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왜 짐 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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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삶과 문화



  • 오피니언 관리자 () --
  • 12 Nov 2018 05:34 PM

구자갑 롯데오토리스 대표 (한국 기업)

스스로의 목숨을 저당 잡히고 살아가는 맹목적 삶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보자는 술자리에서의 호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P교수에게 그의 책과 같은 제목으로 글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막상 말짱한 기운으로 돌아오니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만 남았다. P교수는 니체와 하이데거 등 실존철학을 연구한다.
하이데거의 책은 너무 어려워서 필독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기 일쑤인데, 그런 하이데거의 철학을 매혹적으로 강의해 준 그의 책을 읽은 많은 사람이 ‘인생의 책’으로 꼽으며 갖가지 사연을 보내온다고 한다. 지금의 삶이 녹록지 않으니 더 그럴 수도 있겠다. 독자들의 뜨거운 반향이 분에 넘친다며 겸손을 떨지만 고백하건대 그가 풀어내는 얘기를 듣다 보면 그 자리가 ‘인생 술자리’가 될 만큼 훈내가 폴폴 난다. 그 혼자 단 한 모금의 술도 삼키지 않으면서 말이다.


서양 철학자로서는 드물게 노장사상 등 동양철학에도 밝았던 하이데거는 기술문명을, 자연 전체를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 변환시키고 남용하려는 광기 어린 ‘지배에의 의지’로 치부해 비판한다. 기술문명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고 규정하면서 일상적으로 격차에 대한 우려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세간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바쁘게 살면서도 정작 마음 밑바닥에서 이러한 삶에 대해 염증과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고 진단한다.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은 경영할 수 없다”는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의 말을 당연시 받아들이는 기술문명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존재자들의 지배자가 아닌 존재의 파수꾼이 되라는 하이데거의 처방을 그래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세상에는 측정할 수 없는 일도 많다. BTS가 문화훈장을 받은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의 원래 무료였던 티켓을 150만원씩 주고 암표로 사는 젊은이들이나, 해외에서 열리는 골프 대회마다 매번 응원을 간다는 박성현의 골드미스 팬들은 과학적이고 계산적인 이성을 넘어선 근원적인 이성이 드러나는 경우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전환시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들의 팬덤은 좋아하는 대상과 지금의 나 또는 되고 싶은 나를 동일시하면서 발전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고 스스로가 평가하는 실제적 자아(real self)가 내 마음속에 있는 ‘어떤 사람이고 싶다’는 이상적 자아(ideal self)와 가까워질 때 자존감은 상승하고 멀어질수록 불안해진다. 그렇다고 되고 싶은 나를 좇아 지금의 나를 버리고 가상현실에 들어가 영원히 머물기를 바란다면 현실의 삶은 늘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다. 불안과 공허함이야말로 삶이 짐이 되는 근본이유이기도 한데, 자신의 삶의 방식을 자연과 사물 등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자신 안에 깃들게 하는’ 인간 고유의 감정을 회복하는 쪽으로 변화시켜야 고독감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세상 이치를 알아듣기 쉽게 풀어 주는 내공에서 자기는 아무리 노력해도 P교수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둥 지나친 겸손이 내가 아는 유일한 결점인 K교수도 마침 술자리에 동석했었다.
그는 외국에서 문학박사를 받고서는 따로 풍수지리에서 일가를 이룬 알아주는 고수다. 산수 간에 터를 잡고, 건물을 짓고 거주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고 그렇게 했을 때의 길흉을 따지는 행위를 풍수지리라 설파한다.
이 설명을 들으면 풍수지리야말로 유망한 분야를 찾아 회사를 세우고 핵심 성공요소를 따져 비즈니스모델을 적용해 키워 나가는 스타트업의 일생을 담은 빅픽처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싶기도 하다. 그날 술자리에서 하이데거와 풍수지리를 안주 삼아 삶이 더는 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호기롭게도 나는 나를 다시 창업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국 한국일보]

삶은 왜 짐 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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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 박찬국 지음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우리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것이 이성과 합리성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이데거에 따르면 실은 광기에 가까운 편협함이다. 현대는 ‘인간 개개인을 비롯한 모든 사물을 기술적인 처리 대상으로 격하시키고 그것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들의 에너지를 내놓도록 몰아’댄다. 때문에 우리들은 세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에 시달린다. 이를 잊기 위해 우리들은 일상을 잡담과 호기심으로 채우고 있다.

‘시인으로 거주하지 않고 단순히 과학자나 기술자로만 존재하는 한,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삶에 대한 공허감과 권태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비와 오락 그리고 향락에 탐닉하지요. 이와 함께 소비와 오락, 향락을 위한 물자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자연 파괴를 일삼거나 사람 사이의 투쟁과 갈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극복 방안으로 하이데거는 시인으로서의 삶을 제시한다. 사물을 끊임없이 분해하는 합리성의 사막을 벗어나, 존재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시인의 관점을 회복할 때 우리는 삶을 통해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적 감성을 통해 세계와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고독감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보는 세계는 의미로 충만한 곳이기에 허무감 역시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잘 알지 못했던 독일 철학자의 사상이 불교의 가르침이나 크리슈나므르티의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사실에 우선 놀랐다. 하지만,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유사한 주장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아래는 그 책을 읽고 내가 남긴 감상문의 일부이다. 

'진리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이성적인 관점은 과거 인간들이 꿈꿀 수 없었던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이성 혹은 과학의 유용성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이성의 기준으로 보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이라는 것이 작가의 통찰이다. 살아가면서 모든 문제를 유용성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어떤 것은 유용성 혹은 진리의 관점이 아니라 개개인의 가치에 기반하여 판단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현대 철학 조류가 합리성의 극복이라는 사실은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지만, 이제야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되었다. 현대인의 문제점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유사하다. 내가 자주 접한 에리히 프롬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게 아닌가 싶다.

시인의 관점이라니.. 알듯 모를 듯 하다.

박찬국 교수가 쉽게 풀이한 하이데거 철학의 해설서다. 하이데거 하면 실존철학자로만 알고 있지 그분의 사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서양의 소로우나 동양의 선불교, 노장사상과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삶은 왜 짐이 되는가>는 전체가 10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각 장과 그 장의 내용을 요약한 문장을 보면 하이데거 철학의 대체적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장 하나하나가 모두 묵직한 주제들이다.

1장, 고향 상실의 시대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듯, 대도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곳에서는 시기와 질시 그리고 경쟁이 은밀하게 혹은 공공연하게 사람들을 지배한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지 몰라도 마음은 한없이 허젆고 외롭다.

2장, 과학과 기술에 대한 우상 숭배

서양철학 전통에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 파악되었고 이러한 인간 이해가 극에 달한 것이 바로 과학기술문명이다. 이 시대의 과학기술은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과학기술문명의 주체라고 자부하며 살지만 실은 현대라는 거대한 기계 속의 부품으로 소모되고 있을 뿐이다.

3장, 우리의 삶은 왜 이토록 공허한가

오늘날 우리는 권태와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극적인 것에 탐닉하거나, 남의 흠을 들추어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려는 가십거리로 하루를 채우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를 두고 "오늘날 인간은 존재를 망각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존재 상실에서 오는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4장, 근본기분이라 무엇인가

존재 상실의 공허함은 세계와 사물을 경이롭게 봄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세간의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나 잡담에서 벗어나 사물과 세계의 신비에 조용히 마음을 열 때 사물들은 무한한 깊이를 갖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때 비로소 우리 삶은 진정으로 충만해진다.

5장,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

우리는 타인과의 비교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타인의 시선이 불편한 이유는 '나'라는 고유한 존재가 그들이 평가하는 대상으로 완전히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호젓이 피어 있는 장미처럼, 우리의 존재도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로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6장, 인간은 왜 불안을 느끼는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불안'이라는 기분으로 찾아와 일상적의 삶의 자명성을 파괴한다. 그제야 우리는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자신과 마주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 없다면, 의미로 충만한 삶도 있을 수 없다.

7장,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덧없는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의 삶이란 고독과 허무, 무력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하이데거는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말한다.

8장, 언어란 무엇인가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의 본질은 세계와 사물의 내밀한 통일을 '불러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시가 바로 진정한 언어라고 말한다. 시인은 침묵 속에서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어를 통해 존재의 소리를 구체화한다. 시가 존재의 소리를 구체화하는 한, 시는 항상 자신 안에 꿰뚫을 수 없는 깊이와 신비를 간직하게 된다.

9장, 건축의 본질과 시적 사유

하이데거가 생각한 건축의 본질은 인간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건물을 더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시골의 작고 낡은 농가라 하더라도 '사역'으로서의 세계가 자신을 환히 드러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 건축의 본질이다.

10장, 자연은 위대한 사원이다

세계에 대한 과학적 파악과 기술적인 지배를 통해 행복을 실현하려 할 때 우리는 오히려 불안과 초조를 느낀다. 이러한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물질적인 대용재를 생산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소박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할 때 우리 삶이 진정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시대가 전대미문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독과 무력, 허무감에 시달리는 시대다. 인간은 오직 욕망의 덩어리로 존재할 뿐이고, 사물들은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이 시대를 '궁핍한 시대'로 규정했다. 이런 인간 소외 현상을 직시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하이데거 철학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시적 정신과 경이감을 유난히 강조한다.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우리는 세계를 달리 경험할 수 있다. 이때 등장하는 용어가 '사역(四域)'이다.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세계는 사역으로 나타나는데, 사역이란 대지, 하늘, 죽을 자들, 신적인 자들을 가리킨다. 이 네 요소가 거울이 서로를 비추듯 조응하며 어울려 있는 상태가 세계의 근원적인 모습이다.

인공물에 대한 소유욕에서 벗어나 세계와 사물의 경이로운 존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이 광기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다. 현대인들의 소유와 향락에 대한 욕망 때문에 소박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현대문명의 불행이 비롯되었다고 하이데거는 진단한다. 우리 삶이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자연과 사물 등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경이와 기쁨을 느끼는 인간 고유의 감정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자면 단순 소박한 정신과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이데거는 독일 남부의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 속 산장에서 기거하며 그의 철학을 만들어나갔다. 베를린 대학으로부터 두 번에 걸친 교수직 제의를 거부하며 대부분의 연구와 저술을 산장에서 했고 시골 사람들을 사랑했다. 삶으로 자신의 사상을 실천해 보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이데거가 기술문명을 송두리째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주(主)과 되고 종(從)이 되어야 하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멋진 말을 하나 소개한다.

"깊은 겨울 밤

사나운 눈보라가

오두막 주위에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뒤덮을 때야말로

철학을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