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의 사진을 보며 부러워하던

  SNS는 현대 사회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단순히 정보를 공유하는 데 그쳤던 이전과 달리 실시간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며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SNS 속 수많은 팔로워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인플루언서가 등장했고 각종 인터넷 마켓으로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구매하는 등 새로운 세상이 형성됐다. 이렇듯 SNS는 현대 사회의 주축이자 사회적 흐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SNS를 자발적으로 이용하며 그 속에서 즐거움과 재미를 얻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SNS 속 세계에는 못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여유롭고 호화로운 삶을 전시한다. 상향 평준화된 SNS 속 삶과 실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체감하며 부러움과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다.

  SNS에 게시된 글을 보다 보면 변별력을 잃고 SNS 속 세상과 현실을 혼동할 수 있다. 마치 나를 제외한 모두가 직사각형 안 이상적인 이미지의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현실과 다른 공간을 맹신하게 된 순간 SNS를 재미 목적으로만 이용할 수 없다. 끊임없이 남들의 삶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비교하며 스스로를 인정하는 기준을 높인다. 나 또한 그 세상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느끼는것이다. 그럴수록 인플루언서들이 자랑하는 완벽한 일상과 다른 자신의 삶을 깎아내리고 깊은 우울에 빠진다.

  하지만 자신의 주관을 잃고 다른 이의 기준을 따르는 이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SNS 속 해외 여행지에서의 이국적인 일상을 보며 쉽게 감탄하지만 이를 위해 얼마만큼의 노력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수면 위 백조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물속의 힘겨운 발길질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단편성에 괴리감을 느끼며 SNS는 만들어진 행복만으로 가득 찬 기이한 세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동경하던 게시물들의 뒤편에 반드시 아름다움만이 존재하는것은 아니다. 부분적인 경험을 마치 일상처럼 부풀려 만든 SNS 안의 화려함은 어쩌면 사실조차 아닐 수 있다. 뒤편에 어떤 것이 존재할지 모르는 사진 몇 장으로 자신의 삶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동시에 위와 같은 사실을 계속 일깨워야 한다. 이를 알고 있어도 직사각형 안 세상의 찬란함을 보다 보면 이따금 우울을 느끼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 다른 이들의 부분적인 삶을 부러워하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빛낼 수 있는 자신의 오늘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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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의 사진을 보며 부러워하던

피레네 산맥 북쪽에 자리잡은 프랑스의 소도시 루르드는 해마다 6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가톨릭 성지다. 14살 소녀였던 베르나데트가 18번이나 성모발현(성모 마리아가 한명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초자연적으로 나타난다고 여겨지는 기적 현상)을 경험한 곳으로 유명하여, 역사와 문화의 체험장 이상으로 기적과 구원을 바라는 이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종종 신체치유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정해진 과정을 거쳐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루르드>의 크리스틴(실비 테스튀)은 전신마비로 휠체어에 묶여 항상 다른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어머니와 함께 이곳을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자신을 돌봐주는 자원봉사자 마리아(레아 세이두)를 보며 부러워하던 그녀에게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난다. 미약한 힘이지만 스스로 일어서게 된 것이다. 함께 성지순례를 온 사람들은 축하인사를 건네지만 의심과 질투의 시선도 있다. 그녀는 진정으로 기적을 경험한 것일까.

루르드를 찾는 수많은 인파는 물론 성체강복식과 고해성사의 과정, 그리고 성수(聖水)라 불리는 샘물의 모습 등 영화는 성지순례를 대리 체험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영화 속 인물과 똑같이 그 기적을 온몸으로 겪으며 마술과도 같은 순간을 안겨준다. 정상인인 자원봉사자를 부러워하고 남자들을 흘깃 쳐다보는 크리스틴의 야윈 몸에 욕망이 새겨질 때 수수께끼와도 같은 강렬함이 뇌리를 스친다. 정작 스크린에서 아무런 사건도 그 어떤 충돌도 일어나지 않지만 가슴을 뜨겁게 충동질한다. 그 불안한 직립보행만으로도 우아하고 숭고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사랑스런 리타>(2000)와 <호텔>(2004) 등으로 주목받은 예시카 하우스너는 정갈한 미장센과 절제된 화법으로 특유의 인상적인 침묵과 여백을 보여준 감독이다. 그래서 ‘신’과 ‘기적’에 대해 얘기하는 <루르드>는 더없이 그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공평함에 대한 질문, 과연 그 기적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기다림 등 영화는 종교에 대한 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그녀에게만 기적이 일어났을까, 묻는 사람에게 “늘 해명을 찾는 우리에게 그분의 뜻은 불가사의”라는 신부의 모호한 대답은 결국 진리이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그 거대한 ‘뜻’에 선택받은 주인공으로 <두려움과 떨림>(2003)의 실비 테스튀를 캐스팅한 것은 너무나 적절하다. 기적의 모호함으로 가득한 라스트신의 음악과 그녀의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은 단연 압권이다.


아름답다는 표현에 맞는 것을 발견했다면

모든 감각을 이용해서

머리와 가슴에 기록해두자.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때의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변해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오랫동안

간진하는 방법은 있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카메라를_사진가의 기억법

영화를 좋아한다. 그림을 좋아하듯 사진을 좋아하듯 그렇게 영화가 좋았다. 영화를 한참 보던 시기의 나는 꽤 오랫동안 내 쓸모를 증명하지 못했고, 온종일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더 영화에 빠져들었다. 영화는 내게 좋은 취미 활동이자 선생님이며, 친구였다. 종일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영화 하나는 봤으니까 하고 생각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는 영화와 친해졌다.

집중해서 보기도 하지만, 그냥 틀어놓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 집중해서 보기도 하고, 다시 흘려보내기도 했다.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영화를 보며 멋진 장면이 나올 때마다 셔터를 누르듯 캡처를 했다. 영화의 미장센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것이 좋았다. 마치 사진을 찍듯이 움직이는 영상을 멈추는 것을 즐겼다. 어쩌면 이런 행동이 사진 작업에 꽤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닮아 있다. 처음에는 좀처럼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알아갈수록 놓쳤던 장점을 발견하는 것이 그렇고 가끔은 무심한듯 멀어졌다가도 어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이 그렇다. ... 어쩌면 내가 영화는 나름의 사교활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조금 이상한 사람_영화 감상법


어떤 이의 사진을 보며 부러워하던


 

직업병일수도 있는데 나는 광고와 관련된 책이면 꼭 읽어본다.

게다가 에세이라면 이렇게 하루 시간을 내서 읽거나(사실 이 책도 그렇지만 앉은 자리에서 하루만에 다 읽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깐 서점에 들러 후루룩 속독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인터넷서점으로 책 제목과 소개라도 읽는다.

이번 책은 김규형 포토그래퍼님의 <사진가의 기억법>.

게다가 캐논, 에어비앤비, 에잇세컨즈 등 브랜드들이 사랑하는 포토그래퍼라니!

이미 <서울 스냅> 책과 강연, SNS 등으로 유명한 김규형 작가님이지만 끌리듯 <사진가의 기억법>을 폈다.

작가의 이력이 조금 독특하다.

광고를 하다가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이자 사진가의 길로 서다니.

궁금증이 생겨서 채널예스 인터뷰 기사도 읽어봤는데 평범하지 못하고 틀리고 이상한 아이였다는 자기소개가 눈에 띈다.

자신의 업을 관찰이나 메모, 기억, 좋아하는 일 등으로 푼 <사진가의 기억법> 책에도 나오지만 그만이 가지고 있는 뷰어 속 시선이 좋았다.

창작

-어렸을 때 나는 장래 희망을 적는 칸에 발명가가 되고 싶다고 했지마 실은 '발견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일상에서 특별함을 발견하는 사람.

직업병

-편집자가 띄어쓰기가 잘못된 문장을 보면 상상 속에서 스페이스바를 누르고 간판 디자이너가 길을 가다가 마음에 안 드는 간판을 보면 어도비 프로그램을 열어 수정하듯이, 살면서 만나는 모든 아름다운 순간을 프레이밍해서 저장하려는 습관은 내 직업병일지도 모른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은 자연스레 잘 볼 줄 알아야한다. 잘 보려면 그만큼 관찰이 중요하다.

김규형 포토그래퍼가 보는 세상은 발견하고 프레밍하고 메모하고 기억하는 삶이다.

이 책의 제목이자 가장 중요한 꼭지 중 하나가 <사진가의 기억법>이라는 챕터인데, 그 속에서 모든 감각을 이용해 소중한 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간직'하자고 말한다.

한참 SNS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도 나는 조금은 자의반 타의반 계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사진이나 짧은 글을 포스팅하는걸 그리 열심히하는 편은 아니다.)

누구는 맛집에 가고 예쁜 카페를 가고 멋진 장소에 가서 인증하는 '인증샷' 문화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하는데

SNS를 열심히 하지 않는 나조차도 이 의견과는 다르다.

사진을 찍는 건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다. 비록 사진이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더라도, 사진을 찍고 오랫동안 잊고 살면서 폴더 속 파일로 방치되더라도 사진이 가진 영원성은 그 자체로도 유의미하다.

아마 사람들도 SNS의 '좋아요'를 바라는 마음 속에는 그만큼 소중한 순간을 함께하고 공감받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더 열심히, 더 많이 인생을 즐기고 싶어진다.

<사진가의 기억법> 에세이 속에서는 사진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작가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경험이나 업에 대한 철학도 담겨 있고, 아픈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하는 모습이 담긴 글에는 눈시울도 붉어졌다. 그리고 사진과 영화로 말하는 일상의 이야기도 좋았고 중간중간 작가가 찍은 멋진 사진들도 빼놓을 수 없다.

책을 보다보면 알겠지만, 사진들의 특징이 있다.

어딘가 비쳐서, 거울로 대비해서 찍은 사진들이 꽤 많았는데 아름다운 상을 눈에 한번 담고, 거울에 한번 담고, 사진기에 한번 담는 시선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과 사진에는 이유가 있다.

아마 <사진가의 기억법> 김규형 포토그래퍼님의 글에도 묻어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사진과 순간의 관계를 맺듯, 이 책과 관계를 맺은 독자에게도 소중한 순간을 선물해주는 것 같다.

내가 어떤 것을 사진으로 찍거나 글로 썼다면

나는 그것을 만난 것이다.

마치 하마터면 스쳐 지나갈 뻔한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는 것과 같다.

관계를 맺었다면 잊을 리 없다.

내가 기록한 순간은 내가 지워버리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그래서 순간을 기록한다.

에필로그_그래서 순간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