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도 아니면서 왜 밤마다 떠오르나요

달도 아니면서 왜 밤마다 떠오르나요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독립시는 기억한다

주로 책 제목에 꽂혀서 책장을 넘기는지라, 독림운동은 못했지만 독립시는 기억한다, 라는 제목을 보고 그냥 넘길 수 없었습니다. 

한용운, 이상화, 심훈, 김영랑, 이육사, 윤동주.... 학창 시절 수업 시간 내내 잠을 잤어도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심훈이 왜 시집에......? 심훈하면 상록수이고 소설가 아니었나 싶어 네이버를 찾아보니 소설가, 시인, 영화인이라 소개하고 있더군요. 세상에. 

한용운하면 님의 침묵이고 이상화하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김영랑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이육사는 광야 혹은 청포도, 윤동주는 서시 ... 이렇게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시 외에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면서 낯설고 또 낯선 시들을 골라 봤습니다.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는 잊고자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고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 두어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길이 막혀

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언만 산 넘고 물 넘어 나의 마음을 비춥니다.

나의 손길은 왜 그리 짧아서 눈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 만지나요.

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마는

산에는 사다리가 없고 물에는 배가 없어요

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

나는 보석으로 사다리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

오시려도 길이 막혀서 못 오시는 당신이 기루어요.

밤은 고요하고

밤은 고요하고 방은 물로 씻은 듯합니다.

이불은 개인 채로 옆에 놓아두고 화롯불으 다듬거리고 앉았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화롯불은 꺼져서 찬 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오히려 식지 아니하였습니다.

닭의 소리가 채 나기 전에 그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였는데 꿈조차 분명치 않습니다. 그려.

달도 아니면서 왜 밤마다 떠오르나요

이상화

빈촌의 밤

봉창 구멍으로 나른하여 조으노라.

깜작이는 호롱불 햇빛을 꺼리는 늙은 눈알처럼 세상 밖에서 앓는다, 앓는다.

, 나의 마음은, 사랑이란 이렇게도 광명을 그리는가.

담조차 못 가진 거적문 앞에를, 이르러 들으니, 울음이 돌더라.

가장 비통한 기욕(祈慾)

-간도 이민을 보고

, 가도다, 가도다 쫓겨가도다.

잊음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아가도다.

자갈을 밥으로 해채를 마셔도 마구나 가졌으면 단점을 얽을 것을.

인간을 만든 검아 하루 일찍 차라리 주린 목숨을 뺏어가거라!

, 사노라, 사노라, 취해 사노라.

자포 속에 있는 서울과 시골로 멍든 목숨 행여 갈까, 취해 사노라.

어둔 밤 말 없는 돌을 안고서 피울음 울어도 설움을 풀릴 것을.

인간을 만든 검아, 하루 일찍 차라리 취한 목숨, 죽여 버려라!

독백

나는 살련다 나는 살련다

바른 맘으로 살지 못하면 미쳐서도 살고 말련다.

남의 입에서 세상의 입에서 사람 영혼의 목숨까지 끊으려는 비웃음의 쌀이 내 송장의 불쌍스런 그 꼴 위로 소낙비같이 내려 쏟을지라도

짓퍼부울지라도.

나는 살련다, 내 뜻대로 살련다

그래도 살 수 없다면 나는 제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벙어리의 붉은 울음 속에서라도 살고는 말련다.

원한이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장마 진 냇물의 여울 속에 빠져서 나는 살련다.

게서 팔과 다리를 허둥거리고 부끄럼 없이 몸살을 쳐보다 죽으면 죽으면 죽어서라도 살고는 말련다.

선구자의 노래

나는 남 보기에 미친 사람이란다.

마는 내 알기엔 참된 사람이노라.

나름 아니꼽게 여길 이 세상에는 살려는 사람이 많기도 하여라.

오 두려워라, 부끄러워라.

그들의 꽃다운 사리가 눈에 보인다.

행여나 내 목숨이 있기 때문에 그 살림을 못 살까, , 괴롭다.

내가 알음이 적은가, 모름이 많은가

내가 너무나 어리석을가, 슬기로운가.

아무래도 내 하고저움은 미친 짓뿐이라

남의 꿀 듣는 집을 문흘지 나도 모른다.

사람아, 미친 내 뒤를 따라만 오너라.

나는 미친 흥에 겨워 죽음도 뵈줄 테다.

통곡

하늘을 우러러 울기는 하여도 하늘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다.

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이 애달파 하늘을 흘기니 울음이 터진다.

해야 웃지 마라.

달도 뜨지 마라.

눈이 오시네

눈이 오시네

눈이 오시면 내 마음은 미치나니 내 마음은 달뜨나니 오, 눈 오시는 오늘 밤에 그리운 그이는 가시네.

그리운 그이는 가시고 눈은 자꾸 오시네.

눈이 오시면 내 마음은 달뜨나니 내 마음은 미치나니 오, 눈 오시는 이 밤에 그리운 그이는 가시네.

그리운 그이는 가시고 눈은 오시네.

조선병(朝鮮炳)

어제나 오늘 보이는 사람마다 숨결이 막힌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반가움도 없이 참외꽃 같은 얼굴에 선웃음이 집을 짓더라.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 맛도 없이 고사리 같은 주먹에 진땀물이 굽이치더라.

저 하늘에다 봉창이나 뚫으랴 숨결이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