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화가 김홍도는 어떤 사람인가

풍속화가 김홍도 생애 및 그림 배워보자.

김홍도는 조선 후기 산수화, 풍속화를 많이 그린 풍속화가이다.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여러 가지 회화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하였고, 어떤 소재도 수준 높은 차원으로 그려내었다. 그는 어떤 상황의 찰나를 잘 포착하여서 그림 속에 담았다. 그가 그린 그림은 현실과 비슷해서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였고, 감동을 주었다. 화가 김홍도의 그림 세계 배워보겠다.

위인 김홍도 어린 시절 찾아보자.

김홍도는 1745년 경기도 안산에서 아버지 김석무의 무녀독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호인 "단원"은 명나라의 문인화가 단원 이유방의 호를 따서 만들었다. 단원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지낸 집안이었지만, 할아버지 김수성 대부터는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집안에는 화원 출신이 없었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 강세황은 서화와 시에 뛰어났고, 김홍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강세황은 그가 도화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하였다.

위인 김홍도 정조와의 관계 알아보자.

김홍도는 정조로부터 관심과 배려를 많이 받았다. 그는 영조 말년에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정조는 그림에 관한 일은 홍도를 시키게 되었다. 정조는 백성들의 생활을 그려오게 했고, 그가 관내에서 그림을 그려 올릴 때마다 칭찬을 받았다. 정조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신뢰하였고, 그의 그림을 보고 백성들의 삶을 더 잘 알게 되었다. 1789년에는 일본 지도를 그려오라는 밀명을 받고 쓰시마섬으로 건너가 일본 지도를 그려왔다. 1790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용주사 대웅전에 불화 작업을 감독하였다.

풍속화가 김홍도 그림 세계 살펴보자.

김홍도는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그가 문학, 음악, 철학 등에도 소양을 닦아서 폭넓은 사람들과 교제하였는데, 이는 작품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들은 30대에 그린 것이 많다. <행려풍속도> 는 8폭의 병풍에 섬세하게 농어촌의 생활상을 그려 넣었는데, 풍속화에 관심을 가진 초기 작품이다.

<풍속화첩> 은 인물들의 묘사기법과 필치가 30대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서당, 타작, 기와 이기, 어장, 활쏘기, 무동, 논갈이 등 25점으로 꾸며진 화첩이다. 40세에는 <단원도> 를 그렸고, 그 이후 <삼세여래후불탱화>, <오륜행실도> 의 삽화를 그렸다. 그는 50세 이후 관직에서 파직된 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함으로써, 더욱 원숙한 작품을 보여주었다.

그의 그림의 특징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배경을 은은한 먹으로 강조했다는 점이다. 한국적인 풍토 감각을 독특한 개성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영조, 정조 시대에 조선의 화풍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독창적 그림을 그렸고, 일반 서민들의 생활을 그렸으며, 서양 화법을 과감히 도입해서 채색의 농담으로 형체의 원근과 고저를 표현하였다. 그의 풍속화에는 익살이 숨겨져 있고, 내용 전달이 명확하며 미소를 띠게 만든다.

화가 김홍도 업적 평가해보자.

김홍도는 왕으로부터 서민까지 사랑을 받은 화가 이다. 그는 그 이전 화가들이 그리지 않은 민중들의 삶을 그린 풍속화를 많이 남겼다. 이것은 당대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의 작품은 한국교과서에 실려있고, 그의 작품을 모르는 한국인이 없다. 그는 한반도 전통 화단의 정수라 평가받고 있는데, 그는 불화, 동물화,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 등 모든 장르에서 완벽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김홍도는 유일하게 다양한 장르를 소화한 조선시대 화가이며 위인이다.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1776년 조선에서는 정조가 새로운 왕이 되었다. 정조가 등극하면서 김홍도는 도화서를 대표하는 최고 화가로 급성장했다. 1776년에 그는 32세였다. 이해에 김홍도는 '군선도'를 그리면서 병풍화의 대가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왕의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조선시대 최고 화가 김홍도(1745~1806?)는 누구일까?

현시대, '씨름'이 담긴 '단원풍속화첩'(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풍속화가'로 알려진 그의 존재감을 다시 불러낸 책이 나왔다.

장진성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단원 김홍도-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을 출간했다.

장 교수가 책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심했던 건 '단원풍속화첩' 속의 서당, 씨름, 대장간 그림의 작가로만 김홍도를 인식하고 있는 대중들의 그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단원풍속화첩'의 그림들은 신문, 잡지, 방송 등 대중매체뿐 아니라 농산물 광고, 민속 관련 행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심지어 민속주점, 한식당, 관광호텔의 내부 장식용 이미지로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장 교수는 "이 화첩은 결국 김홍도를 한국적 풍속화가라는 범주 안에 가두어버리는 부정적인 역할과 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왔다"고 지적했다.

"김홍도는 풍속화뿐 아니라 산수화, 도교 및 불교 관련 그림인 도석화, 화조화, 인물화 등 모든 그림 장르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였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김홍도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고 그의 진정한 모습을 알리기 위해 쓰였다."

장 교수가 김홍도에 집착하기 시작한건 2005년 가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서 펠로우로 있던 당시 청나라 초기 화가 왕희의 특별전을 준비하면서다. "만약 한국의 화가 한 명을 선정해 특별전을 연다면 누구를 어떻게 소개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때 떠오른 인물이 김홍도였다. 그리고 이후 그의 생애와 예술을 어떻게 조명할 것인가를 늘 고민해왔다."

이 책은 그의 오래된 고민과 연구의 결과.  '한국적 풍속화가'로 좁혀진 김홍도의 모습을 '18세기 후반 동아시아 화단을 뒤흔든 천재 화가'로 조명한다.

특히 김홍도와 정조의 관계에 주목한다. 김홍도가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조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세손 시절 처음 초상화를 그리면서 맺어진 이 둘의 인연은 정조의 재위 기간(1776~1800) 내내 이어졌다. 즉위 이후 정조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규장각을 김홍도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는 등 궁중의 모든 그림 관련 일을 맡겼다. 이외에도 정조의 명을 받은 김홍도는 금강산과 영동 지역을 직접 방문하고 실경산수화를 제작했으며(1788), 대마도로 건너가 지도를 그려왔다고도 전한다. 이후 정조의 화성원행(1795), 화성 건설(1796년 완성)과 관련된 그림 작업을 총괄하였다"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고찰한 이 책은 '가장 조선(한국)적인 풍속화가'라는 대중적 통념에서 벗어나 역사적 진실 그대로의 김홍도를 복원한다.

저자는 "김홍도는 병풍화의 대가였다"고 분석했다. "김홍도가 남긴 대부분의 명작은 모두 병풍화이다. 그는 병풍화를 통해 새로운 회화적 실험을 감행하였다. 그가 남긴 신선도, 풍속도, 금강산도, 평생도, 책거리 그림, 수렵도는 19세기 병풍화의 모델이 되었던 선구적 작품들이다."(p.84)

정조가 즉위한후 줄곧 '왕의 화가'로 특별 대우를 받았던 김홍도. 1783년 무렵 조선 왕궁 도화서 내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국중 최고의 화가로 성장한 1776년 그의 나이는 32세, 이해에 김홍도는 '군선도'를 그렸다.

'군선도'는 어떤 그림일까.  "개인의 주문을 받아 김홍도가 제작한 그림이다. 따라서 '군선도'를 그릴 때 김홍도는 정묘한 화풍 구사와 같은 도화서의 규칙을 따를 의무가 없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자신이 원하는 화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가 도화서 화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법을 사용해 그린 최초의 회심의 역작이 바로 '군선도'이다. 이 그림을 통해 김홍도는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감행했다."(p.104)

저자는 "건륭화원을 대표했던 서양의 퇴장과 정조 시대 도화서를 대표했던 김홍도의 등장이 1776년 전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며 "18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김홍도를 능가하는 화가가 없었으며 아울러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뛰어난 화가였다"는 점을 알린다.

책에는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군선도'와 '삼공불환도'등 다양한 도판을 제공, 탄탄한 연구서를 읽는 재미와 함께 그림도 살펴볼수 있다. 484쪽, 사회평론아카데미, 3만5000원.

◎공감언론 뉴시스

그림 읽어주는 여자

[김홍도의 '서당'] 조선시대의 숙제 검사 시간은 어땠을까?

KTV라디오 DJ 홍옥희의 그림 읽어주는 여자

김홍도_서당 

(18세기, 종이에 담채, 39.7x26.7cm, 국립중앙박물관) 

그동안은 서양화를 소개했기 때문에 오늘은 우리나라 화가의 풍속화를 소개하려고 준비했습니다.

풍속화하면 번뜩 생각나는 화가가 몇몇 있죠? 오늘 주인공은 김홍도예요~

김홍도는 조선시대 영조 때 태어났습니다.

7,8세 때 당시 문인화가였던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어요.

강세황은 김홍도의 재주를 일찍이 알아봤는지 도화서의 화원으로 김홍도를 추천합니다.

도화서는 조선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이에요.

도화서에 들어간 후 20대에 이미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조와 당시 왕세자였던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때는 중인 신분으로 최고의 자리인 종6품 벼슬에 오르기도 하지만

잘못된 일로 파직된 후에 오직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합니다.

말년에는 농촌이나 전원생활 등 주변풍경을 화폭에 담는 데 집중했습니다.

조선 후기 농민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농업이나 어업 장면, 여가를 즐기는 모습, 빨래터 등

서민의 삶과 밀접한 것들을 주로 소재로 그려 풍속화에 능한 화가로 거듭납니다.

화가 김홍도 말고 인간 김홍도는 어떤 사람인가, 이것도 궁금하시지 않나요?

동시대의 화가 조희룡은 그의 책에서

김홍도는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 씀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은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라고 쓰고 있고요.

스승인 강세황은 다른 책에서

김홍도의 인품을 보면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 알 수 있을 것

이라고 적었습니다. 이렇게 두루두루 평판이 좋으니 김홍도가 얼마나 인성이 밝은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김홍도의 풍속화는 단원풍속도첩 속 그림들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도첩은 보물 제527로 지정됐고요, 25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로세로 30cm 정도의 종이에 그려진 그림은 배경도 거의 없고 간결합니다. 색도 거의 칠해져 있지 않습니다.

김홍도가 공들여 그렸다기보다는 편안하게 그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그림과 채색으로 서민들의 삶이라는 주제 자체를 돋보이게 한 의도입니다.

오늘은 그 25점의 그림 중에 서당이라는 작품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또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요.

이 그림의 모든 인물들은 다 얼굴이 보이는데 단 한 사람만 뒷모습을 그려서 얼굴이 보이지 않게 해놨습니다.

그림 오른쪽 줄 제일 끝에 앉은 막내 아이가 그래요.

이 아이는 대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요?

여기서 김홍도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 속 인물들은 모두 둥그런 얼굴형에 푸근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는 데요.

래서 더욱 그림 속 서민들에게 정겨움이 느껴지고 한국적인 정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또 김홍도가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서민들의 삶을 그림으로 남겼기 때문에

후대의 우리가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고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다음 작품은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