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문화운동가 임진택의 애국가 바로잡기 ❏ 이 책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애국가에 감추어진 진실을 찾아서 임진택은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듯이 풀어나간다. 그의 주장은 민족적이고 애국적이다. 친일파와 그의 후예들은 낡은 시대적 사고라고 주장하겠지만, 분단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자 과거 청산과 반성 없는 현실이 만들어낸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머리글-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 문화운동가이자 명창인 임진택은 ❏ 그는 주장한다. 안익태의 두 얼굴 안익태와에키타이 안 ❏ 1938년 2월 20일 안익태는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게이어트 극장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1938년 더블린과 부다페스트 연주 이후
1947년 스페인 마요르카에 정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긴 기간 동안 안익태의 행적은 베일에 감춰진다. ❏ 안익태의 두 얼굴! 다른 한쪽 얼굴은 에키타이 안이었다. 안익태의 비밀과 거짓말 ❏ 드러난 친일ㆍ친나치 부역 -‘만주환상곡’ 필름 ❏ 이해영이 쓴 ≪안익태 케이스≫를 읽고 애국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애국자의 애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 김구도 몰랐고 이승만도 속은 안익태의 거짓말 ❏ 안익태는 애국가뿐 아니라 그가 대표작으로 내세우고 있는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에 대해서도 온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다. 남의 나라 곡(曲)을 표절한 국가(國歌)란 있을 수 없다. ❏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가 가진 변절과는 다른 또 하나의 논란은 바로 <애국가> 곡조의 표절설이다. <애국자> 작사자는 누구인가 ❏ 대한민국 <애국가>의
작사자는 공식적으로는 미상이다. 애국가 작사자 논쟁의 시발 ❏ 해방 이후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처음으로 글로 기록한 이는 작가 이광수이다. 그는 1947년 ≪도산 안창호≫라는 책에서 ‘애국가의 현 가사는 안창호의 작’이라고 주장했으며, 안창호는 이를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애국자 작사자 조사위원회 활동의 전말 ❏ <애국가>가 작사자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논쟁으로 번진 것은 1955년의 일이었다.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애국가’
작사자와 작곡가를 물어왔을 때(≪세계대백과사전≫에 넣기 위해)문교부는 작사자 안창호, 작곡자 안익태라고 통보하고 이 자랑스러운 경사를 언론사에 통보하였다. ❏ 작사자 논란이 일자 문교부는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인문학 및 국학의 선구자 최남선, 서지학의 권위자 황의돈 등으로 4자위원회를 구성하여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다.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 증거 검토 ❏ ‘윤치호 작사설’에서 주요한 증거로 제출된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에 대한 나의 의문은 이런 것이다.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 증거에 담긴 함의 ❏ 앞의 1955년 4월 ‘주요한의 경향신문 칼럼’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설에는 당초 ‘성자성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라는 가사가 윤치호 씨 원작인데, 나중에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 주요한이 전한 이 내용은 이른바 애국가 작사자 논쟁에 있어서 ‘단독 작사설’과 다른 ‘안창호ㆍ윤치호 합의설’이다. 윤정경이 채록ㆍ공개한 ‘안창호 애국가 작사’ 증언 ❏ 김정수(윤정경의 작은할머니, 1894년생)의 목격 증언 김정수:‘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첫머리는 안창호 선생이 우리 집에 와서 지으셨다. … 손님으로 온 분이 미국에서 온 지 며칠 안 됐다고 나도 끼어 앉아 있었지. … 그리고는 함께 예배를 보는데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 ‘백두산과 두만강이 마르고 닳도록’ 으로 시작되는 찬미가가 있었거든. 안창호 선생님이 들으시고 그 가사에 무슨 연유가 있는지 궁금해하시더구나. 네 큰방아버지(윤형관 집사)가 “저희 집안 조상인 윤관 장군의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백두산석마도진 두만강수음마무白頭山石磨刀塵 豆滿江水飮馬無’라는 구절이 있어 거기서 따온 것으로, 신자들의 간도 땅 만주 전도(傳道) 열망을 담아서 예배 볼 때 찬미가처럼 부르고 있습니다.” 설명을 드렸단다. 안창호 선생은 시문(詩文)과 가사(歌詞)에 대단히 박식한 것 같더라. 자신이 직접 새 찬미가사를 지어보겠다면서 하시는 말씀이 “… 세상에는 춘하추동 없이 너무 춥거나 덥거나 해서 살기 어려운 나라도 많다는데, 이왕이면 우리가 복 받고 있는 춘하추동을 찬미하는 것도 새바람을 추가하는 데 좋을 것 같습니다. … 만주 벌판을 달리던 우리 민족의 강성했던 기상을 새로 짓는 가사에서도 첫머리에 담되 ‘두만강 물’을 ‘동해 물’로 바꾸면 더 웅장해 보일 것 같습니다. 미국을 왕복할 때 보니 태평양이 참으로 광활하고 웅대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구나. 네 큰방아버지가 “이왕이면 선천 바닥뿐 아니라 온 겨레가 즐겨 부를 수 있도록 선생님이 잘 지어주시면 그대로 받들겠습니다.”라고 청을 드렸단다. … 안창호 선생은 평양으로 가싱 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해 춘하추동 사계절을 노래하는 가사를 새로 만들어 보내주셨는데, 그 내용이 어찌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는지 선천교회 찬미가는 대번에 안창호 선생이 지어 보낸 가사로 바뀌었고, 이 찬미가는 선천 바닥에서 애창곡 1번이 됐단다. 내가 안창호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이 ‘백두산과 동해물이’라는 노랫말과 함께이니까 아직도 기억하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잊었을 게야. 안창호 선생이 이 노랫말을 짓기 위해 이틀이나 금식기도를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안창호 선생은 자신이 가르치는 평양 대성학교 학생들에게도 이 찬미가를 알려줬다는데, 대성학교뿐 아니라 이 찬미가를 부르는 교회가 점점 늘어났지. … • 이 생생한 대화는 1957년에 있었던 일이다.
김정수 할머니와 아들 윤성실이 나눈 대화에 종손 윤정경이 함께 들으면서 촘촘히 기록해놓은 자료를 글로 복원한 것이다. ❏ 윤형갑(윤정경 작은할아버지, 1904년생)의 직접청취 증언 윤형갑: 많은 사람들이 애국가는 누가 지었을까 궁금해합니다. 큰형님(윤형관)은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는 선생님께서 지어주셨다고
말하던데요. • 그러면서 안창호는 애국가가 미국의 <오 마이 클레멘타인>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민요처럼 정착되기를 바랬다. 무궁화 노래와 애국가 <애국가>류의 최초 형성과정 ❏ ‘애국가’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6년 서재필을 필두로 독립협회가 결성할 즈음 창간된 ≪독립신문≫이 제안한 ‘국가(國歌) 제정을 위한 애국가 부르기 운동’에서 출발한다. ❏ <올드 랭
사인> 곡조 <무궁화노래> 출현 ❏ ‘무궁화 2’ –‘동해물과
애국가’의 탄생 민족의 수난 속에 퍼져나간 ‘주권재민 애국가’ ❏ 1907년 처음
출현한 ‘동해물과 애국가(무궁화가2)’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안창호와 관련이 깊다. 안창호의 <애국가> 노랫말의 실마리는 유길준의 <독립경절가> ❏ 작사자 규명의 결정적 증거는 <애국가> 노랫말 그 자체이다.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애국가> 가사에 들어 있는 흥사단 4대 정신 ❏ 박재순은 ‘애국가 작사자에게 필수적인 사상과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 그는 ‘흥사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대한민국 애국가! 노랫말은 살리고 곡조는 바꾸자 ❏ 어떤 노랫말을 짓자면 작사자의 머릿속에 그 노랫말 내용과 성질에 맞는 의지와 정신과
신념이 들어 있어야 한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 새로운 애국가들로 민족정기를 되찾고, 향후 국민의 뜻과 지혜를 모아 국민 모두가 동의하고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 임진택 지음, ≪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 ☞ 임진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방송국 프로듀서로 재직하였으나, 1981년 TBC가 KBS로 통폐합되어 강제 해직된 후, 문화운동가이자 명창으로 활동 중이다. 전통연희에 바탕을 둔 민중연극인 ‘마당극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문화운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했으며, 시대와 역사를 담아내는 새로운 ‘창작판소리’를 실현했다. 민족예술과 민중예술의 지평을 확장함과 동시에 민주화운동에 기여했으며, 새로운 창작판소리 열두 바탕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여 <백범 김구>, <남한산성>, <다산 정약용>, <윤상원가>, <세계인 장보고>, <전태일> 등의 판소리 사설을 창작해 공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