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이 암행어사를 무서워하는 거지

서수록(西繡錄박내겸의 암행일기

이 서수록은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한 박내겸(1780?)이 순조22(1822) 316일부터 728일 까지 암행어사로서 평안도 지방을 다니며 보고 듣고 행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공식적인 보고서가 아닌 개인의 일기입니다. 문화콘텐츠진흥원에 있는 자료를 일부 정리하여 게재하는 것입니다.

순조22(1822) 316.
명령을 받아 희정당으로 들어가 국왕을 모셨다. 이날 사알(司謁, 궁궐에서 임금의 명령 등을 전달하는 잡직 관리)을 통한 구두 전갈로 승정원에 명령하셨는데, 임후상(任後常) 박제문(朴齊聞)과 나에게 들어와 대기하라는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국왕께서 친히 문서 봉투 하나를 주시고 이어 '내려가 잘 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일어났다 다시 엎드리면서 경건히 받아 소매에 넣고 바로 물러나왔다. 신문(新門,현 강북삼성병원 근처에 있던 문)밖 조용한 곳에서 열어보니,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나가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사목책 하나, 마패 하나, 유척 둘이 있었다.
이 모자라는 능력을 돌아보니 어찌 이 무거운 임무를 감당할 것인가, 걱정되고 두려워 어찌 할 바를 알 수 없었다. 또 과거시험 시험관 후보에 들어 궁궐의 관리 대기소로 갈 때 마침 명령을 받아 바삐 들어갔으므로 미처 식구들과 작별을 하지 못하였다. 급히 떠나야 마땅한 일에 비록 감히 사사로운 말을 할 수는 없으나, 가까운 사람들을 오랫동안 떠나고 온갖 사정을 모두 던져두려니 마음이 어두워 스스로 할 말이 없었다. 머물러 길 떠날 준비를 하였다.

<4일간 떠날 준비를 하다>

321.
길을 떠났다. 데리고 가는 사람은 성부(誠夫) 아저씨와, ()가 경박(景博)인 김후근(金厚根), ()가 치삼(稚三)인 최태운(崔台運), ()가 계현(季賢)인 초관(硝官) 조익렴(趙益濂), 경기감영의 이서(吏胥)인 노유종(盧有宗)이고, 노자(奴子)는 복남(福男)이었다. 역참(驛站)의 마졸(馬卒)은 청파역(靑坡驛)의 강희진(姜喜進) 이성필(李聖必) 권복이(權卜伊), 연서역(延署驛)의 이원이(李遠伊) 권가오쇠(權加五金) 이완실(李完實)이었다. 해어진 도포와 깨진 갓에 걸음이 느리고 둔한 말(款段馬, 관단마)를 타고 나아갔다. 새벽달은 그림 같은데 구불구불 돌아 서쪽으로 나아가자니, 빈궁한 선비의 모습이어서 스스로 내 몸을 돌아보아도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고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 수령은 정연시(鄭淵始)이다. 저녁은 파주에서 묵었다. 수령은 이인달(李仁達)이다. 길에서 얼굴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나 부채로 가리고 지나쳤다. 이날 80리를 갔다.

322.
아침 일찍 출발하여 화석정(花石亭)을 찾아 올라갔다. 옛날 무오년(1798, 정조14)에 이 정자에 한번 올랐던 기억이 있는데, 어느 틈에 25년 전의 일이 되고 말았다. 정자 건물은 무너지고 꽃나무와 돌이 어지러이 흩어져 옛날 모습을 다시 보여주지 못하였으나, 오랜 세월을 겪은 큰 강만은 옛날처럼 길게 있어서 나그네의 마음을 조금 맑고 시원하게 해주었다.
장단(長湍)에서 점심을 먹었다. 수령은 백홍진(白泓鎭)이다. 저녁에 개성을 지났다. 유수는 오한원(吳翰源)이고 경력(經歷)은 김낙룡(金洛龍)인데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여기부터는 내가 처음 가보는 길이다. 성곽과 인민(人民)이 매우 번성하지만 기상(氣像)이 쓸쓸하여 처량한 느낌이 마음 속 깊숙이 파고들어서, 진실로 옛사람이 말한바 '지방은 사람을 따라 변해간다'는 것이었다. 옛 도읍의 상황을 정말 한번 보고 싶었으나, 서울에 가까운 곳이어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 머무르지 못하였다. 남문 밖 곧은길을 따라 미륵당(彌勒堂)에 도달하여 묵었다. 이날 90리를 갔다.

323.
아침 일찍 출발하여 금천(金川)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수령은 이덕수(李德秀)이다. 읍의 터를 옮긴지 겨우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아 백성과 사물이 별로 번성하지 못하였지만, 큰 내가 앞에 가득 차 흐르고 늙은 버드나무들이 빽빽하게 서서 푸른 낭떠러지가 물결의 중심에 붙어 깍은 듯이 서 있다. 이름 하여 물에 비친 병풍, 영수병(映水屛)이라 하니 그럴듯한 놀이터가 될 만하다.
차차 평산(平山)을 지났다. 읍에 수십보 못 미쳐 일련정(一蓮亭)이 있는데 이곳 수령 이겸회(李謙會)가 작년에 지은 것이다. 비록 바닥이 얕아서 드러나는 것이 흠이지만 연못물이 밝고 맑으며 꽃과 버들이 열을 지어 퍽이나 고요하고 깨끗한 것이 사랑할 만하였다. 현판의 시문도 모두 수령 이겸회가 지은 것으로서, 그는 무관(武官)이면서도 이와 같이 흥겨운 취미가 있으니 매우 가상하였다. 저녁에 남천(南川)에 묵었다. 이날 120리를 갔다.

324.
여러 수행인과 헤어져 서로 길을 달리 하여 갔다. 계현은 대로를 따라 바로 중화, 평양, 상원 순안 등지로 향하게 하였고, 경박과 치삼은 삼화 등 대동강 가의 다섯 읍을 향하게 하였다. , 성부와 노유종은 곡산 길을 따라 바로 양덕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가리탄(加里灘)에서 조금 쉬면서 술을 사서 마셨다.
주막 주인인 노인이 우리를 끌어들여 마주 앉더니 민간의 기근 상황을 장황하게 말하였다. 또 전임 수령의 잘하고 못한 일과 간사한 아전들이 민폐를 끼치는 상황을 대강 말하더니 "이른 봄에 전하는 소문에는 곧 암행어사 행차가 있을 것이라고 해서 그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꽤 두렵고 꺼려했는데, 이때까지 오래도록 소식이 없으니 괴상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했다 "암행어사 행차가 비록 오지 않더라도 그 전에 먼저 소문이 났다면 아래 위 사람들이 마땅히 함께 경계하고 두려워해서 법을 어기지는 않았을 터이니 다행한 일이겠소." 노인이 말했다 "나같이 어리석은 백성이야 비록 어사 행차의 소식을 잘 알지 못하지만, 관가와 아전들은 서울과 서로 통하니 암행어사가 오고 안 오는 것을 틀림없이 이미 환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처럼 법을 계속 어기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웃고 일어섰다.
대개 금천 이후의 지방에서는 굶주림이 너무 심하여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에 떠돌며 구걸하는 자가 많았고, 머물러 사는 사람들도 굶주린 탓에 얼굴에 누른빛이 돌았다. 그러나 이른바 진휼 사업이라는 것은 대상자를 너무 엄밀히 선정하여 집이나 땅이 있는 사람은 살아나갈 방법이 없어도 고하여 호소할 곳이 없으니 슬픈 일이다.
신연포(新延浦)에서 점심을 먹고 신계현(新溪縣)을 지났는데 수령은 이회연(李晦淵)이었다. 시내와 산이 맑고 그윽하여 풍경이 그지없이 빼어나니, 이곳이 바로 기개 높은 관리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볼 만한 곳이었다. 마침 진휼 곡식과 죽을 나누어 주는 날이어서 자취가 드러나지 않게 굶주린 백성들과 섞여 현청(縣廳) 마당에 들어가 죽사발을 받아들었다. 현령은 한 동네의 가까운 친구인데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니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웃을 따름이었다. 저녁에 신곡원(新谷院)에서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325.
일찍 출발하여 곡산에서 점심을 먹었다. 수령은 이규현(李奎鉉)이다. 외부와 끊어진 산골짜기에 읍 터는 넉넉하게 트여 있었다. 앞에 용봉(龍峰)이 있는데 신덕왕후 본가의 옛 터이다. 비각 앞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숲이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계곡물을 떠내어 버드나무 잎을 띄워 바친 곳일 것이다. 식사 후에 호로천(葫蘆泉)에 걸어 올라갔더니, 샘 옆에 한가로이 거닌다는 뜻의 한보정(閑步亭)이 있었다. 전 수령 신위(申緯)가 세운 것이다. 샘은 절벽에 있는데 바위틈으로부터 나오는 크기가 회초리를 묶은 것만 하였다. 그것을 나무통으로 이어받아 파인 바위로 우물을 만들었는데 맑고 차서 떠 마실 만하였다. 신 부사가 호로병 하나를 잃었는데 배고픈 까마귀가 물어다 샘 위에 버렸기 때문에 그 샘에 호로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성부가 수년 전에 이 읍에 유람 온 적이 있었던 까닭에 친숙한 관리 몇 사람이 보러 와서 가는 곳을 물었다. 그는 지금 양덕(陽德)으로 책객(冊客, 수령의 개인참모)이 되러 간다고 대답하고 또 나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지금 영변으로 책객이 되러 가므로 동행하여 이곳에 왔다'고 하였다. 우스운 일이었다.
저녁에 문성강(文城江)을 건너 진() 아래 마을에 묵었다. 골짜기와 강, 산과 시장이 그림처럼 맑기 그지없는데, 물살이 매우 급해서 배로 가면 하루에 평양에 닿을 수 있다고 한다. 식사는 여관 주인이 칡가루 국수를 큰 사발에 주었는데 그것 또한 산골짜기의 별미였다. 이날 80리를 갔다.

326.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문성 관문의 화명탄(火鳴灘)에는 여관들이 큰 강에 임해 있고 강에는 작은 배들이 늘어진 버드나무 사이로 왕래하는 것이 또한 신기한 볼 거리였다. 하남산(河南山) 아래에 도착하여 멀리 치마도(馳馬道) 기념 비각이 날개를 펼친 듯이 산령에 임해 있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비문을 선왕 정조가 직접 짓고 전 수령 서장보(徐長輔) 때에 세운 것이다.
사고개를 넘으면 평안도와 황해도의 경계이다. 경계 지점의 여관에 도착하여 사람과 말을 머물러 두고 나만 다른 일행 몇 명과 함께 저녁에 양덕현(陽德縣)으로 걸어 들어갔다. 길을 떠난 후 인마를 많이 거느리고 일제히 읍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모두들 문득 의심을 품어 깊이 살펴보았었는데, 이날은 한명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참으로 등애(鄧艾)가 촉나라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밤에 이씨 성을 지닌 중군(中軍)의 집에 묵었다. 이날 110리를 갔다.

327.
일찍 출발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벽하루(碧霞樓)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온정원(溫井院)을 찾으니 우물이 바위틈에서 나왔고 산의 등 쪽도 역시 그러했다. 그곳마다 욕실을 두었는데 물이 처음 나오는 곳은 뜨거워서 손을 넣을 수가 없었다. 온정원의 창고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다. 양덕 현감의 행차를 만나게 되어 길가 집으로 피해 들어갔다가 좌수(座首) 이철수(李哲秀) 집으로 찾아 들어가 저녁밥을 얻어먹었다. 서창(西倉)에서 묵었다. 이날 80리를 갔다.

328.
일찍 출발하였다. 가창에서 점심을 먹었다. 창고 마을은 평안도와 함경도가 서로 통하는 큰 길이다. 화물은 산처럼 쌓이고 마을은 넉넉하고 번성하여서 산골짜기의 큰 도회였다. 저녁에 구암에서 묵었는데 이곳은 성천 땅이다. 이날 95리를 갔다.

329.
비가 조금 왔다. 성천에 들어갔다. 수령은 이기연(李紀淵)인데 마침 관아에 없었다. 수행원들을 각기 흩어지게 하고, 혼자 강선루(降仙樓)로 갔는데 문이 닫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지기에게 간절히 부탁한 후에야 겨우 들어갔는데 규모가 크고 아름다우며 앞이 탁 트이고 넓어서 참으로 눈이 트이는 듯하였다. 맑은 강과 절벽 또한 깊이 어우러져서 이름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할 만하였다.
홀로 앉아 있다 무료하여 누() 아래로 내려가니 맹인 한 명이 있기에 갈 길의 길흉을 물었다. 맹인이 말하기를 "손님은 지금 쇠를 차고 있으니 필시 지사(地師, 묘 자리 등을 보아주는 지관)일 것입니다. 점괘에 백리를 놀라게 하는 상이 있으니 장차 반드시 관서에서 크게 이름을 얻을 것입니다. 또한 횡재수가 있으나 길에서 모두 녹아 없어져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마 내가 몸에 마패를 차고 있으므로 지사로 오인한 것일 터인데, 우스운 일이다.
본관 수령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날이 저문 후 공주 박서방을 자칭하고 관아 문에 명함을 넣었다. 내가 본관 수령과 어려서부터 매우 친한 데다 그가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매우 많아 꺼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기쁘게 맞아들여 구걸하는 객으로 대접하여 베개를 나란히 한 채 밤이 깊었다. 그래도 관속(官屬)들은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겉이나 살피는 몸의 눈이란 참으로 우스운 것이다. 오로지 늙은 기생 하나가 깊숙이 들여다보더니 말하였다. "손님께서는 말에 부끄러움이 없고 널리 통하는 기운이 빼어나니 이미 높은 자리에 오른 분 같습니다. 장차 오래지 않아 반드시 귀하고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날 15리를 갔다.

41.
비가 조금 왔다. 일찍 출발하였는데, 푸른 봄비가 뒤늦게 피어났다. 저녁에 강동에 이르렀다. 본관 수령은 윤심규(尹心圭)이다. 산수는 온화하여 편안했고 마을은 빗살처럼 늘어섰다. 만류제(萬柳堤)는 홍양호(洪良浩) 판서가 현감으로 있을 때 쌓은 것인데 관찰사로 있을 때 비석을 세웠다. 기다란 둑에 버드나무 빛이 꽤나 볼 만하였다. 필련문(匹鍊門) 영금정(映金亭)도 매우 아름다웠다. 이날 50리를 갔다.

42.
일찍 출발하여 삼등에서 점심을 먹었다. 본관 수령은 김영익(金永翼)이다. 황학루(黃鶴樓)에 올라 푸르고 맑은 강물을 굽어보고 푸른 절벽을 앞에 대하니 또한 매우 후련하고 깨끗한 곳이었다. 여기서 배로 6,7리면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에 닿을 수 있다고 한다. 그곳은 엄기(嚴耆) 참판이 현감으로 있을 때 그윽하고 아름다운 곳을 찾아 처음 골의 이름을 붙인 것인데, 그 후로는 왕래하는 사신들이 머물러 놀면서 즐겨 감상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전에 죽리에서 약속하기를 서너 수령들과 만나 배를 타고 내려가 상원에서 바로 평양에 도달한다고 하였다는데 나는 갈 길이 매우 바빠 찬찬히 돌아볼 틈이 없었다.
우연히 이 읍의 전 향임(鄕任) 주원(朱遠)이라고 하는 자를 만나 36동천의 경치 좋은 곳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삼등 백성은 동천 구경하는 손님들을 모시느라 지탱하기가 힘들다면서 동천이 천벌을 받은 후에야 삼등 백성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산수를 유람하는 것이야 멋진 일이지만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저녁에 상원군(祥原郡)에 닿았는데 본관 수령은 이병희(李秉熙)이다. 해지는 저녁이 되었는데 들어가 묵을 곳이 없어, 길 가 달팽이같이 작은 집에 간절히 부탁하였는데 관노(官奴)로 일하고 있는 자의 집이었다. 다행히 받아들여져 그곳에 머물러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43.
주인이 관청에 일하러 나갔기 때문에 집에 주인의 처만 남았는데 예쁜 젊은 여자였다. 나는 그것이 꺼려져 혼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바로 따라 나갔다. 그러나 밤이 캄캄하고 비오는 날씨여서 나아가거나 물러갈 길이 막혔다. 마침 한 술집이 등을 켜고 국을 끓이는 것을 발견하여 뛰어 들어가 술을 사서 부엌의 화롯불을 대하고 있노라니 하늘이 밝아지고 비가 그쳤다.
동행하던 사람들을 찾아내 함께 출발하였다. 반천(盤泉)에 도달하여 성부와 노유종을 만나 함께 갔다. 중화 촌마을의 집에 당도하여 머물러 묵었다. 본관 수령은 백능수(白能洙)이다. 이날 50리를 갔다.

44.
일찍 출발하여 중화에 다다랐다. 지금까지 지나온 곳은 모두 산골짜기의 읍이었으므로 민간 풍속이 어리석고 민첩하지 못하여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이곳 이후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잇는 서관대로(西關大路)로 나섰으므로 간혹 의심을 품어 따져 묻는 자도 있었다. 지나가던 역졸은 내가 탄 말을 보더니 "이것은 청파역의 말인데 어떤 사람이기에 민간인 복장으로 타고 다니는가?"라고까지 하였다. 영제교(永濟橋)에서 점심을 먹었다. ()가 덕유(德惟)인 유형원(柳馨源)군은 일찍이 약속을 해 둔 자인데, 뒤에 출발하였으나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와 상봉하여 집에서 보낸 안부 편지를 보았다.
장림으로 바삐 나가 멀리 평양성을 바라보니, 누대와 성첩(城堞)이 큰 강 절벽 위에 맑게 빛나서 마음과 눈을 시원하게 틔워 주었다. 강을 건너는데 뱃사람 역시 사람들을 조사하는 자라서 지나온 길을 따져 물었다. 대답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이윽고 일행 및 말과 나누어져 각자 흩어져 성으로 들어갔다. 여관 하나를 찾아 머물러 묵었다. 감사는 김이교(金履喬)이며, 판관(判官)은 한백연(韓百衍)인데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조금 쉰 뒤에 연광정(練光亭)에 올라갔다. 하늘을 찌르는 누각, 나루에 어지러운 커다란 배들, 땅 끝까지 가득한 동네, 강을 따라 계속되는 숲.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다른 겨를이 없고 무어라 이름붙일 수 없었으니 진실로 평생토록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계현은 먼저 도착하여 감영 막사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저녁밥을 먹은 후 그에게 소개하도록 하여 감영에 들어가 평안감사를 뵈었다. 모두 계현이 막료의 직책(幕名)을 띠고 있어 남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고, 평안 감사도 친숙한 사이라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남모르게 이야기를 나눈 후 나와서 여관으로 돌아와 묵었는데 이미 닭이 울었다. 이날 50리를 갔다.

45.
다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차근차근 여러 경치를 보았다. 식사 후에 작은 배 하나를 세내어 부벽루(浮碧樓)에 올라갔다. 이어서 영명사(永明寺)로 숙소를 옮겼는데, 여관은 분주하고 떠들썩하여 남모르게 조사한 내용을 일기로 정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관속들이 꽤나 수선스럽다. 내 생각에는 틀림없이 어사가 성에 들어온 것 같다." 절의 중들도 모두 승군(僧軍)이고 유람객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활쏘기 모임으로 어수선하였다. 여기도 고요하고 적막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여관집보다는 나았기에 그대로 유숙하였다.

46.
아침을 먹는데 어떤 사람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옷을 벗어 맨살을 드러냈으며 해어진 작업복을 등에 걸쳤는데 그나마 가렸다 벗었다 하며 앞에 와서 밥을 구걸하였다. 그리하여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니 절의 중이 대답하기를, '이는 미친 사람입니다. 본래는 능라도(凌羅島) 향인(鄕人)의 아들로 부모와 처자가 있습니다. 어려서는 시와 문장에 능하고 경학을 공부하였는데, 어려움 속에서 학문에 힘쓰다가 괴로움이 지나친 까닭에 문득 마음의 병이 일어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불러다 앞에 앉혀 함께 식사를 하는데 반은 먹고 반은 흘렸다.

주역을 외게 하니 주역을 외고, 시경을 외우라면 시경을 외었다. 또 시를 짓게 하니 한두 귀절을 읊조렸다. 모습은 비록 까맣게 때에 절어 차마 볼 수가 없었지만, 그가 본래 단정하고 아취 있는 선비였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이 상하고 불쌍해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옷을 벗은 채 성에 들어가면 여인들이 황망히 달아나고, 저잣거리를 지나면서 떡과 고기를 움켜쥐어도 감히 무어라고 할 사람이 없다. 굶주려도 피곤하지 않고 추워도 얼지 않으며 재빠르기가 원숭이와 같아, 겹겹이 쌓인 바위 언덕을 날아 올라가면 저자의 어린 아이들이 다투어 기와조각과 돌을 던지며 쫓으니 볼 만하면서도 불쌍하다.
계현이 술과 안주를 제법 갖추어 와서 대접을 하는데, 남들이 볼까 두려워 배 하나를 세내고 종인(從人)으로 하여금 노를 젓게 하여 멀리 절벽 아래로 거슬러 올라가 실컷 마시고 먹은 후 돌아왔다.
주지승이 병이 매우 중하여 머물러 있기가 어려운 까닭에 중성(中城)의 별감(別監) 유희필(劉希弼) 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집주인이 꽤 세상일에 밝고 행동이 민첩하여 내실을 비워 머무르게 해주었다. 사람도 없고 조용하여 좋았다.
밤에 등을 걸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니 집주인 유군(劉君)이 평양의 누대와 강산이 빼어나고 기세 높은 협객들의 풍류가 번성함을 장황하게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기를, 평양부는 배와 수레가 통하고 화물이 모이는 곳이라서 식리(殖利) 사업으로 살아가며 부를 쌓기가 매우 쉽지만, 어지럽도록 화려하고 멋대로 놀아나서 엎어져 망하는 것 또한 쉽다고 하였다.

민간 유행어에 부자의 손자가 가장 불쌍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이익을 몰아 부를 쌓으면 아들이 방탕하게 놀러 다니며 남김없이 써버리고 손자는 굴러다니는 거지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배를 끌어안고 엎어질 정도로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방탕하게 놀러 다니는 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하겠다. 머물러 잤다.

47.
식사 후에 다른 사람들과 각처로 흩어져 갔다. 염탐을 한 후에 다시 대동문 누각에 오르니 감사가 자산 수령과 더불어 연광정에 와서 노는 것이 멀리 보였다. 감사의 맏아들 김군실(金君實)이 그 서()삼촌 면여(勉汝)와 더불어 배를 타고 골짜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노래하는 기생, 술과 안주가 부러워할 만했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감영에 소속된 자가 몽둥이를 들고 와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쫓으면서, 연광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고 하였다. 여러 차례 곤경을 겪으며 누각을 내려왔다. 성의 여첩(女堞)에 기대어 서있으려니 얼마 후에 김군실이 배에서 내려 성으로 들어갔다. 돌아서서 성 위를 쳐다보니 우리 일행이 기쁘게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사람이 바다처럼 많은 중에 다가가 말은 할 수 없고, 서로 가만히 들여다 보다 슬쩍 웃고 흩어졌다. 저녁 무렵에 돌아와 묵었다.

48.
이른 아침에 경박과 치삼이 함께 와서 모였다. 각자 문서들을 정리해 기록하고 여행 도구를 정돈한 다음 앞으로 나아갈 계획을 세웠다. 이날은 등불 밝히는 사월 초파일이다. 때가 음악을 그치는 때라서 노래 소리 악기 소리가 들리지 않고 등 시장이 열리지 않은데다가 비마저 와서, 참으로 맛이 안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감영에 들어가 감사에게 작별하고 닭이 울 때 돌아와 잤다.

49.
종일토록 비가 내려서 떠나지 못하였다. 여관에 그대로 머물러 있자니 몹시 무료하였다.

410.
성부, 덕유, 치삼, 경박을 각처로 나누어 보내고, 계현과 노유종만 데리고 느지막하게 출발하여 칠성문(七星門)으로 나갔다. 여기저기를 거쳐 기자묘(箕子墓)에 올라갔는데, 낮은 담을 둘러치고 석물(石物)이 있었으나 전혀 넉넉하지가 않았다. 무덤의 형태는 모서리가 넷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옛날 제도일 리는 없다. 정자각(丁字閣)이 너무 가깝고 돌계단 앞도 심히 황량하였으며, 금지하여 보호하는 지역이 넓히거나 키울 수가 없었다.

큰 성인 기자가 우리 동쪽 나라에 있었기에 옛날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이루어졌고, 여덟 조목으로 백성을 가르친 것은 오늘날까지도 의지할 힘이 된다. 무릇 우리 동쪽 나라에서 군신과 부자의 윤리가 있음을 아는 것은 모두 성인 기자가 남기신 가르침인데, 높이고 보답하는 법식이 마음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신원(新院)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자산 수령의 행차가 앞에 도착하는 바람에 혹시 자취가 드러날까 봐 두려워 그대로 지나갔다. 냉정굴(冷井窟)을 찾아보고 저녁에 자산읍에 묵었다. 본관 수령은 이지연(李志淵)이며 읍터는 별로 아름답지 못하였다. 이날 90리를 갔다.


411.
늦게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먼저 순천(順川)에 가려 했으나 대천(大川)에 다리가 끊기고 배가 없어 건널 수 없다는 소식이 들려 결국 은산(殷山)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강을 건너 읍에 들어갔는데 머무를 만한 곳이 없어 그대로 관아 문 밖의 여관으로 들어갔다. 관속의 무리들이 혹여 기미를 알아채고 와서 엿볼까봐 그런 것이다. 본관 수령은 박영원(朴永元)이다.

읍터는 사면이 토성으로 둘러싸이고 하늘이 갑자기 끊겨 곳곳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 모서리가 모두 일어나 서 있어서 어찌 보면 병풍을 둘러친 것 같고 어찌 보면 책상 같고 붓꽂이 같고 도검(刀劍) 같았다. 여기 저기 동굴이 뚫리고 움푹 파여져 있는 것 또한 기이한 볼거리였다. 저녁에 담담정(澹澹亭)에 올라갔는데 정자는 절벽 위에 있고 절벽 아래는 큰 강으로 둘러싸였다. 강 밖에는 큰 들이 있고 들 밖에는 먼 산들이 손을 잡고 늘어서 있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사방을 바라보니 맑고 아름다우며 탁 트여 환한 것이 관서에서 최고가 될 듯싶다.
인물이 모두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비록 베 짜는 여인이나 부엌의 아낙이라 하더라도 모두 아리따운 태가 있었다. 여관 주인이 말하기를 이 읍은 산수가 맑고 밝은 까닭에 문장(文章)하는 사람이 대대로 끊이지 않고 과거 급제자가 해마다 쏟아져 나온다고 하는데, 그 말이 정말 그럴 듯하였다. 읍의 일 또한 매우 한가롭고 조용하여 깊은 폐단이 되어 버린 것도 없었다. 참으로, 수령이 된 자가 직책은 젖혀 두고 노래나 읊조릴 땅이었다. 옛날에 내가 외직을 구하여 부안 수령 자리를 얻었을 때였다.

그때 이 읍에도 자리가 났지만 이조(吏曹)에서 은산은 박하고 부안이 넉넉하다 하여 이곳을 두고 그쪽으로 나가게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후회가 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밤에 달빛을 받으며 향리와 장교들 집 서너 곳을 찾아 본 끝에 유숙하게 되었다. 이날 30리를 갔다.

412.
늦게 출발하였다. 다시 계현과도 길을 달리 하여 노유종만 데리고 갔다. 신창(新倉)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곳은 순천 땅이다. 미륵령을 넘었는데 고개가 매우 가팔랐다. 저녁에는 가창에서 묵었다. 달밤에 서너 명의 마을 노인들과 어울려 읍의 정사와 민간의 고통거리를 함께 이야기하였다. 마을의 존위(尊位)가 말하기를 '근래에 듣자니 암행어사가 내려왔다는데 반드시 여기를 지날 것이기 때문에 읍내에 남몰래 지시하여 자취가 수상한 자가 지나가거든 즉시로 와서 고하라고 했는데, 아직 지나간 일이 없으니 괴상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80리를 갔다.

413.
저녁에 비가 왔다. 일찍 출발하여 용연(龍淵)을 지나는데 골짜기가 깊어질수록 지역은 더욱 기이해졌다. 절벽이 있고 맑은 연못이 있고, 곳곳이 그지없이 기이하고 마을마다 살 만하였다. 북창(北倉)으로 찾아 가니 그곳 또한 큰 도회여서, 마을이 빗살처럼 늘어서 있고 사람과 화물이 매우 풍부하였다. 동현(銅峴)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은 맹산현에서 묵었다.

맹산현은 많은 산의 가운데에 있다. 옥녀봉(玉女峯)이 우뚝 솟아 홀로 빼어났는데, 칼과 창을 세운듯하기도 하고 옥비녀를 꽂은듯하기도 하여 높고 아득한 모양이 기이하기가 그지없었다. 이것이 읍의 진산이다. 산골짜기의 풍속이 어리석고 사나워서, 다가가 이야기를 붙이기가 참 어려웠다. 본관 수령은 유창근(柳昌根)인데 서울에 올라가고 관아에 없다고 한다. 이날 70리를 갔다.

414.
종일 비가 내리다가 저녁에 조금 갰다. 붓 수십 자루를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걸고 향청으로 들어갔다. 내가 말하기를, 해주에 사는데 묘 자리 송사를 벌이다 자산에 귀양 갔는데 다행히 용서는 받았지만 돌아갈 길의 양식을 마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앞으로 함경도로 들어가 아는 사람에게 구걸하려 한다고 하였다. 읍의 수령이 헤아려주어 마침 붓과 먹을 얻었으므로 그것을 팔아서 여행 밑천으로 삼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들 믿기도 하고 의심도 하였다.
기생들이 여럿 옆에 앉아 있다가 쌍륙(雙陸)을 치길래 내가 점수 살대를 놓아주었더니 기생 하나가 살짝 웃으며 말하였다. "손님 손놀림이 꽤나 익숙하고 말씀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니 결코 곤궁하여 구걸하러 다니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어찌 그렇겠는가. 일찍이 듣자니 기녀들은 사람들을 매우 많이 겪어서 사람을 잘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더니, 그대를 보건대 산골짜기 사람임을 면하지 못하겠다." 기생이 말하였다. "산골짜기 사람들이라고 어찌 모두 식견이 없겠습니까. 오늘 밤에 우리 집에 왕림해 주신다면 제가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놀이꾼들을 많이 모을 것이니 함께 내기 쌍륙이나 치면 좋겠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구걸하러 다니는 사람이 주머니에 일전도 없는데 무엇으로 내기 놀이를 하겠는가." 기생 또한 살짝 웃었다.

내가 일어서 나오자 기생도 뒤따라오면서 자기 집이 저쪽에 있다고 가리켰다. 나는 다만 머리만 끄덕였다. 밤에 이리저리 생각하였으나 결국은 감히 갈 수가 없었다. 밤에 여관에서 유숙했다.

415.
여행 중에 다만 말 한 필이 있을 뿐인데 발에 병이 나서 탈 수가 없었다. 연로에서 혹시 말을 세내어 갈 수도 있겠으나 이 산골짜기 읍에서 말을 세내는 것 또한 어려웠다. 할 수 없이 노유종과 그 나귀의 앞대를 끼고 나란히 걸으면서 내 몇 개를 건너고 고개 몇 개를 넘었으니, 발이 부르트고 숨이 헐떡이는 괴로운 모습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점심을 휴암 에서 먹었다. 영원읍(寧遠邑)에 닿으려면 5리 남았는데 말이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하였다. 할 수없이 포탄(浦灘)의 좌수 한학모(韓學謨) 집에 묵었다. 밤중에 듣자니 이웃 사람이 묘향산으로 간다기에 이유를 물으니, 암행어사 행차가 바야흐로 묘향산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억울함을 호소할 일이 있어 급히 간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꽤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하였다. 10여 년 전에 어사 홍병철(洪秉喆)이 왔을 때도 그 집에 3일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이날 65리를 갔다.

416.
비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는데, 저녁 무렵에 조금 개었으므로 진흙을 헤치고 영원군(寧遠郡)으로 들어갔다. 본관 수령은 이병규(李秉逵)이다. 군이 외부와 끊어진 골짜기에 있는데 아마 맹산보다도 심하지 싶다. 읍 터가 좁아 바로 앞에 큰 강에 임하였다. 민가 백여호가 모두 기와를 돌로 대신하여 기와집과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다. 대개 평안도에 돌집이 많은데 이 읍은 특히 심하였다. 영파정(影波亭)이 안산(案山) 아래에 읍을 내리누르듯이 서 있는데 큰 강이 그것을 감고 있어 맑고 시원한 것이 참 좋았다. 이날 5리를 갔다.

417.
영파정에 올랐다. 점쟁이를 만나 점을 치니 송괘(訟卦)의 곤해괘(困解卦)를 얻었다고 한다. 점괘가 크게 길하였다. 여행길이 편안하고 조용하며 가을이 지나면 집에 돌아가겠으며, 역마가 남몰래 움직이는 형세가 있으며 또 내년의 재물 운수와 벼슬 운수가 크게 길하다고 하였다. 그대로 유숙하였다.

418.
말 두 필을 세내어 노유종과 함께 타고 출발하여 행차가 고성에 이르렀다. 성은 하늘이 만든 토성으로서 둘레는 5리 남짓인데 밖으로는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고 안은 여유 있고 평탄하여 뽕나무와 삼이 빽빽하게 무성하였다. 촌락이 늘어서 있는데 듣자니 한씨(韓氏)들이 대대로 산다고 한다.

위에 올라가 굽어보고 사방을 돌아보니 산들이 둘러서 호위하고 있는데 높이는 낮았다. 강물이 앞을 돌아 흘러, 활을 당긴 모양과 비슷했다. 평야가 넓게 트여있고 논 또한 많아서 참으로 낙토였다. 읍민들이 모두 이곳으로 읍을 옮기고자 하는데, 백성들의 힘이 쇠잔하여 관과 민이 모두 뜻은 있으되 이룰 수가 없다고 한다. 처음에 읍을 설치할 때 왜 이 낙토를 버리고 그 좁은 곳을 택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강을 건너 신창(新倉)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유령(踰嶺)을 넘어 바로 덕천(德川)의 삼탄(三灘)에 닿았는데 이곳은 정씨(丁氏)들의 마을이다. 양벽당이 강물을 내리누를 듯이 임하여 있는데, 시원하고 깨끗해서 사랑할 만하였다. 현판에는 앞 시기의 현인들이 이곳에 부쳐 읊은 시들이 많았다. 모두 정씨들이 수십대를 이어 살아온 땅인데, 수십호가 담장을 잇고 집을 붙여 살면서 아이들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치고 노비들에게 농업을 맡긴 것이, 깊은 곳에서 조용하게 살아가는 멋이 제법 있었다. 내가 머문 집의 주인 정계팔(丁繼八)도 단정한 선비로서 향시(鄕試)에 여러번 급제한 사람이었다. 생선을 요리하고 기장밥을 지어 내놓았다.
황혼이 질 때 읍으로 들어갔다. 본관 수령은 조제인(趙濟仁)이다. 읍이 터는 비록 크지만 볼 만한 것은 없었는데, 앞에 맑은 강을 마주한 것은 꽤 좋았다. 이날 70리를 갔다.

419.
비가 조금 왔다. 늦게 출발하여 휴령정(休寧亭)을 찾아가 보았는데 이것은 읍중의 노인들이 모여 회의하는 곳이었다. 강물이 둘러막았는데 버드나무 빛에 그늘이 엇갈리니 이 또한 뜻을 둘 만하였다. 평지원(平地院)에서 점심을 먹고 알일령을 넘었는데 고개에 올라와 보니 가히 '해를 찌르는 고개'라는 이름을 얻을 만하였다. 그 높이를 알 만하였다.
직동(直洞)에 다다랐다. 이곳은 개천 땅이다. 관서에 들어온 이래로 참봉 현심목(玄心穆)의 학문과 품행에 내실이 있음을 싫도록 들었는데, 그 집이 마침 길가에 있었으므로 말을 버려두고 들어가 만났다. 유람하다가 이곳에 도달하였노라고 말하였는데 주인이 영접하는 데 꽤 정성이 있었다.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친절하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으므로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산천이 매우 그윽하고 예쁘며 사는 집이 맑고 시원한데, 주인 나이는 바야흐로 84세로서 동안과 백발에 한점 속세 사람의 티가 없었다.

단정히 앉아 중용을 읽으며, 날마다 해야 할 공부를 정해 놓고 열심히 밟아나가는 것이 어린 아이가 공부하는 것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가묘(家廟)에 참배할 때는 자손들이 늘어서서 모시는데 고요하고 경건하기가 마치 조정과 같았다. 그는 귀와 눈이 밝고 맑았으며 정신이 어그러지지 않아서, 더불어 담론하자니 강물이 흘러가듯 말이 유창하였다. 책상에는 경전과 역사서. 제자백가서들이 열을 지어 있었고, 스스로 만든 천문 관측기 혼천의(渾天儀)는 규격에 어긋남이 없었다.

뜰 앞의 화훼와 목석 또한 매우 가지런하고 고왔다. 한밤중에 가야금 몇 가락을 타니 그것 또한 문장가나 시인다웠다. 저술 몇 권을 청하여 보니 시문은 매우 빼어나고 예설(禮說)은 자세하고 막힘이 없었다. 변방의 풍속이 어두운 지방에 이렇게 으뜸가는 유학자가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하였다. 마음이 취하여 떠날 수가 없어서, 결국 그 맏아들 삼원(森元)과 함께 별당에 머물러 묵었다. 삼원 역시 그 집 아들로서 손색이 없었다. 이날 60리를 갔다.

420.
일찍 일어나 작별하니 주인이 배웅하였다. 동구 밖에 큰 바위가 병풍처럼 줄지어 서고 시냇물이 그 가운데로 흘러가는데 물이 맑고 빨리 흐르며 검푸른 빛을 띠어 그 깊이를 잴 수 없었다. 가히 정자를 세울 만했다.
한낮이 못되어 개천군(价川郡)에 들어갔다. 본관 수령은 홍기석(洪箕錫)이다. 읍터가 제법 시원하고 맑았으나 재작년 홍수를 겪은 지 얼마 안 되었다. 읍내에 떠내려간 것이 수백호였는데 새로 짓는 것은 아직 자리 잡고 살만큼 되지 않아, 사람들의 집과 시내의 흐름이 모두 자리를 바꿨다고 한다. 가게 주인이 말하는데 일전에 자취가 수상한 사람이 와서 며칠 묵었다 갔다고 한다. 필시 계현이 지나간 곳일 것이다.
저녁 무렵에 유생들이 향교에 머물러 공부한다는 말을 듣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경전을 공부하는 유생과 시와 부()를 익히는 유생이 각기 다섯 명씩 묵고 있었다. 나는, 과거에 떨어진 사람으로서 산수를 구경하면서 두루 돌아다니다 이곳에 도달했다고 하였다. 모인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하는데 마침 각기 지은 글을 둘러놓았다. 나도 마침 떠오른 구야(龜野) 당숙의 시 몇 구절을 읊어 전하니 모두들 서로 돌아보며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도 각자 지은 것을 내보이는데 볼 만한 것이 꽤 있었다. 나는 말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칭찬하였다.
한 사람이 말하였다. "전해 듣기로는 이번 회시(會試)가 매우 공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서의 생원 진사 몇 사람은 거의 모두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찌 부자는 글을 잘하고 가난한 자는 글을 잘하지 못하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빈부를 따지지 않고 모두 직접 짓게 한다면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보다 꼭 낫다는 법이 없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지은 글을 빌려 제출한다면 반드시 부자가 합격할 것입니다. 아마 공정한 방식이 아닐 듯합니다." 누가 말했다. "손님 말이 맞습니다. 설령 성인이 시험관이 되었더라도 부자 석숭(石崇)이 응시하여 술을 만동이나 빚어 회계(會稽구천이 처음에 부차에게 패한 곳)나 적벽(赤壁)처럼 경치가 좋은 곳에서 왕희지(王羲之) 이태백으로 하여금 깊이 취하게 한 후 대신 짓고 쓰게 한다면 어찌 당연히 장원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요란하게들 웃어댔다.

내가 말했다. "요즘 세상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도 바른 도리가 없어져서, 가난한 사람들이 글을 파는 것은 허물하는 법이 없고 부자가 남에게 글을 짓게 하여 급제하는 것만 탓합니다. 시험을 주관하는 이가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글 잘하고 글씨 잘 쓰는 사람은 부자라 하여 밀어내고 글 못하고 글씨 못 쓰는 사람을 가난한 자라 하여 뽑은 후에야 겨우 공정한 도리라고 할 것입니까" 한 사람이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글을 파는 자의 죄입니다. 시험을 주관하는 자에게 무엇을 탓하겠습니까?"
그러고 나더니 내게 술과 떡을 권하였다. 내가 사양하니 모인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은 이 모임의 오래된 풍습입니다. 행여 사양하지 마십시오." 나는 젓가락만 대고 물러나와 여관에서 유숙하였다. 이날 30리를 갔다.

421.
또다시 노유종과 길을 나누어 그는 바로 안주로 가도록 하고 나는 일찍 출발하여 순천 땅으로 향하였다. 무진대(無盡臺)에서 점심을 먹었다. 무진대는 절벽 위에 있는데, 사면이 바위로 된 낭떠러지이고 강물이 감돌아 흐르며 급하게 요동쳤다. 가슴이 오싹하여 내려다 볼 수가 없었다. 정자 또한 높이 솟아 탁 트이고 아득한 것이 연광정이나 강선루에 버금갔다.
정자 위에 병풍을 두르고 휘장과 자리를 폈으며 부뚜막을 만들어 아전들이 접대하는 것이 모두 다 매우 요란하였다. 이지연이 성천을 거쳐 묘향산 구경을 가느라 국령, 그리고 방금 진사시에 합격한 그 맏아들과 더불어 바야흐로 이곳에 도착하는 까닭에 이곳 수령이 그들을 맞이하여 대접하느라 그런 것이다. 조금 있으니 이지연의 배가 상류로부터 기생과 악공을 싣고 물결 따라 내려왔다.

나는 모래밭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마침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지연이 놀라 물었다. "공주 박생원이 어디서 나타났습니까." 내가 말했다. "정해진 곳도 없이 여기저기 다니다가 문득 우연히 만나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함께 무진대에 올라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한 후에 작별하였다.
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성부와 경박이 가는 것을 만나 집에서 보낸 안부 편지를 받아 보았다. 성천으로 가는 편에 부쳐온 것이다. 길에서 잠시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다시 은산 땅 북창(北倉)의 앞강을 건넜다. 소나기를 만나 길가의 어떤 집으로 들어 갔는데 어린 아이 하나가 젖을 찾으며 큰 소리로 울어댔다. 주인 할머니가 달래면서 말했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어사가 온다." 내가 어사라는 것은 알지 못하고 어린 아이에게 겁을 주는 말이었다. 내가 말하였다. "어사가 비록 무섭기는 하지만 어린 아이가 어떻게 알겠소." 노파는 "근래 듣자니 어사가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하여 이 마을의 일을 맡은 무리가 모두 겁에 질리고 바짝 얼어서 몸에 정신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어린 아이를 달래고 으르느라고 하는 말일 뿐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사가 호랑이 곰이나 되는가. 어찌 그리 무섭겠는가.'라고 묻고 이어 말했다. "어사는 임금님께서 남몰래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관리들의 수탈과 민생의 고통을 살피게 하는 것이므로 죄가 있는 자는 비록 무섭겠지만 죄 없는 자야 어찌 무서운 것이 있겠는가." 노파가 말했다. "요즘 세상에 어찌 죄 없는 자가 있겠습니까. 암행어사 소식이 있은 후부터 읍내와 마을을 가릴 것 없이 스스로 몸들을 사려서, 관속이 오랫동안 나오지 않고 토호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제발 바라건대 어사가 내 평생토록 돌아다닌다면 빈궁한 마을의 작은 백성들이 의지해 살 만하겠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이런 것을 보면 어사 행차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임을 알 만하다.
저녁이 되기를 기다려 순천으로 걸어 들어갔다. 본관 수령은 이현기(李顯夔)이다. 읍터는 볼 것이 없었지만 유련정(惟蓮亭)은 한 자리 차지할 만하였다. 이날 70리를 갔다.

422.
새벽에 천둥이 울고 비가 내렸는데 개기를 기다려 길을 떠났다. 내가 암행어사가 되어 서도로 나온 이후로, 멀고 가까운 곳의 자잘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어사의 수행원이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어사와 친한 사이라고 칭하기도 하면서 관리와 백성들을 공갈 협박하여 돈과 재물을 빼앗았다. 그 죄는 죽여도 시원치 않고 폐단 역시 적지 않은 까닭에 일찍이 여러 읍에 공문서를 내려 보내 조사해 잡아들이도록 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오자 읍의 장교들이 오히려 내가 돌아다니는 것에 의심을 품어, 몰래 발자취를 더듬어 쫓아다니면서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몹시 힘이 들었다.

어떤 고개에 도달하여 인마와 수행원을 먼저 보내고 나무 아래에서 홀로 쉬노라니 추적하는 자가 도달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먼저 엉뚱한 일을 말하면서 나를 살피느라 내려 보고 올려보고 하였다. 나는 얼굴색에 조금도 변함이 없이 묻는 대로 대답하였더니 그 사람은 암행어사가 다닌다는 이야기를 하고 또 가짜어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지금 남몰래 조사하러 다니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끝내 내 행동거지가 수상하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러더니 민간에서 붉은 실(紅絲)이라고들 부르는 쇠줄을 허리춤에서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길손은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이 지경에 이르러 화가 곧 머리에 닥치는 터라 나도 대답 없이 가슴에서 마패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너는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그 순간 그 사람은 얼굴색이 흙빛이 되어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면서 쳐다보더니 곧 쓰러졌는데 언덕을 따라 판자 위의 작은 구슬처럼 몸이 굴러가다가 평평한 곳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나는 마패를 들어 다시 가슴 속에 감춘 후 밑으로 내려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위로하였다. "너나 나나 모두 각자 나라 일을 하는 것이다.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되니 힘을 내서 일어나 가거라." 그러고 나서 앞장서 자리를 떠나 고개를 넘어 가버렸다. 그 광경은 참으로 포복절도 할 일이었다.
빈수원(頻水院)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안주에 도착하였다. 그대로 가면 동문을 통해 들어가야 했지만 지목받을까 두려워 빙 돌아서 서문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백상루(百祥樓)에 올라가니 누각은 높이 솟아 앞이 탁 트였으며 크고 아름다웠고, 성첩과 관청 건물들은 평양에 버금갔으니 이곳은 역시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었다. 저 중국의 수 양제와 당 태종이 쳐들어 온 때로부터 홍경래 난()에 이르기까지 이 성은 적에게 함락된 적이 없고 산하가 참으로 아름다우니 가히 복 받은 땅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다만, 옛날에는 강의 흐름이 성벽을 치며 지나가서 평양 대동강가의 연광정이나 진주 남강가의 촉석루와 같았으나 50년 전부터 점차 성 밑에 넓게 흙이 쌓여 강물이 활 사거리의 7,8 배나 물러나게 되었으니 그것이 흠이라고 하겠다. 예전에 영조 정조 두 임금님께서 여러번 골똘히 생각하시어 평안병사를 뽑아 보내 강의 흐름을 막을 방도를 마련하게 하셨으나 아직까지 이룬 것이 없다.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누각에서 내려와 북문으로 나가 칠불사(七佛寺)에 들어갔다. 수양제가 원정 왔을 때 군대를 강 밖에 주둔시켰으나 그 강에 막혀 건널 수가 없었다. 저녁 무렵 일곱 노인이 옷을 걷어 올리고 강을 건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음이 이미 단단히 얼었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몰아 전진시켰다가 얼음이 꺼지는 바람에 모두 강물에 빠져 죽었다. 아마도 일곱 노인은 신이 변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안주 사람들이 그들의 상을 빚어 절에 모신 데서 그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어두워진 후에 여관에 들어가니 일행 일곱 명이 일제히 도착하였는데 모두 탈이 없어서 매우 기뻤다. 조용하고 구석진 곳을 찾아 마음 편히 쉬면서 묵었다. 이날 90리를 갔다. 안주 목사는 홍시제(洪時濟), 평안 병사는 조화석(趙華錫), 우후는 정홍관(鄭鴻觀)이었다.

423.
각기 몰래 조사한 기록들을 내놓고 수정해가면서 옮겨 적었다. 계현은 지금 감영 장교의 직책을 띠고 있으므로 끝까지 자취를 감추기가 어려운 까닭에 먼저 평양으로 돌려보냈다. 종일토록 피곤하여 누워 있었다.

424.
경박과 덕유를 각처로 나누어 보냈다. 나도 떠나려 하였으나 비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저녁에 잠깐 개었기에 망경루(望京樓)에 올라갔다. 땅의 형세가 갑자기 툭 끊어진 것이 평양의 을밀대와 거의 같았다. 저녁에 여관에 돌아와 묵었다.

425.
머물러 있었다. 성부와 치삼은 다른 길로 가게하고 노유종만 데리고 출발하였다. 길에서 큰 비와 우박을 만나 정좌수의 집으로 피해 들어갔다. 숙천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읍 터는 비록 특별히 볼 것이 없었으나 역시 큰 읍이었다. 본관 수령은 남석구(南錫九)인데 직책이 바뀌었지만 아직 돌아가지 않았고 신임 수령 이관식(李觀植)은 부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밤에 유곡(柳谷)에서 묵었다.
여기부터는 바닷가 읍이다. 며칠 새 더위가 시작되어 매우 힘들다. 고개를 오를 때 바다 빛을 바라다보면 퍽이나 시원하다. 영유까지 십리 안쪽이다. 이날 80리를 갔다.

426.
일찍 영유현으로 들어갔다. 본관 수령은 이정신(李鼎臣)이다. 여기 또한 큰 읍이지만 산수간에 유람할 경치는 없다. 백로리(白鷺里) 김좌수 집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그는, 좌랑을 지내고 지금은 죽은 김희린(金禧麟)의 아들이다. 일찍이 김좌랑과 친숙하였지만, 대대로 사귀는 우의를 말하는 것은 하지 못하였다. 저녁에 돈산촌(敦山村)에서 묵었다. 증산까지는 거리가 20리에 못 미친다. 이날 70리를 갔다.

427.
아침 일찍 증산으로 들어갔다. 본관 수령은 권중임(權中任)이다. 읍 터는 꽤 트이고 맑았으며 마을이 깨끗하고 질서 있었다. 길에서 바라다보니 본관 수령이 기생 하나와 손님 한 명을 데리고 관아 왼편의 초가 정자에서 함께 활쏘기를 하고 있었는데 매우 청아하게 느껴졌다. 과녁 있는 쪽으로 산등성이를 넘어가 한 나절을 보고 즐겼다.
본관 수령은 나와 한 동네에 사람이므로 알고 지내기는 하지만 한번 불러 함께 세상일을 이야기하지는 못하였다. 속내를 알지 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저녁에 함종에서 묵었다. 본관 수령은 임태순(任泰淳)이다. 읍 터는 볼 것이 더욱 없었다. 이날 40리를 갔다.

428.
듣자니 읍의 창고에서 환자(還上) 곡식을 나누어준다기에 여러 사람 중에 섞여 창고 마당으로 헤치고 들어갔다. 여기저기 돌아보는데 나누어주는 쌀이 품질이 거칠다고 몇 사람이 수령 앞에 나아가 고발하려 하였다. 아전들이 함께 말리니 그 사람들이 원망하여 말하였다. "근래 암행어사가 내려왔다고 하는데도 당신들은 이처럼 농간을 부리는가. 거친 곡식을 나누어 준데다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길까지 막아버리면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이오."

아전들이 웃으며 말하였다. "작년에 거친 곡식을 바치고서 지금은 고운 곡식을 받으려 하다니, 고운 곡식이 어디서 생겨나겠는가. 우리들이 농간하는 것이 아닌데 당신들이 우리를 죽이려 하는가? , 암행어사가 이 마당에 들어와 있지나 않은지 어떻게들 알고 이처럼 소란스럽게 구는 거요." 그 몇 사람은 결국 말을 못하고 받은 것을 헤아려 흩어졌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호소할 곳도 없다니, 참 심하구나.
오후에 걸어서 낙민정(樂民亭)에 나갔다. 연못이 꽤 넓고 홰나무 버드나무가 뒤섞여 그늘을 이루니 물고기들을 바라보기에 정말 좋은 자리였다. 고기 잡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낚시터에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시험 삼아 암행어사 소식을 찔러보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암행어사 행차가 두세번 지나갔는데 어제 오늘 또 왔다고 합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언뜻 들으니 오늘 온 사람은 가짜인 것 같다고 하던데 잘 알지는 못하겠습니다."

내가, "어느 간 큰 녀석이 감히 어사 행세를 한다는 말이오."라고 말하니 "근래 인심이 맑지 못하니 못된 무리가 가짜로 다니면서 재물을 빼앗는 폐단이 없으란 법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입을 다물고 일어나 여관에 돌아와 앉았다.
갑자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와 말을 붙이는데 다녀온 길을 따져 묻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에게 따져 보았더니 낚시꾼에게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었다. 마음에 매우 이상하게 생각되어 수행원을 시켜 뒤를 밟아 살피게 하였더니, 아전과 장교들이 아래 위 집집마다 터를 잡고 모여든 것이 우리를 에워싸고 조여드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즉시 비밀히 공문을 발행하여 나에 대한 말을 지어낸 사람을 잡아 가두게 하고, 밤을 타서 출발하였다. 5리 밖에 있는 여관으로 나가서 묵었다.

429.
노유종이 병이 나서 길을 갈 수가 없기에 몸을 조섭한 후 바로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두 역노만 데리고 일찍 출발하여 이문동(里門洞)에서 점심을 먹고 도감(都監) 이사원(李思遠)을 만나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삼화에 도달하였는데 본관 수령은 구진(具縉)이었다. 읍터는 비록 컸지만 별로 아름답지 않았다. 해가 아직 높았으므로 여러 곳을 빙빙 둘러보다 어둠을 타고 여관으로 들어가 묵었다. 이날 50리를 갔다.

51.
일찍 출발하였다. 마현(馬峴)을 넘어 양의공(襄毅公) 김경서(金景瑞)의 영당(影堂)으로 찾아 들어가 참배하였다. 유생 서너 명이 그곳에 머무르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모두 양의공의 후손이었다. 영당이 그 산 아래에 있었고 옆에 세워진 풍비(豊碑)는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비문을 지은 것이었다. 그 제사를 모시는 후손 김치화(金致和)는 웅천(熊川) 수령을 하다가 그만 두고 돌아온 후에 문을 닫아걸고 부모를 모신다고 한다.
비를 무릅쓰고 용강현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본관 수령은 안광직(安光直)인데 평양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읍 터는 꽤 트이고 맑은데 읍 앞 연못의 정자(蓮亭)는 더위를 피할 만하였다. 또 읍 뒤에 있는 황룡산성(黃龍山城)은 성첩이 꽤 단단하고 사면이 툭 끊어져 떨어진 것이 바닷가의 길목을 막는 요충지로서 꼭 지켜야 할 곳이라고 할 만하였다. 처음에 하나하나 비교하면서 똑똑히 둘러보다가 비를 이기지 못하여 곧 출발하였다. 길에서 용강 수령을 만났다. 정신없이 말에서 내려 길 왼편으로 돌아 피한 후에 강서현으로 급히 들어갔다.
본관 수령은 윤헌규(尹憲圭)이다. 읍 터가 꽤 편안하고 온화하였으며, 넉넉하고 번성하였다. 먼저 구고정(九皐亭)에 올랐는데 그것은 연못에 있는 정자였다. 연못이 넓고 탁 트였는데 안에 섬이 아홉개 있으므로 정자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밤중에 진사 홍희규(洪羲圭)를 찾아갔다. 그는 관서의 뛰어난 인물인데 내 얼굴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는 역시 처음에 몹시 냉대하다가 밤이 깊어지자 등불을 걸더니 무릎을 바싹 대고 말하였다. "어찌 이 누추한 곳에 오셨습니까? 귀인은 나를 알지 못할지라도 나는 일찍이 평동(平洞)에 모인 자리에서 여러번 뵈어 귀한 얼굴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따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여 말이 새지 않도록 할 것만 부탁하고 여관으로 돌아와 묵었다. 이날 60리를 갔다.

52.
일찍 출발하여 태평시장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 시장은 도회지에 있는데 백성들의 집도 꽤 넉넉하고 번성하였다. 그곳의 큰 다리인 적교(狄橋)를 건너갔다. 다리 아래는 끝이 없는 큰 평야로서 바다로 나가는 바다 어귀까지 그대로 닿아있었는데 바다의 조수가 큰 들에 밀려들어 평평한 호수를 이루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폭우를 만나는 바람에 급하게 평양 보통문(普通門)으로 달려 들어가 전번에 묵었던 유희필의 집에 바로 도착하였다. 일행이 모두 모였는데, 경박 만이 아직 오지 못하였다. 이날 70리를 갔다.

53.
만수대(萬壽臺)에 가서 계현과 진사 홍성구(洪聖九)를 만나서 집에서 보낸 문안 편지를 보았으며, 밤에는 감사를 찾아갔다가 닭이 운 다음에 여관으로 나와 묵었다.

54.
덕유와 치삼을 먼저 돌려보냈다. 여러 읍을 이미 두세번씩 조사했으며 일행에 사람이 많아 심히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함께 출발하여 밤에 장수원(長水院)에서 묵었다. 이날 30리를 갔다.

55.
일찍 출발하여 직통하는 큰 길을 택하였다. 학나루(鶴津)를 건너 강동현에서 점심을 먹었다. 성천 땅으로 들어갔는데 의관(衣冠)을 갖춘 자들이 끊임없이 오고 가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넘을 때 말에서 내려 쉬면서 그 이유를 한번 물어보니, '우리 부사가 이름난 관리인데 승지에 임명받아 서울로 가신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이처럼 훌륭한 수령을 잃고 어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온 읍의 크고 작은 백성들이 지금 읍내에 모두 모여 수레를 끌어당겨 행차를 막을 계획을 세우고, 한편으로는 감영에 나아가 호소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계시도록 청원서를 올리려 합니다.

내가 말했다. "백성들의 마음이야 비록 머무르게 하고 싶더라도 이미 직책이 갈린 관리를 어찌 받들어 앉히겠습니까. 감영에서 비록 머무르게 할 것을 청한다 하여도 조정에서는 또 어떻게 이 사람을 오래 외직에 둘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는 일은 결국 헛수고가 될 뿐 이득은 없을 듯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근래 듣자니 암행어사가 내려왔다는데 이렇게 훌륭한 관리를 어찌 백성을 위하여 그대로 둘 것을 청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어사된 사람 또한 어사라고 이름붙일 수가 없겠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어사가 조정에 보고하는 것이 어느 때일지는 모르지만 필시 거기에 앞서 신임 수령이 부임하실 것이니, 어느 겨를에 보고하여 요청하겠습니까." 대답하기를 "어사는 임금님의 명령을 받드는 신하입니다. 죽이고 살리는 것이 그 손에 달려 있고 내쫓고 높여주는 것을 뜻대로 하는 것인데,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사를 꾸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기연 그 친구가 얼마나 덕 있는 정치를 베풀어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는 일이란 우스울 따름이었다.
저녁에 성천부에 들어가니 이기연은 지금 유선관(留仙館)에 나가 거처하며 모레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이름을 바꿔 쓴 명함을 넣은 후에 들어가 만났다. 자리에서 물러나 툇마루에 앉아 있자니, 젊은 기생 하나가 옆에 앉아 한참 들여다보고 말하였다. "제가 겪어본 사람이 많습니다. 손님께서는 결코 궁하고 어려운 분이 아니신데 행색은 왜 이렇게 초라하신가요. 다시는 제가 선비님들 관상 볼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대의 예리한 눈은 칭찬하고 격려해 줄 만하구만. 지나간 것이야 그렇다 치고, 앞길에는 좋은 바람 부는 시절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기만 하다면 마땅히 그대를 황금으로 지은 집에서 지내게 하겠네." 기생이 말하였다. "옛 말에 이르기를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고 여인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얼굴을 꾸민다고 하였거니, 진정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그 사람의 속옷이 된다 하더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천한 사람이지만 돈과 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늘 어찌 꼭 황금으로 만든 집을 기대하겠습니까. 외람되오나 손님께서는 저를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듯하니, 그것이 도리어 가슴이 아픕니다." 나는 다만 웃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어서 그녀와 더불어 시문을 평하고 산수를 논하였으며 각자 지은 시 몇 편을 읊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운 이야기에 싫증을 느낄 겨를이 없고 가락과 품격이 맑고 아름다웠으며 생각과 마음이 속세를 벗어났으니, 참으로 당대에 견줄 바가 없는 신이 내려준 재주꾼이었다. 그녀의 기생 이름은 부용(芙蓉)이고 자는 추수(秋水)이며 호는 스스로 수일(水一)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지방 사람들이 시에 능하다고 이름 붙여주었고 일찍이 서울에 드나들어, 귀한 집 자제와 높은 자리의 명사들이 그를 끌어다 함께 앉아 시와 노래를 주거니 받거니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나도 그 이름을 많이 듣고 그가 지은 시를 익히 보았는데 이제 직접 만나보니, 과연 이름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밤에는 주인 수령과 함께 유선관에서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56.
일찍 출발하여 강동으로 들어갔다. 비오는 형세가 매우 급하여 그냥 머물러 묵었다. 이날 50리를 갔다.

57.
일찍 출발하여 큰 길을 따라 갔다. 열파정(閱波亭)에 오르니 정자는 절벽 위에서 맑은 강물을 내리누르듯이 서 있고 눈에 들어오는 지경이 매우 넓게 트여서 이곳 또한 명승지였다. 강을 건너 장시를 거쳐 장수원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으로 들어갔다. 경박은 이미 양덕에서 돌아왔다가 노유종과 함께 나갔고, 성부가 혼자 머물러 있기에 함께 묵었다. 이날 90리를 갔다.

58.
저녁 무렵에 대동문으로 걸어 가보니 이지연과 국령의 배가 내려와 앞강에서 맞이하는데 매우 화려하였다. 성 머리에 우두커니 서서 행차로 인한 먼지만 바라볼 뿐이니 그들은 천상의 신선에 그칠 정도가 아니었다. 밤에 관찰사가 집무하는 선화당으로 들어가 국령과 함께 더불어 세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한밤이 되어 돌아왔다.

59.
식사 후에 강 머리에 나가 국령이 막 출발하는 것을 보았다. 피리와 북, 돛과 돛대며 위엄 있는 의식이 매우 요란하였다. 국령은 그림배 위에 단정히 앉았는데 경란(鏡鸞)이라는 모시던 기생이 옆에서 애틋한 미련에 이별하지 못하였다. 국령은 손을 저어 들어가게 하였지만 경란은 더욱 말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여 울기만 하니 눈물이 비처럼 쏟아질 뿐이었다. 배가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국령 또한 정을 끊고 떨쳐 떠나지 못하더니, 마침내 함께 타게 하여 배를 출발시켰다. 크게 웃을 만한 일이었다.

510.
일찍 출발하여 태평시(太平市)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비를 무릅쓰고 바로 용강으로 들어갔다. 관아 문전에서 공주 박서방이라 자칭하며 문지기를 불러 본관 수령을 만날 것을 청하니, 그 역시 기미를 알아채고 맞아들였다. 한밤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하였는데 아전들이나 기생들이 의심을 두는 자가 통 없었다. 이날 120리를 갔다.

511.
종일토록 비가 왔다. 비를 무릅쓰고 되돌아 출발하여 태평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평양으로 들어왔다. 이날 120리를 갔다.

512.
경박과 노유종이 들어왔다. 각자 조사한 기록을 정리하게 하고 잠깐 연광정에 갔다. 강을 건너다보니 안장을 갖춘 말이 구름과 같고 쌍 피리소리가 밝게 울리는데, 급하게 뱃사공을 불러서 사공이 관청 배를 가지고 가서 건네주었다. 평양 외성 사람으로 새로 급제한 전윤담(全允淡)의 빛나는 귀향 행차인 것이다. 강을 건너더니 곧바로 내성의 넓게 트인 큰 길로 접어들어 지나갔다. 이때가 마침 음악을 쓰지 못하는 때여서 비록 풍악은 울리지 못하였지만 광대와 기녀들이 종종걸음을 치면서 뒤쫓는 것이며 위엄 있는 의식이 그 또한 하나의 장관이었다.
저녁에 경란의 집을 찾았다. 경란은 이곳에 소속된 기생이면서 성천에 가서 머무르고 있는 자인데 지금 막 돌아왔으나 마침 집에 없었다. 이름이 빙심(氷心)이라고 하는 그 어머니가 나이는 41 세이고 얼굴 모습은 별로 쇠하지 않았는데, 맞아들이는 품이 꽤나 정성스럽고 정다웠다. 내가 말했다. "나는 구걸하러 다니다가 성천에 가서 경란과 얼굴을 익혔으므로 믿고 찾아왔지만, 행색이 이와 같이 초췌한데 주인네가 이처럼 극진히 대해주니 몹시 고맙네."

"제가 화류 마당에서 30년 동안 늙어오면서 겪어본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논다는 사람들이 우리집에 올 때는 모두들 깨끗한 옷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하여, 시골의 못난 선비들은 감히 문도 들여다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손님께서는 해진 도포와 찢어진 신을 신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행동과 말씀이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당당하시니, 반드시 오래지 않아 아주 귀하게 될 분이십니다. 제가 어찌 감히 만만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붉은 이슬 같은 술을 유리잔에 가득 부어 권하니 나는 큰 잔을 셋이나 연거푸 비워버렸다.
조금 있으려니 경란이도 돌아와 나를 기쁘게 맞아주었다. 그가 이야기하기를, 성천에 있을 때 부용이 나에게 무릎을 바싹대고 정성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어째서 구걸하며 다니는 길손과 서로 극진하게 구는가?"라고 물으니 부용이 "여러분이 무얼 알겠소마는 성천 태수가 귀인이라는 것만은 알 것이오. 이 손님이 지금 비록 초췌하지만 야박하게 대하면 성천 태수를 위하는 길이 못될 겁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행색을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비밀을 알아챈 것을 알고서는 일어나 나왔다.

513.
오후에 일제히 길을 떠나, 황혼에 순안현 관아 문 앞에 바로 닿았다. 본관 수령 이문용(李文容)은 마침 산사로 놀러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관속들은 그를 마중하려고 모두 관문 밖에 모여 있었다. 역졸들이 빠른 소리로 암행어사 출도를 한번 외치니 사람들이 무리지어 놀라 피하는 것이 마치 바람이 날고 우박이 흩어지듯 하였다. 우선 문루에 올라가 바라보니 온 성안의 등불이 모두 꺼지고 바깥문들이 빠짐없이 닫혔다. 계속되는 소리로 빨리 외치는데 끝내 사람의 자취는 없었다. 내가 거느린 무리가 여기저기서 들어오고 관아 건물들은 비어서 사람이 없었다. 나도 오래 서 있기가 어려워 천천히 동헌으로 들어갔는데 그곳 역시 빈 집이었다. 암행어사의 위엄과 서슬은 과연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참 있자 차차로 모여들더니 병풍을 두르고 자리를 펴며 촛불을 밝혀서 일을 볼 자리가 점차 위엄과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밤이 깊어 큰 상을 하나 차려 내왔는데 마침 체증으로 설사가 나서 젓가락을 댈 수가 없었으니, 한번 실컷 먹는 것도 운수가 따로 있는듯하여 웃음이 나왔다. 조사하고 다스리는 일을 대략 행한 다음 닭이 세번 운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날 50리를 갔다.

514.
종일토록 문서와 장부를 조사 검토하고 죄수들을 심문하여 다스렸다. 이 읍은 둘째 할아버님께서 귀양살이 하던 곳이다. 시험 삼아 그때 머물러 지내시던 집의 주인을 알아보니, 그는 이미 죽고 그 아들 김원호(金元灝)가 지금 아전 일을 이어받아 하고 있으므로 불러들여 좋은 낯으로 만나보았다.. 당시 그 어머니가 매우 부지런히 받들어 모셨다는 것을 들었기에 음식을 물려 내려 주었다. 겁먹어 두려워하던 끝에 좋아서 기뻐하는 것이 배를 움켜쥐고 웃을 만하였다.

515.
비가 조금 왔다. 서류 조사와 죄수 처리를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516.
서류 조사가 끝났기에 즉시 각 창고들을 닫아 봉하게 하였다. 내가 본관 수령과 개인적으로는 친교가 있지만 처지가 어쩔 수 없어 부득이 이렇게 하게 되었는데, 비록 공무를 수행하는 것이라지만 마음으로는 차마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이미 졌는데 즉시로 말을 끌어내 출발하였다. 관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앞뒤의 마부며 수행자들을 일제히 뒤로 떨구고 샛길을 따라 날아가자니 마치 달아나는 것 같았다.

전과 같이 평복에 남루한 거지차림이니 한림학사 소내한(蘇內翰)의 일장춘몽도 이처럼 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저녁에 수우점(水隅店)의 여관에 들어가 묵었다. 이날 10리를 갔다.

517.
일찍 출발하여 모안(母岸)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용강현에 들어갔다. 현의 아전들이 기미를 알아채고 무섭고 당황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미리 병풍이며 휘장을 치고 다과를 준비하기를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는 번갈아 문밖에 나와 눈치를 살피기를 끊임없이 하였다. 우리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자리에 들어 깊이 잤다. 이날 120를 갔다.

518.
닭이 처음 울 때 일제히 길을 떠났다. 새벽 달빛을 받으며 마현(馬峴)을 넘어 바로 삼화읍으로 들어가려니 하늘이 비로소 밝아 왔다. 곧바로 관문 밖을 향하니 본관 수령은 마침 평양 행차를 떠나고 있었다. 다시 빠른 소리로 한번 외쳤는데 현의 아전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터라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였다. 한참 있으니 와서 모이기에 동헌으로 들어갔다. 심문해 다스리는 일을 크게 벌이고 머물러 잤다. 이날 20리를 갔다.

519.
그대로 머물렀다.

520.
문서 조사가 끝났으므로 날이 밝은 후 용강현으로 들어갔다. 밤이 이미 깊었는데 본관 수령이 이름을 향염(香艶)이라고 하는 기생 하나를 잠자리에 들여보냈으므로 함께 잤다. 이날 20리를 갔다.

521.
그대로 머물렀다.

522.
황룡산성에 올랐다. 성은 읍의 몇 리 뒤에 있는데 삼면이 툭 끊어져 내렸고 일면만 완만하게 되어 있다. 밖에서 성안을 살펴보면 성을 지킬 곳이 못된다고 할 것이나 연해(沿海)의 다섯 읍에 오로지 이 성밖에 없으므로 진() 하나를 설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녁에는 동헌에서 묵었다.

523.
일찍 출발하였다. 관아 문을 나서자마자 또 곧바로 마부와 수행자를 뒤에 떨어트리고 빨리 달려갔다. 태평시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큰 비를 무릅쓰고 평양에 들어가 묵었다. 이날 110리를 갔다.

524.
서울에서 온 편지를 받아보고 파발 편에 답서를 부쳤다. 일찍 출발하였는데 간밤에 비가 몹시 퍼부어 계곡물이 모두 넘쳐난 탓에 몹시 힘들게 길을 갔다. 순안현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는 일전에 자취가 탄로 난 곳이라서 감히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 못하였다. 비록 내 얼굴은 모두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수행원들은 자취를 숨길 수가 없어서 온 읍내가 다시 한바탕을 놀라고 두려워했다. 우스웠다. 저녁에 암적천(巖赤川)에 도달하였는데 수심이 어깨까지 잠기므로 남의 어깨에 올라앉아 간신히 건넜다. 그대로 암적의 여관에서 묵었다. 이날 70리를 갔다.

525.
숙천에서 점심을 먹고 안주에 급히 들어갔다. 신임 병사가 내일 부임한다 하여 읍내가 매우 떠들썩하였다. 남들이 알아볼까 두려웠으므로 몸이 오그라들어 나갈 수가 없었다. 이날 110리를 갔다.

526.
늦게 출발하여 강을 따라 가다 동쪽으로 돌아 개천(价川)으로 급하게 달려 들어갔다. 본관 수령은 안주 병영의 우후로서 신임 병사를 기다려 맞이하기 위해 지금 안주에 있다. 객사 문 앞으로 바로 들어가 출도를 외쳤다. 객사 문 앞은 시장터였는데 마침 장날을 맞이하여 장시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라 몸을 피하였으므로 길거리가 텅 비어 사람이 없었다. 위엄 있는 의식을 갖추어 동헌에 들어가 앉아 죄수의 심문과 처리를 대략 행하고 머물러 잤다. 이날 60리를 갔다.

527.
종일토록 비가 그치지 않았다. 문서를 조사 검토하였다.

528.
문서 조사를 계속했다.

529.
일찍 일어났다. 각 창고들을 닫아 봉하고 나서 덕천군을 향하여 신분을 드러낸 채 행차하여 갔다. 직동에 이르러 참봉 현심목을 찾아보고 알일령을 넘었다. 평지원(平地院)에서 점심을 먹고 덕천군에 들어갔다. 본관 수령은 서울에 올라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날 90리를 갔다.

61.
아침에 일어나 문서를 조사하였다. 식사 후에 공개적으로 영원군을 향해 갔다. 신창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고 옛 성 자리에 도달하였다. 해가 진후에 영원군에 들어가 잤다. 이날 60리를 갔다.

62.
문서를 조사하였다.

63.
신분을 밝힌 채 행차하여 맹산 북창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현에 들어갔다. 이 읍과 덕천은 별로 조사할 만한 일이 없으므로 부득이 공개적으로 다닌 것이다. 전번에 만났던 기생들이 모두 빙 둘러서서 맡은 일을 하기에 시험 삼아 접때 수작하던 일을 물으니 모두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아마 어려워서 감히 우러러 대답을 못하는 듯하였다. 이날 70리를 갔다.

64.
식사 후에 갑자기 출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행차가 오리정(五里亭)에 도착하였을 때 앞뒤에서 수행하는 자들을 모두 떨어뜨리고 빨리 달렸다. 순천 북창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가창에서 잤다. 이날 70리를 갔다.

65.
아침에 비가 왔으나 그것을 무릅쓰고 출발하여 신창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강을 건넜다. 배에서 내려 말을 풀밭에 풀어놓고,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 쉬면서 수행원을 기다렸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오더니 나루터에 서서 배를 부르고는 내 옆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배를 기다렸다.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더니, 영원과 맹산에 암행어사가 출도 하였다는 말을 듣고 청원서를 올릴 일이 있어 지금 달려간다는 대답이었다.

내가 말했다. "내가 지금 맹산에서 오는 길인데, 어사는 어제 아침에 이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길손이 놀라 물었다. "어사가 과연 어디로 간답니까?" "어사가 가는 길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는 멍한 채 한참을 있더니, "벌써 자취를 감추었다고 해도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니 자취를 밟아서 그가 간 곳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오가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어사 행차를 알아내어 뒤쫓는단 말입니까."라고 말하니 그는 "어사의 용모를 잘 들어두었는데 키가 크고 모습이 단정하며 구레나룻이 적다고 합니다. 또 큰 키에 맞추어 해진 평복을 입고 검은 말을 탔으며 반드시 한두 사람이 말을 타고 따라 다닌다고 합니다." 조금 있다가 배가 와 닿고 거기서 내 수행원이 내리니 그 길손은 '저기 오는 사람이 틀림없이 어사일 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과연 좀 수상하군요."라고 말하였다.

수행원은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짐짓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더니 술집 주인 아낙을 불러 술을 사서 마시는데 관서 방언을 섞어 말했다. 길손은 "아닌데요, 말소리가 서울 사람 같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서 강을 건너려고 가는데 내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따로 사람을 찾아나서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저녁에 순천 읍내의 여관에 묵었는데 여관 주인이 관리들에게 달려가 알렸다. 그 바람에 아전들이 와서 밤새도록 엿보는 것이, 며칠 전에 용강에서 묵을 때와 꽤나 비슷했다. 이날 90리를 갔다.

66.
빈수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안주로 들어갈 때는 성 북쪽의 작은 길을 따라 빙 돌아 칠불암에서 잠시 쉬고 북문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백상루에 올라가 높다랗게 한번 외치니 성안이 온통 끓는 솥 같았다. 어두워질 무렵 동헌에 들어가 앉았는데 신임병사 유상량(柳相亮)은 병이 있어 와 보지 않았다. 이날 90리를 갔다.

67.
문서를 조사했다.

68.
문서를 조사했다.

69.
문서를 조사했다.

610.
일찍 일어나 별안간 말을 타고 출발하였다. 성문을 나서자마자 모두 뒤에 떨어뜨리고 신천원(新川院)에 도달하여 점심을 먹었다. 지나는 길에 길을 치우는 사람들이 이어지면서 말하는데, 오래지 않아 어사 행차가 여기로 돌아갈 것이므로 미리 길을 치운다는 것이었다. ()을 쓴 사람을 여러번 만났는데, 어사의 지시 공문으로 인해 안주에서 이감되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밤에는 영유현 읍내에서 묵었는데 여기서도 헛되이 그저 무서워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날 90리를 갔다.

611.
이즈음 뜨거운 열기가 가장 견디기 어렵다. 새벽에 일어나 출발하여 은산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어두워질 무렵에 강서현 관아 문 앞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번에도 큰 소리로 한번 외치고 나서 동헌에 들어가 앉았다. 본관 수령은 휴가를 얻어 서울로 올라가고 없었다. 이날 110를 갔다.

612.
문서를 조사했다. 파발 편에 서울에서 지난 7일에 부친 편지를 받아 보았다.

613.
문서를 조사했다.

614.
신시(申時) 후에 공개적으로 행차하여 증산현에 들어갔다. 이날 40리를 갔다.

615.
문서를 조사했다.

616.
일찍 일어나 말을 타고 출발했다. 현 앞의 버드나무 둑에 도달했을 때 다시 종적을 감추고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단구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평양성 안에서 묵었다. 역시 밤새도록 소란스러웠다. 달빛을 타고 만수대로 홍성구를 찾아본 다음 닭이 운 후에 여관에 돌아와 잤다. 이날 90리를 갔다.

617.
늦게 출발하여 장경문으로 나왔다. 지경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더위와 열기를 견뎌낼 수 없어 열파정에 올라 오래 쉬면서 땀을 들였다. 곧바로 강동을 향해 어둠을 타고 빨리 달렸다. 백마문(白馬門)에 올라 출도한 후 동헌에 들어가 앉았다. 이날 90리를 갔다.

618.
문서를 조사했다.

619.
아침에 비가 왔다. 오후에 문서 조사가 끝났으므로 공개 행차로 성천으로 향했다. 밤에 유선관에 들어가 묵었다. 본관 수령은 서희순(徐熹淳)이 새로 부임했다. 기생들과 도장 심부름하는 자들이 서로들 가만가만 하는 말이, "어사 용모가 접때 구걸하러 관아에 들어왔던 길손과 흡사하다"고 하여 웃음이 나왔다. 이날 50리를 갔다.

620.
비가 왔다. 문서를 조사했다. 맨 밑의 작은 할아버지가 일찍이 이 읍에 수령으로 있었으므로 그때의 우두머리 아전의 아들과 손자들을 불러 보았다. 또 이른바 부용이라 하는 기생을 불러들여 시를 논하고 그림을 평하며 노래 부르고 읊조리다 보니 자못 심심하거나 쓸쓸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였다. "정자는 신선들 사는 데 있어야 이름을 얻지 죄인들 형구가 뜰에 가득차고 짚신에 높은 자리까지 올라온다면 품격을 잃게 됩니다." 과연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파발 편에 서울에서 15일에 부친 편지를 받았다.

621.
문서를 조사하는 틈에 본관 수령이 그림배를 갖추어 놀아보자고 하기에 함께 배를 타고 절벽 아래에 가서 실컷 즐기다가 돌아왔다. 부용이 부르는 운에 맞추어 한 가락씩 뽑아 보았다.

622.
문서를 조사했다.

623.
식사 후에 곧 일어나 작은 문으로 나와 그림배에 올랐는데, 바빠 정신이 없는 가운데 전후의 위엄 있는 거동을 갖출 수가 없어 곧 물러날 것을 명령하였다. 수행원과 몇몇 기생들만 데리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갔다. 북산(北山) 아래에 닿아 배에서 내려 걸음이 느린 관단마[款段馬]를 타고 갔다.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자들을 멀리 보노라니 슬픈 생각이 들었다. 낮에 온정원에 도착하였는데 더위가 심하여 머물러 묵었다. 이날 40리를 갔다.

624.
비가 조금 왔다. 자산강(慈山江)을 건너 식송의 여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해가 질 때 급히 달려 숙천으로 들어갔다. 닫힌 문루에서 출도를 외치고 동헌에 들어가 앉으니 신임 수령은 이관식(李觀植)이었다.
청북 암행어사가 강계에 도달하여 마음 씀이 착하지 않아 덕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참담하기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후로 온 도내에 와언이 일어나기를 청남 암행어사가 마땅히 방향을 바꾸어 청천강 이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고, 나 또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120리를 갔다.

625.
문서를 조사했다.

626.
문서를 조사했다. 정선지(鄭善之)가 영변 수령으로 있다가 새로 승지로 임명받아 불려 들어가게 되어 이곳 성천에 들어왔다. 밤을 타서 보러 왔기에 조용히 이야기하다 작별하였다.

627.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관문을 나서자 즉시 격식 차린 행차를 뒤에 떨어지게 하고 지름길로 갔다. 순안현에서 점심을 먹고 더위가 심하여 연정(蓮亭)에서 쉬었다. 읍내의 여러 사람들이 감히 다가오는 자가 없었다. 신임 수령은 이조식(李祖植)이다. 해가 진후에 평양으로 들어가 다시 유희필(劉希弼)의 집에 묵었다. 이날 110리를 갔다.

628.
비가 조금 왔다. 더위가 심하여 감히 나가지 못하고 가만히 들어앉아 문서와 장부들을 수정했다.

629.
그대로 머물렀다.

630.
황혼에 곧바로 대동문 누각에 올라가는데 누각 문이 닫혀 있어 역졸이 돌을 들어 올려 문을 부쉈다. 큰 소리로 한번 외치니 성내가 온통 끓는 솥처럼 되어 사람과 말들이 놀라 피하는 것이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밀려드는 듯하였다. 서쪽으로 나온 이래로 으뜸가는 장관이었다. 객관에 들어가 앉았다. 본관 수령은 한백연(韓百衍), 전임 중군은 이정곤(李貞坤), 대동역 찰방은 유영보(柳榮輔)였다.

71.
문서를 조사했다. 이날은 내가 태어난 날인데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다. 객관이 오래 쓰지 않던 곳인데다 더럽고 찌는 듯이 더워서 저녁에 연광정으로 처소를 옮겼다.

72.
비가 왔다. 저녁에 관찰사를 찾아뵙고 밤이 깊은 후에 돌아와 잤다. 서울로 편지를 부쳤다.

73.
비가 왔다. 천둥 번개가 심하게 치더니 객관 앞 쾌재정의 기둥을 부숴버렸다. 접때 객관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깜짝 놀랄 뻔하였다. 감사가 찾아와 봤다.

74.
비가 왔다. 영변 신임 부사 박태수가 방문하였다. 듣자니 서울에 다시 괴질이 크게 번져 재상 중에서도 여럿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니 오래 돌아다니는 사람 걱정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75.
강물이 크게 불어 배들이 문루 바로 아래 정박하였다. 베개 밑으로 파도소리가 꼭 밤중에 삼협[() 나라의 세 협곡]을 지나는 것 같았다.

76.
비가 왔다. 밤에 감사를 들어가 뵈었다.

77.
감사가 찾아와 봤다.

78.
황명조(黃命祖)가 관서에서 으뜸가는 집안인데다 토호와 부자들을 끼고 변장(邊將)을 지냈다. 혼자 의심하기를 어사의 탐문 내용 중에 들어갔는가 하고, 또 그 사촌 형 황겸조(黃謙祖)가 일러 어사의 보고 내용 중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의심하여 밤중에 겸조를 찔러 죽이고 자기도 배를 찔러 죽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없는 일이 없다.

79.
관찰사가 이름이 만홍(晩紅)이라는 관아의 기생을 보내주었는데 용모도 꽤 예쁘고 대나무를 잘 그렸다. 사랑할 만하여 결국 함께 잤다. 서울에 편지를 부쳤다.

710.
인현서원(仁賢書院)과 충무사(忠武祠)에 가서 참배했다. 점심에 한사정(閑似亭)에서 점심을 먹고 정전(井田)과 기자궁과 기정(箕井)을 돌아본 후 저녁에 돌아왔다.

711.
감사와 함께 배를 타고 부벽루로 거슬러 올라가 하루 종일 유쾌하게 놀았다. 밤에 배로 내려오는데 구름 때문에 그늘이 져서 달을 즐길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서울 편지를 받았다.

712.
밤에 감사를 들어가 뵈었다. 다경루(多景樓)에 올라가 닭 우는 것이 들린 후에 돌아왔다.

713.
감사와 밤에 달 놀이를 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비가 와서 이루지 못하였다.

714.
공개 행차를 하여 중화에서 묵었다. 이날 50리를 갔다.

715.
문서를 조사했다.

716.
비가 왔다. 문서를 조사했다. 서울 편지를 받고 또 서울로 편지를 부쳤다. 밤에 기생 부용이 길을 더듬어 찾아와 홀연히 만나러 들어왔다. 달을 바라보며 적벽부를 낭송하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717.
문서를 조사했다.

718.
오후에 남몰래 길을 가서 황주에서 묵었다. 병사는 정래승(鄭來升)이고, 본관 수령 김원근(金元根)은 서울에 갔다가 이날 밤이 깊었을 때 비로소 돌아왔다. 달밤에 월파루(月波樓)에 올라 절벽을 굽어보니 큰 강 앞이 넓게 트였는데 큰 숲이 멀리 에워싸고 있었다. 성첩과 관청 건물, 마을이 참으로 일대 도회인데 수비 관문과 바다 사이에 자리 잡아 필히 서로 차지하려 싸우는 곳인 동시에 지킬 만한 곳이었다. 이날 50리를 갔다.

719.
일찍 출발하여 동선령(洞仙嶺)을 넘었다. 두 산이 중복되어 있는 가운데 수비 관문을 하나 설치하였는데 수목이 하늘 높이 늘어서 있어서 낮에 지나가기도 두려울 정도였다. 고개 위 수풀 속에 잡신을 모시는 사당이 하나 있고 사당 아래에는 한 노인이 술을 팔고 있었다. 신을 털고 앉아 이야기를 건네다가 오고 가는 수령들 일을 물어보게 되었다. 노인이 말하기를, 전임 순안 수령의 부인이 올라가다가 마침 매우 더운 때여서 이곳에 가마를 부려놓고 쉬는데 가마 앞에 있던 한 늙은 여종이 뜻밖에 자리가 바뀐 것에 분을 품고 술기운에 신사 앞에 와서 소리쳐 울면서 말하기를 "내 밥그릇을 빼앗아갔으니 어사는 내 원수입니다. 오직 바라건대 밝은 신께서는 어사를 잡아가소서."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한번 웃어줄 만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측은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 여자 종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다만 내 행동으로 인해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봉산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본관 수령은 이형(李炯)이었다. 검수역(劒水驛)에서 조금 쉬고 밤이 된 후에 서흥(瑞興)에 닿아 거기서 묵었는데 본관 수령 조제인(趙濟仁)은 아직 부임하지 않고 있었다. 이날 110리를 갔다.

720.
일찍 출발하였다. 총수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식당 건물이 모두 홍수에 떠내려갔다. 근래 황해도에 수해가 드물었던 탓에 방비가 없어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떠내려간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봉산에서 금천(金川)까지는 모두 바다가 뽕밭이 되는 변화를 겪었는데 경기 지역은 이렇지 않았다고 한다.

산에 의지한 작은 식당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었는데, 앞으로 푸른 절벽을 마주하고 그윽한 풍치가 품어볼 만 하였다.. 냇가로 걸어 나가 돌 절벽 아래를 바라보니 약수 샘 옆에 송나라 사신 지번이라고 하는 인물이 이곳을 읊은 것을 새겨놓은 글씨가 있었는데 물이 깊어서 건너갈 수가 없었다. 평산 읍을 지났는데 여기부터는 지나간 길이다. 밤에 칠령(漆嶺) 여관에 도착하여 머물러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721.
금천읍(金川邑)을 지났는데 본관 수령 이익영(李翼榮)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수문통(水門筒)의 여관에서 점심을 먹고 북문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갔다. 만월대에 찾아 올라가 고려시대 고적을 둘러보았다. 초가집 서너 군데를 들렀는데 개성 부자의 별장들이었다. 모두 매우 그윽하고 깨끗하여 화훼와 과일나무, 동산과 골짜기가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여 오래 앉아 있어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밤에 여관에 돌아와 묵었다. 신임 경력 김낙룡(金洛龍)은 부임한 지가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이날 90리를 갔다.

722.
일찍 출발하였다. 성의 동쪽 길을 따라 선죽교(善竹橋)를 찾아보니 포은 정몽주 선생의 핏자국이 아직도 완연하였다. 갑자기 그것을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들어 일어나 예를 표했다. 여러 비석의 글을 두루 읽었다. 다시 큰 길을 찾아 길을 갔다. 장단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임 수령은 경기 암행어사에 의해 창고가 봉해지고 파직 당하였으며 신임 수령은 유상묵(柳相默)이라고 한다. 밤에 파주에서 잤는데 신임 수령은 이존경(李存敬)이라고 한다. 이날 80리를 갔다.

723.
그대로 머물며 문서와 장부를 고쳐 정리하였다.

724.
양주에서 점심을 먹었다. 읍내의 입해촌(入海村)은 맏형님이 새로 마련한 집이다. 이날 90리를 갔다. 복명 보고서인 서계와 거기에 딸린 건의서인 별단을 정서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725.
그대로 머물렀다.

726.
그대로 머물렀다.

727.
그대로 머물렀다.

728.
성안으로 들어와 임무 수행을 보고하니 머물러 대기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이어서 명령을 받아 희정당으로 들어가 모셨다. 나아가 엎드리니 전하께서 말씀하셨다. "살피고 조사하는 일은 남김없이 모두 다 하였는가." 나는 일어나 엎드린 후 아뢰었다. "정성과 힘이 닿는 곳은 감히 빠트린 곳이 없습니다." 물러가라고 명령하시기에 곧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