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 레이 왜 눈물이 나지

오늘은 제노사이드 12장 시작이야

신지랑 아스카 눈치싸움은 이제 일단락 됐지만 그렇다고 해피엔딩이 오진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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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내 심장은 류트와 같으니; 당신 손가락 밑에 떨리오" -드 베랑제

제노사이드 0.12 / 속박

곡조가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 끝이 보이지 않는 강이 됐다. 건반을 누르는 것이 몸이 붕 떠오르고, 마음이 진정되고,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환희속에 잠시 존재의 고통마저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건반을 누르고 거기서 울려퍼지는 소리를 듣는 동안만은 천국에 있는 것 같았다.

나가라 게이코는 그래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노란색과 흰색이 섞인 플러그슈츠를 입은채로 울려퍼지는 곡조에 둘러싸여서. 앉은 자리 주변으로는 스포트라이트까지 비춰지고 있었다. 그때문에 볼 수 있는건 앞에 놓인 피아노와 주변을 감싼 암흑뿐이었다. 슈츠를 두른 손가락이 건반 위를 넘나들며 감성이 넘치는 푸가를 연주했다.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본능에 따른 손놀림이었다.

게이코는 자신이 왜 피아노를 포기했던건지 이제 이유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완전히 손을 놓았다가 결국 다시 배우지 않고 잊어버렸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피아노의 음색도 차갑고 가슴아프고, 잊고 싶은 것을 생각나게 만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엄마.

갑자기 기억이 되돌아왔다. 음악도 멈췄다. 얼어붙은 손가락을 움직여 연주를 재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를 붙잡고 기대섰다. 머리를 푹 숙인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피아노의 번뜩이는 검은 표면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게이코는 팔꿈치로 불협화음을 내며 건반 위에 쓰러졌다. 팔에 머리를 묻고 완전히 상심해 울음을 터트린다.

그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몇시간, 며칠, 몇주. 이곳에는 시간의 감각 자체가 없었다. 손등의 반짝이는 LED 시계도 작동을 멈춘지 오래였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영원히 울고 있으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어깨에 부드럽게 와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두려움에 휩싸여 고개를 들어보니,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야나미 레이의 유령같은 모습이었다.

"아-아야나미?" 게이코는 말을 더듬었다. "여-여기서 뭐하는거야?"

레이의 눈에서 붉은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으스스한 느낌은 없었다. 두렵기는커녕 그 손에서 게이코가 평생 그리워했던 온기가 느껴져왔다. "다시 연주할 수 있겠어?" 레이가 물었다.

잠시 게이코는 무슨 말인지도 이해하지 못했다가, 피아노쪽을 돌아봤다. "아." 눈을 비벼본다. "나...별로 잘하지도 않는걸."

"부탁이야." 레이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게이코는 레이와 딱히 만나본 적이 없었다. 몇달을 같은 학급에서 지냈지만 그것도 최소한의 교류뿐이었다. 다들 레이를 이상한 애 취급했기 때문에 학급 생활을 위해선 레이와 어울리지 않는편이 나았다. 사실, 레이와 엮이는건 사회적 자살에 가까웠던 것이다. 다른 숱한 일들과 마찬가지로 게이코는 레이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레이가 옆자리에 앉자 게이코도 더이상 사양할 핑계가 마땅찮았다. 게이코는 몸을 일으켜 레이의 곁에 앉은 다음 반짝이는 하얀 건반에 손을 올렸다. 레이쪽을 한번 돌아본다. "너도 배워볼래?"

게이코를 따라 건반에 손을 얹는 레이. "응."

게이코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행복하니?" 레이가 물었다.

"내가 웃고 있어서 묻는거야?" 게이코는 눈을 감고 악보를 떠올렸다. 자체적인 의지라도 있는 것처럼 손가락이 먼저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니, 행복하진 않아. 여기선 행복할 수 없어. 여기가 어딘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더는 외롭지 않아 다행이야."

"외로움도 삶의 일부인거 아니야?" 레이는 아직도 건반에 손을 올린채 연주는 하지 않으며 말했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을수는 없는거잖아?"

게이코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혼자 있는거랑 외로운건 다른 개념이야. 외로움은... 마음속에서 느껴지는거야. 꼭 혼자가 아니어도 외로울 수 있는거지. 괜찮아, 이해하지 못해도. 어차피 끝까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거니까. 난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느껴와서 다른건 기억도 안날 정도야."

그건 정말 사실이었다. 머릿속에 선명해야할 최근의 일들마저도 그 외로움에 비하면 흐릿했다. 어째선지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에 대해 기억나는건 번뜩이는 고통과 중간중간에 느낀 공포뿐이었다. 확실히 기억나는 마지막 지점은 사도가 자신의 몸을 만지고 침입하는 동안 비명지르고 울고 몸부림쳤던 것이었다. 사도는 게이코의 머리에 고통스러운 광경들을 채워넣었다. 어머니의 죽는 모습, 아스카가 자신을 무시하고 상처주는 모습, 미코가 떠나기로 마음먹는 모습. 마음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러고는 그것도 갑자기 뚝 끊기고, 마음 속에서 많은 것들이 사라지며 텅 빈 구멍을 남겼다. 그 구멍을 채운 것은 붉은색 고통이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너머로 울려퍼지는 자신의 비명. 태어나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공포. 어느 순간 비명은 아스카에게 제발 그만해달라고 애원하는 말로 변했다.

뭘 그만해달라고 한걸까? 게이코는 기억해낼 수 없었다. 기억나는거라곤 너무 익숙해서 차라리 반갑기까지 한 외로움뿐이었다. 그러고는 이곳에서 깨어났고 더이상 고통도 없었다.

아스카가 있어줬으면 했다. 아스카가 있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선 자신이 이 이상한 곳으로 오게 된 것도 아스카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미워해야하는걸까?" 게이코는 레이에게 물어봤다.

"그건 스스로 결정해야할 일이야." 레이는 그 말과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두 곡조가 울리며 화음을 이뤘다.

게이코는 아스카 때문에 화장실로 달려가 울음을 터트렸던게 몇번인지 셀 수도 없었다. 놀리거나, 소리지르거나, 아니면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괴롭히거나 해서. 그래도 게이코는 아스카의 친구가 되고 싶었었다. 아스카를 돋보이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을 게이코도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인기만이 아니라 그 자부심과 아름다움과 용기도. 아스카는 그런 게이코를 만만한 장난감 정도로만 취급했고 어쩌면 게이코는 아스카를 미워하는게 맞는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네르프 의무실에서 둘만 있었던 그 날, 게이코가 완전히 무너졌을때 아스카는 예상외로 손을 내밀어줬다. 게이코가 아스카를 끌어안고 어깨에 기대어 울었을때도 아스카는 불편해하면서도 밀어내지 않았다.

게이코는 아스카 때문에 숱한 고통을 겪어왔지만 막상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때의 일이었다. 게이코에게 아무 빚진 것도 없고 조금의 호감도 없으면서도 그 순간에 게이코를 버리지 않았다. 그날 둘은 깊고 의미있고 내밀한 유대를 만들었다. 그렇게 곁에 있어준 날 이후로 아스카는 조금씩 친절해졌었다.

작은 친절 한번. 그 이후로 게이코는 절대 아스카를 미워할 수 없게됐다. 그것을 굳이 소리내어 말할 필요도, 레이가 들을 필요도 없다고 게이코는 확신했다.

한동안 피아노 소리만 울려퍼졌다. 다시 입을 연 것은 레이였다.

"돌아가고싶어?" 레이가 물었다. "인생이 많이 달라져 있을거야."

"알아." 왜 아는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게이코는 알고 있었다. 눈을 감고 건반에 집중하며 손가락을 날렵하게 움직인다. "엄청 나쁠까?"

"난 의사가 아니야. 완전히 알 수는 없어."

"미코는?" 게이코는 죽음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네 언니는 널 그리워할거야."

게이코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연주도 멈췄다. 놀란 얼굴로 레이를 돌아본다. "언니?"

"미코가 그렇게 말했어." 레이는 연주를 이어가며 말했다. "너의 유대 중에 그 부분에 대해선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가족. 그 의미. 난 사람들 사이에는 벽이 존재한다고 믿었어. 고정되어서 특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 벽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거야. 가족이 아니더라도 가족과 똑같이 사랑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그 가족이라는 기준도 적용될 수 없는거겠지."

게이코는 기분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레이, 그렇게 복잡한 일 아니야." 게이코는 오른손은 건반 위에 놓아두고, 왼손을 심장쪽에 올려다보였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해. 그건 인간의 본능이야."

"언제나 그렇진 않아."

"그래, 언제나 그러진 않지." 게이코는 인정했다. "하지만 아스카 같은 사람도 그럴 수 있는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끼리도 끌릴 수 있는거고. 인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건 타인이 있기 때문이야."

레이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고개를 까닥했다. 표정에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지만, 레이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게이코는 굳이 부연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피아노에서 오른손을 뗀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게이코는 알고 있었다. 방금 마지막 연주를 마쳤다는걸.

잠이 오지 않았다. 아스카는 몸을 움츠리고 방의 어둠을 멍하니 바라봤다. 옆에서는 간신히 보일까말까한 신지가 평화롭게 꿈꾸며 잠들어 있었다.

아스카의 잠을 깨운 악몽은 이제 슬슬 무의식의 영역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두렵고 생생한 악몽이었다. 마지막에는 지금 옆에 있는 아이가, 아스카가 자신의 심장을 넘겨준 아이가 죽은채로 아스카의 품에 안겨 있었다. 몸에 칠갑이 된 피가 짙은 안개속에 붉게 빛나고 있었다.

악몽을 더 끔찍하게 만드는 것은 신지가 이제 더이상 바보같은 짝사랑 같은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신지는 이제 아스카의 일부였다. 신지는 아스카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슬픔밖에 없을때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었다. 신지를 잃는걸 견딜 수 있을지 아스카는 확신이 없었다. 

그런 생각만으로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게 짜증났다. 혹시 신지가 지금 정말 자고 있는건지, 아니면 잠든척 하는건지 궁금해졌다. 아스카가 이모양일때 아스카를 피하는 것도 신지다운 일이니까.

신지의 방향을 한번 노려본 다음, 아스카는 침대를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에 몸을 숙이고 얼굴에 물을 끼얹는 동안 빛 때문에 눈이 아팠다. 눈물도, 악몽도 모두 씻어내야했다. 거울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는 전혀 자기자신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때 그 자랑스럽던 세컨드 칠드런이 이렇게 지친 몰골에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다는게 믿기 어려웠다.

"넌 뭐가 문제야, 아스카?" 거울 속 소녀에게 말을 거는 아스카. "걜 사랑하는게 잘못은 아니잖아. 걔도 널 사랑하고. 네가 원했던거 아냐? 그럼 된거 아냐?"

아니, 그건 아스카가 원한게 아니었다. 아스카의 마음 속 갈망은 의식적인 결정 같은게 절대로 아니었다. 계획에도 예상에도 절대 없었던 일이었다. 오히려 그 반대면 반대였지. 아스카는 그것을 혐오하고, 두려워했다. 그래도 자기 머리에 반기를 든 가슴을 상대로 이길 방법 같은 것은 없었다.

아스카는 신지를 밀어내려고 정말 노력한 것이었다. 적당히 상처입혀서, 자기를 떠나는게 낫다고 신지가 스스로 납득하게 만드는 것. 절망 속에서 아스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신지가 아스카와 영원히 함께하겠노라고, 아스카를 위해 살겠노라고 말한 순간 아스카의 기껏 다진 결의도 모조리 박살나버렸다.

신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걸 깨달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아스카는 이제 안다. 자신의 비극에만 몰입한 아스카는 아직 자신에게도 살아서 고동치는 심장이 있다는 것을, 영원히 상처만 받고 살아야 할 의무 같은건 없는 심장이 있다는 것을 잊었었다. 아스카는 아직 애정도 위로도 우정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 정말 환상적인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 키스의 온기가 잦아들고나자 아스카에게 다시 남은 것은 악몽뿐이었다.

몇분을 고통스럽게 서있던 아스카는 더이상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이마가 수도꼭지에 한 뼘 거리까지 닿을 정도로 세면대에 몸을 기울이고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자 어둠속에서 다시 한번 끔찍한 악몽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비탄이 몸을 내달리며 아직 남아있는 감정적 방어선을 모조리 압도할 것 같이됐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일어난다. 예전의 자랑스러운 몸짓도 다 잊혀져, 아스카는 더는 똑바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한숨을 내쉬자 어깨가 푹 늘어졌다. 거울 속 소녀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녀를 도저히 다시 대면할 수는 없었기에 아스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봤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는 동안 화장실에 자신의 숨소리가 가득찼다. 이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아스카는 신지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아스카 자신의 방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혼자서 잘 수 없으니까. 얼마나 한심한가. 다시 어린 소녀로 되돌아갔다. 혼자 있는게 무섭고, 버림받는게 무섭고, 그냥 모든게 무서운 어린애로.

신지는 아스카가 방을 나섰을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평화롭게, 그녀의 고통에 대해선 알지도 못한채 잠들어 있다.

"네가 얼마나 운 좋은지도 모르지." 아스카는 중얼거리며 침대 옆 탁자에 놓여있는, 여태껏 자존심 때문에 먹지 않고 방치해왔던 수면제 통을 바라봤다.

지난 일주일을 이렇게 버텨왔다는건 답답하면서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스카는 그냥 잠이 자고 싶었다. 자존심도 이제 상관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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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는 분량이 엄청 긴데(반지의 제왕 3부작보다 한 10~15%쯤 짧을거임ㅋㅋㅋ) 완급조절을 잘 해놓은 물건임. 11장에서 아스카 신지 키스했다고 해서 15장 완결짜리 물건이 뚝딱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날리가 없지. 사실 이 시점에서 해결된 문제라곤 둘 사이 관계 하나밖에 없음. 하지만 그 나머지 문제들을 이 두사람이 헤쳐나가는데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 마련됐다고 할 수 있겠다

게이코는... 내일 핫산 분량에서 여파가 다뤄질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