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저자 : 미하엘 하우스켈러 독일 철학자. 2003년 영국으로 건너가 엑서터대학교에서 철학 교수를 지냈으며 지금은 리버풀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전공 분야는 도덕철학이지만 심리철학, 미학과 예술철학, 현상학, 포스트휴머니즘 철학 등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윤리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허용되거나 허용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따지기보다는 “우리는 누구이고,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라는 궁극적 질문을 탐구하기를 좋아한다. 철학은 과학보다는 치료에 가깝다는 생각을 가지고 섣불리 답을 찾기보다는 근본적인 질문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다수의 책과 논문을 집필했으며 한국에 번역된 저서로는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존재하는 건가?Ich denke, aber bin ich?》, 《예술 앞에 선 철학자Was ist Kunst?》,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 입문Alfred North Whitehead zur Einf?hrung》 등이 있다. 역자 : 김재경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현재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하며 인문, 심리, 정치사회, 경제경영 등 다양한 분야의 도서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옮긴 책으로 《2050 거주불능 지구》, 《포스트트루스》, 《하드코어 히스토리》, 《광장의 오염》,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공역) 등이 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생각을 처음 했던 건 작년 봄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열심히 살지 고민만 했지, 사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한참 코로나가 심해지고 혼자서 하는 폐관 수련에 지칠 때쯤, 그 생각이 들었다. ‘왜 살지?’

 그동안 내가 왜 살아왔나 생각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뚜렷한 목표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교에 오니 꿈은 더 커졌지만 그게 명확하지 않고 뚜렷이 보이질 않으니 삶의 목적이 사라진 것 같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나와 비슷할 것이다.

 유튜브로 왜 사는지에 대해 찾아봤다. 그때 얻은 결론은 왜 사는지는 모르겠고 ‘내가 이거 하려고 살지’라고 느낄 만한 것들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런 시점에 우연히 George Bernard Shaw의 “Life isn’t about finding yourself. Life is about creating yourself.”라는 격언을 봤다. 격언을 곱씹다가 어느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나의 삶에 대한 태도가 너무 수동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이 부러워할까, 잘 사는 것처럼 보일까.’가 내 삶의 목표였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남의 눈치를 보게 되고, 삶이 별로 재미없었다. 이번에도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누군가 답을 주길 원했다. 이때 생각했다. ‘수학 문제처럼 주어진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답을 스스로 만들어보자, 내 스타일대로.’

 이 생각을 할 때쯤, 인간관계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으니 자연스레 잘 살기 위한 방법이 눈에 안 들어오더라. 그 책을 집어 던지고 방학 내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셸리 케이건 교수님의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 이론(ex. 인간은 육체+영혼이다 vs 오직 육체이다, 나를 규명하는 것은 뇌다 vs 인격이다 vs 육체이다)을 소개한다. 저자는 죽음에 대한 여러 의문 중에, 어느 한 이론도 증명하기엔 우리의 기술이 아직 발전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반증은 할 수 있다. 여러 이론 중 하나씩, 하나씩 반증하다 보면 더 가능성이 높은 이론이 나올 것이다. 책은 이런 이론들을 설명, 반례를 들며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지다가 끝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에서 죽음에 대한, 인생의 가치에 대한 모든 것을 깨닫지 못했을뿐더러,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갈 것들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되짚어보며 평소에 당연해 보이는 것도 더 깊게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 이 책을 기점으로 더 깊은 사고와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되었다. 책이 좀 두껍긴 하지만 한 번쯤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책 홍보는 여기까지 하고, 책을 다 읽고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그 결과, 현재 우리가 저승에 평생 살다가 100년 동안만 이승에 와있다가 다시 돌아가는 건지, 아니면 어찌 태어나서 100년 살다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죽음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사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인생을 잘 살고 싶다. 또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 번일 지도 모르는 인생, 내가 이루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 모두 누려 보기 위해 산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 칭찬받거나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개인적인 욕심이고, 그저 내가 사는 이유이다. 삶의 이유와 목표가 생기니 그것에 맞는 신념이 생긴다. 신념은 운영체제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삶의 목표와 신념이 생긴 후에야 그 운영체제 위에 올바른 삶의 전략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왜 사는가? 본인의 가치관이 나와 정반대여도 상관없다. 우리는 유전자, 느낀 경험 어느 하나 같은 게 없기에 다른 게 당연하고 나는 다른 가치관을 존중한다. 만약 왜 사는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잠시라도 깊게 생각해 보기를 추천한다. 나는 삶의 목표와 신념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니 내면의 흔들림이 줄었고 그 위에 여러 삶의 전략들이 자연스레 생길 수 있었다. 글이 길어져서 여기서 마무리 해야겠다. 만약 반응이 좋다면 내 신념과 그 운영체제 위에서의 삶의 전략에 관해서도 소개하고 싶다.

'왜 살아야 하는가' 번역 출간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인간은 왜 살아야 할까?

인간이 수없는 세월 동안 반복해온 질문이다. 독일 철학자 미하엘 하우스겔러 리버풀대 교수는 최근 출간된 책 '왜 살아야 하는가'(추수밭)를 통해 아직 정답이 나오지 않은 이런 해묵었지만, 여전히 도전적인 질문을 다시 꺼내 든다.

저자는 쇼펜하우어부터 카뮈까지 19~20세기 유럽 지성사를 수놓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작품을 들춰보며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다. 다만 글 서두부터 "궁극의 질문에 대한 궁극의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우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본성에 대해 질문한다. 저자는 쇼펜하우어를 인용하면서 "삶의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을 언급한다. 인간이라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피할 수 없기에 "고통과 고난이 삶 곳곳에 만연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행복"이란 것도 고통으로부터 일시 벗어난 "고통의 유예" 정도에 불과하다고 쇼펜하우어는 지적한다.

키르케고르에게도 인생은 고통이다. "행복 저 깊숙한 곳, 가장 구석진 곳에서도 결국 절망이라는 불안"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 적당히 하면서 살아가는" 체념적인(심미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그런 심미적인 태도를 벗어나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태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에 집중하는 삶'이 필요하다고 키르케고르는 말한다. "무슨 선택을 내리든 '내'가 바로 그 선택에 따라 살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애쓰다가 그만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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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모비딕'을 쓴 소설가 허먼 멜빌에게 삶은 신뢰할만한 것이 못되고, 공평하지도 않은 어떤 것이었다. 절친한 친구가 사악한 악마로 돌변하는 일도 일어나는 게 인생이다. 이를테면 그에게 삶은 '이해할 수 없는 환영'에 가까웠다. "우리는 실상 무엇을 찾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데 그런 실수는 인생 전반에 걸쳐 지속해서 반복된다고 멜빌은 이야기한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귀족이었고, 젊은 시절 사치스럽고 방탕하게 살았으며 생전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르면서도 장수했던, 누가 봐도 부러운 삶을 산 러시아의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에게도 "삶은 뛰어난 사기꾼"에 불과했다.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죽음이 자주 나온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주요 등장인물이 죽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아예 죽어가는 과정을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자유, 평등, 이상 등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한 저자는 말년으로 갈수록 종교적 색채가 짙어진다. "인간은 노동하고, 겸손하며 고통을 겪고, 타인에게 자비를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철학자 니체는 오히려 나약하게 만드는 '기독교적 연민'을 버리고 인간의 삶을 긍정하라고 강조한다.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도 '삶이 제공하는 기쁨에 내어 맡기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소설가 프루스트는 천변만화하는 삶의 속성에 속지 말고, 오로지 예술창작에 골몰하자고 주장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자고 제안한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말한 삶과 죽음의 어법은 각각의 울림이 있고, 설득력도 있다. 그렇지만 10명의 사상가가 삶과 죽음에 대한 똑 부러진 해답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궁극의 질문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대답 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며 "이 책이 그랬듯이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간결하고 함축적인 결론 따위를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것 하나만 기억하자고 강조한다.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김재경 옮김. 460쪽. 1만8천원.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1/08/04 11:43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