식도 알았
으니까, 이젠 희망을 가져 봐야 소용도 없는 노릇이구. 파샤를 찾는 목적이 아니라면 애당초 이런
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야.'
  카첸카가 지금 어떡하고 있을까? 가련한 고아! 근간에  아주 급격하고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었
다. 전에는 여러 가지 신성한 의무 따위가 있었다. 조국에 대한 의무, 군에  대한 의무, 사회에 대
한 의무 등. 그러나 이제 전쟁에 패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불행의  근원이었으며, 신성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해버려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평생 어린애처럼 남의 손에 이끌려오기만 하다가 갑자기 보호자를 잃고 혼자서 걷는 법을 배워
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 자신이 없었다. 의논할 만한 가족이나 친지도 옆에  없었으며, 이런 때
는 무언가 절대적인 것, 삶과 진실과  미에 스스로 몸을 내맡기고 싶어지고, 인간이  만든 규칙이
폐기된 대신에 절대적인 것에 지배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전에 평화롭던 시대의 인생에서는
느끼지 못했으나, 지금은 뭔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온몸을 아낌없이 바치고  싶었다. 라라의 경
우,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카첸카였다. 남편을 잃은 지금 라라한테는  모성 이외의 아
무것도 없었다. 아버지 없는 불쌍한 카첸카를 위해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것만이 자기가 할 일이
라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지바고는 모스크바에서 편지를 받았다. 고르돈과 두도로프가  그에겐 아무런 양해도 없이 출판
한 그의 저서가 호평을 받아 문학가로서의 전도가 촉망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 모스크바
는 소란한 동요에 휩싸여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에 있으며, 대중의 불만이 팽배
하여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도 씌어 있었다.
  느지막한 밤이었다. 지바고는 졸고 있었다. 끄덕끄덕 졸다가도 그는 이내 눈을 번쩍 뜨고, 지난
며칠 동안의 흥분이 잠을 이룰 수 없게 했다. 창밖에  살랑이는 바람결도 졸리는 듯 하품을 하며
속삭이고 있었다. '토냐, 싸샤. 보고 싶구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돌아가 일하고 싶어.' 바람은
울며 뇌까린다. 바람결의 속삭임에 지바고는 자다가도 눈을 뜨며 다시 잠을  청하곤 했다. 변덕스
러운 날씨도 불안한 밤처럼 한없이 기쁨과 슬픔을 뒤바꾸고 있었다.
  라라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은 파샤의 유품을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전
해주었는데, 나는 아직 그 사람이 누구며 어디서 왔는지조차 묻지 않고 있다니.' 그래서 늦었으나
인사를 하려고 다음날 아침 병실에 들렀을 때 갈리울린의 여러 가지를 자세히 물어보면서 라라는
크게 놀랐다. "브레스트스카야 거리 28번지, 치베르진네  집! 1905년 혁명이 일어난 겨울!  당신이
유수프카라구요? 아니, 만난 적이 있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아요. 어느 해였는지 그  집에 간 적이
있어요. 그게 언제더라? 눈앞에 모든 일이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때 그  근처에서
총을 쏘고 있었죠. 그걸, 그때 뭐라고 했더라? 그렇지 '주님의 뜻' 이라고 했어요. 소녀 시절에 처
음 느껴본 강렬하고 짜릿한 느낌! 용서하세요,  중위님. 성함이 누구시라구요? 아니, 벌써  말씀해
주셨는데. 고마워요, 유수프카, 다 생각이 나는군요. 정말 고마워요!"
  그날 온종일 그녀는 '그 집'을 생각하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다. 브레스트스카야 28번지! 그리고 지금도 총을 쏘고 있지만 두려움은 그
때와 비할 것이 못 되었다. 이젠 '애들이 총을 쏜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들은 이제 다 어
른이 되어 여기 군대에 와  있었다. 그 집과, 그와 비슷한  다른 집들과, 그리고 비슷비슷한 여러
마을에 살던 소박한 사람들이 모두 여기 와 있는 것이다.
  누워서 거동할 수 없는 환자를  빼 놓고는 각 병실의 환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목발을 짚고
절룩거리거나 뛰어다니며 또 지팡이를 짚고 걸으면서 제각기 외쳐댔다.
  "굉장히 대단한 뉴스야! 페테르부르그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대. 페테프부르그 경비대가  반란에
가담했다는 거야. 혁명이 일어났어."

       5.과거와의 고별
    1
  멜류제예보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도시는 비옥한 흑토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무스름한 먼지가
메뚜기떼 구름처럼 지붕 위에 떠 있었다. 그것은 이 소도시를 지나는 전투 부대와 소송대들이 지
나가면서 일으키는 먼지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선으로 가는 것과 전선에서 돌아오는 것이 서
로 교차하면서 움직이고 있어서, 사람들은  전쟁이 과연 계속되고 있는지  이미 끝나버린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새로운 임무가 마치 버섯처럼 생겨났다. 지바고와 갈리울린,간호원  라라 그리고 뜻밖
의 몇몇 사람에게는 큰 도회지에서 온 유식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하여 모든 일을 다 떠맡기
고 있었다.
  시 자치위원회 직원으로, 또는 군 의무부대와 시 위생과의 하급 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
은 수시로 변동되는 직책을 흡사 야외 스포츠나 술래잡기 놀이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일
들을 빨리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 직업을 되찾아야겠다고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지바고는 라라와 함께 바쁘게 일했다.
    2
  비가 내리면 거무스름한 먼지는 커피의 빛깔처럼  짙은 갈색의 흙탕물로 변해버린다. 대부분의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온통 흙탕물로 뒤덮이고 만다.
  도시는 그다지 크지도 않았다. 도시 어느 쪽에서 보아도 우울한 초원과  어두운 하늘이 보였고,
전쟁과 혁명의 넓은 광장을 전망할 수가 있었다.
  지바고는 자기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군대에서는 혼란과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고 있소. 규율과 사기를 회복하기 위해 대책을 강구중
에 있어서 나는 근처의 주둔 부대를 순찰하고  돌아왔소. 좀더 일찍이 당신한테 소식을 전했어야
하는 건데 늦게 되었소. 당신한테  알리고 싶은 것은 나는 지금  리라라는 간호원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소식이오. 그녀는 우랄 출생이며 모스크바에서 온 여성이오.  당신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무서운 날 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검사를 저격했던  처녀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그 후 아마
재판을 받게 되었지요. 또 그녀가 여학교 학생일 때, 당신의 아버지를 따라서 간  적이 있는 불결
한 여관에서 나와 미샤가 어떤  여학생을 봤다던 얘기는 당신도 들은  적이 있지요.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 여관에 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몹시 추운 날 밤이었지요. 그게 아마 프레스냐 폭동이
있었던 땐 것 같소. 그때의 그 여학생이 바로 지금의 라라란 말이오. 나는  집에 돌아가려고 무척
애썼는데 그렇게 일이 간단하지가 않소. 여기 할 일이 많아서가 아니오.  일은 쉽사리 인계해버리
면 되지만  문제는 기차를 타는 일이오. 기차는 거의 다니지 않고, 또 간혹  있다해도 초만원이기
때문에 좌석을 얻을 수 없는 형편이오. 하지만 이렇게 언제까지나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 라라나
갈리울린 또 나는 개별적으로 행동해서 사직이나  해임이 되는 사람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음
주에는 떠나기로 작정했소. 그러는 편이 기회를 얻기가 수월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러니까,
언제 불쑥 집에 나타나게 될는지 모르겠소. 물론 미리 전보를 치도록 애써보겠소.

  그러나 출발하기 전에 아내로부터 회신을 받았다. 편지에는 눈물과 잉크 자국으로 수없이 많은
구두점이 찍혀 있었다. 비탄에 젖은 문장으로, 아내는 그에게 모스크바에 돌아올  것이 아니라 그
멋있는 간호원을 따라 바로 우랄 지방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 여자의 인생 행로에 나타나 있는
기적과 우연의 일치는, 토냐 자신과 같은 보잘것없는 인생 따위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이
었다.

  쌰싸의 장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부끄럽게 생각할 그런 인물로는 기르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직접 보시던 그러한 정신으로 그 애를  기를 것을 약속하
겠어요.
  지바고는 당장 편지를 냈다.

    "토냐, 당신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구려.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오!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당신이 없었더라면, 당신이나 우리 가정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 처절하고 무
서운 싸움터에서 2년이나 되는 세월을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겠소! 그러나 이런 말을 지금 새
삼스럽게 할 필요도 없게 되었소. 우린 곧 함께 살  수 있게 되고, 인생을 재출발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오. 혹시 나 자신의 태도에 애매한 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는 점이오. 그렇다면 나는 당신뿐만 아니라 그 여자한테도 죄를 지은 결과가 된  셈이오. 내가 그
녀를 유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녀가 돌아오는 대로 나는 사과해야겠소. 지금 그 여자
는 시골에 가서 없어요. 이전에는 지방의 주요 도시나 군청 소재지 같은 곳에만 지방 소비에트가
있었는데 지금은 마을에까지도 그것이 설치되어서, 이러한  제도상의 변경을 지도하고 있는 동료
를 지원하기 위해 출장 중에 있어요. 당신에겐 흥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린 한 집에 있으면서도
라라가 어느 방을 쓰고 있는지조차 난 모르고 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소.
    3
  두 갈래의 큰 길이 멜류제예보로부터 하나는 동쪽으로, 또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진구렁 길로서 숲 사이를 지나 즈이부시노로 통하는 길이었다. 즈이부시노는 조그마
한 곡물 집산지로서 행정상으로 멜류제예보 관할 하에 있었지만, 여러 가지 면으로 보아 앞서 있
었다. 다른 또 하나의 길은 자갈이 깔려 있었다. 겨울엔 질퍽하고 여름엔 건조한  들판을 지나 제
일 가까운 철도분기점인 비류치에 이르는 도로였다.
  6월에는 즈이부시노에서 제분 업자인 블라제이코가 독립 공화국을 선포해서 두  주일간을 지탱
하고 있었다. 이 공화국은 제212보병 연대의 탈영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탈영병들은 폭동
이 일어났을 때 무기를 가진 채 전선을 이탈하여 비류치를 경유하여 즈이부시노에  오게 된 것이
다.    이 공화국은 혁명 임시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러시아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블라제이코
는 청년 시절에 톨스토이와 서신 거래도 가졌던  분리파 교도였다. 그는 여기를 신천년성 즈이부
시노 왕국이라 선포하고, 모든 노동과 재산은  집단화되어 사도회라고 불리는 지방행정부가 관장
하고 있었다.
  즈이부시노는 언제나 전설과 과장의 근원지였다. 그것은  동란기 당시의 기록 문서에도 기록되
어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주변의 울창한 숲은 도둑들의 소굴이었다. 그  고장의 번창한 상인들과
거짓말처럼 비옥한 땅은 널리 화제거리가 되어 왔었다. 이 전선에서 가까운 서부 지방 일대의 특
징인 미신과 습관, 그리고 소문들이 이즈이부시노에서 나오고 있었다.
  블라제이코의 수석 보좌관에 대해선 황당무계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는 원래 귀머거리에
벙어리에 때로는 신령의 힘으로 말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7월에 즈이부시노 공화국은 붕괴되고 말았다. 혁명 임시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가 즈이부시노에
쳐들어 와서 탈영병의 무리는 비류치로 물러가게 되었다.  비류치 철도를 끼고 부근의 몇 베르스
타에 달하는 산림은 한때 벌목되었고 나무 그루터기에는 산딸기가 무성해 있었으며, 조금씩 도둑
을 맞아서 줄어든 목재더미와 또 나무를 벨 때 노동자들이 지은 허물어진  오막살이 집들이 있었
다. 여기서 탈영병들이 야영하고 있었다.
    4
  지금 지바고가 떠나려고 하는 이 병원은 그가 부상으로 입원하고 그 후  의사로서 근무하던 자
브린스키 백작 부인의 저택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백작 부인은 자기 저택을 적십자에 제공하였
던 것이다.
  2층짜리 그 집은 멜류제예보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큰 거리가 시작되는 광장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어 광장은 연병장이라고 불렸고,  옛날에는 여기서 병사들이 훈련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밤마다 집회 장소가 되고 있었다. 그 저택에서는 근처 일대가 한눈에 바라다 보였
다. 광장과 한길 이외에도 근처의 농장이 보였다. 그것은 농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가난한 근교
농장이었다. 또한 뒤쪽에 있는 백작 부인의  오래된 정원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백작  부인은 이
지방에 '라즈돌리노예'란 큰 영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따금 볼일이 있어서 여기에 내려왔을
때 가끔 이 저택을 쓰곤 했었다. 또 여름이 되면 영지를 찾아 사방에서 오는 손님들의 집합 장소
로도 쓰였다. 결코 이 저택은 부인만의 사유물은 아니었다.  지금 그 저택은 병원으로 바뀌고, 주
인은 페테르부르그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 댁에서 일하던 시녀 중에서 두 여인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전에 백작의 요리사였던 할
머니 우스치냐와 백작 부인의 딸의 가정 교사였던 마드므와젤 플레리였다.
  헝클어진 희끗희끗한 머리에 얼굴이 불그레한 노파 마드므와젤 플레리는 침실용 슬리퍼를 신고  
낡은 가운만을 걸친 채, 자브린스키 댁의 가세가 기울지 않았던  그 때와 다름없이 병원 안을 총
총걸음으로 돌아다녔다. 서투른 러시아 말로 프랑스 말처럼 말끝을 삼키면서 손짓과 몸짓을 섞어
가며 지껄이기도 했다. 그녀는 연기하듯이 제스처를 하면서  목쉰 소리로 크게 웃고는 몹시 기침
을 하곤 했다. 그녀는 라라의 마음속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으며, 그녀와 지바고는 서로 좋아하
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파한테는 라틴계  기질이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남녀의 중매
를 들고 싶어하는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을 같이 있게 하고는 즐거워하며 손가락을 흔
들어 보이면서 의미 있는 윙크를 해 보였다. 이런 꼴을  볼 때마다 라라는 의아하게 생각하고 지
바고는 화를 냈으나, 흔히 이상한 사람에게서 보듯  마드므와젤은 자기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
고도 그 고집을 버리지 못했다.
  우스치냐는 더구나 이상한 여자였다. 볼품없이 생긴 몸집은  흡사 밑으로 퍼진 암탉 같은 인상
이었다. 그녀는 거의 악의에 가까울 정도로 냉랭하고 고지식한 여자였다. 그  고지식한 성미는 미
신에 대해 한량없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스치냐는  주문을 많이 알고 있었으며 외출할 때
면 화재나 악마가 집에 들지 않도록 난로나 열쇠 구멍에까지 주문을 외지 않고는 한 발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정열은 옳은 것에는 한사코 변호하고 나섰다.
  즈이부시노 공화국이 와해된 후, 멜류제예보 집행  위원회는 지방에서의 무정부주의 경향에 대
하여 계몽 활동을 시작했다. 매일 밤 연병장에서는 평화로운 집회가 저절로  열려서, 이전 여름에
소방서 앞에 모여서 농지거리나 하면서 소일하던  실업자들이 조금씩 모여들었다. 멜류제예보 문
화협회가 집회를 권장하면서 토론을 지도하기 위하여 자체 연사나 초빙 연사를 파견하였다. 초청
된 연사들은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말을 할 수 있다는 따위의 소문을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강조
했다. 그러나 멜류제예보의 천박한 여직공이나 병사의  여편네들과 이전에 양반의 시종으로 있었
던 여자들은 오히려 어리석은 잠꼬대라고 하면서 그 소문을 한사코 변호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변호에 열을 올린 사람이 우스치냐였다. 처음에는 여자답게 수줍어하기도 했
지만, 차츰 그 연사들의 견해를  면박하는 데 대담해지더니 멜류제예보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를 말하는 연사를 야유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연단에서 열변가로 되었다.
  저택의 열어 놓은 창문으로 광장의 웅웅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밤에는 연
설하는 말소리까지도 들렸다. 우스치냐가 자주 연설을 시작하자, 마드므와젤은  사람들이 모여 있
는 방에 뛰어 들어와선 그들에게 연설을 들어보라고 권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흉내를 내기도 했
다.
  "무질서...혼란...제정주의의 비적들...즈이부시노! 벙어리...배신자...배신자!"
  마드므와젤은 입심이 좋은 떠버리 요리사를  은근히 자랑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는 다툼도
많았으나 그래도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
    5
  서서히 지바고는 친지의 집이나 사무소를 찾아가 작별 인사를 하며  필요한 서류를 신청하기도
하면서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 무렵 이 전선 지구에 새로 임명된 군사 위원 한 사람이 멜류제예보에 들렸다. 그 사람에 대
해선 모두들 풋나기 어린애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하여 새로운 일대 공세 작전이 계획되고 여러 가지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혁명군법회의가 설치되었고, 최근에 폐지되었던 사형 제도가 다시 부활되었다.
  떠나기 전에 지바고는 경비대 사령관으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했다. 언제나 사령관의 사무실은
혼잡을 이루고 있었으며,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열이 한길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수백 명의 인파가 시끄럽게
떠들어서 전혀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날은 면회일이 아니어서 텅 비고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는 서기들이 일이 점점 까다롭게 되어
간다고 신경질을 부리고 서로 비꼬는  눈초리를 던지며 묵묵히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령관
실에서는 유쾌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군복  단추를 끌러 제치고 무엇인가  시원한 것을 마시고
있는 모양이었다.
  갈리울린이 안쪽 방에서 얼굴만 내밀고 지바고를 보더니 마치 경주의 출발이나 하듯이 몸 전체
를 굽히면서 그를 맞았다.
  지바고는 어차피 사령관의 서명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마치 화가의
화실처럼 어수선했다.
  오늘의 영웅이며 온 시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군사 위원이 여기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임지에는 가지도 않고, 인사와 작전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이 지상 왕국에 지배자와
담소하고 있었다.
  "여기 또 스타 한 분이 나타나셨군." 사령관은 지바고를 소개했다.  군사 위원은 자기 이야기에
도취된 나머지 돌아보지도 않았다. 사령관은 지바고가 제출한 서류에 서명하고 나서 정중한 손짓
으로 방 중앙에 있는 낮고 푹신한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 방에서는 지바고만이 보통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과장된 자세
로, 우정 태연자약하게 앉거나 단정치 못하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사령관은 거의 책상 위에 눕다
시피 주먹으로 턱을 피고 페초린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부관은 떡 벌어진 체구를 긴 의자
에 기대고 마치 말 위에 한쪽 안장에만 올라앉은 것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군사 위원은 창문
턱에 팔 굽을 얹고 있었으며, 앉았다 일어섰다 하기도 하며 또 재빠른 걸음걸이로 방안을 서성거
리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입술을 놀리고 있었다.  화제는 주로 비류치에서 일어난 탈영병 문제였
다.
  군사 위원에 대한 소문은 듣던 그대로였다. 그는 날씬하고 품위 있어 보이고 이제 겨우 10대를
넘어섰을 정도였으며, 촛불처럼 고상한 이상에 불타고 있는 청년 같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는 명문 출신이며, 일부에서는 원로원 의원의 자제라고 말하고, 2월 혁명 때에는  국회로 자기 중
대를 이끌고 맨 먼저 쳐들어갔던 사람이라고들 하였다. 그의 성이 긴체였던가 킨츠였던가 지바고
는 확실히 귀담아 듣지 못했다. 발틱 지방이  억양이 섞인 페테르부르그 말투로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몸에 꼭 끼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꺼려서인지 나이 먹어 보이게 얼굴에
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부러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빳빳한 계급장을 단 어깨를
구부리고 두 손을 호주머니 속에 깊숙이 넣고 있기 때문인지 어깨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두 줄기
의 직선이 쭉 뻗어 있는 것이 흡사 기병과 같은 옷차림이었다.
  "철길을 따라 좀더 가게 되면 거기에 카자크 연대가 있습니다. 그들은 적색이며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러서 폭도들을 포위하면 끝장이 나는 겁니다. 군단 사령관은 지체없이 무장을
해제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령관이 군사 위원에게 보고했다.
  "카자크라니? 농담하지 말아요!" 위원은 얼굴을 붉혔다. "지금은 1950년이 아니란 말이요. 그건
혁명 전의 추억에 지나지 않소! 그런 점에서는 나는 사령관과 의견이 맞지 않아요. 당신에 장군들
은 너무나 잔꾀를 부리는 것이 탈이오."
  "아직 아무 조치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계획에 불과하고, 목안이 그렇다는 겁니다."
  "작전 문제에는 간섭하지 않도록 최고 사령부와  협조가 되어 있으니까, 나는 구태여 카자크를
불러드리는 명령을 취소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오.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로선  상식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하니까. 거기서 그들은 야영하고 있겠죠?"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항상 진지는 견고히 하고 있습니다."
  "좋아요. 나는 거기 직접 가보고 싶어요. 나에게 그 불상사를 보여주시오. 그 숲 속의 탈영병을
말이오. 총을 버렸는지 또한 탈영병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여러분, 그들은 민중이라는 것을 잊어
서는 안됩니다. 민중은 어린애입니다. 여러분은 민중을 알고 민중의 심리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됩
니다. 민중을 가장 잘 이용하려면,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민중의 가장 착하고 또  가장 민감한 심
금을 잘 건드려야 합니다. 나는 가서 흉금을 터놓고 그들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러면 반드시 이
탈했던 진지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믿어지질 않습니까?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주장이 옳기를 바랍니다."
  "난 그놈들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형제들이여, 나를 보시오. 나는  외아들로서 나의 부모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명예도 가족도 지위도 모
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이것도 다 여러분의 자유를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세계에서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한 것과 같은 일을 다른 많은  청년들도 했습니다. 우리
의 선배 원로들은 민중의 권리를 위하여 앞장서서 싸웠고 시베리아  유형을 감수했으며 쉴리셀리
부르그 요새 감옥에 갇혔던 사실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 또 누구의 강요로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은 어떻습니까? 이미 여러분은 평범한 일개 병사가 아닙니다. 세계 최초의 혁명군의 용사인 여러
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봅시다. 과연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름에  호응하였던가? 우리의 조국
이 구두사와 같은 적에 의하여 포위되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피를 흘리며  최후의 힘을 다하
고 있는 이때, 여러분은 인간의 쓰레기들과 한패가 되어서 정치적 의식을 가지지 못한 채 자유를
포기한 오합지졸이 되어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속담에도 있듯이, 식당에
뛰어든 돼지가 들어오자마자 식탁에 뛰어오른 격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나도 그놈들의 급소
를 찔러 수치를 알게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위험합니다." 사령관은 반대하려다 말고 재빨리 부관과 의미심장한 눈짓을 했다.
  갈리울린은 군사 위원의 정신없는 생각을 고치려고 애썼다.
  그는 제 212연대 폭도들을 잘 알고 있었다. 전선에서 같은 사단에 소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러나 그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지바고는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하였다. 위원의 순진한 태도에 놀랐으나 한편으로 쓴웃음이 나
왔다. 그리고 또 사령관과 그 부관의 빈정거리며  꾀만 부리는 기회주의적 교활한 잔꾀에도 염증
을 느꼈다. 한쪽의 우둔은 다른 한쪽의 교활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었다.
  아아, 허망하고 지루한 웅변, 얄팍한 미사 여구에서 벗어나,  아무 말 없는 대자연 속으로 숨어
서, 오래도록 뼈가 으스러지는 노동과 말 없는 깊은 잠, 참된 음악과 감정에  압도되어 언어를 잃
은 인간들끼리 의사가 소통되는 깊은 침묵 속에 젖어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있는 일일까!
  지바고는 라라와 만나 얘기할 일을 생각했다. 그 얘기는 반드시 즐거운  것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녀와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
나 그는 기회를 보아 일어나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살짝 방을 나왔다.
    6
  라라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준 마드므와젤은 그녀가 몹시 피곤해서 저녁 식사
를 재빨리 끝마치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면서 잠을 깨우지 말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
라면 노크해 보겠어요. 아마 그녀는 아직 잠들지 않았을 테니까." 마드므와젤이 권했다.
  "방은 어디지요?" 지바고가 물었다.  마드므와젤은 너무나 뜻밖이라  열렸던 입이 닫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라라는 2층 복도 끝에 있는, 백작 부인의 가구를 한데 넣어둔 몇 개의  방이 있는 바
로 맞은편에 있었다. 지바고는 아직 한 번도 거기에 가보지 못했다.
  어느새 날이 빨리 어두워지고 있었다. 밖에는 집과 담이 어둠 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나무들은
정원 구석에서 앞으로 나와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받고 있었다. 후텁지근하게 더운 밤이었
다. 몸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땀에 흠뻑 젖는다. 앞뜰로 흘러 나가는 석유 램프의 불빛이 더러운
안개처럼 나무 사이를 헤치고 스며든다.
  의사는 마지막 층계에서 발을 멈춰버렸다. 여행에서 지쳐서 막 돌아왔는데 문을 두드린다는 것
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얘기는 내일로 미루기로 하자. 결심을 바꾸었을 때는 언제나 허
전한 법이다. 그는 복도 반대쪽 끝으로 걸어와 옆집 앞뜰이 바라다보이는 창가에 기대 섰다.
  밤은 고요하고 신비로운 여러 가지 소리를  들려주었다. 복도 세면대에서도 물방울이 규칙적으
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창 밖에서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린다.  채소밭 근처에서
오이에 물을 주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우물에서 두레박의 쇠줄 소리가 들리더니  물통에 붓는 물
소리가 들려온다.
  온갖 꽃들이 일제히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의식을 잃었던 대지가 그 향기를 맡고
막 잠에서 끼는 것 같았다. 꺾여서 쌓인 나뭇가지 때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오래된 백
작 부인의 정원에서 가득히 꽃을 피운 거대한 보리수 노목이 입을 크게 벌리고 짙은 향기를 마음
껏 뿜어내고 있었다.
  오른쪽 담 너머 한길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떠들썩한 노랫가락, 술취한 병사들의 주정, 문
을 쾅쾅 여닫는 소리.
  백작 부인의 정원에 있는 까치집 너머에서 큼직하고 불그레한 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처음에
달은 즈이부시노의 새 벽돌 공장을 연상시키는 색깔이었으나, 이윽고 비류치 역의 급수탑과 같은
노란빛으로 변해갔다.
  창문 바로 밑에는 갓 베어온 건초가 자스민차와 같은 싱그러운 향기에 벨라도나의 향기가 뒤섞
여 풍기고 있었다. 얼마 전에 먼 시골에서 암소 한 마리를 팔려고 가져와 여기에 매어 놓고 있었
다. 그것이 하루 종일 끌려와서  지쳐버렸는지, 아니면 동료들이 그리워서인지 새  여주인이 주는
사료는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자 자, 받지 말고, 이걸 줄 테니 받지 말아요." 여주인은 부드럽게 달랬으나, 암소는 화난 듯이
머리를 내저으며 목을 길게 뽑고 구슬프게 울었다.  멜류제예보의 시커먼 창고 위에는 별들이 반
짝이고, 암소를 가엾게 여기는 하늘나라에도 외양간이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동종의 실오라기
가 별과 암소를 잇고 있는 듯싶었다.
  주위의 모든 것은 생존의 마술사인  효모에 의하여 발효되고 성장되고  불어나고 있었다. 삶의
즐거움이 들과 거리에, 벽과 담장에, 그리고 나무들과 인간의 살결에 부드러운 바람처럼 불어오고
있었다. 이 밀물에 밀려나지 않도록 지바고는 광장으로 연설을 들으러 나갔다.
    7
  달은 이미 중천에 높이 떠 있었다. 흰 분가루를 뿌린 듯 달빛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광장
을 둘러싼 둥근 기둥이 있는 관청 석조 건물 앞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검은 융단처럼  땅 위에 깔
렸다.
  광장 맞은편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말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
었으나, 지바고는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되어 소방서 앞 벤치에  걸터앉아 멍하니 주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광장으로는 좁다란 몇 갈래 길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시골길과 같은 진흙길이었다. 길을
따라 양쪽에는 기울어진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버드나무를 엮어  만든 울타리가 진흙길로
마치 새우를 잡는 어살처럼 내밀었다. 열어젖뜨려 놓은 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좁은
앞뜰에는 윤기 있는 수염을 드리운 옥수수의 불그스름한 이삭이 보였다. 창백하고 가느다란 접시
꽃들이, 더위에 견디지 못해 바깥 공기를 마시러  나온 잠옷바람의 여인처럼 담 너머를 기웃거리
고 있었다.
  자비로운 사랑을 느끼게 하며 해맑은 달빛이 가득히 흘러 넘치는 밤이 어쩐지  이 세상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최근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잔잔한 고요함을 깨뜨리며 또박또박한 음률
의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확신에 넘침 열띤 목소리였다. 긴츠 위원이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시 집행위원회가 그의 권위 있는  지원을 요청한 모양이었다. 그는 열띤  목소리로, 멜류제예보
주민들이 무질서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볼셰비키들의 파괴적인 영향에 굴복하고 있다고 비난했
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즈이부시노의 무질서한 상태를 선동한 장본인이 바로 볼셰비키라는 것이
었다. 사령관 실에서 말하던 때와 같은 정신으로 그는 강력하고 잔인한 적에 대하여, 그리고 조국
이 처해 있는 시련의 시기에 대하여 열변을 토로했다. 그의 연설 도중에 청중들의 야유가 일어나
기 시작했다.
  항의하는 고함 소리가 일어나고 잇달아 조용 하라는  소리도 들렸다. 야유하는 소리가 점차 더
시끄러워지자 긴츠와 동행하여 의장석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허락 없이  발언하지 말라고 소리치
면서 청중들에게 질서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이때 군중 속에서 여성  한 사람이 발언하겠으니
허락해달라고 소리쳤다.
  한 여인이 군중을 밀치면서 연단 대신에 엎어놓은 나무 궤짝 쪽으로 다가가더니  궤짝 위로 올
라서려고 하지도 않고 옆에 멈춰 섰다.  군중은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청중의 주의를 끈 그 여인은 바로 우스치냐였다.
  "위원 동지, 당신은 지금 즈이부시노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더러 눈을 똑바로 뜨라
고 했습니다. 눈을 날카롭게 뜨고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도 당신이 고작 한다는 소리가 볼셰
비키니 하는 따위의 소리뿐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야  한다거나 모든 사람은 다 동포라고 하
는 소리는 멘셰비키만이 아니라 신앙이 깊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일터나
공장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볼셰비키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친절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벙어리'의 얘긴 너무
나 많이 들어서 귀에 혹이 생길  지경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말하는  벙어리'를 헐뜯고 있는데,
당신네들은 대체 뭐가 못마땅해서 그러는 겁니까? 여태까지 말 못하는 사람이 당신네  허락도 없
이 불쑥 지껄이게 된 것이  괘씸하단 말입니까? 그것이 뭐가 그렇게  이상합니까! 이보다 괴상한
일은 얼마든지 있잖습니까. 예를 들어 저  유명한 암탕나귀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발라암,발라암,
제발 내 말 들어요. 그 길로는 가지 말아요. 꼭 후회하게 될 거예요'  하고 나귀는 말했으나, 발라
암은 듣지 않고 가버렸지요.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벙어리에다 귀머거리 당나귀인  주제에 말이
야. 바보 같은 짐승이 지껄이는  소리를 뭣하러 듣는가' 하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당나귀를
욕하고 나서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고 어떻게 외었는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얘깁니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요?" 누군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집어치워요." 우스치냐가 소리쳤다. "너무 꼬치꼬치 캐물으면 지레 늙어버려요."
  "우물쭈물 넘기지 말고 말해주어요" 하고 물고 늘어졌다.
  "좋아요. 그렇다면 가르쳐드리죠. 소금 기둥으로 변해버렸답니다."
  "그건 거짓말이야. 그건 로트지. 로트의 아내 이야기란 말이야."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의장은
질서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지바고는 잠을 자려고 집으로 돌아왔다.
    8
  다음날 저녁에 지바고는 라라를 만났다. 식기실에서  금세 빨래한 세탁물을 쌓아놓고 다리미질
을 하고 있었다.
  그 방은 위층 뒤쪽에 있어서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여기서 사모바르를  끓이기도 하고 음식을
접시에 나누어 담거나 쓰고 난 접시를 승강기에  실어 부엌으로 내려보내기도 했다. 여기에는 병
원의 자재 명세를 보관하여 식기와 의류를 확인했었다.  그리고 이곳은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집
합소로 이용되기도 했었다.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문은 열려 있었다. 방안에는  오래된 공원처럼 보리수의 꽃향기와 회양나
무의 마른 가지에서 풍기는 씁쓰레한 향기가 숯의  열기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다리미가 식지
않도록 바꾸어 가며 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어젯저녁엔 왜 저의 방을 노크하시지 않았죠? 마드므와젤한테서 들었어요. 하지만 노크하시지
않기를 잘했어요. 그때 저는 이미 잠들어 있었어요.  그래 어떠세요? 숯불을 조심하세요. 옷에 닿
지 않도록."
  "마치 병원의 빨래를 도맡아 하시는 것 같군요."
  "아니에요. 제것이 대부분인 걸요. 제가 멜류제예보에 아주 주저앉았다고 농을 하셨지만 이번에
는 정말 떠납니다. 물건을 정리하고 짐을 꾸리는 것만 끝나면 이내 떠날 거예요.  저는 우랄 지방
으로, 당신은 모스크바로. 훗날에 누가 '멜류제예보라는 조그마한 도시를 아십니까?' 하고 물으면,
당신은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하고  대답하시겠지요. '그럼 라라를 기억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대답하실 거예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여행이 재미있었어요? 시골은 어때요?"
  "말을 하자면 많아요. 이놈의 다리미가 왜 이렇게 빨리 식어버릴까! 미안하지만 저것 좀 집어주
세요. 저기 난로 위에 있는 것 말예요. 그리고 이것을 도로 놓아주세요. 미안합니다. 마을은 다 다
르더군요. 주민들이 하기에 따라 다 달랐어요.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잘 돼가고 있어
요. 그런데 어떤 마을에 가면 사람들이 한결같이 주정뱅이로 보이는 곳도  있었어요. 그런 마을일
수록 형편없이 황폐해서 보기에도 안됐어요."
  "그럴 리가 있나요! 주정뱅이라니? 잘못 보신 거겠지! 남자란 남자는 모조리 군대에 나가  버렸
으니까 마을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요. 새 혁명 위원회는 어땠습니까?"
  "주정뱅이에 대해선 당신이 잘 모르고 계시는 거예요.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위원회 말인가요?
위원회는 큰 골칫거리가 될 것 같아요. 지시를 실행할 수도 없고, 일을 할 만한 사람도 없었어요.
지금 농민들의 제일 큰 관심거리는 토지 문제예요...  가즈돌리노예에도 들렀는데 아주 좋은 고장
이더군요. 올 봄에 화재와 약탈을 당해서 창고가 불타버렸고, 과수원도 타고 집도 여러  채 타 버
렸다는 거예요. 즈이부시노에는 가질 않았어요. 갈 수도 없었구요. 사람들은 '말하는 벙어리'가 정
말 있다고 말했어요. 그 사람의 얼굴 생김새까지 말해주더군요. 젊고 유식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어젯저녁에 우스치냐가 광장에서 그 사람을 변호하더군요."
  "제가 돌아와 보니까, 라즈돌리노예에서 또  넝마를 한 짐이나 보내 오지  않았겠어요. 저는 몇
번이나 그냥 두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여기 있는 것만으론 부족한 줄 아나봐요. 그런데 오늘 아침
에 경비대 사령부에서 사람이 사령관의 쪽지를 가지고 왔었는데, 백작 부인의 은잔 한 질과 유리
컵을 빌려달라는 거예요. 생사에 관계되는 일이나 하루 저녁만 빌려주면 곧 반환하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빌려주기만 하면 반쯤은 돌아오지 않거든요.  왜 빌려달라는 건지 대략 짐작은 가
요. 아마 손님이 와서 파티를 하려는 거겠죠."
  "그럴 겁니다. 신임 군사  위원이 도착했으니까. 이 전선  지구에 파견된 사람이었어요.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났지요. 탈영병을 처리할 모양인데 포위해서 무장  해제시키겠다나요. 그런데 위원이
란 사람은 아직 풋내기에 일하는 것도 어렸어요. 이쪽에선 카자크를 불러오려고  하는데, 그는 감
상적인 호소로서 체포할 생각이었어요. 민중은 어린애와 같다느니 하면서 떠들고, 마치 그것을 무
슨 어린애 장난같이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갈리울린이 만류하며 그곳에 가서는  안 된다, 야수를
건드리면 큰일이 난다고 하면서, 이  일을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했지만 요지부동이더군요.  한 번
이렇다고 생각한 이상 그것을 절대로 포기할 순 없다는  겁니다. 봐요, 잠시 다리미를 놓고. 이제
이 고장은 곧 큰 소동이 일어날 겁니다. 우리 힘으론 막을 길이 없어요. 소동이 일어나기 전에 여
길 떠납시다!"
  "일어나긴 뭐가 일어나겠어요! 당신은 괜히 지나치게 생각하시는군 요. 어차피  저는 떠나긴 하
지만, 지금 당장 떠날 순  없어요. 재산 목록을 다 점검해서  깨끗이 인계해야 하니까요. 뭘 훔쳐
가지고 도망쳤다는 소린 듣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누구한테 인계하지요?  그것도 문제구요. 제가
그 재산 점검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마 모르실 거예요. 그런데도 저한테 돌아오는 건 욕뿐
이거든요. 저는 자브린스키 백작 부인의 물건을 죄다 병원 재산으로 기록해버렸어요. 그런데 그것
제가 횡령하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욕하는 거예요! 정말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 그릇이나 융단 따위에 애를 쓸 건 하나도 없어됴. 그까짓  것들 내버려두어요. 지금은 그런
것에 마음을 쓸 때가 아닙니다! 어제 당신을 만났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는 아주  충격을 받았
어요! 당신에게 솔직히 얘기할 수 있었을 거예요. 어떤 난처한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었을 거구!
아니, 정말 나는 가슴에 담은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어요. 아내와 자식,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서 이야기하고 싶었답니다. 어른이 다된 남녀가 뭐가 두려워  이야길 나눌 수 없단 말입니까? 남
의 눈치를 본다는 건 치사한 일입니다.
  어서 다리미질을 계속해요. 나에겐 개의치 말고 내의나 깨끗이 다려요. 나는  이대로 이야길 계
속할 테니까. 오래 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얘깁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한 번 생각해보아요. 그런데 당신과 나는 이런 시대에 같
이 살고 있지 않아요. 이런 일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단 한 번밖엔  없는 일이지요. 생각해보아
요. 온 러시아가 송두리째 뒤집혀서 당신이나 나나 그밖에 모든  사람이 밝은 빛 아래 노출돼 있
어요! 이제 우리를 엿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자유! 참된 자유예요! 이건 말만의 자유가 아니
라 뜻밖에 찾아온 자유, 예기치 않았던 자유, 우연한 자유 그리고 또 오해에서 오는 자유이지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위대해요! 그리고 자기의 위대함을 알고 어리둥절해 있는 형편이에
요. 아시겠어요? 자기의 무게에 짓눌리고 자기의 위대함에 압도당하고 있는 거지요.
  일은 계속하면서, 듣고만 있어요. 따분하지 않습니까? 다리미를 바꿔드리지요.
  어젯저녁 나는 광장에서 집회를 구경했어요. 볼  만하더군요! 우리 조국 러시아는 지금  가만히
있지를 않고 요동하고 있어요. 진정해 있질 못한단 말입니다. 입을 열기 시작하더니 멈출 줄을 몰
라요. 사람들만이 아니라 별과 나무들도  한데 모여서 이야길 하며,  꽃들이 밤에 철학을 말하고,
석조 건물이 집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복음서에 있는 그대로가 아닙니까? 사도들이
살고 있던 바로 그 시대 그대로지요. 성 바오로의  말을 기억하시지요? 여러 가지 방언으로 예언
할 것이니 해득할 재능을 달라고 기도하라."
  "별과 나무들이 집회를 연다는 의미는 알겠어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거든요."
  "그것은 부분적으론 전쟁 탓이라 하겠지만 나머지는 혁명 때문이에요. 전쟁은 인생의 인위적인
중단-마치 얼마 동안 인생을  유보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참으로 바보스러운 짓입니다!
혁명은 싫든 좋든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너무나 긴 세월을 한숨만으로 살아왔으니까. 지금은 모
든 사람이 소생하고 재생하고 변신해버렸어요. 우린 모두 다 두 개의 혁명을 경험했어요. 그 하나
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혁명인 거예요. 제가 보기엔 사회주의
는 바다와 같으며 개인적인 개개의 혁명이  그 바다로 흘러들고 있어요. 그 바다란  인생의 바다,
독창성의 바다예요. 제가 말하는 인생이란 당신이 그림에서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부에서 경험하려는 거예요. 추상적인 인생이 아니라 실제에서 얻는 인생을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억제할 수 없는 열기에 떨리고 있었다. 라라는 다리미에서 손을 떼고 심각한 표
정으로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지바고는 당황하여 다음 말의 실마리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쑥
스러운 침묵이 흘러간 뒤 문득 머리에 떠오른 말을 이어갔다.
  "요즘 나는 성실하게 살며 보람찬 생활을 해야겠다는  의욕이 솟구쳐요! 이러한 기쁨에 넘치는
가운데서도 나는 당신을 알 수 없는 슬픔에 젖은 시선을  보게 됩니다. 어딘지 먼 곳을 바라다보
는 당신의 눈동자를. 난 당신의 그런 시선을 보게 됩니다. 어딘지 먼 곳을  바라다보는 당신의 눈
동자를. 난 당신의 그런 시선을 보면 견딜  수 없어요! 당신의 얼굴이 행운을 즐기며  누구한테도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는 표정을 가져주기를 바랍니다.  만일 당신과 아주 가까운 당신의 친구나
당신의 남편이-군인이라면 더욱 좋겠지만-나의 손을 잡고, 당신의  운명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거
나 괜히 당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난 그 손을 뿌리치고 상대방을 때리
려고 덤벼들지 몰라요...아니, 이거 쓸데없는 소릴 해서... 죄송합니다."
  다시금 지바고의 음성이 마음속의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는 손을  흔들고 마음을 억제할
수 없이 몹시 겸연쩍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기대어 서서 볼을 어루만지며, 멍한 시선
으로 어둠에 잠긴 정원을 내다보면서 가슴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라라는 테이블과 다른 창문 사이에 놓인 다리미대를 돌아 지바고의 뒤에서 몇  걸음 떨어진 방
한가운데 멈춰 섰다.
  "언제나 전 이런 일이 있을까봐 두려웠어요."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조용히 말했다. "제가 나빴
어요... 하지만 그런 말씀하시면 안 돼요. 어머나, 선생님 때문에 큰일이 났군요!"  그녀는 크게 소
리치고 다리미대로 달려갔다. 셔츠 위에 올려놓은 다리미 밑에서 매콤한 연기의 가느다란 실오라
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라라는 다리미를 내려놓으면서 화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선생님, 제발 마드므와젤한테 가서 물을 좀 마시고 오세요. 그리고 여태껏  제가 알던 그런 훌
륭한 분이 되어서 돌아와 주세요, 네! 아시겠지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죠? 부탁이에요."
  그 후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이야기는 다시 있지 않았다. 일주일 후 라라는 마침내 병원을 떠나
고 말았다.   
    9
  얼마 후 지바고도 역시 집으로 떠났다. 이곳을 떠나기 전날 밤 심한 폭우가 내렸다.
  거센 바람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지붕을 부술 것만 같고, 바람이 바뀔 때마다 비바람
이 한 걸음 한 걸음 두들겨 때리며 나가듯이 거리를 휩쓸었다.
  우레 소리가 그칠 사이가 없었고, 계속 번쩍이는  번갯불에 비치는 한길이 저 멀리로 사라져가
고, 휘어진 나뭇가지들도 똑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듯 흔들리고 있었다.
  한밤중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드므와젤은 잠을  땠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일어나 귀를
기울었다. 노크 소리가 계속 들렸다.
  이제 병원에는 일어나 문을 열어줄 사람이 하나도 남질 않았단 말인가? 모든 일을  내가 다 도
맡다니. 책임감이 있는 천성을 타고났어도 이 늙은 사람이 아니면 안된단 말인가?
  그래, 이 저택은 부유한 귀족의 소유이지만 병원은 어디까지나 민중의 것이 아닌가? 그 민중은
도대체 누구한테 병원을 돌보게 하려는 걸까?  그 위생병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군  간부와 간호
원, 의사는 다 어디로 도망쳐버렸을까.  책임 있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 하지만 집에는 아직
환자가 남아 있었다. 전에 응접실이던 외과  병실에는 다리를 자른 환자 두 사람이  있고, 아래층
세탁소 옆 창고에는 이질 환자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스치니아마저 어디론가 초대를 받
고  갔었다. 폭우가 있으리라고 뻔히 알면서도 나가버렸어. 외박할 좋은 구실을 찾은 셈이지.
  다행히 문의 노크 소리가 멎었다. 아무도  나가 보지 않았더니 단념한 것 같았다.  이 비바람에
어떻게 나갈 수가 있어야지... 혹시 그게 우스치니아가 아니었을까? 아내야, 그녀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니, 큰일이군, 또 두들겨대는군!
  돼지 같은 것들! 아마 지바고가 그 소릴 듣고서 나오겠지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어림도  없어요.
그는 내일 출발할 사람인데, 마음은 이미 모스크바나 여행에 있을 텐데.  그런데 갈리울린은 뭣하
고 있을까! 이렇게 시끄러운데 그대로 코를 골며 잠들어 있을까?  아니면 자는 체하고 이 불쌍한
노파더러 나가보란 말인가? 이렇게 험악한 세상에, 그것도  한밤중에 어디서 굴러온 말 뼈다귀인
지도 모를 놈에게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야!
  갈리울린-마드므와젤은 문득 생각났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 참, 난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
이군. 나와 지바고 둘이서 그를 숨겨주었고 민간인으로 변장시켜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도망하기
위해서 이 근처의 길과 동네를 가르쳐주었지. 그때  역에서 무서운 린치 사건이 일어나 폭도들이
긴츠 위원을 살해하고 비류치 역에서  멜류제예보까지 갈리울린을 뒤쫓아와서 총을  쏘면서 온통
읍내의 집을 샅샅이 뒤졌지!
  만일 자동차를 타고 온 군인들이 없었더라면, 이  고장은 돌멩이 하나 제대로 남아나지 않았을
거야. 때마침 이곳을 통과하던 장갑 사단이 그 악당 놈들을 몰아냈기에 다행이었지.
  폭우는 기세가 꺾이면서 물러가 버렸다. 천둥소리가 뜸해지면서 그 소리도 멀리서 들려왔다. 이
따금 비도 멎고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도랑으로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먼데서 번개가 소
리도 없이 마드므와젤의 방을 이따금 비추며 무엇을 찾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얼마 동안 잠잠하더니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누군가 급한 볼일이 있어서 제
멋대로 두들겨대는 것 같았다. 다시 바람이 세차게 불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다려요!"
  마드므와젤은 누군지 모를 사람을 향해 소리지르고는 제 목소리에 놀라 몸을 떨었다.
  누가 두들기고 있는지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슬리퍼를 끌고 옷을 어깨에 걸치고 지바고
를 깨우려고 황급히 그의 방으로 갔다. 그 사람과 같이 나가면 그다지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바고도 역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 이미 손에 촛불을 들고 나오려는 참이었다.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로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의사 선생님,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무서워서 혼자 갈 수가 없어요." 그녀
는 프랑스어로 말하고  나서 다시 러시아어로  덧붙였다. "아마 라르나와  가야르 중위가 아닐까
요?"
  지바고도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뜬 순간,  갈리울린이 도망가다가 길이 막혀서 숨으려고 되
돌아온 것이 아닐지, 아니면 라라가 여행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겨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생
각했다.
  현관에서 지바고는 촛불을 마드므와젤에게 주고 빗장을  빼고 손잡이를 돌렸다. 거센 바깥바람
이 그의 손에서 문을 빼앗아 열면서 촛불을 꺼버리고 길가의 차가운 빗방울을 날려 넣었다.
  "누구요? 누구요? 아무도 없어요?"
  바깥 어둠을 향해 지바고와 그녀가 소리질렀으나 대꾸가 없었다. 갑자기 또 딴 곳에서 노크 소
리가 들렸다 - 뒷문이 아니면 정원으로 향한 창문이 아닐까?
  "바람 때문이군." 지바고가 말했다.  "하지만 확실히 알아보아야 하니까  뒤쪽으로 돌아가 보고
오십시오. 정말 누가 왔을지도 모르니까.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마드므와젤이 집안으로 사라져 갔을 때  그는 밖으로 나가 현관 처마  밑에 섰다. 눈이 어둠에
익혀지자 어렴풋이 날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먹구름이 하늘에 너무나 낮게 떠서 쫓기듯이 달리고  있었다. 조각구름이 나무 끝에 잡힐 것만
같았다. 나무들은 하늘을 쓸고 있는 빗자루처럼 한 방향으로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비에 젖
은 저택의 판자 벽이 잿빛에서 검은빛으로 변색해 있었다.
  "어떻습니까?" 의사가 돌아온 마드므와젤에게 물었다.
  "당신이 말하던 대로 아무도 없었어요." 그녀는 집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는 길이었다. 나뭇
가지가 주방의 창문을 두드려서 창문 유리 한 장이 깨지고 마룻바닥엔 빗물이  흥건히 괴어 있었
다. 라라가 사용하던 방도 흡사 바다와 같이, 아니 진짜 바다가 돼 있었다. " 그리고 이쪽 덧문이
부서져서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어요. 그래서 소리가 났던가 봐요."
  그들은 잠시 말을 주고받고는 문을 잠그고 공연히 잠을 설친 것을 후회하면서  각기 자기 방으
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까 이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 주면 라라가 비에 흠뻑 젖어 덜덜 떨면서  뛰어든다. 그녀가 비옷을 벗고 있는 사이
에 두 사람은 이것저것 묻는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그리고 밤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부엌 난로 앞에서 불을 쬐면서 머리를 빗고 웃으며 자기의 모험담을 들려준다.
  두 사람은 이러한 정경이 꼭 일어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현관문을 닫아걸고 난 후에도 그녀
의 비에 젖은 모습이 거리의 집  모퉁이에 꼭 서 있을 것만  같아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그녀의
환상이 오랫동안 두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  
    10
  비류치 역의 통신사 콜랴 프롤렌코는 역에서 일어난 병사들의 소요 사건에 간접적인 책임이 있
다고 보았다.
 콜랴는 멜류제예보에서 잘 알려진 시계공의 아들이었으며 어려서부터 그 고장에서는 누구한테나
낯익은 아이였다. 소년 시절에 그는 라즈돌리노예의 하인들  집에 놀러가서 백작 부인의 두 양녀
들과 함께 놀았다. 그녀는 콜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는 프랑스 말도 좀 배웠었다.
  멜류제예보에서는 어떤 날씨에도 가벼운 차림으로 모자도 쓰지 않고 여름  운동화 바람에 자전
거를 달리는 콜랴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는  전주와 전선을 쳐다보며 상태를 조사하면서 곧잘
두 손을 놓고 한길에서 자전거를 달리곤 했다.
  멜류제예보에서는 역의 교환대에서 지선으로 연결된 전화를 몇 집만 가지고 있었다. 역의 교환
대는 콜랴의 소관이었음, 그는 몹시 바쁘게 지냈다. 전화나 전보를 취급하는  일뿐만 아니라 역장
포바리힌이 자리에 없을 때에는 철도 신호도 처리해야 했다. 신호는 교환대가 있는 바로 그 방에
서 보내지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그는 한꺼번에 몇 개의 기계 장치를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어느새 애매하고 무뚝뚝하게 아무렇
게나 대답하는 이상한 버릇이 몸에 배어버렸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을 수도 있고
대화를 끊어버릴 수도 있었다. 소동이 일어난 그날에도 그는 이런 버릇이 좀 지나쳤던 것이다.
  사실 콜랴는 꼭 전해야 할 말을 전하지 않음으로써 갈리울린의  선의를 짓밟고 무의식적으로나
마 이 사건을 치명적인 것으로 크게 만들어버렸다.
  갈리울린이 시내에서 전화를 걸어와 역이나 그 근처에 긴츠 위원이 있을 테니까 찾아서 전화를
받게 해달라고 콜랴에게 부탁했었다. 갈리울린은 긴츠 위원에게 자기가 갈 테니까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콜랴는  가까이 오고 있는 열차에 신호를 해야
하니까 자리를 뜰 수 없다는 구실로 위원을 불러올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비
퓨치로 출동 명령을 받은 카자크 부대의 수송 열차를 연착시키기 위하여 온갖  힘을 다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고서도 그는 막상 카자크 부대가 도착하자 당황한 빛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기관차는 어두컴컴한 플랫폼의 지붕밑으로 천천히  들어와서 관리실 큰 창문  앞에 멈춰 섰다.
콜랴는 파란 바탕에 노란 색으로 철도 회사의 머릿글자를 수놓은 묵직한 면직  커튼을 젖히고 창
문턱에 놓인 큰 주전자를 들어 맑은 유리컵에 물을 따라 두세 모금 마시고 나서 바깥을 내다보았
다. 기관사실에서 기관사가 그를 보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더러운 녀석! 기생충 같은 놈!" 콜랴는 속으로 괘씸하게 생각하면서 욕을 퍼부었다. 그는 혓바
닥을 쑥 내밀고 주먹을 휘둘러 보였다. 기관사는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흠칫해 보이고 객차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내가 뭣을 할 수 있겠는가? 너 같으면 어떻게 할 도리가 있겠는가? 별수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너는 더러운 짐승들과 한패거리야." 콜랴는 몸짓으로 대
답했다.
  화물 찻간에서 말들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말들은 내려오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다. 말발굽 소
리는 나무 발판에서 돌 바닥 플랫폼으로 옮아왔다. 말들은 앞발을 치켜들며 선로 몇 개를 건너서
끌려갔다.
  선로 끝에 내버려진 나무 객차가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페인트칠이 비에 씻겨 모두 벗겨지고,
벌레와 습기가 그 내부를 썩히고 있어서 객차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숲  속의 수목과 비슷
한 모양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이끼와 자작나무 숲은 바로 그 차량  뒤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구
름이 낮게 떠가고 있었다.
  명령이 내리자 카자크들은 말에 올라 숲 속 공지를 향하여 질주해갔다.
  제 212연대 폭도들은 포위되었다. 말에 탄 기병들은 들판에서보다  숲 속에서 더 키가 크고 사
납게 보였다. 폭도들은 움막집에 총을 숨기고 있었으나 기병한테 위압되고 말았다. 카자크들은 사
벨을 뽑았다.
  말들이 에워싼 둥근 포위망 한가운데 재목더미가 있었다.  긴츠 위원은 이 재목더미 위에 올라
서서 포위된 사람들을 향해 연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제나름대로 병사의  의무에 대하여, 조
국의 의미에 대하여, 또 그 밖에 여러 가지 고상한 제목에 대하여 말했다.  그러나 청중은 아무런
공감도 보이질 않았다. 청중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 전쟁으로 너무나  많은 공포에 시달
려 와서 웬만한 것에는 느낌이 없었고, 더욱이 지쳐 있었다. 위원이 늘어놓는 문구들은 벌써 이전
에 지겹도록 들었던 소리들이었다.  4개월씩이나 좌익과 우익에서 이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는
바람에 순진했던 이들이 이제는 연사의 외국인 냄새를 풍기는 이름과 발틱 지방의 말투에 냉소를
지었다.
  긴츠는 자기 연설이 장황해진 것을 깨닫고 당황했으나, 자기에게 감사해야 마땅할 처지에 무관
심하거나 오히려 적의를 품고 지루함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이 괘씸한 청중에게 자기의 입
장을 명백히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점 초조해진 그는  주저할 것 없이 그들에게 좀더 강력한
어조로 위협을 주리라 다짐했다. 여기 저기서 술렁거리는 것도 아랑곳없이 혁명 군법회의가 설치
된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탈영병이 사형을 바라지 않는다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주모
자를 끄집어내라, 이것이 싫다면 너희들은 비열한  배신자가 될 것이며 무책임한 오합지졸이라고
공격했다. 군중은 이런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수백 명의 고함 소리가 일시에 터져나왔다. "좋아, 똑같은 소리. 다 들었어." 별로 성난 것 같지
도 않은 목소리와 증오에 찬 발광적인 고함 소리가 뒤섞여 터져나왔다. "저 뻔뻔스러운  놈! 옛날
과 똑같군! 장교들의 못된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군! 우리가 배신자라구? 그럼 당신은 뭐요?
저따위 녀석은 상대도 안 돼. 저놈은 독일의 스파이란  말이야. 용케 숨어 들어왔군. 증명서를 내
보여라, 이 귀족놈! 그런데 너희들은 바보처럼 입만  벌리고 있으니." 폭도들은 카자크 병사를 향
해 몸을 돌렸다. "너희들은 질서를 회복하러 온 거지, 자 우릴 마음대로 체포해 보지."
  그러나 카자크병도 긴츠의 서투른 연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의 눈엔 전부가 돼지로 보이는 모양이군." 카자크들이 투덜거렸다. "저 혼자 양반인 체하고!"
처음에는 한 사람 두 사람이 그러더니 차츰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 넣으
면서 말에서 내렸다. 대부분이 말에서  내리자 그들은 한 떼로 몰려  공지의 중앙에 나가서는 제
212연대 병사들과 한데 어울려 한패가 되고 말았다.
  "조용히 이곳을 떠나십시오." 카자크  장교가 긴츠를 염려하여 말했다.  "당신의 차는 건널목에
있습니다.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빨리 떠나시오."
  긴츠는 시키는 대로했다. 그러나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체면상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되어 떳
떳하게 옆쪽으로 향했다.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위신을 꺾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의젓한 걸음걸
이로 걸었다.
  역 가까이 까지 걸어갔다. 선로가 보이는 숲 언저리까지 나와서 처음으로 뒤돌아보았다. 소총을
가진 병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어쩌자는 걸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뒤따르는 사람들도 걸음을 빨리 했다. 그래서 그들과의 거리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2중 벽으로
된 객차 뒤쪽을 돌자 뛰기 시작했다. 카자크를 싣고 온 기차는 대피 선에  옮겨져 있었다. 선로에
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선로를 가로질러 높은 플랫폼에 뛰어올라갔다. 그  순간 병사들도 낡은
객차의 뒤에서 달려왔다. 포바리힌과 콜랴가  소리지르며 손을 흔들어 역  건물 안으로 숨으라고
했다. 거기로 도망쳐 들어갔다면 살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이어내려 오면서 박혀버린 자존심, 그를 자기 희생으로  몰아 놓은 자존심,
그리고 여기서 잘못 들먹이던 명예심이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는 길을 막고 말았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며 공포를 억누르기 위하여 온 신경을 긴장시켰다  - 나는 놈들에게 "이성을 찾으라. 내
가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은 너희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해야겠다.  감동을 줄 만한 몇
마디만 하면 그들은 제정신을 차릴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용감한 행동이나 감격스러운 연설은 그의 가슴속에서 무대나  연단 혹은 의자
위에 올라서서 군중을 향하여 호소하는 행위와 무의식적으로 결부되는 것이었다.
  역 건물의 문가에 종이 달려 있는 바로 밑에 방화수 통이 하나 있었다. 단단한 뚜껑이 닫혀 있
었다. 긴츠는 뚜껑 위로 뛰어올라가  다가오고 있는 군중을 향하여  격한 어조로 횡설수설하면서
연설을 시작했다. 어색한 목소리, 쉽게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문에서 두 발짝을 두고 서서 정신나
간 사람처럼 대담한 몸짓으로 병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들은 문득 발을 멈추고 손에 쥔
총을 내렸다. 그런데 긴츠가 올라선 뚜껑이  갑자기 빠지면서 한 발은 물  속에 또 한 발은 물통
가에 걸려 밑으로 늘어졌다. 물통 언저리에 걸터앉아 허우적거리는 긴츠의 모양을 바라보던 병사
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앞에 섰던 한  병사가 긴츠의 턱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른 놈들은
뛰어가서 이미 죽은 그의 몸에 총검을 쑥쑥 찔러댔다.
    11
  마드므와젤은 콜랴에게 전화를 걸어서 의사 선생이 모스크바로 돌아가시는데 기차의 좋은 좌석
을 부탁하면서, 만일 안 될 경우 재미없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콜랴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전화
연결을 해주고 있었으나, 그의 말에 가끔 소수점을  섞어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다른 전화로
는 암호문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프스코프, 프스코프, 들려요? 폭도가 어쨌다구? 응원을?... 무슨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거요. 마
드므와젤? 전화를 끊어주시오. 프스코프, 프스코프, 36포인트 제로,포바리힌한테 부탁하세요. 그건
모두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오, 거짓말. 35... 제기랄... 전화 끊어주시오, 마드므와젤..."
  마르므와젤은 전화통에 대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프스코프, 프스코프라니, 날 속이려고 해도 속아넘어가나. 그게 무슨 소리람, 거짓말쟁이. 당신
어디 두고 봅시다. 알겠어, 내일 의사 선생을 꼭 차에 태워야 해요. 난 이 이상 더 싱거운 사람과
는 얘기하기 싫으니까."
    12
  지바고가 떠나던 그날은 몹시 무더웠다. 이틀 전에 있었던 것  같은 폭우가 또 가까이 오고 있
었다. 교외 역 부근의 해바라기 씨 껍데기가 흩어져 있는  곳에서 시꺼먼 하늘이 소리 없이 위협
하여 오두막집과 거위의 무리가 허옇게 떨고 있었다.
  역 앞 넓은 들판의 잡초들은 몇 주일씩이나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덮이면서 마구 짓
밟혀버렸다.
  남루한 회색 모직 외투를 입은 노인들은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모여든 사람들 사이를 서성대
며 무슨 소식이나 소문을 알려고 찾아다녔다. 열 네댓 살쯤  돼 보이는 얌전한 소년 소녀들이 팔
을 베고 누워서 마치 가축을 지키기나 하듯이  껍질을 벗긴 나무작대기를 휘두르고, 그들의 동생
들이 셔츠의 옷깃을 팔락거리며 붉은 엉덩이를 드러내고 아장아장 뛰놀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두
발을 앞으로 쭉 뻗고 앉아서 갈색 농부 옷의 밋밋한 젖가슴에 아기를 껴안고 있었다.
  "총격전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양 떼와 같이 흩어져버렸어요." 역장이 냉담한 말투로 지바고에게
말했다. 그들은 출입구 앞 땅바닥이나 구내의 마루에 누워 있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흩어져버렸어요! 그래서 다시 땅을 볼 수가 있었어요. 기뻤습니다! 넉 달 동
안이나 땅바닥을 볼 수가 없어서 잊어먹을 지경이었다니까.  긴츠 위원이 쓰러진 장소가 바로 여
깁니다. 참 놀라운 일이었어요. 난 전쟁에서 여러 가지 무서운 일들을 봐서 이런 일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가련한 생각이 듭니다.  정말 무의미한 짓이에요. 무엇 때문이
지요? 그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겁니까? 하지만 생각하면  놈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분이 부유
한 집안의 아들이라고 생떼를 쓰더군요. 자, 오른쪽으로 갑시다. 내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이 기차
에는 탈수가 없어요. 밟혀 죽을 겁니다. 지방 열차에 타시지요. 지금 편성  중에 있습니다. 타시기
전까지는 모르는 체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편성도 되기 전에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오늘
밤에 수히니치에서 바꿔 타면 됩니다."
    13
  '비밀'열차가 철도 차고 뒤에서 뒷걸음질로 정거장으로 들어오자 군중들이 일시에 선로에 꽉 들
어찼다. 사람들은 완두콩처럼 언덕을 굴러 내려와서 제방을 기어오르며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승강
구나 완충기에 뛰어오르는가 하면, 창문을 넘어 기어들기도 하고 지붕으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기
차가 아직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 어느새 만원이 되어 버리고, 플랫폼에 정거했을 때에는 안에 꽉
찼을 뿐만 아니라 꼭대기에서 밑까지 승객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기적적으로 플랫폼까지
나온 지바고는 저절로 객실 복도에까지 떼밀려 들어가 버렸다.
  수히니치까지 줄곧 자기 짐짝 위에 앉아서 갔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개고 햇볕이 따스하게 흐르는 들판에는 기차의 바퀴 소리에 간간이 귀뚜
라미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가리고 있는 승객들 옷 때문에 차안은  어두컴컴했다. 마루와 의자 위에 사람의 그림자
가 두 겹 세 겹으로 비쳤다. 사람의 그림자는 맞은편  차창을 지나 기차가 달리고 있는 그림자와
함께 비치고 있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떠들고 노래 부르고  싸움질을 하고 또 카드놀이를  하면서 야단법석들이었
다. 기차가 정거할 때마다 우르르  몰려드는 밖의 군중들의 아우성으로 소란은  더한층 심해졌다.
폭풍의 바다와 같은 들끓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귀청을 찢는 듯하다가도 잔잔한 바다처럼 조용
해지기도 했다. 수수께끼처럼 조용한 플랫폼을 부산히 뛰어 다니는 발소리와 화차 밖에서 웅성거
리며 다투는 소리, 띄엄띄엄 들려오는 말소리, 서로 이별을 고하는 소리, 정거장 뜰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닭 울음소리, 소리고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차안에서 전해 준 전보가 멜류제예보에서 멀리 보내온 석별의 인사와도 같이 익숙한 향
기를 창문에서 풍겨주었다. 이 향기는 정원의 꽃이나 야생화보다도 높은 곳에서 풍겨 들어오면서
무엇보다도 그것을 남몰래 자랑하고 있는 듯싶었다.
  사람들이 창문을 가리고 있어서 의사는 나무들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 바로 옆
에 무거운 가지를 차량의 지붕 위에 드리운 밤처럼 울창하게 우거진 잎들이  달리는 기차에서 날
린 먼지에 뒤덮이며, 조그맣게 반짝이는 촛불의 불꽃이 별똥처럼 날리고 있는 광경을 머리 6속에
그려보았다.
  여행 도중에는 이따금 정거장에 사람들이 웅성댔고, 어디에나 보리수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풍기는 보리수의 향기는  기차를 앞질러 북쪽으로 먼저  여행하면서, 아무리 작은
정거장에 도착하여도 뒤에서 오는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모든 소문을 먼저 알고 그들의 질문
에 대답해주는 듯싶었다.
    14
  그날 밤 수히니치에서는 아직도 전쟁 전의 친절한 마음씨를 잃지 않고 있는  한 역부가 지바고
를 안내하여 어두운 선로를 넘어서 방금 도착한 임시 열차 뒤쪽에 달린 2등차에 태워주었다.
  차장의 열쇠로 칸막이 좌석 문을 열고 지바고의  짐을 안으로 넣으려고 하는데, 차장이 달려와
서 짐을 밖으로 내던지려 했다. 그러나 지바고가 간곡히 부탁을 하자 차장은 그대로 물러가 다시
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이상한 열차는 후에 '특별 열차'였다는 것을 알았다.  정거장마다 잠깐씩 정거할 뿐 꽤 빨리
달렸다. 무장한 경비병 비슷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찻간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했다.
  지바고가 차지한 칸막이 좌석에는 조그마한 탁자 위에 양초가 촛물을 흘리며 반쯤 열린 차창에
서 흘러 들어오는 바람결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촛불이 켜 있는 칸막이 안에는 승객 한 사람밖에는 없었다. 그는 금발의 청년이었으며 팔과 다
리의 길이로 봐서 매우 장신의 사나이였다. 창가의 구석진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었으나, 지
바고가 들어오자 겸손하게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그의 좌석 밑에는 뭔가 깔개와  같은 것이 들어차 있었다. 그  한쪽 구석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귀가 축 늘어진 사냥개가 기어 나왔다. 지바고한테 다가와서 냄새를 맡아보고는 발을
꼬고 있는 키다리 주인 모양으로 엉성한 다리를  이리저리 내두르며 찻간 안을 기어다녔다. 그러
나 얼마 후 주인의 명령으로 좌석 밑에 기어 들어가 다시 깔개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때 비로소 지바고는 케이스에 들어 있는 쌍연발총이라든지  가죽 탄띠, 그리고 잔뜩 들어 있
는 사냥 주머니가 못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년은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매우 말하기를 좋아했으며 상냥하게 웃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지바고와 이야기를 시작했
다. 말하면서도 그는 지바고의 입을 유심히 바라다보고 있었다.
  듣기에 귀에 거슬릴 만큼 거친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양철통을 울리는  것 같았다. 그는 말하는
데 또 한 가지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제대로 러시아말을  하면서도 '우'하는 모음을 프랑스어의
'유'나 독일어의 '위'처럼 어색하게 발음하는 것이었다.  이 부정확한 '우'를 발음하면서도 그는 몹
시 애를 썼으며 다른 음보다 높게 발음했다.  만나서 처음부터 지바고는 그의 발음이 어색하다고
느꼈다. 그는 간혹 그 결점을 바르게 하려고 했으나 으레 어색한 소리가 되곤  했다. 지바고는 의
아하게 생각했다.
  '웬일일까? 어디선가 책에서 본 것 같다. 의사로서 알아두어야 할 일인데 잘  생각이 나질 않는
군.' 지바고는 생각했다.   
  침대 대신에 선반 위에 기어올라갔다. 청년은  잠자는 데 촛불이 방해가 될 테니  끄자고 했다.
지바고는 감사하다고 했다. 그가 불을 끄자 찻간은 캄캄해졌다.
  "창문을 닫을까요?" 지바고가 물었다. "도둑이 무섭지 않습니까? "
  대답이 없었다. 더 높은 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새 찻간을 나가버렸나 생각하고 성냥을  그었다. 그렇게 금방 잠들지는 않았으리라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년은 눈을 뜨고 침상에 않아 있었다. 몸을 쑥 내밀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냥불이 꺼졌다. 지바고는 다시 성냥을 긋고 또 한 번 물어 보았다.
  "좋도록 하세요." 청년은 이내 대답을  했다. "나는 도둑놈이 욕심을 낼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열어 두시지요, 더우니까."
  '이상한 사람이군!' 지바고는 생각했다 '이상한 사람이야. 어두운 데서는 말을 하지 않는군. 그리
고 이번엔 아주 정확한 발음이었어. 놀라운 일이야!'
    15
  지난 한 주일 동안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과 그리고 여행을 준비하느라고  아침 일찍 일어
나 떠나와서, 지바고는 편안한 자리에 길게 몸을 펴기만 하면  이내 잠들 것만 같았으나 막상 눕
고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피곤했기 때문에 오히려  잠을 청하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어둠 속에서 갖가지 상념이 소용돌이쳐 왔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도 정리해 보면 두 가지 뚜
렷한 갈래로, 서로 얽혔다가 풀어지곤 하는 두 개의 실뭉치로 나눌 수가 있었다.
  그 하나는 토냐와 집에 대한 생각이다. 지극히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도 모든 것이 애정
과 따스함에 젖어들고 시적인 분위기에 잠기는 예전의 그 차분한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상념이었
다. 2년 동안이나 그 생활에서 떨어져 있다가 지금 야간 급행 열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이 상념에는 혁명에 대한 그의 충성과 찬미의 마음도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중간 계급이 받아
들일 수 있는 혁명이었고, 블로크의 추종자였던 1905년  당시의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혁명
이었다.
  전쟁이 있기 전인 1913년부터 1914년 사이에  지평선 위에 나타나 러시아의 사상과  예술과 또
러시아의 생활에 등장한 그 사상은, 러시아 전체와  지바고 자신에 관련된 새로운 질서의 선구자
로서 또 양속으로서 이렇게 오래도록 가슴속에 간직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금 그러한 것들이 다시 소생되고 계속되기를 바라며 다시 그러한 풍토로 돌아간
다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이상으로 가슴이 벅차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상념의 또 한  갈래에는 좀 다른 새로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구세대에 연유하는
낯익은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의하여 결정되고 강요되는 마치  지진과도 같이 당돌한
것이었다.
  전쟁과 그로 인한 유혈, 공포, 방황, 야만성, 시련과 전쟁이 가르쳐주는  세속적인 지혜 등은 이
새로운 것에 포함된다. 전쟁의 물결에 휩쓸린 쓸쓸한  작은 도시나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도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 또 1905년의 혁명과 같은 대학의 관념적인 혁명이 아니라 오늘의 새로운 혼란
과 전쟁이 가져온 피비린내 나는, 거칠고 원시적인 병사들에 의한 혁명,  직업적 혁명가인 볼셰비
키들이 지도하는 혁명이 여기에 속한다.
  이 새로운 상념 속에서 전쟁 덕분에 정처 없이 방황하는 간호원 라라도 들어 있었다. 지바고로
서는 알 길 없는 복잡한 과거를 지닌 라라. 누굴 원망치도 않으나 그녀의 깊은 침묵이 그것을 말
해주고 있으며 수수께끼와 같은 그녀의 눈동자엔 무엇인가 감춰져 있었다. 그리고 지바고는 일생
을 통해서 자기 가족과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해  온 것과는 반
대로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열린 차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지바고의 머리카락을 헝클
어뜨리고 먼지를 날렸다. 밤중에도 낮과 같이 정거장마다 사람들이 모였고 보리수의 꽃향기가 풍
겨 왔었다.
  이따금 어둠 속에서 역으로 달려오는 마차의 달음질 소리와 기차 바퀴의 소음이 이야기 소리와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에 뒤섞여 들려왔다.
  이런 때에는, 밤의 그림자가 설레이면서  저마다 머리를 맞대고 나무  잎사귀를 팔락이며 서로
속삭여대는 소리의 뜻을 지바고는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러시아의 약동과 흥분이 점점 더 넓게
파문을 일으키는 소리이며, 혁명과 이에 따르는 숙명적인  고난의 시기 그리고 아마도 끝내는 혁
명의 위대성에 대한 소리일 것이다.
    16
  지바고는 다음날 오전 열 한 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깼다.
  "마르키스! 마르키스!" 그는 자기 사냥개를 부드럽게 부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람과 단둘
뿐이며 그 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었다.
  어려서부터 귀에 익은 정거장 이름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칼루가 지방을  지나 모스크바로 꽤
들어와 있었다.
  전쟁 전과 같은 여유 있는 기분으로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한 후에 청년이 초대하는 아침 식사시
간에 맞춰서 찻간으로 돌아왔다. 이제 상대방을 좀더 잘 관찰할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바고의 관심을 끈 것은 그 청년이 지나치게 떠벌리며  도무지 침착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청년은 이야기를 좋아했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며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언어 능력의 기능, 다시 말해서 단어를  발음해서 소리를 낸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마치 용수철처럼 엉덩이를  들썩이고 별다른 이유 없이 귀청이 찢
어질 정도로 큰 소리로 웃어대며 만족스러운 듯이 양손을 비벼대곤 했다. 이렇게 하고도 자기 기
쁨을 표현하는데 부적한 것 같으면 무릎을 탁탁 치면서 눈물이 날 만큼 웃어댔다.
  그의 말투는 어젯밤과 같이 여전히 이상한 데가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자가 당착되어 있었다.
묻지도 않은 것을 고백하는가 하면 아무런 저의도 없는 질문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자
기 신상에 대해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를 횡설수설했다. 거짓말도 조금씩 섞어가면서 지
나치게 과격한 의견을 꺼내며, 보통 상식에 속하는 견해를 부인하면서 지바고를 어리둥절하게 만
들었다.
  그 청년의 견해는 지바고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것과 비슷한 데가 많았다. 지난 세기의 허무주
의자가 그와 유사한 과격한 사상을 주장하였고,  좀 후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의 주인공들도
주장했으며, 더욱이 최근에는 그의 직접적인 아류에 솔하는  시골 지식 계급의 그것과 비슷한 사
상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시골의 지식층은 때로는 도회지보다 앞서고 있을 경우
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뿌리까지 파헤치는 습관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었으나, 도
시의 지식층은 이런 태도는 이미 낡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의 말에 의하면 그는 저명한 혁명가의 조카가 되지만 자기의 부모는 반대로 형편없는 반동
이라고 했으며, 그의 말을 빌면 외고집 장이라고 했다. 양친은 전선 가까운 곳에  큰 영지를 가지
고 있었으며 청년은 거기에서 자랐다고  했다. 양친은 일생 동안 삼촌과는  앙숙이었으나, 이제는
오히려 삼천 덕택에 불쾌한 꼴을 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 자신의 사상은 삼촌과 같으며 인생이나 정치, 예술 할 것 없이 과격론자였다. 이런 점에서
청년은 표트르 베르호벤스키의 냄새를 풍겼다. 좌익사상을 닮았다고 하기보다는 경박하고 천박스
러운 점이 닮았었다. '이제 아마 자기는 미래파라고 나오겠지' 하고 지바고가 생각하고 있자, 실제
로 얘기는 현대 예술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스포츠 얘기겠지-경마나 스케이트, 그리고 레슬링 같
은...' 또 지바고가 생각했던 대로 얘기는 사냥으로  옮겨갔다. 청년은 자기 고향에서 사냥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나는 사격의 명수랍니다. 만일 신체의 결함만 없었더라면  군대에서 명사수가 되
었을 겁니다." 그는 자랑했다. 지바고가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아니 거짓말인 줄 아십니까?
내 실력을 의심하는 것같은데..." 하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아직도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했군요? 난 당신이 나의 결점을 짐작하리라 생각했어요."
  그는 호주머니에서 두 장의 카드를 꺼내서 지바고에게 주었다. 한 장은  그의 명함이었다. 그는
두 개의 성을 가지고 있었다. 막심 아리스타르호비치 클린초프=포고레브시크였다. 그러나  삼촌의
성을 기념하여 간단히 포고레브시크라고만 불러 달라고 했다.
  또 하나의 카드에는 네모진 부호가 그려져 있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맞춰놓은 두 손과 손가
락을 구부린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농아자의 알파벳이었다. 이윽고 모든  것이 명백해졌
다. 포고레브시크는 가르트만이나 오스트로그라도프 농아학교에  다닌 재주가 뛰어난 학생이었으
며, 선생의 목 근육을 바라보고는 어렵지 않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알아내는 농아 자였던 것이다.
  고향의 지명이나 사냥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지바고는 물어보았다.
  "이런 말을 묻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혹시 당신은 즈이부시노 공화국이나 그 수립에 무슨 관계
를 가졌지 않습니까?"
  "잘 아시는군요...블라제아코를 아십니까? 무슨 관계가 있느냐구요? 있지요! 물론 있지요!" 포고
레브시크는 즐거운 듯이 소리치더니 몸을 좌우로 흔들고  양쪽 무릎을 탁탁 치면서 웃어댔다. 그
러고는 다시 꿈 같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청년의 이론을 실제에 적용할 기회를 준 사람은 블라제이코였으며 장소를  제공한 곳은 즈이부
시노였던 것이다. 그러나 청년의 이론이 지바고에겐 납득되지 않았다.  포고레브시크의 철학은 무
정부주의의 원리와 사냥꾼의 허풍이 뒤범벅돼 있었다.
  청년은 마치 철학자와도 같은 초연한 태도로 장차 비참한 사태가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고 예언
했다. 지바고는 마음속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이 보기 싫은 젊은 친구가 점잔을 빼
면서 오만한 얼굴로 예언하는 데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잠깐만, 잠깐만." 지바고는 머뭇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아마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태로 봐서는 즉 혼란과 파괴, 그리고 적군의  압력 같은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데 그러한 위험한 실험을 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은 새로운 동란에서 회복 돼야 하
지 않습니까. 적어도 평화와 질서를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건 어린애와 같은 생각입니다." 포고레브시크가 말했다. "당신이 무질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
은 당신이 갈망하고 있는 질서와 같은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파괴는 광범한 창조적 계획에 있어
서는 불가결한 예비 단계라는 것입니다.  사회는 아직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아주
산산조각이 되어버린 곳에서 진정한 혁명적 정부가 아주 새로운 기초 위에서 사회를 다시 건설하
게 되는 것입니다."
  지바고는 불쾌한 마음을 참으며 통로로 나왔다.
  기차도 속도를 더 빨리 하면서 모스크바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별장들이 산재해 있는 자
작나무 숲을 지나고 있었다. 교외의 지붕 없는 작은 정거장과 피서객의 무리가 먼지 구름과 함께
멀리 뒤로 물러났다. 기관차가 울려대는 기적 소리가  주변의 숲속으로 달려가 산울림이 되어 되
돌아온다.
  며칠만에 처음으로 지바고는 자기가 어디에 있으며, 그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그리고 한
두 사간 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들을 뚜렷이 알게 되었다.
  3년간의 변화, 행방 불명과 변혁,  전쟁과 혁명, 파괴와 죽음의  광경, 포격, 폭파된 교량, 화재,
폐허 등 모든 것이 갑자기 거대하고 공허하고 무의미한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오랜 중단
끝에 처음 찾아온 실제의 사건이 이 급행 열차의 여행이며,  미칠 듯이 고대하던 집에 가까이 가
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기 집은 편안하게 예전과 다름이 없을는지, 돌멩이  하나라도 그립지 않
은 것이라곤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인생이고 유익한 경험이며, 모든 탐구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거야말로 예술이 지향하는 것-자기 집으로, 단란한 가정으로, 진실한 자기로, 참된 존재
로의 복귀인 것이다.
  자작나무 숲을 뒤로하고, 기차는 나뭇잎  터널을 빠져나와 넓고 밝은 곳으로  나왔다. 비스듬한
분지에서 널따란 언덕으로 펼쳐진 들에 검푸른 감자밭  이랑이 가로로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감
자밭 끝의 언덕 위에 온실에서 들어낸 유리 형틀이 있었다.  들 반대쪽에 달리고 있는 열차의 후
미에는 검은 자색 구름이 하늘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 구름장  사이에서 비치는 햇살이 열차
바퀴의 덜거덕 소리가 사방에 퍼지듯이 온상 유리에 눈부시게 반사되었다.
  갑자기 굵직한 빗방울이 햇빛에 반짝이면서 구름  사이에서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대
지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질주하는 기차 바퀴  소리와 경쟁하듯, 마치 비가 뒤떨어질세라 따
라가기에 있는 것 같았다.
  지바고가 미처 주의를 돌리기도 전에 언덕 어귀에서  성구세주 교회가 보이고, 다음 순간 벌써
도시의 종루와 굴뚝과 지붕과 건물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스크바입니다." 지바고는 찻간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내릴 채비를 해야지요."
  포고레브시크는 벌떡 일어나더니 사냥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중 굵직한 오리 한  마리를 꺼냈
다.
  "이거 받으십시오." 그는 말했다. "기념으로 드리는 거니까. 덕분에 온종일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사양을 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럼, 좋습니다." 지바고는 하는 수없이 오리를 받기로 했다. "당신이 내 아내에게 보내는 선물
로서 받겠습니다." "부인한 테요? 그거 참 영광입니다! 부인한테,  부인한테 꼭 전해주십시오." 포
고레브시크는 부인이란 말을 생전 처음 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못 기쁜 듯이  온몸을 흔들며 웃
어대는 바람에 사냥개까지 덩달아 일어나 그와 기쁨을 나누려는 듯 멍멍 짖어댔다.
  기차는 정거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차안이 캄캄해졌다. 귀머거리 청년은  무슨 인쇄된 포스터
종이에 싼 들오리를 의사 앞에 내미는 것이었다.
      6.모스크바의 숙영지
    1
  좁은 기차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 지바고는 움직이고 있는 것은 기차뿐이고 시간은 정
지되어 있는 것 같아서 아직 정오가 못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태운 마차가 스몰렌스
크 광장의 혼잡을 누비고 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몇 년 후에 의사는 그날의 기억이 뚜렷이 남아서인지, 혹은 후의 경험이 살을 붙여서 혼돈하고
있는지 똑똑히는 모르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별로 붐빌 이유가 없었고 사람들은 습
관적인 타성으로 시장에 나와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텅 빈 노점들은 닫혀 있
기는 하였으나 잠그지도 않았고, 청소를  하지 않아서 너저분하게 흩어진  광장에서는 팔고 사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만 하더라도 점잖은 옷차림을 한 수척한 노인이나 노파들이  벽에 기대서서 행인들
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무한테도 필요 없는 조화나  유리 뚜껑과 주둥이가 달린 둥근 커피병,
검은 레이스가 달린 야회복, 폐지된 관청 제복 따위를 벌여놓고 그저 서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더 긴요한 물건만을 사고 있었다. 곰팡이 냄새 나는 배급품 검은 빵,
지저분한 설탕 덩어리, 포장된 채로 반으로 자른 1온스 짜리 싸구려 담배 같은 것들이었다.
  온 시장에서는 이런 잡동사니가 매매되었고 사람의 손으로 넘어갈 때마다 그 값이 자꾸만 뛰어
오르고 있었다.
  마차는 광장으로 통하는 좁다란 길로  접어들었다. 서쪽으로 기운 해가 잔등에  비쳤다. 앞에서
빈 마차 하나가 덜컥거리며 가고 있었다.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먼지 기둥이 석양빛을 받아 청동
색으로 보였다. 마침내 지바고가 탄 마차는 길을 막고 있던 짐마차를 피해서 앞질렀다. 마차는 속
력을 내면서 달렸다. 의사는 담장이나 벽에서 떨어진  낡은 신문이나 포스터 등이 인도나 차도에
산더미처럼 흩어져 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올랐다. 바람이 이것들을 한쪽으로 불어제치면 지나던
말과 마차 바퀴가 그것을 또 다른 쪽으로 밀어붙이곤 했다.
  네거리를 몇 개 지나고 의사는 집이 모퉁이에 보였다. 마차가 멈춰 섰다.
  지바고는 숨가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마차에서 내려 현관에 다가가서 초인종을 눌
렀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눌렀다. 여전히  응답이 없어서, 짧게 연거푸 눌러댔다. 한참 종
을 누르고 있는데 문이 토냐의 손으로 소리 없이 열리고,  그녀가 활짝 열어젖뜨린 문을 잡고 서
있었다. 너무나 뜻밖이라서 이 순간 서로의 입에서 터져나온 외침 소리도 듣지 못한 듯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토냐가 문을 활짝 열었다는 것은 환영을 뜻하는 것이며 포옹을 기다리
는 표시인 것이다. 잠시 후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들은 뜨겁게 부둥켜안았다.  이윽고 서로들 예기
에 바빴다.
  "무엇보다도, 다들 별고 없소?"
  "네, 네, 잘 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제가  그 동안 실없는 편지 많이 드려서 미안해요. 하
지만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어요. 왜 전보를 치시지 않고서? 짐은 마르켈더러 옮기게 할 테니까
요. 예고로브나가 문을 열러 나오지 않아서 걱정하셨죠? 시골에 갔어요."
  "당신 좀 수척해졌군, 하지만 싱싱하고 예뻐요! 잠깐만, 마차를 보내고 오겠어."
  "예고로브나는 밀가루를 구하러 보냈어요.  다른 하인들은 다  내보내고 지금은 싸샤를 돌보는
뉴샤라는 계집애 하나만 있어요. 고르돈이나 두도로프도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던데요."
  "싸샤는 잘 있어요?"
  "잘 있어요. 금방 잠이 깼는데.  당신이 여행엣 돌아오는 길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보실
수 있게 할 텐데."
  "아버님 집에 계시오?"
  "당신한테 알리지 않았던가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시소비에트에 나가 계신답니다. 의장이랍
니다. 놀라셨죠? 마차 삯은 주었나요? 마르켈! 마르켈!"
  두 사람은 고리짝과 트렁크를 내버려 둔 채 길 한복판에 서서 오가는 통행일 방해하고 있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그들을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훑어보기도  하고 인도에서 멀어
져가는 마차와 활짝 열린 현관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마르켈은 젊은 주인을 맞으러 대문에서 뛰어 들어왔다. 셔츠 위에 조끼를 입고 손에는 수위 모
자를 들고 달려오면서 외쳤다.
  "아이구, 서방님 아니십니까! 우리의 빛이 돌아오셨군요! 유리 안드레예비치, 우릴  잊으시진 않
았군요. 하나님이 우리의 기원을 저버리시지 않았어! 하여튼 잘 오셨습니다.!" 그는  구경꾼들에게
호통을 쳤다. "무슨 볼일이 생겼다고 이렇게 서 있는  거요? 가시오, 가요! 무슨 구경거리가 있단
말이오!"
  " 잘 있었나, 마르켈! 한 번 안아 보세. 모자를 쓰게나. 뭐 달라진 것은  없었나? 마누라와 딸들
도 다 잘 있고?"
  "잘 지내고 있답니다. 하나님 덕분에 잘들 자라고 있지요. 달라진  것이라면 서방님이 전선에서
바쁘게 지내시는 동안에 우리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는 거예요.  난장판이었지요. 어찌할 도리
가 없었어요. 길거리는 지저분하고 지붕은 못  고친 채 버려 두었구요, 집에 칠도  하지 못했답니
다. 뱃속은 사순절 단식 때처럼 텅 비었고요. 이것이 다  참된 평화- 그들이 말하는 무병합, 무배
상의 덕택이랍니다."
  "여보, 마르켈은 언제나 저렇다니 까요. 저 사람  예기를 드려야겠군요. 당신이 좋아할 줄 알고
저렇게 수다를 떤답니다. 저 사람의 뱃속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걸요. 가만히 있어요,  마르켈, 난
다 알고 있으니까. 당신이 얼마나 능청스럽고 또 약아빠진 사람인지. 당신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
지 잘 알지요."
  마르켈은 짐을 안으로 들여다 놓고 계속 지껄였다.
  "아씨는 너무하세요. 서방님도 다 들으셨죠? 언제나  저러신 답니다. 저더러, 너의 뱃속은 굴뚝
처럼 시커멓다, 요즘은 어린애뿐만 아니라 강아지들까지도 뭐가 어떻게 되어 돌아가는지 잘 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지만 서방님, 정말 그걸 아는 사람은 1백 40년  동안이나 돌 밑에
놓여 있는 석공의 예언서를 본 사람뿐이에요. 그리고 이건 저의 생각인데,  우리는 한마디 콧노래
에 팔려 왔던 처지에 무슨  불평이 있겠어요? 보세요, 아씨가  저더러 가라고 손짓하고 계시잖아
요."
  "그렇게 거드름 피우지 말고, 이제 됐어. 어서 서방님의 짐을  마루에다 날라요, 마르켈. 서방님
이 시킬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를 테니까."
    2
  "드디어 쫓았어. 시원하게 됐어.  당신이 그 사람을 믿는다면  믿어보세요. 하지만 그것은 거짓
연극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은 그 사람의 말만 듣고 다른 바보들과 같은 바보로 아시겠지만 속으
로는 칼을 갈고 있는 흉칙한  사람이에요. 그 칼을 누구한테 던질  것인지 아직 그것을 결정하지
못했을 뿐이고,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심술꾼이에요."
  "그건 좀 지나친 얘기 같군! 내가 보기엔 그저 주정뱅이고 좀 허풍이 있을 뿐인 것 같소."
  "그럼 언제 그가 맑은 정신일 때가 있나요? 어쨌든 마르켈의 얘긴 그만 해둡시다. 싸샤가 다시
잠들지 않았는지 걱정이에요. 혹시 당신은 기차에서 티푸스를... 당신 몸에 이는 없겠지요?"
  "그렇지 않을 거요. 편한 여행을 했으니까. 전쟁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여행했소. 하지만 우선
간단히 씻고 나중에 또 다시 씻기로  하지. 그런데 왜 그리로 가오?  응접실을 지나서 다니지 않
소? 지금 당신은 딴 생각을 하고 있군 그래."
  "그렇군요, 당신은 아직 모르시죠. 아버님과 의논한 끝에 아래층  일부를 농업 아카데미에 내주
기로 했어요. 어차피 겨울에는 난방도 큰일이고  2층도 너무 큰 편이니까. 그래서  우린 내주기로
했어요. 아직 이사를 오진 않았지만 도서실과 식물 표본실, 종자 표본들은 옮겨왔어요. 쥐를 끌어
들였는지 몰라요. 하기야 그것도 곡식은 곡식이니까요. 아직까지  방은 깨끗이 쓰고 있어요. 지금
은 '방'이라고 말하지 않고 '거주 면적' 이라고  한답니다. 이리로 오세요. 어리둥절하시는군! 뒤쪽
층계로 올라가야 해요. 아시겠어요? 자, 내가 안내할 테니 따라오세요."
  "방을 내 주길 잘했어. 내가 있던 병원도 개인 주택이었어. 방들이 쭉 연결되어 있었고, 여기저
기에 모자이크 마루가 깔렸고 화분에 심은 종려나무가 마치 유령처럼 침대 위에  손을 뻗치고 있
어서 부상병들이 잠을 깨는 순간에 곧잘 놀라곤 했다오. 물론 정상적이 아닌 전투 신경증인 사람
이었지만. 그래서 화분을 들어내지 않을 수가  없었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돈  많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는 뭔가 불건전한 데가 있었다는 거요. 가구도  지나치게 많고, 방도 많고, 취미도 지나
치게 섬세하고 허례 허식이 너무 많아요. 우리가 쓸 방이 적어진 것은 아주 잘된 일이오. 우린 아
직 방을 더 줄여도 무방할 것 같소."
  "그 종이 꾸러미는 뭐예요? 새 부리 같은 것이 툭 튀어나와 있군요. 오리군요! 아이, 귀여워! 어
디서 구했지요? 믿어지질 않는군요. 요즘은 귀한 물건이에요."
  "기차에서 얻었다오.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요. 다음에 합시다. 어떻게 할까? 부엌에 둘까?"
  "네, 그렇게 해요. 뉴샤한테 빨리 털을 뽑고 씻으라 하겠어요. 올 겨울에는 기근이나 연료 부족
등 여러 가지 무서운 얘기가 돌고 있어요."
  "그래, 가는 곳마다 그런 얘기뿐이더군. 하지만 나는 금방 기차 차창에서 밖을 내다보면서 평화
로운 가정 생활과 일하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더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오. 그 밖의
것은 우리 힘으론 어쩔 수도 없는 일이오. 어쨌든 많은 사람에게 어려운 시기가  닥쳐올 거요. 어
떤 사람은 불행을 피하려고 남부 지방인 카프카스나 그보다 더 먼 곳으로 가려고 애쓰고 있다 하
지만, 난 그따위 짓은 하고 싶지  않아요. 떳떳한 사나이라면 이를 악물고 조국에  닥쳐온 운명을
함께 감수해야 해요. 이건 재론할 여지도 없는 일이지. 하지만 당신의 경우는 달라. 난 당신을 고
생시키고 싶지가 않아요. 핀란드나 어디 안전한 곳으로 당신을 보내고 싶어요. 이거 참 어찌된 일
이요, 한 층계마다 이렇게 반시간씩이나 실없는 얘길  하다보면 위층까지 언제 다 올라갈지 모르
겠군."
  "잠깐만, 진작 말씀드려야 하는  건데. 좋은 소식 전해  드리죠. 니콜라이 아저씨가 돌아오셨어
요."
  "누구, 니콜라이라니?"
  "니콜라이 아저씨 말예요."
  "토냐, 그럴 리가! 어찌된 일이오?"
  "네 그래요, 스위스에 계셨대요. 런던으로 가는 길에 핀란드를 경유해서 오셨대요."
  "당신! 날 놀려대는 건 아니겠지? 당신이 만났단 말이오? 어디 계시는데? 곧 만날 수 있어요?"
  "어지간히 급하시군요! 지금 시골 어떤 사람의 별장에 가 계세요.  모레 돌아오신다고 약속했어
요. 많이 변했더군요. 당신 실망하실 거예요. 오는 도중에 페테르부르그에 들린 것 좋은데 볼셰비
키한테 물들어버렸어요. 아버지는 아저씨와 언성을  높이면서까지 논쟁했답니다. 참, 층계마다 잃
게 멈춰 서다간 정말 안 되겠네요? 빨리 올라갑시다.  당신도 고난과 위험이 닥쳐올 것이란 소문
을 들으셨단 말이죠? 정말 어떤 고난이나 불행이 일어날 건지 예측할 수 없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무슨 방도가 있겠소? 힘껏 살아 나가야지, 이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
도 아니니까. 우리도 남들처럼 정세나 관망합시다."
  "땔감이나 물, 등불도 없이 살아야 하고, 돈도 없고 물자 배급도 없어지리라고 하더군요. 또 멈
춰 섰군요! 자, 갑시다. 아르바트 거리엔  신문을 태워서 음식을 끓일 수  있는 작은 철제 난로를
팔고 있어요. 그 상점 주소를 알고 있어요. 다 팔리기 전에 하나 사기로 해요."
  "그럼, 사야지. 여보, 그래 니콜라이 아저씨가 돌아온 게 틀림없단 말이지! 정말 믿을 수 없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2층 한쪽 구석을 우리가 차지하고, 그러니까 아버지와 싸샤, 그리고 뉴
샤와 함께 두 개나 세 개의 방을 차지하여 같이 쓰고, 나머지는 전부 내주도록 해요. 칸막이로 막
고 출입문을 따로 내면 딴 집과 같이 될 거예요. 그리고 가운데 방에 작은 난로를 놓고 창문으로
연통을 뽑아요. 그 방에서 빨래니 취사니 손님 접대니 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연료를 절약할
수도 있고, 이럭저럭 겨울을 나게 될 것 같군요."
  "그렇군, 문제없을 거요. 그리고 좋은  생각이 있는데, 뭔지 알겠소?  우리 집들이 축하 연회를
차립시다 오리 요리를 만들고 니콜라이 아저씨도 초대합시다."
  "좋아요. 그럼 전 고르돈한테 알콜을 부탁하지요. 실험실이나  어디서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여
기가 아까 말씀드린 방이에요. 마음에 드세요? 트렁크를 여기 두고  고리짝을 가져오세요. 연회에
아저씨와 고르돈 외에 두도로프와 슈라도 함께 부르도록  해요. 좋겠죠? 욕실은 잊어버리시진 않
았죠? 몸에 소독약을 뿌리셔야 해요. 난 싸샤한테 가서 뉴샤를  아래층으로 내려보내겠어요. 그리
고 준비가 되면 제가 부르러 오겠어요."
    3
  모스크바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어린 아들이었다. 싸샤가 출생하자마자 그는 군에
소집되어 아들 얼굴조차 익힐 여유가 없었다.
  토냐가 아직 병원 산실에 있던 어느 날, 그가 면회하러 찾아갔었다. 이미 군복  차림을 하고 모
스크바를 떠나는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애기한테  젖먹이는 시간이어서 병실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합실에 앉아 있는데, 산실 저편 복도 끝에 있는 육아  실에서 십여 명 가량의 애기들이 합창
하듯 울어대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간호원 여럿이 복도를 바쁜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갓난아기가
감기 들지 않게 물건을 싸듯이 둘둘 말아서 두 팔에 하나씩 안고 어머니한테로 옮기고 있었다.
  "응아, 응아." 애기들은 다 똑같은 음률로 냉담하리만큼 거의 무감동하게 의무적으로 지르듯 울
어댔다. 그 중에서 목소리 하나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그것은 다른 목소리보다 더  큰 고통을 나
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깊이 있고 침울한 반항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지바고는 장인
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뜻에서, 아들이름을 알렉산드르라고 짓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무슨 까닭인
지 몰라도 그의 주의를 끌고 있는 특징을 가진 울음소리가 마치 자기 자식이라는 생각에 견딜 수
가 없었다. 아마도 그 울음은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특정한 인간이 장차의 개성과 운명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알렉산드르라는 애기  이름이 가지는 독특한 뉘앙스 때문이라
고 지바고는 생각하였다.
  그의 상상은 틀리지 않았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바로 싸샤의 울음 소리였던 것이다. 이
것이 자기애기에 대한 최초의 지식이었다.
  다음은 토냐가 전선으로 부쳐준 사진이었다. 입술은 마치 큐피드의 활 모양으로 또렷하고 귀엽
고 토실토실한 애기가 담요 위에 엉거주춤 서서 농부 춤이라도 추듯이 주먹을 치켜올린 사진이었
다. 그때 싸샤는 만 한 살로서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금은 두 살이니까  말도 곧잘 하겠
지.
  지바고는 마루에서 트렁크를 집어들고 끈을  풀어서 창가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방은
전에 무엇을 하던 방이었을까? 그는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아마 토냐가 가구를 들어냈든지 아
니면 벽지를 새로 발라서 단장했는지도 모르겠다.
  트렁크에서 면도 기구를 끄집어냈다. 창문 맞은편 교회탑  기둥 사이로 밝은 달이 둥글게 떠오
르고 있었다. 트렁크 속에 개어 놓은 의복과 책 그리고  세면 도구 위에 달빛이 반사되어 방안이
훤해지면서 불현듯 그는 생각이 떠올랐다.
  안나 부인이 망가진 책상이나 의자, 낡은 서류 따위를 보관하던 창고  자리였다. 그녀는 여기다
가족의 기록 서류를 보관하고, 여름에는 겨울옷을 넣은 트렁크를 두었던 곳이다.  그녀가 살아 있
었을 때에는 구석구석에 고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서 어린애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었다. 그
러나 성탄절과 부활절 때만은 많은 애들이 파티에 오면  2층 전체가 개방되곤 했다. 그때는 창고
까지 개방해 놓고 애들은 변장하느라 숯덩이로 얼굴을 검게 칠하고 산적놀이를 하면서 놀았던 것
이다.
  잠시 동안 그는 서서 이런 생각에  잠기다가 현관에 놓아둔 고리짝을 가져오려고  뒤쪽 층계를
내려갔다.
  밑의 부엌에서 뉴샤가 난로 곁에  웅크리고 앉아서 신문지 위에 오리  털을 뽑고 있었다. 그가
고리짝을 들고 들어오자 뉴샤는 수줍은 듯이 날씬한 몸짓으로 일어서서  얼굴을 붉히며 앞치마의
털을 털고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고리짝을 받다 들려고 했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고 자기가 할
수 있다면서 뒤쪽 층계를 올라갔다. 두 방쯤 건너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젠 들어오세요, 유라!"
  이전에 토냐와 그가 공부방으로 쓰던 방에 들어갔다.  어린이 침대 위의 애기는 사진에서 보던
것같이 그렇게 예쁘지는 않았으나 지바고의 어머니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를 그대로  꼭 닮은 얼굴
이었다. 어머니 초상보다도 더 닮았다고 할 수 있을 것같았다.
  "아빠가 오셨다. 너의 아빠야. 손을 흔들어 인사해야지." 그가 애기한테 키스하고 껴안아 올리기
쉽게 토냐는 침대의 그네 줄을 낮췄다.
  싸샤는 털북숭이 얼굴의 낯선 사람이 자기한테 다가와서 몸을 기울이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싫
었지만 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벌떡 일어나 한 손으로 엄마 목을 부둥켜안고 또 한 손을 크게
휘둘러 아빠의 얼굴을 찰싹 후려갈겼다. 그러고는 자기의  대담한 행동에 놀란 듯이 어머니 가슴
팍을 파고들어 옷에 얼굴을 파묻고는 지리하게 훌쩍였다.
  "자, 자, 그러면 못써!" 토냐가 꾸짖었다. "아빠를 때리다니,  싸샤. 아빠가 어떻게 생각할까? 싸
샤는 나쁜 애라고 그러시겠지. 자, 아빠한테 뽀뽀해 드려야지. 뽀뽀할 줄 알지. 울지 말구. 바보처
럼!"
  "그냥 둬요." 지바고는 말했다. "공연히 신경 쓸  거 없어. 당신이 지금 뭘 생각하는지 난  알아
요. 이런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나쁜 징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부질없는 생각이오. 당연하
지 않소, 이 애는 날 본 적도 없으니까. 내일쯤 실컷 보고 나면 떨더질 수가 없을 거요."
  그러면서도 그는 침울한 마음으로 방을 나오면서 어떤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4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는  몹시 외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단지 자기 자신이 바라던 것을 얻었을 따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친구들이 예전보다 희미한 존재가 되어  빛을 잃고 있었다. 누구나 자기 주견
이나 독자적인 세계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엔 친구들이 훨씬 뚜렷한 존재로 남아 있
었던 것은 아마 지난날 그가 친구들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구질서 아래에서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은  남을 희생시키면서 어리석은 장난이나  괴상한 짓을
마음놓고 할 수 있었던 반면에,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
어 있었다. 그런 시대에는 소수의 특권 계급의 어리석고 지금 하층 계급이 들고일어나 상층 계급
의 특권을 없애 버리자 특권 계급은 갑자기 빛을 잃어버리고 거리낌없이 제  나름의 사상을 내동
댕이치고는- 그따위 사상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지바고가 친근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내와 장인, 그리고 두세 명의  동요로서, 미사 여구
따위나 뇌까리는 족속과 달리 착실히 노력하고 일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가 집으로 돌아와서 얼마 후에  오리와 알콜의 연회가 열렸다.  그때까지 그는 연회에 초청한
사람들을 벌써 다 만나봤기 때문에 사실상 이 연회에서 그들을 처음 만나 보는 것은 아니었다.
  이 굶주렸던 시기에 기름진 오리 한 마리는 지나친 사치였으나, 여기에 빵을 곁들이지 못한 점
이 호사한 연회의 흠이 되었으며 사람들의 신경에 거슬렸다.
  고르돈은 유리 병마개가 닫힌 약병에 알코올을 담아왔다. 알콜은 암거래 상인의 좋은 상품이었
다. 토냐는 그 병을 손에서 놓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조금씩  알콜을 물에 타서 좀 독하게도
하고 또 약하게도 만들었다. 그래서 같은 도수의 술을 마시는  것보다 도수가 다른 편이 빨리 취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 역시 화를 돋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슬픈 일은 연회가 시대 조건에 동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 집에서는 먹고
마시고 있는데, 같은 시간에 길 건너의 집들에도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다. 창밖에는 어둡고 굶주
린 모스크바가 말없이 늘어져 있었다. 모든 상점이 텅 비었고 사람들은 이미 오리나 보드카 따위
에 대해서 생각마저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웃 사람들과 같은 생활 속에서 아무런 파란도 없이 지
내고 그 속에 융화된 생활만이  참된 생활이며 혼자만의 행복은 행복이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날 연회 상에 나온 오리나 술도 이들만이 즐기는 것이므로 참된 오리나 술이 되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손님들은 또한 씁쓸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르돈이 어두운 사상에 골몰하면서 우울하고
제멋대로 표현하던 학창 시절이 좋았다.  그는 지바고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중학 시절에는 많은
동료들이 그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새로운 개성을 익히려 했으나 그 노력의 결과는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렸
다. 그는 낙천가 흉내를 내려고  쾌활하게 농담하며 곧잘 "재미있군!","유쾌하군!"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예전엔 그에게 이러한 어휘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인생을 즐거운  것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두도로프를 기다리는 동안에 고르돈은 두도로프의 우스운  결혼 내력에 대해 얘기했다. 친구들
간에는 다 알려진 얘기지만 지바고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두도로프는 결혼 후 1년쯤 지나서 아내와 갈라서게 외었는데,  그 경위가 믿기 어려울 만큼 색
다르다는 것이었다.
두도로프는 무슨 착오 때문에 군대에 징집되었다.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병사로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거리에서 장교에게 경례를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멍하니 있었기 때문에 번번
이 처벌을 받았다. 그래서 징집 해제 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장교만 눈에 띄면 무의식적으로 손을
번쩍 올리게 되고 사방에 계급장이 눈에 어른거렸다.
  제대하고 돌아올 무렵에는 그의 거동이 여러 가지로  이상한 데가 있었다. 하루는 볼가강 선창
가에서 기선을 기다리다가 두 처녀와 알게 되었다. 그 처녀들은 자매였다.  그런데 거기에 군인들
이 많이 눈에 띄게 되면서 그는 갑자기 군대 생활이 머리에 떠올라  머리가 이상해져서 느닷없이
동생 되는 처녀에게 마음이 끌려 즉석에서 결혼 신청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재미있지 않아요?"
하고 고르돈이 질문했다. 이때 그는 하던 얘기를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의 목
소리가 현관에서 들리더니 그가 곧 방안으로 들어왔다.
  두도로프도 지난날의 그 사람과는 달리  아주 변해 있었다. 예전엔  좀 경망스럽고 촐랑거리는
편이었으나 지금은 의젓한 학자가 되었다. 중학 시절에 그는 정치범의 도망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나 예술학교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으나, 끝내 인문과학을 공부하고 전쟁 중에 동료
들보다는 몇 해 뒤늦게 서야 대학을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학에서 러시아 역사
와 일반 역사 이 두 과목을 강의 맡았고, 이미 두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그 책들은 이반 뇌제의
토지 정책에 관한 것과 두 번째는 성 주스트에 관한 연구였다.
  연회가 끝날 무렵에 슈라가 뛰어들어 한층 더  시끄러웠을 때, 지바고와는 소년 시절부터 친구
였던 두도로프는 예전처럼 친한 말투가 아니라 점잖은 말투로 물었다.
  "당신 마야코프스키의 <전쟁과 평화>와 <등뼈 피리>를 읽어보았소?"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에 지바고의 대답을 듣지 못한 그는 얼마 후 다시 물어댔다.
"<등뼈 피리>와 <인간>을 읽어 봤어요?
  "아까 말했는데 듣지 못한 것은 당신 탓이오. 당신 나름대로 생각해요. 다시 말하지만, 난 마야
콥스키를 좋아했어요.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오히려 그는 서정시를
쓰는 도스토예프스끼라고 말하는 편이 옳아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반항적인 청년-'미성년'이라
든지 이폴리트,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인물이 시인이 된 것과 같아.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다 집
어삼키려는 그 시적 에너지, 절대 타협을 모르는 꿋꿋한 기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나 그 배경
인 공간을 향해 던지는 대담한 도전! 참 멋있어!"
  그러나 이 밤의 주인공은 누구보다도 니콜라이  아저씨였다. 또냐가 아저씨는 모스크바를 떠났
다고 한 것은 잘못이었으며, 지바고가 돌아온 날에 이미 시내로 돌아와 있었다. 이들은 벌써 두세
번 만나서 실컷 얘기를 나누며 웃고 즐겼던 것이다.
  첫 대면은 이슬비 내리는  침울하게 어둑어둑한 밤이었다.지바고는  아저씨가 유숙하고 계시는
여관을 찾아갔었다. 여관은 시 당국의 추천 없이는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니콜라이는 저
명 인사로서 예전의 연줄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여관은 직원이 모두 도망쳐버리고 난 정신병원 같았다. 층계나 복도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모
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큰방의 창 밖으로 혼란기의 거대한 광장이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이 몸서리치게 내다보였다. 그건 여느때 보던 광장이 아니라 마치 악몽 속에서 몽
롱하게 나타나는 광장 같았다.
  이것은 인상적이며 잊을 수 없는  의미 있는 상봉이 아닌가! 그의  소년 시절의 우상이며 그의
마음을 지배하던 스승과 재회하게 되는 것이다.
  아저씨의 머리가 꽤 희끗했으며 낙낙한 외국제 양복이 몸에 잘 맞았다. 그는 나이에 비해 퍽이
나 젊었고 또 단정하게 보였다.
  그러나 아마 이웃을 휩쓸고 있는 커다란 사건들에  눌려 다소 빛을 잃고 좀 작아져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바고는 이러한 척도로 아저씨를 본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바고는 아저씨가 냉혈적이면서도 농담하듯 그리고 차분한 태도로 정치를 말하는  데 적이 놀
랐다. 그의 능력은 현재의 러시아의 누구보다도 뛰어났으나 어딘지 외래자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
만 그것은 낡아 고리타분했으며 따분하게 생각되었다.
  그들 재회의 처음 몇 시간은 정치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서로 울고 웃으며 포옹하고 열띤 대
화가 이따금 끊기곤 했으나 정치와는 무관한 얘기였다.
  이것은 두 예술가의 재상봉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가까운 친척이었고,  두 사람 사이
에는 다시 지난날의 회상이 숨가쁘게 되살아나서 헤어진 사이의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나, 일단 창
조적 정신에 대한 중요한 대목에 화제가 미치게  되자 두 사람을 잇고 있던 모든  관계는 말끔히
사라지고, 친척이라든지 연령 차이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오직 기본적인 힘의  대립, 에너지의 대
립, 원리의 대립뿐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니콜라이는 창작의 문제를 이토록 자유스럽고 또 심각하게 얘기할  수 있는 기
회를 별로 갖지 못했었다. 지바고 역시 이렇게 예리하고 발랄한 견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대화는 감동에 넘쳐 있었다. 이들은 서로 상대방의 통찰력에 놀라면서 흥분하여 방안을
서성거리고, 또 어쩌다 서로 완전히 이해가 된  점을 발견하고는 아주 좋아하면서 묵묵히 창가에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유리를 탁탁 튕기곤 했다.
  이것이 처음 상봉이었다. 그 후 지바고는 두세 번 다른 좌석에서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으나 그
때는 알아볼 수도 없게 사람이 아주 달라져 있었다.
  니콜라이는 모스크바에서 방문객으로 자처하였으며 또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페테르부르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딘지 확실치 않았다. 그는 사
교계의 인기 있는 정치가의 역할이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마 국민의회 전야에 파리에서
날리던 마담 롤랑의 정치 살롱 같은 것이 모스크바에도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모스크바의 조용한 뒷골목에 살고 있는 여자  친구들을 찾아가 환대 받으며, 그들과 그들
의 남편들이 시대에 뒤져 있음을 은근히 놀려댔다.  그는 이전에 교회에서 금지하던 책자나 오르
피스교의 서적에 정통한 듯이 신문에 나 있는 지식으로 아는 체했었다.
  그는 스위스에서 젊은 애인과 하던  일을 채 끝맺지 못했으며, 또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저술을
남겨둔 채 조국의 혼란 속에 잠시 젖어보려고  돌아왔다는 소문이 들렀다. 만일 무사히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다시 서둘러 사랑하는 알프스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는 볼셰비키에 호의를 보였고, 그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의 사회혁명당 좌파의
이름을 곧잘 입밖에 꺼내곤 했다.  그 한 사람은 미로쉬카 포모르라는  가명으로 글을 쓰고 있는
저널리스트였고, 또 한 사람은 실비아 코체리라는 정치 평론가였다.
  "무서운 일입니다. 당신도 어지간히 타락했군요, 니콜라이 선생." 그로메코 교수는 그를  마땅치
않게 나무랐다. "당신이 마음에 든다는 미로쉬까는 쓰레기통과 같은 사람이란  말이오! 또 리쟈도
포코리도 마찬가지구."
  "코체리 실비아입니다." 니콜라이가 정정했다.
  "포코리이든 포푸리이든 이름은 달라도 알맹이만은 같으니까."
  "그러나 코체리는 코체리지요." 니콜라이는 무던히 참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드디어 벌어졌
다.
  "그런 걸 가지고 다투어봐야 무슨 소용이오?  너무나 명백한 걸 논증한다는 거도  창피한 일이
오, 아주 초보적인 것이지요. 역사책을 보시오. 여러 세기 동안에 민중은 어려운 생활을 보내왔어
요. 봉건 제도의 농노라든지 자본주의 제도의 산업  노동자라든지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
도 부당하고 부정한 생태에 있었어요. 이러한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일이지요. 세계는 민중을
계몽하고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한 봉기를 준비해왔어요.
  낡은 질서를 부분적으로 땜질해 본들 아무런 소용도 없고, 근본적으로 기초까지 파헤치고 들어
가야 한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 결과는 건물이 완전히  허물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오? 무서운  일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어차피 그건 시간 문제지요. 저항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하는 말은 그게 아니오." 그로메코 교수는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 말하는 포
푸리니 미로쉬카 같은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오, 그건 그렇고 당신의 얘기는 논리에 닿지도 않소.  너무 비약하고 있단 말이오, 잠깐만 기다려
요. 내가 뭘 보여주겠소."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요란스런 소리로 웅변을 토하면서 문제의  논문이 실린
잡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로메코 교수는 이야기 도중에 이따금 문득 말을  중단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러한 중단은 이
야기가 막혔을 때 중얼거리거나 헛기침을 하며 슬쩍  넘어가게 했다. 무엇인가 잊어버린 것을 찾
을 때- 말하자면 어두울 때 현관에서 덧신 한  짝을 찾거나 수건을 어깨에 걸고 욕실 문가에  서
있을 때, 또 식탁에서 무거운 접시를 옮길 때라든지 손님  술잔에 술을 따를 때 갑자기 혓바닥이
부드러워져서 잘 돌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지바고는 그의 장인의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했다. 귀에  익은 옛 모스크바 어조로 부드러운 말
씨에 그로메코 집안의 독특한 목젖을 울리며 나오는 음성이 듣기 좋았다.
  그로메코 교수는 나비 넥타이가 목에 비죽이 나와 있는 것과 흡사하게 콧수염을 기른 윗입술이
아랫입술 위로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의 입술과 넥타이는 뭔가 닮았고,  어딘지 모르게 순박하고
미더운 표정을 엿보이게 한다.
  그날 밤 슈라는 연회가 끝날 무렵에야 찾아왔다.  그녀는 집회에서 바로 오는 길이라면서 재킷
에  노동자 모자 차림이었다.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와서는 한 사람씩 악수를 나누고 느닷없이 불
평과 비난을 퍼부었다.
  "토냐 잘 있었어? 그로메코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참  너무들 합니다. 모스크바가 온통 유라가
돌라온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나한테만  감추고 있었으니.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죠.
도대체 어디 있어요? 왜 이렇게 담장처럼 막고 서 있는  거요. 자, 좀 봅시다. 안녕하시오? 난 당
신의 글을 읽어 봤지만 한 마디도  이해할 수가 없더군. 하지만 훌륭하다는 것은  금방 알았어요.
안녕하십니까, 니콜라이 선생님. 유라, 나중에 당신한테 꼭 해야 할 특별히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건 또 누구야, 꽥꽥거리는 거위, 고고치카가 아닌가?" 고고치카는 그로메코
집안의 먼 인척이며, 새로운 등장 인물에 대해선 열렬한 경의를 보내는  사나이였다. 그를 고고치
카라고 부르는 것은 웃기기 위해서이고 홀쭉하고 귀가 커서 촌충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군요?  난 당신들을 쫓아버려야겠어
요. 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실제 민중
집회에 가보시오. 책에 씌어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진짜 노동자 그리고 진짜  병사들 말이에요.
만일 그들에게 최후의 승리까지 전쟁을 계속하라고  호소해보십시오. 그들은 반드시 최후의 승리
가지 싸워 나갈 것입니다. 저는 이제 금방 한 수병의 연설을 들었어요. 유라, 당신이 그걸 들었다
면 열광하고 말았을 거요. 그 대단한 정열! 그 순진함!"
슈라는 이야기를 멈췄다. 모두들 제각기 떠들어댔다. 슈라는 지바고 옆에 가까이  앉으며 그의 손
을 붙잡고 그의 얼굴에 가까이 대고, 떠들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메가폰으로 얘기하듯이 큰 소리
로 말했다.
  "언제 한 번 나와 같이 가요, 유라. 난  당신한테 참된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어요. 당신은 안테
우스와도 같이 굳게 발을 땅에 딛고  있어야 해요. 뭘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거요? 당신은 내가
고참병이란 걸 알지요, 고참 베스투제프였다는 걸 알고  있지요? 감옥의 맛도 보고 바리케이드에
서 사운 일도 있어요. 물론 당신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우린 민중을 전혀 모르고 있었
단 말이오, 나는 지금 그들에게 도서관을 지어주기 위해서 그 기금을 모으는 중이에요."
  슈라는 꽤 많이 마셨는지 취기가 올랐으며, 지바고도 역시 머리가 빙빙  돌았다. 어느새 슈라와
는 반대쪽 책상 끝으로 옮겨와 자기도 모르게 연설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는 잠시 조용해지길 기
다렸다.
  "여러분, 한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샤! 고고치카!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또냐, 어떡하지, 들
으려 하지 않는군! 여러분, 한두 마디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대미문의 엄청난 일이 닥쳐오고 있
습니다. 이러한 사태가 오기 전에 저는 여러분에게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가호로 우
리는 서로를 잃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영혼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고고치카, 박수는 나중에
쳐주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구석에선 떠들지 마시고 경청해주시기 바랍니다.
  전쟁 3년째인 오늘, 누구나 전선과 후방의 구분이 곧 없어지리라고 믿습니다. 피의 바다가 우릴
향하여 밀어닥쳐 오고 있으며, 전쟁은 옆에서 구경하던 모든 것들을 삼켜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홍수가 바로 혁명인 것입니다.
 혁명 시기에는 전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인생이 정지되며 개인적인  것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고, 죽이고 죽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살아 남아서 이 시기의 기록이나 회고록을 읽을  수 있다면, 남들이 1세기에 걸쳐서 경험
하였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가 이5년이나 10년  동안에 경험했다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민
중이 자발적으로 들고일어나 한데 뭉쳐 나가며 무든 것이 민중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는 나
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거대한 사건은 증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증명이 없이도 난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거대한 사태의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용렬한 짓입니다. 원인  따윈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건의 여유를 가리는 일은  부부 싸움 정도가 아닐까요. 서로  상대방의 머리끄덩이를
쥐어뜯고 그릇을 부수고 나서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는지 생각해내려고  있는 격입니다. 실로
위대한 것은 마치 우주와 같이 그 시초가 없는 법입니다.  그것은 항상 저 만큼에 있다고 생각했
는데 느닷없이 나타나선 우리와 대결하는 것입니다.
  저도 역시 러시아는 세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왕국이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
랫동안 멍하니 있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기억의 대부분이 영영 사라지고  난 후일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일어난 사건이나 뒤에 계속된  사태를 망각하고 그렇게 된 이유조차 알
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사물의 질서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으며, 지평선에 보이는 숲
이나 머리 위를 떠다니는 구름처럼 친숙해질 것입니다."
  그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를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는 동안 술은 말끔히 깨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술에 취해 있어서 주위에서 말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그들은  알았으나 저절로 치밀
어 오르는 슬픔을 쫓아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분을 알겠습니다.  저는 그것에 보답할 길이 없습니
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사랑을 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허둥지둥 사랑을 조금 나타낸
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람들은 괜히 하는 소리로 들었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재난이 닥
쳐올 것이라는 예감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가  선을 위하여 제아무리 애쓴다 한들 미래에
대해 아주 무력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손님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두들 지쳐서 까칠한 얼굴들이었다.  턱을 떨면서 하품하는
모습들이 흡사 말처럼 보였다.
  돌아가지 전에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눅눅한  하늘엔 지저분한 토색 완두빛 구름이 가
렸고, 노란 새벽놀이 물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사이에 소나기가 왔었군." 누군가가 말했다.
  "이리로 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겨우 뛰어왔다오." 슈라가 덧붙였다.  아직도 어둠이 깔린 텅
빈 골목길에는 나무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비에 젖은 참새들이 신나게 지저귀고 있었다.
  하늘을 삽으로 주욱 긋듯이 천둥소리가  울렸다가는 다시 조용해진다. 이윽고  가을에 잘 영근
감자를 부드러운 땅속에서 파내어 집어던지듯이 사이를 두고 천둥소리가 크게 네 번 울렸다.
  천둥은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을  맑게 했다. 이윽고 생명의 모든  요소가 뚜렷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전류, 물, 공기, 그리고 환희의 기대, 땅과 하늘.
  길거리는 돌아가는 손님들의 말소리로 가득 찼다. 그들은 집안에서 시작한 흥분된 토론을 거리
에 나와서도 계속했다. 말소리는 차츰 멀어져갔다.
  "너무 늦었군." 지바고가 말했다. "이젠 자러  갑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당신과 아버님뿐이오."
    5
  8월이 지나 9월도 마지막으로 접어들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겨울은 가까워
오고 인간 세계에는 일종의 가사 상태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누구나 그것을 화제로 삼고 있었다.
  엄동을 대비하여 식량이나 땔감을 마련해야  할 시기였다. 그런데 유물론이  득세하고 있는 이
시기에는 물질이 추상적인 관념으로 변하면서 식량이나 장작 대신에 영양 문제와 연료 보급 문제
가 우세했다.
  도시의 사람들은 미지의 것에 직면하여 어린애처럼 꼼짝도  못했다. 그 미지의 것이란 바로 도
시 자신이 생산한, 도시인의 창조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존의 관습을 말끔히 쓸어버리고 그 지
나간 자리엔 폐허만이 남게 되었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자신을 기만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일상 생활의 타성으로 절름
발을 끌며 허둥지둥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바고는 사실 그대로의  인생을 볼뿐이었다.
이미 인생에 사형 선고가 내렸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자기와 주위의  운명이 이미 결판이 난
것으로 보고 있었다. 앞으로는 여러 가지 시련이 다가올 것이며, 어쩌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 남은 나날이 그의 눈앞을 스치고 있었다.
  일상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쫓겨 분주하게 지내지 않았더라면 아마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처자식의 일이나 수입의 길을 터야 하는 일, 그리고 평상시의 일과인 환자 치료,  이런 것들이 그
를 구원해주었던 것이다. 거대한 괴물과  같은 미래의 메키니즘 앞에서  그는 보잘것없는 무력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미래를 걱정하며 사랑을  기울여 남몰래 자랑스럽게
느끼곤 했다. 그리고 마치 마지막  이별을 고하기라도 하듯 나무와  구름, 길가는 사람들의 모습,
재난을 벗어나려는 필사의 노력을 쏟고 있는 위대한 러시아의 도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었
다. 그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 한 몸을  희생할 각오였으나 너무나 무력하여 어쩔 수
없는 처지였었다.
  러시아 의사협회의 약국 근처 스타로코뉴센느이 모퉁이에서  아르바트 거리를 횡단할 때, 그는
가끔 거리 복판에 멈춰 서서 하늘과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는 다시 이전에 근무하던 병원으로 돌아가  일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성십자병원이라
고 불렀으나 그 이름의 단체는 이미 해산되고 없었다. 하지만  이 병원에 적합한 이름은 아직 생
각지 않고들 있었다.
  병원에는 이미 파벌이 생기게 되었다. 온건파에  대해서 지바고는 그들을 우둔한 사람들이라고
나무랐으며, 그들 자신은 지바고를 위험  인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혁신파의  눈에는 지바고가
미온적인 인물로 보였다. 그러한 결과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게 되어 전자로부터는 떨어져
있었고 후자로부터는 기피되고 있었다.
  그는 병원에서 정상적인 직무 외에 원장 지시에 따라 일반 통계 업무를 맡고 있었다. 질문서와
그 밖의 서류들이 끊임없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사망률, 직원의 재산 상태, 그들의 정치 의식 수
준, 선거 참가율, 그리고 계속 부족 되고 있는 연료, 식량과 약품의 부족 등을 점검하여 보고해야
했다.
  지바고는 의무실 창가에 놓인 낡은 책상에 앉아서 일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도면이나 서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한쪽 구석에 밀어놓고 이따금 의
학에 관한 저술 메모를 하든지, <민중  놀이>라는 표제의 일기장에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 놓곤 했다. 그것은 민중의 대다수가 자기의 실존을 거부하고 미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에서 영감을 얻어 산문, 시, 그 밖에 여러 가지를 써넣는 우울한 일기였다.
  성모 승천제 이후에 계속되는 화창한 가을 크림색 햇볕이 흰 벽의 방안에 가득히 넘쳤다. 아침
엔 서리가 내리고 박새 까치들이 숲의 밝은 잎새로 날아들었다. 이런 날이면 하늘은 끝없이 높고,
하늘과 땅 사이의 투명한 공간을 통하여 차갑고 검푸른 빛이 북쪽에서 흘러온다. 그래서 이 세상
의 모든 것들이 더 잘 보이고 더 잘 들리게 된다.  먼 곳에서 울리는 음향은 얼어붙은 공명 상태
에서 더 잘 전해진다. 지평선은 마치 앞으로 몇 해 동안의 인생의 모든 것을 보여주듯 활짝 열려
져 있다. 이러한 맑은 분위기가 다급히 황혼이  깃들이는 늦가을의 잠시 동안이 아니었다면 아마
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재빨리 저물어 가는 가을 석양이 무르익은 능금 알처럼 감미롭고 물기 있는 빛을 지금 막 의무
실 방에 비치고 있었다.
  지바고는 책상에 앉아서 뭔가 쓰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생각에 잠기며 펜에 잉크를 묻히곤 했
다. 진기하고 조용한 새들이 높은 창문을 소리 없이 날아 지나면서 펜을 든 손이며, 책상, 마루와
벽에 그림자를 던지고 사라져갔다.
  해부의가 들어왔다. 예전에 그는 뚱뚱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살이 쑥빠져 버려서 피부가 주머
니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단풍잎이 거의 다 떨어지고 말았어.  비바람에도 끄떡없던 것이 하루  아침 서리에 당해 버렸
어!"
  지바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름도 모를 진기한 새들이 창문 가까이도 날아갔다고 생각했으나, 실
은 그것이 진한 포도주 빛깔의 단풍잎이었다. 나무에서  땅 위로 떨어지는 구부러진 별처럼 생긴
단풍잎들이 병원 잔디 위를 덮고 있었다.
  "창문 틈새를 막았어?" 해부의가 물었다.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지바고는 대답도 없이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참 타라슈크가 있어야 하는 건데." 해부의가 말을 잇는다. "틀림없는 사람이었는데... 신발도 꿰
매 주고, 시계도 고쳐 주고, 무엇이든 못하는 일이라곤  없었어. 그리고 필요한 물건은 죄다 구해
주었지. 이제 그 사람이 없으니까 창문도 우리가 붙여야 한다니까."
  "빠데가 없어요."
  "그건 만들 수가 있지. 가르쳐 드릴까?" 해부의는 아마유와 분필로 빠데 만드는 방법을 설명했
다.
  "그럼 난 가요. 당신은 남아서 일하겠소?"
  그는 다른 창가로 가서 시험관과 표본들을 만지작거린다.
  "눈이 나빠져요." 잠시 그는 잠잠했다. "어두워졌어요. 불도 켜지 못하는데 이젠 돌아갑시다."
  "좀더 있다가 가지요. 한 20분 후에."
  "그 사람의 마누라는 여기 간호원이라오."
  "누구의 마누라?"
  "타라슈크의 마누라 말이오."
  "아, 그래요?"
  "그는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떠돌아다니기만 하니까. 지난여름에 마누라를 만나러 병원에 두어
번 찾아오긴 했었지. 지금 어디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있을 테지. 그는 길거리나 기차에서 흔
히 눈에 띄는 볼셰비키 병사의 한 사람이라오. 그들은  어떤 점에서 표가 나는지 아시겠소? 타라
슈크를 보아요. 그는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할 수 있어요.  무엇이든 훌륭히 해치운단 말이오.
군대에 있을 때도 그랬었지. 그래서 우수한 저격수가 되었다오. 그의 손과 눈은  제 1급품이란 말
이오. 여러 가지 훈장도 받았지만 그건 용기나 기지가 있어서가 아니었소. 언제나 겨냥한 것은 다
맞췄단 말이오. 말하자면 뭣이든 열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전쟁을 하는 것도 열중한 탓이었어요.
그는 소총이 그에게 권력과 영예를 안겨다 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 자신도 권력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무기를 가진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달라요. 옛날엔 이런 패거리들이 병사에서 산적으
로 변했었지. 지금 타라슈크한테서 청을 빼앗으려 해보아요. 그건 안 될 말이지! 그런데 느닷없이
'너희들의 총부리를 주인에게 돌리라...' 라는 슬로건이 나왔었지. 타라슈크는  시키는 대로했을 뿐
이지요. 이것이 마르크스주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극히 순수한 현실 생활에서 우러나왔다는 거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해부의는 시험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난로 수리공은 뭐라고 하던가요?" 얼마 후에 그는 물었다.
  "보내줘서 고마워요.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더군. 헤겔이나 크로체에 관하여 오랫동안 얘길 하였
어."
  "그랬을 테지!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철할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거든. 그런데 난로는 어떻게
됐는데?"
  "말도 말아요."
  "아직도 연기가 난단 말이오?"
  "여전해요."
  "연통을 잘못 달았을 거요.  연통 구멍에다 제대로  연결시켜야 해요. 창문으로  연통을 뽑았나
요?"
  "연통 구멍에다 연결했는데도 여전히 연기가 나더군요."
  "그렇다면 공기 구멍을 제대로 내지 않은 모양이로군. 타라슈크가 있었다면  문제 아닌데! 그렇
지만 어떻게 되겠지. 모스크바도 하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니까. 난로를 고치는  일은 피아노 치
는 것과는 달라요. 숙련이 필요하거든. 장작은 마련됐어요?"
  "어디 마련할 수 있어야죠."
  "교회 수위를 보내 드리죠.  그는 나무 도둑이라오. 울타리를  부숴서 장작을 만들어요. 그러나
거래할 물건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빈대약이 좋겠군."
  그들은 외투를 걸어 둔 방으로 내려가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다.
  "빈대약은 뭣에 쓰려고?" 지바고가 말했다. "우리 집엔 빈대가 없어요."
  "그런 얘기가 아니오. 난 지금 장작  얘기를 하고 있어요. 나무 장사를 크게  하는 노파가 있는
데, 그 노파는 장사하는 요령이 좋아요. 여러 집에서 땔 만한 장작을 한꺼번에  몽땅 사들이는 겁
니다. 어두우니 발 조심해요! 이전엔 난 이 근처에서 눈을 감고서도 당신을 데리고 갈  수도 있었
을 텐데. 마치 손바닥 보듯 했지요. 난 이  근처에서 태어났거든요. 그러나 울타리를 뜯어서 장작
으로 때기 시작한 후부터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대낮에도 몰라보게 됐고, 마치  처음 보는 거
리처럼 됐단 말이오. 예전에는 눈에  띄지도 않던 둥근 정원용 탁자나  반쯤 찌그러진 벤치 등이
보였고, 또 구식 건물이 눈에 띄었어.  언젠가 삼거리를 지나다 보니까 거기 공지에서  나이 많고
점잖은 노파가 막대기로 땅을 헤쳐가면서 무엇인가 찾고 있었어- 아마 백 세쯤 돼  보였어. '안녕
하십니까, 할머니. 낚시하시려고 지렁이를  파고 계십니까?' 하고 물어보았지요.  물론 농담이었지
만. 그런데 노파는 정색을 하면서 '아니라오,  지렁이가 아니라 버섯을 캔 다오'  하고 대답하더군
요. 사실이야, 당신도 알다시피 이  도시는 매일같이 숲처럼 변하고  있어요. 가는 곳마다 나뭇잎
썩는 냄새와 버섯 냄새가 풍기고 있어요."
  "당신이 말하고 있는 데가 어딘지 알  만해요. 세레브랸나야 거리와 몰르노프스카야 거리 사이
가 아닌가요? 거기서는 정말 이상한 일들이 곧잘 일어나곤 하지요. 20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하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는가 하면 또 무엇인가 찾아내기도 하고, 모퉁이에는 소매치기가 있다고들 해
요. 놀랄 일도 아니지, 사방이 뚫려있으니까. 그곳 스몰렌스크 광장 부근은 옛날에도 도둑놈의 소
굴로 통하는 길이 그물처럼 뻗어 있었거든요. 눈 깜짝할 새에 껍데기를 홀랑 벗겨 가지고 사라진
다오."
  "저렇게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으니, 사고등이라고 하는 것도 당연해요.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요."

      6
  그 장소에서 지바고는 여러 가지 이상한 일을 보았다. 10월의 시가전이 있기 직전의 춥고 캄캄
한 밤에 지바고는 어떤 사람이 의식을 잃고 인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는
팔을 벌린 채 머리는 인도 돌 위에 놓고 두 다리는 도랑에 처박고 있었다. 이따금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바고가 그를 일으키려고 하자 "지갑, 지갑" 하면서 몇 마디 중얼거렸다. 날
치기를 당했던 것이다. 머리를 얻어맞고 피가 낭자했으나 얼핏 보기엔 두 개골은 무사한 것 같았
다.
  지바고는 가까운 아르바트 거리의 약국에 뛰어가서 전화로 적십자병원 응급용  마차를 불러 그
를 어느 병원으로 옮겨갔다.
  그가 저명한 정치 지도자였음이 판명되었다. 지바고는 그가 회복될 때까지 치료해 주었다. 훗날
그 사람은 여러 가지로 지바고를 보살펴주었으며, 많은 의혹이 지배하던 그 시기에 여러 번 그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7
  일요일이었다. 지바고는 집에서 쉬고 있었다. 토냐의 의견대로 식구들은 이미 2층 방 셋으로 겨
울을 나기 위해 옮겼다. 이날 차가운 바람이 불고 하늘엔 눈구름이 낮게 떠서 어둑어둑했다.
  아침부터 난로에 나무를 지폈으나 연기만 내고 타질 않았다. 뉴샤는 젖은  나무와 씨름을 했다.
토냐는 난로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면서  되지도 않는 일을 이것저것  참견하고 있었다. 게다가
또 더욱 아무것도 모르는 지바고까지 참견하려 들었으나,  아내가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잡아 방
에서 밀어냈다.
  "참견하지 마세요. 우두머리가 없으면 안 되는 것 같지만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불
에 기름을 붓는 거나 다름없어요."
  "기름이라면 나쁠 것 없지. 오히려 난로가 잘 탈걸! 그런데 기름도 불도 없으니 탈이야."
  "농담하실 때가 아니예요."
  난로의 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모든 일요일 계획이 뒤틀리게 되었다. 저녁때까지 자질구레한 일
들을 처리하고 한가하게 밤을 보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면 저녁 식사도 늦어지고 더운물
로 머리를 감을 수도 없었고 여러 가지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연기가 점점 더 심하게 나오게 되
자 숨쉬기조차 어려워졌다. 거센 바람이 거꾸로 방안에 연기를 휘몰아 넣었다.  마치 깊은 숲속의
동화책에서 본 괴물과도 같은 시커먼 연기구름이 방안에 자욱했다.
  결국 지바고는 식구들을 옆방으로 쫓아버리고  창문 꼭대기의 통기 창을  열었다. 그러고 나서
난로에 지폈던 나무의 반쯤을 도로 집어내어 남은 것을 적당히 사이를 두고 성기게 놓고는 그 사
이에 나무 부스러기와 자작나무 껍질 따위를 채워 넣었다.
  신선한 공기가 통기 창으로 흘러 들어왔다. 커튼이  펄럭거리며 책상 위의 서류가 바람에 날렸
다. 현관 쪽에서 문이 바람에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방안 구석구석에서 남은 연기
를 고양이가 쥐를 쫓듯이 쫓기 시작했다.
  나무에 불이 확 당기며 불꽃이 탁탁 튕겼다. 난로는 벌겋게 달아올라 마치 폐병 환자의 불그레
한 볼처럼 철판 동체에 붉은 반점이 생겼다.
  방안의 연기가 차츰 맑아지더니 이윽고 아주 사라져버렸다. 방안이 점점 밝아왔다. 지바고는 해
부의한테서 최근에 배운 대로 만들어 발랐던 기름기 있는 빠데가 창문에 흘러 내렸다. 그 냄새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난로 옆에서 말린 전나무 껍질의  씁쓸한 냄새와 포플러 나무의 화장수 같은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이때 통기 창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처럼 니콜라이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면서 방안으로 뛰어
들어와 알린다.
  "시가전이 벌어졌어. 임시 정부를 지지하는  사관생도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경비대 병사들간
에 교전이 벌어지고 있어요. 온통  시내 전체에 전투가 벌어져서 봉기의  초점이 어딘지 알 수가
없어. 이리로 오는 도중에도 두세 번 휘말려들 뻔했지. 한 번은  볼샤야 드미트로프카의 모퉁이에
서, 또 한 번은 니키트스키 문이 있는 데서였어. 이제는  곧바로 다닐 순 없고 돌아서 다녀야 해.
빨리 외투를 입어라, 유라! 같이 나가지. 구경을 해야 돼.  이것이 바로 역사란 말이야. 일생에 단
한 번 밖에 없는 이이야."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니콜라이 아저씨는 그냥 눌러앉은 채 두 시간 동안이나  잡담만 하고 있
었다. 이윽고 저녁 식사가 끝나고 이제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바고를  데리고 나서는데, 뜻밖에
도 이번엔 고르돈이 니콜라이 아저씨와 똑같은 모양으로 들어와선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사태는 전보다 악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더 자세한 것을 알게 되었다. 고르돈의 말에 의
하면 소총에 의한 교전이 치열해져서 유탄에 맞아  죽은 통행인도 있다는 것이었다. 시내 교통은
마비 상태였으며, 고르돈은 기적적으로 뒷골목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지금쯤은 완전히 통행
이 차단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아저씨는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기어이 밖으로 나간 그는 1분도 채
못 되어 되돌아오고 말았다. 골목길에서 나갈 수가  없고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와서 벽돌에 부딪
치는 소리가 요란했고, 거리에는 사람이 없고 통행이 차단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 무렵에 싸샤는 감기가 들었다.
  "난로 가에 아이를 가깝게 해선 안 된다고 수백 번 말하지 않았어!"  지바고는 불끈 화를 냈다.
"추운 것보다 너무 덥게 하는 것이 훨씬 나빠요."
  싸샤는 목구멍을 앓아서 열이 심했다. 아이는 특히 입속을 들여다보는 것을 싫어했다. 지바고가
목구멍을 보려고 하면 손을 내밀면서 이를 악물고 숨이 막힐 듯이 울어댔다. 위협도 하고 달래도
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하품을 하는 사이에 재빨리 스푼을 입속에 밀어넣고 혓바닥을 눌
러서 빨간 목구멍 속에 허옇게 덮인 반점과 부어오른 편도선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얼마 후 똑같은 방법으로 표본을 받아서 마침  집에 있는 현미경으로 조사해보았다. 다행히 디
프테이라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밤에 후두 카타르의 증세가 나타났다. 열이 너무 심해서 호흡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지바고는 어린애의 고통을 덜어 줄 방도도 없었고, 또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
다. 또냐는 아이가 죽는 줄로만 알았다. 그들은 교대로  아이를 껴안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 동
안에 아이가 잠들었다.
  우유와 탄산수가 필요했지만 시가전이 한창 치열했다. 포소리와 총소리가 한시도 멎질 않았다.
  만일 지바고가 목숨을 걸고 교전 지대를 빠져나간다 해도 저쪽 거리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
다. 정세가 분명해질 때까지 온 거리의 생활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승패의 판가름은 이미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노동자와 병사들 편이 우세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사관생도의 몇 개의 작은 집단이  아직도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으나 서로 연
락이 끊기고 본부와는 차단된 상태에 놓였다.
 시브체프 지구를 점령한 병사들이 부대는 시중앙을 향하여 계속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독일 전선에 참가했던 병사들과 미성년 노동자들이 길거리에 참호를 파고 버티고 있었다. 그들
은 근처의 주민들과도 아는 사이가 되어 참호 밖으로 나와서 대문 가에 서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
누기도 했다. 이러한 곳은 교통이 회복돼 가고 있었다.
 지바고네 집에 발이 묶인 고르돈과 니콜라이 아저씨는  사흘 동안의 감금에서 해방되었다. 지바
고는 싸샤가 앓고 있는 동안에  그들과 함께 있어서 마음 든든했었다.  아내도 난리 통에 그들의
기식을 그다지 귀찮게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주인 측의 신세를 갚기 위해서 무슨 위안
이 될 만한 이야길 들려주느라 애썼다. 지바고는  사흘 동안의 무의미한 객설을 듣느라 지쳐버렸
고 그들이 돌아가게 된 것이 더없이 기뻤다.
    8
  손님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시가전이 아직도 계속되어 거리 몇 군데
가 여전히 차단되고 있어서 지바고는  병원에 나갈 수가 없었다. 빨리  병원에 나가 의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원고를 계속 쓰고 싶었다.
  아침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개인 참호에서 나와 가까운 곳에 빵을 사러 가곤 했다. 우유 병을
들고 가는 사람을 보면 우르르 몰려와서 어디서 샀느냐고 귀찮게 했다. 이따금 총소리가 온통 시
내에 울려 퍼지며 다시 군중을 흩어지게  했다. 양편이 타협을 하는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타협이 진척되는 여하에 따라 시가전의 양상이 달라져 갔다.
  구력, 10월 말경, 어느 날 밤 열 시쯤 되었을 때 지바고는 꼭 가야 할 곳은 아니었으나 어느 친
구 집을 찾아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곳은 평시에 붐비는  곳이었으나 텅 비어 있어서 거의 사
람이 보이질 않았다. 그는 빠른  발걸음으로 걸었다. 첫눈이 날리면서 싸락눈이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고 지바고의 눈에 날아들었다.
  그는 골목길을 하도 여러 번 굽어 돌았기 때문에 몇 번쯤 돌았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눈
송이가 차츰 굵어지고 바람이 눈보라로  변했다. 들판에선 이런 눈보라가  울부짖으며 온 들판을
눈의 포장으로 뒤덮어 버릴 테지만, 도시에서는 길이라도 잃은 듯 하염없이 헤매기만 했다.
  정신 세계와 물질 세계, 말하자면 지상과 하늘의 소란은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었다. 어디선가
섬에서 고립된 저항자들이 최후의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눈보라도 회오리바람을 일으키
곤 사라져 축축한 차도와 인도에 자욱히 날렸다.
  잉크 냄새가 풍기는 신문을 한아름 옆구리에 낀  신문 팔이 소년이 "최신호!"라고 외치면서 달
려와 네거리에서 지바고를 따라잡았다.
  "거스름돈은 괜찮아." 지바고가 말했다. 소년은 눅눅한 신문 한 장을  다발 속에서 뽑아 지바고
의 손에 쥐어주고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지바고는 가로등 밑에 멈춰 서서 표제를 훑어보았다. 한쪽 면만 인쇄된 호외였는데 페테르부르
그에서의 공식 발표가 실려 있었다. 인민위원회의가  조직되고 러시아에 소비에트 정권과 프롤레
타리아 독재가 수립되었다고 보도되었다. 그 밑에 신 정부의 최초의 포고문이 몇 개 있었으며 전
화나 전보로 수신된 짧은 뉴스 기사가 많이 실려 있었다.
  눈보라는 지바고의 눈을 때리고 가볍게 휘날리는 회색 눈 알갱이가 신문지를 덮었다. 그렇지만
읽을 수 없게 한 것은 눈보라가 아니었다. 이 역사적인  사실에 충격을 받은 지바고는 잠시 동안
제정신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나머지를 읽기 위해 좀 밝고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은 장소를 찾으려고 주위를 살폈다. 바로 그
세레브랸나야 거리와 몰르차노프까 네거리에 5층 건물의 현관 유리문으로부터 밝은  빛이 흘러나
오고 있었다.
 지바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층계 입구의 전등불 밑에서 신문을 읽었다.
  머리 위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층계를  내려오다가 망설이듯 자주 멈춰 서곤 했
다. 잠시 후 마음을 바꿨는지 다시 뛰어 올라갔다. 어디선가 문이 열리고 말소리가 요란스럽게 들
려왔다. 이윽고 문이 쿵하고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이번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내려오는 당당
한 발소리가 들렸다.
  지바고는 신문에 정신이 쏠려서 쳐다볼 겨를도 없었으나 층계 밑에서  갑자기 발소리가 멈췄기
때문에 얼굴을 들었다.
 시베리아식 털을 밖으로 한 딱딱한 순록 가죽 외투를 입고, 또 순록 가죽 모자를 쓴 열 여덟 살
가량의 청년이 서 있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키르기스 사람처럼 눈이 가느다랗고 귀공자다운 면
모에 총명하고 조심성 있고 냉랭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청년은 지바고를 어느 다른 사람으로 분명히 오인하고  있었다. 청년은 지바고를 보자 무슨 말
을 건네 보고 싶은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지바고는 청년에게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것을 깨
우쳐 주기 위해 오히려 쌀쌀한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았다.
  어리둥절해진 청년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는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
는 육중한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은 청년의 뒤에서 쿵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10분쯤 지나서 지바고는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지바고는 조금 전의  그 청년에 대해서나 또
친구 집으로 찾아가려던 생각을 말끔히 잊어버렸다. 그는 신문 기사가 머리에 가득했으며 곧바로
집으로 행했다. 그러나 도중에서 또 하나의 사건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여느 때라면 하잘
것없는 일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무렵에는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두운 보도의 골목길에 높이 쌓아 올린 나무더미에 부딪쳤던
것이다. 이 거리에는 정부의 시설들이 있었고 정부가  교외의 집들을 부수어서 나무를 연료로 공
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모두 뜰 안에 운반할 수가 없어서 일부는  밖에 쌓아놓고 있었다.
소총을 든 보초가 나무 더미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뜰  안을 걸어다니며 가끔 바깥 거리로 나오
곤 했다.
  지바고는 크게 결심하고 보초가 뒤돌아서는 사이에, 바람이 눈보라를 휘몰아칠 때 가로등 불빛
을 피하면서 컴컴한 그늘로 몸을 숨기면서 제일 밑에 깔린 무거운 대들보  하나를 조심스럽게 빼
냈다. 그는 그것을 겨우 짊어질 수 있었으나 곧 그  무게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내 것이라고 생
각하면 무거운 것이라곤 없는 법이다.' 어두운 담벼락에 바싹 붙어서 무사히 집까지 가지고 왔다.
  때마침 집에는 땔감이 하나도 없었다. 대들보를 쪼개서 쌓아놓았다. 지바고는 난로에 불을 붙이
고 나서 말없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장인 그로메코 교수도  안락의자를 끌어다 놓고 불을
쬐었다.
  지바고는 외투 옆주머니에서 신문을 끄집어내서 펴들었다.
  "이것 보셨어요? 이거 보십시오."
  그는 여전히 쪼그리고 앉은 채 불을 뒤적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멋있는 외과 수술이야! 메스를 들어 단번에 썩고 헐어 버린 종기를 도려내고야 말았어. 간단하
고도 분명한 쾌재였지. 몇 세기에 걸쳐 신주처럼 모시던 낡고 부정한 괴물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거야. 그처럼 아무런 두려움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가는 데에 러시아 민족의 양상이 있지. 푸슈킨의
타협 없는 명석함과 톨스토이의 사실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충실성을 생각하게 하는군."
  "푸슈킨이라니? 잠깐만, 다 읽고 나서. 한꺼번에 읽고 듣고 할 순 없지 않는가?" 그로메코 교수
는 자기에게 하는 얘긴 줄 알았던 것 같았다.
  "그런데 참된 천재란 무엇일까요? 누구한테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새 시대를 발족시키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우선 기초를 닦고 새시대를 이룩하기에 앞서 구시대가
끝나기를 기다릴 테지.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깨끗한 페이지부터 시작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여기서는 그따위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새로운 것,  이 역사적인 놀라움, 이 계시는 일
상 생활 따위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그 속으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파고드는 거야. 그것은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도중에서 시작하는 거지. 아무런 예정도 있을  수 없고, 부닥치는
첫날에, 그것도 교통이 한창 번잡할 때에. 이것이 참된  천재인 것이오. 참으로 위대한 것만이 때
와 장소에 개의치 않아요."
    9
  걱정스러웠던 겨울이 닥쳐왔다. 그 후의 두 겨울만큼 지독한 추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침울하
고 굶주리고 추운 겨울이었다. 낯익은 모든 것이  파괴돼 버리고 일체의 존재를 기초에서부터 다
시 쌓아 올리면서, 또 동시에  사라져 가는 생활을 위하여 비인간적인  힘에 기대어야 하는 모든
것에 무진 애를 썼던 겨울이었다.
  이러한 겨울이 3년을 계속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917년에서 1918년에  걸쳐서 일어난 것처럼
생각되는 모든 일들이 실은 그해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부는 그 후에  일어난 일이었는지도 모
른다. 그러나 잇달아 찾아온 3년간의  겨울이 하나로 엉켜서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낡은 생활과 새 질서는 아직도 융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1년 후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처럼 공
공연한 갈등은 없었으나, 양자 사이엔 아무런 연계도 없었고 서로 대립만 계속되고 있었다.
  주택관리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조직, 그리고 관공서 등 도처에서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
었다. 독재 권력을 부여받은 위원들이 각각 임명되었다. 검은 가죽 상의를 입고, 위엄을 과시하는
연발 권총으로 무장한 철의 의지의  사나이다. 그들은 수염도 잘 깎지  않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다.
  그들은 이른바 부르주아 족속이나 싸구려 정부 채권 따위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중산층을 잘
알고 있었다. 털끝만큼 동정하는 기색도 없이 조소하듯  미소를 지으면서 마치 범죄 현장에서 붙
잡은 좀도둑을 다루는 말투였다.
  그들은 계획에 따라서 모든 것을 뜯어고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회사나 기업들은 점차 볼셰
비키 체제로 변모되고 있었다.
  성십자병원도 지금은 제 2개혁 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병원 내용도 많이 달라졌다. 해고된 직
원도 있었고 대우가 나빠서 그만둔 직원도 많았다. 이들은 상류 사회에 단골 환자를 가진 수입이
좋은 의사들이었으며 또 말 깨나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수입을 위해서 병원을 그만두
면서도 표면상으로는 정치적 동기에서 저항을 표방하며,  남아 있는 의사들을 경멸하고 심지어는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지바고는 병원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밤이 되면 지바고 부부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수요일엔 의사 조합에 가서 언 감자를 가져오는 걸 잊어서는 안되오, 거기에 두포대가 있으니
까. 몇 시에 병원에서 나올 수 있는지 알릴 테니 썰매를 가지고 같이 가기로 합시다."
  "알았어요. 아직 날짜가 있으니까. 이젠 쉬세요,  밤도 늦었어요. 주무세요, 당신은 아무 일이나
혼자선 할 수 없어요."
  "전염병이 돌고 있소, 피곤하면 저항력을 약하게 하니까. 당신과 아버님은 너무 지쳐 있어서 큰
일이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텐데, 어떡하면 좋지? 우린 더욱 건강에 조심해야  하오, 여보, 당
신 졸고 있소?"
  "아뇨."
  "나는 걱정 없소. 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사람이니까. 그러나 혹시 내가 병으로 스러지게
되면 바보처럼 집에 그냥 두지 말고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하오."
  "여보, 무슨 말씀을 하세요! 걱정할 건 없어요. 불길한 얘긴 그만두세요."
  "이젠 믿을 만한 사람이나 친구가 없다는 걸  명심해요. 만일 무슨 일이 생길 경우엔 피추즈킨
한테 부탁해요. 물론 그가 살아 남았을 경우의 얘기지만, 당신 자는 거요?"
  "아뇨."
  "봉급이 적어서 다들 병원을 그만뒀다오. 그러고서도 사상과 주장이  달라서, 시민의 양심에 따
라 그만둔 것으로 되니까 견딜 수가 없어요. 오가다 만나면 고작 손을 내밀고 눈썹을 치켜올리면
서 한다는 소리가 '아니 그래, 당신은 그놈들과 함께 있단 말이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소.
'그렇소. 하지만 나는 우리의 궁핍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에게 궁핍을 강요
하면서 영광을 안겨다 주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있어요.'
    10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평상시 음식은 옥수수와 청어  대가리를 넣어 끓인 수프였다. 청어 몸체
는 다음에 구워서 먹었으며 통밀과 귀리로 죽을 만들어 먹었다.
  토냐는 아는 대학 여교수에게서 난로에 사용하는  고기 굽는 기구로 빵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
다. 그래서 빵의 일부분은 팔아서 예전처럼 페치카로 난방할 수 있는  비용을 뽑으려는 것이었다.
철제 난로는 연기만 나고 방이 따스하지 않아서였다.
  토냐가 만들어 낸 빵은 좋았으나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다시 철제 난로를 쓰게 되었다. 지바
고의 살림 형편은 말할 수 없이 옹색해 갔다.
  어느 날 아침 지바고가 출근한  후에 토냐는 낡은 겨울 외투를  걸치고 물건을 구하러 나섰다.
집엔 장작이 겨우 두 개비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몸이 어찌나 쇠약했는지 따뜻한 날에도 외
투를 입고 떨었다. 반시간쯤 근처의 골목길에서 서성거렸다. 모스크바  근교의 농촌에서 농부들이
채소나 감자를 팔러 오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짐을 가지고 오는 농부들을 낚아야  했다. 토냐는
구하려던 물건을 마침내 발견했다. 아르먀크를 입은 건장한 젊은이가 마치 장난감 다루듯 가볍게
썰매를 끌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라 그로메코 댁 앞뜰로 들어왔다.
  포장을 덮은 썰매 안에는 사진에서 본 19세기 시골집 난간대만큼이나  가느다란 자작나무 장작
이 실려 있었다. 토냐는 그 가격을 잘 알고 있었다. 자작나무는 이름뿐이고 질이 나쁜 장작이었으
며, 그것은 베어낸 지가 얼마 안  되는 생나무였다. 하지만 토냐는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어서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젊은 농부는 대여섯 아름의 장작을 방안으로 옮겨 놓고 그 대가로 토냐의 거울 달린 작은 옷장
을 들어내어 썰매에 실었다. 그는 제 색시에게 선물로 줄 생각 같았다. 앞으로  감자와 교환할 때
는 무엇을 가져가겠는가 물었더니 농부는 문 옆의 피아노를 가리켰다.
  집에 돌아온 지바고는 부인이 사들인 것에 대하여 아무런 탓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옷장을 부
숴서 장작으로 쓰는 편이 나았겠지만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책상 위의 종이 쪽지를 보셨어요?" 아내가 물었다.
  "병원에서 온 거 말이오? 얘긴 벌써 들었소,  급한 환자니까 가야지. 그런데 좀 쉬었다 가겠소,
너무 먼 곳이어서... 개선문 근방인 것 같더군. 주소는 알고 있어요."
  "왕진료로는 괴상한 것을 주겠다고 했어요. 읽어 보셨어요?  독일제 코냑 한 병과 여자용 양말
한 켤레예요! 대체 그는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요? 아마 속물이겠죠. 우리가 요즘 어떻게 살고  있
는지 모르나 봐요. 벼락부잔 지도 몰라요."
  "아마, 매점자일 거요."
  매점자라든지 이권자, 대리인이란 소상인들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정부는 개인 상업을 철폐시켰
으나 경제 사정이 곤란한 시기에는 그러한 상인을  인정하고, 여러 가지 물자의 조달을 위촉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자본가도 아니고 망해버린 회사의 간부들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심
한 타격에서 재기하지 못했다. 이들과는 반대로 그들은 새로운 범주에 속하는 기업가들로서 전쟁
과 혁명 덕분에 벼락부자가 된 뜨내기들이었다.
  지바고는 우유를 조금 넣은 뜨거운 물에 하얀 설탕을 타서 마시고 왕진에 나섰다.
  차도와 보도는 온통 깊은 눈에 뒤덮이고, 곳에 따라선 1층집 창문 높이까지  눈이 쌓였다.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사람들의 조용한 그림자가 여기저기서 얼마 안 되는 양식을  들거나 썰매에 싣
고 끌면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 밖에 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저기에 이전의 상
점 간판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것들은 새로  생긴 조그만 소비조합 상점이나 협동조합 상점
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상점들도  텅 비었고 앞문을 닫아걸고 창문에는 빗장을
지르거나 나무 판자에 못질을 해 놓았다.
  앞문을 닫아걸고 안이 텅 비어 있는 까닭은 팔 물건이 없을뿐더러 상업을 위시한 사회 생활 여
러 영역의 재건이란 한낱 탁상의  계획에 불과했으며, 못을 박아 놓은  상점 따위의 사소한 일엔
아직 손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11
  지바고가 방문한 집은 트베르 성문 근처 브레스트스카야 거리 변두리에 있었다.
  병사를 연상하게 되는 낡은 벽돌 건물로서 앞뜰이 있고 뜰을 향한 벽에는 세 개의 나무 층계가
있었다.
  그날은 마침 이 집 거주자들의 총회가 있어서 지구 소비에트에서 여성 대표들이 참석하고 있었
다. 그런데 갑자기 군사위원단이 무기  소지 허가증을 점검하며 무허가  무기를 압수하기 위하여
나왔다. 거주자들은 각기 자기 거처로 되돌아가려고 했으나, 군사위원단의  책임자는 검사엔 별로
사간이 걸리지 안으니까 곧 집회를 계속할  수 있으니 돌아가지 말라고 지구  소비에트 대표에게
말했다.
  의사가 도착했을 무렵에 검사는 거의 끝나 가고 있었으나 왕진을 하게 된 집은 아직 수색을 받
고 있지 않았다 지바고가 층계 입구에 서서  소총을 들고 있는 병사와 들어가겠다 안  된다 하고
시비하고 있는 걸 군사위원단 책임자가  보고는, 환자의 치료가 끝난  때까지 수색을 연기하도록
명령했다.
  집주인이 의사를 맞았다. 핏기 없는  얼굴에 어두운 시름이 엿보이는 점잖고  젊은 사람이었다.
부인의 병과 가택 수색이 겹치고 의사와 대표에게 인사를 하느라고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의사에게 시간과 수고를 덜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설명하려고 했으나, 덤비면 덤빌
수록 오히려 횡설수설 말이 길어질 뿐이었다.
  급작스런 인플레 때문에 미리 장만해놓은 것인지 집안에는 값비싼 가구와  싸구려 가구들이 어
수선하게 놓여서 발을 들여놓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가구는 세트로 된 것도 있었지만 낱개
로 된 것도 있었다.
  주인은 아내의 병이 신경성 쇼크에서 온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여러 가지 횡설수설하는 설명
에 의하면 이 부부는 얼마 전에 고물 시계 하나를  샀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자명종 시계이
긴 하지만 시계에서 울려 나오는 멜로디만 들어도 시계공의 멋있는  솜씨를  알 수 있었다. 주인
이 지바고를 옆방으로 안내해서 시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고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몇 년동안이나 태엽을 감아  주지 않았던 시계가 느닷없이 혼자 움직
이기 시작하면서 복잡한 미뉴엣 한 곡을 울리더니 이내 멈춰 섰다는 것이다. 부인은 새파랗게 질
려서 자기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 고열에 신음하면서 식음을
전폐한 채 남편도 알아보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래서 신경성 쇼크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지바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환자를 좀 봅시
다."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도자기 샨데리야, 넓은 더블  베드, 그리고 그 옆에 마호가니 탁
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침대  한쪽에 검은 큰 눈동자의 몸집이  작은 여인이 턱 위까지 이불을
올려 덮고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이불에서 한 손을 내밀고 잠옷의 넓
은 소매를 겨드랑이 밑까지 흘러내리며 나가라는 시늉으로 손을 내저었다. 남편도 알아보지 못하
고 혼자인 줄 알고 있는지 낮은 목소리로 서글픈 노래를 부르더니 설움이  북받쳐 어린애처럼 훌
쩍이면서 집으로 보내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의사가 침대 가까이 가자  그녀는 뒤돌아 눕더니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의사는 말을 건네었다.
  "진찰해봐야 하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을 것  같군요. 티푸스가 틀림없어요. 그리고 중태입니다.
환자는 몹시 괴로울 겁니다. 병원에 입원시키도록 하십시오. 집에서도 잘 보살필  순 있겠지만 적
어도 몇 주일은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겠어요. 마차나  짐차라도 좋으니 옮길 수 있겠지요? 물론
환자의 몸을 잘 감싸주어야 합니다. 입원 지시서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정말 티푸스가 틀림없습니까? 큰일 났군요!"
  "그렇게 생각됩니다."
  "선생님, 입원을 시키면 처는 죽고 말  겁니다. 집에서 치료를 받을 순  없을까요? 되도록 자주
왕진하시면 원하시는 대로 무엇이든 다 드리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렸지만 부인한테 중요한 것은 계속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제발 내 말
대로 하십시오. 부인을 위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여하튼  마차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지시서를 드
리지요. 주택위원회 방에서 쓰는 편이 좋겠군요. 주택위원회의 도장도 찍어야 하고, 그 밖에도 약
간의 수속이 필요하니까.
    12
  따뜻한 숄을 걸치거나 슈바를 입은 거주인들이 심문과 수색을 마치고 난로도 없는 지하실로 하
나 둘 되돌아왔다. 여긴 예전에  계란 창고로 쓰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주택위원회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사무용 책상 하나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의자가 부족해서 빈 계란 상자
를 뒤집어 의자 대용으로 나란히 놓았다. 이러한 빈 상자  더미가 천장까지 높이 쌓아 올려져 있
었고, 한 구석에는 부서진 계란에서 노른자위가 대팻밥더미에 흘러내려서 여러 군데 마른 덩어리
가 되어 있었다. 쥐들이 무리지어 그 속을 휘젓고 다니며  이따금 돌을 깐 바닥 한가운데로 뛰어
나왔다간 도먕쳐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뚱뚱한 한 여인이 상자 위로 뛰어올라가 호들갑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치맛자
락을 요염하게 손가락을 펴서 쳐들고 멋진 장화를 탕탕 구르면서 술 취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올랴, 올랴, 여기 이것봐! 쥐들이 우글거리고 있어요! 쉿, 저리 갓! 아이, 이것 좀 보라구, 이 쥐
새끼가 내 말을 알아듣나봐. 성을 내면서. 아이! 저놈이 상자에 기어올라요, 내 치마  밑으로 기어
들어와요. 어마, 어마, 무서워! 여보세요, 쫓아주어요. 아  참, 지금은 여보세요가 아니라 동무들이
라고 불러야지!"
  시끄러운 여인의 털외투 앞깃이 헤쳐지면서 그 속에서 세 겹으로 처진 살과  턱과 명주옷을 입
은 풍만한 가슴과 배가 보였다. 그녀는 한때  상인이나 점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여왕이었으나
지금은 퉁퉁 부어오른 눈꺼풀 밑에 작은 돼지 눈이 잘 뜨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연적의
유산 세례를 받은 일이 있었으나 위기를 모면하여 한두 방울이 뺨과 입술  가장자리에 묻어서 오
히려 그럴듯한 조그마한 흠이 남아 있었다.
  "떠들지 말아요, 흐라푸기나! 회의를 진행할 수  없어요." 의장으로 선출되어 책상에 앉아 있던
지구 소비에트 여성 대표가 말했다.
  대표는 오래 전부터 이 집의 모든 거주자들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그녀
는 수위인 파치마 할머니와 잠깐 낮은 목소리로 사담을 나눴다.  이 노파는 이전에 이 더러운 지
하실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으나 지금은 딸과 둘이서 2층 방 두 개를 쓰고 있었다.
  "할머니 어떻게 지내세요?" 대표가 물었다.
  파치마 할머니는 이렇게 거주인이 많고 큰집을 자기 혼자서 보살필 수는 도저히 없는데다가 거
주인들이 순번으로 안뜰이나 통로를 청소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누구 하나  청소하는 사람이 없다
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내가 혼내줄  테니 편하게 될 겁니다.  한데 여기 위원회는 뭘 하는
거죠? 도대체 돼먹지 않았어요. 범죄 분자를 숨기거나 불순 분자를 등록도 하지 않고 거주시키고
있으니 말예요. 이런 위원회는 없애 버리고 새로 선거해야 돼요. 할머니를  주택 관리인으로 임명
할 테니 염려 마세요."
  수위 할머니는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으나 대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방안을 둘
러보고 인원이 다 출석했다고 생각되자,  대표는 정숙할 것을 요구하면서 간단한  개회사를 했다.
주택위원회의 태만성을 신랄하게 비난한 다음 새로운 위원을 선출하기 위한 후보자를 추천하도록
제의하고 나서 다음 문제로 넘어간 후 그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동무들, 솔직히 말해서 이 집은 큼직해서 숙박소로  적당하겠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 대표들을 유숙시킬 적당한 장소가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지방에서 올라오는 삶들을 위한
지구 소비에트 숙박소로서 이 집을 접수하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유형 되기까지  여기서 살던 치
베르진 동무를 기념하여 치베르진 숙박소로 부르기로 결정하였소. 이의 없지요? 그러나 이사해야
할 날짜에 대해서는 서두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직도 1년이나 남았으니까. 근로자에게는 별도로
주택을 마련해주겠소. 그 밖의 사람은 저마다 찾아봐요. 12개월의 여유를 주겠소."
  "우리들 중에 근로자가 아닌 사람이 누구요? 누가 근로자가  아니란 말이오! 모두 다 근로자지
요."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대는 소리 가운데서 유독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러시아 민족 우
위의 배타주의요! 지금 러시아에 사는 민족은 평등하단 말이오! 난 당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
소!"
  "한꺼번에 말하지 말고 한 사람씩  말해요! 누구의 질문이 먼저요? 발드이킨씨,  도대체 이것이
민족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흐라푸기나를 보아요. 그녀의 경우 민족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이오. 하지만 흐라푸기나도 함께 퇴거시킬 테니 두고보아요."
  "퇴거라니! 어디 한 번 쫓아내 보라지! 소파나 부숴 보라지! 침대 홑이불이나 구기라고 해!" 흐
라푸기나는 싸움을 하듯이 정신없이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뱀 같은 년! 창피한 줄도 몰라!" 수위 할머니가 분개했다.
  "가만있어요, 할머니. 내가 처리할 테니." 대표가 말했다.  "이봐요, 흐라푸기나. 당신이 하고 있
는 짓은 다 알고 있어. 잠자코 있지 않으면 밀주를 만들어  비밀 주점을 하고 있는 걸 당국이 알
아서 붙잡아가기 전에 지금 당장 내 손으로 넘겨버릴 테니까."
  소란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누구와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이때 의사가 문간에서 처음 만났던
사람을 붙들고 주택 위원 한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두 손을 나팔처럼 입에 대
고 소리쳤다.
  "갈-리울-리나! 이리 오시오, 누가 보잡니다."
  지바고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약간  허리가 굽어진 여윈 여인이 그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수위 노파였다. 아들 갈리울린 중위의 모습과 너무 닮은 데 그는 놀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기
소개는 하지 않고 말했다.
  "이 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티푸스에 걸렸습니다. 전염을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우선 환자는 입원시켜야 하겠습니다. 제가 입원 지시서를 쓸  테니 위원회에서 확
인해주어야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할머니는 환자를 '어떻게 옮기겠는가'를 묻는 줄 알았다.
  "지구 소비에트에서 제미나 동무를 모시기 위해 마차가 오기로 돼 있습니다. 대표의 한 사람이
죠. 매우 친절한 사람이랍니다.  제가 부탁드리죠. 틀림없이 마차를  쓰게 할겁니다. 걱정 마세요,
의사 동무. 꼭 입원시켜야죠."
  "그것 참 다행이군요. 제가 말씀드린 것은 어디서  입원 지시서를 작성할 수 있는지 묻는 겁니
다. 하여튼 마차편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혹시 갈리울린 중위의 어머님  되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전선에서 같은 부대에 있었답니다."
  노파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의사의 손을 부둥켜 잡으며 말했다.
  "밖으로 나가 정원에서 얘기합시다."

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재빨리 말을 꺼냈다.
  "제발 말소리를 낮춰요. 들통이 나면 전 파멸이라오. 유수프카(갈리울린)는 길을 잘못 들었어요.
생각해 봐요. 지금 그 애는 무슨 꼴이오? 그 애는 견습공이고 노동자였답니다.  요즘 세상은 신분
이 낮은 편이 훨씬 잘 되고 있다는 걸 그 애는 왜 모를까요? 장님도 다 아는 일을  그 애는 모르
고 있다니. 선생님한테 말해도 괜찮겠지만 그 애는  이걸 부정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오. 그 애 애비는 병사였는데 전사하고 말았답니다. 얼굴과 팔다리를 날려보냈다
우."
  노파는 더 말할 힘이 없었으나 손을 흔들며 다시 말을 이었다.
  "갑시다. 마차를 준비해야죠.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잘 알고 있어요. 그 애는 2,3일 여기에 있었
어요. 그 애한테서 들었어요. 라라를  아시지요? 좋은 처녀였지요. 그녀는 여기  자주 찾아왔다오.
그런데 지금 양반 행세하던 사람들이 다 어찌 됐는지? 물론 한데 뭉치는 건 당연하지만 유수프카
는 확실히 길을 잘못 들었어요. 이리로 오세요. 마차 편을 좀 부탁해야지. 제미나 동무는 꼭 편의
를 보아주실 겁니다. 제미나 동무가  누군지 아세요? 라라의 어머니  밑에서 재봉일을 하던 올랴
제미나예요. 그 여자도 바로 이 집에서 살았지요. 자, 갑시다."
    13
  벌써 밤이 되었다. 사방은 컴컴해졌다. 제미나의 회중 전지의 동그란 불빛만이  네댓 걸음 앞에
서 눈 더미를 뛰어가면서 길을  밝혀준다기보다 오히려 분간키 어렵게  만들었다. 어둠이 사방에
깔렸다. 많은 사람이 라라를 잘 알고 있고, 그녀가 처녀때 자주 찾아왔고, 그녀의 남편 파샤가 살
았다는 집을 지나서 갔다.
  "회중 전지가 없어도 길을 아시겠지요, 의사  동무? 어때요? 전지를 드릴까요?" 제미나는 자못
생색을 내며 익살을 부린다. "어린 처녀 시절에 나는 라라와 다툰  일이 있어요. 그들은 양장점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하고 있었지요. 금년에 그녀가 모스크바를 지나는
도중에 들렀더군요. '어디로 가는 거지, 바보처럼. 여기에 와요. 나하고  같이 살아요. 일자리도 구
해줄 테니' 하고 권했으나 소용이 없었어요. 제 마음이 내키는 대로하랄 수밖에요. 라라는 진정으
로 파샤를 좋아서 결혼한 게 아니고 마지못해 결혼한 거죠. 결혼한 후부터 머리가 좀 돈 것 같더
니 결국 가버렸어요."
  "당신은 라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심하세요, 미끄러워요. 밖에다 구정물을 버리지 말라고 그렇게 얘길 했지만 도무지 들어먹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으셨지요? 생각한다는 건 무슨  뜻이죠? 왜 내가 라라를 생각
하지 않으면 안 되요? 생각할 틈이  없어요. 여기가 우리 집이랍니다. 라라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게 하나 있어요. 군대에 갔던 그녀의 오빠는 아마 총살되었을 거예요. 옛날 나의 주인이었던 라라
의 어머니만은 구해내도록 하겠어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두 사람은 헤어졌다. 제미나의 회중 전지의 작은 불빛이 좁은 돌문 안으로 비쳐 들어가면서 때
묻은 담과 더러운 층계를 비치는 동안 지바고는 혼자 어둠 속에 삼켜 들어갔다. 오른쪽은 사도바
야 트리움팔리나야 거리이며 왼쪽은 사도바야 카레트나야 거리였다. 어두운 두 밤거리는 이미 거
리가 아니라 석조 건물의 밀림을 지나는 통로였다. 마치 시베리아나 우랄의 인적 없는 밀림을 뚫
고 지나가는 통로와도 같았다.
  집은 밝고 따뜻했다.
  "왜 이렇게 늦으셨지요?" 토냐는 그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나가신
사이에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어제 아버님이  자명종 시계를 고
장냈는데, 당신에게는 얘기하는 걸 잊었어요. 그것이 집에 있는 마지막 시계인데  몹시 마음에 걸
렸지만 별 도리가 없었어요. 고치려고 무던히 애도 썼으나 허탕이었어요. 근처  시계 방은 엄청난
수리 비를 내야 한 대요. 빵 3파운드나  말예요.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고  아버님은 풀이
죽어 보였어요. 그런데 말예요, 놀라지 마세요. 한 시간쯤 전에 갑자기 종이  울렸어요. 귀청이 찢
어질 만큼 큰 소리로 말예요. 우린  새파랗게 질렸어요. 저절로 가기 시작하다니 글쎄  이럴 수가
있어요!"
  "내가 티푸스에 걸릴 때가 왔군."
  지바고는 웃으면서 환자의 자명종 시계 이야기를 했다.       
    14
  그러나 그가 티푸스에 걸린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그 동안  지바고의 살림 형편은 극도로
비참했다. 그들은 돈 한푼 없이  굶주리는 형편에 이르렀다. 지바고는 이전에  강도에게 피습되어
도와주었던 당원을 만나러 갔었다. 그는 의사를 위하여 하는 데까지 돌봐주었으나, 내란이 시작되
는 바람에 거의 지방에 가 있었다.
  게다가 그는 그 당시 사람들이 궁핍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생각했으며, 그 자신도 말
은 하지 않아도 굶주려 있는 형편이었다.
  지바고는 트베르 성문 근처의 상인과 연락을 하려고 했으나 그 후 몇 달 동안  그 사람은 자취
가 없었고 티푸스가 완쾌한 그 아내의 소식조차 묘연했다.
  지바고가 방문했을 때 갈리울린의  어머니는 외출하였고 대부분의  거주인은 새 사람들이었다.
제미나는 전선에 나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공정 가격으로  장작을 배급받았으나 그것을 빈다프스키  정거장에서 운반해와야
했다. 듯밖에 생긴 보물처럼 장작을 실은 마차를 지켜보면서 메샨스카야 거리를 돌아오는 길에서
그는 거리의 모습이 달라져버렸다고 느꼈다. 그의 발이 겨우 움직여지며 휘청거렸다. 이젠 틀렸구
나, 티푸스에 걸린 것을 알았다. 의사는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부가 그를 들어올렸다. 의사
는 어떻게 자기가 장작 위에 눕혀지고 집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15
  그는 두 주일 동안 열이 심해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지바고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토냐가 책
상 위에 두 개의 거리를 세워 놓고 있었다. 왼쪽에는 사도바야 카레트나야 거리, 오른쪽에는 사도
바야 트리움플리나야 거리였다. 거기에 탁상 전등을 비춰서 오렌지색 불빛이 거리를 따뜻하게 비
치고 있었다. 거리가 환해졌다. 글을 쓸 수 있겠다. 그리하여 지바고는 글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전부터 언제나 쓰고 싶어하면서도 쓰지  못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술술 펜을 움
직여 가며 말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따금 한 청년이 그것을 방
해했다. 키르기스 사람같이 눈매가 가느다랗고, 우랄이나 시베리아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순록의
털가죽 외투를 입은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그의 죽음의 정령, 다시 말해서 그의  죽음 자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러나 청년이 시를 쓰고 있는 그를 돕고  있으니 어떻게 그의 죽음일 수 있겠는
가. 죽음이 도움이 되리라는 가능성이 있을까.
  그의 시의 주제는 장례식도 부활제도 아니고  그 중간의 날이었다. 제목은 <곤혹>.  사흘 동안
미친 듯 울부짖으며, 벌레가 우글거리는 암흑의 대지가  사랑의 불멸의 화신에 암석을 들고 공격
하며-마치 파도가 해안에 밀려왔다 간 부서지듯 - 사흘 동안  대지의 시꺼먼 폭풍이 휘몰아쳐서,
밀려 오가는 모습을 그는 항상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두 줄의 시구가 머리 속을 자꾸 맴돌았다.

    가볍게 스치는 기쁨
  눈떠야 할 때

   그의 바로 옆에 그를 스칠 듯이  지옥과 파괴와 부패가 있었으며, 그것들과 함께  봄과 생명이,
그리고 막달레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눈을 떠야 할 때다. 눈을 뜨고 일어날 때다. 소생할 때인
것이다.
    16
  그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음이 편안해서 무엇이든지 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
무런 생각도 없이, 사물의 관련을 알지 못하고, 무슨 일에도 놀라는 법이 없었다. 아내는 흰 빵과
버터를 먹여주었고 설탕을 넣은 차도 따라주었고 커피도 내놓았다. 지바고는 이러한 물건들이 구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회복기의  환자에게는 마땅히 있어야 할 음식들이라고 생
각하여 시나 동화를 즐기듯이 음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생각하는 힘이 생기자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한테 물었다.
  "이것을 어디서 구했소?"
  "예브그라프가 가져왔어요."
  "예브그라프라니?"
  "예브그라프 지바고 말예요."
  "예브그라프 지바고?"
  "그래요, 당신 동생 예브그라프가 옴스크에서  왔어요. 당신의 이복 동생 모르세요?  앓고 있는
동안에 매일같이 왔어요."
  "순록 가죽 외투를 입지 않았어?"
  "그래요, 그럼 보셨군요, 줄곧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 예브그라프는  어떤 집 층계에서 당신을
보았대요. 당신을 알아보고 말을 걸려고 했나 봐요. 그런데 당신이 얼마나  무섭게 노려보는지 말
도 못한 모양이에요. 예브그라프는 당신을 존경하고 있어요. 당신이 쓰신 글은 죄다 읽었구요. 쌀,
건포도, 설탕 모두가 그가 갖다  준 거예요. 그리고 옴스크로  되돌아가 버렸어요. 우리를 그리고
데리고 가고 싶다는 거예요. 그는 좀 이상한 데가 있고 신비스럽게 보였어요. 보기에 정부와 무슨
줄이 닿아 있는 것 같더군요.  우린 1,2년쯤 도시에서 떠나 '땅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대요. 내가
크류게르의 영지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참 좋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거기 가면 채소도
가꿀 수 있고 주위엔 숲이 우거져 있어요. 싸워보지도 않고 양처럼 죽어간다는 건 무의미하긴 하
지만."
  그해 4월 지바고는 온 가족과 함께 멀리 우랄 지방의 유라친 근처에 있는  바르이키노 농원 영
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7.여로
    1
   3월말에야 그해 들어 처음으로 따뜻한  날씨가 찾아들었다. 제법 봄인가 싶었지만,  그 후에는
반드시 추운 날씨가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지바고네는 떠날 준비에 한참 부산했다. 거리의 참새보다  더 많이 함께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활제 준비로 대청소를 한다고 소문을 냈던 것이다.
  지바고 자신은 떠나는 데 반대였었다. 그는 이사해  봐야 별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준비하는 일
을 방해하지는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 아내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바랬다. 그러나 준비가 진행되어
거의 끝날 무렵에 이르러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아내와 장인에게 가족 회의를 해서 그이 걱정되는 점을 이야기했다.
  "그래 내 말이 틀렸단 말이오? 그래도 떠나야 한단 말이오?"
  지바고는 끝내 반대 의견을 말했다.
  "앞으로 한두 해만 지나면 새로운  토지 소유 제도가 이루어져서 모스크바  근교에서 채소밭을
가꿀 수 있다고 당신은 말하지만 그때까지 어떻게 지내지요? 그게 제일 문제인데 한 마디도 말씀
이 없군요."
  토냐가 말했다.
  "그건 믿을 수 없는 소리야."
  장인이 토냐 편을 들었다.
  "알았어요. 내가 졌습니다." 지바고가 수그러졌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눈을 가린  채 아무것도
모르는 곳으로 가는 거나 같다는  말입니다. 바르이키노에 살던 세분  중에서 어머님과 할머님은
돌아가셨고, 남은 크류게르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인질로 그 집에 갇혀 있는 거나 다르지 않
습니다.
  "할아버지는 전쟁 마지막 해에 임야와 공장을 가매각해서 개인명의가 아니면 은행에 재산을 등
기 이전시켰다고 했어요. 사실 우리는 그 진상을 전혀 모르고 있어요. 지금 그  농장이 누구의 것
으로 돼 있는지조차도 몰라요. 이  땅이 우리의 소유인지, 남의  소유가 돼 버렸는지조차도. 다만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벌목을 하고 있는지? 공장은 움직이고 있는지? 결국 그  일대의 권력자
는 누구일까? 또 어찌될 것인가,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늙은 관리인 미쿨리츠인이 우리를  도와주리라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바르이키노에 그 노인이
살고 잇는지조차 모르고, 우린 다만 그  노인의 이름이나 알고 있을 뿐이죠. 이것도  그의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는 것뿐이지. 하지만 더 이상 논의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
들은 이미 마음을 정했고 나도 동의했으니까요. 이제는  여행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알아보는 일이
남았을 뿐이지요. 더 이상 주저할 필요는 없습니다."
    2
  지바고는 야로슬라브 역으로 문의하러 갔다.
  조금 높게 된 나무 난간 사이의 통로를 따라 여행자 대열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돌 바닥 위
에는 회색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나란히 누워서 기침을 하거나 침을 뱉으며  이리저리 몸을 뒤치
락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지껄거리는 소리가 높고 둥근  천장에 부자연스럽게 큰 소리로 울려 펴
졌다.
  대부분은 티푸스에 걸렸다가 위기를 벗어나 다음날로 병원에서 쫓겨난 환자들이었다. 지바고는
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하는 도리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으나, 병원에서 쫓겨난 사람이 이
렇게 많으며, 갈 곳이 없어서 역에 머무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선 여행 증명서를 받아야 해요." 안내원이 말했다. "그리고 기차가 있는지 없는지 매일 와서
알아보아야 해요. 요즘은 차가 드물어서 운이 좋아야 탈 수 있는 형편이랍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에 엄지손가락을 비비면서) 말하자면 약간의...기름을 치지  않으면 기
차도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또 이것 말이오.  (목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굴도 좀 있어야지
요."
    3
  이 무렵 그로메코 교수는 여러 차례의 요청에 못 이겨 최고경제회의 고문역을 맡고 있었고, 지
바고도 정부 요인의 환자를 치료해 준 일이 있었다. 둘 다 당시의 최고 보수를 받고 있었다. 그것
은 그때 개설된 배급소의 들어온 물건을 우선적으로 살 수 있는 배급표였다.
  배급소는 시모노프수도원 옆의 전의 군대 창고 자리에 있었다. 지바고와 그의 장인은 수도원과
병사의 앞뜰을 지나 낮은 석조 문을 지나서 둥근 천장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경사진 지하실 바닥
은 점차 넓어져서 벽과 벽 사이에 진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진열대 저편에서 점원이 혼자서 침
착하게 물건을 저울에 달기도 하고 재 보기도 하며 물건을 내주고 있었다. 물건을 내주고서는 연
필로 품목표에서 삭제하고 때로는 안쪽에서 없는 물건을 보충하기도 했다.
  손님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점원은 배급표를 흘끔 보고는 "담을  그릇"하고 말했다. 교수와 의
사는 자루 대신 크고 작은 베갯잎  몇 개를 내 들고 밀가루와  곡식, 마카로니, 설탕, 기름, 비누,
성냥 그리고 카프카스 치즈 등을  받았다. 종이에 포장한 것들이 가득  담기는 것을 보고 그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점원의 대단한 선심에 기가 질렸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염려까지 해주어
서 재빨리 물건을 자루에 쑤셔 넣고 어깨에 멨다.
  그들은 하늘에라도 올라가듯이 지하실을 나왔다. 그것은 귀중한 식량을 듬뿍 얻었다 해서가 아
니었다. 자기들도 세상에서 쓸모 없는 인간이 아니라 얼마든지 유익한 구실을 할 수 있으며, 집에
돌아가면 토냐한테 자랑하며 칭찬을 받게 되리라는 생각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4
  남자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관공서에 다니면서  여행 증명서 교부를 신청하거나  다시 돌아왔을
때 쓸 수 있도록 주거 등록을 하고 있는 동안에, 토냐는 가지고 갈 짐을 챙기고 있었다.
  지금은 정식으로 지바고네한테 할당된 방 셋을 들락거리면서 아주 조그만  물건까지도 스무 번
이나 손으로 무게를 달아보고는 가져갈 짐 속에 챙겨 넣었다. 자기들이 가서 사용할 물건은 극히
적었으며, 대부분은 여행 도중에 쓸것과 그곳에 도착하여 처음 얼마 동안 통화 역할을 할 물건들
이었다.
  열린 통기 창으로부터 봄의 산들바람에 갓 자른  흰빵 냄새가 풍겨 왔다. 뜰에는 닭울음소리와
아이들이 떠들며 놀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방의 통풍이 좋아질수록 겨울옷을 담은 채 뚜껑을 열
어둔 트렁크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점점 심하게 코를 찔렀다.
  가지고 갈 것과 두고 갈 것을 골라서 나누는 일은, 이때까지 모스크바를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
남아 있는 친지에게 전해 온 경험을 거울삼아 빈틈없는 이론이 성립되어 있었다. 그 이론의 단순
한 법칙이 토냐의 머리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지저귀는 참새 소리와 아이들의 재잘거리
는 소리에 섞여, 밖에서 들려오는 어떤 신비로운  목소리와도 같이 되풀이되어 그녀의 귀에 속삭
이고 있는 듯싶었다.
  "옷감이 제일이에요." 신비로운 목소리가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도중에서 짐 조사를 당하게 될
테니까 가봉해서 의복처럼 보이게 하지 않으면  위험해요. 옷감, 양복감, 의복, 그다지  낡지 않은
것이면 외투도 좋구요. 트렁크나 고리짝은 안돼요. 정거장에는  짐꾼이 없으니까. 쓸모 없는 물건
을 가지고 가지 않도록 조심할 것. 여자란 어린애도 들고  갈 수 있도록 보따리를 조그마하게 꾸
릴 것. 소금이나 담배가 좋지만 위험해요. 돈은  지폐가 좋아요. 가장 어려운 것은 서류  같은 것,
등등."
    5
  출발 전날은 눈보라가 불어왔다. 잿빛 구름이 눈을  토하면서 하늘로 치달아 올라갔다 간 하얀
회오리바람이 되어 땅에 되돌아와서 깊고 어두운 거리로 사라지며 흰 보자기처럼 뒤덮인다.
  짐을 꾸리는 일은 다 끝났다.  여러 가지 물건을 남겨둔 방은  전에 점원으로 일하던 부부에게
부탁했다. 그들은 예고로브나의 친척이었고, 지난겨울에 토냐가 낡은 옷가지와  가구를 감자와 땔
감과 바꾸는 데 애를 써준 사람들이었다.
  마르켈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의 정치 클럽으로 선택한 민경대 사무실에서 그의 옛 주
인한테 피를 빨렸다고 까지는 말하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그를 무지 속에 묶어두고 인간의 조상
이 원숭이였다는 것을 고의로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토냐는 그들 부부를 데리고 마지막으로 집안을 살펴보면서 자물쇠에 열쇠를  맞춰 보기도 하고
서랍과 장문을 닫기도 하면서 부부에게 마지막 지시를 하고 있었다.
  의자나 책상 따위는 벽가로 옮겨놓고,  창문 커튼이 떼어지고, 한쪽 구석에는  꾸러미가 수북히
쌓였다. 휑한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눈보라는 지바고 일가에게 지나간 슬픈 사연들을 생각하게 했
다. 지바고는 그의 소년 시절과 어머니의 죽음을 회상하였고, 토냐와 장인은  안나 부인의 죽음과
장례식 때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집에서의 마지막 밤이며, 다시는 이 집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세 사람은 저마다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감정을 억제하며, 슬픈 회상에 솟구치는 눈
물을 삼키면서 이 지붕밑에서 지내온 세월을 되새겨 보았다.
  하지만 토냐는 남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모든 것을 맡기고  가는 그 부
인과 쉴새없이 이야기했다. 토냐는 그들 부부의 회의를 크게 생각하고 있었다.  호의를 모르는 사
람이란 말을 듣게 될까봐 그녀는 옆방으로 가서  머릿수건이며 블라우스, 또는 명주나 무늬 있는
비단 천을 들고 나와서 그  부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흰 체크  무늬와 물방울무늬가 있는 어두운
빛깔의 옷감은 그 이별의 밤에 커튼을 벗긴 창문에서 바라다  보이는, 벽돌 건물에 흰 눈이 내리
는 거리 풍경과 흡사했다.
    6
  새벽녘에 그들은 역으로 나갔다. 여느 때라면 아직도 잠자고 있을 시각이었으나, 남한테 친절한
일이라면 언제나 발 벗고 나서는 제보로트키나가 "일어나요! 일어나! 동무들! 빨리, 빨리!"하고 문
을 두들기며 외쳐서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깨웠다.
  그들은 뒷문 층계로 우르르 나와서 사진이라도 찍듯이 반원형으로 늘어섰다. 하품을 하거나 추
워서 벌벌 떨면서 바쁘게 걸쳐  입은 외투를 여미는 사람도 있었고,  엉겁결에 맨발에 끌고 나온
커다란 방한화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도 있었다.
  술을 구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때인데도 마르켈은 어디서 마셨는지 지독한  밀주에 곤드레가 되
어서 뒷층계 난간에 송장처럼 기대  서 있었다. 난간이 그의 체중을  지탱하지 못해 금세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는 역까지 짐을 날라다 주겠다고 우겼으나 굳이 사양하자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겨우 만류했다.
  뜰 안은 아직도 어둑어둑했다. 바람은 잠잠해졌으나 눈은 간밤보다 훨씬 더  내리고 있었다. 굵
직한 솜눈송이가 천천히 내리며 땅위에 앉기 싫은 듯 너풀너풀 공중에서 춤추고 있었다.
  골목을 나와서 아르바트 거리에 이르렀을  때에야 날이 좀 훤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눈이
거리 넓이만큼이나 넓고 흰 장막처럼 내리고 있었다.  이 장막의 아랫자락이 발길에 채여서 걸어
가는 사람들은 앞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잃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시브체프에서 오는 행인은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조랑말이 끄는 마차가 뒤에서 쫓아왔다. 마부도 역시 흰
가루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 당시 찻삯이 엄청나게 비싸서 짐과 가족은 역까지 타고 갔으나, 지
바고만은 자기가 원해서 가벼운 걸음으로 역까지 걸어갔던 것이다.
    7
  역에서는 나무 난간 사이에 끼여 길게 늘어선 대역 속에 토냐와 장인의 모습이 보였다.
  대열은 플랫폼 입구까지 늘어서 있었으나 실제로 기차를 타려면 반 베르스타쯤 철길을 더 가서
타게 되어 있었다. 청소부가 부족해서 역은 몹시  지저분했고 플랫폼 앞의 선로는 쓰레기와 얼음
이 덮여서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차는 멀리 떨어진 곳에 정거하게 되어 있었다.
  뉴샤아 싸샤는 엄마와 할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고 밖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이따금 어른들 사이
에 끼일 때가 되었나 알아보려고 기웃거렸다. 둘 다 석유냄새를 몹시 풍기고 있었다. 티푸스를 전
염하는 이를 막기 위해 목이며 팔뚝, 무릎, 발목에 석유를 듬뿍 발랐던 것이다.
  토냐가 남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가 가까이 오자 여행  증명서에다 스탬프를 찍어주는
곳을 큰 소리로 일러주었다. 그는 그리로 향했다.
  "어디 봅시다, 뭘 찍었는지." 그가 돌아오자 토냐가 물었다.
  그는 난간 너머로 한 뭉치의 서류를 내보였다.
  "그건 특등 석인데요." 줄에 섰던 한 사람이 뒤에서 그녀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토냐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세상 물정을 잘 알아서 무척 형식을 따지고 또  존중하는 부류의 사
람 같았다.
  "이 스탬프가 찍혀 있는 당신들은 1등 좌석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한단 말입니다. 물론
열차에 객차가 붙어 있을 경우의 얘깁니다만."
  이윽고 줄 전체가 벌집처럼 이 화제에 끼여들었다.
  "객차라니! 무슨 소리야! 요즘은 화물차에 끼여 타기만 해도 고맙다고 해야지!"
  "이 사람들이 하는 소릴 듣지 마시오. 내가 설명해드리지요. 간단해요. 요즘의 열차는 단 한 가
지 종류밖엔 없어요. 군용 차량, 죄수 호송 차량, 가축  수송 차량과 객차 등이 언제나 섞여 있어
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군중을 향해 외쳤다. "왜 이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합니까? 말이야 아
무리 해봐도 축날 것은 없지만, 이 사람이 알아듣도록 똑똑히 말해야 할 게 아니오!"
  그는 사방에서 야유를 받았다.
  "이봐, 무슨 소리야! 똑똑한 체 말아요. 1등석이 다 뭐야! 말하기 전에 저 친구 얼굴을 좀 봐요.
저런 사람이 어떻게 1등석을 탄단 말이오. 1등석엔 수병들이 가득차 있는데.  그들은 매서운 눈초
리와 권총을 가지고 있어요. 첫눈에 벌써, 이거 유산  계급이로군, 게다가 의사 선생-예전의 양반
이로군, 하면서 총을 빼들고 파리 잡듯 때려잡을 거요."
  새로운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바고에게 쏠렸던 동정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었을지
모른다.
  얼마 동안 사람들은 역의 두꺼운 유리 창문을 통해 꽤 떨어진 곳에 지붕이 있는  선로 쪽을 바
라보고 있었다. 멀리 지붕 너머에는 눈 내리는 것만 보였다. 너무나 멀리서 보는  그 눈은 물고기
한테 던져준 빵 부스러기가 물 속으로 가라앉듯 천천히 땅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따금 몇 사람이 선로를 따라  멀리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철도원이 출근하는
길인가 생각되었으나. 이윽고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관차 연기가
오르고 있는 곳으로 가까이 향하고 있었다.
  "이놈들아, 문을 열어라."
  대열 속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물결은 넘실거리면서 문에  부딪치고 서로 밀고
당기고 했다.
  "무슨 짓들이냐! 우리를 여기에 가두어놓고 저놈들은 돌아서 먼저 보내기냐! 빨리 문을 열지 않
으면 문을 부수겠다. 자, 여러분, 밀어 봅시다."
  "바보 같은 놈들, 부러워할 것 없어요." 아는 체하던 그 사람이 말했다.
  "저것은 페트로그라드에서 강제 노동으로 징집된  사람들이에요. 북쪽 볼로그다로가게 되어 있
었지만 변경되어 동부 전선으로 보내어지고 있는 거요.  제 마음대로 여행하는 게 아니라 호송돼
간단 말이오, 참호를 파는 데 쓸 사람들이오."
    8
  기차를 타고 사흘이 지났으나 아직도  모스크바에서 그다지 멀리 가지  못했다. 창밖은 여전히
겨울 풍경이었다. 선로, 들, 숲, 마을의 지붕 모든 것이 눈에 덮여 있었다.
  지바고 일행은 다행히 화물차의 윗단 왼쪽 한 구석을 차지했다. 그곳은 다른 사람들과 막혀 있
지는 않았으나 가족끼리 한군데를 차지하고, 천장 가까이엔 때묻은 길쭉한 창문이 나 있었다.
  토냐는 여태껏 화물을 타고 여행한 적은 없었다. 올라타자, 지바고는 부인을  윗단에 밀어 올리
고 겨우 움직이는 창문을 열어주었다. 나중에는 토냐 혼자서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화물차는 흡
사 바퀴를 단 헛간과 같았다. 토냐는 처음에 덜커덕하는 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 아닌지 걱
정되었다. 그러나 사흘 동안 기차가 속력이나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들이 앞 뒤 좌우로 흔들리고,
사흘 동안이나 자동식 장난감 북의 북채처럼 차바퀴가 덜컹거렸으나 아무 사고도 없었다. 그녀는
공연한 걱정을 했던 것이다.
  열차는 스물 세 개의 차량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지바고네는 14호 차량이었다.  너무 길어서
시골 역에 정거할 때는 앞이나 중앙이나 아니면 뒤의 몇 개의 차량만이 짧은 플랫폼에 닿을 뿐이
었다.
  수병들은 앞쪽에, 일반 승객은 중앙,  그리고 징집 노무자들은 뒤쪽  차량에 타고 있었다. 승객
수는 약 5백 명 정도였으며, 각기 다른 연령, 신분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군중이 차지한 여덟개 찻간은 잡다한 광경이었다. 옷을 잘 입은 부호와 페트로그라드의
부유한 변호사, 증권 중매인 등의 착취 계급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부,마루닦이,목욕탕 때밀리
꾼,타타프인,고물상,도망친 정신병자, 상인, 수도승 등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변호사와 증권 중매인이 외투를 벗어  던지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난로를  에워싸고는 짤막하고
굵직한 토막나무에 걸터앉아 쉴새 없이 지껄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잘 어울렸으며 태
연한 태도였다. 그들 뒤에는 세력 있는 친척들이  있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매수하는 방법도 있었
다.
  그 밖의 사람들은 장화를 신고 소매가 긴 외투 단추를 끌러 놓고 있는 사람, 맨발에다 긴 셔츠
를 바지 위로 축 늘어뜨린 사람, 수염을 기르고 있는  사람이나 수염이 없는 사람들이 숨막힐 듯
찻간이 반쯤 열린 문간에 서서 옆기둥이나 통로에 못을 박아 놓은 널빤지에  기대어 연도에 보이
는 농부들과 마을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징집된 사람들에게 배당된 차량이 부족해서 일반
인 차량에까지 그들이 밀려 들어왔었다. 그런 사람들은 14호 차량에도 있었다.
    9
  기차가 역에 가까이 왔을 때마다 토냐는 천장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일어나서
는 약간 열린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며 혹시 내릴 필요가 있겠는지  알아보곤 했다. 역의 크기나
정차 예정 시간에 따라 유리하게 물물교환을 할 수 있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기차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는 바람에 그녀는 졸다가  정신이 들었다. 흔들
리며 기차가 지나가는 연결 지점의 숫자로 미루어보아 꽤 튼 역으로 짐작되어 오래 정차하리라고
생각되었다.
  토냐는 눈을 비비며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짐 꾸러미 속을 휘저어 수탉과  말발굽과 바퀴 등을
수놓은 타월 한 장을 끄집어냈다.
  그때 지바고도 잠을 깨고, 먼저 아래로 뛰어내려 아내를 부축하여 마루에 내려오게 했다. 신
호수 사무실과 신호등이 차창을 스쳐 지나가고 나무들이 환영이라도 하듯이 소복이 눈이 쌓인 가
지를 기차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기차가 정거하기 전부터 수병은  발자국도 나 있지 않은 눈 위
로 뛰어내려 역 모퉁이를 돌아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대개는 역 근처에서 농촌 여자들이 음식을
암거래하고 있었다.
  검은 제복과 나팔바지, 차양이 없는 모자에 팔락이는  리본 등이 달려가는 수병들 모습에 스피
드 감을 더해 주는 것  같았다. 마치 경주하고 있는 스키나  스케이트 선수에게 길을 비켜주듯이
사람들이 비켜 주었다.
  모퉁이를 돌면 가까운 농촌에서 온 시골 처녀나 아낙네들이 역 담벼락에 한  줄로 늘어서서 오
이, 치즈, 삶은 쇠고기를 담은 접시, 냅킨에 싼 따뜻하고 먹음직한 호밀 핫케이크 따위를 팔고 있
었다. 끝을 양피 외투에 밀어 넣은 숄로 머리를 감싼 여인들은 수병들의 농담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속으론 겁에 질려 있었다.  투기 행위나 암시장을 단속하는  부대는 대개 수병들로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골 여자들의 걱정은 곧 사라졌다. 기차가  서고 일반 승객이 군중에 뒤섞이자 거래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토냐는 어깨에 타월을 걸치고서 마치 세수하러 가듯이 역 뒤로 갔다. 장사 아낙네들이 몇 번이
나 그녀를 불러 물었다.
  "여보세요, 타월로 뭘 바꿀 거요?"
  그러나 토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남편과 함께 더 걸어갔다.
  줄의 맨 끝에 빨간 무늬의 검은 숄을 쓴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수놓은 타월을 보자 조심스럽
게 주위를 두루 살피고는 토냐 옆으로 다가와서 숨겼던 물건을 보이면서 열심히 속삭이는 것이었
다.
  "보세요. 이런 것 오래 보지 못했지요? 마음에 없어요? 너무 오래  생각하면 놓쳐요. 당신의 타
월과는 반 마리하고 바꿉시다. 어때요?"
  토냐는 마지막 얘기를 듣지 못했다. 무슨 반 마리인지 몰라서 되물었다.  시골 여자는 머리에서
꼬리 끝까지 통째로 구워서 둘로 자른 토끼 고기를 손에 들어 보이며 이 절반과 바꾸자는 것이었
다.
  "이 절반을 당신의 타월과 바꾸자는 거예요. 뭘 그렇게 들여다봐요?  개고기는 아녜요. 우리 주
인이 사냥꾼이라오, 틀림없는 토끼예요." 그녀가 되풀이했다.
  교환이 이루어졌다. 서로 자기가 이득을 봤다고 생각했다. 토냐는 불쌍한 시골 여인을 속이기나
한 것처럼 부끄러움을 느꼈고, 시골  여인은 자기대로 만족하게 생각하면서  물건을 다 팔아버린
친구를 불러서 마음이 변하기 전에 눈길을 재빨리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때 군중 속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한 노파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놈! 어디로 도망치는 거야? 돈 내라!  언제 줬어? 저 사기꾼 같은  놈, 불러도 돌아다보지도
않고 거기 섰거라! 여러분! 도둑놈 잡아요! 저놈 봐요. 저놈 잡아요!"    
  "어떤 놈이오?"
  "저놈이오. 수염 깎은 놈, 싱글벙글하는 놈 말이오!"
  "그래요, 그래, 그놈을 잡아줘요!"
  "팔꿈치를 기운 놈 말이오?"
  "그래요, 그래! 난 도둑맞았단 말예요!"
  "무엇을 훔쳤는데?"
  "저 사람이 우유와 만두를 산다면서 잔뜩 처먹고는 돈도 내지 않고 그대로 도망쳤다오. 그래서
할머니가 소리치고 있답니다."
  "그걸 왜 그냥 두지요, 잡지도 않구요?"
  "잡아요? 온몸에 탄띠를 감고 있는데, 그놈이 오히려 임자를 잡겠소."
    10
   14호 차량에도 징집 노무자 몇 사람이 타고 있었다. 호송병 보로뉴크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
다. 그 중 세 사람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한 사람은 페트로그라드 국영  주점의 출납 계원이었던
프로호르 프리툴리예프인데, 그는 찻간에서 출납계로 불리었다. 또 한 사람은 철물 상에서 일하던
열 여섯 살 난 소년 바샤 브르이킨이었다.  세 번째는 백발의 혁명적 협동조합주의자 코스트예드
아무르스키였는데, 이 사람은 혁명 전에도 줄곧 투옥되었으나 지금은 또 새로운 징역거리를 찾아
낸 것이었다.
  징집되었을 때 그들은 서로 생소한 얼굴이었으나 점차 가까이 사귀게 되었다. 출납계와 바샤는
같은 바트스킨 지방 출신이었다. 열차가 얼마 후 그들의 고향 마을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프리툴리예프는 말므이즈 읍의 건달이었고 머리를 짧게  깎은 곰보였으며 땅딸보였다. 회색 스
웨터는 땀에 절어 겨드랑이 밑이  검게 보였고, 마치 뚱뚱한 여자가  입은 블라우스처럼 몸에 꼭
끼었다.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돌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주근깨투성이 손에 붙은 사마귀를
피가 나서 곪을 때까지 긁으면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지난가을 어느 날 그는 네프스키 거리를 걸어가다가 리체이느이 거리  모퉁이에서 민경대에 걸
렸었다. 신분 증명서를 내보여야 했으나 4급 배급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발각되었다. 이것은 노동
자가 아닌 사람에게 발급한 배급표였으며 실제로 아무것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붙잡
혀서 같은 이유로 잡혀온 많은 사람들과 함께  유치장으로 호송되었다. 그의 일행은 먼젓번과 같
이 아르한겔리스크 전선에 참호를 파기 위해 호송될 예정이었으나 도중에서  방향을 바꾸어 모스
크바를 지나 동부로 보내지게 되었던 것이다.
  프리툴리예프는 전쟁 전에 루가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아내는 거기서  살고 있었다. 아
내는 풍문에 좋지 않은 소식을 듣고서 볼로그다로  뛰어갔었다. 그를 찾아서 석방시키려 했던 것
이다. 그러나 그의 일행은 볼로그다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노고는 허사가 되고 소식이 끊
기고 말았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프리툴리예프는 차구노바라는  여자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붙잡혔을 때는 그녀와 금방 작별하고 그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돌아서는
길이었다. 리체이느이 거리를 바라보니 사람들 속에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차구노
바는 몸집이 풍만한데다가 손이 아름다웠으며 머리를 굵직하게 묶고 있었다. 이따금 깊은 한숨을
쉬면서 머리채를 어깨에 내흔들었다. 그녀는 지금 프리툴리예프를 따라가려고 자원해서 호송대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다.
 프리툴리예프처럼 그렇게 못난 사내한테 여자가 반하다니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확실히 여자
들이 그에게 매달려 떨어지질 못했다. 좀 앞쪽  찻간에는 오그르이즈코바라는 그의 또 다른 여자
친구가 타고 있었다. 눈썹이 희고 깡마른 처녀였는데 용케도 기차에 탔었다.  차구노바는 이 처녀
를 '떠버리'니 '주전자 주둥이'니 하면서 악담을 했다. 연적  관계에 있는 이 두 여자는 서로 피해
다녔다. 오그르이즈코바는 절대 상대방의 찻간으로는 가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애인을 만나는
지는 수수께끼였다. 승객들이 다 밖으로 나와서 기관차의  연료를 보충하고 있을 때 멀리서 애인
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11
  바샤의 내력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아버지는 전사했다. 어머니는 바샤를 아저씨 댁에서 기술을
배우라고 페트로그라드로 보냈다.
  그의 삼촌은 아프락시느이에 철물 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지난겨울 어느 날 소비에트에서 알
아볼 일이 있다며 아저씨를 불러갔다. 그런데 그는  사무실 입구를 잘못 알고 노동징집위원회 사
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사무실 안에는 징집 노무자로 가득차 있었다. 잠시 후 적위군 병사들이 들
어와서는 그들을 둘러싸고 세묘노프스키 영내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볼로그
다 행 열차로 호송해버렸다.
  이 대량 체포 소식이 시내에 파다하게  전해지자 다음날 역에는 가족들이 작별  인사를 하려고
모여들었다. 바샤와 아주머니도 나갔다. 아저씨는 역에서 감시병에게 아내를 잠깐만 만날 수 있도
록 내보내 달라고 애걸했으나, 꼭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이는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아저씨
와 아주머니는 바샤를 인질로 할 것을 제의하게 되었다. 그  감시병이 지금 14호 찻간에 타고 있
는 보로뉴크였다. 보로뉴크가 동의하여 바샤를 인질로 끌고 들어가고 그의 아저씨를 내보냈다. 바
샤가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속았다는 것이 판명되자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던 바샤는 왈칵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보
로뉴크의 발밑에 몸을 내던지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며 놓아달라고 애걸했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
다. 보로뉴크가 끄덕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냉정해서가 아니라 동란기에는 특히 규율이 엄
했기 때문이었다. 감시병은 맡은 인원수에 대해 목숨을 걸고 책임을 져야  했다. 인원수는 점호로
써 확인된다. 그리하여 바샤는 노무대의 일원이 된 것이다.
  협동조합주의자 코스토예드는 제정시대에도 또 현정부 치하에서도 죄수들의 존경을  받으며 언
제나 변함없이 그들과 사이가 좋았다. 그는 바샤의 기구한 수난에 대하여 가끔 호송 대장과 담판
하기도 했으나, 대장은 터무니없는 착오였다고 시인은 하면서도 도착할 때까지는 바샤에 대한 사
건 조사가 수속상 어려운 일이라고 회피하고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면  힘을 써주겠노라고 약속
했다.
  바샤는 단정한 용모에 귀염성 있는 소년으로 마치 그림에서 보는 왕실의 시종  동자나 천사 같
았다. 그는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순진했다.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 바싹 다가앉아서  무릎 위에 두
손을 얹고 빤히 쳐다보며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바샤는 기쁨과 슬픔을 감출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얼굴 표정만 봐도 얘기의 내용을 알 수가 있었다.
    12
  지바고는 협동조합주의자 코스토예드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구석에 앉아서 크게 씩씩
거리면서 토끼 다리를 뜯고 있었다. 문틈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과 냉기를 피해 "어디서 바람이
분담?"하면서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다 겨우 바람 없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여기가 좋군." 그는
뼈다귀를 뜯고 나서 손가락을 빨아 깨끗이 하고는 손수건으로 닦고 나서 토냐에게 감사하다는 말
을 했다.
  "이 창문은 안 되겠소. 발라야겠군요. 그런데 먼저 하던 얘기로  돌아갑시다. 의사 선생, 당신의
생각은 틀렸어요. 토끼 고기는 맛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농민들이  부유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실례입니다만, 경솔한 생각입니다."
  "그럼 저 역들을 보십시오. 나무도 울타리도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 암시장들! 저 여
인들! 얼마나 좋습니까! 어디선가 생활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며  행복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
두가 다 비참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으로 설명은 충분하겠지요?"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당신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
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어디든 철길에서 1백 베르스타만 떨어진 곳에 가 보시오. 도처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있어요. 누구를 반대하는 가고 물어보았소? 적색이다 백색이다 할 것 없이 여하
튼 권력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농민들은 모든 권력의 적이며
자기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시겠지요. 그러나 그건  모르는 말씀입니다. 농민들
은 당신이나 나보다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답니다.
  혁명에 눈을 떴을 때, 농민들은 옛날부터 지녀온 오랜 꿈이 실현된다고  생각했지요. 그 꿈이란
그들이 완전히 독립되어 누구에게도 의무를 지지 않고 자기 땅에서 자기 손으로 일하는 것이었습
니다. 그런데 낡은 국가의 박해를 새 국가의 박해로 바꾸어  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
은 알게 되었어요. 혁명적 초국가라는 훨씬 더 가혹한 멍에가 씌워졌단 말입니다.
  농촌이 술렁이고 조용하지 못한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농민이 잘돼 나간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닙니다. 당신이 모르는 일이 얼마든지 있어요. 그리고 내가 보기엔 당신은 알려
고도 하지 않는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나는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일들을 굳이 알아서
골치를 썩혀야 한단 말입니까! 시대는 나를 고려에  넣지도 않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  나든
간에 다만 그것에 순응해야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왜 내가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말입니
까? 나의 생각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오늘날 러시아 어디에 현실이 있습니까?
내가 보기엔 현실은 지금 너무나도 위협을 받아서  숨어버린 것입니다. 나는 농민이 부유하고 잘
돼 나간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것이 착각이라면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살아 나가야 하며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그런데  난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가족이 있
지 않습니까."
  지바고는 손을 내저으며 코스토예드와의 논쟁의 마무리를 장인한테 맡기고 저만큼 침상의 끝에
가서 머리를 수그려 밑을 내려다보았다.
  프리툴리예프, 차구노바, 보로뉴크, 바샤네 사람이 얘기하고 있었다. 기차가 고향  역에 점점 가
까워지자 프리툴리예프는 자기 집 마을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말을 타고 갈 때에는 이 길로
가고, 걸어서 갈 때는 저 길로 간다고 하면서 그의 이야기는 자상했다. 귀에 익은 마을 이름이 나
올 때마다 바샤는 신나는 얘기나 듣듯이 눈을 반짝이면서 입속으로 되풀이했다.
  "수호이 브로드에서 내리나요?" 그는 너무나 흥분해서 목이 멘 소리로 물었다. "우리 고향 역이
군! 그래요! 그 다음은 부이스코예로 가는 거지요?"
  "그래, 다음이 부이스코예지."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부이스코예 마을,  알고 있어요. 거기서 한길을 오른편으로 돌아가
다가 다시 오른편으로 돌면 베레첸니크에 닿지요. 당신네는  강에서 왼쪽으로 가지요? 펠가 강을
아시죠? 그래요, 우리는 그 강을 따라가면 오른편 언덕에 강을 내려다보는 마을이 있어요. 그것이
우리 동네예요. 베레첸니크라는 마을, 언덕 위 가파른 곳이라서 눈이 빙빙 돌아 현기증이 날 정도
예요. 아래는 맷돌을 만드는 채석장이 있어요. 베레첸니크에는 우리 어머니가 계시고 또 누이동생
알렌카와 아리쉬카도... 우리 어머니는 차구노바 아주머니와 닮아서 아직 젊고 말쑥해요. 보로뉴쿠
아저씨! 보로뉴크 아저씨! 제발 부탁이에요...네! 부탁해요, 아저씨!"
  "뭐라구? 아저씨, 아저씨 하지 않아도 내가 아주머니가 아니란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래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냐? 내가 미쳤어? 너를 놓아주었다 간 나는 끝장이야. 아멘, 총살이란 말이야."
  차구노바는 바샤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창 밖을 내다보면서 묵묵히 있었다. 이따금 그
녀는 머리를 수그려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보같이 남들이 듣고 있는 데서 보로뉴크한테
할 소리가 아니예요. 걱정 말고 참아요. 잘 될 거니까."
    13
  열차가 중부 러시아 지역에서 동부로 향하고 있을 무렵 괴상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무장 폭
도들이 소란을 부렸던 지방을 지나 최근에 폭동이 진압된 마을들을 지나고 있었다.
  기차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자주 정거했고, 치안  순찰대가 승객의 신분 증명서와 짐을 조사했
다.
  한 번은 밤중에 정거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누구 한 사람 기웃거리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보지
도 않았다. 지바고는 무슨 사고가 난 줄 알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캄캄한 밤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기차는  역에서 중간쯤 되는 들판에 멈춰 서  있었다. 선로
양쪽에는 전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다른 승객들도 내려와서 눈 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녹이
고 있었다. 지바고가 물어보았더니, 별로 일이 생긴 것이 아니고 기관사가 이 근처는 위험하기 때
문에 먼저 선로차로 조사를 하지 않고서는 더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우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승객 대표가 기관사를 설득하기 위해 나갔다.  때에 따라서는 뭘 좀 쥐어주어야 했다.  수병도 한
몫 끼여들고 있어서 잘될 것이라고 했다.
  굴뚝에서 불꽃이 오르고 화통 안에서 석탄이 우글거리며 타오르는 불빛에  마치 횃불을 밝혀놓
은 듯이 때때로 기차의 앞부분의  눈이 밝게 반짝였다. 몇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기관차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기관사로 보이는 앞장선 그림자가 기관차 끝머리까지 가더니 완충기를 뛰어넘어 마치 땅속으로
꺼져 들어간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뒤쫓아가던 수병도 똑같이 공중에 떠올랐다가 사라져버렸다.
  지바고와 몇 사람이 호기심에서 그리로 가 보았다.
  완충기 앞에 뻗어 있는 선로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기관사는 허리춤까지 눈에 파묻
혔다. 사냥 몰이꾼들처럼 쫓아가던 수병들이 둥글게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도 허리까지 눈에
파묻혀 있었다.
  "고맙소! 수병 동무들! 훌륭한 해연들이  총을 가지고 자기의 형제인 노동자를  쫓다니! 그것도
내가 기차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 때문에 말이오. 승객 동무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말해
주시오. 어떤 놈이 레일의 나사못을 빼 놓았는지 알 게 뭐요! 내가 내 목숨을 위해 그러는 줄  아
시오? 당신들이 무사하기를 염려해서 하는 일인데, 그 대접이 이것이란 말이오? 자, 쏘려면 쏴 보
시오. 승객 동무들, 증인이 돼 주시오. 난 달아나지 않습니다."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진정해요... 이 사람들은  그런 생각은 아닐  거요...누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나...정말
그럴 생각은 아닐 거요."
  또 다른 사람이 튼 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구말구, 가브랄카! 굽히질 말아요!"
  제일 먼저 눈을 헤치고 나온 수병은 얼굴이 납작하게 놀린 것같이 보일 정도로 머리통이 큰 붉
은 머리카락의 거인이었다. 그는 승객들을 향하여  보로뉴크와 같은 우크라이나 사투리를 써가면
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몇 마디 침착한 말이 기묘한 이 밤의 광경과 조화되었다.
  "용서하시오, 뭘 이렇게까지 떠들고 있습니까? 추워서 감기 드시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여러분.
바람이 찹니다. 자리로 돌아가서 몸을 녹이는 것이 어떨까요?"
  군중들은 차차 흩어져 갔다. 거인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기관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제 히스테리는 그만 부려요, 기관사 동무. 눈 속에서 나오시오. 어서 가봅시다."
    14
다음날에 기차는 탈선할까봐 두려워 아주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을 지나 기차는 폐허가 된 역에 멈춰 섰다.  검게 그을린 역사 전면에서 니즈니 켈리메스
역 이름을 겨우 알아볼 수가 있었다. 비단 화재의 흔적은 역 건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
었다.
  역 뒤편에는 눈으로 뒤덮인 인기척 없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도 화재를 당했던  것이다. 맨
끝의 지붕은 검게 그을렸고 다음 집은 한쪽 모퉁이의 기둥이 넘어져서 기울어 있었다. 부서진 썰
매, 녹슨 쇳조각, 산산이 부서진 가구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눈은 연기 때문에 더럽혀지고 군
데군데 얼어붙은 웅덩이에는 반쯤 타다 남은 목재가 밖으로 튀어나와 새까만 땅이 들여다보였다.
모든 것이 화재와 그 화재를 끄려고 애쓴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을과 역은 처음 인상처럼 전혀 사람의 자취가 없지는 않았다. 역장이  폐허 속에서 나타났다.
차장이 열차에서 뛰어 내려가더니 그를 위로했다.
  "전부 타 버렸군요?"
  "안녕하십니까. 잘 오셨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화재를 당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한 일이 있었
답니다."
  "알 수 없군요."
  "모르는 것이 좋을 거예요."
  "스트렐리니코프 말인가요?"
  "바로 그 사람이오."
  "왜요, 당신들이 무엇을 했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웃 때문에 함께 당하게 되었답니다.  저 마을이 보입니까? 니즈
니 켈리메스는 우스치 냄지 지구에 있는데, 다 그들의 탓이랍니다."
  "무슨 죄가 있다구?"
  "일곱 가지 큰 죄목이지요. 첫째는 빈농위원회를 해산시킨 것,  둘째는 적위군에 말을 보급하는
것을 거절한 죄인데, 그놈들 전보가 타타르 기병이었고, 세  번째는 동원령에 항거한 것, 뭐 이런
죄목입니다."
  "그랬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포 사격을 받았나요?"
  "그야 물론이지요."
  "장갑 열차로부터?"
  "물론."
  "그것 참 안됐습니다. 동정합니다. 하긴 우리들이 알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지나간 얘깁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정보도 또한 당신들에겐 반가운 것이 못 되
겠어요. 당신들은 여기서 이삼 일 더 정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농담 마시오! 전선으로 보충병을 수송중입니다. 한시도 더 지체할 수 없어요."
  "농담이 아니예요. 꼭 한 주일 동안 눈보라가 계속돼서 이 선로에는 눈이 쌓여버렸습니다. 눈을
치울 사람도 없어요. 마을 사람의 반수는 도망갔답니다. 남은 사람한테 시켜야  하는데 손이 부족
합니다."
  "제기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서든지 눈을 치워야 하지요."
  "눈은 깊은가요?"
  "그다지 깊지는 않습니다. 제일 나쁜 곳은 여기서 3킬로미터쯤 되는  곳이 어렵습니다. 그 저쪽
은 숲이 있어서 선로에는 눈이 그렇게 많이 쌓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쪽은 들판이 돼서 바람에
조금은 날려갔지요."
  "제기랄, 골칫덩이로군! 승객을 모두 동원합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수병과 적위군의 군인은 쓸 수 없지만 징집 노무자와 그 밖의 승객을 합치면 7백명 정도는 될
겁니다."
  "됐습니다. 삽을 얻는 대로 곧 시작합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좀 부족하니 가까운 마을에
서 빌어오도록 하지요. 잘 될 거예요."
  "큰일인데, 해 내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군대가 많다면 도시도 점령하는데. 선로도 길지 않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15
  철길은 눈을 치우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지바고의 온 가족, 뉴사까지 참석했다. 이 사흘 동
안 이 여행 중에서 제일 즐거운 날이었다.
  주위의 풍경은 차분하여 무슨 비밀이라도 간직한 것 같았으며 푸가초프  반란에 대한 푸쉬킨의
이야기와 아크사코프가 묘사한 고장을  연상케 했다. 불타고 난 자리가 한층 더 신비로운 분위기
를 보이고 있었다. 남아 있는 마을 사람들은 조심성이 많았다. 스파이가  두려워서 여객을 가까이
하지 않고 그들끼리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제설 작업에 동원된 사람은 몇 개 반으로  나뉘어서, 징집 노무자는 일반 민간인과는 격리되어
있었다. 무장한 병사들이 각 작업반을 감시했다.
  각 작업반이 동시에 몇 군데서 눈을 치웠다. 눈 더미가  각 반의 접촉을 차단하고 작업이 끝나
는 최후의 순간가지 그 눈 더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작업하는 사람들은 온종일 밖에서 지내고 다만 잠을  자기 위해 돌아왔다. 맑은 날씨였으나 몹
시 추웠다. 삽이 부족하여 작업 시간은 짧게, 자주 교대하곤 했다.
  지바고가 맡은 노선 근처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동쪽에 보이는 들판은 계곡으로 비스듬
히 뻗어 내렸고, 멀리까지 서서히 뻗으며 기복을 이루고 있었다.
  언덕 위에는 풍설에 시달린 한 채의 외딴집이  있었다. 그 주위의 수목들은 한여름이면 울창하
게 우거질 것 같았으나, 지금은 흰 성에가 레이스처럼 방풍구실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은 여러 가지 지형을 고르게 그리고 둥글게 만들었으나 개울 바닥의 굴곡을  완전히 덮을 수
는 없었다. 봄이 되면 철둑 선로 밑의 육교로 흘러내리겠지만, 지금은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쓴 어
린애처럼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저 언덕 위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을까? 지바고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토지위원회에 접수
되어 빈집으로 폐허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이때까지 살던 사람은 어찌되었을까? 외
국으로 도망친 것일까? 아니면 농민들한테 죽었을까?  혹은 또 덕망이 있어서 그  고을에서 무슨
기술 전문가로 있게 된 것일까?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스트렐리니코프가 그대로  두었을까? 그렇
지 않으면 부농과 운명을 같이했을까?
  언덕 위의 집은 지바고의 호기심을  돋우었으나 슬픈 침묵만 지킬  따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무엇을 함부로 물을 수도 없고, 물어도 대꾸해 주지도 않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태양만이 눈부신
햇빛을 새하얀 눈 위에 뿌리고 있었다. 삽날이 아름답게 그리고 부드럽게 눈의 표면을 베고 들어
갔다. 한 삽 한 삽 퍼낼 때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맑은 무지갯빛을 던졌다. 어렸을  때 집 뜰 안
에서 털실 모자를 내려쓰고 검은 양털 외투의 곱슬거리는 털이 엉긴 구멍에 후크를 잠그고, 반짝
이는 눈으로 네모난 피라밋이나 슈크림 과자를 만들고 또 요새와 동굴을 만들어  놀던 생각이 났
다. 아, 그때의 생활은 얼마나 달콤하고 얼마나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가!
  그러나 이 사흘 동안의 바깥 생활도 얼마나  만족스러운 인상을 주었는지 모른다. 별다른 이유
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밤이 되면 작업하러 나갔던 사람들에게  갓 구워 낸 따뜻한 빵을 배급했
다. 어디서 가져오는지 또 누구의 명령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맛있는 까칠까칠한 빵 껍질은, 위쪽
은 반질거렸고 옆은 갈라졌으며 밑쪽은 숯불에 구워 낸 자국이 있었다.
    16
  눈 덮인 산으로 등산해서 잠시 머물렀던 대피소에 애착을 느끼듯이  사람들은 폐허가 되어버린
역에 애착을 느끼는 것이었다. 타 버린 형체와 장소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태양이 과거에 충실하려고 언제나처럼 창문 밖의 해묵은 자작나무 뒤로  떨어질 무렵에 사람들
은 불탄 자리로 모두 되돌아오곤 했다.
  바로 그곳은 벽이 방안으로 무너져 있었으나 창문을 향하고 있는 모퉁이는 그대로였으며, 커피
색의 벽종이와 동그란 바람구멍이 있는 타일 난로와 쇠줄에 묶인 뚜껑, 그리고 검은 액자에 놓여
벽에 걸어두었던 사무 용구의 목록표 같은 것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불타 덜어지듯 져 가는 석
양은 난로의 타일을 어루만지며 벽종이에 따스한 갈색 빛을 던지고, 여인의 숄처럼 벽 위에 자작
나무 그림자를 걸어 놓았다.
  건물 뒤 대합실의 불탄 자리에 못질한 문짝에는 아직도  고시문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2월 혁
명의 초기나 그 직전에 붙인 것 같았다.
  환자 승객에게 임시 약품 및 붕대 지급을 하지 못함. 사정에 의하여 이 문은 폐쇄함
                                        -우스치 넴지 지구의무관
  제설한 선로 사이의 눈 더미를 마지막으로 치워 버리자 화살처럼 저 멀리로  달리고 있는 철길
이 쭉 내다보였다. 철길 양쪽에는 퍼낸 눈 더미가 허옇게  늘어서서 검푸른 숲의 벽과 경계를 만
들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먼 곳까지 삽을 든 사람들의 무리가 철길을 따라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다. 처음으
로 자기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은 어마어마한 그 수에 놀라는 것이었다.
    17
  시간이 늦어 해가 저물었으나 기차는  몇 시간 후에는 출발한다는  소문이었다. 지바고 부처는
다시 한 번 눈을 치운 선로의 전망을 즐기기 위해서  찻간에서 내렸다. 철둑에는 이제 아무도 없
었다. 그들은 먼 곳을 바라다보면서 잠시 서 있다가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는 찻간으로 되돌아왔
다.
  돌아오는 도중에 여자 둘이서 말다툼하는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오그르이즈코바와 차
구노바의 목소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열차 앞쪽에서 뒤로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으나,
그들은 역 쪽에서 지바고 부처보다 앞서거나 혹은 뒤떨어지면서 나란히 가는 적은 없었다.
  두 여자는 몹시 흥분해 있었으나  차츰 힘이 다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고함
소리로 높아졌다가는 속삭이듯 낮아지는 것으로 보아 발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고 쉴새없이
눈구덩이로 넘어지는 것 같았다. 차구노바가 오그르이즈코바를  쫓고 상대를 잡을 때마다 주먹으
로 때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연적한테 심한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음성이
남성의 거칠고 거슬리는 욕설보다도 오히려 더 추악하고 상스럽게 들렸다.
  "이 게으름뱅이 년아. 더러운 창부년." 차구노바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언제  봐도 히히
덕거리며 요망스런 년, 우리 바보  영감으로 부족해서 젖비린내 나는  애한테까지 추파를 던지는
거냐!"
  "그래, 바샤도 네 남편이냐?"
  "뭐라고? 다시 한 번 지껄여보라구! 더러운 페스트야! 까불면 죽여버린다!"
  "손대지 말라구.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널 죽이고 싶단 말이야. 이 더러운 색골, 암내나는 고양이, 뻔뻔스러운 암캐!"
  "그래, 너 같은 대단한 귀부인에  비하면 나는 암코양이나 암캐밖엔 못  되겠지. 그렇지만 너는
시궁창에서 나서 하수구로 시집가 쥐새끼를 배고 고슴도치를  낳는 귀부인이란 말이지... 사람 살
려요!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불쌍한 사람 살려 주세요!"
  "빨리 갑시다." 토냐는 남편을 재촉했다.  "메스꺼워서 더 들을 수  없어요. 무슨 일이 날  거예
요."
    18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었다. 날씨도, 경치도 다  변했다. 벌판은 끝이 나고 선로는 기복
이 샘해지면서 산악지대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줄곧  불어오던 북풍이 잠잠해지고 페치카에서 불
어오는 것 같은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산의 경사면을 따라 낭떠러지에는 숲이 우거지고  철길이 숲을 지난 때 기차는  급경사를 오르
고, 숲이 깊은 곳에서부터는 다시 가파른 경사를 내려가야 했다. 기차는 앞장을 서서 손님을 인도
하는 늙은 산림 간수처럼 기어가듯 겨우겨우 숲속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돌
리면서 시선이 미치는 곳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볼 만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숲은 아직도 편안한 겨울잠에 깊이 빠져  있었다. 겨우 여
기저기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답답한 껍데기를 벗어버리려는 듯이 가지의 잔설을 털어 버리고
있었다.
  지바고는 잠에 취해 있었다. 이 며칠 동안 그는 침상에 누운 채 지내고 있었으며, 자고 있지 않
을 때는 명상에 잠기거나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별로 들을 만한 이야깃거
리도 없었다.
    19
  자바고가 실컷 잠자고 있는 동안에 어느덧 봄이  찾아와 온 땅 위에 내린 엄청난  눈을 녹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바고가 집을 떠나던 날에 내렸던 눈을 녹이고, 그후 우스치 넴지에서 사흘 동
안 철길에서 치웠던 한없이 길고 두껍게 쌓인 눈을 녹이고 있었다.
  눈은 우선 속으로부터 남몰래 조용히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작업이 반쯤 되어 갈
무렵에는 이미 그것을 더 감출  수가 없게 되어 기적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밑에서
물이 콸콸 흘러나온다. 산림은 그 알 수 없는 깊은  속으로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면 모든 것에 눈
이 뜨이게 된다.
  물은 어디서나 제멋대로 흐르며 놀고  있었다. 바위 밑으로 흘러서  모든 웅덩이에 넘쳐흐르고
또 퍼져 간다. 물은 숲속을 소리내어 흐르면서 안개를 일으켜 증발하는가 하면, 수목 사이를 흘러
길을 막고 있는 눈 속에 스며들며 넓은 땅 위로 재빨리 달려가 언덕에서 몸을  내던져 오색의 영
롱한 물안개를 그린다. 땅은 축축이 젖어든다. 아찔하게 좁은 곳에 자리잡은  늙은 소나무가 구름
에서 물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수염에 붙은 맥주의  흰 거품처럼 물은 거품을 일으켜 소나무뿌리
에 하얗게 말라붙는다.
  봄에 취하고 그 향기에 아찔한  하늘이 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솜털구름이  양쪽 끝은 낮게 숲
위로 드리우고, 그 구름에서 따뜻한 흙과 땀 냄새를 풍기는  비가 땅위로 마지막 얼음의 검은 갑
옷을 씻으면서 쏟아졌다.
  지바고는 잠을 깨면서 지지개를 켜고 한 족 팔꿈치를 짚으며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며 귀를 기
울이는 것이었다.
    20
  광산 지대로 가까워지면서 주민들의 수는 차츰 많이  보였고, 기차가 정거하는 역도 자주 있었
다. 작은 역에서 타고 내리는 승객들도 많아졌다. 자리를 잡고 한잠 자려는 사람들 대신에 가까운
거리를 여행하는 사람은 문가에나 중간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자기들끼리 지방 문제를 낮
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잠도 자질 않았다.
  지난 사흘 동안의 이런 승객들이 말하는 눈치로  보아 백위군이 우세한 상태이며, 유라친은 이
미 점령되어 있거나 점령중인 것을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이름을 잘못 알았거나 아니면 옛
친구의 이름과 같은지 몰라도,  멜류제예보에서 헤어진 갈리울린이란  사람이 백위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족에게는 쓸데없는 걱정이 되지 않도록 이 확실치 않은 소문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었
다.
    21
  한밤중이 지나서 지바고는 왠지 행복감에 젖어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행복감은 그의 꿈을 깨울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기차는 멈춰 서고 있었다. 정거장은 백야의 희끄무레한 어둠에 잠겼다. 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걷잡을 수 없는 강력한 것이 활짝 트인 광경을 암시하고 있었다.
정거장은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면서  그림자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찻간을  지나 플랫폼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전쟁 전처럼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지바고는 흐뭇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난데없이  고함 소리와 소란한 발자국 소리로 플랫폼이
떠들썩했다. 또 가까운 곳에 폭포가 있었다. 폭포는 상쾌하고 자유로운 입김으로 백야의 광막함을
더해 주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가 그의 꿈에 행복감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끊임없는 물소리는
모든 소리를 억누르고 고요한 환각을 느끼게 했다.
  폭포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의 편안과 자극을  받으면서 지바고는 깊이 잠들고 있었다. 그
의 침상 밑에서는 두 사람이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 좀 잠잠해졌나? 그들은 아직도 집어치우지 않았나?"
  "상인들 얘긴가?"
  "그래, 그 양곡 상인들 말일세."
  "조용해졌어. 참 온순한 놈들이지. 놈들 중에서 몇 놈만 벌금을 물게 하니까 잠잠해졌어."
  "너의 동네에서는 얼마냐?"
  "4만 정도라면 참새 눈물이지."
  "4루블 리가 아니라, 4만 후드란 말이야."
  "그건 대단한걸."
  "4만 푸드의 최상급 밀가루라니."
  "생각해봐. 별로 놀랄 것도  없어. 땅이 아주 비옥한데다  곡물의 중심지란 말이야. 여기서부터
르인바 강을 따라 유라친까지는 마을마다 곡물 창고가 곳곳에 있다네. 쉐르스토비프의 형제나 페
레까트치코프 형제는 다 큰 중간 상인이 아닌가!"
  "큰소리 내지 말아. 사람들이 깨겠네."
  "그래." 그는 하품을 했다.
  "한잠 청할까? 움직이기 시작하는가봐."
  그러나 기차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른 기차가  뒤에서 달려와서 귀가 찢어질 만큼 요란한
소리를 냈다. 폭포의 물소리가 사라져버렸다.  옆 노선을 구식 급행 열차가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으르렁거리고, 지적을 울리면서 차 후미의 등불만 간들거리며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다시 그들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틀렸어. 곧 떠나기는 글렀어."
  "그래 이내 떠나지는 않겠군.:
  "저건 장갑 급행열차야. 스트렐리니코프일걸세."
  "그럴 거야."
  "반혁명에 대해선 그는 맹수나 같다구."
  "그가 갈레예프를 쫓고 있는 중일 거야."
  "그건 또 누군데?"
  "아따만 갈레예프 말일세. 체코인의 엄호 부대를 이끌고 유라친 밖에 있다네."
  "듣지 못한 이름이야."
  "갈릴레예프 공작이라고 하던데. 난 그 이름을 똑똑히는 기억하지 못하네."
  "그런 이름의 공작은 없어요. 알리 쿠리반이겠지. 자넨 혼동하고 있는 게로군."
  "그럴지도 몰라."
  "쿠리반이겠군."
    22
  새벽녘에 지바고는 다시 눈을 떴다. 또 그는 무슨 즐거운 꿈을 꿨었다. 넘치는 행복과 해방감에
들떠 있었다. 기차는 여전히 멈춰 서 있었다. 그대로 그 정거장인지 또 다른 정거장인지 알 수 없
었으나 다시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폭포인지는 몰라도 먼저와 같은 폭포라고만 느껴졌다.
  이윽고 그는 다시 잠들기 시작했다. 깊이 잠들면서  뛰어 다니는 발소리와 떠들썩한 소음을 어
렴풋이 들었다. 코스토예드가 호송 대장과 다투고 있었다. 서로 큰소리를 질러댔다.
  공기는 전보다 더 상쾌했다. 어딘지 모르게 새로운 입김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이때까지 없었
던 신기한 것. 봄다운, 거무스레 흰, 얄팍하고 아롱거리는 것. 축축한 진눈깨비가  땅에 내리며 검
게 물들이는 5월의 눈송이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투명하고 거무스름하고 그리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것이었다. '들 벚꽃이구나!'하고 지바고는 꿈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23
  다음날 아침 토냐가 말했다.
  "정말 당신은 변했어요. 마치 모순덩어리 같아요.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새벽까지 한잠도 못 이
루시던 양반이 그 소동도 아랑곳없이 주무시다니. 아무리 깨워도  소용없었지요. 놀라운 일이었어
요! 프리툴리예프와 바샤가 도망쳤어요! 그리고 차구노바와 오그르이즈코바도  함께! 꿈에도 생각
지 못했어요! 좀 기다리세요. 그것뿐 아내예요. 보로뉴크도 도망쳤어요. 자, 들어보세요. 그들이 어
떻게 도망쳤는지, 함께 갔는지, 따로 갔는지, 또 누가 먼저 도망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보로뉴크
는 다른 친구가 없어진 것을 알자 자기 생명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도망친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된 거지요?
  모두 자유 의사에 의해서 사라진 걸까요?  그렇지 않으면 누구한테 당한 것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여자들을 의심한다면 차구노바가 혹시 오그르이즈토바를 죽인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일지도 몰라. 전혀 알 수  없어요. 호송 대장은 미치광이가 돼서 찻간을  돌아다니고 있어
요. '기차를 출발시켜선 안 돼. 죄수를 찾을 때까지는 조금도 움직이지 말 것. 법에 의하여 명령한
다.' 그러니까 사령관은 소리를 지르며 '나는  전선에 보충병을 수송하고 있는 거야.  너희들 같은
건 알바 아니야. 무슨 소릴 하고 있어!' 그래서 두 사람은 코스토예드한테 갔어요. '당신은 협동주
의자이고 교육을 받는 사람인데 1개 병사인 무지한 사람이 철없는 짓을 하고 있는데도 가만히 보
고만 있었단 말이오! 무슨 나로드니크가 그렇소!' 그러니까  코스토예드는 '그거 재미있는 말이오.
죄수가 그래 경비병을 감시해야 한다는 뜻이군. 그렇다면 암탉이 울겠소.'  하고 대꾸했어요. 나는
당신을 마구 흔들어 깨웠어요. '여보, 일어나세요. 도망자가 생겼어요.' 그러나 당신은 조금도 대답
이 없더군요. 아마 귓전에서 대포를 쏴도 듣지  못했을 거예요...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지요...보세
요. 여보, 경치가 참 아름답지요!"
  창문 틈새로 끝없이 넘실거리는 봄의  홍수가 넓은 들판에 한눈으로  보였다. 어디선지 강물이
넘쳐서 물이 철둑 밑까지 와 있었다. 침상에서 바라다 보이는 좁다란 시야는 기차가 마치 물위로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 부드러운 수면이 푸른 줄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곳을 제외한 수면에는 따뜻한
아침 햇빛이 파이 빵을 구울 때 칠하는  녹은 버터와도 같은 매끄럽고 기름기 있는  빛을 던지고
있었다.
  이 끝없는 범람에 흰 구름이 숲과 함께 물 속에 잠겨 있었다.  
  홍수의 복판에는 길쭉한 땅덩이가 보이고, 수면에  비치는 그림자가 이중으로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땅과 하늘 사이에 떠 있었다.
  "저것 봐! 오리 떼야." 그로메토 교수가 외쳤다.
  "어디요?"
  "저기 섬 있는데. 더 오른쪽. 저런! 날아가 버렸군. 우리가 그것들을 놀라게 했나?"
  "아, 이제 알겠어요." 지바고가 말했다. "저 장인한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중에 하기로 하
지요... 징집 노동자와 여자들은 잘했어요. 살인 같은 건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물처럼 속박이 싫
었던 거예요."
    24
  북국의 백야는 끝나고 있었다. 산과 잡목 숲  그리고 골짜기가 마치 가공적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은 인상을 주면서 뚜렷이 떠올랐다.
  들벚꽃이 여기저기 조금 피어 있는 숲은 금방 나무 잎사귀가  돋아 나오고 있었다. 숲은 산 절
벽 아래 계곡 사이에 약간 있었다.
  폭포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잡목 숲 저쪽 골짜기 끝에서만 바라다 볼 수 있었다. 바
샤는 폭포를 바라보고 그 경치를 즐기면서 두려움을 느껴서인지 아주 지쳐 버렸다.
  이 부근에는 폭포를 따를 만한 다른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폭포는 주위의 모든 것을 위압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생명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생물과도 같이 그 고장에서 조공을 받아들이는
용이나 마왕과도 같은 존재였다.
  폭포는 내려오면서 반쯤 높이에서 바위에 부딪쳐 두  갈래로 갈라진다. 기둥은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발이 미끄러져, 다시 서서 자세를 바로 잡는 형국이었다.
  바샤는 잡목 숲 땅 위에 양털 외투를 깔고 누었다. 날이  밝아 올 무렵에 새 한 마리가 묵직한
날개를 움직이며 산에서 날아와 숲 주위를 서서히 선회하면서 바샤가 있는 근처 소나무 꼭대기에
앉았다. 그는 새의 검푸른 목과 회색과 푸른색의  가슴팍에 정신이 팔려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론
쟈라고 우랄 지방에서 부르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윽고  일어나 외투를 집어 입고는 공터를 지
나 동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가세요, 아주머니. 아니, 꽤 추웠던 것 같군요! 이가 떨리는 소리가 들려요. 뭘 보고 그렇게 무
서워하지요? 자, 갑시다. 마을까지 가야 해요. 우릴 숨겨줄 거예요.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해치지 않아요. 이렇게 가다가는 굶어 죽기 꼭 알맞아요. 벌써 이틀 동안이나 아무것
도 먹지를 못했어요. 보로뉴크아저씨는 큰  소동을 쳤겠지요. 틀림없이 모두들 우릴  찾아 헤맸을
거예요. 자, 가요. 아주머니는 이틀 동안이나 한 마디도 말이 없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정
말 왜 그렇게 슬퍼하지요? 아주머니가 오그르이즈코바 아주머니를 기차에서 밀어  떨어뜨리지 않
았다는 것을 저는 알아요. 그저 옆에서 붙잡으려 한  것뿐이에요. 내가 봤어요. 그 아주머니와 프
리툴리예프 아저씨는 꼭 우리를 따라올 거예요. 그렇게 되면 또 일행이 될 수 있지 않아요? 그러
지 말고 좀 말해 봐요."
  차구노바는 일어나서 바샤의 손을 꼭 잡고 조용히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가요."
    25
  기차는 가파른 언덕길을 온 차체를 흔들어 삐걱거리면서 올라가고 있었다. 철둑 밑에는 싱싱한
관목이 무성한 숲이었다. 그 나무들의 높이는 열차의 높이만 했다. 그 밑은 들판이었고 금방 홍수
가 빠져나가서 풀밭에는 모래나 통나무가 흩어져 있었다. 상류 어딘가에 쌓아둔 통나무들이 홍수
에 밀려 내려온 것 같았다.
  제방 밑 어린 나무숲은 아직도 겨울과 같이  벌거숭이였다. 나무에는 새싹이 군데군데 맺혀 있
었으나 그것이 다른 부분과는 꼭 조화되지는 않았다. 그 새싹은 어떤 여분의 것, 어떤 혼란, 어쩌
면 더러운 나무를 부풀어오르게 하는 염증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혼란과 여분, 그리고 더러움은 생명의 신호인 것이다. 이미 나무들은  앞서가며 녹색 불꽃을
태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자작나무에 싹이 돋아나, 뾰족한 잎사귀의 가시 화살을 온몸에 받은 순교자의 모습
처럼 우뚝 서 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와니스의 원료가 되는 반짝이는 송진 냄새를 느끼게 했다.
  얼마 후 기차는 홍수에 흘러내린 통나무를 쌓았던 장소까지 다다랐다. 선로가 돌아가는 숲속에
서 나무를 벌채해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사방에 나무조각과 톱밥이 깔렸고 한가운데에 나무더
미가 있었다. 기관의 브레이크 소리가 들리고 기차는 크게 반원을 그리더니 얼마 후 등을 구부리
면서 언덕 위에 덜커덕 멈추고 말았다.
  화물차의 문이 활짝 열리고 타고 있던 승객들이 우루루 나왔다. 수병들만  앞간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잡일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이 공자의 나무는 기관차에 쓸 만한 장작이었기 때문에 큰 통나무를 적당히  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관차에 가지고 다니는 톱이 있었다. 이 톱을 원하는 두 사람에게 한 개씩 분배했다. 의
사와 그 장인한테도 톱이 지급되었다.
  병사들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문에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들은 단기 훈련을 말 끝마친 중년
노동자와 해군 사관학교를 갓 나온 소년 같은  사람들이 혼성된 기묘한 집단이었다. 해군 사병들
은 무슨 착오 때문에 그들과 함께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런 걱정도 없
이 나이 많은 병사들과 맞장구를  치면서 농담을 하거나 바보 같은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시련의 시기가 가까워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을 따라와 농담을 하거나
웃음을 주고받았다. "이봐요, 할아버지, 난 게으름뱅이가 아니라오. 애기가 되어서 일 못 해요. 유
모가 말려서 말요."
  "여보, 스커트를 베겠네요. 감기 들겠어."
  "이봐, 색시, 숲에 가지 말구 내 마누라나 되라구."
    26
  숲속에는 여러 개의 발판이 십자 모양으로 나무를 묶어서 땅에 박혀 있었다. 지바고와 그의 장
인이 그 중 하나에 톱을 걸었다.
  봄은 아직 일러서 대지는 여섯 달 전 눈에 파묻혔던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눈  밑에 깔려 있
었다. 숲은 축축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으며, 지난해의 나뭇잎들이 수북히  쌓여 있어서 마치
누가 몇 년동안 모아 둔 편지며 계산서며  영수증 따위를 마구 찢어서 흩어놓은 채  버려둔 방안
같았다.
  "천천히 하시지요, 피곤해지시겠어요." 지바고는 장인에게 말하고 톱을 천천히 율동적으로 움직
였다. "좀 쉬는 게 어떨까요?"
  숲은 다른 톱질하는 소리에 메아리쳤다. 저 멀리 어디선가 첫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따금 티티새가 파리에서 먼지를 불어내듯 우는소리가  들렸다. 기관차가 내뿜는 증기에서는 육아
실 알콜 램프에 데우는 우윳병에서 나는 소리가 하늘 위로 사라졌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었지?" 장인이 물었다. "생각나는가? 섬 옆을 통과할 때 오리 떼가 날아
갔었지. 그때 자네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그랬지요. 어떻게 간단히 말씀드릴까요?  저는 그때, 우리의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지방 곳곳이 뒤끓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리고 도착했을  때는 어떤 사태
가 일어날지 알 수 없어요. 미리 얘기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
은 저희들의 신념에 대한 건 아닙니다. 봄의 숲속에서 우리의 신념을 5분 동안에 말할 수는 없어
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장인 어른과  나와 토냐, 그리고 많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요즘은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단지 그 의식하는 정도가 다를 뿐입
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일정한 사정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정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서로 낯을 붉히지 않아도 되고 또 서로 창피하게 생각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네 생각을 알았네. 잘 말해주었어. 그렇다면 내  의견을 말하지. 자네가 최초의 정부 포고문
이 실린 신문을 나한테 가져다주었던 그 눈보라 치던 밤이 생각나겠지? 정부의 포고문은 아주 강
경한 것이었어. 그 소박한 맛이 우리 마음을 끌게 되었어. 그러나 그러한 것은 입안자의 가슴에만
본래의 순수성이 있게 마련이야. 그것도 처음 공포한 날 단 하루뿐이지.  이튿날에는 정치의 궤변
은 그것을 싹바꿔놓고 말지. 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그들의 철학은 나와는 아무런 상
관이 없어요. 그들의 제도는 우리와는 적대적인 것이지. 나는 내가 모든  이러한 변동에 동의하느
냐는 질문을 받은 일은 없어요. 하지만 그들은 나를 믿어 왔고, 나 자신의 행동은 그것이 자유 의
사에 의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로 하여금 어떤 의무를 가지게 하였어.
  우리가 채소를 심기에 적당하게 도착하겠느냐고  토냐는 자주 묻고 있지만,  나는 우랄 지방의
지질도 풍토도 아무것도 몰라요. 여름이 너무 짧아서 무엇이든지 자랄 것 같지가 않군. 하지만 우
리는 채소를 가꾸기 위해서 우랄까지 멀리 가고 있는 것은 아닐세. 우리는 솔직하게 현실과 대결
해야 하니까. 우리의 목적은 전혀 다르지. 우리는 현대식으로 살아가려는 거야. 다시 말해서 크류
게르 할아버지의 재산과 공장 그리고 기계를 탕진하는 데 한  몫 끼어들려고 가는 거지. 우린 그
의 재산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남들과 똑같이 그  재산을 물처럼 써버리고 단돈
한 닢의 생활비를 얻기 위해서  수천 루불리를 써버리는 데 합세하러  가고 있어요. 만일 자네가
황금비를 뿌려준다 해도 나는 옛날과 같은 조건으로  땅을 도로 찾지는 않겠네. 그것은 발가벗고
다니거나 알파벳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거나 같단 말일세. 지금은 달라졌어. 러시아에서 사유 재
산의 시대는 이미 끝나버렸어. 우리 그로메코 집안은 한 세대 이전에 욕심을 잃고 말았어."
    27
  더위와 무더운 공기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살짝 침
상에서 내려와 찻간의 문을 열었다.
  끈끈하고 축축한 열기는 얼굴에 땅굴 속이 거미줄이 닿는 것 같았다.
  '안개로군. 내일은 몹시 덥겠어. 그래서 이렇게 숨이  답답하고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 같군.'
의사는 생각했다.
  의사는 화물차를 떠나기 전에 문가에 서서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기차는 차를 바꿔 타
는 아주 큰 정거장에서 멈춰 서고 있었다. 안개와 고요만이 깃들여 공허하고 허전한 느낌마저 감
돌고 있었다. 마치 기차가 길을 잃어 버림받은 것 같았다. 역의 제일 끝에 머물러 있는 것같이 역
의 건물과의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선로가  착잡하게 밀집되어 있었다. 구내의 저편에서 땅이
입을 크게 벌리고 역 전체를 삼켜버린다 해도 차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
할 것이다.
  멀리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두어 번 들려왔다.
  그의 뒤에서 음률적으로 물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옷을 물에 헹구는 소리가 아니면 흠뻑 젖
은 깃발이 바람결에 나부끼는 소리 같았다. 멀리 앞쪽에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전선에 있었던
경험이 있는 의사는 귀를 바싹 기울였다. 조용하게  메아리치며 길게 계속되는 소리를 듣고 나서
장거리포라고 생각했다.
  '틀림없는 대포 소리다. 전투 지구에 가까이 온 거야.'
  지바고는 머리를 저으면서 찻간에서 뛰어내렸다.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찻간으로부터
앞쪽으로 두 번째 찻간에서 기차가 끊겨져 있었다.  앞의 것은 기관차에 끌려서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 수병들이 어제 일부러 그렇게 위세를 부리고 있었군.' 의사는 생각했다. '도착하자마
자 전투에 투입될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게로군.' 선로를 넘어 역의 중심을 바라보려고  앞 차량을
돌았으나 총을 든 보초병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어디 가는 거요? 통행증을 봅시다!"
  "여기가 무슨 역이오?"
  "무슨 역이든... 당신은 뭣하는 사람이오?"
  "모스크바에서 온 의사요. 우리 가족은 이 기차에 타고 있어요. 이것이 신분 증명서요."
  "증명서가 무슨 소용이오. 이 어두운  데서 글자가 보이나. 안개를  봐요. 증명서 같은 건 보지
않아도 당신이 어떤 의사인지 다 알고 있어. 당신 같은 의사놈들이 우리한테 20인치 포를 쏴대고
있단 말이야. 죽기 전에 어서 돌아가라구."
  '사람을 잘못 알고 있군.' 지바고는  생각했다.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이 없겠어.  괜히 시끄럽기
전에 돌아가야 하겠다.' 그는 방향을 바꾸어 걸어갔다.
  이번에는 포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뒤는 동쪽이었다. 안개가 흐르는 속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어
서, 그것은 김이 서려 오르는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나체가 희멀겋게 보이는 것 같았다.
  지바고는 기차의 끝까지 가서 제일 뒤쪽 차량을 지나쳤다. 부드러운 모래에 발이 점점 깊이 빠
졌다.
  철벅철벅 물을 퉁기는 단조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급경사가 진땅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발을
멈추고 앞쪽 희미한 그림자에 눈이 갔다. 안개  때문인지 그 물체는 더 크게 보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순간 강 언덕에 있는 작은 배의 동체가 어둠 속에서 쑥 떠올랐다. 그는 넓은 강 언덕에
서 있었고, 강물은 어선의 뱃전과 강변의 선창가  널빤지에 잔물결을 출렁이며 천천히 흐르고 있
었다.
  "누구의 허가를 받고 여기를 서성거리는 거요?" 소총을 가진 다른 보초가 물었다.
  지바고는 이제 절대 질문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서도 불쑥 물었다.
  "이 강의 이름이 뭡니까?"
  보초는 대답 대신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다른 보초를 부르려다 말았다. 아까 만났던 보초가 가
만히 지바고를 뒤따라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두 보초병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생각할 것도 없어. 첫눈에 수상했다니까. '여기가 무슨 역이냐? 이것이 무슨 강인가?' 물으면서
뭘 속이고 있지! 당장 끌고 가서 한방 먹여줄까? 아니면 다시 기차 있는 데로 끌고 갈까?"
  "기차로 데려가지. 대장이 뭐라고 할지 알아 봐야지. 너의 신분 증명서를 보자."
두 번째 보초가 소리질렀다. 서류뭉치를 빼앗아 쥐고 누군가를 불렀다.
  "이놈을 감시해주게."
  보초 둘은 역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잘 몰랐으나 이 세  번째 사람은 어부였다. 그는 강가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지바고 곁으로 다가와서는 과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말했다.
  "당신을 대장한테 끌고 간다는 것은 운이 좋았어요.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지는 마시오. 자기의 임무를 다하고 잇는 것뿐이니까.  지금은 민중의 시
대랍니다. 지금은 별로 신통치가 않지만 앞으론  잘돼 갈 겁니다. 그들은 사람을 잘못  알고 있어
요. 누굴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서 당신으로 그 사람으로 오인하고 있는 겁니다. '그놈이야, 노동자
의 적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잘못 알았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말하시오. 그놈들 멋대로 하게 해서는 안 되오. 그놈들은 미치광이처럼 정치와 결부시키는
데,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어리석은 짓이죠. 만일 같이 가자고 해도 가면 안 돼요. 대장을 만나
게 해달라고 하세요."
  지바고는 어부에게서, 강은 르인바라는 유명한 수로이며 강가의 역이 유라친 교외의 공업 지대
인 라즈빌리예 마을의 역이라는 것을 알았다. 유라친 2베르스타 정도 상류에 있으며 지금은 백위
군이 탈환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라즈빌리예에서는 최근 폭동이 일어나서 진압되긴 했으나 역 구역과 그 주변이 아주 조용한 것
은 주민들을 피난하도록 명령하고 엄중히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에 있는 몇 대의
기차는 사령부가 사용하고 있어서 군사 위원 스트렐리니코프의 특별 열차도 섞여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보초가 보고하러 간 곳이 바로 특별 열차였던 것이다.
  그들이 걸어간 방향에서 다른 경비병 한 사람이 걸어왔다. 그는 총의 개머리판을 땅에 질질 끌
면서 마치 술 취한 친구를 부축하듯 하여  걸어왔다. 이 경비병이 지바고를 군사위원한테로 데리
고 갔다.
    28
  두 대의 연결된 특등 차의 한쪽에서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경비병이 보초에게 암
호를 말하고는 지바고를 데리고 들어서자 웃음소리와 떠들던 소리가 뚝 끊겼다.
  경비병에게 연행되어 좁은 통로를 지나 중앙의 널찍한 찻간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고 아늑한 방
이었다. 깨끗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유명한 비당원 군사
전문가로서 이 지방의 자랑과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지바고는 그의 배경을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뜻밖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스트렐리니코프의 활동의 중심은 여기가 아니고  전선 사령부나 군사 작전지구  가까이에 있을
것 같았다. 여기는 그의 개인 거실, 사무실, 침실일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코르크의 마룻바닥에 부드러운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증기  목욕탕을 연사에 할
만큼 조용한 곳이었다.
  사무실은 열차의 중앙부에 있는 전의 식당차였다. 융단이 깔리고 책상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잠깐 기다리게."
  입구 책상에 앉은 젊은 장교가 말했다. 경비병은 복도 마룻바닥에 붙어 있는 철판에 총 개머리
판을 부딪쳐 철거덕 소리를 내며 나가버렸다. 그  후부터 지바고에게 주의를 쏟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출입구에서 바라보니 그의 증명서가 방안 구석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책상에는 나
이가 들어 보이는 제정 시대 대령 같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군의 통계 가사로서 무슨 통계 처리
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무슨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참고서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야전 지도를
대조하기도 하며 무엇을 오려 붙이기도 했다. 그는 창문을 모조리 둘러보고 나서 "오늘은 무덥겠
군"하는 폼이 마치 창문마다 다 조사한 후가 아니라면 결론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투였다.
  전기 기술병이 마룻바닥을 기어다니면서 끊긴 전화선을  정비하고 있었다. 기술병이 문 앞쪽까
지 이르렀을 때 젊은 장교가 일어서며 비켜주었다. 옆 책상에는 군용 가죽 상의를 입은 타자수가
타자기와 씨름하고 있었다. 타자기가 고장난 모양이었다. 젊은 장교가  옆으로 가서 들여다보면서
고장 원인을 찾고 있는 사이에 기술병은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조사하고 있었다. 통계 기사도
일어나서 그들 가까이 갔다. 온 방안 사람들이 타자기 하나에 매달렸다.
  지바고는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자들이 나의 운명을 나
이상으로 잘 알고 있을 텐데, 죽음의 위협에 직면한 사람의 눈앞에서 이렇게 하찮은 일에 열중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누가 그걸 안단 말인가?' 그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태연할  수가 있을까? 총
알이 날아오고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고 있는  판에 태연히 날씨가 무덥겠다는 걱정을  하고 있으
니. 그것도 전투의 열기가 아니라 기온을  말이다. 이들은 아마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해서 이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29
  창문에서는 철길과 언덕 좀 위에 있는 정거장과 라즈빌리예의 교외 지구가 내다보였다.
  아무 칠도 하지 않은 세 개의 나무 계단이 플랫폼과  역 건물을 연결하고 있었다. 선로 끝에는
낡은 기관차의 고철이 무덤처럼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탄수차가 달려 있지 않은 기관차가 많
은 고장 차량 사이에서 마치 장화의 윗부분이나  찻잔 모양으로 생긴 굴뚝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이 기관차의 무덤과 위쪽 인간의 묘지, 노선 위에 이어진  레일, 녹슨 양철 지붕, 교외 상점의 간
판 등이 한데 어울려 아침의 온기가 허옇게 타 붙은 하늘 아래서 한 폭의  황폐하고 낡은 정경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모스크바에만 살았기 때문에 지바고는 다른 도시에 많은 상점 간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에서
글자를 분간할 수 있을 만큼 아주 큰 것이었다. 간판은  기울어진 단층 건물의 창문을 가릴 만큼
낮게 걸려 있어서 납작한 건물은 마치 아버지의 모자를 쓴 마을 아이의 얼굴처럼 가려져 있었다.
  안개는 서쪽으로부터 차차 개기 시작하여 동쪽에 지금 남아 있는 안개는 무대의 장막처럼 하늘
하늘 움직이면서 흩어져 가고 있었다.
  라즈빌리예로부터 3베르스타쯤 더 가서 언덕 위에 지방의 큰 도시가 있었다. 햇빛이 도시를 노
랗게 물들이고, 도시의 윤곽이 멀리서 단조롭게 보였다. 도시는 집과 집, 거리와 거리가 층층으로
되어 언덕에 들러붙어 보이고 맨 꼭대기 중앙에는 큰 교회당이 솟아 있어서  마치 싸구려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라친이다.' 지바고는 가슴이 설레었다.  '장모나 간호원 리라한테서 자주  들었던 고장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 도시를 바라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엔들 생각지 못한 일이 아닌가!'
  이때 군인들의 주의는 타자기로부터 창밖으로 쏠렸다. 지바고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포로의 한 떼거리가 호송되어 역의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그 중에 중학생 제복을 입고 머리에
부상을 입은 소년도 있었다. 응급처치는  받았으나 붕대에서 피가 스며  나오고 있는데다가 소년
자신이 자꾸 손으로 만져서 검게 땀 흘린 얼굴에 피가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는 행렬 맨 뒤의 두
병사 사이에 끼여 있었지만,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된 것은 그이  씩씩하고 귀여운 용모나 아주
나이 어린 반란의 패배를 애처롭게 생각하는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이상한
느낌을 준 것은 그 소년과 호송병들의 우스꽝스러운 동작이었다.
  소년은 지금도 학생모를 쓰고 있었다. 모자는 붕대를 감은 머리에서 자꾸 미끄러져 내려왔으나,
벗어서 손에 들면 되는 것을 벗어질 때마다 붕대나 상처에도 불고하고 다시 집어쓰곤 했다. 그리
고 호송병들은 소년이 하고 있는 동작을 열심히 돕고 있었다.
  이 상식에 벗어난 행동에서 지바고는 어떤 상징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는 뛰어나가서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말을 소년에게 던지고 싶은 충격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는 소년과 이 찻간 안의 사람
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인간의 구원은 형식을 충실히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형식
을 내동댕이치는 데 있다고.
  지가보는 얼굴을 돌렸다. 그때 스트렐리니코프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방 한가운데 섰다.
  의사로서 많은 사람을 대해 온 지바고가  여태까지 이 사나이만큼 뚜렷한 개성을  지닌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들 두 사람의 인생 행로가 교차하여 여태까지  서로 모르고 지
내온 것은 대체 무슨 조화였을까?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사나이가  의지의 화신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완전할 정도로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의 존재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모든 것을 더없이 정확
하고 완벽한 것 같았다. 균형 잡힌 단정한 머리, 성급한 걸음걸이, 긴 다리, 진흙투성이여야 할 텐
데도 잘 닦여진 장화, 구겨져 있어야 할 옷이 금방 다려 입은 것 같은 회색 빛의 말쑥한 군복 등
모든 것이 그럴싸했다.
  그의 명석한 머리와 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는 이 세상의 어떤  사태에서도 침착하리라는 인상을
풍겼다.
  지바고는 생각했다. 분명히 그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반드시 독창적
인 재능이 아니라도 좋다. 그의 모든 동작에서 엿볼 수  있는 그 재능은 어쩌면 모방의 재능인지
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누구든지 남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역사상의 영웅을 모방하고, 전선
이나 시가전에서 명성을 떨친 인물, 민중의 믿음을 모았던 인물, 아니면 탁월한 혁명 동지들을 모
방하고 있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낯선 사람을 보고, 놀라서 불쾌하게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예의바르게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부하에게 말했다.
  "다 함께 축하하세. 우린 놈들을 격퇴하였어. 이건 생명을 걸고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전쟁 놀이라도 하는 것 같군. 하기야 놈들도 우리와 같은 러시아인들이니까.  그들은 다만 그릇된
생각을 머리 속에 잔뜩 가지고 깨끗하게 청산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두들겨 준거지. 그
놈들의 사령관은 나의 오랜 친구인데 나보다 더 분명한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지. 그와 나는 한 집
에서 자랐고 예전엔 그의 신세도 많이 졌어. 그런데 나는 그를 강 너머나 더 멀리 격퇴하고 나서
기뻐하니 말이야! 구리얀! 빨리 연결해주게. 전화를 해야 돼. 전보나  전령 만으론 안되겠어. 오늘
은 꽤 무더운걸. 그래도 한 시간은 잤을 거야. 아, 그렇지..."그는 의사의 일 때문에 일어났다는 걸
상기하고 지바고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스트렐리니코프는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천만에! 하나도 닮지 않
았어. 바보들 같으니!'
  그는 웃으며 지바고에게 말했다.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당신을 다른 사람과 잘못 알았던 것 같습니다.  보초병들이 실수한 것이
니 용서하시오. 돌아가도 좋습니다. 이  동무의 서류는 어디 있어?  아, 여기 있군. 어디  좀 봅시
다...지바고 ...지바고, 의사 지바고... 모스크바... 내 방으로 잠깐  가실까요? 여긴 사무실입니다. 내
방은 옆이구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30
  도대체 스트렐리니코프란 어떤 인물일까?
  그가 지금의 지위까지 올라가 그것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당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널리 알려진 인물도 아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자
곧 지방에 가서 학교 교사가 되었다. 전쟁 중에는 포로가 되어 실종으로 보고되었고 전사한 것으
로 되어 있었다. 그가 독일 군에게서 도망쳐 돌아온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를 추천하고 보증한
사람은 진보적인 정치 사상을 가진 철도  종업원 치베르진이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소년 시절에
치베르진네 집에서 살았다. 임명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스트렐리니코프에  탄복하고 있었다. 그
당시만큼 터무니없는 미사 여구나 극단적인 정치 견해가  판을 치는 시대에, 어느 누구보다도 분
방한 그의 혁명적 정열은 그것이 순진하기 때문에  돋보였다. 그의 열광은 여태까지의 그의 생활
의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스트렐리니코프는 당국의 신임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지난 수개월 동안의 그의 전투 기록에는 니즈니  켈리메스와 우스치 넴지의 작전, 식량 징발대
에 대한 무장 저항을 시도한 구바소프 농민 봉기의 진압,  그리고 메드베지 포임 역으로 가는 구
호 식량 열차를 약탈한 제 14보병 연대병사들의 토벌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투르카투예에서 폭
동을 일으키고 백위군에 투항한 '스첸까 라진르틴 우스의 반란을 진압했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는 적의 허점을 찌르고, 심문, 재판, 형 선고 등 재빠르고 엄격하게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그는 이 지방 전체의 징병 기피 경향을 완전히 막아내고 모병 기관을 훌륭히 재조직했었다. 그
결과는 징병이 철저하게 진척되어 적위군 징집 본부는 언제나 붐비고 있었다.
  북부에서 백위군의 최후의 압박이 강력해지고 정세가 어려웠을 시기에 그가 군사, 전략, 작전상
의 새로운 임무를 맞게 되었다. 그의 개입은 즉각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자기를 라스트렐리니코프가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 재생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노동자였으며 1905년 혁명에 참가하여 투옥되었었
다. 스트렐리니코프 자신은 혁명 운동에 참가한 경험은 없었다. 그것은 첫째로  그가 나이가 어렸
고, 둘째로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청년은 부유한 집안
자식보다는 고등 교육을 높이 평가하고 더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 운동에 말려들
지 않았다. 개학에서 깊은 교육을 쌓아 인문과학의  학위를 받은 다음 독학으로 과학과 수학까지
공부했었다.
  그는 병역을 면제받았으나 군대에 자원하여 임관했고,  전선에 나가서 포로가 외었으나 풍문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1917년에 탈주하여  귀국했던 것이다. 그는 두 가지 특
징과 두 가지 정열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명석한 두뇌와 논리적 사고력, 또  하나는 깊은 정신
적 순결과 정의감이었다. 또한 그는 정열가인 동시에 명예를 존중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 세계를 개척할  만한 과학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지성에는 미지의
세계로의 대담한 비약 능력이 결핍되어  있었고, 논리적인 해석을 초월할  만한 통찰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가 훌륭하게 되려면 원칙적인 것 외에 그 원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음가짐도 필요할 것이
다. 사소한 행위에 의하여 훌륭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어릴 때부터 숭고한 동경을 가슴에 안고 이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엄격히 규
범을 지키면서 완벽을 향해 달리는 거대한 경기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자기의 세계관이 너무나 단순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불만을 안고, 인생을 왜곡하는 암흑의 세력과 맞싸워  인생의 챔피언이 되고
복수를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실망의 고배를 마시고 혁명에 의하여 무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31
  스트렐리니코프는 자기 사무실에 들어서자 다시 중얼거렸다. "지바고... 지바고... 상인이군. 아니
면 귀족... 그렇지, 모스크바의 의사... 바르이키노에 가는 도중이라... 이상한데. 왜 당신이 그런 벽
촌으로 가기 위해 모스크바를 떠날 생각을 했지요?"
  "그냥 조용하게 살 곳을 찾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래요? 매우 낭만적이시군요! 바르이키노라고 하셨지요? 나는 그  근처 일대를 대충 알고 있
어요. 이전에는 크류게르네 영지였지요. 당신은 그의 친척은 아니겠지요? 설마 크류게르의 상속인
은 아니겠지요?"
  "농담하시는군요. 그의 상속인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하긴 내 처가  그의 상속인이긴 하지
만..."
  "그것 보시오! 하지만 당신이 백위군에 향수를 느끼고 있다면 아마 실망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이미 그 지역을 소탕해 버렸으니까."
  "여전히 저를 희롱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또 당신은 의사입니다. 군의관이구요. 그리고 지금은 전쟁 중이에요. 내가 고려하는 것
은 오직 전쟁뿐입니다. 당신은 탈영병이란 말이오. 녹색군도 역시 숲속에 숨을 곳을 찾고 있어요.
당신과 똑같단 말입니다. 어떻게 변명하겠습니까?"
  "나는 두 번이나 부상해서 의병 제대한 사람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당신이 '소비에트 분자'이며 '동조자', '완전히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교육 인민위원회나 보건 인민위원회의 증명서를 나에게 제시할 순서가  아닐까요? 지금은
묵시록의 시대입니다. 최후의 심판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동조나'나  소비에트에 충성스러운 의사
선생님들의 시대가 아니라 검을 든 천사와 날개 달린 짐승의 시대란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까
당신을 석방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일단 약속한 것을 번복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기억해두시오, 이
번 만이라는 것을. 아무래도 당신과 나는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그때는 지금과는
다를 겁니다. 조심하시오."
  위협과 도전에도 지바고는 끄덕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겠습니다. 당신의 입장에서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한테 토론을 걸어온 문제는 내가 일생동안 상상 속의 비난자와 토론해온 것들입
니다. 따라서 내가 아직까지 거기에 대해 어떤 결론을 얻지 못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겁니다.
다만 여기서 지금 간단히 설명할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나를 석방시킬 생각이라면
이대로 물러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석방시키지 않겠다면 처분대로  하십시오. 나는 변명하
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 이야기는 전화 때문에 중단되었다. 전화선이 복구되었던 것이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수화기
를 집어들었다.
  "고맙네, 구리얀. 수고스럽지만 누가 지가보 동무를 기차까지 보내주게. 앞으로 이런 시시한 일
을 나한테까지 가져오지 않도록 라즈빌리예의 체카의 수송부를 부탁해."
  지바고가 떠나자 스트렐리니코프는 역에다 전화를 걸었다.
  "호송된 포로 중에 중학생이 있었지? 그래, 모자를 자꾸 다시 쓰던 녀석 말이야. 머리에 붕대를
감고. 보기 흉하지 않은가... 음, 음...필요하다면 치료해  주게...그렇구말구... 음식도 요구하면 주라
고. 그렇지. 그건 그렇고, 용건을 말하겠는데... 통화중이야... 전화를 끊지 마. 제기랄, 혼선됐군. 이
거 봐, 구리얀! 구리얀! 저쪽에서 전화를 끊고 말았어. 다시 연결해주게."
  그는 잠시 그의 통화를 끝맺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혹시 '내가 가르친 학생인지도 모르지. 우
리와 싸우다니! 많이 컸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포로가 된 소년이 그가 가르친 학생일 수 있는가
를 확인해 보려고 그는 교사를 그만둔 후의 횟수를 손가락으로 세어보았다. 그리고 차창 너머 지
평선 쪽으로 시선을 옮겨 전에 살던 유라친의 한 모퉁이를 더듬었다. '저기에 아내와 딸이 아직도
살고 있을까? 만날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하지만 만나서 어떡하지? 아내와 딸은  별개의
인생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나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고 나서 중단
되었던 예전의 인생으로 되돌아갈 수가 있다. 언젠가는 돌아갈 날이 있겠지. 꼭 돌아간다. 그러나
언제일까? 아아, 언제일까?'

        8.도착
    1
  지바고네 가족을 태우고 온 기차는 정거장에서 여러 대의 열차가 서 있는  뒤쪽 대피선에 머물
러 있었다. 여태까지는 모스크바와의 인연이 끊기지 않고 계속돼 왔으나, 오늘  아침에는 뚝 단절
되어 끝나버린 느낌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모스크바 사람들보다 더 친절했다. 정거장 구내에는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고 적
위군 부대에 의하여 포위되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지방 여객들이 노선으로 용케  뚫고 들어왔
다.
  말하자면 '침투'해온 것이다. 그들은 벌써 차안에 빽빽이 차  있었고 화물차 문간에도 꽉 차 있
었다. 어떤 사람들은 차 옆에서, 또 자기 객차 출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 서로 잘 아는 사이여사, 만나자마자 손을  흔들고 인사를 나누며 큰 소리로 담
소했다. 말씨와 옷차림, 음식이나 습관이 대도시와는 좀 다른 데가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해서 먹고살까? 그들의 관심이나 문자의 형편은 어떨까? 그리고 이 어려운 시기
를 어떻게 이겨나가고 어떤 방법으로 법망을 벗어나고  있을까? 지바고는 궁금히 여겨졌다. 이러
한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서 명백히 풀리게 되었다.
    2
  소총을 땅바닥에 끌고 다니거나, 지팡이처럼 짚고 다니는 보초병의 호위를 받으며 지바고는 자
기 객차로 되돌아왔다. 무더운 날씨였다. 햇볕은 선로와 객차 지붕 위를 뜨겁게 내리쬐었다. 기름
에 절어 시커멓게 된 땅덩이가 금박처럼 누렇게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보초병의 소총이 모래 위에 끌리며 고랑을 긋다가 철길 침목에 부딪쳐 땡그랑  소리를 내곤 했
다.
  "날씨가 풀렸군요. 씨를 뿌릴 때가 됐는데. 귀리, 보리, 수수 다 좋을 때라오. 하지만 메밀은 아
직 일러요. 우리 고향에서는 아쿨리나의 날에 파종해요. 난 이 지방 사람이 아니고 땀보프 지방의
모르슈에서 살았어요. 여보, 의사 동무! 이놈의  내란과 반혁명 소동이 없었다면, 내가 이런  철에
낯선 땅에 와서 빈둥거리고 있겠소? 계급 투쟁이 우리들 사이를 검은 고양이처럼 날뛰고 있으니.
보란 말이오, 돼 가는 꼴을."
    3
  의사를 끌어올리려고 찻간에서 여러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혼자 올라갈 수 있어요."
  지바고는 차에 껑충 뛰어올랐다. 그는 몸의 균형을 바로잡더니 아내를 껴안았다.
  "아이, 이젠 됐어. 고마워요, 고마워." 토냐는 자꾸 되풀이했다. "무사한 줄은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다니?"
"다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보초들이 일러주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견뎠겠어요?  아버님과 저는 미칠 것만 같았
어요. 저기서 깊이 주무시고 계시니 깨우진 마세요.  그렇게 흥분하시더니 세상 모르고 주무세요.
이제 새 손님이 몇 사람 생겼어요. 곧 소개해드리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뭐라  하는지 아세요? 모
두들 당신이 잘 빠져나왔다고 인사들이에요. 저기 저 분."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더니, 아내는 되돌아보며 찻간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새 손님 한
사람을 어깨 너머로 남편에게 소개했다.
  "삼제바코프라고 합니다." 폭신한 모자를 벗어 사람들의 머리 위로 쳐들고 붐비는 속을 뚫고 다
가왔다.
  '삼제바토프?' 지바고는 생각했다. '고대  민화에 나오는, 텁수룩한  수염에 짧은 소매의 적삼을
입고 장식이 달린 혁대를 맨 용사와  같은 이름이군. 헌데 희끗희끗한 고수머리,  콧수염, 턱수염,
이런 걸 보니 시골 예술가 클럽이 생각났다.'
  "그래 스트렐리니코프가 한바탕 을러대지 않던가요? 솔직히 말해주어요." 삼제바토프의 말이었
다.
  "아니오, 왜 그러시죠?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습니다. 확실히 그는 패기 있고 뛰어난 인물이었어
요."
  "그렇겠지. 어떤 위인인지 짐작은  갑니다. 이 지방의 사람은  아니고, 당신들과 같은 모스크바
사람이에요. 우리한테서 신기한 것은 다 도시에서 수입한 것이니까. 우리로선 생각이 미치지 못하
는 거예요."
  "여보, 이 삼제바토프 씨는 모르는 게 없어요.  당신에 대해서도, 당신 아버님에 대해서도 알고
계세요. 우리 할아버지까지도.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학교 선생을 하던 라라 안치
포프도 만나본 적이 있으시죠?" 토냐는 거리낌없이  물었다. 그랬더니 삼제바토프 역시 거침없이
대답했다. "라라 말씀이죠..."
  지바고는 둘이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들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말
을 이었다.
  "이분은 볼셰비키래요. 유라, 조심하세요. 볼계비키들과는 말을 조심해야 하니까."
  "아니, 정말이오? 뜻밖인데요. 얼른 보아 예술가로 알았는데."
  "저의 부친은 여관을 경영하셨다오. 트로이카를 일곱 대나 가지 셨어요. 그리고 저는 고등 교육
을 받았고, 또 사실 저는 사회민주당원이랍니다."
  "여보, 안핌 예피모비치의 말을 들어보세요. 리언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당신의 이름을 발음
하려면 혀가 잘 돌지 않아요. 그런데 여보, 들어봐요. 우리는 아주 운이  좋았어요. 유라친 역에선
차를 내리지 못한데요. 거리에 불이 나고, 다리가 끊겨서 갈  수 없게 됐대요. 이 차는 다른 노선
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노선이 바로 우리가 가는 토르파냐야 노선이란 말예요. 당신 생각해 보
세요! 차를 갈아타느라고 짐짝을 이 정거장에서 저 정거장으로 온 거리를 끌고 다니지 않아도 돼
요. 그 대신 정말로 떠나기 전까지는 또 얼마 동안 기차가 선로를 바꾸느라고 왔다갔다할 거래요.
이분이 다 얘기해주셨어요."
    4
  토냐가 미리 말한 대로였다. 객차를 딴 열차에 연결시켰다고 하더니, 다시 떼어버렸다. 다른 열
차가 앞을 막고 있어서 자바고가 타고 있는 기타는 오랫동안 앞뒤로 움직이고  나서 들판으로 나
갔다.
  저 멀리 도시의 반쯤은 경사지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가 지붕과 공장 굴뚝, 종합 위의
십자가가 지평선 위에 보인다. 이때 교외 지구의 한 군데에서 불이 났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말의
갈기처럼 검은 연기가 하늘에서 너풀거렸다.
  의사와 삼제바토프는 다리를 화물차 밖으로 내려뜨리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삼제바토프는 줄
곧 먼 곳을 손짓해 가면서 지바고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가끔 차가 요란스럽게 덜커덩 소리를 내
면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다시 묻곤 했다. 그러면 그의  귓전에 입을 대고 큰 소리로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저것은 영화관 '자이언트'가 불타고 있는 겁니다.  사관생도들이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투
항해버렸어요.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오, 종탑 위에 검은 점들이 보이지요? 저 사람들
이 우리편인데, 체코군을 저격하고 있어요."
  "저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당신은 저곳까지 잘 보이나 보군요."
  "저기 불타고 있는 곳은 직공들이 살고 있는  호호리키 지구죠.  그 저쪽은 상가인 콜로제예보
지구인데, 우리 집이 거기에 있어서 걱정되는군요. 그러나 대단치 않은 불이 돼서 퍼지진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까지 중심부는 무사하답니다."
  "뭐라구요? 안 들려요."
  "중심부, 도시의 중심부 말입니다. 교회당과 도서관 등이 있어요. 우리의 삼제바토프란 성은 산
도나토를 러시아 식으로 바꿔부르게 된 거래요. 우린 제미토프 가문의 후손이라오."
  "또 안 들려요!"
  "삼제바토프는 산 도나토에서 온 말이라고요.  우리는 제미토프 가문의 한  줄기로서, 제미토프
산 도나토 공작의 가문이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헛소리인지도 몰라요. 그저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
는 말이지요. 이곳 지명은 스피리킨  니즈라고 불리고 별장지에다 유원지죠, 정말  괴상한 이름이
죠?"
  눈앞에는 들판이 펼쳐지고 여러 지선의  철길이 엇갈려 있었다. 전신주가  거인의 큰 걸음처럼
지평선에 뻗어나가 있고, 리본처럼 구부러진 넓은 한길이 철길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견주면서 지
평선 너머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저것이 유명한 간선 도로입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있어요. 죄수들의 노래에서 불려지던 길
이죠. 지금은 빨치산의 작전 근거지로 돼 있어요. 하지만  그리 나쁜 고장은 아니랍니다. 이제 곧
정이 들게 될 거예요. 거리의 진기한 일들에 마음이 끌리게 되면서 말이에요. 네거리의 펌프장 같
은 곳은, 물을 길러온 여자들이 늘 줄을 짓고 있어서 겨우내 야외 집합소가 된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내에서 살게 되지 않을 겁니다. 바르이키노로 가는 길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볼일로 읍에 나오게 되는 일이 있지 않겠어요. 전 부인을 보고 한눈에 누
구인지 알아봤어요. 크류게르 영감님을 그대로 닮았더군요.  눈매, 코, 입술 할 것  없이 할아버지
그대로인걸. 여기 사람들은 누구나 다 크류게르를 잘 알고 있답니다."
  들판 저쪽에는 붉고 둥근 석유 탱크와 높이 세워진 게시판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유라의 눈에
띄었다. '모로베트친킨 회사. 파종기, 탈곡기' 이라고 씌어있었다.
  "건실한 회사였지요. 일류 농기구 제작 회사지요."
  "뭐라구요? 들리질 않아요."
  "좋은 회사라구요. 아시겠어요? 좋은 회사란  말입니다. 농기구를 만드는 주식회사였지요. 우리
아버님도 주를 가지고 계셨답니다."
  "아버님은 여관업을 하셨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요, 그렇다고 주를 가질 수 없는 건 아니지요. 그리고 그분은  빼놓지 않고 좋은 기업에는
투자해왔거든요. '자이언트' 영화관에도 투자했었지요."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것 같은 말투군요?"
  "아버님이 빈틈없는 분이란 걸 말이죠? 물론이죠."
  "그렇다면 당신의 사회 민주주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허참, 그게 무슨 상관이오?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해서 얼치기나 코흘리개 같은 노릇을
해야 할까요? 마르크스주의는 진정한 과학이며, 현실의 이론이며, 역사 철학이에요."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구요? 잘 알지 못하는 분과 마르크스주의를 논한다는 것은 놈 경솔한
노릇이긴 하지만, 굳이 말씀드리나면,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으로서는 너무나 빈약합니다. 과학이라
면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하는데, 마르크스주의에 객관성이 있습니까? 마르크스주의만큼 자기 본위
면서 또 사실을 떠난 운동은 없을 겁니다. 누구나 셀제에 있어서는 자기를 나타내려고 무진 애를
쓰지요. 그리하여 권력을 잡은 자들은 자기들이 절대로  틀림이 없다는 신화를 꾸미는 데 급급한
나머지, 진리를 무시하는 데에는 온갖  수단을 다 쓰거든요. 난  정치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나는
진실을 가볍게 여기는 자들을 싫어합니다."
  삼제바토프는 유라의 말을 재치 있는  기인의 허튼 소리로 들어  넘기듯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반박하여 들지 않았다.
  아직도 기차는 선로를 바꾸고 있었다. 허리띠에 우유통을  매단 아니 많은 여인이 신호수 당번
을 하고 있었다. 신호를 할 때면, 뜨개질을 집어치우고 몸을 굽혀 레버를 움직여서 기차를 후퇴세
켰다. 기차가 서서히 뒤로 물러가고 있을 때, 그녀는 똑바로 앉아서 기차를 향해 주먹을 내흔들었
다.
  삼제바토프는 그녀의 거동을 자기한테 하는 짓으로 생각했다.
  "저 여자가 왜 저럴까? 낯익은 얼굴이야, 글라샤가 아닌가? 꼭 닮았어. 아니야, 나이가 너무 많
아 보이는걸. 어쨌든 왜 나더러 야단이지?  조국이 난리판에 있고 철도가 혼란  상태에 있으니까,
저 여딘도 고충을 겪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날 원망하고 있는 게로군! 에이, 제기랄! 그 여자 때문
에 머리를 썩히다니!"
  마침내 그녀는 기를 흔들면서 기관사에게 뭐라고 소리지르고, 기차는 신호기를 지나 넓은 평야
로 나서게 되었다. 14호 차량이 지나가자 그녀는 화물차 바닥에 걸터앉아 서로 지껄이며 자기 신
경을 건드렸던 두 사람에게 혓바닥을 내밀었다. 삼제바토프는 다시 생각에 잠겨버렸다.
    5
  불타고 있는 교외와 둥근 석유 탱크, 전신주, 광고판들이 멀리 사라지고 숲과 높고 나지막한 언
덕의 경치가 보이고 이따금 넓은 한길이 보였다. 삼제바토프는 말을 꺼냈다.

"우리 자리고 갑시다. 저는  곧 내려야합니다. 당신은 여기서  두 번째 정거장에서 내려야합니다.
지나치지 않도록 하시오."
  "이 고장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군요?"
  "잘 알고말고요. 1백 리 사방까지는  별로 모르는 일이 없어요.  저는 변호사올시다. 20년 동안
경험과 사업 그리고 여행뿐이랍니다."
  "지금도요?"
  "물론이죠."
  "요즘 같은 때에 어디 일거리가 있나요?"
  "얼마든지 있어요. 끝맺지 못한 과거의 거래라든지, 영업이나 계약 위반이니 하는 따위예요. 바
빠서 못 견딜 지경이랍니다."
  "그러나 그따위는 지금 모두 폐지되지 않았어요?"
  "명목상으론 그렇지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여러 가지  물건이 필요하고, 서로의 이
해 관계가 다르지 않습니까. 기업체 국유화라든지, 시 소비에트의 연료 문제, 지방경제회의에서는
운송 문제 등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살아나가야 하지요. 과도기의 특징은  이론과 실제
사이에 간격이 있드는 점이죠. 이런 때에는 나와 같이 약삭빠르고 재간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참
으로 모르는 게 다행이죠. 저의 아버님은 늘 말씀하시지만, 이따금 따끔하게  갈겨주는 것이 오히
려 약이 된다고 하셨죠. 이 지방의 반수는 제가 먹여 살리는 셈이죠. 곧  바르이키노에 제가 가게
될 겁니다. 그러나 당분간은 안  되겠습니다. 말을 타지 않고는 갈  수 없는데, 지금은 저의 말이
다리를 절고 있어요. 이 덜컥거리는 기차의 기어가는 꼴을 좀 보시오, 그래도 이름만은 기차라오.
바르이키노에서 저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찾아가는  미쿨리츠인 씨에 대해서는
제 다섯 손가락을 보듯 환히 알고 있어요."
  "우리가 왜 거기로 가는지 아십니까? 뭘하러 가는지?"
  "대개 짐작은 갑니다. 향토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영원한 동경이겠죠. 자기  손으로 꿈을 실현하
려는 거 말이오."
  "안 될까요? 못마땅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천진하고 낭만적이긴 하지만, 어떻습니까? 잘 해보시지요. 그러나 저는 믿질 않습니다, 유토리
아나 미술 공예 같은 것은."
  "미쿨리츠인은 우리를 어떻게 대할 것 같습니까?"
  "당신들을 집안에 넣지도 않고,  빗자루를 휘둘러 쫓아낼 겁니다.  당연하지요. 그 사람은 지금
궁지에 몰려 있으니까. 공장은 서 있고, 노동자들은 도망쳐 버렸구요. 생계가 막막하고 식량이 떨
어진데다 당신네들이 훌쩍 나타나 보시오. 그 사람이 당신을 죽인다 해도 저는 그 사람을 나무랄
순 없어요."
  "그것 봐요. 당신이 볼셰비키라는 것을 당신 자신이 부정하지는 못하는군요.  지금의 현실은 사
람이 사는 게 아니라 미친 짓이고, 터무니 없는 악몽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소."
  "물론 그래요. 하지만 이것은 역사의 필연성이며, 이 고비를 이겨나가야 합니다."
  "왜 필연성이란 말이오?"
  "당신은 철부지 어린애가 아니면  괜히 이러시는 겁니까? 마치  달나라에서나 온 사람 같군요.
식성이 좋은 기생충들이 굶주린 노동자들의 등에 앉아섲 구을 때까지 부려먹어  왔어요. 그래, 이
런 일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갈 줄 알아요? 그 밖에  불법과 횡포는 더 말할 나위도 없어요. 당신
은 민중의 분노, 정의와 진리에 대한 욕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잖으면 제정 국회
의 의회 절차를 밟아서 일대 혁신이 가능할 것 같소? 독재 없이 해나갈 수 잇다고 생각하시로?"
  "우린 서로 입장이 아르니까, 여기서 백년 떠들어봐야 의견의 일치는 못  볼 겁니다. 저도 한때
는 열렬한 혁명주의자였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폭력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
요. 선을 가지고 선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런 이갸기는 이제 그만둡시다. 미쿨리츠인 댁 말인데,
우리가 그런 대접을 받을 거라면 뭣하러 가지요? 되돌아가고 말 일이지."
  "공연한 말씀. 우선 갈 데가 그 사람 집 아니면 없는 것도 아닐  테고, 다음은 미쿨리츠인 씨는
아주 착한 사람이예요. 처음에는 야단법석으로 거절하겠지만 결국 누그러지고,  나중에는 자기 셔
츠까지 벗어주고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까지도 나눠 먹을 위인이죠." 삼제바토프가 이야기했다.
    6
  미쿨리츠인은 지금부터 25년 전에 페트로그라드에서 이곳에  왔었다. 그는 공과 대학 학생이었
는데. 이곳으로 유배되어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 것이다. 여기에 와서는  크류게르 회사 지배인이
되었고 또 결혼도 했다. 그 당시 투체프 댁에는  딸이 넷 있었는데 아그리피나, 아브도차, 글라피
라, 세라피마였다. 이들의 뒤꽁무니를 유라친의 온 남학생들이  줄줄 따르고 있었다. 이들을 부르
기 쉽게 세베란카라고 불렀다. 미쿨리츠인은 그 맏딸과 결혼했던 것이다. 얼마 안 되어 그들 사이
에 아들 하나가 태어났다. 우직한 아버지는 자유를  동경한 나머지 아들의 이름을 리베리라고 유
별나게 붙였다. 리베리를 약칭하여 리프카로  불렀으며, 개구장이로 컸으나 재간동이였다. 전쟁이
시작외었을 때 그 아이는 열 여섯 살이었으나, 나이를 속이고 지원병이  되어서 출전했다. 병약한
그의 어머니는 그 충격 때문에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재작년, 혁명 전 해에 세상을 떠
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리베리는 훈장을 셋이나 받은 영웅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물론 철저한 볼
셰비키 전선 대표가 되어 있었다.
  "당신은 '산림 의용대' 소식을 달어봤어요?"
  "아니 못 들었어요."
  "그렇다면 얘기해도 소용이 없겠군. 얘기할 흥미의 반은 없어진 거나  같으니까. 게다가 당신은
창밖의 한길을 내다볼 재미도 없어질 거고. 요즘 한길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이 뭡니까? 빨치산
이지요? 빨치산은 혁명군의 중추가 되고 있어요.  혁명군의 세력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어요.
하나는 혁명의 지도권을 장악한 정치 조직이고, 또 하나는 전쟁 후 구권력에 항거하였던 보통 사
병들이오. 빨치산 부대는 이 양자가 합류하여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대개는 중류 농민이지만, 별
별 족속들이 다 끼여 있어요. 빈농, 교회에서 쫓겨난  신부, 자기 아버지에게 총부리를 돌렸던 부
농의 자식들이 있고, 또 꿈  같은 걸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자, 정치  따위에 눈이 먼 빈민, 여자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다 퇴학당한 조숙한 남학생들도 섞여  있구요. 또한 자유를 주고 순환시켜준
다는 약속에 끌려서 온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포로들.  이렇게 이루어진 민중의 큰 부대의 하
나가 산림 의용대란 말이오. 그 지휘관이 레스느이치 동무이고, 그 사람이  바로 미쿨리츠인의 아
들 리프카, 즉 리베리란 말이오."
  "정말 그래요?"
  "정말이고말고. 그렇다면 얘길 계속할까요? 미쿨리츠인은 상처하고 나서 재혼하게 되었다오. 새
부인 레노치카는 할교를 갓 졸업하고 결혼했지요.  레노치카는 천성이 순진한 여자이지만 지나치
게 순진한 체하지요. 아직 젊은 여자가 벌써부터 더 젊은 체하면서 재잘거리고 까불고 아양을 떨
면서 애티를 부리곤 해요. 사람을 만나면 곧잘 시험을 치르려고 든다오. '수보로프의 생일이 언제
냐?' 라든지, '어찌하면 두 개의  삼각형이 같게 되는가?' 따위로.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면 아주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한답니다.  하여간 몇 시간 후에는 당신도 그
여자를 확인하게 될 겁니다.
  남편이라는 사람도 괴물이라오. 본래 선원이 되려고  대학에서 조선 공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어
요. 그의 몸가짐이나 버릇이 선원과  똑같다오. 언제나 말쑥하게 면도를 하고는  입에서 파이프를
떼는 법이 없고, 파이프를 문 채 다정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합니다. 파이프를 피우는 사람
에게서 흔히 보듯 아래턱이 앞으로 나와있고, 사늘한 잿빛  눈을 가진 사람이오. 그렇지, 잊을 뻔
했군. 그는 한때 사회 혁명 당원이었으며 제헌 국뢰의 대의원으로 지방에서 선출되었지요."
  "그것 참 큰 문제로군. 아버지와 아들이 견원지간의 정적이 되었으니 말이오!"
  "하긴 그렇지만, 그러나 실제 밀림과 바르이카노 사이에 싸음은  없습니다. 어쨌든 얘기를 좀더
할까요? 툰체프 댁의 나머지 세 따님들, 그러니까 미쿨리츠인의 첫 부인의 동생들은 지금도 유라
친에 살고 있는데 셋 다 노처녀라오. 세월이 변하면 처녀들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제일 손위의 아브도차는 시립 도서관에서  도서계 직원으로 있지요. 좀  검은 피부에 예쁘장한
아가씨인데 몹시 수줍음을 타서 걸핏하면 얼굴이  새빨개진다오. 도서관은 묘지처럼 조용한 곳이
랍니다. 그녀는 1년 내내 감기에 걸려서 연방 재채기를  하면서 구멍이라도 있으면 그 속으로 숨
어버릴 표정이었어요. 아마 신경이 과민한 상태 같아요.
  그 밑의 동생 글라피라는 이 집안의 복덩이랍니다. 활발하고 일 잘하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
로 척척 해내는 여자지요. 사람들 얘기는, 산림 의용대장 레스느이치가 그의  이모를 꼭 닮았다는
겁니다. 한때는 양재사 일을 하는가 하면, 양말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고, 그런가 했더니 또 어느
새 미용사 노릇을 하고 있었어요. 아까 신호대 옆에서 우리한테 주먹을 휘두르던 여자 보았지요?
그때 나는 글라피라가 이번에는 철도의 일을 하게 된 줄로만 알았어요. 그러나 조금 다르다고 생
각됐어요. 나이가 좀 많아서.
  그 다음 막내딸 시무슈카는 이 집의 십자가랍니다. 두퉁거리예요. 교양이 있고  독서도 많이 했
답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시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혁명이 일어난 후, 세상이 뒤끓어 연설이다, 시
위 행렬이다 하는 북새통에 머리가 돌아서 지금은 종교 미치광이가 다 됐답니다. 두 언니가 일하
러 나갈 때면 으레 시무슈카를 방에 가두어 놓았지만, 그녀는 창문을 뛰어넘어, 길거리에 나와 사
람들을 모아놓고는 그리스도의 제2의 강림이나, 세상의 종말이 닥쳐왔다느니 한다는 겁니다. 이제
그만 지껄여야겠군. 난 여기서 내려야겠습니다. 당신네는 다음  정거장이오. 이젠 내릴 준빌르 하
세요."
  삼제바토프가 기차에서 내리고 나자 토냐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렵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몰라도, 내 생각은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무슨 좋은 인
연인 것 같아요. 틀림없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몰라. 그런데 토냐, 모두가 당신이 크류게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스트렐
리니코프까지도 내가 바르이키노 이야기를 하니까, 대뜸  불쾌한 얼굴로 우리가 크류게르의 재산
상속인인가 묻기까지 하더군.
  우리는 남의 눈을 피하려고 모스크바에서 도망쳐왔는데, 여기 오니까 오히려 드러나 보이니 말
이오. 이제는 별 도리가 없어, 일은 이미 저질러진 거니까.  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숨어서 행동
을 조심하는 게 좋겠어. 도무지 불쾌한 예감만 자꾸 들어요. 이제 다 왔나보오. 내릴 채비를 서둘
러요."
    7
  토르파나야 역 플랫폼에서 토냐는 찻간에 두고 내리는 짐이 없도록 가족과 짐을  몇 번이나 다
시 세어 보곤 했다. 그녀는 플랫폼의 단단히 다져진 모래땅을 밟고 감촉하면서도, 기차가 역을 지
나쳐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기차가 눈앞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도 그녀의 귓전에는
차바퀴의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주위의 것을 보거나 듣거나 의식
하지 못했다.
  더 여행을 계속할 승객들이 높은 화물 찻간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토냐는 여념이 없었
다. 그녀는 기차가 움직이는 것도 모르고,  기차가 사라진 노선 너머에 푸른 들판과  파란 하늘이
시선을 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기차가 떠나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역의 건물은 석조였다. 입구 양쪽에 벤치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토르파나야 역에 내린 모스크바
손님은 지바고네 가족밖엔 없었다. 그들은 짐을 내려좋고 벤치에 걸터앉았다. 한적하고 조용한 정
돈된 역이 그들의 가슴을 짜릿하게 했다. 군중들에  둘러싸여 욕지거리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
하게 느껴졌다. 역사는 이 외딴 시골  생활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곳은  아직 수도의
야만 생활로 변하진 않았다.
  역은 자작나무 숲이 우거져 그 속에 감춰져 있었다. 기차가  그 속으로 들어올 때 찻간에는 어
둠이 깃들이게 되었다.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나무 그림자가 그들의 손과 얼굴에 그리고 플랫폼의 깨끗하고 눅눅한 모
래 위에, 또 땅과 지붕 위에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숲속에서는 우짖는 새소리가 시원하게 들려
왔다. 맑고 깨끗한 그 울음 소리는 온 숲속에 울려 메아리쳤다.
  숲을 꿰뚫고 있는 두 갈래의 길. 철길과  시골길은 긴 팔소매처럼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
가 깃들어 있었다. 이때까지 멍멍했던 토냐의 눈과 귀가 트이게 되었다. 한꺼번에 그녀는 모든 것
을 의식하게 되었다. 울려 퍼지는 새의 울음소리와 맑은 숲의 고요와 조용히 흐르는 정적이 감돌
았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무사히  도착하게 된 것이 꿈이 아니었구나.  남편을 잡아간
스트렐리니코프는 아량을 베푼 채 석방해놓고, 우리가 차에서 내리는 즉시 우리를 잡아두라고 전
보를 칠 수도 있었다. 그들은 고상한 감정을 가졌다고 믿을 순 없고, 모두가 다 기만이야.'
  그러나 눈앞의 신비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아, 참 아름답구나!" 하고 탄식
이 터져나오면서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어 아무 말 없이 점차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토냐의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고 역장 제복을 입은 노인이 역 구내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위가
빨간 제모를 쓰고, 그 챙에 한 손을 얹어 인사를 하면서 정중히 물었다.
  "젊은 귀부인께 진정제라도 드릴까요? 정거장 구급 약통에 조금 있을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여행에서 오는 불안과 걱정 때문이겠지요. 흔히 있는 일이죠. 게다가 아프리카와 같은 이 더위
는 여기에서도 흔히 있는 일은 아니랍니다. 더욱이  유라친에서 일어난 사건은 말씀드릴 것도 없
구요."
  "기차를 타고 오면서 불붙는 것을 보았어요."
  "실례입니다마는 러시아에서 오셨나요?"
  "모스크바에서 왔어요."
  "모스크바에서요? 그렇다면 부인의 심경이 과민하신 것도 당연하지요. 모스크바는 쑥밭이 되었
다더군요."
  "괜히 과장해서 하는 소리지요. 그러나 정말 여러 가지 일을 다 구경했다오. 이애가 내 딸애고,
이 사람이 내 사위고, 그리고 애들이고, 저 사람은 유모 뉴샤올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매우 반갑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참이랍니다. 삼제바토프 씨가 삼카에
서 전화를 걸어왔었다오. 지바고 선생이 가족을 데리고 모스크바에서  오시니까, 잘 돌봐드리라고
했어요. 바로 그분들이시군요?"
  "아니오, 지바고는 내 사위랍니다. 저기 저 사람이오, 나는 농학 교수 그로메코라고 합니다."
  "실례했습니다. 뵙게 되어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그러시다면 삼제바토프를 아시나요?"
  "모를 리가 있습니까, 우리 생명의 은인이지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
릅니다. 벌써 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 되도록 편의를 봐드리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
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드렸답니다. 그러면 말이든 뭣이든 필요하신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어디
로 가시는 겁니까?"
  "우린 바르이키노에 갑니다. 여기서 먼가요?"
  "바르이키노? 그렇군, 저는 아까부터 선생님 따님을 어디서 뵌  분이라 생각했어요. 바르이키노
로 가시는군요! 그러면 다 알겠어요! 크류게르 노인과 저와 둘이서  이 길을 닦았답니다. 곧 말과
사람을 불러서 마차를 알아보겠습니다. 도나트! 도나트! 이 짐들을 잠깐 대합실에 갖다두어요. 그
리고 말은 있어요? 찻집에 가서 얼른 알아봐요. 오늘 아침 바커스가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아직도
있는지 보고 와요. 바르이키노에 가실 손님이  제 분 계시다고 하고, 지금 막  도착하셨는데 짐도
얼마 없고 급하다고 해요. 그런데  부인, 이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의 충고인데, 크류게르 노인과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지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아주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이런 시기에는 말입니다."
  바커스라는 이름을 듣자 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무쇠로 만든 내장을 끼웠다는
대장장이 이야기와 이 지방의 많은 전설을 안나 부인이 이야기하던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8
  그들을 태운 말은 최근 새끼를 낳은 흰  말이었으며, 마부는 헝클어진 백발에 마치 콘도르처럼
생긱 노인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노인의 모든  것은 흰 것뿐이었다. 그의 새 신발은  양말보다 희
고, 셔츠나 바지는 오래 입어서 희끗희끗 바랬다. 장난감같이 생긴 검은 새끼말이 흰 어미말을 따
라서 짧게 곱슬거리는 갈기를 흔들며 뼈가 연한  다리를 내차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마차가 바퀴
자국에 덜컹거리고 흔들릴때마다 타고 있는 사람들이 마차 옆으로 달라붙었다. 그들은 마음이 편
하고 여행도 거의 끝나가면서 꾼이 실현돼 가고  있었다. 화사한 하루가 아름답게 저물어가는 시
간은 끝없이 넓고 화려한 한 나절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마차는 때로는 숲속을 빠져나가며, 때로는 넓은 들판으로 달리고 있었다. 숲을  지날 때 차바퀴
가 나무 뿌리에 부딪쳐 심하게  흔들릴 적마다, 그들은 상을 찌푸리며  서로 어깨를 맞대고 붙어
앉았다. 그러다가도 하늘이 탁 트인 넓은 들판으로 나오게 되면, 그들은 다시 꼿꼿한 자세로 고쳐
앉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산이 많은 지대로서, 산들은 언제나 변함 없는 표정을 지으며 저 멀리에서 오만한 그림
자처럼 검은 모습으로 말없이 길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미빛 따스한 빛이 들판으로 여행자의
뒤를 따라, 그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마음에 흡족했으며 신기하기만 했다. 더욱이 괴산한 늙은 마부의 끊임없
이 지껄거리는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고대 러시아 어체와 타타르의 사투리, 거기에 지방 사투리,
그의 독특하고 괴상한 말투가 기묘하게 뒤범벅되어 있었다.
  새끼말이 뒤로 떨어질 때마다 어미말은 걸음을 멈추며 기다렸다. 그러면 새끼말은 파도치듯 예
쁘게 춤추며 따라와서는 긴 다리를 지나칠 정도로 붙이고 이상한 걸음걸이로 마차에 접근하여 긴
목을 내밀어 끌채 밑으로 작은 머리를 갖다대고 어미 젖을 빨아댔다.
  토냐는 마차의 동요로 이빨이 마주쳐서 갑작스레 크게 움직이면 혀끝이라도 깨물어 버릴 것 같
아 두려워하며 남편에게 소리질렀다. "이상하죠. 어머님이 말씀하시던 바커스가 이 사람일지도 몰
라요. 당신 생각나시죠? 싸움에서 복부가 망가지니까, 제손으로 새 것을  만들어 끼웠다는 대장장
이 이야기 말이에요. 철의 배를 가진 바커스 얘기는 물론 엉터리 이야기지만. 하지만  혹시 이 사
람의 얘긴지도 몰라요. 이 사람이 바로 그 바커스가 아닌까요?"
  "그럴 리가 있겠어? 우선 당신의 말과 같이 터무니없는 전설에 지나지 않아요. 벌써 백 년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어머님도 말씀하셨어요. 너무 큰 소리로 얘기하지 말아요. 노인이 들으
면 기분이 상해요."
  "듣지는 못해요. 귀가 먹었나 봐요. 들었다 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거예요. 머리가 좀
이상하더군요."
  "이봐, 표도르 네페드이치!" 어찌된 일인지 노인은 남자 이름으로 말을 불렀다. 그 말이 암말이
라는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타고 있는 사람들도 물론 다 알고 있었다. "웬걸 이렇게 덥담! 뜨거운
가마솥에 들어앉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처럼! 제기랄, 이놈아! 너보고 하는 소리야, 마제파!"
  노인은 이전에 여기 공장에 다닐 때 지어 부르던 노래 몇 구절을 느닷없이 부르는 것이었다.

    잘 있거라, 사무실아
  잘 있거라, 굴라 광산아
  주인이 빵도 이젠 그만,
  물을 마시는 것도 역겨워졌다네.
  물가에 백조가 헤엄쳐 지나가며
  물 위에 여울을 남기는데
  내가 흔들리는 건 술 탓이 아니야
  바냐가 군대에 갔기 때문이지.
  하나 나 마샤는 꺾이진 않아,
  그리고 나 마샤는 바보가 아니야.
  나는 간다, 세랴바로.
  센체추리하에 일하러 간다.

   "제기랄, 망할 놈의 짐승아! 여러분, 이 썩은 망아지를  보아요. 내가 채찍질하면, 오히려 날 깔
보지 않소! 이것 봐 페쟈, 넌 가려는 거냐? 저 숲을 여기선 따이가라고 부르고 끝이  없는 곳이란
다. 그 안에는 농민들이 힘이 있고 산림 의용대가 있단다. 이야, 페쟈, 도 멈췄군, 빌어먹을 놈!"
  그는 갑자기 몸을 뒤돌려 토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젊은 부인, 당신이 누군지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아시오? 부인, 나는  그것쯤은 훤히 알고 있다
오. 천지가 뒤바뀌기 전에는 나의 눈은 틀림이 없단 말이오! 나는 여우한테 홀리지나 않았나 싶었
단 말이오. 당신은 그리코프와 꼭 닮았어요. 당신은 그리코프의 손녀가 아니시오? 그 집안 일이라
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단 말이예요. 난 일생 동안을 그의 밑에서 일해  왔으니까. 여러 가지 일
을 닥치는 대로 해왔습지요. 탄광에서 목수 일도 하고,  땅 위에선 원치에 붙어 일하기도 하고,마
구간에서도 일했답니다. 이랴, 가자! 또 서다니, 다리가 없나! 내 말이 안 들려?
  헌데 당신은 내가 그 대장장이 바커스가 아니냐고 물으셨지요. 당신은 정말 어리석은 분이군요.
그렇게 큰 눈을 가진 귀부인이면서 바보군요. 당신이 말하는 바커스란 포타노고프라는 철의 내장
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벌써 50년 전에 죽어버렸어요. 내 성은 매호닌이라오. 둘 다
이름은 같아도 성은 달라요."
  이윽고 노인은 미쿨리츠인 집안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으나, 그것은 거의 삼제바토프한테서 이미
들었던 대로였다. 그는 미쿨리츠인 부부를 미쿨리치와 미쿨리치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미꿀리
치나를 관리인의 후처라고 부르고, 첫째 부인을 천사니 백의천사니 하고 불렀다. 이야기는 빨치산
부대의 지도자 리베리에 이르자, 그의 명성이 모스크바에  알려져 있지 못한 점과 산림 의용대가
알려지고 있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 귀를 의심하듯 놀랐다.
  "듣지 못했어요? 레스느이치 동무의 이야기도 못 들었단 말이오? 제기랄! 모스크바에서는 귀를
뒀다 어디에 쓴담!"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마차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면서 앞으로 내달았다. 나무도 없는 평탄
한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명아주와 꽃송이가 달린 버들풀, 엉겅퀴의  홀쭉한 줄기가
쓸쓸하게 자라고 있었다. 언덕 위에 제멋대로 자라난  화초의 망령 같은 그림자들이 들판을 감시
하는 경비병처럼 보였다.
  멀리 전방에는 들판의 높은 언덕이 이어져서, 그것이  마치 벽처럼 길을 가로지르고 그 너머에
는 골짜기 아니면 시내가 흐를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그쪽  하늘이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길이
성문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 언덕 위에 기다란 흰 단층집이 보였다.
  "저 위에 집이 보이지요?" 바커스가 말했다. "미쿨리치와 미쿨리치나가 살고 있는 집이예요. 그
리고 그 아래 골짜기를 슈치마라고 불러요."
  언덕 저쪽에서 두 방의 총성이 들리고 그 뒤를 이어 메아리가 울렸다.
  "저건, 뭐 뭐예요? 빨치산이 우릴 보고 총질하는 건 아니겠지요, 할아버지?"
  "천만에요. 빨치산이라니. 스체파느이치가 계곡에서 이리떼를 쫓고 있을 겁니다."
    9
  미쿨리치인 부부와의 최초의 해후는 관리인의 집  마당에서 있었다. 침묵으로 시작되었다가 떠
들썩하게 혼란에 빠진 이 해후는 고통스러운 광경이었다.
  엘레나 프로클로브나는 숲 속의 산책에서 돌아와 마당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의 금발처럼 석양
의 황금빛이 숲속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가면서 그녀의 뒤를 좇고 있었다. 그녀는 가뿐한 여름 옷
을 입고 있었다. 산책에서 돌아와 얼굴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목에 고무줄로 매단 밀짚 모자
가 그녀의 등뒤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골짜기에서 금방  기어 올라와서는 그녀를
만나려고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든 총의 삽탄 장치가 제대로 돼 있지 않는 걸로 보아서 집에 돌
아와 총을 고치려는 것 같았다.
  이 평화스러운 정경을 갑자기 뒤흔들면서  바커스는 바퀴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면서 자갈길을
달려 마차의 선물을 날라왔다.
  손님들은 재빨리 마차에서 내렸다. 그로메코 교수는 모자를 벗어들었다 썼다 하면서 설명을 시
작했다.
  부부는 아연 실색하여 얼마 동안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손님들은 몹시 무안한 기분에 창
피한 나머지 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얼굴이었다. 무슨 설명을  한다 해도 당사자들뿐만이
아니라 사센까나 뉴샤, 바커스에게까지도 사태는 뻔한 것이었다. 그들의  괴로움은 대화와 황금빛
석양, 엘레나 프로클로브나의 주위를 감돌아 얼굴과 목덜미에 달라붙는 모기들에게까지도 전해진
것 같았다.
  침묵은 드디어 마쿨리츠인에 의하여 깨뜨려졌다.
  "나는 알 수 없어요.정말 모를 일입니다.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 같군요. 남부에는 백위군이 있
고, 식량도 충분한 고장이지요? 그런데 하필 여기, 우리 집을 찾아오게 된 이유는 뭣입니까?"
  "이것이 미쿨리츠인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레노치카, 참견하지 말아요. 정말 우리 집사람 말이 맞아요. 당신네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짐이
될지 생각해보았어요?"
  "아니, 당신들은 우릴 오해하고 있어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우리는 당신들의 평화스러운 생
활에 뛰어들어서 시끄럽게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우리가 고작 바라는 것은 아주 작은 거
예요.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집 한 구석을 차지하고 쓸모없이 버려진 황폐한 땅에 채소나 좀 가
꿀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숲에서 나무나 끌어오면 되구요. 이것이 다
랍니다.지나친 요구일까요? 부담이 된단 말입니까?"
  "그건 그래요. 하지만 세상은 넓답니다. 왜 이런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않고, 하필 우리
가 받아야 합니까?"
  "그건 우리가 당신네를 알고, 당신네들도 우릴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우리는 서로 남
남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크류게르 때문이군요! 당신네들은 그분과 친척이 되시죠? 그러나 지금 그런 걸  다 다질
땐가요?"
  그는 균형이 잡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기고 큰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니고 있
었다. 여름에는 루바시카를 입고 수술이 달린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옛날 같으면 하적
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현대에 와서그러한 인물은 만년  대학생으로서 책 속에 파묻혀 사는 몽상
가로 되었을 것이다.
  미쿨리츠인은 해방 운동과 혁명에 청춘을 바쳤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혁명이 일어날 땎지 살아
갈 수가 있을까, 또 설사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온건하여 철저한  것이 못 되지나 않나 걱정이 되
었다. 그런데 막상 혁명이 일어나고 보니 이때까지 생각했던 그의 미지근한 꿈보다 그것은 더 격
렬한 것이었다. 그는 스바토고르 바가트이리에서  최초의 공장위원회를 조직한 한  사람이었으나,
시대 조류를 타지 못하고 버림받고 있었다. 그래서  앞장서서 일하지 못하고 벽촌에 쫓겨나 있었
다. 이 부락에서는 노동자의 일부가 멘셰비키  편에 서서 이 고장을 떠나버렸다. 거기에  지금 이
구질구질한 크류게르의 집안 사람들이 불청객으로 밀어닥친 것은 운명의 장난이거나, 참을 수 없
는 고의적인 모략이 아닌가.
  "일이 참 괴상하게 되어가는군. 이것이 나를 얼마나  위험에 몰아넣게 되는지 아십니까? 난 정
말 정신이 없어요. 뭐가 뭔지 알  수 없군요. 통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찌될지 예측할
수 없어요."
  "여러분이 여기 오시지 않아도 우린  화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  거나 다름 없었어요. 아시겠어
요?"
  "잠깐, 레노치카. 집사람이 말한 대로 여러분이 오지 않아도  우리는 개처럼 살아온 미치광이의
집안이랍니다. 줄곧 앞뒤의 불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나의 아들놈이 공산당 볼셰비키
가 되어서 민중의 총아라고 떠벌여대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또 딴 패들은 내가 제헌 국회위원으
로 당선된 것을 이러쿵저러쿵하는데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꿈쩍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오. 다들
나를 적대시하기 때문에 배겨날 도리가 없어요.  이런 판국에 도 당신들이 찾아들었소!  고맙게도
당신들 때문에 총살대 위에 서게 됐단 말이오!"
  "무슨 소릴 하시오! 정신 차려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잠시 후 미쿨리츠인은 좀  누그러졌다. "자, 밖에서 다투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집안으로
들어갑시다. 물론 들어간다고 좋은 일이 있을  건 아니지만, 쓸데없이 이러고 있을 순  없지 않아
요. 그리고 우린 야만적인 이교도가 아니니까, 당신네들을 숲속으로  쫓아서 미하일로 포타프이치
의 밥이 되게 할 수는 없어요. 여보, 서재  옆방으로 이분들을 안내해요.아주 자리잡을 곳은 나중
에 정원 어디에 찾아보기로 하지요. 자, 들어오십시오. 바커스, 이분들의 짐을 옮겨 주구려."
  바커스는 투덜거리면서 시키는 대로 짐을 들고 왔다. "어찌된 노릇입니까!  순례자보다 짐이 적
으니! 작은 보따리뿐이고, 트렁크 하나 없으니."
    10
  밤에 날씨가 차가워졌다. 손님들은 세수하고, 여자들은 옆방에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쌰사의
말재롱을 즐거워하던 예전의 습관대로, 어린애는 오늘 저녁에도 재롱을 부려댔으나 아무도 못 들
은 척하면서 상대해주질 않았다. 싸샤는 검은 새끼말을 집 안에 들여놓지  않은게 불만이었다. 짜
증을 내는 아이에게 조용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금세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싸샤는 아빠
와 엄마가 농으로 하는 말을 곧이 듣고서 애기를 파는 상점에 자기를 데려가지나 않나 걱정이 되
었다. 어린애는 정말 무서워서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순진한 재롱을  부렸으나, 다른 때와
는 달리 조금도 신이 나지 않았다. 남의 집 신세를 지고 있는 탓인지 어른들은 그저 묵묵히 자기
일에만 여념이 없었다. 이래서 싸샤는  화가 나서 실쭉했다. 간신히  밥을 먹고 잠자리에 누었다.
마침내 잠들자, 이 집 하녀 우스치냐는 뉴샤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저녁을 주고 집안의 할
소리 안 할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토냐와 남자들은 미쿨리츠인 부부와 차를 같이 들기로 했
다.
  그로메꼬 교수와 지바고는 바람을 쏘이려고 베란다로 나갔다.
  "별도 많군!" 그로메코 교수가 말했다.
  바깥은 몹시 어두웠다. 불과 두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도 사위와 장인이 서로 알아볼 수가 없었
다. 방아느이 등잔 불빛이 창문으로 새어나와 그들 뒤에서 골짜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빛에 크
고 작은 나무들이 차가운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빛의 밖에 있었으
므로 그 주위의 어둠이 한층 진하게 느껴졌다.
  "내일은 아침부터 우리한테 빌려준다는 별채를 보고  와야겠네. 그리고 웬만하면 곧 수리를 시
작해야겠어. 그럭저럭 정리도 되고 따뜻한 계절이 오면, 시간을 허송하지 말고, 밭을 가꾸어야 해.
씨감자를 줄 듯이 말하던 것 같았는데, 잘못 들은게 아닌지 몰라?"
  "말하는 걸 저도 들었어요. 다른 씨앗도 주겠다고 하더군요. 저도 들었어요. 우리한테 빌려주겠
다던 장소는 공원을 지나서 있어요. 어딘지 모르시겠어요? 주인집 뒤에 있는 별채인데, 엉겅퀴 때
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주인집 큰채는  석조 건물이고 별채는 목조랍니다.  생각나세요? 마차에서
제가 가르쳐드렸는데, 묘상하기에 알맞은 곳이었어요. 이전에 화원 자리 같았으며, 멀리서 자세히
는 알 수 없었으나 아마 화원이 있었던 자리라면 거름이 잘 돼 있어서 거름기가  지금도 남아 있
을지도 모르겠어요."
  "글세, 난 잘 모르겠어. 내일 가보세.  잡초가 우거져서 아마 돌처럼 굳어  있을지도 몰라요. 이
집 채소밭이 어디 있을 텐데. 그것을 우리도 같이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일 알아보기로 하지.
아마 아침마다 아직은 서리가 있을 걸세. 오늘 밤엔 틀림없이 서리가 내릴 거야. 어찌됐든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되어 다행이야! 서로들 감사해야겠어. 여긴 좋은 곳이야, 마음에 들었어."
  "사람들이 좋았어요. 더욱이 주인 양반은 좋은 분이었어요. 부인은 건방진  데가 있는데다가 자
기 불만 같은 게 있더군요.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말이 많고,  아주 어리석게 보여요. 마치 나쁜
인상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 일부러 상대방의 주의를 딴곳으로 돌려보려는 듯이 서두르는 것 같
았어요. 그리고 모자를 목에 걸어두고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다니는  꼴은 오히려 그 여자에게
잘 어울려요."
  "자, 돌아가세. 예의가 없다고 하지 않겠나."
  식당에는 천장에 걸려 있는 등잔불 아래 놓인 둥근 식탁에 주인 부처와  토냐가 사모바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거기로 가면서 두 사람은 미쿨리츠인의 서재를 지났다.
  서재에는 골짜기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별채만큼 큰 창문이 있었다.  지바고는 아까 날이 밝을
때, 이 창문에서 골짜기와 바커스의 마차를 타고 오던 저편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창가에는 널따
란 제도용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총을 놓아두고도 여유가 있어 보일 정도로 꽤 넓
은 책상이었다.
  지금 지나오면서 지바고는 다시 한 번  전망이 좋은 창문, 책상의 크기와 위치,  그리고 가구와
설비가 잘 된 이 방의 널찍한 면적을 부러워했다. 그는 식당에 들어서자 서재 이야기부터 꺼냈다.
  "참 좋군요. 서재가 훌륭합니다. 영감이 떠올라 연구에 열을 낼 수 있을것만 같군요."
  "차는 글라스로 하실까요, 찻잔으로 하실까요? 그리고 어떤 걸 좋아하세요. 지하게 할까요?"
  "유라, 이걸 보아요, 실체경이예요. 미쿨리츠인 씨의 아드님이 만든 거랍니다."
  "그애는 아직 어린애랍니다. 지금도 차분하질 못해요.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서 코무치로부터 점
차 지역을 탈환증이랍니다."
  "코무치가 뭡니까?"
  "시베리아 정부의 군대인데 제헌 의회를 부활시키기 위하여 싸우고 있지요."
  "우리는 하루 종일 선생님의 아드님 칭찬을 들어왔답니다. 무척 자랑스럽겠습니다."
  "이 우랄 지방 풍경 사진도 그 애가 제손으로 직접 만든 사진기로 찍은 거랍니다."
  "먹음직스러운 케이크군요. 사카린을 넣어 만드셨나요?"
  "천만에! 이런 벽촌에 사카린이 다 뭡니까? 순전히 설탕으로 만든 겁니다. 제가 차에 설탕을 타
는 걸 보시지 않았어요?"
  "그렇군요. 전 사진을 보고 있어서 못 봤어요. 차도 진짜 같군요."
  "그럼요. 소형차랍니다."
  "어디서 구하셨어요?"
  "마법사 비슷한 사람이 여기 오지요.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인데, 새로운 타입의 사람이지요. 아
주 좌익이며, 지방경제위원회의 공식 대표랍니다. 그는 우리  목재를 읍으로 가져가서, 자기가 아
는 사람을 통해서 밀가루나 버터를 갖다주어요. 설탕 그릇  좀 줘요. 시베르카, 그럼 재미있는 문
제를 낼까요? 그리보예도프가 사망한 해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는 1795년에 출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피살된 해는 정확히 알 순 없소."
  "차를 더 드시겠어요?"
  "그만하겠어요."
  "이번엔 우스운 문제를 내겠는데, 님베겐 조약이 체결된 시기와 국가는요?"
  "레노치카, 그분들을 괴롭히지 말아요. 오시느라고 피곤하실 텐데..."
  "그럼, 이것만 물어보겠어요. 렌즈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어느 경우에 영상이
제대로 또 반대로 나타나지요?"
  "물리학에 대해서 어쩌면 그렇게 많이 알고 계시죠?"
  "유라친 우리 학교에는 훌륭한 과학 선생이 계셨어요. 남자 학교와 우리 학교를 같이 가르쳤어
요. 그 선생이 어떻게나 좋았든지 말할 수도 없었어요. 얼마나 똑똑히  설명하시는지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말이에요. 안치포프라는 분이었는데 어떤  여선생과 부부였어요. 여학생들이 모두  넋을
잃고 그 선생을 사모했어요. 선생은 군에 자원했는데  돌아오지 못하고 얼마 후 전사했다는 거예
요. 어떤 사람들은 천벌을 받아야 할 군사  위원 스트렐리니코프가 안치포프 선생이 되살아난 망
령이라고 하지만, 그건 허튼 소문이죠. 어림도 없는 소리지. 한 잔 더 하시겠어요?"

                   바르이키노
  1
  겨울이 깊어지면서 시간이 많아지자 지바고는 생각나는 대로 여러 가지 글을 쓰기 시작하
였다.
오 여름, 아름다운 여름이여!
이건 절묘, 바로 그것.
그래서 난 묻고 싶구나,
소리없이 언제 왔느냐고.
  새벽부터 밤까지 자기와 가족을 위하여 땀흘려 지붕을 만들고 식량을 얻기 위해 땅을 파
며, 전능하신 조물주를 본받아 로빈슨  크루소처럼 자기 세계를 창조하고, 어머니와도  같이
새로운 자기를 탄생시키는 일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닌가!
  두 손이 심한 육체 노동에  바삐 움직이며 마음이 육체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때, 기쁨과
성공을 가져올 일을 우리에게 맡겼을 때, 생명을 불어넣어 준 하늘에 몸을 불태우면서 여섯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땅을 파거나 마차에 뒤흔들릴 때 새로운 사상이 구름처럼 머리 속
에 끓어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잠시 동안의 생각, 직관,  추측 따위를 종이에 적어두지 않고
잊어버린다는 것은 손해보다는 이득이 되는  것이다. 독한 블랙커피나 담배  연기에 신경과
상상력을 쥐어짜는 도시의 은둔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잘 듣는 약-그것은 건강과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나는 톨스토이의 인내  생활이나 땅으로 돌아가라고 설교하
는 것도 아니며 또 농업  문제에 대하여 사회주의를 수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며, 우리들 자신의 우연한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를 세워보려는 것도 아니
다. 우리의 예는 많은 이론이 있을 수 있으며,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의 경제는 너무
나 혼란되어 있다. 우리들이 생산하는 감자나 채소 따위는 필요한 양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
으며 나머지는 딴 곳에서 얻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의 토지 사용은 불법적인 것이다.  우리는 제멋대로 하고 있는데다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국가에 숨기고 있다. 우리가 숲에서 재목을 베어내는 것은 국가로부터 훔친 것이
되는 것이지, 그것이 한때 크류게르의 재산이었던 때문은 아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
은 미쿨리츠인의 너그러운 태도 덕분이었다. 그도 우리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
고 그것은 도회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다행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전혀 알지 못했
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일을 집어치웠으며, 내가 의사라는  것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나의 자유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이키노에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어떤 선량한 사람들이 30베르스타나 되는 길을 멀게도 생각지 않고 진찰을 받으러 왔다. 이
들은 닭, 달걀, 버터 따위 물건을 가지고 왔었다. 나는 보수를 받지 않으려고 극구 사양했으
나 이들은 공짜 치료를 받게 되면 병이 낫질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진료 행위 덕분
으로 그럭저럭 조금의 수입이 생겼다, 그러나 미쿨리츠인과 우리가  가장 크게 의지하고 있
는 사람은 삼제바토프 씨이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진정으로 혁명을 지지하고 유라친
시 소비에트가 신뢰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소비에트가 부여한 권한을 행
사한다면 그는 미쿨리츠인이나 우리한테 한마디도 없이 바르이크노의 목재를 징발할 수  있
을 것이며, 우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못할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그가  국가
재산을 훔치고 싶은 생각만 있다면 그는 호주머니를 가득 채울  수도 있으며, 누가 말할 사
람도 없고, 누구와 나눠 먹거나 뇌물을 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우릴  돕고
미쿨리츠인과 토르피나야 역장을 비롯한 이 지방  모든 사람들을 돕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
까? 그는 언제나 뛰어다니면서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우리한테 가져온다. 또 그는 <<공산
당 선언>>과 똑같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잘  읽으며 또 논하길 즐겨했다. 나의
생각으로는, 아마 그의 생활이 그처럼 복잡한 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고독에 지쳐 벌써 죽
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2 
  얼마후 지바고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저택 뒤의 낡은 목조 건물 두 칸짜리 별체에  살고 있다,, 토냐가 어렸을 때, 크류
게르는 이 별체에 재봉사와 가정부 또 퇴물이  된 유모와 같은 특별한 하인들을 살게 했었
다.
  우리가 왔을 때, 이 집은 매우 초라해서 우리는 급히 이것을 수리했다. 일꾼의 도움을  받
아서 페치카를 새로 놓고 굴뚝을 바로 세워서 지금 두 방은 따뜻해졌다.
  공원이 있는 이 근처에는 새로 자라난 초목으로 해서  낡은 흔적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겨울이 닥친 지금은 모든 것들이 생기를 잃게 되어 생명을 가지고 있던 자연도 이미
죽어간 것들을 감추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의 흔적이 눈 속에 파묻혀 버렸으며 뚜렷이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가을은 건조하고 따스한 날씨였다. 비와 추위가 닥치기 전에  감자를
캐낼 수가 있었다. 미쿨리츠인한테 돌려줄  것을 제외하고도 20부대나 되는 감자가  생겼다.
우리는 이 감자를 저장고 제일 큰 상자 속에 담고  낡은 담요와 짚으로 덮었다. 지하실에는
토냐가 소금에 절인 오이와 양배추가 각각 두 통씩 놓여 있었으며, 대들보에는 싱싱한 양배
추를 두 포기씩 걸어두었다. 마른 모래 속에는  당근, 무, 사탕무우, 순무우 등을 저장해  넣
고, 높은 장소에는 완두나 콩 따위를 잔뜩 저장했다. 창고 속에는 봄까지 쓸 수 있는 충분한
나무가 마련돼 있었다.
  나는 지하실의 훈훈한 입김을 좋아했다. 겨울날 이른 새벽에  희미하게 비치는 등불을 손
에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 문을 여는 순간, 흙과 나무와 무우와 눈의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
른다.
  지하실에서 나오면 날은 아직 밝지  않았다. 문의 삐걱거리는 소리,  재채기 소리, 그리고
말밑에서 눈이 밟히는 바스락 소리만 들린다. 멀리 양배추 밭에서 산토끼가 뛰어나와 눈 위
에 이리저리 발자국을 남기면서 뛰어 달아난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여오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치질 않는다. 새벽닭 우는 소리도 이미 그치고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끝없는 눈 벌판위에는 산토끼 발자국만이 아니라 삵괭이 발자국이 구슬끈처럼 이어져  가
고 있었다. 삵괭이는 고양이같이 양쪽 발을 번갈아 내디디며 하룻밤에도 수십 리 길을 간다
고 한다.
  덫을 놓으면 삵괭이는 걸려들지 않고 산토끼가 걸려들어, 덫을  풀고 보면 눈속에 파묻혀
서 딴딴히 얼어 굳어 있다.
  첫해 봄과 여름에는 고생도 많았다. 우리는 힘껏 일했다. 그러나 이제 겨울 밤에는 쉴  수
가 있었다. 삼제바토프가 석유를 공급해 준 덕분에 우리는 등불가에 모여 앉는다.  여인네는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고, 나와 장인은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 페치카는 아주 잘 타고  있
었다. 화부 노릇은 내가 도맡아 했고, 열을 허비하지 않도록 바람 마개를 조절하는 데  신경
을 썼다. 잘 타지 않는 나무가 있으면 눈 속에 던져버린다. 나무는 횃불과 같이 불꽃을 튕기
며, 잠자는 정원, 새하얗게 네모진 잔디밭을 훤히 비쳤다가는 싯싯 소리를 내면서 눈더미 속
으로 묻혀갔다.
  우리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푸슈킨의  <<예프게니 오네긴>>이나 그 밖의 시
들, 스탕달의 <<적과 흑>>, 디킨즈의 <<두 도시의 이야기>>의 번역탄과 콜레이스트의 단
편들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3
  봄이 가까워 올 무렵에 지바고는 다음과 같이 썼다.
  토냐는 임신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으나 내말은 통 믿어주질 않는
다. 그러나 나는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기 증세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이상  더
확실한 징후를 기다릴 필요조차 없었다. 이런 때에는 여자의  얼굴은 변해가지만 매력을 잃
게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용모  따위는 돌보지 않게 되고, 몸 속에 움직이는  미래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다. 이젠 혼자가 아니었다. 아내는 용모를 돌보지 않게 되어  육체적으
로 쇠약해진 듯했다. 얼굴이 까칠해지고 피부가 거칠어지고 눈동자가 지나치게 번뜩여서 이
모든 변화를 감당해낼 수가 없어 포기하고 만 것이다.
  토냐와 우리는 항상 떨어져 있지 않고 이 어려운 한 해 동안 함께 지내어 서로 더욱 가까
워졌다. 토냐는 유능하고 강인해서 피로를 모르고 일해 왔다. 헛된 시간이 생기지 않게 하려
고 현명하게 일할 계획을 짜내고 있는 걸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잉태는 다 순결하지만,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가르침만큼 모성의 개념을 잘 나타낸 것
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어린애를 해산할 때면, 어떤 여성이든지  버림받고 난 외로움으로 고독감에 잠기게  된다.
이 중대한 순간에 남성은 지금까지 전혀 관계가 없는,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동
떨어진 사이가 되고 만다.
  여성은 혼자서 자손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어딘가 실존의 한 모퉁이에 요람을 놓기
위해 조용하고 안전한 장소로 옮긴다. 그리하여 말없이 홀로 애기를 키우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신에게 열심히 기도하라'고 청한다.  그리고 찬미의 소리가 성
모의 입을 빌어 말하게 된다. '내가 주를 찬양하며, 내 영혼이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을 기쁘
게 섬기나니,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굽어 살피소서.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누릴 복이 있
다 일컬으리로다. '성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식 때문이었다. 주는 마리아를 찬양하였고 전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사하셨다고 했다. 주는 마리아의 영광이었다. 모든 여성에게  있
어서 신은 그 자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람의  어머니는 이런 감정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여성은 위인의 어머니인 것이다-훗날 그들을  실망시키는 때가 있더라
도 그것이 여성의 죄는 아니다.
  4
  우리는 푸슈킨의 <<예프게니 오네긴>>과 그의 시를 줄곧 읽고 있었다. 어저께 삼제바토
프가 찾아와 맛있는 음식과 등유를 주었다. 우리는 예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생각으로는 예술이란 하나의 카테고리가 아니고, 여러 가지 개념이나 파생적인 형상
을 망라하고 있는 한 부문도 아니며, 이와는 반대로 뭔가 응집되고 엄밀하게 한정된 것이라
생각했었다. 예술이란 모든 예술 작품 속에 존재하는 본질이며, 예술 작품에 적용되는  하나
의 힘이며, 예술 작품 속에서 만들어내는 진리인 것이다. 나는 예술이 형식이라고 생각한 적
은 결코 없었다. 예술은 비밀로 숨겨진 내용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것은 나에게 너무도  분
명한 것이었다. 나는 온 정성으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거나 형상화 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
려운 일이었다.
  하나의 문학 작품은 제목, 주제, 내용, 인물의 성격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들에게 호소
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작품 속에 예술이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를 감동시
킨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속에 있는 예술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지 결코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의 주인공)의 범죄 이야기는 아니다.
  원시적 예술, 이집트의 예술, 그리스의  예술, 그리고 우리의 예술은  수천년 동안 변하지
않은 같은 예술이었다. 예술은 하나의  이념, 즉 생명에 관한 발언,  낱개의 말로써 나눌 수
없는 포괄적인 발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작품에도 여러  잡다한 것 가운데 예술의 한
조각이 섞여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눌러버리고 그 조각이 작품의 알맹이가 되어야 하는 것
이다.

  5
  오한이 좀 나고 기침을 했다. 열도 좀  있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숨이 가쁘고  목구멍에
무슨 덩어리가 막혀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다. 이것은  심장병이 아닐까? 한평생 심
장병을 앓았던 불쌍한 어머님이 나에게  물려준 약한 심장의 최초의  징후가 아닐까? 정말,
그럴까? 이렇게 빨리? 그렇다면 난 오래 살 수 없겠군.
  방안에는 숯 냄새가 좀 풍겼다. 다림질을  하는 냄새도 났다. 토냐가 다림질을 하고  있었
다. 때때로 페치카에서 벌겋게 타고 있는 숯덩어리를 집어다 다리미에 넣는다. 그러면  이빨
을 다물 듯이 뚜껑이 닫힌다. 무엇인가 나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으나 좀처럼 그 생각이 떠
오르지 않는다. 걱정 탓일까.
  삼제바토프가 비누를 준 일이 고마워서 이틀 동안 빨래를 했다. 그 때문에 싸샤를 돌보지
않아서, 지금 글쓰는 나에게 와서  테이블 밑의 횡목에 걸터앉아 나를  썰매에 태운 것처럼
놀고 있다. 삼제바토프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찾아오면 꼭 싸샤를 썰매에 태워주
었다.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시내 도서관으로 찾아가서 이 고장의  민속이나 역사를 일고 싶다.
도서관은 몇 권의 귀중한 장서를 기증받았다는 소문도 있고,  보기 드물게 훌륭하다는 평판
이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곧 봄이 돌아오면 그때는 그럴 시간이
없어진다.
  점점 두통이 더해 갔다.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잠을 깨고 나면 곧 잊어버리는 뒤죽
박죽의 꿈을 자주 꾸었다. 기억에 잠시 남는 것은 눈이 뜨일 때의 부분만이었다. 그것은  어
떤 여자의 목소리였다. 꿈속에서 들은 여자의 목소리는 허공에 울려 퍼지며 나의 기억을 되
살렸다. 마음속에서 그 목소리가 자꾸 들려왔다. 여자 친구의 이름을 이것저것 생각해보았다
-그 깊고 조용한, 좀 목쉰 소리의 사람을 아무리 찾아보았지만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토
냐의 목소리라고 생각해봤다. 나의 귀가 그녀 음성에는 하도 익숙해 있어서 오히려 처의 음
성을 꼬집어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나의  처라는 걸 잊어버리고 제3자의 기분으
로 찾아보려고 애썼으나, 역시 토냐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그것은 풀리지  않았
다.
  꿈은 통상 낮에 받은 강렬한 인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그 당시에는 전혀 주의하지 않았던 일-말하자면 곰곰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던 막연한
생각, 아무렇지도 않게 귓전을 스치고  간 말들이 밤이 되면 피와  살을 갖추고 되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낮에 눈 뜨고 있는 사이 무시된 것을 보상이나 하듯이, 그것이 꿈의 주제가 되
는 것이다.

  6
  맑고 추운 밤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죄다 이상하게 맑고  순수했다. 대지, 하늘, 달, 별
들, 모든 것이 서리에 얼어붙어 함께 못박혔다. 정원에는 뚜렷한 형체의 나무 그림자가 오솔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길 건너편 여러 군데에 검은 형상들이 줄곧 보이는 것 같았다.  큰
별들이 마치 푸른 운모의 등불처럼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고, 작은  별들은 여름 벌판의
들국화처럼 온 하늘에 널려 있었다.
  밤마다 우리는 푸쉬킨에 대하여 토론을 했다. 전날 밤에는 학생 시절의 초기 작품에 관하
여 이야기가 있었다. 그의 시는 운율 선택에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모른다.
  행이 긴 시로서는 아르자마스(19세기 초기의 문학 서클. 푸쉬킨도 그의 한 사람)의 친구를
놀라게 하려는 것이 그의 야망이었다. 어른에 뒤질세라 신화나 과장, 조작된 퇴폐선과  향락
주의 등으로 숙부를 놀라게 하려고 했으며 또  재간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시안(3세
기경에 살았다는 켈트족의 시인)이나  파르니(1753∼1814. 프랑스 시인)의 모방을  그만두고 
<차르스코에 세로의 회상>으로부터 <자그마한 도시>, <누나에게 보내는 글>, <나의 잉크
병에게> 또는 <유진에게>를 옮겨가자 후기의 푸쉬킨을 이미 엿볼 수가 있었다.
  그의 시에는 마치 창문에서 방으로 흘러들어오듯 거리의 빛과 공기, 생활의 소음,  사물과
현실이 흘러들어와 있었다. 외부 세계, 일상 생활의 여러 가지 일과 명사들이 그의 시  속에
몰려 들어와서 시의 줄들을 차지하고, 애매한 표현을 몰아내고 나서 시구를 차지하였다.  그
의 시 곳에는 끓임없이 사물이 등장하여 리듬을 이룬다.  훗날 그렇게도 유명해진 푸쉬킨의
4음보구는 마치 러시아의 현실의 척도이며, 러시아의 모든 존재를 본뜨는 것과 같았다. 마치
장갑이나 신발을 잘 맞도록 하기 위하여  신발의 치수나 장갑의 사이즈를 지시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 후 대체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네크라소프(1821∼1877. 러시아 민중 시인)의  3음구와
강약약격 속에는 구화체 러시아의 운율과 보통 말할 때의 음조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7
  나는 의사나 농사일을 하는 한편 무엇인가 귀중한, 학술적이거나 예술적인 작품을 남기고
싶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파우스트가 된다고 했다. 이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파악하
고 경험하고 표현하고 싶었다. 파우스트는  선조와 동시대인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학자가
된 것이다. 과학에 있어서의 발전은 반발 법칙에 의하여 좌우된다. 모든 전진은 알려진 오류
나 그릇된 이론을 반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파우스트는 그의 스승들의 고무적인 모범이 있
었던 덕분으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예술의 진보는 인력 법칙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경애하는 옛 사람들을 모방하고 찬양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의사이면서 동시에 작가가 되는 것을 무엇이 방해할 것인가? 가난이나 방황, 떠돌이
생활 때문은 아니다. 지금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 미사 여구의 분위기 탓이라고 생각된다. 어
디서나 입버릇처럼 '미래의 여명'이라느니, '신세계의 건설', '인류의 선구자'  등의 어구는 처
음 들었을 때는 '얼마나 폭넓고 풍성한 상상력이랴!'하고 감탄도 했지만 실은 상상력이 없는
값싼 허식에 지나지 않았다.
  진실로 위대한 것이란 천재의 손질로써 변모하게 된 극히 흔해빠진 것들 뿐인 것이다.
그 제일 좋은 실례가 푸쉬킨이다. 그의 시는 성실한 노동, 의무, 일상 생활을 찬양하는 찬가
였다. 오늘날 우리는 시민 또는 소시민이란 용어를  비난하고 있으나 푸쉬킨은 <족보>에서
자기가 중류 계급에 속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예상되는 비판에 대하여 자기가 평민임을
강조하고 <오네긴의 여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썼다.
  지금 나의 이상은 가정의 주부,
  내 가장 큰 소원은 조용한 생활
  그리고 큼직한 한 사발의 배추국.
  내가 러시아 문학 전반에 걸쳐 가장 좋아하는 것은 푸쉬킨과 체호프의 러시아적 소박성이
다. 그들은 인류의 궁극의 목적이라든지 그들 자신의 구원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이런 것들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떠버
리의 사치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고골리,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은 하염없이 생명의
의미를 추구하여 죽음을 준비하고 결론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푸쉬킨과 체호프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문학자로서의 천직이 그들에게 부과한
그때그때의 특정한 임무에 몰두했을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일을 해가고 있는 과정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 삶과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적이며 개인적인 것으
로 취급해왔었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인 일들이 언제나 모든 인류의 관심사가 되어, 마치 익
기도 전에 따낸 푸른 사과가 저절로 익어 차츰 붉어지듯이 의미를 깊게 하고 있다.

  8
  봄의 첫 징후는 해빙에서부터 공기는 사순절의 떡과 보드카처럼 매끄럽게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기름칠을 한 듯한 태양이 숲속에서 졸고, 졸리는 듯한 소나무 잎이 속눈썹처럼 움츠
리고, 웅덩이는 한낮에 기름처럼 번들거렸다. 자연은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켜고 돌아누워
다시 잠들고 있었다.
  <<예프게니 오네긴>>의 제7장은, 봄을 묘사하고 오네긴이 없는 텅 빈 집과 언덕 기슭의
냇가에서 잠들고 있는 렌스키의 무덤을 그리고 있다.
  봄의 연인 종달새가
  밤을 지새워 노래 불렀다.
  들장미가 피어났다.
  왜 '연인'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이 형용어가 자연스럽고 적절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종달
새는 봄의 연인이며 '들장미'와 운을 맞추기에도 필요했다.  유명한 민요에 나오는 오지흐만
치의 아들을 '도둑 종다리'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종달새 휘파람 소리에
  야상의 외침에
  초목은 떨며
  꽃잎은 지고
  숲속의 어둠은 땅에 깔리고
  착한 사람들은 쓰러져 죽는다.
  우리가 바르이키노에 도착했을 무렵, 봄은 아직 일렀다. 얼마 있지 않아서 오리나무, 개암
나무, 들벚꽃나무가 푸르러 갔다. 특히 미쿨리츠인 저택 아래쪽 슈치마 골짜기는 푸르게  물
들어 있었다. 몇 밤이 지나고 나자 종달새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서 처음으로 듣기나 하듯이, 종달새 소리와 다른 새소리의 차이에 새삼 감명을 받
았다. 그 넘쳐흐르듯이 풍부한 소리가 묘하게 떨리는 소리로  살짝 바뀌어가는 자연의 신묘
한 조화, 그 소리에는 다채롭고 힘차고 아름다운 울림이 있다! 투르게네프는 어디선가 휘파
람 소리 같고 피리 소리 같은  이 새들의 노래 소리를 묘사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도 특히
주의를 끄는 두 구절이 있었다.  하나는 호사스럽고 탐욕스럽게 되풀이하여  '쭈 쭈 쭈'하고
이슬에 젖은 초목이 몸을 떨며 기쁨에 대답한다. 다른 하나는 엄숙하게 가슴에 다가서서 호
소나 경고하듯 '깨어나세요! 깨어나세요! 깨어나세요!'하고 부르는 것만 같았다.

  9
  봄이 왔다. 우리는 농사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기를 쓰는 일을 그만두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으나 겨울까지는 중단해야 했다.
  요전날, 진짜 사순제 날이 오고 말았다. 눈이 녹아서 물바다와 진구렁을 이루고 있을 때였
다. 병든 농부 한 사람이 썰매를 타고 뜰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의사를 그만두었고, 약도 기
구도 없다'고 말하고 진찰을 거절하였으나, '피부가 잘못 됐습니다. 도와주세요. 아픈 사람입
니다.'하고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었다. 내 심장은  돌 덩어리가 아니었다. 나는 환자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그의 병은 낭창이었다. 그를 진찰하고 있는 동안 나의 눈에 띈 것은 창
문턱에 놓인 석탄산 병이었다(저것이 어디서 내손으로 들어온 것인지 물을 필요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삼제바토프한테서 온 것들이다). 이때 또 한 대의 썰매가  뜰에 보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다른 환자를 싣고 온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구름같이 나타난 나의 아우 예브그
라프였다. 그는 토냐, 쌰샤 그리고 장인과 함께 집안 이야기를 나눴고, 나도 얼마 후 그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어디서 오는 길이며, 어떻게 왔느냐고  캐물었다. 예브그라프는 여느 때와
같이 분명치 않게 미소를 짓고는 어깨를 흠칫하며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그는 약 두 주일 동안 머물렀다. 자주 유라친에 다녀오곤  했으나 돌연 땅속으로 꺼져 버
렸는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예브그라프가 삼제바토프보다는 더 유력하다는 것을 그가 머
물러 있는 동안에 알게 되었으나,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이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어디서 왔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세력을 가졌을까? 그는 우
리들의 생활을 더 편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토냐는 쌰샤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
게 하고, 나는 의사 노릇을 하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돌봐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 우리 형편을 펴게 해주겠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다만 빙긋이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졌다. 우리의 생활이 실제 변화되고 있다는  징조
가 나타나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야! 그는 나의 이복 동생이었다.  우리는 성이 같은 지바고라는 것 외
에는 그에 대하여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가 선량한 천재로서 또 나의 구세주로서 나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와 여러 가지 어려
움을 단번에 해결해준 일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아마도 누구의 생활에나, 많은 등장인물 속
에는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힘이라 할까, 상징적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있어서 그것이 부
르지도 않는데 뛰어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의 경우는 동생  예브그라프가 은인 역할을 하
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지바고의 수기는 뚝 끊기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계속 쓸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10
  유라친 시립도서관 열람실에서 지바고는 대출한 책 몇 권을  읽고 있었다. 열람실은 여러
개의 창문이 있었고, 1백 명쯤  수용할 수 있었다. 창가까지 긴  테이블들이 줄지어 놓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도서관은 닫게 돼 있었다. 봄에는 거리의 가로등이 켜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바고는 언제나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저녁때가 지나도록 읍내에 머물
러 있는 일은 없었다. 미쿨리츠인한테서 빌어타고 온 말은  삼제바토프 집에 두고 오전중에
는 독서하고, 오후엔 바르이키노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도서관에 다니기 전까지 지바고는 유라친에는 좀처럼 나오지를 않았다. 특별히 볼일도 없
었고 읍내를 잘 알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이 점점 열람실에 모여들어 그의 바로
옆자리나 좀 떨어진 자리에 앉게 된  지금, 흡사 네거리의 혼잡한 한 모퉁이에  익숙해지고,
주민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이나 거리까지 열람실에 흘러들어오고 있는  느낌이었
다.
  창 너머로, 상상하고 있었던 유라친이 아니라 현실의 거리 모습을 내다볼 수가 있었다. 가
운데 있는 가장 큰 창문 앞에는 끓인 물을 넣어두는  물통이 놓여 있었다. 독서하는 사람들
은 휴식을 할 때면 계단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우거나 물통  가에 모여서 끓인 물을 마시고,
마시다 남은 물을 대야에 버리고 나서는 창가에 서서 거리의 경치를 즐겼다.
  도서관에 찾아오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었다. 그 대부분은 지방의 인텔리층의 중년들이
며 나머지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전자의 대부분은 부인네들이었다. 보잘것없는 옷차림에 게으르고 천박한 모습의 여자들이
었으며, 병색이 나는 얼굴은 굶주림 때문인지 혹은 황달이나  수종에 걸려서인지 부어 있었
다. 그들은 매일같이 도서관에 다니며 직원들과도 친했고 도서관  안에서도 마음 편하게 지
내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서민층 출신의 사람들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용모에 명절날처럼 화려하게  성
장하고 교회에 가는 사람들처럼 들뜨고 초조해했다. 이들은 다른 열람자보다는 더 떠들썩했
다. 그것은 이들이 도서관 규칙을 모르고 있어서가 아니라.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탓으로 오히려 허덕이는 발걸음과 말소리를 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창문이 있는 반대쪽 벽의 우묵히 들어간 곳에 높게 단을 만들고 카운터를 설치하여 사서
와 두 사람의 조수가 앉아 있었다. 조수 한 사람은 심통궂은 얼굴 을하고 있는 여자였고 털
숄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필요해서가 아니라 기분이 내키는 대로 줄곧 코안경을 썼다 벗
었다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조수 한 사람은 검은 비단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으며, 가슴이 약
한 사람같이 언제나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숨쉬고 있었으며,  무슨 말을 할 때에도 절
대로 수건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도서관의 다른 직원들도 역시 볼이 축 늘어진 얼굴에 그 피부는 소금에 절인 오이나 곰팡
이 낀 것처럼 푸르죽죽하였다. 세 사람의 직원은 새로 오는 손님에게 교대로 낮은 목소리로
규칙을 설명해주고 대출증을 분류하거나 서적을  주고받고 하면서도 틈을 타서는  이것저것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마치 갑상선종에 걸린 사람들 같은 주위 사람들의 부어오른 얼굴, 그가 도착하던 날 아침
유라친 역 신호수를 보고 있던 여인의 얼굴을 생각게 하는  이 얼굴들과, 밖에 보이는 실제
의 거리 풍경과 열람실 안에서 상상하는 거리 풍경을 위시하여 지바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상이 떠올랐으며, 거리의 경치나 화물차 마룻바닥에  걸터앉았던 삼제바토프의 모습과 그
의 비판이나 설명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는 여태까지 거리 밖에서 들었던 이 설명을 지금 그를 중심으로 하여 바로 주위에서 이
루어지는 정경과 연결시켜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삼제바토프가 하던 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헛수고에 그쳤다.

  11
  지바고는 책이 놓여 있는 열람실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지방 농지 통계
에 관한 보고서와 지방 민속에 관한  서적 몇 권이 놓여 있었다. 그  밖에도 푸가초프 반란
(1773∼1775. 푸가초프 지휘하에 농노제에 대항하여 일으킨 투쟁)에 관한 서적 두 권을 신청
하였으나, 비단 블라우스를 입은 계원이, 혼자서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책을 대출할 수는 없
다고 말하면서 다른 책을 대출하려면 이미 대출해 간 정기 간행물과 참고 서적 일부를 반납
해야 한다고, 입에 손수건을 가린 채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는 꼭 필요한 것만 가려내고 나머지는 도로 반납하고, 역사 서적을 빌기 위하여
이미 대출해 놓고서 가려내지 못했던 책더미를 서둘러 휘저었다.  그는 재빨리 책장을 넘기
며 목차를 살피고 각 장의 제목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열중한 나머지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열람실의 사람들은 그를 방해하거나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가까이  있
는 사람들을 잘 관찰하여 그의 좌우에 앉은 사람들은 그의 의식에 소화되고 있기 때문에 눈
을 떼고 보지 않더라도 그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마치 창밖에 보이는 집과 교회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듯이 이들 열람자들도 자기보다 먼저 자리를 떠나지는 않으리라  생
각했다.
  그러나 해는 멈추고 있지 않았다.  시종 움직이면서 열람실 동쪽 구석을  떠난 해는 지금
남쪽에 향한 창문 너머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고 있었다.
  손수건을 코에 대고 있던 여직원이 단에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갔다. 아직 햇빛이 들지 않
고 있는 구석 창문을 제외하고는 주름이 잡힌 흰 커튼으로 죄다 가려버렸다. 햇빛은 기분좋
게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모든 창문을 다 가렸으나 창문 하나만 가리지 않았다. 제일 구석의
그 창문에 와서 노끈을 잡아 당겨 공기 창문을 열려는  순간 재채기를 시작했다. 열 번이나
열 두 번쯤 재채기를 연발하고 있을 때, 지바고는  그녀가 미쿨리츠인의 처제이며 삼제바토
프가 말하던 툰체프 댁의 따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고 있던 다른 사람들과 같
이 그도 고개를 돌려 여직원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그는 열람실 안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맞은편  끝에 새로 온 사람이 하
나 더 있었던 것이다. 지바고는 한눈에 라라를 알아보았다.  그에게는 등을 보이고 앉은 채,
재채기를 하던 여직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직원은  몸을 기울이고
듣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얘기가 여직원한테는  흡족했던 것 같았으며 순식간
에 지긋지긋하던 감기가 나아버리고 신경질을 피우던  증세도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감사한
듯 다정스럽게 라라를 바라보면서, 얼굴에 대고 있던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행복과
자신에 넘친 미소를 띄어 가면서 그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열람실 여기저기에 앉은 사람들도 이 흐뭇한 광경을 바라보고서,  그들 또한 미소를 지으
며 라라에게 칭찬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 사소한 사건으로, 지바고는 라라가 읍내 사
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환대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2
  지바고는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성질로서는
아주 이상스럽게도, 과거에 그녀를 대하면 수줍어지고 솔직한 마음이 없어지던 것처럼 조금
도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녀를 방해하지 말고 자기가 하던 일이나 계속하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고 싶은  충동에서 벗어나려고 의자를 책상 사이에  돌려놓고
등을 보이고 앉았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또 한 권은 무릎 위에 펼쳐놓고는  독서에 주의
를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책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헤매는 것이었다.  느
닷없이 그는 바르이키노에서 어떤 겨울밤 꿈속에서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 바로 라라의 목소
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해진 기색을  나타내더니 주위 사람들이 놀랄
만큼 거칠게 의자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나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쪽 옆에서 바라보았다. 밝은 체크  무늬의 블라우스에 벨트를 맨
그녀는 고개를 오른쪽 어깨로 기울이고 어린애처럼 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따금 책에서 눈을 떼고는 천장을 쳐다보거나 앞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기곤 했
다. 그러다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거나 머리를 짚었다. 그러더니 재빨리 연필을 노트에 움직
여서 책을 발췌하고 있었다.
  지바고는 이전 멜류제예보에서 받은 인상과 똑같은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  여자는
남성의 주의를 끌거나 예쁘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의 본능을 깡그리 경멸하
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아름답기 때문에 자기를 벌하고 있는 거나 같았다. 그리하여 이  거
만스러운 적의는 그녀의 매력을 열 배나 더하게 했다.'
  그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잘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마치 독서가 가장 고상한 인간
의 행위가 아니라 짐승들도 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일이며, 우물에서 물을 푸거나 감자 껍
질을 벗기듯이 쉽게 책을 읽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에 잠기고 있는 사이에 그는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마음의 동요
가 멈추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라라의 존재가 신경질을 부리던 여직원에  작용하였던
것처럼 그의 신경에도 편안을 가져다 주었다.
  이젠 의자의 각도에 마음을 쓰거나 주의가 흩어지는 따위를 두려워하지 앉게 된 지바고는
전보다 더 열을 내면서 한  시간쯤 독서에 몰두하게 되었다. 테이블위에  쌓인 산더미 같은
책들을 죄다 훑어보고 나서 필요한  책을 추려내고, 그러는 사이에 발견한  중요한 논문 두
편을 골똘히 읽을 수 있는 여유까지 있었다. 이윽고 오늘은 이만 하기로 만족스럽게 생각하
면서 책들을 모아서 테이블 위에 챙겼다. 그리하여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별다른
생각도 없이 오전중 열심히 공부를 하였으니까 옛 친구나 만나서 회포를 푼다는 것은 당연
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어나 방안을 휘둘러보았으나 라라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
았다.
  지바고가 반납하기 위하여 책들을 가지고 갔을 때, 그녀가  반납한 서적도 카운터에 놓여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교재들이었다. 교사로  복직하기 전에 자신을 정치적으로  재교육하는
것 같았다.
  책 사이에 끼워놓은 대출증에 그녀의 주소가 씌어 있었다.  지바고는 그 주소를 적어두었
는데 '쿠페체스카야. 조각품들이 있는 집의 맞은편'이라는 괴상한 주소에 놀랐다.
  그래서 지바고는 알 만한 사람에게 물었다. 유라친에서 '동상이 있는 집'이란 표현은 모스
크바에서의 교구 교회의 이름을 따서 거리의  명칭으로 부르거나 페테르부르그에서의 '다섯
개의 모퉁이'와 같은 표현이었다.
  그것은 여인 동상과 조각, 라라, 심벌즈를 손에 든 고대 뮤즈의 조상이 장식된 어두운  청
회색 건물이었다. 어떤 상인이 지난 세기에 개인용 극장으로 지었던 건물인데, 그 재산을 상
속받은 사람들이 상인조합에 이 건물을 팔아버렸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거리의 이름이 쿠
페체스카야로 불리고 그 집 일대를 '동상이 있는 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시 당위
원회가 쓰고 있으며, 이전 같으면 포스터나 프로그램이 붙어 있던 전면의 경사진 낮은 벽에
는 지금 정부의 발표문이나 법령 따위가 나붙어 있었다.

  13
  5월 초순의 찬바람이 불고 있는 오후였다. 지바고는 거리에서 일을 마치고 잠시 도서관을
기웃거리다가 급히 모든 계획을 바꾸고 라라를 만나러 같다.
  바람은 모래와 먼지를 날려 지바고의 걸음을 이따금 멈추게 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눈
을 감고 먼지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다시 걸음을 계속했다.
  라라는 쿠페체스카야 거리와 노브스발로치느이 골목길 모퉁이,  동상이 있는 어두운 청회
색 집의 맞은편에 살고 있었다. 지바고는 그때 동상이 있는 집을 처음 보았다. 이름  그대로
괴상하고 소연한 인상을 주는 집이었다.
  위층은 사람의 반만큼씩한 신화의 여인  조상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세차게 휘몰아쳐
오가는 먼지 바람이 멈춘 사이에  바라본 이 여신상들의 모습은, 흡사  온 집안의 여자들이
발코니로 나와서 난간 너머로 그를 내려다 보는 것만 같았다.
  라라네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거리에서 현관으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골목길에서 들로 통하고 있었다. 지바고는 정면에 문이 있는 것을 모르고 골목길 문
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문을 지나 들어오는 순간 바람이 먼지를  공중으로 휘몰아쳐서 지바고는 뜰안을 볼  수가
없었다. 수탉한테 쫓긴 암탉이 성가시다는 듯 울어대면서 그의 발 근처를 스쳐갔다.
  먼저 구름이 사라지자 우물가에 있는  라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물통  두 개에 물을
채우고 작대기에 걸어서 왼쪽 어깨에 지는 것이었다. 먼지를 막기 위해 머릿수건을 쓰고 이
마에 동여매서 마치 두견새 같았다. 그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치맛자락을 양 무릎으로 여미
고 있었다. 물을 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또 한 번 휙  바람이 일면서 머릿수건이 벗겨져 담
저만큼에 날려가는 바람에 멈추어 섰다. 그쪽 담에서는 아직도 암탉들이 꾸꾸거리고 있었다.
  지바고는 뛰어가 수건을 집어들고 우물가로  가서 라라에게 주었다. 그녀는  새삼 놀라는
기색도 없이 여전히 자연스러운 얼굴로 그저 "지바고!"이 한 마디뿐이었다.
  "라라!"
  "여길 어떻게 오셨어요?"
  "물을 내려놓으시오. 내가 갖다드릴 테니."
  "나는 하던 일을 중도에서 그만두지 못하는 성미예요. 저를 만나러 오셨다면 이리로 오세
요."
  "당신 말고 누굴 만나러 왔겠소?'
  "누가 알아요."
  "어찌됐든 물통을 나한테 주시오. 당신이 수고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어요."
  "이게 일인가요 뭐. 그냥 두세요. 괜히 층계에  물이나 엎지르시려구. 그보다도 오신 영문
이나 말씀하세요. 무슨 바람이 불었지요? 이 지방에 오신지 1년이 넘도록 한 번도 찾아주지
않으셨으면서?"
  "어디서 알았소?"
  "세상 소문이 오죽한가요. 더구나 도서관에서 당신을 본걸요."
  "그럼 왜 모르는 체했지요?"
  "당신은 나를 못 보셨나요?"
  흔들리는 물통의 무게에 몸을 휘적거리며 그녀는 지바고에 앞서 아래층 낮은 입구를 지나
가자 재빨리 웅크려 물통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작대기를 벗어버리고 몸
을 일으키고 나서는 어디서 났는지 작은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자, 들어오세요. 집안 통로로 해서 현관방에 안내하겠어요. 거기가 밝아요.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는 물통을 가지고 뒷층계로 올라가서 좀 치우고, 옷도 갈아입고 올게요. 오
래 걸리진 않아요. 이 멋있는 층계를 보세요. 무늬가 새겨진 주철 난간은 위에서 밑을  내려
다볼 수 있어요. 낡은 집이랍니다. 폭격 때문에 석조가  파괴되었어요. 벽돌 새에 생긴 틈을
보세요. 저와 카첸카가 외출할 때에는 여기에 열쇠는  감춰두어요. 기억해두세요, 아무 때나
제가 없는 사이에 당신이 찾아오실지 모르니까요. 여기서 열쇠를 찾아서 문을 열고, 제가 돌
아올 때까지 편히 계시도록 하세요. 자,  보셨지요. 여기에 두었어요. 지금은 필요하지  않아
요. 제가 뒷문으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열겠어요 한 가지 골칫거리는 쥐랍니다. 너무나 많아
서 잡히지도 않아요. 낡은 건물의 벽이  허물어져서 사방에 틈이 생겼어요. 한번 오셔서  절
도와주시겠어요? 마루와 띠나무 새를 막아야 해요. 자, 그럼 여기서 무엇이든 생각하면서 계
세요. 곧 당신을 부를게요."
  기다리는 동안에 낡은 벽과 철층계를 구경하면서 생각했다. '그녀를 도서관에서 보았을 때
는 고된 육체 노동이나 하는 것처럼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대로 물을 길어 나
르는 일이, 마치 아무 어려움이 없이 가볍게 독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하는 모든  일
은 거침없이 돼갔다. 마치 어려서 인생의 길을 떠날 때부터  날아다닐 듯 민첩해서 그저 손
을 대는 일마다 척척 자연스럽게 해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녀가 몸을 숙일 때 잔등의 선
에서도, 입술을 가볍게 열고 턱을 둥글게 부풀리며 미소짓는 폼에서, 그리고 말하고  생각하
는 데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지바고!" 라라가 층계 위에서 불렀다. 그는 층계를 올라갔다.

  14
  "저의 손을 잡고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가구를 쌓아 둔 방 두 개를 지나지 않으면 안
돼요. 어디 부딪쳐서 다치지 않도록 하세요."
  "정말 미로 같군요. 혼자선 길을 찾지 못하겠군. 왜 이렇지요? 집 수리중인가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이건 남의 집이랍니다. 우리는 집 임자를 알지도 못해요.
우리는 학교 관사에 살고 있었는데, 학교가 유라친 시 소비에트 주택부에 접수 되었기 때문
에 저와 딸은 주인이 버리고 간 집을 할당받게 되었답니다. 남은 가구들이 많았고, 저는  남
의 것에는 손대고 싶지가 않아서 이 방 두 군데에  가구를 모조리 옮기고, 햇빛을 막으려고
창문을 발라버렸답니다. 손을 놓으시면 안 돼요,  길을 잃게 되니까. 자,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미궁을 벗어나게 됩니다. 여기가 저의 방 문이예요.  곧 밝아질 거예요. 발 조심하
세요."
  그녀의 안내를 받아서 방으로 들어선 지바고는 문 맞은편 창문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망에
감명을 받았다. 뜰 저쪽은 옆집 뒤뜰이었으며,  그 저편 강가의 공지에는 염소와 양들이  긴
털옷을 땅바닥에 끌면서 풀을 뜯고 있었다. '모로 베트친킨 회사. 파종기·탈곡기' 눈에 익은
광고판이 서 있었다. 광고판 때문에 우랄에 도착했던 날의 일을 상기하게 된 지바고는 라라
에게 그 예기를 했다. 그런데 스트렐리니코프가 이 여자의  남편이었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
을 그만 잊고서, 찻간에서 군사위원과 만났던 이야기를 해버렸다. 이 이야기는 그녀에게  각
별한 인상을 준 것 같았다.
  "스트렐리니코프를 만났단 말이에요?" 그녀는 열을  올려서 물었다.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 이상해요. 마치 당신이 그를 만나게 될 운명이었나 봐요. 언젠가는 말씀드리겠
지만 틀림없이 놀라실 거예요. 스트렐리니코프는 당신에게 나쁜 인상보다는 오히려 좋은 인
상을 준 것 같군요."
  "그런 것 같소. 그는 나를 좋지 않게 여기고 있을 텐데 그렇지도 않았소. 우리는  그가 죽
음과 파괴의 무대로 만들어놓았던 고장을 지나왔었소. 나는 그  사람이 야만적인 군인이 아
니면 혁명의 광신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인 것을
알게 되었소. 어떤 사람을 봤을 때, 상상하던 인물과 현실의 인물이 다르다는 것은 좋은  일
이지요. 그 사람은 어떤 형에 맞는 인물은 아니었어요. 어떤 형에 맞는다고 하면, 그것은 이
미 인간으로서는 끝장이지요. 그러나 그 사람을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가 없다면,  적어
도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라도 살아 있는 인간임을 보여줄 수 있는 요소를 간직하고 있었어
요. 그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불멸의 기질을 가졌어요."
  "사람들은 그 사람이 당원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나도 그렇게 느꼈어요. 그 사람에게 동정을 느끼게 된 까닭을 말할까요? 그의 운
명은 이미 결정돼 있어요. 그는 불행한 결말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는 자신의 죄값을  치르
는 거지요. 제멋대로 날뛰는 혁명가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들이 악인이라서가  아니라
궤도를 벗어난 기차와 같은 조절할 수 없는 메카니즘  탓이에요. 스트렐리니코프는 다른 혁
명가들과 같이 미치광이였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그의 광태가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어온 시련에서였다는 점이예요. 나는 그 사람의 비밀을  알지는 못하지만 비밀을 가
졌다는 것은 틀림없어요. 그가 볼셰비키와 손을 잡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지요. 그들에게 필
요한 때까지 그의 길동무가 되겠지요. 그러나 그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순간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군사 전문가들을 처치하듯 짓밟아 버릴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물론이죠."
  "그럼 그를 구할 길이 없을까요? 도망친다거나?"
  "어디를 도망친단 말이오? 제정 시대에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안 돼요."
  "안됐어요. 당신의 얘길 듣고 있으니까 그가 불쌍해지는군요. 그런데 당신은  많이 달라지
셨어요. 이전에는 혁명에 대하여 예민하지 않았고, 신랄하지도 않았어요."
  "바로 그 점입니다, 라라. 어떤 것에든지 한계가  있는 법이라오. 이때까지 무엇인가 뚜렷
한 것이 이루어졌어야 했어요. 그러나 혁명을 선동하던 사람들에게는 변화와 변동의 혼란만
이 그들의 마음에 맞는 자연의 상태였었고, 그들에게 빵을 주고 집을 주어왔어요.  그들에게
는 새로운 세계 건설, 다시 말해서 과도기 그 자체가 목적이었지요. 그 밖엔 훈련이 되지 못
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 계속적인  준비란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아시오? 혁명가들은 정말 재간이 없는 무능한 사람들이었소. 인간은 살기 위
하여 태어난 것이지,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서 태어나지는 않았단 말이에요.  인생 그 자체,
인생의 현상, 인생의 선물, 이런  것들이 숨가쁘게 심각한 문제들이 아니겠소!  어떻게 그런
유치한 철부지들의 생각과 바꿀 수 있단 말이오! 미국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웠던 체호프의
국민 학생들(체호프의 단편(어린이들)) 그대로가 아닙니까? 자, 그만둡시다. 이번엔 제가 물
어볼 차례입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은 이 지방에서 난리가 있던 때의 아침이었는데, 그때 당
신은 난리를 어떻게 겪었지요?"
  "그럼요! 이 일대는 불바다가 됐답니다. 우린 겨우 면했지만. 앞서 얘기했지만, 이 집도 흔
들흔들했어요. 지금도 정원 대문 옆에는 불발 폭탄이 뒹굴고 있어요. 권력이 바뀔 때마다 약
탈과 포격, 게다가 추태가 있었어요. 우리는 이미 이런  것에는 선생이 되었고, 단련이 되어
버렸어요. 그 전에 백위군 치하 때 있었던 일인데,  개인적인 보복으로 인한 뒷골목의 살인,
약탈, 협박 등 정말 지옥의 향연이란 이걸두고 하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갈리울린에 대한 얘기예요. 제일 높은 사람이 되어서 체코
군과 함께 나타났어요. 총독인지도 몰라요."
  "알고 있어요. 들었어요. 당신은 그를 만나봤어요?"
  "여러 번 만났어요. 그 양반 덕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렸는지 몰라요!
또 많은 사람을 감춰주었어요. 공정하게 말해서 그 사람의 행동은 훌륭하고 당당했어요.  카
자크의 대위나 경찰 대장과 같은 속물들과는 달라요. 유감스럽게도, 잘난체 날뛴 것은  이런
속물들이지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갈리울린은 절  무척이나 도와주어서 고맙게 생
각해요. 우리는 옛 친구가 아닙니까. 제가 어렸을 때 자주 그의 집엘 찾아갔었지요. 그 집에
사는 대부분은 철도 종업원이었어요. 제가 혁명에 대하여 당신과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것
도 이런 점에 있는가 봐요. 혁명은 저의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혁명의 내부에서 보면  이해
되는 일이 여러가지 있어요 그런데 수위의 아들이 돌연 백위군의 대령이나 심지어 장군까지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저는 군인과 접촉이 적어서 군대 계급은 잘 모릅니다만, 나
의 직업은 역사 교사가 아닙니까. 이건 당신이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많은 사람들을 도
와줬어요. 저는 그를 찾아가서 만나보곤 했어요. 우리는  당신에 대하여도 이야기했어요. 정
권이 바뀔 때마다 새 정권에 친구나 연고자가 있었는가 하면 또 슬픔과 실망이 찾아오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두 진영으로 갈라서고 서로 적대시한다는 것은  시시한 책에나 씌어 있을
뿐이지, 실제는 모든 것이 뒤얽혀 있는 법 아니겠어요? 일생을 통해서 같은 역할만 하고, 사
회에서 한 자리만 차지하고, 그리고 정해놓고 같은 것만 지지한다는 것은 가망 없는 존재들
이나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너 지금 왔구나."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내린 여덟 살쯤 되는 소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장난꾸러기 같이
생긴 실눈이 웃을 때마다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녀는 밖에서  남자 목소리를 듣고서 손님
이 온 것을 알고 어머니한테  놀랐다는 듯이 보여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인사를 하고
나서 그애는, 어려서부터 생각에 잠기는 고독한 어린이한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두려워하
는 기색도 없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지바고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딸 카첸카예요. 귀여워해주세요."
  "멜류제예보에서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지요. 참 컸군, 많이 달라졌어!"
  "너 집에 있었구나? 놀러 나간 줄 알았지. 집에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었어."
  "나 거기서 열쇠를 집어내는데, 거기  아주 큰 쥐가 있었어. 이만큼한  게! 소리 질러버렸
지! 무서워 죽을 뻔했어."
  카첸카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에서 끄집어낸 고기 입처럼 입을 동그랗게 하고는 귀여운 얼
굴을 찡그려 보였다.
  "이제 나가보렴. 아저씨는 저녁때까지 계실 거예요. 죽이 다 되면 알려주마."
  "고맙소. 같이 저녁 식사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읍에 다니게 된 후에는 여섯 시 저녁
식사에 언제나 늦은 일이 없어요. 집에 가는 데 세 시간, 아니, 네 시간 가까이 걸려요. 그래
서 일찍이 왔는데, 유감이지만 곧 가야겠어요."
  "그럼 반 시간은 더 계실 수 있어요."
  "좋습니다."

  15
  "그럼 이제 저도 탁 터놓고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당신이 만나셨다는 스트렐리니코프는
저의 남편 파샤-파벨 파브로비치 안치포프예요. 저는 그이를 찾아 전선까지 갔었어요. 전사
했다고들 하였지만 전 믿지 않았어요. 역시 살아 있었어요."
  "별로 뜻밖의 일은 아니오. 짐작하던 일이었으니까. 나도 스트렐리니코프가 당신의 남편이
라는 뜬소문을 듣긴 했어도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소문을
무시하고 거리낌없이 당신한테 얘기하였던 겁니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은  당
신과 어떻게 결부시켜서 생각할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이 그 사람과 어디 맞는 데가 있습니
까?"
  "그건 사실이에요. 지바고 선생님, 스트렐리니코프는 저의  남편이에요. 저는 소문을 믿어
요. 스트렐리니코프는 남편의 가명이에요.  다른 혁명가들처럼 그이도 가명을  쓰고 있어요.
무슨 이유인지 남편은 가명으로 살고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유라친을 탈취한 것도 그 사람이고,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걸 알면서 포 사격을 퍼
부은 것도 그 사람이에요. 그리고  자기 정체가 드러날까 두려워서 우리가  살아 있는지 한
번도 알아보지도 않았어요. 물론 그것이 그의 의무란 것을 모르진 않아요. 만일 그이가 저한
테 물었더라면 그렇게 하라고 했을 거예요.  내가 무사히 살고 있는, 시 소비에트가  주택을
내주고 있는 걸 본다면 그 사람이 뒤에 숨어서 날  돌봐주었다고 할는지 몰라요. 그러나 그
사람이 실제로 유라친에 있으면서 우리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참았다는 생각은 어림없는 일
이죠! 나는 그걸 믿을 수 없어요. 옛 로마 사람들의 미덕처럼 신기한 생각을 어떻게 믿겠어
요. 난 당신의 영향을 받았고 당신의 흉내를 내왔어요.  나는 그걸 원치 않았었는데,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달랐어요. 무슨 걷잡을 수  없는 하찮은 일에는 뜻이 맞았어요.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 부닥치면, 가령 인생 철학에 대한 우리의 의견은 상반될 거예요. 그럼  스트렐리니코
프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그 사람은 지금 시베리아에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대로 나도 심장이 서늘한 소문
을 들어왔어요. 그는 우리 군의 최전방의 한 부대를 지휘하여 가련한 갈리울린과 싸워 이기
고 있답니다. 어려서부터 친구이며 독일 전선의 전우였던 갈리울린과 말입니다. 그러나 저한
테는 그런 걸 한마디도 말하지 않더군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는 스트렐리니코프의 이름만
들어도 화가 치밀어 미칠 지경일 거예요. 아무튼 그이가 지금 있는 곳은 시베리아예요.
  하긴 여기 오래 살았었지요. 당신이 그를 만났다는, 그 기차에서 살고 있었어요.
나는 항상 그를 어떻게 한번 만나봤으면 했답니다. 그는 이따금 본부에 다녀가곤 했는데, 본
부가 있는 건물은 이전에 제헌의회군의 코무치 군사령부로 사용하던 곳이었어요. 게다가 묘
한 운명의 장난 같지만, 본부의 입구는 제가 갈리울린을 만나러  자주 다니던 곳 바로 옆이
었어요. 나는 밤낮 그리로 가서는 누굴  구해 달라거나, 여러 가지 끔찍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만두게 해달라고 그에게 부탁하곤 했어요. 예를 들면 육군사관학교에서 일어난 사건 같은
것은, 그때 아주 시끄러웠답니다. 인기가  나쁜 교관이 있으면 생도들이 숨어서  기다렸다가
사살해버렸지요. 그리고 그 사람을 볼셰비키의 동조자였다고 몰았어요. 또 유태인을  박해하
기 시작하였을 때도 대단했었답니다. 우리와 같이 정신 노동을  하거나 도시에서 살고 있었
다면, 우리가 아는 사람의 태반은 유태인이었어요. 그런데 유태인 박해가 시작되어 처참하고
비열한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는 그저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분개하거나, 창피하다고만 생각
한 것이 아니고 뭔가 모르게 거리감에 사로잡혔어요. 흡사 우리의 동정이 이 가슴에서 끓어
오른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생각해낸 일종의 위선이 아니었던가 하는 석연치 못한 데가 있
었어요,.
  한때 우상 숭배의 질곡에서  인류를 해방시킨 사람들인데, 지금은  그중의 많은 사람들이
인류 사회를 죄악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있는데,  그들은 이미 의미를
상실한 낡은 제도에 바치는 자신들의 충성에서 해방될 수  없다니 이상해요.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자기들이 창조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 융화되지 못하니 말이예요.  이해
하려고 노력만 한다면 정말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인데 멀어지고 있어요.
  물론 박해를 받으니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하잘것없는 비참한 태도를 갖는 것이 사실이
에요. 자기 억제의 고립 속으로 유태인을 몰고 간 셈이지요. 그러나 나는 이런 현상이 그 일
부는 몇 세기에 걸쳐 역사적으로 누적된 피로, 말하자면 내부적인 노쇠에서 오는 것으로 봐
요. 그들의 압세적인 체념, 무미 건조한 좁은  시야, 옹졸한 상상 따위가 나는 싫어요.  마치
노인이 나이 얘기를 싫어하고, 병자가 병 이야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에
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그런 걸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나의 친구 중에 고르돈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당신과 같은 의견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이가 드나들 때 만날 생각으로 그곳에 자주 갔습니다. 재정 시대 그 건물
에는 총독실이 있었으나, 지금은 문  밖에 '창원소'라는 간판이 나붙어 있어요.  보셨겠지요?
시내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곳이에요. 앞쪽 광장은 포장돼 있고 그 맞은편 공원은  단풍나무,
아가위나무, 인동나무가 울창해요. 바깥  보도에는 청원인이 떼를  지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순서를 무시하거나 내가 그의 처라고 말하지도 않았구요. 성마저도 달랐으니까요. 그리고 또
그 사람들 감정에 호소해봐야 소용도 없었고, 바탕이 다른 사람들이에요.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아버지 파벨 페라폰토비치 안치포프가  거리에서 가까운 도로를 지
나 좀 떨어진 마을에서 쭉 살고 있었어요. 그의 아버지는 고참 노동자로서 정치범으로 유배
되어 그 마을에서 쭉 살고 계셨어요. 아버지 친구 치베르진도 같이 있었어요. 둘 다  혁명재
판소 위원이었어요.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파샤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도 않고 부자지간
이라고 해명도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 쪽에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조금도  가슴아프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자식이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나지 못하
면 그만이지, 하는 거예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주의나 규율이 꽉 들어찬 돌멩이예요.
  그리고 끝내 내가 그 사람의 처라는 것이 증명이 됐다 해도  큰일이죠! 지금과 같은 시대
에 마누라가 다 뭡니까?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라든지 우주의 변혁, 이런 것들이 중요한 일이
지요. 그러니까 여편네란 그저 두 발 가진 동물이나 벼룩, 이따위란 말이에요.
  그 사람의 부관이 나와서 다니면서 용무가 뭐냐고 묻고, 들여보내는 사람도 있었어요.  저
는 이름을 말한 적이 없고, 개인적인 용무라고만 했어요. 물론 거절당하는 실없는 소리가 되
고 말았어요. 부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의아한 눈으로 쳐다 봤어요. 결국 한 번도  만
나질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가 우리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렇진 않아요!
저는 남편을 잘 알아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빈손으로 돌아오고 싶지가
않고, 우리들 발 앞에 월계관을 놓고 싶은 거예요, 정복자로서! 불멸의 영예를 안고,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하려고! 어린애처럼 말이에요."
  카첸카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라라는 딸을 부둥켜안고, 흔들며 꼭 껴안아 보더니  입을
맞췄다.

  16
  지바고는 말을 타고 시내에서 바르이키노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을 수없이 다녔기
때문에 길을 훤히 알아서 별로 의식하지 않고 다녔다.
  그는 숲속 십자로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다. 길 하나는 곧바로 바르이키노에 통하고,  다른
길은 사그마 강에 있는 바실리예브스코예 어촌으로 통하는 길로  갈라져 있었다. 그 갈림길
에는 세 번째 농업 기계 게시판이 서 있었다. 이 근처에서 지바고는 항상 저녁놀을 보게 되
었다. 지금도 황혼이 깃들어 있었다.
  유라친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라라네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식구들에게는 일 때문
에 삼제바토프 댁에서 잤다고 말하던 때가 벌써 두 달이나  지났다. 라라는 지금도 그를 지
바고라고 불렀지만, 그는 이전에는 그녀를 라라로 불렀는데  지금은 '당신'이라는 친밀한 말
투로 바뀌고 있었다. 지바고는 토냐를 속이고, 그의 비밀은 차츰 커져 허용할 수 없는  무서
운 일로 되어버렸다.
  그는 토냐를 숭배할 정도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마음씨는 이 세상에서 무
엇과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나 그녀  자신보다도 그녀의 명예를 지켜주었
다. 그녀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손으로 갈기갈기 찢었을 것이다.  그런
데 그러던 자신이 그녀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집에서 죄인과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신구들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애정
을 쏟아주는 일들이 그에게는 지옥  같은 고통을 안겨다주었다. 즐겁게  담소하다가도 그는
불현듯 죄의식에 마음이 오싹해졌다. 그러면 주위의 얘기에 귀는 필요 없는 물건이 되고 마
는 것이다.
  만일 식탁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 먹던 음식이 목구멍에 걸려버렸다.
그는 스푼을 내려놓고 접시를 밀어놓는다. 눈물에 목이 메었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토냐
는 걱정스럽게 묻는다. "시내에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으셨어요? 누가 붙잡혔나요? 총살됐
어요? 말씀하세요. 나의 일은 걱정 마시고 말씀해 버리면 좀 마음이 후련해질 거예요."
  그가 딴 여자에 마음이 끌렸다고 해서  토냐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
다. 그는 비교하거나 골라 좋아한 것은 아니다. '자유 연애'라는 개념이나 '정당한 사랑의 욕
구'라는 표현은 그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거나 주장한  것만으
로도 타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기분의 잘못'을 한 적도 없으며,  자기를 특권
이나 특전을 가진 초인간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양심이  더러움에 짓눌려 피곤한 것뿐
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따금 생각했으나 대답을 찾지 못했다. 예상 외의 일이 갑자기 일
어나서 그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줄 것을 비통한 기분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여의치가  않았다. 그는 이런 관계를  끊어버리자고 다짐하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모든 걸 토냐한테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지. 라라를 다시 만나지 말아
야겠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리 평탄하지가 않았다. 그는 라라와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싶다
는 뜻을 그녀에게 분명히 알아듣도록 전하지 못했다고 느꼈다. 그날 아침, 그는 아내에게 모
든 걸 고백하리라 생각하고서, 이젠 만나지 말자고 라라에게 말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애매하게 얼버무려서 분명히 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의 비참한 기분을 눈치챈 라라는 시끄럽게해서 그를 더  괴롭히려 하지도 않고, 가슴을
쥐어짜는 슬픔을 꾹 참으며, 조용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썼다. 둘은 텅 빈  방
안에서 이야기했다. 눈물이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러나 맞은편 집의 석상이 얼굴에  흘러
내리는 빗물을 의식하지 못하듯이 그녀도 흐르는 눈물을 의식하지 못했다. "당신이 좋을 대
로하세요. 저의 일은 걱정마시고." 그녀는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아량을 보이
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울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
하여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라라가 곡해하고 있지 않을까-잘못된 인상을 주어서  실없이 미련을 남기고 오지나 않았
는지 생각하게 되자, 그는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 말하지 못했던  것을 모두 툭 털어놓고 더
욱이 마지막 이별의 부드럽고 따뜻한 인사를 남기러 곧장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간신히
자신을 억제하고 계속해서 가고 있었다.
  해가 기울어지면서 숲은 차츰 춥고 어두워져갔다. 축축히 젖은 나뭇잎 냄새가 풍겼다.  모
기떼가 물 위의 부표처럼 공중에 떠서 끊임없이 윙윙거렸다. 그는 땀에 젖은 얼굴이나 목덜
미에 모기가 붙으면 연방 손바닥으로 때렸다. 탁 치는 소리에 말안장의 삐걱거리는 소리, 진
흙을 밟는 무거운 말발굽 소리, 말 배에서 새어 나오는  메마른 소리가 장단을 맞춰 대꾸하
듯 들렸다. 놀이 져 가는 저편 멀리서 느닷없이 종달새 소리가 들려왔다.
  "잠 깨라! 잠 깨라!" 줄기차게 들려온다.  부활제 전야의 "잠 깨라, 나의  영혼! 왜 잠들어
있는가!" 하듯이.
  돌연 지바고는 아주 간단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둘러야 하나.  집으
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변하고 있었다.  토냐한테 고백해야 하지만 반드시  오늘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토냐한테는 아직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으니까, 요다음에 시내를  다녀와서
하여도 된다. 라라와 따뜻한 사랑에 넘치는 말로써 이때껏 두 사람의 고뇌를 파묻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멋있는가! 왜 이런 생각을 진작 하지 못했을까?
  다시 라라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의 가슴은 기쁨에 설레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기대에 부풀어올랐다. 교외  목조 건물을 지나자 나무 포장길이었다.  지바고는
라라한테로 가고 있었다. 노브스발로치느이의 거리에서 빈터와 나무 포장길이 끝나고 돌 포
장 길이 시작되었다. 교외의 작은 집들을 책장을 넘기듯이 지나가 버렸다. 그것도  집게손가
락으로 한 장식 넘기는 것이 아니라, 책 끝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한꺼번에 책장을 전부 넘
겨버리듯이 획획 지나가버린 것이다. 눈이  어지럽도록 빨리 달렸다. 드디어 거리  맞은편에
그녀의 집이 보였다. 비구름이 벗겨지면서 저녁때는 하늘이 맑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집
으로 가는 길가의 자그마한 집들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걸 집어들어서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다! 모자를 푹 내려쓴 듯한  지붕 밑의 외짝 문이 있는  이층집들. 그리고 물 웅덩이에
반사하여 딸기처럼 비치는 등불과 불빛! 하얀 구름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집! 거기서 그는
다시 조물주가 만든 희고 아름다운  선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어  어둠에 싸인 모습이
문을 열어 줄 것이며, 이 세상 어느 주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차분한 북국의 백야와 간은
차가운 그녀의 지밀한 기대가 밀려 닥쳐오리라. 마치 어둠 속의 바닷가 모래밭에 뛰어 내려
갔을 때 밀어닥치는 첫 파도와도 같이.
  지바고는 말고삐를 놓고 안장 위에 몸을 숙여 두 손으로 말의 목덜미를 껴안고 갈기에 얼
굴을 파묻었다. 이런 애정의 표시를 힘을 내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말은 힘껏 달리기 시
작했다.
  발굽을 부드럽게 허공에 휘저으며 나는 듯이 달리고 있을  때, 지바고는 기쁨에 끊어오르
는 심장의 고동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으나,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했다.
  별안간 바로 옆에서 귀청이 떨어질 듯한 총성이 울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있는 힘을 다하여 달리던 말을 갑자기 세웠기 때문에 옆으로 쏠리면서 뒷발로 일어
서려고 엉덩이를 낮췄다.
  앞은 십자로 갈림길이었다. '모로베트친킨 회사. 파종기·탈곡기' 간판이 석양을 받아 번쩍
였다. 세 명의 무장한 기병이 길을 막아 섰다. 두 개의 탄띠를 어깨에 엇갈아 두른 학생모에
소매 없는 상의를 입은 중학생과, 장교 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쓴 기병이 마치 가장 무도회
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솜을 두툼하게 넣은 바지에 차양이 넓은 승려 모자를 눌러쓴 해괴한
모습의 뚱뚱한 사람이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의사 동무." 제일 나이가 많은 털모자의 기병이 뚜렷하면서도 조용하게
말했다. "명령에 복종하면 생명을  보증하겠소. 그렇지 않으면 죄  없이도 처형하겠소. 우리
부대의 의사가 전사했기 때문에 당신을 의무 노동자로 징용하는  것이오. 말에서 내려 고삐
를 이 젊은이에게 주시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도망치려 들면 용서하지 않겠소."
  "당신은 미쿨리츠인의 아들 레스느이치 동무입니까?"
  "아니오, 나는 그의 수석 연락 장교 카멘노드보르스키요."

    한길에서
  1
  도시, 읍, 부락들이 있었다.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 읍, 오멜리치노, 파쥔스크,  트이사
츠코예의 여러 역들, 야글린스코예 개간지, 즈보나르스카야 마을, 볼리노예,  구르토브시츠
키의 여러 부락들, 케맴스카야 개척지, 카제예보 역 그리고 쿠체이느이 교외 마을, 말르이
예르몰라이 마을이 있었다.
  시베리아에서도 제일 오래된 길이며 옛날의 역마가 달리던 한길이었다. 가도는 마치 빵을
자르듯이 읍내를 구분지어 놓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다보아도 보이지 않게 좌우편으로 시골
마을을 통과하고 있는 이 한길은 저 멀리 뒤쪽에 농가를 바라보며 마을을 휘감고 돌거나 급
커브를 짓고 뻗어 있었다.
  먼 옛날 호다트스코예에 철로가 개설되기 전에 트로이카가 이 한길을 달렸다. 차, 곡식,
선철을 가득 실은 짐마차들이 한쪽 길로 가고, 경비대에 호송되는 유형수의 무리가 그 반대
쪽에서 오고 있었다. 그들은 보조를 맞춰  일제히 밭고랑쇠 소리를 내면서 걸어갔다.  울던
애들도 울음을 멈췄다. 구원받을 수 없는 무법자의 무리. 주위는 인적이 없이 어둡고 술렁
거리는 울창한 숲뿐이었다.
  한길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가족같이 지내고 있었다. 마을과 마을, 읍과 읍은 우
정과 인척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호다트스코예는 한길과 철도가 교차되는 곳이었다.  기관
수리 공장, 그 밖에 보선 관계의 작업장이 여러 개 있고, 그 외에도 바라크 마을에는  가난
뱅이들이 우글거리고 살며 병을 얻어 죽어가고 있었다.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정치범들은 형
기를 끝마치면 숙련 기계공이 되어 일하러 와서는 여기에 그대로 눌러 살아버리는 수도 있
었다.
  철도 노선을 따라 곳곳에 수립되었던 최초의 소비에트는 이미 오래 전에 뒤집혀지고 얼마
동안은 시베리아 임시 정부가 지배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든 지방이 최고 통치자로 자처
하고 있는 콜차크 제독에게 넘어가버렸다.

  2
  길은 가다가 한 곳에서 오르막 산길이었다. 차츰 넓은 전망이 트였다. 밋밋한 언덕길과 지
평선은 한없이 넓었으나 피곤에 지친 말과 사람들이 한숨을 쉬려고 할 때 고갯길 꼭대기에
올라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은 다리를 지나고 그  밑으로 께쥐마 강의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편 상당히 가파른 꼭대기에 보즈드비젠스크 수도원의 벽돌담이 보였다.
길은 교회의 언덕길을 휘감아 돌아 교외까지 꾸불꾸불 읍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읍의 중심지에 이르러서는 길은 다시  뜰을 지나게 된다. 교회의 푸른  철문은 큰 광장을
마주보고 있었다. 아치 모양의 대문 위의 성상에는 금박으로 '기뻐하라, 생명을 주는 십자
가, 패하지 않는 승리를 믿으라' 라고 씌인 틀이 걸려 있었다.
  겨울이 끝나는 무렵, 사순절도 끝나는 부활제 전 주일이었다. 길에 눈이 꺼멓게 되면서 녹
기 시작하는 것 같았으나, 지붕 위에 쌓인 눈이 새하얀 높은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종 치는 사람을 구경하려고 종각으로 기어 올라간 소년들에게는 저 밑으로 보이는 집들이
어수선하게 모아 놓은 흰 병과 작은 상자처럼 보였다. 점보다 별로 크다고 볼 수 없는 사람
이 집 쪽으로 움직여 가다가는 멈춰 서서  벽에 나붙은 최고 통치자의 포고문을 읽고 있었
다. 그것은 3년령 적령자를 군에 소집한다는 포고문이었다.

  3
  그날 밤 예상치도 않았던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이맘때의 계절로는  이상하게도 따뜻한
날씨였다. 가랑비가 내리는데 어찌나 가늘고  보이지 않게 내리는지 미처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물안개가 되어 공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실
은 빗물이 되어서 땅바닥을 따뜻이 데워가며 재빨리 흘러서 남은 눈을 깨끗이 씻어 냈으며,
대지는 검게 물들고 땀흘리듯 번쩍거렸다.
  키가 낮은 사과나무들은 순을 가득히 달고서 정원 울타리 너머 거리로 가지를 뻗치고 있
었다. 가지를 따라 물방울이 나무를 깔아놓은 인도 위로 사정 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온  시
내에 들렸다.
  사진사의 집 뜰안에 매어두었던 강아지 토미크가 새벽까지 짖어댔다.  아마 그 짖는 소리
에 화가 낫던지 갈루진네 정원에서는 까마귀가 온 시내가 들으라는 듯이 시끄럽게 울고 있
었다.
  시내 아래 지역에서는 짐마차 세 대가 상인 류베즈노프 집에 도착했는데, 그는 어디서 착
오를 했는지 주문을 낸 일이 없다면서 보내온 물건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마부는 시간이
늦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하룻밤을 묵게 해달라고 사정 했지만, 그는 빌어먹을 것이
라 욕설을 퍼붓고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 옥신각신 떠드는 소리가 온 시내에 들렸다.
  일곱번째 기도 시간이었다. 밤 한 시, 교회의 제일 낮은 소리를 내는 종소리가 은은히  들
려왔다. 종소리는 캄캄한 밤중에 소리없이  내리는 부슬비에 녹듯이 대기  속으로 퍼지면서
마치 강둑에서 무너진 흙덩이가 봄 장마철에 홍수에 씻겨 내려 없어지듯이 사라졌다.
  이날은 부활제 전날의 '발 씻는 목요일' 밤이었다. 멀리  비의 장막 저쪽 여기저기에 사람
들의 모습과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등잔불에 비친  이마와 코, 얼굴이 교회 뜰안
을 어른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15분쯤 지났을 무렵, 미사가 시작되었을 때 교회에서 인도로  가까이 오는 발소리가 있었
다. 그것은 잡화상 갈루진의 처였으며,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털외투의 앞깃을 풀어헤친 채
한참 동안 뛰어가다간 걸음을 늦추더니 멈췄다가 다시 불안한 걸음걸이로 집으로 가고 있었
다. 그녀는 교회에서 졸도할 것 같이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밖으로 잠
깐 나왔지만, 막상 나와보니 끝까지 앉아 있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창피했던 것이다. 그녀
는 이제 2년째나 사순절에 단식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정작 걱정되는 것은 이것 때
문이 아니었다. 그날 벽에 나붙은 동원령에 아무것도 모르는 가엾은 자기 아들 체로쉬카 걸
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생각을 잊으려고 애썼으나 길을 접어들 때마다 어둠 속에서 하얗
게 나붙은 종이가 그녀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바로 모퉁이에 있었으나, 밖에 있는 것이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공기가 나쁜
방구석에 빨리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어두운 마음이었다. 괴로움을 다 말하자면  밤
새껏 말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밖에 나와 있으면, 슬픈 상념이 덩어리가  되어
밀려와도 교회 모퉁이에서 광장 모퉁이까지 두세번만 왔다갔다하다 보면 그런 걱정을  모조
리 떨쳐 버릴 수가 있었다.
  이제 부활제 날이 눈앞으로 다가왔으나 집엔 아무도 없으며 그녀 혼자만 남게 되었다. 왜
나만 혼자가 됐지? 물론, 크슈샤는 양녀이니까 열외로 생각했다. 정말 그 애는 무슨 아이지?
남의 생각은 아랑곳없었다. 그 애는 내 편인지 원수인지 또  숨은 적수가 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편의 먼저 부인이 데리고 온 딸인데, 남편 말에 의하면 그녀를 양녀로 입적시켰
다는 것이다. 아니, 혹시 그 애가 남편의 친딸이 아닐까? 아니, 딸이 아니고 딴 관계가 아닐
까? 남자의 속은 아무도 몰라! 하긴 솔직히 말해서 그 애는 흠잡을 데가 없어. 영리하고 예
쁘고 얌전하니까. 바보 같은 아들이나 아비보다는 훨씬 똑똑하지.
  이렇게 나 혼자 남아서 부활절의 전 주일을 보내다니. 온 집안 식구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나가버렸어.
  남편은 거리를 누비고 다니면서 소집된 신병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그들의 무공을 격려하
고 있었다. 바보 자식을 돌보고 위험에서 건져주는 것이 아비의 도리가 아닌가.
  게다가 체로쉬카마저 역시 차마 견디지 못하고 부활제 전날 밤에 집을 뛰쳐 나가 버렸다.
그는 쿠체이느이 마을의 친척 집을 다니고 놀면서 근심을 잊고 있었다. 그애는 기어코 학교
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한 학년 걸러 번번이 낙제를 시키고서 8년째 되는 지금 와서 쫒아
내다니 너무하는 일이었다.
  참으로 따분한 일들뿐이야! 오 하나님! 왜 일이 이렇게 뒤틀어지기만 할까요! 즐거운 일이
란 하나도 없으니 다 집어치워 버리고 싶기만 해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이 모든 불
행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혁명 때문일까요? 아니, 절대 그런 건 아니야! 이 모든 것이 전쟁
때문이야! 전쟁이 러시아의 꽃 같은 대장부들을 죽여 버렸지. 지금은 썩어빠진 인간 쓰레기
밖엔 남지 않았어.
  아버님이 살아 계셨을 때만 하더라도 아주 달랐었다. 우리 아버지는 청부업자였으며 술은
마시지 않았고 학식이 높은 분이었다. 우리는 아주 호강하며 살았고 폴랴와 올랴 두 자매가
있었다. 이름이 잘 조화되듯이 그들은 사이 좋게 지냈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
오던 목수 감독들은 능력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나와 동생들은 여섯 가지 털실로 스카프를  짜려고 생각했어-느닷없이 무슨 생각이 났었는
지. 우리 자매의 뜨개질 솜씨가 얼마나 좋았던지 그 스카프는 온 고장에 소문이 자자했었지.
그리고 그때는 무슨 일이든지 즐겁고 풍족하고 좋았어. 교회에서 하는 일도 춤도 사람도 예
절도 다 가슴을 뛰게 하는 것뿐이었어. 이렇게 우리 집안은 농민 노동자의 평민이었지만 만
사가 즐겁기만 했어. 그리고 이 무렵 러시아는 처녀시대였었지. 요새 같은 쓰레기가  아니라
믿음직스러운 실제의 방패들이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모든 것이 빛
을 잃어가고, 변호사와 유태인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혓바닥을 놀리고 있으니 말이야.  남편
과 그의 친구들은 건배나 연설, 축원만으로 그때의 그 황금시절을  다시 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나 그것으로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  바위를 녹이고 산을
움직이고 땅을 파보아도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다.

  4
  이제 그녀는 몇 번이나 장터가 있는 시장 입구까지 왔다갔다했다. 거리에서 길 왼편에 그
녀의 집이 보였으나, 거기까지 올 때마다 생각을 다시 하고는 또 교회로 통하는 구불구불한
뒷골목을 되돌아가곤 했다.
  시장은 들판만큼 널찍한 곳이었다. 이전에는 장날이 되면 농부들의 짐짝으로 붐벼댔다. 광
장의 한쪽은 옐레닌스카야 거리와 통하고 있었다. 다른 한쪽은 둥글게 구부러진 곳에 1,2층
짜리 건물이 있었고, 거기에 큰 상점, 사무실, 공장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세상이 조용하던 그때, 여기에는 안경을 끼고 팔소매가 긴 옷을 입은 여자를 아주 싫어하
던 부르하노프가 피혁, 타르, 차바퀴,  마구, 보리, 건초 등의 장사를  하고 있었다. 네 장의
철판을 붙인 커다란 문 밖에 점잖게 나앉아서는 신문을 읽곤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
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뿌연 유리 진열장 속의, 리본으로 묶은 결혼식 양초와 꽃다발이 들어있는 종이
상자 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뒤쪽 작은 방에는 가구도 없었고, 한두 군데에 촛덩어리
가 없었다면 아무런 물건 흔적도 없었을 것이며, 어디에 사는지도 알 수 없는 백만장자  양
초 제조업자가 1천 루불리대의 큰 거래를 한 적도 있었다.
  여기 상점들이 있는 중간쯤에 창문이 세 개 달린 갈루진의 큰 잡화점이 있었다.
잘 다듬지 않아 짬이 많이 난 마룻바닥에 주인과 심부름꾼이 온종일 차를 마시고 차 껍데기
를 버렸기 때문에, 하루에 세 번은 훔쳐야 했었다. 결혼을 금방 한 그녀도 여기가 좋아서 자
구 계산대에 앉곤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색깔은 엷은 자색이었다. 교회의 장엄한 의식이  있을 때 신부님이 입은
옷의 색깔이나 라일락 꽃봉오리의 색깔이 그랬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비로드 옷도 그 빛
깔이고, 그 집의 술장도 그런 색깔이었다. 그것은 행복과  추억의 빛깔인 것이다. 그리고 혁
명 전까지의 순결했던 러시아도 라일락꽃 빛깔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전분과 설탕과 유리병
에 든 검은 당밀의 향기가 풍기는 상점  안의 어스름한 자색빛 속에서 계산대 앞에 앉기를
그녀는 무척 즐겨했던 것이다.
  이곳 재목 하치장 옆골목에는 목조 이층집이 망가진 대형 마차처럼 서 있었다. 이 집에는
네 세대가 살았으며, 집 정면에서 양쪽으로 입구가 하나씩 나 있었다. 아래층에는 오른쪽에
잘킨드의 약국이 있었으며 왼쪽에는 공증인 사무소가 있었다. 약국 바로 위층에는 늙은 양
재사 쉬물레비치가 여러 식구와 살고 있었다. 공증인의 위층 즉 양재사의 방에서 계단 중턱
을 건너 맞은편 방에는 하숙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그들의 장사나 직업을 나타내는 명
패나 간판이 문 전체에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기계 수리, 구두 수선, 조각사  카
민스키도 포함되었고, 두 사람의 사진사 주크와 쉬트로다도 이곳에 있었다.
  이층 건물이 이렇게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사진사의 젊은 조수로서 수정을 맡아보는 세냐
마기드손과 대학생 블라제인은 뜰안의 큰 나무 창고 구석에 암실을 꾸며 놓고 있었다. 암실
창문에 희미하게 비치는 빨간 램프가 핏발이 선 눈처럼 보여서 지금도 아마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쇠줄에 매어 놓은 강아지 토미크가 옐레닌스카야 거리  일대에 들릴 만큼 시끄럽게
짖어대던 곳이 바로 이 암실 창문 밑이었다.
  '꽉 꽉 들어찬' 회색 집을 지나면서 갈루진 부인은  생각했다-'더러운 빈민 소굴' 이지. 그
러나 이내 그녀는 자기 남편의 지나친 유태인 증오에 대해 뉘우쳤다.
그들은 러시아의 문제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사람들은 아니니까.  그러나 소요와 혼란의 원
인은, 쉬물레비치 노인의 얘기대로이다. 그는 추한 얼굴을 찡그리고 웃으면서  "그런 레이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가 트로쯔끼의 유태식 애칭)의 못된 장난이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 이런 하잘것없는 것을 뭣 때문에 생각하고 있담? 유태인이 어쨌단 말인가.
그들이 불행의 씨란 말인가? 불행의 씨는 도시에 있는 것이  아닌가. 도시 덕분에 러시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 사람들은 교육을 받았고, 지방 사람들은 도시에 아주 취해 버려서
도시의 흉내를 내려고 하지만 따라갈 수 없기 마련이야 그래서 촌사람들은 허공에 둥둥 떠
버리고 말았어.
  그런데 반대로 무지가 곧 불행일지도 몰라. 배운 사람들은 땅속도 뚫어보며 모든 걸 이미
다 환히 알고 있었다. 우린 목을 잘렸는데도 모자를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지. 어두운 숲속을
헤매는 꼴이었어. 그렇다고 지금 지식 잇는 사람이라고 해서 편안히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기근 때문에 도시에서 잇달아 도망쳐 나오고  있는 꼴을 보란 말이야. 뭐가 뭔지  모르겠군.
잘 생각해보아야지.
  그러나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은 시골 사람들이야. 친척인 셀리트빈, 팜필 팔르이흐,
네스토르와 판크라트 형제 집안들은 다  잘 지내고 있어. 한길가의 새  농장들은 참 멋있었
어! 15제사친(1제사친은 약2정보)의 경작지에  양, 소, 말, 돼지를  기르며, 앞으로 3년 먹을
곡식을 다 마련해놓았다. 농기구가 볼 만했어, 수확기까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콜차크는 그
들을 자기편에 끌어들이려고 애썼고, 군사 위원은 그들대로 산림 의용대에 끌어들이려고 기
분을 맞추고 있었어. 그들은 게오르기 훈장을 받고 전선에서  돌아와서는 교관이 되려고 앞
을 다퉜어. 어깨에 견장이 있거나 없거나 자기가 할 일을  잘 알고 있다면 언제든지 일자리
는 있는 법이야. 그냥 썩지는 않아.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여자가 이렇게 늦도록
거리를 서성거리는 것은 좋은 일이  못 되지. 정원이라면 몰라도.  게다가 여긴 진구렁이야.
아무튼 기분이 좀 가벼워졌으니까.
  마침내 회상에 잠겨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다가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층계 앞
에서 발을 멈추고 다시 몇 가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지금 호다트스코예의 선도적 인물에 대하여 생각했다.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은 알고 있었다. 모두 도시에서 유배되어 온 정치범들이었다. 치베르진,  안치포프, 무정부주
의자인 '검은 깃발' 브도비첸코, 이곳의 난폭한 대장장이 고르제냐가 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활한 사람들이라 저마다 속셈은 다 가지고 있었다.  한창 날리던 때에는 소동깨나
일으켰던 족속들이었다. 지금도 무얼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게  없이는
도무지 살아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기계로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기계
처럼 냉혹한지도 모른다. 그들은 천천히  걸어다니며, 스웨터 위에 상의를 걸치고  파이프에
담배를 피워 물고, 전염별이 두려워 끓인  물을 마시고 있었다. 남편은 지금 공연히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모든  것을 제멋대로 뒤집어 놓고 제  갈 길을 찾아갈
사람들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을 했다. 자기 자신은 멋과  독창력이 있으며 또
절제할 줄 아는 영리하고 좋은 사람으로 생각됐다. 그런데 이런 촌구석에서는 자기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우랄 일대에 알려진 센체추리하라는 어리석은 노파
의 노래가 생각났으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처음 구절뿐이었다.
  센체추리하는 마차를 팔아
  발라라이카를 샀다네.
  그 뒤는 추잡한 소리뿐이었다.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에서는 그녀에게 빗대어 노래 불렀
던 것이다.
  그녀는 괴롭게 한숨을 내쉬고는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5
  그녀는 현관에 머무르지 않고 슈바를  입은 채 침실로 들어갔다. 방의  창문은 뜰을 향해
있었다. 밤중인 지금, 창문 안쪽에서 중복되는 그림자는 마치 창 밖에서 비친 그림자처럼 생
각되었다. 축 늘어진 커튼의 그림자가 뜰의 앙상한 나무의 그림자와 흡사했다. 겨울이  끝날
무렵, 정원의 비로드 같은 어둠이 봄의 땅속에서 솟아 나는  진한 자색 열기에 훈훈하게 녹
고 있었다. 또 지저분한 커튼이 늘어져 있는 방안에도 비슷한 두 가지 요소가 얽혀  있었다.
숨막힐 듯한 어둠은 다가오는 축제의 훈훈하고 진한 자색빛으로 부드럽게 느껴졌다.
  마리아 성상은 은빛 옷 속으로부터 갸름한 두 손을 펴서 위로 치켜올린 모습이 그녀의 그
리스 이름, 신의 어머니의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받들고 있는 것 같았다.
황금 촛대에 얹어 놓은 검은 잉크병 같은 등잔의 불빛이 석류석 유리를 통하여 별빛처럼 흐
트러져 검붉은 빛을 침실 융단 위에 뿌리고 있었다.
슈바와 스카프를 벗으면서 그녀는 거북하게 몸을 움직였다. 다시 옆구리가 결려와서 아픔을
느끼곤 했다. 예전의 아픔을 두렵게 회상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슬픔이 있는 자를
지켜주시는 자비롭고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 고난에 빠진 자를  건져주시며 세상을 살피시
는..."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픔이 사라지고 옷을 벗기 시작하였으나, 잔등의 후
크가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부드럽게 줄어드는 천에 걸려서 그것을 풀어내느라  애썼
다.
  크슈샤가 잠이 깨서 침실로 왔다. "어머니, 왜 어두운 데 계세요? 등잔불을 가져올까요?"
  "아니 그만둬라. 이만 해도 보인다."
  "제가 벗겨드릴게요. 가만 계세요."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서 마음이  언짢구나. 그 양재사가 일부러  벗기 어렵데 후크를
달았나봐. 북북 찢어서 그놈의 보기 싫은 낯바닥에 모조리 던져버렸으면 속이 후련하겠다."
  "성십자가제의 노래는 참 좋았어요. 밤이 고요하니까 여기까지 들렸어요."
  "노래는 좋았는지 모르지만, 이 어미는 기분이 좋이 않아요. 또 결리기 시작하니-여기저기
온몸이 쑤시니 어떻게 하면 좋지?"
  "이전에는 스트이도브스키 선생이 봐주었는데."
  "그 의사는 되지도 않을 소리를 언제나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돌팔이니까.  그런데 지금
은 없어요. 시내에서 떠난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고, 부활제 직전이라 모두들 가 버렸어. 지
진이라도 나는지 야단법석들이야."
  "그럼 헝가리 의사는 어때요? 포로  말이에요. 그 사람의 치료는 효과가  있던 것 같았어
요."
  "그것도 틀렸어. 사람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어.  케레니 라이오쉬는 저쪽(백위군의
점령 지역 밖)에 있는 헝가리 사람들과 한패가 돼 버렸어. 적위군에 징용돼 끌려가 버렸지."
  어머니는 왜 그렇게 조심성이 많으시죠? 너무 신경과민이예요.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좋
은 말 한마디로 거뜬히 낫는 수가 있는데. 주문을 외면서  어머니의 아픔을 고쳤던 군인 색
시 있었지요? 이름이 뭐더라..."
  "얘, 정말 못할 소리가 없구나.  그래 나를 무식한 바보로 취급한단  말이냐! 차라리 내가
없는 곳에서 센체추리하의 노래라도 부른다면 눈 하나 까딱 않겠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죄가 돼요. 남부끄러운 줄 모르시고. 그 여자 이름을 가르
쳐주면 어때요. 입안에서 뱅뱅 돌면서 생각이 안 나요. 꼭 알아야 속이 시원하겠는데."
  "그 여자 이름은 바지 종류보다도 더 많단다. 네가 어떤 이름을 알고 있는지 몰라도 쿠바
리하라고도 하고 메드베치하 즐르이다리하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그 밖에 이름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 여자는 지금 이 근처에 살고 있지는 않아요.
지금은 자취를 감춰 버렸단 말이야. 들리는 말엔 낙태를 시켰는데, 무슨 환약인가  가루약을
만들어서 잡혀가 케제마 형무소에  갇혔다고도 하고, 감옥에 들어간  직후에 탈옥해서 극동
지방 어딘가 도망쳐 버렸다는 소문이 있어요. 하기야 누구나 다 내빼고 말았지만 말이야. 블
라스 파호므이치(남편 블라수쉬카)도 체로쉬카도 마음씨 고운 네  이모 포랴도 다 가버리고
없단 말이야. 나하고 너 같은 바보만 우물쭈물하고 있지, 시내에는 정직한 여자라곤  하나도
없어지고 말이야 나는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야. 그리고 의사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하
나도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젠 의사를 부를 수가  없게 되었어. 유라친에는 의사 한
사람이 있는데 모스크바에서 온 유명한 교수로서, 자살한 시베리아 상인의 아들이라고 말하
고 있었어. 그래도 내가 그 사람을 불러오려고 했는데 적위군이 길에 열 두 개소나 경계 초
소를 펴고 있어서 아무데도 못 가게 됐어. 그럼 너는  가서 잠이나 자렴. 나도 자야겠어. 너
는 그 학생 블라제인에게 정신이 빠져버렸지? 아니긴 뭐가 아냐. 새우처럼 얼굴이 빨개지면
서. 그 학생, 내가 맡긴 사진을 현상하느라 고생하겠군. 그집 사람들은 잠자지도 않더군,  다
른 사람까지 못 자게 하면서. 토미크는 온 거리를 떠들썩하게 시끄럽게 짖어대고,  사과나무
위에선 까마귀가 깍깍 울어대니 이 밤도 또 그냥 새우게 될 것 같구나... 뭘 그렇게  화내니,
발끈해 가지고. 처녀가 연애도 못할 바에야 학생도 어디 소용이 되겠니!"

  6
  "개가 왜 저렇게 짖어댈까? 가서  알아봐야겠어. 아무 이유도 없이 저렇게  짖어 댈 리가
없지. 리도치카, 기다려! 왜 그런지 알아 봐야겠어. 그러다가  경찰이 뛰어오면 큰일 나니까.
우스친, 자네는 여기 있게. 시보브류이, 자네까지 갈 건 없네."
  중앙에서의 대표 리도치카는 빨치산 대장의 제지하는 소리도 듣지 않고 지루한  장광설을
재빠르게 늘어놓는다.
  "시베리아에 있는 부르주아 군사 정권의 약탈,  징발, 폭행, 총살, 고문 등의  정책은 무지
몽매한 민중의 눈을 뜨지 않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시베리아 정권은 노동자 계급만 아니라
전체 근로 농민의 적인 것입니다. 시베리아와 우랄 지방의 근로 농민은 알아야 합니다.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병사가 동맹을 하여야만이,  키르기스와 부라트의 빈민이  동맹을 하여야만
이..."
  이윽고 그는 방해자가 들어온 것을 깨닫고 말을 멈추고 나서 땀이 흐르는 얼굴을 손수건
으로 닦고 피곤한 듯이 부풀어오른 눈을 감아 버렸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속삭였다.
  "좀 쉬고, 물이라도 마셔요."
  알아보러 갔던 사람이 걱정하던 빨치산 대장에게 보고했다.
  "그렇게 걱정할 건 없습니다. 다 제대로 돼가고 있습니다. 신호등은 창문에 보이고 보초도
제자리에 있어서, 극적으로 말하자면, 공간을 시선으로 삼키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보고를
계속해 주십시오, 리도치카 동무."
  큰 창고 안은 장작들이 치워지고, 천장까지 쌓아 올린 장작의 벽으로 막힌 입구의 깨끗한
장소에서 비밀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만일 비상시에는 비밀  문을 통하여 지하실로 내려
가 교회 뒤쪽의 콘스탄치노브스키 골목의 뒤뜰로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보고자는 벗겨진 대머리에 검은 무명 모자를 쓰고 귀 밑까지 구레나룻이 덮여 있는, 혈색
이 좋지 못한 얼굴이었다. 신경질 때문에 줄곧 담을 줄줄 흘리면서 책상위의 석유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열에 담배 꽁초를 연방 붙여 물고는 굶주린 듯이 연기를 빨아 삼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흩어진 종이조각 위로 허리를 구부려서 냄새를 맡듯이 근시의 눈을  신경질적으로
움직이면서 피로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도시와 농촌가의 빈민의 동맹은 소비에트를  통해서만이 달성됩니다. 지금이야말로 좋든
싫든간에 시베리아의 농민들은 목적을 향하여 돌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베리아의 노동자가 이미 오랜 옛날에 이것의 달성을 위하여 투쟁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노동자 농민의 공동의 목적은 카자크 두령이나 제독 따위의 증오할 만한 전제 정권을 타도
하고, 무장 봉기에 의하여 농민·병사 소비에트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이빨까지도 무장한 장
교나 카자크 등의 부르주아와의 용병들과 싸우면서 봉기한 민중은 정규의 전면 전쟁을 전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투쟁은 길며 가열될 것입니다."
  다시 말을 멈추고 얼굴의 땀을  씻은 다음 눈을 감았다. 규칙을  무시하고 청중 가운데서
일어서서 손을 쳐들고 발언을 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빨치산 대장, 정확히 말해서 빨치산 부대 케젬 대장은 보고자의 바로 면전에 시무룩한 태
도로 앉아서 아주 버릇없이 그의  말을 연방 가로막고 있었다. 그에게는  조금도 경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제 겨우 소년의 꼭지가 떨어진 젊은 군인이 큰 부대를 지휘할 순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부하의 복종과 존경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의자 뒤로 제쳐놓은 기병  외투
속에 손발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어깨에는 견장을 떼어낸 자국이 검게 보였다.
  그의 양편에는 곱슬거리는 양털로 가장자리를 한  회색빛에 가까운 흰 염소 가죽의  짧은
외투를 입은, 대장과 같은 또래의 호위병이 묵묵히 서 있었다. 멀끔한 얼굴은 돌처럼 무표정
하고, 대장에 대한 맹목적인 총성과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할 용의가 있다는 결의를 나
타내고 있을 뿐이었다. 토론에도 끼어들지 않고, 그곳에서 제기된 문제에도 관심 없는  그들
은 이야기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방안에는 십여 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서 있는 사람도 있고, 장작더미에 기대거나 두
다리를 마룻바닥에 뻗어버리거나 또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앉은 사람도 있었다.
  귀빈 서너 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제1차 혁명에 참가했던 고참 노동자였다.  그
들 중의 한 사람은 전과 달라진 음흉한 치베르진이었다. 그의 친구 안치포프 노인도 있었다.
그는 치베르진이 하는 말이라면 뭣이든지 찬성했다. 그들은 혁명이  발 앞에 제물과 희생이
바쳐진 신으로 인정되었으며, 우상과도 같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거만  때문
에 따뜻한 인간미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 밖에도 이름 있는 몇 사람이 있었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검은
깃발' 브도비첸코인데,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줄곧 마룻바닥에 앉아 있다가는  다
시 일어나고 또 왔다갔다 걸어다니다가 중앙에 서기도 했다. 아주 뚱뚱한 거구에다 큰 머리
와 큰 입, 사자의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터키와의 전쟁 때인지, 아니면 노
일전쟁 때 장교로 참전했으며, 가슴 속에 자라나는 백일몽에서  언제나 헤어나지 못하는 몽
상가였다.
  놀랄 만큼 거대한 체구 때문인지 또 자기보다 작은 것을  의식 못하는 탓인지, 아니면 너
무 좋은 성질 때문인지 몰라도 브도비첸코는 흔히 주위에서 일어나고 잇는 사태에는 마음을
쓰지 않고, 무엇이든 잘못 알아들으며 자기의 반대자의 의견을 자기 의견과 같은 것으로 생
각해버리고는 아무렇게나 다 찬성하는 것이었다.
  그의 옆자리 마룻바닥에는 친구인 사냥꾼 스비리드가 앉아 있었다. 그는 농부는 아니지만,
그의 검은 셔츠에서 농민다운 데가 엿보였다. 목에 건 십자가를 끄집어 당겨서 그것으로 가
슴패기를 긁어댔다. 부라트인과의 혼혈인 그는 마음은 부드러웠으나 무식한 사람이었다.  머
리를 가는 변발로 땋고, 숱이 적은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몽고인 특유의  용모
탓으로 나이 먹어보이는 얼굴이 언제나 상냥한 미소로 주름을 짓고 있었다.
  보고자는 중앙위원회의 군사 지령을 가지고 시베리아를  여행하고 있었으며, 이제 다녀야
할 넓은 지역을 끊임없이 머리 속에 생각했다. 그는 대부분의 경우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에
게는 무관심했다. 다만 어려서부터 혁명가였으며 민중을 위해 싸운  탓으로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젊은 대장에게 선망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다. 그는 대장의 무례한 태도를 순수한 혁
명적 기질의 표시로 보고 용서하였을 뿐만아니라, 마치 연모하는 여인이 그 사내의 거친 태
도에 오히려 마음이 쏠리는 것처럼 대장의 독설을 좋아했다.
  빨치산 대장은 미쿨리츠인의 아들 리베리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사람은 협동주의 자로서
트루도비크(나로드니크의 경향을 가진 농민과 인텔리가  결성한 종파. 볼셰비키와는 반대적
입장)의 코스토예드 아무르스끼였다.
그는 이전에 사회혁명당에 가담하였으나 최근에는 과거의 사상적 오류를 시인하고, 여러 번
성명서를 발표하고 자기 비판을 하였다. 공산당은 그의 입당을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입
당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재의 책임 있는 일을 맡겼던 것이다.
  그는 군인도 아니면서 지금 그 일을 위촉받게 된 것은 오랫동안 혁명의 경륜과 제정 시대
의 옥고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였으며, 또한 한때 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하였던 경험이
잇기 때문에 서부 시베리아를 휩쓸고 있는 봉기에서 농민 대중의 심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
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그의 지식은 군사 지식보다도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그의 정치적 신념의 변화는 그의 마음과 태도, 습관까지도 바꾸어버렸다. 이전에 그를  알
고 있던 사람은 벗겨진 머리나 턱수염의 남자를 그 사람이라곤  알지 못했다. 혹시 또 변장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는 당으로부터  이전의 신분을 밝히지 않도록  엄명을 받고 있었다.
지하 운동 시기의 그의 이름은 베렌제이 또는 리도치카 동무로 통용되고 있었다.
  브도비첸코가 성급하게 금방 낭독한 지령에 찬성한다고 발언하였기 때문에 잠시동안 주위
가 소란해지더니, 잠시 후 조용해지자 코스토예드는 말을 계속했다.
  "확대되는 농민 대중의 운동을 극력 광범위하게 포섭하자면 지방당위원회  관할 구역에서
작전중인 모든 빨치산 부대와 연락할 길을 어서 터놓아야겠습니다."
  그는 이어서 비밀 집회 장소, 밀어,  암호와 통신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더욱  자세히
설명하였다.
  "각 부대는 백위군의 시설과 단체에 속하는 병기, 식량, 장비 등의 저장 장소에 대한 정보
를 빨치산 부대에 제공하고, 백위군이 큰돈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와  그 경비 상황 같은 것
을 알려고 합니다.
  더 상세히 필요한 것은 빨치산 부대의 기구, 그 대장, 군사 집단의 규율, 모략활동, 부대와
외부와의 연락, 지방 주민에 대한 태도, 야전 군사 혁명 재판, 적의 지역내에서의 파괴 전술
-예로서 교량, 철도 노선, 증기선, 전마선, 역, 공장과 기술 설비의 전부, 그리고 전신,  광산,
식량 보급 등인 것입니다."
리베리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허황된 이야기로 들렸
다.
  "좋은 강의이군요. 귀에 담아두겠소. 그런데 적위군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꼼
짝없이 모든 것을 수락하란 말이오?"
  "그래야지요."
  "나의 부대는, 포병과 기병을 합해서 3개 연대가 있소. 이들이 지금 수개월 동안이나 작전
하여 적을 격파하고 있었는데, 리도치카, 당신의 그런 어린애 같은 장광설은 대체 우리를 어
떻게 하라는 말이요?'
  '참으로 훌륭해! 힘이 있군!' 코스토예드는 생각했다.
  리베리의 건방진 말버릇 때문에 화가 치밀어오른 치베르진은 논쟁을 막고 나섰다.
"죄송합니다. 보고자 동무, 저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데가 있습니다. 아마 지령서 중의 한
점이 잘못 적힌 것 같습니다. 내가 그것을 읽겠습니다. 나는 확실히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혁명 다시 전선에 있던 병사의 조직에 속해 있는 재향  군인을 위원회에 들어오게 하는 것
이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위원회의 구성에는 한두 명의 하사관과 한 명의 군사 기술자를
포함시키는 것이 요망됩니다'라고 틀림없이 읽었지요, 코스토예드 동무?"
  "그렇소. 한마디도 틀리지 않았소."
  "그렇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저는 군사 전문가에  대한 점은 어쩐지 이해가 되
지 않습니다. 1905년의 혁명에 참가했던 우리 노동자들은 군인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했습니
다. 언제나 그들 중에는 반혁명 분자가 숨어 있었습니다."
  주위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결의! 결의합시다. 늦었어. 돌아가야지."
  "난 다수 의견에 찬성이오." 브도비첸코는 우레와 같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적으로 표현한다면, 시민에 대한 지령은 민주주의의 기반에서 마치  흙 속에 심어져 뿌리
를 박는 묘목과도 같이 밑으로부터 자라나야 하오. 울타리의  말뚝처럼 위에서부터 때려 박
지는 못하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야코빈스키  독재의 과오였으며, 콘벤트(국민공회)가 체르
미도리안에 의하여 파탄된 이유였소."
  "그것은 햇빛보다 더 밝은 사실이오." 그의 방랑의 친구 스비리드가 찬성했다.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오. 지금은 늦은 감이  있어요. 벌써 알았어야 할 터인데. 이
젠 우리는 오직 싸우고 전진할 따름이오. 이제 출발 지점에 되돌아갈 순 없지 않소.  끓여놓
은 국은 먹어야 하오. 물속에 뛰어든 판이니 군소리 맙시다."
  "결의합시다! 결의합시다!" 사방에서 제의했다. 그로부터도 토론은 더 있었으나 그런 말은
점점 더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드디어 새벽 무렵에야 회의가 끝났다. 그들은  보통때
와 같이 한 사람씩 집으로 돌아갔다.

  7
  한길가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장소가 있었다. 파쥔카 강의 급류가 쿠체이느이와 말르이 예
르몰라이의 두 마을로 갈라지는 곳이었다. 하나는 가파른 언덕을 미끄러져 내리듯이 펼쳐져
있었고, 또 하나는 그 밑의 골짜기에 퍼져 있었다. 쿠체이느이 마을에서는 신병 입대의 송별
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말르이 예르몰라이 마을에서는 부활제 때문에 한때 중지했던
쉬트레제 대령의 감독하에 징병위원회가 그 일대 장정들의 신체  검사를 다시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을에는 카자크 병사와 기마 민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날은 예년에 비하여 늦게 시작한 부활절의 사흘째 되는  날이었으며, 예년보다 일찍 찾
아온 봄날이라서 따뜻하고 고요한 날씨였다. 한길에서 좀 떨어진 쿠체이느이 마을에서 장정
들에게 베풀 음식이 놓인 식탁에는 흰 상보의 끝을 땅바닥까지 내려 드리우고 있었고, 왕래
에 방해되지 않도록 호수처럼 길게 늘어놓았다.
장정들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돈을 냈으나, 대부분의 음식은  부활절에 쓰다 남은
것이었고, 햄 두 개와 쿨리치(큰 과자빵)  몇 개, 큰 파스하(세모난 우유 과자,  사순제 단식
후에 축하하기 위하여 부활제 당일 아침에 먹음)  두세 개, 게다가 소금에 절인 버섯, 오이,
양배추를 가득 담은 접시라든지 집에서 만든  두텁게 자른 빵과 부활제의 달걀을  쌓아놓은
접시가 식탁 위에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달걀은 대부분 분홍과 연한 푸른색으로 칠해 있었
다.
  껍데기는 분홍색이나 푸른색 칠을 했으나 속이 흰 계란 껍데기가 식탁 주변 풀 위에 널려
있었다. 젊은 남녀의 의복도 분홍과 엷은 푸른색이었다. 그리고 분홍색 구름이 푸른  하늘을
서서히 그리고 아름답게 떠다니고 있었다. 하늘도 구름과 같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분홍색 루바쉬카에 일곱 색 명주 허리띠를 맨 갈루진이 좌우로 발끝을 돌리면서 한길 비
탈에 있는 파프누트킨네 집 계단을 요란하게 내려와 식탁 앞으로 달려와서는 연설을 시작하
였다.
  "샴페인이 없으니 우리가 만든 술로 건배합시다. 오늘  출발하는 젊은이 여러분의 장도를
위하여! 신병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 가지 축배를 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앞
길에 놓인 가시덤불 길은 강도의 무리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길인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조
국의 산야에 동포의 피를 뿌리게  하고 있습니다. 민중은 무혈 혁명의  승리를 즐길 희망을
가졌으나, 외국 자본의 앞잡이인 볼셰비키당은 총검의 폭력을 가지고 민중의 최대의 희망인
제헌 의회를 해산시켰던 것입니다. 지금 의지할 길 없는 민중의 피는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
니다. 오늘 출발하려는 젊은이여, 러시아 군대의 욕된 명예를 회복하는 것만이 여러분의  사
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굴욕을 받아왔으며 충실한 동맹국의 신세만 지고 있는 것입니
다. 그러나 빨갱이들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까지도 두꺼운 낯짝을 또다시 들고 기
웃거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목소리는 우라(만세) 소리와 그를 공중으로 치켜올리라는  함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
다. 그는 입술에 술잔을 대고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것은 잘 걸르지도 않은  보드카
술로 구미에 맞지 않았다. 그는 포도주만을 마셔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중에게  희생하
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은 만족감에 부풀어 있었다.
  "너의 아버지는 대단한 웅변가야! 밀류코프 의원도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취해서 큰 소리로 떠들썩한 식탁에 나란히  앉은 고쉬카가 혀꼬부라진 소리로 옆의  친구
체렌치 갈루진에게 말했다.
  "말은 맞지만, 그러나 너의 아버지는 공짜로 그렇게 열을 낸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연설하
고 다니면서 널 징병 면제시키려는 속셈이겠지."
  "뭐라고, 고쉬카! 그런 양심의 가책을 받을 소릴 하다니. '징병 면제'라구, 터무니없는 소리
말게. 난 너와 같은 날에 영장을 받았어. 우리는 같은  부대에 갈 걸세. 내가 그 악당들한테
학교를 쫓겨나서 어머니는 울기만 하신다네. 놀란 것은 그것이 그의 타고난 재간이며,  그는
별로 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단 말일세."
  "사니카 파프누트킨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봤나?"
  "들었어. 그놈이 그렇게 지독한 병에 걸렸었나?"
  "불치의 병이라네. 척추병으로 죽을 거라고 했어. 그가  잘못했으니까 하는 수 없지.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어. 상대가 어떤 여자인지 조심해야 하네."
  "그는 이제 어떻게 하 건가?"
  "비극일세. 자살하려고까지 했었지. 그런데다 또 군대에 소집되어서 지금은 예르몰라이 마
을에서 신체 검사를 받고 있는데 끌려가고 말았어. 그는  빨치산에 들어가서 사회악에 대항
하여 복수하겠노라 말했어."
  "고쉬카, 자넨 성병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여자한테 가지 않으면 다른 병이 생길 거야."
  "자네 말을 알겠어. 자네는 자기 경험으로 하는 소릴 테지. 그건 병이 아니고 숨기고 있는
죄악일세."
  "얻어맞고 싶은가. 친구를 모독하지 말게. 더러운 거짓말쟁이 같으니."
  "이봐, 그렇게 화내지 말게. 자네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파쥔스크에 놀러간 일이
있는데. 강연하러온 사람이 무정부주의자인데 재미나는 사람이었어.
'인격의 해방'이란 연제였었는데 마음에 들었어. 멋있었어. 난 곡 무정부주의자가 되겠어. 힘
은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라 했어. 성과 성격은 동물 전기의 각성이라고  표현했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는 천재였어. 나는 꽤 취해 있었다네. 사람들은 사방에서 떠들어대고
뒤가 멍멍해 버렸어. 이젠 참을 수가 없네. 가만 있게 체로쉬카, 제기랄, 가만 있어요."
  "고쉬카, 하나만 가르쳐주게. 나는 아직 사회주의 용어는 전혀 몰라서, 사보타주니크가 무
슨 뜻인가?"
  "그런 용어에 대해서는 내가 선생일걸세. 모르는 게 없다네. 체로쉬카, 난 지금 취했어. 시
끄럽게 굴지 말게. 사보타주니크란 것은 한패거리란 말이야, 이 바보야. 알겠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쁜 데 쓰는 말이로군. 그런데 아까 자네가 전기에  대한 이야길
했는데 나도 들은 일이 있어. 난 페테르부르그에 전기띠를 주문하려고 했다네. 현품을  받고
대금을 지불하면 된다는 광고를 보고, 정력에도 좋다고 했어. 그런데 느닷없이 또 새로운 혁
명이 일어나고 말았어."
  체렌치가 말을 끝내기 전에 술주정꾼의 떠들어대는 소리를 누르고 얼말 멀지 않은 곳에서
굉장한 폭음이 지축을 흔들며 울려왔다. 순간,  식탁에서의 소동이 뚝 끊기고 이내 훨씬  더
무서운 혼란이 일어났다. 의자에서 뛰쳐 일어난 사람 중에는 좀 덜 취한 사람은 서 있을 수
가 있었지만, 비틀거리는 발로 도망치려다 식탁 밑으로 비실비실  쓰러져 그대로 코고는 사
람도 있었다. 여자들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큰 소란을 피웠다.
  갈루진은 주위를 연방 두리번거리며 범인을  찾고 있었다. 처음에는 폭음이  마을 어딘가
아니면 식탁 바로 근방에서 났던  것 같았다.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얼굴은 자색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들 대열에 숨어들어 만행을 저지른  반역자는 누구냐? 누가 수류탄을 던졌느냐?  그
독사 같은 놈을 이 손으로 죽여버릴 테다. 내 아들이라도 용서 못한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자라도 우리에게 이런 장난을 하도록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마을 주위에 비상선을 치고 스파이를 잡읍시다. 도망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모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말르이  예르몰라이의 군청 건물에서
검은 연기 기둥이 천천히 하늘로 치솟고 있는 곳에 정신이 쏠렸다. 모두 골짜기의 낭떠러지
로 뛰어가 무슨 일인지 살피고 있었다.
  군청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여러 명의 장정이 뛰어나왔다. 그 중에는 맨발에 바지만 걸친
알몸뚱이도 있었다. 쉬트레제 대령이 다른 징병위원회  군인들과 함께 건물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카자크 기병과 민경대원들이 안장 밖으로 몸을 낮게  기울이고 말 채찍을 휘두르면
서 마을을 뛰어다니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말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뛰어다녔다. 많은  사
람들이 경계 신호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 쿠체이느이 쪽으로 길을 뛰어 올라가고 있
었다.
  사건은 무서운 속도로 진전되고 있었다. 어두워지자  쉬트레제 대령은 범인이 예르몰라이
마을을 도망쳐 나갔다고 확신하고 카자트들을 이끌고 쿠체이느이 마을로 달려가 마을  주위
에 보초병을 풀어 모든 집과 농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장정들의 태반은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연회 장소에 그대로 남아 땅바닥에서 잠들
어버리거나 식탁 밑으로 머리를 처박고 코를 골고 있었다.  민병대가 마을에 왔다고 알려진
때는 이미 캄캄해진 후였다.
  몇 명의 젊은이는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서 뒤뜰을 지나 가까운 곳간에 들어가 서로 밀고
차면서 벽의 좁은 사이로 마룻바닥 밑에 기어들어갔다. 어둠과  소동 때문에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없었으나 생선과 석유 냄새로 보아 소비 조합 상점의 곳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  같
았다. 
  숨은 사람들은 양심에 거리낄 일은 없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단지 술에 취해서 이성을 잃
었기 때문에 순간적인 자극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  몇 명은 그다지 신통치 않
은 친구와 사귀고 있어서 그것이  들통이 나서 의심을 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들의
친구는 불량배 이상으로 더 나쁜 놈들은 아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요즘은 뭣이든지 정
치적인 색깔이 묻어 있기 마련이었다. 소비에트 지역에서는 불량배를 흑백인조(제정 러시아
의 극우 반동)와 동일하게 보았고, 백위군 점령 지구에서는 볼셰비키 도당으로 보게 되었다.
  마루 밑에 숨어 들어간 친구들은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마루와 땅바닥의 좁은
새에는 두 마을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쿠체이느이 마을에서 온 자들은 몹시 취해  있었다.
코를 골고 이를 갈며 꿍꿍거리는 자도 있었으며, 병든 자도 있었다. 숨이 가쁘고 캄캄한데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숨은 곳을 눈치채지 못하게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이 구멍을 돌과 흙
으로 막아버렸다. 곧 코고는 소리와 꿍꿍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아주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
들이 죽은 듯이 깊이 잠들고 말았다. 다만 한쪽 구석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줄곧 들렸다.  체
렌치와 고쉬카가 예르몰라이에서 온, 싸우기 잘하는 난폭한 코시카 네흐발레느이와 함께 모
여 앉아 있었다.
  "조용히 해! 소리가 높아!" 코시카가 속삭였다. "들키는 날에는 우리 전부가 잡히게 돼. 저
소리 안 들려? 쉬트레제의 무리가 찾아다니고 있어. 놈들이 마을밖에서 다시 오고 있어. 저,
저기 왔어. 가만 있어. 그렇지 않으면 난 너의 목을  꺾어버릴 테야. 됐어, 가버렸군. 너희들
뭣 때문에 여기 기어들었지? 숨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바보 녀석들! 너희들한테 볼일이 있
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고쉬카가 숨으라고 해서 여기 기어들어왔어."
  "고쉬카는 숨어야 할 이유가 있지. 그들 온 가족은 문제가 있어. 모두 의심을 받고 있으니
까. 그들 친척 중에 호다트스코예  철도 역에서 일하는 친척이 있었어.  그것이 그 이유야...
움직이지 말아. 조용히 해, 바보들 같으니. 여기 있는 놈들은 장소도 가리지 않고 토하고 똥
싸 놓아서, 움직이기만 하면 온몸에 그것이 묻어버려. 너희는 저 냄새를 맡지 못하니?  너희
들은 어째서 쉬트레제가 온 마을을 뒤집고 다니는지 알고나 있어? 그는 파쥔스크에서 온 사
람을 혈안이 되어서 찾고 있는 거야."
  "어떻게 된 영문이지? 코시카, 이 일은 어떻게 발단이 되었지?"
  "사니카가 그 장본인이야. 우리는 징병 검사소에서 알몸뚱이로 줄을 서서 신체 검사의 순
번을 기다렸어. 사니카의 차례가 됐는데 옷을 벗지 않았어. 올 때부터 좀 술 취해 있었던 것
같았어. 서기가 그에게 공손히 옷을 벗으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당신'이리고까지 말하며 공
손했었어. 그런데 사니카는 거칠게 대들 듯이 죽어도 벗을 수 없다면서, 내 몸의 음부를  남
한테 공개할 수가 있겠느냐면서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어.  그 다음에 서기한테 다가가
더니 그의 턱을 탁 쥐어박았어. 믿어지질 않겠지만 눈 깜짝할  새에 그는 몸을 굽혀서 책상
다리를 잡아당겨 엎어버렸어.
잉크병과 장정 명부 등을 한꺼번에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어! 그러니까 쉬트레제가 들어와
큰 소리로 '난폭한 행동은 용서치 않겠다. 난 무혈 혁명이  무엇인지 보여 줄 테다. 공무 집
행 장소에서 법을 무시하는 따위의 행동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겠다. 주모자가 누구냐?'
라고 으름짱을 놓았지.
  그런데 사니카가 소릴 질렀어. '옷을 집어라! 여기 있으면 끝장이야, 여러분!'
창문 쪽으로 뛰어간 그는 창문을 주먹으로 깨뜨려버렸어. 나도  옷을 안고 입으면서 그놈의
뒤를 따라 달렸어. 거리로 뛰어나가선 바람처럼  재빠르게 달렸어. 다른 두 서너 명이  함께
따라왔었어. 우리는 모두 다리가 견디는  한 빨리 뛰고, 그들은  소리지르면서 우릴 따랐어.
그러나 왜 그렇게 뛰었는지 모르겠어."
  "그러면 폭탄은?"
  "폭탄이 어쨌단 말인가?"
  "그럼 던진 건 누구야? 폭탄이든, 수류탄이든간에."
  "천만에, 우리가 한 짓은 아니야."
  "그럼 누가 했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알아? 어느 딴놈이 한 짓이겠지. 어떤 놈이 그 북새통에 '소동이 일어났으니
까, 이틈에 여길 폭파해버리면 딴놈이 혐의를 받겠지' 하고 생각한 게 틀림없어. 파쥔스크의
정치 분자였을 거야. 그곳엔 정치패들이 우굴거리니까... 조용히 해, 입 다물어! 소리가 들리
지 않나? 쉬트레제가 돌아오고 있어. 들키면 마지막이야. 조용히 해."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장화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박차의 절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떠들지 말아. 너희는 날 못 속여." 페테르부르그 억양인 대령의 깡깡 울리는 목소리가 들
렸다. "틀림없이 저기서 누가 말하는 소릴 들었어."
  예르몰라이의 촌장인 늙은 어부 오트바쥔스키 말했다.
  "놀란 탓이겠지요, 각하. 그리고 마을 사람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묘
지가 아닌 이상 말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벙어리 동물과는 다릅니다. 누가 집  귀신
한테 홀린 거겠지요."
  "아니 그만둬요. 날 바보 취급 말아요! 집  귀신이라니! 농담 마시오. 무슨 소린지 모르겠
군. 이번엔 인터내셔널 노래라도 부른다고 하겠군."
  "고정하십시오, 각하! 인터내셔널이라니요! 우린 모두 무식한 바보뿐이랍니다.
기도문조차 못 읽는 주제에 혁명에 대한 걸 어떻게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너희들은 다 그렇게 말한다니까, 꼬리가 잡히기 전까지는. 저기 소비조합의  상점을 철저
히 수색하라. 기와장을 뒤지고 풀 뿌리를 뽑아내는 한이 있어도 찾아내야해."
  "알겠습니다, 각하."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문제가 아니야. 파프누트킨과 랴브이, 그리고  네흐발레느이를 붙잡
아 와. 바다 밑까지라도 들어가서 말이다. 그리고 그  갈루진의 아들놈도 잡아라. 아비가 아
무리 애국적인 연설을 하고 다녀도 상관 없어. 거꾸로  그것은 우릴 자극하는 짓이야. 장사
아치가 연설을 하고 다닌다는 게 구린 짓이고 부자연스럽단  말야. 갈루진 부부가 크레스토
보즈드비젠스크 집에다 정치범을 숨긴 일이나 불법 집회를 가진다는 정보를 이리  입수하고
있다. 그놈의 새끼를 잡아오너라.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무슨  꼬투
리라도 잡히는 날엔 다른 놈한테 본보기로 교수형이야."
  수색대들은 가버렸다. 그들이 아주 멀리 가 버렸을 때, 코사카는 겁에 질려 반쯤 죽어가는
체로쉬카에게 소곤거렸다.
  "들었어?"
  "그래." 목구멍이 막힌 소리였다.
  "이렇게 되면 나와  너 그리고 사니까와 고쉬카가 갈 곳은 숲속밖에는 없어. 하지만 오래
있을 필요는 없어. 잠시 조용해질 때까지만. 그러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제11장 산림 의용대
  1
  지바고가 빨치산의 포로가 된 지 1년이 지났다. 그가 붙잡혀 있는 상황은 매우  애매했다.
그를 울타리 속에 유폐해 놓은 것도 아니고, 감시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행동을  지켜보
는 사람도 없었다. 빨치산 부대는 쉴새없이 이동하고 있어서 지바고도 함께 이동했다.  빨치
산 부대가 지나가는 부락이나 마을 주민들과는  거리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주민에  섞여
그 속에 함께 융화되고 있었다.
  밖으로 보면 그는 잡혀 있거나  구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보였으며, 다만 그
자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를 붙잡아 구속하고 있는 것은, 인생의 다른 형식의 강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도 대개는 눈에 띄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키마이라(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자의 머
리에 양의 동체, 용의 꼬리를  가진 괴물)처럼 공상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비록 쇠고랑을
차거나 쇠줄로 묶여서 감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자유가 아닌 상태에  얽매여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이나 빨치산에서 도망칠 것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잡혀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아서 마치 불장난을  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는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빨치산의 두목 리베리 미쿨리츠인은 지바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리베리는 지바고
와 함께 있기를 좋아하여 같은  막사에서 지내게 하였다. 지바고는 어쩔  수 없이 강제적인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지긋지긋하게 생각되었다.

  2
  이 무렵 빨치산은 쉴새없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때로는 콜차크를 시베리아 서부로
부터 몰아내려는 총공세의 일부가 취해지고 있었고, 때로는 백위군에게 배후에서 위협을 받
고 그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퇴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바고는 오랫동안 그 구별이 잡히질 않았다.
  빨치산은 한길과 평행으로 이동하였지만 가끔은 한길을 따라가기도 했다. 한길을 따라 군
데군데에 있는 읍과 마을은 전세가 달라지면서 적위군의 수중에 있다가 백위군에  점령되기
도 했다. 그때마다 누가 권력을 잡고 있는지는 밖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었다.
  농민 의용군(빨치산)이 이 읍과 마을을 지날 때는 마을의 모든  것이 아무런 존재도 아니
었다. 길 양쪽의 집들은 땅속으로 기어들어가 보였고, 진흙을 밟고 지나가는 기마병, 말,  대
포, 그리고 크게 떠들어대는 보병들이 집을 누르고 높게 두드러져 보였다.
  어느 날, 한 잘은 읍에서 지바고는 빨치산 수중에 들어온 영국군 의약품의 저장품을 접수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카펠 장군 휘하의 백위군 장교 부대가 버리고 간 것이었다.
  음산한 비오는 날의 오후였다. 흰색과  검은색만의 살벌한 정경이었다. 빛이 비치는  곳만
희고 나머지는 한결같이 어둑어둑했다. 색깔의 변화나 그늘도 없이 뚜렷한 명암만 드러나보
여서 쓸쓸한 기분은 한결 더했다.
  군대의 빈번한 이동 때문에 아주 망가진 도로는 시꺼먼  진흙밖에는 없었다. 지나다닐 수
있는 곳은 불과 몇 군데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집 처마 밑으로 바싹 붙어서 먼 거리를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지바고는 파쥔스크  읍에서 펠라기아 차구노바를 만나게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함께 타고 왔던 여자였다.
  차구노바가 먼저 그를 알아봤다. 지바고가 알아보면 먼저 인사라도 하고 알아차리지 못하
면 모르는 체하려는 표정으로, 마침 운하를 사이에 두고  진흙길 저쪽에서 흘끔흘끔 바라보
는 여자를 지바고는 낯익은 얼굴이라고 겨우 알아보았다.
  잠시 후 그는 모든 것이 생각났다. 그와 동시에 초만원의 기차, 강제 노동에 끌려가는  무
리와 감시병, 가슴까지 머리를 땋아 늘인 여인, 그리고 가족들이 떠올랐다.
  재작년 여행의 추억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가 죽도록 그리던  가족의 얼굴이 눈앞에 뚜렷
이 되살아났다.
  도로 저편으로, 진흙탕 속에서 비어져  나와 있는 돌멩이를 따라 넘어갈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그는 고갯짓을 하고 자기도  그쪽으로 걸어가서 건너편으로 넘어가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차구노바는 그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깔끔하고 순진한 바샤가 부당하게 징집
되어 같은 기차를 타고 가던 일을 회상하면서, 그녀는 소년의 고향 베레첸니크에서 그의 어
머니와 함게 지내게 된 사연을 얘기했다.  그녀는 바샤네 집에서 잘 지내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낯선 외지 사람 취급을 하고 바샤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등 소문을 퍼뜨리면서
죽지 않으려면 동네를 떠나라느 것이었다. 그녀는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에 살고 있는 언
니 올가 갈루지나한테 와서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파쥔스크에서 프리툴리예프를 보았다는
소문이 들려서 여기로 찾아왔지만 헛소문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여기서 일자리를 얻
어서 눌러 살게 되었다 했다.
  그동안 그녀의 가까운 친지들 중에는 불행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식량 징발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레첸니크 마을은 징벌대의 습격을  받아서 바샤네 집은 불타 버리고  식구
중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었다. 그리고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 읍에서는 형부 갈
루진이 집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투옥되었든지 총살되었을 것이라고 했으며, 그의 조카는 도
망쳐 버리고, 언니는 얼마 동안 헐벗고 굶주렸으나, 지금은 즈보나르스까야 마을 친척  종가
에서 겨우 먹고 살았다.
  공교롭게도 차구노바는 지바고가 의약품을 징발하러 온  약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징발 조치 때문에 그녀 자신을 포함해서 약국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파멸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지바고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차구노바는 물품을 인도하는 장소에 입회하
게 되었다.
  지바고의 짐마차는 약국 뒤뜰 창고 입구에 대어놓고 있었다.  창고에서 주머니와 상자 그
리고 병을 담은 고리짝 등을 내고 있었다.
  약국 사람들이 비통한 표정을 짓고 운반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비통한 마음은,  약
국의 깡마른 말까지도 알아보듯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비 오던 날씨도 저녁 무렵에
는 하늘이 맑아졌다. 석양이 구름 사이에서 잠깐 비치며 검은 구릿빛 광선을 뜰안에 뿌리고
질척한 거름 웅덩이에 불길하게 비치고 있었다.
  바람은 잠잠했다. 진흙땅을 굴러가는 마차도 무겁게만 보였다. 길바닥에 고인 빗물이 가느
다란 잔물결을 일으키면서 붉게 반사되고 있었다.
  기마 부대와 도보 부대가 깊은 물 웅덩이를 피하면서 길가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빨치
산 대장은 최근 코카인을 쓰기 시작했는데, 징발된 의약품에는 병에 가득 들어 있는 코카인
이 섞여 있었다.

  3
  빨치산 부대에서 의사가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겨울에는 발진티푸스, 여름에는 이질. 게
다가 또 전투가 새로 벌어진 지금은 부상자의 수가 매일 더 불어나고 있었다.
  패전과 빈번한 퇴각은 있었으나, 농민 의용대가 지나갈 때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이 가세
하거나 적의 탈주병이 투항해 옴으로써  빨치산의 대열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지바고는
빨치산과 행동을 같이하면서, 1년 반 동안에 병력이 열 배로 늘어난 것을 보았으며,  그것은
리베리가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 읍의 지하 본부의 회의에서 큰소리치던 숫자와 실제로 거
의 비슷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지바고는 새로 임명된, 경험이 많은 여러 명의 위생병을 부하로 두고 있었다. 또 조수  한
사람은 그의 임상 조수로서 헝가리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포로  출신 군의관 케레니 라이오
쉬였으며, 빨치산 사이에서 라유쉬치 동무로 통했다. 또 한 사람은 호르바트(남슬라브 사람)
인 간호병 안겔라르였다. 이 사람도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로였었다. 지바고는 라이오쉬와
는 독일어로 말하고, 안겔랴르는 슬라브계 발칸 출신이기 때문에  다소 서투르긴 하지만 러
시아 말을 사용하였다.

  4
  국제 적십자사 협약에 의하면, 군 의무 요원은 무장하고 군사 행동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
어 있었다. 그러나 지바고는 한 번 이 규정을 어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전투장에서 전투원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자기 방위 때문에 총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빨치산이 산개하고 있는 숲가에서 적의 사격을 받고 부대 통신병 옆에 엎드렸다. 뒤
쪽은 밀림 지대였으나 전방은 평야로서, 이 노출된 무방비  공간을 백위군이 공격하고 있었
다. 백위군은 아주 가까이까지 접근하여, 지바고는 병사의  얼굴 하나하나를 뚜렷이 보았다.
이들은 소년과 젊은 도시 청년  그리고 예비역에서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대학 1학년이나 중고등학교 졸업학년 정도의 애송이들이었다.
 지바고는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은 없었으나 그래도 태반은  본 적이 있는 얼굴들 같았으며,
아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옛날 학급 친구를 아주 닮은 얼굴도 더러 섞여 있어서 지바고는 그들의 동생이 아닌지 생
각도 됐다. 또 이전에 극장이나 길거리에서  만났던 얼굴도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뚜렷한
표정과 잘생긴 용모들은 지바고 자신의 친근한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그들은 자기 의무를 그렇게 알고 있었는지, 끓어오르는 황당무계한 용기로써 대형을 넓히
면서 근위병의 열병 행진이 무색할이만큼 정연한 자세로 전진하고  있었다.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형도 무시하고, 달리거나 또 땅바닥에 엎드리는 일도 없이 똑바른 자세로 그냥 다가
오고 있었다. 그래서 빨치산의 총탄은 일제히 그들을 쓰러뜨렸다.
  넓고 노출된 들판 한가운데 고목나무 하나가 서 있었다. 벼락을 맞아 불탄건지 아니면 모
닥불 불길에 탔는지, 또 이때까지 전투에서 탄 것인지도 모르겠다. 행진을 하던  젊은이들은
모두 이 고목나무에 시선을 던지며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안전하게, 더욱 정확하게 겨누
어 쏘고 싶은 유혹을 받았으나 이내 다시 생각하고 걸음을 계속했다.
  빨치산에게는 탄약이 떨어지고 있어서 가까운 거리에서 뚜렷이 식별되는 목표만 사격하도
록 명령을 받고 있었다.
  지바고는 총을 가지지 않고 풀  위에 엎드려 전투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차츰
영웅처럼 쓰러져가는 젊은이에게 동정이 쏠리고 있었다.  지바고는 마음속으로 그들의 성공
을 빌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교육과 예절 그리고 판단력에서 그들과 가까운 한가족인  것이
다.
  들판으로 그들에게 뛰어나가 항복하고 구원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
나 그건 발에 모험을 건 위험한 짓이었다. 두 손을 들고 달리고 있는 동안에 양쪽에서 쏘아
댈 수도 있다. 빨치산 쪽에서는 배신자를  벌하기 위하여 잔등을, 백위군 측에선 의도를  잘
모르고 가슴팍을, 그는 그런 일이 이전에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고, 자기도 경험한 적이  있
었다. 벌써 여러 가지로 탈주 계획을 생각한 끝에 이것도  저것도 성공할 공산이 보이지 않
아 단념하고 말았다. 그는 두  갈래의 마음을 지정시키면서 풀 위에  계속 엎드리고 들판을
향한 채 총도 없이 풀속에서 전투의 진전을 관망하였다.
  그런데 주위에서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 하는 일없이  방관만 한다는 것은 인간
의 힘으론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잡혀 있는 측에 대한 배신 행위라든지 그 자신의 생명을
지킨다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질서에 순응하느냐가 문제이며,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배하는 법칙에 순응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가 제3자의 입장을 가진다는
것은 법칙을 벗어나는 결과가 된다.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싸움은  계속되
고 있었다. 그들의 동료는 총격을 받고 있었다. 그는 반격을 해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때 옆의 통신병이 쭉 경련을 일으키더니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을 보고, 그는 기
어가 탄띠와 소총을 집어든 다음 제자리로 기어와서는 마구 쏘아댔다.
  그러나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그가 감탄하고 동정까지 보내던 젊은이들에게 겨냥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중에 쏴댈  수도 없어서 총의 가늠자와 목표  사이에 아무도 없을
때를 보아서 고목나무를 겨냥하여 쏘았다. 그에게는 제 나름의 사격 요령이 있었다.
  우선 조용히 조준을 정하고 서서히 방아쇠를 당기는데, 마치 쏠 의사가 없는 양쭉 당기지
않는다. 그러면 탄환은 뜻하지 않게 혼자서 튀어나가게 되는 방법이었다. 그의 원래의  정확
성으로 낮은 고목나무 가지를 쏴서 나무 주위에 흩어놓았다.
  그러나 무서운 일이 아닌가! 사람을 맞히지  않으려고 제아무리 애썼지만, 탄환이 튀어나
가는 순간에 공격해 오는 젊은이가 느닷없이 화선에 들어온 것이다. 이리하여 두 사람을 부
상시켰으나 고목 옆에 자빠진 한 사람은 생명을 잃은 것 같았다.
  드디어 백위군 사령부는 무의미한 시도를 깨닫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빨치산은 적은 인원이었다. 주력의 일부를  전진하고 있고 나머지는 거기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서 적의 유력한 병력과 교전하고 있었다. 빨치산은 자기  수의 열세를 노출시키지 않
기 위하여 백위군을 추격하는 것을 삼갔던 것이다.
  들것을 가진 두 위생병을 대동한 조수 안겔랴르는 숲의 공지에서 지바고를 만났다.
지바고는 부상자를 돌보도록 지시하고 통신병을 살펴보았다.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아 살필
수 있겠다는 일말의 희망을 안고 셔츠의 가슴팍을 헤치고 심장에 손을 얹어보니 벌써 숨은
끊겨져 있었다.
  지바고는 시체의 목에서 명주실로 매달아 놓은  부적을 끌러보았다. 푸석푸석해진 종이조
각은 꺾인 데로 실로 꿰매져 있었다. 그것을 펼치자 의사의 손가락 끝에서 조각조각으로 흩
어져 버렸다.
  종이조각에는 성서의 <시편> 제91편의  발췌문이 적혀 있었다.  자꾸 기도를 되풀이하는
동안에 어느 새 말하기 쉽게 기도문의 내용이 변해서 원문과는 점점 멀어지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교회 스라브어를 러시아 문자로 옮겨 쓴 것이었다.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시로다'의 <시편>의  글이 '도움으로 산다'로 되어 있었고,
'낮에는 날아오는 화살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하는 구절은 '날아오는 싸움의  화살을
두려워 말라'로 변경되어 있었고, '그가 내  이름을 안즉...'이 '후에 내 이름을  남긴다'로, 또
'괴로울 때 내가 그와 함께하여...'는 '곧 겨울이 온다'로 고쳐져 있었다.
  <시편>의 이 부분은 탄환을 피할 수 있는 기적을 낳게 한다고 믿어지고 있었다.
지난 제국주의 전쟁 때에는 병사들이 이 부적을 몸에다 달고  다녔다. 그후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죄수들은 의복에 그것을 꿰매놓고 밤중의 심문에 불리어 갈 때 몰래 외고 가
는 것이었다.
  지바고는 통신병의 곁을 떠나서 들판에 자빠져  있는 백위군의 젊은 병사 곁으로  다가갔
다. 소년의 깨끗한 얼굴에는 죄 없는 순진함과 애련한  괴로움의 표정이 떠돌고 있었다. '나
는 왜 그를 죽였을까?' 의사는 생각했다.
  외투의 앞자락을 열어 보니 안쪽에 누군가 정성들여 수놓은-아마 어머니가 한 것이겠지-
필기체로 세료자 란체비치라는 죽은 사람의 성명이 수놓여 있었다.
  세료자의 루바쉬까 구멍으로 줄에 매달린 십자가와 조각품, 그리고 담배갑 같은 납작하고
작은 금 케이스가 보였으나, 케이스는 못을 박아놓은 것같이 굽어져 있었다. 거기에서  접힌
종이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펼쳐본 의사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역시 <시편> 제91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슬라브어 원문을 인쇄한 것이었다.
  이때 세료자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몸을 움직였다. 살아 있었던 것이다. 후에 알게 되었지
만, 그는 가벼운 내장 충격으로 기절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주셨던 부적통이 탄환을  막아
서 그의 생명을 건졌던 것이다. 이 의식을 잃은 소년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 시기에는 야만 행위가 마구 자행되고 있었다. 포로들이 산 채로 본부까지 후송되는 일
은 거의 없었고, 적의 부상자는 전장에서 총검의 희생이 되고 말았다.
  적의 탈주별이 투항하거나 빨치산에서 도망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틈을 타서, 만일
완전히 비밀만 지킬 수가 있다면, 그를 새로 도착한 신병으로 가장할 수가 있을 것이다.
  지바고는 통신병의 시체에서 웃옷을 벗겨 안겔라르한테 자기의 의도를 전하고 도움을  받
아 실신하고 있는 소년의 의복과 바꿨다.
  그와 안겔라르는 세료자가 회복할 때까지 간호하고, 회복된 다음에 세료자가 콜차크 군에
돌아가 적위군과 계속 싸우겠다는 의도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놓아 주었다.

  5
  가을에 빨치산은 리시 오토크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작
은 숲속이었다. 빠르게 흐르는 냇물이 거품을 일으키고 기슭에  부딪치며 감돌아 흐르고 있
었다.
  전에는 카펠 장군 휘하의 백위군이 여기서 겨울을 보냈다.  그들은 가까운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자기들의 손으로 숲속에 진지를  구축하였으나 봄에 그 시설을 그대로  남겨둔
채 떠났던 것이다. 지금 빨치산은 그들이 파 놓은 엄폐호나 교통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바고는 리베리 미쿨리츠인과 같은 참호를 쓰고 있었다. 리베리가  이틀 밤 내내 지껄여
서 그는 잠잘 수가 없었다.
  "나의 존경하는 아버님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계실까?"
  '제기랄, 무슨 얼간이 같은 소리.' 지바고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
군.'
  "여태껏 얘길 듣고 보니 당신은 우리 부친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당신은 우리 아버
지를 나쁘게 생각질 않는 것 같은데, 어때요?"
  "리베리 대장, 내일은 선거 강연회가 있고 또 술을 밀조한 위생병들의 재판도  가깝고, 라
이오쉬와 저는 또 자료를 조사해야겠지요. 그래서 저는 라이오쉬를 내일 만나야 되겠습니다.
저는 이틀 동안이나 잠을 자지 못했으니  우리 얘기는 후에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피곤해 죽겠어요."
  "그럼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주세요."
  "우선 당신의 아버님은 아주 젊습니다. 왜 당신은 아버지에 대하여 자꾸 말하는지 모르겠
군요. 말하지요. 전에도 가끔 말한 바와 같이 저는 여러 가지 사회주의를 식별할 수가  없습
니다. 더욱이 볼셰비키와 다른 여러 가지 사회주의자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
다. 당신의 아버지 같은 분은 최근 러시아가 무질서하고 혼란해진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분들 중의 한 사람이지요. 그분은 혁명가의 전형이며, 혁명적 기질입니다. 당신과 같이 러시
아의 혁명적 발효소의 대표란 말이에요."
  "이건 칭찬하는 거요, 욕하는 소리요?"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이 토론은  적당한 때까지 미뤄둡시다. 그런데 당신은  코카인을
과도히 쓰고 있어서 조심해야 되겠어요. 코카인은 저의 책임이지만 당신은 의약품을 제멋대
로 쓰고 있어요. 코카인은 극약인데다 당신의 건강은 저의 책임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신은 어젯저녁 학습회에 참석치 않았지요. 당신은 마치  무식한 농부나 완고한 부르주
와처럼 위축된 사회적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당신은 의사면서도  박식하고 또
글도 쓰고 있으니, 대체 어찌된 노릇이오?"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무것도 안 될 것 같군요.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일부러 겸손한 체하는 것은 교만한 것과 같아요. 남을 조롱하는 따위의 말버릇은 집어치
우고, 우리 학습회 강령이나 잘 읽어보시오. 그러면 그렇게 교만스럽게 굴지도 못할 거요."
  "천만에 리베리 대장! 제가 교만하다니! 저는  당신의 교육 활동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
어요. 당신이 나눠준 토론 자료를 보았습니다. 병사들의 사기 앙양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저
는 알고 있습니다. 훌륭한 생각이었어요. 동포, 약자, 연고가 없는 사람, 또한 부녀자에 대한
민중의 군대로서의 군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명예와 순결  등에 관한 당신의 말씀은
두호보르(18세기 후반 러시아 남부에서  일어난,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와 의식을 부정하는
종파)의 교리와 아주 비슷한 데가 있었습니다.  저의 소년 시절에는 이러한 톨스토이주의나
인생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겠다는 정열에 불타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러한 것들을 비
웃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10월 혁명이래 널리 알려진 사회 개혁의 이념은 나를 고무시키지 못하
고, 둘째로 그러한 사회 개혁이 실천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단지 그 이론을 설명하는 데만
이렇게 무서운 피바다를 필요로 하였으니 말입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수단을 써도 된
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셋째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인생의 개조를 떠들고 있는 걸
들으면 저는 자제심을 잃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인생의 개조! 이런 소리를 예사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
다. 설사 제아무리 많은 것을 체험하였다 하더라도 인생의 입김, 인생의 고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일 거예요. 이러한 사람은 인생을 어떤 가공하는 원료의 덩어리나, 아니면  손을
대서 품위를 높이는 소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인생은 자기 스
스로가 갱신하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갱신되고 개조되고 변화되어 전신하
는 겁니다. 이것은 당신이나 저 따위의 제멋대로 된 인생론을 훨씬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들의 모임에 나와서 우리의 멋있는 민중과 접촉만 하였더라면 그렇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결코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나만 하더라도 지금 당장 골
칫거리가 한둘이 아니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아요. 우리의 패배는 일시적인 것이오.  결국
콜차크는 망해버리고 말 테니까. 내가 하는 소릴 잘 기억해 두시오. 끝내 우리가 승리할  것
이오. 기운을 내시오."
  '도대체 말상대가 되지 않는군!' 지바고는 생각했다.  '얼마나 우둔한가! 얼마나 단순한 사
람인가! 나의 생각과는 정 반대편에서 대립하여 있고, 나를 폭력으로 잡아서 여기에 억류하
고 있는데, 이놈은 내가 패배가  두려워서 생각을 달리하고 있는 줄  알고서 자기의 희망을
들려줌으로써 내가 힘을 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도대체 사람이  저렇게 맹목적일 수
있을까! 이놈에게는 우주의 운명보다는 혁명의 승리가 중요하단 말이야.'
  지바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베리의 어린애 같은데에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리베리도 그것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화났군요. 유삐제르. 그렇다면 당신이 잘못이야."
  "제발 날 좀 이해해 주시오. 그런 것은 나에게는 도대체  의미가 없어요. '유삐제르'라든지
'두려워 말라'라든지 'A라는 사람을 B라고 말하라'라든지 '모든 사람은 일이 끝나면 가도 된
다'-이 모든 케케묵은 글귀와 저속한  말들은 나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어요.  내가 A라고
말한 것을 결코 B라고는 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당신들이 러시아의 해방자이며 선도의  등
불이고, 당신들이 없으면 러시아가 망해 버려서 빈곤과 무지에 빠져버린다고 인정합니다. 그
렇다고 해도 나는 당신들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아요.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는단 말이예요.
  당신들의 정신적 지배자들은 곧잘 속담을 쓰지만, 한 가지 속담만은 모르고 있어요.  그것
은 '사랑은 강제로 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별로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당신들은
해방시키고 은혜를 베푸는 버릇이 있어요. 당신은, 내가 당신과 함께 야영을 하고 당신과 지
내게 되는 일처럼 세상에서 즐거운 일이 더 없으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포로
로 잡아주신 것을 감사하고, 나의 처자나  집안일 같은, 내가 더없이 귀중히 생각하며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모든 일에서 나를 해방시켜 준 것에 기뻐 눈물을 흘려야 할 것 같군요.
  러시아인이 아닌, 누군지 알  수 없는 부대가 바르이키노를  습격하여 제멋대로 약탈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카멘노드보르스키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집과 우리 가족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피했다는 얘깁니다.  무슨 괴상한 솜외투에 털모자
를 쓴, 눈꼬리가 치켜올라 붙은 군사들이 추위도 아랑곳없이 르인바 강 얼음을 타고 와서는
마을의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모조리 사살하고 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이런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까? 이게 사실일까요?"
  "어리석군. 다 거짓말이야. 터무니없는 소리지."
  "당신이 병사의 사기 앙양을 역설하듯이  친절하고 관대하다면 나를 자유롭게 해  주십시
오. 나는 가족을 찾고 싶어요. 어디 있는지 생사조차 모릅니다. 그리고 날 자유롭게 할 수가
없다면, 제발 나에게 신경 쓰지 말고 날 가만히 있게 해주시오.
나한테는 가족들의 운명에 대한 것밖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요. 당신이  계속해서 이렇게
군다면 나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소. 여하튼 나한테도 잠잘 권리는 있지 않겠소!"
  지바고는 침상에 엎드려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리베리의 지겨운 변명을 듣지 않으려고 애
썼다. 리베리는 봄이 되면 백위군을 뿌리째 격멸한다면서 내란이  막을 내리는 날에는 평화
와 자유와 번영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때에는 당신을 붙잡아 둘 사람도 없으며 그때까지 참
고 견디어가야 한다고 했다. 여태껏  여러 가지 시련을 겪고 많은  희생을 해가면서 언젠가
그날이 오기를 기다려 왔는데, 이 두세 달을 참을 수가 없겠는가? 그리고 당신은 지금 어디
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혼자 내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참 단순한 소릴 지껄이는군!' 지바고는  분통이 치밀어올라 이렇게 혼자  생각했다. '입을
놀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니까. 몇 해를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하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용케도 싫증을 느끼지 않고 제 못소리를 듣고 견디는군, 이 코카인 중독자! 잠도 제대로 못
자게 구니. 이 악마 같은 놈! 정말 이놈이 지겨워 죽겠군! 하나님 굽어살피십시오. 언젠가는
내가 저놈을 죽여버리겠습니다. 그리운 토냐! 당신은 살아 있어요? 어디 있어요? 벌써 오래
전에 애기를 낳았을 텐데, 어떻게 산고를 이겨냈을까? 아들일까? 아니면 딸일까? 그리운 것
들아! 지금 어느 별 아래 살고 있을까? 토냐, 당신은 영원히 내 양심의 가책이 되고 있어요.
라라, 그대의 이름을 부르면 나는 괴로움에 견딜 수가 없어요.  아, 이 아픈 가슴을 어찌 달
래야 좋을까! 이 더러운 우둔한 짐승은 또 지껄인는다. 언젠가는 참을 수  없게 될 거야. 그
때엔 죽여버려야지! 알았느냐, 죽여버린단말야!'

  6
  늦여름이 지나고, 황금빛 맑은 가을날이었다. 리시 오토크의 서쪽 끝에는 백위군이 구축한
나무 포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지바고는 여기서 의사 라이오쉬를  만나 여러 가지 일에 대
한 상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약속한 시각에 도착했다. 그는 동료가 오는 것을  기다
리며 허물어진 흙담 가를 거닐면서 망루에 올라가, 지금은 비어  있는 기관총 총좌 앞의 틈
새로 강건너 먼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은 이미 침엽수와 낙엽수 사이의 경계를 뚜렷이 긋고  있었다. 칠흑같이 새까만 소나
무의 침울한 바늘벽 사이에 울창한 숲이 불길처럼 붉게 보여서, 무성한 숲속에서 베어낸 재
목으로 세운 금빛 지붕처럼 보였으며, 울긋불긋한 성을 에워싼 중세 도시를 연상시켰다.
  지바고의 발밑 지면이나 참호 속, 그리고 얼어붙은 숲  오솔길의 차바퀴 자리에는 버드나
무의 가느다란 낙엽이 회오리쳐서 소복이 쌓였다. 가을의 내음은 갈색 낙엽이나 그 밖의 여
러 것에서도 풍기고 있었다. 그것은 서리 맞은 사과의 짜릿하게 쏘는 향기와 마른 나뭇가지
의 씁쓸한 향기, 눅눅한 대지의 달콤한 내음을, 갓 꺼진 모닥불의 연기처럼 자욱이 퍼지는 9
월의 푸른 안개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는 라이오쉬가 뒤에서 올라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라이오쉬는 독일
어로 말했다. 둘은 일에 대하여 상의했다.
  "용건은 세 가지라네. 첫째는 술 밀조자들의 처벌 문제, 둘째는 야전 병원과  약국의 재편
성, 셋째는 정신병자 응급치료에 대한 나의 의견, 라이오쉬, 당신의 생각은 어쩐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에는 우린 언젠가는 미치고 말걸세. 새로운 형의 정신병이 전염병처럼 퍼지면서."
  "그 문제는 아주 흥미가 있지만 차차 말하기로 하고, 우선 다른 얘기부터  합시다. 숙영지
내에서 좋지 못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밀조자의 신세를 동정하는 자들이 있단 말입니다.  역
시 많은 사람들이 백위군이 장악하고 있는 마을로부터 피난하고 있는 자기 가족을 걱정하고
있어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처자와 노인을  수송하는 치중대가 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빨치산의 대부분은 치중대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거길 떠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답니다."
  "알고 있어요. 물론 기다려야 되지."
  "마침 우리 부대와 우리들로부터 독립돼 있던 다른 부대들을 지휘할 통합  사령관을 선출
하는 이 시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기에 말입니다. 난 통합 사령관의 유일한 후보자는 리베리
통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젊은 집단은 브도비첸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를 내세우고 있
는 자들은 우리와는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부농과 상인의  아들, 그리고 콜차크군의 탈
주병들, 이들은 밀조자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이 특히 소란을 부렸습니다."
  "술을 밀조해 판 위생병들은 어떻게 될 것 같소?"
  "나의 생각으론 총살 선고를 받고, 정상을 참작하여 집행 유예 정도로 마무리되겠지요."
  "그렇겠군. 그럼 먼저 일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합시다. 먼저 야전 병원 말인데..."
  "좋아요. 그런데 나는 당신이 제의한 정신병 예방안을 별로 의외의 일로 생각하지 않습니
다. 나도 역시 같은 의견입니다. 현대에 있어서는 전형적이며 특히 시대의 역사적 특징과 직
접 관계를 가지는 일종의 정신 질환이 발생하여 만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습니
다. 야영지에도 그러한 예는 하나 있습니다. 팜필 팔르이흐는 제정 군대의 병졸로 있었는데,
계급 의식이 강해서 혁명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전사할 경우 가족
이 어떻게 될 것인가, 또는 가족이 백위군한테 붙잡혀 자기 때문에 추궁을 당하지나 않을까
근심하다가 병이 났습니다. 매우 복합적인  심리 상태입니다. 호송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가족이 있을 겁니다. 저는 러시아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모르긴 하지만,  안겔라르나
카멘노드보르스키한테 한번 알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를 진찰할 필요도 있습니다."
  "나는 팔르이흐를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군사 소비에트에서 한 번 만났어요. 까무잡잡하고
볼이 좁은 잔인하게 생긴 사람이지. 난 당신이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줄 알
았어. 그는 언제나 극단적으로 엄격한 조치로 처형하는 데 찬성했었지. 그리고 항상 날 괴롭
혀왔었지. 좋아요, 어떻게 해봅시다."
  7
  맑게 갠 화창한 날이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날씨는 쭈욱 조용하고 건조했었다.
  야영지에는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와  같은 소음이 계속 들렸다.  발소리, 말하는 소리,
나무를 패는 소리, 철판이 울리는 소리, 말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 이런 소
리가 숲속에서 뒤섞여 들려왔다. 숲속에는 햇볕에 그을은 사람,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사람
들이 이리저리 나다니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지바고를 알아서  인사를 했지만 몰라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다.
  빨치산은 가족이 따라올 때까지는 리시 오토크를 떠나지 않겠다고 우겼으나, 이제 가족들
이 곧 도착하기 때문에 동쪽으로  더 이동할 준비에 부산했다. 무엇인가  닦고 수리하며 짐
상자에 못질을 하거나 짐마차를 헤아려보기도 하였다.
  숲 중앙에는 넓은 공지가 있어서 이따금 거기에서 집회가 열리곤 했다. 둔덕이나 성터 자
리였는데 풀은 죄다 짓밟혀 있었다. 오늘도 역시 여기에서 중요한 발표가 있어서 총회가 소
집되도록 되어 있었다.
  숲의 깊숙한 곳에 있는 나무는 대부분 아직 누렇지 않고 푸르고 싱싱했다. 서쪽으로 기운
태양이 숲 그늘에 가라앉으면서 화살과 같은 빛을 던지고,  나뭇잎들은 햇살을 받아 해맑은
유리병처럼 푸른 불너울을 토하고 있었다.
  수석 연락 장교 카멘노드보르스키는 그의 문서 보관소 밖의 빈터에서 입수한 카펠 장군의
기록 문서 가운데서 불필요한 서류와 자기가 작성한 빨치산  문서를 불사르고 있었다. 석양
을 바라보며 타오르는 불길이 나무 잎새에서 투명하게 바라보였다. 불은, 너울거리는 열기가
무엇인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숲속의 여기저기에 무르익은 딸기가 눈에  띄었다. 황새냉이의 맑은 수술과  검붉은 빛의
오리나무 열매들이며 순 붓꽃송이들이 흰빛에서 자주색으로 변해서 산뜻하게 아롱거리고 있
었다. 그리고 유리처럼 맑은 날개를  윙윙거리며 허공을 노질하듯 날아  다니는 잠자리들도
붓꽃과 나뭇잎들에 못지않게 햇빛에 젖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지바고는 숲속의 저녁놀을 좋아했다. 그럴 때면 자기  역시도 이 햇빛에 꿰뚫
린 것같이 느껴졌다. 마치 살아 있는 영혼이 그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어 몸을 꿰뚫고 어깻죽
지에서 나래를 펴듯이 느껴졌다. 모든  소년들이 어렸을 때 자기 생애에  형성할 원형은 그
후에도 변하지 않는 내면의 얼굴이 되고 개성으로 바뀐다고  생각되었으나, 지금 다시 지바
고의 마음 뒤에 숨은 본원의 힘을 다하여 눈떠서 자연이나  숲, 저녁놀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압도하고 한 소녀의 본원적인 비슷한 모습으로 변모되어 가는 것이었다. 그는 눈
을 감고 "라라!"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생명의 모든 것, 하나님의 땅 위의 모든  것, 햇빛을
받고 있는 앞쪽 공간의 모든 것을 향하여 불러 본다.
  그러나 매일 계속되는 어지러운 현실은 아직도 그를 뒤덮고  있었다. 러시아는 10월 혁명
을 겪고 있으며, 그는 빨치산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지바고는 무심코  카멘노드보르스키의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서류를 불태우고 있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전부 다 태우려면 며칠이 걸릴지 모르겠소."
  의사는 종이 뭉치 하나를 펴 보았다. 백위군 사령부의 통신 문서였다. 란체비치와 관련 있
는 것이 나오지나 않을까 살펴보았으나 전부 작년 것으로, 뜻을 알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간
추린 암호 보고 문서로서 흥미가 없는 것들뿐이었다.
  '옴스크 기병 총사령부 제일 사본 옴스크 우리 옴스크 지도 40베르스타 예니세이 공격 중
지'
  또 다른 뭉치를 펴 보았다. 그것은 같은 낡은 빨치산 회의 의사록 뭉치였다. 제일  윗장의
종이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지급. 휴가 건. 심의위원회  재선. 당면한 문제. 이그나토드보르차  마을의 여교사에 대한
고발은 증거 불충분으로 군사 소비에트는 다음과 같이 제의한다...'
  카멘노드보르스키는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끄집어내어 의사에게 보여주었다. 의무대
의 출발 지시서였다.
  '빨치산의 가족을 데리고 오는 치중대가 곧 가까이 오고 있고 부대내의 의견이 오늘 저녁
때까지는 해결이 되기 때문에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다.'
  지바고는 종이쪽지를 바라보면서 불안스럽게 중얼거렸다.
  "이전보다도 차량이 적지 않습니까? 게다가 부상자는 더 불어났고. 그래서 경상자는 걸어
가야 하지만, 걸을 수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중상자를 어떻게 처리하란  말입니까?
그리고 약품이나 침대, 의료 기구 같은 것도 실어야 되고."
  "어떻게 되겠지요. 우리는 환경에 순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것은 우리 전부가
요구하는 것인데, 우리 한 동지를  좀 보아주시겠어요? 사업을 위하여  신명을 바친 훌륭한
투사였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약간 이상한 점이 있단 말이에요."
  "팔르이흐 말이죠? 라이오쉬한테서 들었습니다."
  "그래요. 좀 가 봐주세요."
  "정신병 같은 거지요?"
  "그럴 겁니다. 이상한 것이  보인다고 합니다. 과대망상증 같아요.  지금 바쁘지 않으니까
가서 보지요. 집회는 언제부터 있지요?"
  "곧 있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보다시피 나도 나가지 못해요. 우리가 없더라도 별일이 없
을 겁니다."
  "그럼 팔르이흐를 진찰하러 갑시다. 잠이 와서 눈을 뜰 수가 없어요. 리베리는  밤중에 철
학을 논하기를 좋아해서 나는 말상대를 하느라고 지쳐버렸어요. 팔르이흐는 어디 있어요.
  "저기 쓰레기장을 지나 어린 자작나무 숲을 아시지요?"
  "알았어요."
  "그 공지에 지휘관 막사가 있지요. 그 하나를 팔르이흐가 쓰고 있어요. 지금  가족을 기다
리고 있어요. 치중대와 함께 가족이 오고 있어요. 유독 그에게만 혁명의 공로 때문에 대대장
대우로 그곳 막사를 쓰게 하였답니다."

  8
  팔르이흐를 진찰하러 가던 도중에 지바고는 피로가 몰려와서 더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꼬박 며칠 밤을 계속 새워서 피곤이 쌓였던 것이다. 엄폐호에 되돌아가서 잠으 잤으면 좋겠
지만, 그곳은 수시로 리베리가 와서 잠을 자지 못하게 굴 것이 뻔했다.
  그는 숲속의 좁은 공터에 누웠다. 주위 나무에서 누런  나뭇잎들이 낙엽져서 흩어져 겹겹
이 쌓였고, 햇빛이 황금 융단 위에 무늬를 지으며 물들어 있었다. 이 이중으로 엇갈린  빛깔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마치 작은 활자의 글을 읽거나 단조로운 소리를 듣듯이 졸음이
왔다.
  그는 비단결처럼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위에 누워서 나무 밑동의 이끼를 베개삼아  올려놓
은 팔에 머리를 파묻었다. 어느 새 잠이  들어 버렸다. 잠이 들게 한 빛과 그림자의  명암은
격자 모양으로 그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땅에 늘어진 몸이 햇빛과 나뭇잎의 만화경 같은
색깔과 구분이 되지 않아서, 마치 마술사의 모자를 쓰듯이 눈에는 띄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잠자고 싶은 그의 욕망과 필요성이 오히려 그의 잠을 깨뜨리고 말았
다. 직접 원인은 정해진 한도에서 조화되는  것이지, 그 한도를 넘어서면 반대 효과를  내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의 생생한 의식이 조금도 쉬지 못한 채, 그 자신의 타성대로 한층 더 맹
렬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에서는 여러 가지 상념이 회오리치며 맴돌아, 마치  고
장난 기계처럼 뛰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정신적 혼란에 들떠  있었다. '리베리, 이놈! 이 세
상에 사람을 미치게 할 일이 없어서 멀쩡한 사람을 붙잡아 두고 억지 우정을 베풀어 일부러
정신병자를 만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단 말인가. 언젠가 죽이고 말 테다.'
  갈색 반점이 있는 나비가 색헝겊처럼 움직이며 공지의 양지쪽을 날아갔다. 지바고는 졸음
이 오는 눈으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비가 자기와 같은 배경을  찾아 갈색 반점이
있는 소나무 껍질에 앉자 구별할 수 없게 되어, 빛과 그늘의 엇갈림 속에 숨어 있는 지바고
처럼 전혀 보이질 않았다.
  지바고는 늘 머리에 그리던 일련의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많은 의학 논문에서 간접
적으로 다뤄온 문제로서, 적응의 최고  형태로서의 의사와 목적 의식,  모방과 보호색, 적자
생존, 자연 도태의 길은 의식의 형성과 발생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가설이었다. 주체란  무엇
일까? 그것의 동일성은 과연 무엇일까?  지바고의 생각에는 다윈이 쉴링과  비슷하고, 지금
날고 있었던 나비는 근대회화나 인상주의 예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창조하는 것,  창조
되는 것, 창조력과 또 모방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다시 잠들었다가 잠시 후 그는 또 눈을 떴다. 바로 이웃에서 들려오는 조용하고 나지막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몇 마디 가만히 듣고  나서, 그것이 무슨 비밀 음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지바고가 엿듣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
여 발각될 경우 목숨이 달아날 판국이었다. 지바고는 숨을 죽여 가면서 귀를 바짝 세웠다.
  그 목소리에서 몇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빨치산의 찌꺼기나 추악한 부류들
이었다. 사니카, 고쉬카, 코시카와 그들을 따랐던 체렌치  같은 추잡하고 더러운 마부놈들이
었다. 거기에 또 자하르도 끼어 있었는데, 그는 술 밀조 사건에 한몫 끼었던 자이지만, 그가
그 주모자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면하게 된 한층 더 간악한 자였다. 그러나 지바고가
의외로 생각한 것은, 대장 호위병 중의 한 사람이며  정예 '은중대'에 소속되어 있는 시보블
류가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스첸카  라진(1667∼1671년 사이의 러시아 농민전쟁 지도자)과
푸가초프(1742∼1795 러시아 농민 폭동의  지도자)때의 전통에 따라 이놈은  대장의 신임을
톡톡히 받아서 '두목의 귀'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
  그들은 적의 전초 진지에서 온 대표들과 교섭중에 있었다.  대표들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매우 낮은 소리로 배신자들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바고는 이따금 말소리가 끓
기고 있을 때는 적의 대표가 말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주정뱅이로 알려진 자하르가 누구보다도 얘기를 도맡아,  가끔 욕설을 해가며 쉰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아마 그가 주모자인 것 같았다.
  "너희들 잘 들으란 말야. 제일 명심해야 될 건 혓바닥을 조심하는 일이야-이 칼 알지?-배
창자를 갈라놓을 테니까. 똑똑히 새겨두란 말야. 자네들 자신이나 나나 다 잘 알겠지만 우리
는 독 안에 든 쥐야.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우리끼리  밖에는 용서를 받을 데가 없단 말야.
여태껏 아무도 못해 본 일을 해야 하거든. 이 사람들은  그 자를 생포해 달라는 거야. 헌데,
이 사람들의 두령 굴레보이 자신이 오기로 되어 있다구(잘 알아듣지  못해서 갈레예프 장군
이라고 다시 고쳐 말했다). 더없이 좋은 기회야. 이런 기회란 그리 흔한 게 아니야. 이 사람
들은 그 대표란 말이야. 이제부터 너희들한테  설명할 테니 잘 들어둬. 이 사람들은  그놈을
사로잡으라고 하니까. 당신들 설명해봐요."
  대표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지바고는 한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으나 침묵의  길이로 봐서
제안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자하르가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알아들었어?
여보게들, 우리에게 얼마나 귀중한 인물이  굴러 들어온 건지 알겠나?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놈의 죄값을 치러야 하나? 그 바보 같은 놈은 인간이 아니라 승려나 풋내기 애 같단 말이
야. 뭘 그렇게 웃는 거야. 체로쉬카! 맞고 싶어? 너에 대한 걸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풋내
기 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거야. 그런 승려 같은 놈을 쫓아다녀 봐야 결국 너희들을 승려
나 내시로 만들 거야. 그가 하는 소리 알지? 욕도 하지 말고 술도 마시지 말고 그리고 여자
는 멀리하라.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산단 말인가?  나의 결론은, 오늘 저녁 우리 그 자식을
돌이 많은 개울로 끌고간단 말일세. 내가 그 자식을 데리고 올 테니 다 같이 달려들어야 돼.
어려울 건 없지만 그들이 생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지 꽁꽁  묶어서 생포하라는 거야. 만일
잘 안 되면 나 혼자서라도 없애버리면 돼. 저쪽에서도 사람을 보내서 도와줄 걸세."
  그는 계획을 더 설명하고 있었으나 점점 더 저쪽으로 멀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지바고는
더 이상 엿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놈들은 리베리를 사로잡아서 백위군에게 넘기든지 아니면 죽여버릴 심산이군.'
그는 자기 자신이 이따금 리베리를 죽이고 싶다던 생각은 아주 잊어버리고 몹시 놀라며 분
개했다. 어떻게 하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막아낼 수가 있을까? 그렇지,  카멘노드보르스키한
테 돌아가서 이름을 하나도 밝히지는 말고 음모를 알려주어야겠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리
베리를 위험에서 막아주어야겠다.
  그러나 되돌아와서 보니 그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의 보좌관이 모닥불 곁에서 불이 흐
트러지지 않도록 지키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음모는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사저에 음모는 다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날로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고 주모자는 체포되고  말았다. 시보블류이는 정탐과 선동의
이중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지바고는 한층 더 염증을 느꼈다.

  9
  아이들과 함께 가족들이 야영지에서 이틀 걸리는 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시
오토크에서는 가족을 맞이하고 곧바로 이동을 시작할  태세를 갖췄다. 지바고는 팔르이흐한
테 찾아갔다.
  팔르이흐는 막사 입구에서 손에 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어린 자작나무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찍어서 자빠뜨렸을 뿐 아직 껍질을 벗기지 않고 있었다. 자빠진 자
리에 그냥 흩어져 있는 것도 몇 그루 있었다. 나무가  무겁게 자빠지면서 꺾어진 가지의 뾰
족한 끝이 눅눅한 땅에 꽂혀  있었다. 팔르이흐는 가까운 곳에서 끌어다  나무 산더미 위에
자꾸 얹어놓았다. 어린 나무의 탄력  있는 가지들이 지면에 뻗쳐  흔들리면서도 지면까지는
닿지 않고 서로 한데 뭉쳐지지도 않았다. 마치 손을  내뻗치면서 찍어 자빠뜨린 팔르이흐에
저항하면서 푸른 잎들이 막사로 들어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귀한 손님들을 위해 쓰려고." 팔르이흐는 설명했다. "마누라와 애들 말이오. 말사가 너무
낮은데다 비가 새서 지붕을 만들려고 이 나무를 찍었다오."
  "그래 어떨까요-가족을 막사에서 살게 할까요? 민간인이나 여자들을 야영지 안에서 살게
한 예가 있어요? 곧 밖의 어디서 짐마차와 함께 살게 되지 않을까요? 당신이 여가 나는 대
로 만날 수도 있지만, 군인의 막사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허락치 않을 것이오. 당신은  먹질
못하고 잠도 못 자서 허약해졌다고 들었는데? 보기엔 별로 이사이  없는 것 같군요. 머리나
좀 깎으세요."
  팔르이흐는 새까만 머리칼과 턱수염이 더부룩하고 울퉁불퉁한 이마가 두 줄로 금이 간 모
습으로, 건강한 거구의 사내였다. 관자놀이를 찍어누르고 있는 앞턱의 두둑한 뼈는 철테나
철띠 같아서, 그 때문에 무뚝뚝하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혁명의 초기인 1905년처럼 혁명은 교양 있는 상류 계급을 휩쓰는 정도로 짤막한 사건으로
되고, 하층 사회는 아무 영향도 없이 끝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민중을 일깨우고 선동
하고 열광시킬 목적으로 혁명 선전을 대중 속으로 넓히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써왔던 것
이다. 그 당시에는 지식인이나 장교, 상류 계급에 대하여 무자비한 증오를 일으키게  하려면
아무런 외부 자극이 필요치 않는 팔르이흐와 같은 인물이  필요했었다. 좌익 인텔리 중에서
는 찾기 어려운 아주 귀중한 존재 였었다. 그들의 비인간성은 계급 의식으로 보였으며, 그들
의 만행은 프롤레타리아의 용감성과 혁명적인 본능의 표본인 양 취급되었다. 팔르이흐는 그
러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으며 빨치산 대장이나 지도자들의 귀중한 존재로  여겨졌
던 것이다.
  지바고한테는 그 엉큼하고 비사교적이며 냉혹하고  마음이 좁은 거인이 저능한  변절자로
생각되었다.
  "막사에 들어가지요." 팔르이흐가 권했다.
  "아니예요. 바깥이 더 시원하고 좋아요. 더욱이 지금은 들어갈 시간이 없어요."
  "그래요. 편하신 대로 합시다. 우리 나무 위에 앉읍시다.'
  그리하여 그들은 흔들거리는 자작나무 위에 앉았다. 팔르이흐는 의사한테 신상에 대한 얘
기를 끄집어냈다.
  "자, 말하자면 짧고 또 말하게 되면 길답니다. 내  얘기는 길어요. 3년을 두고 얘기하더라
도 끝이 없다오. 그럼 어디서부터 얘기하면 좋을지.
  마누라와 제가 아직 젊었을 때였어요. 마누라는 집일, 나는 밭에서 일하면서 별로  어려움
이 없었답니다. 어린애도 생겼어요. 그런데 나는 군대에  잡혀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전쟁
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얘기가  당신한테 필요하겠습니까. 의사 동무도  전쟁을 보았겠지요.
한데 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나는 광명을 발견했답니다. 병사들의 눈이 확 트이게 되
었어요. 우리의 적은 독일군이 아니라 호히려 우리편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세
계 혁명의 병사들이여, 총을 버리라! 전선에서 돌아와 부르주아들을 무찌르라!' 이렇게 외치
는 것이었어요.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의사동무, 그리고 드디어 내란이 일어났어요. 나는 빨
치산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여기서 얘기를 뛰어넘지 않고는 끝이 나질 않겠군. 그렇게  고생
하였는데도 우리는 지금 어떠한 처지에 있지요?  그 기생충 같은 놈. 그놈이 일선에서  제1,
제2 스타브로폴리스키 연대와 제1오렌부르그 카자크 연대를 데리고 왔단 말이에요. 내가 어
디 어린앤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곤경에  빠지게 됐습니다.
파멸입니다. 그 악당들이 노리는 것은 그 찌꺼기를 데리고 우리를 치려는 것이지요.  우리는
독 안에 든 쥐란 말입니다.
  그러나 나한테는 처자식이 있어요. 만일 그놈들의 뜻대로 되는  날에는 처자식은 피할 길
이 없어요. 물론 내 처자식한테는 아무런 죄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들이 용서해 줄  리
가 없어요. 놈들은 마누라를 동여매고는 배를  눌러 죽일 겁니다. 내 처자식은 온몸의  뼈가
분질러지고 갈기갈기 찢겨버릴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왜  잠을 자지 못하느냐고 물
었지요? 사람이 비록 쇠뭉치로 만들어졌다 해도 그런 일을 생각하면 미치고 말아요."
  "매우 달라졌군요. 당신을 난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수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
면서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다가,  이제 하루 이틀 후에는 말날
수 있게 되었는데 좋아하기는커녕 마치 장례식이라도 치르는 것 같군요."
  "이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달라요. 백위군  놈들한테 당할 판국인데. 난 괜찮아요.  어차피
죽을 건데, 뭐. 그러나 처와 애들을 저 세상에 함께 끌고갈 수는 없어요. 이 세상에 남아 있
어서 놈들의 손아귀에 잡혀서 피를 한 방울 한 방울씩 짜내게 하다니."
  "그래서 이상한 것이 보이게 되는 거죠? 당신에게는 이상한 것이 보인다고들 하더군요."
  "아니 선생님, 나는 아직 할 얘기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좋다면
사실을 모졸 이야기할 테니 날 너무 나무라지 말아요.
  나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오.  내 손은 장교들의 피로 물들어 있어요.  장교나
부르주아의 피로써 말입니다. 나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왔어요. 마치 물을 흘리듯이
말입니다. 죽은 놈들의 이름이나 숫자 따위는 아예 잊어버리고 말았다오. 그런데 딱 한 사람
이 머리에 남아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 조그마한 친구가 있습니다. 뭣 때문에 그를 죽였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나를 웃기고 즐겁게  했는데. 그저 놀이삼아 바보처럼 죽여버렸단  말입니
다.
  2월혁명 때의 일입니다. 케렌스키 정부 때지요. 우리는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기차
정거장 근처에서였어요. 우리는 전선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전선으로  복귀
시키기 위하여 젊은 친구가 파견되어  왔답니다. 승리할 때까지 계속  싸우라고 설득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사관생도의 애송이가 우릴 설복하는 거예요. 마치 병아리 같은 놈이어서 '승
리할 때까지 싸워나가자'는 것이 그놈의 슬로건입니다. 물통 위에 올라서서는 슬로건을 외쳐
댔어요. 정거장 플랫폼에 있었던 물통인데, 좀 높은 데서 싸우라고 호소하면 권위가  있으려
니 생각하고 물통 위로 올라선 거지요. 한데 갑자기 통  뚜껑이 뒤집히면서 물속에 풍덩 빠
지고 말았어요. 그 광경이 얼마나 우스웠던지 옆구리가 결리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나는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었답니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어요. 마치  간지럼이라
도 타듯. 우물거리는 새에 나는 총을 겨누고  탕 한 방을 놓았어요. 그 자리에서 쏴  죽이고
말았어요. 왜 죽였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오. 마치 어떤 사람이 날 떼민 것처럼 말이오.
  헛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밤이 되면 정거장이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그때에는 우스꽝스럽던 일이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그것이 멜류제예보 읍 근처의 비류치라는 정거장이 아닙니까?"
  "기억이 안 납니다."
  "당신은 즈이부시노 폭동에 참가했던가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전선은 어땠습니까? 어느 전선에 있었지요? 서부 전선인가요?"
  "아마 서부였을 겁니다.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달콤한 마가목 열매
  1
  마차를 탄 빨치산의 가족들이 그들의 어린애와 가구를 싣고 주력 부대의 뒤를 쫓아 이동
하기 시작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그 뒤를 따라서 피난자의 짐 뒤로 주로 암소가 많이 섞
인 소떼가 움직이고 있었으며, 소는 수천 마리나 되었다.
  부녀자들의 도착과 함께 숙영지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였다. 그녀는 어떤 병사의 아내
였으나 가축의 의사, 말하자면 수의사이며 남몰래 무당 노릇도하는 즐르이다리하 또는 쿠바
리하라고 불리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호떡처럼 생긴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최고 통치자(꼴
차크)가 영국에서 얻은 보급품인 스코틀랜드 저격병의  황록색 외투를 입고 다니면서, 누구
한테나 죄수의 모자와 옷을 고쳐 만든  것이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 말에 의하면,  별로
뚜렷한 이유도 없이 콜차크한테 붙잡혀 케제마 감옥에 감금되었으나 적위군에 의하여  풀려
나왔다고 했다.
  이 무렵 빨치산은 새로운 숙영지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그  부근을 정찰하여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고 했지만 장차의 상황과 그 밖의 사정 때문에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
게 되었다.
  새 숙영지는 전의 리시 오토크와는 전혀 달랐다. 주위의 산림은 수목이 빽빽이 들어찬 밀
림이었다. 숙영지와 한길에서 떨어진 한쪽은 끝없는 수풀이었다. 도착하자 숙영 준비를 하면
서 지바고는 틈이 있어서 발길이 닿는 대로 숲속을 걸어  보았는데,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
했다. 이렇게 답사하는 도중에 그의 관심을 끌게 된 두  군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
다.
  그 한 군데는 숙영지 바로 바깥쪽 숲의 끝이었다. 나무들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어서 열린
대문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듯이 숲속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아름다운 마가목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으며 불그스름한 그 나무는 잎사귀를  잔뜩 달고 있었다. 낮고 기복
이 심한 눅눅한 습지에 솟아 있는 산 꼭대기에 서 있는 그 나무는 회색빛에 젖어든  늦가을
하늘에 딴딴하고 새빨간 열매를 납작하고 둥근 방패처럼 내밀고  있었다. 추운 겨울 새벽놀
처럼 맑은 빛으로 털을 단장한 새떼들, 콩새와 파랑새가  마가목나무에 앉아서 큼직한 열매
를 쪼아내면서 목을 치켜들어 간신히 삼키곤 했다.
  새들과 나무 사이에는 어떤 친밀한 생명의 연줄이 있는  것같이 보였다. 마가목나무는 마
치 아무것도 하려들지 않고 오랫동안 새들의 무리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결국 그들이 가련하
게 여겨져서 유모가 젖가슴을 헤치면서  갓난애기에게 젖꼭지를 물리듯이 새들에게  열매를
먹여주고 있었다. '그래, 그래, 할 수 없군. 먹어요, 실컷 먹으렴.' 마가목나무가  미소를 지으
며 속삭이는 것 같았다.
  또 한 장소는 한층 이상스러운 곳이었다.
  그곳은 한쪽이 아주 가파른 낭떠러지 위였으며, 내려다보면 그 낭떠러지 밑에는 꼭대기에
있는 광경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있으려니 생각되었다. 거기에는  개울이나 골짜기 그리고 높
이 자란 잡초가 무성한 풀밭이 있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는 밑에도 위와 똑같
은 것이 있었으며, 그것이 깊게 있어서 현기증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깊숙한 밑에는 마
치 숲과 나무들이 한꺼번에 깊이 가라앉아 나무 꼭대기가 발밑으로 내려앉은 것 같았다. 언
젠가 산사태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끝없이 넓고 무성한 숲이 주름 가까이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발이 미끄러지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밑으로 떨어져 땅속으로 파묻히는 순간,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지금은
상처 하나 없이 건재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숲의 높은 곳이 각별한 인상을 주게 되는 까닭은 다른 데 있었다. 높은 곳의 가장
자리에는 대리석 바위들이 솟아 있어서 마치 선사 시대의  고인돌을 연상케 했다. 지바고는
처음 이 바위에 왔을 때, 그것은 자연적으로 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손이 간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그것은 한때 우상 숭배자의 무리들이 기도와 제물을  바치던 고대의 이교도들의 전
당으로 됐던 곳인지도 모른다.
  열 한 명의 빨치산 음모에 가담했던 범인들과  술을 밀조한 두 명의 위생병에 대한 사형
집행을 여기서 하게 되었다. 몹시 추웠던 어느 우울한 아침이었다.
선발된 정예 분자를 포함하여 혁명에 가장  충실한 약 20명의 빨치산들이 죄수들을  형장에
끌고 나왔다. 그리고 반원형으로 포위하여 총을 겨누면서 빠른  걸음으로 이 낭떠러지 가장
자리까지 몰고 갔다. 죄수들은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지는 외에는 더 갈 길이 없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구금되어 심문과 학대로 그 얼굴에서 인간의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새까맣게 때묻은 얼굴과 제멋대로 자라난 수염의 초췌한 모습은 귀신과 같았다.
  그들이 체포되었을 때 이미 무기를 압수해서, 지금 처형될 마당에  다시 몸 수색을 할 필
요는 없었다. 만일 다시 몸 수색을 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하고 비열하게 생각되었으며 곧 죽
음을 앞둔 사람들을 참혹하게 조롱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브도비첸코의 친구였으며 그와 함께 오랫동안 무정부주의자로 일하고 또 지금  함
께 형장에 끌려가고 있는 르자니츠키가 갑자기 경비병을 향하여 권총을 빼들고  시보블류이
를 겨누어 세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르자니츠키는 사격의  명수였으나 지나치게 흥분한 나
머지 손이 떨려서 빗나가고 말았다. 아니면 옛 동지를 가엾게 여겨서 그에게 덤벼들거나 그
자리에서 사살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총에는 아직 탄환이 세 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흥분한  탓인지 아니면 탄환이 남지 않
았다고 생각했는지 르자니츠키는 화가 치밀어 권총을 바위에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권총은 저절로 발사되면서 같은 죄수인 파치콜랴의 발을 꿰뜷고 나갔다.
  위생병 파치콜랴는 비명을 지르면서 한쪽  발을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러워했
다. 옆에 있던 카프누트킨과 고라즈드이는 양쪽에서 그를 껴안고  일으켜 이미 정신이 나가
버린 동료들의 발밑에 짓밟혀 죽지 않도록 팔에 끼고 질질 끌고 있었다. 파치콜랴는 부상한
다리를 땅바닥에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줄곧  비명 소리를 지르면서 죽음이 기다리는  바위
낭떠러지로 한쪽 발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의 고함 소리는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며 그
소리는 마치 무슨 신호처럼 들렸다. 모든 죄수들이 자제심을 잃어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
경이었다. 죄수들은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더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걸하며 또 기원했
다.
  나이 어린 갈루진이 여전히 노란 테두리의 학생 모자를 쓰고 있었으나, 이때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무서운 바위 낭떠러지를 향하여 기어가면서 경비병이
서 있는 땅바닥에 연방 머리를 조아리면서 울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
  "용서해주시오. 여러분, 저는 잘못을 뉘우치고 있어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테니까, 도
와주세요. 죽이지는 말아요. 저는 아직 인생을 살아 보지도 못했어요. 제발 여러분 용서해주
시오. 저는 단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를 보고 싶단  말이에요. 날 놓아주세요, 여러분이 시키
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발에다 입을 맞출까요. 물을  기어드릴까요. 오, 어머니,
절 살려주세요, 이제 틀렸어요. 어머니! 어머니!"
  죄수 가운데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훌륭한 여러 동무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는 두 개의 전쟁에서 피를 함께 흘리
지 않았습니까! 똑같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말입니다. 제발, 우릴 놓아주시오. 불쌍히 생
각해주시오. 당신들은 귀머거리란 말입니까? 왜 아무 대답이 없어요?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
니란 말입니까/"
  시보블류이에게 소리질렀다.
  "이 유태인아! 그리스도를 팔아먹는 놈! 우리가  반역자라면 넌 세 갑절이나 반역자란 말
야! 개 같은 놈, 목을 매달아 죽일 놈! 넌  황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를 죽인 놈이야. 그
런데 이번엔 우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배신을 하다니, 너의 레스느이한테 키스해줘라, 그놈
을 네가 배신하기 전에 말이야. 어차피 네놈은 배반할 테니까."
  그러나 브도비첸코는 무덤에 가까이 쫓겨가면서도 당황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백
발이 성성한 머리카락을 불어오는 바람결에 날리며 머리를 치켜들고 쩡쩡 울리는 우렁찬 목
소리로 무정부주의자가 자기 동료들에게 하는 말투로 르자니츠키를 보면서 말했다.
  "우리는 절대로 천박한 행동은 하지 말자! 너의 항의는 그들 귀에 들리지 않아. 이 새  오
프리치니크(군주의 절대 권력을 대표하는 이반 황제의 근위병)들과  새 고문 집행자들이 너
를 이해할 리가 있겠니! 하지만 실망은 말게. 역사는 진실을  전해줄 걸세. 후세 자손들에게
이 공산주의 전제정치의 반동 귀족들을 그놈들의  추악한 행위와 함께 세상에 폭로하고  말
걸세. 우리는 세계 혁명의 여명기에 이상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거야. 정신 혁명 만세! 세
계 무정부주의 만세!"
  사형 집행 사수들의 귀에만 들리는 어떤 구령이 내리면서 20발의 총성이 일제히 울리더니
사형수의 반수가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다.
다시 일제 사격을 받고 그들도 쓰러지고 말았다. 어린  갈루진이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몸을
뒤틀고 있었으나 그마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2
  겨울을 나기 위해 숙영지를 찾아 동쪽으로 더 이동하려는  계획은 쉽게 포기되지 않았다.
한길 건너의 브이트스카강과 케제마강이 갈라지는 일대의 지역을 정찰하기 위하여 척후병이
파견되었다. 리베리는 지바고를 혼자 남게 하고 가끔 밀림의 숙영지를 비우고 있었다.
  그러나 빨치산은 이미 이동할 시기를 놓쳐서 이젠 어디로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빨
치산은 지금 최악의 형편에 몰렸던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붕괴에 앞서 백위군은 숲속의 이
비정규 부대를 완전히 소탕하기로 결심하고 포위망을 형성하여 여러 방향에서 압박을  가해
오고 있었다. 만일 포위망이 좀더 좁혀졌다면 빨치산은 파멸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
행히도 적의 포위망은 지나치게 넓었다. 겨울이 닥치는 바람에 밀림은 발붙일 수 없게 되어
적의 포위망을 압축하려는 부대는 이미 이동이 불가능하게 됐다. 물론, 혹시 군사적으로  어
떤 특정하게 유리한 점을 가진 계획이 있다면 새로운 진지로 돌파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런 명확한 계획은 가지지 않았다.
  병사들의 사기는 저하됐고, 하급 지휘관들 자신의 사기마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부하에 대한 통솔력을  점차 잃게 되었다. 상급 지휘관은  밤마다 회의를 열고
대책을 의논하였으나 토론만 계속되었을 뿐이었다.
  결국 숙영지를 이동하는 계획은 단념하고 밀림 한복판인 현 위치에서 방어 시설을 구축하
기로 했다. 겨울에는 눈이 깊게 덮여 적의 접근을 막고 있는 점과 적의 스키보급이 좋지 않
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해야할 일은 진지를 더욱 구축하고  대량의 식량을 확보하는 일이었
다.
  병참 참모인 비슈린은 밀가루와 감자가 매우 부족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가축이 많아서
겨울 동안의 주식은 우유와 고기를 먹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겨울 의복도 부족했다.
빨치산의 대부분은 가볍게 옷을 입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숙영지에 있는 개를 모조리
때려 잡아서, 털옷 만드는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털을 바깥으로 한  개가죽 웃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바고는 마차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짐마차는 지금 더  긴요한 일을 위하여 사용하
도록 돼 있었다. 빨치산은 이 숙영지에 옮겨왔을 때도 30베르스타의 먼 거리를 들것으로 중
환자를 수송해왔던 것이다.
  지바고가 가지고 있는 남은 의약품으로는 키니네와 염산소다 그리고 요드 용액  정도였었
다. 요드는 굳어 있기 때문에 상처의 치료나 수술을 할 때는 알콜에 녹여서 사용했다.  그러
고 보니 새삼 양조기를 부숴버린 일이 후회되었다. 전의 재판에서 비교적 죄가 가벼워서 방
면된 술 밀조자들이 양조 시설을 다시 고치거나 새로운  것을 만들도록 지시받았다. 이리하
여 의료용 알콜을 제조하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빨치산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알려지자
서로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정뱅이들이  늘어나서 전체의 사기가 떨어져가
기 시작했다.
  양조해 낸 알콜은 근 1백 도에 가까웠다. 요드를 녹이거나 키니네 용액을 만드는 데는 이
정도의 도수가 적당했다. 추위가 닥쳐오면서  다시 티푸스가 고개를 들어서  키니제 용액을
치료하는 데 사용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3
  이 무렵에 지바고는 팔르이흐의 가족을 만나 보았다. 그의 처자는 지난 여름 동안 피난민
이 되어서 먼지투성이 한길을 방황하면서 공포에 시달려 지내왔으며, 이제부터 새로운 고통
이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끝없는 유랑이 그들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겨놓고 있었
다. 팔르이흐의 처와 두 딸과 아들은 원래는 금발머리였으나, 햇볕에 그을려 아마빛으로  희
게 퇴색되었으며 굵직한 눈썹 역시 비바람에  시달려 불그레 탄 얼굴에 희끗희끗하게  보였
다. 그러나 어린애들은 작았고 별로 고생티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의 어머니의 얼굴은  생
기를 잃고 있었다. 근심과 두려움에서 입술이 실처럼 가늘고  깡마른 것이 고통을 참으려는
표정으로 굳어져 있었다.
  팔르이흐는 가족을 사랑했으며 유독 아이들한테는 대단했다. 지바고는, 그가 잘 갈아 놓은
도끼날로 교묘하게 나무를 깎아 토끼나 수탉, 곰 따위의 장난감을 만든 솜씨에 놀랐다.
  가족이 도착하자 팔르이흐는 기운을 회복하고 병도 나아갔다. 그러나 가족을 빨치산과 함
께 있게 한다는 것은 군의  규율을 문란하게 하므로, 적당한 경계  조치를 하여 숙영지에서
좀 떨어진 장소에서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방 피난민의 부담을 덜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한낱 계획으로 토의되고  있는 정도였으며 실제 준비
는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다. 지바고는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으나, 팔르이흐는 또다
시 침울해지더니 다시 발광하는 버릇이 되살아났다.

  4
  겨울이 닥쳐올 무렵, 숙영지에서는 한동안 소란한 공기가  감돌았다. 불안과 의혹, 혼란과
술렁이는 공기 그리고 뜻밖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백위군은 작전 계획대로 포위를 완료했다. 그 작전의  지휘관은 비츠인, 크바드리, 바살르
이고와 같은 엄하고 강인한 장군들이었으며, 숙영지에 있던 피난민은  물론 포위 부대의 후
방 부락에 남아 있던 주민들까지도 그 이름만 들어도 덜덜 떨었다.
  앞서 말한 대로 적은 포위망을 압축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빨치산은 걱정할 필요는 없
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없었다. 괴로운 입장을 소극적으로  참고만
있을 경우, 적의 사기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포위망 속에서는 제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어떤
시위 작전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빨치산의 주병력은 분할되어 포위망의  서부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되었던 격전 끝에 빨치산 부대는 백위군을  격파하고 그 후방을 돌파하였다.
돌파구는 밀림 속을 뚫고 숙영지에 이르는  길을 터놓게 되어서 새로운 피난민들이  연달아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피난민의 전부가 빨치산의 연고자는 아니었다. 지방 농민들이
백위군의 박해가 두려워서 가정을 버리고 보호를 요청하여 숲속의 농민군에 합류하려고  들
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숙영지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많은 사람을 데리고 있어서 그들을 떼어버리고  싶었
던 처지였으며, 새로 밀려들어오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그리하여  피난
민을 도중에서 막아서 칠림카 강변에 있는 마을로 보내려고 대표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 마
을은 제분소가 있고 농가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어서 드보르이라고 불렀으며, 피난민들을 이
곳에 정착시켜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식량을 보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내렸으나 형편이 여의치가 않아서 빨치산 사령부는 그것을 도저히 감
당할 수가 없었다.
  적은 이윽고 자기 진지의 돌파구를  막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돌파해나갔던 빨치산
부대는 고립되어 숲으로 되돌아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여자 피난민은 성가신 존재였다. 밀림 속에서 여자들은 곧잘 길을 잃게  되었으며,
찾아나선 사람들이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되돌아왔다. 여자들은  흐르는 물결처럼 밀림에 흘
러들어와 나무를 찍어 길을 내고 다리를 만들고 놀랄 만한 창의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짓들은 빨치산 사령부가 의도했던 것과는 반대였으며 리베리가 세운 계획을  흔들
어놓게 되었다.

  5
  그런 이유 때문에 리베리는 몹시 언짢은 낯빛으로 스비리드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몇 명의 참모가 길가에서 도로변에 가설된 전화선을 절단할 것을 의논하고 있었다. 역시 최
종 결정은 리베리가 하게 되었으나, 그는  스비리드와 얘기중이므로 참모들에게 기다리라고
연방 손짓하고 있었다.
  스비리드는 브도비첸코가 총살되는 것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었다. 브도비첸코의 죄라
고 한다면, 그의 인기가 리베리의 권위와 겨루게 되어서  빨치산 내부에 반목을 가져왔다는
것뿐이었다. 스비리드는 빨치산에서 이탈하여 이전과 같은  혼자만의 자유로운 생활로 되돌
아가고 싶었으나 그것을 상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악마한테 정신을 팔고 나면 다
시 사들일 수는 없게 되었다. 산림에서 이탈하게 되면 배신자로 처형되는 것이다.
  날씨는 상상도 못할 만큼 험악하게 찌푸려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예리한 바람이 연기처
럼 검은 구름을 땅위에 휘몰아 붙이고 눈은 미친 듯이 휘날려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광막한 대지는 하얀 담요에 덮여버린다. 그러나 다음  찰나에는 그 흰 담요가 녹
아버리듯이 사라지고 저 멀리 소나기의 빗줄기를  비스듬히 쏟고 있는 컴컴한 하늘  밑에서
대지는 석탄처럼 검게 보였다. 대지는 이 이상 더 수분을 흡수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구름
이 창문처럼 열리면서 하늘이 보였다. 하늘은 차갑게 또 유리알처럼 희게 반짝였다.  흡수되
지 않고 땅 위에 괸 작고 큰 물 웅덩이도 반짝이고 있었다.
  습기는 연기처럼 소나무 꼭대기에 엉겨서 송진을 가진 솔잎이 방수포처럼 물기를 막아 냈
다. 빗방울이 전선줄에 구슬처럼 맺혀 있었다.
  스비리드는 여자 피난민을 만나러 밀림 속으로 보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
기가 목격한 것들을 낱낱이 대장에게 말하고 싶었다. 여러 가지 모순된 명령이 내려졌기 때
문에 괜히 혼란만 일어났을 뿐이며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라든지, 여자들 중에는
처음부터 실망해버린, 마음이 약한 사람이 범한 몸서리치는 행위 등을 말하고 싶었다.  자루
와 보따리를 등에 지고 젖먹이 애를 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걸어온 젊은 어머니들은 이
미 젖은 떨어지고 길에서 지쳐 정신을 잃게 되어, 아기를 길바닥에 팽개치고 주머니와 곡식
을 쏟아버린 채 길을 돌아섰다. 굶주리고 오래 고생하면서  죽는 것보다는 단숨에 죽어버리
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숲속의 야수 이빨에  찢기느니보다는 적의 손아귀에 들어
가는 편이 낫다고 결심하였다.
  또 다른 억센 여자들은 남자에 못지않게 용기와 자제심을  가졌다. 스비리드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대장에게 하고 싶었다. 그는 또 이전에  진압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새
로운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을 경계하도록 말하려  했으나, 리베리는 서두르면서 그에
게 천천히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더욱이  리베리가 스비리드의 말을 자주 가
로막는 것은, 자기 참모들이 길에서 부르고 손짓하고 있었던 이유만이 아니었다. 지난 두 주
일 동안은 그러한 경고를 귀에 혹이 나도록 들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대장 동무. 저는 언변이 좋지 못해서 말이 이빨에  걸리고 목
구멍에 붙어서 숨이 막힐 것 같아요. 어떻게 말한담? 피난민들이 노숙을 하는 곳에 가서 그
여자들에게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라고 말해주십시오. 도대체 우리는 어느 편입니까? 총력을
다해 콜차크와 싸우는 겁니까, 아니면 여자들의 수라장이란 말입니까?"
  "요점만 말해요, 스비리드. 날 부르고 있으니 딴소리 말고."
  "그런데 그 도깨비 같은 쿠바리하 말입니다. 아무도 그 여자의 정체를 모릅니다.  그 여자
는 소의 병을 고치는 여의사로 내보내달라는 겁니다."
  "수의 말이로군, 스비리드."
  "그래, 맞았어요. 가축의 병을 고치는  여자 수의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소 따위를
돌볼 여자가 아닙니다. 암소에 먹이를 주고는 새로 온 피난민의 젊은 여자들을 들뜨게 하고
있답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당신들 자신의 탓이
라면서 말입니다. 당신네가 옷깃을 쳐들고 붉은 기를 따라온 보답이 이거니 이제 다시는 그
런 짓을 말라는 겁니다."
  "그건 어느 피난민 말인가? 우리들 빨치산 편인가, 아니면 다른 피난민들 말인가?"
  "물론 다른 피난민 말입니다. 새로 들어온 낯선 사람들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드보르이 마을에 있기로 했지 않소.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거요?"
  "드보르이 마을 말이군요. 그곳에는 화재가 일어나서 제분소고 뭐고 모든 게 다 타버리고
남은 거라곤 잿더미밖에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칠림카에 도착해서 보니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반은 마음을 돌이켜 울면서 백위군 쪽으로 가버렸
으며, 나머지는 다시 이쪽으로 온 겁니다."
  "밀림과 늪지대를 어떻게 지나왔지?"
  "톱과 도끼는 언제 씁니까? 우리들이 보낸 호송대원들도  좀 돕기는 했습니다. 그들은 30
베르스타나 되는 곳을 나무를 찍고 길을 내면서 왔다는 거예요. 다리도 놓으면서  말이에요.
정말 억척스러운 여자들이에요. 생각지도 못할 일을 해치웠습니다."
  "제기랄! 30베르스타의 길을 만들었다고 좋아하는 건가, 이 바보 같은  친구야! 그건 바로
백위군이 바라던 일이 아닌가. 어서 오십시오, 하는 것과 같단 말일세. 밀림에 통로를 내 주
어서 대포도 끌어들일 수가 있겠네."
  "그럼 막아야지요. 빨리 막아버립시다. 막으면 그만이지요."
  "걱정 말아요,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6
  해가 짧아졌다. 다섯 시가 되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저녁녘에 지바고는 일전에  리
베리가 스비리드와 말다툼하던 바로 그  근처의 한길을 지나고 있었다.  숙영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공지에 거의 가까이 오자, 숙영지의 경계 표시로 되어 있는 마가목나무가 있는 낮
은 산 기슭에서 카랑카랑하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소의사'라는 별명으로 불리
는 쿠바리하였다. 그녀는 귀에 거슬리게  높은 목소리로, 어딘가 명랑하면서도 거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듣는 사람이 많았는지 흥겨운 남녀의 웃음 소리가 이따금 터져나왔다.  이윽
고 조용해졌다. 모두 헤어진 모양이었다.
  그때 쿠바리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혼자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
했다. 지바고는 어둠 속에서 늪지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마가목나무 앞의 늪가의 오
솔길을 천천히 걷다가 문득 멈췄다. 쿠바리하는 옛 러시아 노래를 불렀는데 무슨 노랜지 알
수는 없었다. 아마 그녀가 즉흥적으로 지어 부르는 노래 같았다.
  러시아의 노래는 저수지의 물같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밑에
서는 끊임없이 물이 수문으로 흘러나가고 수면의 고요는 거짓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노래는 반복과 비유로 은근히 전개되는 주제를 이끌어가다가 어느 한계에  이르
러 그것을 갑자기 드러내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노래의 애절한 정신은 이렇
게 해서 표현되었다. 노래란 말로써 시간을 멈춰보려는 미치광이 노릇인 것이다.
  쿠바리하는 노래 부르듯 또 말하듯 혼자 지껄이고 있었다.
  새하얀 빛을 따라 토끼는
  흰 세상, 흰 눈을 달린다.
  마가목나무를 지나 숲속을 달린다.
  숲속을 달려 마가목나무한테 울면서
  난 겁장이에요,
  놀라기만 하는 겁장이래요.
  난 짐승이 지나간 자국만 봐도
  굶주린 늑대의 배가 무서워요.
  나를 불쌍히 여겨주오, 마가목 숲아!
  아름다운 마가목나무.
  너의 아름다움을 못된 원수에게
  원수의 까마귀에겐 주지 말아요.
  너의 빨간 열매를 바람결에 실어
  바람이 흰빛과 흰 눈 위에
  그리운 땅 위에 뿌리게 해요.
  우리 고향까지
  저 멀리 담을 쌓은 집까지
  그 창문에, 그 방안에
  나의 사랑, 그리운 그대
  그대가 닫고 들어간 방에까지
  나의 불타는 말 한마다 속삭여 다오,
  뜨거운 사랑의 속삭임을.
  난, 속박된 병사의 몸
  난, 향수에 젖은 가련한 병사
  나는 쓰라린 구속을 박차고
  나의 빨간 열매, 나의 사랑을 찾겠네.

  7
  병사의 처 쿠바리하는 팔르이흐의 처 아가피아의 병든 소를 고치기로 돼 있었다. 그 소를
여러 소들 사이에서 끌고나와서 관목이  우거진 숲속으로 데려다 나무에  뿔을 동여매었다.
앞다리 옆의 나무토막에는 아가피아가 앉고 뒷다리 옆에는 젖 짤 때 쓰는 의자에 쿠바리하
가 앉아 있었다.
  그 밖의 많은 가축들이 좁은  공지에 들어차 있었다. 검은 침엽수림이  산 높이로 자라난
삼각형 모양의 전나무를 사방으로 벽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전나무의 아래쪽에 뻗은 가지은
마치 살찐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이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시베리아에서는 소의 품종이 어떤 한 가지 스위스종뿐이었다. 암소는  검은 바탕에 흰 반
점이 있었고 거의 대부분이 똑같은  털무늬였다. 그것들도 사람에 못지않게  궁핍과 끝없는
방랑과 견딜 수 없는 혼잡으로 지쳐 있었다. 소들은 옆구리를 비벼대고 장소가 비좁아 미칠
지경이었으며, 자기네들의 성도 잊어버리고 뒷발로 서면서 다른 소에게 올라타 누르는 바람
에, 묵직한 젖통을 빼내기에 힘을 쓰며 수소처럼 으르렁거렸다. 어미소에 깔렸던 어린  송아
지가 밑에서 튀어나와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꼬리를 하늘로 쳐들고 나무 덤불과  가지를
짓밟고 다니자, 소몰이꾼 아이들과 노인이 소리를 질러 그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전나무의 꼭대기가 겨울 하늘을 빽빽이 둘러싼 것처럼 보여서, 숲속 공지 위
에서 검고 흰 구름이 소떼처럼 혼잡하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갈 길을 막고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장소에는 호기심에 찬 구경꾼들이 쿠바리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래
서 그녀는 언짢은 눈으로 아래위를 훑었다. 하지만 구경꾼에  한눈을 판다는 것은 체면이나
예술가의 자존심에 손상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지바고는 쿠바리하한테 들키지 않도록
사람들의 등뒤에 숨어서 슬그머니 지켜보았다.
  그가 그녀를 똑똑히 바라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쿠바리하는 여전히 영국군의 약모를
쓰고 제멋대로 깃을 꺾어 놓은 황록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이든 여인의 정열
에 넘치는 모습과 교만스러운 표정, 그리고 젊음이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눈썹은 무슨 옷을
입건 그녀의 성미를 나타내긴 매일반이었다.
  그러나 지바고가 놀란 것은 팔르이흐의  아내가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요 며칠 사이에 얼마나 늙어버렸는지 부릅뜬 두 눈이 금방 밖으로 떨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마차의 굴대처럼 가느다란 그녀의 목에는 혈관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마음의
공포가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바꿔놓았다.
  "이 소는 젖을 통 내지 못해요." 아가피아가 말하고 나서 생각했다. '새끼를 밴 것은 아닐
까. 그래도 지금쯤은 젖이 날 것 같은데 여전히 없다니.'
  "새끼를 밴 것은 아니오. 저 젖꼭지에 딱지가 붙어 있는 걸 보아요. 우유에 담갔던 약초를
줄 테니 발라봐요. 그리고 주문으로 기도를 드리겠소."
  "그리고 또 남편 때문에 걱정이라우."
  "내가 기도하면 그까짓 바람기는 잡을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주인이 당신한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세번째 걱정거리는 뭡니까?"
  "그 양반이 바람난 게 아니예요. 바람이라도 났으면  좋게요. 반대로, 나와 애들일을 하나
하나 걱정하다 보니까 몸도 마음도 곪아버렸답니다. 저는 그이의 생각을 알고 있어요.  이제
우리는 서로 딴곳에서 살아야 한댔어요. 우린 바살르이코한테 붙잡히게 되고, 남편이 없어지
면 우릴 지켜줄 사람이 없어질 거예요.  놈들은 우리를 고문하고, 그 고통을 그놈들은  즐기
고... 이렇게 생각하니 그이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오. 이만하면 알겠지요?"
  "생각해 봅시다. 그 걱정을 덜어볼 궁리를 할 테니까. 그럼 또 세번째 걱정은?"
  "세번째 걱정은 없어요. 암소와 그이에 대한 걱정뿐이에요."
  "아니 그것뿐이라니! 하나님 은총이예요. 대낮에  불을 켜들고 찾아봐도 당신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요. 그것도 하나는 주인이 너무 위해 주는 걱정이란 말이오. 그런데 소  별을
고쳐주면 뭘 줄 테요? 그럼 기도를 시작해봅시다."
  "뭘 드릴까요?"
  "빵 한 덩어리와 당신의 주인을 받겠어요."
  주위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농담하시는 거요!"
  "너무 비싸면 빵은 그만두고, 당신 남편만으로 합시다."
  웃음 소리가 더 높았다.
  "이름이 뭐지요? 주인 말고 소의 이름 말이오."
  "크라사바라고 해요."
  "여기 암소의 절반은 크라사바가 아니오. 좋아요. 그럼 시작합시다."
  쿠바리하는 암소에게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축한테만 주의를 쏟고  있었으나,
잠시 후 흥이 돋아나 아가피아를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주문을 외는 법과 규칙을 말하는 것
이었다. 지바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열띤 주문을 듣고 있었다. 그가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로
여행하던 중 마부 바커스의 멋있는 객설을 들은 일이 있었다.
  "모르고시야 아주머니, 어서 우리한테 나들이 오소서. 화요일과 수요일엔 썩은  종기를 가
져가시고, 암소 젖꼭지에서 딱지를 떼어내 주시오. 얌전히 있어요. 크라사바! 의자를 자빠뜨
리지 말고. 산처럼 서서 강물처럼 젖을  흘리라. 도깨비와 요괴 같은 딱지를 떼어서  쐐기풀
밭에 던져버리라. 나의 말은 상제의 말과 같으니라. 아가피아, 당신은 무엇이든지 알아야 해
요. 저기 숲을 잘 보고 잘 생각해 보란 말이오.  그건 숲이 아니예요. 저것은 우리가 바살르
이코 부대와 싸우듯이 악마의 군대와 천사의 군대가 싸우는 거예요.
  그럼 다른 예를 들어서 가르쳐주지. 내가 손짓하는 쪽을 봐요. 그것이 아니예요. 잔등으로
볼 수는 없으니 눈으로 보란 말이오. 그렇지, 그래! 저것이 무엇이라고 생각되지요? 바람 탓
으로 자작나무 가지가 얽혔거나 아니면  새가 둥지를 짓는다고 생각하겠지. 아닙니다,  저건
도깨비의 장난이란 말이에요. 물귀신이 자기 딸을 위해 엮은 꽃다발이에요. 사람이 지나가는
소릴 듣고 반쯤 만들다가 그만뒀어요. 밤이 오면 다시 만들 테니, 두고 봐요.
  그리고 또 당신들의 붉은 깃발 말이에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요? 그것을 깃발이라고
생각해요? 아니오, 그것은 깃발이 아니랍니다. 그것은 죽은 딸자식을 홀려내는 데 쓰이는 새
빨간 스카프라오. 왜 홀려내느냐 하면, 젊은 사람들에게 스카프를 흔들어 추파를 던져  젊은
이를 죽음에 빠지도록 유혹하여 병을 준단 말이예요. 그런데 당신은 그 깃발을 믿었어요. 만
국의 노동자와 가난뱅이여, 모여라 하는 깃발이라고.
  아가피아, 오늘날에는 뭣이든지 다 알아둬야 해요. 새는 뭣이고, 돌은 뭣이고, 그리고 풀은
뭣인지 다 알아두어야 한단 말이에요. 가령 이 새는 찌르레기이고, 저 짐승은 오소리라고 하
듯이...
  그리고 또 당신이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면 말해요. 상대가 누구이든 당신한테 반하게 만
들 테니까. 당신들의 대장 레스느이든, 콜차크든 아니면 이반 차레비치(러시아 동화에 잘 나
오는 이목구비가 수려한 왕자)든 아무라도 좋아요. 거짓말인 줄 아시오? 아니예요. 자 들어
보시오. 겨울이 되면 들판에 눈보라치고 회오리바람이 일고 눈기둥이 치솟아 올라가는데, 내
가 그런 눈기둥에다 단도를 찔러 놓으면 그 칼에 시뻘건 피가 묻어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당신은 내가 거짓말은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바람과 눈으로 된 눈기둥에
서 어떻게 피가 나오겠어요. 그것은 말하자면 그 회호리바람이 예사 바람과 눈이 아니고 귀
신이 앗아간 어린 아이를 찾아, 울면서 들판을 헤매는 이리로 변신한 인간이랍니다.  그것을
내가 칼로 찔러서 피가 묻었던 거예요. 나는 그 칼을  가지고 어떤 사람의 발자국을 떼어내
서 당신의 스커트 깃에 명주실로 꿰매주겠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콜차크든, 스트렐리니코프
든 또 새로운 황제건 당신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만국의 가난한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생각
하고 있단 말이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돌멩이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것 말이예요. 어떤 사람이 집에
서 어두운 밖으로 나오니까 머리  위에 돌멩이가 떨어졌어요. 또 어떤  사람들이 본 것처럼
기사가 말을 타고 하늘을 달려서 말굽이 지붕을 차고 지나  갔다고 했어요. 그리고 아주 옛
날의 점장이는 '이 여자에게는 곡식을, 저 여자에게는 꿀을,  그리고 또 한 여자에게는 호랑
이 가죽을 몸에 지니게'했다는 거예요. 그러고는 기사가 마치 상자를 열 듯이 여자의 어깨를
칼로 찍어서 열고는 칼끝으로 밀과 다람쥐 그리고 꿀벌집을 끄집어냈대요."
  이따금 우리는 깊고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반드시 어떤 연민의 정
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그 숭배의 대상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점점 더 그 사람이 희생돼
가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어떤 남자들은 여자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그녀를 비현실적
인 공상의 세계에서 바라보게 되며, 여자가 호흡하고 있는  공기마저도 질투를 느끼며 자연
의 법칙과 그 여자가 태어나기 전 세상에 있었던 수천 년의 역사의 흐름까지도 질투를 느끼
게 했다.
  지바고는 교양이 많은 사람이었다. 쿠바리하가 말하던  마지막 이야기가 노브고로드 연대
기가 아니면 이파치예브 연대기의 첫 부분과 흡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세기를 거쳐서
점장이의 이야기로 전해준 것을 시인들이 왜곡하면서 입으로 전하고, 후세로 내려와서 필생
들의 손으로 잘못 기록되어 점점 더 왜곡되어서 나중에는 원본과는 조금도 비슷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데 왜 지바고는 구비의 위력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돼먹지 않은 터무니
없는 소리가 마치 실재하는 사실처럼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되었을까?
  라라의 왼쪽 어깨를 째서 열어 젖뜨렸다. 그리고 숨겨 둔 금고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듯이
칼을 꽂아서 어깨뼈를 젖혔다. 그러자 그녀의 영혼 깊숙이  간직했던 비밀이 드러나고 말았
다. 낯선 고장, 거리, 집들 그리고 공간 등이 마치 리본의 둥그런 뭉치를 굴리듯이 하나하나
나타나는 것이다.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던가!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내가  언제나 생각하고 꿈꿨던
그녀의 모습은 항상 그려보던 그대로가 아닌가!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그
녀의 아름다움을 말로 다할 수 있을까? 아니야, 절대로 안돼! 그녀는, 조물주가 단 한 번 붓
을 놀려 그녀의 신성한 윤곽을 그린 둘도 없는 소박하고 날랜 선에 의하여 탄생하여 깨끗하
게 담요에 싸놓은 갓난애처럼 신에게 영혼을 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숲, 시베리아 그리고 빨치산. 그들은  지금
포위되고 있으며, 나는 그들의 운명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기이하고 믿을 수 없는 일
인가! 그리하여 또다시 지바고의 눈앞이 흐려지면서  머리가 혼란했다. 모든 것이 흔들리며
움직였다. 그때 눈이 내릴 것으로 짐작했던 날씨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거리의
한길을 가로질러 집과 집 사이에 걸쳐진 넓은 플래카드의 천처럼 숲속 공지의 한쪽에서 다
른 쪽으로 몇 배나 더 넓게  놀라운 환상의 머리가 쑥 나타나 하늘에  퍼졌다. 더욱 세차게
퍼붓는 비는 하염없이 우는 환상의 머리에 입맞추어 씻어 내렸다.
  쿠바리하는 아가피아에게 말했다.
  "이젠 됐어요. 당신의 암소는 곧 나을  겁니다. 빛의 보금자리이며 생명의 성전이신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드려요."

  8
  밀림 서쪽 경계선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밀림은  끝없이 넓기 때문에 마
치 더 먼 국경에서 전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산림 깊숙한 곳에 있는 숙영지에
는 사람이 많아서, 아무리 사람을 전투에 투입하고도 남아 있는 사람의 수가 오히려 불어난
것처럼 느껴져서 서운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터의 총성이 깊숙한 숙영지까지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숲속에서 몇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또 몇  발의 총성이 가까운 곳에서 들리
더니 재빠른 일제 사격 소리로 변했다. 총성을 들은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 일제히 흩어졌
다. 숙영지 예비 대대에 편입되었던 사람들이 자기 마차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소동이 벌
어지면서 모든 사람이 전투 태세를 갖췄다.
  얼마 후에는 잠잠해졌다. 적이 습격해 왔다는 경보는 착오였던 것이다. 총성이 들리던  곳
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군중은 점점 많아지고  새로 모여든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군중이 모인 땅 위에는 피투성이가 된 한 사람이 구르고  있었다. 아직 숨은 쉬고 있었으
나 그의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가 잘려 있었다. 이 가련한 살덩어리가 남은 한쪽 팔과 다리
는 몸서리나는 핏덩어리로 되었고, 뭐라고 길게 써 붙인 널빤지와 함께 잔등에 묶여 있었다.
널빤지에는 여러 가지 욕설과 함께 이 조치가 어떤 적위군 부대의 이와 유사한 만행에 대한
보복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은 숲속의  빨치산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부대였다.  그리고
널반지에는 어떤 기한까지 빨치산이 항복하고 비쯔인 군단의 대표에게 무기를 인도하지  않
을 경우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이러한 결과가 된다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도 피를 흘리면서 때로는 의식을 잃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자기가 후방에
주둔해 있는 비쯔인 장군의 군법 징벌부에서 받은 고문에  대하여 더듬더듬 말하고 있었다.
그는 교수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어서 수족을 잘리게 되었으며,  빨치산 사이에 공포를
일으키기 위하여 이렇게 무서운 불구의  꼴로 만들어 보내진 것이다.  적은 숙영지의 제1선
전초 지점까지 그를 날라와서 거기서 땅바닥에 내려놓고 기어가도록 명령하고 멀리서  공포
를 쏘면서 위협했다.
  그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하여 사람들은 몸
을 낮게 굽혀 귀를 기울였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여러분 조심해요. 적은 우리 진지를 뚫었어요.
예비 부대는 이미 왔어요. 이제 곧 큰 전투가 있을 겁니다. 차단해버리고 맙니다.
  또 돌파됩니다. 돌파된다니까요. 아마 급습을 해올 겁니다.  난 알아요, 이제 나는 글렀어.
여러분, 이렇게 피를 토하고 있으니, 난 죽여요."
  "당신은 누워서 쉬어요. 그리고 그에게 말을 시키지  말라구, 이놈들아. 그에게 나쁘단 걸
몰라!"
  "그 흡혈귀 같은 놈이 내 온몸을 성한 데가 하나도  없이 두들겨 팼어요. 너의 정체를 밝
히라면서, 고백할 때까지 피로써 씻어준다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난 정말 솔직히 탈영병이라
고 말했지만, 아무리  말해도 믿질 않았어요.  나는 그놈들에게서 당신들한테로  도망쳐왔어
요."
  "당신은 그놈들이라고 하는데 당신을 고문한 놈이 도대체 누구요?"
  "아, 괴로워요. 숨을 좀 돌립시다. 말하지요. 카자크 대장 베케쉰과 쉬트레제  대령 그리고
비쯔인 군단의 놈들이었어요. 당신들은 숲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마을 전체가 혼나
고 있는데도 그놈들은 사람을 산 채로 삶아 죽이거나 생가죽을 벗겨서 허리띠를 만들고 있
다오. 놈들은 우리 목덜미를 잡아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곳에 떼밀었어요.  우린
손으로 더듬어 거기에 철장이 있는 걸 알았어요 거긴 화물차였는데 철창 안에는 속옷 한 장
만 걸친 사람이 40명은 더 있었어요 그리고 놈들은 문을 열고 화물차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누구든지 손에 잡히는 대로 밖으로 끌어낸답니다. 마치 닭 모가지를 비틀기나 하듯이.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목을 누르거나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거나 심문을 하는 겁니다. 몸뚱이가
녹초가 되도록 매질하고 상처에는 소금을  비비고 뜨거운 물을 끼얹는  거예요. 토하기라도
하면 그걸 억지로 도로 먹이는 겁니다. 아이들과 여자들이 어떤 짓을 당하고 있는지는 말할
수 없어요."
  불행한 이 사나이는 드디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무엇인가 말하려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흐느껴 우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축 늘어지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그날 밤 그것보다 더 무서운 소식이 숙영지에 알려졌다.
  팔르이흐도 군중 틈에 끼어서 그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그의 얘기를 듣고  널빤지에
적힌 글을 읽었던 것이다.
  자기가 죽었을 경우, 가족한테 닥칠 운명에 대하여 언제나 하던 걱정이 절정에 달했다. 이
미 그의 머리 속에는 상상하던 자기 가족의 고문 광경이 현실처럼 느껴지고, 고통스럽게 일
그러진 가족들의 얼굴이 눈에  보이고, 신음하면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렸던
것이다. 가족에게 앞으로 있을 고통을 없애며 자기의 고민을  청산하기 위해 팔르이흐는 심
한 번민에 사로잡혀 가족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던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던 딸들과 아들 프
레누쉬카에게 목각 장난감을 만들어 줄 때 쓰던  그 예리한 도끼로 아내와 세 자식을 때려
죽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범행 후 자살하지는 않았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앞으로 어찌
할 것인가? 그의 경우는 이미 인간으로서 종지부를 찍은 미치광이였다.
  리베리와 지바고 그리고 군 소비에트 위원들이 처리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으나, 팔르이흐
는 머리를 깊숙이 떨구고 노랗게 흐린 눈으로 멍하게 바라보면서 숙영지를 마음놓고 돌아다
니고 있었다. 어떤 힘으로도 이겨낼 수 없었던 초인간적인  고민에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애매한 웃음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를 동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그를 피했다. 그를 처치하자는 사람도  있었으나
찬성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할 일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동쪽  하늘이 밝아올 무렵에 그는 미
친개처럼 제정신을 잃고 숙영지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9
  한겨울에 접어들면서 모진 추위가 닥쳐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이 찢는
듯한 소리와 형체가 차가운 안개 속에 나타나 멈추고 또 움직이면서 사라져갔다. 태양은 늘
보던 것과는 달리, 누군가 바꿔놓았는지 새빨간 공처럼 숲에  걸려서 꿀보다 진한 호박색의
광택이 꿈이나 동화에서처럼 서서히 퍼지면서 하늘과 나무에 얼어붙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발이 펠트 장화를 신고 둥근 밑창으로 대지를 스치면서 사방으로 움직
여갔다. 그리고 방한모를 쓰고 짧은 털외투를 입은 몸뚱이만이  마치 우주를 나는 천체처럼
공중에 떠서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끼리 걸음을 멈추고 얘기를 나눴다. 목욕탕에 들어간 사람들처럼 빨갛게 상기
된 얼굴과 빳빳하게 얼어붙은 수염을 가까이 대고 입에서 진한 입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러나 무뚝뚝한 말이 토해내는 입김의 크기보다는 오히려 적었다.
  오솔길에서 리베리는 지바고와 마주쳤다.
  "아, 당신이었군요? 오래간만이오. 오늘 저녁에 내 막사로 오시오. 옛 정도 나누면서 전해
야 할 소식도 있어요."
  "연락병은 돌아왔나요? 바르이키노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당신이나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어요.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었소. 아마
가족들은 안전한 것 같소. 그렇지 않았다면  무슨 소문이 났을 텐데. 아무튼 오늘밤  차분히
얘기해봅시다. 기다리겠어요."
  그날 밤 지바고는 리베리의 막사에서 질문을 되풀이 했다.
  "우리 가족에 대해선 무슨 소식이 없었소?"
  "여전히 당신은 자기 코앞의 일밖엔 관심이 없군 그래. 그들은 무사하고 안전하다니까. 그
것보다도 좋은 소식이 있어요. 고기를 먹겠소? 차가운 송아지 고기가 있어요."
  "아니 괜찮아요. 딴소리 말고 빨리 얘기나 해주어요."
  "그래요. 어쨌든 난 좀  먹어야겠어. 숙영지에는 괴혈병이 만연되고  있고, 사람들은 빵과
야채의 맛을 잊어버렸어요. 지난 가을, 여자들이 있었을 때 호도열매와 딸기를 좀더 많이 주
워 들일 걸 그랬어. 그런데 전세는 내가 말하던 대로 유리해지고 있어요. 내가 항상  예언하
던 그대로가 아니오. 어려운 고비는 지났어. 콜차크는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어요. 완전
한 패배란 말이오. 이제 알겠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꿍꿍 앓고만 있으니."
  "언제 내가 꿍꿍 앓았어요?"
  "언제나 그랬지 않소. 더욱이 우리가 비쯔인의 압력을 받게 되었을 때에 말이오."
  지바고는 지난 가을에 일어났던 반란자들의 총살과 팔르이흐의 처자 살해 사건과 같은 잇
따라 일어난 무의미한 유혈과 살인을  회상하고 있었다. 백위군과 적위군은  서로 잔인성을
겨루면서 폭행은 또 폭행을 낳게 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는 목구멍을 찌르고 머리에 올
라와 눈을 흐리게 했다. 이것은 꿍꿍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전혀 달랐다. 어떻게 하면 리베
리한테 설명할 수가 있을까?
  막사 안에는 탄내가 자욱하여 입과 코 그리고 목구멍을 찔렀다. 철제 삼발의 받침대 위에
서 타고 있는 나무조각이 희미한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  타 버린 나무조각은 물을 담은
접시에 떨어진다. 그러면 리베리는 다시 새것에 불을 붙였다.
  "무엇이 타고 있는지 봐요. 기름이 떨어졌어. 나무는 너무 말라서 이내 타 버려요. 괴혈병
말인데... 정말 송아지 고기가 싫어요? 그렇지 괴혈병 얘길 하고 있었지. 당신은 뭘 보고  있
어요? 참모들을 모아서 괴혈병에 대한 방역 지도와 그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소?"
  "제발 날 희롱하지 말아요. 우리 가족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뭣이지요?"
  "정확한 것은 전혀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리고 최근의  전황 보고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아직 당신한테는 말하지 않았군.  내란은 끝났어요. 콜차크군은 격멸되고  말았어요. 적위군
부대는 철도를 따라 동쪽으로 추격중에 있어요. 놈들을 바다로 쫓아 버린단 말이오.  적위군
의 다른 부대는 우리와 합류하기 위하여 이리로 지금 진격중에  있어요. 후방 여러 곳에 산
재해 있는 많은 나머지 적을 소탕하기 위해 합동 작전을  하게 되는 겁니다. 러시아의 남쪽
방면에는 백위군의 그림자도 안보이게 됐어요. 어떻소, 기쁘지 않아요? 당신은 이것으로  충
분하지 않아요?"
  "그야 물론 기뻐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어디에 있어요?"
  "바르이키노에는 있지 않아요. 그건 참  운이 좋았어요. 지난 여름에  카멘노드보르스키가
지껄이던 것은 생각했던 대로 아무 근거 없는 허튼소리였어요.  정체 불명의 사람들이 바르
이키노를 습격했다는 말이에요. 기억나지요? 그러나 마을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을리
만큼 황폐해버렸어요. 그걸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가족들
이 피난한 것은 썩 잘된 일이지요. 척후병의 보고에 의하면  거기에 남아 있는 몇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유라친은? 거기서는 어떻게 됐어요? 어느 편이 장악하고 있지요?"
  "그것이 또 우스운 일이거든. 어딘가 잘못된 모양이야."
  "뭐라구요?"
  "백위군이 있다고 하는데,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곧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당신에
게 보여드리지요."
  리베리는 등불에 새 나무를 꽂아놓고 구겨진 지도를 끄집어내서 필요한 부분만을 위로 나
오도록 접어 펴놓고는 연필을 쥐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아요, 백위군은 이 일대에서 격퇴되고 있어요. 여기와 또 여기에서. 알겠어요?'
  "그렇군."
  "그래서 유라친 방면에 백위군이 있을 리가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보급선이 차단되어서
독 안에 든 쥐란 말이오. 제아무리 무능한 장군들이라 할지라도 이걸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왜 외투를 입었지요, 어디 가려고?"
  "잠시 실례하겠어요. 마호르까(질이 나쁜 담배)와 나무 연기가 꽉 차서 골치가 아파  바깥
공기를 좀 쐬고 오겠어요."
  지바고는 막사 입구에 걸상 대신에 놓인 통나무에서 눈을 쓸어내고 그 위에 앉아서 잔등
을 구부려 두 손으로 얼굴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겨울의  밀림과 숲속의 숙영지 그리고 빨
치산 부대에서의 18개월의 세월 따위는 다 잊어버렸다. 다만 머리에 남은 것은 자기 가족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는 점점 더 두려워지면서 그들의 운명을  이것저것 상상해 보는 것이
었다.
  토냐가 눈보라 치는 벌판을 손에 싸샤를 껴안고 간다. 그녀는 담요에 아기를 싸안고 눈에
깊이 빠지는 발을 간신히 빼면서 걸었으나, 눈보라에 날려 나자빠진다.
일어나기는 했지만 디디고 서 있을 힘이  없다. 나는 항상 잊고 있었다. 토냐한테는  아이가
둘이고, 어린 놈은 아직 젖먹이라는 사실마저도. 토냐는 두  손에 아기를 안고 있다. 슬픔과
힘에 겨운 긴장 때문에 칠림까의 여자 피난민들처럼 미칠 것만 같다.
  토냐는 두 손에 어린애를 안고 있다. 주위에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싸샤의 아버
지는 어디로 갔는지 없다. 그는 늘 멀리에 떨어져 있었다. 일생 동안 어딘가 떨어져 있었다.
이런 사람이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참된 아버지란 어떤 사람일까? 장인은 어디
있을까? 뉴샤는 어디에 있을까? 또 다른 사람들은? 그만, 생각지 않는 것이 낫겠다.
  막사에 돌아오려고 통나무에서 일어나는 순간 지바고의  머리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리베리에게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는 스키와 건빵 등을 넣은 주머니와 그 밖에 도망치는 데 필요한  물
건을 숙영지의 경비선 밖에 있는 큰 소나무 밑에 묻어서 표시해두었다. 지바고는 눈더미 사
이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물건을 숨긴 장소로 가고 있었다. 둥근 달이 밝은 밤이었다. 지
바고는 밤의 경비병 배치 지점을 잘 알고 있어서 빠져나가기 쉬웠다. 그러나 공지의 얼어붙
은 마가목나무가 있는 곳에서 보초가 멀리서 소리를 지르면서 몹시 휘어진 스키 위에 곧바
로 서서 달려왔다.
  "정지! 쏜다! 누구냐! 암호를 말해!"
  "왜 이러시오. 날 몰라요? 의사 지바고란 말이오."
  "미안해요. 나쁘게는 생각지 말아요. 제르바크(빨치산에서 지바고를 이렇게 불렀다. 혹, 종
기라는 뜻) 동무. 잘 몰랐어요. 그러나 동무도 여기서  더 이상은 못 갑니다.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좋아요. 암호는 '붉은 시베리아', 응답은 '간섭자 타도'."
  "그렇다면 좋아요. 마음대로 가시오. 그런데 어찌된 일로 밤중에 나다니는 겁니까? 환자가
있나요?"
  "잠도 잘 오지 않고, 목구멍이 말라서 밤공기를 쐬면서 눈을 좀 먹을까 해서요. 그리고 마
가목나무에 얼어붙은 열매가 있어서 따 먹을까 해요."
  "양반의 근성이로군, 겨울에 마가목 열매가 먹고 싶다니. 우리는 3년 동안이나 당신네들을
두들겨 팼는데 여전히 그대로란 말이야. 알겠어요. 어서 가서 마가목 열매를 실컷 따 잡수시
오. 내가 알 바가 아니니까."
  보초가 큰 걸음으로 힘있게 내딛자 기다란 스키가 바람 소리를 내면서 곧 바른 자세로 점
차 속력을 더해가며 눈 위를 미끄러져서 대머리처럼 벗겨진 겨울 관목 너머로 사라져 갔다.
지바고는 걸음을 계속하여 마가목나무 밑에 이르렀다.
  얼어붙은 잎사귀와 열매가 붙은 채 반쯤 눈 속에 파묻힌 나무는 눈투성이가 된 가지를 뻗
어서 그를 맞이하는 듯했다. 지바고는  라라의 희고 통통한 팔뚝을  생각하면서 나뭇가지를
잡아당기자 마치 적극적으로 대답이나 하듯 마가목은 그의 온몸에 눈을 퍼부었다. 지바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꼭 찾아내야지. 나의 그리운 여인이여. 사랑하는 마가목의 여왕이여."
  밝은 달밤이었다. 그는 밀림 속으로 더듬어 들어가, 전나무 밑에 숨겨둔 물건을 파내 가지
고 숙영지를 떠났다.

    여신상 맞은편 집
  1
  볼리샤야 쿠페체스카야 거리는 경사를 따라 말라야 스파스카야 거리와  노브스발로치느이
거리 쪽으로 뻗어내려 가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언덕 위에 집들과 교회당이 있었다.
  거리 모퉁이에 그리스의 여신상들을 부각한 짙은 잿빛 건물이 있었다. 네모난 큰 돌로 쌓
은 맨 아래층 벽면에는 정부 기관지와 포고문, 결의문 등이 지저분하게 붙어 있었다. 통행인
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서 묵묵히 그것을 읽고 있었다.
  금세 해빙기가 자나, 공기는 건조했고 몹시 추웠다. 몇 주 전만 해도 벌써 날이  어두웠겠
지만 지금은 아직 밝았다. 동절기가 지나자  밝은 빛은 공지를 고루 채우고, 밤이  찾아와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고 서성거리며 민심을 위협하고 경계하게 했다.
  백위군이 적위군에게 이 도시를 내주고 퇴각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총성이 멎고 유혈
이 그치고 전쟁의 공포가 끝났다. 겨울이 지나고 점점  해가 길어졌으나 사람들의 불안감과
경계심은 여전했다.
  길가던 사람들이 읽고 있는 고시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주민에게 알림. 해당자에게 1인당 50루불리로 노동 수첩을 교부함. 교부 장소는  아크차브
리스카야 거리(구 총독 거리) 5번지, 137호실, 유라친 시 소비에트 식량과. 노동 수첩을 소지
하지 않은 자, 또는 노동 수첩에 호위 사항을 기재한 자는 전시에 준하여 엄벌에 처함. 노동
수첩을 사용함에 있어서 주의할 사항은 유라친 시 집행위원회 공보 제86호에 상세히 공시되
어 있으며, 137호실에 있는 유라친 시 소비에트 식량과에도 제시되어 있음.
  또 다른 고시문은, 시내에는 충분한 식량의 재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 배급을 방해
하여 식량 사정을 혼란케 하려는 목적으로  부르주와 분자들이 은닉하고 있다고 강조한  다
음,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식량을 매점하여 은닉한 자는 이를 발견하는 즉시 총살에 처할 것임.
셋째 고시문은 다음과 같다.
  식량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착취 계급에 속하지 않은 자는 소비조합에 가입할 것. 상세한
문의는 아크차브리스카야 거리 5번지, 137호실, 유라친 시 소비에트 식량과로.
군관계 고시.
  무기를 인도하지 않는 자, 또는 새로 허가증을 교부받지 않고 휴대하는 자는 법에 의하여
엄벌에 처할 것임. 허가증 교부 장소는 아크차브리스카야 거리 6번지, 63호실, 유라친 시 군
사혁명위원회.

  2
  초췌한 얼굴에 이상한 차림의 사나이가 고시문 앞에 모여 선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다.
오랫동안 세수도 하지 않았는지 얼굴엔 시꺼멓게 때가 끼고,  어깨엔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아직 희어지지는 않았으나 갈색 턱수염에 흰 수염이 섞
여 있었다. 그는 유리 지바고였다. 아마 오는 도중에  빼앗겼는지, 아니면 음식과 바꿔 먹었
는지 슈바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소매가 짧은 얄팍한 낡은 웃옷을 걸치고 있었다.
  배낭 속에는 교외 마을에서 얻어먹다 남은 빵껍질과 조그만 돼지기름 덩어리 한 개가 들
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한 시간 전에 철길을 따라 이 도시로 들어왔으나 너무나 지쳐 있었
기 때문에 거기서 여기까지 오는 데 거의 한 시간은 걸렸다. 그는 자주 걸음을 멈췄으며, 그
때마다 땅바닥에 엎드려 거리의 포석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제했다. 다시는 영
영 못 볼 것으로 체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그립던 사람을 만나기나 하듯 반가웠던 것이
다.
  그는 긴 여행의 반 이상을 길을 따라 걸어왔다. 철길은 어디서나 죽은 듯이 눈 속에 묻혀
있었다. 도처에 백위군의 열차가 내버려져 있었다. 눈더미에 막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기 때
문에, 콜차크군의 전면적인 패배 때문에,  또는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에 하는수없이  포기할
열차들이었다. 이렇게 눈 속에 묻혀버린 열차들은 마치 기다란 리본처럼 수십 리에 걸쳐 잇
따라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주변에 날뛰는 무장 강도단의 거점이 되었고, 그 당시 본의  아
닌 떠돌이 생활을 하던 범법자나 정치범들의 은신처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철도선
주변의 수많은 부락을 무자비하게 휩쓴 티푸스의 희생자들과 동사자들의 공동 묘지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옛 속담에 '사람을 만나면 승냥이로 알라'는 말이 사실이었다. 여행자들은 서로
안전한 장소로 피해버리거나, 어쩌다  맞부딪치면 자기가 살기 위해  먼저 상대방을 죽여야
했다. 때로는 사람의 고기를 먹은 사실도 있었다. 인류 문명의 법칙은 자취를 감추고, 그 대
신 야수의 법칙이 지배하게 되었다. 인간은 유사 이전의 동굴 시대의 꿈을 꾸고 있었다.
  간혹 사람의 그림자가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오거나 멀리 앞의 오솔길을 지나는 것이 보이
면, 지바고는 되도록 조심스럽게 길을 피했다. 그때마다 어디선가 낯익은 사람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착각이었지만, 한 번은  그런 느낌이 적중한 적이 있었다.
완전히 눈 속에 묻힌 침대 열차에서 소년 하나가 기어 나와 소변을 보고 나서 다시  눈더미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 그것이 숲속의 동료였던 체렌치 갈루진인 것을 알았다.  지바
고는 그가 총살을 당해 죽은 줄 알았었다. 그러나 총알이 급소를 벗어나, 일시 실신  상태에
있다가 다시 깨어난 그는 처형장에서 도망쳐 숲 속에 숨어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렸다는 것
이었다. 그 후 그는 딴 이름으로 눈에 묻힌 열차에  숨어들어 사람의 눈을 피하면서 고향인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런 모든 광경은 도저히 이 세상일같이 느껴지지 않는 초월한 인상을 주었다. 마치 지구
이외의 다른 혹성이 어쩌다 잘못해서 지상으로 옮겨온 것처럼  생각되었다. 오직 자연만 여
전히 역사에 충실할 따름이며, 현대 화가가 그리는 그림과 같은 광경이었다.
  때로는 연한 잿빛이나 진분홍빛 겨울 황혼이 조용히 찾아들고,  저녁놀에 물든 하늘을 배
경삼아 상형문자처럼 가느다란 자작나무 가지가 나타나보였다.  잿빛 안개와도 같은 얄팍한
얼음 밑으로 검은 냇물이 흐르고, 흰 눈이 쌓인 냇가는 흐르는 물에 침식되어 검게  보였다.
그리고 지금도 차갑고 투명한 버들가지의 솜털처럼  부드러운 잿빛 황혼이 한두 시간  후면
유라친의 여신상 맞은편 집에도 조용히 깃들일 것이다.
  지바고는 고시문을 읽어보려고 중앙출판위원회  석조 건물 게시판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자꾸만 맞은편 집 2층 창문으로 옮겨졌다. 한길 쪽으로 향한 창문에 회칠을 하
고, 집주인의 가구를 두 방에다 모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창문은 지금 아래쪽에  엷
게 성에가 끼어 있고 회칠이 말끔히 씻겨 떨어져 투명해 보였다. 어쩐 일일까? 집주인이 돌
아왔을까? 아니면 라라는 딴 데로 이사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는 걸까?
  지바고는 끓어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거리를 건너  현관으로 들어가서
낯익은 층계를 올라갔다. 숲속에서 그는 이 층계를 얼마나 그려보았는지 모른다. 난간  사이
로 내려다보면 층계 밑에 버려둔 낡은 물통이며 대야며 찌그러진 의자 따위가 보였는데, 지
금도 그대로였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지바고는 과거에 충실한 이 층계에 감사하고 싶
은 심정이었다.
  전에는 문에 초인종이 달려  있었지만, 지바고가 숲속으로 잡혀가기  전에 이미 고장나서
소리가 나지 않았었다. 그는 문을 노크하려다가 투박한 자물쇠가 걸려 있는 것을 알았다. 자
물쇠는 아름다운 조각이 붙어 있는 참나무  문짝에다 아무렇게나 박은 문고리에 걸려  있었
다. 전 같으면 이런 몰골 사나운 짓은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손잡이 밑에 있는 열쇠 구멍
에 열쇠를 꽂아 잠그거나 걸어놓았으며, 혹시 망가지면 곧 열쇠 장수를 불러서 고치게 했었
다.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이것 하나만 보아도 그가 없는 사이에 주위의 모든 분위기가  얼
마나 거칠어졌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라라와 카첸카가 집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유라친에도 없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바고는 최악의 사태를 각오했다. 어쨌든 전에 열쇠를  숨겨두
던 구명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손끝에 쥐가 닿아  그와 카첸카가 질겁을 하던 일이
가끔 있었기 때문에, 우선 발로 벽을 차면서 쥐를  쫓았다. 구멍은 벽돌장으로 막혀 있었다.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 벽돌장을  뽑아내고 손을 넣어 보았다. 이건  기적이 아닌가!
열쇠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큼직한 종이에 꽤 길게 쓴 편지였다. 지바고는 층계 위  창가에
다가갔다. 기적이라도 이런 기적이 있담!  바로 자기에게 쓴 편지였다. 그는  급히 읽어내려
갔다.
  하나님,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당신이 살아 계시다니,  근방에서 당신을 보았다는 사람
이 나한테 달려와서 알려주었어요. 당신이 우선 바르이키노에 가시리라고 생각해서 전 카첸
카와 함께 그리로 떠납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열쇠를 여기에 넣어 둡니다. 내
가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데도 가지 마시고 여기서 기다려  주어요. 당신은 아직 모르시겠지
만 저는 지금 길가에 있는 방에서 살고 있어요. 물론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되시겠지요.  먹을
것을 좀 놔두고 갑니다. 삶은 감자뿐이예요. 쥐가 모여들 테니 내가 늘 하던 것처럼  다리미
따위를 남비 뚜껑 위에 얹어 놓아두세요. 너무 기뻐서 미칠 것만 같아요.
  편지 앞면은 여기서 끝나 있었다. 지바고는 뒷면에도 무언가 씌어 있는 것엔 미처 주의하
지 않았다. 그는 손에 펼쳐 들었던 종잇장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유심히 보지도 않고
열쇠와 함께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기쁨에 벅차오르는 가슴에 문득  그는 찌르는 듯한 아
픔을 느꼈다. 라라가 바르이키노로 떠나가는 설명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가족
이 이미 거기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기 가족에 생각이 미치자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왜 라라는 나의 가족의 운명에 대해 한 마디도 쓰지  않았을까? 마치 그들이 이 세
상에 없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그들이 어디 있다는 것조차 라라는 쓰지 않다니!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생각에 골똘할 수는 없었다. 한길은  어느덧 어둑어둑 저물기 시작
했다. 캄캄해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첫째로 거리에 나붙은 고시문들을 읽어둘 필요
가 있었다. 바짝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었다. 멋도 모르고 법규 같은 걸  위반하
여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라라의 방에 들어가지도 않고 배낭을 등에 멘 채 한길
을 건너 여러 가지 인쇄물이 가득 나붙어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3
  신문 사설, 의사록, 연설문, 포고문 등이  붙어 있었다. 지바고는 제목들을 대강  훑어보았
다. '유산 계급의 재산 몰수와 과세 기준. 노력 관리. 공장 위원회 운영' 등, 이  도시를 지배
하게 된 새로운 권력이 구질서에  대치하여 선포한 성명들이었다. 백위군이  일시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 주민들이 잊어버렸는지  모르므로, 새로운 권력은 모든  일에 준엄하다는 것을
새삼 강조하기 위한 것 같았다. 동일한 말투의 끝없는 반복에 지바고는 현기증을 느꼈다. 이
런 제목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혁명  초기였던가, 아니면 백위군이 다
소나마 저항을 시도한 중간기 였던가? 저 슬로건은 뭔가? 작년 것인가, 아니면 재작년 것인
가? 그는 일생에 단 한번, 이 타협을 모르는 말투와 단순하고 직선적인 사상에 감격했던 것
이다. 그렇지만 그 경솔한 감격의 대가로,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진부해지고 더욱  무의미해
지는 미치광이 같은 절규와 요구의 반복을 죽을 때까지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시선은 어디서 오려내서 붙인 연설문 조각에 멎었다.
  기아에 관한 보도는 지방의 여러 단체의 활동이 형편없이 침체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다. 부패와 투기가 공공연히 횡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노동조합 단체는 도대체 무
엇을 하고 있는가? 시와 지방  공장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유라친 역 창고나 근교
라즈빌리예 르이발카 역 등을 공습하여 철저히 수색하고 투기배들은 총살형에 처하는 등 준
엄한 테러 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한 기아 상태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무지함이 오히려 부럽구나!'하고 지바고는 생각했다. '빵이란 것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
지가 옛날인데 이제 와서 빵을 운운하다니! 여태까지 수없이 발표된  포고문으로 벌써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춘 자본 계급이니 투기배가 지급 어디 있단 말인가? 농민이나 농촌이라는 것
조차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자기들의 계획과 자기들이 취한
조치로 하나도 남질 않았는데,  그걸 까맣게 잊었단 말인가!  날이면 날마다 핏대를 세워서
이미 옛날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들을 비난하고 공격할 뿐,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고
주위를 유심히 관찰하려 하지도 않는 건 대체 무슨 까닭일까?'
  지바고는 머리에 현기증을 느꼈다. 순간, 그는 정신을 잃고 인도에 쓰러져버렸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어디로 가려느냐, 데려다 주마고 친절을  베풀
려는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바로 길 건너편이니 염려할 것 없다고 거절했다.

  4
  그는 다시 층계를 올라가서 이번엔 라라의 방문을 열었다. 층계 위는 아직도 밝았다. 그는
시간의 여유가 있음을 알고 안심했다. 문 열리는 소리에 놀라 방안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방이었지만 양철통이 뒤집히고 떨어지기도 하면서 요란한 소음이  그
를 맞아들였다. 쥐들이 후닥닥 방바닥에  내려와 재빨리 흩어졌다. 굉장히 번식한  모양이었
다. 이 저주할 생물을 대하자 지바고는 말할 수 없이 불쾌한 무력감을 느꼈다.
  여기서 밤을 지내려면 무엇보다 쥐들의 습격을 막아야 했다.  문단속이 비교적 잘되는 방
에 자리를 잡고 유리 조각이나 양철 조각 따위로 쥐구멍을 죄다 막아버려야 겠다.
  문간방에서 왼쪽으로 구부러져 처음 보는 어두운 방을 지나 한길 쪽으로 창문이 두 개나  
있는 밝은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 맞은편에는 여신상이 있는 건물이 짙은 잿빛으로  보이고,
1층 벽에는 신문이며 공고문 따위가 가득 붙어 있었다.  통행인들이 이쪽에 등을 대고 그것
들을 읽고 있었다.
  방안은 바깥과 같이 싱싱하고 상쾌한 초봄의 저녁 빛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방안
은 바깥의 일부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사소한 차이점이 있었다. 지금 지바
고가 서 있는 라라의 침실은 바깥 쿠페체스카야 거리보다 오히려 추운 편이었다.
  아까 한두 시간 전에, 멀고 먼 여행 끝에 마침내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지바고는
체력이 극도로 쇠잔해졌음을 느꼈다. 그때 그는 병에 걸리는구나 싶어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 그는 집안과 바깥의 빛깔이  같다는 것이 까닭 없이 기뻤다.  그리고 밖에서와 같이
서늘한 공기를 숨쉬면서 그의 마음은 황혼의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과 거리의 기분과 그
리고 이 세상의 생활과 따뜻하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공포가 사라지고, 이젠 병에  걸린다는
생각도 없어졌다. 도처에 스며 있는 황혼의 해맑은 봄빛이 먼 앞날의 풍성한 꿈을 약속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차츰 나아질 것이며, 따라서 자기는 인생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획득
하리라, 모든 것을 찾아내어 융화시키고,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확신했다.
사실 그가 지금 라라와 만나게 된다는 기쁨이 그 첫 증명일 수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의 무력감은 씻은 듯 사라지고 그는 격렬한 흥분에  휩싸였다. 그것은 병이 들고
있다는 확실한 징후였다. 지바고는 가만 있지를 못하고 무엇이든  구실을 찾아 밖으로 뛰어
나가고 싶었다.
  우선 머리와 수염을 깎고 싶었다. 그래서 아까 거리를 지나올 때 이발소 창문을 기웃거렸
으나, 안이 비어 있거나 아니면 딴 용도에 사용되고 있었다.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는  이발
소도 있기는 했지만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지바고 자신은 면도칼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가
위라도 있었으면 어떻게도 할 수 있겠지만, 라라의 화장대를 뒤져 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꽤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말라야 스파스카야 거리에 양장점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아직
도 그 가게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문을 닫기 전에 가서 가위를 좀 얻어 쓸 수도 있을  것이
다. 그는 다시 한길로 나왔다.

  5
  그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양장점은 전에 없던 그 자리에서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 입구는 거리에 면하고 인도와 같은 높이로 유리 진열장이 가게 전면을 차지하고 있어서
안을 들여다보면 재봉실 안쪽 벽까지 훤히 보였다. 재봉사들이  일하는 것이 거리를 지나가
면서 다 보였다.
  가게 안은 무척 비좁은 것  같았다. 재봉사 이외에도 시내의 중년  귀부인인 듯한 여자들
몇 사람이 재봉틀을 밟고 있었다. 아마도 여신상이 있는 집  벽에 게시된 고시문에 따라 노
동 수첩을 교부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 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어색한 동작은 진짜 재봉사들의 능숙한 동작에 비하면 이내 구분할 수 있었다. 가
게에서는 군복과 솜 누비 바지, 누비  자켓, 그리고 지바고가 빨치산 야영지에서 눈에  익은
여러 가지 개털 가죽 외투 등을 만들고 있었다. 중년 부인들이 서투른 솜씨로 외투 소매 끝
을 재봉 바늘 밑에 쑤셔넣고 있는 것이 보였다. 털가죽 재단사만이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을
맡아 하느라고 쩔쩔매고 있는 눈치였다.
  지바고는 진열장 유리를 툭툭 두드려  들어가게 해달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안에서는,
개인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손짓으로  대답했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손짓을 되풀이하자, 지금 일이 몹시 바쁘니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라고 대답했다. 재봉사 하
나가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고 귀찮다는 듯이 손바닥을 위로  쳐들며, 도대체 무슨 용무냐고
물었다. 지바고는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으로 가위질하는 시늉을 해 보였으나 상대방은
알아듣지를 못했다. 공연히 장난삼아 자기들을 놀리는 싱거운 놈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누
더기옷을 걸치고 괴상한 시늉을 하는 것으로  보아 필시 미치광이나 환자의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여자들은 킥킥 웃으면서 손짓으로 그를 쫓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그는  뒷문으로
돌아가면 되리라 생각하고, 작업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아서 노크했다.

  6
  검은 옷차림에 얼굴이 가무스름하고 나이 지긋한 여자가 문을 열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보아 아마 가게 책임자인 것 같았다.
  "난 또 누구라구!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요! 저리 가요, 지금 우린 바쁘단 말이오."
  "다름 아니라 가위를 잠깐 빌릴까 해서 그럽니다. 여기서 이 수염을 좀 자르고 곧 되돌려
드리겠어요."
  여인의 눈에는 놀라는 빛을 나타냈다. 틀림없는 정신병자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난 먼데서 온 사람입니다. 방금 도착했어요. 수염을 깎으려고 했는데 어디 이발소가 있어
야죠. 그래서 내 손으로 자르려 했으나 가위가 없어요. 미안하지만 좀 빌려주십시오."
  "알았어요. 그렇다면 내가 깎아드리죠. 두고보아요, 만일 무슨 고약한 딴생각이나 무슨 정
치적 이유로 변장을 하려는 속셈이라면 당장 당국에 보고할  테니 그리아세요. 당신 때문에
내 목숨을 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천만의 말씀!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재봉사는 지바고를 들어오게 하여 다락방만한  좁은 옆방으로 안내했다. 얼마  후에 그는
이발소에서처럼 흰 수건으로 목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인이 방에서 나가더니 잠시 후에 가위와 빗, 바리캉과 혁대, 면도칼 등을 가지고 돌아왔
다. 이발 기구가 다 갖추어진 것을 보고 지바고가 놀라자,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난 일생 동안 안 해본 일이 없답니다. 이발사 노릇도 했어요. 전시에 간호원으로 있을 때
배웠죠. 우선 수염을 가위로 대강 자른 후 면도합시다."
  "머리는 좀 짧게 깎아주십시오.'
  "그러죠. 일부러 그렇게 무식한 체해도 당신이 인텔리라는 건 금방 알아낼 수  있어요. 요
즘은 날짜를 주 단위로 세지 않고 10일 단위로 센다는 걸 모르실  리 없을 텐데. 오늘은 17
일이죠? 제7일은 이발소의 정기 휴일로 되어 있어요. 그걸 모르셨군요."
  "그래요, 정말 몰랐습니다. 무엇 때문에 알면서 모르는 체하겠어요? 난 먼  곳에서 왔다고
하잖았습니까? 이 고장 사람이 아니예요."
  "가만히 좀 앉아 계세요. 움직이면 다치기 쉬우니까. 그럼 여행중이란 말씀인가요? 무엇을
타고 오셨죠?"
  "두 발로 걸어서요?"
  "국도를 걸어오셨나요?"
  "국도를 걷기도 했지만 주로 철길을 따라 걸어왔습니다. 기차는  죄다 눈 속에 파묻혀 있
었지요. 특급, 급행 할것없이 모든 열차가 말이오."
  "자, 이젠 이쪽에 조금 남았을  뿐입니다. 이것만 깎아버리면 다  끝나요. 그럼 집안 일로
여행을 하시는 건가요?"
  "천만에! 예전의 신용조합연합회 일 때문입니다. 난 순회 검사원이었어요. 회계 감사를 하
면서 순회중이었지요. 동부 시베리아까지 출장을 갔었는데 되돌아올 수 있어야죠. 기차가 없
으니 하는수없이 도보로 떠났습니다. 한 달 반이나 걸어왔어요.  별별 고생을 다 해서, 죽을
때까지 얘기해도 다 못할 겁니다."
  "그런 얘긴 안 하는 게 좋아요. 여러 가지 가르쳐드려야겠군요. 이젠 거울을  한번 비춰보
세요. 그만하면 됐나요?"
  "좀더 짧게 깎으면 좋을 것 같은데."
  "너무 짧게 깎으면 앞머리가 곤두서요. 하여튼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지
금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죠. 신용조합이니,  눈에 묻힌 특급 열차니, 검
사원이니 감사원이니 하는 따위의 말은 아주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 그것들이 당신을 곤경
에 빠뜨릴 겁니다. 그런 말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니까요. 의사나  선생이 무난할 거예요.
자, 턱수염을 대강 잘랐으니 이젠 깨끗이 면도해 볼까요? 비누칠을 하고 면도하면 10년쯤은
젊어질 거예요. 더운 물을 가져 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 여인은 대체 누굴까?' 그녀가 나가고 없는 사이에 지바고는 생각했다. '어쩐지 아주 낯
선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어디서 만났던가 아니면 누구한테서 얘기를 들었는
지 모르겠군. 그렇잖으면 내가 아는 누굴 닮았든지, 제기랄,  생각이 날듯 날듯 하면서 나지
않는군!'
  재봉사가 돌아왔다.
  "그럼 이젠 면도를 합시다. 잘 알아들으셨죠. 쓸데없는  얘긴 금물이예요. 말은 은이고 침
묵은 황금이라는 속담은 언제나 진리거든요. 특급 열차니, 신용조합이니 하는 말은 집어치우
고 의사나 선생 행세를 하세요. 여행중에 본 것은 가슴 속에 깊이 숨겨두는 게 제일이죠. 그
런 얘기는 아무도 놀라지 않을 테니까. 어때요, 아프지 않아요.?"
  "좀 아프군요."
  "그럴테죠. 하지만 참는 수밖에 없어요. 수염이  자라서 빳빳한데다 피부가 약해졌으니까.
사실 요즘은 웬만한 일엔 아무도 놀라지 않는답니다. 이 고장 사람들도 별의별 참혹한 일을
다 당했거든요. 백위군이 들어와 설치고 있을 땐 그야말로 지옥이었죠. 약탈, 살인, 유괴, 게
다가 인간 사냥까지 했으니까. 예를 들면, 안하무인격으로 으스대던 말단 관리 하나가  있었
는데 어떤 소위가 자기 비위에 거슬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관리는 크라블리스끼 저택 건
너의 자고르드나야 숲에다 별정들을 매복시켜서 소위를 잡아 무기를 빼앗은 다음에  라즈빌
리예로 끌고 가지 않았겠어요. 라즈빌리예에는 요즘 체까 지부가  있지만 그때도 역시 백위
군의 처형장이 있었어요. 무시무시한 곳이었죠. 왜 머리를 움직거리죠? 아픈가요?  아플거예
요. 하지만 곧 끝날 테니 조금만 더 참고 계셔요.  여기는 털을 완전히 깎아야 하니까. 게다
가 털이 너무 뻣뻣해요. 그래서 소위의 마누라가 미친 듯이 발악을 했죠 내 남편 콜랴가 대
체 어쨌다는 거냐고 악을 쓰며  높은 양반한테 바로 진정하러 갔어요.  하지만 바로 만나게
할 리가 있나요. 말뿐이지, 경계가 이만저만 심해야죠. 그런데 바로 이웃 거리에 그 높은 양
반을 잘 아는 여자가 있었어요. 그 여자가 힘을 서서 사람을 많이 구해냈답니다. 게다가  높
은 양반 역시 아주 인정이 많은 사람이어서 부탁만 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어요. 갈리울
린 장군이라던가요. 하지만 주위에서는 린치, 폭행, 중상 모략이 그치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스페인 소설과 똑같았지요."
  라라 얘길 하고 있구나 하고 의사는 추측이 갔으나,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좀더 자세
히 물어보지를 못하고 그냥 듣고만 있었다. 여인이 '스페인  소설과 똑같았다'고 한 말이 너
무나 심한 비유여서, 그 순간 여인의 정체를 거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끝내 실마리
가 풀리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얘기가 다르죠. 수색이나 밀고나 총살 같은 건 여전해요.
하지만 사상이 전혀 다르거든요. 첫째는 새 정권이라는 겁니다. 이제 겨우 정치라는 걸 시작
했을 뿐이니까 능숙하지가 못해요. 둘째로는  무엇보다도 평민의 편이라는 데 힘이  있어요.
우리는 네 자매랍니다. 그런데 모두가 근로자예요. 우린 자연적으로 볼셰비키에 기울었어요.
언니 하나는 돌아가셨지만, 정치를 하는 분한테 시집갔어요. 형부는 이곳 공장의 지배인으로
있었어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나한테는 조카가 되지만, 이 지방 농촌 봉기자들의 두목이
랍니다. 지방의 명사라 할 수 있어요."
  '아, 이제야 알겠군 .' 지바고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베리의 이모로구나. 미쿨
리츠인의 처제로서 이 고장에서는 유명한 여자였다. 이발사건 재봉사건 레일 전철수건, 무슨
일이건 닥치는 대로 다 해내는 여자였다. 하지만 내 정체가 폭로되면 곤란하니 잠자코 있는
게 좋겠군.'
  "조카는 어려서부터 민중에 무척 관심이 있었답니다. 스바토고르에서는 노동자 속에서 자
랐거든요. 바르이키노 공장에 대해선 들은 일이 있겠죠? 아니, 내가 이거 정신 나갔나! 한쪽
볼은 빤빤하게 깎았는데 이쪽은 그냥  남겨두었군.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죠? 비누가 다
말라버렸군요. 물도 식어버렸으니 다시 데워 오겠어요."
  그녀가 되돌아오자 지바고는 물어 보았다.
  "바르이키노라는 곳은 외따로 떨어진 안전한 장소 아닙니까? 이 소동도  거기까지는 미치
지 않겠지요?"
  "그다지 안전하지도 않았나 봐요. 여기보다 오히려 더했다고들 했어요. 정체  불명의 비적
단이 바르이키노를 휩쓸고 지나갔는데, 우리말을 못하는 놈들이었대요. 그놈들이 글쎄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거리에 끌어내다가 총살했다지 않겠어요. 그러고는 시체를 눈 속에 내버랬
대요. 겨울에 있었던 일이예요. 왜 이렇게 움직이지요? 하마터면 목을 벨 뻔했어요."
  "당신 형부가 바르이키노에 살고 있다고 했지요? 그분도 역시 변을 당했나요?"
  "아뇨.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분은 부인과 함께  도망칠 수 있었어요. 부인은 저의  언니가
아니고, 후취로 들어온 여자예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죽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요, 모
스크바에서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벌써 비적단이 쳐들어기도 전에 떠나고
말았어요. 그 집 가장인 젊은 의사는  행방 불명이 되었지만, 그건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지, 실제로는 죽었을 거예요. 백방으로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그때 노인
분은 나라에서 필요해서 소환해 갔어요. 농학 교수라나 봐요. 그 가족이 가는 길에 유라친에
들렀었는데, 그때가 바로 백위군이 두 번째로 이곳에 들어오기  전이었지요. 아니, 왜 또 그
렇게 꼼지락거리죠? 그러다간 정말 베겠어요. 당신 겉은 사람을 만나선 이발사도 못해 먹겠
군요."
  '그러다면 그들은 모스크바로 되돌아갔군!'

  7
  '모스크바에 갔군! 모스크바로.' 지바고는 세번째로 주철 층계를 오르며 한 걸음마다 마음
속으로 외쳤다. 라라의 텅 빈 방에 들어가니 이번에도 쥐들이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이  추
악한 생물을 그냥 내버려두고는 단 1분도  는을 붙일 수 없을 것이  뻔했다. 그는 잠자리를
준비하면서 쥐구멍을 막기 시작했다. 다른 방들은 방바닥과 벽 자체가 손을 댈 수도 없었으
나, 다행히 침실만은 그다지 심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서둘러야 했다. 밤이 가까워졌다. 그가
찾아올 것을 예기했던지, 석유 램프가 부엌 식탁에 옮겨져 있고  그 옆에 성냥 여남은 개비
가 든 통이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하지만 석유나 성냥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침실에
는 그 밖에도 심지가 놓인 작은 등잔 접시가 있었으나, 여기엔 석유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이었다. 아마도 지가 핥아 먹은 듯했다.
  굽돌이 판자가 마룻바닥에서 떨어져 뻐끔이 입을 벌리고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지바
고는 유리조각을 겹쳐, 뾰족한 쪽이 안을  향하게 하여 틈새를 막아싿. 침실 문에는  틈새가
없었다. 잘 닫기만 하면 쥐구멍토성이인 다른 방들과 결리시킬 수 있었다. 지바고는 한 시간
남짓 걸려 작업을 끝냈다.
  침실 한쪽 구석에 타일을 붙인 페치카가 있었다. 부엌에는 장작이  열 단 가량 남아 있었
다. 지바고는 두어 아름 안아서  침실로 날라다가 페치카 옆에  놓고, 페치가를 설펴보았다.
침실 문을 잠그고 싶었으나 쇠걸이가 망가져서, 우선 문틈에 종이를 꽉 끼워서 열기 어렵게
하고 나서 천천히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궁이에 장작을 겹쳐 넣다가 그는 문득 장작의  잘린 부분에 'K.D.'라는 낙인 흔적이 있
는 것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그것은 어느 창고에서 출하(出荷)한 것이가를 표시하기 위해
찍은 낙인이었다. 전에 크류게르 소유인 바르이키노의  쿨라브이셰프스크 숲에서 벌목한 목
재에 'K.D.'라는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라라의 집에 이런 장작이 있다는 것은 삼제바토프가 그녀의 생활을 돌봐주고 있다는 것이
다. 한때 그는 지바고네한테 필요한 모든 물건은 공급해주었는데, 지금은 라라한테 그런  도
움을 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지바고는 가슴에 칼을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전에 지바고는 삼제바토프의 원조에 무거운 부담감을 느꼈으나 지금은 거기에다 좀
더 복잡한 감정이 얽혀 드는 것이었다.
  라라의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삼제바토프의 활달한 언동과  라라
의 대담한 성격을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페치카에서 장작이 활활 타오를수록 지바고의 걷잡을 수 없는 질투는 한낱  추측으로부터
움직일 수 없는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의 가슴은 온갖 고뇌로 갈갈이 찢기는 듯했으며, 하나의 고통은 또 다른 고통을 불러일
으켰다. 그는 라라의 신상에 관한 의혹을 끝내 물리쳐 버릴 수는 없었으나, 그의 상념은  저
절로 다른 더ㅔ로 옮겨져 다시금 압도적인 힘으로 엄습하는 자기 가족에 대한 생각이, 질투
에서 오는 환상을 한때나마 밀어낼 수 있었다.
  '그래 우리 가족은 지금 모스크바에 있단 말이지?' 지바고는 그들이 무사히 모스크베에 도
착했다는 것을 재봉사가 보증이라고 했듯이 느꼈다. '이번엔 나도 없었는데 그 머나먼  어려
운 여행을 했겠지. 모스크바까지 어떻게 갔을까? 장인이 초빙되었다는  건 무슨 말일까? 대
학에서 다시 강의를 맡아달라는  걸까? 모스크바의 우리  집은 어찌되었을까?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을까? 아아, 가슴이 답답하구나! 괴로워. 생각하지 말아야지. 머리 속이 온톤 뒤집히
는 것 같군. 내가 왜 이럴까, 토냐? 아무래도 병에 걸린 것만 같군. 토냐, 우린  앞으로 어떻
게 될까? 나는 어찌 될 것이며 당신과 싸샤, 그리고  장인은 어떻게 될까? 오오, 주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내 사랑하는  가족을 영영 내 곁에서 떼어버려야 합니까?
그러냐 토냐, 우린 곧 다시 만나서 함께  살게 될 거야. 나는 걸어서라도 당신한테 갈  테니
까! 우린 꼭 만날 수 있어요. 우린 다시 만나서 행복하게 살게 될 거야!
  그보다도 토냐는 그때 임신한 몸이었으니  그 사이에 아이를 낳았겠지.  그런데도 언제나
그걸 잊고 있는 이놈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이야. 내가  그걸 잊고 있는것은 이것이 처음
은 아니었어. 해산은 어떻게 했을까? 모스크바로  떠날 때 그들은 유라친에 들렀다고  했다.
물론 라라는 그들과 안면이 없지만, 아까 그 재봉사처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그
들의 소식을 알고 있는데, 하물며 라라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을까? 그런데도 편지에
우리 가족 얘기는 한 마디도 쓰지 않은  건 대체 무슨 까닭일까? 그토록 무관심힐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삼제바토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건 수상한 일이 아닌가.'
  지바고는 새삼스럽게 침실 벽을 차근차근 둘러 보았다. 방안에 놓인 물건 중에 라란의 것
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어디론가 피신해버린 이 집  주인의 가구는 라라의 취미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취미 없는 가구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적의를 품고 지바고를 압박했다. 그는 마치 남의 침
실에 들어온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데 나는 어리석게도 이 집을 항상 생각하며 그리워했고, 라라에 대한 사랑 속에 몸을
내맡기는 심정으로 이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제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얼마나 우스
꽝스러운 일이냐. 나는 삼제바토프처럼 수와과 세력과 외모를 고루 갖춘 사람과는 근본적으
로 다르다. 나같이 아무런 장점도 없는 사내를 라라가 좋아할 리도 없거니와, 꿈 같은  비현
실적인 나의 찬사가 그녀의 마음을 끌  수도 업을 게 아닌가! 내가 가슴  속에 그리고 있는
그런 여자가 되기를 라라 자신이 원할리도 없는 것이다.
  내가 가슴속에 그리는 라라는 대체 어떤 여인일까? 오오, 그거라면 언제든디 서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저 뜰안에 내리깔린 봄날의 저녁.  대기는 여러 가지 음향으로 가득차 있다.  철업이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온다. 마치 끝없는  공간이 생기에 넘쳐 있
듯이. 그리고 이 광활한 공간이 바로 러시아인 것이다! 바다 너머 멀리  그 이름을 떨친, 비
할 데 없이 위대한 어머니 나라 러시아! 파멸의 모험도 서슴지 않고 고난의 길을 꿋꿋이 전
진하는, 미치광이처럼 대담한 러시아! 아아, 생존하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 세
상에 삶을 누르고 그 삶을 사랑하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 삶에, 그 존재에 감사를
드리고 싶구나.
  바로 이것이 라라인 것이다. 삶과 존재 그 자체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라라는  삶과
존재의 대표자이며 그 표현이며, 그녀를 통해 소리 없는 존재는 청각과 언어를 부여받은 것
이다.
  한 순간이라고 라라를 의심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야말로 흠잡
을 데 없이 완벽한 존재인 것이다!'
  회오와 환희의 눈믈이 솟구쳤다. 지바고는 아궁이 뚜껑을 열고, 잘 타고 있는 장작을 안쪽
으로 밀어넣고, 안쪽에 있는 장작을 바람이  잘 통하는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아궁이 뚜껑을 열고 손은 불에다 쬐었다. 너풀거리는 불길이  그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했
다. 그러자 라라를 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솟구쳐올랐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라라의 구겨진 편지를 꺼냈다. 아까는 한쪽 면만을 읽었으나, 지금  보
니 뒷면에도 무언가 씌여 있었다. 종이의 주름을 펴서 페치카 불빛에 대고 읽었다.
  "당신 가족 소식은 알고 계시는지? 그분들은 지금 모스크바에 가 있어요. 토냐는 딸을 낳
았답니다." 그 다음의 몇 줄은 지워져 있었다. "여기다 쓰기가 어색해서 지워버렸습니다. 만
나서 말씀드리겠어요. 서둘러 말을 구해야겠습니다. 말을 구하지 못하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
겠군요. 말이 없으면 카첸카를 데리고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뒤의 몇 마디는 잉크가
번져서 읽을 수가 없었다.
  '삼제바토프한테 말을 얻으러 갔겠지. 바르이키노로 떠난 걸 보면 말을 얻은 모양이군.' 지
바고는 침착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조금이라고 양심에 걸리는 데가 있다면 이렇게 자세하게
쓰지 못할 게 아닌가.'

  8
  페치카가 달아오르고 방안이 따뜻해지자 지바고는 연통 마개를 막고  좀 요기를 햇다. 식
사를 하고 나니 몸이 나른해지며 졸음이 와서 옷도 벗지 않고 그냥 소파에 누워 깊이  잠들
어버렸다. 방문 밖과 벽 뒤에서 설치는 쥐들의 시끄러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불쾌한 꿈을 두 번이나 계속해서 꾸었다-그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방 유리문에 자물쇠를 잠
그고, 그러고도 열리지 않도록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외투를  입고 수병(水兵)
모자를 쓴 귀여운 그의 아들 싸샤가 안에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울면서 애원하고 있
었다. 싸샤의 등뒤에서 쫙쫙 물이 쏟아져 내려와 아이와 유리문에 물방울을 튀기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흔히 수도관이 터지거나, 아니면 쓸쓸하고 좁다란 골짜기의 험로가 유리문으로
차단되어 계곡을 흐르던 시냇물이 유리문을 두드리는 일이 있는데, 마치 그것과 같았다.
  무서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는 물에 아이는 겁을 집어먹고 새파랗게 질려 비명을 지
르고 있지만, 물소리 때문에 들을 수가 없었다. 이 모양이 마치 "아빠! 아빠!"하고 부르는 듯
했다.
  지바고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이를 덥썩 가슴에 안고 어디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
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전히 유리문의 손잡이를 힘껏  붙잡아 당기고 있었다. 그
는 아이를 구해 낼 수가 없었다. 이제 곧 자기 등뒤에 나타날, 아이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
성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아이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었다.
  지바고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열이 대단하구나. 앓아
눕게 될 모양이군'하고 생각했다. '티푸스는 아니지만, 무겁고 심한 증세가 있는 일조으이 피
로라고 할까, 하여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병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죽느냐 사느냐로 결판이
나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졸음이 올까!' 그는 다시 잠들어 버렸다.
  어두운 겨울 아침 무렵이었다. 모스크바와 같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거리에 첫전차가 종
을 울리며 달리고, 인도의 잿빛 눈 위에 가로등 불빛이 노란 무늬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
아 필시 혁명 전인 것 같았다.
  한쪽에 창문이 많고 낮고 길죽한 2층집. 집 안에는 여행자같이 옷을 입은 채 저마다 여러
가지 자세로 누워 잠자고 있었다. 흡사 야간 열차 속처럼 무질서했다. 그겨진 신문에 뭉쳐놓
은 먹다 남은 음식, 튀김닭의 뼈다귀며 날갯죽지 따위가 흩어져 있었다.
  며칠 동안 다니러 온 친척들과 친지들, 그리고 떠돌이들이  벗어놓은 발이 한줄로 나란
히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가운 허리띠를 아무렇게나 맨 이  집 주부인 라라가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소리없이 재빨리 오가면서 손님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그 뒤를 침울한 얼굴로
그가 쫓아다니면서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라라는 그를 상대할 겨를이 없어서, 이따금 그에게 얼굴을  돌려 차분하면서도 의혹의 시
선을 던지기도 하고 방울을 굴리득 그 독특한 웃음 소리가 그의 말에 대답하고 있을 뿐이었
다.
  이것이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남은 유일한 친근감이었다. 항상 거기를 느끼며,  차가우면서
도 강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여성이었다. 이 여성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모든 것
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9
  그 자신이 아니라 무언가 좀더 넓은 것이 어둠 속에  빛나는 인광(燐光)처럼 밝고 부드러
운 말을 속삭이면서, 그의 마음속에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리고 흐느끼는 그의 영혼과 함
께 그 자신도 울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가엾게 여겨졌다.
  고열에서 오는 실신 상태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는 이따금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병에 걸
린 것이 틀림없어. 이건 의학 책에는 없는, 대학에서 배우지 않았던 티푸스의 일종인 것  같
았다. 뭘 좀 먹지 않으면 굶어 죽을지 모른다.' 그는 생각했다.
  팔꿈치를 세우고 몸을 일으켜 보려다가 꼼짝 못할 만큼 힘이 빠진 것을 깨닫고 다시 잠들
어버리곤 했다. 잠이 든 것이 아니라 실신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런 생각도 했다.
  '옷을 입은 채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누워 있었을까? 몇  시간 동안이나? 아니면
며칠간이나? 누웠을 때는 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성에가 창문에 가득 끼어 있다.  방안이
컴컴해지도록 더렵혀졌다.'
  부엌에서 쥐 떼가 접시를 뒤엎고 벽에 기어올랐다가는 쿵하고 뛰어내리기도 하고  불쾌한
울음소리를 내기도 하면서 소란을 떨고 있었다.
  다시금 그는 잠들었으나, 얼마 후 눈을 떠 보니 성에가 하얗게 끼었던 창문은 수정(水晶)
술잔에 따른 포도즈 같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것이 새벽놀일까, 아니면  저녁놀일
까?
  바로 옆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다. 이젠 아주 미쳐버린 게 아닐까, 그는  절
망했다. 자기 자신이 가엾어 눈물을 흘리며,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하늘을 향해 소리없이 호
소했다.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쩌질 줄  모르는 영원한 빛이여! 어찌하여 나를 저주스러운
어둠 속에 떨어뜨리시나이까!'
  문득 그는, 옷을 벗고 깨끗이 몸을 씩고 깨끗한 셔츠를  입고 소퍼가 아닌 산뜻한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누군가 침대 옆에 붙어 앉아서, 그의 머리
에 자기의 머리가 엉킬 듯이 가까이 얼굴을 대고, 그의  눈물에 자기의 눈믈을 뒤섞으면 그
와 함께 울고 있는 라라가 있었다. 그는 행복한 나머지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10
  조금 전까지 그는 무심한 하늘을 원망했드나, 지금 하늘은 끝없이 넓은 아량으로 그를 포
옹하려는 듯 침대 위로, 어깨까지 여인의 흰 두 팔을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그는 눈앞이 캄
캄할이만큼 기쁨에 넘쳐 의식을 잃듯 깊은 행복감에 빠져버렸다.
  그는 일생 동안 뭔가 쉴새없이 활동해 왔었다. 가정을 보살피고, 환자를 치료하고, 사색하
고, 연구하고 글을 썼다. 그러니까 지금은 일하며 애쓰고  생각하기를 멈추고, 얼마 동안 이
러한 노고를 죄다 자연에 맡기고,  자애롭고 아름다운 저연의 품에 안겨  그 관심의 대상이
되고 그 창조물이 된다는 것이 더없이 편했다.
  지바고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라라는 먹을 것을 비롯하여 온갖 시중을 자
상하게 들어주었다. 백조같이 우아하고 청결한 그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도 대
답하면서 쉴새없이 간호했다.
  그들의 소곤거리는 대화는 아무리 평범한 화제라도 플라톤의 대화처럼 심오한 뜻을  가졌
다. 그들은 서로 마음이 통해서라기보다는 고난의 세계에서 공통점을 찾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둘 다 현대인의 전형적인 유형(類型)을 싫어했다. 판에 박은 듯 진부한 감탄사, 떠득썩
하고 공허한 열광, 그리고 우수한 과학자와 예술가들이 열심히  퍼드리고 있는 지독한 상상
력의 결여-그 때문에 참으로 천분을 지닌 사람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그 몸서리치는 풍
조에 반발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애정은 위대한 것이었다.  누구나 애정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허구(虛構)의
감정이란 것을 모르고 있다.
  두 사람에게는-그들이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것은-영원한  입김과 같은 정열의 입김이 파
멸에 처한 인간 존재에 찾아드는 순간이야말로, 그들 자신과 생명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
하고 인식하는 것이었다.

  11
  "당신은 가족을 찾아가셔야 해요. 난 단  하루도 더 당신을 붙잡지는 않겠어요.  그렇지만
주위의 사정을 살펴보세요. 이 고장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편입되더 그날부터 우린 허물어져
갔어요. 지금 소비에트 러시아는 동부 지방과 시베리아로 뚫어진 구멍을 막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전혀 모르실 거예요. 앓고 계시는  동안 이 고장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요.  이곳
창고에 비축했던 식량은 중앙으로, 모스크바로 죄다 실어가고 있어요. 그래 봐야 밑 빠진 독
에 물 붓기지만. 이젠 이 고장사람들이 굶을 판이예요. 우편도 안 되고 여객 열차도  없어지
고, 곡식을 운반하는 화물 열차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예요. 이 도시는 다시 가이다  반란
전과 똑같이 술렁이고 있어서 불온한 공기에 대한 보복이 있을 거예요.
  이런 판국에 당신처럼 지쳐서 뼈와 가죽만 남은 사람이 대체 어딜 가시겠다는 거예요? 걸
어서 가시겠어요? 안 돼요, 갈 수도 없어요!  우선 건강을 회복하고 힘을 기르고 나서 가세
요.
  당신한테 충고드리는 건 아니지만, 만약에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가족한테 돌아갈 때까지
일이라고 좀 해보겠어요. 물론 전문적인 분야에서 말이예요. 실력을 인전받게 될 거예요. 내
가 당신이라면 지방 보건부 같은  데 나가겠어요. 전에 의사회가 있던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더군요.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자살한 시베리아 백만장자의 아들이고, 부인은 이 지방의 큰 공장주
이며 대지주였던 사람의 외손녀, 게다가  당신 자신은 빨치산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예요.
아무리 변명해도 군사 혁명 대열에서 이탈한, 아니 탈주한 혐의는 벗지 못해요. 그러니까 당
신은 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처럼 물러나 있어서는 안 돼요.  나의 경우도 역시 탄탄하진
못해요. 그래서 난 지방 교육부에 나가 일하겠어요. 나도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나  다
름없으니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스트렐리니코프 때문이가?"
  "네, 그리 때문이에요. 그 사람한테는 적이 많다는  얘긴 들었지요. 적위군이 일단 승리하
고, 비당원인 군인으로 수뇌에 가가운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모가
지예요. 그야말로 도끼 신세를 져야 할 사람이예요. 그는 생병의 위협을 느끼고 극동 지방으
로 도주하여 은신하고 있는 거예요. 풀포기를 들춰가며 그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는군요. 하지만 그이 애긴 그만둡시다. 난 울고 싶진 않아요. 그이 얘기를 더 하다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요."
  "사랑하고 있었군, 여태까지 줄곧 구 사람을 사랑하고있었나 보군?"
  "난 그와 결혼한 사이예요. 그는 내 남편이예요, 유라. 고상하고 깨끗한 성품을 가진 사람
이예요. 그이한테 난 죄가 많아요. 그렇다고 내가 그이한테 무슨 나쁜 짓을 했다는 뜻은  결
코 아니예요. 하지만 그이는 아주 큰 포부를 가진 참으로 정직한 사람인데, 나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못난 인간의 쓰레기거든요. 그래서 난 죄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이 얘긴  그만
둡시다. 언제든 또 기회를 보아서 꼭 말씀드리죠. 당신 부인은 참 멋진 분이예요. 마치 보티
첼리의 화폭의 여인처럼. 토냐가 해산할 때 내가 돌봐주었어요. 둘이 아주 친해졌답니다. 하
지만 이 얘기도 다음 기회로 미룹시다. 그보다도 우리 함게 나가서 일하기로 해요, 맞벌이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만 하면 한 달에 몇 십억 루불리(극도의 인플레 때문에 화폐 가치가 없
었음)의 월급을 받을 수 있어요. 이 지방에선 얼마 전까지도 시베리아 지폐가 통용되었는데
최근에 폐지됐어요. 당신이 앓고 있는 동안에 나는 그야말로 무일픈이었답니다. 정말이예요.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었어요. 이번에 화물 열차에 지폐를 가득 싣고  왔더더군요.
화차로 40향이나 된다는 거예요.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인쇄된 지폐는  우표처럼 한 장식 떼
어 내게 되었어요. 푸른것은 5백만 루불리, 붉은 것은 1천만 루불리예요. 인쇄가 엉성한데다
가 빛깔까지 바래서 돈 같지도 않아요."
  "나도 본 젓은 있어요. 우리가 모스크바를 떠나기 직전에 통용되기 시작했지."

  12
  "바르이키노에선 왜 그렇게 오래 있었소? 아무도 없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소?"
  "카첸카와 함께 당신이 살던 집을 정리했어요. 당신이 우선 그리로 오실 것  같았어요. 당
신 집이 그런 꼴이 된 걸 당신한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어떻게 됐는데? 엉망진창이었던가 보지?"
  "형편없었어요. 더러워서 청소를 했어요."
  "말하고 싶지가 않은가 보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니오? 좋아요, 캐묻지는 않겠어. 그
보다도 토냐 얘길 해주어요. 딸아이의 이름은 뭐라고 지었는데?"
  "미샤예요. 당신 어머니 이름을 땄어요."
  "좀더 자세히 얘기해 주어요."
  "다음 기회로 미루어요. 자꾸만 눈물이 나서."
  "당신한테 말을 빌려 준 그 삼제바토프는 재미있는 사람이지. 당신 생각을 어때요?"
  "정말 재미있는 분이에요."
  "나도 그 사람을 잘 알아요. 우리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냈지. 낯선 고장에서  우리를 여러
모로 도와주었어요."
  "그건 나도 알아요. 그분한테서 들었어요."
  "당신과 매우 가까이 지냈겠군? 여러 가지로 당신을 도와주었겠군?"
  "줄곧 신세만 져왔지요. 그분이 없었더라면 정말 살길이 막연했을 거예요."
  "그렇게 짐작은 되더군, 무척 가깝게  지냈을 거라고. 그 사람은 줄곧  당신한테 접근하려
했겠지?"
  "그래요, 줄곧 그랬어요."
  "그럼 당신 자신은 어땠어? 아니, 이거 실언했군. 나에겐 그런 걸 캐어 물을  권리는 없으
니까. 용서하시오. 내가 경솔했어."
  "괜찮아요. 아마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건, 이를테면 어떤 성질의  관계냐는 거죠?
그러니까 당신은 그 사람과의 사이에 무슨 이상한 관계라도 없었는가를 알고 싶다 그 말이
죠? 물론 그런 관계는 없었어요. 그  사람한테는 너무 많은 신세를 져서  그 만분의 하나도
갚을 수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설사 그 사람이 내 앞에 황금의 산더미를 쌓아놓는다  해도,
또 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다 해도 나를 한 걸음도 가까이 끌어당길 수는 없어요. 나는 태
어나면서부터 그런 사람을 증오했으니까. 그처럼 빈틈없는  자신만만한 사람은 일상 생활에
는 유용하지요. 그러나 애정 문제에서는, 남성이라는 걸 내세우는 자신만만한 태도는 질색이
에요. 나는 애정과 인생의 문제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된  까닭도
바로 그런 사람때문이었어요."
  "그런 사람이란 누군데? 대체 어떤 사람 말이오? 당신은 이 세사으이 누구보다도  훌륭해
요."
  "그럼 안 돼요, 유라. 난 진진하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마치 손님처럼 인사치레
의 말만 하시는 군요. 내가 어떤 사람이냐구요? 나는 허물어진 인생이에요. 나는 참혹할 만
큼 일찍 여자가 된 거예요. 그것도  더없이 추악한 모양으로 말예요. 늙고 거만한  구시대의
기생충한테 마치 길거리의 여자와 같은 취급을 당했던 거예요. 이용해 먹을 수 있으면 무엇
이든 그런 인간한테 말예요."
  "난 짐작은 했어요. 잠깐만, 그보다도 당신이 소녀 시절에 겪은 어린애답지 않은 고통, 경
험이 없는 데서 오는 공포감, 아직 덜 성숙한 처녀가 받은 최초의 모욕 등이 어떤 것이었는
지 나는 상상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모두 지나간 일들이 아니오?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그것 때문에 정작  슬퍼해야 할 사람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나처럼 당시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그때 만일 내가 당신 곁에 있었더라면 그런 불행을 당하지 않게 했을
텐데, 하고 머리털을 쥐어뜯어며 원통해 하는  사람은 바로 나란 말이오. 당신이 정마로  그
일을 슬퍼한다면 말이오. 이건 좀 이상한 얘기지만, 나는 자기보다 훨씬 저열한  인간에게만
심한 질투를 느끼는 것 같소. 나보다 훌륭한 사람과 라이벌  관계에 있을 때에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어요. 내가 좋아하는, 정신적으로 서로 통하는 남성이 나와 똑같이 그 여성
을 사랑하는 경우엔 서글픈 심정이 되어 기를 쓰고 경쟁을 할 수  없게 될 거요. 물론 내가
사랑하는 여성을 그 남자와 공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피비린내나는 질투와는 전혀 다
른 괴로운 감정을 느끼며 나는 물러날 거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이를테면 나와
같은 일을 하며 나보다 능력이 있고 나보다 뛰어난 예술가와 맞서게 될 경우라면 나는 자기
의 탐구(探求)의 시도를 스스로 포기할 겁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
을 해 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얘기가 좀 벗어난 것 같군. 하여튼 당신이 슬픔과 회한  같은 걸 가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지 않았을 거요. 나는 한 번도 발을 헛디디거나 낙오하거나 잘못을 하
지 않은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런 사람의 미덕이란 생명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가치
도 없는 것이니까. 그런 사람은 인생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요."
  "바로 그 인생의 아름다움 말인데요, 그것을 알게 되면  상상력에 때가 묻지 않은 어리애
같은 순결이 필요해요. 그런데 나는 그것을 잃었어요. 인생의 첫걸믕에서 내 마음에  비열하
게 타인의 낙인이 찍히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좀더  다른 눈으로 인생을 볼 수 있었을 거예
요. 그뿐만이 아니예요. 인생의 시발점에서 부도덕한 자기쾌락 탓으로,  그 후 나를 꽤나 사
랑하고 나도 역시 사랑했던 좋은 사람과의 평범한 결혼 생활마저 파탄에 이른 거예요."
  "잠깐만, 당신 남편 얘기는 뒤로 미루기로 합시다. 나는 자기와 대등한 자에게보다는 훨씬
저열한 자에게 질투를 느낀다고 하지  않았소? 나는 당신 남편에겐  질투를 느끼지 않아요.
하지만 '그 사람'은?"
  "'그 사람'이라뇨?"
  "당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 말이오. 대체 어떤 인물이오?"
  "꽤 유명한 모스크바의 변호사예요. 우리 아버지의 친구였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
린 생계에 곤란을 받았어요. 그때 그 사람이 어머니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어요. 독신 생
활을 하는 돈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너무 나쁘게 말하는 바람에 오히려 당신한테는 흥
미 있는 인물로 생각되는가 보군요. 사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에요. 이름을
밝힐까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나도 알고 있으니까. 한 번 본 일도 있었소."
  "그래요?"
  "당신 어머니가 여관 방에서 음독한 적이 있잖소?  한밤중이었었지. 난 아직 어린 중학생
이었지만."
  "나도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은 어두컴컴한 문간방에서 서 있었어요. 언젠간  전에도 한번
나한테 그 얘길 하셨죠? 멜류제에보에 있을 때였던가요?"
  "거기에는 코마롭스카가 있었어."
  "그래요? 그랬을 거예요. 우리 식구하곤 언제나 허물없이 지냈으니까."
  "당신, 왜 얼굴을 붉히지요?"
  "당신 입에서 갑자기 코마롭스티의 이름을 들으니까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요."
  "그때 난 학교 친구와 함께 그 여관에 갔었는데, 그 친구한테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
어요. 미하일 고르돈이라는 친구였었어. 그가 그전에 기차 여행중에 백만장자인  사업가였던
우리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했다는 거요. 고르돈은 우리 아버지와 같은 찻간에 타고  있어서,
그때 우리 아버지가 달리는 기차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거예요.  그는 아버지와 동행인 코마
롭스키도 그때 보았다고 했어요. 크마롭스키는 우리 아버지의 법률 고문으로 있으면서 아버
지를 술에 빠지게 했고 사업을 망쳐 파산시켰을 뿐  아니라, 끝내는 자살에까지 몰아넣었던
거요. 아버지가 자살한 것은 그자 대문이었소. 그놈 때문에 난 고아가 되고 알았단 말이오."
  "어쩌면! 정말 기이한 인연이로군요! 곧이  들리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당신의
악령(惡靈)이기도 했군요. 그런 점에서도 당신과 나는 같은 운명에 매어진 사이예요!"
  "내가 당신을 두고 미칠 듯이 질투를 느끼는 건 바로 그자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기는커녕 경멸하고 있어요."
  "당신은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천성이란, 특히 여성의
천성이란 종잡을 수 없는 모순덩어리란 말이오!  당신은 그 자를 혐오하지만 그  혐오 속엔
그자에게 강하게 끌리는 무언가가 잠재해 있지 않을까-당신 스스로 사랑하는 남자에게서보
다 더 강하게 끌리는 그 무엇이?"
  "정말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너무나 태연스럽게 말하시니까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이
마치 사실인 것같이 들리는군요.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요!"
  "진정해요. 내가 하는 말에 신경을 쓸 건 없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뭔가 모호한 건
에, 설명도 할 수 없고 추측도 할 수 없는 것에 질투를 느낀다는 사실이오. 말하자면 당신의
화장품, 당신의 살갗에 배어 나오는 땀방울, 공중에 떠다는다가 당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당
신의 몸을 해치는 병균, 이런 것들에까지 나는 질투를 느껴요. 그리고 이런 병균에게 질투를
느끼듯 나는 코마롭스키에게 맹렬한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겁니다.  언젠가는 죽음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겠지만, 그보다도 코마롭스키가 먼저 나한테서  당신을 빼앗아 갔는지도 모른
단 말이오. 내가 종잡을 수 없는 말만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걸 좀더 조리 있게
설명할 수는 없어요. 다만 나는 당신을 미칠 듯이, 그리고 끝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할
수 있을 뿐이오."

  13
  "당신 남편 얘길 좀더 해주어요. '우리 운명의 책 속에 나란히 이름이 적힌 사람들'이라고
셰익스피어가 말했어."
  "그건 어느 작품에 나오는 말이죠?"
  "<<로미오와 줄리엣>>이던가."
  "그이 얘긴 내가 그이를 찾으러 갔을 때 멜류제예보에서  당신한테 여러 번 했어요. 그리
고 여기 유라친에서 처음 만났을때, 열차 찻간에서 당신을 연행했다는 말을 하셨을 때도 나
는 그이 얘길 했지요. 그이가 자동차에 타는 걸 먼발치에서  보았다는 얘기도 했던 것 같아
요. 어찌나 경호가 삼엄했는지 말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이 자신은 조금도 변한 데가 없
는 것 같았어요. 여전히 착하고 성실하고 단정한 얼굴-내가 이 세상에서 본 것 중에서 가장
성실한 얼굴이에요. 거드름이나 제스처라곤 털끝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남성다운 성격이죠.
과거에도 언제나 그랬었지만 그때도 여전했어요. 하지만 단 한 가지 변한 데가 있더군요. 나
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걸렸어요.
  마치 무슨 추상적인 것이 그이의 용모에 배어 들어 어쩐지 빛을 바래게 한 것 같은  느낌
이었어요.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이 주의(主義)와  사상의 화신으로 변해 아주 굳어져 버린
것 같더군요. 나는 가슴이 섬뜩했어요. 그이가 자기 자신을 바친 그 고상한 힘이 그렇게  만
든 거예요. 고상하긴 고상하지만 언젠가는  그이를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릴 냉혹한  힘이죠.
그이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거라고 나는 생각했어요. 그러나  어쩌면 내가 잘못 보았는지도
몰라요. 당신과 나는 감정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나 항상 당신한테 많은  영
향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보다도 혁명 전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그 얘기나 들려주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순결을 동경했어요. 드이는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우린 한 집에서
살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으니까요. 그이와  나와 갈리울린 말이에요. 그이는 어릴  때부터
나한테 매혹을 느꼈나 봐요. 나를 만나면  넋을 잃고 얼어붙었답니다. 이런 걸 말하다는  건
쑥스러운 일이지만, 그걸 몰랐다고 시침을 뗀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거예요. 말하자면 나
는 그이의 순진한 정열의 대상이었어요. 어린 자존심 때문에 애써 숨기려 했지만, 그의 얼굴
에 나타나서 남들이 눈치채게 되는 그런 정열 말예요. 우린 친해졌어요. 하지만 그이와 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어요. 나와 당신의  성격이 비슷한 것과는 달리 나는  그때 이미 그를
결혼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학교를 졸업하면 곧 이  비범한 소년과 인생을 함께하기
로 마음 먹고, 말하자면 마음속으로 약혼한 셈이죠.
  그이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아시죠! 비범한  사람이에요! 일개 철도 종업원의 아들에
지나지 않지만, 천부적인 재능과 꾸준한 노력으로 수학과 인문 과학의 두 분야에서 현대 대
학 교육 이상의 최고 수준에 도달한 거예요. 어디 그게 수월한 일인가요!"
  "서로가 그토록 사랑했다면 어째서 가정 생활에 금이 갔을까?"
  "그걸 설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제 말씀드리죠. 하지만 이상해요, 나같이 보잘것
없는 여자가 당신과 같이 총명한 분에게, 러시아의 인간 생활이  지금 어떻게 돼 가고 있으
며 나의 가정과 당신의 가정을 포함한 모든 가정이 어째서 파괴되고 있는가를 설명해야 하
니 말입니다. 요컨대 인간 관계라는 것은,  성격의 일치나 애정의 유무 따위는 전혀  문제가
이니예요. 전통적으로 자리잡힌 모든 것,  일상 생활과 인간의 보금자리와 질서에  관계되는
모든 것이 사회 전체의 변혁이나 개조와 함께 무너져 버렸어요. 모근 생활 양식이 송두리째
뒤집히고 파괴되어 버린 거예요.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홀랑 벗긴 벌거숭이의 인간 영
혼만이 남았어요. 이 영혼에겐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요. 그것은 언제나 추위에 오그라져 떨
면서, 똑같이 벌거숭이가 된 바로 곁의 다른 고독한 영혼에게 몸을 의지하는 법이니까요. 몸
을 가릴 필요가 없었던 아담과  이브처럼, 당신과 나도 지금 이  세상 종말에서 벌거숭이가
된 채 외롭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과 나는 태초부터 말세까지 수천 수만 년 동안
이 세상에서 이루어 놓은 수많은  위대한 것의 마지막 추억이에요. 이미  사라져 버린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기변으로 우리는 호흡하고 사랑하고  울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몸부림치고
있는 거예요."

  14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그녀는 한충 조용한 어조로 다시 계속했다.
  "제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에 스트렐리니코프가 다시 옛날의 파샤안치포프로
되돌아와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짓을 그만둔다면, 만약에 시계 바늘이 뒷걸음질쳐서 어디 먼
이 세상 끝에 우리 집 창문이  밝게 비치고 파샤의 책상 위에 등잔과  책들이 놓여 있다면,
나는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그리로 갈 거예요. 나는 과거의  부름, 신의(信義)의 부름을 거부
할 수가 없을 거예요. 나는 모든  것을 다 희생할 용의가 있어요.  가장 귀중한 당신까지도.
아니, 마음에도 없즌 소릴 지껼였나봐요. 용서하세요. 그건 아니였어요."
  그녀는 지바고의 목을 얼싸안고 흐느껴 울었다.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눈물을 닦으며 말
을 이었다.
  "그라나 이건 당신을 토냐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의무의  목소리예요. 하나님 우린 어쩌면
이렇게도 가련한가요?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좋을까요?"
  흥분을 가라앉고 나서 라라는 말을 계속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이 파탄된 이유를 아직  말하지 않았군요. 말씀드리죠. 이건 비단  우리
가정뿐 아니라 많은 가정에도 같은 운명일 거예요."

"말해주구려."
  "우린 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결혼했어요. 겨우 가정을 이루어 살려고  할 때 전쟁이
터졌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세대가 여태까지 겪어온 불행의 근본 원인은 전쟁이에요.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평화롭던 지난 세기의 사고 방식이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어
요. 사람들은 이성(理性)이 가르치는 대로  행동했어요. 양심이 명령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남의 손에 사람이 죽는다는 건  극히 드문 예외적인 현상이었지
요. 살인 사건 같은 건 연극이나 탐정  소설 아니면 신문 사회면에서나 볼 수 있었고,  일상
생활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하는 일로 여겨왔지요.
  그런데 평화롭고 소박하던 세계가  순식간에 뒤집혀 유혈과 통곡의  세계로 변해 버리고,
난폭한 광기가 팽배하여 살육이 합법적인 것으로 찬양을 받게 되었어요.
  이런 판국에 어찌 무사할 수가 있겠어요. 나보다도 당신이 더 잘 기억하시겠지만,  순식간
에 모든 것이 허물어졌습니다. 열차 운행, 도회지로의 식량 공급, 가정 생활의 기반,  도덕률
다위가 한꺼번에 무너져버린 거예요."
  "계속하시오. 당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소. 당신이 모든 걸 그렇게 정확
히 이해하다니 놀랐군! 참으로 기뻐요!"
  "그리하여 우리 러시아 땅은 허위가  휩쓸기 시작했어요. 불행의 근본은, 다시  말해서 그
후의 모든 악의 근원은, 개인적인 의사를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데 있어요. 도덕적으
로 행동하는 사대는 이미 과거의 유물로 되어버렸어요. 이제는 남들이 노래하는 데 맞춰 함
께 노래를 불러야 하고, 외부에서 강요하는 관념에 보조를  맞춰 살아나가야 한다고 모두들
생각한 거예요. 판에 박은 화려한 구호가 판을 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제정주의(帝政主義)
의 구호가, 다음엔 혁명의 구호가 말예요.
  이런 사회적인 풍조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고질화되고 말았어요. 모든 것이  영향을 받게
된 겁니다. 우리 가정도 역시 그 무서운 파괴력에 대항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어떻게  되었
다고 꼭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금이 가기 시작한 것만은 사실이었어요. 우리  가정
에 항상 감돌고 있던  자유롭고 활달하고 신선한 공기가  사라져버리고, 바보스러운 토론이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심각한 국제적 큰 문제를 자못 지진한 얼굴로 논하기 시작한 거
예요. 파샤처럼 섬세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그리고 언제나 실제와 거짓된 외관을 정확히 식
별할 줄 아는 사람이 우리 가정에 침입한 그 허위성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지요.
  그때 그이는 피할 수 없즌 숙명적인 오류를 범했던 거예요.  시대의 상징-즉 사회악을 가
정의 현상으로 오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대화가 관료적으로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자
기가 형식에 구애되는 융통성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런 실없는 일이
우리 결혼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면 당신은 아마 믿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우
리어ㅔ겐 참으로 중대한 문제였어요. 이러 유치한 생각 때문에  파샤는 마침내 어리석기 짝
이 없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어요.
  파샤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전쟁터에 나갔어요. 자기가 나와  카첸카의 무거운 짐이 되
고 있다고 판단하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는 것이었어요. 이것이  그의 미치광이 짓의 발단
이었어요. 어린애 같은 엉뚱한 자존심 때문에 아무도 모욕을 느끼지 않는 사소한 일에 심한
모욕을 느꼈던 모양이예요. 그이는 사태의 진전, 즉 역사에 항거하고있는 거에요. 그이의 도
덕적인 행동은 바로 그 때문이죠. 그런 어리석은 야심 때문에 그이는 반드시 파멸하고야 말
거에요. 아아, 그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한 당신의 애정은 강하고도 순수한 거요. 그 사람을 사랑하시오.  나는 그것
을 질투하지도 않고 방해하지도 않겠소."

      15
  어느덧 찾아왔던 여름이 지나가 버렸다. 지바고는 완전히 건당을 회복했다. 모스크바로 떠
날 계획은 포기하지 않고 그는 한꺼번에 세 군데나 일자리를 구했다. 인플레가 극심해서 한
군데서만 일해 가지고는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는 첫닭이 울 때 자리에서 일어나, 쿠페체스카야 거리로 나가 '거인 회관(巨人  會館)'앞
을 지나서, 옛날엔 우랄 카자크군의 인쇄소였으나 지금은 '붉은 식자공(植字工)`이란 이름이
붙은 작업장 앞까지 갔다. 고로드스카야  거리 모퉁이에 있는 시사무소  문에 '청원소'라 쓴
게시판이 걸려 있었다. 광장을 지나 말라야 부야노프카로 나가서 스첸곤 공장 앞을 지나, 뜰
로 향해 군 병원 진료소로 출근했다. 여기가 그의 본직장이었다.
  통근길의 태반은 가로수의 짙은 녹음이 덮여 있고 양쪽에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지부
으이 경사가 가파르고 나무 울타리에 조각 무늬의 대문이나 덧문이 달린 집이 많았다.
  진료소 이웃에는 상인의 미망인 고레글랴도바의 소유였던 정원 안에 조그만 고대  러시아
식 집 한 채가 있었다. 옛날 모스카바 영주(領主)의 저택처럼  피라밋 형의, 유약을 바른 타
일을 붙인 건물이었따.
  지바고는 열흘에 서너 번씩 진료소에서 스타라야 미아스카야 거리에 있는 리게치의  저택
으로 가야만 했다. 그것은 유라친 시 보건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시내 반대쪽에 삼제바토프의 아버지가 시(市)에  기증한 산부인과 연구소 건물이 있었다.
삼제바토프를 낳고 죽은 자기 아내를  기념하기 위한 연구소였다. 지금은  로자 룩셈부르크
(독일의 유명한 여자 공산주의자)내와과(內外科) 강습소라고 불렸으며,  지바고는 거기서 일
반 병리학과 그 밖에 두세 과목을 강의하고 있었다.
  밤늦게 지치고 허기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라라는 식사 준비며  세탁 등 살림에 골몰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치맛자락을  허리춤에 낀 라라의 소박하
고 평범한 모습은 숨막힐 듯 매력적이었다. 설사 그녀가 가슴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키
가 날씬해 보이도록 굽이 놓은 구두를 싣고. 폭이 넓은 화려한 치맛자락을 흔들려 무도회에
나가는 모습에서도 그는 이토록 매료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라라는 식사 준비를 하거나, 세탁을 하고 남은 비눗물로 마룻바닥을 닦기도 했다.  그리고
세 식구의 속옷을 다림질하거나 뚫어진 데를 깁기도 했다. 그리고 카첸카에게 글 읽고 쓰기
를 가르쳤다. 혹은 개편된 새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준비로서 정치 방면의 입문서(入門書)
따위를 틈틈히 읽기도 했다.
  이들 모녀에 대한 애정이 깊어 감에  따라 지바고는 가정적 분위기에 젖어들려는  욕망을
억제 했다. 자기 자신의 가족을 저버리고 있다는 괴로운 의무감이 그를 압박해 왔다. 그래서
그는 이들 모녀가 자기와의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가지도록  노력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라라와 카체카에게 어떤 모욕감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깊은 존경을 유지하는 구실을 했
다.
  지바고는 이와 같은 감정의 분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따금 덜 아
문 상처가 쑤셔 오듯 예리한 동통(疼痛)을 가슴 속에 느끼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두세 달 가량 세월이 지났다. 10월로 접어든 어느 날 지바고는 라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직장을 그만둬야 할 것 같소. 으레 그럴 것이라는 건 니리  짐작하고 있었어요.
처음엔 더할 수 없이 좋았어요. '성실하게 일해주기만 한다면 우린 언제나 환영하오. 사상을
지닌다는 건, 특히 새로운 사상은 대환영이오. 잘해주시오. 일하고, 투쟁하고, 탐구하시오.'라
고 말이오.
  그러나 잘 알고 보면 그들이 말하는 사상이란 단지  형체뿐이오. 혁명이나 정권을 찬양하
는 엉터리 같은 구호의 반복일 뿐, 정말 구역질이 날 만큼 따분해요. 게다가 나는 그 방면엔
전혀 서ㅗ질이 없는 인간이오.
  어쩌면 그들 쪽이 실제 옳은 건지도 몰라요. 물론 나는 그들과 같은 생각일 순 없지만. 그
러나 그들은 영웅이고 공명정대한 인물인 데 반해 나는 무지 몽매하고 인간의 노예화를 지
지하는 치사스러운 인간이라는 그런 사고 방식과는 도저히 타협 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니
콜라이 베제냐핀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요?"
  "물론 있어요. 당신을 알기 전에도 들었고, 당신을 만나고 나서도 이따금 당신에게서 들었
어요. 시모치까 툰체바가 곧잘 그분 얘길 했어요. 그분을 좋아했어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
는 아직 그분의 책을 다 읽어보지 못했어요. 철학 문제만을  다룬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
든요. 철학이란 건 예술과 인생의 양념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철학에만 몰두한다는 건 마치
겨자만 먹는 것 같아서 이상하거든요. 용서하세요. 쓸데없는 말로 당신 얘기를 방해했군요."
  "아니 천마에, 나도 당신 의견엔 동감이오. 내 생각과 아주 비슷해요. 그보다도 우리 아저
씨 얘긴데, 나는 정말로 니콜라이 아저씨의 악영향을 받았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들은  모
두들 나보고 천재적인 진단의(診斷醫)라고 감탄하고 있단 말이오. 사실 나는 좀처럼 오진을
하는 일이 없어요. 그런데 무슨 병인가를 대번에 정확히 알아내는 힘은, 내가 빠져 있는  직
관(直觀) 그것이란 말이오. 그들이 증오하고 있는 직관력 이와의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나는 모방의 문제-이건 주위의 환경에 유기체가 외적으로 적응하는 것을 말하지만-이 모
방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어요. 나는 이러한 색채의 적응에 있어서, 내적인 것의 외적인 것으
로의 놀라운 전이(轉移)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강의 시간에 용기를 내어 이 문제를  언굽해보았어요. 그러자 대번에 '관념론이다,
신비주의다, 괴테의 자연철학이다, 네오 셸링주의다'라고 하더군.
  아무래도 그만둬야겠어. 보건부와 강습소는 의원 면짓으로 그만두고. 병원만은 쫓겨날  때
까지 버티어볼 작정이오. 이런 말을 해서  당신을 놀라게 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오늘이나
내이 ㄹ체포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염려 마세요, 유라. 그렇게 되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러나 당신 말이  옳아요. 조심하는게
좋아요. 체제가 바뀌고 새 권력이 뿌리를 박기까지는 몇 개의 단계를 거치는 법이거든요. 처
음엔 이성(理性)의 승리, 비판 정신, 편견과의 투쟁.
  다음에 제2단계가 오게 되지요. 새 체제에 진심으로 공명하는 것같이 가장하는  '부화뇌동
배(附和雷動輩)'들이 판을 치는 단계예요. 중상, 모략, 밀고, 음모, 증오 등이  횡행하지요. 지
금은 바로 제2단계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실례는 어디에도 있어요. 이곳 혁명재판소 위원으로 과거 정치범으로 유형되었던 사
람이 호다트스코예에서 두 사람이 왔어요. 치베르진과 안치포프라는 노동자예요.
  두 사람 다 나와는 잘 아는 사이예요.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시아버지 되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최근 이 두 사람이 부임해 온 후부터 나는 우리 모녀의 생명이 염려되어 몸둘  곳을
모를 지경이에요. 그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사람들이니까요. 시아버지는 날 마땅치  않게
생각했었어요. 그들은 어느 날에 최고 정의의 이름으로 나뿐  아니라 파샤까지도 능히 죽일
수 있는 인간들이란 말예요. "
  이 대화는 곧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어느 날 밤, 진료소 이웃인 말라야 부야노푸까  48
번지인 고레글랴도바 부인이 집이 수색을 받도, 은닉 무기가  발견되어 반혁명 조직이 적발
되었다. 많은 주민이 검거되었고 가택 수색과 체포가 계속되었다. 용의자의 일부가 강  너머
로 도주했다 소문이 돌았다.
  "도망쳐 봐야 별수 있나? 강만 건넜다고 되나, 강도 강 나름이지."  사람들을 서로 수군거
렸다. "예를 들어, 블라고베스첸스크에는 아무르 강(黑龍江)이 있지. 강 이쪽은  소비에트 정
권이지만 건너편은 중극이 아닌가. 강에 뛰어들어 헤엄쳐 건너가기만 하면 그만이거든. 이쯤
돼야 진짜 강이랄 수가 있지. 이 고장 강이야 그게 어디 강인가!"
  "분위기가 험악해졌어요." 라라가 말했다.  "어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 둘 다
틀림없이 검거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카첸카는 어떻게 하죠? 나나 그애 어머니예요. 불행을
피하기 위해 대책을 강구해야 해요. 벌써 어떻게든 계획을 세워 놨어야 하는 건데...... 이 생
각을 하면 미칠 것만 같아요."
  "잘 생각해봅시다. 그러나 어디든 남의 눈에 띄지 않을 곳에 당부간 숨어 살 수가 있어요.
가령 바르이키노 같은 곳 말예요. 난 바르이키노의 그 집을 생각해봤어요. 거기라면  외딴곳
이니까 여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거예요. 겨울도 가까워졌으니  거기서 겨울을
지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요. 거기까지  손이 미치려면 아직 1년은  더 걸릴테니까 우리도
그만큼 더 살 수 있는 거예요. 시내와의 연락은 삼제바토프가 맡아줄 거에요. 부탁하면 거전
하진 않은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거긴 인적도  없고 황폐하고 쓸쓸한 곳
이에요. 지난 3월에 내가 갔을 때도 그랬어요. 늑대가 우글거린다더군요. 무서워요. 그렇지만
지금은 늑대보다 사람이, 특히 안티포프나 치베르진 같은 사람이 더 무서워요."
  "글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당신은 언제나  나더러 모스크바로 떠나라고 하지
않았소? 이제는 기차 여행도 어느 정도 가능해진 모양이오. 역에 가서 알아 보았더니,  기차
를 이용하는 보따리 장사들의 단속도 전같이 심하지가 않고, 무임승차자를 강제로 하차시키
는 일도 없다는군. 총살하는 것도 이젠 싫증이 났는지 뜸해졌다는 거요.
  모스크바에는 여러 번 편지를 냈으나 답장이 없어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소. 이젠 모스
크바로 가서 가족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 보는 수밖에 없겠소.  당신이 늘 그렇게 말하지 않
았소. 그런데 지금 바르이키노 얘길 꺼내는 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구려. 설마 당신 혼자
서 그 무서운 외딴곳으로 가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물론 당신 없이 혼자서 어떻게 가겠어요!"
  "그러믄요. 떠나야 해요."
  "알겠소?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어요. 우리 카첸카를 데리고 함께 모스크바로 떠납시다."
  "모스크바로? 당신 제정신이 아니군요. 모스크바엔 뭣하러  가요? 안 돼요. 난 여기  남아
있어야 해요. 어디든 근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파샤의 운명이 결정되는 건  여기니까
요. 필요한 경우 그이를 돕기 위해 결말이 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죠."
  "그렇다면 카첸카는 어떡하지? 그걸 생각해봅시다."
  "나한테 가끔 시모치까가 찾아왔어요. 시모치까 툰체바 말예요. 언젠가 당신한테  그 여자
얘길 하지 않았던가요?"
  "알고 있어요. 자주 당신한테 온 걸 보았소."
  "난 놀랐어요. 남자의 눈은 어디 붙어 있지요? 그 여자한테 반해버릴 거예요. 참으로 멋진
여자예요! 키도 크고 날신한 몸매에 머리도 좋고, 박식한데다 성질도 착하고 명석한 판단력
을 지녔어요."
  "내가 빨치산에서 빠져나와 여기 도착한 날 그 여자의 언니인 글라피라한테  이발을 했어
요."
  "그 얘긴 전에도 들었어요. 그 여자의 자매들은 도서관에  있는 맨 위의 언니 아브도쟈네
집에서 함께 살고 있어요. 일 잘하는 정직한 사람들이예요. 만일의 경우 당신과 내가 체포되
면 카첸카를 데려다 길러달라고 부탁해볼까  해요. 아직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요."
  "최악의 경우엔 그렇게라도 할 수 밖에. 하지만 그렇게까지 되려면 아직 멀었을거요."
  "남들은 시모치까를 보고 좀 머리가 돈 여자라고들 말해요. 하긴 완전히 정상적인 사람이
라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그 여자의 깊이 있는 성격과 독창성 탓이예요. 그 여자는
비범한 교양을 가졌으나 그건 지식인이  아니라 민중의 교양이예요. 당신의  사상과 너무나
서로 닮았어요. 그 여자한테라면 마음놓고 카첸카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

  17
  지바고는 다시 역에 나가 보았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되돌아왔다.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했다. 지바고와 라라는 앞길이 막막했다.  첫눈이라도 내릴 듯싶은 춥고 우중충한  날씨였
다. 길게 뻗은 거리에서보다도 한결 넓게 바라보이는 네거리 위의 하늘은 벌써 겨울빛이 감
돌았다.
  지바고가 집에 돌아왔을 때, 시모치까가  라라를 찾아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시모치까가
라라에게 무슨 강의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바고는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가 않았고 또 잠시 혼자 있고  싶어서 옆방으로 들어갔다. 사잇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천장에서 드리운 포장 너머로 여자들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려 왔다.
  "난 바느질을 할 테니 어서 얘기해주어요, 시모치까. 저는 학교 시절에 역사와  철학 강의
를 들었어요. 당신의 사고 방식이 퍽이나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당신의 얘길 듣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요즘은 여러 가지 걱정거리가 많아서 밤에 잠도 제데
로 못 잔답니다. 우리들에게 최악의  사태가 닥쳐왔을때, 카첸카에게 재난이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머니로서의 의무가 아니겠어요. 그애를 위한 대책을  심각하게 강구해야 한 텐
데, 좀 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요. 내가 이토록 무력한가 생각하면 서글퍼지는군요.
그런데 당신 얘기를 듣고 있으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거든요.  게다가 오늘은 금세 눈이라
도 내릴 것만 같아요. 눈 내리는 날에 현명한 이야기를 오래 들을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
이에요. 눈이 내릴 때, 곁눈으로 창문을 바라보면 누군가 정원으로 우리집에 찾아올 것만 같
아요. 어서 시작하세요, 시모치까."
  "지난번에 어디까지 얘기했죠?"
  라라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지바고는 듣지 못했다. 그는 그녀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문화'니 '시대'니 하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딴 뜻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
어서 혼동하기 쉬우니까 난 그런 말은 쓰지 않기로 하겠어요.  그 대신에 다른 표현으로 바
꾸기로 하죠.
  인간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요-신(神)과 사업의 두  부분으로. 인간 정신의
발달은 오랜 기간을 통해 계속된 개개의 사업에 의하여 구분되지요. 하나의 사업은 몇 세대
에 걸쳐 계속되었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사업이 이루어지곤 했어요. 이러한 사업이  이집
트였고. 그리스였고, 성서의 예언자들이  말한 신(神)의 인지(認知)였어요.  시대로서 본다면
최후의 시대에 해당되어 아직도 다른 시대와 교체되지 않았드며,  영감을 받은 모든 사람들
에 의해 현재 달성되고 있는 사업-그것이 곧 그리스도교지요.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에 가져다준 전혀  새로운 것-당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더 간단하게, 더 직접적으로 신선하게 전하기 위해 기도서(祈禱書)의 구절들을 잠깐 인용하
기로 하겠어요.
  송시(頌詩)의 대부분은 구약과 신약을 한데다 결부시킨 것들이죠. 예를 들어 구약에 나오
는 타지 않는 수풀,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탈출,  불가마 속의 젊은이들, 고래 뱃속
에 들어간 이오나 등의 개념은, 신약의  성모 수태(聖母受胎)와 그리스도 부활 등의  개념과
결부되어 있어요.
  이렇게 자꾸 결부시키고 있기 때문에 구약, 신약의 독특한  성격과 양자의 차이점이 분명
히 나타나게 되지요.
  송시의 여러 곳에서 마리아의 처녀 잉태와 유태인의  홍해(紅海)를 건너간 것을 비유하는
대목이 있어요. 예를 들면 '흑해(黑海)는 이따금 처녀 신부(新婦)와도 흡사했다'는 송시가 '이
스라엘 백성이 건너간 후 바다즌  이전처럼 다시 건너갈 수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 것처럼,
주님을 낳으신 성모 마리아는 여전히 순결했다는 뜻이지요. 이 두 가지 사실은 모두가 초자
연적인 것이예요. 둘 다 기적으로 보아야 해요. 하나는 고대의 원시 시대이고 또 하나는  로
마 이후의 새로운 시대인데, 그렇다면 이 상이한 두 시대에  각각 어떤 것을 기적이라고 봤
을까요? 첫째 경우는, 민주의 지도자인 모세가 마술 지팡이를 휘두르며 명령하기 무섭게 바
다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민족 전체의 많은 사람이 건너가고, 마지막 사람이 건너가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뒤쫓던 이집트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지요. 이런 광경은 고대 정신
에 어울리는거예요. 대자연, 마술사의 주문, 떼지어 움직이는 군중, 민중과 지도자 등 모든것
이 압도적으로 시각과 청각에 호소하고 있어요.
  둘째 경우는, 고대 세계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일개 평범한  처녀가 조용히 남몰래 아
기를 낳지요-이 세상에 생명을, 삶의 기적을, 모든 사라므이  생명을, 후에 예수라고 불리게
된 '만인의 생명'을 부여한 거예요. 이 생명의 탄생은 혼인과는 관계 없는 것으로, 학자의 견
지에서 보더라도 비합법적인 것을 뿐더러 자연의 법칙에도 어긋나는 것이에요. 처녀는 인과
(因果)에 의해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니라 기적에 의해, 영감에  의해 아기를 낳았어요. 이 영
감이야말로 복음서가 평범한 것을 예외적인 것과 대립시키고, 평일을 축제일과  대립시키며,
온갖 강제를 배제하고 생명을 이룩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 아니겠어요!
  이 얼마나 큼 의의를 지닌  변화일까요! 고대 세계에서였다면 하잘것없는  이런 개인적인
사건이, 민족의 대이동(大移動)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다니(그 이유는, 이러한 것은 하
늘에서 볼 때 하늘과 대치하여 평가해야  되면 유일하고 성스러운 울타리 안에서  성취되는
일이니까)!
  이 세상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 거에요. 로마가 끝나고  수(數)의 지배가 끝났지요. 무기
의 힘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삶을 강제당하던  시대는 끝나고, 지도자와 민중이라는
관계도 과거로 밀려나 버린 거예요.
  그 대신에 개성과 자유의 전도(傳道)가 시작되었어요. 개개의 인간 생활이 끝없이 넓은 우
주에 충만되는 하나님의 시대가 도래한  거에요. 성모 수태제(聖母綬胎祭) 찬송가에 나오는
구절처럼, 아담은 신(神)이 되려는 과오를 범했지만 신이 될 수 없었고 이제는 오히려 아담
으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하기 위해 신이 스스로 인간이 된 거예요.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다른 얘기를 좀 하겠어요. 근로자의 생활을 한다
거나, 모성(母性)을 보호한다거나, 금권(金權)과 투쟁하다거나 하는 점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혁명기는 영원히 남을 만한 업적을 달성한 비차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현재 떠
들고 있는 인생관이나 행복의 철학 따위는 제정신으로 말하는  것으로 믿기 어려워요. 우스
꽝스럽기 짝이 없는 고대 세계의 유물이라고나 할까요. 그들이 떠들어대는 지도자와 민중에
관한 미사 여구, 그것이 만약 인생을 뒷걸음질치게 하여 역사를  수천 년 전의 옛날로 환원
시킬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를 태고적 유목 종족과 족장의  시대로 되돌아가게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예요.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에 관해 잠깐 이야기하지요. 이건 복음서의 대목이 아니라 성수
난 주일(聖受難週日)의 기도문에 있는 구절이지만-아마 화요일이나 수요일의 기도문일 거예
요. 하긴 당신도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그 대목을 상기시킨다는 뜻에서 말씀드리겠어요.
  아시다시피 슬라브어의 '스트라스치'라는 말은 원래가 '수난'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
이에요. 주의 수난, '주 스스로 고난을 받는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또 이 말은 고래의 러시
아어 기도문에선 '악덕'이라든지 '정욕'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어요. 예를 들면 '내  영
혼, 짐승과도 같이 정욕에 사로잡혀'라든지  '낙원에서 쫓겨나면, 악덕을 가지고  되돌아오진
못한다'는 거예요. 아마 나는 타락해선지 모르지만, 정욕을 억제하고 금하는 이 사순절(四旬
節)의 기도문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조잡하고 단조로와서 종교 서적에 불가결한 시
적(詩的)인 요소가 없거든요. 필시 비곗덩어리처럼  뚱뚱한 신부(神父)가 썼을 거예요. 하지
만 시눕들이 계율대로 생활하지 않고 남을 속여서가 아니예요. 양심껏 사는 것도 무방한 일
이예요. 내가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기도문 자체의 내용이랑 말예요. 이러한 상심은  육체의
여러 약점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뚱뚱하거나 야윈 데에 지나치게 마음을 스고 있어요.  그건
오히려 반대예요. 무슨 불결하고 하잘것없이 부차적인 것을 터무니없이 치켜올린단  말예요.
얘기가 좀 빗나간 것 같군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내가 항상 의아하게 생각한 건 부활제 전야에 그리스도의 최후와 막달라 마리아를 상기시
킨 이유를 모르겠어요. 하지만 생명과 이별하는 순간에, 그리고 생명이 부활하기 직적에  생
명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데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것은  매우 적적하다고 생각해요. 그것
도 단도직입적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거든요.
  그것이 정말로 막달라 마리아인지, 또는  이집트의 마리아인지, 아니면 또 다른  마리아인
지, 거기에 대해선 의견이 구구하지만, 하여튼 마리아는 주님에게 이렇게  간청했어요. '내가
머리를 풀듯 내 죄를 풀어주시옵소서!'라고. 죄 사함을 갈망하고 깊이 뉘우치는 심정을 어쩌
면 이렇게도 잘 표현했을까요! 마치 손으로 풀듯이.
  같은 날의 또 다른 찬송가에는 이와 비슷한 절규가 좀더  자세히 나타나 있어요. 이건 틀
림없는 막달라 마리아의 얘기지요.
  마리아는 뜨렷이 자기의 과거를  뉘우치면서, 옛날의 고질적인 나쁜  버릇 때문에 밤마다
고민하던 것을 스스로 한탄하고있어요. '밤은 억제할 수 없는 음욕의 불길로 나를  불태우나
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 회오의 눈물을 받아들이마시고 마음속으로부터의 탄식에 귀
를 기울여주기를 애원합니다. '거룩하신 당신 발에  입을 맞추고 내 머리털로 그 발을  닦으
로. 그러면 낙워느이 이브는 낮에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이 두려워 숨게 되리라.' 그리하여 머
리카라그이 얘기가 끝난 뒤 느닷없이 '나의 죄가 많으며 그대 운명은 끝없을  것이니라'하고
마리아의 입을 통해 말했다. 이 얼마나 친말한 표현일까요! 신(神)과ㅓ  생명, 신과 개인, 신
과 여자는 어디까지나 대등합니다!"

  18
  지바고는 지쳐서 역에서 돌아왔다. 그날은 열흘 만에 한 번씩 있는 공휴일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아흐레 동안의 수면 부족을 보충할 셈으로 늘어지게 낮잠을 잤을 것이다. 그는 소파
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이따금 졸기도 하고 시모치까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물론
저 소린 모두 니콜라이 아저씨의 사상이지만, 꽤 재치 있고 현명한 여자야!' 그는 생각했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라라와 시모치까가 소곤고리는 말소리가 바
로 옆방처럼 정원에서 들리고 있었다.
  날씨가 짜푸둥했으며 정원에는 어둠이 깃들였다. 정원으로 가치 두 마리가 날아오더니 날
개를 바람결에 가볍게 푸덕이며 앉을 곳을 찾았다. 이윽고 쓰레기통 위에 앉았으나, 이내 울
타리로 자리를 옮기고 다시 땅위에 내려앉아 뜰안을 걷기 시작했다.
  '까치는 눈 올 징조야.' 지바고는 생각했다. 그때 커튼 너머에서 시모치까가 라라에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까치는 소식을 전한대요. 댁에 손님이 오시든지 편지가 올 거예요."
  얼마 후 지바고가 최근에 고쳐 놓았던 문의 초인종이 울렸다. 라라가 현관문을 열려고 급
히 달려나갔다. 문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시모치까의  언니 글라피라툰체바가 찾아온 것
이었다.
  "시모치까를 찾으러 오셨나요?" 라라가 물었다. "여기 와 있어요."
  "아니, 그 애 때문에 온 건 아녜요. 하지만 지금 집에 돌아가겠다면 함께 가지요. 실은 당
신의 남자 친구에게 편지를 전하러  왔어요. 내가 우체국에 근무했던 덕택에  이 편지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참 다행이에요. 그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바람에 다섯  달
전에 모스크바에서 부친 편지가 이제야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겠어요. 언젠가 이발을 해드
린 일이 있어서 나는 그분을 알고 있거든여."
  퇴색된 겉봉은 개봉되어 있었고, 여러 장 되는 길 편지는 온통 구겨져 있었다. 토냐의  편
지였다. 지바고는 그 편지를 라라가 자기가  지금 라라의 집에 있다는 것을 의식햇으나,  더
읽어나감에 따라 그것마저 염두에 없었다. 시모치까가 돌아가면서 인사를 하는데도 그는 기
계적으로 인사에 대답햇을 뿐이었다. 그는 자기가 어디 있으며, 주위에 누가 있는지조차  완
전히 잊고 말았다. 토냐의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유라, 우리들 사이에 딸이 생겼다는 걸 알고 계신지요? 돌아가신 당신  어머니 마리아 미콜라예브나를 기억하는
뜻으로 미샤라고 이름지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아버님을 비롯한 우리 가족은 국외 추방 명령을 받았어요. 우리와 함께 추방되는 사람 중에는 몇
명의 저명한 사회 활동가, 입헌 민주당원과 우익(右翼) 사회주의자인 대학 교수들-밀리구노프, 키제베르체, 쿠스코
바, 그리고 나의 숙부인 니콜라이 그로메코가 포함되어 있어요.
  불행한 것은, 당신을 빼놓고 우리들만 추방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런 무서운 세상에 비록 추방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관대한 처분을 받게 된 것만도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하겠어요. 이보다 훨씬 가혹한 처분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당신도 여기 계셨다면 함께 떠날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 편지는 라라 안치포프
의 주소로 보내겠어요. 그녀가 혹시 당신을 찾으면 꼭 전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하나님 덕분에 후에라도 당신이 살
아서 돌아올 경우, 우리 가족의 한 사람으로 당신도 과연 출국 허가를 받을 수 있겠는지 그게 걱정이예요. 나는 당
신이 꼭 살아 계셔서 언제든 모스크바에 나타나실 것이라고 확신해요. 내 마음속의  사랑의 목소리가 그렇게 일러
준답니다. 당신이 나타나셨을 때 러시아의 사정이 완화되면,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해외 여행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는 우리 가족도 다시 함께 모여 살 수 있게되겠지요. 지금 이렇게 쓰기만 하면서도 그런 꿈 같은 행복
이 돠연 실현될 것이지는 전혀 믿을 수가 없군요. 무엇보다  슬픈것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지 그 까닭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어요. 나의 결점을 모두 들추어 내보기도 하고, 우리들의 부부 생활
을 돌이켜보기도 하면서 이런 불행을 초래한 원인을 발견하려고 애써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아무래도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게신 것 같아요. 비뚤어진 거울에다 나를 비춰보고 계신 것만 같아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아아,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걸 당신이 아신다면! 나는 사랑해요-당신
의 모든 특이한 것을-장정일 수 있는 특이한 점도, 결점일 수 있는 특이한 점도. 그것들은 서로 하나의 비범한 결
합을 이루어 미남자라곤 할 수 없는 당신의 용모에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결핍
되어 있는 의지력을 보충해 주고 있는 당신의 그 재능과 지혜 또한 내게는 귀중한 것이예요. 나는 당신보다 더 훌
륭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
  여보, 당신은 내가 말하는 듯을 아시지요? 혹시 냉혹할 슬픈 사실을 알고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아니며 나에게 당신이 필요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리라 생각되시겠지요.  말하자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하고 죄스런 일인가 두려워, 그런 생각을 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도 당신도 결코 그
것을 알 수는 없어요. 나 자신의 마음이 그것을 감추고 있어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살인과 같기 때문이예요.
난 결코 그런 타격을 기할 힘이 없어요.
  아직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우린 파리로 가게 될 것  같아요. 그곳은 당신이 어릴 때 가본 곳이고, 우리
아버님과 숙부님이 공부하신 곳이기도 라지요. 싸샤도 잘 생겼다고 할 수 없어도  이제는 크고 튼튼하게 자랐답니
다. 당신 얘기가 나오면 언제나 울곤 한답니다. 눈믈이 가슴을 파고들어와 이젠 더 이상 쓸 기력도 없어요.그럼 안
녕! 앞으로 끝없이 계속될 고나느이 가시밭길에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당신을 탓하거나 나무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어요.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만약 당신만 좋으시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주세요.
  그렇게 무섭고 우리의 숙명적인 고장 우랄 지방을 떠나기 전에,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라라와 가까이 사귈
기회를 가졌어요. 내가 괴로울 때 언제나 옆에 있어 주었고, 해산 때도 여러 가지 도와주었어요. 감사의 인사를 전
해주세요. 솔직이 말씀드려서 아주 좋은 분이었어요. 그러나 나와는 정반대  되는 사람이더군요. 나는 인생을 보다
단순하게 살면서 항상 곧은 길만 걸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녀는 인생을 복잡하게 살면서 변화 있는 길을
걸으려고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아요.
  이젠 펜을 놓아야겠습니다. 편지를 가지러 왔어요. 짐도 빨리 꾸려야겠구요. 아아, 유라, 나의 귀중한  남편 유라,
나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우린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걸까요? 만나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당신은 아시나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네? 옆에서 재촉이 성화 같습니다. 마치 형
장으로 나를 끌고 가려고 재촉하는 것 같군요. 유라! 유라!

  지바고는 말할 수 없는 비탁과 고뇌 때문에 눈물조차 말라버린 빛 잃은 눈을 편지에서 떼
었다. 주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창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눈송이를 점점 더 빨리 점점 더 많이 실어다 퍼부
었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고 서두르기나 하듯이. 지바고의 시야에 명멸되는 것은
건조한 별 부스러기 같은 누송이가 아니라 검고 조그만 글씨로 빽빽이 메운 흰 지면이었다.
  지바고는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기절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두세
걸음 비틀거리며 소파 쪽으로 다가가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제 14장  다시 바르이키노르
  1
  겨울로 접어들었다. 함박눈이 쏟아졌다. 지바고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서 라
라를 만났다.
  "코마롭스키가 왔어요." 그를 맞으러 나온 라라가 목쉰 것 같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들
은 현관에 그대로 서 있었다. 라라는 한바탕 얻어맞은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어디로? 누구한테? 지금 여기 와 있다는 거요?"
  "아녜요. 아침에 왔었는데,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했어요. 이제 곧 올 거예요.  당신을 좀
만나야겠다더군요."
  "무슨 용문데?"
  "그 사람의 말은 잘 알  수가 없었어요. 극동 지방으로 가는  길에 만나고 싶어서 일부러
유라친에 들렀대요. 당신과 파샤의 일 때문이라고 했어요. 우리  세 사람, 당신과 나와 파샤
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자기 말대로 하면  살아나갈 수가 있다는
거예요."
  "난 나가겠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라라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지바고의 다리를 끌어 안고 머리를 그
에게 기댔으나, 그는 억지로 그녀를 잡아 일어켰다.
  "저를 보아서라도 여기 있어 주어요. 그 사람과 단둘이 만나는 게 무서운 건 아니지만 당
신이 없으면 난 괴로워요. 그보다도  그 사람은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니까 정말로 무슨
좋은 수가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그 사람을 싫어하시는 건 당연해요. 그렇지만 제발
꾹 참고 나와 함께 있어 주어요."
  "왜 이러는 거요? 당신, 마음을  진정해요. 무릎을 꿇고 이게 뭐요?  일어나요. 염려할 것
없소. 그자는 한평생 당신을 괴롭혀왔지만, 문제없어요. 내가 옆에 붙어 있으니까. 당신이 나
한테 한마디만 말해 주면 난 그자를 죽여버릴 수도 있어요."
  반 시간쯤 지나 밤이 되어 밖은 캄캄했다. 마룻바닥에 쥐구멍을 모조리 막아버린 지도 벌
썬 반 년이 되었다. 지바고는 새로 구멍이 생기기가 무섭게 이내 틀어막곤 했다. 털이  북슥
북슥한 큰 고양이도 길렀다. 고양이는 꼼짝 않고 앉아서 수수께끼 같은 눈을 번득이고 있었
다. 쥐들이 아주 없어져버린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러워졌다.
  코마롭스키에게 대접하려고 라라는 배급받은 검은 방을 잘라서 삶은 감자를 곁들여  접시
에 담아 식탁에 놓았다. 집 주인이 사용하던 식당인, 지금 그들이 쓰고 있는 방에 손님을 맞
기로 했다. 커다란 참나무 식탁과 역시 참나무로 만든 커다란 찬장이 놓여 있었다. 식탁  위
에는 피마자 기름병에 꽂은 심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지바고의 책상용 등잔불이었다.
  코마롭스키는 온몸에 눈은 뒤집어쓰고 12월의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슈바와 모자 그리고
덧신에서 큰 눈덩이가 떨어져서 마룻바닥에 물이 되었다. 예전엔 기르지도 않았던 콧수염과
턱수염에 젖은 눈이 엉겨붙어서 흡사 어릿광대와 같았다. 잘 손질한 양복 상의와 주름이 빳
빳이 선 줄무늬 바지를 입고 있었다. 코마롭스키는 인사말은 하기 전에 우선 주머니빗을 꺼
내더니 젖어 헝클어진 머리에 빗질을 하고 손수건으로 수염을  깨끗이 닦았다. 그러고 나서
아무 말 없이 의미심장한 동작으로 왼손을 지바고에게 오른손을 라라에게 동시에 내밀었다.
  "우린 이미 구면이나 다름없지요"하고 지바고에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나는 당신 부친과
가까운 사이였어요. 내 팔에 안겨 숨을 거두셨지요. 아무리 보아도 아버지를 닮은 데가 없는
것 같군요. 아버지는 참으로 호탕한 분이었지요.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무엇이든 꼭  해내고
야 말았으니가. 당신은 모친을 많이 닮은 것 같군. 부드럽고 조용한 부인이었지요."
  "라라가 당신이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하기에  일단 만나기로 했습니다. 나 자신으
로서는 당신과 얘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용무가 있거든 어서 말씀하시기 바랍니
다."
  "그래 그 동안 안녀하십니까!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지나치게 허
물없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은 참 잘 어울립니다. 아니, 지극히 다정한 사이인 것같이
보이는군요."
  "그만두시오. 당신한테 관계 없는 말은 하지 마시오. 구태여 당신더러 알아달라는 건 아니
니까. 잊어버리신 것 같군요."
  "그렇게 대번에 흥분하면 골란합니다. 젊은 양반, 그러고 보니 당신은 아무래도 부친을 닮
은 것 같군요. 그분도 어지간히 급한 성미였으니까. 유감스럽게도 두 분은 너무나 세상 물정
을 모르는 어린앱니다, 어린애예요. 난 여기 온 지가 이틀도 채 안 됐지만, 당신네들에 대해
모든 걸 다 알았어요. 아마 당신네들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네들은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지금 두  분은 그야말로 낭떠러지 끝을 걷고  있는 거나 다름없단
말입니다. 어떻든 위험을 피할 방도를 취하지 않으면 자유는  고사하고 목숨까지도 잃고 맙
니다.
  공산주의 인간형(人間型)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런 형에 잘 들어맞는 사람은 드물지만, 지
바고 선생, 당신만큼 이 생활 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배척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그들을 자극하지요? 당신의  존재 그 자체가 공산주의 세계를  우롱하고
모독한다고 할 수 있어요. 더욱이 당신의 사상을 아는 사람이 없다면 모르지만, 지금은 여기
에 모스크바에서 온 영향력 잇는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들은 이  고장 데미스(법과 질서와
정의의 여신)의 고승(高僧)들의 눈 밖에 나 있어요. 안치포프와 치베르진  동무 같은 사람들
이 라라와 당신을 덮치려고 잔뜩 벼르고 있다는 걸 모르느냐는 말입니다.
  당신은 남자니까 자기 목숨을 어떻게 다르든 그건 당신  자신의 신성한 권리지요. 그러나
라라는 자유스런 입장은 아닙니다. 한 아이의 어머니니까. 아이의 생명, 아이의 일생의 운명
이 그녀의 손에 달렸어요. 경솔한 행위는 있을 수 없어요.
  아까 아침에 와서 라라에게 이 점을 입이 닳도록 설득했지만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더
군요. 당신이 거들어주시오. 당신의 말이라면 들을는지 모르니까요. 라라에겐 카첸카의 안정
을 무시할 권리가 없지 않습니까. 나는 결코 자기의 의견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아닙니
다. 더욱이 가가운 사람한테는. 라라가 당신으 뜻을 받아들이건, 안 받아들이건 그녀의 마음
이지요. 그 밖에 내가 할 말이라곤 전혀 없어요. 그런데 나는 당신의 생각을 조금도 알 수가
없어요.
  아니, 그러고보니까, 당신은 부친을 너무나  닮았군 그래. 그분도 당신처럼  외고집이었어.
그럼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하지만 꽤 복잡한 이야기니까 참고 끝까지 들어주어요.
  위에서는 커다란 개혁을 준비하고 있어요. 자, 잠시 기다려주어요. 내가 꽤 믿을만한 데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제는 좀더 민주주의 노선으로 옮겨서 법질서에 양보가 있을 것 같
아요. 이제 곧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징벌 부대는 폐지되겠지만 오히려 더 난폭하게  되어서, 자기가 잃었던 것을
되찾으려고 서두르게 될 겁니다. 당신을  제거한다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실입니다.  지바고
선생,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어요.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이 눈으로 보았으니가, 믿지  않아
도 좋아요. 당신이 살 수 있는 궁리나 해요. 더 늦기 전에.
  이것은 서론이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지금 태평양 연안의 연해주(沿海州)에는 쓰러
진 임시 정부와 해산된 제헌회의(制憲會議)에 계속 충성을 다하고 있는 정치 세력이 집결되
어 있습니다. 전직 국회 의원, 사회 활동가, 전 지방자치단체 중진이었던 사람들, 실업가들이
지요. 의용군의 장군들도 거기서 휘하에 남은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소비에트 정권은 이 극동 공화국의 탄생을 묵인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변경 지방에 그런
것이 생기면 적색(赤色) 시베리와와 외계(外界) 사이에 일종의 완충 지대 구실을 할 것이라
는 점에서 소비에트 정권에게도 유리할 테니까요. 이 광화국의  정부는 우선 연립의 형식을
취할 겁니다. 모스크바 측의 요구에 딸라 각료 자리의 과반수는 공사주의자들에게 안배하도
록 예정되어 있어요. 이렇게 만들어놓으면 언제든지 기회를 보아 쿠테타로써 공화국을 수중
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지요. 뻔한 속셈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남은 시간을 여하히
활용하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혁명 전에 아르하로프 형제나 메르클로프, 그 밖에도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사와 은행
관계 일을 보아 준 적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은 비밀리
에, 반은 소비에트 정부의 묵인하에 조각(組閣) 본부에서 사람이 찾아와 나한테 극동 공화극
정부의 법부장관 자리를 주겠다는 겁니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 지금 그리로 가는  길입니다.
이건 소비에트 정부측에서도 다 알고 묵인하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공개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라라와 당신을 함게 데리고 갈 수 있는  입장에 있단 말입니다. 거기 가기만
하면 당신은 얼마든지 바다를 건너 가족이 있는 것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가족이 추방되었
다는 소식은 물로 알고 있겠지요? 큰 소동이 났었지요. 지금도 모스크바는  떠들썩하답니다.
라라한테는 스트렐리니코프를 구출하겠다는 것을 약속했습니다. 나는 합법적인 독립 정부의
일원으로서 동부 시베리아에서 스크렐리니코프를  찾아내어 우리들의 공화국으로  넘어로게
하도록 노력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탈출해 오지 못하면, 그때는 이족에서 억류하
고 있는 사람 중에서 모스크바 중앙 정권에 유용한 인물과 교환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
니다."
  라라는 이야기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 의아스러운  얼굴로 듣고만 있었으나, 코마
롭스키가 지바고와 스크렐리니코프의 안정을 보장하고 나서자 갑자기 긴장하여 얼굴에 홍조
를 띄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유라, 이 계획이 당신과 파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젠 아셨죠?"
  "이봐요, 라라, 그렇게 간단히 믿어버리면 안 돼요. 아직은 덜 익은 계획에 불과하니까. 물
론 나도 코마롭스키 ㅆ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속이려 든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아직
은 공중누각이나 다름없잖소! 그보다도  코마롭스키 씨, 나의 신상에  대해 염려해 주신 건
고맙지만, 설마 내가 그걸 원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겟죠? 스트렐리니코프에 관해서는 라
라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지요? 지금은 우리가 코마롭스키와 함께 갈 것인가 안 갈 것인가, 그것
만 결정하면 그만이에요. 당신이 안 가시면 나도 안 간다는 건 잘 아시지요."
  코마롭스키는 지바고가 진료소에서 가져온 물에 희석한 알콜을 자주 마시면서 감자를  씹
고 있었으나 차츰 취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2
  밤도 꽤 깊었다. 이따금 심지 끄트머리를 떼어버리면 등잔불이  한순간 방안을 환히 밝게
비췄다가는 다시 어두컴컴해지곤 했다. 지바고와 라라는 졸음이 왔고 둘이서만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코마롭시키는 좀처럼 돌아가려는 기색도 없었다. 그의 존재는 커다란 참나무 찬장
과 창밖의 차가운 추위와 어둠과 함께 방안을 무섭게 짓눌렀다.
  코마롭스키는 취기가 감도는 눈을 거슴츠레하게 뜨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멀리  한곳을
응시하면서, 혀꼬부라진 소리로 같은 말을 여러 번 중얼거렸다. 그는 극동 공화국 얘기를 끈
질기게 되씹다가 이번엔 몽고의 정치적  의의를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바고와 라라는
잘 듣지도 않았지만, 무슨 까닭에 몽고에 대한 화제로 탈선하게 되었는지 몰랐다. 그따위 아
무런 상관도 없는 화제는 오히려 하품만 하게했다.
  "시베리아는 이를테면 신천지인 아메리카 대륙과  마찬가지요. 무진장한 가능성을 내포하
고 있어요. 시베리아는 위대한 러시아의 미래의 요람이며, 러시아의 민주화와 번영과 정치적
부활의 기둥입니다. 그러한 미래에 몽고는 그보다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위대
한 극동의 인방(隣邦)인 외몽고  말입니다. 당신은 이것에 대해  아십니까?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뻔뻔스럽게 하품을 하거나 눈을 깜박이고 있지만, 미개발된 지하자원을
무한히 간직하고 있는 1백 50만 평방 베르스타의 외몽고는  유사(有史) 이전의 처녀지 그대
로 입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아메리카는 이 나라에 탐욕의 손을 뼏쳐, 모든 경쟁국이  공
인하고 있는 우리 러시아의권익을 짓밟고 이  지구의 먼 한 모퉁이에 세력권을  부활하려는
미끼로 삼고 있어요. 중국은 몽고의 낙후된 봉건적 신권제(神權制)를 이용하여 라마승(僧)이
나 후트후트(몽고의 고승)를 움직이고 있어요. 적색 공산 러시아는  몽고 봉기인혁명동맹(蜂
起人革命同盟)의 하므질수와 제휴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 선거에 의한 후룰루따이(몽고 회
의)가 통치하는 진실한 몽고의 번영을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하고 싶어요. 몽고의
국경을 넘으면 마치 새처럼 자유스럽게 되기를!"
  아무런 흥미도 없는 화제를 끝없이 늘어놓는 바람에 라라는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코마
롭스키에게 악수를 청하며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돌아가시는 게 좋겠군요. 나도 이젠 자야겠어요."
  "이건 손님 대접이 너무하군, 이 시각에 나를 밖으로 몰아내다니. 낯선 도시라 난 길도 잘
모르잖소."
  "그럼 뭣 때문에 그렇게 오래 앉아 계셧죠? 아무도 붙잡지 않았어요."
  "왜 이렇게 나한테 심하게 대하지요? 숙소를 정했는지,  인사치레로라도 물어야 할 게 아
니오?"
  "내가 알 게 뭐예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죠. 여기서 주무실  생각이라면 우리가
자는 방은 안 돼요. 다른 방은 쥐 때문에 잘 수 없을 거예요."
  "쥐 같은 건 무섭지 않소."
  "그럼 맘대로 하세요."

  3
  "무슨 일이 있었소, 라라? 간밤엔 한잠도 자지 않더니, 오늘 종일 식사도 입에  대지 않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방안을 서성거리고만 있으니 어쩐 일이오? 뭐가 그렇게 걱정되어요? 걱
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소."
  "병원 수위 이조트가 또 다녀갔어요. 이 집 세탁부와 눈이 맞아 드나들고  있어요. 나한테
잠깐 들러서 위로를 하면서 무서운 비밀을 알려주었어요. 당신이  금명간 잡혀갈 거라는 거
예요. 그 다음은 저의 차례고요. 어디서 들은  말이냐고 물으니까, 폴칸(러시아 전설에 나오
는 반인반견{半人半犬}의 괴물)에서 들었다는 거에요. 폴칸이라는 건 이스폴콤(집행 위원회)
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봐요."
  라라와 지바고는 한바탕 웃었다.
  "그 말이 맞았어. 위험이 닥쳐오고 있는 건 사실이오. 한시 바삐 자취를 감춰야겠는데, 어
디로 가느냐가 문제요. 모스크바로 도망칠 수는 없고, 남들이 눈치챌 테니까. 남모르게 슬그
머니 없어져버려야 할 텐데. 그렇군, 당신의 제안에 따르기로 합시다. 바프이키노로 가잔 말
이오. 보름 동안이나 한 달 가량이라고 거기 숨어 있는 게 좋겠소."
  "고마와요, 유라, 정말 고마워요. 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당신이  바르이키노에 가고 싶
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알아요. 당신의 집으로 가서 산다는 건  당신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당신의 가족이 없는 텅 빈 방은 보기에도 견딜  수가 없을 거예요. 잘 알아요. 남의
괴로움에 행복을 심으려는 건 너무나  크고 신성한 것을 짓밟게 되는  거예요. 난 당신에게
그런 희생을 바랄 순 없어요. 게다가 당신 집은 너무나 파괴돼서 살  수 있게 하려면 큰 일
이예요. 그래서 난 그 집이 아니라 클리츠인네가 살던 집을 생각하고 말했던 거예요."
  "하긴 그래. 그런 데까지 신경을 써주어서 고맙소. 그런데, 잠깐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
는데, 잊었어. 코마롭스키는 어디 있지요? 아직도 여기 있어요, 아니면 벌써 떠났어요? 그자
와 다투고 집에서 쫓아낸 후로는 전혀 소식을 듣지 못했어."
  "나도 전혀 모르겠어요. 알아서 뭣해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렇긴 하지만, 내 경우와 당신 경우는 그자의제안에 대한 태도가 서로 다를 수 있지 않
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오. 나와 당신은 입장이 다르니까. 당신에겐 아이가 있
는데, 당신은 끝까지 나와 함께 있지 않소. 당신이 끝까지 나와 함께 행동하려는 그  심정은
알고 있지만, 사실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요.
  하지만 좋아요. 바르이키노 얘기나 합시다. 비축해 놓은 식량도 없고 힘도 희망도 없는데,
엄동이 몰아닥칠 황막한 무인지경으로 찾아가다니, 고르고 골라서 하는 미친 짓이야. 하지만
미친 짓밖에 우리가 할 일이 남지  않았다면 그 짓이라고 해야지. 우리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여봅시다. 삼제바토프한테 부탁해서 말을 빌어 봅시다. 그 사람이나 그 사람 밑의  암매상
한테 밀가루와 감자도 좀 꾸지요. 도저히 갚을 재간은 없지만. 삼제바토프에게는 말이  도로
필요할 때까지 바르이키노에 오지 않도록 부탁해야겠어. 얼마 동안  우리 둘이서만 있고 싶
으니까. 하여튼 가기로 합시다. 그리고 절약해서 쓰면 1년은 쓸 장작을 1주일 동안에 때  버
립시다.
  아니, 내가 또 실없는 소릴 지껄였군.  용서하시요, 입버릇이 되어서. 어리석은 감정은  빼
버려야지! 그런데 실은 지금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있어요. 불길한 말이지만, 죽음의
사자(使者)가 우리의 문을 노크하고 있단 말이오.  우리들의 생명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
소. 그 짧은 기간이 될 수 있는 한 보람 있게 보내야 하지 않겠소. 그 기간은 인생에 이별을
고하는 데 보냅시다. 영원한 이별을 앞둔 마지막 밀회로. 우리가 귀중하게 여겨온 모든 것에
이별을 고하고, 우리에게 생활의 꿈을 주게 하고 양심을 가르쳐준 사상에 이별을 고하고, 희
망에 이별을 고하고, 우리 서로 이별의 말을 주고받읍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서로 밤의 밀
어(密語)를 속삭입시다. 나의 은말한 천사인 당신이  전쟁과 동란의 하늘 밑에서 내 인생의
종막에 나와 함께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아직 어렸을
때, 평화로운 하늘 아래서 내 인생의 시발점에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당싱은, 그날 밤 커피색 제복을 입은  여학교 졸업반 학생이, 여관방의 어둠 속에  있었어
요. 지금도 당신은 그때와 조금도 변한 데가 없소. 지금처럼 그때도 놀랍게도 아룸다웠어.
  그때 당신이 나한테 던진 그 매혹적인 색깔, 그 어둑어둑한 빛과 사라져가는 소리가 후에
나의 전존재에 배어들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어. 나는 이따금 그  마
법의 힘을 알아내려고 고민해왔었지.
  여학교 제복을 입은 당신이 방안의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났을 때, 당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과 함께 깨달았던 거요-이 연약하고 가냘픈
몸매의 소녀는,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여자다운  모든점을 전기처럼 극한까지 내포하
고 있었어. 만약에 다가가서 대는 순간에 눈부신 불꽃이 일어나 방안을 대낮처럼 밝히고, 나
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한평생 억제할 수 없는 연모와 애수의 자력에 걸려들고 말리라
생각했어. 나는 쏟아지는 눈믈을 억제하지 못하고 가슴에 뜨거운 것을 느끼며 울었어요.  그
리고 나는 이렇게 스스로 묻기도 했소-여성을 사랑하고 여성의 전파를 흡수하는 것이 이토
록 괴로운 것이라면, 그 전파를 발하여 사랑에 눈뜨게 하는 자신은  백 배 더 괴로울 게 아
닌가.
  그래 드디어 고백하고 말았어. 미칠 것만 같았어. 그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
  라라는 옷을 입은 채 침대 한쪽 끝에 누워 있었다. 지바고는 그 옆 의자에 앉아서 이따금
입을 다물었다가는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얘기를 계속하곤 했다.  라라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입을 반쯤 벌리 채 지바고를 쳐다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
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지바고를 꼭 껴안고 속삭였다.
  "유라! 유로치까! 당신은 정말 총명한 분이예요! 무엇이든지 다 알아맞히는군요! 유라,  당
신은 나를 지키는 요새(要塞)이며 의지한 피난처예요. 아아, 하나님, 나의 모험을 용서해주십
시오! 유라, 난 너무나 행복해요! 우리 가요, 바르이키노로!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
이 있어요. 바르이키노에 가서 말씀드리겠어요."
  지바고는 라라가 임신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단
수긍하듯이 말했다.
  "알겠어요."

    4
  우중충한 잿빛 겨울날 아침에 그들은 유라친을 떠났다. 평일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용건
을 안고 거리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아는 사람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네거리에 있는  급
수장에는 집에 우물을 가지지 않은 주부들이 물통과 물지게를 옆에 놓고 줄지어 늘어서 있
었다. 삼제바토프한테서 얻은 갈색 마링  자꾸만 내달리려는 것을 지바고는  고삐를 당기며
조심스럽게 주부들의 대열을 우회했다. 물통에서 흐른 물이 길바닥에 얼어붙어 썰매가 자꾸
미끄러져 인도 쪽으로 쏠리며 가로등과 경계석에 눈받이를 부딪쳤다.
  전속력을 내어 썰매를 달리던 도중, 인도를 걸어가던 삼제바토프를 만났으나 본체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이번엔 코마롭스키가 걸어가는 것을 보았으나, 그
가 유라친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 인사고 건네지 않고 지나쳐버렸다.
  글라피라 툰체바가 맞은편 인도에서 소리쳤다.
  "어제 떠났다고들 하더니 헛소문이었군. 감자 사러가는 길이오?"
  그러고는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는 시늉을 하고는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시모치까를 보았을 때는 썰매를 멈추려 했으나 공료롭게도 비탈길이어서 멈춰 서지를  못
했다. 그러지 않아도 내달리려는 말의 고삐를 힘껏 당겨야 했다. 시모치까는 두세 장의 목도
리를 온몸에 감고 있어서, 마치 통나무처럼  보였다. 뻣뻣한 걸음으로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썰매까지 다가와서 이별의 인사를 했다.
  "돌아오시면 그때 또 얘기합시다, 지바고 선생."
  마침내 시내를 벗어났다. 지바고는 겨울에도 이 길을 다녔으나 기억에 남는 것은 여름 풍
경뿐이어서 무척 생소한 느낌이었다. 식량 주머니와 그밖의 짐들은 썰매 앞쪽의 건초더미에
깊이 넣고 단단히 묶어놓았다. 지바고는 이 고장 사람들이 하듯이 널찍한 썰매 바닥에 무릎
을 세우거나, 썰매 가에 옆으로 앉아 삼제바토프한테서 빈장화를  신은 발을 밖으로 늘어뜨
린 자세로 말을 몰았다.
  오후가 되고 해질 무렵까지는 꽤 시간이 있었으나, 어느덧  겨울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지
자 지바고는 갈색 말에 연방 채찍질을 했다. 말은 쏜살같이 달렸다. 썰매는 차바퀴나 썰매에
깊게 패인 눈길 위를 조각배처럼 위아래로 움직이며 떠서 가는 것 같았다.
  카첸카와 라라는 슈바를 입어서 움직이기 어려웠다. 길이 옆으로  기울거나 깊이 패인 곳
에서는 썰매 한쪽으로 데굴데굴 굴러서 건초 속으로 파묻히곤 했다. 그러자 그들은 비명 소
리를 지르거나 뱃가죽이 찢어지듯 웃어댔다. 이따금 지바고는 일부러 썰매 한쪽을 눈더미에
올려서 썰매가 갑자기 기울면서 라라와 카첸카는 눈 속으로  내던지기도 했다. 지바고는 말
고비를 서서히 당겨 몇 걸음 지나서 말을 멈추고 썰매의  균형을 잡았다. 그러면 그들은 눈
을 털고 썰매에 올라와선 웃으며 지바고한테 눈을 흘겼다.
  "내가 빨치산한테 잡혔던 곳을 가르쳐주지."
  유라친 시에서 꽤 멀리 떨어졌을 때 지바고는 이렇게 말했으나, 벌거숭이가 된 숲과 죽음
과도 같은 정적(靜寂) 그리고 주위가 온통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어서, 가도 가도  비
슷한 장소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들판에 서 있는  모로베크친킨회사의 첫번째 간판탑을 보
자 빨치산한테 붙잡힌 숲속의 두 번째 간판으로 잘못  보고, 지바고는 "자! 이제 금방이야."
하고 외쳤다. 그러나 사끄마 십자로 숲속에 서있는 두번째 광고탑을 지나게 될 때에야, 검은
숲을 은빛 레이스처럼 깊은 안개가 가려서 잘못 보았던 사실을 알았다.
  바르이키노에 도착했을 때, 아직도 해는 남아 있었다. 지바고가 살던 집은 마을 어귀에 있
었으므로 우선 그 집  에서 썰매를 멈췄다. 마치 무엇을 훔치려는 강도처럼 황급히 집 안으
로 달려 들어갔다. 곧 날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집 안은 벌써 어두컴컴한데다
가 급히 서둘러대는 바람에 집 안이 온통 뒤죽박죽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눈에 익은
가구의 일부는 그대로 있었다. 바르이키노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더 이상 황
폐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바고는  가족이 출발할 때 이곳에  없었으므로 물건을
얼마나 가져가고 또 얼마나 남겨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라라가 말했다.
  "빨리 서둘러야겠어요. 곧 캄캄해질 테니까 우물쭈물하고 있을 사이가 없어요. 이 집에 자
리를 잡을 생각이면 말을 헛간에 넣고 식량은 문간방에 들여놓고, 우린 이 방을 써야겠군요.
하지만 나는 반대예요. 여기선 당신이 괴로울 거예요. 당신이 괴로우면 나도 괴로워요. 여긴
당신의 침실이었나요? 아, 아이 방이었군요. 당신 아들의 침대가 있는 걸 보니. 카첸카가 쓰
기엔 작겠군요. 하지만 창문은 제대로 있고 벽이나 천장도 틈이 나 있지 않군요. 그런데  페
치카가 멋있군요. 전에 와서도 놀랐어요. 당신이 괜찮다면 여기서 살아도 좋아요. 그럼 슈바
를 벗고 일하겠어요. 우선 페치카에 불을 지펴서 일주일  동안은 덥혀야 해요. 웬일이죠, 당
신? 한마니도 없으시군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하오. 역시 미쿨리츠인네 집으로 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그들은 다시 썰매를 몰았다.

   5
  미클리츠인네 집엔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지바고는  간신히 문짝에서 나사못과 나무조각
이 붙은 채 자물쇠를 떼어냈다. 아까처럼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 모자와 방한화를 벗을 사이
도 없이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이내 눈에 띈 것은 집안 집기들이었다. 미쿨리츠인의 서재만 하더라도 말끔
히 정돈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 여기서 최근까지 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는 누굴가? 주인 부처나 또는 주인네 식구라면 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현관문을 일
부러 자물쇠로 잠근 것은 어쩐 일일까? 더욱이 주인 부처가 여기 오랫동안 살았다면 집안을
죄다 정돈하지 않고 왜 하두 방만  정돈했을까? 아무래도 미쿨리츠인네 식구는 아닌 것  같
다. 딴사람이 들어와 살았다면 대체 누굴까?  지바고도 라라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이러저리 숨어다니는 백위군 장교일 거야. 돌아오면 함께 살기
로 하자.' 그들은 이렇게 결정했다.
  언젠가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지바고는 서재 문지방에 못박힌 듯 서서 널찍하고 아늑한 방
안과 창가에 놓인 커다란 책상을 선망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쾌적한 환
경 속에서라면 끈기 있게 알찬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뜰안의 부속 건물에는 헛간 바로 옆에 외양간이 있었으나, 문이 잠겨 있어서 그날 밤만은
우선 잠겨져 있지 않은 헛간에 말을 매기로 했다. 지바고는  말에서 썰매를 풀어 내고 땀을
식힌 후 우물에서 물을 떠서 말에게 먹였다. 썰매 바닥에  깔았던 건초를 먹이려 했으나 너
무나 밟히고 부스러져서 먹일 수가 없었다. 다행히 헛간 구석에  건초가 꽤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날 밤은 옷을 입은 채 슈바를 뒤집어쓰고 온종일 놀다 지친 아이들처럼 깊이 잠들었다.

  6
  아침에 잠이 깨기가 무섭게 지바고의 시선이 자꾸만 창가의  책상으로 끌렸다. 뭔가 쓰고
싶은 욕망 때문에 손이 근질거렸으나, 밤이 되어 라라와 카첸카가 잠들 때까지 참기로 했다.
그때까지 방 두 개만이라고 깨끗이 정돈해야 하기 때문에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가 밤에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
은 아니다. 그저 펜을 손에 쥐고 무엇인가 쓰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꼈던 것뿐이었다.
  처음엔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긁적여 보려고 했다. 여태껏 써  본 적이 없는 흘러간 회
상이나 메모 형식의 글을 쓰면 된다. 오랫동안 무료하게 지내서, 잠들어버린 능력을  일깨우
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오래 머물러 있게 되면 기회를 보아 무엇이든 새롭고 보람 있
는 글을 쓰고 싶었다.
  "여보, 무얼 하고 계시죠? 바쁘신가요?"
  "페치카에 불을 때고 있어요. 왜 그러지?"
  "이렇게 불을 때다가는 사흘도 못 가서 장작이 떨어지겠는건. 전에 살던 집 헛간에 가 봐
야겠어. 장작이 남아 있을 거야. 썰매로 몇  차례 실어와야지. 내일 가 보겠어. 빨래  대야가
필요하다구?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나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질 않아요. 없으면 할 수 없지요.  청소하려고 물을
많이 데워 놨더니 남은 물로 빨래를  하려구요. 당신도 세탁할 게 있으면 죄다  내놓으세요.
청소를 대강 마치면 우리 자기 전에 목욕을 해요, 네?"
  "그럼 금방 속옷을 내오겠소. 고마와요. 당신 말대로 장농이나 무거운 것을 벽가에서 옮겨
놓았어요."
  "됐어요. 빨래 대야가 없으면 설겆이 통으로  해 보겠어요. 하지만 기름이 더덕더덕  붙어
있어서 큰일이예요. 이것부터 씻어 내야겠군요."
  "페치카가 더워졌으니 나머지 서랍들을  정리해야겠소. 여러 가지  물건이 쏟아져 나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 비누와 성냥이 나오는가 하면 연필이나 종이등 필기구가 나오
기도 하구. 그리고 여기 책상 위엔 석유가 가득 들어 있는 램프가 놓여 있군. 이건 미쿨리츠
인네 물건이 아니라는 건 내가 알아요. ?딴 사람이 가져온게 틀림없어요."
  "그게 웬일이죠! 필시 수수께끼 인물이 갖다 놓았을 거예요. 마치 쥬리 베르니(1828∼1905
프랑스의 공상 과학 소설가)의 소설 같군요. 아, 정말  당신이 뭐라 하셨더라! 더운 물이 펄
펄 끓고 있어요."
  그들은 바삐 움직였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분주히 드나들며 물던을 나르다가는 서로 맞
부딪치기도 하고, 발 앞에 얼씬거리는 카첸카와 부딪치기도 했다. 카첸카는 심심해서 방안을
서성이며 길을 가로막는가 하면 옆에서 툭 튀어나오기도 하여  청소를 방해했다. 그러지 말
라고 나무라면 금세 토라져서, 추워 죽겠다고 투덜거렸다.
  '요즘 아이들은 가엾군'하고 지바고는 생각했다. '어른들의  방랑에 희생되고 있으니. 그래
도 불평 없이 잠자코 있는 걸 보면 더욱 가엾어진다.'
  "춥긴 뭐가 춥다는 거냐?" 그는 아이에게 말했다. "페치카가 벌겋게 타고 있는데.:
  "페치카는 따뜻한지 몰라도 난 추운걸요."
  "조금만 참아요. 저녁엔 후끈해질 테니까. 어디 그뿐이냐, 목욕까지 시켜 주겠다고 했잖았
어? 그때까지 이거나 가지고 놀려무나."
  그는 창고에서 리베리의 장난감을 한아름 갖다 마룻바닥에 놓았다.  성한 것도 있고 망가
진 것도 있었다.
  "이건 뭣하거 가져왔지요?" 카첸카는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건 다 딴 사람 거예
요. 그리고 이건 조그만 아이들의 장난감 아녜요? 난 이젠 꼬마가 아니란 말예요."
  그러나 곧 마음이 변했는지 양탄자 한가운데에 주저앉았다. 카첸카의  손이 닿자 온갖 종
류의 장난감이 건축 자재로 변해 유라친에서 가져온 인형의 집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딸이 놀고 있는 것을 부엌에서 바로보던 라라가 불쑥 말했다.
  "보세요, 저것이 가정 생활의 본능이며, 파괴할 수 없는  단란과 질서에 대한 동경이예요!
아이들은 정직해요. 진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남에게 떨
어질까봐 스스로 더없이 귀중한 것을 짓밟고 추악한 것을 찬양하며, 아해할 수도 없는 것을
지지하고 나선단 말예요."
  지바고가 어두운 현관에서 들어오며 말했다.
  "빨래 대야를 찾았소. 천장에서 새는 빗물을 받으려고  구석진 곳에 가을부터 놓아두었던
모양이오."

  7
  준비된 식량으로 라라는 사흘을 먹을 만한 음식을  마련했다. 점심은 감자 수프와 구운 양고기
에 감자까지 곁들인 호화판이었다. 줄곧 굶주려 온 카첸카는 신바람이 나서 깔깔거리고 떠들면서
실컷 먹더니, 졸음이 오는지 라라의 숄을 덮고 소파에 누워서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화덕에서 물러난 라라는 땀을 흘리고 피곤해서 딸처럼  졸음이 왔다. 그녀는 자기가 만든 음식
이 잘 되어서 흐뭇했으며, 설겆이를 뒤로  미루고 의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카첸카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녀는 식탁에 가슴을 대고 손으로 턱을 고였다.
  "여보, 이것이 헛된 일이 아니고 그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여기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고 힘껏 노력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당신은 우리가 여기 온 것이 둘이 함께 있기 위해서라는 걸
끊임없이 나한테 상기시켜 줘야 해요. 내가 우울해 하지 않게  용기를 북돋아 주세요, 네! 솔직이
말해서 우리는 지금, 염치없이 남의 집에 침입해서 자기들이 살기 좋게 멋대로 집을 정돈하고 있
을뿐만 아니라 쉴새없이 일하면서 정신을 딴 데다  돌려서, 이것이 현실의 인생이 아닌 연극이고
실생활이 아닌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 가공의 생활이란 것을 인식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리로 오자고 한 건 당신이었소. 나는 처음부터 반대였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결국 나쁜 건 나예요. 당신은 동요하거나 번민할 수  있어도 나는 언제나 한
결같이 논리적이어야 하니까. 당신은 전에 살던 집에  들어갔을 때 아들의 침대를 보고 괴로움에
기절한 뻔했었지요. 카첸카를 열려하거나 장래를 생각하는 건 당신과의 애정을 위해 희생해야 합
니다."
  "라라, 무슨 소리요, 흥분하지 말아요. 지금이라도 결코 늦지는 않았어. 나는 당신한테 코마롭스
키의 제의를 진지하게 고려하라고 권했어. 우린 말을 가지고 있으니까 당신이 원한다면 내일이라
도 유라친으로 돌아가요. 코마롭스키는 아직 유라친에 머무르고 있어요. 우리가 썰매를 타고 떠나
올 때, 거리에서 그 사람을 보지 않았소? 저쪽에선 우릴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돌아가면 말날 수
있을 거요."
  "내가 뭐라고 한두 마디만 하면 당신은 곧 못마땅하게 말씀하시는군요. 하지만 내 말이 틀렸나
요?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무턱대고 몸을 숨기려면 유라친에서도 돼요. 정말 살길을 찾으려면
코마롭스키가 말한 것 같은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해요. 나도 물론 그런 사람은 보기도 싫지만 어
쨌든 세상 물정에 밝은 실제적인 인간인  것만은 틀림없어요. 생각해보세요-여기라고 안전하다고
볼 수 없어요. 눈보라치는 허허벌판에서, 밤에 눈에 묻혀 버리면 아침에 기어나갈 수도 없을 거예
요. 게다가 그 수수께기의 인물이 은인이기는커녕 강도인지도  몰라요. 언제 우릴 죽일지. 당신은
무기를 가지고 있나요? 없지요, 그걸  봐요. 당신의 부주의가 겁이 날  지경이예요. 난 미칠 것만
같아요."
  "그럼 어떡하면 좋단 말이오? 나더러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하여튼 나를 언제나 당신에게 복종하도록 곽 잡아 주어요. 그리고 항상
상기시켜 주세요-나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을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라는  것을.
솔직이 말해서 당신의 토냐와 나의 파샤는 당신이나 나보다도 백 배 천  배나 훌륭한 사람들이예
요!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예요. 사람의 능력은 다른  모든 능력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아무
리 크더라도 축복받지 못하면 결실을 보지 못하는  법이죠. 하지만 우리는 하늘에서 키스하는 법
을 배우고 나서 동시에 이 세상에 보내진 거예요. 하늘에서 배우고 익힌 사라의 능력을 지상에서
서로 시험해보도록 내려보내 진 거예요. 이것은 완전 무결한 융합이에요. 안팎도 없고, 높고 낮음
도 없어요. 전존재가 완전히 한 몸으로 되고, 모든 것이 기쁨을 안겨주고, 모든 것이 영혼으로 되
는 거예요. 그렇지만 물결처럼 끊임없이 밀려드는 이런 티없는 애정에는, 아무래도 어린애처럼 안
전성이 없는 무책임한 요소가 따르기 마련이예요. 그것도 가정적인 평온과는 적대되는 자유 분방
한 파괴적인 요소예요. 그러니까 그 애정을 두려워하고 의혹의 눈으로 보는 것이 나의 의무가 아
닐까요?"
  라라는 지바고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당신과 나의 입장은 서로 달라요. 당신에겐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날개가 있지만, 여자인 나에
겐 땅에 웅크리고 병아리를 감싸주어야 할 날개가 있을 뿐이에요."
  라라의 말은 지바고에게 걷잡을 수 없는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달콤한 감정에 빠져서는 안 된
다는 생각에서 그런 내색은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들의 떠돌이 생활은 사실 정상적인  것은 아니오. 그건 당신의 말이  옳아요. 그러나 이건
우리 자신이 생각해낸 것은 아니잖소. 한없이 광분하게 된 것은 모든  사람의 운명이니까. 이를테
면 이건 시대 정신이란 말이오.
  나도 오늘은 아침부터 당신과 거의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나는 조금이라고 오래 여기 머물러
있고 싶어요. 나는 얼마나 일을 하고  싶었는지 말할 수 없었어. 일이라고 해서  농사일을 말하는
건 아니오. 전엔 여기서 식구들과 함께 열심히 농사일도 해 보았고, 그것이 잘 되었소. 그러나 또
다시 그런 일을 할 만한 기력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언젠가는 사회 생활의 모든 면이 점차로 자리잡혀 갈 거요.  그때는 다시 책도 출판할 수 있게
될거요.
  그래서 나의 생각은 삼제바토프를 설득해서, 그에게 유리한 조건하에, 반 년  가량 우릴 먹여달
라고 부탁해봅시다. 그 동안에 나는 뭐든지 글을 써서  그에게 제공하지요. 예를 들어, 의학 입문
서나 예술 작품, 시집 같은 걸 말이오. 혹은 외국의  유명한 고전을 번역할 수도 있어요. 난 외국
어에 자신이 있으니까. 얼마 전에도 페테르부르그의 유명한 출판사 광고를 보았는데, 그 출판사는
번역물만 취급하고 있다는 거요. 번역도 훌륭한 교환 가치가 있으니까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
요. 하여튼 그런 종류의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나도 오늘 그런 생각을 해 보았어요. 그렇지만 어쩐지 여기서는 오래 배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그렇지만 여기 있는 동안, 당신한테 부탁이 하나 있어요. 앞으로 며칠 밤
은 하루에 두세 시간씩 나를 위해 희생해주어요. 그동안 저한테 들려 준 시를 정리해주세요. 내가
적어둔 것도 반은 분실해버렸고, 적어두지 않은 것도 꽤 많을 거예요. 지금 써  두지 않으면 당시
은 죄다 잊어버리고 말 테니까."
  8
  그날 저녁에 빨래하고 남은 더운물로 모두 목욕을 했다. 라라는 카첸카를  씻어 주었다. 지바고
는 상쾌한 기분으로 창가에 놓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등뒤의 방에서는 젖은 머리를 타월로 둘둘
감은 라라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면서 카첸카를 재우고  있었다. 지바고는 이제 누구의 방해도 받
지 않고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뻐서 견딜 수 없었으며,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밤 한 시였다. 그때까지 자는 체하고 있던 라라도 잠이 들어버렸다.  그녀와 카첸카의 속옷이며
침대의 시트 등이 새하얗게 보였다. 라라는 그 무렵에도 용케 빨래에 풀을 먹였다.
  지바고는 감미롭게 정적을 호흡하면서 안일하고 완전한 행복에 휩싸였다. 등잔 불빛이 흰 종이
를 부드럽게 비추고 잉크 표면이 황금빛으로 비쳤다. 창 밖은 창백한  엄동의 밤이었다. 지바고는 
어두운 옆방으로 걸어가서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보금달 빛이 눈 덮인 들판을 달걀
흰자나 흰 그림 물감처럼 끈끈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겨울밤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더할 데가 없
었다. 지바고의 마음은 편안했다. 그는 밝고 따뜻한 방으로 되돌아가 다시 펜을 집었다.
  생동하는 손의 움직임을 전하면서 개성을 잃지 않고 영혼이 없는 무감각한 인상을 주지 않도록
힘차고 큼직한 필체로, 자작시를 상기하여 추고를 거듭하면서 <성탄제의 별>과 <겨울 밤>을 비
롯한 여러 편의 시를 썼다. 후에 이러한 시들을 잃어버려서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 다음에는 언젠가 손을 댔다가 도중에 내던졌던  시로 옮겨가서, 지금 당장 그것을 완성하지
는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시의 정신 속에 잠겨 다음을 계속해서 쓰기 시작했다.
  몇 줄을 어렵지 않게 쓰다간 스스로 감탄할 만한 비유가 떠올라, 이른바 영감이 다가오고 있음
을 느꼈다.
  예술 찬조를 지배하는 힘의 관계가  뒤바뀐 느낌이었다.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시인도 아니고,
시인의 표현하려고 애쓰는 영혼의 상태도 아니었다. 표현의 매개체인 언어였다. 미와 의미의 샘이
며 그릇인 언어가 시인을 대신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청각을 울
리는 음향으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무서운 속력으로 힘차게 흐르는 음악의 모든 것을 포옹한다.
  그리고 냇가 바닥의 돌을 굴리고 물방아를 돌리며 엄청난 힘으로  달리는 물살처럼 솟아나오는
언어 그 자체가, 자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이에 운과 리듬, 그 밖에  더욱 중요하면서도 여
태까지 인정되지 않고 고려되지 않던 여러 가지 형식을 창조했다.
  이러한 순간에 지바고는 자기 위에서 자기를 움직이는  시적 창조의 힘을 뚜렷이 느꼈다. 그것
은 세계의 사조와 시의 움직임, 말하자면 그 미래에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면,  혹은 역사적 발
전이 움직임 속에 들어맞게 될 것이라고 의식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잠시 동안 그는  자책과 불만에서 풀려나 예리한 열등감에서  벗어났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의 시야에 새하얀 베게를 베고 잠들어 있는 라라와 카첸카의 얼굴이 비쳤다. 깨끗한 속옷, 깨
끗한 방안, 그리고 모녀의 깨끗한 얼굴이 밤과 눈과 별과  달에 함께 얽혀서 지바고의 마음을 파
도처럼 소용돌이쳐 흘렀다. 그는 존재의 더없는 깨끗함에 가슴이 뭉클했다.
  '주여! 주여! 이것이 모두 저의 겁니까? 왜 이다지도 많은 것을 저에게 주십니까? 왜 당신 곁에
제가 가까이 있도록 허락하시고, 당신의 별 아래, 한없이  귀중한 당신의 땅에서 방황하며, 이 어
리석고 방향도 모르며 불운하고 몽매한 자를 당신의 발 앞에 부르셨나이까?'
  세 시경에 지바고는 책상과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  마음과 몸을 하염없이 쏟았던 정신이 집중
으로부터 행복하고 고요한 현실로 돌아왔다.  창밖에 펼쳐진 황량한 들판  끝에서 갑자기 무언가
원망에 찬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는 밖을 내다보려고 캄캄한 옆방으로 갔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유리창에 온통 성에가 얼어
붙어 밖이 잘 보이질 않았다. 지바고는 현관  문틈의 바람을 막으려고 가려놓은 양탄자를 치우고
슈바를 걸치고 현관으로 나갔다.
  그림자 하나 없는 눈 덮인 벌판에 흰 달빛이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어서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잠시 후 뱃속에서 끓어오르듯 긴 포효가 멀리서 들리더니, 골짜기 저쪽 들판에 연필로
짧게 그은 선 정도의 조그만 네 개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늑대들이 코빼기를 나란히 하고 서서  미클리츠인네 집 창문을 향해  짖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지바고가 늑대임을 알아차린 순간 짐승들은 홱 몸을  돌려 개들처럼 달려가 버렸다. 그가 늑대들
이 어느 방향으로 도망쳤는지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늑대들의 모습은 없었다.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그는 생각했다. '아주 가까운 곳에 늑대 굴이 있는 게 아닐까? 저 골짜
기에 있는지도 모르겠군. 무서운 일이야! 삼제바토프의 말이 마구간에 있는 걸 냄새 맡은 게 아닐
까.'
  라라가 놀라지 않도록 당분간 아무 말도 안  하기로 작정하고, 집안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잠그
고 문틈을 막은 후 다시 책상으로 다가갔다. 
  등불은 여전히 발게 타오르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아직도 그냥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나요, 내 밝은  등불인 당신은?" 라라가 잠이 덜 깬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 내 옆에 가까이 앉으세요. 방금 꾼 꿈 얘기를 들려드릴께요."
  이윽고 지바고는 등불을 껐다.
  9
  다음날도 꿈처럼 조용히 지나갔다. 집 안에서 어린이 썰매를 찾아냈다. 지바고는 앞뜰 눈더미를
삽으로 굳게 다진 다음 물을 부어 얼음산을  만들어주었다. 카첸카는 두 볼이 빨개지며 깔깔거리
고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가는 다시 새끼줄에 맨 썰매를 끌고 올라가곤 했다.
  추위는 눈에 띄게 더했다. 양지바른 뜰은 대낮의 햇볕을 쬐며 눈이 누렇게 되고, 이윽고 재빨리
찾아온 황혼의 보라빛 그림자가 꿀처럼 누런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라라가 세탁을 하고 목욕을 했기 때문에 집 안에 습기가 가득했다. 창문엔 성에가 더욱 두껍게
끼고, 수증기에 젖은 벽지가 천장에서 방바닥까지 부풀어  올랐다. 방안은 어둡고 침울했다. 지바
고는 장작과 물을 운반하고 나서, 어제에 이어 다시 집  안을 샅샅이 뒤져서 오늘도 새로운 것을
많이 찾아냈다. 라라는 아침부터 여러가지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바고는 틈틈이 그녀를
도왔다.
  한창 일을 분주히 하다가 서로 손이 맞닿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손에 들었던 물건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억제할 수 없는 은밀한 애정의 발작에 모든 잊어버리고 빠져들고  말았다. 이리하여 시
간은 사정없이 흘러,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꽤 시간이 늦었었다. 카첸카를너무 오랫동안 돌보
지 않았거나 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았던 일이 생각나, 허겁지겁  옷매무시를 고치고 송구스러운
생각이 들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바고는 잠을 덜 잔 탓으로 머리가 아팠다.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의식이 몽롱하고 기력이 약
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중단했던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연기처럼 졸음을 느끼며 일했다. 졸음은 주위의  모든 것을 휩싸고 그의 생각마저 뒤덮었
더. 모든 것에 넓게 깔린 몰롱한 안개가 말끔히 개는 마지막 단계의 직전이었다. 최초의 원고처럼
낮의 감미로운 무의는 밤의 창조에 필요한 준비가 되니까.
  그의 피곤한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했다.
  지바고는 바르이키노에 정착하고 싶은 자기의  꿈이 실현될 수 없을  것이며, 라라와의 이별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영영 잃게 될 것이며, 삶의 의욕을 잃게 되고, 나아
가서는 생명까지도 잃게 될 것이다. 그의  마음은 우수에 차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한시
바삐 밤이 되어.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그 우수를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간밤에 목격한 늑대 떼가 온종일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늑대떼는 달밤의 들판
에서 짖어대는 현실의 늑대떼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시의 주제가 되었고, 지바고와 라라를 파멸시
키려는, 아니면 바프이키노에서 찾아내려는 목적을 지닌 악귀의 상징으로  변했다. 이러한 마귀의
생각은 밤이 되기까지 점점 심해져서, 드디어 슈치마에 유사 이전의 괴물  발자국을 발견하고, 한
없이 큰 용이 지바고의 피를 요구하고 라라의  몸을 탐내서 계곡에 숨어 있는 공상까지  하게 됐
다.
  밤이 되었다. 지바고는 전날 밤처럼 책상 위의 등불에 불을 밝혔다.  라라와 카첸카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원고는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하나는 기억하고 있던 시를 추고해서 깨끗이  정서한 것이고, 새
로 쓴 시는 줄거리를 읽기도 어렵게 난잡한 필체로 씌어 있었다.
  언제나 지바고는 갈겨쓴 초고를 읽으며서 깊은 실망에  빠지곤 했다. 간밤에는 눈물이 날 만큼
감동되었고, 그중 두세 절은 뜻밖에 잘 되었다고 스스로 감탄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
보니 한심스럽게도 엉성했다.
  될수록 감정이 노출되지 않고 밑바닥에 깊숙이 가라 앉아서 겉으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흔
히 쓰는 형식 뒤에 숨겨진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하는 것이 그이  평생의 꿈이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하고 소박한 스타일이면서도 시를 읽고 듣는 사람의 마음이 부지불식간에 그 시의 핵심에 도
달할 수 있는 그런 스타일을 이룩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거기까진 아직도 먼 거리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날 밤, 그는 순진할이만큼 소박한 자장가를 생각케 하느느 따스한 애정과  공포, 비수와 용기
에 뒤얽힌 감정을 표현하고, 그것이 언어로서가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금 시의 행을 낱낱이 허물어버리지 않도록  묶어서 그 시도를 재검토해 보고, 내용이
부족한 것을 알았다. 지바고는 쓰기 시작한 시를 깨끗이 지우고, 같은 서정시 형식으로 용사 예고
리(러시아 구비 문학에 나오는, 용을 퇴치한 장수)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폭넓은 보격으
로 써나갔으나 시 정신과는 관계 없는 규칙적인 격식이 판에 박힌 듯  인위적인 음률처럼 들려서
싫증이 났다. 그래서 과장된 음률과 중간 휴지를 포기하고 너무나 말이 많은 산문은 짧게 고쳐서
사각음까지 행을 압축했다. 펜을 움직이기는 둔했으나 감흥은 한결 강했다. 시는  활력을 더해 갔
으나 여전히 말이 많아지기 쉬웠다. 여기서 행을 더 압축했다. 그리하여  보격속에 시어가 농축되
어, 지바고한테서 졸음의 마지막 흔적을 사라지게 하고 타오르는 흥분을 느끼게  했다. 짧은 행을
채우게 될 적절한 언어가 운을 타고 샘솟았다.  사물은 언어로 표현되자마자 구체적인 형상을 그
렸다. 쇼팽의 담시곡에 평보로 걸어가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게오르기 포베도노세쯔(러시아의
전설적인 용사)가 말을 타고 광막한  대평원을 질주하다가 멀리 사라져  가는 뒷모습이 지바고의
눈앞에 선했다. 그는 정신없이 펜을 휘두르자 언어나 행이 제자리를 잡아갔다.
  지바고는 글쓰기에 열중하여 라라가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옆으로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
다. 발뒤꿈치까지 내려오는 긴 자리옷 때문인지 그녀는 날씬하여 실제보다 키가  더 커보였다. 지
바고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내밀며 조용히 물었다.
  "저 소리 들리죠? 개가 짖고 있어요. 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인가 봐요. 무서워요. 불길한
징조예요. 날이 새면 곧 떠납시다. 여기선 한시도 더 견딜 수가 없어요."
  한 시간 가량이나 여러 가지로 달래고 위로해서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자 라라는 잠이 들었다.
지바고가 현관 앞 층계에 나가보니, 늑대들이 어젯밤보다 더 가까운 곳까지 와 있다가 날쌔게 사
라져버렸다. 지바고는 이번에도 늑대들이 달아난 방향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늑대떼는 한데 몰려
있어서 몇 마리가 되는지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어제보다 수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10
  바르이키노에 와서 열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처음 왔을 때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때 자취를 감추었던 늑대들이 간밤에 또 나타나서  짖어댔다. 이번에도 개가 짖는 것으로 오인
한 라라는 불길한 징조에 겁을 집어먹고 내일은 꼭 유라친으로 돌아가겠다고 서둘렀다.
  다시 그녀의 차분했던 기분이 어두운 불안으로 바뀌었다. 라라와 같은,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거
나 게으름피우거나 낭비하는 버릇이 없는, 일하기를 좋아하는 여인한테는 당연한 것이었다.
  똑같은 일이 그대로 반복되었다. 그러니까 두 주일이 지난 그날, 이때까지 여러번 있었지만, 라
라가 떠날 준비를 시작하면서 중간의 한 열흘은 없었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우중충하게 흐린 날씨여서 집안에 또  습기가 차고 어두컴컴했다. 추위는  좀 덜한 듯싶었으나
구름이 낮게 덮인 컴컴한 하늘에서는 금새 눈이라고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수면 부족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지바고는 몸과 마음이 무척 피곤했다.  머리 속이 혼란해서 정신을 집중할 수
가 없었으며, 몸도 쇠약해서 몹시 추위를 탔다. 그는 몸을 움츠리고 두 손은  비비면서 싸늘한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는 라라가 어떻게 마음을 정했는지, 그녀의 결심에 따라 자기가 무슨 일을 해
야 할 것이지 알 수가 없었다.
  유라친에 돌아가서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지, 라라 자신도 막연했다. 지금이 혼돈된 자유속
에서 갈팡질팡하느니 차라리 분명하게 정해진 엄격한 질서에 복종하여 직장을  가지고 성실히 의
무를 다하면서 살 수만 있다면, 라라는 자기 반생(半生)을 희생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
다.
  이날 아침에도 그녀는 전처럼 침대를 정돈하고 방안을 거두고 나서 지바고와 라라의 아침 식사
를 차렸다. 그러고 나서 짐을  꾸리기 시작하고, 지바고에겐 말에  썰매를 매어달라고 했다. 떠날
결심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지바고는 결심을 번복하도록 권할 수도 없었다. 유라친에서는  지금 한창 검거 선풍이 불고 있
으니, 불과 얼마 전에 자취를 감췄다가 다시 돌아간다는 건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무서운 허허벌판에서 무기도 없이 외따로 떨어져 산다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
다.
  또한 헛간에서 긁어모은 건초는 이제는  바닥이 났다. 여기에 아주  정착한 작정이라면 부근을
돌아다녀서 건초나 식량을 찾아 보충할 수도 있지만,  언제 떠날지 모르는 처지에 공연히 헛수고
할 것도 없었다. 지바고는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한 기분으로 말을 끌어내어 썰매를 맸다.
  그는 썰매를 잘 맬 수가  없었다. 삼제바토프가 가르쳐주었으나 잊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투른
솜씨로 필요한 조치는 해놓았다. 쇠고리가 달린  가죽끈을 말의 멍에채에 묶고, 그 끝을  한쪽 채
끝에 두세 번 감아서 동여맸다. 그리고 말의 배에 한 발을 대고 목걸이를 단단히 끼웠다. 그 밖의
일을 다 마치고 나서, 말을 현관 앞에 대고 안으로 들어가 라라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알렸다.
  라라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녀와 카첸카는 길 떠날 채비를 미치고 짐도 꾸려 놓았으나, 그녀
는 눈물이 글썽해서 두 손을 깍지 끼고 지바고에게 좀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도 의자에 풀
썩 앉더니 다시 벌떡 일어나 울먹이는 소리로 '그렇지 않아요'를 연발하며 몹시 재빠를 어조로 뇌
까렸다.
  "내가 나쁜 게 아녜요. 왜 이렇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지금  떠날 수 없지 않아요?
곧 어두워질 텐데 밤길을 갈 수는 없잖아요? 더구나 그 무서운 숲속을 어떻게 가요? 그렇잖아요?
난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하겠어요. 나 자신의 힘으로 결심할 수가 없어요. 뭔가 목덜미를 잡아당시
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 당신은 알고 계실 거예요. 그렇잖아요? 왜 잠
자코 계세요? 하룻밤 여기서 더 자고 내일 날이 새자마자 떠나기로 해요, 네! 당신은 뜨뜻하게 불
을 때고 하룻밤 더 글을 쓰세요. 하여튼 오늘 밤은 여기서 잡시다. 왜 아무말도 안 하시죠? 아마,
또 내가 잘못했군요!"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요.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어. 하지만 당신 말대로 합시다. 좋아요, 가지
맙시다. 자, 마음을 가라앉혀요. 당신은 너무 흥분하고  있어요. 어서 외투를 벗어요. 카첸카가 배
고프다고 하는군. 뭘 좀 먹읍시다. 당신 말대로  오늘 떠나는 건 좋지 않겠소. 제발  좀 진정해요.
그럼 페치카에 불을 때야겠군. 아니, 그보다도 썰배를 맨 김에 전에 내가 살던 집 헛간에 가서 장
작을 실어와야겠소. 자, 울음을 그쳐요. 곧 돌아오겠소."
  11
  헛간 앞 눈 위에는 여태까지 지바고가 다녀간 썰매 자국이  몇 줄기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문지
방의 눈은 엊그제 장작을 실어낼 때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아침부터 하늘을 덮었던 구름이 걷히면서 날씨가 추워졌다. 이 해 겨울은 유달리 눈이 많이 와
서 헛간 문지방보다 더 높게 쌓였다. 마치 문설주가 내려앉고 헛간의 키가 낮아진  것 같았다. 지
붕 위에는 바람에 날린 눈이 큼 버섯처럼 지바고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 지붕 위에 한
쪽 끝을 찔러 넣은 듯 초생달이 잿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밝은 낮이었으나, 지바고는 밤늦게 인생의 어둡고  울창한 숲속에 홀로 서있는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막막하고 처량한 심정이었다.  거의 얼굴 높이에서 타오르고 있는  초승달은 이별의
전조(前兆)였으며 고독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바고는 너무나 지쳐서 서 있는 것조차 힘에 겨울 지경이었다. 여느 때보다도 적은 야ㅡ이
작을 들어다가 헛간 문지방 너머로 썰매에 던져  올리곤 했다. 장작개비에 얼어붙은 눈이 장갑을
통해 따갑게 느껴졌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데도 몸이 더워지지 않았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망가져서 움직이질 않는 듯싶었다. 그는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면서, 슬픔에 잠긴 소박하고 아름다
운 라라의 인생에 주님의 가호가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초승달은 여전히 헛갖ㄴ 위에서 차
갑게 타오르며 비치고 있었다.
  갑자기 말이 오던 길 쪽으로 되돌아 서며 처음엔 낮은 소리로 울더니 점점 높게  큰 소리로 울
어댔다.
  '어쩐 일일까?' 지바고는 생각했다. '무슨  기쁜 일일까? 무서워서 우는  걸가? 아니다, 겁이 날
땐 울지 않는 거야. 늑대 냄새를 맡았더라도 자기 위치를 알리려고 울어댈 리는  없지. 저건 반가
움을 나타내는 울음 소리가 아닌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 그렇다면 잠깐만 기다
려. 이제 곧 갈테니.'
  지바고는 헛간에서 나무조각과 장작에서 벗겨진, 장화 몸체처럼 생긴 자작나무 껍질을 썰매 장
작 위에 얹고 밧줄로 동여 매고 썰매와 나란히 걸어서 미클리츠인의 집 헛간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말이 울었다. 어딘가 멀리 맞은편 쪽에서 다른 말이 호응하듯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
바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구네 말일까?  바르이키노엔 우리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그렇지가
않은가 보군.' 그는 말 울음 소리가 언덕 너머에 있는 미쿨리츠인네 집 현관  앞에서 들렸으며 손
니밍 오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공장 부지의 부속 건물 뒤로  돌아와 있기 때문에 언덕에 가려 집
정면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어온 장작을 천천히 헛간에 옮기고, 썰매를 풀어서 헛간에 넣었다. 말을  마구간에 끌고 들어
가 건초를 두어 아름 구유에 던져 주었다.
  그는 불안스럽게 집으로 다가갔다. 현관 앞에 살찐 검정말 한 필과 큼직한 썰매가 멈춰 있었다.
값비싼 외투를 걸친 낯선 사내가  말 옆구리를 툭툭 치기도 하며,  다리를 살피면서 주위를 돌고
있었다. 여기 말처럼 살찐 작달막한 사내였다.
  집 안에서는 떠들썩한 말소리가 들렸다.  엿듣고 싶지가 않아서. 지바고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이야기의 내용은 잘 알 수  없었으나, 라라와
카첸카의 목소리 이외에 코마롭스키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현관  옆방인 듯싶었다. 코마
롭스키는 라라에게 무언가 따지고 있었다.  라라의 음성과 어조로 미루어, 그녀는  몹시 흥분해서
울면서 무언가를 기를 쓰며 반대하더니 금세 동의하는 눈치였다. 지바고의 귀에는 이때 코마롭스
키가 자기 얘길 하는 것처럼 들렸다. 지바고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며, 지바고가  자기 가족과 라
라와 어느 쪽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겠는가, 라라가 이런 사람을 믿고  의지하려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쫓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열심히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바고는 집 안으로 들어
섰다.
  그가 생각했던 대로 현관 바로  옆방에, 발등까지 덮을 만큼 긴  슈바를 입은 코라롭스키가 서
있었다. 라라는 카첸카의 외투깃을 여미어주고 있었으나, 후크가  잘걸리지 않는지, 좀 가만 있으
라고 짜증을 부렸다. 카첸카는 "엄마, 억지로 그렇게 하면 숨이 막혀"하고 투덜거렸다. 세 사람 다
길 떠날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지바고가 들어가자 라라와 코마롭스키가  앞을 다투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당신 어디 가 계셨어요? 우린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안녕하시요, 지바고 선생! 저번엔 서로 어색하게  헤어졌지만, 보시다시피 또 이렇게 불청객이
되어 왔소이다."
  "안녕하시요, 코마롭스키 씨."
  "어디 가서 그렇게 오래 계셨어요? 유라,  이븐 얘길 듣고 빨리 결정을  내리세요. 시간이 없어
요. 급히 서둘러야해요."
  "왜 이렇게 서 계시죠? 어서 앉읍시다, 코마롭스키 씨. 어디 갔었느냐 묻는 거요, 라라? 장작을
날라오려고 간 건 당신도 알지 않소. 그리고 말 손질도 하고. 자, 이리 앉읍시다, 코마롭스키 씨."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요? 이분이 가신 후에  우린 이분의
제의를 거절했던 일을 후회했지요. 그런데 당신은  이분이 이렇게 나타나셨는데도 그렇게 태연하
세요? 그런, 놀랄 만한 소식이 있어요. 당신이 말씀하세요, 코마롭스키 씨."
  "무슨 뜻으로 라라가 나더러 말하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내가 말하겠습니다. 나는 일
부러 출발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얼마 동안 유라친에  더 머물러 있었어요. 당신과 라라가 신중
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해서 였지요."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요. 지금 떠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어요. 내일 아침이면......
코마롭스키 씨한테서 듣는 편이 좋겠어요."
  "라라, 잠깐만. 실례했습니다. 코마롭스키 씨. 왜 외투를 입은 채 계시죠? 자, 어서 벗고 앉으세
요. 이건 참으로 중대한 문젭니다. 그렇게 간단히 결정한 문제가 아닙니다. 실례지만 나는 당신과
동행할 생각을 털끝만큼도 해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라라는 다릅니다. 우린 간혹  서로 생각이
다른 경우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각기 다른 운명을 지닌 두 개의 존재라는
걸 생각해보았어요. 라라의 경우는, 특히 카첸카를 위해서라도 당신의 제의를 신중히 고려할 필요
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라라 자신도 줄곧 당신의 제의를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당신과 함께 떠난다는 조건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라라, 서로 헤어진다는 건 당신이나  나나 괴롭기는 같아요. 그러나 우린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 같소. 내가 떠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우선 들어보세요. 내일 아침에...... 코마롭스키 씨!"
  "라라는 내가 가져온 소식을 두고 말하는 모양인데, 다름 아니라 지금 유라친에는 극동 공화국
정부의 특별 열차가 출발 준비를 완료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모스크바로부터 도착했는데,
내일 아침에 떠납니다. 이 열차는 우리 교통부 것인데 반은 침대차로 되어 있어요.
  나는 이 열차로 떠날 예정입니다. 내가 보좌관으로  배치할 사람에겐 좌석을 제공해도 좋게 되
어 있습니다. 아주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는 겁니다. 두 번 다시 없는 기회지요. 당신이 한 번 안
간다고 말한 이상 끝까지 고집하리라는 건 나도 잘 알지만,  라라는 당신이 가지 않는 한 자기도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유라친까지만이라고 함께 갑
시다. 거기 가서 봅시다. 갈 생각이면 급히 서둘러야 합니다. 한시도 꾸물거릴  수가 없습니다. 나
는 말을 모는 게 서툴러서 마부를 데리고  왔습니다. 내 썰매에 다섯 사람이 다 탈  수는 없어요.
당신한테는 삼제바토프의 말이 와 있지요. 장작을 날라 아직 썰매를 풀지 않았겠군요?"
  "아니, 풀었습니다."
  "그럼 빨리 썰매를 매십시오.  내 마부에게 거들도록 이르겠습니다.  아니, 썰매는 두 대씩이나
필요 없습니다. 내 썰매에 다 함께 탑시다. 하여튼  서둘러주십시오. 꼭 필요한 물건만 들고 가면
됩니다. 집은 잠그지 않아도 돼요. 자물쇠  잠그는 것보다는 아이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코마롭스키 씨. 당신은 마치 내가  동의한 것처럼 말하지
만, 만약 라라가 떠나길 원한다면  어서 함께 떠나십시오. 이 집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내가 남아서 깨끗이 정리하고 문을 잠글 테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유라? '만약에 라라가 원한다면......'이란 무슨 뜻이죠? 당신이 함께 떠나
지 않는 한, 이 라라는 절대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당신도  잘 아시지 않느냐 말예요! 그런데 '집
을 정리하겠다'니 무슨 소리예요!"
  "끝까지 고집하는군. 그렇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라라가 없는  자리에서 당신과 둘이서
만 얘기하고 싶어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부엌으로 갑시다. 괜찮겠지, 라라?"
  12
  "스트렐리니코프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어요. 이미 형이 집행되었어요."
  "뭐라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그렇게 들었어요. 틀림없을 겁니다."
  "라라한테는 말하지 마십시오. 그 얘길 들으면 미쳐버릴 겁니다."
  "물론이지요. 그래서 당신한테만 따로 말하는 겁니다. 스트렐리니코프가 총살을 당했으니, 그녀
와 딸의 신변에도 위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해주어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당신은 절대로
함께 떠나지 않겠다는 겁니까?"
  "벌써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안 가면  라라도 안 갑니다.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좋아요, 그러시다면  
이렇게 해주십시오. 말만이라도 좋으니 양보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달란 말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우리를 배웅하러 간다 하더라고 유라친 역에서  라라가 당신에게 이별을 고하고 혼자  떠날 리는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함께 떠난다는 걸 라라가 믿게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여길 떠
나지 않더라도 당신이 곧 뒤따라오겠다고  라라에게 약속해야 합니다. 물론  당신도 함께 떠나실
의향이라면 나는 기꺼이 편의를 제공할  것이며,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당신이 함께 떠난다는 확신을 라라에게 주어야  합니다. 가령 말에 썰매를 매러간다고 하
면서, 우리들이 먼저 떠나면 곧 뒤쫓아가겠다고 약속하면 어떨까요?"
  "스트렐리니코프가 총살됐다는 말에 아찔해서, 당신이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만, 좋습니
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지요. 요즘 세상의 논리에 따른다면 스크렐리니코프가  숙청된 이상 라
라와 카첸카의 생명도 위험하다고 봐야  하니까요. 라라와 나 두 사람  중에 누구든 자유를 잃게
되면 필경은 이별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라라와 카첸카를 어디든 이 세상 끝으로 데
려 가게 하는 편이 낫겠지요. 결국 당신의 계획대로 되고 말았군요. 어쩌면 나  자신도 맥이 짜져
자존심을 버리고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의 도움을  간청하게 되겠지요. 라라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시고, 내가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주십사하고 애걸하게 될는지 모
릅니다. 잘 생각하게 해주십시오. 당신한테서 소식을 듣고 머리 속이 뒤집혀  생각할 힘조차 없어
요. 혹시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일생 동
안 후회의 쓴맛을 맛보게 될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이렇게 괴로우니 뭐가 뭔지 모르겠소. 이젠 기
계처럼 당신의 말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라라의 행복을 위해  연극을 해보겠습니다.
난 썰매를 매러가겠으니 먼저 떠나면 곧  뒤쫓아가겠노라고 라라한테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기 혼자 남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곧 해가 질 텐데 지금 떠나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숲속을 지
나야 하는 데 거긴 늑대가 우글거리고 있어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소총도 있고 권총도 가지고 있어요. 염려 마십시오. 아 참, 술을 좀 가져왔습니
다. 추위를 견디려면 필요하지요. 넉넉히 있으니까, 좀 나눠드릴까요?"
  13
  '어쩌자고 내가 그랬을까? 어쩌자고 그런 바보짓을 했을까? 내가 라라를 저버리다니, 라라를 단
념하고 양보하다니! 단숨에 달려가야겠다. 뒤쫓아가서 도로 찾아와야겠다. 라라! 라라!
  들리지 않을 테지, 바람이 이쪽으로 불어오고 있으니까.  게다가 큰 소리로 지껄거리고 있겠지.
라라는 이젠 즐겁고 편할 테지. 내 연극에 속았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겠지.
  라라는 자기 희망대로 만사가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고집쟁이 유라고  하나님 덕분에
드디어 마음을 돌려 안전한 곳으로  함께 떠나기로 했으니 이런 다행한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린
이제 우리들보다 더 분별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법과 질서가 보호하는 곳으로  가는 거다.
유라가 또 고집을 부리면 내일 기타를 타지 않더라고, 코마롭스키 씨가 다른 기차를 보내주면 얼
른 타고 뒤쫓아오겠지. 지금 그이는 물론 마구간에 있을 거야. 너무나  흥분해서 허겁지겁 서두르
는 바람에 오히려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러나  곧 말에 썰매를 매고 쏜살같이 뒤쫓
아올 테니까 숲 속에 들어가기 전에 우릴 따라잡을 수 있겠지.' 라라는 필시  이렇게 생각하고 있
을 것이다. 우린 제대로 이별의 인사조차 나누질 못했다. 나는 손을 한 번 흔들었을 뿐, 목구멍에
솟구쳐 오르는 아픔을 참으려고 이내 등을 돌리고 말았으니까.
  지바고는 슈바를 아무렇게나 한쪽 어깨에 걸친 채 현관에 서 있었다. 외투에 덮이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는 현관의 매끄러운 기둥 윗부분을 마치  목을 조이기라도 하듯 힘껏 부여잡고 있었다.
그는 온몸의 주의력을 집중하여 저 멀리 들판 한 곳에다  시선을 쏟았다. 듬성듬성 서 있는 자작
나무 사이로 오르막길이 잠시나마 드러나  보이는 곳이 있었다. 서쪽  지평선에 기울어진 태양이
지금 그 근방 일대에 마지막  햇살을 던지고 있었다. 방금 우묵한  지대에 가라앉은 썰매가 이제
곧 그 오르막길에 나타날 것이다.
  "잘 가오! 잘 가오!" 지바고는 그 순간을 기다려 소리없이 되풀이했다.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속삭임이 차가운 저녁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잘가오, 영원히 떠나가 버린, 오직 하나 내 사랑이여!"
  이윽고 썰매는 쏜살같이 자작나무 사이를 달려 올라갔다.
  "아, 저기 가는구나, 저기!" 그가 파리한 입술로 이렇게 속삭이고 있을  때, 썰매는 갑자기 속력
을 늦추며 마지막 자작나무 옆에 멈추어 섰다.
  '아아, 이 가슴의 고동 소리! 미칠 듯 뛰노는 심장이여! 두 다리에서 힘이 쑥 빠지고, 마치 어깨
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슈바처럼 온몸이 금세 쓰러질 것만 같구나! 하나님, 라라를 제게 도로 돌려
주시려는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저  멀리 석양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가지 않고 멈춰 섰을까? 아니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이 집에  이별을 고하려고 썰
매를 세워달라고 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뒤쫓아오는지 확인하려고 한 것일까? 다시 떠나버렸어.'
  다행히 해가 먼저 넘어가지만 않는다면(어두워지면 볼 수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골짜기 저편
공지에, 그저께 늑대떼가 몰려왔던 곳에 또 한 번 썰매가 얼른 나타날 것이다.
  이윽고 그 순간이 오고 또 지나갔다. 검붉은 태양은 아직도  눈에 덮인 푸른 지평선 위에 둥글
게 빛나고, 눈은 달콤한 파인애플빛의 광선을 굶주린 듯 빨아들이고 있었다.  썰매는 땅속에서 솟
아오르는 듯 퍼뜩 나타나서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잘 가오, 라라! 저승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안
녕! 나의 사랑이여, 끝없이 영원한, 그치지 않을 나의 기쁨이요.  안녕, 안녕!' 마침내 썰매는 아주
사라져버렸다.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 다시 라라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
다.'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했다. 눈 위에 여기저기 깔렸던  구리빛 노을의 반점이 이내 퇴색되고 사
라져갔다. 부드러운 잿빛 공간이 재빨리 라일락빛 황혼에 잠기면서 차츰 자주빛으로 변했다. 가느
다란 레이스처럼 꼬불꼬불한 자작나무 가지가 갑자기 핏기를 잃은 듯 불그레한 하늘에 섬세한 선
을 그리고 있었으나, 이내 잿빛 안개 속에 녹아들었다.
  애수는 지바고의 감각을 한층 더  예민하게 했다. 그는 열 배나  더 날카로와져서 주위의 모든
것을 포착했다.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심지어 공기까지도 희귀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 듯싶었
다. 겨울밤은 호의를 지닌 증인인 양  동정 어린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이때까지 어두워진
적이라곤 없었는데, 지금 홀로 고독에 빠진 한 인간을 위하여 오늘 처음으로 어둠의 장막을 내리
는 듯싶었다. 지평선을 등진 언덕의 수목들은 단순한 주위의 전망이 아니라,  마치 그에게 동정을
베풀기 위해 방금 땅속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한 것같이 보였다.
  지바고는 억지로 동정을 베풀려는 무리를 피하듯 그 순간의 선명한  아름다움에서 도망치고 싶
은 심정이었다. 빛을 뻗쳐서 저녁놀을 향해 '고맙소, 하지만 필요 없어'하고 속삭이고 싶었다.
  그는 뒤돌아서서 현관문을 응시하며 여전히 현관에 서 있었다. '나의 밝은 태양은 져버렸어.' 마
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솟구쳐 오르는 눈물이 목구멍을 막아서 이 짤막한 몇 마디도 제
대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두 가지의 상반되는 독백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그 자신에 관한 메마르고
사무적인 독백과, 라라를 향해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독백이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 이젠
모스크바로 가자. 무엇보다도 살아 남는다는 것이 우선 문제이다. 수면 부족을 극복해야 한다. 누
워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 의식을 일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밤을 새워 일을  하자. 그리고 또 한
가지, 밤에 얼어 죽지 않도록 지금 곧 침실에 불을 때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여! 당신을 포옹한 감
촉을 내 팔이 잊지 않는 한, 그리고 내 손과 입술이  당신을 기억하는 한 당신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는 후세에 남을 훌륭한 작품 속에 당신에게 향하는 눈물을 쏟으리라. 당신의 추억을 우
아하고 서글픈 시에 담으리라.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길 떠나지 않겠다. 나
는 당신을 이렇게 그릴 작정이다.-바다 속 밑바닥까지 온통 뒤집은 무서운 폭풍이 지나간  후, 제
일 멀리까지 밀려온 파도의 흔적이 모래 위에 새겨져 있다. 바다 밑에는 휘저어 올릴 수 있는 가
벼운 조약돌이며 코르크, 조개 껍질, 해초 따위가 줄지어 모래사장에 밀려왔다. 끝없이 멀리 뻗은
해변의 경계선이야말로 가장 높았던 파도의 흔적인 것이다. 이렇게 인생의 폭풍이 당신을 나한테
밀어다 준 것이다-나는 당신을 이렇게 묘사할 생각이다.'
  집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외투를 벗었다. 아침에  라라가 말끔히 청소를 했지만 출발을 서두르
는 바람에 뒤죽박죽되어 버린 침실로 들어가서 흩어진 침대며 방바닥과 의자 위에 마구 내던져진
물건들을 보자, 지바고는 어린애처럼 무릎을 꿇고 딱딱한 침대 가장자리에 가슴을 들이대고서 이
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목놓아 울었다. 그러나 통곡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얼른 눈물을 닦고 빛 잃은 피로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코마롭스키가 두고 간 술병
을 집어들고 마개를 뽑아 컵에 반잔쯤 따른 후 물과 섞었다. 그러고는 방금 목놓아 울던 때와 마
찬가지로 모든 것을 잊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14
  지바고에게는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그는 차츰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이상
한 느낌은 처음 느껴보았다. 라라가 떠나간 후에 집안을 치우거나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은 고사
하고, 세월이 흘러가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밤낮을 가리지 못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는 라라를 그리는 시를 썼으나, 추고를 거듭함에 따라 시와 메모 속에 그려놓
은 라라는 카첸카의 어머니로서의 라라, 딸을 데리고 먼길을 떠나간 라라,  말하자면 현실의 라라
와는 비슷하지도 않고 멀어져갔다.
  이렇게 추고를 거듭하는 까닭은 표현의 박력과 정확성을 모색하려는 데 있었으나, 그보다도 그
것은 개인적인 경험이나 과거에 일어난 실제 사건 따위를 솔직히 털어놓아 현실의 인물들을 해롭
게 하거나 자극하지 않으려는 배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시에서는 피어오르는
듯한 박진감은 어느덧 사라졌으나, 그렇다고 병적으로 생기가 없는 것이 되기는커녕 특수한 경우
를 누구한테나 친숙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경우로 승화시켰다. 이것은 그가 의식적으로 추구하려던
목적은 아니었다. 길을 떠난 라라가 도중에서 그에게 보내준 위로의 말처럼,  멀리서 흔드는 그녀
의 손짓처럼, 끔에서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길처럼 저절로 우러난  것이었다. 그는 시
에 새겨진, 마음을 씻은 듯 고결한 인상을 더없이 좋아했다.
  라라를 그리는 애끓는 심정을 시로 읊는 일에 골몰하면서도, 자연이나 일상 생활, 그 밖의 모든
일에 관하여 몇 해 동안 틈틈이 적어 온 노트에 지금도  그는 이따금 뭔가 써놓곤 했다. 시를 쓸
때면 언제나 개인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 관한 온갖 상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다시 역사를 생각해 보았다. 이른바 역사의 흐름이란 흔히 있는  통속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식물계와 같은 것이었다. 겨울에는 눈을 뒤집어쓴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늙은이의 혹
은 자라난 털처럼 가냘프고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봄이 오면, 숲은 며칠 새에 그 모습이
달라져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는 울창한 잎 속에 몸을  숨길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전환은 동물과
는 비길 수도 없을 만큼 급속히 이루어진다. 동물이란 빨리 자라지는 못하니까. 그러나 식물의 움
직임은 절대 관찰할 수는 없다. 숲은 이동하질 않는다. 느닷없이 덤벼봐도  장소의 이동을 잡아내
지는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끊임없이 선장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
의 생명인 역사도 이처럼 언제나 움직이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역사의 전환을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 나폴레옹이나  군수나 장군이 역사를 움직인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는 결론에 이르거나 분명하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역사를 만들지는 못한다.
마치 풀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없듯이 역사의 움직임도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전쟁이나 혁
명, 황제나 로베스피에르는 역사의 유기적인 동인이며 그 효모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은 행동적인
사람들, 외고집 광신자나 날뛰는 천재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들은 불과 몇 시간이나 며칠  동안에 구질서를 뒤엎고 만다. 변혁은  몇 주일 또는 기껏해야
몇 년의 세월이면 족하다. 그러나 그 후 수십 년, 아니 수세기에 걸쳐서  변혁을 유발시킨 편협한
정시은 우상처럼 신성시되는 것이다.
  라라를 생각하며 지바고는 멀리 지나간 멜류네예보의 여름을 그리워했다. 그 당시 혁명은 하늘
에서 지상에 강림한 신이었고 그해  여름의 구세주였었다. 모두가 제멋대로 미쳐서  날뛰고, 모든
생명은 제 나름으로 존재해 있었다.  최고 정책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감상을 쓰고 있는 사이에 그는 자기의 예술관을 새삼 검토해 보았다. 예술이
란 언제나 미에 봉사하는 것이며, 미는  형식을 통해서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몹시
지쳐서 머리가 아팠다.
  삼제바토프가 찾아왔다. 그도 또한 보드카를 가지고 왔다. 그는 라라가 딸을 데리고 코마롭스키
와 함께 유라친을 떠나던 얘기를 했다. 그는 철길을 선로 수리차로 왔던 것이다.  말을 제대로 돌
보지 않았다고 지바고를 나무라면서, 그에게 사나흘동안만  더 말을 두어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
다. 그러나 며칠 안으로 다시 와서 바르이키노에서 딴 데로 지바고를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을 남
기고 돌아갔다.
  이따금 지바고는 글을 쓰다가도 문득  라라를 눈앞에 그리며 그리움에  몸부림쳤다. 지난 소년
시절에 아름다운 여름 자연 속에 파묻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돌아가신 어머니 목소리를 듣듯
이, 귀에 익은 라라의 그리운 목소리가 옆방에게 '여보!' 하고 부르는 것만 같았다.
  그 주일에는 라라의 목소리 이외에 또 다른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 어느 날 밤,  꿈에 이 집 밑
에 용의 굴이 있다는 터무니없는 흉몽을 꾸었다. 끔에서 깨어나 눈을 뜬 순간,  골짜기 쪽에서 불
빛이 번쩍하더니 총성이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놀라운 것은, 이런 놀라운  일이 있었는데도 그는
이내 다시 잠들어버렸던 것이다. 아침에 깨어나자 그는  어젯밤 일은 죄다 꿈이었구나 하고 생각
했다.

    15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어느 날이었다. 지바고는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이렇게 괴로워할 것 없이 더  빠른 방법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삼제바토프가 데리러 오면
즉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저녁 무렵이었으나 아직 어둡기 전이었다. 눈을 밟고 오는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누군지 가벼
우면서도 당당한 걸음걸이로 집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하군. 누굴까? 삼제바토프는 말이 있으니까 걸어올 리가 없는데. 텅  빈 바르이키노에 여행
자가 있을 까닭도 없었다. '나를 데리러 온 게로군.' 지바고는  생각했다. '시내로 출두하라는 호출
이나 명령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나를 체포하러 온 걸까? 아니다, 나를 데리어 왔다면 적어도
두 사람은 왔어야 할 게 아닌가. 미쿨리츠인이 돌아왔나 보다.' 그는 발소리의 주인공을 알 것 같
아 무척 기뻤다. 아직 정체를  확실히 드러내지 않은 이 방문객은  자물쇠가 없어진 것을 의아해
하듯 현관문을 더듬거리더니 문을 열고 조심스레 닫고는 이 집 구조를 다 알고 있는 듯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지바고는 문을 뒤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돌아다보았다. 낯선 사
나이는 이미 문턱에 우뚝 서 있었다.
  "누구를 찾소?" 지바고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던졌다. 대꾸가 없었다. 그래도
지바고는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이 낯선 방문객은 용모가 제법 단정하고 체격도  늠름한 사나이였다. 짧은 털가죽 외투와 털가
죽 바지에 따뜻해보이는 양피 장화를 신고 어깨에는  소총을 메고 있었다. 그래도 지바고는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사나이를 바라본 순가, 지바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낯선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가 아니
었다. 이 집의 살림의 흔적을 보고 이미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짐작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물건들은 미쿨리츠인네가 내버리고 갔을 리는 없었고, 분명 이 사람이 그  주인공일 것이다. 어딘
지 사나이의 얼굴 모습이 낯익은 듯 싶었다. 예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나이는 지바고
를 보고서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집에 누가 살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왔는지도 모른
다. 아니 어쩌면 지바고가 누군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누굴까?' 지바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서  보았을까......그것은 어느 5월의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아침이었던 것 같다. 라즈빌리에 정거장이었지.  무뚝뚝한 인상의 군사
위원의 객차. 뚜렷한 사상, 편협한 사고(思考).  가열한 주의 주장. 잘못을 모르는  태도. 독선적인
자세. 그렇다. 스트렐리니코프다!'
  16
  두 사람은 벌써 몇 시간이나 계속해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대화였다. 그 당시 누구도 그랬듯이 불안과 공포의 열띤 얘기였다.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했다. 그런 신경질적인 다변은 누구한테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으나,
스트렐리니코프가 이렇게 쉴새없이 지껄이는 데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듯싶었다.
  그는 무서운 적막을 피하기 위하여,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서  지바고와 대화에 애를 쓰며
마구 지껄였다. 외로움을 잊으려는 것일까?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서일까? 또는 슬픈 추억이 두
려워서일까? 아니면 죽고 싶도록 자학하는 자기  혐오 때문일까? 또는 그 어떤  최후적인 결심을
하고서, 그것과 대결하기 두려워 이렇게  지바고를 상대로 잡담을 하면서  고통을 잊으려는 것일
까?
  어쨌든 그는 마음속에 괴롭고 중대한 비밀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쓸데없
는 화제를 꺼내어 마구 지껄이며 무거운 마음을 더는 것이었다.
  이것은 시대적인 병폐이며 혁명기의 광증이었다. 모든 언행이 마음과는  딴판이었다. 깨끗한 양
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 죄의식을 느꼈으며, 범법자였으며 무언가 속이고 있다고
스스로 자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소한 일로도 큰 자기 가책에 고민했었다. 사람들은 공포심에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저주하고 학대했었다.  모두가 병적인 파괴본능에서 스스로 최면술에
걸린 듯, 자기 비판의 정열을 멈출 길이 없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고급 장교였으며, 군법 회의를 주재하여 죽어 가는 자의 문서나 자백을 많이
읽고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기 폭로의 발작에 사로잡혀, 자기 생애를 재검토하고 결
말을 지으며 극도의 흥분 속에서 모든 것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두서없이 자기 고백을
계속했다.
  "이것은 치타시 근방에서 있었던 일이었소. 이 집 서랍이나 장롱에 넣어둔 진기한 물건들을 보
고 놀랐지요? 그 물건들은 적위군이 동부 시베리아를 점령했을 때 징발해 온 것들입니다. 그렇다
고 나 혼자서 이곳에 날아온 건 아니지요. 믿음직하고 충실한 부하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그때의
생활은 참 좋았어요. 이 양초며 성냥, 커피, 홍차,  필기 도구 등이었고, 어떤 것은 체코의 재산이
었고, 일본, 영국 재산이었어요.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죠. 그렇잖아요?  참 '그렇잖아요'라는 말은
내 아내의 말버릇이었지요. 당신도 아실 거요.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이 말을 해야 옳을지 망설였
답니다. 나는 아내와 딸을 만나러 온 겁니다. 모녀가 여기에 있다는 소식은 최근에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늦었어요. 소문이나 보고에 의하여 당신이 라라와 가까운 사이라는  말을 듣고 '의
사 지바고'란 이름을 들었을 때, 내가 근년에 만나 본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주에서 언젠가 심문
에 받으러 나에게 끌려온 당신의 얼굴이 생각났어요."
  "그때 나를 총살해버리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았소?"
  스트렐리니코프는 이 질문을 그대로 흘려버렸다.  아마 잘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생각에만 열중하면서 계속 지껄였다.
  "물론 질투를 느낀 건 사실이오. 지금도  질투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연한 일 아니오?  내가 이
근처에 잠복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두 달  전입니다. 그전 원동지방 은신처가 노출되고 말았어
요. 나는 누명을 쓰고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었지요. 결과는 뻔했어요. 나는 결백했어요. 사태가 호
전되면, 불원간 내 입장을 밝히고 오명을 벗을 전망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체포되기 전에
당분간 숨어서 도피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결국 난 구조받게 되었을 텐데, 내가 믿었던
어린 놈의 사기꾼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나는 겨울에 사람의 눈을 피해서  굶주리며 시베리아를 도보로 건너  서쪽으로 갔습니다. 나는
눈덩이에 구멍을 파고 숨거나 눈이 뒤덮인 기차에서 자곤 했어요. 그때 나는 떠돌아 다니는 소년
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애는 빨치산 소대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
께 총살형을 당했으나 총알이 급소를 벗어났다는 겁니다.  그는 쌓인 시체 속에서 기어나와 안전
한 장소에 숨어 상처를 치료하고, 나 모양으로 전전하며 숨어다녔다는 것이  그의 얘기였어요. 그
어린 놈은 고약하고 머리도 나쁜 놈이지요. 중학교 2학년 때 성적이 나빠서 퇴학당했다는 얘기였
으니까."
  스트렐리니코프의 얘기를 자세히 들을수록 지바고는 그 소년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그애 이름이 체렌치, 성이 갈루진이 아니오?"
  "그렇소."
  "그럼 빨치산이나 총살형이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 애의 한 가지 칭찬할 점은 어머니에 대한 미칠 듯한 효성입니다. 그애 아버지는 인질로 잡
혀서 총살되고 어머니는 투옥되어 남편과 같은 운명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애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어떤 짓이라도 하려고 결심했지요. 그는 체까에게 죄값을 치르겠다고 했어요. 말하자면 체
까가 찾는 거물을 넘겨줄 테니 자기의 죄를  사면해달라고 요구하고, 체까가 이를 받아들인 겁니
다. 그래서 그놈은 내가 숨었던 집을 가르쳐주게 된 겁니다. 그러나 난 그놈의  배신을 미리 짐작
하고 그곳을 빠져나온 후였어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초와 끊임없는 모험을 거듭하며 시베리아를 건너 겨우 이 지방에 도착
하게 되었소. 이곳에서는 모두들 나를 알고 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으로 그들은 내가 설마
이곳에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사실 내가 이 집이나  근처의 또 한 집에 은신하고 있
는 동안에 치따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어요. 이젠 끝장입니다. 이제 여기에도 손을 뻗치고 있
어요. 아니, 벌써 어두워지는군요. 나는 밤이 질색이에요. 오래 전부터 나는 밤에 잠을 못 자는 버
릇이 생겼거든요.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아실 겁니다. 내 초가 앚ㄱ 남아 있으면..썩 좋
은 초지요? 그렇잖아요? 진짜 수지로 만든 겁니다. 우리 좀 더 얘기할까요? 당신이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밤새도록 환히 촛불을 밝히고 얘기나 합시다."
  "초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 갑을 뜯었을 뿐입니다. 석유가 있어서 등불을 썼어요."
  "빵은 없나요?"
  "없어요."
  "그럼 무엇을 먹고 살았지요? 아니,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군요. 감자일테지요."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있어요. 이곳에 살던 주인 부부는 경험이 많아서 잘 저장해 두었더군요.
감자는 지하실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썩지도 않고 얼지도 않았어요,"
  느닷없이 스트렐리니코프는 혁명에 대한 화제를 끄집어냈다.
  17
  "이런 얘기는 당신에게 흥미 없을 겁니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겠지요. 우리와는 다르게 살아왔
으니까. 도시의 변두리 지대, 철도 주변의 빈민굴과 셋집들의 세계가 있어요. 불결하고 비좁고, 가
난에 지친 생활들, 노동자의 인간적인 타락, 부녀자들의  타락, 그런데 한편에서는 어머니들의 귀
염둥이들, 말쑥한 학생들, 부유한 상인자식들의 뻔뻔스러운 음탕.  그것도 어떤 짓을 해도 벌받지
않는, 인생을 조롱하듯 하는 방탕한 생활 말입니다. 가난에 찌들고 치욕에 탄식하며, 정조를 빼앗
기고 농락당한 여인의 눈물과 탄식이 그들에게는  농담이나 발작을 일으킨 정도지요. 무위도식하
는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 없고 세상에 이바지하는 일도 없으며  후세에 아무것도 물려
줄 것이 없는 기생충들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생활이 곧 투쟁이었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바위라도 움직였
소. 비록 슬픔 이외에는 아무것도 갖다 준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여자를 모욕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몇 배나 더 괴로움을 당해 왔으니까.
  내가 얘기를 계속하기 전에 당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당신은 생명이 중하면 지체없이
이곳을 떠나시오. 그들의 손길이 여기까지 뻗치고 있어요. 내가 잘못되면 당신도 함께 걸려 들 겁
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얘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당신은 연루를 면할  길이 없어요. 게다가
이 주변에는 늑대가 우글거리고 있어요. 얼마 전에도 총을 쏘아 겨우 늑대떼를 쫓았지요."
  "총을 쏜 것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러하오. 물론 당신도 들었겠지만. 나는 다른 피신처로 가는 길이었소. 그러나 그곳에 도달하
기 전에 여러 가지 징조로 미루어 그곳이 이미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거기 있던 사람들
은 아마 총살되었을 거요. 나는 이 집에 오래 있지 않겠소. 하룻밤을 새우고 아침엔 떠나겠소. 자,
그럼 내 얘기를 계속합시다.
  물론 그런 젊은 탕아들이 멋쟁이 모자를 쓰고 전세 마차에다 계집을 태우고 쏘다니던 트베르스
카야 얌스카야 거리는 비단 모스크바나 러시아에만 있었던 걸까요? 그 거리, 그 밤거리, 19세기를
하나의 역사적 시기로서 구분한 것은 사회주의 사상의 탄생이었소. 혁명이 시작되고 헌신적인 천
년들이 바리케이드에 일어났어요. 어떻게 하면  황금의 횡포를 막고, 어떻게 하면  가난한 인간의
권위를 구원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짜내던 정치학자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했어요.
마르크스주의는 악의 근원을 들추어내고 그 구제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19세기의 거대한
힘이 되었어요. 그것은 트베르스카야 얌스카야 거리에도, 불결한 곳에도, 성스러운 빛에도, 방탕과
노동자의 거주지에도, 선언이나 바리케이드에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아아, 그 옛날 학생 시절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그녀는 우리 이
웃집 셋방에 살던 여학생과 친구  사이였소. 주민들 거의가 부레스트 철도  노동자들이었어요. 그
시절에는 브레스트 선이라고 불렀지요. 그 후에 그 철도는 여러번 이름이  바뀌었지만. 지금 유라
친 혁명재판소의 위원인 우리 아버지는 정거장의 보선공이었어요. 나는 늘 이웃집에 가서 그녀를
자주 만났어요.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였으나 깜찍한 생각과 세상의 불안을  그녀의 얼굴 표정이
나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그 시대의 테마였던 모든 것 - 눈물과 모욕과 희망,  그리고 분
노와 자존심 - 이 그녀의 표정이나 태도에 새겨져서 소녀다운 수줍고 우아한 태도에 뒤섞여 있었
어요. 그녀의 도든 것이 이 시대를 고발하고 규탄하고 있었던 겁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이건 사
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숙명이나 운명과 같은 겁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이건  사소한 문제가 아
닙니다. 이건 숙명이나 운명과 같은 겁니다.   자연이 그녀에게  부여한 권리, 태어나면서부터 가
지고 있던 권리인 것입니다."
  "그녀를 참으로 정확하게 표현하시는군요. 나  역시 그 시절에 그녀를 존  일이 있어요. 당신이
지금 말한 것과 꼭 같은 인상이었어요. 여학생다운 순결과 더럽혀진 드라마의 여주인공의 비밀이
한데 뭉쳐진 느낌이었습니다. 벽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는 긴장된 자기 방어의  그림자였소. 나는
그녀를 그렇게 보았고. 아직도 그녀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은 완벽하게  그 모습을 그려
냈어요."
  "그녀를 보았고, 그리고 기억한다구요?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소?"
  "그건 전혀 다른 문제이니까."
  "그렇지, 좋아요. 지난 19세기에 파리의 혁명, 게르첸을 비롯한 러시아 망명객들의 무리, 러시아
황제의 암살 사건- 그중 몇은 미수에 그쳤지만 대개는 수행되었지요-세계의  노동 운동, 유럽 제
국의 의회와 대학에서 일어난 마르크스주의 운동, 색다르고 재빠른 추론, 자비를  내건 냉혹한 구
제책 그리고 날카로운 조소가 담긴 새로운 사상체계 등 이 모든 것이  남김없이 흡수되고 종합되
어 표현 된 것이 바로 레닌이지요. 레닌은 구세계가 저지른 죄를 앙갚음하기 위해 무서운 힘으로
도전한 보복의 화신이었어요.
  레닌과 함께 세계의 눈앞에는 한없이  거대한 러시아의 모습이, 세계가  보는데서 인류의 모든
비애와 불행을 구제하는 광명이 비쳤던  겁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얘길 하고 있지
요? 당신에겐 헛된 소음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리하여 나는 그 소녀를 위하여 대학에 가고, 그녀를 위하여 교원이 되어 낯선 유라친으로 왔
던 겁니다. 그녀를 위하여 나는 책을 탐독하고 지석을 쌓았어요. 그녀에게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나 곁에서 도움이 되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3년간의 결혼  생활을 보낸 뒤 나는 그녀를 나
의 것으로 새로이 획득하기 위하여 전쟁에 나갔어요.  전쟁이 끝나고 포로 생활에서 다시 돌아왔
을 때, 나는 내가 죽었다고 소문이 나 있는 것을 이용했어요. 나는 가명으로  혁명 대열에 뛰어들
었소. 그녀가 경험한 모든 부정을 하나도 빠짐 없이 복수하고, 그녀의 마음을 그런 슬픈 기억에서
깨끗이 씻어주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다시는 크베르스타야 얌스키야의 생활이 되풀이되
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소. 그녀와 내 딸이 바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들에게 달
려가 만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있었어요! 내 평생의  사업을 먼저 끝마치기를 원했기 때문이
었소. 이제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라도 바치겠소! 그녀가  들어올 때
면, 마치 창문이 활짝 열리고 침실은 신선한 공기와 밝은 빛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지요."
  "당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잘 알겠소. 실례지만 당신은 그녀가 당신을 얼마나 깊이 사
랑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뭐라고 하셨지요?"
  "당신은 그녀가 당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생각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왜 그런 말을 묻습니까?"
  "그녀가 내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오."
  "그런 말을 했소? 당신에게?"
  "그렇소."
  "용서하시오, 내가 물어서는 안 괼 일인 줄은 알지만, 지나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녀가 당
신에게 말한 것을 꼭 그대로 내게 전해줄 순 없을까요?"
  "그러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모범적인 사람이며, 당신과 견줄 사람은 아무도 만
나 보지 못했다는 거요. 그리고 당신은  뛰어나게 성실하다고 말했어요. 또 당신과 함께  지낸 그
집이 다시 나타나지만 하면 자기는 지구 끝까지라도 무릎으로 기어가겠노라고 했어요."
  "미안하지만, 혹시 당신이 말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그녀가 이 말을 했을 때의 상황을 말해
주겠어요?"
  "그녀는 이 방을 치우고 있었어요. 그리고 밖에 나가서 융단의 먼지를 털었어요."
  "미안하지만 어느 융단이지요? 두 개가 있는데."
  "저 큰 거요."
  "그녀에겐 너무 무거웠을 텐데. 당신이 도와주었나요?"
  "그래요."
  "당신이 한쪽 끝을 잡고,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히고 마치 그네를 타듯이 팔을 높이 쳐들고 얼굴
은 먼지를 외면하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큰 소리로 웃지 않던가요? 그렇잖아요? 난  그녀의 버릇
을 잘 압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들은 마주 다가가서 그 무거운 융단을 둘로 접고 다시 넷으로 접
으면서 그녀는 농담을 하며 장난을 쳤겠지요. 그렇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들은 벌떡 일어서 각기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내다보았다. 얼마 후 스
트렐리니코프가 지바고에게 왔다. 그는 지바고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지긋이  댔다. 그리고 여
전히 재빠르게 말을 계속했다.
  "용서하시오. 당신이 소중하게 가슴속에 간직한 것을  건드렸군요. 하지만 용서하시오. 몇 가지
만 더 물어보고 싶어요. 제발 날 혼자 두고  떠나지는 마시오. 내가 먼저 떠나겠어요. 생각해보시
오-우린 6년간이나 떨어져 살았소. 6년 동안이나 만나고 싶은 생각을 억제해왔단 말입니다.  그러
나 난 아직 자유를 완전히 쟁취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것을 쟁취할 때는 내 두 손
은 풀려날 것이며. 난 처자와 다시 어울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러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
아가고 말았소. 내일 나는 체포될 겁니다. 당신은 그녀와 친밀한 사이였소. 언젠가는 그녀를 만나
게 되겠지요. 아니, 내가 무근 말을 하고 있지? 그런 부탁을  할 수 는 없어요. 내가 체포되면 한
마디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내 입에 자갈을
물리고 말 것이오. 난 잘 알아요!"
  18
  지바고는 드디어 깊은 잠에 떨어졌다.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든 것은 근래에 처음 있는 일이었
다. 스트렐리니코프의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지바고는 뒤돌아 눕거나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당기
느라고 잠깐 잠이 깼을 뿐, 깊은 잠이 밀물처럼 밀려와 다시 달콤한 잠결에 빠져들었다. 새벽녘에
그는 소년시절의 꿈을 짤막하게 여러 깨 꾸었다.  그 꿈들은 어떻게나 자세하고 또렷한지 생시의
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머니가 그린 이탈리아 해안 지방의  수채화가 느닷없이 멱에서 떨어져  유리가 산산조각나는
바람에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아니, 이건 꿈이 아니다. 라라의 남편  안치포프가, 즉 스트렐리니코
프가, 가커스의 말마따나 슈치마 골짜기에서 늑대를 쫓고 있는가 보다. 아니, 그게 아니다. 잠꼬대
같은 소리야. 물론 벽에 걸렸던 그림이 떨어진 거야! 저것  봐, 저렇게 방바닥에 유리조각이 흩어
져 잇지 않은가-이렇게 확인하고, 그는 다시금 잠이 들었다.
  늦게서야 잠이 깼다. 너무 많이 자고 나서 골치가 아팠다. 처음에는 자기가 누구인지, 지금어디
에 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아참, 스트렐리니코프가 이집에 머물렀지. 시간이 너무 늦었어. 옷
을 입어야겠군. 스트렐리니코프는 지금쯤 일어나 있을 테지. 아직 자고 있다면  깨워서 커피를 끓
여 같이 마셔야지.'
  "파베 파브로비치!"그는 소리쳤다.
  대답이 없었다. '아직도 자고 있는 게로군 곯아떨어진 모양이지. '지바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스트렐리니코프의 털모자는 탁자 위에  그대로 있었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산책하러 나갔나? 모자도 안 쓰고 가다니. 무슨 단련을 하는가  보군. 오늘은 바르이키노
를 떠날 작정이었는데, 너무 늦었어. 언제나 이렇다니까!'
  그는 부엌 화덕에 불을 붙여 놓고  물통을 들고 우물가로 나갔다. 현관  앞 몇 걸음 떨어진 길
위에 스트렐리니코프가 머리를 눈더미에 처박고 가로 뻗어 있었다. 자살한 것이다. 회족 관자놀이
밑의 눈이 붉은 덩어리로 굳어져 있었다. 저만큼  뿌져진 핏덩어리가 마치 얼어붙은 마가목 열매
처럼 눈 위에 반점이 되어 굴러 있었다.

        제15장 종막

  이제 남은 지바고의 이야기는 그의 죽기 전 8, 9년 동안의 일이다. 이 기간에 그의 심신은 점점
약해졌으며 ,의사로서 또 작가로서 지식과 능력이 점차 쇠퇴해가고 있었다. 때로는 어두운 번민에
서 잠시 빠져나와 영감에 사로잡혀 시작에 몰두했으나, 얼마 후에는 불꽃이 사라지듯이 오랫동안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곤 했으며, 자기는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일에  아주 무관심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심장이 나쁘다고는
알고 있었으나, 어느 정도 악화되고 있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 후, 더욱 애매하고 위선적인 시기였던  네프(신경제정책 1921∼1927)초
기에 지바고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빨치산에서 탈출하여  유라친에 돌아왔을 때 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텁수룩한 초췌한 모습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좀  값이 나가는 옷가지는 하나씩 벗어서 빵
과 바꿔 먹었고, 찢어진 누더기 옷을 얻어 입어서 겨우 벗는 것을 면했다.  이렇게 외투와 웃도리
도 없이 모스크바 거리에 나타났을  때는 회색 털모자를 쓰고 각반을  하고 있었으며, 단추가 다
떨어진 죄수의 옷처럼 낡은 병사의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옷차림은 모스크바의 광장
이나 거리, 그리고 역 구내에서  우글거리는 적위군 병사들 틈에 끼이면  조금도 식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바고는 혼자서 모스크바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가  어디로 가든  그의 뒤에는 역시 낡은 군
복 차림의 곱살스럽게 생긴 시골  청년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런 꼴로  그들은 아직 남아 있던
여인숙을 찾았다. 지바고가 소년  시절에 자주 다니던 집을 찾으면, 지금도 잊질 않고  안으로 들
어오도록 권하면서 여행 후에 목욕을 했느냐고 묻곤 했다―그 당시 티푸스가 창궐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리고 처음 방문했을 때는 그의 가까운 사람들이 모스크바를 떠나게 된 내력 같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바고와 소년은 몹시 사람이 두려워서 누구라도 만나는 것을 아주 꺼렸으며, 혼자서는 절대로
남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혼자 방문하면 그냥 묵묵히 있을 수는 없었고, 자기가 화제를 끄집어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통상 아는 집에서 모임이 있을 경우  두 사람은 큰 키를 엉거주춤하여 사
람들 눈에 띄지 않게 구석진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밤을 보냈다.
  남루한 차림의 수척하고 키 큰 지바고는 서민적인 진리의 탐구자로 보였으며 언제나 따라 다니
는 젊은이는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제자처럼 보였다. 이 젊은 동행자는   과연 누구일까?
  2
  지바고는 모스크바에 가까이 오면서, 여행의 후반은 기차를 탔으나 전반은 훨씬 더 먼 길을 걸
어왔던 것이다.
  그가 지나온 마을의 모습은 이전에 빨치산에서 도망쳐 시베리아나 우랄 지방을 다녔을 때의 비
하면 별로 나아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겨울이었는데, 지금은 늦여름에서 가을 사이의 따
뜻하고 맑은 날씨여서 훨씬 쉽게 올 수가 있었다.
  지나온 마을의 대부분은 적군의 습격을 받고 난 직후처럼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이 텅 비어 있
었으며 밭은 곡식을 추수하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다. 사실 그것은 전쟁의 결과라기보다는 내란
의 피해였던 것이다.
  9월 말경 그는 가파른 언덕길을 2, 3일 동안 걸어왔다. 밑에는 강물이  오른쪽으로 흐르고 있었
다. 길 왼편에는 주인을 잃은 밭들이 구름 덮인 지평선까지 막막하게 뻗어 있었다. 드문드문 무성
한 숲이 우거져 있었으며, 떡갈나무와 단풍나무, 그리고  느릅나무들이 많았다. 숲은 깊은 계곡이
되어 강까지 뻗어 낭떠러지는 가파른 경사지가 되어서 길을 막고 있었다.
  밭에는 거둬 들이지 않은 보리가 무르익어 이삭을  지탱하지 못하고 땅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지바고는 죽을 끓일 수가 없는 최악의 경우에는 낱알을 한줌 긁어 모아 입에 넣고서 간신히 씹어
삼켰다. 이럴 경우에 위가 제대로 소화를 못 시켜서 눅눅한 생낱알째로 배설하게 되었다.
  지바고는 이렇게 진한 흑갈색의, 마치 녹슨 금덩이 같은 보리를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수확기
에 추수해 들인 것은 훨씬 밝은 빛을 띠고 있었다.
  불길이 없이 타고 있는 넓은 밭, 소리없이 구원을 청하고  있는 밭들이 차가운 막에 잠겨 겨울
빛이 감도는 하늘과 잇닿아, 마치 얼굴표정에 검은  그림자가 비치듯이 희고 검은 눈구름이 길게
깔리면서 떠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서서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물은 흐르고, 길은 강을 따라 뻗어 있었
다. 그 길을 지바고는 걷고 있었다. 그 길과 같은 방향에 구름이 흐르며 들판도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쉴새없이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태껏 이처럼 성가시게 굴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밭  가운데를 걷고 있을 때 해가 저물
어 좁은 공지에서  야영을 하게 되면, 쥐가 지바고의 얼굴과 손에 뛰어 다니고 바지와 팔소매 속
으로 기어들었던 것이다. 낮에는   구름 떼처럼 큰 무리가 길가에 우글거렸고, 지바고의   걸음을
방해하다 밟혀 찍찍 비명을 질러댔다.
  야성적으로 사나와진 마을의 개들이 지바고한테 덤벼들어 물어뜯기라도 하듯이 서로 눈치를 살
피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따르고 있었다. 개들은 짐승 고기를 먹고 살았으며, 밭에서 뛰노는 쥐
떼를 성가시게 여기지도 않고 좀 떨어진 곳에서 지바고를 빤히 쳐다보면서 무슨 일을 기다리기라
도 하듯 침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개들이 숲속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했고, 숲에 차
츰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처지더니 나중에는 꼬리를 감추면서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숲과 들은 아주 대조적이었다. 들은 인기척이 없는 사람한테 버림받은 고아  신세가 된 같았다.
반면에 인간으로부터 해방된 숲은 마치 속박에서 벗어난 듯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평시에는 사람들이, 더욱이 동네 애들이 호도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다 따 버렸겠지만 지금은
언덕 경사지나 골짜기 숲에는 가을 해에 타서 거칠어진 황금 및 나뭇잎에 쌓인 호도 열매가 서너
개씩 한데 엉켜 너무나 잘 익어서 금방 흘러 떨어질 듯  했으며, 마치 리본에 묶은 듯 예쁘게 보
였다. 지바고는 걸으면서 쉴새없이 호도를 까 먹었다. 그리고 호주머니와 자루에  호도를 가득 채
웠다. 일주일 동안을 그는 호두만 먹고 지냈다.
  그가 보기엔 들판은 심한 열병에 걸려 있는 것 같았고, 숲은 병이 나은 후의 맑은 상태였다. 그
것은 마치 숲에는 신이 살아 계시고 들판은 악마의 냉소가 깃들여 있는 듯싶었다.
  3
  이 무렵 지바고는 인기척이 없는 타버린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화재가 나기 전에는 강변 도
로의 맞은편에 집들이 한 줄로 나란히 있었으며 강변에는 집들이 없었다.
  마을에는 바깥은 시커멓게 그을었으나 무사한 집도 여러 채 남아 있었다. 그 밖의 농가는 완전
히 잿더미가 되어버린 채 페치카의 굴뚝만 시커멓게 서 있었다.
  강쪽에 면한 낭떠러지 여기저기에는 구멍이 패어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돌절구를 쪼아
낸 자욱이었으며, 이것이 그들의 호구지책이었던 것이다. 마을 동구밖에 있는 농가 앞에는 완성되
지 않은 돌절구 세 개가 굴러 있었다. 이 집도 역시 다른 집과 같이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지바고는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조용한  저녁 무렵이었으나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바람이
집안으로 불어와서 마룻바닥에 흩어진 마른 풀잎과 삼 지푸라기를 사방에  흩어버리며 붙어 있는
종이조각들을 팔락거렸다. 집안의 모든 것이 바스락거리며 움직였다. 여기서도  역시 쥐들이 울어
대며 성가시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농가를 나왔다. 해는 벌판 저 멀리에 지고 있었다. 황금빛에 물든 저녁  노을이 건너편 언
덕 여기저기의 덤불과 강물에 반사되어 흰 무늬를 번득이면서 길게 뻗어 있었다. 지바고는 길 건
너 풀밭에 뒹굴고 있는 돌절구에 걸터 앉았다.
  낭떠러지 밑에서 금발머리가 보이더니 어깨와 손이 차츰  떠올라 왔다. 물을 가득 담은 물통을
들고, 누군가 낭떠러지 밑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지바고를  보자, 허리까지 낭떠러지 위에 나타낸
채로 서 버렸다.
  "물을 드릴까요? 당신이 날 해치지 않는다면, 나도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고마워, 물 좀 주게. 두려워 말고 이리 와요. 내가 자넬 해칠 리가 있겠나?"
  낭떠러지를 올라온 그는 아직 소년이었다. 맨발에 누더기를 걸치고 머리카락은 흩어져 있었다.
  다정하게 말을 건넸으나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지바고를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까닭인지, 소년은 이상하게 흥분되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물통을 땅에 내려놓고 지바고
한테로 달려오더니 갑자기 멈춰 서며 중얼거렸다.
  "아니…아니…그럴 리가 없지. 이것이 꿈인가. 용서하세요. 혹시 동무, 물어봐도 되겠지요? 당신
을 어디선가 뵌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그래! 의사 아저씨가 아니에요!"
  "그런데, 넌 누구냐?"
  "모르시겠어요?"
  "생각이 나지 않아."
  "모스크바에서 같은 기차를 탔었지요. 같은 찻간에 말이예요. 저는 강제  노동에 끌려서 호송되
었구요."
  그는 바샤 브르이킨이었다. 지바고 앞에 엎드려 두 손에 입맞추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불에 타버린 마을은 바샤의 고향인 베레첸니크 마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던 것이
다. 징벌대가 마을을 습격하고 방화했을 때  바샤는 돌을 파낸 구멍 속에 숨어  있었으나, 어머니
바샤가 읍에 끌려간 것으로 알고 한탄한 나머지 미치게 되었고,  지금 이 낭떠러지 밑의 펠가 강
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그의 여동생 알렌카와 아리쉬카는 다른 고장의 고아원에 있을 거라는 소
문이었다. 지바고는 바샤를 모스크바로 데려가기로  했다. 오는 길에 바샤는 소름이  끼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지바고에게 들려주었다.
  4
  "이것은 지난 가을에 씨 뿌린 겨울 보리예요. 씨를 뿌리고 나자  습격을 받았지요, 폴라 아줌마
가 떠나 버린 후의 일입니다. 아줌마를 기억하시죠?"
  "아니, 잘 모르겠다. 누군데?"
  "모르시다니, 펠라기아 니로브나 말이예요! 우리와 함께  왔던 차구노바란 말입니다. 얼굴이 착
하게 보이고 살이 통통하고 흰 여자 말입니다. "
  "언제나 머리를 풀었다 매었다 하던여자 말인가? "
  "그래요, 맞아요! 바로 머리를 땋아 올린 여자예요. "
  "그래, 생각이 난다. 가만 있어, 그 후에 시베리아에서 만났었지. 길가에서 만난 일이 있었어. "
  "정말이예요? 폴라 아줌마를요? "
 "웬일이야! 바샤, 미친 사람같이 내손은 잡 흔드는 거지? 손 빠질라, 계집애같이 얼굴은 왜 붉히
나?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빨리 애기해주세요? "
  "만났을 때는 무사했었지. 너의 집 얘기를 하더라.  너의 집에서 살면서 폐가 많았다고 하면서,
내가 혹시 잘못 들었나? "
  "그래요. 그랬어요. 우리 집에 있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그 아줌마를 마치  친동생처럼 대했고,
좋아했답니다. 아줌마는 조용하고 일 잘하는  손재간도 있었어요. 그녀가 우리 집에  있는 동안은
무엇이든 풍족했어요. 그런데 소문이 나쁘게 나서 베레첸니크에서 쫓겨나게  되었답니다. 아주 몹
쓸 악담을 들어가면서 말이에요.
하를람 구닐로이라는 농부가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폴라 아주머니를 좋아했어요. 아
주 험담꾼이었어요. 그런데 아주머니는 그를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는 나한테
까지 원한을 품었어요. 그는 나와 아주머니에  대해 험담을 했는데, 결국 그녀는 참을  수 없어서
나가 버렸답니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어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무서운 살인 사건이  일어났어요. 부이스코에서 아주 가까운 숲속 농장
에서 한 과부가 살해된 거예요. 그녀는 혼자서 살았으며, 고무끈이 달린 남자 장화를 신고 사나운
개를 기다란 쇠줄에 묶어서 온  농장을 뛰어다녔어요. 개 이름이 고를란이었어요.  과부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집안과 농사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난해에 뜻밖에 겨울 추위가
일찍 닥쳐서 눈이 빨리 왔으며, 과부는 그때까지 미처 감자를 캐지  못했어요. 그래서 베레첸니크
에 찾아와, 돈이나 감자를 줄 테니 도와 달라는 겁니다.
  제가 감자를 캐러 과부의 농장으로 갔을 때, 이미 하를람이 와 있었어요. 나보다 먼저 부탁했던
모양이었어요. 그녀는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그것 때문에 그 녀석과 싸울 생각도 없었
고, 둘서 같이 일을 했어요. 날씨가 아주 고약해서 비와 눈이 내려 마치 진흙 바다와도 같았어요.
그래도 열심히 감자를 캐고 줄기와 잎을 불태워서  따뜻한 연기로 감자를 말리곤 했습니다. 일을
끝마치고 나서 그녀는 품삯을 주더군요. 하를람을 보내면서 그녀는 저더러 눈짓으로 남아 있거나
훗날에 다시 와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찾아갔더니, 그 과부는 여분의 감자를  정부의 강제 조달에 빼앗기고 싶지 않는
다 겁니다. 자네는 착한 사람이니까,  입밖에 낼 리가 없다고  믿어서 얘기한다는 거예요. 자기가
구덩이를 파려고 했으나, 이미 날씨도 겨울이고 또 혼자서는 도저히 해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파
주면 나한테는 잘 해주겠다고 했어요.
  나는 구덩를 팠습니다. 숨기기에 알맞게 병 모양으로 밑은 넓고 윗부분은  좁게 했어요. 그리고
불을 피워서 굴 안을 말리고 따뜻하게 했어요. 더욱이 눈보라가 한창인데  말입니다. 감쪽같이 감
자를 파묻고 흙으로 덮었어요. 누구도 냄새맡지 못하게 했지요. 물론 이  굴에 대해서는 아무한테
도 말하지 않았어요. 어머니와 동생들한테까지도 말입니다. 누구한테도!
  그리하여 한달 가량이 지났을 무렵, 과부집에 강도가 들었어요. 부이스코예에서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문이 다 열린 채 깨끗이 털렸고 과부의 행방도 모르게 됐어요. 개는  쇠줄을 끊고 도망쳐
버렸구요.
  얼마 후, 해가 바뀌기 바로  전에 눈이 처음으로 녹고,  성바실제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어요.
언덕에서 눈이 씻겨 내리며 땅이 보였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개가 돌아와서 눈이 녹은 땅을 발로
파기 시작했어요. 마침 감자를 파묻었던 굴 위를 말입니다. 마구 파헤치자  구덩이 안에서 고무줄
이 달린 신발을 신은 과부가 나왔어요. 끔찍한 일이었어요!
  베레첸니크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 과부를 동정했어요. 하를람이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아
무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놈의 짓이라면 베레첸니크에 버젓이
살면서 동네를 나다닐 수 있겠어요.? 아마 멀리 도망쳐 버렸겠지요.
  농장에서 있었던 참사를 오히려 좋아한 사람은  마을 부농들이었어요. 그들은 마을을 시끄럽게
했어요. 그것을 도시 사람들의 짓이라면서, 겁을 주기 위해서 한 짓이라고 했어요. 곡식을 감추거
나 감자를 숨기지 않도록 하려고 일부러 저런 짓을 저질렀는데, 바보 같은 당신들은 그것이 숲속
의 도둑들이 한 짓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들! 그저 읍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
고 있단 말이야. 그들은 앞으로 더욱더 당신들에게 명령을 하게 되며, 당신에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빼앗기고 굶주림에 몰리게 되고 말 거요. 마을 사람이 편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시
키는 대로 해요. 좋은 길로 인도해 주겠소. 놈들이 당신들의 피와 땀의 결실을 빼앗으려 올 경우,
여분의 곡식은 고사하고 한톨의 보리도  없다고 하란 말이오, 뭣하면 갈퀴를  휘둘러서 처치해요.
그리고 마을의 총의에 반대하는 자는 조심해야 해요.  그래서 마을 노인들이 서둘러서 부락 회의
를 열고 법석을 떨었답니다. 험담꿈인 하를람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어요.  모자를 벗어들게 읍
내에 가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마을에서는 야단이 났는데, 여기서는  바라다보고만 있을 셈인가
요? 우리에게는 빈농 위원회가 필요합니다. 한마디만 해 주시면  저는 당장 에 그들 사이에 싸움
판을 벌여놓겠소―그는 이렇게 말하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으며, 그후 다시는 우리 고장에 나타
나지 않았어요.
  그 후에 모든 일은 제대로 되어갔어요. 나쁜 장난을 하거나 죄짓는  사람도 없었어요. 읍내에서
적위군 병사들이 파견되어 왔어요. 순회 재판이 열리고 저는 곧 체포되었습니다. 하를람이 밀고했
던 겁니다. 제가 강제 노동을 도피하고, 마을의 폭동을 선동하고, 과부를 살해했다는 거예요. 그리
하여 저를 감금했으나 다행히도 마루 판자를 뜯고서  빠져 나왔어요. 땅속에 숨어 있었던 덕택에
머리 위에서 마을이 불타고 있는 것도 보지 못하고, 저 때문에 어머니가 강 얼음 구멍에 몸을 던
지는 것을 보지도 못했어요. 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난 일이에요. 한 농가에서 적위군 병사들을
불러 술을 대접해서 취해 버렸어요. 밤중에 불을 잘 간수하지 못한 탓으로 이 집에 불이 붙기 시
작하더니 옆집으로 하나하나 옮겨 붙게  되었답니다. 불이 붙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밖으로
뛰어나와 도망쳤어요. 읍내에서 와 있던 사람들은 죄다 타 죽을 말았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죽
이려고 방화한 것은 아니예요. 그리고 아무도 마을 사람들이 쫓아 버리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일
어날까봐 두려워서 저절로 도망쳐 버렸답니다. 또 마을의 유지들이 열 사람중 한사람은 총살되리
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제가 굴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마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들
은 어디선가 방황하고 있을 겁니다.”
  5
  지바고와 바샤는 새로운 경제 계획 초기인 1922년  봄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맑고 따뜻한 날
씨가 계속되었다. 햇빛이 구세군 교회당의 황금빛 원형 지붕 위에 눈부시게 비치고, 네모진 돌 포
장 틈에서 잡초가 자라나 있는 넓은 광장에 비치고 있었다.
  개인 기업을 금지하던 법령이 해제되고, 엄격한 통제하에 자유 상업이 허용되었다. 고물 시장에
서 고물상끼리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보잘것없던 거래가 점차 커져서 투기로까지 발전해서 법망
을 벗어나게 되었다. 적은 매매가 아무리 흥청거려도 무슨 새로운 것은 생산해 내지는 못하고, 도
시의 낡은 물자로는 운택해질 수가 없었다.  이미 팔린 물건을 열 번도  더 팔고 사면서 돈을 번
것뿐이었다.
  얼마 안 되는 집의 책을 몇이서 모아서 시 소비에트 협동조합 서점을  개업하고 싶다고 신청했
다. 영업할 장소를 신청하여 혁명 초기에 비어 있던 신발 창고나 원예를 하던  온실을 얻어서, 넓
은 천장 밑에서 잡동사니 책들을 팔고 있었다. 대학교수 부인들은 이전에 어려운 시기에 흰 빵을
구워서 몰래 암시장에다 팔곤 했지만, 지금은 비어  있는 자전거 수리장에서 버젓이 장사하고 있
었다. 세상이 변해서 혁명은 받아들여졌으나 '그렇습니다.'라든지, '좋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그저
그래요'라고 말하게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지바고는 이렇게 말했다.
  "바샤 너도 뭘 해야지"
  "저는 공부하고 싶어요. "
  "그야 그렇겠지 "
  "그리고 또 한가지 희망은, 어머니의 초상을 그리는 일이예요"
  "그것 참 좋은 일이지. 하지만 그릴줄 알아야지. 언제 그림 그려본 일이 있니?"
  "아프라크신에 살았을 때, 아저씨 몰대 목탄으로 장난해봤어요."
  "그래, 기회를 봐서 해보자. "
  바샤는 그렇게 뛰어난 재간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응용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소질은
가지고 있었다. 지바고는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바샤를 구스트로가노프 미술학교 고양학부에
입학시키고, 후에 인쇄 미술과로 전학시켰다. 여기서 바샤는 석판 인쇄와 활판  인쇄 그리고 제본
과 장정기술을 공부했다.
  지바고와 바샤는 서로 힘을 합쳤다. 지바고는 여러  가지 집다한 문제에 관한 얄팍한 소책자를
기술하고, 바샤는 실습 삼아 그것을 학교에서 인쇄했다. 부수는 아주 적었으나, 아는 친지들이 최
근에 개업한 고본점에 맡겨서 팔 수 있었다.
  지바고의 소책자는 그의 철학, 의학, 건강과 질병의 정의, 생물의 변이설과 진화론에 관한 사상,
유기체의 생물학적 기초로서의 개인의 문제, 콜라  아저씨나 시모치까지의 사고방식에 가까운 역
사관이나 종교관, 지바고가 탐방한 푸가초프 사적에 대한 감상, 자기의 시와 단편등이었다.
  알기 쉬운 대화체 문장으로 씌었으나 아무리 보아도 통속적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 까닭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독단적이며 생소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생기있고 독창
적인 것이었다. 그의 책은 잘 팔려서 호사가들의 평가가 높았다.
  그 당시, 시 작법이나 예술 작품의 번역 기술을 포함해서  모든 일이 전문화되어 여러 가지 주
제에 대한 이론적 연구 서적이 나왔으며, 여러 종류의 연구소가 생겼다. 또 여러  가지 사상 연구
소나 미학아카데미가 탄생했다. 지바고는 이런 기구의 절반 이상의 고문의를 맡았다.
  지바고와 바샤는 오랫동안 의좋게 지내고 있었다. 이 무렵 이집저집을 전전하면서 하숙을 옮겼
으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살기엔 좋지 않았다.
  지바고는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곧 시브체프 브라조크에 있는 그의 옛집을 찾아갔다. 그의 가족
은 바르이키노에서 모스크바에 돌아와서는 집에 들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가족의 추방은
모든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지바고네에게 할당되었던 방에는 새 사람이 살았으며, 살림살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웃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지바고를 보자 위험 인물이나 나타난 듯이 새파
랗게 질려서 숨어버리는 것이 었다.
  마르켈은 출세해서 이제는 시브체프에서 살지도 않았다.  그의 무치노이 읍의 주택 관리인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직무상의 사정으로 그의 가족은 전의 수위가 쓰던 방을  쓰기를 원했다. 흙바닥
이었으나 수도전이 있었고, 커다란 러시아식 난로가 있었다. 겨울이면 이집 여러 곳에서 수도관이
나 난방관이 터지기마련이었으나, 이 수위실만은 언제나 따뜻하기 때문에 물도 얼지 않았다.
  이 무렵 지바고와 바샤의 사이가 멀어지고 있었다. 바샤는 놀랍게 성장했던  것이다. 말하고 생
각하는 것이 그가 옛날에 펠가 강변  베레첸니크 마을에서 헌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소년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혁명이 내세운  간단 명료한 진리에 점점
끌려가게 되었다. 여기에 비해서 비유가  많고 어딘지 애매한 지바고의  이야기는 약점을 가지고
현실을 도피하려는 패배주의의 잘못된 생각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지바고는 정부기관을 드나들었다. 그는 두 가지 일에 분주했다. 하나는 자기  가족의 정치적 복
권을 얻어 그들을 조국에 돌아오게  하는 허가를 얻으려는 것과, 또  하나는 출국 여권을 얻어서
파리로부터 가족을 데려오는 데 허가를 얻으려는 것이 었다.
  그런데 이 노력이 너무나 냉담하고 미지근한 데는 바샤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바고는 이
제는 모든 게 글렀다고 체념하고, 며 오히려 만족하고 있는 듯싶었다.
  바샤는 차츰 지바고를 비난하게 되었다. 지바고는 바샤의 올바른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들의 친했던 관계에 금이 가게 되었다. 드디어 우정은 깨어지고 헤어지게  됐다. 지바고는 바샤와
함께 살던 하숙집을 떠나 무치노이 읍내로 옮겼다. 마르켈이 권세를 쥐고 있는 이곳 옛 스벤치츠
키 저택의 한 쪽 구석진 방을  얻었다. 이 집에는 못쓰게 된  욕실과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좁은
방이 있었고, 기울어진 부엌과 지반이 가라앉아 허물어지는 뒷문이있었다.  지바고는 이리로 옮겨
서는 의사 노릇을 포기하고, 자신을 돌보거나 친구를 만나는 일도 없이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
다.
  6
  찌푸등한 겨울 일요일었다. 난로 연기가 지붕 위에  높이 떠오르지 못하고 연기를 내면서 조그
마한 창문에서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시민들은  금지되어 있는 철제 난로 연통을 여전히
창문으로 내고 있었다. 도시 생활은 아직도 복구되지는 못했다. 무치노이 읍내의 주민들은 때투성
이가 되어 종기를 앓고, 추위에 감기를 앓곤 했다.
  일요일에는 마르켈의 가족들이 언제나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그들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했다. 빵 배급 제도가 정상적으로 실시되고 있던 시기에는, 이 식탁
에서 집안에 하숙하고 있는 사람들의 빵 배급표를 가위로 잘라서 구분하여 수를 헤아리며 등급별
로 묶어서 빵집에 가져갔었다. 돌아와서 빵을 잘게  잘라 나누며 각자 배급량만큼 저울에 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일이 옛말이 되어버렸다. 식량 통제의 방법이 달라진 것이다. 마르
켈의 가족은 긴 식탁에 앉아서 맛있게 먹고 마셔대는 것이었다.
  수위실의 절반은 커다란 러시아식 난로가 차지하고 있었고, 난로 위의 높은 침상에서 솜이불의
깃이 드리워져 있었다. 입구 현관 벽에는 수도전이 있었다. 방 양쪽에는 긴의자가 있었고 그 밑에
주머니와 물건이 든 긴 트렁크를  집어 넣고 있었다. 왼쪽에는 부엌 조리대가 놓였고, 그 위에 식
기를 놓는 선반이 벽에 붙어 있었다.
  난로가 타올라 방안은 무더웠다. 난로 옆에는 마르켈의  아내가 작은 병을 솜씨있게 모았다 헤
쳤다 하고 있었다. 땀에 젖은 얼굴에 난로 불빛이 비치다가도 끓는 증기가 덮이곤  했다. 작은 병
을 옆으로 치워 놓고, 안쪽  철판 위에 올려놓은 만두를 끄집어내서  단숨에 뒤집어 누렇게 익은
쪽을 위로 돌려서 다시 난로 안에 넣었다. 지바고가 물통을 양손에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많이 드십시오. "
  "당신도 같이 먹읍시다. "
  "고맙소. 난 벌써 먹었어요."
  "당신의 식사가 어떻다는 건 다  알고 있어요. 앉아서 따뜻한  것을 좀 드시지요, 사양 마시고,
감자 구이, 삐로그(고기만두의 일종)그리고 수프가 있어요. "
  "아니, 정말 먹었어요. 그런데 여러  번 드나들게 되어 방을  식혀서 안됐지만, 한번에 물을 다
길어 놓으려고 해요, 목욕통도 깨끗이 소재하고 물을 가득채워 놓으려고, 일고  여덟 번만 드나들
게 하면 당분간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되니까. 용서해요. 다른 데서는 물을 얻을 수 가 있어야지."
  "괜찮아요. 물은 얼마든지 길어 가시오. 시럽이라면 몰라도 물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냥 드리죠.
장사가 아니니까"
  식탁에 앉았던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그러나 지바고가 세 번째 물을 길어가는 데 공기가 달라졌다.
  "내 사위가 당신이 누구냐고 묻길래 얘기했는데  믿질 않더군. 상관없으니 물은 얼마든지 길어
가요. 하지만 마룻바닥에 쏟지는 말구. 그런데 이것 봐요, 문간에 물을 엎지르지  않았소. 그게 얼
어붙으면 쇠꼬챙이로도 파낼 수 가 없어요. 문은 제발 꼭 닫아요. 바람이 들어오지 않소. 한데 우
리 사위한테 당신이 아무래라고 말했는 데도 통 믿질 않더군. 도대체 당신한테 돈이 얼마나 들었
소! 그렇게 공부하고 이꼴이람? "
  지바고가 다섯 번인가 여섯 번째 들어갔을 때 마르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그만두었으면 좋겠어. 예의를 알아야 하지 않아요?  저 내 딸년 마리나가 당신의 역성을
들어서 내가 참았으니 말이지, 당신이 제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문을 잠그고  말았을 거요. 저
식탁옆에 앉아있는 애 말이으. 마리나를 기억하지요? 저것이 얼굴을 붉히긴…나보고 당신의 기분
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거요. 누가 당신을 들먹거리기나 한다구. 마리나는  중앙 전신국에 전신기
사로 있어요. 외국어도 알고 있다오.  그리고 저애는 당신이 불쌍하다는  거요. 당신한테 내 딸이
그만큼 동정하고 있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빈다오. 당신이  잘 되지 못하
는 것이, 마치 내 탓이나 되는 것 같소. 당신이 중요한 시기에 집을 버리고 시베리아로 도망친 것
이 운이 막힌 원인이었소. 모두가 제 잘못이란  말이오. 우리가 기아(飢餓)와 백위군의 봉쇄를 겪
으면서도 버티고 무사했어요. 자기의 책임을 알아야 해오. 토냐도 그냥 내버려루었기 때문에 지금
외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게 아니오. 그건 당신의 일이고,  내가 알바가 아니오. 그런데 그렇게 많
은 물을 대체 어디에 쓸작정이오. 어디 스케이트장이라도 만들  공사를 하고 있는 거요? 그런 꼴
을 하고 있는 당신을 보고 화낼 수도 없군요"
  다시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나는  잔뜩 화나서 주위를 훑어 보더니 화가
터져서 그들을 욕하기 시작했다. 지바고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가슴을 치는  것을 느꼈으나, 무
슨 영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씻을 게 많아요. 청소도 해야 하고, 마루도 닦아야 하고, 세탁도 하고."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소릴 하고는 남부끄럽지가 않아요? 이번엔 중국인 세탁소를 시작한다 하겠군! "
  "의사선생, 당신에게 딸을 보내드리겠어요. 빨래도 시키고 마루도 닦고 또 바느질도 시켜요. 얘
야, 저분을 겁낼건 없어. 얼마나 얌전한 분인데, 파리도 죽이질 못하는 분이야. "
  "아니예요, 부인, 괜찮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마리나가 나를 위해 손에 구정물을 묻혀서
되겠습니까? 나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
  "자기는 더러운 물을 손에 묻힐  수 있어도, 난 할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너무나 까다로우신
분이군요., 선생님, 왜 사양하시죠? 제가 선생님한테 손님으로 가면 쫓아내시겠어요?"
  마리나는 성악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듣기 좋은 말은 음성은 성량이 풍부한데다 세련되
어 있었다. 마리나는 조용히 말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대화에 필요한 정도를  초월하여 울려 퍼
지듯, 그녀로부터 떨어져 따로  사색하듯이, 옆방이나 그녀의 뒤쪽에서  흘러나오듯 들렸다. 이런
음성은 그녀를 보호하고 경호하는 천사와도 같았다. 이런 음성을 가진 여자를 모욕하거나 슬프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일요일의 물 긷던 일이 발단이 되어서, 지바고와 마리나 사이에 우정이  맺어지게 되었다. 그녀
는 자주 지바고한테 로 와서  일을 돌봐주었다. 이윽고 그녀는  지바고한테서 수위실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마리나는 지바고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런데 지바고는 토냐와 정식 이혼이 되어 있지  않아서 마리나를 입적시킬 수는 없었다. 얘기
를 낳게 되었다. 마르켈 부부는 딸을 의사의 부인이라고 차츰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마르켈
은 지바고가 마리나와 정식 결혼식을 하지 못하고 신고도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말한 적이 있었
으나, 그의 아내는 "여보, 정신  있어요? 토냐가 살아 있는 데  그런 바보짓이 어디 있어요. 이중
결혼이 되잖아요? "하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마르켈은 이렇게 대답했다.   "정말 당신이 바보로군.
토냐를 보란 말이오, 죽은 거나 다를 게 없지 않소. 그녀를 보호할 법률은 없어요. "
  지바고는 가끔 농담으로 우리는 스무개의 물통으로 이루어진 로맨스라고 말하면서 마치 20장이
나 20통의 편지로 된 연애 소설과 같다고 했다.
  이 무렵 지바고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스스로  낙담하고 자기 타락을 자각한 사람처럼 제
멋대로였다. 또 그는 집안을 어지렵혔으나 마리나는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으며, 그의 변덕이나 난
폭한 태도와 신경을 과민을 꾹 참아냈던 것이다.
  그녀의 헌신은 차츰 더해 갔다. 지바고 때문에 겪어야 했던 생활의 곤경이 닥쳐올 때, 마리나는
지바고를 혼자 두기가 안되어 전신국을  그만두고 함께 있는 것이었다.  전신국은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불가피한  시기가 지나면 다시 복직하는 것을  환영했다. 마리나는
지바고의 기분을 맞춰서 함께 날품팔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들은 셋집에 사는 사람들의 땔나무
를 패 주는 벌이를 한 적도 있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네프 초기에 돈을 번 암상인이나 정부와 가
까운 관계가 있는 학자나 예술가들은 집을 새로  짓고 가구를 장만하고 있었다. 하루는 지바고와
마리나가 길에서 먼지가 묻은 신발로 융단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신발을  조심하여 옮기면서 주인
의  서재로 장작을 날랐다. 주인은 무언가 열심히 읽으며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일을 시
키고 임금을 주는 사람은 그의 집 부인이었다.
  '이 돼지 같은 놈이 뭘 그렇게 열중하고 있을 까? '지바고는 호기심을  느꼈다. '뭘 저렇게 열심
히 쓴담? '장작을 안고 책상 뒤로  지나면서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책상에는  예전에 바샤가
학교에서 인쇄한 지바고의 소책자가 놓여 있었다.
  마리나와 지바고는 스피리도노브카 거리에서 살았으며, 고르돈은 근처인 말라야 브론냐에서 방
을 얻어 살고 있었다. 지바고 부부에게는 카프카와 클라쉬카라는 두 딸이  있었다. 카프카는 일곱
살이었고, 클라쉬카는 여섯달 된 갓난애였다.
  1929년의 초여름은 몹시 무더웠다. 아는 사람들끼리는 모자를 쓰지 않고 셔츠 바람으로 거리를
두세개 지나 서로 방문하고 있었다.
  고르돈이 살고 있는 방은 구조가 이상했다.  한때 유행되던 양복점의 작업장으로 아래위층으로
되어 있고 거리를 향한 쪽은 유리창문이 달려서  전망이 좋았다.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통하는 나
선형 계단이 내부에 있었다.
  지금 이 작업장은 셋으로 칸막이 되어 있었다.
  아래위층으로 방이 있고, 그 중간에 추가로 방을 하나 들였다. 이  가운데 방에는 살림방으로는
좀 이상하게 높이 1미터 가량의 유리창이 있었다. 이 유리창의 금박이 벗겨져서 밖에서 들여다보
면 방안 사람의 무릎까지 볼 수 있었다. 여기에 고르돈이 살고 있었다. 지바고와 두도로프 그리고
마리나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머리끝까지 유리창을 통해서 보였다.
얼마 후 마리나와 애들은 돌아가고 남자 셋만 남았다.
  여름에 흔히 보듯이 그들은 한가하게  앉아서 얘길 주고받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학교시절의 우정 그대로의 잡담이었다.
  이렇게 잡담을 해나가려면 누군가가 화제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런 사람이 자연스
럽게 말의 실마리를 풀어서 얘기를  끌고 가든지 생각을 하고 있어야  했다. 지금은 그럴 자격이
지바고 외에는 없었다.
  두 친구는 필요한 표현능력이 부족했으며 화술의 재능도 없었다. 말문이 막히면 방안을 서성거
리면서 담배를 피우거나 몸짓을 하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건 속이는 짓이야…속이는 짓
이야…속이는 짓이란 말이야."
  그들의 이런 연극 대사와 같은 말투는 정열적이며  폭넓은 성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딘가 허무하고 텅 빈 데가 있었다.
  고르돈과 두도로프는 좋은 신분인 학자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좋은 서적이나 훌륭한
사상가나 작곡가와 함께 생활하며, 어제도  오늘도 좋은 환경에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지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취미 때문에 가지게 되는 불행이, 취미가  없는 데서 오는 불행보다 더 못하다
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고드론과 두도로프는 줄곧 지바고를 나무라고 있었으나,  그것은 우정이나 친구의 힘이 되겠다
는 것은 아니며,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의식하지도 않았다. 제
멋대로 달리는 짐마차 모양으로 화제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비뚤게  나갔다. 대화를 조종하지
못하면 결국 궁지에서 충돌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설교도 훈계도 아닌 방향으로 탈선해
서는 지바고와 심하게 다투었던 것이다.
  지바고는 이들의 목적의식 없는 동기와 하찮은 감상, 기계적인 이론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여보게 친구들,  당신들 자신과 당신들이
대표하는 서클이 얼마나 속되며, 당신들이 자랑하는 명예나 권위가 그렇게 퇴색하다니, 우린 다만
같은 세대에 살고 안다는 것뿐일세' 이러한  소리를 친구들한테 해서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며
지바고는 그들을 낙담시키지 않으려고 조용히 말을 듣고 있었다.
  두도로프는 첫 번째 유형를 마치고 돌아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공민권이 회복되어 잠
시나마 매우 감격하고 있었다. 대학의 강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그는 유형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정신상태를 친구들한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고백은 무슨 비굴한 생각이나 딴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 유형되었는지, 또 풀려나오게 된 일,  그 중에는 검사와 흉금을 터놓고 했던  얘기를 통해서
아주 세뇌되어서 정치적으로 재교육되었으며 여러 면에서 눈을 뜨고 성장했다는 것이다.
  두도로프의 감상은 속된 이야기였으나 고르돈에게는 흡족했다.  그는 줄곧 고개를 끄덕이며 동
의를 표시했다. 더욱 두도로프의 이야기는 감상이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의 감동을 사게 됐
다. 그는 그의 회고담이 진정한 인간성의 표현에서 우러나오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라고 잘못 알
고 있었던 것이다.
  두도로프의 솔직한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 정신과 상통했다. 하지만 그의 적응성과 위선이 지바
고의 신경을 건드렸다. 자유를 가지지 못하는 인간은 항시 노예 상태를  이상화하는 법이니까, 중
세기가 그러했고, 그리스도교도 언제나 그걸 이용했던 것이다. 지바고는  소비에트 지식인들의 정
치적 신비주의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성과로서, 말하자면 시대정신의 조
류라 할 수 있었다. 지바고는 다투기 싫어서 참아 왔었다.
  그러나 두도로프의 이야기에서 그의 마음을 끈 것이 있었다. 그것은 두도로프의 감방 친구였고
치흔(1865∼1925 러시아 정교회 대주교, 반혁명 운동의 중심 인물)의 추종자였던 오를레초프 신부
의 얘기였다. 신부에게는 여섯 살된 딸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체포되어  투옥된 사실은 그
녀에게 큰 타격이었다. '우상 숭배자'라든지 '공민권  상실자'라는 딱지는 부끄러운 오점으로 생각
되었다. 흐리스치나는 정열이 끓어오르는 어린 가슴에 언젠가  꼭 훌륭한 가문에 찍힌 오점을 벗
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없이 정한 목적은 그녀의 마음속에 굳은 결의로  불타올라, 지금은 공산
주의의 광신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난 가야겠어."지바고는 말했다. "화내지는 말게, 미샤, 방안이 무덥고 밖은 더워서 갑갑하네. "
  "창문은 열렸는데, 미안해, 우리가 담배를 너무 피웠군. 자네와 함께 있을 땐 삼가야 하는 건데,
내 잘못보다 이 집 구조가 이래 놔서, 자네 방 하나 구해주지 않겠나? "
  "정말 가야겠네, 우리 실컷 얘기했어, 여러 가지  염려해 주어서 고마웠어. 그런데 공연한 소리
가 아니고, 난 환자일세, 동맥 경화증이야,  심장 근육이 약해졌어. 언젠가는 이  심장병이 터지고
말 테지. 아직 나이 40도 안 되었는데, 술도 못 마시고, 인생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
  "벌써 임종의 기도를 하는 건가. 어리석군. 자넨 오래 살 걸세. "
  "최근에는 현미경으로 보일 정도의 심장 출혈이 있었어. 물론 치명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을 수
도 있어요. 이것은 현대적인 질병일세. 정신상태가 병의 원인이 돼요. 많은 사람이 습관화될 만큼
항상 표리부동한 생활을 해야 하니 말일세. 매일 마음에도 없는 소릴 지껄이면서 싫은 것 앞에서
굴복하고 불행을 가져오는 일을 좋아 날뛰고 있으니 우리의 건강이 나빠질 것은  뻔한 이치가 아
닌가. 우리의 신경 계통은 허구가 아니란 말이야. 그것은 섬유로된 신체의 일부라네. 우리의 영혼
은 공간에 존재하여 마치 입속에 이빨이 있듯이. 우리 내부에 자리잡고 있어요.  그것을  계속 학
대하게 되면 온전할 수가 없지. 두도로프, 난 자네의  유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어.
유형으로 인해서 자네가 성장하고 재교육되었다고 했어.  그것은  마치 말이 자기가 자기를 길들
였다는 얘기와 같군. 그래"
  "난 두도로프의 얘기에 찬성이야. 자넨 이미 보통 인간의  언어와는 인연을 끊었으니까, 우이독
경이란 말일세. "
  "그럴 테지. 미샤, 어쨌든 가야겠어. 숨이 막혀요. 진정일세"
  "잠시 기다려주게. 그건 구실에 지나지 않아. 우리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기 전에는 보내지 않
겠네. 알겠나, 이제는 자네도 사고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겠나? 어때, 자네는 토냐나 마리나의 관
계를 분명하게 해야 하지 않겠나? 그들은 살아있는 인간이며, 고민하고 감정을 가진 여성이란 말
일세. 자넨 머리속에 제멋대로 도사리고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상과는 다르네, 게다가
자네와 같은 인물이 아무 쓸모 없이 썩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야. 자넨 잠에서 깨어나 새
출발을 해야 하네. 그 하잘것없는 거만스러운 태도를 버리게. 그래, 주위의 현실을 모르는 체하는
고집을 버리고, 직장을 가지고 일하는 거야"
  "좋아야. 내가 대답하지. 난 혼자서 최근 그런 생각을  자주 해왔어. 부끄럼 없이 약속할 수 있
네, 내 생각으론   모든 일이 잘 것만 같네. 그것도 이제 곧 말일세. 두고  보세. 이제 잘 될 거니
까. 나도 이상한 것은 내가 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일세. 하지만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앞
으로 지고지선를 향하여 전진하고 도달하는 데 있어요. 
  난, 고드론 자네가 이전에 토냐를 돌봐주듯이 마리나를 위해 주어서 기쁘네.  그런데 나는 마리
나나 토냐와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네. 그들뿐만 아니라 나는 누구와도 다투지는 않아. 처음엔 내
가 마리나를 '너'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당신'이라고  부르며 나를 경칭으로 유리 안드레예비치라
고 불러서 자넨 곧잘 날 비난했지만 나 역시 마음이 괴로웠어. 하지만 이런 부자연스러운 관계의
밑바닥에 깔린 어색한 점은 벌써 사라지고 말았어. 이젠 모든 것이 잘 돼가고  있고, 우린 대등한
사이로 돼버렸어.
  이제 좋은 소식을 또 전해주겠네. 다시 파리에서 편지가  오기 시작했네. 애들도 잘 크고, 같은
또래의 프랑스 애들과도 잘 사귀고 있다는 거야.  싸샤는 그곳 국민학교 에코르 프리메르를 졸업
하게 되고, 미샤는 입학하게 되었대. 그렇지만 난 내 딸놈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우리 가족은
프랑스 국적으로 있지만 어쩐지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긴
해도, 잘 될 것 같은 느낌이야.
  여러 모로 보아서 장인과 토냐는 마리나와 애들의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난 편지에 그런
얘기는 하지도 않았지만, 무슨 소문을 들은게 분명해.  물론 장인은 토냐를 생각하고 분개했겠지.
5년 동안이나 편지 왕래가 끊긴 것이 그 탓이겠지. 내가 모스크바에 돌아온 후에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회답이 뚝 끊기고 말았으니까.
  그런데 이제야 그쪽에서 편지가 온 거야. 심지어 애들까지 편지를 써보냈어.  따뜻하고 예쁜 편
지였어. 뭔가 좀 누그러진 모양이야. 아마 토냐한테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제발 그녀에게 새로운
친구라도 생겼으면 좋겠어. 모를 일이야. 나도 가끔 편지를 보내겠어. 이젠 정말 이 방에 못 있겠
군. 꼭 나가 봐야겠어. 다들 잘 있게.”
  다음날 아침 마리나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고르돈에게  뛰어왔다. 아이들을 맡길 사람이 없어서
클라쉬까를 담요에 둘둘 싸서 한 손으로 가슴을 껴안고 다른 손에는 카포카의  손목을 끌고 뛰어
왔다.
  "유라가 여기 있어요, 미샤?"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래요."
  "저는 거기서 와요. 그는 대학  강의가 있어서 안 계셨어요.  이웃 사람이 유라를 아는데, 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럼 어딜 갔을까?"
  마리나는 클라쉬까를 소파에 뉘고, 미친 듯 울음을 터뜨렸다.
  8
  이틀 동안 고르돈과 두도로프는 마리나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 혼자만을 있게 하는 것이 두
려워서 교대로 그녀를 지켰고, 그러는 동안에 지바고를 찾아나섰다. 갈 만한  곳은 죄다 찾아보았
다. 무치노이 읍과 시브체프 댁에도 알아 보았고, 전에 지바고가 근무하던 문화 회관이나 사상 연
구소도 샅샅이 찾아다녔으며, 생각나는 대로 주소를 알면  그의 옛 친구를 모조리 찾았으나 허탕
이었다.
  그러나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다. 설사 호적 계출이  되었고 전과사실도 없었다 해도 그 당신
의 생각으로는 모범적인 시민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며,  그에게 주의를 쏠리게 한다는 것은 좋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고는 그의 행방 수색을기를에 의뢰하지
않기로 했다.
  사흘째 되던 날, 마리나와 고르돈  그리고 두도로프는 각각 다른  시간에 지바고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편지에서 소동을 일으켜  미안하다는 말과 자기에 대해 걱정하지  않도록 바랐으며,
또 아무리 찾으려 해도 소용이 없으니 제발 찾지 말도록 간청했다.
  그는 편지에서 되도록 빨리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의 운명을 뜯어고치를 위해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얼마 동안혼자 있게 해주기를  바랐으며, 조금이라도 다시 소생하고  또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숨어 있는 곳을 뛰쳐 나와 마리나와 애들한테로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고르돈한테 보낸 편지에는 그의 명의로 돈을  보낼테니 마리나에게 전해주기를 부탁했으며, 마
리나는 유모를 두고 아이를 맡기고 직장에 나가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마리나한테 직접 송금하지
않는 이유는 만약 돈의 액수가 알려지만, 그것을  도둑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녀는 걱정시
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얼마 후에 송금되어 왔다. 지바고 자신은 물론, 그의 친구들의 형편에도 생각 못할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그래서 유모를 두고 마리나는 전신국의 직장으로 다시 나가게 되었다.  그녀는 얼마 동
안은 마음이 들떴으나 지바고의 괴팍한 성미에 익숙했던 그녀는 이번에도 체념하고 말았다. 지바
고의 간청과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그의 친구들과 마리나는  계속 그의 거처를 찾았지만, 그의 말
대로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9
  그 사이에 지바고는 몇 발자국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숨어 살았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
이다.
  그가 자취를 감추던 날, 어두워지기 전에 브론나야  거리에 있는 고르돈의 하숙집을 나와서 스
피리도노브카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백 보도 채 못 되는 앞에서 이복 동생 예브그라
프와 만나게 되었다. 지바고는 한 3년 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고, 소식조차 알지를 못했다. 예브그
라프는 얼마 전에 모스크바에 왔다고 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뜻밖에 지바고 앞에 나타나서
는 이것저것 묻는 말에는 그저 웃으며 농담으로  넘기며 어깨만 흠칫해 보였다. 예브그라프는 인
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몇 마디 묻고는 지바고가 겪고 있는 고난을 죄다 파악하고 골목길을 지나
오면서 득실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형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바고가 자취를 감추고 얼마 동
안 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카메르게르스키 거리의 예술 극장 근처에 지바고의 방을 구해주었다.  그가 돈을 대고,
연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어디 병원 같은 곳을 찾아서 분주히 다녔다. 동생은 일상 생활이나 여
러 면에서 형의 뒤를 돌봐주었다. 끝으로 지바고의 가족들이 파리에서 불안한 생활을 그만두도록
지바고가 그곳에 가든지 가족들을 귀국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예브그라프는 모든 것을 잘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자기한테 맡기라는 것이었다. 동생의 도움으로 지바고는 힘을  얻었다. 그의 권력에
대한 수수께끼는 지금도 풀리지 않았으나 지바고는 그것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10
  방은 남향이었다. 이중창 너머로 극장 지붕이 보였다. 오호트느이 시장 하늘 높이 여름 해가 비
치고 있었으며 뒷골목길에 그림자가 들어 있었다.
  지바고가 일하기엔 방은 너무 큰 편이었고, 서재로서도 널찍했다. 이 무렵  그는 일에 열중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 계획이나 착상이 책상 위에 쌓아 놓은  노트에서 넘쳐, 한꺼번에 많은 일을 시
작한 화가의 아틀리에이 그리기 시작한 화폭들이 벽 여기저기 걸려 있듯이, 고개를 든 구상이 망
령처럼 구석구석 떠 있었다. 그의  방은 정신적인 전당이었으며 광적인  발상의 서가를 계시하는
창고였던 것이다.
  다행하게도 병원과의 교섭이 오래 끌게 되어서 언제부터  근무하게 될지 몰랐다. 이 시간을 이
용해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지바고는 작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던 책자들을 예브그라프가
어디선가 찾아다 주었다. 그 뷜는 그의 필적이었으나 또 일부는 딴 사람이 복사한 것이었다. 자료
가 두서없이 엇갈려 있어서 아주 정력만 낭비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의 원고를 정리하는 일은 단
념하고 새로 쓰기로 했다.
  그가 바르이키노에 처음 갔을 때 글을 쓰던 것처럼 논문의 골자를 나열하거나, 처음과 중간 그
리고 결론의 구별없이 생각나는 대로 시의 단편을 틈틈이 썼다. 때론 샘솟듯 떠오르는 생각에 쫓
기어 첫 문자만 쓰거나 약어를 쓰기도 했지만,  이렇게 서둘러 속기하고도 밀어닥치는 생각을 뒤
따를 수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댔다. 상상력이 희미해져서 펜을 움직이기  어려워지면 낙서를 하면서 상상력을 일
으키곤 했다. 그럴 때면 으레 숲의 공지나 거리의  십자로 중앙에 있는 '모로베트친킨 회사. 파종
기·탈곡기'의 광고탑이 있는 그림을 그렸다.
  논문이나 시의 주제는 한결같았다. 그것은 도시에 관한 것이었다.

  11
  이것은 후의 일이었으나 다음과 같은 그의 글이 발견되었다.
  1922년 내가 모스크바에 돌아왔을 때,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았다. 혁명 초기의  시련
을 겪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주민들은 피난해버렸으며, 새 집을 짓거나 집을  수리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에서도 역시 모스크바는 현대적  대도시였으며, 현대의 새로운 예술에
참된 영감을 낳게 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블로크, 베르하렌, 휘트먼과 같은 상징주의 시인들이 연관도 없이 사물과 관념을 무질서하
게 나열하는 것은 결코 문체상의 변덕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에서 인식되고 자연에도 받아
들인 인상의 새로운 질서인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이 시의 한줄 한줄을 엮듯이 19세기와 20세기의 초엽의 도시에서  거리의
잡담은 군중과 마차의 무리, 전차와 지하철의 차량들이 스스로  불을 토하며 우리들 눈앞에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에 목가적인 순박함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순박성을 가지려면  전원 생활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카데믹한   서재의 먼지를 쓰고 있는 서가에서 끄집어낸 책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생생하게 구성되어 현대 정신에  아주 자연스럽게 메아리치는 살아
있는 언어는 도시의 언어인 것이다. 나는 분주한 도시 네거리에서 살고 있다. 내리쬐는 모스
크바의 여름해는 아스팔트를 녹이고 집 이층 창문에 반사되며 비구름과 가로수 길에 입김을
불어서 우리 주변을 눈부시게 맴돌아  나의 눈을 현혹케 하고, 내가  도시를 찬미하고 남의
눈을 흐리게 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 도시는  나를 길렀고 나의 손에 예술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담장 너머에서 밤낮없이 들끓고 웅성거리는  거리는 현대 정신과 굳게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울리기 시작한 서곡이, 아직은 어둠에 감춰져 있으나 이제 조명을 받으며 붉게 나타나
게 될 무대의 막과도 같았다.  대문과 창 밖에서 쉴새없이 아우성치는  도시는 우리들 모든
인생에 끝없이 거창한 서곡을 울리고 있었다. 내가 쓰고 싶은 도시는 이러한 모습이어야 한
다.
  그러나 지바고의 작품으로 보존된 것 중에는 이러한 시가 없었다. 혹시 시 (햄릿)이 이런
부류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12
  8월도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아침, 지바고는 가제트나야 거리 모퉁이의 정류장에서, 대학에
서 니키트스코예 거리를 경유하여 쿠드린스카야 행 전차를 탔다. 그는 솔다첸코프라고 불리
는 보크킨 병원에 처음 출근하는 길이었다.
그는 이전에 한두번 취직 관계로 병원에 가본 적은 있었다.
  지바고는 운이 나빴다. 그가 탄 전차는 낡아서 줄곧 고장을 일으켰다. 짐마차 바퀴가 철길
홈에 끼어서 길을 가로막거나, 전차 지붕이나 마루 밑에서 전기 누전이 일어나서 불꽃을 튕
기기도 했다.
  운전사가 렌치를 들고 앞문을 열고 내려서 전차 주변을 둘러보면서 고장난 장소를 조사하
고, 엎드려서 이 뒤 운전대와 바퀴 사이의 기계 장치를 수리하고 있었다.
  이 운 나쁜 전차는 그 노선의 모든 교통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미 길거리는 멈춰선 전차
들 때문에 혼잡을 이루고 있었으며, 뒤에서는  다른 전차가 자꾸 밀려 들었다. 멈춘  전차의
행렬은 제일 끝이 마시장까지 이르렀고 그 뒤까지 뻗어 있었다. 뒤쪽 전차에 탔던 승객들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게 된다고 생각해서 인지, 앞의 고장난 전차로 옮겨 타고  있었다.
이 무더운 아침에 몸도 움직일 수 없게 꽉 차버린 전차 속은 숨막힐 것 같았다. 니키트스키
대문 쪽에서 길거리를 뛰어 오는 승객들 머리 위에는 검은 자색 구름이 차츰 하늘높이 흐르
고 있었다.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
  지바고는 차츰 창문 쪽으로 밀려서 왼쪽 좌석에 앉아 우두커니 음악원이 있는 왼편 거리
를 유심히 내다 보았다. 무슨 딴생각을 하면서 우두커니  지나가는 사람이나 마차의 왕래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다.
  천으로 만든 실국화와 수레국화 꽃을 장식한 밝은 색 밀짚 모자를 쓰고 몸에 달라붙은 구
식 연보라 옷을 입은 백발 노부인이 숨가쁘게 헐떡이며 손에 든 납작한 보자기로 부채질하
면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코르셋을 꼭  끼게 입고 있어서, 더워서 땀에 젖은  눈썹과
입술을 레이스가 달린 조그마한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그 부인이 가고 있는 방향은 전차가 가는 방향과 같았다.  전차의 이 고장이 고쳐져서 움
직일 때마다 지바고는 여러 번 그 부인을 시야에서 놓쳤으나,  또 고장이 나서 멈추게 되면
다시 보게 되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란히 발전해가면서도 제각기 조금씩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인
생 도상에서 남을 앞지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남보다 오래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럴 경우, 일
상 생활의 경쟁의 터전에는 상대성 원리와 비슷한 것이 작용한다고 생각했으나 끝내 머리가
혼돈되어서 이런 추리도 집어치우고 말았다.
  번개가 번쩍하더니 천둥소리가 들렸다. 불쌍한 전차는  이때 쿠드린스카야 거리에서 동물
원까지 가는 언덕길에서 또 멈춰버렸다. 얼마  후, 보라빛 옷의 부인이 지바고의  차창밑을
지나서 멀리 가고 있었다. 굵직한 빗방울이 인도와 차도, 그리고 부인에게 떨어지기  시작했
다. 세찬 먼지 바람이 불어서 가로수의 나뭇잎을 흔들면서  부인의 모자를 벗기고 스커트를
젖혔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지바고는 허탈한 충격을 느꼈다. 겨우 일어서며 창문에 달린  끈을 붙잡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열심히 창문을 열려고 했으나 끄덕도 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창문에 못을 박아서 열리지 않는다고 큰소리로 말했지만, 불안에 사로잡혀
발작과 싸우고 있는 지바고는 자기한테 하는 소리인 줄도 몰랐고  그 뜻도 알지 못했다. 그
래서 다시 끈을 세 번 올렸다내렸다하며 당기면서 문을  열려고 애썼으나, 갑자기 경험하지
않았던 심한 고통을 가슴에 느꼈다. 몸속에서 무언가 망가지고  어떤 치명적인 일이 생겨서
최후의 시각이 오고 있다고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는 순간 전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프
레스냐를 좀 달리더니 다시 멈추어 버렸다.
  그는 초인적인 의지의 힘으로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의자 사이의 통로에  빽빼이
들어찬 승객 속을 헤치고 뒤쪽 승강구로 나왔다. 승객들은 잘 비켜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욕
설을 퍼붓기까지 했다. 그러나 밖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공기를 쐬자 살 것 같았다. 아직  종
말은 아닌가 보군, 기분이 좋아졌다고 생각되었다.
  뒤쪽 승강구에 빽빽이 들어찬 사람을 밀치고 나오자 다시  소리지르며 밀치곤 했다. 그는
아랑곳없이 밀에 헤치면서 서 있는 전차에서 포도에 내려와 한 발짝 두발짝 세 발짝 내디디
다가 갑자기 돌 위에 픽 쓰러져버렸다.
  금세 떠들썩한 소리, 말소리, 다투는 소리가 났다. 몇  사람은 전차에서 내려와 그를 둘러
쌌다. 이미 호흡이 멎고 심장도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을 알았다. 인도에서도 사람들이  몰려
와,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가 아닌게 다행이라고 했고, 또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보라색 옷을 입은 부인이  가까이 와서는 시체를 들여다보며
주위 사람들 얘기를 듣고는 가버렸다. 그녀는 외국사람이었으나 시체를 전차에 실어서 병원
으로 운반해야 한다느니, 경찰에 알려야 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듣고 있었다. 부인은
결과를 알 생각도 하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보라색 옷을 입은 노부인은 스위스 사람이었으며 멜류제예보에서 온 마드므와젤 플레리였
다. 그녀는 12년 동안 자기 나라에 돌아갈 출국 허가를 신청하여 왔던 것인데, 드디어  최근
에 그것이 결실을 보게 되어 출국사증을 받기 위해 오게  된 것이었다. 그날 대사관에서 사
증을 받아 종이에 싸서 리본으로 묶은 서류를 부채로 쓰고 있었다. 마드므와젤 플레리는 열
번도 더 전차를 앞질러 걸어가면서도, 자기가 지바고를 앞질러 그를 이겼으며, 그보다 더 오
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13
  복도에서 문안으로 들여다보면 방 한쪽 구석에 놓인 테이블이  있었다. 그 위에 아무렇게
나 깎아 만든, 통나무 배처럼  생긴, 밑부분이 좁다란 관 유해의  빳빳한 다리가 보였다. 이
테이블은 지바고가 글을 쓰던 책상이었다.  그밖에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고지는  책상
서랍에 넣고, 그 위에 관을 올려놓았다. 베개를 높게 괴어 머리를 받치고 있어서 관 속의 유
해는 몸을 일으켜 일어나려는 모습이었다.
  그 계절에 귀하게 볼 수  있었던 라일락, 시클라멘 그리고 시네라리아  등의 많은 꽃들이
화병과 바구니에 담겨 주위의 놓여  있었다. 창문으로 비치는 햇빛은 그  둘레에 쌓인 꽃을
지나 유해의 창백한 얼굴과 손에, 그리고 관 나무와 쇠붙이에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테이
블 위에는 금세 움직일 듯한 아름다운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유해를 화장하는 풍습이 많았다. 아이들의 학교  교육과 마리나의 직장을 감
안하고 또 아이들의 학비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종교 의식을 하지 않고 시민화장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을 관계당국에 통지하고 대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안은 마치 살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새 사람이  오기 전처럼 텅 비어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에 문상객들의 발걸음 소리만 간간히 들려올 뿐이었다. 문상객은 그다지 많지
는 않았지만,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았다. 거의 무명인사였던 그의 죽음은  놀랄
만큼 빨리 알려졌다. 고인의 생애에서, 여러 시기에 지면이 있고 또 잊혀졌던 꽤 많은  사람
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의 사상과 예술은 더욱 많은 면식조차 없는 친구들을 끌어들였다. 그
들은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추모하기 위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인 방문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의식도 없이 적막에 싸인 이 시각은 몸에 스며드는 가난을 느끼게 하였으나, 다만
꽃들만이 의식과 노래를 대신해주고 있었다.
  꽃은 향기를 뿜으며 피어났다가 향기가 사라지며 시들어가면서, 있는 힘을 모조리 불사르
고 무언가 이룩하려는 듯 서두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식물계는 유계의 가까운 이웃이라고 생각되었다. 여기 푸른 대지 나무 사이에 있는
묘지, 그리고 땅속에서 돋아나는 꽃의 새싹에 우리를 번뇌시키는 비밀과 생명의 수수께끼가
응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처음에는 잘못 보고,
교회 안을 가고 있는 정원사로 생각했던 것이다.
  14
  마지막 거처였던 카메르게르스키 거리에 고인의 유해가 운구되었을 때, 그의 죽음에 놀란
친구들은 거의 미치광이가 된 마리나를  데리고 허겁지겁 뛰어왔다. 주문한  관이 도착하고
방안 정돈이 끝날 때까지 유해는 긴 의자에 뉘어 있었으나, 마리나는 오랫동안 실신한 사람
처럼 마룻바닥에 엎드려 의자 끝에 얼굴을 대고 눈물을 흘리며 목메어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는 소리라기보다는 신음소리가 되어 저절로 나왔다. 마리나는 시골 여인처럼 남
부끄러움없이 정신을 잃고 통곡했다. 방을  정리하고 나머지 기구는 밖으로  내가고 유해를
운반해서 관속에 안치할때까지도 그녀는 유해에 매달려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어제 있었던 일이었다. 오늘은 미칠듯한 슬픔도  가라앉고 몹시 얻어맞은 것처럼
허탈한 상태였다. 그러나 여전히 제정신을 잃고 한마디 말도 없이 꼼짝 않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 밤낮을 꼬박 앉아서 한 걸음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린 유모가, 젖을  먹이
기 위하여 클라쉬까를   여기까지 안고 오거나 카프카를 데려오곤 했다.
  비탄에 잠긴 두도로프와 고르돈이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  곁에 벤치에는 아버지 마르
켈이 앉아서 조용히 코를 풀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울면서 방문했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 속에 유독  눈에 띈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남들보다 고인과
가깝다거나, 또 마리나와 그의 딸이나 친지들보다 슬픔이 더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고인에 대해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별다른 주장을 한 것도  아니다.
저절로 그 두사람한테 모든 권리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권한을 침해하려는 사람도 없었
고 또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두 사람은 장례를 마련하는 데 스스로 나섰다.  처
음부터 만족스러운 듯이 침착하게 필요한 수속을 하나하나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느긋
한 태도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되고 이상한 인상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은 장례에 관
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바고의 죽음에도 관련된 듯 했으나,  죽은 데 대해서 책임이 있
는 것도 아니며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오히
려 모든 것을 체념하는 태도였다. 세 사람 정도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며,  더러
는 짐작할 정도였으나 대부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키르기스 사람의 인상을 풍기는 가느다란 눈매가 예리하게 빛나고 호기심을  일으
키고 있는 이 사람과 수수한 모습의 아름다운 여인이 관이 안치된 방으로 들어오자,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과 마리나까지도 한마디 항의도  없이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했듯이  자리를
비켜서 벽쪽에 놓인 의자에서 일어나 복도나 대기실로 나가버렸다.  이리하여 두 남녀는 조
용히 누구의 방해도 없이 직접 장례에 관계되는 아주 중요한 일 처리에 초청된 전문가처럼
반쯤 문이 열려 있는 방안에 그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의자에 앉자마자 사무적인 얘길
시작했다.
  "알아 보셨습니까? 예브그라프 안드례예비치?"
  "화장은 오늘 밤 하게 될 겁니다. 이제 반 시간 후에는 의무요원조합에서 유해를 조합 클
럽에 운반하게 될 겁니다. 장례식은 네 시에 있습니다. 그런데 서류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
었어요. 노동 수첩은 기한이 지나버리고, 조합원증은 낡은 것이 었으며 갱신되어 있지도  않
았고, 조합비도 최근 2, 3년 동안 체납돼 있었어요. 이러한 것을 전부 정리하려니까, 꽤 시간
이 걸렸어요. 유해를 그쪽으로 옮기기 전에―이제 곧 올 텐데, 준비를 다 해놔야 됩니다―부
탁하시던 대로, 여기에 혼자 계십시오. 실례하겠습니다. 전화가 왔군요. 곧 돌아오겠습니다."
  예브그라프는 복도에 나왔다. 지바고의 친구,  학교 동창, 병원 하급  직원 그리고 출판계
사람들이 복도에 뒤끓고 있었다. 마리나는 어깨에 걸친 외투 (날씨가 추웠으며 현관에서 추
운 바람이 불었다)속에 아이들을 감싸 손을 붙잡고  벤치 끝에 앉아서, 마치 죄수를 면회하
러 온 사람이 형무관이 면회실에 들여보내기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다시 방문이 열리기를 기
다리고 있었다. 복도가 비좁아서 모인 사람의 일부는 나오고 있었다. 계단으로 오르는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이 대기실이나 현관에서 서성거리고 담배를 피우곤 했다. 층계에서는 거리
에 가까운 쪽일수록 더 큰소리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브그라프는 떠들썩
한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마치 호령하듯이 큰 소리로  전화에
대답하고 있었다. 장례식 준비와 지바고의 사망 경위등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어 그는 방으
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했다.
  "화장이 끝난 후에도 어디 가시지 마십시오, 라라 아주머니, 저는 중대한 청을 드려야겠어
요. 어디서 묵고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되도록 빨리, 내일이나 모래쯤 형의 원고를 정리해야
겠습니다. 당신한테 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형님에 대해 잘 아실  겁니
다. 아까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르쿠트스크에서 모스크바로 오신 지가 이틀 된다고 하셨
지요. 여기서 형님이 몇 달 사셨는지 또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딴 볼일로 우연히 오게 됐다
고 하셨지요. 저는 당신의 얘기에 이해할 수 없는 데가  있지만 굳이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
니다. 아무튼 그냥 떠나버리지는 마십시오. 저는  당신의 주소로 모릅니다. 얼마 동안,  형의
원고를 정리하는 동안은 같이 여기에 계시든지 가까운 곳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웬만하시면
이 집에서 딴 방을 얻어보겠습니다. 관리인도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지요?"
  "당신은 저한테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했는데, 뭣 때문이죠? 나는 모스크바에 도착
해서 짐을 맡겨두고 옛 모스크바 시내를 걸어보았어요. 절반은 모습이 변해서 알 수가 없더
군요. 또 많이 잊어버렸구요. 자꾸 걸어가다가 쿠즈네츠키 다리를 지나서 그 옆길로  올라가
고 있는데, 갑자기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곳으로 왔더군요―카메르게르스키 거리까지,  거긴
돌아간 내 남편, 총살된 안치포프바 대학시절에 방을 얻고 있던 곳이예요. 그것도 바로 지금
당신과 내가 앉아 있는 이 방이란 말이예요. 그래서 잠깐 들러보려구, 혹시 이전 주인이  지
금도 살고 있나 해서요. 그런데 알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다 변해버렸더군요. 저는
어제 오늘 찾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알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당신이 거기에  계셨지요.
제가 왜 당신한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난 기절할 지경이었어요. 현관은 활
짝 열려 있고 방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관에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어요.   누가 죽은
것일까? 들어 가서 가까이 보고, 난 미쳤거나 아니면 꿈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
은 거기서 나를 보고 계셨어요. 그렇지요?"
  "잠깐만, 라라 아주머니, 말씀드리겠어요.  형이나 제가 이 방에  무슨 사연이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한때 안치포프바 이방에 살고 있었다니. 그런데 당신이는 말씀하
신가운데 뜻밖의 사실이 하나 있어요. 용서하세요. 안치포프에 대한 것인데, 스트렐리니코프
의 군사 혁명활동에 대해서 군사 혁명 초기에는 거의 매일같이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그리
고 한두번은 직접 만난일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가족관계에서 그  분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
는 것은 추호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런데  혹 잘못 들었는지, 당신이 '총살된  안치포프'라고
하셨지요. 혹시 잘못 말씀하신 것은 아닌  지요? 자살한 것을 당신이 모르실  리가 없을 텐
데."
  "그런 소리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난 믿질 않았어요.  안치포프는 자살할 사람이  아니예
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형 얘기에 의하면, 당신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버린 후에 유
라친을 떠나기 전까지 살고 계셨던 집에서 안치포프바 자살했다고 했어요. 당신이이들을 데
리고 떠난후 얼마 있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지요. 형이 유해를 매장했어요. 그런 얘길  듣지
못했다니 어떻게 된 겁니까?"
  "그래요, 제가들은 이야기는 다릅니다. 그럼 정말 그분은 자살한 걸까요? 사람들은 그렇게
얘길 했지만 나는 믿질 않았어요. 바로 집에서 일이  일어났다니? 그럴 수가! 죄송합니다만,
그분이 지바고와 얼마나 만났는지 모르세요듣지 못했어요?"
  "형의 얘기는 매우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고 했어요?"
  "정말이예요? 됐어요, 그렇게 되질 잘했어요(라라는 천천히 성호를 그었다."어쩌면 그렇게
신통히 꼭 맞췄을까! 그럼 나중에 천천히,  다시 한번 물어봐도 괜찮겠지요? 아무리 사소한
일도 저에게는 귀중한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난 지금
몹시 흥분해 있어서 조금 쉬면서 진정하고 나서 생각 좀 해야 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하세요."
  "정말 그렇지 않아요?"
  "물론이지요."
  "아, 참 제가 깜빡 잊을 뻔했군요. 당신이, 화장이 끝난후에 저더러 가지 말라고 하셨지요.
알겠어요. 약속하겠어요. 저는 당신과 함께 돌아와서, 말씀하신 대로 일이 끝날지 때까지 머
물러 있겠어요. 우리함께 유라의 원고를 정리하기로 하지요. 도와드리겠어요.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필요할 겁니다. 저는 가슴에 뛰는 피와 전신을 흐르고 있는 피로써 그이의
모든 필적을 흠뻑 느껴보겠어요. 그리고 또 제가 당신한테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도움을 받
아야겠어요. 제가 듣기에는 당신은 법률가시라구요. 적어도 구제도와 지금의 신제도를  잘알
고 계시지요. 게다가 어떤 일을 어느 관서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는 일은 중요한 일
이예요. 이런 것은 매우 알기 어렵거든요. 그렇잖아요? 나로선 무척 마음이 아프고 무서운일
이 한가지 있답니다. 그 일 때문에  당신의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어린 아이에 대한  문제예
요. 그러나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죠. 화장이 끝난후에 말예요.  나 같은 여자는 평생을 사람
만 찾는 팔자인가 봐요.  그렇잖아요? 가령, 예를 들어서  말씀드린다면, 남에게 길러달라고
주었던 아이의 행방을 찾아야 할 경우, 전국에 있는 고아원의 기록 같은 것이 없을까요? 또
인구 조사나 집 없는 애들의 명부같은 것이 없을까요? 아니, 지금은 대답하시지 마세요.  나
중에, 제발 나중에 듣기로 하지요. 정말 무서운  일이예요! 인생은 너무나 처참해요! 어떻게
될는지 몰라도 저의 딸이 올때까지는 여기에 있기로 하겠어요.  카첸카는 연극과 음악에 뛰
어난 소질을 가졌답니다. 그 아이는 흉내도 잘 내고요.  자작 연극도 곧잘 한답니다. 그리고
또 듣고 오운 오페라의 한 대목을 멋있게 부르기도 한답니다. 맹랑한 계집아이예요, 그렇죠?
나는 딸을 연극 학교나 음악학교 초급반에 보내고 싶어요.  어디든지 입학만 시키면 기숙사
에 넣을 작정이예요. 그래서 그 아이를 안 데리고 왔어요. 그것이 잘 되면 저는  돌아가려고
해요. 단숨에 다 얘기할 수는 없군요. 그렇잖아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기로 하고 지금은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좀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걱정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겠어요. 그
리고 참, 유라의 가족들을 복도에 쫓아내서 안됐어요.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꽤
떠들썩하군요. 문을 열어서 그분들을 들어오시게 하시죠. 잠깐  기다리세요. 관 곁에 의자를
하나 갖다 놓지 않으면 유라한테까지 닿질 않아요. 저도  발끝으로 쳐켜서 봤지만 무리였어
요. 마리나와 아이들을 위해서도 필요해요―'너희는  마지막 키스를 나에게 보낼지어라'말이
예요. 정말 괴롭군요.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모두들 들어오게 하겠어요. 그러나 그전에 한마디만, 당신은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와 고통스러웠던 문제들을 물으셨지만 저는 뭐라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
힘 자라는 데까지 기꺼이 도와드리지요. 그리고 아시겠습니까, 언제 어느 경우에도 절망해서
는 안됩니다. 희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만이 불행한 경우를 당했을 때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가 아닐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실망만 한다는 것은  의무를 저버리고 의무에 역행하
는 것이 됩니다. 이제 문상객을 방에 모시기로 하지요. 말씀대로 의자를 옆에 놓도록 하겠어
요. 곧 가져오도록 하지요."
  그러나 라라는 이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예브그라프가 방문을 열고, 복도의  사람들이
밀려들어 오고, 그가 장례를 맡은 사람들과 문상객들에게 하는 말소리도 듣지 못했으며,  문
상객들의 발걸음 소리도, 마리나의 통곡도, 남자들의 기침  소리도, 여자들의 눈물과 울음소
리도 듣지 못했다.
  주위의 단조로운 소음은 소용돌이 속으로 그녀를 휘몰아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녀도 기절
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머리를  숙
이고 상념의 추억 속에 잠겼다. 잠시 몇 시간 동안에 그녀는 알지 못할 미래, 수십  년 후의
장래로, 그녀가 노파가 되어있을 미래로, 생전에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먼  시간속으로
도망쳐 가는 것이었다. 깊은 생각에 빠지며 불행한 밑바닥으로 잠겨가고 있었다.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한 사람은 죽었다. 또 한 사람은 자살했다. 그래서 죽여도 시원
치 않을 사람만 남았다. 내가 죽이려다 못 죽인 사내들만 남았다. 이 세상에 살아있을  필요
도 없는,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비참한 인간들만이, 나의 생애를 뜻하지 않는 범죄의  연
속으로 만들어 버린 사내들만이 꾸역꾸역 살아 남았다. 그 소름끼치는 늙은 괴물은 우표 수
집가만이 알고 있는 아시아 지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한테 있어야 할 가까운
사람은 이미 남지 않았다.
  아, 그 크리스마스 날, 너무나도 추악한 그 속물을 쏴 죽이려고 생각하고 나가기 전에, 이
방 어둠 속에서 나는 아직  소년이던 파샤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고별해 가는
유라는 그때까지는 나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기억을 되새기며 크리스마스 날 파샤와 나눈 이야기를 생각해내려고 애썼으나, 머
리에 떠오르는 것은 창문에 얼어붙은 성에를 둥글게 녹이며 타오르던 창가의 촛불뿐이었다.
  여기 고인이 되어 책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이 그 당시 거리를 지나가는 길에 그  구멍난
유리 창문을 들여다보며 촛불에 마음이 끌렸던 것을 그녀는 생각이나 했을까? 밖에서 바라
본 그 불빛―'테이블 위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여기서  그의 숙명적인 인생이 시작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명상은 흐트러지고 있었다. 교회 장례식을 올리지 않게  된 것은 얼마나 유감스러
운 일인지 몰라! 그 장엄한 의식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그것이 분에 넘치는 의식일는지
몰라도 유라에게는 그것이 잘 어울릴 거야. '관에 눈물을 뿌리면 할렐루야의 노래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분을 두고 하는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순간, 그녀는 자랑과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
기의 얼마 되지 않은 생애에 지바고와 함께 지내고 있을  때에도, 헤어진 후에 그를 생각할
때에도 그녀는 언제나 이러한 감정을 절박하게 느끼곤 하였으나, 지바고의 영혼에서 끊임없
이 흘러나오는 자유스럽고 맑은 입김은 지금도 그녀를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녀는 의자
에서 재빨리 일어났다. 걷잡을 수 없는 생각이 가슴에 끓어올랐던 것이다. 잠시  동안이라도
그녀는 자기를 가두고 있는 슬픔에서 벗어나 유라의 도움을 받고 자유로운 천지에서 다시금
해방의 환희를 느끼고 싶었다. 자기 혼자만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그이 곁
에서 실컷 울면서 이별을 즐기는  행복이야말로 그녀가 그리던 해방에서  오는 행복이었다.
마치 안과 병원에서 안약을 넣은 때처럼 눈물이 흘러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으며, 고통스
러운 눈으로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코를 훌쩍이면서 움직이기 시작하
더니 드디어 방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그녀는 방안에 혼자 남게 되자, 재빨리  성호를
그으면서 관 가까이 가서 예브그라프가 놓은 의자에 올라서 천천히 세 번 유해 위에 성호를
긋고 얼음장 같은 얼굴과 손에 입술을 댔다. 차디찬 이마는 주먹 쥔 손과 같이 줄어든 느낌
이었으나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생각도 없이, 또 울지도 않고 관 중앙의 생화와 유해를
자기의 몸, 가슴, 영혼으로 그리고 영혼과 같은 자기의 큰 두 손으로 덥혔다.
  15
  드디어 참을 수 없는 오열이 그녀의 가슴을 들먹였다. 참을  수 있는 데까지는 참고 견디
었으나 갑자기 힘이 빠지면서 눈물이 쏟아져 뺨과 옷과 손으로 그리고 매달리고 있는 관 위
에 하염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생각도 없었다. 그이와 밤중에 이야기하던 것처럼 일련의 생각,  돌아가
는 얘기, 자식 그리고 확신이 하늘에 뜬 구름처럼 그녀의  머리 속을 혼자서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도 행복과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절로 용솟음쳐 오르는 따뜻한  공감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밀착된 지식의 교환이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이러한 지식이 넘치고 마음의  준비가 되어서 죽음에 대한 어둡고  막연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수십번이나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지바고를 잃어본 일이 있
듯이 굳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 이 관옆에서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가 않았다.
  참으로 자유스럽고 비할 데 없는 애정이 아닌가! 그들은 남들이 노래부르듯 서로 아주 자
연스럽게 이해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정열에 불타'피할 길 없어서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애정은
그들이 자신보다는 주위의 모든 것 ―발밑의 대지와, 머리 위의 넓은 하늘과 구름, 수목들이
원하고 있었다. 또 거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산책하면서  바라보던 먼 경치들과 그들이
살고 만나고 하던 방들이 그들 자신보다 더 그들의 사랑을 기뻐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거야말로 그들을 가까이 묶어놓은 귀중한  것이다! 언제나 낙원처럼 자기를 잊
을 만큼 행복한 순간에도 숭고하고 벅찬  마음을 잃지 않았다. 세계와 조화를 이룬  만족감,
세계의 모든 모습과 피가 통하는 감정, 우주 전체의 모든  정경이 미의 일부라는 감각을 잃
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이 모든 것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을  자연계의 다른 것들
위에 올려놓고 인간을 존중하고 숭배하는 풍조는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한 잘못
된 사회성의 원칙과 정치에의 적용은 보잘것없는 허튼 수작으로 생각되었고 이해가 되지 않
았던 것이다.
  16
  라라는 평상시의 말로써 그에게 이별을 고하기 시작했다. 꾸밈없는 말은 현실성과 논리의
궤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의 합창이나 독백 그리고 시나 음악, 그밖에 약
속된 논리를 벗어나 그저 격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거침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녀
의 슬픈 사연이 담긴 말이 눈물에 젖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말은 따스한 빗물에 젖어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부드럽게 들렸
다.
  "우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유라 신은 우리에게 재회를 주셨어요.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무서운 방법으로 했을까요! 아, 난  울고 또 울어도 소용이 없군요. 생각해보세요.
앞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쳐오고야 말 거예요. 당신이  가셨으니 나의 종말도 가까워지
고 있어요. 아마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이 일어나고야  말 거예요. 삶의수수께끼, 죽음의 수수
께끼, 천재의 매혹, 계시의 매혹 등은 우리에게 이해가 되었어요. 그러나 지구를 개조한다는
따위의 속세의 자길구레한 일들은 우리들이 할 일은 아니예요.
  잘 가세요. 나의 위대하고 그리운 사람아, 잘 가세요. 나의 자랑, 나의 깊고 빠른 시냇물의
흐름이여. 나는 당신의 끊임없이 흐르는 물결 소리와 그대의  차디찬 물결로 뛰어들기를 얼
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기억나시지요? 눈 내리던 그날, 당신과  헤어지던 때의 일을 어쩌면  당신은 나를 그렇게
속였을까! 당신을 그냥 두고 난 혼자 어떻게 갈 수 있어요? 난 알고 있어요 왜 당신이 억지
로 그렇게 하셨는지 알고 있었어요. 나의 행복을 위하여 당신은 억지로 하셨다는 것을. 그러
나 그때 모든 일은 다 끝장이 나버렸어요. 아, 거기에서 내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당신
은 모르세요. 유라, 나는 나쁜 짓을 했어요!  죄인이란 말이예요. 당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쁜 짓을 한 여자란 말이예요!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탓이 아니었어요. 그때 나는 석달 동
안이나 앓아 누웠어요. 그 한달 동안은 의식도 없었어요. 그때부터 후회와 고통 때문에 한시
도 편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어요.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았어요.
도저히 고백할 용기가 없었어요.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  마다 머리끝이 빳빳해지는 두려움
에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다른 여인들처럼 술을 퍼마시는 따위의 일은 없었
어요. 술취한 여자는 정말 마지막이니까 그렇잖아요?"
  그녀는 무슨 말을 하더니 괴로움에 울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얼굴을 들어 자기 주변을
힐끗 돌아보았다. 방안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와 휘청거리는 관에서 물러서면서 마지막눈물을 짜내서 마룻바닥에 던지는 몸짓으로 손
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남자 몇 사람이 관에 가까이 가서 세폭의 피륙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출관이 시작되었다.
  17
  라라는 카메르게르스키 거리에서 며칠을 보냈다. 예브그라프의  부탁으로 그녀는 원고 정
리를 도왔으나 끝내지는 못했다. 예브그라프는 그녀의 부탁도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서 어떤
중대한 일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라라는 집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그날 거리에서 체포된 것 같았으며
그녀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북부에 있는 많은 보통 수용소나  여자 수용소에서 성명도
없이 번호만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일에는 그  번호를 기재한 명부조차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제16장
  에필로그
  1
  1943년 여름, 쿠르스크 만곡지대 돌파 작전과 오룔 탈환 후의 일이었다.
  최근에 소위로 임관된 고르돈과 두도로프  소령은 각기 자기 부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고르돈은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가 귀대중이며, 두도로프는 모스크바에서 사흘 동안의 휴가
를 끝내고 돌아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도중에서 만나 체르니라는 작은 도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적군이 물러가
면서 폐허로 만들어 '무인지대'가 된 주택지는 황폐하기는 했으나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
었다.
  부서진 벽돌과 돌더미가 쌓인 거리의 폐허 사이에 그대로 있는 건초장를 발견하고 거기에
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두 사람은 잠자지 않고 밤새 얘기만 하고 있었다. 새벽 세 시경에, 졸고 있던  두도로프가
바시락거리는 고르돈 때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고르돈은 마치  물속처럼 부드러운 마른 풀
속에 뒹굴면서 옷을 챙겨 들고 엉금엉금 기어서 건초 더리에서 문 쪽으로 나왔다.
  "출발 준비하는 건가? 아직 일러요."
  "강으로 가는 길이야. 세탁 좀 할려구."
  "정신 없는 소리 하는군. 저녁녘엔 부대에 도착할 건데. 타냐가 갈아입을 것은 줄 텐데 뭘
그래."
  "참을 수 없네. 땀에 절어서 더럽혀졌어. 강물에 헹궤서  꼭 짜 입으면, 오전 햇볕이 뜨거
워서 금세 말라요. 거기서 몸도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지."
  "그래도 그건 곤란해. 자넨 장교가 아닌가?"
  "지금은 일러서 모두 자고 있으니까. 나무 그늘에서 씻으면 누가 보겠나? 자넨 아무 소리
말고 잠이나 자게."
  "어차피 잠들긴 글렀어. 나와 같이 가세."
  금세 솟아오른 해는 벌써 뜨겁게 타고 있었으며, 그들은 하얀 돌더미를 지나 강으로 가고
있었다. 전에 거리였던 부근의 땅바닥에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빨갛게 달아오른 사람들이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집을 잃고 갈데 올데 없는 노인들과 아이들이었으
며, 본대에서 낙오된 적위군 병사도 간혹 섞여 있었다. 고르돈과 두도로프는 그들의 발을 밟
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조심스럽게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조용히 하게. 온 동네 사람들이 깨겠네. 그렇게 되면 빨래는 못 하게 되네."
   그들은 낮는 목소리도 간밤에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2
  "이것이 무슨 강인가?"
  "모르겠어. 묻질 못했어. 아마 주샤 강일 걸세."
  "아니야, 이름이 다르든데."
  "주샤라니까, 그 일이 일어난 곳인데. 흐리스치나의 일 말이야."
  "아, 그렇지. 그 강은 더 하류에 있어요. 교회에서는 그애를 성인으로 추앙했다더군."
  "거기엔 '미구간'이라고 불리는 석조 건물이 있었어. 실은 그것이 국영 농장의 마구간이었
지. 지금은 그것이   역사에 남을 명칭으로 되었어. 벽이 두꺼운 오래된 건물이었어. 독일군
이 점거해서 철통같은 요새로 만들어버렸던 거야. 그곳에서는 사방으로 사격이 가능해서 우
리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있었어. 그래서 마구간을 탈취해야 했는 데. 흐리스치니가  용기와
꾀를 가지고 독일군 진지로 들어가 마구간을 폭파해버렸어. 그러나 자신은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지만."
  "왜 두도로바라고 부르지 않고, 흐리스치나라고 부르나?"
  "우리는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니까. 1941년 여름에 전쟁이 끝나면 하기로 약속했던 거
야. 그 후에 나는 굉장히 돌아다녔어. 우리 부대는 언제나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끝없
는 이동 때문에 그녀와의 연락도 끊기고 말았어. 그녀의 무공과 장렬한 전사에 대하여 나는
신문이나 연대 명령을 보고 알게 되었어. 아마 이 근처에다  그녀의 기념비를 세울 계획 같
았어. 죽은 유라의 동생 지바고 장군이 그 여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이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얘기가 있어요."
  "미안하군, 괜히 그 여자 얘길 꺼내서. 자네한테는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나."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아.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만 했어.  이제 방해하지 않을 테니 목욕
하고 빨래도 하게. 난 언덕에 누워서 풀잎을 씹으며 생각에 잠겨봄세. 한잠 잘지도 몰라."
  잠시 후에 얘기가 계속되었다.
  "자넨 어디서 세탁하는 걸 배웠지?"
  "그것은 다 필요해서였어. 우리는 운이 나빴어. 형무소 중에서도 제일 지독한 곳으로 옮겨
졌었네. 살아 남은 사람이라곤 별로 없었다네. 우리는 그곳에 도착하자 기차에서 끌어내려졌
어. 그 일대는 눈 벌판이었으며, 멀리에 숲이 좀 보였어. 경비원들은 총을 겨누고,  경찰견도
있었어. 같은 시각에 또 다른 죄수의 집단이 또 몇 개 있었어. 우리는 온 들판에 깔려서 둥
글게 서고, 서로 마주 보지 못하게  바깥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정렬하게 했어. 무릎을  꿇고
앉으라는 명령이 내렸지. 옆을 바라보면 총살한다는 거야. 이리하여 몇시간 계속하여 긴  굴
욕적인 점호가 시작되었는데, 그것도 무릎을 꿇고 있는 그대로 였어. 점호가 끝나서  일어서
니까 다른 집단들은 줄지어 떠나간 다음에 '여기가 너희들의 수용소다. 알아서 하라'고 하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 눈의  허허벌판에 기둥 하나가 복판에  세워져 있었다네. 그 기둥에는
'구라그(국가수용소 총관리국의 약칭)92야 엔 90'이라고 씌어 있었어.그것뿐이야.
  "그럼 우리는 그것보다는 쉬웠군. 나는 운이 좋았어.  그러나 난 두 번째 유형이었으니까.
한번 당하면 으레 두 번 당하게 되는 법인가봐. 그것도  딴 죄목으로 걸렸으니 조건도 달랐
지. 석방되니까 첫 번째처럼 공민권도 회복되고 또 대학의 강의도 맡을 수 있었으니까. 전쟁
때에는 정식 소령계급으로 동원되었었네. 자네처럼 죄수 부대가 아니었어."
  "거기엔 정말 푯말뿐이고 아무것도 없었어. 처음 우리는 막사를 지을 나무를 구하기 위해
그 추위에 맨손으로 나뭇가지를 꺾어서 움막집을 지었다네. 그러는 사이에, 믿어지지 않겠지
만, 자고 깨고 하면서 마음도 좀 가라앉게 되었어. 자기 손으로 감옥을 짓고 울타리를  만들
고 감시탑도 세우게 되었지. 무엇이든지 다 제손으로 하는 거야. 그리고 벌목하기 시작했어.
숲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여덟사람이 한조가되어서 썰매를 끌고 재목을 운반해내는 거야. 가
슴팍까지 눈 속에 빠지면서 말일세. 우린 전쟁이 시작된 것을 오랫동안알지 못했다네.  숨기
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것이 알려지고 희망자는 죄수  대대로 편성되어 전선에 나
가게 되었고, 만약 전쟁후에 살아남으면 석방해준다는 조건이었어. 그 후에는 공격에 또  공
격,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의 끝없는 연속, 지뢰와 박격포의 폭음이 그치지 않는 포화의 탄막
이 있을 뿐이었어. 우리의 부대를 결사대라고 부른것도 당연한 일이야. 전우는 모두  쓰러지
는 데 내가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정말 기적같은 일이 었어. 그러나 이 유혈의 지옥도 수용
소의 공포에 비하면 마치 천국이었다네. 그것은 물질적인 조건에서가  아니라 아주 딴 이유
에서 말일세."
  "그래, 정말 자네는 혼났겠군."
  "거기서 배운 것은 세탁만이 아닐세. 무엇이든지 다 배울 수 있었어."
  "놀라운 일이었어. 그것은 자네의 죄수 생활과 비교해서 뿐만 아니라,  1930년대까지의 생
활과 비교할 때, 자유스럽고 대학에서 한가하게 교편을 잡고  서적이나 금전에 윤택한 생활
을 하고 있던 그 당시와 비교하면, 전쟁은 폭풍처럼 불어서 신선한 공기를 흘러들여서 구제
의 입김을 느끼게 했었지.
  나의 생각으론 농업의 집단화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과오를 시인하려고
하지도 않았어. 실패를 은폐하기 위해 여러 가지 테러 수법을 써서 국민들로부터 사물을 판
단하거나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
은 오히려 정반대도 역설해야 했어. 그리고  예조프(1936∼1938, 스탈린 대숙청의 하수인)일
당의 포악한 행위와, 처음부터 지킬 생각도 없는 신헌법과  선거의 원칙에서 벗어난 선거의
실시 따위였어.
  이리하여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의 공포나 현실의 위기, 닥쳐올  죽음에 대한 위협등은 비
인간적인 허위의 지배에 비하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 몰라.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
은 듯이 가벼운 마음이었지. 왜냐하면 전쟁은 사문자의 마력을 제한하니까.
  자네와 함께 유형갔던 사람뿐만 아니라 전방 후방은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
을 쉬게 되었고, 참된 행복에 취해서 죽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구제를 의미하는 전쟁의 용광
로 속으로 뛰어들었던 거야.”
  "전쟁―그것은 연이어 내려오는 한 고리에 불과하며,  이것으로 인해서 변혁은 그 직접적
인 원인과 작용을 끝내고 만 것이 되네.
  혁명의 간접적인 영향은, 변혁의 성과가 결실되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란 말일세. 그
것은 재앙에서 구출되고, 성격이 단련되고, 미지근한 것을  쳐부수고, 영웅주의가 생겨 나서
크게 펑펑거리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어. 이런 기괴하고 놀라운 일들
이 이 시대의 도의적 정화를 가져오고 있었으니까.
  이러한 것을 볼 때 흐리스치나의 죽음이나 나의 부상, 그리고 우리 모두의 희생과 전쟁에
서 뿌린 피흘린 대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감에 가득차 있었어. 흐리스치나최후의  빛,
우리 모두의 생명에 밝게 비치고 있는 자기 희생의 빛은 그녀를 잃은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있어요.
  가엾게 자네가 고통을 받고 있을 무렵에는 난 석방돼  있었어. 그때 흐리스치나는 역사학
부에 다니고 있어서 내가 가르치고 있었어요. 벌써 이전에 내가 처음 수용소에서 형기를 마
치고 나왔을 때, 그녀는 어리고 예쁜 소녀라고 생각했네.  그땐 유라가 살아 있었던 때였어.
말한 적이 있었지. 이리하여 그녀는 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네.
  그때는 말이야, 학생이 선생을 곯려주는 것이 유행이었지. 흐리스치나는 그런 장난에 열중
에 있었어.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는 유독 나한테만 매섭게 공격을 퍼붓는 거야. 그것
이 너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어서  다른 학생들까지도 분개해서 나의 편이  될
지경이었으니까. 흐리스치나는 제법 유머가 있는 여학생이었어. 나의 여러 가지 별명을 지어
서는 벽보에 발표해서 날 놀림감으로 만들었지. 그런데 우연히  그 뿌리깊은 증오가 그녀의
풋사랑의 눈가림이었다는 것을 후에야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녀가
좋아졌단 말일세.
  1941년의 여름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여름이었지. 전쟁 첫 해에 그녀는 몇 명의 남녀 학생
과 함께 모스크바 교외의 별장지에서 지내고 있었고, 우리 부대도 거기에 주둔해 있었어. 우
리는 사이가 좋아진 거야. 그 당시는 군사 교육과 의용 부대의 편성, 흐리스치나의 공수  훈
련, 그리고 모스크바 시내의 옥상에서 독일군의 공습을 최초로 격퇴하게 되었던 때였어.  아
까도 얘기했지만 그때 우리는 약혼을 했었지. 그러나 나는  이동하게 되어서 서로 헤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 후는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어.
  후에 전세가 호전되어 독일군이 한 번에 수천명씩 항복할 무렵에 두 번째 부상을 입고 병
원에 입원하고 난 후, 나는 고사포 부대로부터 사령부 제 7국으로 전속되었지. 거기서는  외
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해서 내가 우겨서 자네를 바다 밑창에서 집어올리듯 겨우 배속받
도록 한 걸세.”
  "세탁부로 있는 타냐는 흐리스치나를 잘 알고 있어요. 전선에 있었을 때 서로 잘 알고 친
숙한 사이였지. 흐리스치나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길 해주었다네. 타냐가 얼굴에 웃음을  지을
때는 유라와 닮았더군. 자네는 그렇게  생각지 않나? 그애가 웃을땐  들창코와 광대뼈가 안
보여서 꽤 매력이 있고 예브장하던데, 그런 아가씨는 흔히 볼 수 있어요."
  "그런 것 같기도 하군, 난 주의해서 보지 않았어."
  "타냐 베조체레도바라고 부르는 것은  가혹한 이름이야. 성은 아니지.  무슨 별명일 거야.
그렇게 생각지 않는가?"
  "그 내력을 우리에게 얘기하더군. 소녀는 자기 부모를 알 수 없는 고아였었대.  아마 러시
아의 깊은 시골에서 순박한 말투로 '애비 없는 아이'라는 뜻으로 베조트챠라고 불렀겠지. 그
런데 이렇게 불러본 적이 없는 도시 아이들이 제멋대로 불러서 그 이름이 달라졌을 거야."
  3
  이것은 고르돈과 두도로프가 체르니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서로 얘길 나누고 얼마  되지
않아서 철저하게 파괴된 카라체프 읍에서의 일이었다. 자기 부대를  찾아가던 그들은 이 읍
에서 주력 부대의 후방에 겨우 닿을 수 있었다.
  무더운 가을날이었으며 맑은 바람 한점  없는 날씨가 달포로 더  계속 되었다.브란스크와
오룔 사이의 옥토 지대인 비옥한 브르인쉬치나는 맑게 갠 하늘에서 내리쏟는 뜨거운 열기에
짙은 갈색으로 타고 있었다.
  곧바른 간선 도로가 거리의 중앙으로 지나고 있었다. 한쪽 길가에서는 지뢰가 폭발하면서
부서져 벽돌 더미로 돼버린 집들과 뿌리째 뽑힌 나무가 찢기고 타다 남은 과수원의  잔해가
엿보였다. 길 저쪽엔 거리가 파괴되기 전에도 별로 건물이 없었던 것같은 황야가 보였다. 그
곳에는 전혀 파괴될 것이 없어서 화재나 폭발의 흔적이 적었다.
  집이 많던 쪽에서는 집 잃은 사람들이  무럭무럭 연기가 나고 있는 잿더미를  파헤치면서
덜 탄 데서 무언가 실어내서 한 곳에 모으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재빨리 토굴을 파고서 지
붕을 만들 잔디를 네모나게 자르고 있었다.
  길 건너 공지로 돼 있는 쪽에는 사단  사령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야전 병원과 길을 잃고
혼란되어 서로 찾아 헤매는 수송, 병참, 보급 등의 모든 후방 부대의 막사가 허옇게  보였으
며, 트럭과 짐마차 등이 뒤범벅되어있었다. 회색 약모를 쓰고 무더운 외투를 말아서  어깨에
짊어진 보충 중대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린 병사들이, 적리를  앓고 나서 핏기가 없는 얼
굴로 여기와서 좀 쉬고나서 다시 서쪽을 향해 떠났다.
  화재와 폭격 때문에 반쯤 잿더미가 된 거리는 여전히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시한폭탄
이 설치된 먼 곳에서는 지금도 폭탄이 터지고 있었다. 뜰안을  파던 사람들은 땅의 진동 때
문에 이따금 작업을 중지했다.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곡괭이에  기대서서 폭발이 되고 있는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저 멀리서 회색과 검은색 그리고 붉은 벽돌색의 구름 같은 연기와 먼지가, 처음에는 기둥
이나 분수처럼 하늘에 치솟아 올라가 공중에서  가볍게 퍼져서 깃 모양을 이루다가  마침내
산산이 흩어지며 땅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일손을  멈추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들판 한쪽에서는 관목과 고목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공지가 있었다. 이  울창한 나무로
바깥 세계와 차단된 공지는 외딴집의 시원한 그늘진 뜰안과도 같았다.
  여기에서 세탁부 타냐는 두 세사람의 같은 소속부대 사람과 고르돈과 두도로프 그리고 그
밖의 사람과 함께 아침부터 트럭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은  타냐와 그녀에게
맡겨진 연대의 짐들을 운반하기로 돼 있었다. 연대의 짐들을  상자에 넣어 공지에 산더미처
럼 쌓여 있었다. 타냐는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나머지사람들은 그녀를 태우
러올 트럭을 놓칠세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시간도 더 오래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그들은 심심한 참에, 갖은 파란을 다 겪은  이
수다스러운 여인의 지껄거리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바고  장군을 만났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예요. 장군에게 날 데려가더군요.  지바고 소장 말이예요. 그는 한
국리스치나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이야
기를 물어 보고 다니는 거예요. 그이는 흐리스치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목격자들을 찾
고 있었어요. 우리둘이 친구였다고 말하니까, 그이는 날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와서 나를 데려간 거예요. 아니조금도 무섭지 않았어요. 그이는 조금도 다른 데
가 없이 남들과 똑같은 분이예요. 눈꼬리가  좀 치켜 올라가 있었고 머리는 검은  편이예요.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말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맙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름과 고향
을 물었어요. 난 창피하더군요. 자랑이 될 것이 있어야지요.  나는 여러 번 감화원에 있기도
하고 방랑하기도 했었거든요. 그러나 장군은 말해보라고 하면서 부끄러울 건 없다는 거예요.
저는 처음에는 말을 많이 못했어요. 그러다가 내 말을 조금 더 하니까, 그이는 머리를  계속
끄덕였어요. 그분이 머리를 끄덕이니까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사실 나는  할말이 많았어요.
내가 당신들에게 말해도 믿질 않을 거예요. 그분도 같았어요. 내 말이 다 끝나자 그분은  방
안을 오가면서, 이건 기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다시 나를 찾을 테
니 걱정하리 말라는 거예요. 꼭 찾아서 데려간다고 하셨어요.  난 꿈만 같았어요. 그분은 날
이대로 두지는 않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자상한 말씀이 있었는데, 다음엔 그분이 저의 아
저씨가 되고, 난 장군의 조카가 된됐어요. 날 대학에도  보내구, 어디든지 가고 싶은 학교말
이예요. 거짓말이 아니예요. 정말이예요. 날 놀리시는지도 몰라요."
 이때 그의 짐마차가 공지로 돌아오고 있었다. 폴란드와 서부 러시아에서 보리 짚단을 나를
때 쓰는 옆이 높고 길죽한 마차였다. 예전에는 마부라고 불리었던 마차 수송대 병사가 두필
의 말을 몰고 왔다. 그는 공지에 들어와 자리에서 뛰어내리고 마차에서 말을 끄르기 시작했
다. 타냐와 몇 병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가 차삯을 줄테니 태워달라고 입을
모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마차를 제 마음대로 사용할 순 없다면서 명령대로 해야 한다고
거절하고 말을 끌고가더니 다시 보이지 않았다. 땅바닥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일어나서 빈
마차에 올라 앉았다. 이것 때문에 중단되었던 타냐의 이야기가 다시 계속되었다. "장군이 또
무슨 말을 했지?"고르돈이 물었다. "말할 수 있으면 말해주게."
  "그럼요, 말하지요."
  그리하여 그녀는 끔찍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4
  "정말 할 얘기가 너무 많아요. 나는 보통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래요.  사람들의 하는
얘기인지 나 자신이 어렴풋이 생각이 떠올라 그런 지는 몰라도, 우리 어머니 라리사 코마로
바는 백몽고(당시 소비에트 지배밖에 있던 몽고 지방)에 잠복해 있던 러시아의 장관 코마로
프 동무의 부인이었대요. 그 코마로프라는 사람은 나를 낳은 아버지가 아니었어요. 물론  나
는 교육도 받지 못하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고아였어요. 당신들은 아마 우스울  겁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할뿐이예요. 내 입장이 되어보세요.
  그런데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크르쉬츠이를 지나 시베리아 끝해야 중국 국경이  가까
운 카자크의 거주 지역에서 시작돼요.  우리 편인 적위군이 백위군의  본거지였던 고장으로
가까이 왔을 때, 코마로프는 우리 어머니와 모든 가족을 특별 열차에 태워서 데려가라는 명
령을 내렸어요. 깜짝 놀란 어머니는 한발짝도 갈 수 없다고 했어요.
  코마로프는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내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으니까요. 어머
니는 오랫동안 이분과 헤어져 있는 동안에 날 낳게 되었고, 어머니는 누가 그이에게 이말을
할까봐 정신이 없었어요. 코마로프는 어린애를 몹시 싫어했어요. 애들은 집안을 더럽히고 시
끄럽게 굴면서 소리지르고 발을 굴러 참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적위군이 가까이 오고 있을 때, 어머니는 나고르나야  역에서 신호수로 있는 마르
파 아주머니한테 사람을 보냈어요. 그것은 우리가 있었던 읍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곳이었
는데, 처음 정거장은 니조바야였고, 그 다음이 나고르나야,  그리고 삼소노프스크 재가 있었
어요. 신호수는 이 재에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마르파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아마 그녀가 읍으로 야채와 우유를 팔러 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알 수 없는 일이 있어요. 그들은 우리어머니를 속였어요. 그들은 어머니를 속
이고 그저 잠시 어린애를 맡았다가,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 하루 이틀이면 된다고 말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낳은 자식을 남한테 줄 어머니가 어디 있겠어요. 그때 난
어렸으니까 그 아주머니한테 가면 과자를  주고 좋은 아주머니라고 달래서  갔었어요.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어린 마음에 슬펐던  생각을 하면 끔찍해요. 나는 목을 매어  죽고
싶었어요. 어렸지만 미칠 지경이었어요. 내 짐작으론, 양육비로서  마르파는 많은 돈을 받았
을 거예요.
  그 집은 부유한 편이었어요. 소와 말이 있었고, 닭도  치고 있었어요. 또 채소밭이 있었고
밭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어요. 집은  관사였기 때문에 공짜로 살았구요. 철길 바로  옆에
있어서 기차가 우리 고향 쪽에서  올 때는 언덕의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겨우 올라왔어요.
그러나 당신들이 살고 있는 러시아쪽에서 오는 기차는 내리막길을 너무 급하게 달려서 브레
이크를 걸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가을이 되어서 숲의 나뭇잎들이 떨어지면, 아래쪽의  나고
르나야 정거장이 마치 접시에 올려놓은 것처럼 보였어요.
  신호수인 바시리 아저씨를 시골 풍속대로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그는 명랑하고 선량한 분
이었어요. 그런데 남을 지나치게 믿는 게 흠이었어요. 술에 취하기라도 하면 마치  거세되는
돼지처럼 지껄여서 온 고장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자기
속을 툭 터놓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언제나 나더러 자기를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난 어머니란 소리가 나오
지 않았어요. 그건 내가 친 어머니를 잊지 못했거나 아주머니가 너무 무서웠던 탓인지 모르
겠어요. 그래서 그냥 마르파 아주머니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 몇해가 지나갔어요. 얼마나 지났는지 알지  못해도 나는 기차가 오면
깃발을 흔드는 일이나 마차에서 말을 끄르는 일을 하였고, 소를 돌보는 일을 했어요. 아주머
니는 나에게 물레를 돌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집안일은 말할것도 없고, 청소하거나  정
리하고 식사 준비에 가루를 빻는 일  등 아무 거나 다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또 페쨔를
돌봤어요. 페쨔는 세 살인데, 다리가 마비돼서 걷질 못해서 내가 돌보게 된 거예요. 후에 언
젠가 아주머니가 나의 튼튼한 다리를 곁눈으로 째려보던 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져요. 내 다리는 싱싱한데 페쨔의 다리가 마비된 것은  내가 눈으로 저주했기 때문이
란 거예요. 정말 이 세상에는 그렇게 무서운 증오와 무지한 일이 다 있어요.
  하지만 이때까지는 얘기의 시작이고, 이제부터 좀 들어보세요. 당신들은 그저 놀라울 거예
요.
  신경제정책으로 1천 루불 리가 1코페이카의 가치밖에 없었을 때, 바시리 아저씨가 아랫마
을에서 소를 팔아서 두 부대나 되는 돈을 받았어요. 그때는 게렌카 지폐(게렌스끼 정권에서
사용한 지폐)를 사용했는지 레몬 지폐(1920년대부터 3년간  통용된 1백만 루불리 지폐)였었
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건 그렇고,  아저씨는 술에 취해서 나고르나야가 떠들썩하게  부자가
되었다고 소문냈어요.
  지금도 기억이 나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서 지붕을 날리던 어느 가을이었어요. 기차는  바
람을 안고 달리기 때문에 재를 올라오지 못했어요. 이때  언덕에서 어떤 할머니가 내려오고
있었어요. 바람결에 그의 스커트와 스카프가 나부끼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이 떠돌이 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들어와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면서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
는 거예요. 그래서 의자에 눕혔으나 배가 아파서 죽을 것만  같으니 제발 병원에 데려가 달
라며 돈을 얼마든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는 마차에 말우다로이를  매고 할머니를
태우고는 철길에서 15베르스타나 되는 먼곳에 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떠났어요.
  그후 얼마 지났는지 몰라도 나와 아주머니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창문 밑에서 우다로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마차가 뜰안에 들어왔어요. 병원에서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빨랐어
요. 아주머니는 불을 들고 내의만 입은 채 문을 노크하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빗장을 열
었어요.
  문을 열자 문밖에 검고 사납게 생긴 사람이 서 있었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소 판돈
은 어디있지? 난 너의 남편을 숲속에서 죽여버렸어. 돈만  내놓으면 살려 주겠어. 여자니까,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지 알겠지. 자, 우물쭈물 할 시간이 없단 말이야.'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우린 얼마나 떨렸는지!  아버지는 도끼에 맞아 살해되었고 우리
강도한테 붙잡혀서 구해 줄 사람도 없었어요.
  그 순간 아주머니는 정신을 잃은 것 같았어요. 주인이 죽었다는 소릴 듣고는 가슴이 떨렸
으나 마음을 가다듬어 조금도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먼저 아주머니는 그의 다리 밑에 몸을  던지며,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하며, 돈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그는 바보가 아니었어요.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되자, 아주머니는 꾀를 생각해냈어요. '할  수 없군.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
요. 소를 판 돈은 마루 밑에 있어요. 마루 뚜껑을 열테니 내려가봐요'라고 말 했어요. 그런데
그 악당은 아주머니의꾀를 금세 눈치채 버렸어요. '이것봐, 넌  나를 덫에 걸리게 하려는 생
각이지. 잔소리 말고, 네가 내려가서 마루 밑이건 지붕  위건 돈만 내놓으면 그만이야. 하지
만 딴전을 부렸다간 용서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그럴 리가 있나요. 사람을 믿지 않는군요. 제
가 내려갈 수만 있으면 좋겠지만 난 무리예요. 그것보다도  제가 윗층계에서 촛불을 비추어
드리지요. 걱정 마세요. 딴생각이 없다는 증거로  내 딸과 함께 내려가세요.'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어요.
  여러분, 내가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어땠을까! 이젠 끝장이라고 생각됐어요. 눈앞이 캄캄
해지고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금방 자빠질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그 놈은 바보가 아니었어요. 나와 아주머니를 흘낏  바라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빨을 보이며 쓴웃음을 지었어요. 농담하지  말라는 듯이, 아주머니가 날 귀여워하지  않고
핏줄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그놈은 폐쨔를 한 손에 안고, 한 손으로 뚜껑의
고리를 잡아 열고는 불을 밝히라고 하면서 폐쨔와 함께 마루 밑으로 내려갔어요.
  이렇게 되자 아주머니는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놈이 페쨔를 껴안고 내려가자마자 아주
머니는 재빨리 뚜껑을 닫고 쇠를 잠그고 그 위에 큰 트렁크를 올려놓으려고 했으나 너무 무
거워서 혼자서 움직일 수 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더러 도와달라고 했어요 우리는 그위에 앉
아서 바보처럼 기뻐했어요. 아주머니가 앉자마자 도둑놈이  밑에서 뚜껑을 두드리면서 열어
주지 않으면 페쨔를 죽여버린다고 고함을 질렀어요. 나무 판자가  너무 두꺼워서 잘 들리지
않았으나 그의 말소리로 미루어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숲속의 야수보다 더
험한 소리를 질러대서 겁이 났어요. 이제 너의 페쨔를 죽일 거라고 소리쳤어요. 그러나 아주
머니는 이젠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어요. 아주머니는 앉아서 배를 움켜쥐고 웃어대면서 나
를 쳐다보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트렁크 위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우기면서, 또  열
쇠는 자기가 가지고 있으니까 제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나는 아주머니가
제정신이 들게 하려고 애썼어요. 그의 귀에다 큰 소리도  지르고 트렁크 위에서 밀어젖히기
도 했어요 뚜껑을 열고 페짜를 구해내려고 했으나 나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요. 그때 나
는 어렸으니까.
  도둑놈은 밑에서 연방 천장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아무리 두드려대도 아주머니는 트렁크
위에 앉아서 눈만 깜박이고 있을 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나는  별의 별 일을 다 겪
었으나 이런 무서운 일은 처음이었어요.  페쨔의 가느다란 비명 소리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천사처럼 예쁜 페쨔의 신음 소리가 마루 밑에서 들리는 거예요. 이 악마 같은  놈이
어린아이의 목을 졸라서 죽였어요.
  그럼 어떻게 할까? 이 미친 노파와 살인  강도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빨리 손을 써야겠
다고 생각했어요. 이때 밖에서 우다로이의 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말은 마차를 끄르지  않은
채 바깥에 있었던 거예요. 말 우는 소리가 마치 '빨리 달아나요, 타냐, 그리고 좋은 사람한테
도움을 받아요’하는 것 같았어요. 동이 틀 무렵이었어요. 고마워, 우다로이, 네가 시키는 대
로 하자, 좋은 생각이었어요. 뛰어라, 그런데 이런 생각에 뒤따라 나는 또 숲에서 들리는 소
리를 들었어요. ‘기다려요. 서두르지 말고, 타냐, 우리에게 좋은 방도가  있어요’그런데 이
런 소리는 숲속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어요.  마치 우리 집 닭들이 울어대는 것  같았고,
저 아래 귀에 익은 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들렸어요. 이 기적 소리는 언제나 나고르나야에서
대기중에 있는 기관차에서 울렸는데, 그 기관차는 화물차 뒤에  붙어서 언덕길을 밀어 올렸
어요. 매일 밤 이 시각에 화물 객차가 통과하는데, 그 귀에 익은 기관차가 아래에서 나를 부
르고 있다고 생각됐던 거예요. 그 소리를 듣자 내 가슴이 울렁거렸어요. 나도  아주머니처럼
정신없이 짐승이나 기관차까지 나에게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기차가 가까이 오는데 우물쭈물할 수는 없었어요. 새벽녘이었으나 아직 날이 어두
워서 등불을 들고 미친 듯이 철길 한복판으로 뛰어가 등불을 앞뒤로 흔들어댔어요.
  말할 것도 없이 나는 기차를 멈추게 했어요. 다행히 바람이 불어서 기차는 서서히 걷듯이
움직이고 있었지요. 기관차를 세우자, 나는 아는 기관사가 운전대 창문에 몸을 내밀고  뭐라
고 물었으나 바람 때문에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어요. 나는 기관사에게 큰 소리로 신호
수 집에 강도가 들어서 살인을 하고 물건을 훔치고, 지금 그강도가 집에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데 객차에서 적위군 병사들이 우르르 뛰어 내려왔어요. 이
기차는 군용 열차였으며, 그들은 내려오자마자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숲속  언덕길에서
기차가 멈췄기 때문에 놀랐던 거예요.
  그들은 내 얘길 듣고 강도를 마루 밑에서 끄집어냈어요.  그놈은 페쨔보다도 더 가느다란
목소리로, 여러분,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애원했어요. 그들은  그 놈을
끌어내서 철길에 손발을 묶고 그 위로 기차가 지나가게 해서 죽여버렸어요.
  나는 겁에 질려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집에 돌아가지도 못했어요. 나는  그들에게 기차에
태워서 같이 데려가달라고 부탁했고, 그들은 날 태워주었어요. 그 후부터는 정말 다른  고아
들처럼 끝없이 방황하게 되었답니다. 어렸을 때의 슬픔과 고통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자
유롭고 행복한지 몰라요! 물론 혼도 나고 나쁜 짓도 했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예요, 다음에
또 얘기하지요. 그런데 아까 얘기하던 그날 밤 철도 관리인이  신호수 집에 가서 가구를 챙
기고 아주머니를 정신 병원에 보냈다고 했어요. 그냥 미쳐서 죽었다는 소문도 있고,또  병이
나아서 퇴원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타냐가 이야기를 마치자 고르돈과 두도로프는 오랫동안  풀밭을 아무 말 없이 걷고  있었
다. 드디어 큰 트럭이 한길에서 돌아서 공지로 돌아왔다.  세탁물 상자를 싣기 시작했다. 고
르돈이 말했다.
  "자넨 알겠나, 저 세탁부 타냐가 누군지 말이야?"
  "그야 물론이지."
  "예브그라프가 보살펴주겠지." 잠시후 고르돈이 말을 이었다. "역사에는 간혹  있을 수 있
는 일이네만, 지나치게 고상한 이상이 타락해서 정신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지. 그래서 그리
스가 로마에 굴복했고, 러시아의 계몽운동이 혁명으로 변하게 된 걸세. 블로크의 시에  “우
린 러시아의 암흑 시대의 아이들”이란 구절이 있지. 아이들이란 어린아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과 젊은 세대, 그리고 지식인들을 말하는 거지. 또 암흑이란 섭리나 계시를 말하
는 걸세. 말하자면 아주 차원이 다른  이야길세. 그런데 지금은 비유적인 것이 다  없어지고
말았어. 아이들은 어린이를 말하고, 암흑은 그대로 어두운 상태를 말하고 있어요. 여기에 시
대의 차이가 있어요."
  5
  그 후 5년이나 10년이 지난 어느 조용한 여름날 저녁녘에 고르돈과 두도로프는 다시 한자
리에 앉게 되었다. 창문을 열어 젖뜨리고 높은 장소에서 끝없이 넓게 황혼이 깃들인 모스크
바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예브그라프가 정리한  지바고의 원고를 들추고 있었다. 여러  번
읽어서 거의 외다시피 돼 있었다. 읽으면서 그들은 감상을 교환했다. 읽던 동중에 날이 어두
워서 전등을 켰다.
  저 멀리 뻗어있는 모스크바는 이 작자의 고향이었으며 그와 반생을 함께 한 도시인 것이
다. 그날 저녁 그들이 원고를 다 읽었을 때, 모스크바는 기나긴 얘기의 단순한무대가 아니라
그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전쟁이 끝난 뒤에 기다리던 희망과 해방의 빛은 전승과  함께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렇지
만 자유의 예감이 전쟁 후 온통 넘치고 유일한 역사의 내용이 되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창가에 앉은 연로한  친구들은, 이 영혼의자유가 이미 찾아와  미래가 눈 아래에
보이는 거리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그들 자신이 이 미래를 딛고서 그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설에 등장한 인물이나 그의 자손들은 이날 저녁까지  살아 남아서 이 거룩한
소리와 지상의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고요 속에 잠겨 소리없이 흐르는
행복한 음악에 젖고 있었다. 그들이 손에 든 책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감정을  뒷
받침하며 확인하는 것이었다.

      유리 지바고의 시
   햄  릿

소요가 멎는다. 난 무대 위로 나선다.
문설주에 기댄 채
멀리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생애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을까.

 밤의 어둠이 나를 향해
수천의 쌍안경 눈알처럼 응시한다.
제발, 하나님 아버지 나의 곁에서
부디 이 술잔을 가져가 주소서.

나는 당신의 꿋꿋한 뜻을 사랑하며
맡겨진 이 역할들을 기꺼이 수락합니다.
그러나 지금 다른 연극이 상연되고 있으니
이번만는 나를 그대로 있게 하소서.

 하지만 연극의 순서는 이미 정해진 것
마지막 길은 피할 수 없다.
나는 외롭다, 세상엔 득실거리는 바리새 사람들뿐.
산다는 것은 들판을 지나듯 되지는 않는다.

 삼   월

태양은 땀투성이로 무덥고
골짜기 마을은 광기어리게 들떴다.
건강한 소몰이 아가씨처럼
봄일은 손아귀에서 바빠진다.

눈이 녹아 빈혈을 앓고
앙상한 가지가 힘없이 푸르렀다.
그러나 외양간에는 생명이 솟아나고
갈퀴의 이빨이 건강하게 빛났다.

 이러한 밤, 이러한 낮과 밤!
한낮의 처마 밑에 비가 뿌리고
가느다란 고드름이 처마에 매달리고
밤새도록 시냇물은 재잘거린다.
모든 것이 열렸다, 마구간도 외양간도.
비둘기는 눈 속에서 귀리를 쫀다.
이 모든 것의 원천이며 생명을 주는 자
그것은 신성한 공기를 풍기는 거름더미.

성주간(聖週間)에

아직 밤의 어둠이 주위를 감싸고,
세상은 너무나 일러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저마다 대낮처럼 빛났다.
대지는 하는수없이
찬송가를 자장가 삼아
부활제에도 마냥 잠자고 싶었다.

아직 밤의 어둠은 주위를 감싸고,
세상은 너무나 일러
네거리에서 모퉁이로
광장은 영원처럼 잠들고,
새벽과 따뜻함이 오기까진
아직도 천 년이 걸리리라.

 대지는 여전히 벌거숭이
밤에 걸칠 실오리 하나 없이
종이 울리며
제멋대로 이부 합창한다.

부활절 전 목요일부터
셋째 토요일까지
강물은 기슭을 파고들며
소용돌이친다.

 숲은 벌거숭이로 헐벗고
예수 수난주(受難週)에
참배자들이 기도하듯
소나무들이 모여 서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크지 않은 거리에서
벌거숭이 나무들이
교회당 창살을 들여다본다.

그들의 눈길은 두려움에 떨고
그들의 전율은 역력하다.
정원 울타리는 허물어지고
대지는 흔들리고
신이 지금 여기에 묻히려 한다.

제단 간막이에 등불이 보인다.
검은 포장과 늘어선 촛불,
눈물젖은 얼굴들.
그리고 갑자기 십자가의 행렬이 나타나
수의를 들고 들어온다.
대문 옆 두 그루 자작나무가
길을 열어서 물러선다.

행렬의 보도의 끝을 따라
교회의 뜰을 돌고
거리에서 대문 안으로 실려오는
봄과 봄의 이야기.
그리고 성찬의 뒷맛을 풍기는 공기
봄의 열기를.

삼월은 눈을 흩날려서
문간에 모인 불구자에게 적선하듯
뿌리고,
마치 누군가 법궤를 들고 와서
이를 열고 모든 것을
남김없이 나누어주듯.

노랫소리는 새벽까지 이어지고
한껏 흐느껴 울던 소리도
지금은 가라앉는다.
성가와 복음 소리는 더욱 조용하게
가로등이 비치는 쓸쓸한 거리이 사라진다.

그러나 자정이 되면 생명과 육신은 침묵하며
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이윽고 날씨가 좋아지면
부활의 힘으로
죽음도 정복되리라.

백야

나는 까마득한 과거를 그려 본다,
페테르부르그의 집을.
너는 초원의 소지주의 딸,
쿨스크 태생인 여학생이었다.

너는 귀엽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
그 백야에 우리 둘은
너의 창가에 앉아
네 마천루에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가로등은 가스의 나비처럼
아침의 천 한기에 부딪쳐 떨었다.
나는 너에게 조용히 얘기한다,
멀리 잠든 풍경처럼.

너와 나는 끝없는 네바강(강)너머에
파노라마처럼 쭉 뻗어 있는
저 페테르부르그를 감싸고 있는
신비로운 정경에 잠겼다.

저쪽 멀리 우거진 숲속,
봄의 그 백야에
꾀꼬리의 즐거운 노랫소리가
온 숲속에 넘쳤다.

그 바보스런 소리가 흘렀다.
보잘것없는 이 작은 새의 소리가
도취된 숲 깊숙한 곳에서
환희의 소란을 일으켰다.

밤은 맨발의 여자 순례자처럼
울타리를 껴안고 그리로 기어가고,
몰래 엿들은 우리 대화의 망령이
창가로부터 살짝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메아리가 닿는 곳까지
울타리로 둘러싸인 과수원이 있고
사과나무며 벚나무 가지에
하얀 꽃이 가득 피었다.

그리고 유령처럼 흰 나무들은
무리를 지어 길가에 몰려나왔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아 온 백야에
작별의 인사라도 하려는 듯이.

봄의 홍수

저녁놀의 불길이 꺼져갔다.
깊은 소나무 숲속으로
우랄의 외로운 마을을 향하여
말탄 고달픈 사나이가
봄의 홍수가 터진 산길을 가고 있었다.

말은 내장을 뒤흔들며
철벙거리는 발굽 소리에 맞춰
흐르는 물속으로
길을 가며 그 뒤를 쫓는다.
말탄 사나이가 고삐를 늦추고
천천히 가노라면,
봄의 홍수는 바로 옆까지
소리치며 굴렀다.

어떤 이는 웃고 어떤 이는 울고
돌과 돌이 부딪치고
뿌리째 뽑힌 나무들은
소용돌이 속에 굴러 떨어졌다.

지는 해의 불꽃 속
나뭇가지들이 까맣게 엉킨 사이에서,
메아리치는 종소리처럼
한 마리의 꾀꼬리가 요란스레 울었다.

한 그루의 버드나무가
과부의 스카프 모양으로 늘어진 골짜기에서
새는 옛날의 도둑 꾀꼬리처럼
일곱 개 떡갈나무 피리의 곡조로 지저귄다.

무슨 불행에 대하여 무슨 연정에 대하여
그토록 필사적인 열정을 기울이고 있는가?
그는 누구를 겨누어
소총의 커다란 산탄을 숲속에서 쏠 것인가?
어쩌면 작은 새는 숲의 정령처럼
탈옥수의 피난처에서 빠져나와,
말을 타든 도보로 가든
지방 유격대를 찾아갈 것만 같다.
땅과 하늘, 산과 들
이 희귀한 음향 속에
그 열광과 고통, 행복한 고민을
저마다 접으려고 귀기울인다.

고백

생활은 한때 조그마한 이성을 되찾았다,
그렇게도 이상하게 비뚤어졌던 것을.
난 옛 모습의 거리에서
그해 여름날, 그때 그 시각과 같은.

같은 사람들, 같은 고뇌
그리고 낙조의 불길은 아직 식지 않았다.
저 죽음의 저녁이 마네즈의 흰 성벽에
허둥지둥 못을 박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여인들은 줄무늬의 값싼 무명옷을 입고
여전히 그 밤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처럼 양철 지붕 밑 다락방에서
여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있다.

지금 그중 한 사람이 고달픈 발길로
천천히 문간에 나타나
지하실로부터 층계를 올라가
들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나는 또 다시 나의 변명을 마련한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에 무관심해진다.
이웃의 여인은 뒤뜰을 한바퀴 돌더니
우리만 따라 남겨둔다.

울지 마라, 부은 입술을 찡그리지 마라,
입술에 주름살을 짓지 마라.
봄의 열병으로 생긴
부스럼이 터질 따름이다.

내 가슴에서 손을 떼려무나.
우리는 전기가 흐르는 전선이다.
다시 한번 조심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불현 듯 내던져질 것이다.

 세월은 흘러 너는 결혼하고
참기 어려운 고난을 잊을 것이다.
여자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걸음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건 영웅적인 일이다.

나 자신은 한평생
헌신적인 노예처럼
손과 등과 어깨, 그리고 목에서
여인의 손의 기적 앞에 공손할 따름이다.

그러나 밤이 아무리 많은 고통의 교리로써
나를 얽어맨다 하더라도
원심력은 더욱 거세어
절연하려는 정열이 나를 유혹한다.

도시의 여름

나직은 얘기 소리.
질풍처럼 서둘러
여인은 머리카락을
묵덜미 위로 쓸어올린다.

무거운 빗 밑으로
철모를 쓴 여인이 바라본다.
머리는 땋아 올린 머리카락과 함께
뒤로 젖혀져 있다.

거리의 무더운 밤이
궂은 날을 알리고
행인은 흩어져
집을 향하여 서두른다.

갑자기 천둥이
무너질 듯이 울리고
세찬 바람에
창문 커튼이 흔들린다.

침묵이 찾아오고
공기는 여전히 무덥다.
그리고 번개는 하늘에서
여전히 탐색하고 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뜨거운 아침이 다시 오고
간밤에 비에 패어진
거리의 웅덩이를 말린다.

천 년을 묵어 향기롭게
만발한 보리수는
간밤에 잠 못 이루어
사방을 우울하게 둘러본다.

바람

나는 죽었지만, 너는 살았다.
그래서 바람은 외치며 호소하며
시골 숲과 별장을 흔들었다.
낱낱의 소나무가 아니라
온통 나무를 한데 묶는다.
끝없이 먼 곳에서
일시에 닻을 내린
돛단배의 선체가 흔들리듯이.
이것은 무턱대고 하는 짓도 아니며
목적 없는 분노에서도 아니다.
너를 위하여 그 슬픔에서
자장가의 언어를 찾으려 한다.

담쟁이가 감긴 버드나무 아래
우리의 사나문 날씨를 피갈 곳을 찾는다.
두 사람 어깨의 우비를 두르고
내 두팔로 너를 힘차게 안는다.
아니다, 내가 잘못 본 것이다. 숲속의 관목에 감겨 있는 것은
담쟁이가 아니라 홉이었다. 
그러니 우비를 땅바닥에
편히 까는 것이 좋겠다.

따뜻한 늦가을
구즈베리 나뭇잎은 거칠고 털복숭이다.
집안 웃음 소리에 유리창이 흔들린다.
안에서는 칼로 썰고 소금에 절이고
후추며 정향유(丁香油)로 양념하기에 법석이다.

숲은 어릿광대모양 신나게 술렁이고
그 소음이 멀리 비탈진 초원에 들리고
초원엔 햇빛이 그을은 호도나무가
모닥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여기서 길은 길다란 골짜기로 흐른다.
여기 물에 잠긴 삭정이 사이에 서 있으면
모조리 이 골짜기 쓸어 모으는
넝마주이 노파의 가을이 서글퍼진다.

우주 만물은 게으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다.
숲은 언젠가는 물속에 잠기고
모든 것엔 저마다 종말이 있다.

 눈앞의 모든 것이 태양에 타서
가을의 희디흰 매연이
변덕스런 산들바람을 타고 창문으로 날아들 때
공연히 눈을 깜박거린다는 것이.

울타리에 뚫어진 틈새로 정원 나 있는 길이
자작나무 숲속으로 사라진다.
집안에는 주부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
똑같은 웃음과 소음이 멀리서도 들려 온다.

결혼

손님들은 저마다 악기를 들고
곧장 뜰을 지나
아침까지 마시고 노래하러
신부집으로 모여든다.

펠트 천으로 가린
주인네 안방에선
한 시부터 일곱 시까지
떠드는 소리가 끊기더니

단잠에서 깨기 싫은
날 샐 무렵이 되자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면서
다시 아코디언이 울린다.

하모니카도 불고
바랄라이카도 치고
손뼉치며 구슬 흔들며
향연이 벌어진다.

술취한 손님들의 고함 소리가
여러 번 되풀이되고
신랑 신부의 침실을 향해
곧장 달려들곤 한다.

눈처럼 새하얀 여인 하나
휘파람과 환호 속에
또 한번 공작 춤을 춘다, 
둥실두둥실 엉덩이를 흔들며.

얼굴을 번쩍 쳐들고
오른손을 내저으며
포장 길 위에서 춤추는
공작이다, 암공작이다.

갑자기 떠들썩한 소음도
흥겨운 윤무(윤무)도 멎고,
지옥이 하품을 하며 입을 벌리고
한꺼번에 삼킨 듯 잠잠해진다.

시끄러운 뜰안이 잠깨며
부산하게 일하는 소리가
일꾼들의 얘기 소리, 웃음 소리에
뒤섞여 들려온다.

하늘 높이
회색 반점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듯
집 떠난 비둘기떼가
일제히 날아 올라간다.

누군가 잠에서 덜 깨어나
여러 해를 바라 온
염원을 비둘기에 실어
결혼 축하로 날려 보내리기라도 하듯이,

인생이란 한 순간일 뿐,
나 자신을 녹여서
남에게 선물을 주듯
남들 속에 용해될 수밖에 없다.

결혼이란 창문을 빠져 날아가는
소음에 불과한 것,
한 가락의 노래, 일장의 꿈.
청회색 비둘기에 불과한 것.

가을

난 식구들이 제각기 떠나게 했다.
모든 가까운 사람은 이미 흩어졌다.
그리고 항상 고독을 느끼며 내 가슴에, 자연에,
모든 것이 가득차 있다.

여기 나는 그대와 함께 오두막집에 있다.
숲속은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는 사막.
옛 노래의 오솔길들은
거의 잡초에 뒤덮여 분간할 수 없다.

 우린 지금 단둘이 슬픔에 잠겨
통나무 바람벽을 멀거니 바라본다.
우린 벽을 뚫고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우린 여기서 태연히 죽어가리.

한 시에 식탁에 앉고 세 시에 일어나서
나는 책을 읽고 그대는 수를 놓는다.
그리하여 날이 밝을 때 우리는
언제 키스를 그만두었는지 모른다.
나뭇잎들아, 나부껴라, 흩날려라,
더욱 화사하게, 더욱 방종하게.
어제의 쓴 술잔을
오늘의 비애로 채워라.

애착도 미련도 환희도―
이 9월의 바람결에 날려 보내자!
그대의 모든 것을 가을의 속삭임에 묻어 버리자.
그저 고요히, 넋없이!

숲속의 나무가 잎을 털어버리듯
그대도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비단 술이 달린 잠옷 바람으로
내 팔에 안겨라.

산다는 것이 질병보다더 역겨울 때
너는 파멸의 길을 축복하리라.
아름다움의 근원은 대담함이니
그것이 우릴 서로 끌게 하는 것이다.

옛날 이야기

옛날 옛날 먼 옛날에
동화의 나라에서
한 기사가 말을 타고
험한 황야를 가고 있었네.

그는 싸움터로 서둘러
말을 몰았으나
저 멀리 그의 앞길에
어두운 숲이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이
담대한 가슴을 스쳤다.
물을 조심하고
안장 띠를 죄어라.

그러나 기사는 아랑곳없이
박차를 가하며
숲의 오르막길을
쏜살같이 달려 올랐다.

 그리고 묘지를 돌고
물 마른 강바닥을 건넜다.
작은 초원을 지나
고개 하나를 넘었다.

골짜기로 접어들어
비탈기를 따라가
짐승의 발자국과
냇물이 있었다.

 경고를 무시하고
의혹을 외면하여
그는 계곡으로 내려가
말에게 물을 먹였다.

냇가엔 동굴이 있고
동굴 앞에는 여울이 흐르고
유황불 비치듯
굴 입구가 환했다.
진홍빛 연기 속에
시야를 가리고
높이 솟은 침엽수 사이로
멀리 울부짖는 소리,

기사는 몸을 떨고
구원을 바라는 울부짖음에 따라
계곡을 건너
그쪽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기사는 보았다.
무서운 용(용)의 머리를
그 몸통과 그 꼬리를.
기사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벌린 입에서 용은
시뻘건 불길을 토해내고
굼실거리는 몸통으로
아가씨 허리를 세 번 감았다.

뱀의 동체는
가련한 먹이의
하얀 어깨 위에서
채찍 끝처럼 흔들렸다.

이 고장 풍습대로
예쁘고 젊은 아가씨가
숲속의 괴물에게
바쳐진 것이다.

 대사(대사)의 노여움을 피하여
자기들의 오막살이를 지키려고
이 고장 사람들은
해마다 희생물을 바친다.

그녀의 손을 휘감아
목에 달라붙어
대사는 제멋대로
이 산 제물을 괴롭혔다.

기사는 하늘을 우러러
도움을 빌고
힘껏 창을 거머쥐고
대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굳게감은 눈꺼풀.
높은 산. 구름.
물. 여울물. 시냇물.
날과 달. 많은 세월.

투구는 쭈그러지고, 싸움에 지친 기사는
말에서 떨어져 뻗었다.
충실했던 말발굽으로
대사의 목을 짓뭉갠다.
대사의 시체와 말은
모래밭에 나란히 누웠다.
기사는 의식을 잃고
기절한 아가씨는 깨어나질 못한다.

대낮의 둥근 하늘은
푸르게 빛났다.
누굴까? 공주일까?
눙부의 딸일까? 귀족의 따님일까?

환희와 행복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기진한 영혼은
잠에 잠겨 잊고 말았다.

기사는 차츰 의식이 돌아왔다.
그러나 손발은 꼼짝할 수 없다.
많은 피를 흘려
기력이 쇠진했다.

하지만 그들의 심장은 뛰었다.
기사도 아가씨도 정신을 차려
눈을 뜨려다가
다시 잠속으로 빠진다.

굳게 내리깐 눈꺼풀.
높은 산. 구름.
물. 여울물. 시냇물.
날과 달. 그리고 많은 세월이……

8월

태양은 약속대로 어김없이
아침 일찍 찾아들었다.
주황빛 다발을 비스듬히 끌면서
커튼을 통해 소파에 앉는다.

그 태양은 뜨거운 벽돌빛으로
이웃 숲이며 마을의 집들을, 
나의 침대며 축축한 베개를,
책장 뒤 구석진 벽을 비친다.

내 베개가 축축한
까닭을 나는 생각해본다.
너희들이 길 떠나는 길을 배웅하려고
숲에서 나오는 꿈을 꾼 것이다.

너희들은 짝을 지어, 떼를 지어
서로 앞을 다투어 걸어나왔다.
문득 누군가 생각했다. 구력(구력)으로
오늘은 8월 6일 '그리스도 변용(변용)의 날'이다.

언제나 이날은 불길 없는 빛이
타보르의 산에서 솟아오르고,
가을이 진홍빛 깃발처럼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이다.

그러면 거지처럼 떨고 있는
벌거숭이의 관목 사이를 빠져
너희들은 묘지의 타오르듯 붉은
잡목 숲으로 들어간다.

하늘은 조용한 나무 꼭대기에
점잖게 걸려 있고,
수탉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길게 들린다.

죽음은 마치 정부의 감독관처럼
이 숲속 공지에 버티고 서서
생명 잃은 내 얼굴을 곁눈질하며
파야 할 묘혈의 크기를 재고 있다.

너희들은 모두 너희들이 청각으로
누군가의 나직한 음성을 가까이 듣는다. 
그것은 전에 내 것이었던 예언의 목소리.
지금 그것이 순수하게 들려온다.

"잘 있거라, 변용의 날의 창공이며
재림의 날의 금빛이여,
부드러운 마지막 애무의 손으로
내 숙명의 시간의 고통을 덜어다오.
잘 있거라. 흐름을 모르는 세월이여,
타락의 심연에서 도전한 여인이여!
이제는 너희들과 이별할 때다.
나는―너희들의 싸움터였다.

잘 있거라, 활짝 펴진 날개여,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의지여,
말로 표현된 세계의 표상이여,
기적의 창조물인 우주 만상이여!”

겨울밤

눈이 날린다, 눈이 날린다, 온 누리에
끝없이 눈이 내린다.
촛불이 타오른다. 책상 위에서
촛불이 타오른다.

여름날 날벌레들이
불꽃으로 날아들 듯
밖에서 눈송이들이
유리창에 몸을 부딪는다.

눈보라가 유리창에 부딪쳐
활과 화살 무늬를 새긴다.
촛불이 타오른다, 책상 위에서
촛불이 타오른다.

비뚤어진 그림자가
환한 천장에 비친다.
서로 얽힌 팔, 다리,
운명의 그림자.

조그만 여자 신 한 켤레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침실의 촛불이 자리옷에
눈물처럼 촛농을 흘린다.

모든 것이 눈안개 속에 자취를 감춘다.
백발처럼 하얗게.
촛불이 타오른다, 책상 위에서
촛불이 타오른다.

구석에서 바람이 촛불을 흔들고
유혹의 뜨거운 입김이
천사처럼 날개를 펼치고
십자가를 그린다.

2월은 내내 눈이 날린다.
그리고 쉴새없이
촛불이 타오른다, 책상 위에서
촛불이 타오른다.

이별

사나이가 문가에서 들여다본다.
자기 집 같지 않다.
여자는 도망치듯 떠나가 버렸고,
사방에 혼란의 흔적이

방마다 온통 혼란이다.
머리가 띵하고
눈물이 앞을 가려
그의 눈엔 잘 보이지 않는다.

아침부터 귓속이 윙윙 울렸다.
깨어 있는가, 악몽을 꾸고 있는가?
그리고 바다에 대한 생각만이
자꾸만 머리 속에 기어드는 건 어쩐 일인가?

창문에 성에가 끼어서
바깥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자
절망의 슬픔이 배가하여
황량한 바다와 비슷해진다.

여자의 적절한 행위가 그에게
귀중한 것으로 되었다.
밀물이 해안선을 밀어 올려
육지를 바다 가까이 끌어당기듯.

폭풍 뒤의 거친 물결 속으로
갈대가 가라앉아 버리듯,
여자의 행위와 그 모습은
그의 영혼 속 깊이 가라앉았다.

고난에 찬 세월
예측할 수도 없을 때
그녀는 운명의 파고(파고)로
바다 밑에서 그에게 밀어 올렸다.

헤아릴 수 없는 위험 속을
무서운 암초를 피해 가며
파도는 여자를 밀고 밀어
마침내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지금 여자는 떠나버렸다.
어쩔 도리가 없었으리.
이별은 그들을 삼키고
슬픔은 뼛속에 스며든다.

사나이는 방안을 둘러본다.
여자는 떠나갈 때
장농 서랍을 모두열고
밑바닥까지 온통 뒤집어 놓았다.

그는 어두워질 때까지 서성이며
흩어진 헝겊 조각이며
구겨진 옷본 종이 따위를
서랍 속에 차분히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바느질감에 꽂혀 있던
바늘에 손을 찔렸다.
여자의 모습이 떠올라
사나이는 소리를 죽여 흐느꼈다.

해후

눈이 길을 묻어버리고
지붕 위에 쌓인다.
한 걸음 밖으로 나가면
너는 문밖에 와 서 있겠지.
혼자서 가을 외투를 입고
모자도 쓰지 않고 덧신도 신지 않고
너는 흥분을 억누르며
눈에 젖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무와 울타리는
안개 속으로 멀리 사라지고,
홀로 눈을 맞으며
넌 모퉁이에 서 있다.

물이 스카프를 따라
옷깃과 팔소매 속으로 흘러들고
구슬 같은 물방울이
머리카락에서 반짝인다.

밝은 삼실 같은 머리채
너의 얼굴, 너의 스카프,
너의 가냘픈 모습,
너의 초라한 외투를 비추어주고 있다.

눈이 너의 속눈썹 위에서 녹는다.
너의 두 눈에는 슬픔이 있다.
그리고 너의 윤곽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 같다.
너의 모습은 내 심장에
조각칼과 강한 산(산)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아로새겨져 있는 것 같다.

너의 유순한 모습은
지워버릴 수 없고,
세상이 아무리 잔인해도
난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 속에 이 밤이
아무리 겹쳐도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은 그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이 모든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들이 세상에 없을 때
소문만이 살아 남는다면?

 성탄일의 별

겨울이었다.
광야에선 바람이 불고
언덕 기슭 동굴에서
아기는 추웠다.

소의 입김이 몸을 덥혀주었다.
집짐승들이 동굴 안에서
비좁게 몸을 비벼댔다.
따뜻한 김이 구유 위를 감돌았다.

목동들은 낭떠러지에 서서
양피 외투에 붙은
짚 부스러기며 수수 알갱이를 떨고
졸린 눈으로 먼 야경을 바라본다.

저 멀리 눈 덮인 들이 있고
묘지와 묘석이 있고 울타리가 있고
묘지 위에는 별들이 찬란한 하늘이 있다.

그리고 바로 앞에 본 적이없는
이상한 별이,
오두막집 창문의 촛불보다
더 수줍게 빛나는 별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을 비추고 있다.

지금 그별은 타오르는 건초 더미처럼
하늘과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불타는 초가집처럼
불붙는 곳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엄청하게 큰 집더미처럼
하늘을 향해 불길을 휘말아올리는
이 새로운 별의 출현에
우주 만물은 전율했다.
짙어가는 붉은빛은 무슨 징후인 양
별의 광채를 더해준다.
이 놀라운 빛의 부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세 사람의 점성가(점성가)가 황급히 달려간다.

그 뒤를 공물(공물)를 실은 낙타들이 따르고,
화려한 마구(마구)로 꾸며진 나귀들이
끝없이 줄지어 언덕을 내려간다.

그리하여 후세에 온 모든 것이
기이한 환상이 되어 멀리 떠올랐다.
모든 사상, 모든 꿈, 모든 세계.
모든 미래의 미술관과 박물관,
융단의 그림 무늬, 유술장이의 기적
지상의 모든 크리스마스 트리, 어린이들의 모든 꿈.

흔들리는 촛불의 따뜻한 빛,
반짝이는 구슬의 장관…
바람은 더욱 짓궂게 광야에서 불어오고
…모든 붉은 능금, 모든 황금빛 유리알.

연못의 일부는 오리나무에 가려 있으나
나뭇가지에 둘러싸인 띠까마귀 집 저쪽으로
일부는 낭떠러지에서 똑똑히 보인다.
목동들은 물방앗간 둑을 따라가는
낙타와 나귀를 보았다.
"우리도 함께 가서 기적앞에 경배하자."
이렇게 말하며 목동들은 양피 외투를 입는다.

눈을 밟으며 걸어가니 몸이 훈훈했다.
돌비늘처럼 반짝이는 맨발 자국을 따라
밝은 공지로 나가 객주집 앞을 지났다.
양 지키는 개들이 별빛에 발자국을 찾아
악을 쓰고 짖어댔다.

엄동의 밤은 흡사 동화의 나라,
눈 덮인 산등성이에서 누군가 내려오며
아무도 모르게 그들의 행렬에 끼여든다.
개들은 겁을 먹고 뒤돌아보며
젊은 목동 곁으로 다가온다.
같은 마을 쪽에서, 같은 길을 따라
천사도 사람들 속에 섞여 걸었다.
육체가 없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한 걸음마다 발자국이 남았다.

많은 사람들이 바위 앞에 모였다.
날이 밝아 전나무들이 뚜렷이 떠오른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마리아가 물었다.
"저희는 목동이온데 하나님이 보냈습니다. 두분을 위해 찬송가를 부르겠습니다."
"모두 한꺼번에 들어올 수 없으니,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새벽녘의 잿빛 어둠속에서
목동들이 추위를 잊으려 발을 굴렀다.
걸어온 자와 말 타고 온 자는 서로 나무랐다.
통나무 물통 곁에서
낙타와 나귀는 서로 으르렁거렸다.

날이 밝았다. 새벽놀이 둥근 하늘에서
다 타서 재가 된 별들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마리아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박사들만을 바위 틈새로 불러들였다.

아기는 참나무 구유 속에서 잠들었다.
깊은 나무 구멍 속의 달빛처럼.
나귀의 입술과 소의 코가
양피 외투 대신 따뜻이 덥혀주었다.

외양간의 어둠 속에 그들이 머물러
조심스레 귀엣말을 주고 받는다.
갑자기 누군가 어둠 속에서 옆사람의 손을 건드려
구유에서 왼쪽으로 조금 물러서게 했다.
뒤돌아보니, 안으로 들어오려는 손님처럼
성탄일의 별이 마리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명

너는 내 운명의 전부였다.
그리고 전쟁이오고 황폐가 왔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너한테서는
소문도 소식도 없었다.

또 수많은 세월이 흘러
너의 목소리는 다시 내 마음을 흔들었다.
밤새도록 나는 너의 유언장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의식을 되찾았다.

나는 민중속에서 그들과 함께
아침의 소생을 나누고 싶다.
모든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릎을 끓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층계를 단숨에 달려 내려간다.
마치 첫 외출이라도 하듯이
눈 덮인 한길로,
인적 없는 보도.

사람들이 깨어나고, 등불이, 아늑함이 있다.
차를 마시고 전차로 뛰어간다.
잠깐 사이에 거리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진다.

눈보라가 대문에 눈송이로
그물을 친다.
모두들 시간에 늦을세라
조반도 먹는 둥 마는 둥 달려나간다.

나는 그들과 살을 맞대기라도 한 듯
모든 사람을 피부로 느낀다.
눈이 녹듯 나 자신도 녹으며
아침처럼 나도 눈살을 찌푸린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다.
아이들도, 나무들도, 집 지키는 사람들도
모두가 나의 승리자.
그리고 나의 승리는 오직 거기 있다.

기적

그는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걸음을 옮겼다.
슬픈 예감에 고뇌하면서.

언덕 비탈길의 가시나무 잡목은 햇볕에 타고
가까운 움집에선 한줄기 연기도 나지 않았다.
공기는 뜨겁고, 갈대는 움직이지도 않고,
죽음의 바다는 조용했다.

슬픈 고뇌는 바다의 고통에다 비길까.
조그만 구름 따라 그는 걸어왔다.
먼지길 따라 객주집으로.
거리에는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너무나 깊은 생각에 잠겼고,
들에는 향쑥 내음이 자욱해
만물은 고요하고, 그 한가운데 그는 홀로 외롭게 섰다.

땅은 의식을 잃어 쓰러지고
모든 것이 혼돈에 빠졌다.
뜨거운 날씨와 사막,
도마뱀과 샘물과 냇물.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가까이에 있었다.
열매 하나없이 가지와 잎만 있었다.
그는 나무에게 말했다. "너는 무슨 소용이 되느냐?
너 멍청이는 무슨 기쁨을 나에게 주겠는냐?
나는 굶주리고 목말랐는데 넌 열매 하나 없고,
너를 만남은 화강석을 대하는 기쁨보다 나을 것이 없다.
오오, 실망시키는 너, 너, 정녕 쓸모가 없구나?
너는 종말이 올때까지 그대로 있을지어다”

이렇게 저주받은 나무는
번개에 맞은 피뢰침마냥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만일 그때 잠시나마 자유의 선택이 허용되었다면
잎새도 가지도 줄기도 뿌리도
자연의 법칙에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기적은 기적―기적은 신(神).
우리가 혼란에 빠져 마음 앓을 때
기적은 뜻하지 않은 그 순간에 우리를 놀라게 한다.
대지
당돌한 봄은 곧장
모스크바의 집들에 파고들었다.
옷장을 열면 나방이 나래를 펴고
여름 모자 위로 기어다닌다.
털옷은 트렁크 속으로 감춰진다.

높은 목조 이층집 창가에
화분을 내다놓는다.
꽃무우와 계란풀 화분을.
방안은 한가롭고
다락방엔 먼지 냄새가 풍긴다.

그러고는 희뿌연 창마다
반갑다는 인사를 한다,
이것 참 오랜만이라면서……
백의 (白衣)와 저녁놀이 시냇가에서
이별을 서러워한다.

이윽고 복도에 다다르면
바깥 세상의 뭇소리가 들려오고,
4월의 우연한 대화도 들려온다.
그는 수천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인간의 고뇌에 대해
놀이 담장에 얼어붙어
긴 얘기를 늘어놓는다.

불길과 불안이 한데 엉겨
바깥이나 안락한 집 안에 가득하다.
어디를 돌아봐도 공기는 불안에 떤다.
같은 버드나무 가지는 한데 얽히고
같은 하얀 봉우리들이 융기하는 것을
창가에도 네거리에도
한길에도 작업장에도 볼 수 있다.

왜 지평선은 안개 속에서 흐느끼며
퇴비는 저렇게 거센 냄새를 풍길까?
하지만 나의 역할은
먼 곳을 한껏 바라보며 지겹지 않기를,
거리 너머 저쪽 대지가
슬픔을 느끼게 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에 이 이른 봄
그리운 친구들이 나에게 모여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저녁은 고별이고,
즐거운 모임은 끝났다.
슬픔은 은밀한 흐름이
삶의 한기를 녹여주겠지.

흉일

지난 주에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우리와 같은 찬미를 받으며
사람들은 감람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나날이 불안만 짙어지고
마음속에 사랑이 일지 않고
양미간에 모멸이 스쳤다.
이제 모든 것이 종말을.

하늘은 납덩이 같은 무게로
집을 짓누르고
바리새인은 주를 모함하는 핑계를 찾아
여우처럼 그에게 알랑거렸다.

그리하여 사원(寺院)의 음침한 힘으로
심판을 위해 인간의 더러운 손에 넘겼다.
지난날에 찬미하던 것처럼
사람들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군주들은 문밖에 모여
문틈으로 들여다보며,
결과를 기다리며
앞뒤에서 서성거렸다.

속삭이는 소리는 이웃에 퍼지고
소문은 사방에 흩어졌다.
이젠 꿈같이 회상되리라
이집트로 피했던 그날, 어린 시절이.

사막과 가파른 언덕길에서
그는 회상하였다, 준엄한 산악을.
사탄이 그를 유혹하던
이 세상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그리고 가나에서의 혼인 잔치,
기적에 놀라운 찬사를 보내던 내빈들.
안개에 잠긴 바다를 뭍인 양
거침없이 뱃전으로 걸어가던 그날.

가난한 오두막집에 모여
촛불을 밝히며 무덤을 찾아
불쑥 깨어난 주검 앞에서
겁에 질려 꺼져버린 촛불.

막달라 마리아

밤이 되자 악마는 내 곁에 불쑥 왔다.
그난의 과거에 대한 보상 같은 것.
오욕된 기억이 되살아나 내 심장을 핥는다.
변덕스런 사내들의 노예가 되어
바보처럼 거리를 헤매던 추억들.

남아 있는 찰나가 흐르고 나면
무덤 같은 적막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기 전에
삶의 막바지에 이른 나는
석고의 그릇을 너의 앞에 깨뜨린다.
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나의 스승, 나의 구세주여,
내 그물에 걸린 새 손님처럼
밤의 탁자에서 영원히 날 기다지 않는다면.

말해주소서, 죄악이 무엇인지,
죽음과 지옥과 불과 유황의 뜻을.
모든 눈들이 보는 앞에
나의 한없는 슬픔이 싸여
당신과 한몸의 가지가 되리.

주 예수여, 당신의 두 발을
나의 무릎 위에 부둥켜 안을 때,
십자가의 네 기둥을 안는 법을 익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의식을 잃고 당신의 육체를 껴안은 것은
주의 무덤을 마련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일(聖日)를 앞두고 사람들이 시끄럽다.
혼잡을 피하고
작은 그릇에 성유(聖油)로 씻고
난 그대의 발을 씻는다.

더듬어 찾아도 찾을 길 없는 샌들.
눈물이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는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고
베일마냥 드리운 머리카락.

주의 두 발을 내 치맛자락에 묻고
그 위에 떨구는 눈물, 주 예수여,
목에 감은 구슬 줄로 발을 동이고
외투처럼 머리바락으로 덮는다.

당신이 정지시킨 미래를
나는 샅샅이 살펴봅니다.
이 순간 나는 시빌의 예지로써
다가올 앞날을 예언할 수 있습니다.

내일이면 신전(神殿)의 베일은 찢어지고
우린 흩어져 한쪽에 밀려나고
발밑의 땅은 흔들리고
아마 나도 예외는 아니리라.

호위의 대열은 새로 짜이고
기마병들은 어디론지 사라지리라.
폭풍속의 회오처럼
십자가는 하늘로 치솟으리.

나는 십자가의 발부리에 쓰러져
입술을 깨물리라.
팔은 수많은 인간을 포옹키 위해
십자가 양끝을 뻗치리라.

그렇게 넓은 세상 누굴 위하여
그런 고통과 그런 권세를 지니는 것입니까?
이 온 우주에는 그처럼 많은 영혼과 생명이 있는 것일까?
그처럼 많은 마을과 시내와 수풀이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이 사흘도 이내 지나고
이 사흘은 날 허무속에 밀어넣지만 ,
무서운 그 순간이 지나면
나는 모습을 가다듬어 부활하리라.

겟세마네 동산

길모퉁이는 뜻하지 않은
요원한 별빛이 비치고 있었다.
길은 올리브 산을 감돌고
산기슭에는 께드론 강이 흘렀다.

숲속의 초원은 연연히 뻗어
은하 속으로 사라지고,
은회색 올리브나무는
허공을 활보하며 뻗었다.

길 너머 저쪽에 채소밭이 있다.
담장밖에 제자들을 세워 두고
주는 말씀하셨다. "내 영혼은 슬픔에 가득차
죽음을 향하고 있노니, 그대들에게 머물러 날 살필지어다.”

마치 빌어오기라도 했듯이
전지 전능과 기적을 행하는 일을
주저없이 뿌리치고
이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려 했다.

허무와 절멸의 왕국.
온 우주에는 살아 있는 생명도 없는 듯,
다만 그 동산만이 삶을 위한 고장.
우주 공간은 인적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는 공허
이 암흑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피에 젖어 아버지께 기도한다,
이 죽음의 잔을 물리치기 위하여.

번뇌를 기도로써 달랜
그는 동산 문을 떠났고,
죽음에 겨운 제자들은
잡초가 우거진 길섶에 쓰러졌다.

그는 제자들을 일깨웠다. "나는 지상에 있는 생명을 보증하였거늘
어찌 다들 이 모양인고,
시간은 닥쳐왔다.
그는 자신을 죄인의 손에 넘기리라."

횃불과 칼을 든 한무리의 노예와 도둑들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자 그의 말씀이 멎었다.
그들 앞에 배신자의 입술, 유다가 섰다.

베드로는 칼을 뽑아 악당을 무찌르고,
그중 한 놈의 귀를 잘랐다.
그때 그는 "검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 칼을 칼집에 거두라.

하느님 아버지는 날 구하기 위하여
천사의 대군단을 보낼줄 모르는가?
그러니 내 머리칼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고
적은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생명의 책은 어느 성스러운 것보다 더 값진 대목에 이르렀다.
거기 씌어진 내용은
이루어지리라, 꼭 이루어지리라, 아멘!

세월의 흐름은 우화(寓話)와 같아
그 흐름에 따라 생기는 것.
무섭고 엄한 그 이름으로
고뇌를 거쳐 나는 자유로이 무덤에
이르리라.

그리고 사흘만에 나는 다시 일어나
강물 위에 흘러내리는 뗏목처럼
수송선의 호송선같이
세월은 어둠을 넘어 흐르나니, 나는 그를 심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