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록(西繡錄) 박내겸의 암행일기 이 서수록은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한 박내겸(1780∼?)이 순조22년(1822) 윤 3월16일부터 7월28일 까지 암행어사로서 평안도 지방을 다니며 보고 듣고 행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공식적인 보고서가 아닌 개인의 일기입니다. 문화콘텐츠진흥원에 있는 자료를 일부 정리하여 게재하는 것입니다.
순조22년(1822)
윤3월
16일. <4일간 떠날 준비를 하다>
윤3월
21일. 윤3월
22일. 윤3월
23일. 윤3월
24일. 내가 대답했다
"암행어사 행차가 비록 오지 않더라도 그 전에 먼저 소문이 났다면 아래 위 사람들이 마땅히 함께 경계하고 두려워해서 법을 어기지는 않았을 터이니 다행한 일이겠소."
노인이 말했다 "나같이 어리석은 백성이야 비록 어사 행차의 소식을 잘 알지 못하지만,
관가와 아전들은 서울과 서로 통하니 암행어사가 오고 안 오는 것을 틀림없이 이미 환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처럼 법을 계속 어기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웃고 일어섰다. 윤3월
25일. 윤3월
26일. 윤3월
27일.
윤3월
28일. 윤3월
29일. 4월 1일. 4월 2일.
4월
3일.
4월
4일. 4월 5일. 4월
6일. 주역을 외게 하니 주역을 외고, 시경을 외우라면 시경을
외었다. 또 시를 짓게 하니 한두 귀절을 읊조렸다. 모습은 비록 까맣게 때에 절어 차마 볼 수가
없었지만, 그가 본래 단정하고 아취 있는 선비였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이 상하고 불쌍해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민간 유행어에 부자의 손자가 가장 불쌍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이익을 몰아 부를 쌓으면 아들이 방탕하게 놀러 다니며 남김없이 써버리고 손자는 굴러다니는 거지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배를 끌어안고 엎어질 정도로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방탕하게 놀러 다니는 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하겠다. 머물러 잤다. 4월
7일. 4월 8일. 4월 9일. 4월
10일. 큰 성인 기자가 우리 동쪽 나라에 있었기에 옛날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이루어졌고, 여덟 조목으로 백성을 가르친 것은
오늘날까지도 의지할 힘이 된다. 무릇 우리 동쪽 나라에서 군신과 부자의 윤리가 있음을 아는 것은 모두 성인 기자가 남기신 가르침인데, 높이고 보답하는 법식이 마음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읍터는 사면이 토성으로 둘러싸이고 하늘이 갑자기 끊겨 곳곳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 모서리가 모두 일어나 서 있어서 어찌 보면 병풍을 둘러친 것 같고 어찌 보면 책상 같고 붓꽂이 같고 도검(刀劍) 같았다. 여기 저기 동굴이 뚫리고 움푹 파여져 있는 것 또한 기이한
볼거리였다. 저녁에
담담정(澹澹亭)에 올라갔는데 정자는 절벽 위에 있고
절벽 아래는 큰 강으로 둘러싸였다. 강 밖에는 큰 들이 있고 들 밖에는 먼 산들이 손을 잡고 늘어서 있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사방을 바라보니 맑고
아름다우며 탁 트여 환한 것이 관서에서 최고가 될 듯싶다.
그때 이 읍에도 자리가 났지만 이조(吏曹)에서 은산은 박하고 부안이 넉넉하다 하여 이곳을 두고 그쪽으로 나가게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후회가 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밤에 달빛을 받으며 향리와 장교들 집 서너 곳을 찾아 본 끝에 유숙하게 되었다. 이날 30리를 갔다. 4월 12일. 4월 13일. 맹산현은 많은 산의 가운데에 있다. 옥녀봉(玉女峯)이 우뚝 솟아 홀로 빼어났는데, 칼과 창을 세운듯하기도 하고 옥비녀를 꽂은듯하기도 하여 높고 아득한 모양이 기이하기가 그지없었다. 이것이 읍의 진산이다. 산골짜기의 풍속이 어리석고 사나워서, 다가가 이야기를 붙이기가 참 어려웠다. 본관 수령은 유창근(柳昌根)인데 서울에 올라가고 관아에 없다고 한다. 이날 70리를 갔다. 4월 14일. 내가 일어서 나오자 기생도 뒤따라오면서 자기 집이 저쪽에 있다고
가리켰다. 나는 다만 머리만 끄덕였다. 밤에 이리저리 생각하였으나 결국은 감히 갈 수가
없었다. 밤에 여관에서 유숙했다. 4월
15일.
4월
16일. 4월 17일. 4월
18일. 위에 올라가 굽어보고 사방을 돌아보니 산들이 둘러서 호위하고 있는데 높이는 낮았다. 강물이 앞을 돌아
흘러, 활을 당긴 모양과 비슷했다. 평야가 넓게 트여있고 논 또한 많아서 참으로
낙토였다. 읍민들이 모두 이곳으로 읍을 옮기고자 하는데, 백성들의 힘이 쇠잔하여 관과 민이 모두 뜻은 있으되 이룰 수가 없다고
한다. 처음에 읍을 설치할 때 왜 이 낙토를 버리고 그 좁은 곳을 택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4월
19일. 단정히 앉아 중용을 읽으며, 날마다 해야 할 공부를 정해 놓고 열심히 밟아나가는 것이 어린 아이가 공부하는 것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가묘(家廟)에 참배할 때는 자손들이 늘어서서 모시는데 고요하고 경건하기가 마치 조정과 같았다. 그는 귀와 눈이 밝고 맑았으며 정신이 어그러지지 않아서, 더불어 담론하자니 강물이 흘러가듯 말이 유창하였다. 책상에는 경전과 역사서. 제자백가서들이 열을 지어 있었고, 스스로 만든 천문 관측기 혼천의(渾天儀)는 규격에 어긋남이 없었다. 뜰 앞의 화훼와 목석 또한 매우 가지런하고 고왔다. 한밤중에 가야금 몇 가락을 타니 그것 또한 문장가나 시인다웠다. 저술 몇 권을 청하여 보니 시문은 매우 빼어나고 예설(禮說)은 자세하고 막힘이 없었다. 변방의 풍속이 어두운 지방에 이렇게 으뜸가는 유학자가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하였다. 마음이 취하여 떠날 수가 없어서, 결국 그 맏아들 삼원(森元)과 함께 별당에 머물러 묵었다. 삼원 역시 그 집 아들로서 손색이 없었다. 이날 60리를 갔다.
4월
20일. 내가
말했다. "요즘 세상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도 바른 도리가 없어져서, 가난한 사람들이 글을 파는 것은 허물하는 법이 없고 부자가 남에게 글을 짓게 하여 급제하는 것만
탓합니다. 시험을 주관하는 이가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글 잘하고 글씨 잘 쓰는 사람은 부자라 하여 밀어내고 글 못하고 글씨 못 쓰는 사람을 가난한 자라 하여 뽑은 후에야 겨우 공정한 도리라고 할 것입니까"
한 사람이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글을
파는 자의 죄입니다. 시험을 주관하는 자에게 무엇을 탓하겠습니까?" 4월 21일. 나는 모래밭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마침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지연이
놀라 물었다. "공주 박생원이 어디서 나타났습니까." 내가
말했다. "정해진 곳도 없이 여기저기 다니다가 문득 우연히 만나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함께 무진대에 올라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한 후에
작별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사가 호랑이 곰이나 되는가. 어찌 그리
무섭겠는가.'라고 묻고 이어 말했다. "어사는 임금님께서 남몰래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관리들의 수탈과 민생의 고통을 살피게 하는 것이므로 죄가 있는 자는 비록
무섭겠지만 죄 없는 자야 어찌 무서운 것이 있겠는가." 노파가 말했다. "요즘 세상에 어찌 죄 없는 자가
있겠습니까. 암행어사 소식이 있은 후부터 읍내와 마을을 가릴 것 없이 스스로 몸들을 사려서, 관속이 오랫동안 나오지 않고 토호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제발 바라건대 어사가 내 평생토록 돌아다닌다면 빈궁한 마을의 작은 백성들이 의지해 살 만하겠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이런 것을 보면 어사 행차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임을 알 만하다. 4월
22일. 어떤 고개에 도달하여 인마와 수행원을 먼저 보내고 나무 아래에서 홀로 쉬노라니 추적하는 자가 도달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먼저 엉뚱한 일을 말하면서 나를 살피느라 내려 보고 올려보고 하였다. 나는 얼굴색에 조금도 변함이 없이 묻는 대로 대답하였더니 그 사람은 암행어사가 다닌다는 이야기를 하고 또 가짜어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지금 남몰래 조사하러 다니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끝내 내 행동거지가 수상하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러더니 민간에서 붉은
실(紅絲)이라고들 부르는 쇠줄을 허리춤에서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길손은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이 지경에 이르러 화가 곧 머리에 닥치는 터라 나도 대답 없이 가슴에서 마패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너는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그 순간 그 사람은 얼굴색이 흙빛이 되어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면서 쳐다보더니 곧 쓰러졌는데 언덕을 따라 판자 위의 작은
구슬처럼 몸이 굴러가다가 평평한 곳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4월
23일. 4월
24일. 4월 25일. 4월 26일.
4월
27일.
4월
28일. 아전들이 웃으며 말하였다. "작년에 거친 곡식을 바치고서 지금은 고운 곡식을 받으려
하다니, 고운 곡식이 어디서 생겨나겠는가. 우리들이 농간하는 것이 아닌데 당신들이 우리를 죽이려
하는가? 또, 암행어사가 이 마당에 들어와 있지나 않은지 어떻게들 알고 이처럼 소란스럽게 구는
거요." 그 몇 사람은 결국 말을 못하고 받은 것을 헤아려 흩어졌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호소할 곳도
없다니, 참 심하구나. 내가, "어느 간 큰 녀석이 감히 어사 행세를 한다는 말이오."라고 말하니 "근래 인심이 맑지 못하니 못된 무리가 가짜로 다니면서 재물을 빼앗는 폐단이 없으란 법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입을 다물고 일어나 여관에 돌아와 앉았다. 4월
29일.
5월
1일.
5월
2일. 5월 3일.
5월
4일. 5월
5일. 내가
말했다. "백성들의 마음이야 비록 머무르게 하고 싶더라도 이미 직책이 갈린 관리를 어찌 받들어 앉히겠습니까. 감영에서 비록 머무르게 할 것을 청한다 하여도 조정에서는 또
어떻게 이 사람을 오래 외직에 둘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는 일은 결국 헛수고가 될 뿐 이득은 없을 듯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대의 예리한 눈은 칭찬하고 격려해 줄
만하구만. 지나간 것이야 그렇다 치고, 앞길에는 좋은 바람 부는 시절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기만 하다면 마땅히 그대를 황금으로 지은 집에서 지내게 하겠네." 기생이
말하였다. "옛 말에 이르기를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고 여인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얼굴을 꾸민다고 하였거니, 진정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그 사람의 속옷이 된다 하더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천한 사람이지만 돈과 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늘 어찌 꼭 황금으로 만든 집을 기대하겠습니까.
외람되오나 손님께서는 저를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듯하니, 그것이 도리어 가슴이 아픕니다."
나는 다만 웃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지방 사람들이 시에 능하다고 이름 붙여주었고 일찍이 서울에 드나들어, 귀한 집 자제와 높은 자리의 명사들이 그를 끌어다
함께 앉아 시와 노래를 주거니 받거니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나도 그 이름을 많이 듣고 그가 지은 시를 익히 보았는데 이제 직접 만나보니, 과연 이름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밤에는 주인 수령과 함께 유선관에서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5월 6일.
5월
7일. 5월 8일. 5월
9일. 5월 10일. 5월 11일. 5월
12일. "제가 화류 마당에서 30년 동안 늙어오면서 겪어본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논다는 사람들이 우리집에 올 때는 모두들 깨끗한 옷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하여, 시골의 못난 선비들은 감히 문도 들여다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손님께서는 해진 도포와 찢어진 신을 신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행동과 말씀이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당당하시니, 반드시 오래지 않아 아주 귀하게 될
분이십니다. 제가 어찌 감히 만만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붉은 이슬 같은 술을 유리잔에 가득 부어 권하니 나는 큰 잔을 셋이나 연거푸
비워버렸다. "어째서 구걸하며 다니는 길손과 서로 극진하게 구는가?"라고 물으니 부용이 "여러분이 무얼 알겠소마는 성천 태수가 귀인이라는 것만은 알 것이오. 이 손님이 지금 비록 초췌하지만 야박하게 대하면 성천 태수를 위하는 길이 못될 겁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행색을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비밀을 알아챈 것을 알고서는 일어나 나왔다. 5월
13일.
5월
14일. 5월 15일. 5월
16일. 전과 같이 평복에 남루한 거지차림이니 한림학사
소내한(蘇內翰)의 일장춘몽도 이처럼 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저녁에 수우점(水隅店)의 여관에 들어가 묵었다. 이날 10리를 갔다.
5월
17일.
5월
18일. 5월 19일.
5월
20일.
5월
21일. 5월
22일.
5월
23일.
5월
24일.
5월
25일. 5월 26일. 5월 27일. 5월
28일. 5월
29일. 6월 1일. 6월 2일.
6월
3일.
6월
4일.
6월
5일. 내가 말했다. "내가 지금 맹산에서 오는 길인데, 어사는 어제 아침에 이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길손이 놀라 물었다. "어사가 과연 어디로 간답니까?" "어사가 가는 길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는 멍한 채 한참을 있더니, "벌써 자취를 감추었다고 해도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니 자취를 밟아서 그가 간 곳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오가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어사 행차를 알아내어 뒤쫓는단 말입니까."라고 말하니 그는 "어사의 용모를 잘 들어두었는데 키가 크고 모습이 단정하며 구레나룻이 적다고 합니다. 또 큰 키에 맞추어 해진 평복을 입고 검은 말을 탔으며 반드시 한두 사람이 말을 타고 따라 다닌다고 합니다." 조금 있다가 배가 와 닿고 거기서 내 수행원이 내리니 그 길손은 '저기 오는 사람이 틀림없이 어사일 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과연 좀 수상하군요."라고 말하였다. 수행원은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짐짓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더니 술집 주인 아낙을 불러 술을
사서 마시는데 관서 방언을 섞어 말했다. 길손은
"아닌데요, 말소리가 서울 사람 같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서 강을 건너려고 가는데 내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따로 사람을 찾아나서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6월
6일.
6월7일.
6월8일.
6월9일.
6월10일.
6월11일.
6월12일. 6월13일.
6월14일. 6월15일.
6월16일.
6월17일. 6월18일. 6월19일.
6월20일. 6월21일.
6월22일.
6월23일. 6월24일.
6월25일.
6월26일. 6월27일. 6월28일.
6월29일.
6월30일. 7월
1일. 7월 2일.
7월
3일.
7월
4일.
7월
5일. 7월
6일.
7월
7일. 7월
8일.
7월
9일. 7월
10일. 7월
11일. 7월
12일.
7월
13일. 7월
14일. 7월 15일. 7월
16일. 7월
17일. 7월
18일. 7월
19일. 한번 웃어줄 만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측은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 여자 종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다만 내 행동으로 인해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봉산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본관 수령은 이형(李炯)이었다. 검수역(劒水驛)에서 조금 쉬고 밤이 된 후에 서흥(瑞興)에 닿아 거기서 묵었는데 본관 수령 조제인(趙濟仁)은 아직 부임하지 않고 있었다. 이날 110리를 갔다. 7월 20일. 산에 의지한 작은 식당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었는데, 앞으로 푸른 절벽을 마주하고 그윽한 풍치가 품어볼 만 하였다.. 냇가로 걸어 나가 돌 절벽 아래를 바라보니 약수 샘 옆에 송나라 사신 지번이라고 하는 인물이 이곳을 읊은 것을 새겨놓은 글씨가 있었는데 물이 깊어서 건너갈 수가 없었다. 평산 읍을 지났는데 여기부터는 지나간 길이다. 밤에 칠령(漆嶺) 여관에 도착하여 머물러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7월 21일. 7월 22일. 7월 23일. 7월 24일.
7월
25일. 7월
26일. 7월
27일. 7월
2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