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오웰 유진 아람 이한중

* 조지 오웰의 에세이 중 일부를 선별하여 번역한 책임.

헌책방에서 일하던 때 주로 느낀 것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점이었다. ··· 초판 밝히는 속물들이 문학 애호가들보다 훨씬 흔했고, 싼 교과서 값을 더 깎으려는 동양 학생들이 그보다 더 흔했으며, 막연히 조카 생일 선물이라도 구하러 들르는 여성들이 제일 흔했다. – 43쪽, “서점의 추억”

언어를 함부로 쓰는 것에 대한 저항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으로, 전깃불보다 촛불을 좋아하고 비행기보다 마차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런 주장의 근저에는 언어란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우리 나름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나갈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는, 반쯤은 의식적인 믿음이 깔려있다. – 255쪽, “정치와 영어”

자신이 실패자라는 기분에 술 마시는 버릇을 들인 사람이 술을 마시는 바람에 더더욱 실패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영어의 경우에도 그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생각이 어리석어 영어가 고약하고 부정확해지지만, 언어가 단정하지 못해 생각이 더 어리석어지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건 이런 과정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 그런 습관을 제거한다면 생각을 보다 명료하게 할 수 있으며, 생각을 명료하게 한다는 건 정치적 개혁에 필요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 256쪽, “정치와 영어”

우리 시대에 정치적인 말과 글은 주로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데 쓰인다. – 270쪽, “나는 왜 쓰는가”

과장된 문체는 그 자체로 일종의 완곡어법이다. ··· 명료한 언어의 대적(大敵)은 위선이다. ···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 271쪽, “나는 왜 쓰는가”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 297쪽, “나는 왜 쓰는가”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정도가 아닌 부류의 차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달리 말해 범인을 성인의 불완전한 형태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하지만 ··· 그는 성인도 아니었고 성인이 되고자 하는 이도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썩 훌륭한 인간은 아니었다. ··· 셰익스피어는 철학자도 과학자도 아니었지만 호기심만은 대단했다. 그는 지상을, 인생의 과정을 사랑했다. – 365-367쪽,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톨스토이는 부와 명예와 특권을 버렸다. 그는 모든 형태의 폭력도 포기했으며, 그로 인한 손해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강제의 원리를, 혹은 적어도 남에게 강제를 행사하고픈 ‘욕구’를 버렸다고 믿기는 쉽지 않다. – 369쪽,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나는 왜 쓰는가 오웰 유진 아람 이한중

    나는 왜 쓰는가

    저/역자조지 오웰/ 이한중출판사한겨레출판출판일2010.9.15.총페이지478쪽추천자정과리(연세대 국문과 교수)

    도서안내

    『동물농장』과 『1984년』의 작가 조지 오웰은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이다. 실천적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자신이 가진 지적·언어적 능력 및 기능을 세계의 갱신을 위해 싸우고 있는 자신의 삶에 최대한도로 밀착시키는 사람이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나는 왜 쓰는가』)와 같은 구절이 그대로 가리키듯 그에게 삶과 글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어지는 문단에서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라는 구절까지 읽으면 우리는 고통의 누적으로서의 삶 전체를 덩어리째로 글의 마술에 의해 ‘사는 기쁨’으로 만들고자 고투하는 작가의 절절한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직접적인 언명이 그의 글쓰기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실제의 글쓰기에 의해서만 그것은 증명될 수 있으며, 그 점에서 오웰의 에세이는 더할 나위 없는 물증이다. 통상적인 에세이가 세계에 대한 솔직한 느낌과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세계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면 오웰의 에세이는 그대로 산 체험이다. 그리고 매순간 세계와 씨름하는 가운데 현장에서 솟아나는 생각들을 싸움의 기운을 그대로 담아 뿜어낸다. 체험의 매순간이 금언 하나씩을 분만하는데, 게다가 그 생각들은 단일하지 않고, 정치와 문학과 언어와 인생에 대한 무궁무진한 통찰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에세이에서 매우 입체적인 조형미와 탄력을 느끼게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나는 왜 쓰는가 오웰 유진 아람 이한중

    나는 왜 쓰는가 오웰 유진 아람 이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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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오웰 연보

    <나는 왜 쓰는가> 각 편마다 옮긴이는 그 수필의 출처와 그것을 쓸 당시 오웰의 처지나 상황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하단에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왜 쓰는가>에 실린 수필들의 순서가 집필 시기 순이 아니어서 다른 작품과 비교하려면 뒤에 있는 연보를 보게 된다. 그래서 연보를 간략하게 축약하여 옮긴다.

    - 1903년 : 인도 북동부 모티하리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영국으로 돌아가길 원해 영국으로 갔다.

    - 1904~1911년(1~8세) : 아버지는 인도 행정부 아편국 관리였으나 1904년 인도로 돌아간 뒤 1912년까지 집에 딱 한 번 잠시 다녀갈 뿐이다.

    - 1911~1916년(8~13세) : 예비학교인 세인트 시프리언스 학교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기숙사로 들어갔으나 차별을 받았다.

    - 1917~1921년(14세~18세) : 사립학교 이튼에 입학하였으나 학과목을 등한시하고 시와 단편소설을 쓰며 자유롭게 지냈다.

    - 1922~1927년(19~24세) : 인도 제국 경찰에 지원하여 버마에서 경찰로 보냈다.

    - 1927~1929년(24~26세) : 밑바닥 생활을 하며 습작, 그리고 작가로 입문하게 된다.

    - 1930~1935년(27~32세) : 영국에서 부모와 여동생이 사는 사우스 월드에 머물며 글을 쓰고 이런 저런 교사 노릇을 하기도 한다.

    - 1936년(33세) :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취재하여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집필한다.

    - 1937년(34세) : 스페인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 소속의 민병대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체험을 그린 <카탈로니아 찬가>를 집필한다.

    - 1938~1939년(35~36세) 페결핵으로 요양원에 들어갔고 <카탈로니아 찬가>를 발간한다.

    - 1940~1945년(36~42세)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웰은 좌절과 실의를 맛본다. 런던으로 가 민방위대인 '홈 가드'에서 하사관 노릇을 하며 <동물농장>을 집필한다.

    - 1946년(43세) : 아내가 죽자 스코틀랜드의 한적한 섬 쥬라에 농가를 얻어 입양한 아들과 지낸다. <동물농장>은 성공을 거두었고, <1984> 집필에 착수한다.

    - 1947~1949년(44~45세) : 폐결핵으로 입원하였으나 <1984>가 평단과 대중의 갈채를 받는다.

    - 1949~1950년(46~47세) : 1949년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10월 재혼하였다. 다음 해 1월 생을 마감했다.

    수필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의 소설과 르포는 몇 편 읽었던 적이 있으나 에세이는 이번에 처음 읽는다. 오웰은 생전에 소설 6권, 르포 3권, 에시이집 2권을 썼다고 한다. 책을 낸 것 말고도 에세이를 수백 편 썼다고 한다. 이 수필집 <나는 왜 쓰는가>는 수많은 오웰의 에세이 가운데 가장 빼어나면서도 중요한 29편을 역자가 뽑아 묶어 펴낸 것이다. 조지 오웰은 1936년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자신의 작품들은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는 1936년 1월부터 3월까지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을 취재했고, 12월에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러 떠났다.

    조지 오웰이 지향하는 정치, 문학, 인생 등 사상

    이 수필집을 읽게 되면 조지 오웰의 정치 사상, 지향하는 인간관 등을 알 수 있다. 그는 부자보다는 빈자, 강자보다는 약자 편에 섰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념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동했다. 조지 오웰이 이와 같은 가치와 품성을 갖게 된 이유를 이 책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정말 정말 좋았지'에서 그의 학창시절의 얘기가 나온다. 중산층의 자녀인 그는 공부는 꽤 잘했다고 봐지는데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의 자녀가 다니는 예비 학교(초등학교)에 수업료 면제 혜택으로 강제로 입학하게 된다. 면제 조건엔 명문 사립(중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 예비 학교에서 교장과 교장 사모로부터 아주 노골적인 차별을 받는다. 속물주의에 빠진 친구들로부터는 괴롭힘을 낭하며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고통을 격었다. 결국 장학금을 받고 웰링턴을 거쳐 사립 명문인 이튼에 입학을 하지만 오웰은 시험 때마다 엄청난 압박감을 견뎌야 했다. 이런 학창시절의 경험이 전체주의에 대한 거부와 자유로운 체제를 옹호하게 만들었다고 봐진다. 그가 <1984>와 <동물농장>이라는 소설을 쓰게 된 까닭도 알 수 있다.

    스파이크(The Spike)

    사립 명문교 이튼을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오웰이 식민지 버마에서 5년간(1922~1927)의 경찰 생활을 접고, 밑바닥 생활을 하며 지면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던 무렵의 에세이다. 그의 첫 잭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27장과 35장에 실렸다.

    도시의 거무죽죽한 쓰레기 같은 마흔아홉 명의 부랑인 속에 섞여 나는 스파이크(부랑자 임시 숙소)로 들어 가려고 지저분한 얼굴로 사제로 만든 담배를 피우며 풀밭에 누워 기다렸다. 나의 수중에 8페니가 있다고 부랑자 생활 오래한 사람이 거기서 걸리면 일주일은 살아야 한다고 해서 울타리 아래에 돈을 묻었다. 6시에 발을 질질 끌며 들어갔는데 사람들을 밀치며 면박을 주던 감독이 나에게 젠튼맨이냐며 "팔자 억세게 사납소, 나리"라며 경의에 가까운 배려를 작심한 듯했다. 들어가자 마주친 욕실의 풍경은 부랑자들의 땀내와 스파이크 특유의 대변 냄새로 역겨웠다. 주어진 3분에 씻고 구빈원 입소자용 셔츠를 입었다. 세 끼 언제나 똑 같은 빵 반 파운드, 마가린 한 조각, 차라고 부르는 것 한 컵을 받았다. 내겐 독방에 침대를 줬으나 스팀을 차단해서 추워서 잘 수 없었다.

    아침에 씻을 물은 턱없이 부족했다. 형편 없는 아침 식사, 식사 후 추위 속에서 상의를 벗고 천연두 예방책의 하나로 건강검진을 받았다. 부랑자들은 대부분 건강하지 못했다. 부랑자들은 음산한 방에 10시간이나 갇혀 경찰과 구세군의 부정에 관한 얘기와 음담패설을 하며 보냈다. 담배는 공식적으로 금지이나 묵인해줘 모두 담배를 피웠다.

    부랑자 감독이 나에게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엌일 돕기를 맡겼다. 거기서 직원들이 먹다 만은 소고기를 만든 굉장한 음식이 남아서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었다. 이걸 부랑자들에게 주지 않는 이유는 나쁜 음식을 줘야 부랑자들이 몰려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2박을 하고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건강 진단을 받은 후 10시에 소지품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점심으로 먹을 빵 한 덩이와 치즈를 받고 스파이크를 나왔다.

    교수형(A Hanging)

    식민지 버마의 경찰 간부로 있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1931년 <뉴 아델피>지에 게재했다. 식민 통치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자괴감으로 괴로웠던 당시의 경험은 그의 작가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버마의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질 사형수 중에서 꼬챙이처럼 마른 몸에 머리는 삭발을 한 힌두인 하나가 끌려나왔다. 인도인 간수들에 의해 끌려온 그는 오랏줄에 맥없이서 있었다. 8시 정각이 되자 형무소장이 서둘르라고 하자 간수장이 준비가 다 되었다고 했다. 총을 어깨에 맨 간수 둘이 교수대로 행진하는데 개 한 마리가 안마당에 나타나 마구 뛰어다니며 세차게 짖어대더니 온몸을 신나게 흔들어대며 펄쩍 뛰어다녔다. 갑자기 죄수에게 달려들어 펄쩍 뛰어오르더니 얼굴을 핥으려고 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간수들이 돌을 들고 쫓아 겨우 붙들었으나 녀석은 계속해서 버티며 낑낑댔다.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2분 뒤면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교수형 집행인은 머리가 희끗한 재소자로 우리가 들어가자 비굴하게 웅크리며 우리를 맞았다. 죄수는 목에 올가미가 고정된 순간부터 신에게 외치기 시작했다. 개는 그 소리에 화답하듯 낑낑거렸다. 소장이 명령하자 죄수는 시야에게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교수대 뒤편으로 가서 죄수의 시신을 확인했다. 소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모두 나가서 한잔하자고 했다.

    코끼리를 쏘다

    식민지 버마인들의 침략자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낸 모습을 보여주는 글이다. 반유럽 정서가 상당히 독한 남부 버마의 몰멩이라는 도시에서 남들에게 미움을 받을 만큼 내가 중요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특히 젊은 승려들이 제일 고약했다. 나는 추악한 짓거리들을 하는 제국주의가 사악한 것이니 어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나는 버마인들 편이었다.

    사슬을 끊고 탈출한 발정기 코끼리가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해서 케케묵은 윈체스터 44구경을 가지고 갔다. 버마인 경위와 인도인 순경 몇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꼬끼리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사망자도 있었다. 전령에게 코끼리용 소총을 빌려오도록 해서 그 총을 들고 코끼리가 있다는 곳으로 이동하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나를 따라왔다. 나는 코끼를 쏠 생각이 없었으니 뒤를 따라오는 군중이 있다는 건 당혹스러웠다.

    코끼리를 보자마자 쏴서는 안 된다고 갔는데 평화롭게 풀을 뜯는 코끼리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좀 지켜보며 녀석이 다시 난폭하지 않으리라는 걸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를 따라온 2000명의 인파가 모두 내가 코끼리한테 총을 쏠 것이라 믿고서 흥이 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모두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으니 나는 결국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백인인 나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밀려다니는 바보 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백인 답게 코끼를 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코끼리를 쏘고 싶지 않았다.

    군중이 깊고 낮고 즐거운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코끼리의 귓구멍을 겨냥하고 쏘았다. 코끼리는 움직이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꽤 오래 그 상태로 있더니 결국 풀썩 무릎을 꿇었다. 나는 같은 자리에다 다시 총을 발사했다. 코끼리가 필사적으로 일어서더니 다리를 떨고 겨우 몸을 폈다. 나는 세 번째 탄알을 쏘았다. 코끼리는 울음을 토하고 쓰러졌다. 나는 남은 두 발을 심장 부분에 발사했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리를 떠버렸다. 유럽 사람들 사이에서 나이 든 사람들은 내가 옳았다고 했고, 젊은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했다.

    서점의 추억

    1934년 11월부터 1936년 1월까지 런던의 '북러버스 코너'라는 헌책방에서 파트타임 직원으로 일할 때의 경험을 쓴 글이다.

    헌책방에서 일하던 때 만났던 사람들이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고 초판 밝히는 속물, 값을 깎으려는 사람, 주문하고는 찾아가지 않는 사람, 시간 때우려 오는 사람 등등 상당수가 성가신 존재였다. 헌책방에서 파는 타자기, 크리스마스 카드 등 부수 상품, 인기 작가, 남녀가 각기 좋아하는 소설, 디킨스나 제인 오스틴 등의 고전 소설은 옛날 거라며 찾지 않는 손님, 서점업의 근무환경, 이 일을 하면 책이 싫어진다고 한다.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

    <카탈로니아 찬가>라는 조지 오웰의 글을 읽으면 더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스페인 내전(1936~1939, 좌파인 공화파가 선거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세운 제2공화국 정부에 대하여 우파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시작되고, 결국 반군인 군부가 승리하여 1975년까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가 이어졌다. 오웰은 스페인 민주정권을 지키기 위해 국제 의용군으로 참전하였으나 총상을 입은 뒤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에 아내 아일린과 함께 프랑스로 탈출한다.)은 어떤 사건보다 풍성한 거짓을 낳았다. 영국 대중이 투쟁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친 파시스트 신문보다 좌파 신문이 더 교묘한 왜곡 수법으로 방해했다. 지금 투옥되어 있는 사람들은 파시스트가 아니라 혁명 운동가들인데 무시무시한 혁명가들,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을 그곳에 가둔 데 책임이 있다. 이 글에서 그가 경험한 스페인 내전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프랑코 파시스트 군부 세력,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세력, 공화국 정부 좌파 세력, 공산주의자 세력, 무정부주의자 세력 간에 복잡한 관계와 갈등에 대하여 말한다.

    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

    정치에 거리를 두려는 충동을 느끼는 작가이면서 언론의 자유는 일종인 사기인 영국에서 침묵할 수 없어 맞서 싸우기 위해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파시즘에 맞서 바른 노선을 견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 독립노동당(ILP)에 가입했고, 스페인에서 독립노동당 파견대와 함께 동행했다.

    마라케시(모로코의 도시 이름)

    마라케시의 시신 운구와 매장 등 장례 모습. 굶주리는 식민지 시민들의 생활상, 공원에서 본 가젤이라는 동물, 무어인들에 의해 탄압받는 유대인 거리에서 본 유대인들의 비참함, 황무지로 변한 모로코의 토지, 끔직한 취급을 당하는 당나귀, 착취자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흑인 병사를 보며 백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드러난다.

    좌든 우든 나의 조극

    어린 시절이었던 1차세계대전(1914~1918)을 발발할 무렵의 '마른 강 전투', '타이타닉호 침몰' '학군단OTC 열병식' 전쟁 이전과 전쟁 중 소년단원으로서 전쟁 대비 상황을 그려냈다. 1936년 이후 2차세계대전 발발 징후가 있자 두려움과 어수룩한 좌파들이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애국심과 히틀러에게 저항하기 위하여 저항을 대처할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 당신의 영국

    영국인으로서 영국과 영국인이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였을 때의 특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애국주의에 비하여 아주 연약한 기독교와 국제 사회주의, 빈부차가 심한 영국 사회, 여러 민족이 통일이 안 된 영 연방, 선거제도, 영국인의 성격, 문학, 음악, 계급 착취가 심함, 정직하지 못한 언론, 영국 좌파 지식인들의 정서, 중산층의 확대 등 다양하고 싶고 영국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웰스,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

    오웰은 사회주의자이며 평화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웰스라는 작가가 쓴 글을 비판하고 있다. 웰스는 스탈릭은 작은 정신이상자라며 독일군이 악령이라느니, 장비가 부실하다느니, 사기가 떨어지고 있다느니 하는데 독일군은 발칸반도를 손에 넣고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다며 웰스의 말을 인용하며 비판하고 있다. 웰스는 디킨스와 마찬가지로 중산층에서도 군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집안 출신이라며 웰스의 말과 달리 독일은 영국보다 훨씬 더 과학적이면서 훨씬 더 야만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본다

    앞서 말했듯이 조지 오웰의 르포 <카탈루니아 찬가>를 읽어보면 민병대 대원으로 참전했던 전쟁에서 더 생동감 있게 전투 상황과 작가의 고민이 더 확실하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하면 무엇보다도 소리, 냄새, 그리고 사물의 표면 같은 물질적인 것들이 떠오르는 기억이라고 한다. 전선에 파견되기 전 바로셀로나 기병대 병영에서 일주일 동안 받았던 훈련인 생생하게 기억된다고 한다. 생각나는 사람들, 사람한테서 풍겨나오는 지독한 냄새, 간이 변소, 굶주림, 군대 문화, 좌파들이 퍼뜨리던 낭만적인 전쟁 예찬론에 속아 참전했다고 한다. 내전의 잔학성, 전선에서 저격병의 경험을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묘사는 <카탈루니아 찬가>에서 봤던 모습들이다. 그는 파시스트와 싸우려 참전했으나 같은 편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좌파 정당간 권력투쟁과 제대로 무장도 못하고 급조된 공화국 민병대,로 인하여 오웰은 파시스트와의 싸움에서 패한다. 프랑코를 지지한 독일과 이탈리아, 막판에 독일에 맞섰지만 프랑코를 민 위선적인 영국, 인색할 정도로 공화파를 지원한 러시아 등 스페인 내전의 국제역학 관계 속에 남루하고 무기 없는 스페인 공화국은 무너졌다. 민병대에 입대하한 날 위병소에서 손을 잡아준 이탈리아 민병대에 관한 추억을 되새기며 지금 죽었을 사람을 위해 시 한 편을 남긴다.

    시와 마이크

    라디오 프로듀서로서 문학 방송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경험이 바탕이 된 글이다. 인도의 대학생들을 겨냥하여 당대 영국 작가들의 시를 많이 방송했으므로 수천 명 이상의 청취자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짜임새가 엉성하였으나 하나의 테마를 중심으로 하여 어느 정도 통일성이 있어 보였다. 음악 속에 시를 낭송하였다. 연설이나 강연과 달리 방송은 단방향일 수밖에 없어 청중들의 반응을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시가 인기 없는 건 완벽한 사실이었다. 나쁜 시가 좋은 시보다 더 '시적'인 건 거의 자명한 일이다. 정부와 관료는 전쟁에 돌입할 때 문단의 지식인들을 배제하려고 한다. BBC가 동시대의 문학에 미미하나마 관심을 보이지만 거짓 선전, 음악, 상투적인 농담, 가짜 토론 같은 데만 관심을 가진다. 오웰은 문학을 아끼는 사람들이 너무 무시당하고 있는 매체에 더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고 한다.

    나 좋을 대로

    말 그대로 '자 좋을 대로' 쓴 글이다. <트리뷴>이라는 잡지의 문예 부분 편집장으로 1년 남짓 일하며 분량과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그야 말로 '나 좋을 대로'라는 고정 칼럼을 만든고 쓴 칼럼 중의 하나이다. 겨우 6페니 주고 산 덩굴장미를 심어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보았다는 아주 짧은 글이다.

    민족주의 비망록

    민족주의(nationalism)는 단일한 인종이나 지리적 영역에만 속하는 민족(nation)을 싸잡아 좋으니 나쁘니 하니 딱지를 붙일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습성을 뜻한다며 애국주의(patriotism)과 비교하고 있다. 애국주의는 속성상 군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방어적인데 반해 민족주의는 힘에 대한 욕구와 분리할 수 없다. 소련, 일본, 독일 등의 여러 나라와 국수주의, 제국주의, 공산주의 등의 이념을 비교하며 사례를 통해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자기 세력 집단의 우월성 외에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글을 쓰지 않는 강박증을 지니고 있다. 민족주의적 충심은 강하게 붙들어놓는다고 해도 전이가 되지 않는 게 아니라서 불안정하다. 민족주의자들은 비슷한 유형의 사실들이 가진 유사점을 무시하는 능력이 있어 자기편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반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에 귀를 닫아버린다.

    긍정적 민족주의로는 신토리주의(영국 세력과 영향력이 기울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자 하는 욕구로 영국의 방식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신토리주의의 원동력이다.), 컬트 민족주의(컬트 민족주의의 과거와 미래의 영광에 대한 믿음이 컬트 민족주의의 원동력이다), 유대주의(가 있고, 전이된 민족주의에는 공산주의, 정치적 가톨릭주의, 인종차별 감정, 계급차별 감정, 평화주의(폭력 자체가 아닌 서구 국가들을 방어하는 데 쓰이는 폭력만을 비난하는 주의)가 있으며, 부정적 민족주의에는 영국혐오증, 반유대주의, 트로츠키주의(무정부주의자, 민족적 사회주의자들이며 스탈린에 대한 적대감을 지닌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까지 포함한다.)가 있다.

    당신과 원자폭탄

    일본 원폭 두 달여 뒤인 1945년 10월에 발표한 글이다.

    문명의 역사는 대체로 무기의 역사이기도 하다. 소련이 수년 안에 원자탄을 보유하게 되면 초강대국 두셋이 세계를 나눠 가지게 되는데 '평화 아닌 평화'를 무한히 연장하는 대가로 대대적인 전쟁은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크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 보다는 과학 교육에 관한 오웰의 생각이다. '과학자'가 비과학적인 문제에 대하여 남들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높아야 하지만 그들은 작가나 예술가에 비해 양심의 가책을 덜 느껴 자국 정부 쪽에 줄을 선다. 나치에 동조하고 공산주의에 무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문학이나 역사를 희생하지 않는다면 과학교육을 더 강조해야 한다. 합리적이고 회의적이며 실험적인 사고의 습성을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 예방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대하여 무관심한 세상에 대하여 전체주의에 맞서 지적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전체주의와 권위주위 사회에서는 문학 특히 산문은 발전할 수 없다. 공산당이나 정통 가톨릭은 문학 특히 산문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자유주의 사회를 지지하고 있다. 사상의 자유가 말살되면 문학의 운명은 암울하다.

    행락지

    행락을 위한 댄스홀, 호텔, 극장, 레스토랑, 호화 유람선 등을 만들어 음악을 들으며 휴식, 포커, 음주, 사랑을 나누기 보다는 자연의 소리가 들이는 단순함의 빈터로 남겨둬야 한다.

    "물속의 달" - 조지 오웰이 좋아해서 자주 찾았던 펍의 이름

    건축과 인테리어가 나뭇결을 잘 살린 목공품과 무쇠 벽난로 등 빅토리아 양식이고 조용해서 대화를 나누기 좋으며 뜰이 있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물속의 달'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와 영어

    영어가 쇠락해져 위중한 상태에 놓여 있다. 특히 글로 표현되는 영어에는 나쁜 습관이 많고 그것이 모방되어 퍼지고 있다. 비유가 상투적이라 모호하고 표현력이 떨어지고 있다. 죽어가는 비유, 기능어 또는 언어적 의수족, 젠체하는 용어, 무의미한 단어 사용을 예시를 들어 말하고 있다. 독일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도 지난 10년에서 15년 사이 독재 정권 때문에 상당히 타락했다. 언어의 타락을 치유할 수 있는데 먼저 유용성을 다한 모든 단어나 숙어를 폐기해야 한다며 치유하기 위한 여섯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참고가 될 만해서 그대로 옮겨본다. " 1) 익히 봐왔던 비유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2) 짧은 단어를 쓸 수 있을 때에는 절대 긴 단어를 쓰지 않는다. 3) 빼도 지장이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뺀다. 4) 능동태를 쓸 수 있을 때는 수동태를 쓰지 않는다. 5) 외래어, 과학 용어, 전문용어는 그에 대응하는 일상어가 있다면 절대 쓰지 않는다. 6) 너무 황당한 표현을 하게 되느니 이상의 원칙을 깬다."

    두꺼비 단상(斷想)

    두꺼비가 봄이 왔음을 어떻게 알까? 땅속의 어떤 떨림인지 아니면 그냥 온도가 몇 도 올라서인지 잘 모르겠다. 두꺼비가 땅속에서 나와 산란할 때까지의 모습을 그려내며 매혹적이라고 한다. 자연에 대한 예찬이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

    서평을 쓰는 사람의 모습과 일상을 그리고 있다. 춥고 공기가 탁한 곳, 담배꽁초와 반쯤 비운 찻잔, 좀먹은 가운을 입은 남자, 타자기, 종이로 넘치는 쓰레기통, 편지들, 읽고 써야 할 책들을 보고 고문당하는 남자, 안경 쓰고 영양실조 상태이며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남자는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매년 수천 권씩 쏟아지는 책 중에 쉰 권이나 백 권쯤 기꺼이 서평을 쓰고 싶어 한다. 업계 최고 수준인 사람이라면 열 권에서 스무 권 정도를 택할 것이며, 두세 권만 꼽을 수도 있다. 그 이상은 본질적으로 사기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블로그에 매년 5,60권씩 서평(북리뷰) 쓰는 것도 사기일 수밖에 없다. 그냥 값싼 감상 몇 줄에 거친 줄거리 쓰기라고 봐야한다. 마찬가지로 100권 이상 쓰는 일부 북리뷰 블로거들은 천재 아니면 사기이다.

    전문서는 그 분야 전문가가 서평을 써야 한다. 그러나 소설의 경우는 선수보다는 아마추어가 나을 수도 있다. 소평은 아주 긴 서평(최소한 1000단어는 되게)을 써야 한다.

    나는 왜 쓰는가

    아버지를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거의 본 적이 없을 만큼 외롭게 자란 나는 낱말을 다루는 재주와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대여섯 살때부터 내가 커서 작가가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네댓 살 때 처음으로 시를 쓴 후 이후 글을 썼던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쓰게 된 동기 네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순진한 이기심 : 나는 '순진한 호기심'으로 읽었다. 왜냐하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이기심이 아닌 호기심으로 봤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것과 같은 '순진한 이기심'이 글을 쓰게 했다고 하였다. 오웰은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하였다.

    2.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이라는 미학에 대한 열정과 기쁨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3. 역사적 충동 :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

    4. 정치적 목적 : 지향하는 세상으로 방향을 밀어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그리고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기 위해 <카탈로니아 찬가>를 썼다. <동물농장>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다.

    정치 대 문학 :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줄거리와 등장 인물에 대하여 내게는 매우 낯선 오웰만의 개성적인 해석으로 비평하는 글이다. <걸리버 여행기>가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풍자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은 영국에 대한, 정권을 장악한 휘그당(제임스 2세와 절대군주제를 옹호하는 토리당에 반대하고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정당으로 다수 귀족과 중산층을 대변하였고 나중에 자유당의 주축이 됨)에 대한, 그리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한 공격이라고 한다. 스위프트는 정치적으로 진보정당의 우매함에 심사가 뒤틀려 토리주의자가 되어버린 셈인 사람 중의 하나로 영국에 적의를 품은 매국적인 기미가 보인다고 있다. 걸리버가 자신이 발견한 여러 나라들은 영국 왕의 식민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흐뭇해하며 기록한 구절도 찾을 수 있다. 3부에서 스위프트는 전체주의를 공격하였으나 그가 자유의 투사이지 않다. 귀족이나 왕을 혐오는 하였지만 서민을 더 좋게 보거나 사회적 평등에 호감을 가지지 않아 세습적인 계급차별을 당연시했다. 스위프트는 일종의 무정부주의자

    스위프트가 '통 이야기'로 저지른 불경에 대하여 용서를 받은 것을 보면 종교적이기보다는 정치적임을 알 수 있다. 스위프트의 반종적인 기미는 주로 정치적인 제휴 관계에서 드러나는 게 아니다. 과학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이 드러나지만 실용적이지 않은 '순수' 과학이 스위프트에게 가치 있는 활동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기미는 없다.

    스위프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일부 지도적 인물들에 대해 비이성적이다 할 만한 찬탄을 한다. 하지만 스위프트에겐 보편적인 의미의 종교적 신념조차도 갖고 있지 않는다. 조지 오웰은 책 <걸리버 여행기>를 여섯 번이나 읽었을 만큼 좋아하지만 정상적인 의미의 지혜를 갖지 못한 스위프트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

    1929년 폐렴에 걸려 몇 주 동안 입원했던 경험을 살려 쓴 글이다. 당시 영국에서 환자가 인간미라곤 전혀 없는 비정한 병원에 어떤 과정을 거쳐 입원하고, 병실에서 어떻게 처치와 간호를 받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여러 명이 쓰는 나쁜 환경의 병실,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의 상황, 환자 면회 오는 사람들, 간호사들의 태도, 병으로 죽어가는 참혹함, 의대생들의 장난기 실험으로 가난한 소년의 죽음, 병원은 의대생들이 가난한 자들의 주검으로 기술을 연마하는 장소였다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와 드라마>라는 팜플렛에서 셰익스피어의 전작을 다시 읽고는 작품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반감과 지루함과 당혹감'을 느낀다며, <리어 왕>은 조야, 지루, 시대착오, 외설, 부적절, 과장, 부자연, 미적 결함, <레어 왕>의 표절, 우스꽝스러운 인물, 저급한 세계관....한 작품이라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셰익스피어가 훌륭한 작가라고 추앙받은 건 합리적인 의견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무언가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학적 근거없이 광우병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처럼 남따라서 흥분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오웰은 톨스토이가 이해될 만한 리어의 말을 우스꽝스럽게 곡해하기도 하고 의미를 슬쩍 바꾸기도 하였다며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 사후 200년이 넘도록 계속해서 출판되고 무대에 올려지는지를 설명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이젠 광우병 얘기는 없고 미국산 소고기 잘만 먹는 것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에게서 으뜸으로 꼽는 그의 장점은 언어 구사력이다. 이는 또 한 명의 혹독한 비판자인 버나드 쇼 같은 사람까지도 인정하는 바이다. 이렇게 조지 오웰은 여러 근거를 들어 셰익스피어를 비판한 톨스토이를 저격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리어처럼 대가 없이 엄청난 것을 포기하는 행위(땅과 작위와 저작권을 버리고 농민으로 살려는 시도)를 한 유사성이 있다. 그렇게 하면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로 속세를 버렸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믿었던 두 자식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였고 귀족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지니다 시골 마을의 조그만 집에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리어 왕>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극의 주제에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하다. 셰익스피어를 쓰러뜨리려는 톨스토이의 시도는, 누렇게 바랜 팜플렛 종잇장들 외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정말, 정말 좋았지

    오웰이 여덟 사리이던 1911년부터 1916년까지 5년 동안 다닌 학교에서 받은 상처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명예훼손의 염려가 있어 사후 2년 뒤에야 미국에서 발표되었다. 영국에서는 학교장 부인이 사망한 뒤인 1967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여덟 살 때, 강제로 집을 떠나 예비학교인 세인트 시프리언스 학교에 도착하고 침대에서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밤마다 기도를 드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교장 사모인 W부인은 우리를 추어올리며 사람 좋은 척 할 때가 많았지만 책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부인은 방문객인 승마복 차림을 한 부인에게 나를 오줌을 싸는 아이라며 선배 학생한테 때려주라 할 거라고 했다. 또 다시 오줌을 싸자 교장이 말채찍으로 매질을 했고 나는 매의 고통보다는 공포감과 수치심으로 훌쩍였다.

    나는 침대를 젖시는 게 나쁜 짓이면서 내 통제력을 벗어난 일임과 내가 던져진 곳의 환경이 냉혹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뒤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비싼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그 야만적인 방법이 확실히 효과가 있다는 점은 의심치 않는다.

    세인트 시프리언스는 학비가 비싸고 속물근성이 넘쳐나는 학교였다. 교장의 야심은 작위가 있는 소년들을 끌어오는 것과 학생들을 훈련시켜 사립학교, 특히 이튼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시키는 것이었다. 내가 졸업할 즈음 영국 작위가 있는 소년 두 명을 데려오는 데 성공한 교장은 그들에게 '누구누구 경(卿)이라 불렀다. 아주 부유한 집 아이들은 우유와 비스킷을 먹었고, 승마 교육을 받는 등 공공연히 총애를 받았다. 비싼 학비를 감면받고 내가 이 학교에 온 것은 명문 사립학교에 진학하여 학교를 명예를 높여줄 조건이었다. 나를 포함한 장학반 아이들은 학습으로 꽉꽉 재워져야 했다. 실력보다는 기출문제를 달달 외는 데 바쳤다. 교장은 들들 볶거나 겁을 줬다. 고전 암기가 더듬거리면 매질을 했는데 그건 탁월한 방법이었다. 사실 지금도 나는 체벌 없는 고전 교육이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하는 편이다.

    가난한 것들은 사격이나 목공 같은 특활은 단념해야 했고, 옷이나 소지품 때문에 수치를 맛보아야 했다. 크리켓 배트를 마련하지 못하면 교장은 조롱을 했다. 매주 용돈도 백만장자 자제는 6페니, 대부분 아이는 3페니, 나와 한두 명은 2페니로 차별이 있었다. 생일 케이크도 달랐는데 나는 케이크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사립학교 장학금을 타지 못하는 한 앞날을 누릴 가망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았으므로 열한 살부터 열 세 살까지 시험 때마다 엄청난 중압감과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교장과 사모는 때때로 나를 불러 다른 아이들 부모하곤 형편이 다르다는 걸 말했다. 그러노라면 어느새 눈물이 쏟아질 듯한 불쾌한 느낌이 엄습했다. 사모는 학비를 감면받는 학생인 내게 양식만 축내는 아이를 여기에 둘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부끄러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교장과 사모를 증오했다.

    형편없는 식사를 하는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도 좋은 추억은 여름 날 오후 갔던 소풍, 기숙사 방에서 독서의 즐거움, 애벌레 수집이 있다. 자기 어린 시절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과장과 자기연민을 경계해야 하지만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의 생활은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불결한 시설과 식기, 기름투성이 세면대, 지저분한 변소, 딱딱한 매트리스에서 지내야 했다.

    학생들은 모두 교장의 사모를 미워하고 두려워했지만 모두 더없이 비굴하게 아양을 떨어야 했다. 엄청나게 부유하거나 작위가 있는 소수의 아이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총애를 기대할 수 없었다. 나는 규율을 받아들였으므로 반항아가 아니었다. 빨리 성숙해지는 남미 소년이 있어 동성애 문제가 발생하자 소환과 심문, 자백과 매질과 회개가 있었다. 주모자 아이는 매질을 당한 끝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내 이름이 연루된 사소한 사건은 그 풍파가 가라앉은 뒤였다. 사건 당시 나는 거의 성과는 무관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성교와 아기가 여자의 몸속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알았지만 욕구가 없으니 호기심이 없었다. 교장의 사모는 눈언저리가 까매지며 자위한다는 증거로 삼았으므로 나는 다크서클이 생기면 죄의식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세인트 시프리언스의 여러 규범들은 19세기의 금욕주의 전통과 1914년 이전 시대의 사치 및 속물근성 사이의 모순이었다. 나처럼 야심 있는 중산층이나 시험 합격자는 삭막하고 수고스러운 유형의 성공만 가능했다. 장학금을 받고 사다리를 기어올라봤자 공무원, 아니면 변호사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사다리를 놓치면 일 년에 40파운드 받는 사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철저히 속물로 자라고 있었다. 자동차니 저택이니 하는 것을 자랑 경쟁이 이어지면 계급 차가 선명해졌다. 아이들은 아버지 수입, 런던 어디 사는지? 집에 화장실 개수, 하인 수, 자가용 여부를 궁금해했다. 체력과 남성미 그리고 운동신경도 중요했다. 공차기 보다는 싸움박질인 축구를 못하는 나는 차별을 받는다. 스코틀랜드 혈통이라 주장하는 교장의 사모는 스코틀랜드 출신 아이들을 편애하고 교복 대신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전통적인 체크무늬의 킬트를 입도록 장려했다. 나는 내 실패를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크고 힘이 세고, 잘생긴 아이가 몇 달 동안 나를 못살게 굴었다. 어느 날 탈의실에서 내 손목을 비틀고 아프게 했다. 나는 아주 독하고 고약한 마음을 먹고 녀석이 예상하지 못할 때 한 방 먹이기고 하고 온 체중을 실어 녀석의 얼굴을 힘껏 때렸다. 이후 그가 싸움을 걸었지만 태연한 척 피했더니 문제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때 '규칙을 깨라, 아니면 죽는다'라는 교훈을 깨달았다. 그런 경우에 약자가 자신을 위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 권리를 갖게 된다는 점을 몰랐다. 내가 반골 기질이 강했다면, 그 이유는 내가 더 가난했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런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나의 맹목적인 이기심과 무능력, 그리고 생존본능밖에 없었다.

    성인의 증표인 넥타리를 매고 사립학교에 진학하여 세인트 시프리언스를 떠나게 되었다. 사립학교에 가면 사생활도 더 보장되고, 간섭도 덜 받고, 태만과 방종과 타락을 즐길 기회도 많으리란 걸 알았던 것이다. 작별의 악수를 청하는 교장 사모의 표정에서 그녀는 내게 "네가 우리의 실패작 중 하나란 걸 인정하고 나쁜 감정 없이 헤어지기로 하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기차가 나를 싣고 떠날 때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다음 학기에 나는 이튼 장학금을 탔지만 결원이 날지 확실치 않아 웰링턴에 먼저 가야 했다. 웰링턴에서 사생활과 어른 대접이란 도서관에서 어정거려도 될 터였다. 자유롭던 이튼에서는 학과목 공부를 등한시하고 교지를 만들고 시나 단편소설을 쓰기도 하며 자유롭게 지냈다.

    기숙학교 생활은 회초리와 계급차별과 성적(性的) 금기가 없앤다 해도 공포와 증오, 속물근성과 몰이해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기숙학교는 열등감에 물들거나 불가사의하고 끔찍한 법을 어기는 데 대한 공포감에 휘둘리기 쉽다. 아이가 안식을 얻을 수 없는 기숙학교는 통학학교보다 더 나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젠 세인트 시프리언스도 내 마음을 완전히 떠나버렸다. 그래서 내가 교장과 교장 사모가 죽었으면 하거나 학교가 불타기를 바랄 만큼의 원한도 남아 있지 않다.

    작가와 리바이어던

    작가의 자유주의 정신에 관한 글이다. 그는 문학적 판단은 본능적인 선호를 정당화하기 위한 규칙을 꾸며내는 일이라며 좋다와 싫다 뒤에 따라붙는 것은 합리화일 뿐이니 사기라고 한다. 문학적 기준이 적용되고 있는 척하지만 정치 특히 전체주의는 문학을 침범한다. 진보적, 민주적, 혁명적인 좌파의 시대이지만 정파 정통성에도 허위가 있다. 좌파 이데올리기는 모든 질서를 철저히 경멸하는 이념이다. 특정 압제 즉 자본주의만 전복하면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좌파 이데올로기는 러시아혁명과 파시즘의 발흥으로 타격을 입었다. 파시즘이 대두하자 좌파는 평화주의와 국제주의를 외쳤다. 그런데 좌파 정부는 거의 예외 없이 지지자들을 실망시킨다. 번영 대신에 생활수준이 떨어졌다.

    어떤 정치 이념을 받아들이면 문학적 성실성을 지키지 못한다. 창조적 글쓰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창의성이 왜곡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고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문학은 정치와 거리를 둬야 한다. 작가가 정치에 관여할 때에는 작가가 아닌 일반 시민으로서 관여해야 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정치적인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집단 이데올로기에 굴복하는 건 작가로서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간디에 대한 소견

    간디의 자서전(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를 보며 간디에 대한 생각을 적은 글이다. 영국인들은 간디를 이용하였다고 생각한다. 어떤 위기에서도 폭력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므로 '우리 사람'으로 간주될 수도 있기도 했다. 인도의 백만장자도 그들의 돈을 빼앗아갈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보다는 그가 나았다. 간디는 대단한 담력을 지녔고, 부정직함을 예리하게 간파해낼 줄 알았다.

    댄스 교습을 받고,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고, 에펠탑에 돌라가고 심지어 바이올린을 배우려고 할 게 흥미롭다. 청춘기의 비행을 낱낱이 한 고백, 채식주의, 서구 좌파운동에 동정, 성욕까지 없앤다는 '브라마차리아' 서약, 남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발전시킨 '사티아그라하(비폭력 저항)의 성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오웰은 상대가 관대한 영국이니까 비폭력 저항이 먹혔지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권리가 없는 소련이었으면 달라질 건 없었을 거라고 한다. 간디의목표인 영국의 지배를 평화롭게 종식시키는 건 성취되었다. 그렇지만 노동당 정부였으니 가능했지 보수당 특히 처칠이 수반인 정부였다면 크게 달라졌을 거라고 오웰은 예측한다. 그러면서도 오웰은 "간디가 남긴 향기는 얼마나 맑은가!"로 글을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