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하고도 성과를 얻지 못하면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된다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의 저자인 신정근 교수의 저서로 ‘오십’의 나이에 가장 걸맞은 고전인 『중용』의 지혜를 전한다. 『중용』의 원문 중 오늘날 흑백논리에 치우쳐 나와 의견이 같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해 버리는 극단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선사하는 60개의 명문장을 제시하여 우리 삶에 적용시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설을 덧붙였다. ‘입문(入門)’에서는 해당 구절에 현대적인 맥락을 소개하고, ‘승당(升堂)’에서는 원문의 독음과 번역을 곁들여서 제시하며, ‘입실(入室)’에서는 원문에 나오는 한자어의 뜻과 원문 맥락을 풀이하고, ‘여언(與言)’에서는 현대 맥락에서 되새겨 볼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중용』은 천명에서 시작하여 지천으로 끝내는 시종일관의 구조를 보여주며, 극단을 보편의 시야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중용은 한 가운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0과 1 사이의 수많은 점 중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떤 순간이든 어떤 상황에서든 어느 한 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 바로 중용이다. 그러니 이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 경험을 해왔다는 50대부터라도 치우치지 않도록 마음과 지혜를 다하여야 한다.

저자의 글 삶의 중심을 잡는 것, 그것이 중용이다

나이는 공짜가 없다. 쉰에 접어들면 몸 곳곳이 돌아가면 아파 병원 출입이 잦아진다. 그래서 쉰이 넘으면 점차로 마음먹기가 어려워진다.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스스로 주저하고 스스로 믿지를 목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자가 50을 무얼할지 못할지 가리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무슨 일이든 나이에 따라 시작하는 방식이 다르다. 10대는 호기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시작한다. 20대는 객기가 넘쳐 자신감으로 시작한다. 30대는 경험이 있어 일을 하다 보면 길이 생기리라는 믿음으로 시작한다. 40대는 지혜가 제법 쌓여 겁이 없으니 나름 결과가 잘 되리라는 확신으로 시작한다. 50대는 몸이 서서히 애를 먹이므로 생각해보고 답을 한다며 일의 시작을 주저하기 시작한다. 60대는 몸의 움직임이 둔해져 남이 하는 일에 훈수를 둘뿐 자신이 직접 뭔가를 하기가 부담스러워 잔소리만 는다. 70대는 건강의 차이가 확연해 무얼 하자는 말도 꺼내기 어렵다. 80대는 갈 날이 가까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므로 뒤로 물러나 지켜보려고만 한다. 90대는 혼자 다니기 어려워 사소한 일도 몇 번씩 확인하고 다짐을 받고 움직인다.

50에 『중용』을 연결 지은 이유는 『중용』이 극단의 시대에 삶의 중심 잡기와 관련되고, ‘중용’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인간의 한계 안에서 내리는 최선의 결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2000년을 넘기며 거시적인 민주화의 성취로 우리 사회는 보편적 가치에 따라 모두가 뭉치기보다 이해와 권리에 따라 헤쳐 모이는 다윈주의의 현상을 보였다. 아울러 다양한 대화 상황보다 진영의 주의 주장을 대변하는 극단의 논리가 대세를 이루었다. 극단의 논리가 성행하면서 진영에 따라 선악을 달리하는 추종과 혐오의 언어가 판을 치게 되었다.

극단의 논리와 혐오의 언어는 ‘중용’이 등장하게 된 시대적 배경이었다. 전국 시대에 이르러 반대파를 향해 죽음으로 보복을 실천하는 자객이 용자(勇者)로 추앙되고 사소한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어 진위를 뒤바꾸는 궤변이 달변으로 환호를 받았다. 이러한 극단의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며 내면에서 솟는 진실을 그대로 말하는 보편적 가치는 존중을 받을 수 없었다. ‘중용’은 이렇게 진영의 논리가 득세한 극단(極端)과 극혐(極嫌)과 극호(極好)의 시대에 삶의 중심을 잡고자 제시되었다.

따라서 중용은 인간의 진실에 따라 모든 것을 걸고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도전의 길이다. 중용은 0과 1 사이의 수많은 지점을 하나씩 검토한 후 최선이라면 익숙한 길로 갈 수도 있고 낯선 길로 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중용은 사람이 기우뚱하다가도 중심을 잡게 하는 삶의 무게추다.

1강 극단 | 치우친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중용』이 쓰인 시대적 배경을 ‘극단’에 주목하여 살펴본다. 고대는 복잡한 현대와 다르게 단순한 삶이었기에 중용도 심신 수양과 절제를 강조했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중용』은 서주 시대의 안정기 뒤에 나타난 춘추 전국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듯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군상과 그들이 보이는 특성을 예리하게 잡아내고 있다. 이러한 군상이 벌이는 뜨거운 세상을 “해괴한 주장을 늘어놓고 괴상한 짓을 벌이는” “소은행괴(素隱行怪)”라고 하였다. 그렇게 사람은 스스로 타인을 공격하고 해칠 수 있는 무기가 되어갔다. 『중용』에서는 ‘소은행괴’의 세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사람이 서로 자신만이 옳다고 제 목소리를 높이며 살 것인지 아니면 뭐가 옳고 그른지 구별하고 살 것인지 따져봐야 했다. 시대가 극단으로 흐르는 징표를 보이는 것을 손 놓고 그저 바라볼 수 없어, 사람들이 더 괴상해지고 괴팍해지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런 방향으로 질주하는 세상의 속도를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지 길을 찾고자 했다. 중용은 광기에 사로잡혀 도로를 마구 휘 젓는 무기화된 사람을 멈추는 제동 장치였다.

01 괴벽 | 해괴한 주장을 하고 괴상한 짓을 벌이다: 소은행괴(素隱行怪)-11장

입문: 하나같이 다들 번듯해 보이지만 세상에는 참 별의별 사람이 많다. 그런데 언론에 보도되는 사건 사고를 보면 별의별 사람이 더 많다.

승당: 공자가 말하길,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주장을 찾아내고 납득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길을 버젓이 실행하여 그것으로 후세에 칭찬받고 기리는 대상이 된다고 한다. 나는 이런 짓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子曰 : 素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

자왈 : 소은행괴, 후세유술언, 오불위지의.

여언: 사람들이 도(道)에서 멀어지고 극단적인 일로 나아가는 사회 현상을 다루고 있다. 이런 사회 현상 속에 상식을 넘어서고 평범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등장했다. 사람은 늘 같은 것에 지치면 색다른 것에 눈이 가고 괴상한 것에 솔깃해진다. 하지만 색다른 것은 관심은 끌지만 오래 붙잡아두지는 못한다. 결국 쉽게 찾을 수 있고 늘 겪는 평범한 것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중용』은 극단이 판을 치는 ‘소은행괴’의 세상에서 주위에 널려 있고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는 평범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다. 쉰의 나이도 특별하고 화려함보다 공기처럼 편안하고 일상처럼 부담 없는 보통에 다시 눈이 가는 때다. 보통이 결국 오래 가기 때문이다. 『중용』과 쉰의 나이는 평범함에 잘 어울린다.

02 무모 | 싸우다 죽더라도 꺼리지 않다: 사이불염(死而不厭)-10장

입문: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전쟁이 무서운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는 지도자라면 국민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도록 막고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전국 시대에는 전쟁이 한 나라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사회의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평민 중에도 군공을 세워 벼락출세하여 신분 상승을 꾀할 새로운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전쟁이 장기화되고 일상화되자 ‘죽음’에 대한 사고도 바뀌었다. “사(士)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하였으나 후대의 『효경』에는 “몸과 머리카락 그리고 피부는 모두 부모에게 받았으니 다치거나 못쓰게 해서는 안 되는데, 이게 효도의 시작이다”라고 한다.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중용』에서는 예양이 대변하는 ‘소은행괴’의 세상을 평범한 일상으로 바꾸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승당: 일정하지 않는 숙영지에서 병기와 갑옷을 깔고 자며 싸우다 죽더라도 걱정하지 않는 것이 북쪽 지역에서 말하는 강자다. 강자라면 마땅히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衽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而强者居之.

임금혁, 사이불염, 북방지강야, 이강자거지.

여언: 우리도 과거에는 단정함과 우아함을 강조하다가 근래에 외모를 강조하면서 이 시대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공자에 의하면 북방의 강자는 복수를 앞세우고 남방의 강자는 포용을 앞세운다고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강자는 반드시 도(道)와 연관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강자가 도를 지키지 않으면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용맹하지만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혼란해진다”는 『논어』 「태백」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우리는 북방 강장의 ‘사이불염’을 공자가 긍정하는 강자의 ‘지사불변’과 비교해볼 만하다. 둘 다 죽음 앞에 당당하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북방의 강자는 복수심과 공명심에 마음의 뿌리를 내리고 죽음의 위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반면 공자의 관계는 도에 바탕을 두고 죽음에 이르러도 삶의 향배를 바꾸지 않는다. 이처럼 같은 듯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사람이 전국 시대의 공간에 속속 나타나고 있었다.

사람은 끊임없이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기 쉽다. 강한 의지가 식어버린 욕망을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이때 북방의 강자는 전통이나 가치가 아니라 공명과 복수의 의지에 힘입어 포기할 줄 모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이 전국 시대에 나타난 괴물이다.

03 무지 | 뭘 먹어도 맛을 아는 이가 드물다: 선능지미(鮮能知味)-04장

입문: 사람의 활동은 먹는 것과 관련이 많다. 먹는 문제가 중요한데, 정작 우리는 살면서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한 적보다 짧은 시간에 허겁지겁 먹고 끼니를 때우는 식사를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음식을 제대로 먹는 것이 아니라 쑤셔 넣는다고 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 맛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주린 배를 채울 뿐이다.

승당: 공자가 말했다. 도가 현실에서 실행되지 않고 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지혜로운 자들은 도에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들은 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 세상에서 밝게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현명한 자들은 도에 지나치고 못난 자들은 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음식을 먹고 마시지만 그 맛을 제대로 가리는 이가 적다.

子曰 : 道之不行也, 我知之矣知者過之, 愚者不及也,

자왈 : 도지불행야, 아지지의지자과지, 우자불급야,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도지불명야, 아지지의, 현자과지, 볼초자불급야.

人莫不飲食也, 鮮能知味也.

인막불음식야, 선능지미야.

여언: 원래 이 구절은 해야 할 도리에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현상을 음식을 먹고도 그 맛을 모르는 상황에 견주고 있다. 아프거나 정신이 팔린 경우에는 음식을 먹고 마시지만 맛을 모르고 정량에 모자라게 먹는다. 그런데 굶주린 경우에는 음식을 먹고 마시지만 맛을 모르고 정량보다 훨씬 많이 먹는다. 결국 두 경우 모두 음식을 마시고 먹지만 맛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공자는 마시고 먹는 음식과 맛을 제대로 즐기는 음미의 관계를 도와 그 도를 실행 또는 존중하는 관계에 연결시키고 있다. 공자는 지자(知者)와 우자(愚者) 그리고 현자(賢者)와 불초자(不肖者)는 모두 행도(行道)와 명도(明道)에서 적도(適道)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바로 사람이 음식을 너무 적게 먹거나 많이 먹어서 맛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아파서 밥맛이 없으니 적게 먹고, 굶주려서 배가 고프니 많이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자와 우자 그리고 현자와 불초자는 각자 자신의 처지에 빠져 있으니 그것만을 타당하다고 믿는다. 지자는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행도에서 적도를 넘어서고, 현자는 자신이 다 할 줄 안다고 생각하여 명도에서 적도를 넘어선다. 결국 맛을 모르는 것이다.

04 요행 | 위험을 무릅쓰면서 행운을 바라다: 행험요행(行險徼幸) - 14장

입문: 확률이 낮은데도 고배당을 기대하는 것은 윌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위험률이 높지만 요행에 기재하는 심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용』에서는 착실하게 조금씩 벌어 아껴 쓰는 삶을 가볍게 여기고 위험이 높은 일에 행운을 기대하는 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승당: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지금의 자리를 본래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것의 바깥을 자기 것으로 바라지 않는다. 부귀한 처지에 놓이면 그대로 처신하고, 빈천한 상황에 놓이면 그대로 살고, 외국에서 살게 되면 그대로 살고, 환란의 상황에 놓이면 그것에 맞춰 살아간다.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어디를 가더라도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상황이 없다. …… 그러므로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편안한 자기 자리에 머물러서 일이 되어가는 형편을 느긋하게 살펴본다. 이기적인 소인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행운을 바란다.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 行乎富貴.

군자소기위이행, 불원호기외, 소부귀, 행호부귀.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소빈천, 행호빈천, 소이적, 행호이적.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

소환난, 행호환난. 군자무입이부자득언.

……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险徽幸.

…… 고군자거이이사명, 소인행험요행.

여언: 원래 이 구절은 ‘내’가 처한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어떻게 할까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한시도 바라지 않는 자리에 있으면 불편하고 자존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내’가 주체로서 나의 인생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라는 사고다. 어떤 직장이든 다녀보고 취업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직장에서 자신의 만족도를 중시할 경우 어려운 취업 관문을 뚫고 입사에 성공하더라도 자신이 그 회사에 얼마나 오래 다닐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삶의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고 위험률이 높아진다.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군자라면 먼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밖의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놓이는 상황마다 충실하게 살다보면 거기서 배울 것은 배우면서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주위 사람을 이해하며 삶의 근육을 키울 수 있다. 이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 압도되어 어찌할 줄 모르며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을 조금씩 가꾸면 인생을 살찌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행험요행’과 구별되는 ‘거이사명(居易俟命)’의 삶이라 할 수 있다.

05 자만 | 어리석으면서 무조건 제 고집을 피우다: 우호자용(愚好自用) - 28장

입문: 외국에 처음 나갈 때, 다 같은 사람이니 상식이 통하는 데가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면 상식을 신뢰하게 되어, 관계를 터가기에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남이 나를 속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 괜히 사람을 의심하게 되어, 관계를 넓히기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만 생각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만 하게 되니 외국에 있어 사는 곳은 넓어졌지만 생각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은 셈이 된다. 오히려 자기 식으로 생각하여 스스로 더 단단해졌을지언정 시야는 더 좁아진다.

승당: 공자가 말했다. 어리석으면서 자기 방식대로 하기를 좋아하고 보잘것 없으면서도 자기 고집대로 끌고가기를 좋아하고, 현재의 시공간을 살면서 과거의 규율을 회복시키려고 한다. 이 같은 자는 재앙이 자신에게 미치리라.

子曰 : 好自用, 賤而好自專, 生乎今之世, 反古之道, 如此者, 災及其身者也.

자왈 : 호자용, 천이호자전, 생호금지세, 반고지도, 여차자, 재급기신자야.

여언: 원래 이 구절은 공자가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라는 문제 상황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정약용은 공자처럼 위태로운 나라에서 벼슬하고 어지러운 조정에 있으면서 자신의 이상만을 추진하려고 하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근대의 캉유웨이는 옛날과 지금은 시대가 다르므로 오늘날 세상에서는 오늘의 이치를 운영해야지 과거의 제도를 답습하면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재앙이 생긴다고 경고한다. 누구라도 일을 하다 보면 혼자 할 수 없기에 주위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이 때 내가 무엇을 하려고 제안할 때 주위 사람이 두 손을 들고 반기는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무슨 제안을 해도 곧이곧대로 듣기보다 왜곡하고 오해하기 쉬울 뿐 아니라 심지어 정반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처하는 유형에는 진실형과 독불장군형 두 가지가 있다. ‘우호자용’은 바로 독불장군 유형의 리더십을 말한다. 자신만이 타당 하고 옳다고 생각하면 결국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 자신이 거둔 성공에 도취되어 그 사이에 흐른 시간이라는 변수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리더라면 어떤 상황에서 주위의 도움과 오랜 검토를 거치고서 ‘자용’과 ‘자전’이라는 외로운 결단을 해야 한다. 『중용』은 자연과 자전을 하지 말라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있으면서 ‘자용’하고,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작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자전’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주위와 소통하며 ‘우’를 벗어나고 전체를 조망하여 ‘천’을 벗어나고서 ‘자용’과 ‘자전’하지 않는다면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할 뿐이다.

2강 발각 | 모든 것은 결국 알려진다

2강에서는 사람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모르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듯해도 결국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 스스로 금기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제어 장치가 된다. 그런데 유일신 문화권과 불교 문화권과는 다르게 유학에서는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믄 않지만 사람이 하는 일을 관찰하여 사후에 심판하는 신이 없다. 『중용』에서는 사람이 하는 언행은 완전히 숨길 수도 없고 언젠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자신은 알고 있으며, 내가 안다는 것은 세상에 알려져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혼자 있을 때조차 세상이 다 보고 있다고 제안한다.

06 합체 |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다: 불가유리(不可臾離) - 01장

입문: 좋은 것은 가까이 두고자 하고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 소중한 것이 나에게서 멀어지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암담해질 것이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수 있다. 『중용』에서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은 도(道)이다.

승당: 도(道: 도리)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다. 떨어질 수 있다면 도리가 아니다. 이렇기 때문에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조심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것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

道也者, 不可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도야자, 불가유리야. 가리, 비도야. 시고군자, 계신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

여언: 도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을 가리킨다. 여기에 나오는 도는 걸어 다니는 길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꼭 지켜야 할 가치’ ‘사람이 실현해야 할 이상’ 등을 가리킨다. 『중용』은 사람의 삶이 인의예지의 도와 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하는 언행을 누가 보지 않거나 자신이 내는 소리를 누가 듣지 않는다면 인의예지의 도와 어긋나게 행동할 수 있다. 『중용』은 사람이 자신의 언행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면 도를 벗어나 잘못을 할 일탈의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07 조신 | 혼자 있는 상황에서 삼가다: 신독(愼獨) - 01장

입문: 동아시아 문화에는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역할이 한정적이다 보니 윤리에서 사각지대가 생겨날 수 있다. 따라서 유학에서는 사람이 혼자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풀어야만 한다.

승당: 숨은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약한 것보다 더 두드러진 것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주도적인 사람은 혼자 있는 상황에서 삼간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也.

막현호은, 막현호미, 고군자야.

여언: 유학에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상황을 윤리적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만약 나만이 아는, 결코 알려줄 수 없는 곳에 혼자 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무엇을 해도 좋은 자유의 공간을 가지게 된다. 이 자유의 공간이 자신을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지만 파괴적이고 퇴폐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중용』을 비롯한 유학에서는 두 방향 중 퇴폐적인 길로 나아갈 경향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중용』에서는 숨은 것과 미약한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접근하기 어려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은 누구보다 더 명확하게 보고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 혼자만이 아는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숨어 있고 두드러지지 않지만 나 스스로 모를 수는 없으며, 또 내가 한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공적 공간에서 주의하는 만큼이나 사적 공간에서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사적 공간에서 더더욱 주의하게 된다.

08 누적 | 그만두지 않으면 오래간다: 불식즉구 - 26장

입문: 전국 시대에 이르러 나타난 연쇄법은 사태의 연관성을 복합적으로 사유하는 단계에서 나올 수 있는 표현법이다. 이 표현법의 시작은 ‘멈추지 않는다’인데, 멈추면 하는 일이 끝나서 더는 진행되지 않아 나의 기억에도 잘 남지 않으며 다른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게 된다. 반면 멈추지 않으면 한번 시작한 일이 자연히 오래 지속하게 되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경향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승당: 완전한 진실은 멈추는 적이 없다. 멈추지 않으면 오래가고, 오래가면 효험이 나타나고, 효험이 나타나면 아득하게 오래가고(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고),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면 넓고 두터워지고(공간적으로 무한히 쌓이고), 공간적으로 무한히 쌓이면 고상하고 지혜로워진다(생명과 지혜의 빛이 찬란하게 밝아진다).

至誠無息,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悠遠, 悠遠則博厚, 博厚則高明.

지성무식, 불식즉구, 구즉징, 징즉유원, 유원즉박후, 박후즉고명.

여언: 무슨 일을 되풀이해서 하면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뚜렷하게 남게 되어, 내가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전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중용』에서는 범행이라는 부정적인 맥락이 아니라 고명이라는 긍정적인 맥락에서 사용한다. 입문에서 출발점이라고 말한 ‘불식즉구’가 일어나려면 사전에 필요한 단계가 있으니, 바로 ‘지성무식’의 단계다. ‘멈추지 않으면 오래간다’고 했지만 실제로 멈추지 않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진실이 마음 바탕에 깔려 있을 때 심신이 멈추지 않게 된다. 지성은 나를 멈추지 못하게 하는 무한 동력인 것이다.

09 선지 | 완전한 진실은 신묘하게 들어맞는다: 지성여신(至誠如神) - 24장

입문: 사람은 늘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에서 선택을 한다. 해 보고 나서 좋은 결과가 생기는 것을 선택한다면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용』에서는 느슨해지려는 사람을 다시 긴장하게 한다. 세상에 모르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일을 할 때 그 결과가 드러나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그 전에 결과가 어슴푸레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중용』에서 말하는 전지(前知)와 선지(先知)의 논리다. 미리 앞서 결과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지(前知)와 선지(先知)는 전지(全知)가 아니다.

승당: 완전한 진실의 도리는 미리 알 수 있다. 국가가 앞으로 융성해지려면 반드시 여러 가지 좋은 징조가 생겨나고, 반대로 국가가 앞으로 망하려고 하면 반드시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가 생겨난다. 이런 현상은 미래를 알려주는 시초점과 거북점에 나타나고 팔다리를 놀리는 움직임으로 드러난다.

불행과 행운이 앞으로 닥칠 경우 좋은 현상을 반드시 먼저 알게 될 뿐 아니라 좋지 않은 현상도 먼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완전한 진실은 초자연적 존재처럼 신묘하기 그지없다.

至誠之道, 可以前知.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孽.

지성지도, 가이전지. 국가장흥, 필유정상, 국가장망, 필유요얼.

見乎著龜, 動乎四體, 禍福將至. 善必先知之. 不善, 必先知之. 故至誠如神.

현호시귀, 동호사체, 화복장지. 선필선지지. 불선, 필선지지. 고지성여신.

여언: 무슨 일을 하고서 결과를 알 수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면서 대비를 할 수 있다. 정상과 요얼이 사람의 언행으로 나타나고 최종적으로 흥과 망으로 귀결된다고 하지만, 원인과 결과를 엄밀하게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지성여신’이 중요해진다. 여기서의 신은 일어날 일을 필연으로 안배하는 것이 아니라, 감응으로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킨다. 사람이 일을 할 때 완전하게 진실하면 시작과 끝이 신묘하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10 결합 | 사물의 몸을 이루므로 세계에서 빠뜨릴 수 없다: 체물불유 - 16장

입문: 『중용』을 미롯한 유학에서는 신적 존재를 배제하지 않지만 오로지 신에 의지하여 인간이 자신을 수양하고 세상에 이상을 실현하지 않는다.

승당: 공자가 말했다. 귀신의 덕(힘)은 너무나도 왕성하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귀신, 예컨대 조상신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소리를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지만, 사물의 몸을 이루므로 세계에서 빠뜨릴 수 없다.

子曰 : 鬼神之為德, 其盛矣乎! 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

자왈 : 귀신지위덕, 기성의호! 시지이불견, 청지이불문, 체물이불가유.

여언: 정약용은 신적 존재가 배제되고 나면 윤리 규범이 규범으로 기능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지 않지만 함부로 굴지 말고 두려워해야 하며 혼자 있는 상황을 경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가 주희의 풀이보다 더 일리가 있다. 아울러 『중용』에서 말하는 효도는 산 사람 간의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관계까지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체물’도 사람이 죽어 세상에 남기는 자취는 살아 있는 후손과 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는 것이다.

3강 곤란 | 중용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

3강에서는 중용대로 살기가 바람직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점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 중용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삶을 중용의 궤도에 얹을 수 있는 실마리는 자신에게 조금도 거짓이 없는 진실에 달려 있다. 우리가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으면 하던 일도 중도에 그만두기 쉽다. 하지만 진실하다면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끝까지 갈 수 있다. 우리는 진실을 뜻하는 성(誠)을 통해 전환의 계기를 찾아 그 방향으로 한 걸음씩 걸어나간다.

11 포기 | 서민이 중용대로 살지 않은 지 참 오래되었네: 민선능구(民鮮能久) - 03장

입문: ‘중용’을 포함한 유학의 가치와 덕목은 성인과 사대부를 넘어 일반 서민에게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만의 리그’에 갇히게 된다. 따라서 ‘민선능구’ 현상은 유학의 나라를 만들고자 할 때 엄청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승당: 공자가 말했다. 중용의 가치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서민이 그 가치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子曰 : 中庸, 其至矣乎, 民鮮能久矣!

자왈 : 중용, 기지의호, 민선능구의!

여언: 서민이 국가를 등지지 않을 경우 타락하고 부패한 지도자와 지배 집단이 교체되면 금방 부패와 타락 이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일반 서민이 세상을 지키는 상식과 덕목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벼락출세를 가능하게 하는 극단의 삶을 동경한 일반 서민은 더 위험하지만 더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몰려들어, 사태를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라고 주문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게 된다.

12 지속 | 한 달도 충실하게 중용을 지킬 수 없다: 불능월수(不能月守) - 07장

입문: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웃음이 나오고 생활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다. 그런데 공자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중용’을 한 달을 지키지도 못했다고 한다.

승당: 공자가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나(공자)더러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만일 누가 나를 음모와 함정 속에 빠뜨리려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피해야 하는 줄 모른다. 사람들이 모두 나더러 지혜롭다고 하지만 나는 실제로 중용의 삶을 선택하더라도 한 달 동안 충실하게 지키지 못한다.

子曰 : 人皆曰予知, 驅而納諸署獲陷阱之中, 而莫之知避也.

자왈 : 인개왈여지, 구이납제고화함정지중, 이막지지피야.

人皆曰予知, 擇乎中庸, 而不能月守也.

인개왈여지, 택호중용, 이불능월수야.

여언: 동시대 사람들은 공자더러 지혜롭다고 말했다. 이때 당시 사람들이 ‘지혜로움’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공자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첫째의 ‘지혜로움’은 그 뒤에 나오는 음모와 함정에 빠뜨린다는 말과 관련이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지혜로움’은 술수와 속임수를 간파하는 측면을 가리킨다. 둘째의 ‘지혜로움’은 중용대로 살아가는 삶과 관련된다. 중용의 복잡성은 지혜롭다고 해서 자연히 해결되지 않는다.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복잡한 사태의 여러 국면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 중용대로 살기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문제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끊임없이 재현되는 특징이 있다. 이것이 바로 반복된 행위로 특정한 성향을 만들어내는 덕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덕목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불가역적 수준에 오르지 않는 한 잘하고 못하고를 결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공자는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한 달을 지속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술회하고 있다,

13 위험 | 서슬 푸른 칼날을 밟는 것이 더 쉽다: 백인가도 - 09장

입문: 『중용』에 담고 있는 사회를 보면, 당대 사람들은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보다 위험하지만 팔자를 뜯어고칠 수 있고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극단의 삶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평범한 삶은 단조로워 지루하고 반복되어 매력이 없어 보였다. 반면 극단의 삶은 위험스럽지만 전율이 느껴지고 성공하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어 달콤하게 보였다. 그런데 『중용』은 위험하지만 팔자를 고칠 수 있는 극단의 삶보다 더 어려운 삶이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승당: 공자가 말했다. 천하(온 세상)와 나라 그리고 가문을 고루 공평하게 할 수 있고, 작위와 급여를 겸손하여 받지 않을 수 있고, 서슬 푸른 칼날의 위험에도 뛰어들 수 있지만, 중용의 삶은 완전히 실행할 수 없다.

子曰 :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

자왈 :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인가도야, 중용불가능야.

여언: 『중용』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로 먼저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천하(온 세상)와 나라 그리고 가문을 고루 공평하게 다스리는 일이다. 둘째, 작위와 급여를 겸손하여 받지 않는 일이다. 셋째, 서슬 푸른 칼날의 위험에도 뛰어드는 일이다. 중용대로 살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알아야 하고 또 그렇게 안 것을 제대로 실천해야 한다. 중용대로 살기의 어려움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평생에 걸쳐 반복적으로 풀어야 하는 숙제가 된다.

14 중단 | 중간쯤에 이르러 주저앉다: 반도이폐(半塗而廢) - 11장

입문: 우리는 한번 시작했으면 끝장을 내야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중에 그만두면 뭔가 문제가 있고 찜찜하다고 여긴다. 사회에 이런 ‘완주 콤플렉스’가 강하면 하던 일을 중간에 그만두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유명해진 사람들 중에는 학교를 중도에 그만둔 사람도 있다.

승당: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다가 중간쯤에 이르러 주저앉을 수 있지만 나 공자는 그런 삶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

君子遵道而行, 半塗而廢, 吾弗能已矣.

군자준도이행, 반도이폐, 오불능이의.

여언: ‘중도이폐’는 문제라기보다 각자 최선을 다 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군자가 나아갈 만큼 나아가서 고꾸라진다면 문제가 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걸음씩 내딛으며 나아간 그간의 노력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만둘 수 없고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오불능이’의 정신이다. 이것이 『역경』에 나오는 ‘자강불식(自强不息)’, 즉 약한 자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하는 태도와도 통한다. 이러한 태도는 어찌 보면 인간이 태어나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겠다는 운명을 느끼면서 시작된다.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간, 뒤로 돌아갈 수도 한자리에 멈출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운명은 사람에게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이겨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주도적인 삶을 사는 군자가 주위 사람을 이끌어가는 영웅적 인간, 즉 성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인은 앞서 말한 완주를 통해 완성에 이르는 콤플렉스와 맞닿게 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불리한 여건에서 꺾이지 않는 불요불굴의 기상을 갖게 된다. 일을 바탕으로 시작과 끝이 없는 ‘유시유종(有始有終)’과 시작이 있고 끝이 없는 ‘유시무종(有始無終)’이 끊임없이 길항하며 ‘시종일관(始終一貫)’과 ‘유종지미(有終之美)’를 이룬다.

15 삼재 | 사람이 천지와 나란히 서다: 여천지삼(與天地參) - 22장

입문: 솥의 다리가 세 개인 삼족정(三足鼎)은 다리가 둘이면 넘어지고 넷이면 너무 많아 가장 적절한 셋으로 한 것 같다. 또한 셋은 원시 부족이 완전수로 생각한 숫자라고 한다.

승당: 천하의 완전한 진실만이 개체의 본성에 제대로 충실할 수 있고, 개체의 본성에 제대로 충실하면 사람의 보편적 본성에 제대로 충실할 수 있고, 사람의 보편적 본성에 제대로 충실할 수 있으면 타자의 본성을 제대로 충실하도록 할 수 있고, 타자의 본성을 제대로 충실하도록 할 수 있으면 천지의 생성 작업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생성 작업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생명 활성화에 동참할 수 있다.

惟天下至誠, 為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 능진기성, 즉능진인지성.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능진인지성, 즉능진물지성. 능진물지성, 즉가이찬천지지화육.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가이찬천지지화육, 즉가이여천지삼의.

여언: 이 구절은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서 시작해 세계로 관심을 넓혀가는지 설명하고 있다. 유학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위상을 자각하여 타자와 소통하기에 따라 천지의 운행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제일 먼저 ‘지성(至誠)’에서 출발한다. 천지는 특정한 목적과 의도에 따라 운행하지 않으므로, 진실할 뿐이다. 진실하기에 세상의 모든 존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도울 수 있다. 지성에서 출발하면 사람은 자신이 가진 본성을 남김없이 다 드러낼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의 본성을 다 드러내면 사람 일반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이 사람 일반을 만난다고 끝이 아니다. 다시 사물을 포함하여 타자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사물로 관심을 넓혀가면 나와 관련이 없는 남이 없어진다. 나는 현실에서 여전히 구체적 인물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이제 나는 남을 품을 수 있기에 몸과 욕망을 경계로 타자와 경계를 긋고 성을 쌓아 바깥과 단절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 일반으로 하늘과 땅이 하듯이 세계에 관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천지와 세 축이 되는 길이고 천지와 더불어 합작하는 길이다. 이것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떠받치는 삼재(三才)다.

4강 단순 | 사실 쉬운데 어렵다고 생각할 뿐이다

4강에서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결국 한걸음 한 걸음이 쌓여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덕목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4강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1강과 확연히 구별된다. 1강에서는 삶에서 극단의 선택을 앞세우는 세태를 말하고 있는 반면, 4강에서는 평범한 일상을 높이 사고 있다. 또는 1강에서는 한꺼번에 서너 걸음씩 뛰어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날아가려는 대박의 날개를 그린다면, 4강에서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처럼 엉금엉금 기어가는 시간을 말하고 있다. 3강에서는 중용대로 살기 어려움을 말했지만 4강에서는 중용대로 살기가 바로 우리의 일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용대로 살기는 부자, 군신, 부부, 형제, 친구의 인륜 중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아내와 남편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이어진다. 이것은 중용이 추상적인 원칙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관계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사람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면 하는 일도 어그러진다. 하는 일이 어그러지면 그와 연관된 일들도 하나씩 허물어진다. 『중용』에서는 도끼 자루를 만드는 과정에 비유하여, 중용대로 살아가는 도리가 결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용대로 살기란 가까이 있는 사람과 관계를 잘 맺어가는 삶이다. 따라서 중용대로 사는 삶은 추상적이고 고원한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인륜에 바탕을 두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나와 가족, 나와 주위 사람이 함께 보조를 맞추게 된다. 이를 위해 일에 닥치고서 허둥지둥할 것이 아니라 일이 닥치기 전에 주도면밀하게 앞날을 대비하면 일상과 인륜의 관계가 더욱 중용에 가까워질 것이다.

16 부부 | 도의 실마리를 부부 관계에서 찾다: 조단호부부(造端乎夫婦) - 12장

입문: 교육이 일반화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제 웬만한 지식은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 선지자와 일반 사람의 거리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시경』과 『서경』을 보면 성인이 범인(凡人)을 계몽해서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구상을 보이고 있다. 이때 성인과 범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었다. 『논어』를 거쳐 『맹자』에 이르면 성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면 이를 수 있는 도덕적 경지로 이 되기 시작했다. 이후의 유학은 ‘범인이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이 때문에 유학은 달리 성학(聖學)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로써 성인은 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배우고 수양해서 이를 수 있는 삶의 경지가 되었다. 『중용』에는 이러한 친근한 성인의 모습이 보인다.

승당: 아는 게 없는 시골 부부라도 빼놓지 않고 일상적인 도리를 알 수 있지만, 최고의 도리에 이르러서는 성인이라도 모르는 지평이 있다. 변변찮은 시골 부부라도 일상적인 도리를 실천할 수 있지만, 최고의 도리에 이르러서는 성인이라도 완전하게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 자기주도적인 군자가 가야 할 도리는 부부 사이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고 최고의 도리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대지에 밝게 드러나고 있다.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부부지우, 가이여지언. 급기지야, 수성인역유소부지언.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能焉.

부부지불초, 가이능행언. 급기지야, 수성인역유소불능언.

……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 군자지도, 조단호부부. 급기지야, 찰호천지.

여언: 부부는 원래 결혼한 성인(成人) 남녀를 불문 사회적 가치지만 성인(聖人)은 북쪽으로 완전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 걸레가 다르다 따라서 부부와 성인의 조합이 어색할 수밖에 없다. 중형에서 어울리지 않는 부부와 성인을 연결시키고 있는 이유는 성인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완전해지려고 한 걸음 씩 나아가는 존재라는 점과, 유학에서 말하는 군자의 도가 얼마나 쉽고 친근한지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군자의 도 또는 유학의 도리는 일상과 인륜에서 시작된다. 아내와 남편으로 이루어진 부부는 당당히 인륜 주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부부에서 부자 관계가 생겨난다. 아울러 세상이 작용하는 방식을 음과 양으로 나눌 때 부부는 음양을 대표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부부 또는 부부 사이가 군자가 실현할 도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처음이 된다는 것은 부부와 도 사이의 거리가 현격하게 떨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아가면 부부와 성인도 함께 있기에 어색한 조합이 아니라 얼마든지 잘 어울릴 수 있는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17 근처 |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도불원인(道不遠人) - 13장

입문: 일을 하다 보면 잘 풀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일이 잘 풀리면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척척 진행시킨다. 반면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다른 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지금의 일을 해결할 수 없으니 도움받을 곳을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의 방향이나 목표라면 사정이 다르다. 방향은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고, 목표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다. 내가 가고자 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가 정해야 한다. 내가 어디로 가고자 하고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스스로 분명하게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방향과 목표를 찾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당장 찾지 못해서 멀다고 생각할 뿐이다.

승당: 공자가 말했다. 도리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 사람이 도리대로 살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진다면 도리라고 할 수 없다. 『시경』에서 읊었다. "도끼를 잡고 쓸 도끼 자루를 베니, 만드는 본이 멀리 있지 않네."

子曰 : 道不遠人, 人之為道而遠人, 不可以為道, 詩云:

자왈 : 도불원인, 인지위도이원인, 불가이위도, 시운:

伐柯伐柯, 其則不遠.

벌가벌가, 기칙불원.

여언: 도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그 길이 사람에게서 잠깐이라도, 조금이라도 떨어진다면 제대로 된 길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는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지만 사람들이 멀게 느낀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마치 오래 사용하던 도끼에 딱 맞는 자루를 쉽게 찾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전 도끼 자루를 사용하면서 편한 점도 있고 불편한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도끼 자루는 편리한 점은 살리고 불편한 점은 줄이는 것으로 찾아야 한다. 이 때 편리하고 불편한 점의 기준은 내가 사용하면서 느낀 경험이므로, 그 경험에 따라 나무를 찾아야지 나무에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결국 도끼 자루를 찾는 기준이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중용』의 대답은 간단하다. 나는 부모에게 자식이기도 하고 자식의 부모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가 자식으로 부모에게 뭔가 바란다면 그런 태도로 자식을 키우면 되고, 부모로서 자식에게 뭔가를 바란다면 그런 태도로 부모를 모시면 된다. 핵심은 내가 자식으로서 또는 부모로서 무엇을 바라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바라는 바가 분명하지 않으니 자식과 부모에게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쩔쩔매게 된다. 숙제를 풀 듯이 과거에서 전승되어 내가 정하지도 않은 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와 도 사이의 거리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 도를 내가 공감할 수 있고 나의 길을 환히 비춰 줄 수 있다고 공감하면, 도는 바로 나의 것이 된다. 나의 것이 멀다고 하면 그것은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18 상보 | 말과 행동이 서로 돌아보게 하자: 언고행행고언(言顧行行顧言) - 13장

입문: “말과 행동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사람은 말로 의사소통을 하고 말로 진리를 찾아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은 불필요한 오해를 낳기도 하고 입장 차이에 따라 격렬한 논쟁을 낳기도 한다. 행동은 막상 한다고 했지만 실제 상황이 되면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여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중용』에서는 말과 행동으로 일어나는 사고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탐구했다.

승당: 해야 할 덕목을 힘써 실행하고 해야 할 말을 마땅히 신중하게 골라라. 덕행과 언어 생활에 충분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채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지나친 점이 있다면 절제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은 행실이 따라올 수 있을지 고려하고, 행실은 말이 책임질 수 있는지 고려한다. 이와 같다면 자율적 군자가 독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용덕지행, 용언지근. 유소부족, 불감불면.

有餘, 不京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惜惜爾?

유여, 불감진. 언고행, 행고언. 군자호부조조이?

여언: 사람은 늘 덕목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덕을 부지런히 힘써 실천해야 하고 말은 가려서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으므로 현실적인 진단이 필요하다. 먼저 덕목을 실천할 때 모자랄 수 있다. 따라서 노력하여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야 한다. 다음으로 말을 가려야 할 때 오히려 넘칠 수 있다. 따라서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낼 필요가 없고 할 말만 해야 한다. 바로 말을 할 때 말만 고려하지 않고 동시에 행동도 검토하고, 행동할 때 행동만 고려하지 않고 동시에 말도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할 말을 딱 부러지게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하고 할 행동을 제때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다. 언행상고는 언행이 화근보다 예술이 되게 하는 지침이다.

19 비근 |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부터: 행원자이(行遠自邇) - 15장

입문: 교통수단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자 공간이 압축되면서 심리적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오가는 시간도 짧아지고 있다. 과학 기술이 나날이 발달하는 시대에 한 걸음을 강조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들릴까? 『중용』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승당: 자기주도적인 군자의 도리는 비유하자면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고 높은 곳을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부터 시작하는 것과 닮았다.

君子之道, 辟如行遠自邇, 辟如登高必自卑.

군자지도, 벽여행원자이, 벽여등고필자비.

여언: 모든 게 부족하던 시절에는 열정과 노력을 강조했지만 모든 게 풍족한 시절이 되자 계산과 효율을 따지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먼 곳은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고 높은 곳은 낮은 것부터 시작한다’는 말도 그 의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먼 곳과 높은 곳을 조금씩 나아가서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에 훌쩍 날아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도 걷기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을 보면 빠른 속도의 혜택을 누리면서 점점 소외되는 느낌을 받자 내가 직접 했다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중용』에서는 비약이 아니라 평범한 이야기가 왜 생명력이 있는지 사람으로 하여금 되새김질해보게 한다.

20 사전 | 일은 미리 대비하면 제대로 풀린다: 사예즉립(事豫則立) - 20장

입문: 일을 미리 하면 여유가 있고 실수를 줄일 수 있으므로 좋다고 생각한다. 좋다는 것을 알지만 그대로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일을 미리 준비하면 예측 가능성이 높아져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일이 진행될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

승당: 모든 일은 미리 대비하면 제대로 풀려가지만,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엉망이 된다. 말(목표)을 미리 조정해두면 문제가 생기지 않고, 일을 미리 조정해두면 어려움이 생기지 않고, 행동을 미리 조정해두면 약점이 생기지 않고, 도(원칙)를 미리 조정해두면 미궁에 빠지지 않는다.

事豫則立, 不豫則廢. 言前定則不跆, 事前定則不困, 行前定則不疚, 道前定則不窮.

사예즉립, 불예측폐. 언전정즉불겁, 사전정즉불곤, 행전정즉불구, 도전정즉불궁.

여언: 『중용』에서는 일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놓고 화제를 언(言)으로 넓혔다가 사(事)에서 다시 한 번 더 짚어주고 다시 행(行)과 도(道)로 넘어간다. 이때 앞의 예(豫)는 전정(前定)으로 바뀐다. ‘언사행도’가 코밑에 다가와서 움직이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때 계획이며 일정을 미리 짜두라는 말이다. 이런 요구는 사람으로 하여금 추상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를 하도록 이끈다. ‘사예즉립’은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잡을 수 있게 하지만, ‘불예즉폐’는 카이로스의 뒷머리만 만지게 한다.

5강 중심 | 마음 근육의 중심 잡기

5강에서는 사람이 마음 근육의 중심을 잡는 길을 이야기한다. 한 발로 서기는 힘들지만 두 발로 서기는 쉬운 것처럼, 마음도 확고하게 기준이 서 있으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복잡해서 머리가 아플 수는 있지만 당황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마음의 중심이고, 그 중심을 잡는 힘이 마음 근육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본성이 있는데 그것이 하늘이 명령한 것이라고 한다. 이로써 우리가 하늘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명령한 내용을 자각하면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사람이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존재라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모든 것으로부터 같은 거리를 유지하면 급속히 기울어지거나 갑자기 이랬다저랬다 하는 흔들림을 막을 수 있다. 또 감정을 표출하더라도 상황에 어울리는 절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 기울어지지도 치우치지도 않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인 ‘중’을 확고하게 지키면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또 그러한 ‘중’을 사람 사이의 인륜과 일상인 ‘용’에서 실천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은 지와 행에서 다양한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를 알고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사람은 어떤 측면에서 생득적으로 뛰어나지만 어떤 측면에서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고칠 수 있다. 이때 사람은 여러 측면을 똑같게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균질적으로 바꾸면 인격이 그만큰 더 나아진다.

21 천명 | 하늘이 명령한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 01장

입문: 『중용』에서 제일 첫 머리에 나오는 구절로 『중용』의 전체 내용을 종합하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이러한 특성은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 도가 아니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로 시작되는 『노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사람의 본성이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 밝히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기원 또는 근원은 삶의 향배를 바꾸는 결정적 요소이기도 하다. 나의 삶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면 나는 하늘을 알아가야 하고 하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승당: 하늘(하느님)이 명령한 것을 본성이라 하고, 본성에 따르는 것을 도리라고 하고, 도리를 터득하는 것이 교육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여언: 『중용』의 첫 구절은 천 → 성 → 도 → 교로 이어지는 과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중용』이 『중용』으로서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서경』과 『시경』에서의 천은 세상의 모든 사람과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덕이 있는 현자와 관계를 맺는 것이지만, 『중용』에 이르러 ‘천명’은 천과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차원의 이야기이며, ‘천명지위성’은 “천이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명령한 것이 본성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중용』에서는 성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맹자는 사랑과 연대의 인(仁), 도리와 정의의 의(義), 문화와 예절의 예(禮), 시비 판단과 지혜의 지(知)의 네 가지 덕목을 가리키고 있다. 맹자는 천명이 사람에게 인의예지의 네 덕목을 본성으로 실천하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천에서 성으로 연결되고 나면 사람은 솔성의 과정으로 나아가, 천이 명령한 인의예지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람의 도다. 성이 도로 연결되고 나면 사람은 수도(修道)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사람은 솔성으로 실천하면서 도를 넓혀가는 것이다. 그렇게 넓히는 길이 바로 나를 가프티고 남을 이끄는 교가 된다.

22 근원 | 지각할 수 없는 절대 중심: 미발지중(未發之中) - 01장

입문: ‘미발지중’은 ‘이발지화(已發之和)’’와 함께 중요하지만, 정작 일반 사람은 왜 중요한지 모른다. 미발과 이발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성리학의 핵심과 구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미발과 이발의 논쟁은 도덕의 기초를 어디에 두느냐를 두고 벌어지는 대결이다.

승당: 기쁨 · 성냄 · 슬픔 · 즐거움이 아직 드러나지 않는 것을 중(중정)이라고 하고, 드러나서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조화)라고 한다. 중이란 세계의 위대한 근본이고, 화란 세계의 공통된 길이다. 중정과 조화가 완전한 상태에 이르면 하늘과 대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잘 자라게 된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中也者, 天下之大本也.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중야자, 천하지대본야.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화야자, 천하지달도야.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여언: 사람이 온전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으면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한다. 이때는 상황에 압도되어 주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엄청난 충격과 심각한 위기에 놓여도 표정과 태도가 평소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안정되고 차분하게 사태를 파악하여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위 두 가지 양상을 ‘흥분형’과 ‘차분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차분형은 안심이 되므로 중책을 맡길 수 있지만, 흥분형은 불안해서 중책을 못 맡기겠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판단과 선택을 할 때 각자 나름의 근거를 제시한다. 도덕도 마찬가지다. 도덕이 어디에 기초를 두느냐에 따라 특성이 달라질 수 있다. 사람이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뻐하고 화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겪은 일에 대해 얼마만큼 정당하게 감정을 드러내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일종의 정신 상태로서 감정이 표정, 태도, 언행으로 드러날 때 주위 사람들이 수용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정도를 지키느냐, 아니면 그 정도를 벗어나느냐가 관건이 된다. ‘발이중절(發而中節)’은 감정이 드러나더라도 수용과 공감의 정도에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인 한 ‘발이부중절(發而不中節)’의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이발은 도덕의 근원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발이중절’이 일반적이고 ‘발이부중절’이 임시적이라면 미발보다 이발을 우선하게 된다. 감정과 태도가 나타나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는 말이다. 미발은 어느 한쪽으로 감정과 태도 등 정신 상태가 기울어지거나 지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는다. 따라서 사람은 미발 상태에서 ‘희로애락’으로부터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미발은 원의 중심과도 비슷하다. 이러한 ‘미발지중’이야말로 도덕의 근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면 이발보다 미발을 우선하게 된다. 이발과 미발은 도덕의 근원을 두고 유학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논쟁하는 초점이었다.

23 중심 | 치우치지도 기울어지지도 않다: 불편불의(不偏不倚) - 주희의 주석

입문: 『중용』에는 중용이 없다. 중용이라는 개념이 자주 쓰이지 않을 뿐 아니라 중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풀이한 내용도 없다. 주희의 중용 풀이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중용』의 의미를 파악하는 나침판을 가진 것처럼 든든하다. 먼저 이 나침판에 의지해 『중용』을 이해하고 나면 『중용』에 ‘분명하지 않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채로’ 풀이되는 중용의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승당: 중(중정)은 치우치지도 기울어지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이름이다. 용은 늘 있는 평범한 일상이다.

中者, 不偏不倚, 無過不及之名. 庸, 平常也.

중자, 불편불의, 무과불급지명. 용, 평상야.

여언: 주희는 중용을 통해 도덕의 확고한 절대 기준과 도덕의 일상화를 동시에 설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중은 어느 한쪽으로 조금도 치우치지도 기울어지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객관적 거리를 가리켰다. 주희는 윤리 도덕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되고 현실의 구체적인 인륜에 일상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에, ‘용’을 불변이 아니라 늘 있는 일상의 평범함으로 풀이하고자 했다. 주희의 풀이는 일상적 관계를 도덕화하고 도덕이 구체적인 삶에 뿌리내리는 일상화를 꾀한 유학의 가치를 잘 드러내고 있다.

24 생득 | 나면서 알고 편안하게 움직이다: 생지안행(生知安行) - 20장

입문: 사람은 살려면 몸과 마음을 움직여서 뭔가 계속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지만 사람마다 아는 것도 차이가 나고 실천하는 것도 차이가 난다. 유학은 현실에서 출발하기에 사람의 본성이 같더라도 재질이 다르다고 보며, 사람의 재질이 각자 다른 것을 인정하고 각자 일정한 높이로 끌어 올리는 변화를 강조한다. 사람은 긍정적으로 바뀐 만큼 위대한 것이다. 사람이 바뀌려면 먼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승당: 어떤 이는 나면서부터 그것을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그것을 알고, 어떤 이는 힘들여서 그것을 알게 된다. 세 경우 차이는 있지만 아는 것은 동일하다. 어떤 이는 편안하게 그것을 실천하고, 어떤 이는 하나하나 따져가며 그것을 실천하고, 어떤 이는 억지로 노력해서 그것을 실천한다. 세 경우 차이는 있지만 성공은 동일하다.

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혹생이지지, 혹학이지지, 혹곤이지지, 급기지지, 일야.

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혹안이행지, 혹리이행지, 혹면강이행지, 급기성공, 일야.

여언: 『중용』을 보면 지는 나면서부터 아는 생지(生知), 자발적으로 배워서 아는 학지(學知), 어려운 상황에 놓여서 비로소 알게 되는 곤지(困知)로 나뉘고 행은 편안하게 실천하는 안행(安行), 하나하나 따져가며 실천하는 이행(利行), 억지로 노력해서 실천하는 면행(勉行) 또는 강행(强行)으로 나뉜다. 우리는 자신이 지와 행의 세 유형 중 어디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점을 제대로 파악하면 지와 행에서 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제 길을 찾을 수 있다.

25 성찰 | 안으로 돌이켜봐도 허물이 없다: 내성불구(內省不疚) - 33장

입문: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수많은 상품이 쏟아지고 제품의 주기가 짧다 보니 아직 쓸 만한데도 거들떠보지 않는 신세가 된다. 바깥만 봐도 어지러울 정도니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쉽지 않다. 자기 자신을 만나지 않고 수집과 소유에 골몰하다 보니 정작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 내가 뭘 하려는지 잘 모른다. 『중용』에서는 시선을 안으로 돌리자고 제안한다.

승당: 『시경』에서 읊었다. "물속에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더라도(보이지 않더라도) 아주 크게 빛난다." 그러므로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자신을 돌이켜봐도 허물이 없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뜻에 나쁜 동기가 없다. 우리가 군자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처신하는 데 있을 뿐!

詩云 : 潛雖伏矣, 亦孔之昭. 故君子內省不疚, 無惡於志.

시운 : 잠수복의, 역공지소. 고군자내성불구, 무오어지.

君子之所不可及者, 其唯人之所不見乎!

군자지소불가급자, 기유인지소불견호!

여언: 이 문장은 물속 깊숙이 있지만 오히려 환히 빛나는 역설적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물속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곳마저 환히 드러난다면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곳은 없다. 숨을 곳도 자신을 가리지 못하니 숨지 못할 곳은 더더욱 환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이 모르는 한 곳이 남았으니 바로 자신의 마음이다. 마음은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하니만큼 내가 무엇을 해도 좋은 사각 지대로 생각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다들 바빠 지금 하는 것도 뭘 하고 있는지 의식하기 어렵고, 바로 전에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이 잘 없다. 그러다 보니 뭘 잘했는지 못했는지 따져 보기도 쉽지 않다. 먼저 하루 얼마의 시간이라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내가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안에 불빛을 비춰 부끄러워할 것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마음은 숨길 곳이 아니라 자주 들여다봐야 할 곳이다.

6강 균형 | 삶 근육의 중심 잡기

6강에서는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무너지지 않고 중심을 잡는 근육을 기르는 이야기를 살펴본다. 5강에서 마음의 근육을 길러 중심을 잡게 되었다면, 6강에서는 마음의 근육을 바탕으로 일상에서 때로 기우뚱거리더라도 결국 중심을 잃지 않고 곧바로 설 수 있는 삶의 근육을 키우는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마음의 중심을 잡기 위해 근육을 키울 때는 철저하게 나 자신과 대결한다.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 근육을 키울 때는 싸워야 할 대상이 다양하고 상황에 따라 바뀐다. 생각도 한쪽만 아니라 양쪽을 고려해야 한쪽으로 쏠리지 않듯이, 몸도 넘어지지 않으려면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모자라고 부족한 만큼 완벽하지 않다. 잘한 것은 앉아서 앞으로 계속 나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못할 때가 문제다. 못하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못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하면 잘 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된다. 나를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숨길 것이 아니라 아예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 놔둬라. 그러면 못하는 나를 숨길 곳이 더는 없다. 탈바꿈에 나서게 된다. 진정으로 부끄러운 것은 지금 못하는 내가 다음에도 버젓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이때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적에 맞서는 힘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단점을 들추는 힘이기도 하다. 사람은 있는 대로 믿지 않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있는 대로 믿으면 시간이 지나도 믿음이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증거의 힘이다. 증거에 의지할 때 삶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혼자서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면 함께 서지 못하고 독점하려고 한다.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면 중심을 잡기 어렵게 만든다. 반면 여럿이 나란히 함께 가면 서로 어울려서 중심을 잡기가 편하다. 삶에서 중심을 잡으면 기우뚱거리지만 넘어지지 않게 된다.

26 중립 | 가운데 서서 기울어지지 않다: 중립불의(中立不倚) - 10장

입문: 장정일은 무난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한국 사람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이런 한국 사람의 특성 때문에 중립이나 중용을 취하는 사람은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로 추앙되었다. 중립과 중용을 취하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아 유식한 척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의 비판은 『중용』의 중용과 상관성이 깊어 보이지 않아 보인다.

승당: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조화를 이루어 어디로 휩쓸리지 않으니 굳세구나, 꿋꿋함이여! 가운데 서서 기울어지지 않으니 굳세구나, 꿋꿋함이여! 나라에 원칙이 통할 때 가난한 날의 뜻을 버리지 않으니 굳세구나, 꿋꿋함이여! 나라에 원칙이 통하지 않을 때 죽게 되더라도 지조를 바꾸지 않으니 굳세구나, 꿋꿋함이여!

君子, 和而不流, 强哉矯! 中立不倚, 强哉矯! 國有道,

군자, 화이불류, 강재교! 중립불의, 강재교! 국유도,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불변색언, 강재교! 국무도, 지사불변, 강재교!

여언: 유학은 ‘중용’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은 장정일처럼 유학의 중용은 어정쩡하다고 비판한다. 선택은 둘 중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야 한다. 선택은 둘 다를 동시에 할 수 없고 늘 하나를 골라야 하는 고통스러운 절차이자 활동이다. 장 정일의 중용은 어떤 상황에서 입장을 확실히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곳에 두는 것이다. 한국식 중용의 이미지는 이렇게 비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화는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합리적인 부분을 수용하고 타협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나타낸다. 반면 류는 정파, 당파, 이념 등을 위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람의 주장이 타당하더라도 그 점을 놓친다. ‘중립불의’에서의 중립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채 선택지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깊이 숙고하고 차분하게 검토하고 신중하게 결정한 뒤에 선택한 중립이 물론 가운데일 수도 있지만 왼쪽 또는 오른쪽 극단에 있을 수도 있고 양극단의 어느 지점일 수도 있다. 중립은 무지를 드러내지 않고자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결론을 찾느라 칼날 위에 올라서는 치열한 결정전이다. 불의는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상태다. 이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더는 객관적일 수도 공정할 수도 없다. 힘들지만 기울어지지 않고 버티려면 굳세고 또 굳세어야만 한다.

27 공정 | 윗자리에 있으며 아랫사람을 깔보지 않다: 재상위불릉하(在上位不陵下) - 14장

입문: 신분제가 살아 있을 때 고안되었지만 신분제가 사라지고도 계속 남아 있는 것이 ‘관료제’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참여하고 실적과 기여도에 따라 나누는 수평적 제도가 도입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관료제는 여전히 현실에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관료제에서 사람은 직무상으로 위와 아래로 구분되는데, 직무를 넘어 사적 관계로까지 확장되기 쉽다.

승당: 윗자리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어 깔보지 않고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끌어내리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관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으면, 사람 사이에 원망하는 소리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특히 위로는 하늘에 대고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특정 사람을 두고 탓을 하지 않을 것이다.

在上位不陵下, 在下位不接上. 正己而不求於人, 則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재상위불릉하, 재하위불원상. 정기이불구어인, 즉무원. 상불원천, 하불우인.

여언: 관료제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풀어야 할 과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그런데 그 제도가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임시로 만든 틀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자연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변경 불가능한 제도로 생각하게 된다. 『중용』에서는 아래와 위의 관계가 권력의 남용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두 가지를 제안하고 있다. 하나는 위가 아래를 업신여기지도 깔보지도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가 위를 잡아서 끌어내리지 말라는 것이다. 위와 아래가 권력 관계나 약탈적 관계로 변질되면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투쟁하는 자연 상태가 된다. 약자가 되지 않으려면 서로 도움을 주는 사람끼리 모여 전체가 파당, 파벌, 당파의 부분으로 쪼개지고, 부분들이 끊임없이 웅성거리며 불안을 잊으려고 한다. 『중용』에서는 아래와 위 또는 위와 아래가 권력 관계나 약탈적 관계로 변질되지 않도록 ‘불릉’과 ‘불원’의 원칙을 제시했다. 나아가 사람에게 ‘릉’과 ‘원’으로 타락하지 않으려면 ‘자기 자신을 바로잡아라’라고 주문하고 다른 사람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28 용기 |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 지치근용(知恥近勇) - 20장

입문: 사람은 일상과 도덕에서 늘 성공만 할 수 없다. 실패했을 때 그 자리에 주저앉고서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포기다. 반면 넘어진 지점에서 다시 일어서서 했던 일을 이어서 계속하면 끈기다. 체력으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더라도 정신력이 있으면 그만두려는 자신을 다독이고 설득하여 재출발할 수 있다. 부끄러움은 상황을 빨리 피하게 할 수 있지만 실패의 원인이나 상황에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부끄러움은 한계가 있으므로 그런 특성만으로 용기에 가깝다고 할 수 없다. 용기에 가까운 부끄러움은 어떤 것인가?

승당: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혜에 가깝고, 온 힘으로 실행하는 것은 사랑(연대)에 가깝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

好學, 近乎知. 力行, 近乎仁. 知恥, .

호학, 근호지. 역행, 근호인. 지치, .

여언: 부끄러움이 용기와 연결되지 않으면 체면이 구겨지는 정도다. 부끄러움이 용기와 연결되려면 도전의 계기가 들어가야 한다. 용기는 못하는 것을 시도하고, 모르는 것을 해결하고, 부끄러운 것을 넘어서는 모든 활동과 관련이 있다. 상황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서 이전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체면과 용기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는데, 적어도 용기 쪽으로 나아갈 때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이제 지혜와 사랑을 살펴보자. 배운다는 것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채우는 활동이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 반복하고 노력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배워서 얻는 것이 자유를 가져다준다면 고통에 지지 않을 수 있다. 지혜의 빛을 쬐면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배우게 된다. 또 선행이 일시적인 활동에 그치지 않고 평생의 활동으로 나아가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선행이 오해를 받고 시련을 겪을지라도 사랑이 진실하고 그 힘이 강력하면 그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오해에 억울해하지 않고 오해마저 녹일 수 있다.

29 증거 | 증거가 없으니 믿지 않네: 무징불신(無微不信) - 29장

입문: 사람은 실수를 덜 하고 싶어 하지만, 제한된 능력과 지식으로 판단하여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인간의 조건을 인정하고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의 도움을 받더라도 실수할 가능성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중용』에서는 육아 그 입장에서 목적이 3 표에 대응할 만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삼중(三重)이다.

승당: 천하를 다스리는 데 세 가지 소중한 것, 즉 앞의 의례 · 제도 · 문화(기록)가 있는데 이대로 하면 실수(행정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것(상고 시대 성왕의 의례)은 비록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증거가 없고, 증거가 없으므로 믿을 만하지 않고, 믿을 만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그것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의 것(당시의 의례)은 비록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의 지위가 높지 않고, 지위가 높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믿을 만하지 않고, 믿을 만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그것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王天下有三重焉, 其寡過矣乎. 上焉者, 雖善無徵, 無微不信,

왕천하유삼중언, 기과과의호. 상언자, 수선무징, 무징불신,

不信民弗從. 下焉者, 雖善不尊, 不尊不信, 不信民弗從.

불신민불종. 하언자, 수선부존, 부존불신, 불신민불종.

여언: 묵자는 실수를 줄이는 과과(寡過)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판단과 선택을 할 때, 역사적 참조, 대중 지성의 힘 참조, 효용성 점검의 세 가지(三表)를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용』에서는 의례(儀禮), 제도(制度), 고문(考文)의 삼중을 제시한다. 즉 예에 따라 논의하고, 도를 살피고, 문을 고려하는 것이다. 예는 개인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용을 담고 있고, 도는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고 또 하더라도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담고 있고, 문은 과거에 오랜 시간을 통해 검증된 지식을 담고 있다. 같은 삼종이라도 시대의 차이가 있다. 상(上)은 가깝게는 지금 이전을 가리키고 멀리는 기억과 이야기로 전해지는 고대를 가리킨다. 하(下)는 지금 현재를 가리킨다. 이렇게 시대를 구분해 놓고 보니 각각 한계가 있다. 따라서 『중용』에서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삼중이 증거와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30 병행 | 나란히 자라나더라도 서로 해치지 않는다: 병육이불상해(立育而不相害) - 30장

입문: 우리가 한 정파 입장에 서면 자연히 그 편의 주장에 동조하기 쉽고 반대파를 비판하기 쉽다. 이렇게 굳어지면 진영 논리가 판을 치게 된다. 진영 논리는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공통 영역이 있을 수 없다. 나에게 무한히 관대하고 반대자에게 추상같이 엄격해진다. 이런 진영 논리가 득세하면 경쟁과 대립이 사회에 만연하여 해결할 길이 없다. 『중용』에서는 이와 입장이 다르다. 자연과 사회는 원래 경쟁하고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고 조화한다는 것이다.

승당: 만물이 나란히 자라나더라도 서로 해치지 않고, 도가 나란히 실행되더라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작은 생성력이 흐르는 강물이고, 위대한 생성력은 되돌릴 수 없는 강대한 변화다. 이것이 하늘-대지가 위대하게 여겨지는 까닭이다.

萬物立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小德川流,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 소덕천류,

大德敦化, 此天地之所以為大也.

대덕돈화, 차천지지소이위대야.

여언: 사람은 일상과 인륜에서 다양한 관계에 놓인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한 명이지만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역할을 수행하더라도 서로 전혀 부딪치지 않는다. 『중용』에서는 만물이 서로 어울려 나란히 자라기도 하고 서로 해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중용』은 우리에게 시선을 교정하도록 요청한다. 경쟁과 대립이 두드러지면 사람의 눈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그것만 보인다. 『중용』에서는 그것만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진실은 아니라고 본다.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지, 있는 대로 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중용』에서는 눈을 돌려 만물과 길을 살펴보라고 제안한다. 만물은 서로 어울리며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주고 길은 여기저기 나 있더라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여기서 새삼 공존과 평화가 세상에 진실로 드러난다. 경쟁과 대립을 넘어 공존과 평화에 더 관심을 기울일수록 세상의 참 모습이 더 드러난다. 보고싶은 대로 착각하며 살 것이 아니라 있는 대로 보면 공존과 균형의 가치에 관심을 더 기울일 수 있다.

7강 중용 | 삶에 중용이 들어오는 순간

7강에서는 중용이 추상적 이론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 삶으로 들어선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원래 윤리학은 이론만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옳고 가치 있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아름다운 가치와 훌륭한 덕목은 현실에서 실현될 때 빛이 난다. 이렇게 중용이 시공간으로 들어서려면 이론과 보편의 차원에서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시중(時中)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적 기준을 현실에다 무조건 적용하게 되어 개별 사정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바로 “글로벌 차원에서 생각하고 로컬 차원에서 실천 하라”는 말과 통한다. 『중용』에서는 『논어』와 마찬가지로 양극단을 두루 살피라고 제안한다. 이쪽저쪽 번갈아가며 살핀다면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방법이 손에 꼭 쥐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슴에 품고 꼭 껴안거나 가슴에 새겨 기억할 수 있다. 일단 기억을 하고 있어야 실천하려고 움직일 수 있다. 상황에 필요한 덕목을 이해하고 실천하려면 증거가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돕는 사랑의 덕목도 빛나고 잘못의 시정을 요구하는 분노의 덕목도 감동을 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용의 덕목을 실천하려면 좀 명확하고 분명한 형식이 필요하다. 형식이 기준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모든 행위가 중용에 맞는다고 주장할 수 있고, 형식이 분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중용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중용』을 비롯한 유학에서는 ‘a하지만 b하지 않는다는 형식을 중용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도움을 주더라도 너무 의존하여 자립심을 잃지 않도록 하라 고 할 수 있다. 이런 형식을 찾아서 자신에게 적용하면 중용대로 살기가 좀 쉽게 다가올 수 있다.

31 시중 | 군자는 중용을 때에 맞춘다: 군자시중(君子時中) - 02장

입문: 철학은 원래 무엇이 참으로 있는지를 밝히는 학문이다. 한마디로 참으로 있음을 가리는 활동이다. 이때 ‘있음’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서 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윤리학은 무엇이 옳다는 것을 알고 실제 행위로 옮기는 학문이다. 한마디로 ‘함’을 가리키는 활동이다. 이때 ‘함’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찾아 중도에 그치지 않고 끝까지 완수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시중(時中)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시중은 중용이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특정한 시공간에서 가장 적절한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승당: 중니가 말했다. 자기주도적인 군자의 삶은 중용에 들어맞지만 이기적인 소인의 삶은 중용에 어긋난다. 중용을 따르는 군자는 중용을 시공간으로 옮긴다. 반면 중용에 어긋나는 소인의 삶은 이해관계를 우선시하여 어려워지거나 거리끼는 것이 없다.

仲尼曰 : 君子中庸, 小人反中庸. 君子之中庸也,

중니왈 : 군자중용, 소인반중용. 군자지중용야,

君子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군자시중, 소인지반중용야, 소인이무기탄야.

여언: 마지막에 나오는 ‘무기탄(無忌憚)’은 공격적이며 도전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언행의 두 측면에서 색다르고 자극적인 극단을 표출하는 ‘소은행괴(1강 1조목)’는 무기탄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지만 주저하고 꺼리는 바탕에는 도덕적으로 허용되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어떠한 주저함도 없고 꺼림직함도 없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할 때 통제하는 규칙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1강 1 조목에서 살펴본 극단의 삶을 살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인용문에서는 제일 먼저 군자와 소인을 각각 중용과 반중용으로 구분한다.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중용대로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는 반면 이기적인 소인은 중용과 어긋나는 삶을 살려고 한다. 후자의 반중용은 달리 말하면 무가탄의 삶이고 ‘소은행괴’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용은 구체적인 현실을 초월한 추상적인 규범이 아니라, 일상과 인륜을 규율하는 규범이다. 하지만 일상과 인륜을 규율하는 규범은 특정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점에서 보편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규범은 개별적인 일상과 인륜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바로 중용과 시공간이 결합되는 시중 개념이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중은 중용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실에 무조건 욱여넣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서 인간답고 자연스런 행위를 길어내는 예술적 속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32 집중 | 사태의 두 극단을 다 고려하라: 집기양단(執其兩端) - 06장

입문: 한 자리에만 머문다면 한 반에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없다.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도 선입견이 있으면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되지, 사태가 지닌 객관적 특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따라서 한 면을 보고 이렇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다른 측면을 볼 때까지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다른 측면을 보고 종합해서 판단하더라도 결코 늦지 않는다.

승당: 공자가 말했다. 순임금은 틀림없이 완전한 지자일 것이다. 그는 궁금하면 잘 물었고 대중적인 언어를 잘 살피며 주위 사람의 단점을 숨겨주고 장점을 드러내며 사태의 두 극단을 다 고려하고서 그것의 중을 백성에게 사용했다. 이런 덕택으로 사람들이 높이 받드는 순임금이 되었을 것이다!

子曰 : 舜其大知也與, 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자왈 : 순기대지야여, 순호문이호찰이언, 은악이양선,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집기양단, 용기중어민, 기사이위순호!

여언: 우리는 일상에서 모든 가능성을 다 검토할 수 없기 때문에 입장을 표명하거나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할 때 부담을 느낀다. 선택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상황과 둘 이상의 대안 중에 하나를 고르는 상황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한계를 안고서 최선의 선택을 내리고자 한다. 이렇게 압축된 대안 또는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최종적으로 선택할 때 『중용』은 ‘집기양단’을 제안한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고기양단(叩其兩端)’과 흡사하다. 최종 결정을 하기 위해 왼쪽 끝과 오른쪽 끝 사이의 모든 지점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자유로운 관점의 이동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고정된 지점에 집착하면 다른 지점이 중용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게 된다. 하나의 지점마다 그것이 중용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검토해봐야 한다. 이 작업을 하려면 나의 관점과 특정 지점에 대한 고집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누구도 신의 지능과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늘 옳고 다른 사람이 늘 틀릴 수는 없다. ‘집기양단’의 중용은 이미 정해진 특정한 방안을 융통성 없이 고집스레 지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개별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0과 1 사이에서 가장 적절하고 적합한 지점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나를 다양한 가능성에 놓아보는 익숙하지 않은 도전을 즐겨야 한다.

33 명심 | 가슴에 꼭 품고서 절대로 놓지 않는다: 권권복응(拳拳服膺) - 08장

입문: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아 안전한 곳에 보관하려고 한다. 물건도 그러할진대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중용과 선을 알게 되었다면, 행여라도 놓칠까봐 가슴에 꼭 품어야 한다.

승당: 공자가 말했다. 안회의 사람 됨됨이를 보면 중용의 삶을 선택해 하나의 선을 발견하면 그것을 소중히 가슴(마음)에 꼭 품고서 결코 놓지 않는다.

子曰 : 回之為人也, 擇乎中庸, 得一善, 則拳拳服膺, 而弗失之矣.

자왈 : 회지위인야, 택호중용, 득일선, 즉권권복용, 이불실지의.

여언: 소중한 것을 감춘 다는 점에서 보면, 어머니의 드러내기는 ‘권권복응’과 반대되지만, 아이에게 젖을 물리려면 드러낼 수밖에 없다. 꼭 쥐고서 놓치지 않으려는 것과 젖을 드러내고서 물리는 것은 결국 소중한 것을 지키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안회는 공자가 그렇게 어렵다고 말한 중용을 실천하고자 했다. 듣고 알게 된 것이 어느 순간 슬며시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두려워한 안회는 ‘권권복응’이라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권권복응’은 듣고 배운 것이 기억의 영역으로 넘어가서 나중에 내가 듣고 배운 적이 있는지 잘 모르는 망각의 영역으로 가는 것을 막는 활동이다. 듣고 배운 것이 나의 가슴과 마음에 늘 남아서 현재진행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권권복응’은 마음에 새기는 명심과 같은 뜻인 셈이다. 누군가와 비슷한 이야기를 해도 듣고 배운 것이 생각나고, 다른 이야기를 들어도 앞서 듣고 배운 것과 연결시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공이 안회를 높이 평가했던 ‘문일지십’이고 안회가 공자에게 끊임없이 배우려고 했던 ‘욕파불능’이다.

34 증험 | 보통 서민에게 타당성을 묻다: 징제서민(徵諸庶民) - 29장

입문: 사람은 판단과 선택에서 실수를 줄이고 싶어한다. 이때 판단과 선택이 옳은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있으면 일차적으로 실수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주관적이어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쉽고 감정적이어서 일관성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기준이 있다고 자동으로 실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준에 이어 그 기준을 해석하는 실천적 매뉴얼이 필요하다. 체크포인트가 있으면 기준은 어떤 안목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지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검토가 가능하다. 이러한 기준과 세부 사항은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이다.

승당: 자기주도적인 군자가 가는 길은 자신에게서 뿌리를 찾고, 보통 서민에게 타당성을 검토해보고, 이상적 군주들의 언행에 비추어 보아 잘못이 없는지 살펴보고, 하늘과 대지에 적용해봐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문의하여(제사 지내) 바로잡아서 의심이 생기지 않고, 백세 이후 성인을 기다려도(장기의 시간에 걸쳐 검증 받더라도) 문제점이 없으리라.

君子之道, 本諸身, 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認, 建諸

군자지도, 본제신, 징제서민, 고제삼왕이불류, 건계

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

천지이불패, 질제귀신이무의, 백세이사성인이불혹.

여언: 『중용』은 판단과 선택을 하는 기준으로 묵자의 삼표에 대응하여 삼중, 즉 의례, 제도, 고문을 제시한 바 있다. 삼중이 있다고 하더라도 해석은 결국 사람이 한다. 사람은 해석을 자의적으로 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아무리 기준이 잘 갖춰져 있다고 하더라도 실수할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는다. 따라서 『중용』에서는 먼저 증거와 권위에 바탕을 둔 삼중을 제시한 뒤 이를 검토하는 여섯 가지 체크 포인트를 제시하고 있다. 육층의 체크 포인트는 자기자신, 서민, 삼왕, 천지, 귀신, 미래의 성인을 가리킨다. 체크 포인트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순서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주위의 권고 등 외부적인 요인에서 시작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충분히 공감하지 않는다면 일을 끝까지 하기가 쉽지 않다. 일을 하는 중에 의심이 들고 확신이 없어지면 쉽게 그만둘 수 있다. 그러지 않으려면 제일 먼저 우리는 자기 자신을 납득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의 검증을 통과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보통 서민의 처지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은 나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의 상황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받을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함께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셋째로 삼왕이라는 한 민족이 축적해온 전통의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넷째와 다섯째로 천지와 귀신의 검증을 통과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미래에 출현할 성인의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군자의 삼중은 과거 · 현재 · 미래에서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의혹이 남지 않아야 할 정도로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로써 중용이 왜 찬란한 기억을 가진 고대의 삼중과 지금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현실의 삼중을 넘어 군자가 제시하는 삼중을 기준으로 삼는지 수긍할 만하다. 군자의 삼중은 육층의 체크 포인트를 가질 정도로 엄격하고 철저하다.

35 담백 | 담박하지만 물리지 않는다: 담이불염(淡而不厭) - 33장

입문: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서 중용대로 살기를 일반화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규범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중용대로 살기를 어떻게 형식화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승당: 군자의 도리는 담박하지만 물리지 않고, 간절하면서 문채가 있고, 온화하면서 조리가 있다. 또 멀고 깊은 것이 가깝고 얕은 것에서 시작하는 것을 알고, 바람이 어떤 연유로 시작되는지를 알고, 은미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안다면 함께 덕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知遠之近知風

군자지도, 담이불염, 간이문, 온이리, 지원지근지풍

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지자, 지미지현, 가여입덕의.

여언: 이 인용문에서 중용대로 살기의 두 가지 형식을 찾을 수 있다. 하나가 ‘담이불염’이고 다른 하나가 ‘간이문(簡而文)’과 ‘온이리(溫而理)’다. 첫째, 담박하지만 물리지 않는다는 ‘담이불염’은 ‘a를 하지만 b를 하지 않는다’는 중용대로 살기의 형식을 나타낸다. 이 형식은 사람이 닥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a를 하더라도 그것이 b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때 a는 문제를 풀기 위한 적절한 덕목을 가리 키고, b는 a의 덕목을 실천하다 보면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 현상을 가리킨다. 즉 b까지 가서는 안 된다는 맥락이다. 일을 하더라도 b의 위험성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간결하면서 문채가 있고 온화하면서 조리가 있다는 ‘간이문’과 ‘온 이리’는 공통으로 ‘a를 하면서도 b도 한다’는 중용대로 살기의 형식을 나타낸다. 간 결하다 보면 단조로울 수 있지만 문채가 있어야 한다. 온화하다 보면 온정으로 흐를 수 있지만 도리를 지켜야 한다. 이 형식의 중용은 a를 하다 보면 새로운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b는 바로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가 기준이 획일적이다 보면 경우에 따라 가혹한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융통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평가할 때의 중용이다. 경험이 많다는 것을 강조하다 보면 섬세 하지 못하고 놓칠 우려가 있을 수 있으므로 꼼꼼한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능력을 균형있게 키울 때의 중용이다. 위에서 살펴본 형식화는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한다. 각자가 처한 상황의 정체를 분명히 하고 선택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도출하여 중용의 지점을 찾으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없어 막막하기만 한 상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8강 진실 | 나와 우리를 움직이는 진실의 힘

8강에서는 중용의 논리를 바탕으로 진실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진실을 뜻하는 성(誠)은 『중용』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게 논의된다. 이 때문에 『중용』을 '중용(中庸)'과 '성(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진리가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때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말할 수 없듯 하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의 막강한 힘은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이 때문에 중용과 성은 한꺼번에 논의할 수밖에 없다. 먼저 『중용』은 진실로 성은 천이 운행하는 길이다. 거짓은 진실인 양 위세를 부릴 때 큰 힘을 가지고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지만 거짓이 거짓으로 밝혀지는 순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은 한번 시작되면 중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진행될 수 있다. 사람은 한계가 있지만 부분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세계와 더 넓게 만날 수 있다. 사람이 한 분야를 오랫동안 파면 부분을 통해 전체로 통하는 길을 찾게 된다. 진실이 하늘의 길에 한정되지 않는 것처럼 존재와 사태도 마찬가지다. ‘나’와 ‘내가 하는 것’ 사이에 한 치의 틈도 없는 것이 진실이다. 진실은 나와 남 사이에 날카롭고 깊게 파인 선을 허물어뜨린다. 마음의 문도 열고 끊임없이 묻고 배워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진실은 우리에게 자신의 더 많은 모습을 보여준다. 진실이 전체를 보여줘도 우리가 준비하지 않으면 일부만 보게 된다.

36 진실 | 진실이란 하늘의 길이다: 성자천도(誠者天道) - 20장

입문: 하늘은 한번 일을 시작하면 중단 없이 계속한다. 그런데 사람은 무슨 일을 시작했다가도 금방 그만두고 또 어느 때에 새로운 일을 벌인다. 사람은 애초에 지식, 의지, 감정 등 다양한 측면에서 완전하지 않으므로 사람의 변덕만 탓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한계와 고통은 ‘시시포스 신화’에 잘 나타난다. 시시포스는 영원히 다시 시작하는 반복을 하지만, 『중용』을 비롯하여 유학에서는 다시 시작하는 고통을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성(誠)이다.

승당: 진실이란 하늘(하느님)의 길이고,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사람의 길이다. 진실이란 힘쓰지 않아도 중정에 들어맞고 숙고하지 않아도 원칙과 부합하므로 차분하고 침착하게 도에 맞으니 성인에게 가능하다.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선을 골라서 굳건하게 잡는 것이다.

誠者, 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不勉而中, 不思而得,

성자, 야. 성지자, 인지도야. 성자블면이중, 불사이득,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종용중도, 성인야. 성지자, 택선이고집지자야.

여언: 『중용』에서 성(誠)은 원래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구별하는 지혜와 늘 이어져 있다. 성은 보통 ‘성실하다’로 풀이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성실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하는 일에 반복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을 성실보다 진실로 풀이하는 것이 더 맞는다. 진실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만큼 무엇을 왜 하는지 자각하고 있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란다고 스스로 속일 수 없다. 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고 있으니 주위에서 뭐라고 한다고 해서 우르르 몰려가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고 있으니 주위에서 뭐라고 한다고 해서 우르르 몰려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진실은 성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으므로 가족, 친구, 동료 등과 어울려 지낸다.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혼자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므로, 주위에 물어서 결정하게 된다. 이때 주위 말만 믿고 덜컥 일을 크게 벌이면 처음에는 좋은 면만 보이다가 시간이 갈수록 생각하지 못한 일이 생긴다. 이렇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면 일을 더 진행하지 못하고 그만둘 수밖에 없다. 진실이야말로 ‘다시 시작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한다. 진실에서 출발하여 그 중에서 최고를 찾아 굳게 잡고서 놓지 않아야 한다. 이는 윤리적 행위와 예술 창작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좋은 것을 찾아내서 반복하고 그 중에서 좋은 것을 최종적으로 골라서 놓치지 않으면 인간의 성지(誠之)가 천(天)의 성(誠)을 닮아갈 수 있다.

37 변화 | 부분에 간절하면 진실해지리라: 곡능유성(曲能有誠) - 23장

입문: 영화 <역린>에서 정조는 암살의 위기에도 자신을 지키는 말로 『중용』 23장을 인용했는데 그 해석을 다름과 같이 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승당: 다음으로 부분에 간절히 하라. 부분에 간절하고 탁월하면 진실해질 수 있다. 진실하면 변화의 싹(형상)이 드러나고, 싹이 드러나면 흐름이 한층 뚜렷해지고, 한층 뚜렷해지면 흐름이 누구에게도 분명해지고, 한층 분명해지면 흐름이 사람을 흔들어서 움직이게 하고, 사람을 흔들어서 움직이게 하면 흐름의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흐름의 작은 변화가 쌓이면 최종적으로 흐름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오직 세상에서 완전한 진실만이 커다란 변화를 제대로 일구어낼 수 있다.

其次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기차치곡, 곡능유성, 성즉형, 형즉저, 저즉명, 명즉동,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為能化.

동즉변, 변즉화, 유천하지성, 위능화.

여언: 인간은 후천적 학습을 통해 자신의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배우게 된다. 아무리 메운다고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라 부족함이 있다.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가 인간의 이런 작업을 도와주어 간단한 조작으로 개인이 평생 수집하는 것보다 많은 정보를 빨리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유사 이래로 전체를 파악하려는 지적 모험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철학이 그런 모험에 적합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인간이 완전한 전체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방법은 하나를 알고 또 하나를 알아가며 모르는 것으로 나아가고 그 과정이 오래되면 ‘활연관통(豁然貫通)’의 기회가 생긴다. ‘활연관통’은 하나씩 아는 것이 쌓여서 그것이 나중에 하나로 연결되어 부분에서 전체를 만나는 과정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38 종시 | 진실하지 않으면 존재가 있을 수 없다: 불성무물(不誠無物) - 25장

입문: 『중용』에서 언급한 진실의 막강한 힘은 무력한 허위와는 달라 하루아침에 선인과 악이의 처지가 뒤바뀔 수도 있다.

승당: 진실이란 존재(사태)의 시작이자 끝이고, 진실하지 않으면 존재(사태)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진실을 고귀한 것으로 여긴다.

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

성자물지종시, 불성무물, 시고군자성지위귀.

여언: 진실로서 성(誠)은 일의 끝이자 시작이다. 무슨 일이든 진실과 결합하지 않으면 정점을 찍었다가 거품처럼 사라지고, 진실과 결합하면 억울하고 역겨운 과정을 겪더라도 누려야 할 것을 되찾게 된다. 이로써 ‘성자물지종시’는 결국 ‘사필귀정(事必歸正)’과 통한다. 성(誠)과 정(正)은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불성무물’은 존재(사태)가 제값으로 있게 하는 충만한 의미 활동을 가리키는 것일 뿐 성이 존재(사태)를 생성한다는 맥락은 아니므로, 절대 관념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39 자타 | 진실은 나를 이루고 남도 이루도록 한다: 성기성물(成己成物) - 25장

입문: 현대인 나와 남의 구분이 확실해 그 경계도 선명하다. 내가 남을 왜 도와야 하는지 따지고 난 뒤에 그 이유가 합당하다면 그제야 비로소 돕는다. 남을 돕는 데도 자신을 설득할 이유가 필요하다.

승당: 진실이란 스스로 자신을 이룰 뿐 아니라 타자를 이루게 하는 바탕이다. 자기를 이루는 것이 사랑이요, 타자를 이루게 하는 것이 지혜다. 이것은 본성의 힘이고 자기 내부와 외부의 도리를 종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시대) 상황에 맞게 처리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성자, 비자성기이이야, 소이성물야. 성기, 인야, 성물, 지야.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時措之宜也.

성지덕야, 합내외지도야, 고시조지의야.

여언: 『중용』을 비롯하여 유학은 사람이 신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윤리적 완성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때 사람을 나와 남으로 철저하게 나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을 중심으로 관계의 그물망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학에서는 나와 남 중에 누구를 먼저 도와야 하는지와 관련해서 단계론을 주장한다. 유학은 나와 가족을 최우선에 두고 사랑을 차례로 넓혀간다. 그러나 묵자는 “나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과 남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 같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유학의 나와 남의 단계적 사랑을 수정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나와 남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면 별애(別愛)의 폐쇄성과 배제성을 다소 완화할 수 있다.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우리는 흔쾌히 ‘내가 먼저’ 양보하고 타인에게 우선권을 준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진실의 압도적인 힘 때문이다. 진실은 다른 이유와 항의를 침묵하게 하는 힘이 있다. 현대인은 자신의 욕망과 가치를 최우선에 놓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은 진실하기 때문이다. 이 진실은 나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타자에게로 확장될 수 있다. 타인이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하고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진실은 타인을 우선적으로 돌보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중용』에서 말하는 나를 이루는 성기(成己)에서 남도 이루도록 돕는 성물(成物)로 나아가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40 덕성 | 덕성을 존중하고 학습으로 이끌다: 존덕성도문학(尊德性道問學) - 27장

입문: 한 제국 이후 불교의 전래와 도교의 출현으로 유교는 주줌하였으나 당 제국 후기에 이르러 유학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송나라에 이르러 문예 부흥의 흐름이 큰 기세를 이루게 되었다. 아울러 유학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힘으로 윤리적 완성을 꾀하려면 믿을 만한 확실한 기초를 찾아야 했다. 당시 유학은 선천적인 덕성과 후천적인 학습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양대 기둥으로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평범한 보통 사람이 윤리적으로 완성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송나라에 이르러 유학자의 진영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 진영은 청 제국까지 이어졌고,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진영을 탄생시킨 것이 바로 주희와 육상산의 논쟁으로 명 제국의 왕양명으로 이어졌다. 이 두 학파의 특징이 바로 존덕성과 도문학으로 구분된다.

승당: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선천적 덕성을 존중하고 후천적 학문으로 이끌어가며, 광대하고 보편적인 것을 완전히 하고 정밀하고 특수한 것을 세세하게 파악하며, 고명하고 순수한 것(초월적인 것)을 극단화하고 현실과 결부된 중용을 추구하고, 옛것을 재해석하여 새것을 창조하며, 품성(습성)을 확고하게 길들여서 문명의 예절을 높이 친다.

君子, 尊德性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군자, 존덕성도문학, 치광대이진정미, 극고명이도중용,

溫故而知新, 敦厚以崇禮.

온고이지신, 돈후이숭례.

여언: 『중용』과 유학에서는 사람이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데 든든한 밑바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크게 기여한 성선(性善)이다. 따라서 사람은 성선만을 믿고 따르면 도덕적 인간으로 성장하여 성숙한 인격을 갖출 수 있다. 하지만 ‘성선에다 무언가를 더 더해야 하는가’를 두고 주희 대 육상산과 왕양명은 대를 이어가며 지속적으로 논쟁했다. 왕양명은 성선먼 있으면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도덕적 상황에 놓이면 오로지 성선에 따르려는 흐름과 이해관계를 따지려는 흐름의 양 갈래 중 후자를 누르고 전자만을 따르면 충분하다고 보았다. 사람이 성선만으로 부족하다며 구체적인 사실과 정보를 더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전자를 따르지 않고 후자를 따르려고 하는 성향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왕양명은 ‘치량지(致良知)’라는 개념을 만들어 사람이 각자 선천적으로 지닌 양지(良知)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주희는 성신을 믿지만 특정 상황에 대한 앎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상황을 제대로 알아야 성선이 행위로 드러날 때 새로운 문제를 낳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존덕성과 도문학을 각각 왕양명과 주희의 학문적 특징으로 분류하게 되었다.

9강 정직 | 진실을 삶의 틀로 담아내라

9강에서는 진실이 국가와 개인 차원에서 현실화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진실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만 모든 방향을 정하지는 않으므로, 사람은 진실을 느끼고 그 진실에 어울리는 삶을 기획해야 한다. 몇몇 종교에서는 단순한 의례적 행동이 복을 가져오고 평화를 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풀리는 패키지 종교라 할 수 있다. 반면 배낭 종교에서는 늘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했으면 회개하고, 자신만이 아니라 이웃을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유학은 철저하게 배낭 종교로 불교와 도교를 패키지 종교라고 비판하곤 했다. 『중용』에서는 진실을 삶의 틀로 담아내기 위해 정치 지도자가 천하나 국가를 통치하려면 지켜야 할 9가지 규칙인 구경(九經)을 제시했다. 진실은 허위와 가짜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에 선다. 그러나 사람은 도덕에 대해 진실할 수도 있지만 욕망에 대해 진실할 수도 있다. 도덕이 욕망을 이끌어 가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도덕과 욕망의 경계가 애매해지면 진실만으로 판정을 내리기 어렵다. 이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명선(明善)이 필요하다. 진실과 명상을 갖춘다고 하더라도 사람 사는 세상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발생한다. 한두 번만으로 이전에 했던 것처럼 도덕적 삶을 잘 살 수 있는 사람도 있고 한두 번 해봐도 여전히 어설픈 사람도 있다. 『중용』에서는 중용대로 살기라는 도덕적 숙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나름의 방안을 제시한다. 될 때까지 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두 번 실패에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1 구경 | 스스로 균형을 잡고 현자를 우대하다: 수신존현(修身尊賢) - 20장

입문: 『중용』의 앞부분에서는 중용을 정리하고 중용을 실천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또 뒷보분에서는 진실을 뜻하는 성(誠)의 의미를 다루었다. 이것만으로도 도덕 윤리가 바로 현실에 그대로 실현된다고 할 수 없다. 도덕 윤리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중용』에서는 이런 도덕 윤리의 문제를 현실에 적용하여 실현하기 위해 구경, 즉 아홉 가지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구경은 정치 영역을 나타낸다.

승당: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구경, 즉 아홉 가지 지도 규칙이 있다. 하나하나 나열한다면 몸을 닦아 균형을 잡는 것, 현자를 높이는 것, 친척과 가깝게 지내는 것, 대신(중역)을 우대하는 것, 여러 관료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 백성을 자식처럼 아끼는 것, 각 분야의 기술자를 오게 하는 것, 먼 곳(변방과 외국)의 사람을 회유하는 것, 제후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 등이다.

凡為天下國家, 有九經. 曰 : 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범위천하국가, 유구경. 왈 : 수신야, 존현야, 친친야,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경대신야, 체군신야, 자서민야, 래백공야, 유원인야,

懷諸侯也.

회제후야.

여언: 첫째는 자신을 균형 잡힌 사람으로 가다듬는 수신(修身)이다. 수신은 윤리와 정치 영역을 가리지 않고 공통의 기초가 된다. 둘째는 현자를 높이 대우한다는 뜻의 존현(尊賢)이다. 셋째가 다수의 왕족을 잘 다독이는 일인 친친(親親)이다. 넷째가 경대신(敬大臣)인데, 이를 융통성 있게 운영하면 왕과 대신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지만, 기계적으로 운영하면 대신의 권위가 비대해져서 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 있다. 다섯째가 체군신(體群臣)이다. 『중용』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를 ‘체’로 표현하고 있다. 왕은 왕을 대신하여 수많은 일을 조사하고 조치를 취하는 관료들을 통해 자신의 몸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여섯째가 백성을 세금을 거둘 대상으로 보지 말고 자식처럼 아껴야 한다는 뜻의 자서민(子庶民)이다. 권력은 백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42 격려 | 잘하면 우대하고 못하더라도 기회를 주다: 가선이긍불능(嘉善而矜不能) - 20장

입문: 여기서는 구경 중에서 외부의 사람을 끌어들이는 내용을 다룬다. 외부에 있는 사람은 보통 나에게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지거나 심리적으로 먼 사람을 가리킨다. 내가 혼자 살 수 없다면 주위 사람과 어울리면서 살아야 하는데, 사람이 나에게 가까워지지 않고 멀어진다면 나는 고립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주위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위해 『중용』에서 제안하는 처방이나 리더십을 살펴본다.

승당: 철에 따라 백성들을 동원하고 세금을 덜 걷는 것은 백성들을 북돋우는 길이다. 일별로 월별로 시험하여 하는 일에 어울리게 대우하는 것은 여러 전문가를 북돋우는 길이다. 떠나는 이를 따뜻하게 보내고 찾아오는 이를 반갑게 맞이하며, 뛰어난 사람을 대단하게 여기고 뒤떨어지는 사람을 안타깝게 여겨서 기회를 주는 것은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기 위한 길이다.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고 망한 나라를 일으켜서 시조의 제사를 지내게 하며, 다른 나라의 혼란을 안정시키고 위기에 처한 나라에 도움의 손길을 뻗치며, 조회와 예방은 때에 맞춰서 하며, 보내는 원조와 은전을 풍부하게 하고 받는 공물을 간소하게 하는 것은 제후(인접국 또는 동맹국)에게 혜택을 주는 길이다.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試, 既稟稱事, 所以

시사박렴, 소이권백성야. 일성월시, 기품칭사, 소이

勸百工也, 送往迎來, 嘉善而矜不能, 所以柔遠人也.

권백공야, 송왕영래, 가선이긍불능, 소이유원인야.

繼绝世, 舉廢國, 治亂持危, 朝聘以時, 厚往薄來, 所以懷諸侯也.

계절세, 거폐국, 치란지위, 조빙이시, 후왕이박래, 소이회제후야.

여언: 구경 중 8조항부터 9조항까지는 조정을 벗어나 일반 서민, 기술자, 외국인(이주민), 국제 관계를 다루고 있다. 6조항의 요역과 세금 문제는 경감이 가장 큰 원칙이다. 7조항은 기술자와 기능인, 요즈음의 전문가를 대우하는 방식을 말하고 있다. 큰 원칙은 일을 맡기고 정례적으로 실적을 평가하고 급여 등 대우는 하는 일에 비례해서 정하는 데 있다. 8~9조항에서는 천자의 나라가 외국과 제후의 나라를 대우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한 나라가 자국의 이해와 안전을 위해 외교 관계를 풀어 나가는 데 필요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8조항에서는 교류를 하지만 천자와 제후처럼 천자가 임명하고 해임하는 관계가 아닌 사례를 다룬다. ‘송왕영래(送往迎來)’는 천자 중심의 국제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방법이다. ‘가선이긍불능’은 상대의 능력과 실력을 인정하고 아쉽고 모자란 점이 있으면 도와준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교류를 지속하면서 관계가 갑자기 악화되는 상황을 미리 막을 수 있다. 9조항은 망한 나라가 제사를 지내서 명맥을 유지하게 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원하여 국정을 정상화 할 수 있게 하고 정상 국가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혜택을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43 지선 | 진실하려면 옳고 그름에 밝아야 한다: 성신명선(誠身明善) - 20장

입문: 전국 시대의 문헌을 보면 존재와 사태의 복합적 연관성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많이 보인다. 이 시도는 연쇄법의 구문으로 나타났다. 여기서도 윤리와 정치의 다양한 현상이 어떻게 서로 물고 물리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다양한 현상이 궁극적으로 어떤 기능과 연결되는지 추적한다. 이 시도는 최종 근원에 이르러서야 탐구를 멈추는 소급법의 양상을 나타낸다. 『중용』에서는 이와 관련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제시한다.

승당: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믿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릴 기회가 없다. 윗사람에게 믿음을 얻는 방법이 있는데, 친구들 사이에서 믿음을 얻지 못하면 윗사람에게 믿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믿음을 얻는 방법이 있는데, 어버이와 원만하게 지내지 못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믿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버이와 원만하게 지내는 방법이 있는데, 저 자신을 반성해서 진실하지 않으면 어버이와 원만하게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방법이 있는데, 좋음과 옳음(선善)에 분명하지 못하면 자신에게 진실해질 수 없을 것이다.

在下位, 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 獲乎上有道,

재하위, 불획호상, 민불가득이치의. 획호상유도,

不信乎朋友, 不獲乎上矣. 信乎朋友有道, 不順乎親,

불신호붕우, 불획호상의. 신호붕우유도, 불순호친,

不信乎朋友矣, 順乎親有道, 反諸身不誠, 不順乎親矣.

불신호붕우의, 순호친유도, 반제신불성, 불순호신의.

誠身有道, 不, 不誠乎身矣.

성신유도, 불, 불성호신의.

여언: 취업에 성공하기 전부터 꿈꾸거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갖게 된 ‘꿈 또는 이상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진실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질문이다. 상사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중용』에서는 친구 사이에서 신뢰를 얻으면 상사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해법을 내놓는다. 다음으로 친구의 신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중용』에서는 어버이에게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한다. 『중용』에서는 상사 문제를 상사와의 관계에서 찾지 않고 좀 더 근원적인 관계로 소급한다. 어버이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내게 진실 하려면 스스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해법을 내놓는다. 이렇게 보면 『중용』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가름하는 명선(明善)에서 출발하여 어버이로 나아가고, 다시 친구로 나아가고, 상사로 나아간다. 오늘날에는 명선과 사람의 교제가 별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중용』에서는 윤리적 선악과 인간관계가 연결되었다고 본다. 인간관계는 직무상 업무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늘 만나는 일상적인 관계이고 함께 공동체에서 수행할 역할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용』에서 그리고 있는 이상 사회이지만 현대와 좀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는 서로 윤리적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선과 인간관계를 소극적으로 연결시키지만, 우리는 직장 동료와 친구들에게 좋은 정보를 소개하여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44 학행 | 널리 배우고 돈독하게 실천하라: 박학독행(博學篤行) - 20장

입문: 사람은 한번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가길 바란다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그만두고 이전 상황으로 되 돌아가기 쉽다.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것은 유학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다. 특히 유학에서는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덕목을 중시하는 만큼 후천적으로 길러지는 제2의 천성을 아주 중시한다.

승당: 널리 배우고, 자세하게 묻고, 조심스레 생각하고, 분명하게 분별하고, 돈독하게 실천하라!

博學之, 審問之, 慎思之, 明辦之, 篤行之!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

여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정리가 도탑다는 것은 서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가 그렇지 않은 관계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사람이기에 헤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도타운 정리는 웬만해선 사람 사이를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말이다. 불가역적인 결론과 불가역적인 합의는 여러 차례 논의를 통해 결론을 내리고 또 수많은 협상 끝에 서로 만족할 만한 합의에 도달하면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가역적인 결론과 합의를 해놓고 이와 상반되는 이야기를 한다면 앞으로 상대 말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 말을 언제 어떻게 뒤집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중용』에서는 사람이 덕목을 불가역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섯 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널리 배운다는 뜻의 박학이다. 배우더라도 그 범위가 좁으면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로 착각하여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문제가 생긴다. 둘째는 자세하게 묻는다는 뜻의 심문이다. 들어서 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말과 생각으로 정리하려면 묻는 과정이 필요하다. 셋째는 조심스레 생각한다는 뜻의 신사다. 생각할 때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이모저모를 따져보며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실수를 줄일 수 있다. 넷째는 분명하게 분별한다는 뜻의 명변이다. 생각이 갈래로 나뉘지 않고 덩어리로 뭉쳐져 있으면 생각이 꽉 막히거나 뭐가 뭔지 몰라서 뒤엉키는 경우가 있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잘게 잘라서 사고하면 혼선을 피할 수 있다. 다섯째는 돈독하게 실천하라는 뜻의 독행이다. 독행은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못을 박는 것이다. 박학, 심문, 신사, 명변을 거쳐 독행에 이르는 것을 통해 불가역적인 제2의 천성을 기른다.

45 노력 | 남이 열 번에 성공하면 나는 천 번을 한다: 인십기천(人十己千) - 20장

입문: 자신을 믿지 못하고 패배감에 빠지는 일은 과거에만 있었던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려운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중용』에서도 이 문제를 중요하게 검토하고 있다.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중용』을 비롯하여 유학에서 말하는 인륜 도덕이 ‘그들만의 리그’를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군자의 도를 실현하게 하려면 사람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길을 찾아야만 한다.

승당: 실행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실행하려고 할 경우 독실하게 되지 않으면 그만두지 말 것이다. 주위 사람이 한번 해서 잘하면 나는 백 번을 할 것이며, 주위 사람이 열 번 해서 잘하면 나는 천 번이라도 할 것이다. 과연 이 방법을 제대로 한다면 비록 사람이 처음에 어리석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똑똑해질 것이고, 비록 사람이 유약하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강건해질 것이다.

有弗行, 行之, 弗篤弗措也. 人一能之, 己百之.

유불행, 행지, 불독불조야. 인일능지, 기백지.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

인십능지, 기천지. 과능차도의, 수우필명, 수유필강.

여언: 『중용』에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해결되지 않으면 그만두지 말라는 끈기를 강조했다. 둘째, 한두 번 하고 안된다고 선언을 할 것이 아니라 잘하는 사람보다 백배 천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마지막 부분을 보면 『중용』에서는 낙관적일 정도로 사람을 신뢰한다. 『중용』을 비롯해서 유학에서 본적으로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10강 효성 |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보다

10장에서는 효(孝)가 『중용』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맥락을 살펴본다. 보통 『중용』하면 중용과 성(誠)에 주목하여 효의 언급에 의아해하기도 한다. 중용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던 기억과 관행을 다시 생각해 보자고 제안한다. 또한 살아 있는 사람의 오륜만이 아니라 산 자와 죽 은자의 오륜으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산 자는 제사를 지내 기념하는 등으로 죽은 자를 잘 대우한다. 이것은 산 자를 쉽게 내버리지 않는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죽음을 통해 사람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만이 아니라 산 자끼리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산 자는 죽은 자가 걸어왔던 길을 하루아침에 뜯어고쳐서 천지개벽을 한 듯 부산을 떨지 않는다. 그런데 급변하는 오늘날에는 바꾸기만 하면 뭔가 잘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어받을 것은 그대로 이어받고 고쳐야 할 것은 하나씩 고쳐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46 성복 | 재계하고 정갈한 태도로 성대하게 차려입다: 재명성복(齊明盛服) - 16장

입문: 제사를 지내려면 어떤 태도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승당: 온 세상의 사람들, 즉 후세로 하여금 재계하여 정갈한 태도로 복식을 성대하게 갖추어서 제사를 받들도록 한다. 존재감이 곳곳으로 흐르며 넘실거려서 사람들(현세대)의 머리 위에 있고 또 사람들의 좌우에 있는 듯하다.

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사천하지인, 재명성복, 이승제사, 양양호여재기상, 여재기좌우.

여언: 종교를 인간이 엄숙한 예식을 통해 성숙해지며 삶의 근원적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정리하면, 유학은 예(禮), 도(道), 리(理), 성(性), 성(誠), 학(性) 등의 개념을 바탕으로 개인의 구원과 사회 구원을 기획하는 만큼 종교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특히 제사는 유학을 종교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제사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만나고 교류함으로써 죽은 자를 주기적으로 소환하여 공동체에서 영원히 기억되게 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제사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에서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제사의 준비를 『중용』에서는 ‘재명성복’으로 제시한다. 이는 부정을 탈 만한 모든 일을 피하고 목욕을 하는 등 심신을 정갈하게 하는 활동을 말한다. 여재(如在)는 죽은 조상 또는 귀신이 강림하여 제사의 공간에 임한 상황을 가리킨다. 죽은 조상은 제사를 통해 사라지지 않고 주기적으로 되살아나게 된다.

47 계승 | 뜻을 잇고 일을 풀어나가다: 계지술사 - 19장

입문: 효도는 여전히 사람이 지켜야 할 덕목으로 인정된다. 효도는 사람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인 부모와 자식 사이에 지켜야 할 덕목이므로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뜻이 같다고 생각하기 쉽다. 효도는 가족 속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느끼는 자연스런 애정과 그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효도의 개념을 바탕으로 인용문을 살펴보면 생각한 것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승당: 무왕과 주공은 틀림없이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효자이리라. 두 사람이 보인 효란 사람(과거 세대)의 뜻을 잘 이어가며, 사람의 일을 전통에 따라 잘 풀어나간 것이다.

子曰 : 武王周公, 其達孝矣乎!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

자왈 : 무왕주공, 기달효의호! 부효자, 선계인지지. 선술인지사자야.

여언: 효는 나이 많은 노인이 혼자 걸어갈 힘이 없으니 자식이 부축하는 모양으로 풀이되었다. 그러나 효는 힘 있는 현세대가 힘 없는 기성세대를 돕는다는 맥락이 아니라, 지혜와 경험이 없는 현세대 또는 미래 세대가 기성세대에게 지혜와 경험을 물려받는다는 문맥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용』의 원문을 보면, 제일 먼저 주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만든 무왕과 주공을 두고 세상 모든 사람이 공인하는 효자로 칭찬하고 있다. 여기서는 효도의 정의를 계지(繼志)와 술사(述事)의 측면에서 풀이하고 있다. 계지는 현세대 또는 미래 세대가 기성세대의 중시하거나 하고자 했던 뜻을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간다는 취지이고, 술사는 계지와 마찬가지로 기성세대가 추진했거나 추진하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지 않고 그대로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중용』에서 효도를 계지와 술사로 풀이하고 있는 것은 효를 지혜와 경험이 많은 노인이 현세대에게 지혜와 경험을 넘겨주고 현세대는 넘겨받은 지혜와 경험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 풀이와 잘 맞아떨어진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은 효 자의 어원 풀이와 『중용』의 효에 대한 정의에 나오는 효의 특성과 서로 일치한다. 애틋한 정감으로서 효는 사회가 2대 또는 3대로 구성된 뒤에 나타나는 후대의 효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뜻과 사업을 존중하는 효도는 가장 초기의 형태다. 이 때문에 후손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나의 위치는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고마움의 표시로서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다.

48 제사 | 고치고 늘어놓고 펼치고 올린다: 수진설천(修陳設薦) - 19장

입문: 명절에는 사람이 한 곳에 모이게 되므로 함께 먹을 음식과 함께 지낼 공간이 필요하다. 이렇다 보니 누가 일을 하고 비용을 대느냐를 두고 가볍거나 무거운 논란이 생겨난다. 더구나 요즘에는 자식이 없거나 한 둘인 가정도 많고, 있더라도 아들이 있는 집도 있고 딸만 있는 집도 있다. 이런 실정이기에 제사를 왜 지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제사를 어떻게 지낼지 논의가 절실히 필요하다.

승당: 봄가을에는 조상들의 영령이 깃든 사당을 수리하고 종묘에 보관해온 여러 귀중한 기물을 진열하고 조상들이 남긴 의상을 펼쳐 놓고 제 철에 난 음식을 제물로 올린다.

春秋其祖廟, 其宗器, 其裳衣, 其時食.

춘추기조묘, 기종기, 기상의, 기시식.

여언: 오늘날 우리는 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제물을 중심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 제사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제도다. 공자가 말했듯이 제사는 조상의 혼백이 찾아오게 해야 하고 후손이 그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본이고, 나머지는 형식이고 장식이다.

49 동락 | 함께 술을 권하며 빠짐없이 어울리다: 여수체천 - 19장

입문: 동아시아를 제외하면 세상 어디에도 뛰어난 학자를 위해 건물을 짓고 위패를 안치하여 주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곳은 없다. 이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무력이 아니라 문화의 힘을 세상에 실현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승당: 종묘의 의례는 조상의 출신과 서열을 매기는 것이고, 조상의 작위를 순서대로 나누는 것은 신분의 귀천을 밝히기 위한 것이고, 일을 순서대로 나누는 것은 똑똑한 사람을 가려서 맡기기 위한 것이다. 여럿이 모여 술을 권할 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술을 따르는 것은 낮은 사람을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서 머리카락의 색깔에 따라 차례를 두는 것은 나이대로 대접하기 위한 것이다.

宗廟之禮, 所以序昭穆也. 序爵, 所以辨責賤也. 序事,

종묘지례, 소이서소목야. 서작, 소이변귀천야. 서사,

所以辨賢也, 旅酬, 下為上, 所以逮賤也. 燕毛所以序齒也.

소이변현야, 려수, 하위상, 소이체천야. 연모소이서치야.

여언: 종묘는 살아서 왕 노릇을 하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안치하는 곳이다. 종묘는 위패를 안치하지 않으며, ‘서상제(西上制)’라고 하여 왼쪽이 윗 세대가 되고 오른쪽으로 올수록 후손이 된다. 유학에서는 다양한 의식을 치른다. 의식을 치를 때 누가 먼저 하고 누가 뒤에 하느냐는 순서가 중요하다. 신분과 서열을 따져야 할 때는 따지더라도 함께 어울리는 장이 있어야 한다. ‘여수제천’은 종묘를 비롯하여 다양한 곳에서 제사를 올릴 때 참여자들끼리 함께 어울려서 술을 권하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것은 맹자가 강조한 ‘여민동락(與民同樂)’과도 통한다.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위로하고 축하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50 치국 |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여시제장(如示諸掌) - 19장

입문: 크지 않은 단체도 운영하다 보면 어려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천자나 제후의 권한이 크기는 하지만, 규모가 크다 보니 어려운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러나 『중용』에서는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세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승당: 무왕과 주공은 선왕들의 자리에 나아가서 그분들이 만든 의례를 실행하고, 그분들이 만든 음악을 연주하며, 그분들이 귀하게 여기던 사람을 존중하고, 그분들이 친밀히 사랑하던 사람을 아끼며, 죽은 자 돌보기를 산 자를 돌보는 것같이 하고, 없는 자 돌보기를 살아 있는 자를 돌보는 것같이 한다. 이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완전한 효도다. 하늘과 땅에 지내는 교사의 예는 상제를 섬기는 것이고, 종묘의 예는 선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다. 교제와 사직제 그리고 봄가을에 지내는 체제와 상제에 밝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물건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보는 것처럼 쉽다.

踐其位, 行其禮, 奏其樂, 敬其所尊愛其所親, 事死如

천기위, 행기례, 주기악, 경기소존애기소친, 사사여

事生, 事亡如事存, 孝之至也. 郊社之禮, 所以事上帝

사생, 사망여사존, 효지지야. 교사지례, 소이사상제

也. 宗廟之禮, 所以祀乎其先也. 明乎郊社之禮, 稀嘗

야. 종묘지례, 소이사호기선야. 명호교사지례, 체상

之義, 治國, 其如示諸掌乎!

지의, 치국, 기여시제장호!

여언: 인용문에는 상제에게 지내는 제사, 종묘에 지내는 제사, 사직에 지내는 제사, 계절에 지내는 제사가 연이어 나온다. 그리고 제사를 잘 지내면 나라와 세상을 다스리는 일이 손바닥 위에 물건을 올려놓고 보는 것처럼 쉽다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기가 쉽지 않다. 이와 달리 『중용』이 쓰인 시대는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지금의 지위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 세대나 더 먼 조상에게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다양한 존재에게 감사의 예식을 치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자신을 있게 해준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는 인물이 된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이뿐 아니라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자원과 터전을 제공해 주고 권력의 정통성을 부여해 주는 하늘과 땅에도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다. 곡식과 계절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므로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제사를 지내는 한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 제사를 치국과 치천하를 손쉽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후손이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많지 않은데 제사를 지낸다고 하니 보은보다 고통의 측면에 주목하는 것이다. 개인주의 시대에 제사가 설 땅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11강 감응 | 진실하면 이루어지는 것들

11강에서는 중용과 진실을 따르면 어떻게 되느냐라는 문제를 다룬다. 사람은 보통 유아기가 끝나면 학습기를 보낸다. 학습기에 갖춘 실력과 능력을 바탕으로 세상에 나서고 정년을 맞이하고 노년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인생의 준비는 나라마다 문화마다 다르다. 학습기가 좀 더 길거나 짧은 차이가 있다. 『중용』에서는 천과 사람의 관계에서 천이 이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이 중용과 진실을 뜻하는 성(誠)대로 살아가면 천은 그에 상응하는 배려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감응(感應)론이다. 먼저 천은 세상의 모든 만물과 관련을 맺는다. 이것이 바로 천이 땅과 함께 만물의 어버이로 간주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은 만물에게 각자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만물은 이 기회를 살릴 수도 제대로 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이때 천은 잘 자라는 것은 북돋워주지만 쓰러지고 시든 것은 넘어뜨린다. 이것은 천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천은 세계를 창조하고 심판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만물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역할만을 한다. 중용과 진실을 뜻하는 성대로 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고 쌓아가면 각자 자신이 살아가는 곳을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정치는 결국 신이 아니라 사람이 하기에 달려 있다. 이것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신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한 세대가 이룩하고 사라지면 다음 세대가 이어 받아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꾸려나가게 된다. 이때 이전의 결실과 성취는 다음 세대가 참조해야 할 자원이 된다. 사람이 전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면 사람은 자신의 역량을 키우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천지의 자식으로 수혜만 바라지 않고 천지와 함께 세상을 운영하는 일원이 된다.

51 생물 | 각자의 자질에 따라 생명력을 북돋우다: 인재이독 - 17장

입문: 천은 땅과 함께 사람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낳고 기른다. 천지는 만물의 부모라고 할 수 있다. 농업이 생활 자원을 생산하던 시대에 재해로 일 년 농사를 망칠 수도 있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천이 왜 나 또는 우리에게 가혹하냐고 한탄할 수 있다. 사람이라면 많은 자식에게 다 잘해 주지 못한다고 해도 천이 왜 그렇게 못하냐고 울분을 터트릴 수 있다. 이에 대해 『중용』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본다.

승당: 하늘(하느님)이 만물을 생겨나게 할 때 반드시 개별적인 자질에 따라 생명력을 두텁게 했다. 이 때문에 제대로 잘 자란 것은 자라게 북돋워주고 시들어 기운 것은 죽도록 뒤엎어버린다.

天之生物, 必因其材而篤焉. 故栽者培之, 傾者覆之.

천지생물, 필인기재이독언. 고재자배지, 경자복지.

여언: 사람의 역사는 잉여를 두고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인류의 원시 사회는 대부분 공산 사회의 특성을 보인다. 남는 것이 없으니 잉여를 두고 다툴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철기를 농기구로 이용하면서 사람은 자연에 대해 늘 불리한 입장에서 조금 벗어나 먹고 생활하는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하게 되었다. 잉여가 생기자 사람들은 어떻게 나눌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공정하게 나눠서 함께 잘 사는 방향과 ‘내’가 더 많이 가져서 잘 살자고 생각하는 방향 두 가지였다. 전자가 문명의 길이고, 후자가 독재의 길이다. 잉여가 축복임에도 잉여로 인해 갈등과 대립이 진행된다면 인류에게 재앙이다. 문명은 축복으로서 잉여를 인류가 함께 더 잘사는 데 이용할 수 있도록 이성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잉여를 조금이라도 더 공정하게 나누기 위한 제도와 틀을 만들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독재자가 국가의 이름으로 잉여를 대부분 독점하는 경우도 있고, 몇몇 자본가들은 통제받지 않고 국경을 넘나들며 잉여를 키우고 있다. 이런 차이로 인해 ‘부익부빈익빈’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으니 그 연원이 멀고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은 자신의 권능을 나누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는 ‘인재이독’이고 다른 하나는 ‘재배경복(栽培傾覆)’이다. ‘인제이독’은 천이 세상의 만물이 재질과 역량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더 잘 되도록 도와준다는 맥락이다. ‘재배경복’은 ‘인재이독’을 더 구체화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제대로 잘 자라서 잘 된 사물은 더 잘하게 북돋워주고 자라다가 시들어 기운 사물은 죽도록 뒤엎어버린다는 뜻이다. 얼핏 보면 잔인하고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천이 무한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모든 것을 할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자는 맥락이다. 천이 한계가 있는 만큼 사람이 보충할 부분이 남게 된다. 그래서 바로 사람이 천지와 협업하는 삼재가 필요한 것이다.

52 수명 | 덕이 높은 자는 하늘의 부름을 받는다: 대덕수명 - 17장

입문: 무슨 일을 하다가 힘에 부쳐서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다. 이 경우 조금 쉬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지만, 자신이 일을 하더라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면 견디기가 쉽지 않다. 『중용』은 순 임금을 소재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는 어떤 사람이길래 하늘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는지 『중용』의 원문을 살펴보자.

승당: 순임금은 위대한 효자이구나! 덕스러움은 성인이 되고, 존귀함은 천자가 되고, 부는 온 세상의 것을 가지고, 종묘에서 조상신들은 흠향하고 자손들은 순의 영광을 보존하는구나! 위대한 덕은 반드시 어울리는 자리를 얻으며, 반드시 어울리는 보상을 받으며, 반드시 어울리는 명예를 누리며, 반드시 어울리는 생명을 살게 된다. …… 그러므로 위대한 덕의 소유자는 반드시 하늘의 명령을 받게 된다.

子曰 : 舜其大孝也與, 德為聖人, 尊為天子, 富有四海

자왈 : 순기대효야여, 덕위성인, 존위천자, 부유사해

之內, 宗廟饗之, 子孫保之, 故大德必得其位. 必得其

지내, 종묘향지, 자손보지, 고대덕필득기위. 필득기

祿必得其名, 必得其壽. …… 故大德者必受命.

록필득기명, 필득기수. …… 고대덕자필수명.

여언: 순은 신화 전설의 시대에 훌륭한 군주로 알려진다. 순은 계모 밑에서 갖은 구박을 받으며 살았지만, 지극정성으로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모시자 부모와 이복동생 상도 새사람이 되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군주였던 요는 후계자를 찾다가 순의 이야기를 듣고, 농사꾼 순에게 자신의 딸을 아내로 짝지워주고 사위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처럼 순은 임금이 되기 전부터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대표적인 효자였다. 요는 그의 부모를 선하게 변화시킨 순이기에 세상에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러한 능력이 바로 덕(德)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중용』에서는 순의 사례를 통해 사람이 덕을 쌓으면 천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 자신이 속한 지역과 세상을 위해 진심으로 진실하게 노력하면 주위 사람들은 모르더라도 반드시 천이 알아준다는 말이다.

53 효과 | 정치는 사람에 달려 있다: 위정재인(為政在人) - 20장

입문: 정치인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점점 말을 혼과 마음을 담아 자신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쓰지 않고 일종의 구호나 슬로건처럼 쓴다. 대중이 선호하는 말을 내걸어 관심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 다음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듣기 좋게 떠드는 구호가 아니라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개념과 말을 복원할 때다. 『중용』에서는 정치가 제대로 된 성과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는지 살펴보자.

승당: 노나라의 애공이 정치에 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정치는 목간과 죽간, 즉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두 분과 같은 인물이 있으면 그와 같은 훌륭한 정치가 살아날 수 있고, 두 분과 같은 인물이 없으면 그와 같은 훌륭한 정치가 움츠러들게 된다. 사람의 도리는 정치를 통해 빠르게 나타나고 땅의 도리는 나무를 통해 빠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두 분의 효력이 정치로 나타나는 것은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갈대와 비슷하다. 정치는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다. 자기 수양에 의거해서 인재를 선발하고, 도리에 의거해서 자기 수양을 하고, 사랑(연대)에 의거해서 도리를 배양한다.

哀公問政. 子曰 :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 則其

애공문정. 자왈 : 문무지정, 포재방책. 기인존, 즉기정

. 其人亡, 則其政息. 人道敏政, 地道敏樹, 夫

거. 기인망, 즉기정식. 인도민정, 지도민수, 부정야자

蒲盧也. 故為政在人, 取人以身, 修身以道, 修道以仁.

포로야. 고위정재인, 취인이신, 수신이도, 수도이인

여언: 국가와 기업은 혼자 힘으로 관리할 수 없다. 말만으로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반짝이는 좋은 생각이 있어도 바로 정책이 되지 않는다. 먼저 현실의 다양한 위험 요소와 가능성을 고려하여 생각을 정책으로 가다듬어야 한다. 그런 다음 정책을 입안하고서 내외부 집단의 반응을 점검하고 실행 시점을 조율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 인재가 필요하다. 인류는 기나긴 역사를 통해 인재를 얻는 합리적인 방법을 찾고자 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주위에서 사람을 찾았다. 주위 사람을 뽑는 것도 한계가 있으므로 두 번째로 생각해낸 것이 추천제다. 추천자가 대상자의 실력만 보고 추천하면 인재를 광범위하게 활용할 수 있지만, 추천자가 자신의 관계와 청탁에 따라 추천하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내는 제도로 전락할 수 있다. 시대가 흘러 자격을 갖춘 인재가 늘어나자 과거를 비롯한 시험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시험도 공정성과 관련해서 시비가 있지만 아직 완전히 대체할 방법이 없다.

54 모범 | 사상적 근원을 전하고 시대의 문법을 세우다: 조술헌장(祖述憲章) - 30장

입문: 시대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있다. 또한 사상사에 큰 별은 철학 사상의 역사를 기록할 때 빠지지 않고 페이지를 장식한다. 이들 모두는 자신 앞에 기틀을 놓은 선배의 성과를 자양분으로 삼거나 기틀로 삼아 큰 별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또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끊임없이 질의 응답을 나눈 제자들의 공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 공자가 유교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배경을 『중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승당: 중니(공자)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모범으로 삼아 두 분의 뜻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었고, 문왕과 무왕을 기준으로 삼아 두 분의 정신을 밝게 빛냈으며, 위로는 하늘의 때를 본받았고 아래로는 각 지역의 다양한 풍토(지역 문화)를 그대로 좇았다. 비유하면 하늘과 대지가 실어주지 않는 것이 없고 덮어주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았다. 또 사계절이 번갈아 바뀌고 해와 달이 바꾸어가며 빛을 비추는 것과 같았다.

仲尼祖述免舜, 憲章文武, 上律天時, 下襲水土. 辟如

중니조술요순, 헌장문무, 상률천시, 하습수토. 벽여

天地之無不持載, 無不覆幬, 辟如四時之錯行, 如日月之代明.

천지지무부지재, 무불복도, 벽여사시지착행, 여일월지대명.

여언: 오늘날 공자는 동아시아 유교 문화를 창조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중용』은 이에 대해 뚜렷한 주장을 제시한다. 첫째가 ‘조술요순(祖述免舜)’이고 둘째가 ‘헌장문무(憲章文武)’다. 요순은 황하 문명을 건설한 영웅으로, 역사적 인물의 특징과 신화 전설의 주인공으로서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두 영웅은 부족 연맹의 우두머리로서 권력을 세습하지 않고 현자끼리 선양한 사례로 주목을 받아왔다. 이 시대의 우두머리는 권리보다 엄중한 의무와 막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고 공자는 요순에 이어 은나라의 천자 시절에 시안 지역에서 활약한 주나라 제후인 문무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이 폭정을 할 때 문왕은 전국에서 주나라의 선한 영향력을 키우며 미래를 기다렸다. 그의 아들 무왕은 문왕이 다져놓은 정치적 자산을 바탕으로 목야에서의 전쟁으로 주왕의 폭정을 끝냈다. 무왕은 주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세우고 요순이 말했던 덕의 정치를 펼친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문무도 요순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대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공자는 요순과 문무를 이상 정치를 이룩하기 위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인물로 설정하면서 ‘조술’과 ‘헌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조술에서 조는 조상으로 여긴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자신의 사상적 근원으로 간주한다는 맥락으로 쓰인다. 헌장에서 헌은 법, 틀, 기준을 뜻하고 장은 문장, 문법이라는 뜻으로, 합쳐서 어떠한 사실에 대하여 이상으로서 규정한 원칙을 선언한 규범을 가리킨다. 공자도 사상의 빚쟁이로서 자신을 일구어냈으니 우리도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55 확장 | 하늘과 짝이 되다: 배천(配天) - 31장

입문: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평소에 했던 일을 바탕으로 스스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맡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 유학자들도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바람을 모으면 ‘배천(配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미를 알아보자.

승당: 이렇기에 그의 성명(이름)이 중원 지역에 널리 퍼지고 그의 은혜가 주위의 이민족까지 미치게 된다. 배와 수레가 닿은 곳마다 사람의 힘이 미치는 곳마다 하늘이 덮어주고, 대지가 실어주는 곳마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마다 한곳도 빠짐없이 혈기(지각)가 있는 존재는 모두 그를 존경하고 친밀하게 좋아한다. 그러므로 성인이 하늘과 짝이 된다.

是以聲名, 洋溢乎中國, 施及蠻貊, 舟車所至, 人力所通,

시이성명, 양일호중국, 이급만맥, 주차소지, 인력소통,

天之所覆, 地之所載, 日月所照, 霜露所隊, 凡有血氣者,

천지소부, 지지소재, 일월소조, 상로소대, 범유혈기자,

莫不尊親, 故曰配天.

막부존친, 고왈배천.

여언: 유가가 자신들의 이상을 ‘배천’으로 표현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천의 의의와 한계를 알 필요가 있다. 고대에 생활과 생명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천은 정치 질서와도 관련이 깊었다. 천은 지상의 수많은 인물 중에 특정한 사람에게 세상을 통치할 기회와 권능을 부여했기에, 최고 통치자는 천자로 불렀고, 천과 정치 질서는 한 몸을 이루었다. 하지만 현행의 정치 질서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통치자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처럼 천은 인간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제사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천은 권능의 측면에서 무제한이 아니었다. 자연 재해에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 하늘이 모든 사물을 남김없이 비춰주는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이런 사람을 요즘에는 의인이라 하지만 유학에서는 성인이라 한다. 성인과 의인은 하늘과 땅이 다 하지 못하는 역할을 대신하여 세상에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가져온다. 이것이 바로 ‘배천’이라고 할 수 있다.

12강 포용 |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12강에서는 중용의 진실을 뜻하는 성(誠)을 바탕으로 50대에서 60대로 넘어가면서 필요한 지혜를 살펴본다. 공자가 얘기한 나이 별 초점 사항은 30대의 이립(而立), 40대의 불혹(不惑), 50대의 지천명(知天命), 60대의 이순(耳順)이다. 50대에서 60대로 넘어가는 즈음에는 포용이 중요한 덕목이다. 포용하려면 주위를 편하게 둘러보며 다양한 일을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주위에 사람이 있는 것은 내가 직접 해야 할 모든 일을 나눠 할 수 있어 내가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어 고마운 일이고, 나와 다른 것도 내가 달리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추사 김정희의 예서 대련에서도 평범한 일상의 발견을 엿볼 수 있다. 『중용』에도 김정의의 발견과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56 생동 | 솔개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헤엄치다: 연비어약(鳶飛魚躍) - 12장

입문: 사람은 일상적으로 늘 하던 것을 하지 못하면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게 느낀다. 늘 하던 것을 그냥 할 수 있다는 것, 평범함이 주는 행복이다. 『중용』에서는 이 평범함이 주는 행복감을 『시경』에서 찾아내 부연 설명하고 있다.

승당: 자기주도적인 군자의 도리는 그 작용이 더없이 넓지만 그 본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알기 어렵다. …… 『시경』에서 읊었다. "솔개가 하늘 높이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헤엄친다." 이는 위의 하늘과 아래의 물에서 도리가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을 말한다.

君子之道, 費而隱. …… 詩云 :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군자지도, 비이은. …… 시운 : 연비려천, 어약우연, 언기상하찰야.

여언: ‘연비어약’은 솔개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헤엄치는 장면을 나타낸다. 하나도 신기할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누구라도 보았던 일이고 어디서라도 관찰할 수 있는 일이다. 유학에서는 ‘연비어약’을 단순히 물리적인 사건으로 취급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의미가 담긴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이러한 장면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시간을 나타낸다. 이러한 시간에는 번뇌와 불안이 없고 평화와 안도감이 느껴진다. 평화와 안도감 속에서 동질감을 느끼며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거나 이전에 즐겨 했지만 잊었던 취미를 즐기거나 무뎌졌던 심장이 새로운 일을 찾아서 두근거릴 수 있다. 행복감은 꿈에 그리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도 느낄 수 있지만, 사실 살면서 이런 행복감은 몇 번밖에 느끼지 못한다. 이럴 때 별로 힘든 일도 아니지만 그동안 마음을 내지 못해서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면 바쁘게 돌아가던 시간이 멎는다. 이런 체험은 지극히 평범한 시간이고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런 체험을 하고 현실의 시간으로 돌아오면 사람은 스스로 삶이 더 여유롭고 느긋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체험은 사람이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할 때 자주 겪을 수 있다. ‘연비어약’은 그런 시간을 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57 중정 | 위엄 있고 점잖고 곧고 바르니 존경받는다: 재장중정(齊莊中正) - 31장

입문: 요즘에는 연예인만이 아니라 대중의 관심을 받는 많은 사람이 대중과 일상을 공유함으로써 친밀감을 높이려고 노력한다. 유학에서 성인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다. 그래서 유학은 ‘성인이 되는 학문’이라는 뜻에서 성학(聖學)으로 불린다.

승당: 오직 세상에서 최고의 성인만이 총명과 예지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으므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백성을 마주할 수 있고, 관대하고 부드러울 수 있으므로 어떠한 사람(일)이든지 포용할 수 있고, 강인하고 굳건하므로 지켜야 할 것을 굳게 잡을 수 있고, 위엄 있고 점잖으며 곧고 바르므로 함께 어울리며 존경받을 수 있고, 제도의 조리를 세밀하게 따질 수 있으므로 시비를 분별할 수 있다.

唯天下至聖, 為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유천하지성, 위능총명예지, 족이유림야. 관유온유,

足以有容也. 發强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

족이유용야. 발강강의, 족이유집야. 재장중정, 족이

有敬也. 文理密察, 足以有別也.

유경야. 문리밀찰, 족이유별야.

여언: 『중용』을 비롯하여 유학에서는 보통 사람이 덕행을 가리키는 중용과 진실을 뜻하는 성(誠)을 통해 사(士), 현인(賢人)을 거쳐 성인으로 상승할 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성인은 사람이 인격이 높아져서 도달하는 최후의 단계다. 성인이 더 노력한다고 해서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학에서는 결코 사람이 신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범인과 비교하여 『중용』은 성인을 다섯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첫째는 ‘총명예지(聰明睿知)’다. 앎과 관련이 있는 이 네 글자는 어떠한 문제에 닥치더라도 풀어갈 수 있으니 누구를 만나더라도 조금도 꿀리지 않고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 둘째는 ‘관유은유(寬裕溫柔)’다. 부드러움과 관련이 있는 이 네 글자는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치지 않고 끝까지 들으면서 좋은 말을 받아들일 수 있다. 셋째는 ‘발강강의(發强剛毅)’다. 굳세다는 의미의 이 네 글자는 상황에 끌려가지 않고 전체적으로 장악할 수 있다. 넷째는 ‘재장중정(齊莊中正)’이다. 성인은 위엄이 있고 점잖으며 곧고 바르며, 기품이 넘치고 공정하다. 틈이 있어야 시비를 걸 텐데 바늘만 한 허점도 보이지 않아.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다. 그냥 존경할 수밖에 없다.

다섯째는 ‘문리밀찰(文理密察)’이다. 이는 공중에서 빙빙 돌다가 먹이를 포착하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쏜살같이 날아와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와 같이 성인도 ‘문리밀찰’하여 조리가 있고 디테일에 강하니 사태를 차근차근 구분하여 잘 풀어갈 수 있다. 이처럼 성인은 다섯 가지 덕목을 갖추고 있으니 사람이 노력 끝에 이른 최고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58 은은 | 비단옷 입고 홑옷을 걸치네: 의금상경(衣錦尚網) - 33장

입문: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도 옷은 물론 생활 태도며 가치관이며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시대에 따라 세대가 나뉘고 세대마다 각자의 특성을 보이게 마련이다. 『중용』에서도 옷 이야기를 끄집어내 옷 자체에서 입은 옷의 의미로 논의를 확대하고 있다.

승당: 『시경』에서 읊었다. "비단옷을 입고서 그 위에 홀옷을 걸쳤구나!" 비단옷의 화려한 무늬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주도적인 군자의 도리는 은은하지만 나날이 빛이 나고, 이기적인 소인의 도리는 선명하지만 나날이 줄어든다(없어진다).

詩曰 : 衣錦尚網,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

시왈 : 의금상경, 오기문지저야. 고군자지도, 암연이

日章. 小人之道, 的然日亡.

일장. 소인지도, 적연이일망.

여언: 『중용』에서는 옷을 비롯해서 자신을 꾸미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시경』과 『중용』에서 소인의 옷차림새를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군자와 상반되는 점을 고려하면 겉옷의 화려한 무늬를 가리는 옷을 입지 않고 그대로 노출되리라 짐작할 수 있다. 군자가 걸어가는 길은 은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은은 함은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고 드러나지 않은 다른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은은함의 특성은 깊이를 더하는 맛을 주고 있는 듯 없는 듯하니 쉽게 풀리지 않고 오래간다는 것이다. 『중용』은 이를 ‘은은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날이 빛이 난다’고 포착하고 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뭐가 뭔지 분명하지 않고 애매하다는 느낌을 준다. 반면 소인이 걸어가는 길은 겉으로는 뚜렷해 누가 봐도 분명하게 드러나서 다른 것과 헷갈리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에 더 있지 않으니 남겨진 여백이 없다. 즉 선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명함은 시선을 확 끌어당기고 감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만큼 그 효과가 오래가지 않고 쉽게 피로를 느끼게 한다. 이는 또 새로운 것으로 주의를 옮기게 만든다. 『중용』에서는 이를 ‘선명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날이 줄어든다’고 포착하고 있다. 극단의 시대에 태어난 『중용』은 자극적이고 색다른 것이 주는 즐거움에서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 주는 평안함의 가치를 되돌아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여기서는 옷, 색감, 미의식의 측면에서 피로감을 주는 선명함에는 없는 은은함의 깊이와 여백이 주는 맛을 일깨워주고 있다.

59 신중 | 방구석에서조차 부끄럽지 않네: 불괴옥루(不愧屋漏) - 33장

입문: 공자는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하게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주의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과 처신이 은연중에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오늘날 옷은 개인의 취향이므로 다른 사람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승당: 『시경』에서 읊었다. "네가 혼자 방 안에 있을 때를 살펴보니 방구석에서조차 부끄럽지 않네!" 그러므로 자기주도적 군자는 움직이지 않아도 잡도리하고 말하지 않아도 믿는다.

詩云 : 相在爾室, 尚不愧屋漏, 故君子, 不動而敬, 不言而信.

시운 : 상재이실, 상불괴옥루, 고군자, 부동이경, 불언이신.

여언: 『중용』에서는 사람이 홀로 있는 사적 공간을 공적 공간과 마찬가지로 주의하라며 ‘신기독(愼其獨)’을 요구했다. 더구나 『시경』의 내용과 이에 대한 풀이는 ‘신기독’에서 말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을 말하고 있다. 첫째, ‘상재이실(相在爾室)’에서 누군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를 뚜렷하게 하고 있다. 둘째, 완전한 비밀 공간이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셋째, 『시경』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함을 암시하고 있고, 『중용』에서는 바라보는 존재가 언동을 하지 않더라도 군자는 스스로 자신을 규율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넷째, 『중용』에서는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규제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근원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이 보느냐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이처럼 내가 한 일이 어딘가에 분명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한 일이 확실하게 인지되고 기억되어 사실로 분명하게 있게 된다. 그 역할은 신이 하지 않는다면 마음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60 비교 | 덕은 새털처럼 가볍다: 덕유여모(德輔如毛) - 33장

입문: 『중용』의 마지막 구절로 주제가 덕(德)이다. 사람은 하늘이 명령한 제1의 천성에 디디고 서서 덕행을 가리키는 중용과 진실을 뜻하는 성을 배양하여 제2의 천성으로 우뚝 세워야 한다. 제2의 천성이 바로 덕이다. 한번 시도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다시 시도하고 그렇게 되풀이하여 결국 제 2의 천성을 일구어내야 한다. 제1의 천성이 사람다움이라면 제2의 천성은 제1의 천성을 나에게 맞게 일구어내는 나다움이다. 사람다움이 나다움과 만나는 제2의 천성을 빚어내는 일은 실패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실패에 넘어지지 않고 일어서서 다시 시작한 끝에 나다움이라는 제2의 천성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공자가 『논어』에서 힘주어 역설한 ‘실패의 존재론’이다.

승당: 『시경』에서 읊었다. "나는 밝은 덕을 품을 뿐 들리는 호통 소리와 보이는 얼굴빛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네!" 공자가 말했다. 감각으로 느껴지는 호통 소리와 얼굴빛이 백성들을 감화(변화)시키는 데 부차적인 방법일 뿐이다.

『시경』에서 읊었다. "덕은 새털처럼 가볍다." 터럭이 아무리 가볍다고 하더라도 감각적으로 견줄 만한 것이 있다. "하늘의 일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런 하늘이야말로 더 말할 나위 없이 지극한 것이다.

詩云 : 予懷明德, 不大聲以色. 子日 : 聲色之於以化民, 末也.

시운 : 여회명덕, 부대성이색. 자왈 : 성색지어이화민, 말야.

詩云 : 德輔如毛, 毛猶有倫,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시운 : 덕유여모, 모유유륜, 상천지재. 무성무취. 지의.

여언: 윤리학은 제2의 천성을 기르는 길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덕을 닦는 과정이다. 사람은 덕을 길러 제2의 천성을 넓고 깊게 갖춘 만큼 인격을 쌓게 된다. 이렇게 덕의 탑을 높이 쌓으면 그 향이 하늘과 땅 그리고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가게 된다. 『중용』에서는 이런 사람이 하늘로부터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말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이런 사람이 삶의 구석구석에 빛을 밝히는 작은 영웅들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용』에서는 소리와 색의 길은 덕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소리와 색은 한계가 있다. 소리와 색은 사람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한다. 소리와 색으로 실어 나르는 것이 중용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이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을 그냥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덕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다. 사람이 ‘천명지위성’을 바탕으로 제2의 천성을 내 것으로 일구어내려면 무수한 시간이 필요하다. 주위 사람에게 뒤처지더라도 수천 배 노력하는 ‘인심기천’의 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천도 자신을 만나려면 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중용』은 제일 마지막에 반전을 시도한다. 사람도 고생하며 덕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 ‘무성무취(無聲無臭)’의 길을 가면 어떠냐고 말이다. 사람이 덕의 길을 다하고 나면 마지막에 천의 길 입구에 다다를 뿐이다. 지천(地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중용』은 천명에서 시작하여 지천으로 끝내는 시종일관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극단을 보편의 시야로 바꾸자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