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구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l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구절

낭만적 운명론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 -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 - 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한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 착아볼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자기 인식에서 나온 모든 증거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이상화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묘한 상실감, 슬픔을 느꼈다.

이것이 정말 사랑일까? 겨우 아침을 함께 보낸 주제에 사랑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낭만적 미망과 의미론적 우둔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냐 단순한 망상이냐?

시간[이 또한 그 나름으로 거짓말을 하지만]이 아니라면 누가 그 답을 말해줄 수 있을까?

진정성

리는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자기에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 침묵은 저주스러웠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마르크스주의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곰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한다. 

...

클로이에게 상처를 준 일 때문에 나 자신에게 느끼게 된 혐오는 순간적으로 클로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노력한 것 때문에, 나를 믿을 정도로 약하다는 것 때문에, 나 같은 인간을 선택해 결국 속이 뒤집어지는 꼴을 겪고 마는 그 형편없는 감식력 때문에 그녀가 싫었다. 나한테 칫솔을 주고, 아침식사를 준비해주고, 어린애처럼 침실에서 우는것이 갑자기 너무 비루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이런 약한 모습에 벌을 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내가 어쩌다 이런 괴물이 되었을까? 내가 늘 일종의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공원 정문에 도착하자 그때까지도 약간 샐쭉해 있던 소피가 갑자기 침묵을 깨면서 내 팔을 잡더니 할 만한 이야기를 했다. "걱정마, 나는 너한테 화나지 않았어. 나는 네가 그 끔찍한 것을 입고 있어서 기뻐. 만일 네가 나 하라는 대로 했다면 나는 네가 너무나약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 사랑이 보답을 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있다. 자기 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저런 핑계로]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자신의 쓸모없는 면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틀린 음정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냐 자유주의

나와 클로이의 관계가 공포정치 수준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아마 그녀와 내가 사랑과 주유주의 사이의 선택에서 다른 관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하물며 사랑의 정치인들[레닌, 폴포트, 로베스피에르]에게서는 더욱더 찾아보기 어려운 재료를 넣어서 반죽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국가든 남녀든 그 재료만 있다면[그것이 다들 나누어 쓸 만큼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불관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재료는 다름 아닌 유머 감각이다.

사랑을 말하기

우리는 밤에 같은 침대에서 같은 책을 읽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가 각기 다른 데서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결국 다른 책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한 줄의 사랑의 메시지에서도 똑같은 차이가 발생하지 않을까? 나는 마치 어느 것이 가닿을지도 모르면서 허공에 수백 개의 포자를 방출하는 민들레가 된 느낌이었다.

순간 나는 클로이의 팔꿈치 근처에 있던, 무료로 나오는 작은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갑자기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기에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더 불가해한 일이지만, 내가 클로이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사람이란 절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바탕에는 주관적이고, 또 어쩌면 환상적인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친밀성

대부분 클로이와 나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일화들과 관련된 부수적인 연상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은 중요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고, 일들을 함께 겪어가며 산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함께 끌어낸 의미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확인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동요

나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운이 닿지 않아 우리가 제대로 알 기회도 얻지 못했던 사람과 마주치면 우리는 낭만적인 노스탤지어에 젖는다. 다른 사랑의 이야기의 가능성과 마주치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가능한 수많은 삶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가 슬픔에 빠지는 것은 그 삶들을 다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달 후에는 그 사람을 피하려고 일부러 길 또는 서점을 지나쳐버린다는 것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사랑이 그 순간의 나의 자아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한시적인 것으로서 끝을 맺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일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축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문제를 말하면 진짜로 문제가 생겨"클로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낭만적 테러리즘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은 말한다.너는 나를 사랑해야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만일 상대가 사랑으로 보답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랑이 더럽혀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이렇게 낭만적 테러리즘은 자신의 요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그 요구를 부정해버린다.



선악을 넘어서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핸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예수 콤플렉스

클로이가 나를 버린 것에 대한 나의 최초의 반응은 자기 혐오적인 것이었다. 우리 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실패한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계속 클로이를 사랑했고 나 자신을 미워했다. 그러나 예수 콤플렉스가 생기면서 그 등식이 뒤집혀, 이제 클로이가 나를 찬 것은 클로이를 경멸할 만한, 잘해야 동정할 [기독교 미덕의 모범]만한 증거로 해석되었다. 예수 콤플렉스란 자기 방어 매커니즘에 불과했다.  

생략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시간표와 다이어리의 엄격한 요구에 이끌려 가지만 마음의 자리인 영혼은 기억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만일 모든 연애가 낙타에게 짐을 더 얹는 것이라면, 사랑의 짐의 의미에 따라서 영혼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낙타다 마침내 클로이의 기억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떨쳐버렸을때, 낙타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사랑의 교훈

그들은 아주 어린시절의 감정적 애착 경험을 통해서 사랑이 보답받지 못하는 것이며 잔인한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들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을 절대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치료과정에 들어가 유년시절을 다시 짚어보면 자신의 마조히즘의 뿌리를 이해하게 되고, 어울리지 않는 짝을 변화시키려는 욕망이 사실은 문제 있는 부모를 제대로 된 부모로 바꾸던 어린 시절의 공상의 잔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좀더 복잡한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의 모순들에 부응할 수 있는 교훈, 지혜에 대한 요구를 지혜가 무력해지는 상황과 조화시킬 수 있고, 첫눈에 반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그 불가피성과 조화시킬 수 있는 교훈, 사랑을 평가할 때에는 교조적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로 달아나지 말아야하고, 두려움의 철학이나 실망의 윤리학을 구축하지 말아야했다. 사랑은 분석적 정신에게 겸손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