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그런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ㅌ

잘 쓰는게 아니라 잘 쓰는 것처럼 보이는 게 중요하단 걸 알았죠

대체 왜 그런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ㅌ

사진 | 김창길 기자

▲ 복선 많이 넣으면 잘 쓴 것처럼 보여…
난 셰익스피어보다 글 많이 써, 그러니 내 드라마가 예술일 순 없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드2세는 ‘형제 살해법’을 칙령으로 공표했다. 아들 중 누구라도 술탄의 왕좌를 물려받으면 즉시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죽여야 하며, 종교 지도자와 법률학자들이 이 절차를 이미 승인하고 허용했다는 말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이방원은 아들 ‘이도’(세종)에게 권력에는 독이 있어 그것을 밖으로 뿜지 못하면 안으로 썩는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긴다. 피 냄새가 가신 적 없는 아비의 자리를 보고 자란 이도는 자신의 유약함을 저주하며 다른 세상을 꿈꾼다. 그렇게 권력의 독을 안으로 품어 ‘문’(한글)으로 치세하려던 이도는 자신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결국 왕이란 사람을 죽이는 자리란 말인가!’라고 통탄하다 “네가 하려는 일이 인간의 길이라 생각하느냐!”라고 되묻던 아비의 말을 끝내 기억해낸다. 왕의 마음이 지옥이어야 겨우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드라마가 그러므로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선덕여왕> <뿌리 깊은 나무>의 작가인 박상연이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로열패밀리>의 원작 제목은 ‘인간 증명’이다. 원작은 주인공이 악마가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천사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도 인간 증명의 예시가 될 수 있음을 드라마를 통해 증언한다. 나는 <선덕여왕>의 주인공이 제목대로 ‘덕만’(선덕여왕)이 되지 못하고 ‘미실’이 된 것은 고현정의 놀라운 연기 때문이 아니라, 박상연이라는 사람이 가진 ‘생에 대한 유별난 감각’ 때문이라고 예감한 바 있다. 그가 ‘착한 사람이란 아직 나쁜 상황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헤어진 애인의 말을 뾰족이 기억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전 희망이나 사랑이 아니라, 공포나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는 것 같아요.” 그제야 머릿속에 <선덕여왕>이나 <뿌리 깊은 나무>와 <고지전> 같은 작품들의 윤곽이 구체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신’이 되어 움직이는 세계에서 이도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덕만의 마지막 말은 ‘잘될 거야!’가 아닌 ‘버티자!’로 끝나야 했다는 것 말이다. 나는 행복을 다행이라 바꿔 부르는 남자들을 몇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말’ 비슷한 것이라도 되게 만들기 위해 쓰는 안간힘도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작가 박상연이 말하려는 건 결국 ‘희망 없음’이 아니라 ‘희망이 없다는 것을 다 알고 나서도 살아내야 하는 삶’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 문학계에서 영화와 드라마계로 따라온 우연의 여신

그러나 이토록 어두운 세계관을 가진 박상연의 인생은 아이러니하게도 평탄해 보인다. 그는 1996년 이문열 선생의 추천으로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주위에 가장 젊은 작가가 김영하였는데, 그마저 박상연보다 나이가 네 살 많다. 그의 처녀작 ‘DMZ’는 1998년 발생한 김훈 중위 사건의 예고편처럼 받아들여졌고, 박찬욱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영화 ‘JSA’가 개봉해 주가를 높이던 2000년 부산에서 그는 <대장금>의 작가 김영현을 만난다.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 있나! 그가 문학계에서 영화계로, 드라마계로 오는 긴 행로는 분명 우연의 여신의 선한 미소에 이끌린 듯했다. 게다가 이 모든 이야기의 화룡점정은 박상연이 <고지전>이나 <공동경비구역 JSA> <화려한 휴가>처럼 인간의 가장 극한 폭력과 광기에 대한 이야기를 적확한 언어로 구사해 낸다는 점이다. 이때, 그가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평생을 독신으로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제인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 같은 끝내주는 연애소설을 쉬지 않고 써냈다는 아이러니를 상기시킬 만하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인데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한 사람은 찰리 채플린이다. 나는 다짜고짜 어쩜 그리 운이 좋으냐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결국 이 질문은 당신의 진짜 삶이 궁금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동아일보에 중편만 써서 응모했는데 계속 낙방했어요. 쓰다 보니 자꾸 양이 늘어나는 게 병이라, 중편이 장편 됐고 그걸 ‘오늘의 작가상’에 응모했고요.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고 연락을 받았는데 최종심에서 떨어졌어요. 제가 전화로 울먹이는 것 같으니까 당시 심사위원이던 이문열 선생이 절 불렀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미 하늘을 한 번 만져봤기 때문에 작가인생 포기 못할 거라고. 어쨌든 등단을 하긴 했어요. 근데 친구들은 ‘민음사’가 무슨 절 이름인 줄 아는 녀석들뿐이었고, 제 학점이 당시 선동열 방어율과 비슷해서 취직이 잘 될 리 없었고요. 때마침 IMF까지 터진 거죠. 공무원 시험 봐도 떨어지고, 택시기사라도 할까 싶었지만 자격증 시험에서 또 떨어졌어요. 공부가 별로였어요. 제가 중대 안성 나왔거든요. 서태지가 은퇴했을 때라, 절필보단 은퇴가 멋져 보여서 글쓰기에서 은퇴했는데 마침 김훈 중위 사건이 터지고 신문사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한 거예요. 하루에 인터뷰를 17개나 한 적도 있어요. 근데 김훈 중위 사건의 디테일이 제 소설과 비슷하다고 경찰서에서 멀리 가지 말라는 경고성 전화가 온 겁니다. 그 얘길 해준 친구에게 피해가 갈까봐 무지 걱정됐었죠. 사실 심재명 대표에게 <하얀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정지영 감독이 ‘DMZ’를 연출할 거란 얘길 듣고 기뻤어요. 근데 뜬금없이 <달은 해가 꾸는 꿈> <삼인조>를 연달아 망한 감독이 제 작품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아! 이건 뭐지? 전 두 영화 다 진짜 재미없었거든요.”

■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간 맞추기

문학상 최종심에서 떨어진 작품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달랑 망한 영화 두 편을 채워 넣었던 감독을 만난 과정은 흥미로웠다. 그래서 나는 그가 드라마 작업을 함께하는 작가 ‘김영현’을 만난 과정이 궁금했다.

“제가 돈 벌고 나서 부산에 콘도를 샀어요. 당시 나우누리 상퀴(상식퀴즈방)에 빠져 있을 때라, 동호회 사람들이 가끔 그곳에 놀러왔어요. 동호회 출신 중에 훗날 <드림하이>의 작가가 되는 분이 아는 언니가 있는데 드라마가 안 풀려 힘들어하니 데리고 가도 되겠냐고 물었는데 그게 김영현 작가였던 거죠.”

퀴즈 ‘풀던’ 백수와 드라마가 너무 ‘안 풀리던’ 작가는 그렇게 만났다. 박상연은 잘나가는 영화 때문에 부산이 내 것 같았고, 김영현은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없는 드라마 때문에 세상이 등 돌린 것 같은 때였다. ‘자매’도 아닌데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는 이들의 비결이 내심 궁금했다. 나로선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한 대본을 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김영현 작가는 약점이 거의 없는 분이세요. 반면에 전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게 분명하고요. 그럼 이건 상연씨가 써야겠네 그렇게 나누는 거죠. 근데 그것도 초반에만 그랬고, 1회를 앞과 뒤로 나눠 쓰거나, 1회와 2회를 번갈아 쓰기도 해요. 좀 쉬운 부분을 맡았으면 좋겠다 막 기도하면서 지금은 그냥 가위바위보를 해요.”

내가 “가위바위보?”라고 되묻자 “가끔 동전도 던지고!”라는 말이 날아왔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간 맞추기예요. 방영이 시작되면 작가가 24시간마다 잠을 잘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고요. 나한테 딱 3시간만 더 주면 대본을 훨씬 좋게 고칠 수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넘겨야 할 때가 있어요. 밤중에 연애편지 쓰고 아침에 보면 얼마나 낯뜨거워요? 텔레비전을 보면서 딱 그 심정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시간을 잘 써야 해요. 20개의 문제를 받았는데, 그 시간 안에 4문제를 완벽하게 풀고 16문제 틀리면 잘못된 거죠. 대부분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분들은 사전제작을 하면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에 대한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그는 배우와 제작진의 실시간 교감을 말했다. 배우의 연기를 보고 강한 피드백으로 캐릭터가 점점 강화되는 걸 보는 게 드라마 작가가 느낄 수 있는 쾌감이란 말도 덧붙였다.

“사전제작에 대한 제 생각은 꼭 시청률 때문만은 아니에요. 전 시청자와 교감하면서 쓰진 않아요. 어떤 캐릭터를 죽이고 살리는 문제는 애초의 주제와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거니까요. 제작진과 배우, 작가의 교감은 굉장한 경험이에요. 제 경우 너무 많이 쓰고 들어가면 그 즐거움을 포기하는 겁니다. 50부작이면 한 10개 정도 쓸까? 대신 시놉시스, 트리트먼트 단계에서 공을 많이 들이는 스타일이에요.”

그가 잠시 담배를 집어 들었다.

“어느 순간, 잘 쓰는 게 아니라 잘 쓰는 것처럼 보이는 게 중요한 거라는 걸 깨달았어요. 어떤 친구가 문제가 있어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주는데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야! 책임지는 게 뭐 중요해, 책임지는 것처럼 보이는 게 중요하지. 그 순간 안 거예요. 조직에서는 누군가 책임을 졌다는 걸로 마무리되는 거고, 그 친구는 책임지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 조직에 살아남는 거죠. 굉장히 미묘한 차이이긴 한데 글 쓰는 것도 그런 측면들이 있어요.”

■ 캐릭터와 스토리가 충돌할 땐 스토리로 간다

잘 쓰는 것처럼 보이는 건 어떤 건지 궁금했다.

“복선을 많이 넣으면 잘 쓴 것처럼 보여요. 제 작품을 예로 들면 민망하지만, 가령 선덕여왕에서 극 초반 덕만이 서역에 있을 때 상인들에게 받은 화주라는 게 나와요. 렌즈 같아서 그걸로 햇볕을 모아서 태울 수 있죠. 그리고 곧 사라져요. 그러다가 38회에서 세필을 보는데 덕만이 이때의 화주로 확대해서 보는 거죠. 복선의 간격이 넓을수록 사람들은 작가가 모든 걸 꿰뚫어 썼다고 생각해요. 정답은 모르겠지만, 방향은 맞지 않나 생각해요. 제가 정말 잘 쓰는 것보다 사람들이 잘 쓴다고 믿는 게 더 중요해요.”

나는 그가 드라마를 쓰기 위해 직접 쓴 체크리스트가 있다는 얘길 떠올렸다.

“영국에서 백만장자가 되는 비법을 알려주겠다면서 1달러를 부치면 비법을 편지로 동봉해 보내겠단 얘기가 있었다더군요. 그래서 누군가 그 편지를 보고 1달러를 부치면 답변이 ‘저처럼 하세요!’였다는 거예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고 누군가 부자가 되었을 거라곤 생각 안 해요. 하지만 그걸 쓴 저자는 분명 부자가 됐죠. 같은 거예요. 작가는 직관에 의해 쓰기 때문에 평소 아카데믹하게 정리하지 않잖아요. 근데 책을 쓰려면 정리해야 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쓰는 실력이 늘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차원에서 저만의 작법책을 썼어요. 주인공은 욕망이 있나? 그의 장애물은 거대한가? 내가 정말 쓰고자 하는 걸 쓰고 있나! 체크리스트가 100개 좀 넘는 것 같네요. 제가 영어과를 나왔는데 혼비의 25형식이라는 게 있어요. 그때, 문장을 25형식으로 통일할 수 있다면 스토리는 왜 못하겠나 싶었던 거죠. 그래서 직접 스토리의 유형을 나누기 시작했고 17형식까지 나와 있는 상태예요. 최근에 <분노의 윤리학>을 보다가 형식이 하나 더 늘어난 거죠.”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의 회사 ‘리치 글로벌’은 2012년 10월 파산했다. 이런 복잡요란한 세상에서 창작은 자주 현실의 음란함과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창작하는 사람들의 절망은 그것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더구나 드라마는 절대 다수가 본다는 매체의 엄청난 폭발력 때문에 작가 스스로 가져야 하는 딜레마도 깊을 것이다.

“드라마의 화제성은 캐릭터에서 나와요. 하지만 시청률은 스토리에서 나옵니다.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대중과 발언하지 않는 대중의 차이예요. SNS 착시효과 같은 건데, 소수의 발언이 너무 커서 침묵하는 다수의 얘길 못 듣고 내가 하는 얘기가 옳다는 신념이 강화되는 거죠. 김 작가님과 제가 정해놓은 원칙이 있어요. 캐릭터와 스토리가 충돌할 땐 스토리로 간다는 것이죠. 스토리로 간다는 건 작가가 하고 싶었던 얘기로 돌아가자는 의미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어요. 1회 시청률이 4%도 안 나오는 상황이 생길 수 있어요.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심정이 되는 거죠. 보통 시청률이 안 나오면 독을 타요. 그걸 이곳에선 ‘독 3종세트’라고 부르는데 울고, 때리고, 욕하는 데 장사 없다는 거죠. 하지만 우린 작품성으로 가자고 원칙을 세웠어요. 제가 시청자를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두려워하죠. 시청률은 오전 6시40분에 나옵니다. 정치인들이 유권자 사랑한다고 떠들던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스코어가 매주 나온다면 정치를 그런 식으로 하진 않을 겁니다.”

시청률은 어쩌면 그에게 직업윤리와 연결되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매번 작품성으로 인정받는 그에게 드라마가 예술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제가 셰익스피어보다 많이 썼어요. 크리에이터로 일한 것까지 치면 양으로만 원고지 2만9000장을 쓴 거죠. 이렇게 많이 쓰는데 그게 예술일 순 없죠. 사극에도 PPL이 있다는 거 모르실 거예요. <뿌리 깊은 나무>를 할 때, ‘뿌리 깊은 샴푸’라는 제품이 PPL로 들어왔어요. 가령 이런 거죠. ‘김 나인, 자네는 어찌 그리 머릿결이 좋소?’ 그럼 그 샴푸의 주성분인 백향이 어쩌고 하는 식으로요.

■ 사람들 소통 많으면서 자기 자신과는 소통 전혀 안 해

김영현과 박상연의 차기작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작품에 대해 물었다.

“<뿌리 깊은 나무> 이전 이야기가 될 거예요.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 시기에 활약했던 풍운아들의 이야기인데 내년 상반기에 방영될 것 같고 제목은 미정입니다. <아이리스>를 쓴 김현준 작가가 친구인데, <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이니까 제목을 ‘파종’이나 ‘묘목’으로 하라고 하더군요. 하하하.”

그는 한참을 웃다가 무척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최근에 40대가 20대 극장 점유율을 앞섰다고 해요. 세계적으로도 그런 일이 없다고 하던데. 전 20대들의 영화 관람률이 떨어지는 건 스펙을 쌓느라 바쁘고, 돈이 없어서는 아닐까 생각했어요. 근데 이유가 극장에선 휴대폰을 켜놓을 수 없기 때문이라더군요. 드라마가 방영되면 어째서 실시간 검색어로 드라마 주인공 패션이나 이름이 뜨겠어요? 문화의 축이 다시 움직이고 있단 생각이 들어요.”

마셜 맥루한 식으로 말하면 이 세대에게 휴대폰은 손가락의 확장, 여섯 번째 손가락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극장이란 공간조차 이들에겐 휴대폰을 못 끄는 희귀한 공간이 된 셈이다. 끝없이 소통하는 이들에게 소통은 어떤 의미일까. 드라마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말하던 박상연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소통’과 ‘자기계발’이라는 게 나로선 흥미로웠다.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너무 소통해서 자기 자신과는 소통을 전혀 안 하는 것 같아요. 전 제가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제 취향이 고급인 줄 착각한 거죠. 근데 로마네공티를 마시나 마주앙을 마시나 거기서 거기인 거예요. 1억원짜리 오디오나 내 방에 있는 280만 원짜리 오디오나 다를 게 없고요. 입맛은 후지고 ‘막귀’였던 겁니다. 하하. 드라마 작가라는 직업이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힘든데 그럼 이 고통의 대가는 어디서 찾아야 하지라고 물으면, 기껏 모범택시 타고 밥값 안 아끼는 정도인 거예요. 한심하죠. 요즘 직업적 사춘기를 겪고 있어요. 시간의 유한성이나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돼요, 왜 70까지만 살고 싶단 사람들이 있잖아요? 근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금은’ 죽고 싶지 않은 거거든요. 우리가 살 수 있는 게 ‘지금’밖에 없는데, 그럼 죽기 싫은 거 아닌가? 예전에 한석규씨랑 얘길 하는데 갑자기 ‘인간은 평온해질 수는 없는 존재인가 봐요’라는 거예요. 그 양반이 나이가 50인데 50이 되어도 마음이 평온해지지 않는 건가 싶었죠. 어릴 때는 그때가 되면 다 안정되고 평온할 줄 알았는데. 얼마 전까지 마지막 꿈은 내 이름으로 된 ‘삼국지’를 쓰는 거란 말을 했어요. 지금은 그것도 만들어진 답 같고 잘 모르겠어요.”

나는 다양한 장르를 통해 많은 것들을 보고, 많은 것들을 겪은 후 결국 ‘모른다’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다다른 사람의 말이 갖는 천근같은 무게를 생각했다. 섣불리 나는 너를 ‘안다’라 말하지 않고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후의 삶과, 그렇기 때문에 쉽게 위로하지도, 절망하지도 않는 삶에 대한 것들까지. 거장들의 작품이 점점 단순해지는 건 어쩌면 ‘나는 안다’란 말이 ‘나는 모른다’로 회귀하며 벌어지는 간격의 진폭은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선 연신 싸이가 ‘알랑가몰라~ 알랑가몰라’를 외쳐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