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룡사와 최제안(催齊顔) 천룡사터는 남산 고위봉(高位峰) 서쪽면에 있다. 높이 약 500m 되는 정상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서 고원(高原)을 이루고 펼쳐져 있으니 아무리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이곳이 예사 터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문무왕(文武王) 때에 왔다는 당(唐)나라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이 절을 보고 ‘이 절이 무너지는 날이면 나라도 망하리라’ 했다는데, 신라 말에 절도 없어지고 935년에는 나라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토론(討論) 삼한집(三韓集)」을
인용하여 ‘계림(鷄林) 땅에는 두 줄기의 객수(客水)가 흘러 들고 한 줄기의 역수(逆水)가 흘러가는데, 이 세 물줄기가 천재(天災)를 진압해 주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져 가라앉으리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또한『삼국유사』에 이런
말이 있다. 천룡사는 이 천룡바위 이름을 따서 불려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천룡사는 서라벌 사람인 최제안(催齊顔)이 고려(高麗) 정종(靖宗)의 명을 받들어 1040년(정종 6)에 지은 절이다. 최제안의 증조부가 최은함(崔殷?)이다. 최은함은 늦도록 자식이 없어 중생사(衆生寺) 관세음보살께 정성을 들여 자식을 얻었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 석달도 못되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쳐들어왔다. 나라에 난리가 났는데 젊은 사람이 방안에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아기가 걱정이다. 어떻게 얻은 아이인데! 최은함은 아기를 안고서 중생사(衆生寺)로 달려갔다.“대성관세음보살께서 점지해 주신 아기입니다. 제가 싸움터에서 돌아올 때까지 보살님께서 아기를 맡아 주십시오.” 최은함은 울며 절하면서 아기를 관세음보살 발 앞에 뉘어 놓고 싸움터로 나갔다. 견훤은 서라벌에서 갖은 행패를 부리다가 보름 만에 돌아갔다. 최은함은 싸움이 끝나자 중생사로 달려왔다. 아기는 여전히 관세음보살 발 앞에 있었는데 금방 목욕한 것 같고, 입에서는 젖냄새가 나고 있었다. 최은함은 관세음보살님께 감사드리며 아기를 데려가서 길렀다. 이 아기가 최승로(崔承老)였고, 그의 아들이 최숙(崔肅)이며 최숙의 아이가 바로 최제안인 것이다. 이렇게 최제안은 불교와의 큰 인연(因緣)으로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최은함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송도(松都)에 가서 왕건(王建)을 섬기며 경순왕을 받들었음으로 해서 최은함의 자손들은 고려(高麗)에서 공신(功臣)의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최제안은 정종(靖宗) 때 시중(侍中)의 벼슬에 올라 경주(慶州) 남산(南山)의 고위봉에 천룡사를 다시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최제안은 쳔룡사를 다시 수축(修築)하여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량)을 개설하였으며, 고려 조정의 명을 받아 신서(信書)의 원문(願文)까지 만들어 절에 보관하였다. 그 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열반골 옛날 서라벌에 한 각간(角干)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사랑하는 외동딸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마음씨도 고와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마침내 처녀는 시끄럽고 더러운 속세를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인 열반에 살 것을 결심하고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섰다. 부모님의 따스한 사랑도 여러 사람의 존경도, 화사하게 장식된 향기나는 머리다발도 다 끊어버리고 오직 맑고 청정한 부처님의 나라를 찾아서 들어선 곳이 이 곳 열반골이었다. 금빛으로 수놓은 화려한 옷과 은빛 대(帶)며 요패(腰佩)도 벗어버리고 잿빛나는 먹물옷으로 갈아있었다. 그리고 이 골짜기로 발을 옮겼다. 아무리 머리를 깎고 잿빛나는 먹물옷을 갈아 입었다. 하더라도 숨길 수 없는 것은 꽃피는 나이에 무르익은 살 향기였다. 애티나는 처녀의 살 내음을 맡은 뭇 짐승들이 길을 막고 으르렁거린다. 처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서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계곡에 들어섰다. 처녀의 살 내음을 맡고 맨먼저 나타난 것이 ‘고양이바위[묘암(猫巖)]이다. 담을 넘는 구렁이도 징그러웠다. 그리고 달려오는 작은곰바위[소웅암(小熊巖)], 꼬리를 감추는 여우바위[호암(狐巖)], 심굴궂게 뛰어오는 멧돼지바위[저암(猪巖)], 독수리바위 등 뭇 짐승들이 으르렁거리며 처녀에게 덤벼들었다. 그래도 처녀는 곁눈도 팔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발을 옮겼다. 계곡으로 더 들어가니 계곡은 더 깊어지고 여울물은 더욱 급히 흘렀다. 이곳에는 맹수(猛獸)들이 우글우글거렸다. 먼저 엉덩이를 치켜들고 노려보는 맹호바위[맹호암(猛虎巖)], 산허리로 기어오르는 이무기바위, 큰 입을 벌리고 달려오는 사자바위, 큰 키에 앞발을 들고 내려다 보는 큰콤바위[대웅암(大熊巖)] 등이 으르렁거리고 겁을 주는데 큰곰바위 밑에 작은 거북바위[구암(龜巖)]가 처녀를 걱정하듯이 지켜보고 있다. 처녀는 한결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계곡으로 들어갔다. 큰곰바위를 지나가니 여울도 바위도 잔잔해지고 조용함이 계속된다. 처녀가 새로운 골짜기에 들어서서 오른쪽을 쳐다보니 이상한 바위가 있다. 높이가 2m 쯤 되고 둘레가 6m쯤 되는 바위더미 위에 꼭 대변 본 것 같은 바위가 있다. 분암(糞岩)이다. 처녀는 이 바위를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이때가지 저런 것을 보면 더럽다고
피해다녔다. 내 몸 안에도 있는 것을 어째서 피해다녔을까. 더러운 것을 피해다닐 것이 아니라 더러운 곳은 깨끗이 해야 한다. 지옥도 피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신라 때의 바위들을 보며 속세에서 열반으로 도달하는 소설같은 이야기를 엮어놓았으니 불교가 발전했던 시대였음을 감탄케 한다. 이 열반 계곡에는 갱의암 부근에 한 절터가 있고 큰곰바위 밑에도 절터가 있다. 또 분암(糞岩) 밑에도 절터가 있으나 처녀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다. 용장사터용장사는 남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이었다. 그것은 절터의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남산에서 가장 큰 골짜기가 용장골[용장곡(茸長谷)]이요, 그 어귀에 있는 마을 이름이 용장(茸長)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 토기며 고려청자편, 조선 백자편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남산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두고 향연을 올렸던 절터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용장사 터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대현(大賢) 스님 이야기와 설잠(雪岑) 스님 이야기밖에 없다. 현 스님은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때 사람이다. 753년(경덕왕 12)에 가뭄이 심하자 왕은 내전에 단을 쌓아 대현 스님을 불러 비를 빌게 하였다. 스님은 재 올린 단에 모든 준비를 다해놓고 기다렸으나 정수(淨水)가 오지 않아 재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공양하는 사람이 늦게야 물을 길러 왔으므로 재를 주관하는 감리(監吏)가 꾸중을 하니 그는 대궐 우물이 모두 말라서 먼 데 가서 길어오느라 늦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대현 스님은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며 향로를 들어 하늘에 받쳐들고 있으니 잠깐새 우물에서 물이 솟아 나는데, 그 높이가 70자[척(尺)]나 되었다 한다. 그 우물이 금광정(金光井)이다. 지금 이 부처님은 머리가 없어졌다. 그래도 대좌 높이를 합치면 약 15자 가량이 되니 옛날 머리가 있을 때는 16자 높이가 되었을 것이다. 곧 장육미륵상(丈六彌勒像)이니 대현 스님이 돌았다는 바로 그 미륵상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이 미륵상의 가사(袈裟)자락은 연화대좌 위로 흘러내려 대좌를 덮고 있다. 불상의 옷자락이 대좌를 덮고 있는 것을 상현좌(裳懸座)라 하는데, 상현좌는 삼국시대 불상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그래서 근래까지 상현좌인 불상은 삼국시대 불상이라 했는데 1942년 황복사(皇福寺) 탑에서 상현좌로 순금불상(純金佛像)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불상은 706년에 조성하여 봉안했다는 명문(銘文)이 같이 나왔다. 8세기 초기까지도 상현좌로 나타난 불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대현 스님이 돌았다는 삼륜대좌불도 이 연대로 보아 무방할 것 같다. 그렇다면 용장사는 성덕왕(聖德王) 초기 쯤에 지어졌고 대현 스님이 주지로 있었을 때는 경덕왕(景德王) 때였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1455년은 조선조 왕실이 피와 눈물로 얼룩진 슬픈 해였다. 15살밖에 안되는 어린 임금 단종이 왕위에 있었으나 그 자리를 탐낸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임금을 보필하는 신하들을 모두 없애고 기어코 그 자리를 빼앗아 옥좌에 앉은 해다. 이 슬픈 소식을 듣고 의분을 못이겨 문을 닫고 삼일 동안 통곡을 하다가 더러운 세상을 비관하여 부푼 꿈을 포기한 채 읽던 책을 불살라 버린 다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방랑생활을 떠난 21세의 청년이 있었으니 그이가 바로 설잠(雪岑) 스님이다. 속명은 김시습(金時習)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실천도 되지 않는 학문을 배워서 무엇하랴 하는 판단이었다. 5살에 이미『대학(大學)』을 깨쳤으므로 세상에서 신동(神童)이라 불렀다. 세종대왕께서 소문을 듣고 대궐에 불러들여 ‘삼각산’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였더니, 지은 시가 뛰어나게 그 뜻이 묘했음으로 대왕께서 크게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설잠 스님은 집을 떠나서 양주의 수락해상(水落海上)이며 설악산(雪嶽山) 등 나라의 명승지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방랑생활을 계속 하였는데, 경주(慶州)의 금오산(金鰲山, 남산(南山))에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 금오산에 온 뒤부터 먼 곳에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바닷가나 들에서 노니면서 매화(梅花)나 대[죽(竹)]를 읊으면서 취한 나날을 보냈다 한다. 스님은 먼저 은적곡(隱寂谷)의 은적암(隱寂庵)에 숨어 지내다 용장사로 옮겼다 하는데, 이 절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지었던 것이다. 설잠 스님은 1482년 승복을 벗고 속세로 환속했다가 149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용장사도 다 허물어지고 일부 유적만 남았는데, 영조(英祖) 때 용장사터에 매월당사(梅月堂祀)를 세우고 스님을 기렸으나 지금은 그 당사(堂祀)도 다 없어지고 모셨정(影幀)만 기림사(祇林寺)에 보존되어 있다. 남산(南山)에 남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신라시대의 이야기이고, 고려시대의 것도 더러 있지만 조선시대의 이야기로는 이 계곡에만 남아 있다. 설잠 스님이 먼저 숨었던 골짜기를 ‘은적골’이라 하고 숨어 있던 암자를 ‘은적암’이라 부르게 된 것도 설잠 스님이 숨어계시던 곳이라는 뜻이라 한다.
삼화령 미륵불 『삼국유사』에『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이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생의사터를 찾으려면 우선 삼화령을 찾아야 한다.『삼국유사』「빈녀양모(貧女養母)」라는 이야기가 있다. 화랑(花郞)인 효종랑(孝宗郞)등이 남산 포석정 또는 삼화술(三花述)에서 놀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삼국유사』에는 ‘삼화술’로 적혀 있다. 그렇다면 삼화령(三花嶺)과 삼화술(三花述)은 같은 곳일까 다른 곳일까? 필자는 같은 곳이라 생각한다. ‘술(述)’이라는 것은 우리말 ‘수리’를 한자로 쓴 것인데, 수리는 신라 말로 높다는 뜻이다. 사람 몸에서 가장 높은 곳을
정수리라고 하고 서쪽에서 가장 높은 산을 서수리산(서술산(西述山), 西鷲山) 이라 부른다. ‘령(嶺)’도 높은 고개라는 뜻이니, 수리나 령(嶺)은 같은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삼화는 ‘세 꽃송이’로 보아야 하나 아니면 ‘세 화랑(花郞)’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까? 삼화를 이두(吏讀)로 읽으면 ‘세 곳’이 된다. 이영재는 옛날 언양(彦陽) 방면으로 통하던 고개로서 ‘언양재’가 변해서 ‘이영재’가 되었다고 한다. 임금님의 사자(使者)들은 귀중한 문서를 가지고 다녔을 것이고, 장사꾼들은 돈을 가지고 다녔을 터이니 이 고개를 넘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이영재 서쪽 봉우리에는 지금도 지름이 2m나 되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놓여 있다. 삼화령은 이영재였고 삼화령 미륵불은 이 큰 연화대좌에 안치(安置)되었던 불상(佛像)이었을 것이다. 연화대좌 밑에 절터였던 돌축대가 남아 있으니 이곳이 곧 생의사터일 것이다. 이곳이 남산 남쪽 골짜기가 되기 때문이다. 연화대좌 밑에 비신(碑身) 없는 비석대좌(碑石臺座)가 있다. 석가사와 불무사 서기 660년에 백제 땅을 다 차지하고 668년에 고구려 땅을 차지한 당나라가 신라마저 점령하려고 온갖 심술을 다 부리더니 마침내 674년에 유인궤(劉仁軌)를 대장으로 삼아 십 수만 대군(大軍)이 신라로 쳐들어왔다. 신하들이 말을 타고 삼성곡(三星谷) 또는 대적천원(大?川源)에 있다는 비파암(琵琶巖)에 가 보았더니 진신석가는 들고 가던 바릿대와 짚고 가던 지팡이를 바위앞에 놓아두고 몸체는 바위속에 숨어 버렸던 것이다. 돌아와서 복명(復命)하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 효소왕은 비파암 앞에 석가사(釋迦寺)를 지어 진신석가에 사죄하였고, 숨어버린 바위에는 불무사(佛無寺)를 지어 진신사리를 위하였다. 한 절엔 지팡이를 그리고 또 한 절에는 바리때를 두었다는데 일연(一然) 스님이 와 봤을 때는 두 절은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고 했다. 지금은 두 절도 다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다. 경주시(慶州市)에서 포석정 쪽으로 7km 지점에 비파(琵琶)마을이 있다. 비파마을에서 비파계곡의 여울을 거슬러 200m쯤 들어가면 여울 북쪽 기슭에 송림(松林)이 우거져 있는데, 이곳에 돌축대로 된 건축터가 있다. 마을사람들이 이곳을 ‘풀무절터’라 한다. 풀무절터는 ‘불무사터’라는 말일 터인데 좀 이상하다. 불무사는 삼성곡(三星谷) 또는 대적천원(大?川源)에 있다고 했으니 이 계곡 막바지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조선총독부 조사 때 잘못 된 것 같다. 이 절터에서 계곡물을 거슬러 350m쯤 더 들어가면 북쪽에서 흘러오는 지류(支流)가 있다. 이 지류를 마을사람들이 ‘잠늠골’이라 한다. 잠늠골 어귀에도 절터가 있으며 돌축대로 된 두 곳의 건축터가 있다. 고려청자 조각들이 많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까지 향연(香煙)을 올린 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절터의 서쪽을 막아 뻗어내린 백호산맥(白虎山脈)이 절 앞에 머물러 삼각봉을 이루며 솟아있는데, 이 삼각봉 위에 삼층석탑이 서있었다. 6면 입방체로 깨트린 돌을 기단으로 삼아 정교하게 다듬은 아담한 석탑이었다. 탑신(塔身)의 총고(總高)가 3m가 될까말까한 작은 탑이지만 풍기는 느낌은 크다. 기단 윗면은 얼금얼금 다듬어 탑신으로 조화시켰고, 기단 밑부분은 깨트린 채로 우둘두툴 버려놓았기 때문에 산으로 조화되어 산과 탑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신석가(眞身釋迦)가 계신 신성한 골짜기를 지키기 위한 절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절터에서 다시 계곡으로 450m쯤 들어가면 개울을 건너게 되는데, 개울 건너 50m쯤 가면 계곡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가던 길로 바로 가면
용장골이 되니 방향을 바꾸어서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야 한다. 북쪽 골짜기로 200m쯤 들어가면 환경이 아주 달라진다. 무성하던 소나무는 별로 없고 둘러싼 산며래에 흰 화강석 더미가 빌딩처럼 여기저기 솟아 있다. 가파른 산며래는 모래흙으로 되어 있으니 비가 오면 씻겨내려 모래가 계곡에 쌓일 것이다. 대적천(大?川)이 막고 더 갈 데 없으니 원(源)도 멎는다. 수골[약수곡(藥水谷)]과의 분수령이 되는 산등성이에 마을 사람들이 ‘삼형제(三兄弟)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하나는 엎드려 있고 하나는 앉아 있고 하나는 서 있는 듯이 보이는 세 바위를 말한다. 이 바위를 옛날에는 별로 보고 ‘삼성(三星)바위’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삼성골이라 불렀을 것이다. 금송정과 장구터 남산에서 제일 큰 봉우리가 냉곡암봉(冷谷岩峰)이다. 금오봉 정상에서 북쪽으로 525m쯤 떨어진 곳에 정상(468m)보다 약 100m 낮은 높이로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있다. 옥보고는 이곳에서 신선(神仙)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금송정 북쪽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기암(碁巖)이라 한다. 옛날에 신선들이 바둑을 두던 바위다. 지금도 경주 시내가 한눈에 보이니, 옛날 절들이 별처럼 많았고 탑들이 기러기 줄지어 가듯이 많았다는 17만호의 대도시 서라벌도 발아래 속세로 보여 가히 신선들이 노닐던 곳이라 하겠다. 금광사와 명랑스님명랑(明朗) 스님은 632년(신라 선덕여왕 1)에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635년에 본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서해 바다의 용궁(龍宮)에 납치되었다. 그런데 1926년에 조선총독부가 발간한『경주남산(慶州南山)の불적(佛蹟)』에서는 식혜골[식혜곡(識慧谷)]의 사제사(四祭寺)를 금광사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제사터를 금광사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금광사터로 정한 이유로 ‘근방에 금광평(金光坪)이라는 땅이 있고 금광제(金光堤)라는 못이 있으니 이 터가 금광사터일 것이다’라고 했다. 1979년 무렵 어느 개인이 금광못을 사서 물을 뽑아 버리고 밭을 만들었는데 그 못 속에서 절터가 발견되었다. 불상 대좌며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이며 불상편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식혜골 절터에서는 ‘사제사(四祭寺)’ 명문(銘文)이 있는 수막새와 암막새가 많이 발견되어 박물관으로도 갔고 또 일본사람들도 많이 가져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식혜골 절터는 바로 사제사터이고, 금광못 속에서 발견된 절터를 금광사터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나정나정(蘿井)의 본이름은 내울(내을(柰乙))이었다. 고허촌장(高虛村長) 소벌도리는 가끔 촌의 경계로 돌아다니며 이상이 없나 살폈다. 어느날 양산(楊山)에 올라섰을 때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내울에 비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삼국유사』에는 임금이 된 해를 B.C 69년 3월이라 하고,『삼국사기』에서는 B.C 57년 4월이라 했다.『삼국유사』의 69년은 내울에서 태어나던 해이고,『삼국사기』의 57년은 임금이 된 해일 것이다. 천관사터 명장 김유신(金庾信)은 젊어서
천관(天官)의 집으로 드나들었다. 어머니 만명부인(萬明夫人)은 유신이 어려서부터 사람 사귀는데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다. 김유신은 그 후 뜻을 세워 660년(신라 무열왕 7)에 백제의 항복을 받고 668(문무왕 8)에 고구려의 항복을 받으니 형식상으로는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유신은 그 공로로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신라 최고의 벼슬에
올랐다. 이 때 김유신은 백발이 성성한 노(老)태대각간이었다. 노태대각간은 먼저 어머니 무덤을 찾았다. 지금 천관사터는 논밭으로 되어 있고 불상 대좌편과 주춧돌 몇 개가 논뚝에 박혀있을 뿐이다. 이곳에 있던 탑재(塔材)들은 지금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있다고 한다. 천관사는 소중한 사적(史蹟)이다. 아무 유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 자리만이라도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인용사와 김인문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고 문무왕의
동생이다. 김인문은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에 통달한 대학자이며 붓을 들면 명필이었고 칼을 들면 대장군이었으니, 고구려 정벌 때는 김인문이 군사들을 이끌고 일선에 나섰던 것이다. 김인문은 삼국통일을 이루는 동안 일곱 번 중국 당나라로 왕래하면서 신라에 이롭도록 외교에 힘썼다. 당나라는 고구려가 항복하던 668년까지는 신라를 이용할 가치가 있었으므로 신라를 괴롭히지 않았는데, 고구려가 항복한 때부터 신라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670년에는 당나라에 가있는 신라 사람들을 가두기 시작했다. 김인문도 갇힌 몸이었으나 당나라 임금을 달래도 보고 당나라 정세를 고국에 알리기도 했다. 일마다 트집을 잡고 심술을 부리던 당나라는 674년에 유인궤(劉仁軌)를 대장으로 삼아 십 수만 대군으로 신라를 쳐들어왔다. 신라는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섭게 싸웠다. 싸움 중에 적국의 감옥에 갇혀 있는 김인문이 걱정이었다. 신라 사람들은 대궐인 신월성(新月城) 건너편에 인용사(仁容寺)를 세워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열어 김인문의 안녕을 축원했다. 피나는 전쟁 삼년 끝에 당나라는 우리땅을 다 차지하겠다는 야욕을 버리고 만주(滿洲) 요동(遼東)으로 도망갔다. 전쟁에 패한 당나라의 고종(高宗)은 이를 갈며 심술을 부렸으나 별 수 없었다. 신라에서도 당나라를 달래기 위해 망덕사(望德寺)를 세웠다. 그 소식을 듣고 당 고종은 마음이 풀려서 김인문 이하 신라 사람들을 감옥에서 석방시켰다. 망덕사는 당나라 왕실의 번영을 기도하는 절이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나온 김인문은 당나라에 그대로 남아서 신라에 이롭도록 외교를 펼쳐나갔다. 694년(효소왕 3)에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돌아가니 인용사에는 다시 아미타불을 모시고 그의 왕생극락을 비는 절로 고쳤다. 지금 인용사터에는 무너진 석탑 1기 뿐이나, 신라 사람들의 정성어린 아름다운 절이었던 것이다. <윤경렬(尹京烈), 향토사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