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자네 무슨 방책이 없겠나

그나마 가정도 안꾸미고 솔로에 무직에 저스팩등의 부담없는 삶을 누리며 
자살 생각하는놈들은 여기 올리는 이 책이나 읽고 솟아날 구멍을 찾도록 해라.
여건도 안되는 주제에 가정 꾸민다고 지랄발광해 결혼하고 자빠져
질러논 애색히들 다 굶여죽게 만드는 무책임한놈들보다는 너희들이 훨 낫다.

내가 호주에 혈혈단신 이민을 강행하기에 도움을 많이준 책이다. 
힘들떄 이책을 읽고 힘을 얻어 지금의 성공을 보게 해준 책이다.
국내 빙신같은 친구색히들과 동생색히들한테 선물로 많이도 사준책이기도 하고.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읽으셨다는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를 토대로 쓴 소설 <칼의 노래>다.
그럼 쫄지말고 무조건 정독 이다 시발롬들아. 

파이팅은 지랄이고 그냥 쭈욱 지렁이 꿈틀식으로 포복해 끝까지 살아남아라.
자살은 극단적으로 지하철이나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려야 성공100%인데
집념 패기없어 저스펙된 너희같은 색히들이 이런 용기까진 없을테니 
자살성공은 불가능하고 반병신되어 병원신세 지며 수십년동안 가족들 못살게
구는 인생될거다. 자살을 하더래도 타인에게 부담 안주는 성공률 100% 자신없으면
하질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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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책머리에

-칼의 울음
-안개 속의 살구꽃
-다시 세상 속으로
-칼과 달과 몸
-허깨비
-몸이 살아서
-서캐
-식은땀
-적의 기척
-일자진
-전환
-노을 속의 함대
-구덩이
-바람 속의 무 싹
-내 안의 죽음
-젖냄새
-생선, 배, 무기, 연장
-사지에서
-누린내와 비린내
-물비늘
-그대의 칼
-무거운 몸
-물들이기
-베어지지 않는 것들
-국물
-언어와 울음
-밥
-아무 일도 없는 바다
-노을과 화약 연기
-사쿠라 꽃잎
-비린 안개의 추억
-더듬이
-날개
-달무리
-옥수수숲의 바람과 시간
-백골과 백설
-인후
-적의 해, 적의 달
-몸이여 이슬이여
-소금
-서늘한 중심
-빈손
-볏짚
-들리지 않는 사랑 노래

부록/ 연보, 인물지, 해전도


책머리에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 만하지는 않았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이 없었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놓은 날 내 마지막 바다 오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다시, 만경강에 바친다.

2001년 봄 김훈



일러두기
1.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
2. ‘여진’이라는 여성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실명의 여인이다. 그러나 34쪽에서 40쪽 사이에 기술한 이순신과 여진의 관계는 글쓴이가 지어낸 것이다.
3. 41쪽에서 48쪽 사이에 기술한 ‘길삼봉’의 대목과 45쪽에 기술한 ‘남사고’의 대목은 <연려실기술>에 바탕한 것이다.
4. 이순신의 장계, 임금의 교서, 유시를 인용한 대목들은 대체로 이은상의 <이충무공전서>의 문장을 따랐다. 그러나 글쓴이가 지어낸 대목도 있다. 그 부분을 분명히 하지 못한다.
5. 해전의 사실은 대체로 <난중일기>에 따랐으나,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글쓴이가 지어낸 전투도 있다. 그러나 이순신 스타일의 전투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6. 책의 부록으로 첨부한 <인물지>와 <연보>에서 소설과 사실의 차이가 드러나기를 바란다.


칼의 울음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 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저무는 해가 마지막 노을에 반짝이던 물비늘을 걷어가면 바다는 캄캄하게 어두워갔고, 밀물로 달려들어 해안 단애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어둠 속에서 뒤채었다. 시선은 어둠의 절벽 앞에서 꺾여지고, 목측으로 가늠할 수 없는 수평선 너머 캄캄한 물마루 쪽 바다로부터 산더미 같은 총포와 창검으로 무장한 적의 함대는 또다시 날개를 펼치고 몰려온다. 나는 적의 적의의 근거를 알 수 없었고 적 또한 내 적의의 떨림과 깊이를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가 바다 가득히 팽팽했으나 지금 나에게는 적의만이 있고 함대는 없다.
나는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과 의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 형틀에 묶여서 나는 허깨비를 마주 대하고 있었다. 내 몸을 으깨는 헛것들의 매는 뼈가 깨어지듯이 아프고 깊었다. 나는 헛것의 무내용함과 눈앞에 절벽을 몰아세우는 매의 고통 사이에서 여러 번 실신했다. 나는 출옥 직후 남대문 밖 여염에 머물렀다. 영의정 대사헌 판부사들이 나를 위문하는 종을 보내왔다. 내가 중죄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종들은 다만 얼굴만 보이고 돌아갔다. 이 세상에 위로란 본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장독으로 쑤시는 허리를 시골 아전들의 행랑방 구들에 지져가며 남쪽으로 내려와 한 달 만에 순천 권률 도원수부에 당도했다. 내 백의종군의 시작이었다.
한산, 거제, 고성 쪽에서 불어오는 동풍에는 꽃핀 숲의 향기 속에 인육이 썩어가는 고린내가 스며 있었다. 축축한 숲의 향기를 실은 해풍의 끝자락에서 송장 썩는 고린내가 피어올랐고, 고린내가 밀려가는 바람의 꼬리에 포개져서 섬의 꽃향기가 실려왔다. 경상 해안은 목이 잘리거나 코가 잘린 시체로 뒤덮였다.
포탄과 화살이 우박으로 나르는 싸움의 뒷전에서 조선 수군은 적의 머리를 잘랐고 일본 수군은 적의 코를 베었다. 잘려진 머리와 코는 소금에 절여져 상부에 바쳐졌다. 그것이 전과의 증거물이었다. 잘라낸 머리와 코에서 적과 아군을 식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다에서는 모든 적들이 모든 적들의 머리를 자르고 코를 베었다. 지방 수령들은 만호진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달아났다. 포구로 몰려온 적들은 산속으로 숨어든 피난민의 아녀자들까지 모조리 죽이고 코를 베어갔다. 피난민들은 다만 얼굴 가운데 코가 있기 때문에 죽었다.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 조선 수군들은 물 위에 떠다니는 아군들의 시체를 갈고리로 찍어 건져올려서 갑판 위에서 목을 잘랐다. 목을 자르기 위하여 작두를 따로 배에 싣고 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목이 잘린 시체들은 다시 물에 던져졌다. 그 머리와 코의 숫자로 양측 지휘관들은 승진했고, 장려한 수사로 넘치는 교서를 받았다. 경상 해안을 뒤덮은 사체는 순천, 보성만 연안까지 떠내려와 밀물에 실려 갯벌에 처박혔다. 시체는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면 구더기들이 끓고 있었다. 목이 잘려나간 단면으로 게와 조개들이 파고들었고, 절벽 꼭대기에서 독수리들이 시체를 겨누고 급강하했다.
남해로 내려오는 한 달 동안, 수령들이 달아나버린 시골 동헌의 무너진 객사나, 아직 달아나지 않은 종들의 토방에서 잠드는 밤마다 나는 식은땀을 흘려가며 기진맥진했다. 잡초가 올라와 지붕을 덮은 마을마다 백일홍은 흐드러지게 피었고,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은 아이를 죽여 그 고기를 먹었다. 이따금씩 쑥부쟁이 덩굴 밑에 엎드린 유령들이 내 말방울 소리에 놀라 머리를 내밀 때, 퀭한 두 눈에서 눈빛이 빛났다.
구례에서 바꾸어 탄 말이 순천으로 넘어오는 고개에서 죽었다. 굶주리고 비루먹은 짐말이었는데, 고개 밑에서부터 앞다리를 절었다. 말은 무너질 듯 비틀거렸으나 고갯마루까지 기어이 올라와서 죽었다. 말의 죽음은 자연사처럼 고요했다. 말은 닳아 떨어진 편자가 박힌 네 다리를 쭉 펴더니 눈을 뜬 채 숨을 거두었다. 눈을 뜨고 죽은 말은, 그 죽은 눈으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말의 죽은 눈동자에 비치는 내 봉두난발을 들여다보았다. 말의 시체를 길섶에 버리고, 나는 걸어서 순천에 도착했다.
내가 바다에 당도했을 때, 연안의 바람은 끈끈했고, 간고등어 썩는 냄새가 자욱했다. 순천에 도착한 첫날, 권률 도원수부에 신고를 마치고 나는 여수 쪽 바닷가로 나아갔다. 다시 내 앞에 펼쳐진 바다는 감당할 수 없는 넓이로 아득했고 나는 한 척의 배도 없었다. 갯벌 안쪽 갈대숲에 시체 몇 구가 박혀 있었다. 썩다 만 옷자락은 조선 수군이었는데, 목이 잘려 있었다. 그의 목은 도원수부를 경유해서 조정으로 올라가 조선 수군의 전과로 등록되었을 것이다. 목이 잘려나간 단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죽은 말의 눈동자에 비치던 내 모습을 생각했다.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캄캄한 바다는 인광으로 뒤채었다.


안개 속의 살구꽃

바다를 건너오는 바람은 늘 산맥처럼 출렁거렸다. 겨울이면, 병영 담벽에 걸어놓은 시래기가 토담에 쓸렸고, 포구에 묶인 배들은 밤새 바람에 비꺽거렸다. 바람이 몰려가 버린 빈 자리에 밀물로 달려드는 파도 소리가 가득 찼다. 바람의 끝자락에 실려, 환청인가, 누에고치에서 실 풀려나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바다에서는 언제나 그랬다. 바람이 아니라, 파도에 실려서 수평선을 건너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메뚜기떼가 풀섶에서 서걱대는 소리 같기도 했고, 먼 곳에서 쥐떼가 씻나락을 까먹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환청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또렷했지만, 들리는가 싶으면 물소리에 묻혀버렸고 몰려가는 바람의 뒤끝에서 다시 살아났다. 바람이 잠들고, 달빛 스민 바다가 기름처럼 조용한 밤에도, 사각 사각 사각, 그 종잡을 수 없는 소리는 수평선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식은땀의 한기에서 깨어나는 새벽의 환청이 밤이나 낮이나 나를 따라다니는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흔들어 그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떨쳐내면, 다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그 소리는 되살아났다.
포구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물길을 따라 물러설 자리가 없는 포구야말로 가장 위태로운 숙영지였다. 한바탕의 싸움이 끝나고 인적 없는 섬의 포구로 살아남은 병력을 물려서 배와 병졸들을 재우는 밤에 그 환청은 보이지 않는 눈보라로 내 마음에 몰려왔다. 그리고 식은땀에 뒤채이는 새벽에 그 환청은 캄캄한 수평선 너머에서 내 피폐한 연안으로 다가오는 수천 수만 적선들의 노 젓는 소리로 들렸다.
다시 귀 기울이면, 그 눈보라와도 같은 환청은 수평선 너머 대마도 쪽 바다에서만 몰려오는 것이 아니라, 압록강 물가 의주까지 달아난 조정으로부터도 몰려왔다. 사각 사각 사각. 환청은 압록강에서 남해안까지 반도의 모든 산맥과 강들을 건너서 눈보라로 밀려왔다. 바람 거센 밤이면 포구에 묶인 배들이 서로 부딪혔다. 나는 잠든 병졸들을 깨워 갯가로 내려보냈다. 병졸들은 선창에서 부딪히는 배들을 뭍으로 끌어올려 놓았다. 바다에서 나는 늘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했다.
정유년 여름에,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 수군 연합 함대는 거제도 북쪽 칠천량 앞바다에서 전멸되었다. 그해 초봄, 나는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가덕 방면 전투는 헐거웠다. 적의 전투 의지가 내 몸에 전해지지 않았다. 전투라기보다는 부지런히 잡초를 뽑는 농사일 같은 느낌이었다. 가덕 해역으로부터 함대를 철수시켜 한산 통제영 모항으로 돌아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의금부 도사는 선착장에서 나를 묶었다. 포승은 뼈를 파고들듯이 억세었다. 의금부 도사에 따르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죄목은 조정을 능멸했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서울로 가는 함거에 오르기 전에 나는 내 후임자인 원균에게 함대, 병력, 군량, 총포, 화약, 창검, 포로 그리고 행정 사항을 인계했다. 원균은 나를 실은 함거가 어서 떠나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는 실물의 수량과 보존 상태를 확인하지 않은 채 인수서에 도장을 찍었다.
개전 이듬해인 계사년 여름부터 나는 한산 통제영에 주둔해 왔다. 내가 원균에게 인계한 병력과 장비는 한산 통제영에서 3년 반 동안 확보한 군비의 전체였으며, 조선 수군 총 군비의 팔할이 넘는 것이었다. 그 팔할이 칠천량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 그 팔할이 불탄 널빤지와 목 잘리고 코 잘린 시체로 물 위에 흩어졌다. 하룻밤 하루 낮의 전투였다.
나중에 들으니, 적선 천여 척이 방사대형으로 날개를 펴면서 달려들었고, 한산 통제영에서 거제도 앞바다까지 하루 종일 배를 저어온 피곤한 군사들을 원균은 적의 방사형 대열 중앙부에 일자진으로 집중시켰다는 것이다. 나는 안다. 원균은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고 아무도 말리지 못할 무서운 적의를 지닌 사내였다. 그 사내는 모든 전투가 자기 자신을 위한 전투이기를 바랐다. 그는 전투의 결과에 얻을 것이 있다고 믿었다. 나는 때때로 수많은 적의 머리를 주어서 그를 달랬다. 그의 활화산 같은 적의와 분노가 날개를 펴고 달려드는 적의 방사진 앞에 장졸과 함대를 집중시켰던 것이다.
갑옷마저 잃어버린 원균은 거제도의 산속으로 달아났다. 그는 칼 한 자루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아서 그 뚱뚱한 몸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뭍까지 쫓아온 적의 칼을 받았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도 죽었고 충청 수사 최호도 배가 부서질 때 바다에서 죽었다.
함거가 통제영을 떠날 때, 격군과 군관들은 길을 막고 주저앉아 통곡했다. 원균이 쓰러져 우는 군사들을 채찍으로 때려서 길을 열었다. 원균은 소리쳤다.
-울지 마라. 적들이 듣겠다.
원균은 내 함거 위에 서울의 요로에 보내는 진상품 보따리를 실었다. 말린 홍어와 미역이었다.
-갈 길이 멀겠소.
-무운을 비오.
원균과 나의 작별은 그토록 무덤덤했다.
함거를 끄는 소는 아흐레 밤낮을 걸어서 북으로 갔다. 금부 나졸들은 끼니때가 되면 연기 나는 마을을 찾아 들어가 먹을 것을 빼앗아왔다. 연기 나는 마을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나졸들은 다음 끼니까지 빼앗아 함거에 실었다. 의금부 도사는 심하게 길 재촉을 했고, 함거는 밤에도 이동했다. 조정은 시급히 나의 죽음을 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포승에 묶인 채 함거 위에서 흔들렸다.
조정을 능멸한 죄,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 나는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죽음은 절벽처럼 확실했다. 다만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문과 문초가 길지 않기를 바랐다. 죽여야 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내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
길은 산맥의 저편으로 돌아나가 굽이친 저쪽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는 그 길의 끝에 임금과 조정과 사직은 있었다. 나의 전쟁은 나의 죽음으로써 나의 생애에서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분명한 끝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귀 기울이면, 사각 사각 사각, 어두운 수평선 너머에서 내 적들이 노 저어 다가오는 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함거가 마포나루를 건너 서울로 들어갈 때 나는 자꾸만 고개를 흔들어 그 환청을 몰아내곤 했다. 서울에는 봄비가 내렸고 한강 밤섬에는 안개 속에서 살구꽃이 피어 있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는 조선 수군 연합 함대가 칠천량에서 전멸되었다는 소식을 도원수 권률에게서 들었다. 한산 통제영은 으깨졌다. 통제영 휘하의 모든 연안 포구와 섬들에 적의 깃발이 휘날렸다. 바다가 내륙 쪽으로 파고들어 아늑하고 오목한 물목마다 적들은 포진했다. 밤이면 술취한 적들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전쟁이 소강이던 몇 달 사이에 농토로 돌아왔던 피난민들은 다시 흩어졌다. 그들의 행방을 나는 모른다. 늦여름이었다. 그들이 버리고 떠난 논밭은 아직도 파랬다. 가을에, 적들은 그 수확을 차지할 것이었다.
적들은 불법의 신통력이 전투를 인도해 주기를 기원했다. <나무묘법연화경>의 깃발이 적선마다 높이 걸려 있었다. <나무묘법연화경>은 바다를 가득 메우고 밀려들었다. 임진년 개전 이후, 깨드린 적선 내부를 수색해 보면 적장의 선실 안에서는 <법화경>이나 <연화경> 책이 발견되기도 했다.

……오는 세상에 너희는 마땅히 성불하리라. 그때 너희 국토에 청정하고 착한 보살이 가득하여 너희 선남자 선여인들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으리라.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라, 여래가 중생을 버리지 않느니…….

라고 그 경전에는 적혀 있었다. 선실 안에 불단을 차려놓고, 승려를 배에 태우고 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나의 부하들은 흔히 생포된 적의 승려를 배에서 목 베어 바다에 던졌다. 승려는 합장한 자세로 염불을 외면서 칼을 받았다. 염불을 외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포로까지 먹일 만한 군량이 나에게는 없었다. 내 장졸들은 <나무묘법연화경>의 깃발을 찢어서 부상자들의 상처를 싸매주었다. 올이 촘촘한 그 비단 깃폭은 상처를 싸매기에 좋았다. 헐벗은 내 장졸들은 그 비단 깃폭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노 젓는 그들의 등판에 법자나 경자의 획이 드러나 있었다.
그 <나무묘법연화경>의 깃발을 치켜든 적선들은 다시 눈보라처럼 밀려왔다. 전선은 통제 불능으로 확산되었다. 전선과 후방은 구분되지 않았다. 아군 병력은 집중, 분산 양쪽이 모두 불가능했다. 도원수 권률은 이 불가능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모든 불가능은 확실했다. 도원수 권률은 정보가 없었다. 가장 확실한 운명이 가장 모호한 풍문으로 연안과 내륙에 퍼져나갔다.
도원수 권률은 백의종군하는 내가 순천 도원수부에 신고하고 나서도 나의 임지와 보직을 정해주지 않았다. 나는 무기한 대기 상태였다. 아마도 그는 내가 다시 배에 오르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나는 연안 일대의 무너진 포구들과 지리산 산속 마을과 섬진강 강가 마을을 떠돌았다. 내륙 지역의 관아는 겨우 회복되었으나 인기척 없는 마을에는 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고 버려진 우물 속에서 풀이 자라 올라왔다. 어느 마을에나 장정은 보이지 않았고 건져서 쓸 만한 것은 못대가리 하나 없었다. 진주에서 나는 초계 마을 아전 집 토방에 머물렀다.
도원수 권률이 그 토방까지 나를 찾아온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미리 종사관을 나에게 보냈다. 도원수가 방진 시찰차 진주에 왔다가 나를 보러 온다는 전갈이었다. 진주성은 계사년 여름에 함락되었다. 김천일, 최경희, 황명보, 이종인이 죽었고, 5천여 관민이 모두 다 성 안에서 도륙되었다. 들에는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 그 후 진주는 폐허로 방치되어 왔다. 도원수가 시찰해야 할 군사 시설이 진주에는 없었다. 그가 방진 시찰 명목으로 진주에 나타난 것은 납득 못할 일이었다.
도원수 권률은 군관과 나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말은 살찌고 기름졌다. 갈기에서 무지갯빛이 부서졌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토방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나졸들은 마당에서 창검과 기치를 정렬했다. 나는 마루로 나와서 그에게 절했다.
-이순신, 자네를 자네라고 불러도 좋겠는가?
그는 백의종군하는 나의 지위를 명석하게도 나에게 인식시켰다. 환갑의 나이에도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백의의 몸이오니…….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체포되기 몇 달 전인 병신년 초겨울에 나는 한산 통제영에서 그를 대면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통제영까지 나를 찾아왔었다. 조정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곧 바다를 건너서 부산으로 진공하게 되어 있는데, 함대를 이끌고 부산 해역으로 나아가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적을 요격해서 가토의 머리를 조정으로 보내라고, 그때 그는 나에게 말했었다. 그는 이 작전이 조정의 전략이며 도원수의 지시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다만,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해 주십시오, 라고만 대답했다. 그는 서둘러 돌아갔고 나는 함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반간들로부터 입수했다는 조정의 정보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 무렵 부산 해역의 연안 포구와 섬들에 적들은 거대한 군비를 쌓아놓고 있었다. 그 섬들 사이로 함대를 이동시키자면 후방과 측방이 모두 위태로웠다. 겨울 바다는 물결이 높았다. 그 물결 높은 바다 위에서 며칠이고 진을 펼치고 언제 올지 모르는 적을 기다린다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조정은 작전 전체의 승패보다도 가토의 머리를 간절하게 원했다. 가토는 임진년 출병의 제 1진이었다. 가토의 부대는 한나절 만에 부산성을 깨뜨리고, 꽃놀이 가는 봄나들이 차림으로 가마 대열을 꾸며 북으로 올라갔다. 붙잡힌 조선 백성들이 그 가마를 메었다. 임금은 가토의 부대에 쫓겨 의주까지 달아났었다. 임금은 가토의 머리에 걸린 정치적 상징성을 목말라했다.
임금은 진실로 종묘사직 제단 위에 가토의 머리를 바치고 술 한잔을 따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한 움큼이 조선의 전부였다. 나는 임금의 장난감을 바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을 한탄했다. 나는 임금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함대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는 즉각 기소되었다. 권률이 나를 기소했고 비변사 문인 관료들은 나를 집요하게 탄핵했다. 서울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는 동안 나는 나를 기소한 자와 탄핵한 자들이 누구였던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 권률이 이 궁벽한 산골까지 또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권률은, 바로 이틀 전에 칠천량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되었다는 소식을, 혼잣말을 하듯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전멸’을 여러 번 강조했다. ‘전멸’이라니까, 정확한 정황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듣기만 했다.
-자네, 서울 의금부의 일들은 다 잊어버리게. 무인이란 본래 그래야 하네.
권률은 무섭게도 집중된 위엄을 가진 사내였다. 육군인 그는 임진강에서 이겼고, 용인에서 이겼고, 수원에서 이겼고, 이천에서 이겼고, 행주산성에서 이겼다. 그는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한 자의 살기를 몸 속 깊이 숨기고 있었고, 나는 나의 살기로 그의 살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정치 권력의 힘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육군의 지원을 요청하며 출전을 머뭇거리는 원균을 불러들여 곤장 50대를 때려서 칠천량 바다로 내어몰았다. 그는 예순에 가까운 삼도수군통제사를 형틀에 묶어서 곤장을 칠 수 있는 사내였다. 그는 늙고 우둔한 맹수처럼 보였다.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자네 무슨 방책이 없겠나?
울어지지 않는 울음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 내 몸 깊은 곳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방책, 아아 방책. 그때 나는 차라리 의금부 형틀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방책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 나는 겨우 대답했다.
-방책은 물가에 있든지 없든지 할 것입니다. 연안을 다 돌아보고 나서 말씀 올리겠습니다.
-고맙네, 속히 시행하게.
권률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순천에서 진주까지는 이틀이 걸린다. 칠천량 전투는 이틀 전에 끝났다. 권률은 패전 보고를 받은 즉시 나를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방책이었을까. 권률이 돌아간 뒤, 나는 종을 시켜 칼을 갈았다. 시퍼런 칼은 구름 무늬로 어른거리면서 차가운 쇠비린내를 풍겼다. 칼이 뜨거운 물건인지 차가운 물건인지 나는 늘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칼을 코에 대고 쇠비린내를 몸 속 깊이 빨아넣었다. 이 세상을 다 버릴 수 있을 때까지, 이 방책 없는 세상에서 살아 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새벽에 나는 종에게 칼을 들려서 진주를 떠났다. 내 늙은 종의 이름은 막쇠였다. 나는 하동, 남해, 여수 쪽 연안으로 길을 정했다. 내가 떠날 때, 묵던 집 아전이 좁쌀과 소금과 말린 생선을 싸주었다.


칼과 달과 몸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 임진년 개전 이래,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믿었다기보다는, 그렇기를 바랐다. 그 바람은 숨막혔다. 좀더 정직하게 말해보자. 사실 나는 무인된 자의 마지막 사치로서, 나의 생애에서 이기고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나는 다만 무력할 수 있는 무인이기를 바랐다. 바다에서, 나의 무의 위치는 적의 위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사치는 성립될 수 없었다. 바다에서, 나의 위치는 늘 적과 맞물려 돌아갔다. 내가 함대를 포구에 정박시키고 있을 때도, 적의 함대가 이동하면 잠든 나의 함대는 저절로 이동한 셈이었다. 바다에서 나는 늘 머물 곳 없었고, 내가 몸 둘 곳 없어 뒤채이는 밤에도 내 고단한 함대는 곤히 잠들었다.
다시 내 앞에 펼쳐진 바다에서, 적의 조건도 나의 조건도 보이지 않았다. 가을빛이 스러져가는 바다는 차가웠고, 외마디로 짖어대는 새들의 울음은 멀었다. 멀리 부산, 거제, 고성 쪽 해안은 목측이 꺾여져 보이지 않았고, 경상 바다 수평선 안쪽으로 흩어진 섬들에서 적들끼리 서로 부르고 응답하는 봉화가 올랐다. 봉화는 불꽃에서 연기로, 검은 연기에서 흰 연기로 바뀌어갔으나, 나는 그 봉화의 내용을 해독할 수 없었다.
하동에 도착하던 날, 나는 섬진강 물가의 버려진 농가에 머물렀다. 이미 사령장을 받은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적들이 장악한 섬이나 포구로 부임하지 못하고 하동 포구 언저리에 엎드려 있었다. 그들은 내가 묵던 농가로 찾아와 마당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통곡했다. 그들의 울음은 나에 대한 의전 행사처럼 보였다. 울기를 마치고 그들은 사공을 불러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돌아갔다. 그들은 울기 위해 내 초막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어두워지는 물가에서 왜가리 몇 마리가 물 위에 비친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농가 마루에 앉아서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았고, 내 종 막쇠는 강물에 바지를 걷고 들어가 투망질을 하고 있었다. 저편으로 건너갔던 나룻배가 다시 이편으로 돌아왔다. 그 배 위에 웬 여인네가 한 명 타고 있었다. 사공과 여인네뿐이었다. 여인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물가에 내린 여인은 내 농가를 향해 걸어왔다. 미투리가 해져 버선이 땅에 닿았고, 위로 치켜올린 두 겨드랑 사이로 속치마 끈이 보였다. 짐 보따리에 눌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작고 둥근 어깨와 어린아이처럼 좁은 보폭, 그것은 여진이었다. 나는 경악했다. 오랫동안 뒷물을 하지 않은 더러운 여자의 날비린내가 내 마음속에서 살아났다.
-나으리……
여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당에 쓰러져 울었다. 몸 안으로 밀어넣으려는 울음소리가 몸 밖으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전신으로 울고 있었다. 작은 몸뚱어리 어디에 그토록 깊은 울음이 감추어져 있었는지, 여진의 울음은 길었다. 강 건너편에서 달이 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울음이 스스로 추슬러질 때까지, 흔들리는 어깨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는 병신년 가을에 처음으로 여진을 품었다. 그때, 전쟁은 지리멸렬했다. 적들은 부산과 울산에서 기나긴 농성을 계속하며 바다로 나오지 않았고, 육군은 적들을 바다로 내몰지 못했다. 나는 내륙지방 관아를 돌면서 징모 부정 사건을 색출해 내고 있었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나버린 아전들도 있었다. 수군에서 탈영해 마을로 숨어들어온 자들을 적발하고도, 보리쌀 두 가마를 받고 눈감아준 아전이 있었다. 함평 아전이었다. 아전과 탈영자 세 명을 붙잡았다. 군관을 시켜서 목 베게 했다. 그들은 불탄 향교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목 을 벨 때, 그 식솔들은 울부짖다가 실신했다. 잘린 머리 네 개를 마을 정자나무에 걸었다. 보리쌀 다섯 말을 받고 일가족 호적을 부재자로 기재한 아전을 함평 산골에서 붙잡았다. 형틀에 묶고 곤장 40대를 치게 했다. 늙고 병든 아전이었다. 그 아전은 아마 스무대 쯤에서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숨이 끊어진 것을 모른 형리가 나머지 스무 대를 계속 쳤다. 그의 몸은 으스러져서 죽처럼 흘러내렸다. 그날 밤 나는 동헌 객사에 묵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아전의 몸을 으깨던 매와, 보리쌀로 죽을 끓여 먹었을 그의 식솔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맑은 청정수를 들이켜고 싶었다.
밤늦게, 함평 현감이 내 방으로 술상을 들여보냈다. 여진은 그 술상을 들고 들어온 관기였다. 그때 서른 살이라고 했다. 기생이라기보다는 관노에 가까웠다. 손등이 터져 있었고 머리에서 쉰내가 났다. 그 여자의 몸은 더러웠고, 눈동자는 맑았다. 눈빛이 찌르는 듯해서, 내가 시선을 돌렸다. 정자나무에 매단 머리들의 뜬 눈을 생각하면서, 그날 밤 나는 여진을 품었다. 그 머리들이 내 몸을 여진의 몸 속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았다. 그 여자의 몸 속은 따스하고 조붓했다. 오랫동안 뒷물하지 않은 여자의 날비린내 속에서 내 몸은 나로부터 아득해져 갔고, 또 돌아왔다. 그 여자의 몸은 쉽게 수줍음을 버렸다. 그 여자의 몸은 출렁거리며 나에게 넘쳐왔다. 새벽에 여진은 윗목에 쪼그리고 앉아서 두 무릎을 안고 울었다. 작고 동그란 어깨가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그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돌아누워 식은땀을 흘렸다. 낮에 정자나무에 매단 머리의 뜬 눈들이 어둠 속에서 커다랗게 나에게 다가왔다.
-왜 왔느냐?
-나으리, 어찌 그런 말씀을……
여진은 고개를 떨구었다. 종 막쇠가 저녁상을 차려왔다. 조밥이었다. 강에서 잡은 쏘가리에 시래기를 넣고 매운탕을 끓여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무말랭이가 상 위에 올라 있었다. 여진과 나는 저녁상에 마주앉았다.
-먹어라.
-겸상을 하여주시니……
여진은 눈을 들어 나를 쏘아보았다. 맑은 눈이었다. 머리카락이 뒤엉켜 있었고, 쪼그리고 앉은 발 뒤꿈치 각질에 때가 끼어 있었다. 먼 길을 걸어온 모양이었다.
-왜 왔느냐?
-출옥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여진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먹어라.
-……네.
밥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그 여자의 어깨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뒤엉킨 머리카락 밑으로 두 볼이 촛불에 빛났다. 그 여자의 등 뒤, 담벽에 걸어놓은 칼에 그 여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여진은 수저를 들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손이 떨렸다.
-편히 먹어라.
-……네.
-아느냐? 나는 물 위에 뜬 수군이다.
-……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밥을 먹었다. 입이 작은 그 여자는 큰 놋숟가락을 힘들어했다.
-내가 출옥했기로 네가 어찌 왔느냐?
-전에, 제 몸을 편안해하시기에……
그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담벽에 비친 그림자의 입이 그렇게 말했다.
그날 밤, 나는 두 번째로 여진을 품었다. 그 여자의 몸은 더러웠다. 그 여자는 쉽게 수줍음에서 벗어났다. 다리 사이에서 지독한 젓국 냄새가 퍼져나왔다. 그 여자의 입 속은 달았고, 그 여자의 몸 속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에는 다급한 갈증이 섞여 있었다. 새벽에 나는 품 속의 여진에게 물었다. 밝는 날 어디로 가겠느냐…… 나의 실수였다. 나으리, 밝는 날 저를 베어주시어요…… 그 여자의 목소리는 진실로 베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를 부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여자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담벽에 걸린 칼에 달빛이 비치었다. 칼날의 숫돌 자국 속에서 달빛이 어른거렸다. 그 여자의 머리 속에서 먼지와 햇볕의 냄새가 났다. 나는 더욱 끌어안았다. 그 여자는 몸을 작게 옹크리고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여자의 작은 손이 내 등판의 식은땀을 씻어내렸다. 그 여자의 빗장뼈 밑에서 오른쪽 젖무덤까지, 굵은 상처자국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등에도 아문 지 오랜 상처 자국이 있었다. 나는 상처에 관하여 묻지 않았다.
달이 구름을 빠져나오면서 다시 칼날을 비추었다. 달은 칼의 숫돌 무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칼빛이 뽀얗게 살아났다. 칼은 인광처럼 차가워 보였다. 가늘고 긴 목이 내 품속에서 떨리면서, 그 여자는 다시 말했다. 나으리 밝는 날 저를 베어주시어요…… 이 세상이 아닌 곳으로 저를 보내주시어요…… 나는 다시 그 여자의 몸 속을 파고들었다. 그 여자의 신음은 낮고도 애절했다. 나는 그 여자를 안듯이 그 여자를 베어주고 싶었다. 나는 내 몸을 그 여자의 몸 속으로 밀어넣듯이, 그렇게 칼날을 여자의 몸 속으로 밀어넣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 여자를 안는 힘으로 세상의 적을 맞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몸을 떨었다.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때 나는 무인이 아니었다. 아침 숲에서 새떼들이 깨어나 지껄였다. 아침에 나는 그 여자의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나는 다시 바다 쪽으로 나아갔다. 내가 먼저 떠났다. 나는 여진의 삶의 궤적을 알지 못했다. 함평에서도 나는 여진의 내력을 현감에게 물어보지 않았었다.


허깨비

크고 확실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으므로, 헛것인지 실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헛것들은 실체의 옷을 입고, 모든 실체들은 헛것의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 젊은날, 여진족과 맞서 있던 두만강가 산속에서, 출렁거리며 대륙을 달려가는 산맥들은 보이지 않았고 남쪽 물가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눈보라 속에서는 눈과 바람의 저쪽이 보이지 않았지만, 크고 또 확실한 적들은 늘 보이지 않는 저편으로부터 몰려왔다.
임진년의 세월은 정초부터 흉흉했다. 그 전해에도 그랬고, 또 그 전해에도 그랬다. 길삼봉이라는 이름의 허깨비가 구름을 타고 돌아다니며 산천에 피를 뿌리고 있었다. 길삼봉이 지리산 피아골에서 역모의 군사를 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의금부 나졸들이 거렁뱅이 두 명을 붙잡아왔는데, 그 거렁뱅이들이 ‘길삼봉’의 이름과 행적을 실토했다. 황해도에서 잡아온 거렁뱅이들이었다. 황해도 거렁뱅이가 지리산에 숨어 있다는 길삼봉의 행적을 소상히도 진술했다. 길삼봉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길삼봉을 보았다는 자들이 전국에서 속출했다. 
길삼봉은 천안의 농갓집 종놈인데, 나이는 예순쯤 되었고 얼굴을 구릿빛이고 살이 쪘다고도 했다. 또 어떤 자들은 길삼봉은 나이가 서른 살이고 흰 수염이 허리에까지 내려왔으며 얼굴은 희다고도 했다. 길삼봉은 수괴가 아니라 역적의 졸병이고, 하루에 3백 리를 걷는다는 말도 있었다. 길삼봉은 성이 길가가 아니고 최가인데, 몇 년 전에 이미 산병(散兵)하고 함경도 북청에서 죽었다는 말도 떠돌았다. 길삼봉은 현 임금이 등극하던 다음해에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곧 쳐들어올 일본군의 선봉대로 다시 바다를 건너오게 되어 있는데, 조선 왕이 항복하면 길삼봉이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조선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도 있었다.
길삼봉의 허깨비는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나 길삼봉은 어디에도 없었다. 헛갈리는 냄새는 짙었으나 자취는 없었다. 관군은 온 나라의 벽촌과 해안을 모두 뒤졌으나 길삼봉을 잡지 못했다.
마침내 길삼봉은 누구냐?라는 질문은 누가 길삼봉이냐?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질문의 구조가 바뀌자 길삼봉의 허깨비는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길삼봉으로 지목된 사람은 정여립이었다. 그때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진안에 숨어 있었다. 금부 나졸이 닥치자 그는 아들과 측근들을 베어 죽이고 그 칼로 자살했다. 천하는 공물이라 주인이 따로 없다, 라는 그의 글이 압수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정여립이 자살하자 길삼봉의 허깨비는 실체로 둔갑했다. 그 다음에 길삼봉으로 지목된 사람은 진주의 선비 최영경이었다. 젊어서, 그는 한때 삼봉이라는 호를 썼다. 그는 임금이 불러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우의정 정철을 벌레처럼 경멸했다고 한다. 의금부 형틀에 묶여 최영경의 몸은 걸레가 되었다. 길삼봉인지 아닌지 밝혀지기 전에 그는 옥에서 죽었다. 죽었으므로, 그는 길삼봉의 대접을 받았다. 감옥 안에서 그는 늘 벽에 기대는 일이 없이 단정히 앉아서 옷깃을 여미었고, 그의 낯빛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감옥으로 면회 온 가족들에게 그는 바를 정(正)자 한 글자를 써서 보여주었다.
-너희가 이 글자를 아느냐?
그렇게 말하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정여립과 최영경에 연루된 자들 천여 명이 형틀에 묶여 죽었다. 가족 친척이 죽었고 함께 술마시며 음풍농월한 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자들과 그들을 두둔한 자들과 그들을 욕한 자들을 욕한 자들이 모조리 끌려와서 베어지거나 으깨졌다. 매일매일 가마니에 덮인 시체들이 시구문 밖으로 나갔다. 시체를 묻어준 자들도 끌려와서 베어졌다.
중국 산수화를 들여다보고 있던 임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옥에 갇힌 자들을 끌어내서 죽였다. 팔십 먹은 노파를 곤장으로 쳐 죽였고, 여덟 살 난 남자아이와 다섯 살 난 여자아이를 무릎을 으깨서 죽였다. 목격한 사실을 자백하라는 위관의 심문을 아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때리고 꺾고 비틀고 지지면서 형리들은 울었고, 울던 형리들이 다시 형틀에 묶였다. 우의정 정철이 그 피의 국면을 주도했다. 정철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민첩하고도 부지런했다. 그는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근면히 살육했다. 살육의 틈틈이, 그는 도가풍의 은일과 고독을 수다스럽게 고백하는 글을 짓기를 좋아했다. 그의 글은 허무했고 요염했다. 임금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임으로써 권력의 작동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삼봉은 천 명이 넘었으나, 길삼봉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무렵 나는 여수의 좌수영에 부임해 있었다. 이따금씩 서울에서 내려오는 선전관들과 그들을 수행한 하급 벼슬아치들에게 술대접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서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길삼봉. 나는 길삼봉을 떠올렸으나, 길삼봉은 떠올려지지 않았다. 길삼봉은 강력한 헛것이었다. 바다 건너의 적들처럼, 길삼봉은 보이지 않았다. 내 칼은 보이지 않는 적을 벨 수 없었다. 나는 두개골 속이 가려웠다. 나는 맑은 청정수를 들이켜고 싶었다. 이 세상과의 싸움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헛것은 칼을 받지 않는다. 헛것은 베어지지 않는다.
술취한 선전관으로부터 길삼봉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길삼봉은 임금 자신일 것이었다. 그리고 승정원, 비변사, 사간원, 사헌부에 우글거리는 조정 대신 전부였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길삼봉이 숨을 수 있는 깊은 숲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풍수쟁이 남사고가 임진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선전관은 말했다. 남사고는 서울 관상감에서 천문학 교수를 맡은 인물이라고 했다. 어느 날 밤에 샛별이 흐려졌다. 남사고와 함께 하늘을 바라보던 늙은 감정이 이것은 내가 죽을 징조다,라고 말했다. 남사고는 빙그레 웃었다. 죽을 사람이 따로 있다,라고 남사고는 말했다. 남사고는 며칠 후에 죽었다.
선전관들의 말에 따르면, 서울 도성 안에서는 유림 사대부 집 자식들이 수백 명씩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미치광이나 괴물의 흉내를 내며 히히덕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건을 쓴 젊은 선비들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몸을 구부려 앞선 자의 허리춤을 붙잡고 뱀처럼 흔들면서 종로통을 휩쓸며 다니는데, 우는 자, 웃는 자, 실성한 자, 발광한 자, 술 취한 자, 토하는 자들이 뒤섞여 도깨비나 무당의 흉내를 냈다. 공맹을 외던 젊은 선비들이 대낮에 거리로 몰려나와서 짐승이 흘레붙는 흉내를 냈다. 그들의 놀이의 이름은 <등등곡>이라 했다. 도성 안 백성들은 남산, 관악산, 무악산에 모여 날마다 해가 지도록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복사꽃 피니 세상은 끝나네>가 그들의 노래였다고 한다. 도성 주변 모든 왕릉에서 밤마다 귀신 울음이 들려 수비하던 군사들이 놀라 흩어졌다고도 했다.

선전관 일행과 늦도록 술을 마시던 날 밤에 방답 권관 김옥천이 탈영했다. 아침에도 술이 깨지 않았다. 방답 만호가 수졸을 보내 보고해 왔다. 군사를 풀어 좌수영 관하의 모든 포구와 나루를 막았다. 그의 고향 강진에도 군관을 보냈다. 강진으로 가는 군관에게, 베어서 머리만 들고 오라고 일렀다. 김옥천은 오동도 나루에서 배를 타고 먼바다 쪽으로 달아났다. 여천 격군들이 바다에서 김옥천을 붙잡았다. 배에는 젊은 여자가 한 명 타고 있었고, 훔친 군량미 세 가마와 이부자리, 소금, 그리고 솥단지가 실려 있었다. 남녀가 함께 묶여서 끌려왔다. 김옥천은 작년에 무과 병과에 급제한 자였다. 스물두 살이었고, 태껸과 활 솜씨가 좋았다. 묶여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젊음의 힘이 빛났다. 콧날이 완강해 보였다.
-어디로 가려 하였느냐?
-나는 단지 살고 싶었소. 여기가 아닌, 먼 섬으로 가려고 했소.
동헌 노대석 위에 꿇어앉히고 군관을 시켜 베었다. 칼을 받기 직전에 김옥천은 고개를 들었다. 상대를 밀쳐내는 눈동자였다. 젊은 사내의 거친 힘이 끼쳐왔다.
-나으리, 민망한 말씀이오만……
-말하라.
-우리는 지금도 살고 싶소. 나를 죽이시고 저 여자를 살려주시오. 저 여자를 나으리께 바치리다. 곱고 착한 여자요. 거두어서, 죽이지는 마소서.
나는 군관들에게 소리쳤다.
-집행하라.
좌수영 선착장은 군사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김옥천의 머리는 장대에 꽂혀서 선착장 기찰 초소에 세워졌다.
남자를 벨 때, 묶인 여자는 눈을 들어서 집행의 과정을 읽듯이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고요했다. 허공을 가르던 칼이 남자의 목에 내려올 때, 여자의 맑은 시선은 칼을 따라 이동했다.
나는 여자를 풀어주었다. 풀려난 여자는 갯가로 내려가 해송 가지에 목을 매고 죽었다. 격군들이 여자의 시체를 동헌 마당으로 옮겨왔다. 격군들은 여자의 빼물린 혀를 입 안으로 밀어넣고 입을 오므려주었다. 여자의 죽은 얼굴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그 여자의 아비인 늙은 어부를 잡아들였다. 어부가 달아나는 남녀에게 배를 내주었다. 그 배는 수군에 징발된 목선이었다. 돛은 없고, 노만 있는 배였다. 돛 없는 배를 타고 젊은 남녀가 가려던 ‘먼 섬’이 어느 섬인지 알 수 없었다. 죽은 딸의 시체를 노려보는 어부의 눈빛이 타올랐다.
-그 배는 내 배요. 나으리 배가 아니오. 내 배를 내 딸에게 내준 것이오.
늙은 어부는 형틀에 묶여서 소리쳤다. 곤장 스무 대를 때렸다. 어부는 힘겨운 일을 감당하듯이 겨우겨우 매를 감당했다. 스무 대째에 고개가 꺾여졌다. 동헌 문 밖에는 어부의 처와 아들이 지게를 지고 와서 기다렸다. 어부의 아들은 늘어진 아비를 지게에 싣고 돌아갔다.
방답진 색리가 묶여서 끌려왔다. 군관들의 조사에 따르면, 김옥천이 군량미 세 가마를 빼돌릴 때 이 색리와 공모했다. 여죄도 만만치 않았다. 징모 부정과 탈영자 은닉이었다. 군사를 보내 색리의 집을 수색했다. 곡식과 가축을 모두 끌어다가 수영 창고로 옮겼다. 색리를 베어서 그 머리를 방답으로 돌려보내 진중에 걸게 했다.
그날, 선전관 일행은 서울로 돌아갔다. 나는 수영 어귀까지 전송했다. 저녁때 사정에 올라가 활을 쏘았다. 열다섯 순을 쏘았다. 먼 바다 쪽에서 안개의 비린내가 몰려왔고, 표적 너머에서 길삼봉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어디를 조준해야 하는지, 표적은 흔들렸다. 바람은 계통 없이 불어댔다. 화살은 거의 맞지 않았다. 어두워져서 사정에서 내려왔다. 표적은 비어 있었다.


몸이 살아서

연안은 텅 비어 있었다. 산하뿐이었다. 포구마다 부서진 전선 두어 척이 뻘밭에 밀려와 처박혀 있었다. 수리해서 쓸 만한 물건이 못 되었다. 불타다 만 선체는 널빤지 한 장 뜯어낼 것이 없었다. 나는 광양만에서 구례 쪽으로 걸었다. 적들이 해안에 상륙하자 피난민들이 내륙으로 몰려들었다. 거꾸로 내륙의 피난민들은 남쪽 물가를 향해 내려갔다. 양쪽의 피난민들이 길에서 마주쳐 서로 떠나온 곳의 형편을 물었다. 피난처는 아무 곳에도 없어 보였지만,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하여 어디론지 가고 있었다. 어디론지 가고 있다는 것만이 그들의 위안인 듯싶었다. 쓰러진 자들은 숨이 끊어지기 전에 길섶에 버려졌다. 나는 그들의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성 없는 마을마다 지방 수령들의 수염은 길게 자라 있었다. 그들은 무기력했고, 무기력한 만큼 격렬하게 비분강개했다. 나는 그들이 가져다 주는 밥을 먹고 그들의 숙사에서 잠을 잤다. 도원수 권률에게는 아무것도 보고할 수 없었다. 보고할 사실이 나에게는 없었고, 세상에도 없었다. 다만 도원수의 안부를 묻고, 내가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다는 내용만을 간략히 적어서 지방 아전 편에 도원수부로 보냈다.
구례에 도착하던 밤에 혼자서 술을 마셨다. 술이 먼 것들을 가깝게 당겨주었다.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백의종군 길에 고향 마을인 아산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길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던 날, 나를 호송하던 의금부 도사는 길을 재촉하지 않았다.
부고를 받던 날 시골 객주집 행랑방에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어머니를 순천에 모셔왔다. 순천은 우수영이나 통제영에서 가까웠다. 어머니는 내가 출옥했다는 소식을 듣고 순천에서 아산으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남해안을 돌아서 서해로 올라가는 화물 배편을 얻어 탔다. 엿새가 걸렸다. 어머니는 배에 관을 싣고 있었다. 배가 아산에 닿았을 때, 어머니는 배 안에서 당신 혼자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싣고 온 관 속에 누웠다. 나중에 들으니, 어머니의 시신은 가랑잎처럼 가벼웠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의 초상을 치를 수 없었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순천에 모실 때 가끔 찾아뵈면, 어머니는 아들을 어려워했고, 아들에게조차 내외를 했다. 어머니는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면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고 이부자리를 단정히 했다. 안아보면 어머니는 한 움큼이었다. 어머니의 몸에서는 오래된 아궁이의 냄새가 났다. 내가 안을 때, 어머니는 고개를 돌리며 수줍어했다.
-어서 가거라. 가서, 나라의 원수를 크게 갚아라.
내가 돌아갈 때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나는 차라리 어머니가 어리광을 부려주기를 바랐다. 두 달이 지났으니, 어머니는 땅 속에서 썩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취했다. 허리가 결리면서, 비가 내렸다. 차가운 늦가을 비였다. 어머니의 몸과, 피난민들의 노숙 자리에 내리는 비를 생각하면서 나는 자꾸 마셨다. 술은 비처럼 몸 안으로 스몄다. 아침에도 비는 멎지 않았다. 안주 없이 마신 술에 속이 쓰렸다. 빗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뒤채었다. 더 이상 떠돌아다니면서 확인할 것도 건질 것도 없었다.
그날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내 숙사로 찾아왔다. 그는 도원수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나에게 왔다. 그는 임금의 교서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교서를 내밀 때, 나는 그가 사약을 들고 온 의금부 도사가 아닌가 싶었다. 나는 마당으로 내려가 교서 두루마리에 절했다. 양호가 두루마리를 펼쳐서 큰 소리로 읽었다. 임금의 수사는 장려했다.

……왕은 이르노라. 어허, 국가가 의지할 바는 오직 수군뿐인데, 흉한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군사를 한 번 싸움에 모두 잃었으니 누가 바다 가까운 여러 고을을 지켜주리오. 한산을 이미 잃었으니 적들이 무엇을 꺼리리오……

칠천량 패전과 한산 통제영의 붕괴가 임금에게 보고된 모양이었다. 양호는 계속 읽어나갔다.

……지난번 그대의 벼슬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케 한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것이,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한 죄인에게 임금이 할 수 있는 소리인가.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나는 임금이 가여웠고, 임금이 무서웠다. 가여움과 무서움이 같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임금은 강한 신하의 힘으로 다른 강한 신하들을 죽여왔다. 양호는 계속 읽었다.

……이제 그대를 상복을 입은 채로 다시 기용하여 옛날같이 전라 좌수사 겸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그대는 부하를 어루만지고 도망간 자들을 불러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회복하고 요해지를 지켜 군의 위엄을 떨치게 하라. 그대는 힘쓸지어다. 군율을 범하는 자는 장졸을 막론하고 그대의 지휘로 처단하려니와, 그대가 나라 위해 몸을 잊고 나아감은 이미 다 겪어보아 아는 바이니 내 구태여 무슨 말을 길게 하리오……

내 끝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다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전라 좌수사였다. 나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 통제사였다. 내가 임금을 용서하거나 임금을 긍정할 수 있을는지는 나 자신에게도 불분명했다. 그러나 나의 무(武)는 임금이 손댈 수 없는 곳에 건설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건설은 소멸되기 위한 건설이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다는 나의 죄는 유죄가 되어도 하는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못대가리 하나 건질 것 없는 텅 빈 바다와 목 잘린 시체가 썩어가는 연안을 생각했다. 나는 먼 섬들에서 오르던 적의 봉화를 생각했고, 불타버린 한산 통제영을 생각했다. 물러설 자리 없는 자의 편안함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사지에서는 본래 살길이 없었다. 그러자 몸의 깊은 곳이 자꾸 뜨거워져 갔다. 성욕 같기도 하고, 배고픔 같기도 한 것이 자꾸만 내 속에서 끓어올랐다. 양호는 보따리를 풀어 지필묵을 꺼내놓고 동헌으로 물러갔다. 동헌에서 양호는 임금에게 가져다 바칠 나의 답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텅 빈 바다 위로 크고 무서운 것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각 사각 사각, 수평선 너머에서 무수한 적선들의 노 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환청은 점점 커지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환청을 떨쳐냈다. 식은땀이 흘렀고 오한에 몸이 떨렸다. 저녁 무렵까지 나는 혼자 앉아 있었다. 양호가 종을 보내 답신을 재촉했다. 나는 붓을 들어 장계를 써나갔다. 문장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런 의전상의 단어와 상투적인 어구를 끌어대며 장계를 지었다. 나는 장계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


서캐

우수영의 가을 물빛은 날카로웠다. 먼 산과 먼 섬들의 갈묏빛 능선이 도드라졌고, 바람의 서슬은 팽팽했다. 겨울이 다가오는 바다에서, 저녁마다 노을은 투명한 하늘 위로 멀리 퍼졌다. 적은 오지 않았다. 저녁 노을의 붉은 기운이 갑자기 검게 바뀌거나, 저무는 수평선 쪽에서 먼 섬들이 흔들려 보이면 비가 내렸다. 적은 몇 달째 오지 않았다. 먼바다 쪽에서 붉은 구름과 흰구름이 어지럽게 뒤엉키면 바람이 불었다. 망군들은 산꼭대기에서 일몰의 바다를 주시했다.
해남반도 끝에서, 이따금 적의 연기가 올랐다. 적의 척후가 진도 벽파진 앞바다에 나타나 나의 척후를 척후하였고 나의 척후가 적의 척후를 척후하였다. 해남, 강진, 여수와 그 너머 경상 해안 쪽으로도 망군과 척후를 보냈다. 더러는 배를 타고 갔고 더러는 육로로 갔다. 육로로 간 망군들은 적이 장악한 포구의 인근 산꼭대기에 올라가 적정을 염탐했다. 열흘 후부터 산발적인 보고가 도착했다. 첩보는 여러 읍진의 망군들을 통해 역송되어 왔다.
적은 분산되어 있었고, 여러 포구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적은 중심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첩보가 엇갈리기는 했지만 경상 해안 쪽의 적은 전라 해안 쪽으로 이동하면서 해남반도 남쪽 어란진 일대에 새로운 중심을 도모하는 듯했다. 어란진은 우수영에서 한나절 물길이었다. 밀물의 앞자락에 올라타면 반나절이면 족했다.
딱히 어란진이 아니더라도, 적이 우수영 쪽으로 다가오면서 새로운 포진을 도모하고 있음은 확실했다. 적이 경상 해안 쪽 여러 작은 중심들을 해체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망군과 척후들은 적에게 바싹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의 여러 중심들로부터 적의 군량과 화약은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 이동은 확실해 보였다. 첩보는 일치했다. 군량의 이동은 대공세의 조짐이었다. 적은 기나긴 항해를 예비하는 모양이었다. 적의 장기 항해란, 목포 앞바다를 돌아서 서해로 북상하다가 전라, 충청의 서해안에 상륙하거나 아니면 한강 물줄기를 따라서 서울을 겨누는 전략일 수도 있었다. 망군 두 명이 기한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생포되었거나 투항했다면 나의 빈손은 적에게 노출되었을 수도 있었다. 진도 벽파진 쪽 망군들은 언제나 먼바다 쪽으로 돌아서 있었고, 망군의 목측이 닿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적들은 오고 있었다.

정유년 늦가을에 나는 교서를 받들고 우수영에 부임했다. 우수영은 진도와 마주보는 해남 쪽 바닷가 언덕이었다.
내 기나긴 관등과 관직명처럼, 우수영은 이름뿐이었다. 수영이 버려졌던 시절에, 백성들의 초가집과 논밭이 수영 주변에 들어차서 끼니때마다 삭정이 타는 연기 속에 보리밥이 익는 비린 향기가 퍼졌고 양지바른 남쪽 언덕은 남루했으나 평화로워 보였다. 이따금씩 대열을 이탈한 적들이 섬의 연안을 집적거리기는 했으나, 물 건너 진도는 아직도 맑은 땅이었고 백성과 농토가 온전했다. 진도로 흘러들어온 피난민들은 섬의 서쪽 연안을 따라 움막을 짓고 모여 살았다. 원주민들이 피난민들에게 마을 앞 어장을 나누어주었고 묵은 밭을 내주었다. 피난민이 들어간 지역은 누런 땅이 어느새 푸르게 바뀌었다. 겨울에도 무, 배추, 대파가 새파랗게 들을 덮었다. 보름달이 뜨는 저녁이면 진도 여자들은 바닷가 언덕에 모여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춤추고 뛰고 노래했다. 우수영 쪽 여자들도 바닷가에서 둥글게 춤추면서 물 건너 진도 쪽 여자들에게 화답했다. 그 노래 소리는 수영 안까지 들렸다. 스스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생명이 모질고도 신기하게 느껴져, 칼 찬 나는 쑥스러웠다. 적들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우수영에서 내 군사는 120명이었고 내 전선은 12척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 위에 입각해야 할 사실이었다. 그것은 많거나 적은 것이 아니고 다만 사실일 뿐이었다. 다른 아무것도 없었고 그 밖에는 말할 것이 없었다. 수졸들은 내가 연안을 돌면서 한두 명씩 끌어모은 자들이거나 칠천량 패전에서 흩어졌던 자들을 불러모은 무리들이었다. 거제 현령 안위, 미로항 첨사 김응함, 녹도 만호 송여종, 경상 우수사 배설 들도 우수영 관하로 들어와 엎드려 있었다. 그들은 칠천량 패전 이후 임지와 작전 구역을 적에게 빼앗긴 지방 수령들이거나 수군 지휘관들이었다.
우수영에 부임하던 첫날, 장졸들을 수루에 모아놓고 교서에 절까지 했다. 지방 수령과 수사, 여러 읍진의 만호들은 누각 위에 앉았고 병졸들은 누각 아래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앉았다. 제주에서 보내온 소 3마리를 잡고 술 10말을 풀었다. 먼 읍진의 장졸들에게도 약간의 군량과 가축을 허락하여 먹게 했다. 내장과 선지를 수영 부근 백성들의 마을에 보냈다. 주린 장졸들은 걸신들린 듯이 먹어댔다. 군복을 제대로 걸친 자가 없었다. 그들은 다만 누린내 나는 음식에 껄떡거리는 피난민일 뿐이었다. 이미 멸망을 체험한 자들의 깊은 무기력이 고기 건더기를 넘기느라고 꿈틀거리는 그들의 목울대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국물을 넘기느라고 꿈틀거리는 그들의 목을 나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안위의 눈빛도 힘을 잃고 있었다. 안위는 내 시선을 피했다. 바다 쪽으로 돌린 그의 옆 얼굴은 광대뼈가 드러나 있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교서에 절하지 않았다. 배설은 심한 허리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배설은 수루 난간에 기대앉아서 이빨을 쑤셨다. 칠천량 전투 때, 배설은 원균의 휘하였다. 조선 수군의 일자진이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는 전선 10척과 수졸들을 포위망에서 빼내 진도로 물러섰다. 그 전선은 아직 나에게 인계되지 않고 있었다. 칠천량에서 물러설 때 그는 적들의 상륙이 임박한 한산 통제영에 불을 질렀다. 계사년 이후 내 통제영 본부 건물인 운주당도 그때 불타버렸다. 불탄 운주당 별실에서는 원균의 기생 12명이 그을린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나는 배설의 후퇴 경위를 조사하지 않았다.
-통제공, 무운을 비오.
숙배례가 끝나고 교서를 거둘 때, 배설은 그렇게 말했다. 배설의 말은 전쟁의 밖에서 전쟁의 안쪽으로 보내오는 덕담처럼 들렸다. 배설은 잇새에 낀 고기 찌꺼기를 혓바닥으로 털어내 뱉었다. 그때, 나는 어느 날 배설의 후퇴 경위와 한산 통제영 방화 경위를 조사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겨우 그의 덕담에 대답해 주었다.
-존망의 길에, 운세란 없는 것이오. 아시겠소? 배수사.
배설은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통제공, 용맹할 때는 용맹하고, 겁을 낼 때는 겁을 내는 것이 병가의 전략이라 알고 있소만…… 그게 바로 무운이라는 것 아니겠소.
(이 자식 봐라……)
내 몸의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흔들리면서 솟구쳤다. 나는 침을 삼켜서 그 뜨거운 것을 몸 속으로 밀어넣었다.
나는 물었다.
-그래, 지금은 그 어느 때요?
배설은 대답했다.
-허허, 그야 통제공께서 판단하실 일이 아니겠소. 저처럼 병든 몸이 어찌……
(이 자식 봐라……)
나는 물었다.
-칠천량에서는 마땅히 겁을 내야 할 때였소?
배설의 옆자리에서 안위의 얼굴은 얼어붙어 있었다. 배설은 대답했다.
-용맹과 겁은 흔히 같은 것이오. 다만 쓰일 때가 다를 뿐이오. 송장에 덮인 바다 위에서 목숨의 귀함을 깨닫는 것 또한 용맹이오. 용맹은 인(仁)에 가까운 것이오. 아시겠소? 통제공.
(베어야 하나?)
내 몸 속 깊은 곳에서 징징징 우는 칼의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아시겠소 통제공,에서 배설은 내 어법을 흉내내고 있었다.
배설은 또 말했다.
-그게 오묘한 일이오. 이거다 저거다 말하기 어려운 것이오. 그러니 병법 아니겠소.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것은 내가 빼돌린 전선과 수졸들뿐이오. 통제공께 다 드리리다. 그나마 통제공의 홍보이고 무운으로 아시오.
(베어야 한다……)
등판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그가 진도의 어느 갯가에 감추어둔 10척의 전선을 생각했다.
(아직은 아니다.)
내 속에서 우는 칼을 나는 달랬다. 칼은 좀처럼 달래지지 않았다. 마당에서는 오래 주려 기진한 장졸들이 몇 잔 술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날 밤 경상 우수사 배설은 탈영해서 도주했다. 아침에 보고를 받았다. 전날 숙배례가 끝나고 장졸들이 임지로 돌아갈 때 배설은 아픈 허리에 침을 맞아야겠으니 육지에 머물러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허락했다. 배설은 그 길로 달아났다. 아침에 그가 달아난 목포 쪽으로 군사를 보냈다. 배설은 이미 추격권을 벗어나 있었다. 배설은 잡히지 않았다. 군사들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진도에 군사를 풀어서 모든 연안 갯벌을 뒤졌다. 그가 감추어둔 전선 10척을 수습했다. 노가 몇 개 부러져 있을 뿐 배들은 온전했다. 총알자리도 그을린 자리도 없었다. 칠천량에서 배설은 전투 초기에 물러섰던 모양이다. 그날 배설은 잡히지 않았다. 도원수부에 서찰을 보내, 조선 팔도를 다 뒤져서라도 배설의 머리를 우수영으로 보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도원수는 알았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그날 밤, 내륙 깊숙한 곳 남원이 함락되었다. 조선 관민 4천과 명군 4천이 전멸되었고 살아남은 백성들은 흩어졌다. 남원을 무너뜨리고 나서 육지의 적들은 전주로 향했다. 밤새 바람이 불었고 새벽에 비가 내렸다. 배설을 잡지 못했다. 저녁 때 여종을 불러서 머리의 서캐를 잡게 했다.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배설을 잡지 못했다.


식은땀

성난 파도와도 같은 한없는 적의가 어떻게 적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작동되는 것인지, 나는 늘 알지 못했다. 적들은 오직 죽기 위하여 밀어닥치는 듯했다. 임진년에 나는 농사를 짓듯이, 고기를 잡듯이, 적을 죽였다. 적들은 밀물 때면 들이닥치는 파도와도 같았다. 적들이 멀리 물러간 밤에, 나는 때때로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생각했다. 나는 그를 본 적이 없었고, 그의 모습은 내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다. 생포된 적의 장수들을 주리 틀고 지져서, 히데요시에 관한 소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라는 일본 천하의 맹수가 다케다 신겐이라는 또다른 맹수의 진영을 모조리 죽이고 일본을 차지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의 칼에 죽었다. 그러자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정권의 수뇌부를 몰살하고 일본의 관백이 되었다고 했다. 일본 천하의 모든 창검과 총포와 군사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총집결했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있었는데 그 뜻은 무(武)를 천하에 펼쳐서 난세를 치세로 바꾼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천하포무 깃발을 인수했다. 히데요시는 스스로 천하인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그 천하포무는 조선과 명을 아울러서 가지런히 하는 것이며, 조선의 국토를 여러 봉토로 찢어서 일본 막부의 가신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히데요시의 전후 조선 경영 구상이라고 적장들은 실토했다.
히데요시는 그러하되, 물 위에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며 파도처럼 달려드는 그 무수한 적병들의 적의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죽음의 물결은 충이나 무라기보다는 광에 가까웠다. 때때로 내 지휘의 위치가 진의 후미일 때 내 부하들의 창검에 풀처럼 베어져나가는 적병들의 모습과 깨어진 적선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던 피의 물결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 죽음 너머에서 보고를 기다리고 있을 히데요시를 생각했다. 그때도 히데요시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 히데요시는 또 다른 길삼봉이었다. 알 수 없었고 벨 수 없었고 조준할 수 없었다. 벨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나는 다만 적의 종자를 박멸하려 했다.
임진년 바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박하게 내 몸을 조여오는 그 거대한 적의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나,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었다. 그것은 자명했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싸움이 끝나는 저녁 바다 위에서, 전의가 잠들고 살기가 빠져나간 함대는 비로서 기진했고 노을 헤치며 모항으로 돌아가는 항해 대열은 헐거웠다.
그 저녁에도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었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병신년에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되었을 때 나는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을 분명히 알았다. 그때 나는 한산 통제영에 부임해 있었지만 임금이 김덕령을 때려죽인 일의 전말은 바람처럼 전군에 퍼졌다. 군은 나직이 엎드렸다.
그해 봄에 충청도 부여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몽학은 객기 많고 담력 좋은 건달이었다. 그의 군사는 사노, 승려, 피난민을 끌어모은 7백이었고 그가 부여를 장악했을 때 그의 무리는 1만이 넘었다. 그는 처음 군사를 끌어모을 때 의병 행세를 했다. 그때 김덕령은 진주에서 도원수 권률의 막하에 있었다. 김덕령은 도원수의 명령에 따라 토벌군을 이끌고 진주에서 남원 운봉까지 나아갔다. 그가 부여로 입성하기 직전에 이몽학은 부하의 칼에 맞아 죽고 반란군은 흩어졌다. 김덕령은 하릴없이 군사를 거두어 진주로 돌아갔다. 서울로 압송되어 간 반란 연루자들은 김덕령을 공모자로 끌어들였다. 김덕령의 부여 진압이 늦어진 까닭은 그가 이몽학과 내통하고 운봉에서 일부러 지체했다는 혐의가 성립되어 갔다.
도원수 권률은 진주로 돌아온 김덕령을 체포해서 하옥했다. 권률은 김덕령의 혐의 내용을 수사하지 않은 채, 김덕령을 묶어서 서울로 보냈다. 그때 의병장 곽재우도 얽혀들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임금은 강한 신하를 두려워했다. 이몽학이 처음에 의병을 가장했으므로, 임금에게 의병이란 뒤숭숭한 무리들이었다. 김덕령은 의금부에서 한 달 동안 여섯 번 심문을 받았다. 부러진 정강이에 거듭 주리를 틀었다. 마지막에 그는 무릎으로 기어서 형리 앞에 나아갔다. 그는 조용했고, 그의 진술은 논리가 맞았다. 그때 임금은 말했다.
-저놈이 형장을 가벼이 여겨 오히려 태연하니 참으로 역적이다. 쳐 죽여라.
김덕령은 그렇게 죽었다. 임금의 사직은 끝없이 목숨을 요구하고 있었고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김덕령이 죽기 이태 전, 갑오년 가을에 나는 거제도에서 김덕령을 만난 적이 있었다. 김덕령은 진주에서 이겼고 담양에서 이겼다. 내가 보기에 그의 산발적인 승리는 전쟁의 국면을 전환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영남의 몇몇 고을을 온전히 지켜냈다. 거제도에서 만났을 때 김덕령의 풍모는 단아한 선비와도 같았다. 그의 담력과 기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때 김덕령의 육군은 섬의 안쪽 고지에 진 친 적의 주력을 해안 쪽으로 내몰았고 나는 잔문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바다로 몰려난 적들을 부수었다. 기다릴 때, 나는 포구에 묶인 적들의 배를 부수지 않았다. 적들은 그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다. 잔문포에서 적들은 가루처럼 부서져 흩어졌다. 김덕령을 잡아들일 때, 임금은
-덕령은 삼군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다. 누가 능히 이자를 묶을 수 있겠는가?
라면서 발을 굴렀다고 한다. 김덕령은 용맹했기 때문에 죽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사직의 제단은 날마다 피에 젖었다.
곽재우는 거듭된 심문 끝에 겨우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풀려난 그는 한동안 군사를 해산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은거하는 산이 구월산이라고도 했고 지리산이라고도 했다. 풍편에 그의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가 땅 위의 곡식과 채소를 일체 끊고 안개를 마시고 개울물을 퍼먹으며 연명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미 신선이 되어 날아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우수영 침소의 안쪽 벽에 나는 교서를 걸어놓았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대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렸다. 망궐례를 올릴 때 나는 교서에 절했다.

……전하, 전하의 적들이 전하를 뵙기를 고대하고 있나이다. 신은 결단코 전하의 적들을 전하에게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적들은 전하의 적이 아니라 신의 적인 까닭입니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교서 아래서 잠 깨는 새벽마다 어둠 속에서 오한이 났고 식은땀이 요를 적셨다. 종을 불러서 옷을 갈아입을 때, 포구에 묶어둔 배들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가 들렸다.


적의 기척

멀어서 보이지 않는 적의 기척이 내 몸에 느껴지는 날들이 있었다. 적들이 수런거리는 기척은 새벽의 식은땀이나 오한처럼 내 몸 속에서 살아 있는 징후였다. 우수영에서는 보이지 않는 적들이 더욱 확실했다.
명량 해협에서 물은 겨울 산속 짐승의 울음소리로 우우 울면서 몰려갔다. 물은 물을 밀쳐내면서 뒤채었다. 말 잔등처럼 출렁거리는 물결이 수로의 가운데를 빠르게 뚫고 나가면, 밀려난 물은 흰 거품으로 소용돌이치며 진도 쪽 해안 단애에 부딪혔다. 물이 운다고, 지방민들은 이 물목을 울돌목이라고 불렀다. 우수영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해남반도에서 목포 쪽으로 달려가던 북서해류는 돌연 거꾸로 방향을 바꾸어 남동쪽으로 몰려가는데, 해협은 하루에 네 차례씩 이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다.
물길이 거꾸로 돌아서는 사이사이마다 바다는 문득 기름처럼 고요해졌고, 그 고요한 잠시가 끝나면 물살은 다시 거꾸로 돌아섰다.
명량에서는 순류와 역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함대가 그 흐름에 올라탄다 하더라도 마침내 올라탄 것이 아니었다. 때가 이르러, 순류의 함대는 억류 속에 거꾸로 처박힌 것이었다. 명량에서는 순류 속에 역류가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적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여기는 사지였다. 수만 년을 거꾸로 뒤채이는 그 물살을 내려다보면서, 우수영 언덕에서 나는 생사와 존망의 흐름을 거꾸로 뒤집을 만한 한 줄기 역류가 내 몸 속의 먼 곳에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몸의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바람이었을까. 희미했지만, 그것은 확실했다. 내 몸이 그 희미한 역류를 증거하고 있었다. 그것이 삶에 대한 증거인지 죽음에 대한 증거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여기는 사지였다. 일출 무렵의 아침 바다에는 늘 숨을 곳이 없었다. 사지에서, 죽음은 명료했고, 그림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역류 속에서 삶 또한 명료했다. 사지에서, 삶과 죽음은 뒤엉커 부딪혔다. 그것은 순류도 아니었고 역류도 아니었다. 거기서 내가 죽음을 각오했던 것인지, 삶을 각오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그 모호함을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정유년 8월 말에 우수영을 떠나 물 건너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가벼운 이동이었다. 벽파진은 명량의 사지를 약간 비켜나서 등진 곳이었다. 벽파진과 해남반도 남단 사이에는 시각 장애물이 없었다. 나는 적이 울돌목의 사지로 들어와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전선 12척으로 적을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전략이었다 전략이라기보다는 그 이외에는 아무런 방책이 없었다. 나는 그 사지가 적에게 공지(空地)로 인식되기를 바랐다. 벽파진은 내가 적을 맞을 해역이 아니었다. 나는 12척뿐이었다. 벽파진 동쪽의 넓은 해역은 나만의 사지였고, 울돌목은 적과 나의 사지였다. 나는 죽기를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명량의 사지를 적에게 비워주고, 벽파진 쪽으로 적의 척후를 유도했다. 진을 옮긴 후 벽파진을 겨누는 적의 척후는 눈에 띄게 빈번해졌다. 적은 주력의 앞길을 예비하고 있었다. 적의 더듬이는 바쁘게 움직였다. 소규모의 산발적 야습으로 적들은 집적거렸다. 적들은 늘 달 없는 새벽에 왔다. 적들은 물 위에 비친 캄캄한 섬 그림자 속에 숨어서, 연안에 바싹 붙어서 이동했다. 잠든 함대를 깨워서 내보내면 적들은 더 이상 근접하지 않고 물러갔다. 그 너머에 복병이 있을 수 있었다.
-멀리 따라가지 말라. 다만 쫓아 보내라.
나는 출동하는 함대에게 일렀다. 적들의 야습은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일몰 후에는 망군을 촘촘히 배치했다. 망군들을 재울 수가 없었다. 야습의 목적은 교전이 아니라 탐색과 유인이었다. 그것들은 주력의 앞길을 평탄케 하려는 예민한 더듬이였고, 적의 더듬이는 벽파진 일대의 나루를 더듬거렸다. 울돌목의 사지는 비어 있었다.
내륙에서는 창녕, 합천, 웅치, 익산, 전주, 직산이 무너졌다. 육군은 한강 방어선까지 물러났다. 도원수부에서 오는 전령은 매일같이 전선 붕괴와 함락의 소식을 전했다. 추석이 지난 바다는 날마다 추워졌다. 다시 커져오는 달빛이 물 속 깊이 스몄다. 적은 밀물이 사나운 보름을 겨누어, 커져가는 달빛을 따라올 것이었다.
벽파나루는 물 건너 삼지원나루를 마주보고 있었다. 삼지원 포구마을 뒷산 옥매봉에서 연기가 올랐다. 임준영이었다. 임준영은 해남 달마산, 두륜산 일대에 박아놓은 척후장이었다. 달마산 꼭대기에서는 해남반도 남쪽 바닷가 적의 기지가 손살피처럼 내려다보였다. 임준영은 군관으로, 5며으이 척후병을 인솔하고 있었다. 그는 달마산 꼭대기에서 삼지원까지를 반나절에 달렸다.
-배를 보내라.
협선 한 척이 건너가서 임준영을 싣고 왔다. 나는 벽파나루 물가에서 임준영을 맞았다. 그는 농부 차림이었고 미투리 여러 켤레를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수루로 올라가자.
-아니올시다. 곧 임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적이 바삐 움직이고 있소이다.
나는 물가 갯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임준영의 보고를 들었다.
-적선 쉰 척이 어제 해남 어란진에 들어왔습니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았습니다. 멀고 또 물 아지랑이가 흔들려서 쉰 척인지 쉰다섯 척인지 확실치 않지만 쉰 척은 넘었습니다. 그제도 열 척이 들어왔습니다. 모두 경상 해안 쪽에서 왔습니다. 산을 내려가서 포구 쪽으로 바싹 다가갔습니다. 군량과 화약도 어란진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어란진에 모인 적선들은 부러진 노를 갈아끼우고 돛을 수리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적들은 군량을 배에 싣기 시작했습니다. 밤이면 적장들끼리 모여 사로잡힌 조선 여자들에게 풍악을 잡히고 놀았습니다. 조선 여자들은 조선 노래를 불렀는데, 경상도 노래도 불렀고 전라도 노래도 불렀습니다. 밤늦게 적장들은 조선 여자를 하나씩 끼고 선실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더욱 바싹 다가갔습니다. 새벽에 이 방 저 방으로 여자들이 바뀌었습니다. 어제는 적에게 생포되었다가 도망친 조선 선비를 달마산 중턱에서 만났습니다. 그 선비는 일본말을 알아들었습니다. 그가 적의 진중에 묶여 있을 때 적장들이 주고받는 말을 엿들었는데, 진도 쪽의 조선 수군은 불과 열두 척으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물길을 따라 서해로 올라가 한강으로 들어가서 서울을 도모하자고 저희들끼리 말했답니다. 적들은 말린 생선을 군것질처럼 씹고 다녔고, 아무데나 똥오줌을 누었습니다. 해남에 백성들은 자취도 없었습니다. 적들은 달아난 백성들의 집에 불을 질렀고, 백성의 어린 자식들을 붙잡아 나무에 묶어놓고 조총 연습을 했습니다.
임준영은 느리고도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나는 듣기만 했다.
-수고했다. 이제부터 하루에 한 번씩 매일 오너라. 네가 힘들면 너의 수하를 보내라. 적선들이 일제히 발진하는 날에는 동태를 감지한 즉시 미리 달려와서 보고하라. 유념해라.
임준영은 타고 왔던 배로 물을 건너갔다.
적의 전략 목표가 서울이라면, 적의 주력은 벽파진으로 오지 않고, 울돌목으로 올 것이었다. 적들은 물이 목포 쪽으로 몰려가는 북서 밀물의 시간에 밀물 위에 올라타서 명량을 빠져나갈 것이었다. 아마도, 밀물이 가장 거칠게 밀리는 보름 전후에, 적들은 올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보름 전후에, 적과 나의 사지에서 순류와 역류는 가장 거칠게 뒤채일 것이었다.
임준영은 벽파진에서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나는 갯바위 위에 앉아서 저무는 해남 쪽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밤을 새울 망군들이 제 초소로 나아갔다. 번을 마친 수졸들은 바위틈에서 저녁의 잔광을 쪼이며 옷을 벗어 서캐를 잡았다.
그날 밤, 나는 조정으로 보내는 장계를 썼다. 며칠 전 도원수부에서 전해온 임금의 유시에 대한 답신이었다. 그때, 임금은 수군이 외롭고 의지할 데 없으니 해전을 포기하고 장졸을 인솔해서 육지로 올라가 도원수부의 육군과 합치라는 것이었다. 나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지 며칠 후에 임금은 또 그런 유시를 내려보냈다. 임금은 적이 두려웠고, 그 적과 맞서는 수군 통제사가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임금의 싸움이었다. 그날 밤 달은 상현이었다. 보름까지는 며칠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벽파진 수영에서 나는 간단히 썼다. 통제사가 된 뒤 두 번째로 쓰는 장계였다.

……이제 수군을 폐하시면, 전하의 적들은 서해를 따라 충청 해안을 거쳐서 한강으로 들어가 전하에게로 갈 것이므로, 신은 멀리서 이것을 염려하는 바입니다. 수군이 비록 외롭다 하나 이제 신에게 오히려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온즉……

그리고 나는 한 줄을 더 써서 글을 마쳤다.

……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


일자진

정유년 9월 14일 밤에 임준영으로부터 두 번째 첩보가 도착했다. 바람이 잠들어 바다는 고요했고, 달은 보름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섬 그림자가 물에 비치어, 물과 하늘이 뒤바뀐 듯했다. 임준영은 직접 오지 않고 그 수하의 척후병을 보냈다. 강진의 토병으로 열일곱이라고 했다. 토병은 마당에 엎드려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민가의 창호지를 찢어낸 종이에 언문으로 급히 쓴 글씨였다.

……적정이 다급하여 사람을 대신 보냅니다. 오늘 산에서 내려가 적의 포구에 바싹 다가갔습니다. 이제 적의 배는 3백여 척인데, 대부분이 전선인 것 같았습니다. 닻에 녹이 슬지 않은 걸로 보아 일본에서 새로 만들어 끌고 온 배인 듯싶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적은 백성의 빈집을 돌며 장독을 몰아왔습니다. 적들은 장독에 물을 채워 배에 실었습니다. 적의 무리들이 갯가에 모여 대충 2백 명씩 패거리를 가르고 깃발을 세웠는데, 아마도 승선 대오를 갖추는 듯했습니다. 적들은 창검과 조총을 닦아서 모두 배에 실었습니다. 적에게 붙잡힌 조선 여자들은 30명쯤이었는데, 10명쯤은 묶어서 배에 태웠고 나머지는 갯가에서 목 베었습니다. 목을 벨 때 적의 병졸들이 둥그렇게 모여서 염불을 외는 듯도 했고 노래를 부르는 듯도 했는데, 똑똑히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다음 임무를 지시하여 주십시오. 바라옵기는, 이제 수하를 거두어 우수영으로 돌아가 본대에 가세하고 싶습니다. 저와 저의 수하들을 배에 태워 적의 앞으로 내보내 주십시오……

전령으로 온 토병 편에 임준영의 본대복귀 명령을 전했다. 밤에 온 토병은 벽파진에 머물지 못했다. 돌아가는 토병에게 쪄서 말린 쌀 두 되를 주었다.

-명량에서 적을 맞겠다. 우수영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기다리자. 오늘밤 전 함대는 발진

욕쟁이라이트의 꼬릿말입니다

칼의 노래 자네 무슨 방책이 없겠나
칼의 노래 자네 무슨 방책이 없겠나

암살단 두목: 
오유 아이디: 부엉이바위 
아이피: 211.234.***.137

다음 인물들 암살 처형해야 좃만민국이 대한민국 될수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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