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준 구술 녹취문 □ 녹취록 면담자 : 네 그럼 지금부터, 지금 최영준 선생님을 모시고 5·18, 해외에서, 해외의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구술 채록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5일이구요. 장소는 LA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이 구술 녹음은 5·18 기념재단이 주관하는 5·18 기록물 조사 및 수집 사업의 결과물로 제출될 예정입니다. 너무 이렇게 부담 갖지 마시구요, 그냥 옛날 선생님 살아오셨던 좀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준다라고 좀 생각을 하시고, 편안하게 얘기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그 선생님 언제 태어나셨나요. 어디에서? (DV TAPE 교체로 잠시 중단) 면담자 : 혹시 그때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에 관한 김상일 박사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6일 오후 2시 30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희가 이제 선생님이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 삶을 쫌 인제 구술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중에서 특히 이 미국 LA, 미국 지역에서 선생님께서 80년 당시부터 5·18과 관련해서 활동하셨던 내용들, 그 이후에 또 그, 뭐 오월 진상규명 운동이라든지 5월 정신 계승 운동 부분들에 대해서 그, 박사님의 그런 활동사항들을 저희가
구술로 쫌 담아서요, 이걸 나중에 저희가 해외에서 있었던 5·18 기록물, 꼭 이제 지금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독일에서도 이런 유사한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일어났었던 5·18 관련 운동들을 다 종합을 집대성해서 이 부분을 따로 인제 자료집으로 인제 저희가 낼 예정에 있거든요. 그래서 그것 일환이라고 생각해주시고 그냥 편안하게 있었던 부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선생님 그, 출생연도를 쫌 말씀을 해주시면... (tape 교체) 구술자 : 마침, 인제 뉴스에 막 나오기를, 나오는데 어떻게 나오냐면 지금 그니깐 뭐 여기 시간으로, Dp. 바로 인제 공수부대가, 공수부대가 도청을 향해서 진격에 들어가고 있다, 막 뉴스가, 미국 뉴스가 나오는 거예요. 그니깐. 그니깐 광주나 그 다음에 서울에선 미처 몰랐겠죠. 그치만 미국 언론들이 공수부대가 지금 광주 도청을 향해가는 것을 텔레비로 막 보이는 거죠, 그러니까. 28일날. 그러니 우리는 뭐 전부다 자다 일어나가지고는 미국 대통령, 뭐 상하의원들, 하원들 전부 인제 붙들고 전화를 하는 거예요. 좀 도와달라고. 만약에 미국에 여기서 만약에 스톱을 시키면
이 공수부대가 절대 못 들어갈꺼다. 도청에는 시민하고 학생들이 있는데 가면 무자비하게 학살, 다 죽지 않느냐, 좀 도와 달라 한 거죠. 나는 그때 누구한테 전화를 했냐 하면 그때 상원의원인 하야까와한테 전화를, 하야까와. 그 유명한 의미론이라 하는 책도 쓴 학자죠, 이 사람은. 일본인 상원의원. 이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이에요. 내가 전화한 대상은 바로 그 사람이었어요. (TAPE 교체로 중단) □ 녹취록 면접자: 이 구술 녹음은 그,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5월 운동과 관련한 김준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면접 장소는 L,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6일 10시 15분입니다. 이 구술 녹음은 5·18 기념재단이 주관하는 국외 5·18 기록물 조사 및 수집 사업의 결과물로 제출될 것입니다. 면접자: 그럼 지금부터 구술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건데요. 일단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저는 너무 기쁘구요. <off the record> 구술자: 아니, 근데 이거는 철환이를 만나서 얘기를 해도 되고. 그 종화형을, 종화형은 다 모르지. 종화형은 87년돈가 저기, 뭐냐 오월, 오월 특위라고 나오잖아, 오월투쟁위원회라고 항상 해만 되면 나오니까. 87년엔가 아마 종화형이 투쟁위원장을 했을 거라고, 그때. 확인해봐야돼, 잘 몰라. 종화형하고도 얘기하고 그런가? (잠시 중단) 구술자: 이 과정에서 물어볼 것 물어봐, 이거 빼고, 인제 얘기 안 하고 이거는. (DV TAPE 교체로 잠시 중단) 내용 상당부분 누락 구술자: 그러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그럼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나 후배들이나 선배들이 많이 있을 거 아니에요. 특히 또 제가 또 문화 쪽에 그 쪽에 잠깐 몸 담이 활동 했을 때도 다들 어렵게, 지금은 얼마나 받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뭐 만원, 만 오천 원, 이만 원 이런, 이런 거 가지고 생활하고 그랬던 시기라, 정말 열정 하나로 버텼던 시기라. 근데 그렇게 함께 했던 사람들을 그냥 놔두고 딸랑 미국에 와가지고 산다는 거 자체가 너무 그분들한테 미안하잖아요. 여기 살면서 그런 미안함들이 많이 있었죠. 난 여기서, 그래도 그 사람들 보다는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닌가라는 그런 생각, 그믄 괜히 지금 현장에서 열심히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뭐 조국이 뭐간디, 조국의 자주 민주 얘기하면서 통일
얘기하면서 막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그런 생각하면. 똑같이 해봤기 때문에 알잖아요. 그니까 그런 생각을 뻔히, 나는, 나는 거기에 떨어져 나와서 여기 미국 생활 한다는 게 미안하고. 항상 그런 죄스런 마음, 이런 것들이 존재했었죠. 그래서 대충 좀 여건이 된다면 다시 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 라는 그런 마음들이 많이 있었죠. (TAPE 교체) 구술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은 이쪽은 이쪽이고. 그거는 뭐 내가 상관하고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5·18 가지고 있는 정신을 이렇게 우리가 잘 모아서 그걸 잘 알릴 수 있는 방식의 활동으로 할 수밖에 없다, 라고 저는 생각을 한다고요. 단순히 그냥 5·18 기념식 한번 하고 끝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니까 저기 앞에도 민족학교 들어오면 딱 윤한봉 선생님 사진 있고 거기에 5·18이 우리 역사에 의미가 뭐가 되는지, 하나, 더 놓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최근 들어서 우리 재단 저기 설립 추진위원회, 합수형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5·18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라고. 그런 말씀을 재단을 설립하시면서 그 생각을 피력을 하셨는데 나는 분명히 나는 그런 입장에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5월, 그걸 하나 추가 하고 싶어요. 5·18은 명예가 아니라 멍에라고. 그런 것들을 감내해가면서 할 수 있는 행사들을, 이거는 우리가 이번에 하면서 만든, 만들어 놓은 거고. 이것도 우리가 거의, 거의 유명무실 해졌지. 이름만 있는 상탠데. 그니까 내년에는 35주년이고 그래서 뭔가 쪼끔은 더 역량을 해서 앞으로 5·18을 이 땅에서 어떻게 더 잘 해낼 건가, 어떤 사업들을 벌일껀가에 대해서 한번 의견들을 모으는 자리? 또 그걸 되돌아보는 자리? 그런 자리를 내년에는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앞으로 그런 속에서 여기서 10년이 가도, 20년이 가도, 30년이 가도 5·18을 내가 얘기해주고 싶은 거. 아까 주먹밥에 대한 거, 5월 26일날, 27일날 산화해 갔던 사람들의 정신, 그리고 그걸 딛고 일어선 승리의 정신. 뭐 그런, 그런거는 시대를 떠나서나 지역을 떠나서나 다 관통할 수 있는 정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서 어떻게 풀어내든지 간에 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거를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또 단순히 5·18을 정신 계승한다, 이게 아니라 그거를 담아내는 활동들이 우리 민족학교가 하면 된다, 그거죠. 단순히 뭐 5·18 정신을 계승하는 활동입네 이게 아니라, 그거는 다 포함되는 활동으로 민족학교가. 그리고 어차피 민족학교는, 이 민족학교를 세우신 결정적으로 세우신 분 중에 한분이, 막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인제 하셨지만, 결정적으로 하신 분이 윤한봉 선생님이시니까. 또 민족 학교, 그러면 윤한봉 선생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차피 민족학교는 5·18 정신을 안고가야 된다고. 그래서 민족학교 생활 속에서 공간 속에서 항상 5·18이 보여줄 수 있는, 인제 공간으로서 뭔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고 있고. 인제 얼마 전에 그런 얘기도 했었었어요. 그, 이게 민족학교를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잖아요. 그러며는 민족학교, 그 어떤 건물 외벽이라든가 한 부분 중에 5·18 조형물 같은거, 합수형님을, 윤한봉 선생님을 기억할 수 있는 거라든가 5·18을 좀 정신을 어떻게 딱 보면 알 수 있는 조형물, 그림이면 그림, 이런 것들을 딱 세워놓자, 라는 의견들이 나왔었어요. 그래서, 그게 일 년 반, 2년 뒤의 얘기지만 지금부터라도 이렇게 고민하고, 또 우리, 홍성담 선배님이, 예술가도 있으니까 자문도 얻을 수 있으면 얻어서 민족학교 건물에 그런 것들이 세워졌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해봐요. 단순히 행사 속에서가 아니라 건물 자체 내에서나 활동 속에서 5·18이 가끔 생각날 수 있는 그런, 생활 속에서의 5·18 정신 이런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일을 하는데 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그래요. (off the record) 면접자: 뭐
질문은 거의 지금, 제가 드리고자 했던 질문들은 대부분 좀 말씀을 많이 드렸던 것 같은데요. 마지막 질문일 수도 있겠는데 다른 또, 앞에 선생님께서 얘기를 포괄적으로, 아울러서 해주셔가지고 내용이 좀 중복이 될 수도 있겠다, 라는 판단이 쫌 드는데요. 지금 선생님께서 이곳에 오셔서 이곳에서 관련, 그런 운동들을 진행해 오신 게 25년. 앞으로도 이걸 계속 꾸준히 선생님께서는 진행을 하시고자. □ 녹취록 면담자: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과 관련한 이길주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 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6일 오후 8시 입니다. □ 녹취록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은호기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8일 오후 4시 5분부터 시작입니다. 예, 선생님. 먼저 이렇게 오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조재길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LA에 있는 민족학교에 있는, 아, 뉴욕,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8일 토요일 오후 한시, 열두시 삼십분입니다.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번에 재단 들어오셨을 때도 저희 그, 저희가 그 기록물 담당 부서다 보니까 분류하고 선생님이 가지고 들어오신 ????코리안 스트릿 저널????(KOREAN STREET JOURNAL) 저희가 다 펼쳐서 분류하고 일자별로 이렇게 정리하고 이렇게 보존하기 위해서 이렇게 등록하고 그러한 작업들을 저희가 좀 했었는데요, 그때 기증해주셨던 자료 저희가 지금도 소중하게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네. 그, 선생님 일단 언제 태어나셨고 어디에서 좀 태어나셨는지를 좀 말씀해주시면 합니다. (비프음, TAPE 교체) 면담자 : 아까 그 말씀하신 게 5. 16 <녹화 재개>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육길원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일시는 2014년 11월 10일입니다. 네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 녹취록 면담자 :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이병헌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담자는 김경택이며 구술장, 어, 구술 일시는 2014년 11월 11일 아침 9시 40분입니다. 예, 선생님 반갑습니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5월 운동에 관한 조철규 선생님의 구술 녹취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일시는 2014년 11월 11일 오후 2시 34분입니다. 선생님, 먼저 반갑습니다. 면담자 : 선생님 잠시만요, 테잎 좀 갈고...<TAPE 교체> 면담자 : 낙향해서 쫌 고향에서 인제 하셨나요?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5월 운동에 관한 조철규 선생님의 구술 녹취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일시는 2014년 11월 11일 오후 2시 34분입니다. 선생님, 먼저 반갑습니다. 면담자 : 선생님 잠시만요, 테잎 좀 갈고...<TAPE 교체> 면담자 : 낙향해서 쫌 고향에서 인제 하셨나요?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이, 이일용 선생님의 구술 면접입니다. 어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일시는 2014년 11월 12일 오후 세시 이십분입니다. 예 선생님, 만나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그, 저희가 선생님께 질문을, 구술 질문을 크게 한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해서 말씀을 드릴 거예요. 첫 번째는 선생님이 미국에 오시기 전까지, 유년 시절부터 한국에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이렇게 미국에 오시게 되셨는지 하는 그 부분하고, 미국에 오셔서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 또 그 안에서 특히나 5월 문제 5·18
관련 문제라든지, 한국의 뭐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선생님이 여기서 이곳에서 활동하셨던 그런 부분에 대한 질문을 좀 드리겠구요. 마지막에 선생님이 현재 어떻게 좀 지내시고 있는지,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한국 뭐 지금 정치상황이라든지 사회 상황에 대한 그런 이야기를 끝으로, 그 정도로 질문을 저희가 좀 드릴 거예요. 그래서 그,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요, 그냥 저에게 옛날, 선생님 살아온 이야기 그냥 들려주신다 생각하시고 편안하게 말씀을 해주시구요. 어, 그러면 선생님께 질문을 인제 드리겠습니다. 언제 태어나셨고 어디에서, 고향은 어디신지 쫌 말씀을 먼저 해주십시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5월 운동 등에 관한 임용천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뉴욕 플러싱에 있는 민권센터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14일 오후 6시 30분입니다. 선생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TAPE 교체로 잠시 중단) 면담자 : 그럼 선생님께는 처음 이렇게 오셔가지고 어떤 일을 시작을 하셨나요? (TAPE 교체) 면담자 : 2000년, 필라델피아에서 선생님께서는 계속 한청련 활동을 하시다가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오신 건가요?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항쟁 및 이후 오월운동 등에 관한 김수곤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뉴욕 플러싱에 위치한 민권센터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15일 오후 3시 30분입니다. 예, 선생님 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구술자 : 폭격당하면서 생각한 게 그때 내가 경험했던 이북 군인들하고. 이런 게 어떤 내 속에 의심을 가지게 했던
거였어요. 그거를 내가 그냥 애써 기억에서 지워뻐리긴 했지만 그게 씨가 됐던 게 나는 있었다고 생각해. 왜냐면 그 사람들이 못된 짓도 많이 하고 했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런 게 별로 없었던 거에요. 그러고 그 사람들이 완전히 아직 완전히 되기 전에 쫒겨가버렸거든. 그러니까 더 오래있고 그랬으면 어떤 걸 봤을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군대에서 그 부패했던거 본거 이런 거하며 그 다음에 미군한테 폭격을 당하고 그 그것도 한번 두 번 아니고 내가 죽을 뻔 했던 거 생각하면 악몽 꾸던 거 생각하고. 미국에 처음 미국와서 내가 경험했던 거 중에 내가 인종 차별 당한 거 이렇게 해서 그런게 아마 그 내가 애써 내가 의식에서 지울라 했지만 그 밑바닥을 형성하게 됐던 거는 부인 할 수 없는 거야. 그래서 회의를 가지기 시작해서 아, 그 미국 사람들이 중미 사람들한테 하고 남미사람들한테 하는 거 이걸 보기 시작하면서, 다시 그 월남전에 대한 것도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나라에서 전쟁 일어났던거
이거에 또 내가 회의를 가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이런 여러 가지. 그 다음에 일어난 뭐 이거 미국의 소위 세뇌정책, 뭐 이렇게 소위 프론티아(frontia) 정책, 프론티아 정신이란 게 좋은 거 있죠, 그건 뭐 언제든 그건 양면이 있으니까. 그렇지마는 그거는 미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볼때는 좋은 거지만 당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는 거는 이건 침략, 침략 정책이거든, 완전 침략 정책이거든. 자기들 확장해 나가고 침략해나가는게 그게 바로 프론티아 정책이에요. 그래서 그 이제 내가 어떤 그 윤한봉선생이 와가지고 씨를 이렇게 던졌을 적에 그 뭐가 아무것도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애. 그 전에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내가 뭐 우익이고 뭐 친미주의자고 이렇게 이런 사람이었지만 아마 그 생각을 설명하라고 그러면 그런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거에요. 그러고 또 6.25 전쟁 났을 적에 우리 외삼촌이, 큰 외숙이 만주로 가셔거든. 옛날에, 젊을 때. 근데 그 양반이 돌아가셨어. 그니까 그 인민군 고급장교가
되가지고 죽은 거에요. 그, 나는 만나질 못했어. 근데 시골에서 보니까 우리 외숙부가 세 사람 더 있는데 아 그 사람들이 이제 인민군 고급장교 가족이니까 뭐 해가지고 인민 위원회 뭐, 거기 점령됐었을 적에 감투 씌우고 뭐 이거 허수아비 된 거에요. 이 양반들이 무슨 뭐 의식 있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래가지고 소위 수복되고 난 뒤에는 아주 엉망진창이 되버린 거에요. 우리 외가집은. 외삼촌 인자 그분들은 다 돌아가셔버리고, 나보다 2년 위에, 그분이 그러니까 한국 연세로 85세, 그 분만 살아계세요. 우리 어머니 형제 중에서는 그분만 살아있는데 그 외삼촌, 큰 외삼촌, 나중에 얘기 들은거. 뭐 이런 거 그 외삼촌은 이제 돌아가셨어. (off the record) 구술자 : 그저 미리 봤으면 좋겠다. □ 녹취록 구술자 : 한번 알았는데 몰랐으면 모르지만 한번 알았는걸 아는 거를 내팽개치고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간다는 건 사회 구성원으로서 너무 무책임하다면 무책임하달까.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이랄까,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디서 뭘 하든지 간에 쪼끔 이렇게 그런 것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죠. 그르고 가서 거기서 학교만 4,5년 다니고 다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오게 됐어요. 그 남자친구하고도 그렇게 하고. (TAPE 교체)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오월운동 등에 관한 장광선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일시는 2014년 11월 16일 오후 3시 30분입니다. 예. 선생님 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TAPE 교체) 면담자 : 인제 졸업하신 이후에, 이후에 선생님 활동과 이민 오시기 전까지의 활동에 대해 (전화 통화로 잠시 중단) 구술자 : 데리고 나오너라 그랬더니 데리고 나왔든 모양이에요. 근데 인제 동생이 그때 인제 사회를, 회장이니까 사회를 봤는데 보고 나서 저는 인자 잊어버렸죠. 서로 인제 젊은 남녀들이니까 만나가지고 어떻게 이야기 나눴는가는 끝난 다음에 그 다음날인가 제가 전화를 해봤죠, 그 누나한테. 동생 데리고 나갔는데 좀 만나봤드냐고 얘기했드니 아이구 학을 떨면서 그냥 손사래를 치더라는 거예요. 왜그러냐니까 그런 빨갱이하고는 사귈 수 없다고 동생이 그러는데 어쩔 수 없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만큼 한국에서 금방 온 사람이니까. 이게 장흥 사람인데. 광주와 멀지도 않잖아요. 그 다음 광주 사건 있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강진으로 장흥으로 이렇게 다녔다고 제가 들었거든요. 제
동생들도 그렇게 이야기 했고. 그런대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너무 깜짝 놀랬어요. 그런 어떤 것이 일반적인 동포들의 의식 상태였기 때문에 저희가 참 여기에서 그 민주화 운동을 한다든지 통일운동을 한다 하는 것이 얼마나 각박한 토질인가 하는 걸 그때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낀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