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성경적 유목민을 자처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매일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새로운교회 담임목사. 광야는 메마르고 거칠다. 척박한 땅이다. 그러나 다윗이 머물렀던 엔게디 광야에 실제로 섰을 때 그의 눈앞에는 신비롭기까지 한 절경이 펼쳐졌다. 그때 그는 ‘내가 지금까지 광야를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봐왔구나’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성경적 유목민을 자처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매일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새로운교회 담임목사.
광야는 메마르고 거칠다. 척박한 땅이다. 그러나 다윗이 머물렀던 엔게디 광야에 실제로 섰을 때 그의 눈앞에는 신비롭기까지 한 절경이 펼쳐졌다. 그때 그는 ‘내가 지금까지 광야를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봐왔구나’란 사실을 깨달았다. 광야는 생고생하는 곳이 아니라 축복의 미래를 감당할 사람으로 준비되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특별한 영성훈련학교인 것이다.
그는 광야는 힘든 곳, 나쁜 곳, 최대한 빨리 통과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광야에서만 찾을 수 있는 영적 보물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광야에서는 빨리 통과하는 것보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교훈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광야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때 ‘광야는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다.

갑작스런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마주했다. 곧 해결될 것이라 여겼지만 언제 극복 가능할지 여전히 미지수다. 모두가 불안하고 힘든 상황 속, 자신에게도 속 시원한 답이 없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럼에도 이렇게 묻는다.
“고통을 낭비해서야 되겠습니까?”
폭풍이 몰아치는 파도 위, 배 안에 웅크리고 있는다고 과연 안전할까? 시간이 흘러 바다가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게 답일까? 두려웠지만 베드로는 예수님만 바라보며 대담히 물 위로 발을 내디뎠다. 저자는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폭풍 속으로 한 발 디딜 때, 평소에 배우지 못했던 영적 레슨을 받으며 더 강한 믿음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고 말한다. 원망 섞인 “왜”가 아닌 주님의 뜻을 구하는 “어떻게”를 질문하며 나아간다면, 폭풍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폭풍을 뚫고 나오는 순간까지 우리를 책임지시고 성장시켜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향하는 눈과 귀가 우리를 살린다. 이 책을 통해 해결책이 없어 보이고 끝이 없어 보이는 문제의 폭풍 속에서 저자가 받은 은혜를 우리도 경험하고 어제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UC버클리대학을 졸업하고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석사, 풀러신학교대학원에서 미국 교회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온누리교회 양재캠퍼스 수석부목사, 횃불트리니티 리더십센터 원장, 한동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고, 2009년 새로운교회를 개척하여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 《하나님의 경영》, 《내게 힘을 주는 교회》, 《종교개혁 히스토리》, 《하나님이 내시는 길》, 《아멘 다음이 중요하다》, 《기독교 에센스》 등 다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것의 가장 익숙한 예는
은행에서 현금을 찾는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거래은행에서 계좌에 예치되어있는 금액만큼만 인출할 수 있다.
내이름으로는 그이상의 금액을 인출할 수 없다.

영국은행에는 내 돈이 한픈도 예치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꺼내 쓸수 없다.

그러나 영국 은행에 거액의 돈을 예치하고 있는 어느 부자가 손수 서명한
백지수표를 내게 건네면서 원하는 금액을 마음대로 공란에 기입해도 좋다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나의 절친한 친구이다.
어떻게 할까? 당장 필요한 금액만 기입할까?
아니면 뱃심좋게 최대한의 금액을 인출할까?

나는 지나치게 적은 액수를 기입하여 친구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지나치게 많은 액수를 기입하여 내 체면을 구기는 짓은 결단코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친구의 의중을 파악해 그것에 호응하려 애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이 자신의 은행이라고 종종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부유한 은행가이시다.

왜냐하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기"(약1:17)때문이다.
이 무한한 금고를 이용하려면 수표가 필요하다.

그런데 주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백지수표를 건네시며
"원하는 금액은 얼마든지 기입하거라.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줄 것이다.
단 내 이름으로 수표를 제시하거라.
그러면 너희의 요구를 존중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어느 유명한 전도자의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가 하늘의 은행에 갈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 갈때에
나와같은 일이 일어난다.
나는 그은행에 아무것도 예금한 돈이 없다.

그리고 나는 그은행에 아무 신용도 없다.
그러므로 내이름으로 가면 아무것도 받을수 없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께서는 천국 은행에 제한없는 신용계좌를 갖고 계신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이 기록된 수표를 들고
천국 은행에 갈 수 있도록 특권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이수표를 들고 천국 은행에 가면 나의 기도는 얼마든지
지불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신용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그분의 신용에 근거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실로 기쁜일이요 어떤 점에서는 매우 타당하다.

만일 이수표가 정부기관이나 어떤 기업체 앞으로 발행된 것이라면
찾을수 있을 만큼의 돈을 한꺼번에 싹 찾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는 온맘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
앞으로도 거듭거듭 찾아야 하는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께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은행에서 수표를 현금으로 교환 하려는 것
곧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는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실추 시키고
우리에게 의심과 고통을 안겨줄 수있다.

진실로 하나님의 자원은 무한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하심에 흠집을 낼 수가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경험은 토론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법이다.
친애하는독자여~당신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가?

천국 은행에 다녀올 때마다 '예수의 이름으로'구한것을 확살하게 얻었다고
자신있게 말할수있는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어디에서 질못된 것일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그롷게 된것은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려고 애쓰면 안된다.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한 적이 없는 개인적인 체험 한가지를 말하려고 한다.
30여년전에 일어났던 이일은 나에게 매우 독특한 체험이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기도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바에 대한
비할데 없이 좋은 예가 될것이다.

하루는 무척 바쁘게 지내는 유복한 친구 하나가 나에게 1파운드의 돈을 주려고 했다.
그는 나를 사무실로 불러 1파운드짜리 수표를 급히 써주었다.

그리고 수표를 접어 내손에 건네주면서 "은행에 가서 현금으로 바꾸어 쓰게"라고 말했다.
나는 은행에 도착하자마자 수표의 금액을 확인하지도 않고 배서한뒤에
창구에 있는 직원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그직원이 곁눈질로 나를 주의깊게 살피면서 "손님 죄송하지만 너무 큰 금액이라
창구에서 바꾸어 드릴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런가요?"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1파운드인걸요?"

"아닙니다."직원이 대답했다.
"이건 1천파운드짜리 수표입니다."

정말 그랬다.
내 친구가 거액의 수표를 쓰는것이 습관이되어 1파운드짜리 수표대신에
1천파운드짜리 수표를 써준 것이다.

이럴때 나의 법률적 위치는 어떠한가?
그 수표는 분명히 내친구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서명도 이상이 없었고 배서도 문제가 되지않는다.
친구의 계좌에 충분한 금액이 예치되어 있는 한 내가 1천파운드를 인출하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수표는 내 친구가 자발적으로
물론 급히 발행하기는 했지만 자유의사로 내게 써준것이었다.

내가 그친구의 선물을 받아서는 안될 이유가 있는가?
1천파운드를 찾으면 안될 까닭이 무엇인가?

그친구는 내게 사랑과 호의를 베푼 너그러운 친구였으며 속마음까지 다 보여준
절친한 친구였다.
나는 그친구가 무엇을 소망하고 어떤 것을 갈망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친구는 내게 1천 파운드를 주고자 했지 그이상을 주고자 하지않았다.
나는 그친구의 의도와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도 관대한 금액이 기입된 수표를 즉시 회수하여 적절한 때가 되었을 때에
그친구의 계획에 따라 정확히 1파운드만 받았다.

만약 그 친구가 내게 금액이 적혀 있지않은 백지수표를 주었더라도 결과는 동일했을것이다.
그친구는 내가 1파운드의 금액만 기입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한 계획과 뜻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뜻을 알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1파운드가
우리를 위한 최선의 금액이라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때에 1천파운드를 구하기 쉽다.

우리는 기도할때에 친구가 되시는 사랑의 예수님께 나아간다.
우리는 그분께 모든것을 빚지고 있다.

아버지 께서는 원할때에 언제든지 와서 필요한것을 찾아가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의 자원은 무한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에 합당한것 곧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것만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도요한은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라고 말했다.
우리의 친구이신 하나님께서는 백지수표를 건네시면서 무엇이든지 바라는것을
기입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지않는것을 결코 기입하지(구하지)않으리라는것
(그런것은 우리에게 심히 해롭기 때문에)을 잘알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의 측면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는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백지수표를 주시며 "1천파운드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1백파운드만 구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혹시 우리가 이런식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충분히 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영광가운데 그풍성한대로"구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심사숙고해야 할점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못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