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구텐베르크 성서 몇 권

“인쇄기, 성경과 지식의 독점 체계를 무너뜨리다”

인쇄기를 발명하여 중세 유럽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지식 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구텐베르크. 그의 발명은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성경과 지식을 독점하던 체계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는 제자로부터의 배신과 동업자의 소송에 따른 파탄, 그리고 노년에 찾아든 실명(失明)이라는 엄혹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 인쇄와 지식 혁명의 불꽃을 피워낸 그였으나 더이상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독점과 어둠이라는 중세의 봉인을 해제한 행위에 대한 천형(天刑)이었을까.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개발되기 전 유럽에 수천 권의 필사본들이 출판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의 인쇄술이 발명되고 난 후 불과 50년이 지난 1500년경에 이미 900만 권이 넘는 책들이 출판된다. 인쇄기라는 천재적 발명품을 만들어낸 구텐베르크의 파란 많은 삶은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의 욕구와 필요성과 결합하면서 14세기 르네상스(Renaissance)와 종교개혁, 그리고 18세기 프랑스대혁명의 여명을 밝혔다. 산업 혁명과 더불어 지식의 빅뱅으로 이어졌으며, 디지털 혁명과 함께 1992년의 구텐베르크 프로젝트(Gutenberg project)라는 이름으로 그의 존재가 부활되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책과 출판의 출발점은 독일 마인츠 출생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에서 시작된다. 인쇄기를 발명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천재성은 지금도 감탄을 자아낼 만한 것이지만, 『42행 성서(42-line Bible)』를 둘러싼 그의 파란 많은 인생은 8백년이 지난 세월에도 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숙연하게 한다.

남아있는 구텐베르크 성서 몇 권
인쇄기를 발명하여 중세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지식 혁명을 촉발시킨 구텐베르크

동양과 서양에서의 15세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왕자의 난을 통해 왕도정치를 꿈꾸던 정도전(鄭道傳)을 죽이고 즉위하면서 조선의 15세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조선은 세조, 세종, 성종에 이르는 절정기를 맞이한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포신 길이가 8미터가 넘고, 돌 포탄의 무게는 600kg가 넘는 우르반(Urban)의 대포를 개발하여 군대 8만여 명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최후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예복을 벗고 육박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한다. 유럽의 15세기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대한 충격과 공포로부터 시작된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유럽과 중동, 아시아와 중국 그리고 조선으로 이어진 육지와 바다의 비단길(Silk Road)이 막힌 것을 뜻한다.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와 중동지역을 지배하면서 유럽은 아시아와 교역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에스파냐 왕국의 가톨릭 군주이던 이사벨 1세(Isabel I de Castilla)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지원을 받아 아시아를 찾으러 서쪽으로 떠나 아메리카를 발견한다. 유럽의 배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을 하는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는 이렇게 출현한 것이었다.

대항해시대는 서유럽 나라들이 새로운 바닷길을 찾기 위해 유럽의 배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던 15세게에서 17세기까지를 말한다. 이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미처 알지 못하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엔히크(Infante Dom Henrique)가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당시 탐험가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바스쿠 다가마 등이 있었다. 당시 중세 유럽인들이 믿던 천동설(天動說)이 대항해시대를 추진하던 세계관이 되었다. 천동설은 태양과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주장이다. 항해 기술의 발달도 큰 몫을 했는데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나침반과 더불어 먼 바다에서도 빠르고 안전하게 타고 다닐 수 있는 카라벨 선(Caravel ship. 무게가 25~60톤에 이르고, 2~3개의 마스트와 대형 삼각돛이 달여 있음)을 포르투갈이 개발한 뒤에 네모난 돛을 단 배인 카라크 선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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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대항해시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에 대한 항로의 개발.

프랑스 동부 지역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 다르크(Jeanne d’Arc)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끈다. 러시아의 이반 3세(Ivan III)는 “우리는 더 이상 칸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킵차크 칸국을 격퇴시키고 러시아 북동 지역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통합하고 몽고-타타르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이로서 나중에 러시아 제국이 되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기초를 닦습니다. 15세기는 동서양 모두 중세의 변곡점을 지나는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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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의 오를레앙 포위전을 그린 Jules Eugène Lenepveu의 작품. 1886~1890.

포도주 압착기를 이용한 인쇄기계의 발명

15세기 서양의 지식 혁명에 불을 지핀 주인공인 그는 포도주를 짤 때 사용하는 압착기를 개조하여 근대적 인쇄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를 “근대 활판 인쇄술의 발명자”로서 정의하는 것은 무리이다. 목판 인쇄는 중국에서 3세기경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며 14세기 들어 유럽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금속활자는 고려시대 이미 개발되어 경전을 인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위대함은 불편하고 번거로웠던 인쇄술을 기계식으로 개발하여 대량 인쇄가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혁신적인 점은 세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많은 활자를 정확히 주조할 수 있도록 자모(字母)들이 각인된 펀치 모형(활자의 앞면을 주조하는 데 사용한 금속 각주)을 부착한 주형과 활자 합금이다. 둘째, 포도주 제조 및 제지·제본할 때 쓰이는 프레스를 응용해서 만든 인쇄기이다. 셋째, 유성의 인쇄잉크 등이다. 중국이나 한국의 인쇄술, 또는 여러 종류의 목판에 활자를 찍었던 유럽의 인쇄기술에서 이러한 특징은 볼 수 없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필요에 따라 낱개의 글자를 새겨 글자들을 끼웠다 뺐다를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속도와 편의성, 인쇄릐 품질리 훨씬 나아진 것이었다. 구켄베르크보다 앞서 개발된 중국과 한자의 인쇄기도 낱개의 글자를 움직일 수 있었지만 기계로 눌러서 인쇄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눌러서 인쇄하는 방식이 아니면 여러 장을 인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남아있는 구텐베르크 성서 몇 권
구텐베르크는 활자판을 위한 각 글자를 한묶음으로 정밀하게 절단할 수 있는 주형틀도 고안했다.

당시 개발되어 있던 합금 방식과 유성잉크 기술이 결합되어 구텐베르크의 인쇄 개발이 완성된 것이다. 놀랍게도 구텐베르크의 기계식 인쇄 방법과 원리는 옵셋인쇄(offset printing)가 출현하는 20세기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컴퓨터나 인터넷의 개발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기도 한다.

그는 무거운 압착기 나사볼트를 이용해 활자판을 눌러 인쇄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의 아버지가 금화를 제조하는 조폐국에서 일했다는 기록을 보아 압착을 하는 아이디어는 거기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금세공사조합에 가입해서 금속세공기술을 익혔다는 사실이 당시 자금거래 서류에서 나오고 있다. 1430년 마인츠의 조합측과 귀족계급 사이에 오랫동안 벌어져온 치열한 싸움의 와중에 이 도시로부터 추방되어 그는 프랑스의 슈트라스부르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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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까지 사용되던 압착 방식의 인쇄기. 구텐베르크는 그의 아버지가 금화를 제조하는 조폐국에서 일했다는 기록을 보아 압착을 하는 아이디어는 거기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금세공사조합 기록에는 동업자들과 함께 보석세공과 거울 만드는 일을 하면서 많은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1437년 그가 부유한 방문판매원에게 보석들을 광택내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금속 작업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노하우가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아버지에게서 압착 기술의 아이디어를 가져왔다면 금속세공 기술은 금속 활자를 개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1448년 10월 돈을 빌리기 위해 마인츠로 돌아와서 재정가인 요한 푸스트(Johann Fust)를 설득해 인쇄기와 설비를 담보로 800길더라는 꽤 많은 돈을 빌릴 수 있었다. 2년 뒤 푸스트는 800길더를 더 투자하여 사업 동업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투자가 안전하고 신속한 결실을 맺기를 바란 반면, 구텐베르크는 빨리 만들기보다는 완전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사이가 멀어졌다. 

필사본의 아름다움을 손상하지 않은 『42행 성서』

구텐베르크는 마인츠(Mainz)로 돌아와 고향집에 1448년 인쇄소를 차렸다. 구텐베르크가 꿈꾸던 것은 중세의 전례(典禮)에 관한 필사본들을 그 색깔이나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전연 손상하지 않고 기술적으로 재생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그는 1450년에 유력자인 요한 푸스트(Johann Fust)에게 돈을 빌려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부르는 『42행 성서』 출판 작업에 착수한다. 연구에 따르면, 모두 2권에 총 1,272쪽에 달하는 분량이며 당시의 제작 공정을 고려할 때 25명 정도의 장인들이 참여했다고 예측된다. 『42행 성서』은 180질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48질이 남았는데 상태가 완벽한 것은 21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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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수도원에서 만들던 필사본 책의 아름다움과 레이아웃, 모양새를 손상하지 않게 구현하려고 했던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42-line Bible)』의 본문.

구텐베르크는 『42행 성서』의 인쇄를 위해 290개의 서로 다른 자모(字母)를 만들었다. 삽화로 그려진 머리글자와 부호들은 채색공이나 식자공들이 삽입하여 넣었다. 전체 180질 중 150부 정도는 종이에 인쇄하였고, 나머지 30부는 값비싼 양피지에 인쇄하였다.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48부 중 2부를 구텐베르크 박물관이 소유하고 있다.

1457년 8월 14일 시편이 완성되어 마인츠에서 발행됐었다. 이 시편은 하나의 조판대 위에 여러 색의 잉크를 칠하는 기법을 바탕으로 한 매우 독창적인 기술인 정교한 소용돌이 무늬로 가장자리를 장식했으며, 또한 수백 개의 색상으로 머리글자를 장식했다. 시편의 장식은 바로 구텐베르크가 생각해낸 것이다. 당시 구텐베르크가 동판인쇄도 고안했으리라는 의견이 있다. 동판인쇄로 생동감있는 아름다운 활자를 알아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방법으로 활자·머리글자·장식서체 등을 양각으로 주조하게 되었다.

오랜 필사 작업으로 만들어진 성경 66권 한 질을 사려면 집 10채 값에 지불해야 했다. 따라서 성경은 수도원이나 교회만 소유할 수 있었다. 성경을 독점한 교회는 교리를 자신들 방식으로 해석하고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성경이 대량으로 보급되고 사람들이 손쉽게 접하게 되었고 수도원과 교회의 교리해석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형성되었다. 인쇄기 개발이 종교개혁에도 바탕이 된 것이다. 그럼에서 불구하고 구텐베르크는 『42행 성서』또한 당시 기관의 서기 한 명의 3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30길더 정도에 판매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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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는 『42행 성서』의 인쇄를 위해 290개의 서로 다른 자모를 만들었다. 삽화로 그려진 머리글자와 부호들은 채색공이나 식자공들이 삽입하여 넣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는 1454년 푸스트가 제기한 소송에서 패배한다. 이 소송에 대해서는 독일 괴팅헨(Göttingen)대학 도서관에 1455년 11월 6일자 헬마스페르거 공증문서로 남아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푸스트가 승소했고 2번에 걸쳐 빌린 원금과 복리이자를 합한 2,026길더(guilder)를 갚으라는 판결이 내려진다. 인쇄기 한 대와 몇 가지 물건만 가지고 쫓겨나다시피 한 그는 성서 출판 작업 사업에서 제외된다. 자신의 발명품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재정적으로 파산하게 된 것이다.

구텐베르크 인쇄로의 가장 숙련된 기술자였던 피터 쉐퍼(Peter Schöffer)가 구텐베르크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으며 푸스트의 양자가 된 사실로 보아 투자자에게 사업을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 파산한 구텐베르크는 1459년 밤버그(Bamberg)라는 도시에서 작은 인쇄소를 열어 성경 인쇄 작업에 계속했다고 하는데 인쇄된 성경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성경에 남기지 않아 그 후의 작업은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한 전기에 의하면 그는 말년에 이르러 거의 실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468년 사망하여 마인츠의 프란체스코 교회(Franciscan church)에 묻히지만 그후 그 교회와 묘지가 파괴되어 유골이 남지 않은 상태가 된다.

The Art of Making a Book. 15세기 인쇄기로 책을 만드는 장면. 지금도 예술 제본이라는 영역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쇄 혁명 확산의 진원지가 된 독일

연구자들은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유럽에 수천 권의 필사본들이 출판되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구텐베르크는 가난하고 고독한 말년을 보내야 했지만 그의 인쇄술은 유럽 전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그의 인쇄술이 발명되고 난 후 불과 50년이 지난 1500년경에 이미 900만 권이 넘는 책들이 출판된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인쇄기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550년경 인쇄기와 기술이 자리잡히면서 인쇄업자들이 책 출판 활동을 주도하여 활자 주조(鑄造), 편집, 출판, 판매 활동까지 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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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연대기』의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설명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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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연대기』의 천지창조 네번째 날의 묘사 일러스트.

구텐베르크가 활동하던 지역이 독일 마인츠(Mainz)였기 때문에도 인쇄 기술 발전은 독일의 덕을 크게 본다. 따라서 당시에는 인쇄를 “독일의 예술”이라고까지 불렸다. 마인츠는 로마시대에 개발된 라인강 주변의 상업 도시이다. 16세기초 독일이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도 발달된 독일 인쇄술과 관련된다. 인쇄기술은 독일 상인들의 교역로를 따라 널리 확산되어 1464년에는 마찬가지로 로마시대에서부터 상업 도시로 발달된 라인강 주변의 쾰른(Cologne)이 인쇄 중심지로 떠오른다. 한편 남부지역에서는 바젤,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등 거대한 교역 중심도시들이 인쇄 중심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업의 선두자리를 차지한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는 안톤 코베르거(Anton Koberger)라는 출판업자는 24대의 인쇄기를 보유하고 바젤, 스트라스부르크, 리옹, 파리 등 다른 많은 도시들에 지사를 두고 국제적으로 출판 활동을 했다. 세계 최초의 대기업 규모의 국제적인 출판 활동을 한 인물인 셈이다. 15세기 말 베스트셀러인 『뉘른베르크 연대기』(Nuremberg Chronicle)도 안톤 코베르거가 펴낸 책이다. 창조의 순간부터 1490년까지 역사를 담은 이 책은 세계사 그림책입니다. 이 책에는 유명한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션의 선구자로 꼽히는 알브레흐트 뒤러(Albrecht Dürer)의 판화 등 645점의 목판화가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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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년 줄리어드 시이저에 관한 책의 일부. 젠슨이 개발한 로마체를 살펴볼 수 있다. 동전 조작가인 젠슨은 뛰어난 인쇄기술자로 1470년 로마체 활자를 완성시킨 사람이다.

인쇄 기술이 르네상스와 결합된 이탈리아

독일의 인쇄 기술의 발달이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과 관련된다면 이탈리아의 인쇄 기술의 확산과 출판 활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관련된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1462년경 독일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던 로마 근교의 베네딕토회(Benedictine Order)의 수도원을 통해 이탈리아에 전해진다. 베네딕토회는 535∼540년경 성 베네딕토(Saint Benedict)가 만들었는데 이탈리아와 갈리아 지방에 확산되어 노동과 기도를 통하여 복음에 바탕을 둔 자기 향상에 매진하는 모임으로서 교육•학문•선교•교구 활동 등에 종사하였다. 역사적으로 많은 선교사를 배출,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학문을 존중하여 문헌 보존과 사본 제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처럼 이탈리아에서도 거대한 상업 도시를 중심으로 인쇄와 출판이 발달한다. 1500년경 베네치아에는 150대나 되는 인쇄기가 있었으며, 니콜라스 젠슨(Nicolas Jenson)과 알도 마누치오(Paolo Manuzio)라는 각각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출현한 2명의 인쇄업자가 서적 출판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해진다. 젠슨은 뛰어난 인쇄기술자로 1470년 로마체(Roman type) 활자를 완성시킨 사람이다. 그는 동전 조각가인 프랑스인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에서 구텐베르크의 제자로서 인쇄술을 익혔지만 베네티아에 인쇄소를 설립하여 고전 베네치아체로 알려진 읽기 쉬운 서체를 개발했는데 현재까지 어도비(Adobe)사의 젠슨체로 전해지고 있으며 분류하자면 세리프(serif)체에 속한다. 세리프는 타이포그래피에서 글자와 기호를 이루는 획의 일부 끝이 돌출된 형태로서 한글에서의 명조체는 세리프체에 속한다. 세리프체는 시각적으로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따라서 글자의 크기가 작더라도 독자들이 쉽게 판독할 수 있게 합니다. 획의 두께가 강하지 않아서 산세리프체보다 가독성이 높은 것입니다. 1465년에 개발된 글꼴로서 올드 스타일 세리프(old style serif)가 있습니다. 올드 세리프체는 사선이 강조되고 더불어 굵고 얇은 선들의 차이를 활용하여 최고의 가독성을 구현합니다.  세리프가 없는 글꼴은 산세리프(sans-serif)체로서 이후 고딕체로 발달하여, 그후 세리프체는 책과 신문과 같은 전통적인 인쇄물에 널리 쓰인다.

유럽 전체로 확산된 구텐베르트 인쇄기

프랑스는 인쇄술이 전해지던 단계부터 발행인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1470년 파리 소르본대학(Sorbonne)의 학장이자 도서관장이 대학 내에 인쇄기를 설치하기 위해 3명의 독일 인쇄업자를 초빙하여 프랑스 인쇄가 시작된다. 교수들이 직접 출판할 책을 선정하고 인쇄 과정을 감독했다. 심지어는 사용할 활자체도 지정해주었다. 발행인들이 로마체를 매우 선호하여 고딕체는 결국 밀려나게 된다. 파리 다음 가는 인쇄 중심지로는 리옹(Lyon)을 꼽을 수 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도하던 파리에서와는 달리 리옹에서는 인문주의와 신교에 관련된 책들이 보다 자유롭게 출판되었다. 그러나 1600년경 종교 탄압과 함께 파리의 출판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리옹의 출판업은 종말을 맞고, 그후 프랑스의 출판활동은 파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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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캑스턴(William Caxton)이 에드워드 4세에게 인쇄의 첫번째 견본을 보여주는 그림. 다니엘 맥클리스(Daniel Maclise)의 1851년 작품.

독일의 인쇄술이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빠르게 전파되어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1470), 헝가리의 부다페스트(1473), 폴란드의 크라쿠프(1474), 스페인의 발렌시아(1473) 등의 도시들이 인쇄 중심지로 성장한다. 특히 스페인의 책들은 대부분이 고딕체로 인쇄되어 나름대로 독창성과 품위가 있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출판물로는 옆 단에 여러 언어로 쓰인 대역성서가 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 비해 다소 늦은 1476년 인쇄 기술이 도입된다. 영국에 인쇄술을 도입한 사람은 영국인 윌리엄 캑스턴(William Caxton)이다. 1438년에 그는 직물상 로버트 라지의 도제가 되었다가 양모 교역 중심지 브뤼주로 이주하여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에서 영국 무역계의 영향력 상인이 되어 ‘영국인모험상인연합의 총재’직을 맡기도 한다. 그는 1471~72년에 쾰른에서 인쇄술을 배운 후 1474년경 벨기에의 브뤼즈에서 인쇄소를 경영하기 시작하여 오랫동안 그곳에서 인쇄업에 종사한다.

50세가 넘어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리처드 3세와 헨리 7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출판업을 부흥시킨다. 그는 처음부터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서적을 출판하여 아직 정형화되지 않았던 영어를 공식적인 언어로 정착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다. 그가 인쇄한 90여 권의 책 가운데 74권이 영어로 출판되었고 그중 22편은 직접 번역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독일의 가톨릭 수사이자 사제, 신학 교수였으며  종교개혁을 일으킨 주요 인물이다.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여러 가르침과 전통을 거부하였다. 대사의 오용과 남용을 강하게 성토한 그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대사령 설교 담당자인 요한 테첼에 맞섰다. 1520년 그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하였다. 1521년 교황에게 파문을 선고받았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식하여 이 기간을 성서 주석, 로마 가톨릭 학자들과의 서면 논쟁, 논문 저술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번역에 사용하였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는 1522년 9월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9월 성서(Septemberbibel)’으로 불리게 되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은 독일 기독교인들을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하고, 독일어 발전에 이바지한 신학적, 언어학적 사건이다.

독일 종교개혁 이전에 사용된 성서는 라틴어 성서였으므로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는데, 성직자들은 이를 악용하여,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의 목회적 필요에 따라 조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터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면서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되어, 독일 기독교인들은 성직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루터가 성서 번역에 사용한 고지독일어는 현대 표준 독일어가 되었기 때문에, 루터의 성서 번역은 독일어와 문법이 통일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남아있는 구텐베르크 성서 몇 권
루터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면서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되어, 독일 기독교인들은 성직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사회에 끼친 영향

구텐베르크가 발명하고 개발한 인쇄기와 기술이 사회, 역사, 경제, 경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① 많은 활자를 정확히 주조할 수 있도록 자모(字母)들이 각인된 주형과 활자 합금, ② 프레스를 응용해서 만든 인쇄기, ② 인쇄잉크 등의 혁신적 기술들의 조합이었다. 그의 인쇄기는 책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어 저렴해진 성경은 중산층들이 글을 배우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또한 작가들은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출판을 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구텐베르크의 눈부신 발명품과 파란많은 인생 덕분에 유럽에서는 서적이 대량으로 인쇄될 수 있었고, 르네상스, 계몽주의, 종교개혁과 맞물려 유럽을 중세의 우매함과 암흑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소수가 독점하던 성경이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지식으로 변화되었다. 이 변화는 엘리트 집단의 폐쇄성이 무너지고 대중 교육이 시작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초기의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성서, 라틴어 문법, 연감, 뉴스 등에 활용되었다. 전해지는 인쇄 뉴스들 중 최초의 것은 1470년경 이탈리아에서 열린 토너먼트 경기에 대한 뉴스였다.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과의 전쟁에 대한 팸플릿들도 전해진다. 인쇄기는 뉴스 제작자들이 필사해야 하는 노력을 덜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독자층들을 확보하게 해주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뉴스의 대량생산체계를 가져다 준 것이다. 1483년에 필사로 1장을 쓰는 데 20페이지당 1플로린이었는데 인쇄는 20페이지당 3플로린이었다. 3배의 값이지만 1025장을 찍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쇄는 원본을 기반으로 하는 사본이라는 신뢰성을 가졌다. 구두뉴스와 마찬가지로 필사본은 거듭하여 작성하는 과정에서 착오와 왜곡, 과장이 개입될 수 있었다.

대항해시대에 뉴스를 공유하기 위한 신문이 출현하고 산업혁명을 거쳐 신문과 잡지가 매스미디어로서 자리를 잡게 하는 핵심적 자리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기술은 구텐베르크보다도 앞선 것이지만, 인쇄물과 지식을 대중화하고 확산시키는 역할로 발전해나가지 못하였다.

남아있는 구텐베르크 성서 몇 권
현대적 인쇄기의 발명가인 구텐베르크를 기념하는 독일 베를린의 조각상.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개발한 활판 인쇄 기술과 원리가 20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어 왔다는 점이다.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인쇄술은 그가 살던 15세기 당시 유럽에 인쇄술의 혁신을 위한 관련 조건이 모두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다만 그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일 뿐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문자가 등장한 이후에 금속활자를 사용한 근대적인 의미의 책이 출현하는 데는 3,500년이 걸린 것이다.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문예커뮤니케이션학회 학회장.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광고는 어떻게 세상을 유혹하는가?』,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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