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주의자 는 어떻게 현실 을 보는가

 

낭만주의(浪漫主義) 

1. 낭만주의(浪慢主義)의 개념

(1) '낭만'의 개념

 낭만주의의 원어인 'romanticism'은 'romantic'이란 말에서 온 말이며, 그것은 'romance'에서 유래한다. 즉, 기사도, 모험 및 애정의 이야기들과 관계되어 있었으며 허황한 감정, 비개연성, 과장 및 비현실성과 같은 것, 곧 건전하고 합리적인 인생관과 정반대되는 요소들로 특징지어져 있었다.

 로망스는 기이하고 가공적이며 경이적인 것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로망스는 등장 인물(신비의 보물을 찾아 떠나는 기사들, 고독한 영웅들), 풍경(폐허, 절벽, 폭포), 감정(우수, 정열, 자연에 대한 심취)등 모든 면에서 낭만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최초로 이 말을 문학사에서 쓴 이폴리트 텐은 낭만주의 작가들이 고전적인 것과 대조되는 당대성을 지닌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 용어를 사용하였다.

(2) 낭만주의의 정의

 넓은 의미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체에 걸쳐 서구에 나타난 문예 사조이며, 좁은 의미로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사이에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서구의 주관적이고 개성이며 공상적, 상징적, 신비적, 초자연적, 혁명적인 특성을 지닌 문학 예술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대체로 후자에 중심을 두고 개념을 사용하지만 추상적인 초시대적 사조로서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의 질풍 노도 운동에서 시발점을 찾으며 프랑스 혁명과의 상관 관계 속에서 혁명적 낭만주의와 병적 낭만주의를 구분하기도 한다. 전자는 사회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서 나온 문학이며 후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침체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으로 도피하려는 지향을 보이는 등 퇴폐적인 성향이 두드러진다.

2. 낭만주의의 시대적 조건

(1) 사회의 상태

 낭만주의가 발생한 조건은 산업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에서 전형적인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산업 혁명은 발달한 과학 기술을 생산에 이용하여 대량 생산을 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자본주의 사회는 생활의 편의를 도모라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전통적인 삶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낭만주의는 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태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한편 프랑스 혁명은 사회체제를 민주적인 제도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으며 사회의 진보를 촉진하는 계기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진전 과정에서 여러 부정적인 측면이 노출되기도 하고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는 양상이 나타나면서 이에 대한 환멸이 낭만주의를 촉진하기도 하였다. 즉 합리화되어 가는 사회, 도시적인 생활, 부르주아적인 생태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낭만주의의 배경을 형성하였다.

(2) 사상적 배경

 낭만주의의 사상적 배경은 고전주의와 함께 나타난 계몽주의에서 찾는 경우도 있지만, 통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경구로 유명한 루소의 사상에서 기원을 찾는다. 루소는 모든 불행과 죄악의 원인이 문명에 있고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善)하고 완전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것은 전시대의 철학자들이 전능한 이성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 대비되는 양상으로서 루소는 사회의 진보를 믿지 않았으며, 사적 소유권에 의해서 원시적인 자유와 평등이 깨졌다고 보고 자연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즉 사회계약에 의해 달성되는, 인간의 문화적 성과와 도덕적 자유에 의한 평등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루소는 인간의 기본 성정(性情)이 이성보다 감성에 있음을 주장하여 낭만주의의 인간관을 선취하였다.

3. 낭만주의의 문학 이론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규범성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다. 이에 따라 어떤 이론이 먼저 제시되고 낭만주의 문학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시인, 작가, 비평가들의 활동에서 낭만주의에 고유하다고 할 수 있는 공통적인 문학관을 살펴볼 수는 있다.

(1) 감정의 표현

 고전주의가 감정의 절제를 주장한데 비해서 남만주의는 감정 표현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루소는 '참회록'에서 "한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의 진실을 꾸밈없이 보여 주고자 한다."며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고, 영국의 시인 위즈워스는 "모든 좋은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 발생적 유출(流出)이다."고 말했다. 즉, 낭만주의 시인, 작가들은 상상력을 통해 자아의 감정, 인상(印象), 대상물을 보다 큰 전체로 통일시켜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주고자 했던 것이다.

(2) 천재론

 낭만주의자들에게 문학은 더 이상 현실에 있는 것의 재현(再現)이 아니었다. 감정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상상력에 의해 '생명력(生命力) 있고, 창조력 있는 힘으로 심미적 균형과 통일을 나타내며 주관과 객관, 현실과 이상, 감각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결합시키는'는 것이었다. 영국의 시인 블레이크가 말했듯이 상상력은 "궁극적 실재를 창조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이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동이 가장 뛰어난 존재가 독창성을 지닌 천재들이고 고전주의의 모방 원칙과 대조적인 것이다.

 모방은 기왕의 소재를 가지고 제작 시술이나 노력을 통해 만들어 내는 데 비해 천재는 '반항적이고 초인간적이며 신적인 거인'으로, 신적인 영감, 순간적 인상과 직관(直觀)에 의해 일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실재의 깊이에 도달하는 존재였다. 즉, 고전주의에서 천재가 좀더 세련된 교양, 더 높은 지성에 의해 특정지어지는 인물이었다면, 낭만주의에서는 일상의 논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물의 내적 연관을 찾고 여러 가지 관련의 연합을 통해 환상과 꿈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이상화된 인격의 소유자였다.

(3) 상징과 암시

 낭만주의는 감정 표현론과 천재론을 주장함으로써 표현 수법에 있어서 상징과 암시를 중시하게 된다. 특히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장르인 서정시에서의 상징과 암시는 창조적 변용력(變容力)의 중심이었다. 독일의 슐레겔은 낭만주의가 표현하는 초월적인 것은 '오직 이미지(Image)와 기호(記號)를 통해 상징적으로만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4) 민족 문화의 강조

 낭만주의는 시어로는 일상 생화에 쓰이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민족의 전설적인 과거를 되살려 주제를 다양화해야 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이는 현실의 정치를 비롯한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4. 낭만주의의 전개

 낭만주의는 맨 먼저 독일에서 발생하여 영국으로 건너가고 이어서 프랑스에 전해진 문예 사조였다.

(1) 독일(獨逸)

 낭만주의의 징조는 18세기 전반에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집단적 현상으로 구체화한 것은 독일의 폭풍 노도 운동에서이다. 고전주의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표현한 폭풍 노도 운동은 문학이 제약이나 구속을 넘어서 인간의 마음에 깃든 정서, 감정이나 정열을 표현해야 하며, 그 속에서 인생의 실재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운동의 과정에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은 작품이 산출되었다.

(2) 영국(英國)

 독일의 낭만주의가 관념적인 주장이 앞선 것이었음에 반해서 영국의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대보다도 당시의 사회적 변동에서 더 많은 자극을 받았다. 산업 혁명 이후 부르주아적 질서가 확립되어 가던 현실이었던 만큼 문학인들은 동시대 사회에 대해 포괄적인 거부감을 나타냈으며 물질적인 소유에 대한 경멸감을 표시하고, 합리적인 곳에 대해 자연적인 것을 선호했으며 인간 심정의 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한편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퇴색해 가던 1798년 무렵부터는 현실에 대한 환멸이 시인들에게 더 강한 자극을 주었으며 상상력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블레이크, 워즈워스, 키츠, 바이런, 셀리, 콜리지 등이 있었다.

(3) 프랑스

 1750년경 독일과 영국에서 시발된 낭만주의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 확산되는 데는 1 세기가 필요했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초반 권력에서 밀려난 인사들을 중심으로 귀족적 낭만주의가 발생하여 돈이 유일한 관심사인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환멸을 표현하였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스탈 부인, 샤토브리앙, 비뉘 등을 들 수 있다.

 19세기 중반에는 정치적, 사회적 난국이 펼쳐지는 가운데 인간 조건에 대한 반항과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낭만주의를 이끌었다. 고전주의적 규칙에서 해방된 문학, 영감의 자유, 언어와 형태의 자유, 진보의 문학을 주장했던 스탕달의 '라신과 셰익스피어'가 출간된 이후 낭만주의는 본격화된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뮈세, 네르발, 고티에, 위고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고티에는 예술 지상주의를 주장하여 '무용한 것만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는 신조를 내세운다. 사실주의 작가로 알려진 발자크, 스탕달 등의 소설도 혐오스런 현실 세계에 맞서는 인물을 그린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의 경향을 드러내었다.

인기 작가 김영하 씨가 '모두에게 사과드린다'는 글을 끝으로 14일 자신의 트위터와 인터넷 블로그를 떠났다.

김 씨의 인터넷 절필은 지난 1월 말부터 진행돼 온 문학평론가 조영일 씨와 벌인 작가(지망생)들의 현실 인식을 둘러싼 논쟁 끝에 그가 선택한 결론이다. 조 씨는 16일 블로그에 '새로운 논쟁을 꿈꾸며 : 김영하 님과의 논쟁을 마무리하면서'라는 글을 올렸고, 이로써 2주가량 인터넷 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논쟁이 일단락 지어졌다.

김 씨는 블로그 '김영하 아카이브'를 닫으며 쓴 글에서 논쟁 상대였던 조 씨에게 "조만간 문학 판을 바꿀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나의) 자기만족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예술관'을 타인에게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며 "이런 저를 비판하셨던 분들은 앞으로 나아가 세계를 바꾸고 현실과 대결하라"고 적었다. 그러자 조 씨는 16일 트위터와 블로그를 통해 "이런 찜찜한 사과는 난생 처음"이라며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심정을 밝혔다.

김 씨와 조 씨 사이의 논쟁은 작가(예술가)의 정체성과 생존권을 둘러싸고 '예술가의 자기 책임이 중요하다'(김영하)와 '구조 개혁이 중요하다'(조영일)라는 의견 간의 대립 양상을 보였다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또 김영하 대 조영일 개인 간 혹은 '소설가' 대 '비평가' 간의 논리와 감정 싸움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이 논쟁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죽음을 맞으며, 문화예술 업계의 현실 인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시켰다. 이 과정에서 블로그 댓글, 트위터 등을 통해 수많은 이들이 관전했다.

기 : 작가의 정체성 둘러싼 논란

논쟁의 발단은 지난 1월 1일 김영하 씨가 쓴 '작가는 언제 작가가 될까'라는 글이다. 그는 신춘문예에서 낙선한 이들에 대한 위로 차원의 글에서 "누군가를 작가로 만드는 것은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긍지"라며 "스스로 작가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영일 씨는 같은 달 29일 '젊은 문학 지망생에게 보내는 편지 : 김영하의 작가론에 부쳐'라는 글을 통해 "(김영하가 말하는) 원론적인 동감이 현실적인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조 씨는 "외부의 인정과 상관없이 자신의 가치만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것은 나르시시즘이며 이것은 '어른 되기'를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라면서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이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김 씨는 "예술가는 바로 그런 정신적 어린아이들이 나르시시즘으로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냉정한 자기 인식은 예술가가 아니라 증권 시장의 투자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말했다. 이에 조 씨는 "(근대 문학에서 작가란) 인정받거나 말거나 예술혼을 불사르는 자기만족적인 아마추어 작가가 아니라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 한없이 노력하는 프로 작가만을 가리킨다"면서 김 씨의 작가론을 재반박했다.

여기까지의 논쟁은 그저 작가(지망생)의 정체성 문제였다. 김 씨는 작가를 일종의 자기 선언과 자기 인정만으로 선택이 가능한 개인의 정체성으로 보았고 조 씨는 독자와 수요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직업으로 보았다.

그러던 논의는 김영하 씨의 다음 글인 '낭만주의자는 어떻게 현실을 보는가'를 통해서 등단 제도가 존재하는 문학계의 현실 문제로 넘어간다. 성공할 확률이 지극히 낮기 때문에 수반되는, 낙선자와 생계가 어려운 작가 지망생의 불행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에 대해서다. 두 사람은 낙오자가 생기는 현실과 문단 제도의 문제에는 의견을 같이했지만 결론은 달랐다.

김 씨가 "예술가 개인은 시장의 규모도, 진입 장벽의 높이도, 정치 제도도 바꾸지 못한다"면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당분간 오직 우리 자신뿐"이라고 강조한 데 대해 조 씨는 "문학가(예술가)는 세상의 편견이나 불합리한 사회 제도와 싸워가면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라고 맞섰다.

승 : 최고은의 죽음…"영악하게 살아남아라" vs "뭐라도 해야 한다"

여기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죽음이 8일 <한겨레>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논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 논쟁에 최 씨를 먼저 '소환'한 것은 조 씨 쪽이다.

조 씨는 9일 트위터에 "문학계에 여성 작가가 많은 이유는 상대적으로 생계 부담이 적기 때문"이라는 글을 남겨 여성 작가들을 모욕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11일 '예술가는 누가 지키는가 : 최고은 씨에게 바친다'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을 비난한 사람들에 대해 "뉴스 소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비판한 뒤, 이 문제를 앞선 논쟁의 영역으로 끌고 왔다.

그는 영화계에서 비정규직 스태프 착취 등 불공정한 관행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영화인들이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일갈한 뒤 "영화계 스스로 관행을 제도적으로 고치기 전까지 절대 한국 영화를 보지 않겠다"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는 이어지는 글에서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고(故) 박완서 작가 역시 "'가난'이라는 문제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기성 작가들이 인세를 '작가기금'으로 적립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일관되게 '제도의 마련'을 주장한 것이다.

▲ 故 최고은 씨 .

한편, 12일 김영하 씨도 "나는 최고은의 선생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생전 최 씨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사제 관계였음을 밝힌 뒤, 최 씨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조 씨와의 논쟁을 이어가자면 꺼내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조 씨가 둘을 비슷한 선상에 두고 구조 문제를 지적한 것과 달리 영화계와 문단을 구분하면서 "(문단의) 제도는 보기보다 간단하지 않다. 카르텔을 형성해 새로운 작가들의 진입을 막고 있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고은이들의 건투를 빈다. 영악하게 살아남으라"며 "세상이 곧 바뀐다는 풍문에 속지 마시라"라고 끝맺었다.

이렇듯 작가의 정체성과 현실 인식을 둘러싼 논쟁은 최 씨의 죽음이라는 '현실 문제'를 만나면서 한층 격하게 상승해갔다. 초점은 부적절한 현실에 대한 개인의 변화가 중요한가, 사회 제도의 변화가 중요한가로 뚜렷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전 : 김사과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던 13일 소설가 김사과 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김영하-조영일 논쟁과 관련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글을 올렸다. 최고은 씨와 마찬가지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시절 김영하 씨의 제자였던 김사과 씨는 자신의 입장은 조영일 쪽에 가깝다면서 "예술가라면 더욱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예술가들에게 삶 아니면 삶과 유리된 예술로의 도피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게 아니라 "삶과 예술 모두를 포기하지 않는" 길이 있다고 말했다. 예술가는 다른 노동과 차별되는 특별한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모든 인간들처럼 먹고 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는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이런 엉망진창인 사회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투쟁한다고 해서 예술가들의 창작욕이 타락되거나 고갈되지 않는다"며 각 개인 간의 연대를 강조했다.

이에 김영하 씨는 "현실적 문제들을 고민하지 않는 한, 선언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미 우리는 문인협회나 작가회의를 비롯한 단체들을 이미 갖고 있다"면서 "그들이 있는데도 왜 궁핍한 예술가들이 줄어들지 않는지를 실사구시의 눈으로 살펴야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미국의 작가 길드(Authors Guild), 작가들을 위한 조합(Writer's Guild of America), 프랑스의 예술가 지원 프로젝트의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 대응에서 알 수 있듯 김영하 씨 역시 제도 개선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그는 반복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세상은 선언만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앞서 쓴 글에서 "세계의 변화는 다음 문제"라고 자신의 세계관에 따른 순서를 명확히 한 결과, 그가 뒤늦게 제시한 예들은 반대자들의 큰 설득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결 : 논쟁의 다음 단계는?

비판이 쏟아지자 결국 김 씨는 인터넷 절필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는 마지막 글에서 '많은 사람들이 최고은의 사인을 아사로 믿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살아갔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펼쳐 또 한 번 논란을 몰고 왔다. 김 씨는 최 씨가 갑상선 기능항진증은 물론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 같다며 "어쩌면 삶에 대한 희망을 서서히 놓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일부 누리꾼들은 김 씨가 고인의 사생활을 추측으로 언급하며 애초의 보도가 문제라는 주장을 펼친 것을 비난했다. 수많은 매체들이 이 발언에 초점을 맞춰 기사를 작성하는 부작용도 뒤따랐다. <동아일보>는 15일 기명 칼럼에서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한도 아닐진대 '아사'라는 표현을 쓰려면 신중해야 한다"라는 엉뚱한 논지를 펼치기도 했다.

최 씨의 죽음에 대해 주변인들은 극도로 언급을 꺼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죽음의 원인을 둘러싸고 '아무도 알 수 없는 개인의 문제다', '사회적 타살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 씨가 병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투병 중 이웃집에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나', '밀린 돈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쪽지를 남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건의 주인공은 '밀린 돈'을 받지 못한 한 작가였고, 그로 인해 월 50만 원 이하의 급여로 계약 상태를 유지하는 영화 스태프들 등 불합리한 사례들이 환기되고 있다.

이번 논쟁의 마무리를 지켜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한 누리꾼은 "개인의 의견과 의견들이 오롯이 의견으로서 공존하는 세상이 너무 멀다"(듀나게시판, 아이디 'Paul.')고 안타까워했다. 김 씨의 태도를 비판하는 의견과 함께 조 씨가 김 씨의 애초 주장을 곡해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다음 아이디 '1109'는 "시작은 김영하의 글에 대한 (조영일의) 논점일탈에서 출발하지 않았나"라고 지적했다.

그런가 하면 한 누리꾼은 논쟁과 관련한 블로그 댓글에서 "누가 옳네, 틀리네 하는 놀음에서 진짜 중요한 문제가 덮였다"면서 "(처음 논쟁대로) 신춘문예 제도에 대해 불합리성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정도로 논쟁이 발전했다면 오히려 생산적이었을 것"이라고 김 씨와 조 씨 모두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조 씨는 16일 블로그 글을 통해 "논쟁 과정에서 생기는 격한 감정의 충동도 논쟁의 본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논란이 '논쟁의 무용성'을 증명하는 예가 되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논쟁은 우위를 가리는 경기가 아니라면서 "논쟁의 당사자들은 물론 그 논쟁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장(場)을" 꿈 꾼다고 말했다.

이번 논쟁은 '작가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작가 지망생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야 하는가'에서부터 냉혹한 승자 독식 구도가 존재하는 문화예술계를 둘러싼 현실 인식 문제를 건드렸다. 이 부분은 김사과 씨의 지적대로 "각자의 문제이고 (어느 쪽도) 비난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논쟁 당사자·관전자들은 모두 입장을 떠나 문단과 영화계를 포함한 우리 문화예술계 현실이 약자에게 더욱 냉혹하며, '밀린 돈'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김영하-조영일 간 논쟁은 마무리됐지만 일련의 글들이 촉발시킨 논쟁들은 현재진행형이다. "'밀린 돈'은 '개인의 불행'인가, 문화예술계의 '관행'인가'", "예술 직종 지망생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어디까지 지원하고 지원하지 말아야 하나", "문화예술계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 안전망의 문제다" 등 인터넷 게시판·트위터를 통해 추가적인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조영일 씨는 트위터에서 "논쟁은 마무리됐지만 논쟁에서 다룬 문제까지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