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자가 평안함은 무슨

2009년 5월 6일, 수요일
<본문> 예레미야 12:1-17

 시편 1편은 의인들의 길이 형통할 것임을 노래합니다. 시편 1:3절 말씀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뒤이어서 악인들에 관하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1:4) 의인의 형통함과 악인의 망함이라는 주제로 기록된 시편 1편은, 그래서 지금까지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처음부터 듣기 거북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은혜로운 질문을 듣고 싶은데,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에게만 거북한 것이 아니라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듣기 불편한 질문을 하나님께 도전적으로 던집니다. 1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에게는 불경한 질문이요,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는 자에게는 반길 만한 질문입니다. 그러한 질문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예언자가 하나님의 정의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던지고 있는 겁니다. 그 결과 본문은 시편 1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연출 되고 있습니다. 영문 성경을 보면 ‘why'라는 의문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면서, 어찌 보면 하나님과 맞서있는 예언자의 심령이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표출됨으로써 모순된 진실이 드러납니다. 의인의 길이 아닌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는 것을 예레미야가 직접 보았기에 더욱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현실을 어찌 예레미야만 보았겠습니까? 반역한 자(배신자)가 다 평안한 것을 어찌 예레미야만 보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이기에, 하지만 감추고 싶은 현실이기에 예언자의 질문이 우리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더 나아가 예레미야는 악한 자들과 반역자들을 심은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감히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었기에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다고 도전합니다. 틀린 말이 아니기에 ‘은혜스러움’만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역정이 나는 진술입니다. 그런데 또 한술 더 떠 그 악한 자들과 반역자들이 다름 아닌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 있는 자들임을 밝혀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 입에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2절)
 이러한 도전적인 진술 후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떠한지를 고백하면서 악인들의 멸망을 구합니다.(2절) 그리 하면서 악인들을 구별해 줄 것을 간청합니다.(3절) 주목할 것은 의인들을 구별함은 구원과 관련한 ‘거룩’이지만 악인들을 구별함은 멸망과 관련한 ‘떼어 내어놓음’입니다. 이 악인들을 멸하지 않는다면 ‘땅의 슬픔’과 ‘풀들의 시듦’ 그리고 ‘짐승과 새들의 멸절’은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들과 반역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의인들과 완연히 다른 인식입니다. 하나님의 보심을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않느냐가 의인과 악인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예언자가 제기한 불편한 현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언자가 처한 현실은 장차 닥칠 현실과 비교하면 견주기에도 아까운 현실임을 말씀하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편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5절) 쉽게 말해 네가 지금 말하는 현실은 보행자와 경주하는 정도지만, 네가 장차 맞게 될 현실은 말과 경주해야 하는 처지라는 겁니다. 그 예언자에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도 하나님은 한 현실을 덧붙이십니다.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 너를 속이고, 너를 배반할 것이라는 현실입니다. 가족의 몰이해와 배신이야말로 인간관계에서 겪는 가장 큰 아픔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은 다 날 몰라주어도 가족만 날 이해해준다면 어디든 달려갈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인데. 하지만 예언자는 말과 경주해야 하는 자로 택함 받았습니다. 보행자가 아니라 말입니다. 하여 이 가혹한 현실을 하나님의 사람은 ‘주와 함께’ 달려야만 하는 현실로 이겨내야 하는 새로운 소명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도 여전히 악인의 형통과 반역자들의 평안이 목격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악인과 반역자를 차치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 속에서도 악인과 반역자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웬만해선 모든 것을 ‘은혜스러움’으로 해결하려 하지만 어느 순간 내면 깊은 곳에서 강렬한 질문이 터져 나옵니다.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그러나 인정하십시다. 그 현실이야말로 땅이 슬퍼하고 풀이 마르는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듯이 보행자와 경주하는 듯 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와 함께 경주해야 하는 맞상대는 ‘보행자’가 아니라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언자의 심령으로 주와 함께 달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심을 인식하지 않는 악인의 형통을 주목할 것이 아니라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신앙의 사람은 악인과 함께 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달리고 있는 새로운 현실을 보게 됩니다. 여기로부터 하나님의 회복이 강같이 황무지와 같은 이 땅을 적실 것입니다. 우리로부터 시작하여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진정한 회복입니다.(14-17절) 이것이야말로 ‘은혜스러움’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현실이 비록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현실을 부인하거나 회피하는 나약한 신앙을 내세우지 않기를 원합니다. 또한 ‘은혜스러움’이라는 이름하에 우리 자신들의 입은 주께 가깝게 하면서도 마음은 주님으로부터 먼 자의 길을 택하지도 않기를 원합니다.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습니까? 오직 주님으로 인하여 예언자의 심령과 담대한 영혼을 소유하게 하옵소서. 이로써 진정한 은혜 속에서 참된 회복을 묵묵히 실현하시는 하나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내가, 우리가 주와 함께 달려가겠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렘12장 강해설교 216,320 321 2009년 1월 28일

예레미야는 자신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살해음모를 알게 되었습니다.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면서 오랜 의문을 하나님께 털어놓습니다. 왜 악한 자가 형통하고 반역한자가 평안합니까?  '어떻게 악인들이 잘되고 번성할수 있습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지만 부조리한 현실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1)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하나님이 의롭다 하심은 흔들릴수 없는 사실이요,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엔데 왜 세상에는 그분의 의로움과 모순되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이해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해할수 없는 이런 현실에 대해 하나님께 묻습니다.(1)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신에게는 살해의 음모와 갖가지 핍박이 따르는 반면 자신을 죽이려는 악한 자들은 형통한 삶을 누리고 있는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1)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신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은 오히려 안전하다는 것이 과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능한 일인가'라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것입니다. 

악인의 형통과 번성이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면 가능할수 없다는 사실입니다.(2)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여기서 악인은 나무에 비유되고 있는데 그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크게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 나무를 심으셨기 때문아닙니까? 비록 그들이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제사를 드리면서 종교적 모양은 갖추었지만 실상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악인들인데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심고 또한 그들이 형통하게 성장하도록 허락하셨느냐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는 도무지 조화를 이루지 않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갈등과 의문이 아나돗 사람의 음모로 인해 예레미야의 갈등은 터져나온 것입니다.

이런 의문속에서도 선지자는 악인과 대조되는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께 고백합니다.(3) 3'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나뿐만 아니라 사람의 속마음을 다 알고 보시며 감찰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숨은 죄악을 다 살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이런 확신이 잇었기에 선지자는 지금 악인들로 인해 자신이 수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예비해두신 심판의 날에는 자신을 해치려는 악인들이 하나님의 법정에 끌려나가 심판받게 해달라고 탄원하고 있다.
악인의 형통은 잠간입니다.악인들의 성공에 번영에 부러워할필요도 없고 죄인들의 성공에 조급해 할 필요가 없다. 오직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주시는 은총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마 예레미야도 악한 자의 잘 사는 집을 본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형통하며, 속이고 배반하는 사람들이 천벌을 받지 않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웃고 있고 먹고 있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때에 예레미야의 마음에 울화가 터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조심스럽게 질문합니다. "지금까지 항상 하나님께서 맞으셨지만 그래도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왜 저 악당들이 잘 살고 있습니까?"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자기의 살은 먹다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죄는 사람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불행과 형벌을 초래합니다.죄는 심각한 불행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예)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결과를 보면  잘 알수 있다. 모든 인류에게 죽음의 형벌이 주어졋다.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주어지고 남자에게는 힘든 노동의 수고가 주어졌으며 그들 모두는 낙원에서 쫓겨나야 하였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실때의 아름다운 자연질서가 파괴되고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이 피조계의 생존원리가 되었으며 땅은 저주를 받아 전에 없던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죄는 엄청난 심각한 불행을 초래하는 것입니다.예)다윗왕 밧세바 여인과 간음한 사건으로 커다란 재난,화,어려움을 가져왔다.그의 인생이 승전가도를 달리라 그 범죄의 결과로 침륜의 구덩이에 빠져 반란과 재난,수치와 굴욕이 끊이지 않았다.집에는 칼이 떠날줄을 몰랐다.(삼하12:10)  진정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것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확신해야 합니다.(1) 그래야 우리의 삶도 확고히 설수 있습니다.예레미야는 부조리한 현상을 가지고 하나님과 변론하려고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게서 의로우시다는 사실만큼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의로우심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만약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의심하면 불의한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그들을 닮아갈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점점 침잠되어 죄악을 주도적으로 저지르는 자리까지 나아갈것입니다. 그리할 때 이 악한 세상가운데서도 흔들림없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한 삶 온전한 삶을 살게 될것입니다. 신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며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시145:17’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예)아삽의 시 시73: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17'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라고 했다.

또 악인들을 보며 한탄하고 슬퍼합니다.(4)4'언제까지 이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쉬운성경] 이 땅이 언제까지 신음하고 있어야 합니까? 온 들판의 풀이 언제까지 메말라 있어야 합니까?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이 죽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내려다보시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때까지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인간들의 죄악은 자연 만물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롬8: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니‘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
하나님은 앞서 제기된 선지자의 의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5) 대신 당시에 잘 알려진 격언으로 우회적인 답변을 하셨습니다.(5) 5'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며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 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물이 넘칠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이 격언이 의미하는 바는 고향사람들에 의한 핍박은 기껏 사람과 달리기 하는 정도에 불과 하지만 앞으로 닥쳐올 핍박은 마치 말과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비교될수 없을 만큼 엄청난 핍박이 예레미야의 앞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보행자와 함께 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그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할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말을 타고 달리는 장수의 뒤를 따를 수 없다. 아나돗 사람들의 핍박은 보행자와 함께 달리는 것에 지나치지 않습니다.예레미야의 앞에는 그와는 비교할수 없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그는 왕들로부터 매국노와 반역자라는 오해를 받아 거듭해서 생명이 위협을 느끼게 될것이며 바벨론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혀갈 위기와 고통을 당할것이므로 아나돗 사람들의 핍박정도는 가볍게 견녀대야 하였습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벧전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예레미야는 악한 사람들의 길을 보면서 그들의 형통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가 가야 하는 길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가 달려가야 할 경주가 그 앞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험하고 힘든 길이었지만 그 길은 악한 사람들의 겉으로의 형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길과 자신의 길을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길을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우리 자신의 길이 있습니다. 혹 그 길이 힘든 길일지 모르지만 그 길은 분명 영광의 길입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이라면 그 길은 분명 영광의 길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한가지 주의를 더 주었습니다.(6) 6'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그를 해하고자 하는 위협이나 핍박은 고향사람들뿐 아니라 심지어 친족 중에서도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위협과 박해는 뒤에서는 마치 죄인을 잡듯이 소리치며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좋은 말로 회유하는 것입니다. 강경책과 회유책을 모두 동원하여 에레미야의 사명 수행을 방해하려 할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같은 말씀을 주신 이유는 앞으로 갈길이 멀고 험하므로 이 정도 일로 실망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더욱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쳐있는 예레미야를 더욱 강하게 서도록 격려하고 계신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작은 시련만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작은 시련을 이겨내면 더 큰 시련을 주어 우리를 기어기 쓰러뜨리려고 합니다.우리는 이 시련을 모두 이겨내야 합니다.그래야함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사명을 다 감당하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하나님은 여러분이 시련을 만날 때 여러분들을 붙들사 강하게 하십니다. 작은 시련 큰 시련 모두 통과하도록 능력으로 붙들어주십니다.롬5: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고향사람들에 의한 핍박이 그냥 땅이라면 닥쳐올 핍박은 요단강이 불어나 넘쳐나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비교될수 없을 만큼 엄청난 핍박이 예레미야의 앞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고향 사람들인 아나돗 사람들에 의한 위협이나 핍박은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므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굳게 먹으라는 것입니다. 골1: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 유다가 대적에게 넘겨질것이라는 사실이 선포되고 있습니다.(7) 7'내가 내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내집 내산업,내마음의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지켜주시던 유다 백성들에 대한 다양한 표현입니다.하나님은 당신의 경고를 끝까지 무시한 유다백성들을 대적의 손에 넘겨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가장 가슴 아픈일이다.그의 백성이 그 앞에 범죄하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다.후련하고 개운한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고난받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처절한 슬픔과아픔을 느끼신다. 예)마치 부모가 자녀의 슬픔 자녀의 고통앞에 창자가 끊어질 듯 슬퍼하듯 하나님 역시도 자녀인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 당하는 것을 보시며 그와 같은 심정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범죄로 인하여 아파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의 십자가이다.정말 사랑하면 자신의 아픔보다 사랑하는 부모의 아픔,여인의 아픔을 더 슬퍼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왜 유다를 대적들의 손에 넘겨주었는지에 대해 말합니다.(8) 악인의 형통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8'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다.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데 대적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미움을 받아 대적들의 손에 넘겨진것입니다.

하나님의 미움을 받게 된 유다는 무자비한 대적들의 말발굽 아래 마구 짓밟히고 유린당하게 될것입니다.유다를 '무늬 있는 매'에 비유했습니다.(9) 9'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사나운 새들의 공격 표적이 된 이 무늬있는 새는 쪼임을 당하여 죽을 것이고 결국 들짐승들의 밥이 되고 말것입니다. 이처럼 유다는 맹금류 같은 바벨론의 공격으로 비참하게 멸망당하게 될것입니다.

포도원에 비유했습니다.(10) 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유다는 포도원,분깃,낙토에 비유되었습니다.많은 목자는(이방 여러나라들의 통치자들을 가리킴니다.)원래 유다는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보호를 받았던 아름다운 포도원이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 포도원을 하나님이 버리시자 이방의 악한 목자들이 쳐들어와 마구 훼파하고 유린하여 황무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무자비한 대적들의 손에 넘겨진 유다는 비참해집니다.(11-13) 11'그들이 이를 황페하게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땅이 황페함은 이를 마음에 두는자가 없음이로다.12' 파괴하는 자들이 광야의 모든 벗은 산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끝에서 저끝까지 삼키니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도다.13'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악을 행하는 자는 아무리 수고해도 수치 외에 아무 열매도 얻을수 없습니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보편적 진리이지만 항상 심은대로 거두는 것은 아니다.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그 뿌린 것이 자라도록 적당한 햇빛과 비,봄의 따사로움,여름의 더위,가을의 서늘함을 주실 때 가능한것입니다.만일 하나님께서 이를 거두어 가신다면 인간은 절대로 심은 대로 거두지 못합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에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감사할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싹을 티우지만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열방이 심판을 받습니다.(14) 심판의 도구를 꺽어버리시는 것입니다.(14) 14'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대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사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내리라.' 그들은 악한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는 징계는 있어도 영원한 멸망은 없습니다.삼상12:22‘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애3:31‘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고전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15'내가 그들을 뽑아 낸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단지 이스라엘 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이스라엘을 초월하여 모든 세상을 위한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것처럼 열방의 민족들에게도 구원의 길과 멸망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16-17) 16'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17'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의 대적들이라도 여호와 신앙을 갖게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구원의 소망을 가질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동일합니다. 어느 민족 누구라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갖는다면 구원을 얻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딤전1: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16’그러나 내가 긍휼함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다.예)십자가상의 강도(눅23:42)

악한 사람의 길과 우리의 길을 오늘 보이는 것만으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 나의 길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나의 길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갈 때 그 길이 영광의 길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길이 힘든 길이든 고난의 길이든 그 길을 묵묵히 감당하며 갈 때 그 길이 영광의 길입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