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재현과 역사의 재현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남산예술센터의 <명왕성에서>(박상현 작, 연출)에 대해서는 엇갈린 반응이 들린다. 우선 나 개인으로서는 어딘지 무척 불편한 공연이었다. 첫날 가서 본 탓인지 산만하고 조야하기도 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평하기도 한다. 역시 소재가 주는 힘이 있었다며 세월호를 이만큼 본격적으로 다룬 공연도 없지 않았느냐는 의견도 낸다. 공...

남산예술센터의 <명왕성에서>(박상현 작, 연출)에 대해서는 엇갈린 반응이 들린다. 우선 나 개인으로서는 어딘지 무척 불편한 공연이었다. 첫날 가서 본 탓인지 산만하고 조야하기도 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평하기도 한다. 역시 소재가 주는 힘이 있었다며 세월호를 이만큼 본격적으로 다룬 공연도 없지 않았느냐는 의견도 낸다. 공연이 좋았다, 안 좋았다는 평가 이전에, <명왕성에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늘의 연극계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지점을 수면 위로 띄워 올렸다. 이런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지점이란 “과연 ‘세월호’의 재현이 가능한가?”라는 무겁고 어려운 질문이며, 이 질문에는 “재현이란 무엇인가?”, “‘세월호’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제는 ‘세월호’를 재현할 수 있는가?” 와 같은 많은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결코 쉽게 답할 수는 없으나, 짚고 넘어갈 가치가 있는 질문들이다.

영화의 재현과 역사의 재현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현재도 진행 중인 ‘혜화동1번지’ 동인의 기획 ‘2019 세월호-제자리’가 말해주듯 그간 연극계는 ‘세월호’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왔다. 남산예술센터 역시 <그녀를 말해요>(2016)와 <이반검열>(2017)을 통해 신중하고 첨예한 윤리적, 연극 방법론적 모색을 통해 ‘세월호’에 다가갔다. 그런데 이번 <명왕성에서>의 경우는 작품 선정과 제작 단계에서부터 공연의 기본 관점에 관해 과거 어느 경우보다 많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로그램은 이례적으로 온통 ‘재현’과 관련된 고민과 갈등을 담고 있다. 한 예로 ‘작품소개’ 중 첫 문장을 보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문화예술계에서 ‘세월호’를 다룬 작품들은 많았으나 비유로써, 부분적 배경으로 쓰지 않고 ‘사건 그 자체와 그들의 시간’으로 쓴 작품은 거의 없었다. …희생된 망자들과 남겨진 이들을 위해 참사의, 그리고 그 후의 시공간에 더 가까이 다가갈 때가 되었다.(6쪽)

<명왕성에서>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보다 직접적이거나 본격적인 어떤 관점을 택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와 관련해 ‘프로덕션 노트’에서는 일종의 세대론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의 이 세계를 만든 세대들은 좀처럼 발언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발언했던 기억이 드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박상현 연출의 발화방식에서 의미를 찾았다. 온전히 책임지는 태도, 세월호를 직면하는 시도를 해보는 ‘용기’가 <명왕성에서>가 지닌 특별함이 될 수 있을 것이다.(27쪽)

가장 흥미로운 글은 ‘배우의 자리, 재현 불가능한 것의 언저리에서’라는 제목의 좌담회였는데 외부 연기자들과 이 공연에 참가했던 연기자들이 함께 자유롭게 얘기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김현아(무브먼트 당당)는 광화문 광장의 절규를 들은 이후 “이제 배우로서는 연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연기할 수 없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이 더 강렬하기에, 재현하지 않고, 드라마화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회고했다. 성수연(크리에이티브 바키)은 “관객을 구경꾼으로 만들지 않고 관객에게 닿을 수 있는 방식을 매번 고민한다”고 했다. 한편 이 공연에 참가했던 내부 연기자들은 이번 공연의 연기콘셉트에 관한 심각한 회의와 수행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공연 2주일 전에 진행된 이 좌담에서 그들은 “이번 공연에서는 이상하게도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고 과연 이것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더라”, “글쓰기나 연출방식에 완전히 동의할 수 있는지, 계속 질문을 품고 있으나 한 명의 배우로서 어디까지 의견을 말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배우로서 재현을 포기할 수는 없으나 스스로 그 인물인 척 하는 것은 거짓말 같다”는 식의 절실한 고충을 털어놓는다. 이에 관해 배우 이리(여기는 당연히 극장)는 “결국 공연 제작 방식에 대한 얘기이고 배우에게 책임이 더 많아지는 시대”라고 마무리했다.
이 좌담을 읽으면서 이런 고민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그 열린 분위기에 놀라면서도 이런 문제점이 공연 안에서 이미 해결되지 못하고 공연과 별개로 프로그램에 실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만큼 “‘세월호’의 재현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제작진과 특히 연기자들에게 절박했던 것이리라.
재현이란 무엇인가? 아쉽지만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오늘까지 많은 이론가가 자기 나름으로 재현이라는 개념을 해석했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 나름의 재현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해하기에 <시학>이래 사실주의자들에게까지 ‘재현(representation)’이란, 대상에 대한 그럼직한 모방(mimesis)을 뜻할 뿐 아니라 그 전제는 재현의 대상이 되는 세계와 그에 대응하는 허구적 세계의 총체성과 논리적 유기성, 감정이입과 동시에, 대상을 감상하기 위한 최소한의 거리감 등이라고 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재현적 연극을 대변하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이나 프로시니엄 아치도 이런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모두가 알고 있듯이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서구 예술에서는 더 이상 재현이 쉽지 않게 되었다. 본래 재현의 목적이 세계의 체계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의 세계는 설명과 이해가 불가능한 괴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인 클로드 란츠만은 아우슈비츠의 ‘재현 불가능함’을 토로했고, 철학자 리오타르는 탈근대의 예술은 ‘재현 불가능성’ 그 자체를 증거 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비록 본질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정서적, 정치적, 윤리적 충격이라는 점에서 세월호는 한국인들에게 아우슈비츠이며 9.11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그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힘든 엄청난 상실감과 무력감과 절대적 슬픔과 부끄러움이었다. 그랬기에 누가 방침을 정하지 않아도 연극인들은 차마 ‘세월호’에 관해 기존의 방식으로 인물과 이야기를 만들고 기존의 방식으로 연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목격자, 방관자, 가해자, 피해자였으며 슬픔과 분노는 당사자들과 함께 진행되었다. 참상의 실재 그 자체에 다가가거나 허구가 개입되지 않은 다큐멘터리나 버바텀 형식이 선호되었다. 이런 참사를 허용한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와 목격자의 무력감으로 괴로워했다. 그래서 차라리 소리치거나 노래했다. 혹은 아주 낮은 독백으로 일상의 상실감, 자책감, 허무감 속에서 언뜻 마주친 순간들을 속삭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재현을 완전히 배제한 연극은 극히 일부의 실험극 정도이다. 재현에는 아마 수백, 수천의 얼굴이 있을 것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지난달 ‘세월호’를 주소재로 그린 첫 번째 상업영화인 <생일>(2019)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는 한 유가족의 일상에 집중해 그 심리적 재현을 통해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물론 장르의 특성상 영화는 기본적으로 재현에 의존하며, 대중영화의 경우는 어느 정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연극의 경우는 보다 열려있다. 실제로 연극 <명왕성에서>는 기법상 사실적 재현 방식만을 따르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연극이 시선을 끄는 이유는 처음으로 ‘세월호’에 대해 본격적인, 전모(全貌)를 다루고자 하는, 그 나름의 총체적 재현을 시도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본다.

영화의 재현과 역사의 재현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명왕성에서>는 몇 가지 내용으로 나뉘는 11개 에피소드의 교차적 배열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전통적 재현 서사를 벗어났으면서도 각 에피소드는 부분적으로 재현적/비재현적 효과들에 기대고 있다. 첫 장면을 포함한 네 개의 에피소드는 희생자 학생들과 이들을 대변하는 두 명의 남녀 방송반 사회자를 그리고 있다. 이들은 이미 죽었으면서도 살아있고 처연하면서도 쾌활하다. 마치 <우리 읍내> 3막을 연상시키는 그런 생사시공을 초월한 연극놀이들을 통해 그들은 관객의 슬픔을 다시 불러오면서도 이승에 두고 온 부모와 친지들을 위로하는 초연한 상상적 존재로 그려진다. 진도항의 의경과 자원봉사자, 그리고 잠수사들의 처절한 경험담이 실린 3번째와 6번째 장면은 모든 국민들이 뉴스에서 눈이 닳도록 보고 또 보았던 장면들이다. 재현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재연’에 가까울 이 장면들은 아직도 재현/재연이 소환하는, 사실이 주는 울컥한 힘을 발휘한다.
한편 ‘세월호’의 총체적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정리하려는 작가-연출가의 의도는 5번째 장면부터 다소 서둘러 시작된다. 참사에 관한 교회 신도들 사이의 회의와 갈등을 그린 이 장면은 죽어가는 목사 앞에서 유가족 여인이 부활을 지킨 성경 속 여인들을 받아들이는 8번째 장면과 함께 이 공연이 죽음과 부활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희생된 학생들은 명왕성으로 짐작되는 아주 먼 우주로 떠나가며 가족들과 마지막 이별을 한다. 프로그램의 작품소개도 요약하고 있듯이 이처럼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명왕성에서>의 키워드는 참사의 재현과 기억, 이별하기,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생일>이 어떤 관점에서 긍정적 반응을 얻었듯이 이 연극의 어느 부분 역시 어떤 관객들을 애도와 치유와 화해로 이끌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또 다른 많은 관객이 느꼈을 어색하고 이상한 기분은 아마도 앞서 제기했던 “과연 ‘세월호’의 재현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그리고 “‘세월호’에 관해 재현적 연기가 가능한가?”라는 배우들의 고민으로 환원된다.
재현적 연기와 비재현적 연기의 차이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의 말과 몸을 매개로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에 관해 재현적 연기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배우들이 개별적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과도하고 잔인한 것 같다. 굳이 말한다면 <명왕성에서> 11개의 에피소드는 적어도 5~6가지의 서로 다른 연기적 정서와 감각과 표현을 요구하지만 대체로 재현적 성격의 연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 기본적으로 작가-연출가는 공연 전체의 틀을 설정해야 하며 공연 참여자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사전 합의를 이루어야 했다. 그러나 그 좌담회 이후 개막 전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작가/연출가-배우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 배우들의 이런 고민은 <명왕성에서>가 예술-개인-사회 사이의 문제들과 관련해 아직도 많은 자기모순과 균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본다.

영화의 재현과 역사의 재현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이제는 ‘세월호’의 재현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어떤가? 이제 5년이 흘러가고 있다. 이에 관해 작가-연출가의 태도는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못한 듯하다. 프로그램 작가의 글에서 박상현은 “…사건의 전모와 진면목을 아직 밝히지 않고 있으니 어찌 진실과 본질을 얘기할 수 있겠느냐?”면서도 “이 공연을 한다는 것, 그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하나의 작은 점이고 작은 획”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그는 ‘용기’를 내었다. 화해와 치유의 단계가 , ‘세월호’를 존재론적 성찰로 보편화할 수 있는 시점이 왔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유가족들의 마음은 감히 헤아리기 힘들다. 사회 한편에서는 이제는 그만 보내주자고, 남은 사람들끼리 화합해서 잘 살아가자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나는 실은 그리 정치 참여적 인간이 아니다. 아직 ‘안산순례길’도 안 가 본 게으른 방관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아직 멍이 남아있다. 세월호 생각을 하면 아직도 잠시 멍해진다. 그리고 세월호 팩트에 관련된 의문 이전에 이 나라 권력 기관들의 행태를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의 기본의식과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나 개인의 경우로는 세월호는 아직 재현의 그물망으로 포획되기 힘든 너무 커다란 그 무엇이다. 아직은 세월호를 ‘정리’해서 떠내 보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언젠가는 어떤 다양한 방식들의 재현, 혹은 ‘재-현(re-presentation)’이 점차 가능한 때가 올지 몰라도….
작가가 획득을 시도한 세계의 총체적 재현은 이 연극이 시도하는 종교적, 존재론적 성찰과 시적 정서에 의해 더 공고해진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학생들의 존재는 스러진 젊은 생명을 애통해 하는 데 있어 그 나름으로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개념과 함께 특정한 종교적 신념과 전언이 강하게 재현된 8번째 에피소드는, 개개인의 종교적 성향과 관계없이, 당혹스러웠다. 아직 ‘세월호’의 상처와 아픔을 종교로 ‘보편화’ 하기는 이르지 않을까? 삶과 죽음이 그들과 우리를 갈라놓았고 우리도 언제는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고 우주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고 해도 그들을 먼 우주로 사라지는 존재로 마무리하는 것 역시 좀 가볍거나 이르지 않을까? 최근 연극에서 ‘평행우주론’으로 위안을 삼거나 우주의 이미지로 끝나는 공연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마침 내가 공연을 본 날은 유가족들이 관극하러 온 날이었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 앉아 관극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족과 같은 장소에서 ‘그것’을 마주하고 떠올린다는 행위는 아직은 연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종류의 리츄얼에 더 가까웠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세월호는 아직은 전모가 정리되어 재현될 수 없는 어떤 ‘실재’이지 연극적 재현으로 거리를 두고 감상될 그 무엇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참사의 재현 /비재현 같은 추상적 개념과 직접 싸우지 않아도 좋은 작품은 할 수 있고,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술가들이, 그리고 관객들이 이런 미학적, 윤리적, 정치적 개념과 질문에 각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는 시대, 한국 연극은 원하든 원치 않든 이런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재현과 역사의 재현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시계방향으로) <메이데이>, <노동가>, <제르미날>, <궁립공단_무아실업> (사진제공: 국립극단)

국립극단은 작년에 이어서 ‘2019 연출의 판-작업진행중’ 기획으로 소극장 판에서 매 주말 네 편의 작품을 올렸다. 연극계와의 교감을 중시하는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젊은 연출가들이 제약 없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판’을 벌여준다는 취지다. 윤한솔 연출가가 이 기획의 예술감독을 맡았는데, 작년에는 ‘연극선언문’을, 올해는 ‘노동’이라는 주제 하에 완성된 결과물이라기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쇼케이스 스타일로 진행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대신 입장료가 없다). 의도는 정말 멋지게 들리지만 작년의 경우 작품들이 산만하고 평가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올해는 드라마투르기(이경미)를 투입하고 준비기간도 5개월 남짓 길게 잡은 탓인지 작년에 비해 작품이 고르고 완성도도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배려가 넘치는 이 기획에는 여전히 뭔지 어색한 구석이 남아있었다. 왠지 자연스럽고 자생적이지 못하며 기획된 전시품, 실험을 위한 실험 같은 느낌말이다.
<메이데이>(김민경 구성, 연출)는 몸동작과 밧줄을 활용해 거대한 배를 완성해 가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현실과 꿈과 이상을 보여준다. 스펙터클은 정교했고 흥미로웠지만 이들 노동자가 꿈꾸는 이상적 세계가 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보다는 연출이 아마도 스스로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그리고 노동의 재현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임을 강조하기 위해 무심하게 뻥 뚫어버린 시간과 공간과 배우 인터뷰가 재미있었다. 너무나 덥고 힘든 배우/노동자들은 판의 창문을 열고 메인 출입구를 통해 휴식을 위해 나가버린다. 관객들은 관극 태도를 유지한 채 노동이 잠시 사라진 빈 무대/공간를 약 십분 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노동가: 역사와 실재, 혹은 그 하염없는 실천을 향하여>(쯔카구치 토모 구성, 연출)는 시대별 노동가를 통해 노동과 노동운동의 역사를 요약한다. 예컨대 전반부에서는 군사독재 하에서의 저항적 노동운동을, 후반부에서는 IMF 이후의 신자유주의 하의 노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재치있는 연출과 배우들의 앙상블이 즐겁고 의미 있는 공연을 만들어냈으나, 노동과 노동운동의 긴 역사를 너무 단순화시켜 정리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제르미날>(에밀 졸라 원작, 백석현 연출)은 19세기 프랑스 탄광 파업 속의 한 가족과 주변인들을 그려냈다. 단순하면서 세련되고 힘 있는 공간 사용이 인상적이었으며 배우연기는 마치 메이어 홀드나 초기 강량원의 공연을 연상시킬 정도로 에너제틱 했다. <궁립공단_무아실업>(윤혜진 구성, 연출)은 공연기간 중 연출자가 실제로 회사를 설립하고 실제 노동자들을 모집해서 임금을 주고 노동을 시키면서 그 모습을 관객들에게 지켜보게 하면서 도중에 잠깐씩 관리팀과 인터넷 채팅도 가능하게 한다는 파격적 실험을 시도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본 날 실험의 결과는 허전했으며 “연극이 일종의 노동이라면, 노동은 연극으로 재정의 될 수 있을까(프로그램, 김상옥 글)”라는 질문에는 크게 못 미친 것 같다.
쇼케이스라고 했으나 오히려 대부분 완성도 면에서는 좋은 성과를 낸 편이다. 다만 전반적으로 너무 심각하고 관념적이라는 느낌이었다. 연출가들은 전공학자들도 어려울 노동의 일반적 정의를 내리기 위해 힘겨워하는 듯 했다. 노동은 우리의 현재적 삶과 밀착되었다기보다 거대담론이며 추상적 관념처럼 느껴졌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참혹한 죽음을 부르는 제도적 문제도 있지만 편의점 알바도 노동이다. 소비를 위한 노동의 악순환에 빠져든 노동도 있다. 그리고 연극은 어떤가? 어떤 의미의 노동인가? 이번 판에서 오히려 가장 살아있었고 흥미로웠던 점은 노동을 얘기하면서 연극하기도 ‘노동’이냐고 조심스럽게 자기질문을 제기해보는 부분들이었다. 오늘날 노동은 서둘러 관념화시키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얼굴로 다변화된 문제의식을 품고 우리 주변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명왕성에서

일자2019.5.15.(수) ~ 5.26(일)장소 남산예술센터작/연출박상현출연강봉성, 강연주, 김동휘, 김문식, 김은정, 김청순, 김솔, 백익남, 윤미경, 윤현길, 이동영, 이상홍, 이우현, 이은정, 이지원, 최지연, 최지현1, 최지현2, 최희진 드라마터그손원정 제작PD권연순 무대손호성 조명남경식 음악이율구 영상윤민철 의상고혜영 분장이동민 액팅코치강민재 움직임홍예원 조연출김예진, 이철용 무대진행문성복 홍보사진이강물 인쇄물디자인브랜드디렉터스 배리어프리버전 제작㈜사운드플렉스스튜디오 제작남산예술센터, 극단 코끼리맘보관련정보 http://www.nsac.or.kr/Home/Perf/PerfDetail.aspx?IdPerf=1196

2019 연출의 판 ― 작업진행중

장소 국립극단 소극장판

메이데이

일자 2019.4.19(금) ~ 4.21(일)작/연출김민경 출연양동탁, 이소희, 구자환, 김수민, 최경훈, 이태영, 정성진, 이정모 조연출김종우 무대감독박말순, 박기쁨 조명김윤희 무대김준환 음향최준환 의상신은혜 움직임강예린 음향오퍼레이터이도경*페이스북

노동가: 역사와 실재, 혹은 그 하염없는 실천을 향하여

일자2019.4.26(금) ~ 4.28(일)구성/연출 쯔카구치 토모출연 전정훈, 서정식, 김수정, 강민규, 조영민, 김보경, 문지홍, 강정한, 박은영, 김유림, Anupam Tripathi무대 Shine Od조명 이경은음향 류가혜

제르미날

일자2019.5.03(금) ~ 5.05(일)원작 에밀 졸라 연출/각색 백석현 출연 김계남, 김선권, 김지숙, 린다전, 최용진, 천효범 목소리출연 장덕주 드라마투르그·각색·음향오퍼레이터 홍예원리허설기록 김지현 무대 송성원 조명 손정은 음향 목소 음악 강예름 조명오퍼레이터 신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