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행복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신곡 15장 반주

  • 이렇게 행복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신곡 15장 반주
    [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외갓집 가는 길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장리석(張利錫, 1916~ ) 화백은 2016년 4월 백세(百歲)를 넘긴, 그러나 아직 화필을 잡는 당당한 현역이다. 평양에서 출생하여 상수보통학교 졸업, 1937~1939년 일본 다마가와(多摩川) 제국미술학교 수학, 귀국해 1940~1945년 평양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미술부장, 이때 조수로 있다 숨진 화가 최지원(崔志元, ?~1940)을 추모하여 그의 아호를 딴 ‘주호(珠壺)회’를 구성,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최영림(崔榮林, 1916~1985), 황유엽(黃瑜燁, 1916~2010),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박영선(朴泳善, 1910~1994), 윤중식(尹仲植, 1913~2012) 등과 5년간 동인전을 열어 평양 미술인의 자긍심을 높였다. 1950년 7월 북한 노동성에서 건립 중이던 금강산호텔 벽화 작업에 동원되어 평양을 떠난 뒤, 북진(北進)한 국군 원산 해군기지 사령부에 입대, 종군하게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1951년 1·4후퇴 때 제주도까지 내려가 4년 여 체류한 인연으로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1955년 제4회 국전에 이 특선되고, 1958년 제7회 국전에 이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화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1981년까지 서라벌예대, 수도여자사범대학, 중앙대학교에서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 구상회화의 산증인이 되었다. 주로 제주에 머무르며 서민들의 일상,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해녀 등을 독특한 색감으로 그리고 있다. 2005년에는 제주도에 그림 110여 점을 기증하여 2009년 개관한 제주도립미술관 내의 ‘장리석 기념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다. 2014년에는 전을 열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 속에는 두고 온 고향풍 경도 많이 있는데, 내가 보았던 겨울 풍경은 , , 세 작품이었다. 눈 내린 시골마을, 옹기종기 초가집도 보이고 밤나무 옆길로 엄마와 아기, 소년과 강아지 등이 눈길을 걸어가는 시정어린 그림으로 화가의 유년시절 외가 마을의 설경을 그린 것이다. 바람에 눈발이 날리듯, 노화백의 가슴에 묻혀 있던 아슴푸레한 기억들이 연작으로 화폭에 옮겨져, 보는 이들을 묻혔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한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적이 따뜻하게 해 준다. 이 작품 은 10여 년 전, 인사동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낙찰받은 작품이다. 창밖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 그림 아래 아내와 차를 끓이고, 가야금 산조를 들으며 깊은 감상에 젖곤 한다. 은 박용인(朴容仁, 1944~ ) 화가의 유럽 여행 중의 한 작품이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 1981~1983년 프랑스 몽파르나스의 아카데미 드 라그랑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Chaumière)에서 유학하고 국내 여러 미술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북한산, 제주도 등 곳곳의 풍경이나 와인, 과일, 꽃의 정물도 많이 그렸다. “남극과 북극을 빼고 전 세계를 여행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유럽에 자주 머물며 알프스의 마터호른,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같은 세계적 명산은 물론 고성(古城)들을 그렸다. 이 화가는 회화의 기법상 캔버스에 나이프를 주로 써서 유화물감을 바른다. 나이프를 쓰면 그림의 두께를 더하여 마티에르(matiere, 물감의 질감)가 무겁고 깊이 있게 보이고, 평면의 화면도 시각적으로 입체적인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미술시장에서, 외국 풍경을 그린 작품은 우리나라의 풍경을 그린 작품보다 다소 가격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경매에서 이 그림을 살 때에는 그 시작가가 높아 의외였다. “이 작가나 권옥연(權玉淵, 1923~2011) 화백 같은 경우, 외국 풍경이나 인물을 워낙 심도 있게 작품화하기 때문”이라는 경매 회사의 설명이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교외, 한적한 도로를 건너 왼편으로, 고색창연한 성당의 옆모습이 보인다. 후원에 나뭇잎을 채 떨어뜨리지 못한 나무에도 눈이 덮여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성당의 첨탑도 잿빛 하늘에 묻혀 희미하다. 지붕은 흰 눈으로 적요하다. 고목의 가로수 위에도, 풀밭에도 깊게 눈이 내려 사위가 고요에 휩싸였다. 그림을 보는 찰나, 아늑함과 경건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속세의 혼탁함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이 화폭에 질펀히 흐르고 있다. ‘잘 된 그림이 반드시 좋은 그림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으나, 이 작품은 아주 잘 된 그림이며, 동시에 좋은 그림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예술세계는 소재에 대한 친근감과 따뜻한 눈길이 와 닿는다. 거기에는 격정의 향수와 서정성 짙은 은유의 시어(詩語)로 잔잔한 감동이 다가온다. 정직, 성실한 자태와 순수함을 잃지 않는 작가적 심성이 화면 깊숙이 투영되고 있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화가는 “내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유럽풍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유럽에서는 동양적이라고 한다.”고 미소 짓는다. 사실 화가들은 설경(雪景) 그리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흰색이 다른 색에 묻히고 그 밋밋함이 화폭을 평이하게 이끌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도 화선지의 흰 여백을 그대로 두어 눈[雪]의 형상화가 어려움을 나타내곤 하였다. 눈 내리는 날은 마음이 설렌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노라면 마음도 경건해진다. 입속으로 가만히 어떤 바람이라도 읊조리고 싶고,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작은 오두막, 무쇠난로에 장작불을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한때를 회상해본다. 눈설레 속에서 정겨운 얼굴들이 하나둘 스쳐지나가고, 아르보 페르트(Arvo Pärt 작곡가, 1935~ )의 몇 곡을 듣다 보면 정화(淨化)된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드는 적멸감(寂滅感), 시공을 넘어 유년의 뜰로 이어진다. ‘외가’라는 낱말은 단순히 ‘어머니의 친정’ 이라는 뜻만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함축된 말이다. 외가는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고,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곳이며, 내 모든 투정이나 허물도 기꺼이 품어 주는 따뜻한 풀솜 속 같은 곳이다.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에게선 느껴볼 수 없는 자글자글한 정이, 외할머니 치마폭에서 피어난다. 김칫국물 얼룩진 저고리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아릿하다. 어머니의 어머니로 농축된 모정이 “아이고, 내 강아지” 한마디 속에 묻어난다. 진종일 눈사람을 만들다, 강아지와 뛰놀다, 눈이 그치면, 보랏빛 하늘 위에 연을 띄워 날리며 얼레에 대고 ‘우우우’ 입김을 뿜던, 그 아름답던 시절이여!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2016-12-20 11:30
  • 이렇게 행복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신곡 15장 반주
    [비로소 나를 돌보기 PART5] 美, 온전히 나를 위해 사는 사람들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쉽다. 오히려 나를 위해 사는 게 더 힘들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이제라도 시작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美베이비부머들의 ‘나를 사랑하는 길’을 들여다봤다. 정리 남진우 뉴욕주재기자 ◇ 작가, 캐런 마이잔 밀러 : 정원 가꾸기는 나의 천직 20년 전 나는 25분 단위로 수당이 책정되던 직업을 포기했다. 그때 40세였으나 완전 기진맥진했다. 동료들이 왜 그리 급하게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모험적인 인생 2막으로 과감히 뛰어들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새 남편과 함께 서부로 와서 유서는 깊지만 버려진 헐값의 집을 사는 데 저축한 돈을 몽땅 털어넣었다. L.A. 교외에 있는, 80년 전에 조성돼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반 에이커(약 2023㎡) 규모의 일본식 정원이 있는 집이었다. 악취가 나는 연못과 무성한 잡초와 산더미 같은 낙엽이 가득한 정원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상적인 곳이라는 확신이 섰다. 남편은 좋아하는 우주공학 관련 일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이사로 내 진로는 막혀버렸다. 1년간 이력서를 보내고 인터뷰를 하면서 허송세월했다. 학교로 돌아가야 하나? 교사나 간호사 자격증을 따야 하나? 시간을 현명하게 쓰고 싶었지만 언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될지 고민이었다. 공백이 길어지면서 대답은 분명해졌다. 바로 여기가 시작이란 것을. 수년간 땀내 나는 밀짚모자를 쓰고 낡은 바지를 입고 무릎 굽혀 작업을 하면서 그 생활을 좋아하게 된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경험이 없었지만 남는 시간에 머리를 비우고 해왔던 정원 가꾸기가 천직이었던 것이다. 정원 가꾸기로 하루가 가고 수년을 보내면서 이보다 값진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땅 지킴이로 인생 2막의 꽃을 피우고 있다. 정원의 시간에 맞춰 살아가다 보니 잡초가 연못과 오솔길로 나를 인도하고 가을에는 낙엽이 나를 호출한다. 노력해도 금전적인 보상은 없지만 정원은 가장 이상적인 일자리다. 고요하고 끈기 있고 믿음직하며 창조적인 일자리다. 내가 실수를 해도 그들 스스로 바로잡는다. 부족한 내가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아무도 내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 남편 혼자 버는 돈으로 살지만 적은 돈으로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많은 것을 탐하지 않으며 만족스럽고 행복한 결혼생활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정원에서 자라나는 것은 풀만이 아니다. 42세에 첫아기를 낳고 50세에 작가가 되었으며 선종 불교의 수련을 쌓아 그 결실도 얻었다. 계절의 느린 반복 속에 야망과 후회에서 벗어나 시간에 쫓기지 않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됐다. 환갑을 자축하면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준 정원에 감사하며 항상 정원에서 살아갈 작정이다. ◇ 배우, 린다 카터 : 스컬, 잔잔한 강물 위에서의 명상 스컬(좌우의 노를 한 사람이 젓는 가벼운 보트)은 배우기는 쉽지만 마스터하기는 매우 어렵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스포츠를 배우는 것 자체가 즐겁다. 워싱턴 DC의 포토맥 강은 공연 연습을 하는 데 이상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공연을 위한 신곡을 준비할 때면 스컬을 하면서 가사와 리듬을 내 몸속으로 완전 체화시킨다. 처음에 친구가 스컬을 권유했을 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포토맥 강을 따라 사이클링을 하다가 조정을 하는 모습에 끌려 요트클럽을 찾게 됐고 바로 좋아하게 됐다. 워싱턴 DC에 사는 사람이면 포토맥 강이 바로 옆에 있어서 쉽게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체단련에도 좋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강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을 것이다. 보트가 좁고 길어 균형 잡기가 힘들며 뒤집어지면 올라오기 어려운 것이 최악이다. 어느 날은 스컬을 하다가 자살한 여자 시체를 발견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때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가족들은 행방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별로 무섭지 않았고 장례식에 참석해 조사(弔辭)도 낭독했다. 스컬을 시작한 2008년부터는 공연을 위한 신곡 연습을 보트를 타면서 했다. 아이팟만 있으면 연습을 할 수 있다. 바람이 없는 잔잔한 강물 위로 노를 저을 때는 물과 혼연일체가 되고 명상에 빠지기도 한다. ◇ 여행작가, 키티 빈 얀세이 : 멕시코 산 미구엘에서의 일주일 나는 데킬라 술잔을 들고 예술가들의 멕시코 메카에서 오랜 친구들과 건배를 하고 있다. 나의 동반자 배리와 친구 론니, 제인과 함께 이국적인 꽃들이 활짝 핀 파티오와 벽난로가 있는 세 개의 마스터 스위트룸을 갖춘 기막힌 빌라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산 미구엘의 임대 방식이 다 그렇듯, 일주간 반나절씩 일하는 가사도우미도 있다. 구릉진 자갈 깔린 길로 10분 정도를 걸어 다채로운 색상의 집을 지나면 고딕양식의 파로키아 성당과 광장이 있는 도심에 도착한다. 현지 주민과 관광객들은 잘 정리된 월계수 아래 벤치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거나 무료로 와이파이를 이용한다. 낮에는 어린 학생들이 광장을 돌며 서로를 쫓아가기도 하고 저녁에는 연인들을 유혹하는 마리아치 세레나데가 흘러나온다. 나는 제인과 함께 노천시장에서 요가 수업과 쇼핑을 즐기고 부티크, 공방, 갤러리 등을 돌아본다. 식당에서는 채식주의자용 요리와 스시 그리고 군침 돌게 하는 멕시코 요리가 나온다. 예정된 일주일이 끝날 무렵 론니는 임대 아파트를 찾아 나섰고 나는 배리를 이끌고 부동산소개소로 갔다. 애틀랜타에서 만났던 한 여인이 산 미구엘은 마술의 소용돌이라고 묘사했는데 나는 왜 이제야 알았을까? ◇ 가수, 달린 러브 : 삶의 전부가 된 킥복싱 딸 로즈가 대단한 킥복싱 수업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미친 짓이라 생각했다. 킥복싱 동작을 배운 딸이 나와 몇몇 부인들에게 킥복싱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 후 6년이 지나 76세가 된 나에게 킥복싱은 삶의 전부가 됐다. 운동과 노래는 젊은 시절 가장 중요한 일상이었다. 나는 항상 무언가 활기찬 것을 원했고 아버지가 목사로 있었던 샌안토니오의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했다.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우리 합창단이 할리우드 볼에서 냇 킹 콜과 공연을 한 것은 위대한 순간이었다. L.A.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야구와 배구를 했다. 1958년에는 블로섬스 걸그룹에 합류했고 몇 년 후 필 스펙터와 계약을 하면서 ‘He’s a Rebel’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마침내 싱글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도 제인 폰다의 비디오를 보면서 운동을 계속했지만 너무 많은 당분을 먹어 체중이 자꾸 불었다. 먹으면 운동을 해야 하는데 나이가 들면 상황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킥복싱이 너무 힘들었지만 팔, 다리, 허리 등에 너무 좋았다. 남편이 딸의 교실에 데려다줬고 수업이 끝난 후 차를 탈 때는 눈썹 이외의 모든 곳이 쑤셨다. 그러나 점차 익숙해졌고 내 목표는 전보다 더 잘하는 것이었다. 지금 딸 교실의 수강생은 30명으로 늘었고 그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다. 그래서 수강생들은 “저 늙은이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곤 한다. 일주일에 5일, 오전 5시에서 한 시간 동안 킥복싱을 하지만 수업은 하루하루가 다르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다리 근육운동을 할 때는 서로 도와준다. 이제는 하나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서로 기합을 넣으면서 동료애를 느낀다. 몸매를 유지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도움이 된다. 특히 공연을 할 때 그렇다. 이제 나는 더 많은 에너지로 충만해졌고 15파운드나 빠졌다. 하지만 때로는 승용차에서 넘어지고 정크푸드를 먹기도 한다. 이럴 때 꿈을 되새긴다. 물과 비타민을 섭취하고 운동을 하러 간다. 우리 몸은 인생이다. 몸을 돌봐야 마음이 몸과 함께 작동한다. 무대에서 노래할 때처럼. 나는 내 느낌을 청중들도 느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한자리에서 노래하기보다는 청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한다.2016-12-05 11:30
  • 이렇게 행복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신곡 15장 반주
    현금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우리 사회에서 돈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다. 사회라는 몸을 지탱하는 것이 경제이고 돈은 이러한 경제의 혈관을 도는 혈액이라고 배웠는데 몸속의 혈액이 서서히 빠져나간다면 빈혈로 창백해져 언젠간 죽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상상을 해 보니 이걸 만약 영화로 만든다면 드라큘라에 버금가는 스릴 넘치는 호러 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실을 조금 과장되게 표현해 봤지만, 점차 현금이 지갑 속에서 사라지는 현상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발달하는 IT 기술 때문인데 극단적으로 동네 시장에 갈 때를 제외하면 지폐나 동전을 쓸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런 현실에 익숙해져 가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솥단지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익어가도 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돈은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를 확립한 일등공신이다. 고등학교 경제 시간에 배운 대로 인류가 물물교환 시대를 거쳐 가치를 담보하는 금과 은의 시대를 만들고, 나아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폐의 시대가 열림으로써 자본주의가 활짝 개화했다. 이런 자본주의의 꽃인 화폐가 마치 중생대 공룡처럼 지구 상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돈과 함께 살아오면서 만만치 않은 사연과 스토리를 만들어 왔다. 젊은 날 누런 월급봉투 속에 들어 있던 칼같이 빳빳한 지폐의 감촉을 잊을 수 없다. 침을 발라 한 장 한 장 세면서 우리는 미래의 꿈을 키웠다. 친정에서 돌아오는 어느 저녁나절 동구까지 따라 나오신 어머니가 손에 쥐어주던 축축한 만 원짜리 지폐는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그런 지폐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한 시대와 문명이 저물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으로 아이들에게 주는 용돈을 자녀의 계좌로 송금하며,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도 자동이체로 처리할 것이다. 이미 결혼식이나 장례식에는 계좌 이체 번호가 나돌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아마도 돼지 저금통에 ‘딸그락’ 하고 떨어지는 행복한 소리를 들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단지 하나의 문명이 가고 새로운 문명이 도래하는 데 따른 쓸쓸한 세기말적 감상이라면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차 한 잔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아직 IT와 친해지기 어려운 우리 세대에게 화폐의 몰락은 곧 삶의 혼란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스마트폰으로 척척 결제하는 세대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본다. 한국은행은 2020년까지 우선 ‘동전 없는 사회(Coinless Society)'를 만들기로 했고 그 후 차례로 고액권부터 줄여 가기로 방침을 세웠단다. 돈의 제작비용을 아끼고 투명한 사회로 만들어 가려면 바람직한 방향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 돈에 대한 따뜻한 향수를 차가운 IT기기로 바꾸기 어려운 세대에게 이런 상황은 분명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SF 공포영화로 다가올 듯하다.2016-12-02 10:41
  • 이렇게 행복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신곡 15장 반주
    [비로소 나를 돌보기 PART1] 자기다운 삶은 '비교급'이 아닌 '절대급'으로 사는 것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욘사마 열풍’이 한창이던 시절, 시청 앞 광장과 남대문시장 그리고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걷다 보면 배낭을 메고 지하철 지도를 손에 든 채 어설픈 한국어로 길을 묻는 중년의 일본 여성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이돌에 열광하는 10대도 아니고 40대를 훌쩍 넘은 중년 여성들이 왜 욘사마를 찾아 한국까지 왔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인 교수 덕분에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일본의 중년 여성들이야말로 한때는 입시지옥 아래 자식교육에 올인하기도 했고, 이젠 거품으로 끝나버린 부동산 버블의 주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저속 성장과 끝 모를 불황의 늪에 빠지자 ‘자식도 아니고 돈(부동산으로 대변되는)도 아니더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들 중년 여성이 ‘욘사마 열풍’을 주도하면서 의 자취를 찾아 한국 땅을 밟는 것이라는데, 정작 이들이 찾아 나선 건 욘사마가 아니라 를 보며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에 가슴 설레어하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자식 뒷바라지 하랴, 빠듯한 남편 월급으로 살림하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렸던 자신을 뒤늦게나마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일본 중년 여성들의 절실함이 왠지 남 이야기 같지 않다. 언젠가 고령화를 다룬 책을 읽다가 멋진 문장을 만나게 되었다. “부부 나이를 합해 100세가 되면 라이프스타일 이주(移住)를 준비하라. 결코 빠르지 않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호기심도 떨어지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도 감퇴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50대가 시작되면 인생 이모작을 시작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책 쓴 이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던 차에 정말 우연치 않게 주말이면 초보 농사꾼으로 변신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찾아왔다. 오래전 세종시 인근에 땅을 사두셨던 이모님께서 은퇴 후 이모부와 사별하고 귀농을 결심하시면서 ‘가족농장’을 시작한 덕분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쉰둘이었는데, 어느 새 햇수론 7년이 지났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농사라곤 대학교 1, 2학년 때 소양강 근처의 부귀리란 마을로 농촌 봉사활동 가서 콩밭의 풀 뽑았던 경험이 전부였던 내가, 겁도 없이 농사에 살짝 한 발을 걸쳐보았는데, 의외로 농사일이 적성(?)에 맞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살아 있는 생명을 다루는 데서 오는 기쁨이 남다른 것 같다. 농사 첫해엔 소나무 묘목을 심었는데 “나무는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크는 것”이라고 했던 마을 이장님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말 못하는 나무도 사람의 손길을 이토록 탄다는데, 하물며 사람 하나를 키우는 데는 얼마나 깊은 사랑과 남다른 정성이 필요한 것인지…. 소나무 키우기의 묘미는 가지치기라는 주변 이야기가 아니어도, 해마다 쳐내야 하는 잔가지와 굵은 가지들이 초보자의 눈에도 선명하게 들어온다. 전문가들이라면 수년 후의 나무 모양까지 정확히 머릿속에 그리며 과감히 가지치기를 하겠지만, 초보자 눈엔 어느 가지를 쳐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아 망설일 때가 잦다. 우리네 삶도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해야 크고 굵은 가지들이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갈 수 있으련만, 과한 욕심에 필요 없는 가지를 늘어뜨리고 이것도 저것도 포기 못 한 채 초라한 삶을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쓰잘데없는 상념도 잠시, 소나무 밭에 앉아 가지치기를 하고 있노라면, 잡념도 없어지고 머리도 맑아지는 것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농사 두 번째 해엔 2년생 블루베리를 심었다. 어릴 때는 생김새가 비슷해 품종을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조생종 패트리어트는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엉덩이 부분이 익었는지 판별이 어렵고 열매의 신맛이 강한 대신, 가을 단풍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빨강 빛으로 물이 든다. 중만생종인 토로는 넓적한 이파리에 가지 또한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가는데 열매의 끝 맛에 달달함이 오래도록 남는 것이 일품이다. 만생종 넬슨은 유선형의 날렵한 잎에 큰 키를 자랑하는데 시큰한 맛과 달콤한 맛의 조화가 매력적이고 탱탱한 식감도 훌륭하다. 예전에 대학 은사님께서는 “인생은 혼자 뛰는 마라톤이다. 비교급으로 살지 말고 절대급으로 살아라’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사노라면 항상 나보다 잘난 사람들 때문에 주눅 들고 상대적 박탈감에 좌절하면서 스스로를 초라하게 몰아가기도 한다. 꽃이든 열매이든 자연 속에선 아무도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데 말이다.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어쩌다 농사가 잘되면 3년을 고생하고 한 해 농사를 망치면 3년이 편안하다’라고 한마디 툭 던지고 가신다. 왜 농사를 망쳤을까. 두루두루 이유를 찾다 보면 배수도 챙기고 거름도 제때 주고 풀 관리도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연한 행운보다는 노력이 더욱 값진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주옥같은 말씀이다. 얼마 전 카톡방에 유튜브 동영상이 전달되었다. 열어보니 미국의 대학 강의실인 듯했는데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유리병을 채우는 실험이었는데 먼저 조약돌로 유리병을 가득 채우도록 했다. 다음은 작은 자갈을 가득 넣도록 했다. 그다음엔 모래를 살살 뿌려 유리병을 채우도록 했다. 마지막엔 물을 가득 붓도록 했다. 실험을 끝내며 교수님 왈, “여러분, 만일 순서를 바꾸어 물부터 부으면 유리병 속에 모래와 자갈과 조약돌을 넣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네 인생길에서 조약돌과 자갈 그리고 모래와 물이 무엇일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조약돌이야말로 평소엔 잊고 사는 삶의 의미, 삶 속에서 이루고자 했던 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가치 등이 아닐까.2016-11-23 11:18
  • 이렇게 행복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신곡 15장 반주
    [11월의 산책] 역사와 자연,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도심 속 산책‘걷기’는 격한 운동이 부담스러운 중·장년에게 알맞은 운동 방법 중 하나다. 걷기를 생활화하는 이들을 보면 지하철이나 버스 두세 정거장 정도 거리를 걸으며 건강을 챙긴다. 대중교통 노선을 따라가면 대개 평지를 걷게 되지만, ‘서리풀공원’ 산책로를 이용하면 맑은 공기를 쐬며 서초구의 중심을 가로지를 수 있다. 서초동(瑞草洞)은 과거 서리풀(벼)이 무성했다 하여 붙여진 동명(洞名)이다. ‘서리풀공원’은 2호선 방배역에서 서울고속터미널(강남)까지 서초구 중심을 가로지르는 산지형 공원으로 걷기에 부담 없고 볼거리가 많아 남녀노소에게 두루 권할 만하다. 방배역 4번 출구로 나와 청권사 돌담길을 따라 돌면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 시작해 청권사쉼터, 서리풀다리, 몽마르뜨공원, 누에다리를 거치면 1시간 30분 내외로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약 3km 거리). 시간이 넉넉하다면 꽃과 나무를 구경하거나 할머니·할아버지 쉼터, 맨발로 걷는 길(황톳길) 등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1. 청권사(淸權祠, 효령대군 이보 묘역) 조선 제3대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제4대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과 그의 부인인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묘소가 있다. 입구(외삼문)로 들어서면 마당 왼편의 작은 연못이 눈에 띈다. 조금 더 걸어가면 1902년에 제작한 효령대군의 신도비를 찾을 수 있다. 입구 오른편으로 난 작은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묘소를 기점으로 한 바퀴 돌면 짧게나마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평일 10~16시 무료 개방) 2. 서리풀공원·서리풀다리 서리풀공원 내의 서리풀다리는 도로로 단절된 산책로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북쪽으로는 한강을, 남쪽으로는 우면산을 이어주는 짧은 다리다. 서리풀다리를 기점으로 방배역 방향으로는 공기가 맑은 서리풀공원 산책로를 즐길 수 있고, 고속터미널 방향으로는 몽마르뜨공원과 누에다리를 만날 수 있다. 경사가 높지 않은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 점이 이곳만의 특징이다. 길이 넓고, 쉴 수 있는 의자와 쉼터가 곳곳에 있어 어린 손주와 함께 걷기에도 무리 없다. 3. 몽마르뜨공원 프랑스인이 많이 거주하는 서래마을 진입로를 ‘몽마르뜨길’이라 부르는데, 그 인근에 자리 잡게 되면서 ‘몽마르뜨공원’이 됐다. 원래는 아카시아나무가 우거진 야산이었는데, 지난 2000년 지역 배수지 공사를 시행하면서 주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넓은 잔디밭을 둘러보다 보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토끼를 발견할 수 있다. 귀여운 토끼를 보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4. 누에다리 누에다리는 낮보다는 해가 진 이후에 찾아갈 것을 권한다. 다리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꽤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몽마르뜨공원에서 나와 누에다리 왼쪽을 바라보면 조명으로 반짝이는 남산서울타워가 보인다. 같은 위치에서 왼쪽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이, 오른쪽으로는 서울성모병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리 아래 도로로 시선을 옮기면 자동차 전조등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2016-11-03 14:56
  • 이렇게 행복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신곡 15장 반주
    [박원식이 만난 귀촌(귀티나는 촌사람)] 노년의 부부는가급적 산골 외딴집에 살아야글 박원식 소설가 대전에서 은행원으로 살았던 홍성규씨(75)가 명퇴 뒤 귀촌을 서둘렀던 건 도시생활에 멀미를 느껴서다. 그는 술과 향락이 있는 도회의 풍습에 착실히 부응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지럽고 진부한 일상의 난리블루스,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돼 있는 게 삶이라는 행사이지 않던가. 그러나 문득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색을 하고 화드득 나를 돌아보는 순간이 찾아오는 법. 홍성규씨는 그렇게 소스라치듯 자신과 독대한 뒤 곧바로 산골로 들어가기로 했다. 대담하고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반백년 이상을 살았던 도시생활을 일거에 청산한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금강이 굽이치는 산발치에 터를 잡은 홍씨는 아내 박명자씨(70)의 손을 슬며시 잡아 유혹처럼 이끌었다. 처음에 아내의 반응은 미미하다 못해 썰렁했다. 난 싫소, 당신 혼자 잘해보시구려! 강과 산이 얼싸안고 춤을 추는 경관이야 기차게 삼삼했지만, 스러져가는 폐가와 길길이 웃자란 잡초들만 무성한 묵정밭으로 이루어진 터전에 아내는 초장부터 정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뱀이 대가리를 쳐들고 튀어나올 것처럼 뒤숭숭한 쑥대밭 앞에서 단박에 우아한 감흥을 느낄 여자란 세상에 없다. 홍성규씨는 기함을 치고 앵돌아진 아내를 거듭 꼬드겨 답사를 반복했다. 마침내 부부는 귀촌에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 드나드는 사이, 아내 역시 외진 호젓함과 빼어난 풍치에 마음을 열었던 것. 20여 년 전, 귀촌의 시동은 그렇게 걸렸다. 풍경을 볼까. 산과 강이 긴박한 교제를 한다. 산은 제 늠름한 하체를 강에 들이밀었고, 강은 수줍은 듯 살포시 온몸으로 산을 받아들인다. 이 소리 없는 통정과 협연을 관람하는 건 능선마루에 늘어서서 관음증에 취한 수목들이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후끈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염탐하겠다는 양, 수면 위 허공으로는 연신 물새들이 선회한다. 밤이면 별들이 모여 수군거리겠지. 달빛은 요요히 쏟아져 산을 흘러 강물로 스며들겠지. 홍성규씨는 시를 짓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니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을 게다. 알아주는 이가 많은 수묵 화가인 아내에게도 역시 이하동문이렷다. 풍경이 수려하다지만 풍경만 뜯어먹고 살 수 없는 게 생활이라는 난적이다. 유유히 음풍농월을 즐기며 참하게 찻잔이나 기울이면 그만일 것 같지만, 철따라 피고 지는 꽃들의 마술에서 시를 건져 올리고 그림을 길어 올리면 그만일 성싶지만, 그러나 널리 알려졌듯이 삶이란 고달픈 나그네 길이라서 고난을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홍성규씨 내외는 거하게 손에 움켜쥔 것도 없는 채로 산골에 입장했다. 산골이 주는 고립감과 권태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리라. 홍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가령,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데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귀촌하면 안 됩니다. 정서가 맞질 않으니까. 그 무엇보다, 그저 편안하게 살 궁리만 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시골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싹 비우고 갖가지 고생을 할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죠. 산골의 적막이나 고독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부부도 초기엔 생각이 마구 왔다 갔다 했어요. 마치 향수처럼 도시 생각을 하곤 했는데, 우리가 지금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러고 사나? 하는 회의가 없지 않았어요. 3년쯤 지나고 나자 비로소 만족감이 찾아듭디다.” 강물에 자동차가 떠내려가기도 “강철 같은 기세로 올라오는 풀들을 해치우는 일은 거의 전쟁이라죠? 선생의 거처 면적은 자그마치 2000평이에요. 이 너른 터를 간수하는 일부터가 벅차겠어요. 노년에 적당히 살기로는 터를 작게 잡을수록 이상적이라는 충고들이 많던데, 이건 믿을 만한 정보일까요?” “연로한 분들의 경우엔 무리해서 너른 터를 잡지 말아야겠죠. 하지만 300평 이상은 돼야 뭐든 마음먹은 대로 활개를 쳐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하튼 온갖 노동과 정성을 쏟아야 기반이 잡히는 게 산골 살림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둘러보고 거참 근사하다고들 하지만, 구석구석 비지땀을 쏟은 현장이라는 걸 알진 못해요. 물론 시골에서의 건강한 노동은 커다란 성취감을 줍니다. 모든 주변 사물과 정들게 되고요.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들듯이….” “과도한 노동으로 골병이 들거나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더군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창밖으로 보이는 저 돌담장은 3년에 걸쳐 쌓았어요. 돌담을 쌓다 보니 재미가 생겨 봄가을로 열심히 돌을 주워다 쌓아올린 것인데 3년이나 걸렸어요. 그 와중에 병을 얻기도 했지만, 햐, 완성을 하고 나서는 얼마나 좋던지…. 마치 영화 한 편을 만든 감독처럼 신나더라고요. 골병은 피해야겠지만, 하나하나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크기에 시골살이를 애호할 수밖에 없어요.” 강의 이름은 올목강이다. 강굽이 형세가 오리의 목을 닮아 ‘올목강’이라 부른다. 이 강엔 교각이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부어 납작하게 가설한 잠수교가 걸려 있다. 이 옹색한 다리나마 없었던 시절엔 배로 강을 건넜다. 폭우가 쏟아지면 잠수교는 순식간에 물에 잠긴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갇힐 수밖에. 장마철이나 봄가을의 폭우 때는 여러 날씩 외부와 고립된다. “별안간 고립될 가능성에 대비해 음식이나 가축 사료를 늘 충분히 비축해둡니다. 한번은 새벽에 잠이 깨어 나가보니 마당까지 물이 차올라 아예 싯누런 바다로 변했더라고요(웃음). 세상에 물 구경, 불 구경처럼 신나는 게 없다지만 기가 막힙디다. 우당탕탕 굽이치는 물살에 아름드리 통나무며, 컨테이너 박스며, 자동차며, 뭐든 막 떠내려가더라고요. 그 난리 통에 강 저편에 세워뒀던 우리 승용차도 떠내려갔어요. 졸지에 차를 잃어버렸지만, 차보다 정말 아까웠던 건 마당의 컨테이너 박스에 보관했던 집사람의 그림이었어요. 모조리 물에 잠겨버렸죠.” 아내 박명자씨는 그림 그리기를 밥 먹듯이 해온 인물이다. 무채색 먹의 농담(濃淡)으로 사물을 표현한다. 세필을 활용한 정교한 사생보다 일필휘지, 대담하고 호방한 작풍을 구사한다. 그림만 봐서는 여자의 작품이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활달하고 후련하다. 남편의 눈에는 이런 아내의 작품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명품이다. 그런 판국에 수해를 입어 그림들이 모두 물속 용궁 나들이를 했으니 상심이 컸을 게다. 수려한 강변에 사는 가혹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런 변을 겪을 때면 귀촌이 후회될 성싶지만, 아서라, 홍씨는 수해이든 수난이든 자연의 형제로 살아가기로 작정을 한 자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수련이거나 단련의 계기로 받아넘기는 낌새다. 정든 오누이처럼 홍성규씨는 이라는 시집을 낸 바가 있다. 염염한 로맨틱이 비치는 제목이지만, 그의 적성은 자연과 사교하는 쪽으로 사뭇 발육했다. 이를테면 그는, 산골에서 꽃향기가 천지간에 가득하면 황홀해져 춤추고 싶어 하고, 비바람에 갈피없이 흔들리는 꽃들의 비통한 몸부림에도 섬세하게 가슴이 닿아 시적 충동을 느끼는 개성의 소유자로 보인다. 일찍이 세간에 횡행하는 욕망이나 허영은 대충 놔버렸기에 간소하게 먹고도 뿌듯하게 자족하는 생리가 몸에 익었다. “시골에선 도시에 비할 때 생활비 지출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습디다. 한 달에 150만원이면 뒤집어쓰고도 남을 지경이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는 70만원 남짓으로도 까딱없어요.” “텃밭에 키우는 작물들로 충분히 자급자족이 되겠죠? 닭들은 마구 알을 낳을 테고.” “불필요한 외출을 즐거이 자제하며 살기 때문에, 거처 내부에서 사는 재미를 쏠쏠히 느끼기에,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많죠. 승용차 대신 작은 트럭을 굴려 유지비를 절감하고, 가끔 먼 곳을 여행할 경우엔 대중교통을 이용해 검소한 살림을 운영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역시나 돈 문제로 충돌하게 마련인 동물입디다. 때론 아내와 토닥거리기도 하는데 그게 주로 금전 문제 때문이었어요. 끙.” “금전의 여유가 있으면 덜 싸우게 될까요?” “부자들은 돈 때문에 더 치열하게 싸우지 않습디까(웃음)?” “도무지 싸우지 않고,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어엿하게 살 수 없는 게 원래 인간일까요?” “저 고고한 하늘에도 가끔은 번개가 치지 않나요?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산다는 건 맹물 마시고 술 취하려는 것처럼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충돌과 마찰 속에서 부부 사이가 더 단단해지는 법이거든요. 우리 내외가 말이죠, 도시에 살 때는 불행하게도 부부싸움을 할 기회가 없었어요. 나는 툭하면 밖으로 나돌아 다녔고, 아내는 아내대로 스케치니 전시회니 하면서 며칠씩 나가 살고 그랬거든요. 모든 시간을 같이 붙어살게 된 귀촌 이후엔 싹 달라졌어요. 자못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부부싸움을 전개해서 진정한 친선을 도모하게 되었으니까요. 이거 쾌거 아닌가요(웃음)?” “앗! 부부싸움도 창의적 예술이라는 말씀?” “집식구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요리사입니다. 뭐 제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뜻이죠. 대충대충 사는 저에 비해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꼼꼼한 여자라는 점도 아주 매력이죠. 그러나 단점이라면 예민하다는 점이에요. 전엔 송곳이었다면 지금은 부지깽이처럼 좀 무뎌졌지만, 아무튼 이런 아내에게 제가 그림 비평을 인정사정없이 해대곤 했어요. 그러니 다툼이 없었을 리가. 오해는 마시라. 다툼의 날들은 이젠 추억의 잔영으로 남았을 뿐이니까(웃음).” 느티나무를 맨손으로 뽑을 천하장사가 있던가. 불화와 앙앙불락이 없는 부부가 있던가. 홍성규씨의 언설은 자주 아내와의 역사를 술회하는 쪽으로 번진다. 20년 세월을 산골에 살며 그는 자연과 교감하는 도락을 만끽해왔다. 일상의 근로로, 절간의 중들이 비운 발우와도 같은 허심(虛心)의 내공으로, 또는 우슬(牛膝, 일명 쇠물팍)이니 쇠비름 같은 산야초를 장복한 건강생활로, 그는 인생의 저물녘을 훈훈하게 통과하고 있다. 그러고서도 한결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아내라는 고백을 차마 참지 못하고 토설한다. “아내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을 때면 대통령에게 표창장을 받은 것보다 기쁩디다. 그런 아내가 강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은 또 얼마나 행복한지…. 노년의 부부란 말이죠, 가급적 산골 외딴집에 살아야 합니다.” 졸혼(卒婚)이라는 요상한 잠정적 결탁이 예찬되기도 하는 이 부박한 세상. 그러나 강변에 사는 내외는 정든 오누이처럼 단란하게 어깨를 겯고 산골의 나날을 동행한다. 이는 아마도, 귀촌이 아니었다면 도달하기 어려운 비경이렷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2016-10-27 09:21
  • 이렇게 행복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신곡 15장 반주
    [올댓연금] 국민연금 수급 연령에 얽힌 인간의 욕망 손성동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전 세계적으로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 기준은 65세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은 1988년 도입 당시에는 60세였다가 1998년 연금개혁조치로 2013년부터 5년마다 1세씩 높아져 2033년에는 65세가 되어야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1952년생까지는 현행대로 60세에 받을 수 있지만 1953~1956년생은 61세부터, 1957~1960년생은 62세부터, 1961~1964년생은 63세부터, 1965~1968년생은 64세부터, 1969년생 이후는 65세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서구의 복지 선진국들도 65세에 지급하던 국민연금을 고령화에 따른 재정 부담을 고려해 2~3년 뒤로 늦추고 있는 추세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왜 65세로 정해진 걸까? 세계 최초로 국민연금이 도입된 나라는 독일이다. 1889년 비스마르크가 처음 국민연금을 도입할 때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은 70세였다. 당시 독일의 평균수명이 46세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아주 운 좋은 사람만 혜택을 받는 불합리한 제도였다. 평균수명이 80세인 오늘날에 비스마르크 시대의 연금 개시 연령을 적용하면 104세가 되어야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보편적 복지제도로서의 가치가 매우 약한 제도였던 셈이다. 사회주의자 탄압이라는 채찍에 대한 당근책치고는 너무나 말라비틀어진 당근이었던 것이다. 이런 비판이 지속적으로 일자 1916년, 수급 연령을 65세로 낮추었고 이 제도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보는 기준 역시 이 제도에서 유래됐다. 여기까지는 팩트, 즉 논픽션이다. 독일에서 처음 국민연금 수급 연령을 70세로 정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상상력, 즉 픽션이 필요하다. 비스마르크는 처음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정할 때 왜 70세로 했을까? 잘 알려진 대로 유럽은 크리스천 대륙이다. 이는 곧 성경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성경 시편 90장 10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의 일생이 70이고, 혹시 힘이 남아 더 살아봤자 80인데, 그저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며 그것도 금세 지나가니 우리가 멀리 날아가 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에 ‘우리의 일생이 70이고 좀 더 살아봤자 80’이라고 했으니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70세로 정한 타당성은 이미 확보한 셈이 된다. 그러나 시편의 내용처럼 수급 개시 연령을 70세로 정하면 너무 인색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65세로 낮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천지만물을 창조할 때 하느님이 인간에게 70년의 생명을 부여한 근거는 무엇일까? 이제는 진짜 창작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독일의 유명한 형제 동화작가의 작품인 에는 ‘수명’이라는 동화가 나온다. 이 동화에서 그림 형제는 인간의 수명이 70세가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풀어낸다(내용을 약간 변형시켰다). 세상을 창조한 뒤 하느님이 피조물들에게 수명을 정해주기로 하자 나귀가 먼저 왔다. 하느님이 나귀에게 30년을 주겠다고 하니 나귀가 펄쩍 뛰며 말한다. “아이구, 하느님. 너무 길어요. 저의 고달픈 삶을 생각해보세요. 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등에다 무거운 짐을 실어 날라야 하고, 또 곡식자루도 방앗간으로 날라야 해요. 그 덕분에 사람들은 빵을 먹을 수 있게 되지만, 제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정신 차리고 기운을 내라는 욕설과 발길질뿐인걸요. 그러니 제 수명을 줄여주세요.” 하느님은 나귀의 딱한 사정을 감안해 18년을 빼주었다. 모든 피조물들에게 30년의 수명을 주기로 한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부터 삐걱거리고 말았다. 다음엔 개가 찾아왔다. 다소 근엄한 목소리로 하느님이 개에게 물었다. “넌 얼마나 살고 싶으냐? 나귀는 30년이 길다고 했다만, 너에게는 적당한 것 같은데.” “하느님은 그러길 바라세요? 제가 그렇게 많이 달려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제 다리는 그만한 거리를 견뎌낼 힘이 없어요. 게다가 짖지도 못하고 물어뜯을 이빨도 없어진 다음에는 이 구석 저 구석을 옮겨 다니며 불평 속에서 살아야 해요.” 개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하느님이 당초 생각한 개의 수명에서 12년을 빼주었다. 개가 나가자 원숭이가 들어왔다. 피조물들의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한 하느님이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원숭이에게 말했다. “너는 분명히 30년을 살고 싶어 할 거야, 안 그래? 너는 개나 나귀처럼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즐겁게 사니까.” 사태의 준엄함을 파악한 원숭이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휴 하느님, 그렇게 보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재수좋은 날조차 늘 빈 밥그릇 바닥을 핥는걸요. 사람들은 내게 늘 재미있는 장난과 우스운 표정을 기대해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내게 사과 한 쪼가리 던져줄 뿐인데, 그나마도 시어서 먹을 수 없는 것뿐이죠. 내 기쁜 얼굴 뒤에는 슬픔이 감춰져 있다고요. 난 그런 일들을 30년이나 견뎌내긴 싫어요.” 원숭이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하느님이 자비를 베풀어 원숭이의 수명에서 10년을 빼주었다. 드디어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즐거워 보였고, 건강했고, 활기에 차 있었다.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하며 하느님이 말했다. “네 수명은 30년이야, 충분하겠지?” 당황한 인간이 약간 볼멘소리로 하느님과 협상을 했다. “너무 짧아요! 생각을 해보세요. 집을 지어서 불을 지피고, 제가 심은 나무가 자라 꽃이 되고 열매가 맺어 이제 막 인생을 즐기려 할 때, 그때 죽어야 하다니요! 오, 하느님, 제게 좀 더 시간을 주세요.” 나귀, 개, 원숭이와는 반대의 제안에 다소 당황한 하느님이 그래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귀가 반납했던 수명인 18년을 사람에게 주었다. “그래도 충분치 않아요.” 할 수 없이 개의 수명이었던 12년도 주었다. “아직도 너무 적어요.” 끝도 없는 인간의 욕심에 뿔이 난 하느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원숭이의 10년까지 더 주지. 그 이상은 안 돼.” - 이렇게 해서 인간의 수명은 70년이 되었다. 하지만 70년 속에는 인간의 원래 수명 30년에다 나귀와 개, 원숭이가 반납한 수명 40년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숙명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그림 형제는 인간의 숙명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한다. “처음 30년은 사람 자신의 수명으로, 참으로 빨리 지나가버립니다. 이 기간에는 건강하고 즐거우며, 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며 사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이 기간이 지나고 오는 18년은 나귀의 수명이었던 기간으로, 하나의 짐이 들어지면 그다음 짐이 얹히는 식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곡식을 실어 날라야 하지만 그의 충성스런 봉사의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욕설과 발길질뿐입니다. 그러고 나서 오는 개의 수명이었던 12년은 물어뜯을 이빨도 없이 구석에 앉아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이 지나고 나면 원숭이의 10년이 그의 삶을 마무리 짓지요. 그때 사람의 머리는 아주 물렁물렁해져서 바보가 됩니다. 하는 짓마다 어리석어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지요.” - 그림 형제의 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수명 70년은 하느님에게 떼를 써가며 얻어낸 것이다. 요즘은 어떤가? 그림 형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인간의 수명은 끝없이 연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이미 150세 인간을 상상하고 있으며 평균수명 120세의 시대도 멀지 않았다는 낙관론도 있다. 인간수명의 한계는 115세이며 이미 그 한계치에 도달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어느 쪽이든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70세로 하느냐 65세로 하느냐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진시황제가 하늘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차라리 2000년 뒤에 평범한 노동자로 태어날걸” 하면서 통곡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적으로 늘어난 수명을 질적 수준이 받쳐주지 못하면 허망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으로부터 애걸복걸하며 늘린 수명, 눈부신 과학의 발달로 늘어난 수명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면 그동안의 노고는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수명 연장에 대한 욕심의 반만이라도 연금에 쏟아 부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림 형제가 비유적으로 표현한 인생의 막장만 길어질 뿐이다. 늘어난 수명을 제대로 누리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적연금의 급여 수준을 대폭 올려주면 된다. 그러나 이는 너무 근시안적인 방법이다. 낮은 출산율과 점점 길어지는 수명을 생각할 때 지속가능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살다 갈 세상이 아니지 않는가. 길게 봐야 한다. 나이 들면 자연스레 노안이 오는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왜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는데 가까이 있는 것은 잘 안 보일까? 이제는 눈앞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멀리 보며 살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당장 내 연금통장에 들어올 돈이 늘어나면 좋겠지만 그러려면 큰 대가가 따른다. 바로 사회적 기회비용이다. 누군가는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데, 주로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는 젊은이들이다. 일인당 연금액이 증가하고, 연금을 받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면 젊은이들의 가처분소득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결국 젊은이들은 아이를 덜 낳고 소비를 줄이고, 그 결과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힘을 얻게 된다. 다행히도 요즘 노후를 자식에게 맡기겠다는 노인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가정의 문을 넘어 광장으로 나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내 자식에서 누군가의 자식으로 옮겨가는 순간 굳은 의지에 균열이 생긴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약점이다. 이 틈바구니를 정치권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렇게 하여 노후의 주 서식지가 사유지에서 공유지로 바뀌면 ‘공유지의 비극’에 직면해 젊은이들의 고충은 더욱 커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람들은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재산은 잘 간수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른 사람과 공유한 물건보다 자기 물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세대 전쟁으로 풀어쓴 이야기를 살펴보자. 알버트 브룩스의 에 나오는 이야기다. 2020년대 암이 완전 정복되고 각종 요법의 발달로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노인들이 더욱 젊어 보이는 세상이 도래한다. 노인복지에 엄청난 재정이 투입되고, 젊은 세대의 부담은 늘어만 간다. 젊은 세대의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가지만, 막강한 노인협회의 로비로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젊은이를 대변하는 맥스라는 청년은 비밀결사체를 만들어 노인들이 타고 있는 유람선을 납치한다. 노인 대상 테러와 살인사건도 증가한다. 설상가상으로 LA에 대지진이 발생해 미국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적자재정으로 연명해오던 미국은 도시 재건을 위해 중국에 손을 벌린다. 결국 중국인이 연방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렇게 하여 세계를 호령하던 미국은 중국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비록 소설 속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금을 누리는 자와 부담하는 자가 극명하게 대비되면 곤란하다. 그 순간 세대 갈등은 증폭되고 급기야 세대 전쟁으로 비화될 소지도 있다. 인간 욕망의 산물인 무병장수는 누구든 누려야 한다. 그리고 장수에 따른 연금 재정 문제도 골고루 나눠 가져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공유지의 비극’에 직면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 노후는 스스로 책임지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노력으로 견고한 연금 피라미드를 쌓아야 한다. 이른바 ‘자기노력 연금’ 시대를 활짝 열어야 한다. >> 손성동(孫盛東)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2016-10-26 12:06
  • 이렇게 행복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신곡 15장 반주
    우리 동네 노천카페 풍경.우리 집에서 버스 세 정거장 아래에 전통 재래시장이 있다. 이 시장은 새로 난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운동하러 갈 때 배낭을 메고 나가서 오는 길에 시장도 보고 올 수 있어 좋다. 아파트 뒤편으로 몇 년 전 새로 산책로가 생겼는데 우리 동네는 청계천 복원처럼 서울의 예전 개천을 정비하여 깨끗한 하천으로 바꾸는 사업이 끝나 참으로 깔끔하고 예쁜 산책길을 갖게 되었다. 북한산 국립공원에서부터 흘러내린 개천물을 따라 정릉 초입까지 2km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이제 무릎이 고장 나 산이 가까이 있음에도 올라갈 수 없는 시니어들에게 최적의 운동코스로 환영받고 있다. 왕복 4km면 시니어의 하루 운동량에 적합하다고 하여 필자도 열심히 걷는 중이다. 사계절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도 멋져서 고운 색의 벚꽃과 개나리 진달래가 자태를 자랑하는 봄철과 한여름엔 녹음이 싱그럽고 콸콸 웅장하게 쏟아져 내려가는 계곡물이 장관이어서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해 주기도 하고 차분한 갈색 세상으로 바뀌는 가을철, 새하얀 눈이 꽁꽁 언 계곡물 위로 살포시 쌓여 온통 순백의 세상이 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런데 낮에는 몰랐는데 어느 날 저녁 무렵 산책길을 따라 걷다가 시장쯤 오니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와 와글와글 사람들이 재미있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산책길 위쪽 시장통 거리에서 각각 음식점마다 자기 집 마당 쪽으로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노천카페 겸 식사를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치킨집, 주꾸미볶음집, 삼겹살집, 피자집 등 다양한 업종의 가게 앞에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다. 노천카페라면 그림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멋있는 가게 앞 길가에 예쁜 공간이 있어 많은 사람이 차를 마시거나 맥주와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우리 동네 노천카페는 그렇게 세련되지는 않지만 친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맥주잔을 부딪치는 모습을 보니 어느 멋진 노천카페 부럽지 않을 듯하다. 이웃집 가족들이 함께 나왔는지 산책로 아래에서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개울 속의 작은 물고기를 관찰하기도 하고 돌 징검다리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수풀 속 곤충을 탐색하기도 하며 놀고 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엄마아빠들 끼리는 시원한 맥주잔으로 건배도 하며 친목을 갖는 모습이 참으로 좋아 보인다. 남자들끼리 또는 여자들끼리 모여앉아 길가에서의 시간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그들의 소속감이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필자는 살면서 한 번도 직장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나 실제로도 열심히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동료끼리 몰려가 회식을 하거나 모이는 장면은 부럽기만 한 일이었다. 어느 곳에 속해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마음이 든든할 것이다. 일부러 산책길에서 계단을 통해 올라와 무리지어 담소하는 그들을 지나쳤다. 산책로가 생기기 전 이곳은 더러운 하천으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하천정비가 끝나고 조성된 산책로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나와 길가에서의 담소를 즐길 수도 있게 되었으니 매우 고맙고 만족스러운 풍경이다. 여기저기 자리 잡고 즐겁게 떠드는 무리를 지나면서 필자도 저 속에 끼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참으로 즐겁고 정겨워 보이는 노천카페 풍경이다. 2016-10-18 11:31
  • 이렇게 행복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신곡 15장 반주
    [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물에 잠긴 달을 긷다한 도예가를 만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던가. 왜 꼭 그 예인(藝人)을 만나고자 했던가? 돌아보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 아릿함이 밀려온다. 청광 윤광조(晴光 尹光照· 1946~ ) 도예의 모든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싶은 열망에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으로, 경북 안강의 자옥산 자락으로 몇 차례 도요지를 찾아갔으나 바람 같은 흔적을 놓치고 매번 조우조차 못했다. ‘예술인은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작품이 탄생되는 순간을 생생히 보고 싶은 습벽(習癖) 때문에 여러 예술인들을 찾아다녀야 직성이 풀렸다. 특히 흙을 수비(水飛)하고 물레나 판으로 형태를 만들어 건조하고, 초벌구이와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깎아 내고, 유약을 바르고 마지막 가마에 불을 지펴 소성(燒成)하고 식혀서, 가마 문을 열어 완성품을 꺼내는 수 주일의 도예작업은 꼭 참관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5년 선배라는 학연도 있었지만 1994년 호암미술관에서 ‘한국의 미, 그 현대적 변용’이라는 명제의 오수환(吳受桓·1946~ ), 황창배(黃昌培·1947~2001)와 함께 한 윤광조의 전시회에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공예과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처음에는 전통도자(청자, 백자)를 잇는 기물을 빚기도 했으나, 태토(胎土)의 거칠고 질박한 질료에 화장토(化粧土)를 입히고 대칼, 지푸라기 혹은 손가락으로 유희하듯 글자나 문양을 만드는 과정에 매료되어 오늘날까지 분청자기만을 고집스레 만들고 있다. 심산(深山)의 사찰을 다니며 불가(佛家)의 깊은 명상에서 비롯한 선(禪)의 경지에 이르고자, 끝없는 수양(修養)과 참배여정(參拜旅情)으로 수개월에서 1,2년간 도요지를 비우기 일쑤였다. 도자기에 대한 구상이 가슴 가득 차 올라와야 몇 점씩 빚어내곤 하였다. 작가의 군 시절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본 옛 도자기에 매료돼,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1916~1984)선생을 찾아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76년 첫 가마를 짓자 혜곡 선생은 젊고 창의력이 도저한 윤광조에게 당신의 스승이었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1905~1944)의 아호이기도 한 급월(汲月)이란 아호를 내렸다. 그래서 윤광조의 도자 가마는 급월요(汲月窯), 급월당(汲月堂)이 되었다. 우현 선생은 원숭이의 우화(寓話)를 인용하여 급월을 설명하였다. ‘산중 원숭이가 깊은 밤 목이 말라 샘가에 오니 마침 달이 물에 비쳤다. 원숭이는 달을 건지려 계속 물을 떴으나 달은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었다. 학문을 연구하는 이치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다해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끊임없는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감계(鑑戒)의 깊은 뜻이 서린 아호였다. 1986년부터는 쉽게 도자를 빚는 물레를 치우고, 판 작업과 흙 타래를 쌓아 올리는 자유롭고 정형이 없는 창작도예를 통해 그릇으로서 쓰임은 이어가되 무심히 손가락으로, 혹은 지푸라기나 못 끝으로 글을 써 넣거나 문양을 그렸다. 심경(心經), 율(律), 정(定), 관(觀), 월인천강(月印千江), 정토(淨土), 지월(池月) 등의 작품들은 작가의 깊은 선정(禪定)의 경지에서 빚은 격조 높은 예술품으로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 분청자기의 세계를 나타냈다. 이 작품 ‘정(定)’은 직사각 육면체 통 위에 동그란 구멍을 두어 꽃을 꽂을 수도 있으며, 넓은 한쪽에는 한 그루 나무와 새의 형상을 손가락으로 그리고, 이면에는 달이 강에 비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을 나타낸 귀한 작품으로, 인사동 화랑 주인을 꽤 오래 졸라서 구입한 것이다. 올해 7~8월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遊戱三昧(유희삼매) 도반 윤광조. 오수환 전’에서 윤광조는 산동(山動), 혼돈(混沌), 심경(心經) 등 무위자연의 순수와 인간의 고뇌를 한 점 한 점 도자에 녹여내고 있다. “작업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한다. 죽을 때까지 흙과 불을 붙들고 예술적 삶을 이어가겠다.” 거칠되 따뜻한 두 손을 잡으니 “보잘 것 없는 선배를 깊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만날 때마다 겸손한 그의 인품에서 든든한 예(藝)의 거목을 본다. 내 향리(鄕里)인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이수종(李秀鍾 1948~ ) 도예가가 가마를 짓고 도자를 굽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려고 답사하면서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기록했다는 한촌(閑村)이다. 이수종은 중송리 언덕에 중송당(中松堂)이라 자호(自號)하고 특색 있는 분청자기를 빚었다. 그의 도자기는 산청의 흙이나 옹기토로 도판, 병, 사발, 불상 등을 자유롭게 만들고 화장토를 입힌 후 붓이나 손가락에 철화(鐵畵)안료를 찍어 대담하게 문양을 그리되 그 임리(淋)가 뚝뚝 흘러 그릇 바닥에 넘치기도 하였다. 그 역시 윤광조와 같은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하였으며 분청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만을 구웠다. 초기에는 추상의 물상을 만들기도 했으나, 대학 강의 등을 물리고는 오직 분청자기만을 만들었다. 고향 시인 두 명과 동행했던 가을날 그는 맑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사진도 마음껏 찍게 하고 저간에 새로 시도한 백자 달항아리를 여러 점 안아 볼 수 있게 했다. 단아한 부인의 다과 접대를 받으며 그의 예술관을 경청하였다. “새벽이나 해 질 무렵, 솔숲을 지나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을 걸으면서 엄숙한 자연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런 마음의 리듬을 작품에 이입하려 한다.” 일찍이 그가 만든 연적, 향꽂이, 찻사발, 약사여래불상을 수집하고 아껴왔는데, 이젠 고희(古稀)를 앞둔 그의 달항아리를 수집하러 중송당을 드나들 즐거움이 더 생겼다. 이 편병(扁甁)은 신세계백화점에서 토전 김익영(土田 金益寧·1935~ ) 등 빼어난 도예가 몇 명과 함께하는 전시회에서 아내와 함께 구입한 것이다. 철화의 그림 속 이삭이 끊긴 수숫대가 빈 밭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 편병을 바라볼 때마다 낫으로 수수 이삭을 자르던 유년의 고향 밭이 떠오른다. 2010년 용인의 ‘지앤아트스페이스’에서 3개월간 열렸던 ‘이수종 청담에 뜬 달’이라는 대형 전시회는 이수종의 분청자기에서 백자의 달항아리까지 맥을 짚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황량한 대지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장소의 풍경마저 바꿔 버리는 오늘날의 거목이 되기까지 모진 세월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평자(評者)는 이어 “어느 누구보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원초적인 맛이 흘러 넘치고 살아 꿈틀거리며 또 그만큼 주위 공간과 사물들을 자연처럼 너그럽고 편안하게 감싸 안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이 두 도예가의 가마를 찾아가서, 물에 잠긴 달을 긷듯 노년의 열정을 불사르는 예술혼에 슬며시 젖어 볼 꿈을 꾼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2016-10-18 09:52
  • 이렇게 행복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신곡 15장 반주
    처음 가 본 순천만필자는 외국 여행은 많이 한 편이지만 정작 국내 여행은 별로 가 본 곳이 없다. 물론 부산 같은 대도시는 업무상 몇 번 가봤지만, 여행이라고 하기보다는 출장이었다. 가족과 함께 피서 차 동해안이나 서해안 해변에 놀러가 본 적은 있다. 그러나 혼자의 여행이 아니라 먹고 마신 기억밖에 없다. 그래서 순천만을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고 벼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해안과 석양, 철새들의 군무를 인터넷을 통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전라도는 먹거리가 풍부하고 맛있기 때문에 먹는 즐거움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순천으로 여행지를 정한 것이다. 주변에 물어보니 벌써 몇 번씩 갔다 왔다고 했다. 그러니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정보가 없이 순천에 도착하다 보니 순천만 국가정원이 따로 있는 줄 몰랐다. 마침 9월30일부터 10월16일까지 17일 동안 ‘순천만국가정원산업디자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입장료로 8천원을 받았다. 볼거리가 많고 넓어서 하마터면 이곳이 순천만의 전부인 줄 알고 그냥 갈 뻔 했다. 가을을 맞아 국화꽃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꽃을 볼 수 있었다. 진짜 볼거리는 ‘꿈의 다리’를 건너 각 나라 국별 정원들이었다. 호수 정원 안에 있는 동산도 빙빙 돌아 걸어올라 갔다 올 수 있게 해 놓았다. 뉴스나 인터넷에 자주 올라오는 장면이다. 점심으로 행사장 안에 있는 음식점에서 짱뚱어탕을 먹었다. 걱정했던 냄새는 없었고 추어탕과 비슷한 맛이었다. 짱뚱어탕 한 그릇에 8천원을 받았다. 여기서 순천만 습지까지 다시 8천원을 내면 스카이큐브라는 무인전동차로 습지까지 갈 수 있다. 순천만 습지 입구에 도착하자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갈대밭에 들어 섰다 나무로 만든 나지막한 통로를 따라 사람들이 걸었다. 가족단위, 연인들의 발길이 나란히 서서 길을 막고 가는 바람에 걸음이 빠른 필자는 여러 사람을 헤치고 가야 했다. 갈대는 억새와 달리 볼품은 없는 식물이다. 다만, 염분이 많은 갯벌에 적응해서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식물이다. 군집하여 있으니 볼만 한 것이다. 1m 정도 아래에 짱뚱어와 게가 많이 보였다. 갈대를 꺾어 쿡쿡 찔러보는 사람들도 있고 호기 있는 사람은 바지를 걷어 부치고 내려서려는 사람도 있었다. 중간에 회차로가 있어 절반 쯤은 거기서 돌아서는 것 같았다. 계속 앞으로 가니 용산전망대 표지가 나왔다. 뉴스 사진을 기억해 보니 높은 곳에 올라가 찍은 것으로 앞에 보이는 산 위에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과연 그랬다. 올라갔다 오려면 한 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갈대 밭 뒤로 올라가는 통로가 있었다. 오르막이라 노약자들은 무리일 것 같았다. 중간마다 전망대가 있다. 백미는 역시 용산 전망대로 순천만의 바다 쪽이 다 보였다. 과연 툭터진 시야도 좋았지만,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었다. 기대했던 철새 떼는 보지 못했다. 겨울철에나 볼 수 있단다. 단풍도 아직 철이 이르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걷고 나니 만보기가 3만보를 가리키고 있었다. 걷기로 단련된 체력이라 거뜬히 소화하기는 했으나 보통 사람들은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2016-10-11 1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