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성경적 유목민을 자처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매일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새로운교회 담임목사. 광야는 메마르고 거칠다. 척박한 땅이다. 그러나 다윗이 머물렀던 엔게디 광야에 실제로 섰을 때 그의 눈앞에는 신비롭기까지 한 절경이 펼쳐졌다. 그때 그는 ‘내가 지금까지 광야를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봐왔구나’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성경적 유목민을 자처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매일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새로운교회 담임목사. 갑작스런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마주했다. 곧 해결될 것이라 여겼지만 언제 극복 가능할지 여전히 미지수다. 모두가 불안하고 힘든 상황 속, 자신에게도 속 시원한 답이 없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럼에도 이렇게 묻는다. UC버클리대학을 졸업하고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석사, 풀러신학교대학원에서 미국 교회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온누리교회 양재캠퍼스 수석부목사, 횃불트리니티 리더십센터 원장, 한동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고, 2009년 새로운교회를 개척하여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 《하나님의 경영》, 《내게 힘을 주는 교회》, 《종교개혁 히스토리》, 《하나님이 내시는 길》, 《아멘 다음이 중요하다》, 《기독교 에센스》 등 다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것의 가장 익숙한 예는 나는 거래은행에서 계좌에 예치되어있는 금액만큼만 인출할 수 있다. 영국은행에는 내 돈이 한픈도 예치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영국 은행에 거액의 돈을 예치하고 있는 어느 부자가 손수 서명한 그는 나의 절친한 친구이다. 나는 지나치게 적은 액수를 기입하여 친구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그리스도인은 천국이 자신의 은행이라고 종종 말한다. 왜냐하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그런데 주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백지수표를 건네시며 이것을 어느 유명한 전도자의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가 하늘의 은행에 갈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 갈때에 그리고 나는 그은행에 아무 신용도 없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께서는 천국 은행에 제한없는 신용계좌를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수표를 들고 천국 은행에 가면 나의 기도는 얼마든지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신용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만일 이수표가 정부기관이나 어떤 기업체 앞으로 발행된 것이라면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는 온맘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 그래서 우리는 천국은행에서 수표를 현금으로 교환 하려는 것 진실로 하나님의 자원은 무한하다. 경험은 토론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법이다. 천국 은행에 다녀올 때마다 '예수의 이름으로'구한것을 확살하게 얻었다고 어디에서 질못된 것일까?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한 적이 없는 개인적인 체험 한가지를 말하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기도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바에 대한
하루는 무척 바쁘게 지내는 유복한 친구 하나가 나에게 1파운드의 돈을 주려고 했다. 그리고 수표를 접어 내손에 건네주면서 "은행에 가서 현금으로 바꾸어 쓰게"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직원이 곁눈질로 나를 주의깊게 살피면서 "손님 죄송하지만 너무 큰 금액이라 "그런가요?"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직원이 대답했다. 정말 그랬다. 이럴때 나의
법률적 위치는 어떠한가? 서명도 이상이 없었고 배서도 문제가 되지않는다. 그수표는 내 친구가 자발적으로 내가 그친구의 선물을 받아서는 안될 이유가 있는가? 그친구는 내게 사랑과 호의를 베푼 너그러운 친구였으며 속마음까지 다 보여준 그친구는 내게 1천 파운드를 주고자 했지 그이상을 주고자 하지않았다. 그래서 너무도 관대한 금액이 기입된 수표를 즉시 회수하여 적절한 때가 되었을 때에 만약 그 친구가 내게 금액이 적혀 있지않은 백지수표를 주었더라도 결과는 동일했을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한 계획과 뜻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기도할때에 친구가 되시는 사랑의 예수님께 나아간다. 아버지 께서는 원할때에 언제든지 와서 필요한것을 찾아가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에 합당한것 곧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것만 사도요한은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의 측면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는것 같다. 혹시 우리가 이런식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우리는 "영광가운데 그풍성한대로"구하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