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 유전자 조작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하는가

특별기획 : 생명공학들여다보기 1 – 인간지놈프로젝트와 우리의 삶

지난 6월 26일 클린턴 대통령과 블레어 총리는 사람의 DNA 염기서열의 위치를 해독하는 인간지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완성을 발표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 “신이 인간을 창조한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에 들어선 사건”이라고 격찬했다. 전세계의 신문과 TV는 한결같이 지놈 프로젝트의 완성으로 질병을 극복하고 생명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되었다는 축제의 팡파레를 울렸다.

인간은 17세기의 과학혁명과 그 이후의 산업혁명 이래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까지의 변화가 인간을 둘러싼 조건과 환경의 변화였다면 지놈프로젝트의 완성으로 본격화된 생물공학의 혁명은 인간과 생명 그 자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최근 발간된 “바이오테크의 세기(The Biotech Century)”라는 저서의 1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향후 25년 동안 우리의 생활양식은 우리가 과거 2백년 동안 겪었던 변화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2025년까지 우리와 우리의 후세들은 인류가 일찍이 과거에 경험했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리프킨이 이야기하는 변화는 상당히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 변화의 정도가 생물에 대한 정의, 인간의 본성(즉 인간스러움[humanity]), 성(性), 생식, 출생, 부모의 역할, 나아가 평등과 자유의지에 대한 의미까지도 바꾸어 놓을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생명공학(biotechnology)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무척 힘들다. 특히 그 의미와 파급효과라는 측면에서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변화가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개괄적으로나마 평한다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렇지만 모든 변화가 그러하듯 오늘날 생물공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급격한 변화도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더구나 최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유전자 조작식품, 생명복제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듯이 생물공학의 문제는 유전자조작 콩이 들어있는 콩라면, 두부, 유전자 조작 옥수수로 만든 콘프레이크로 우리들의 밥상에 올라와있고, 인터넷에는 외국 생물공학회사의 한국지사가 내놓은 “10만 달러에 당신을 복제해드립니다”라는 광고가 버젓이 나돌고 있다. 이미 우리는 그 변화의 한복판에 놓여있고,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오늘날 생물공학을 둘러싼 문제의 중요한 토대인 인간지놈프로젝트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이 프로젝트의 완성과 이후의 전개 양상이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 인식론적 함축과 윤리, 사회적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인간지놈프로젝트란 무엇인가?

4문자로 이루어진 DNA 언어

사람의 난자와 정자의 핵 속에는 각기 23개의 염색체가 있다. 염색체는 디옥시리보핵산, 즉 DNA라 불리는 커다란 분자로 이루어지고, 이 DNA 분자 속에 한 인간이 어떤 모습과 성향을 지니게 될지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23 개의 염색체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총괄하여 인간의 지놈(genome)이라부른다. 사람의 지놈에는 대강 10만개 정도의 유전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0만 개의 파일이 23개의 염색체에 나뉘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세포에는 모두 46개, 즉 23쌍의 염색체가 있다. 이것은 컴퓨터의 백업 파일처럼 일종의 예비 염색체를 갖추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세포에는 각각 2벌의 지놈, 46개의 염색체를 지니게 된다. 세포가 분열할 떄 마다 DNA 분자에 수록되어 있는 정보가 정교하게 복제되기 떄문에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는 이론상으로 동일한 유전정보를 지니게 된다.

DNA는 4종류의 서로 다른 염기가 계속 연결되어 있는 거대분자이다. DNA를 이루는 4종류의 염기(A, C, G, T)가 어떻게 배열되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 형질이 나타난다. 따라서 DNA라는 언어는 모두 4개의 문자를 가진 셈이다. 이 4문자 언어가 어떻게 씌여지는가에 따라 사람이라는 책의 모습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사람 뿐아니라 모든 생물체에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염기는 모든 생물의 언어인 셈이다. 이러한 염기 30억개가 모여 사람의 1지놈을 이룬다. 사람의 지놈을 활자화하여 책에 기록한다면 한 쪽에 1,000자가 들어간 1,000쪽짜리 책 3,000권의 방대한 분량이 된다.

사상 최대의 거대과학

사람의 전체 유전자, 즉 인간 지놈을 해석하는 인간지놈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는 그 출발과 함께 “인간이라는 책을 읽는 대장정”, “생물학의 성배(聖杯)” 등 화려한 수사로 장식되었다. 지놈프로젝트는 약 10만개에 달하는 사람의 유전자의 정확한 지도를 작성해서, 어느 유전자가 어떤 특성에 관여하는지를 밝혀낸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힌지 불과 30여년 후인 1985년 미국의 산타크루스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최초로 인간 지놈을 해석하는 계획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그후 논의가 구체화되고 미국 국립보건연구소(NIH)와 에너지성이 상호협조 각서에 서명하면서 인간지놈프로젝트는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같은 해에 일본과 유럽도 연구계획에 착수했다.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가고, 세계의 주요한 국가들이 대개 공동으로 참여하는 거대과학(big science)이 시작된 것이다.

이 연구에 참여한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국가 연구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각국 정부들은 인간지놈프로젝트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들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켰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분야가 하늘이 내린 천벌로 불리는 유전병이다. 유전성 알츠하이머병, 심장병, 낭포성섬유증, 겸형적혈구빈혈증, 우울증 등이 여기에 속한다. 유전병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발견은 그 예방과 치료약 개발로 이어지기 때문에 유전병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반가운 소식이다. 그외에도 유방암, 대장암 등의 암(癌)과 에이즈를 비롯해서 아직까지 인류가 극복하지 못하고는 있는 난치병들도 유전자와의 관계가 밝혀진다면 치료와 예방을 위한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려 3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지놈프로젝트가 전체 인구 중에서 극히 일부를 차지하는 유전병 환자들을 위해 계획된 것은 물론 아니다. 이 프로젝트가 처음 논의가 시작된지 불과 몇 년 만에 일사천리로 결정된 데에는 다음 세기에 열릴 엄청난 규모의 시장에 대한 예상이 큰 역할을 했다.

21세기에 열릴 천문학적 규모의 생물공학 시장

많은 사람들은 유전공학의 진전이 21세기에 수조 달러의 천문학적 시장을 형성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놈프로젝트는 일부 추산에 따르면 30억 달러 이상의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 얼마가 들어갈지는 아무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한다. 이 규모는 인간을 달에 보낸 아폴로 계획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도이다. 60년대의 아폴로 계획은 소련과 벌인 냉전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리자 미국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스푸트니크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폴로계획을 제창하게 되었다. 따라서 60년대의 거대과학 아폴로 계획이 냉전이라는 정치적 동기의 산물이었다면, 역시 미국에서 시작된 90년대의 거대과학인 지놈프로젝트는 냉전 이후의 세계질서를 그대로 반영하면서 경제적 동기에 의해 힘차게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퀴를 굴리는 원동력은 자본의 논리이다. 여담이지만 같은 미국에서 입자물리학 분야의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세계 최대의 입자 가속기 SSC 건설계획이 미 의회의 지원 중단 결정으로 사실상 백지화되었고, 지구밖 생물체의 가능성을 탐지하는 SETI 계획이 예산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는 상황은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유수 생물공학회사들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유전자 해석 프로젝트를 지원하거나, 과학자들을 고용해 독자적으로 염기서열 해석작업을 진행시켰다. 미국의 셀레라 게노믹스사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초기의 지놈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일부 과학자들이 연구소를 나와 기업을 차린 경우도 있다. 이들 기업들은 장래에 열릴 엄청난 규모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 유전자 특허를 얻기 위한 시도를 벌이고 있다. 즉, 돈벌이가 될 중요한 유전자의 염기배열에 대한 특허를 얻어 이후 개발될 치료약이나 그밖의 상업적 이윤을 독점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유전자는 인류 공동의 유산”이라는 여론이 강세를 보였지만, 이미 유전자 특허가 법정에서 인정되고 있는 추세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얼마전에 지놈프로젝트의 결과를 인류에게 공유시키겠다고 발표했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현재 인간 유전자와 연관해서 가장 많은 특허를 획득한 기관은 미국 정부이다(99년 말 현재 388건).

이번 발표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셀레라 게노믹스사의 크레이그 벤터 박사가 나타난 사실이 암시하듯이 지놈 프로젝트는 그 출범 자체가 유전자 상업화라는 동기에서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상업주의의 대세를 막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셀레라게노믹스사는 이미 그동안 해독한 유전 정보를 기초로 6천건 이상의 특허를 출원해놓은 상태이다.

현재 완성된 것은 지놈의 물리적 지도

많은 사람들이 지놈프로젝트의 완성으로 유전자의 모든 비밀이 풀린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번에 밝혀진 것은 약 30억개에 달하는 DNA의 염기서열과 유전자의 위치가 확인된 것이며, 유전자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는 아직 거의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많은 기업들이 이른바 포스트-지놈(Post-genome)의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가령 인사이트 제약과 같은 제약회사들은 개인의 고유한 유전적 성질에 따라 맞춤식 약을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는 보다 상세한 유전자 지도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지놈의 극히 세밀한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이루어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산학협동(産學協同)을 형성하고 있다. 세계 10대의 제약회사, 영국의 주요 자선단체, 그리고 몇 개의 유전학 연구소로 이루어진 비영리 컨소시엄은 이미 1999년 4월에 구성이 공표되었으며, 연방의 지원을 받는 인간지놈프로젝트를 지원하고 가속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질병에 걸리기 쉬운 소인과 약에 대한 반응과 같은 특성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이 DNA라는 고속도로 상에서 최소한 1백만개의 표지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드 허친슨 암연구센터의 한 유전학자는 <네이처 제네틱스(Nature Genetics)> 1999년 6월호에서 인간지놈의 상세한 지도를 작성하는 작업에 과거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많은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보고서의 저자인 레오니드 크루글리악 박사는 현재의 유전자 지도 작성을 위한 노력이 공통된 질병 유전자의 위치를 알아내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40만개의 유전자를 식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그 지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약학(藥學) 연구나 약품 개발에 유용한 것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표지(標識)들이 발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 컨서시엄은 향후 2년 이내에 2백만개로 추정되는 단일-뉴클레오티드 다형성, 즉 SNPs(single-nucleotide polymorphisms) 중에서 30만개의 위치를 확인할 계획을 수립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지놈에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공격인 셈이다. SNPs(‘스닙스’라고 읽는다)는 그 크기가 극히 미세하며, 공통된 질병유전자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도움을 주는 표지, 또는 표지판으로 기능할뿐 유전 암호 속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서 인간지놈 프로젝트가 찾아내려고 목표하는 표지는 10만개이다. 제약회사의 상품 제작에 이용될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한 염기배열 분석이 이루어지려면 앞으로도 길게는 수십년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2. 유전자 결정론을 우려한다

–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인식론적 문제; 인간 = 유전자?

인간지놈프로젝트를 지지하는 과학자와 정책입안자들은 생물공학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진전이 인류에게 풍요로운 미래를 약속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와 환경운동단체, 과학기술 시민운동단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유전자 해석과 조작에 따른 부작용과 사회적, 윤리적 문제들을 지적해왔고, 몇해전 복제양 돌리 사건 이후에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그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유전자를 해석하는 일이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유전자 결정론(genetic determinism)에 대한 우려이다. 유전자 결정론이란 말 그대로 유전자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을 결정하며, 유전자를 해석하기만 하면 인간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유전자 재조합이라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질병 뿐아니라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특성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을 기계나 컴퓨터로 간주하고, 그 설계도나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유전자를 분석하기만 하면 사람의 정신적 특성 나아가 인간스러움(humanity)의 본성까지도 낱낱히 밝혀질 수 있다는 기계론적 사고방식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지놈프로젝트는 그 출발에서부터 이러한 유전자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유전자로 환원될 수 없다. 유전자의 작동방식이 컴퓨터의 프로그램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차이를 간단히 살펴보자.

유전자 속에 들어있는 유전정보와 컴퓨터 프로그램의 정보는 유사하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 첫째, 유전자가 발현되는 과정은 컴퓨터처럼 외부의 지시에 의한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율적인 과정이다. 둘째, 유전자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결과와 1 대 1 대응하는 것과는 달리, 개체를 이루는 많은 유전자들이 발현 과정에서 서로 상호작용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개별 유전자의 속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속성을 나타낸다. 셋째, 유전정보가 발현되는 과정에는 끊임없이 외부환경의 정보가 유입되며 이러한 외부환경의 영향에 의해 새로운 발현 과정이 창발(創發)될 수 있다.

큰 차이점만 개괄했지만, 이러한 유전자의 특성을 감안할 때 유전자 하나 하나를 따로 떼어 각각의 역할이나 구조를 규명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이 유전자가 지니는 속성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을 이루는 여러 가지 특성의 발현, 나아가 생명활동은 여러 유전자들이 서로 연합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며 동시에 주변환경의 요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생물의 특성이나 생명현상 자체를 다룰 때에는 하나의 유전자가 지니는 유전정보를 하나씩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 보다 전체를 조망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코의 형태나 눈의 색깔과 같은 단순한 특성도 어떤 단일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전자와 그 발현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물며 한 개인의 성격, 지적 능력과 같은 복잡한 특성이 유전자에 대한 해석으로 규명될 수 있다는 생각은 넌센스에 가깝다. “사람 = 유전자”라는 생각은 “사람 = 기계”라는 생각과 다르지 않으며, 서구의 오랜 전통인 기계론적 인체관이 자기발전을 거듭한 결과이다. 최근의 수돗물 불소화 주장도 그 뿌리에서 사람의 몸을 기계로 보고 “좋은 요소(불소)를 넣으면 결과도 좋다”고 생각하는 발상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소가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몸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과거 DDT의 경우처럼, 어떤 예상치못한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유전자 안에 없다.

윤리적 문제; 누가 인간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는 곧바로 현실의 윤리 문제로 발전한다. 인간지놈프로젝트는 유전병 치료와 암을 비롯한 불치의 질병의 극복을 목표로 내걸었지만, 그 프로젝트의 출발을 가능하게 했던 다음 세기의 잠재적 시장은 치명적인 유전적 질병 뿐아니라 키, 비만도 등 이른바 “질병 이외의 특성”에까지 뻗어있다.

건강한 자식을 갖고 싶다는 욕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외가 없을 것이다. 유전병이 있는 가계(家系)의 부모가 앞으로 태어날 자식이 유전병과 같은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지를 미리 판별해보고 싶은 심정은 어찌 생각하면 이해가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유전병의 소질을 가진 태아를 미리 제거한다는 것은 엄청난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다. 유전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짧은 삶이 가치가 없다고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른바 출산전, 또는 착상전 유전자 검사가 가능해진다면, 유전병 가계가 아닌 사람들도 돈만 있다면 자신들의 자식에 대해 이러한 ‘유전자 감별’을 하려 들 것이다. 실제로 일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미국에서 부유층을 중심으로 출산전 유전자 감별이 자행되고 있다. 따라서 바람직하지 않은 유전자를 가진 태아나 인간의 배아(胚芽)는 세상 구경도 하지 못한채 사전에 제거될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일부 과학자와 생물공학 회사들은 질병 이외의 특성에 대한 유전자 검사에 대해 긍정적인 주장을 제기한다. 선천성 난장이를 비롯해서 유전자에 의해 빚어지는 모든 신체 부자유자들이 사라진다면, 그 결과는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태어날때부터 선천적인 기형(奇形)을 가지거나 선천성 간질병과 같은 질병을 갖고 세상에 나온 이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일견 타당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겪는 고통은 이른바 정상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겪는 고통이 과연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조금더 깊이 파고들면 우리는 전혀 다른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빚어내는 사회적 구조가 온존하는 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는 한 이 불행의 고리는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과학철학자 필립 키처(Philip Kitcher)는 이 지점을 “의료가 사회적 편견에 의해 대체되는 지점”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키처는 그의 저서 “다가올 우리의 삶 – 유전공학의 혁명과 인간의 가능성”에서 유전공학을 통해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일부 학자들을 비판했다. 과연 귀머거리, 정신박약아, 난장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갈 권리가 없는 것인가? 누가 그들이 이른바 정상인보다 못한 삶의 질을 누리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인가? 그 답은 매우 분명하다. 소위 정상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그들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텔레비전과 잡지를 통해 늘씬한 미인과 미남 배우들을 보고, 광고에 등장하는 기형에 가까울만큼 호리호리한 남녀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전세계의 다국적 기업 화장품 회사들은 사람들을 인공적인 아름다움에 길들인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본제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엉덩이에 닿을만큼 긴 머리와 날씬한 몸매, 늘씬한 키의 소유자들이다. 이렇듯 우리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비현실적인 서양의 미남 미녀에 대한 콤플렉스”를 키우며 자라나는 셈이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의 작가 무라까미 하루끼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군살이라고는 단 1 그램도 붙지 않은” 모습으로 정형화된다. 우리는 매년 전세계에서 살빼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작은 나라의 GNP를 넘어서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많은 돈을 들여 살빼기를 강요하고, 정상 체중을 가진 십대 여학생들의 상당부분이 자신을 비만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무리한 살빼기를 계속하다 건강까지 해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자본은 이러한 편견과 콤플렉스를 조장하면서 엄청난 이윤을 올린다. “정상과 비정상”의 대립구도에서 가장 득을 보는 쪽은 자본인 셈이다. 그들이 어떻게든 이 구도를 유지시키려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자본의 논리이다. 가령 유전자 검사로 난장이가 사라진다면,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모두 없어지고 우리들의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되면 과거에 정상에 속하던 키작은 사람들이 비정상의 범주로 내려오게 될 뿐이다. 난장이가 사라진 세상에 또다른 난장이가 태어나는 셈이다. 유전자 검사로 돈벌이를 하는 기업들은 어떻게든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고, 비정상인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물음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과연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할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무슨 기준으로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분하는가? 과학자와 철학자, 윤리학자들을 적당히 버무려놓은 무슨무슨 윤리위원회에서 그 기준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사회적인 편견과 그 편견의 원천인 왜곡된 구조가 온존하는데, 누가 온전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단 말인가?

사회적 문제; 유전정보의 유출

우리는 요즈음 개인 정보가 판매회사나 정보기관, 범죄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사태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인간지놈프로젝트로 인간의 모든 유전자가 해석되고, 주민등록증이 전산회되듯 개인의 유전자 검사가 보편화될 경우, 유전정보의 유출은 개인 신상정보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가장 우려되는 사태는 유전병이나 그밖의 유전적 경향을 갖는 질병의 가족력(家族歷)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정보가 보험회사나 기업에 유출되어 보험에 가입할 수 없게 되거나 취업할 기회를 원천봉쇄당하는 일이다. 실제로 최근 미국의 경우 유전병의 가계를 가진 사람들이 유전자 검사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자신이 유전병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현재까지는 뚜렷한 치료법도 개발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할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영화 가타카에서 묘사된 생물학적 최하층 계급은 허구적인 상상물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2차대전에서 벌어진 유대인 대학살이 단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유럽의 역사에서 끊이지 않았던 단종(斷種) 전통의 확대재생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역사는 인종, 남녀, 장애 등에 대한 불평등과 편견이 온존하는 한 과학기술의 발전만으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유전자를 해석하려는 과학 프로젝트가 유대인 대량학살에 이용된 가스실처럼 기존의 사회적 편견들을 확대재생산해서 생물학적인 하층계급으로 고정시키는 도구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며칠전 영국 정부가 보험회사들이 유전 정보를 사용할 수 있게 할 계획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생명소외로서의 복제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 이래 급속하게 발전한 분자생물학은 생명현상의 본질을 DNA로 환원시켜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기계론적 인식론의 극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2005년까지 사람의 유전체(genome)를 모두 해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인간지놈프로젝트는 유전자를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식의 유전자 결정론적 관점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동물복제와 인간복제 시도에 이르러 과학혁명 이래 자기-강화된 기계론적 인식론은 그 절정에 도달한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의 발견이 ‘생명의 설계도가 DNA이고 생물은 DNA를 보관하는 용기(container)’라는 생각으로 발전하기까지 한걸음에 불과했듯이, 유전자 해석에서 유전자 조작과 생명복제로의 진전도 한걸음에 불과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근대사회의 인식론적 환경이 그 변환을 거의 자동적으로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다른 한편으로 생명소외의 과정이다.

생명복제 기술의 근저에 깔려있는 ‘DNA = 생명’이라는 사고는 우선 DNA에서 35억년에 걸친 생명탄생의 과정(process)을 배제시키고 DNA를 그러한 과정과 무관한 부호(code)로 환원시킨다. 아직까지 단세포 생물에서 동물에 이르는 진화과정에서 DNA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DNA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지 않았으며, 선형적(linear)이 아닌 복잡하고 우회적인 많은 경로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각광받고 있는 체세포(體細胞) 복제기술은 유성생식(有性生殖)이라는 복잡한 생식과정을 배제하고 우량의 특성을 나타내는 개체의 유전자를 복사하듯 복제하는 기계적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정확히 언제 유성생식(有性生殖)이 진화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많은 생물학자들은 유성생식이 생물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낳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데 동의한다. 사실 무성생식에 비하면 유성생식은 무척이나 번거롭고 복잡한 과정들을 수반한다. 가령 짝짓기에서 성공하기 위해 동물들이 벌이는 지난한 구애 행위나 한쌍의 남녀가 만나서 아기를 낳기까지 거치는 복잡다단한 과정과 그에 따른 숱한 물리적, 심리적 비용(cost)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이런 비용은 그로 인해 획득되는 풍부함과 다양성에 의해 보상되고 남는다. 어쩌면 우리가 인간스러움(humanity)의 중요한 특성으로 꼽는 고도한 뇌 기능과 풍부한 감정도 거기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복제는 생명에서 이런 모든 과정들을 제거한다. 이것은 생명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과정과 그 배경들에서 생명을 소외시키고, DNA가 탄생할 수 있었던 풍부한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다. 복제의 논리는 불확실하고 비효율적인 우회로들을 제거해서 효율적으로 ‘우량’의 품종(인간을 포함해서)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우량성(優良性)을 가능하게 했던 원천이 복잡하고 불확실한 과정이었으며, DNA 자체가 그러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밖에도 생명복제는 생명이 생태계(ecosystem)와 맺고 있는 물질과 에너지 순환의 연결망(network)을 간과하며, 유전자의 발현과정 자체가 기계적인 1:1 대응관계가 아니며, ‘유전자-발생과정-주위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사실도 무시하고 있다. 근대사회는 여러 겹으로 소외를 일으켰다. 일찍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풍부한 연결망을 잘라내 자연을 개발대상으로 환원시키면서 자연과 인간 모두를 소외시켰고,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삶의 총체성에서 노동과 여가를 분리시키고 노동을 소외시켰다. 그리고 급기야는 복제를 통해 인간조건의 근본토대인 생명과 탄생성(한나 아렌트의 “인간조건”)까지 소외시키고 있다. 아마도 그 결과는 지금까지 인류가 겪은 어떤 고통보다도 큰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치를 대가의 상당부분이 우리의 정체성(identity)과 연관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글을 맺으면서

현재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살펴볼 때, 생물공학이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데에는 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이 분야와 연관된 기술은 과거 컴퓨터의 발전에 버금갈 정도로 그 진전속도를 가속시키고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연구자들은 세계 생명공학기술 수준에 뒤지지 않는 연구 노하우와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최근의 젖소와 한우 복제 성공은 그것을 실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술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의 발전과정을 고려할 때, 그 진전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편견을 해소해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문제들에 대웅할 수 있는가? 과학자, 철학자, 윤리학자들로 생명윤리자문위원회를 구성해서 그들에게 맡겨놓으면 해결될 수 있을까? 유전자가 인류 공동의 유산이고, 유전자 검사와 조작은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면 가능할까? 이런 처방들은 21세기에 형성될 엄청난 규모의 시장과 그 시장을 노리는 자본의 힘에 비해 너무도 왜소하다. 그리고 이미 우리들이 빠져있는 편견과 잘못된 고정관념의 늪은 너무도 깊다.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편견,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유전자 결정론과 환원주의 . . . 그리고 이런 편견과 고정관념 뒷편에는 그것들을 조장하는 사회구조가 있다.

순수하고, 객관적인 과학이란 없다. 인간지놈프로젝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편견 등 숱한 사회문화적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지놈프로젝트와 생물공학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이다. ‘만들어지고 있다’는 의미는 그 과학이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는가의 결정이 아직 열려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우리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한국 유네스코 주최로 생명복제에 대한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가 열렸다. 여기에서 시민 패널은 생명복제에 대한 폭넓은 문제를 전문가들과 토론하고 그 결과를 언론에 발표했다. 16명의 시민패널들은 찬반 양쪽 입장의 전문가들과 생명복제의 윤리적, 사회적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동안 과학기술은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제는 보통 시민들이 과학기술의 주제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참여가 과학기술의 통제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 중요한 출발점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