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신라 황금 보검이 왜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 장군과 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 황금보검이 경주에서 나왔다고?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 홍범도 장군, 그는 고대의 역사를 데리고 조국으로 귀환할 운명이었던가!

  • Editor. 탄소중립투데이
  • 입력 2021.08.17 16:05

역사에 특별한 관심이 없던 분들에게는 홍범도라는 이름이 낯설다.

영화 봉오동전투가 나오고 나서 많이 알려졌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다.

왜 그럴까? 국사 교과서에 독립군의 활약이 잘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힘이 없어 만주로 도망가서 무기도 식량도 없이 고생하다가 정부를 만들었고 정규군을 만들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아 어느 정부가 정통인지를 두고 혼동이 있는 듯하다.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는 한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의 승리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역사 서술이었던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이렇게 역사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

1945년 광복후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했다.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물러나고 난 다음인 1960428일에 문교부 장관으로 이병도가 되었다.

이병도가 누구인가? 일제가 한국사를 날조한 기관인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직접 한국사를 날조한 사람이다. 매국노 이완용의 가까운 조카이다. 3, 5,7,9촌 몇 촌 조카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광복 후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하지 않았다면 이병도는 아마 한국전쟁 전에 맞아 죽었을 지도 모를 운명이었다. 살아남은 이병도는 한국전쟁 중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을 지낼 정도로 한국 역사를 좌지우지하였다.

이병도가 서울대 교수, 대학원장에서 문교부 장관이 될 정도였으니 한국 역사에서 독립군의 역할은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이병도에 빌붙어 목숨을 유지하고 재산을 보전하던 세력들은 자력으로 광복하지 못하고 미국의 힘으로 광복하였다는 논조로 국사책을 편찬했다.

이승만이 잠깐 수반으로 있었던 상해임시정부에 대비해 만주의 독립군과 정부를 왜곡하고 저평가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독립군 중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자였거나 공산주의에 협조적이었고 김일성을 추종하여 남한을 침공하였기 때문이다.

아주 유명한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정도만 강조되었을 뿐 많은 광복군, 독립투사들은 공산주의자였거나 공산주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역사 저쪽으로 묻혀서 잊혀졌고 그들의 후손은 가난에 찌들려 살아왔다.

홍범도 장군도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으로부터 권총을 받았다고 한다. 1927년 레닌이 이끄는 공산당인 볼세비키 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은 오랜 기간동안 잊혀져야 했다.

홍범도 독립군 대장이 조선도 아니고 북만주도 아니고 중국 땅도 아닌 카자흐스탄에서 죽었을까?

홍범도라는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데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는 더 익숙하지가 않다. 축구 시합에서 언뜻 이름을 들었을까. 유라시아 지역에는 무슨 무슨 스탄나라가 너무 많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산하의 많은 나라, 민족들이 독립하여 나라를 세웠다. ‘스탄은 페르시아 어로 누구의 땅 혹은 나라를 의미한다. 키르기스스탄은 40여 부족인 키르키스 민족의 나라이고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크 민족의 나라라고 한다. 카자흐스탄은 카자흐 민족이 60% 이상인 나라이다. 카자흐 언어로 카자흐라는 말은 방랑한다, 유목민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굳이 번역하면 카자흐스탄은 유목민의 나라정도가 될 것이다.

홍범도 장군는 어떻게 북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가 아시아의 정 반대쪽인 카자흐스탄에 가서 일생을 마쳤을까? 일본의 추격을 피해 연해주에 머물면서 1927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로 강제 이주당했고, 그곳에서 76세로 사망했다.

스탈린은 일본 첩자들이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1937년 홍범도 독립군 등 극동지방의 고려인 약 172천명을 정 반대쪽인 카자흐스탄에 10만여명, 우즈베키스탄에 7만여명을 이주시켰다.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할 때 카자흐스탄이 한국 고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1973년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도로공사중에 황금보검이 발굴되었다. 동양에서 보기 힘든 형태였다. 황금, 가넷, 마노 등으로 만들어진 보석 장식부는 온전히 남았는데 전체 길이 36.8, 최대 너비() 9.05이다. 검을 장식한 보석은 동유럽 원산 석류석이고, 소용돌이 문양 또한 불가리아에서 출토된 트라키아 시대의 유물과 흡사했다.

경주에서 황금보검이 발굴되고 무려 45년이 지난 2019111일 카자흐스탄의 주요 일간지, 웹사이트 및 포털들은 동일한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제목은 카자흐어로 Кореяда табылған алтын сапты семсер ежелгі қазақ жерінде жасалған한국어로는 한국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은, 고대 카자흐에서 제작된 것이다.

경희대학교 교수진 및 미국 덴버 대학교의 사라 넬슨 교수가 연구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신라가 아닌 다른 국가와 교류했다는 점에 의견을 일치시켰고, 그 국가가 카자흐스탄이라 밝혔다. 한국의 학자들은 계림로보검과 유사한 황금 보검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시 박물관에서 발견했으며, 계림로보검은 실크로드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확인했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문화소식 2019-02-07 [언론분석] 경주 계림로에서 발견된 황금 보검, 제작 국가는 고대 카자흐스탄. http://kofice.or.kr/c30correspondent/c30_correspondent_02_view.asp?seq=16588 )

카자흐스탄의 고분을 발굴하고 연구중인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권오영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실크로드를 끼고 있는 카자흐스탄의 북쪽 텐산(천산)산맥일대에서 사카()는 기원전 8~7세기부터, 오손()은 기원전 4세기부터, ()은 기원전 1세기부터 이곳에 등장하여 선행 종족을 교체하였고, 투르크족은 5세기 이후부터 살고 있다.

이들이 발전시킨 황금문화는 한국 고대사와 무관하지 않다.

사카족의 쿠르간(유라시아에 분포하는 대형 무덤)은 신라의 왕릉으로 채택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흡사하다. ()의 금제 장신구나 무기에는 보석을 박아 넣는 감옥기법, 작은 금알갱이를 붙이는 누금기법이 특징인데, 역시 신라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1969년에 카자흐스탄 이식 유적지 중형급 쿠르간의 조사에서 황금인간이 발굴되었다. 165, 연령 15~18살 정도 되는 남성의 모자와 상의, 허리띠와 신발은 온통 순금제 장식으로 뒤덮여 있었고, 허리춤에는 금으로 장식한 철제 단검을 차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의 국가적 상징이 되었는데 201811월 한국에서 전시된 바 있다.

카자흐스탄의 이식 유적은 지름 20~120m에 이르는 쿠르간 150기로 구성되어 있다. 경주에서 작은 고분이 지름 20m, 단독분으로 가장 큰 봉황대고분이 지름 82m, 두 기가 합쳐져서 가장 크게 된 황남대총의 길이가 120m란 사실과 비교된다. 경주평야에서 지상에 봉분이 남아 있는 것이 158기란 점도 우연이지만 비슷하다. 따라서 이식 쿠르간과 경주 고분군은 매우 흡사한 경관을 보이고 있다.

( 한겨레 신문 2019112일자 신라 황금 보검이 왜 카자흐스탄에서? 토요판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사카와 오손의 땅으로)

무덤 양식이 같고 부장품이 같으면 같은 민족이라고 보는 것이 특별히 무리가 아니다. 실크로드의 나라 카자흐스탄 고대 유적에서 신라 경주의 유적과 꼭 같은 무덤과 유물이 발견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 홍범도 장군, 그는 고대의 역사를 데리고 조국으로 귀환할 운명이었던가!

공유 신라 황금 보검이 왜 카자흐스탄에서
2019.1.12 한겨레신문보도에서 캡쳐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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