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하면 되는것이 아닌가 왜 노력해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바는 각 개인의 ‘노~오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현재 사회 시스템에서 살아남아 괄목할만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당위성이 충분하기는 하다. 하지만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단계를 뛰어넘을 사다리가 존재하기는 한 것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돈만을 위해 교육 받고 공부하느라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취업 절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어렵게 취업을 하더라도 고용 불안과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고민이 여전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모두들 따라가는 사회에서 정해준 길을 무작정 걷기보다, 쉽지는 않지만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꿈을 향해 가는 건 혹독한 고통도 따른다. 하지만 시도도 안 해보고 포기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며, 이를 위해 사회도 변화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ㄸ환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만을 바라고 열심히 사는 것이 얼마나 열패감을 안길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누구를 이기고 싶어서 견뎌서는 안 된다. 삶의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다. 열심히 살지 말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

프롤로그 | 나는 어디로

딱히 품은 뜻이 있거나 대책이 있어 회사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멈춰선 것이다. 만약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인생의 반환점인 지금 바로잡아야 할 것 같았다. 사회에서 시키는대로 인내하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이 진리라 생각했고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점점 더 불행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나 하는 후회와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런 이유로 이제부터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모두가 열심히 사는 세상에서 열심히 살지 않겠다니 황당한 소리라는 걸 알지만, 단지 나에게 다르게 살아 볼 기회를 주고 싶을 뿐이다. 솔직히 ‘노력하지 않는 삶은 처음’이라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이건 내 인생을 건 실험이다.

1부. 이러려고 열심히 살았나

지금 우리에겐 노력보다는 용기가 더 필요한 것 같다. 무모하긴 하지만 도전하는 용기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포기할 줄 아는 용기 말이다.

노력이 우리를 배신할 때

열심히 노력했다고 반드시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열심히 안 했다고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믿었던 것과는 다르게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지금 괴로운 이유는 우리의 믿음, 즉 ‘노력’이 우리를 자주 배신하기 때문이다. 왜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는지, 그럼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알지는 못하지만, 분해도 그것을 ‘인정’해 버리면 괴로움은 줄일 수 있다. 보상은 언제나 노력한 양과 비례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원래 노력은 공평하지도 않고, 노력으로 다 된다는 말도 거짓이다.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열심히 살면 지는 거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니 부러워하면 안 된다. 기어이 승자와 패자를 정해야만 하는 우리 사회는 확실히 경쟁 사회다. 열심히 살고 있지만 좀처럼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빈곤해지는 늒미이다, 차라리 열심히 살지 않았더라면 덜 억울할텐데 말이다. 계속 지는 느낌인데 과연 누구한테 지는 것일까? 열심히 사니까 자꾸 승패를 따지게 되어 계속 진다는 느낌을 받게 되니, 지는 게 싫으면 열심히 살지 않으면 된다. 그저 승패에 상관없이 살고 싶어진 것이다.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경주에 나가지 않음로 성적을 낼 필요가 없게 되고, 따라서 더 이상 경쟁자도 아니고 내 성적표도 궁금하지 않다. 어떻게든 되겠지.

내 열정은 누굴 위해 쓰고 있는 걸까

열정이 ‘있으면 좋은 것’에서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버린 지금의 현실은 뭔가 불편하다. 열정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지 강요로 만들어질 수는 없다. 열정은 사랑이므로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대부분 열정 때문이 아니라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기 위해 일한다. 거기에 열정까지 요구하는 것은 너무 하다 싶다. 세상은 열정을 가지라고 강요하고 그 열정을 약점 삼아 이용하고 착취한다. 그래서 열정을 함부로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 이런 열정을 나를 위해 쓰기만 한다면 열정은 좋은 것이다. 열정도 닳는다. 함부로 쓰다 보면 정말 써야 할 때 쓰지 못하게 된다. 언젠가는 열정을 쏟을 일이 찾아올 테고 그때를 위해서 열정을 아껴야 한다. 그러니까 억지로 열정을 가지려 애쓰지 말아야 한다.

마이 웨이

우리 사회엔 ‘이 나이’면 ‘이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한다는 ‘인생 메뉴얼’이라는 게 존재한다. 실제로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모두가 그걸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살려고 노력한다. 이건 내 삶인데, 타인의 평가에 따라 괜찮았다가 불행했다가 한다. 예를 들어, 결혼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묻는 그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그들이 보기에 괜찮은 삶을 살려고 애써온 것을 이제는 쉽지가 않다. 내가 욕망하며 좇은 것들은 모두 남들이 가리켰던 것이다.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게 이제 무끄러워졌다. 열심히 쫓아가다 엎어진 꼴이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려고 한다.

우리의 소원은 부자

외환 위기를 거치며 일어난 부자 열풍은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내 목표이자 우리의 목표가 되었다, 그렇게 물질 만능주의 사회가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가 되지 못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우리 대부분은 왠지 모를 패배감과 자괴감을 느끼면 살아가게 되었다. “부자 되세요”가 처음에는 덕담 같았지만 이제는 오히려 강요가 되었다. “부자가 안 되면 비참해져요”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돈이 최고인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도 흔히 돈은 수단이어야 하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돈이 목적인 삶을 살아왔다. 늘 돈을 많이 벌고 싶었기에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같은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제쳐두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을 좇으며 살았다. 우선 돈부터 많이 벌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자가 되기는 커녕 중요한 걸 놓치고 살아온 기분이었다. 그래서 부자 되기를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부자가 못되는 것이 아니라 안 되기로 한 것이다.

길은 하나가 아닌데

좋은 대학만 가면 인생이 바뀔 거라는 믿음이 있지만, 그걸로 인생은 변하지 않는다. 조금만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면 다른 길들이 있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길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길은 절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그 길이 전부라 생각해 막상 가보면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닌 경우도 많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처럼 잔혹한 말은 없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다. 어떤 길을 고집한다는 것은 나머지 길들을 포기하고 있가는 이야기와 같다.

아이 캔 두 잇

주식 투자에서 실패하는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손절매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포기는 비굴한 실패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명한 삶을 위해서는 포기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아깝고 아쉽거나 실패를 인정할 수 없어서 계속 도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단지 실패 유보다. 실패를 인정하는 용기, 노력과 시간이 아무 결실을 맺지 못했더라도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용기, 그리고 새로운 것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현명한 포기는 어쩔 수 없이 하는 체념이나 힘들어 그냥 그만두는 의지박약과는 다르다. 타이밍을 놓치면 작은 손해에서 그칠 일이 큰 손해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에겐 노력보다 용기가 더 필요하다.

노력의 시대는 갔다

노력으로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거기에다 원래 출발선이 다른 ‘특출난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노력으로 자신의 타고난 환경을 이겨낸 사람들의 신화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모든 부족함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착한 사람들이 바로 흙수저이다.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에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수저계급론이란 단어까지 등장한 것은 그만큼 부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노력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는 방증이다.

득도의 시대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은 꿈이나 욕망없이 현실에 만족하며 득도한 사람처럼 살아간다는 의미로 ‘사토리 세대’라고 불린다. 우리의 ‘N포 세대’와 비슷하지만 그들은 원래 욕망이 없다고 얘기한다. 기성세대들이 보기에는 지금 젊은이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져 안타까운 마음이겠지만, 그들의 시절과 지금은 완전히 다르므로 젊은 세대의 나영함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일본과 한국 젊은이들이 ‘득도’하고 ‘포기’하게 된 이유는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젊은이들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무책임하고 손쉬운 해석이다. 그들은 결코 인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라도 인생을 살아 내고 싶을 뿐이다. 그들은 살기 힘든 이 시대가 낳은 필연적인 현상이지, 좋다 나쁘다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그들을 동정하거나 훈계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득도’나 ‘포기’는 세상을 향한 그들의 자조 섞인 한탄이다. 그들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해서 기성세대가 같이 비웃어서는 안 된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뛸 사람은 뛰지만, 개인들을 닥달해서 폭풍우 속을 뛰게 하지 말고 폭풍우가 잦아들어 뛰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먼저다.

청춘의 열병

청춘의 열병에 의한 열은 다행히 내렸다고 하더라도 그 시절에 했던 고민과 불안은 여전하다. 다니던 회사의 폐업은 고민해서 선택한 나의 인생 설계를 무색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인생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믿지만, 한낱 파도에 휩쓸리는 힘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고민은 필요한 것이지만 분명한 답도 없고, 답을 얻었다 한들 그 방향대로 일이 잘 돌아가지도 않는다. 또 잘 돌아가더라도 꼭 좋은 선택이라는 법도 없다. 내가 한 선택이 당장은 맞는 것 같아도 세월이 흘러 잘못된 결과를 낳기도 하고, 잘못된 선택이라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인생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통제가 안 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고민과 불안함은 계속되지만 뜨겁게 열이 오르지 않는 이유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까지 고민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잘 그리고 싶어서

인생을 막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인생 앞에선 누구나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잘 살고 싶어서 필사적이다. 이를 악물고, 두 손을 꽉 쥐니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힘을 주고 버티느라 어깨가 단단하게 뭉친다. 힘을 빼면 넘어지고, 뒤쳐질까 봐 힘을 뺄 생각을 못 한다. 이제 힘을 빼야 한다. 뭉친 근육을 풀어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겁내디 말고 한 걸은 내디뎌보고, 넘어져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야 한다.

인생은 수수께끼

수수께끼의 본질은 답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재미에 있다. 답이 틀려도 재미있는 것이 수수께끼다. 어차피 이 수수께끼에는 정답이 없다.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고 현실은 궁상맞지만 비관적으로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 이 수수께끼는 ‘답’이 아니라 ‘리액션’이 중요한 시험인지도 모른다.

2부. 한 번쯤은 내 마음대로

방전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하는 게 아니라 ‘덜’ 하는 게 아닐까? 각성도 좀 덜 하고, 노력도 좀 덜 하고, 후회도 좀 덜 하면 좋겠다.

어른은 놀면 안 되나요

어릴 땐 어른들이 못 놀게 해서 못 놀았지만, 어른이 되면 조금은 선택권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보니 어째 더 못 노는 것 같다. 놀지 못하는 이유는 차고 넘치지만 놀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어른들은 적당한 명분이 없으면 하고 싶어도 안 한다.하지만 욕망에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어쩌면 지금 내 방황의 이유는 모두 놀기 위한 명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놀고 싶은 거다.

퇴사의 맛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했다. 눈이 번쩍 뜨이게 달콤한 맛은 자유의 맛이다. 그러나 자유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달콤함만으론 살 수 없다는 걸, 자유가 밥 먹여주지 않는 다는 걸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알게 된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달콤했던 자유는 순식간에 맛이 변하고 만다. 이제 회사의 노예가 아니라 불안의 노예가 된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노예 생활에 길들여졌다.

실연의 아픔

자유로운 시간이 많은 건 참 좋은데, 문제는 언제나 돈이다. 아마도 이런 불안함 때문에 많은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직장인들은 결국 자신의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인지도 모른다. 프리랜서가 된 지금은 자유로운 시간이 많지만,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기 위해선 비용이 든다. 그러고 보면 직장인들이 자신의 자유를 팔아 번 돈을 열심히 모으는 이유도 나중에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커다란 모순처럼 느껴진다.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면서 돈도 계속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욕심이다. 돈과 자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돈으로 자유를 샀다면 이제 자유를 마음껏 누려야 한다.

나를 채우는 시간

시간이 많으니 하고 싶은 걸 다 해볼 수 있는 시간이 넘치지만, 막상 하고 싶은 게 없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도 된다. 하고 싶던 것이 의무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는지고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 원하는 걸 모르고 헛된 것들로 허기를 채우며 사는지도 모른다. 직장 생활을 하며 가끔 주어지는 휴식을 위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휴식을 보내기 위해 애쓰느라, 쉬는 동안에도 온전히 쉬지 못해 더욱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방전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하는 게 아니라 ‘덜’하는 것이다. 걱정도, 노력도, 후회도 좀 덜 하는 게 좋겠다. 그것이 방전되지 않는 지혜다.

아직 위로는 필요 없습니다

“열심히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 사람들에겐 “인생을 포기하겠다”라는 말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열심히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 그런 세상은 얼핏 좋아 보이지만, 반대로 열심히 사는 걸 강요당해도 감당해야 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단지 돈을 벌고 집을 갖겠다는 욕심을 위해 무조건 열심히 살고 싶지는 않다. 간절한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거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은 포기가 아니라 무심함이다. 원하지만 가지지 못해도 괜찮은, 가지면 좋지만 가지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닌, 욕심이 없지는 않지만 욕심 때문에 괴롭지 않은 그런 마음이고 싶다. 엸미히 살지 않는다는 게 일을 안 하거나 돈을 벌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단, ‘열심히’의 논리 때문에 시간과 열정을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혼자만의 시간

어려서는 학교와 집을 잇는 그 길만이 유일한 위로였고, 휴식이었다.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언제나 사람이다. 뭐든 혼자 하는 게 유행인 세상이 됐다. 당연히 함께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들마저 혼자 하고 싶을 만큼 혼자가 편한 사람들,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와 같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눈치 보고, 맞춰주고, 참아주고, 손해 보고, 비교 당하고……. 인간관계는 지친다. 그런데 혼자 하면 편하고 좋기는 하지만 감정을 같이 나눌 수 없어 쓸쓸해진다. 사람이 피곤해 혼자를 택했지만 결국 사람을 그리워한다. 어쨌든 혼자 있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그 시간은 치유의 시간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다시 돌아오기 위한 여행이다. 잠시 떨어져 바라볼줄 아는 지혜다. 정말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서 잠시 떨어져 있을 줄 아는 사람. 혼자 있는 외로움을 잘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혼자 있는게 편하지만 결국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 외로움을 충분히 즐기고 나선 다시 사람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고 싶다.

술술 넘어간다

술자리에서 즐겼던 건 술이나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고 웃고 떠드는 술자리가 즐겁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대화의 윤활유가 된다.

넌 나고 난 너야

아버지도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겠지, 힘들었겠지. 나는 어느덧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세상에 이리저리 치인 나이가 됐다. 내가 이해한다고 해서 갑자기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 애를 썼검만 나는 돌고 돌아 이곳에 와 있다. 어쩌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나 굴레 같은 게 정말 있는지도 모르겠다. 갖은 이유로 지금 내 게으른 삶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결국 나는 닮고 싶지 않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고독한 실패가

검색만 하면 정보가 많아 확실히 편리해졌고 실패도 줄었지만, 그만큼 즐거움도 같이 줄어들었다. 내가 선택하는 즐거움, 미지의 것이 주는 즐거움 말이다.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유독 기억에 오래 남는 것들이 있다. 그런 선택에는 무모하고 위험한 매혹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과 그 선택에 책임을 지려는 용기가 있다. 당연히 실패할 확률도 높지만 성공했을 때 가지는 성취감도 크다. 그건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롯이 내 것이 된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것들이 과연 내게도 좋은 것은 아닐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실패할 확률이 낮지만, 나에게 딱 맞는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나에게 딱 맞는 것을 찾아 도전하고 위험을 무릅쓰기보다 실패하지 않을 검증된 ‘중간 이상’을 택한다. 그렇게 점점 내 생각이나 감각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고 퇴화하여 어느새 나의 선택을 믿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해져 더는 ‘나’의 취향이나 감을 믿지 못하고 선택권을 ‘남’에게 넘겨버린 지금의 우리, 고작 식당 하나, 영화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패할까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니 인생은 오죽할까. 안전하다고 유혹하는 ‘남’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선택은 어쩌면 ‘고독한 실패가’의 길이다. 하지만 그 길을 가면 적어도 남들이 하라는 대로 사는 ‘남’의 인생을 살게 되진 않는다. 실패해도 좋다. 실패했을 땐 후회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남의 말을 듣고 우르르 몰려갔던 사람들 대부분도 후회하긴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취향은 어쩌면 무수히 많은 실패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건데, 그것이 창피하고 부끄러운 이유는 아마 그 마음의 바탕에 ‘이 나이 먹도록’이라는 정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나이 먹도록’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바심을 내고 있었고, 나이를 먹을수록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늙어가는 육체에 갇혀 있으므로, 내 영혼이 아무리 자유롭다고 한들 나이 먹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가끔은 나이를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특히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말이다.

계획도 목적도 없이

우연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목적 없는 헛걸음. 이런 게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재미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줄 아는 건 멋진 일이다. 여행은 계획을 이행하러 떠나는 미션이 아니다. 계획대로 될 리도 없고, 그대로 안 된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다. 언제나 계획은 필요한 것이지만 계획에 얽매이는 것은 의무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 속은 괜찮은 걸까

내가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면서 겉모습을 꾸미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며 산다. 하지만 내면은 자주 들여다보지 않는다. 문에 보이는 것만 신경 쓰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아무것도 안 해서

도전하는 젊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젊음. 그런 것이 젊음이라지만 나는 상상만 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도전하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고, 현실의 무게에 눌려 도전할 엄두를 못 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현실이 되지 못하고 젊음과 함께 흘러가버렸는지……. ‘아무것도 안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됐는데. 왜 마음이 이런 걸까. 돌이켜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나이이기도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고민이 많았다. 내가 더 용기가 있거나 무모한 사람이었다면 고민할 시간에 많은 일을 시도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됐을까? 지금 내 모습이 싫은 건 아니지만 궁금하다. 내가 선택하고 한 일에 대해선 결과가 좋든 나쁘든 잘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 않은 일들은 왜 이리 후회가 되는지 모르겠다. 인생은 후회로 가득하다. 내일이 되면 또 오늘을 후회할지 모른다. 후회해도 후회하지 않아도 인생은 굴러간다.

3부. 먹고사는 게 뭐라고

마음껏 꿈을 펼치는 게 가능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별한 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꿔 본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뭘까

학교를 다니기 위해 일을 하는데, 정작 학교 생활을 잘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몇 년간 이어지다 보니 학원 강사 일이 싫어졌다. 또한 학생들에게 입시가 삶의 목표라고 강요하며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요구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배움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대학 졸업장을 원했던 것 같다. 졸업하자 강사 일을 그만두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찾은 결론은 너무 괴롭지만 않으면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꼭 뜨거운 사랑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하면 된다.

퇴사는 어려워

누구나 퇴사 후 안전하게 옮겨 탈 것이 준비돼 있지 않으면 퇴사를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퇴사는 안전장치 없이 뛰어내리는 모험에 가깝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모험가로 길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고민만 한다. 회사를 다니느라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는 건 핑계다. 그냥 회사를 다니기 싫었던 것이다. 대책이 없다고 한숨만 쉬었지 대책을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영원히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모두 퇴사를 한다.

삶의 균형

균형 잡힌 삶을 동경한다는 건 내가 균형 잡힌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적당히 열심히 살면서 적당히 게으르게 살 수도 있는 것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만 봐도 그렇다. 내가 금방 싫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이해한 후로는 한 가지 일에 매진하는 장인처럼 되려는 헛된 노력을 멈추었다. 그런 내 성향을 알게되자 일에 싫증이 나면 ‘또 싫증이냐? 조금만 더 해보자’라며 마음을 다독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치우침을 안다는 것은 균형을 잡는 첫걸음이다. 우리의 삶은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와 같다. 파도 위에서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면 꼿꼿해선 안 된다. 유연해야 한다. 힘을 빼고 이리저리 휘둘릴 각오를 해야 한다. 파도에 맞춰 무게중심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쉴 새 없이 옮겨야 넘어지지 않는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면 마치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도 자세히 보면 열심히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 삶이 매우 불안해 보일지라도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이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타는 것이니까.

꿈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공부 빼고는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윽박지르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이 꿈을 가질 수는 없다. 자신의 꿈이 뭔지 찾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오직 대학을 가기 위한 교육 시스템 속에 매몰되어 간다는 것이 문제다. 오로지 20년을 입사를 위한 ‘회사 인간’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지만 막상 졸업은 하면 취업할 곳이 없다. 간신히 취업을 하더라도 고용 불안과 과도한 업무로 고통을 호소한다. 청년실업 문제의 책임은 정부와 사회, 부모와 당사자 모두에게 있다. 우리 사회는 정답을 정해놓고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한다. 꿈을 가지라는 것도 ‘도전 정신’이라는 또 다른 스펙을 강요하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일이 뭐길래

좋아하던 것도 ‘일’이 되면 좋아하지 않게 된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아마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일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먹고사는 기본만 돼도 감지덕지다. 그렇다면 욕심을 좀 버리면 지금 일에 만족할 수 있을까?

돈 벌기 싫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한심하고, 바르지 않고, 게으르고, 비열하고, 무능한 이미지로 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이니, 일은 단순한 돈벌이 수단을 넘어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로소득은 노동하지 않고 얻는 소득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엔 불로소득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일하지 않고 잘 사는 건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이다. 그런데 노동의 값어치를 매겨 우리에게 노동의 대가를 주는 사람은 일하지 않는 자본가기고, 그들은 노동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데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 불로소득은 아니더라도 워라밸만 맞아도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균형이 개인의 의지만으로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워라밸이 가능한 사회가 되는 것보다 불로소득이 생기는 게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냥 일을 하기 싫은 게 아니다. 돈에 대한 부담이 없더라도 일은 하고 싶다.

앞으로 뭐 해먹고 살지

직장인들이 ‘자신만의 가게’를 열망하는 것은 불만족스러운 현재와 미래에 대한 한숨 내지는 고민일 뿐 장사하는 것이 정말 일생일대의 꿈도 로망도 아니다. 더구나 은퇴가 멀지 않았는데 퇴직금과 연금만으로 생활하기엔 노후가 너무 길어졌다. 자식들에게 기댈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뭘 해서 먹고살까 궁리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고민이 장사라는 한 가지 답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아마 장상 외엔 딱히 떠오르는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개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집단적이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기 편한 세상이니 돈이 되는 일에 사람이 몰리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좀 더 다양한 방식의 삶과 밥벌이가 가능한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도해볼 권리

자신의 마음을 따르면 적어도 남을 탓할 일은 없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다 내 책임이다. 그러면 인생이 좀 덜 억울하다. 어차피 암에게 책임지라고 따져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꿈이 있다는 건 분명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꿈을 향해 간다는 건 혹독한 고통의 길이기도 하다. 그 고통을 다 참아 내도 꿈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힘들어도 망해도 내 삶이므로 우리는 꿈을 쫓아가 볼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시도해볼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사지는 못하고

매일 인터넷 쇼핑을 하고 사지 못해 장바구니에 집어 넣던 버릇이 심드렁해진 것은 회사를 그만둔 후였다. 사고 싶은 게 많다는 건 그냥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영혼의 어딘가가 병들어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빚 없는 삶

지금 당장 지불 능력이 없는데 누군가로부터 혹은 내 미래로부터 돈을 빌려 무리해서 무언가를 가지고 싶지 않다. 대출까지 받아 서민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은행은 대출을 통해 돈을 만든다. 단순히 이자를 받자는 게 아니라, 돈을 만드는 게 목적이고 그게 은행이 돈을 버는 방식이다. 실체가 없는 돈을 빌려주고, 반드시 이자까지 붙여 돌려받는다. 곧 “돈은 빚이다.” 빚 위에 세워진 거대한 제국, 그 안에 우리가 살고 있다.

유목민

‘디지털 노마드’는 한곳에 정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계약 기간이 끝나면 집을 옮겨야 하는 삶은 디지털 유목민 이전에 이미 그냥 유목민인 셈이다. 디지털의 발전으로 공간에 제약이 없어진 건 어쩌면 축복이 아니라 양극화를 가속시킬 재앙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불안하면 안정되고 싶고, 안정되면 불안하고 싶어지는 이상한 동물이다. 그래서 익숙한 것에서 떠나 불안한 여행을 즐기고, 여행에서 돌아와 “집이 제일 좋다”라며 안정을 확인한다. 세계를 떠돌아야 생존 가능한 유목의 시대가 오고 있다.

욜로가 별건가

YOLO를 남의 얘기로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사는 것도 일종의 YOLO가 아닌가 싶다. 평생을 돈을 좇으며 살아왔는데 그럴수록 돈이 도망가는 기분이었다. 돈 때문에 자유를 계속 미루기만 하다간 한 번도 자유롭지 못한 채 늙어 죽게 생겼다는 위기감이 덮쳐왔다. 지금의 자유는 통장 잔액이라는 유통기한이 정해진 자유다. 생각보다 빨리 줄어들고 있다. 약간의 자유를 포기하면 유통기한을 늘릴 수도 있을 것이다. 돈을 버는 행위는 같지만 미래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유를 위해 돈을 번다는 것이 다르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유의 기한을 늘려가며 죽을 때까지 자유롭게 사는 것이 목표다. YOLO가 별건가? 현재를 위해 사는 것이다.

4부. 하마터면 불행할 뻔했다

꿈꾸던 대로 되지 못했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끌어안고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이건 관점의 차이다.

느려도 괜찮아

“나만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우리는 자주 불안하다. 남보다 6~7년은 뒤진 나는 “내가 원래 좀 느려.” 라고 예전부터 스스로 인정해버렸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숨기지 않고 말하고 다녔다. 신기한 건 주변 사람들이 잔소리하거나 한심해하지 않고 내 느린 속도를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반응을 보면서 나 역시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함보다는 천천히 간다는 여유로움이 생겼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들과 똑같이 살기 싫다고 하면서도 똑같이 맞추려고 애를 쓰고, 뒤쳐지면 불안해한다. 자신의 속도를 잃어버리고 남들과 맞추려다 보면 괴로워진다. 남들과 다르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남들과 전혀 다른 삶이 된다. 천천히 가기는 하지만,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으니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었다. 느린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이왕 늦은 거 천천히 가도 괜찮다. 인생도 더 길어졌는데 빨리 가서 뭐 하겠는가. 나 혼자 느릿느릿 가려니 외롭다. 그러니 같이 천천히 가면 된다. 모두 같이 뛰지 않는다면 경쟁 사회도 달라질지 모른다.

안 되는 게 정상

우리는 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괴로워한다. 나름 열심히 노력도 했건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더 괴롭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정상이다. 누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게 다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초능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초능력자가 아니다. 원래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정상이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쩌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는 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건 아니다. 원하는대로 다 되지 않는 지금이 정상이다. 괴로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어쩌다 이런 어른이 됐습니다만

누구나 꿈꾸는 모습이 있다. 몇몇 사람은 그 모습을 이루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루지 못하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꿈을 이루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 하지만 계속 불행하다. 그런데 지금의 나를 부정하며 노력하는 대신 지금의 나를 좋아해주고 인정하기로 마음 먹으면 행복할 수 있다. 지금의 내 삶도 꽤 괜찮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아직 꿈꾸던 모습이 되지 못한 삶을 보며 괴로워 하진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주어진 삶에서 행복을 찾아 누리기에도 짧은 생이다. 이것이 자기합리화라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잘못된 건 아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내 인생을 사랑해줄 수 있겠는가.

타인의 취향

두루두루 다 잘하려는 것보다 ‘선택과 집중’으로 성과를 높이는 전략은 다에게 잘 보이는 걸 포기하고 소수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데 자신만의 개성과 세계관을 밀어붙인 작품이 세계적으로 폭넓은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차피 결과를 알 수 없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는 게 낫다. 모두를 맞추려다가는 아무도 못 맞출 수 있다. 우리가 개성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유치한 마음 때문이라는 걸 되새긴다면 선택은 한결 가벼워진다.

내 삶도 드라마 같으면 좋겠다

SNS를 하며 드는 생각은 “다들 잘 사는데 나만 이렇게 사는구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생의 대부분은 시시하다. 어쩌면 만족스러운 삶이란 인생의 대부분을 이루는 이런 시시한 순간들을 행복하게 보내는 데 있다. 사소한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시시함을 긍정한다면 자금의 내 삶도 조금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보통의 자존감

범람하는 SNS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처받는다. 자존감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그런데 자존감이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흥미로운 점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을 과대평가한다고 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커질수록 괴로움이 커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상을 버리고 현재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낮은 자존감을 높이는 노력 때문에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존감은 그런 식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누가 나를 괴롭게 만드는가

스스로를 가장 빨리 불행하게 만드는 방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교하지 않는 삶을 실천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인간은 자신이 행복한 이유를 찾기보다는 불행한 이유를 찾는 데 평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도 일종의 마조히즘일지 모른다. 그런데 왜 부모님은 ‘친구의 자식’과 우리를 비교하는 이유는 어차피 넘사벽은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비슷한 수준의 친구와는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잡지의 목적은 읽는 이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좌절감은 고도의 계산된 상술이다. 많은 사람이 명품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것을 쉽게 살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좌절을 기반으로 한 상품과 서비스들을 모아 정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광고하는 전단이 바로 잡지다. 요즘은 모든 매체가 좌절과 불행감을 준다. 세상은 불행하지 않으려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속삭이면서 우리가 불행하다고 속인다. 없던 욕망도 생기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방식이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세상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당하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사람들은 잃고 나서야 그게 좋았다는 걸 깨닫는다. 싱그러움을 잃어버리니 싱그러운 것들이 좋아졌고, 그래서 식물도 키우고 수목원에 가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다. 때로는 자연은 냉혹해 어떤 불평도 통하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다 좋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젊음은 조금 미화됐다. 조금은 쓸쓸하지만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지금이 더 좋다.

잃은 후에 오는 것들

흔히 얻는 것이 있으면 일흔 것이 있다고 한다. 성공한 사람은 바쁘게 일만 하느라 건강을 잃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지 못해 가족과의 추억을 잃었을 수도 있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은 무언가를 얻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얻었을 때는 얻은 것에 집중하느라 일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무언가를 잃었을 때는 잃은 것에 집중하느라 얻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무언가를 얻었다고 느낄 땐 기쁨이 크니까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무언가를 잃었을 때 느끼는 상실의 슬픔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만약 상실로 괴로워할 때, 상실로 반드시 무언가를 얻게 된다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슬픔을 더 잘 이겨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 읽는 남자

이야기는 인생이고, 다양한 인생이 이야기 속에 있다. 이야기를 무시한 결과는 냉혹하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모두의 삶은 가십의 헤드라인이 아닌 아주 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결과만으로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습관은 부메랑처럼 내 삶을 평가한다. 내 삶을 실패로 만들고, 내가 했던 연애를 시간 낭비로 만들고, 남들과의 단순한 비교로 내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많은 이야기가 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안다는 것은 더 많은 이해를 갖게 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대

너무 기대하면 대부분 실망하게 되어 있다. 기대가 없는 상태라면 같은 것을 봐도 굉장히 만족스럽다. 무엇을 기대했는지에 따라 같은 것도 다르게 보인다. 이미 원하고 바라는 것이 있으니 기대를 한다는 것은 기준이 생긴다는 것과도 같다. 반대로 기대가 없다는 것은 설정해놓은 기준이 없어 바라는 게 없으니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조금만 좋아도 크게 만족하게 된다. 기대가 없으면 작은 것에도 즐거워하고 만족한다. 만약 인생도 기대없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은 일들로 가득할 수 있다. 욕심을 버리고 순응하라는 말은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라 인생을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같은 인생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것이라는 말이다.

에필로그 | 삶이 힘들게만 느껴질 때

귀찮은 과정들을 건너뛰고 바로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귀찮을 수도 있는 과정에 집중하며 잡생각 없이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과 답답할 정도로 느리지만 결국은 끝을 맺는 희열이 진정한 재미다. 과정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무언가를 하면서 결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과정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열심히 살면 힘들다. 그건 견디는 삶이기 때문이다. 같은 일이라도 이왕이면 ‘열심히’보다 ‘재미있게’ 해야 한다.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아무 것도 이룬 게 없더라도 제대로 즐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