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과학 혁명이 현대 과학에 어떻게 기여하였는지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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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과학 혁명이 현대 과학에 어떻게 기여하였는지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이래로 계속 분리되어 있던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뉴턴에 의해 통합되면서 완성된 과학혁명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 1543)에서 시작되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은 인간의 지위, 신과 인간의 관계가 달라지는 종교적 사건이기도 하다. 코페르니쿠스는 더 단순한 설명으로 천체(행성)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지상과 달리 천상의 세계는 완전한 등속 원운동이라고 믿었으며 1,400년 전의 프톨레마이오스처럼 수십 개의 주전원을 도입했다. 관성에 대해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시기였기에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면 위로 던진 물체가 왜 뒤로 가지 않는가? 라는 반박에 대응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관측자료가 향상될수록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정지해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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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발달하면서, 우주의 중심은 지구에서 태양으로(17세기 이후), 우리은하로(1920년대 중반 이후)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사실 우주에서 중심이라는 개념은 아예 없으며(1930년대~), 팽창하는 우주의 모든 곳들은 거시적으로 동등하다. 지구는 우주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지 않으며, 어느 곳과도 다르지 않게 평범할 뿐이다. 케플러 위성은 태양계 밖에 있는 행성들을 수천 개 발견했다. 현대 천문학은 태양계와 비슷한 행성계가 여러 성운들에서 생성되는 것도 관측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1510년 필사본 형태로 출간한 ‘짧은 해설서’에서 우주에 대한 7가지의 새로운 상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위키피디아의 ‘코페르니쿠스’ 참조)

  1. 모든 천구들은 공통되는 하나의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지구는 무게가 향하는 중심, 달의 천구의 중심일 뿐이다.
  3. 모든 천구들은 태양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의 중심은 태양의 근처에 있다.
  4.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대천구(항성들의 천구)의 높이와 비교하면 매우 작아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이다.
  5. 대천구의 겉보기 운동은 실제 운동이 아니라, 지구의 운동에 의해 생긴 결과이다. 지구는 고정된 극을 회전축으로 삼아 자전하며,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항성들의 대천구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
  6. 태양의 겉보기 운동은 실제 태양의 운동이 아니다. 지구와 지구의 궤도 껍질의 운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지구는 다른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구는 적어도 두 가지 운동을 하고 있다.
  7. 행성의 역행 운동은 실제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지구의 운동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의 운동만으로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불규칙한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등속원운동을 믿었기에 20년 동안 27개 주전원의 위치, 크기, 속력을 배정하여 관측과 맞추려고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이 사망하는 해인 1543년에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라는 책에서 독자적 이론을 발표하였다[1]. 독자적 이론을 발표하기 33년 전에 이미 훌륭한 가설을 갖고 있었으나, 천상의 완전함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관측자료와 더 뛰어난 수학적 통찰과 역량이 필요했다.

당대는 물론 현대에서도 인정하는 천문관측의 대가 튀코 브라헤는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돌고, 태양은 우주의 중심인 지구를 도는 것으로 당시의 역학적 상식과 종교사회적 믿음을 관측자료와 억지로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제자이며 동료인 당대의 뛰어난 수학자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가 화성과 전투를 벌이며 엄청나게 지루하고 장황한 계산을 한 끝에 마침내 1609년에,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지구를 포함한)행성들의 타원운동이 불필요한 주전원을 모두 지울 수 있었다. 천상의 세계는 천상계의 완벽한 원운동에서 타원운동으로 약간 일그러지게 된 것이다.[2]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와 동시대에 활동한 케플러는 갈릴레오의 관측을 보증하고 지지하였으나, 갈릴레오는 케플러의 천문학 이론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플러는 제 1법칙과 2법칙을 발표한 후에도 여러 행성들에 대해 엄청난 계산을 10년간 한 끝에 제 3법칙을 발견하였으며, 이 우아한 법칙은 뉴턴의 운동법칙과 만유인력의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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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코 브라헤의 천문관측기인 육분의,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을 설명한 이미지, 프라하에 있는 튀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가 함께 있는 동상. 이들은 관측과 이론에서 각자의 역량을 발휘하며, 과학혁명의 중요한 진전을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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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코 브라헤는 관측 결과와 맞추기 위하여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생각했으나, 행성들을 거느린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을 벗어나기 힘들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갈릴레오는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고, 직접 망원경을 제작하여 지구의 누구보다도 먼 곳을 바라보았다. 망원경의 현실적인 쓰임새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많았지만, 갈릴레오는 하늘을 관찰하면서 천상의 세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달의 지형은 매끈하지 않고 지구처럼 산과 골짜기가 있는 것으로 관찰되었고, 목성이 위성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한 것이다. 또한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였으며, 금성의 위상변화도 관찰하며 천상의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객관적 증거와 지동설에 대한 믿음을 단단하게 했다. 또한 갈릴레오는 운동에 대한 실험과 이론을 발달시켰고, 관성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근대과학이 갈릴레오부터 시작되었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갈릴레오는 실험, 관찰과 이론의 수학적 체계라는 과학의 방법론에 충실하였다. 갈릴레오는 현상의 관찰을 중시하며, 현상의 본질적 요소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후 가설을 세우고 가설에 의하여 도출되는 연역적 논증을 하였으며, 이 논증의 결과를 실험, 관측으로 검증하였다. 과학, 자연의 진리를 탐구하는 갈릴레오의 방법은 현대과학에서 행해지는 과정과 마찬가지다. 갈릴레오가 죽은 해에 태어난 뉴턴은 마침내, 천상의 세계를 완벽히 설명할 수 있었고 같은 법칙으로 지상의 세계도 조화롭게 설명할 수 있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에 갈릴레오의 고향 피사를 방문하였을 때, 갈릴레오에게 가해졌던 박해를 교회의 잘못을 시인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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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바라 본 천상계는, 지구가 아닌 목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들도 있었고 금성도 달처럼 위상변화를 하였으며, 태양도 얼룩진 점이 있었다. 천상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바램처럼 그렇게 완벽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측적 증거는, 인간이 천상계로 이성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게 했다.

뉴턴의 역학체계는 그 자체로 뛰어난 인간의 성취였으면서도, 향후에 인간이 가야 할 길을 확실하게 구체화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자연현상을 수학(논리체계)로 기술함으로써, 원래의 현상들뿐만 아니라 다른 현상들까지도 설명할 수 있었다. 자연의 현상과 원리는 수학적 이론을 통해 더 깊이 이해되고 체계화될 수 있었으며, 그 이론은 자연을 통해 검증될 수 있었다. 과학이 자연을 어떻게 탐구해야 하는지, 다른 학문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지점이 어디인지, 미지의 세상을 개척하는 인간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뉴턴은 확실하게 보여줬다. 우주의 중심을 흔든 한 인간에게서 시작한 과학혁명이, 140여년 뒤에 뉴턴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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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학적 태도는 과학의 발달을 건강하고 활력 있고 겸손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자성과 이해, 문명과 사회발달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뉴턴의 과학 방법론과 과학의 속성이 뚜렷이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뉴턴의 체계로 미지의 세계가 드러나며 인간이 거닐 수 있게 되면서, 다른 분야의 과학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계몽사조의 대표적인 사상가였던 볼테르는 가장 활동적인 시기의 15년을 뉴턴의 과학을 공부, 번역, 소개하는데 바쳤으며, 볼테르의 애인 샤를레는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훌륭하게 번역했다. 당시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대거 참여하여 저술한 방대한 ‘백과전서’(1751~1772) 출간은 하나의 사회운동이었고, 상업적으로도 유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뉴턴 과학의 정신은 자연을 넘어 인간과 사회를 보는 관점에 큰 영향을 끼쳤다[4]. 한편으로는 과학지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낭만주의 경향과 반과학적 태도 역시 뉴턴 과학의 사회적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 과학은 점점 더 자신의 가치를 증빙하고 성장하며 인간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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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전서 1권 권두화. 가운데 진리가 모습을 드러내며 — 밝은 빛이 주위를 감싸고 있다. 오른 쪽에는 이성과 철학이 있으며, 진리를 감싼 베일을 찢고 있다.

[1] 코페르니쿠스의 일생과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출판관련 내용은 http://bitly.kr/vnt4 참고

[2] 신플라톤 주의자였던 케플러의 정다면체와 천체에 대한 생각, 튀코와의 관계 등 http://bitly.kr/0fz9 참고

[3] 갈릴레오의 교황청과의 대립 등 http://bitly.kr/XyRP 참고

[4] 계몽주의 http://bitly.kr/AQLG 및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http://bitly.kr/nNf8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