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침부터 이유없이 기분이 좆같을까

  힙스터 프렌즈


   윤주는 자고 있던 수진을 깨웠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수진의 어깨를 흔들었다. 수진은 일어나는 대신 응, 하고 중얼거렸다. 윤주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도와줘, 수진아.
   수진은 가만히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해가 뜨기도 전이었다. 방안은 깜깜했다. 한밤중에 귀가한 윤주가 불도 켜지 않고 곧장 자신을 깨워 부탁할 일이 대체 뭘까. 수진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뭘? 윤주는 한참을 뜸들이다 입을 열었다. 주저하는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상기된 목소리였다.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수진은 일으켰던 몸을 그대로 뉘었다. 그래, 윤주는 윤주였지. 윤주는 얼마 전 동거하던 애인과 헤어졌다. 수진은 아무렇지 않게 캐리어를 끌고 들어오는 윤주가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대뜸 와서 영영 눌러앉을 것처럼 있다가 어느 순간 떠나버리는 게 윤주였다. 수진은 타인과 사는 것이 불편했지만 윤주만큼은 예외로 쳐줄 수 있었다. 집에 붙어 있는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윤주는 낮에는 잠만 자고 밤에는 나가 놀았다. 그렇지 않은 날도 수진의 생활 패턴을 방해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가끔 화장실 전등을 끄는 걸 잊거나 샤워를 지나치게 오래 하긴 했지만, 강박적으로 깔끔을 떨어서 늘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했다. 정리정돈에 젬병인 수진은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윤주의 사사로운 결점은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수진은 아침부터 취업 스터디에 출석해야 했다. 수진은 더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손을 두어 번 내저었다. 윤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협탁 위의 향초에 불을 붙였다. 헛소리를 진지하게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윤주는 오늘 새벽 어떤 바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곱슬거리는 단발머리와 귀밑에서 어깨까지 이어지는 타투가 윤주의 시선을 끌었다. 윤주는 다짜고짜 앉아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타투 멋지네요. 무슨 뜻이에요?
   몰라요, 나도.
   남자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옆에 앉아 있던 그의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한마디씩 했다. 저 새끼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한 거예요. 독일어로 Vogelkopf, 한국어로 새대가리. 윤주는 다시 물었다.
   그쪽 새대가리예요?
   어렸을 때 닭대가리란 말 많이 듣긴 했어요.
   알지도 못하는 단어를 무턱대고 몸에 새겨넣는 남자라니. 윤주는 황당했다. 한편으로는 Jesus lives in us, 같은 문구보다는 새대가리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주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엉뚱함이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이었다. 윤주는 새벽 내내 그와 술을 마셨다. 나중에는 취해서 그의 단발머리를 잡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머리숱 좀 봐라. 삼대가 탈모 걱정은 없겠다.
   난 원래 털이 많아.
   그럼 몸에도 많겠네?
   아니, 나 브라질리언 왁싱 했는데.
   윤주의 말에 남자는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윤주는 그가 취한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너 브라질리언 왁싱 한 남자 본 적 있어?
   윤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남자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한 번쯤 봐두는 것도 좋은 경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너한테는 절대 안 보여줘.
   남자는 윤주의 손을 잡아내리고는 다리를 꼬았다. 윤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거절당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자존심이 상하기보단 오기가 생겼다. 윤주에게 가장 쉬운 건 남자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는 어려웠다. 그 점이 윤주를 확실하게 건드렸다. 그의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는 그 구석까지도. 그러나 윤주가 그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름도 나이도 말하지 않았다. 아는 거라곤 그가 인스타그램을 한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니 수진이 필요했다. 수진은 마음만 먹으면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아이돌에 빠져 있을 때는 한정판 앨범 발매 소식이나 비공식 스케줄표를 누구보다 빨리 입수했다. 단종된 상품은 해외 홈페이지까지 몽땅 뒤져 무조건 찾아냈다. 당시 윤주의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양다리였다는 걸 알아낸 것도 수진이었다. 수진은 인정했다. 구글링이나 뒷조사는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걸 윤주 일생일대-라고 주장하는-의 남자를 찾기 위해 써먹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수진아, 너라면 할 수 있어. 네 별명이 오죽하면 흥신소였겠니?
   수진은 팔을 잡고 애원하는 윤주를 바라보았다. 무구한 것 같으면서도 확고한 그 표정을 수진은 잘 알았다. 그런 표정을 짓는 윤주는 늘 원하는 걸 이뤄냈다. 윤주에게는 그런 구석이 있었다. 엉뚱하고 집요한 구석이. 그리고 그런 구석을 끌어내는 건 언제나 남자였다.
   둘의 행보는 고등학교 졸업을 기점으로 판이하게 갈렸는데 수진은 상경했고 윤주는 고향에 남았다. 수진은 취업난을 고려해 진로를 간호학과로 택했다. 윤주가 택한 건 남자였다. 수진이 실습을 끝내고 국가고시를 준비한 것처럼 윤주는 정해진 과정처럼 이 남자를 만났다가 저 남자를 만났다가 했다. 그때마다 윤주는 뭔가를 자주 바꾸었는데 취미나 아르바이트, 때로는 사는 곳까지도 그랬다. 수진이 기억하는 한 윤주에게는 언제나 애인이 있었다. 헤어졌다가도 금방 새 사람을 만났다. 한 명도 빠짐없이 별 볼 일 없었다. 그건 윤주도 인정한 바였다. 수진은 윤주를 끊임없이 연애에 뛰어들게 만드는 건 남자 자체가 아니라 어떤 관성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윤주가 반년을 넘게 같이 살았던 남자와 헤어지고도 금방 새로운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집념과 오기를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진은 인스타그램에 윤주가 갔던 술집의 이름을 검색했다. 수많은 위치 태그와 해시태그가 떴다. 수진은 게시물을 최근순으로 정렬했다. 근 며칠간의 게시물을 모두 확인한 수진이 그럴듯한 프로필들을 간추려 윤주에게 내밀었다. 단발머리와 타투. 윤주는 곧 남자의 프로필을 찾아냈다. 허탈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대부분의 일상을 포스팅했다. 식당에 가면 상호를 남겼고 좋아하는 브랜드의 계정은 꼭 태그했다. 연희동에 자주 다니며 본가는 일산이지만 홍은동의 작은 원룸에서 자취하고 있다는 것도 적혀 있었다. 그가 모르는 사람들, 이를테면 수진과 윤주마저 얼마든지 알 수 있도록.
   연희동 그 카페라면 나도 아는 곳인데. 매일 죽치고 앉아 있다가 우연인 척 마주쳐볼까?
   수진은 윤주를 끌어당겨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헛소리 말고 잘 봐. 지금부터가 진짜야.
   수진은 남자의 팔로잉 목록을 누른 후 정렬된 프로필을 하나하나 눌러 방문했다. 브랜드 공식 계정과 인플루언서, 실제 친구나 지인으로 보이는 계정을 제외하면 약 30명이 남았다. 수진은 그 계정들을 꼼꼼히 탐색한 후 결론을 내렸다.
   알겠다. 이 남자 취향은 프렌치 시크계 힙스터야.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대충 프랑스 모델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야. 스테이시 마틴 같은.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윤주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알 만했다. 윤주는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윤주는 헐렁한 민소매와 청바지 대신 프릴 달린 원피스를 좋아하니까. 그가 간과한 건 윤주가 취향쯤이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거였다.
   윤주의 힙스터 되기는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윤주에게 그럴듯해 보이고 멋있게 느껴지는 취향이라곤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있다곤 해도 너무 뜬금없거나 비일관적이어서 그야말로 마땅한 취향이 없는 인간으로 보이기 딱 좋았다.
   빌리 아일리시는 어때? 나 꽤 좋아하는데.
   걘 힙하지만 너무 흔하잖아. 흔할수록 신념을 가지고 좋아해야 한다고. 너한테 신념이 있어?
   아니.
   수진은 예전에 듣던 플레이리스트를 뒤져 한참 만에 적당한 아티스트를 찾아냈다.
   생전 처음 들어보네.
   일단 이름이 적당히 튀는데 너무 쉽지는 않아. 오래전에 데뷔했지만 꾸준히 신곡은 나오고 있어. 노래도 너무 대중적이지 않고 매니악한 구석이 있지. 이게 딱이야.
   수진은 윤주에게 앨범 당 타이틀곡 하나, 수록곡 하나씩을 외우라고 했다.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곡일수록 좋아.
   이게 정말 힙이란 말이야?
   아이돌은 절대 안 돼. 아이돌 이름을 꺼내는 순간 너는 저기 어디 아래로 처박힌다니까.
   아이돌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건 나도 몰라.
   윤주는 잠깐 회의감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이내 의욕을 되찾았다.
   수진은 남자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쭉 훑어보았다. 이 세상에서 힙하다는 건 몽땅 때려 박아놓은 것 같았다. 도쿄의 스카이트리부터 파리의 에펠탑, 서울에서 가장 핫하다는 동네의 가장 잘나가는 카페, 이름도 알 수 없는 외국 밴드의 플레이리스트,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패션 브랜드의 룩북까지 몽땅 정사각형 안에 쑤셔 넣어져 있었다. 확실히 세련되고 감각적이었지만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일정한 색감으로 정렬된 사진은 지나치게 편집된 느낌을 주었다. 수진은 이렇게 본인을 전시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치고 멀쩡한 놈 없다는 걸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애초에 멀쩡한 놈이 있기는 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윤주는 며칠 지나지 않아 그와 열렬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대충 그의 피드에 올라와 있는 것과 비슷한 사진 몇 장, 프렌치 시크계 힙스터처럼 보이는 셀카 몇 장을 포스팅한 후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냈더니 금방 반응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있지는 않았다. 굳이 대화하지 않아도 그의 일상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속 편한 거지. 모든 걸 다 보여줄 수 있다는 거.
   수진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윤주가 물었다.
   무슨 뜻이야?
   나라면 내가 언제 어딜 갔는지 짐작 못하게 하겠어. 무슨 일이 날 줄 알고? 그렇지만 이 남잔 상관없는 거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지. 그래서 이렇게, 실시간으로 위치도 태그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저녁 여덟 시 사십오 분에, 서교동 스타벅스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다고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거지.
   조금 전 게시된 남자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며 수진이 말했다. 윤주는 그런가, 중얼거리며 웹서핑을 시작했다. 대충 힙해 보이는 사진을 찾아 저장하는 거였다. 수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이런 일까지 하게 만드는 건 정말 사랑일지도 몰랐다. 수진은 괜히 트집을 잡았다.
   그거 힙한 거니?
   나도 잘 모르겠어. 우기면 되지 않을까?
   수진은 윤주의 핸드폰으로 탁자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를 찍었다.
   자, 이건 힙한 두루마리 휴지야.
   내가 봐도 없어 보인단 건 알겠다. 이런 건 힙이 아니야.
   우기면 된다며?
   수진은 멈추지 않고 온갖 사진을 찍어댔다. 윤주는 처음에는 수진을 무시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힙한 소파, 힙한 나무 주걱, 힙한 신발장…… 둘은 집에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몽땅 찍어댄 후에야 노란 장판에 나란히 누웠다. 수진은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일단 이 장판이 구리다는 건 알겠다.
   이런 집에 산다는 걸 들키면 힙스터 탈락이야.
   너한테 그보다 큰일은 없겠다.
   그렇지만 노란 장판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
   그날 밤 수진은 윤주의 핸드폰을 훔쳐봤다. 처음에는 갤러리를 구경했다가 나중에는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윤주의 다이렉트 메시지 창은 심플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윤주가 계정을 만든 건 오직 그와 대화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수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화 창을 눌렀다. 남자와 윤주의 대화는 종잡을 수 없었다. 윤주가 뭔가 물어도 남자는 애매하게 대답하거나 동문서답하기 일쑤였다. 평일에는 뭘 하느냐는 물음에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꼬박꼬박 답장은 해주었지만 윤주를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스크롤을 내릴수록 윤주는 절박해졌다. 다음주에 시간을 낼 수 있느냐고 윤주가 세 번째 물은 것까지 보고 수진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윤주는 여러 번 말하는 걸 싫어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다니. 이렇게까지 하게 하다니. 수진은 잠든 윤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전에 없이 서글퍼졌다.
   잠들기 전 수진은 윤주의 계정에 사진을 업로드했다. 아까 찍어둔 노란 장판이었다. 그 밑에는 짧은 코멘트를 달았다. 힙스터의 집.

   일찍 일어난 윤주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수진이 이유를 묻자 윤주는 다짜고짜 그녀를 껴안았다.
   역시 넌 내 인생 최고의 서포터야.
   윤주는 간밤에 수진이 올린 사진이 남자의 마음에 쏙 든 것 같다고 했다.
   나보고 너무 웃기대. 저세상 힙이라나. 뭔진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척했지.
   언젠 구리다면서.
   그건 네가 그랬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진은 가끔 윤주가 한심하다고 느꼈는데 이렇게 남자 앞에서 한없이 가벼워질 때가 그랬다. 찰나의 감정이었으므로 내색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얄팍하게 빠져나가는 윤주가 얄미운 것은 사실이었다. 더 대꾸하지 않으려는데 윤주가 말을 이었다.
   오늘밤에 만나기로 했어.
   수진은 윤주를 돌아보았다. 상기된 얼굴이었다. 수진은 왠지 모를 무력감을 느꼈다.
   꼭 만나야 해?
   그럼. 우리가 이때까지 그 삽질을 왜 했는데?
   수진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려다 그만두었다. 이유는 많았다. 그러나 그걸 윤주에게 납득시킨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 보였다.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남자의 브라질리언 왁싱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열두 살 때도, 고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도, 스무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수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물었다.
   집은 언제쯤 옮기려구.
   윤주는 잠깐 수진을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곧 나가야지.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었어.
   윤주가 금방 왔다가 금방 사라지는 건 익숙했다. 이번에는 머리에만 털이 난 남자와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웃기면서도 못마땅했다. 윤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절대 수진의 집에서 계속 살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수진은 뻔뻔하고 한심한 윤주가 이럴 때만 대쪽같이 구는 게 화가 났다.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수진은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이럴 땐 참 빠르구나.
   윤주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수진은 소파에 벌렁 누워버렸다. 깜빡 잠이 들어 한참 만에 깨어났을 때 윤주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기어이. 수진은 생각했다. 짐을 싸던 중이었는지 방안에는 반쯤 채워진 캐리어가 펼쳐져 있었다. 수진은 윤주의 캐리어를 뒤적거렸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짐 속에서 잠옷이 튀어나왔다. 수진이라면 절대 사지도 들여놓지도 않을, 프릴이 잔뜩 달린 투피스였다. 윤주가 집에 온 첫날 자꾸만 그걸 입히려고 해서 수진은 짜증을 냈다.
   이 과일 포장지 같은 건 너나 입어.
   목 늘어난 티셔츠나 입고 있으니까 기분이 우중충해지는 거야.
   그걸 떠올리자 별안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화를 낼 기운도 이유도 사라진 기분이었다. 수진도 알고 있었다. 윤주가 얹혀살 곳은 어디든 있었다는 걸. 애인과 헤어져서가 아니라 취업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수진의 옆에 있어주기 위해 서울까지 왔다는 걸. 성가시게 굴기는 해도 그것 역시 윤주의 방식 중 하나였다.
   수진은 올해 초, 사주를 봤다. 심심풀이였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럴듯했다. 자기 몫은 확실히 챙기고 앞가림을 잘해서 뭐가 되긴 될 거라는 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런 수진의 생년월일을 유심히 대조해보던 여자가 은근히 웃으며 말했다.
   남자 복은 없는데 자식 복은 있네. 연애론 재미 못 보겠지만 결혼하고 애 낳으면 애한테 헌신하며 잘 살 거야.
   수진은 그녀가 종이에 적어놓은 뜻 모를 한자들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건 곧 결혼하고 애 낳으면 끝장이라는 소리로 들렸다. 이어진 말은 더 심각했다. 잘하면 올해겠네. 자식 복이 꽃피는 해야.
   그때 만나던 남자친구와 저녁을 먹으며 수진은 사주 본 얘기를 했다.
   터질 복이 없어서 자식 복이 터지냐. 그것도 올해는 꽃까지 피어.
   그는 앞접시에 낙지볶음을 한가득 덜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힘 좀 써봐?
   수진은 그게 웃기지 않았다. 그와 섹스할 때마다 콘돔 껍질과 그 얄팍함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그건 영영 수진만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헤어진 후로는 두어 명을 더 만났지만 미지근했고 내친김에 쉬기로 했다. ‘올해는 안식년이야.’ 일단 섹스 프리를 선언하고 나니 가끔 심심하긴 해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고작 사주 따위를 맹신하는 건 아니었지만 계기로 삼기에는 충분했다. 아무리 세이프 섹스를 외쳐도 안 하는 것만 할까. 이참에 평생 소파와 교감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소파와는 아무리 몸을 겹쳐도 자식이 생기지 않으니까. 생리가 늦어져도 불안하지 않고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설령 싸운다고 해도 얻어터질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수진은 소파에 누워 문득 생각했다. 그렇다면 윤주는.
   수진은 윤주와 함께했던 수많은 사건을 생각했다. 수진은 늘 크고 작은 일들을 계획했고 윤주는 행동에 옮겼다. 고등학생 때에는 무전여행을 떠나겠다고 엄마의 비상금을 훔쳐 가출했다. 돈은 하루 만에 바닥났고 둘은 경상남도 의령군의 크리스탈 모텔에서 자다가 수진의 아빠에게 덜미를 잡혔다. 반성문을 쓰면서도 윤주는 더럽게 장사 안되는 모텔이었을 거라며 깔깔거리기만 했다. 수진은 일단 저지르고 보는 윤주의 대책 없음과 무모함이 좋았다. 가끔 한심하고 개탄스럽지만 그래도, 윤주가 아니라면 수진이 그 누구와 고작 삼만 원을 훔쳐 여행을 떠날 수 있었을까? 또 수진이 아니라면 그 누가 윤주의 터무니없는 부탁들을 들어주었을까? 둘을 통과한 그 모든 시간을 거쳐 결국에는 서로 다른 사람으로 자라났다고 해도 윤주는 윤주였다. 수진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을 결국 하게 만드는 것도 언제나 윤주였다. 수진은 반쯤 닫힌 캐리어를 구석으로 밀었다.

   윤주는 예상과 달리 금방 돌아왔다. 커다란 편의점 봉지를 들고서였다. 수진은 윤주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윤주는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나 예전에 다니던 학원 선생 만나던 거 기억나? 스무 살 때.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멸치같이 말라빠져서 늘 아파 보이던 남자였다.
   그 새끼가 세계 일주하겠다고 내 알바비 들고 튀었잖아.
   그것도 기억한다. 윤주가 주말 아르바이트로 이십만 원을 벌 때였다. 윤주는 매일 울었다. 수진은 윤주를 달래는 대신 남자의 메일 계정에 접속해 항공권 정보를 빼돌렸다. 이륙 당일 윤주를 끌고 발권 게이트를 지켰지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둘은 이륙 방송이 나오고도 한참 후에야 퉁퉁 부은 다리로 공항철도를 탔다. 수진은 아직도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수 없었다.
   난 아직도 그 이십만 원이 생각난다. 아까도 잔돈이 부족한데 그 이십만 원만 있었어도, 싶은 거야. 그럼 그날 공항에 다섯 시간씩 서 있을 필요가 없었겠지, 하면서. 그러다보니까 네 안식년이 아직 한참 남았다는 생각이 들고.
   윤주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 편의점 봉지를 열었다.
   그러니까 힙인지 엉덩인지 때려치우고 술이나 먹자.
   수진은 그제야 남자가 정말로 브라질리언 왁싱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윤주는 소주 뚜껑을 따며 말했다.
   나는 그냥 내 취향대로 할래. 소주는 참이슬, 좆같을 땐 한라산.
   남자 취향은 좀 바꾸는 게 어때?
   내 남자 취향이 어떤데?
   못난 남자.
   야, 나 배우 지망생도 만난 적 있어.
   그러니까 못난 남자라고. 못생긴 남자가 아니라.
   윤주는 한참 말이 없다가 그대로 벌렁 누웠다. 군데군데 그을린 자국이 있는 노란 장판에. 수진도 따라 누웠다. 형광등 때문에 눈이 아팠다. 너 취직 전에. 윤주가 입을 뗐다.
   여행이나 가자.
   무전여행?
   돈 없으면 망하는 게 무전여행이더라.
   가게 되면 경남은 빼고 가자. 적어도 의령은.
   수진은 낄낄거렸다. 불현듯 아빠에게 잡혀 오기 전날 모텔 앞 치킨집에서 마셨던 김빠진 맥주의 맛이 생각났다. 그거 분명히 물 탔을 거야. 윤주는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같이 낄낄거렸다. 늘 그랬듯이.

양아현 소설을 쓰다 보면 늘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있다. 그럴수록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왜 아침부터 이유없이 기분이 좆같을까
왜 아침부터 이유없이 기분이 좆같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