었냐는 말입니다 당신 왜 당신에게 기는 말투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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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서는 2018년 한국에서 최초로 쓰여 무료한 누군가에게로 전해졌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도달한 이 문서는 빠르면 빠를수록, 적어도 3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당신도 이 문서를 누군가에게 보내야 합니다. 복사해도 좋습니다. 혹 미신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문서를 받고 서두 몇 문장만 읽고 덮어버렸습니다. 그러고는 비서에게 복사해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질문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계속해 생각 없는 삶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72시간 내 이 문서가 자신의 손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문서를 읽은 그는 곧 해답 없는 고민에 빠졌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깨닫고 그는 자신이 쓴 또 다른 문서를 누군가에게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남은 생을 사유하는 삶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생각 없는 삶과 고민 있는 삶이라니, 무엇이 더 좋은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이 문서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유행하던 행운의 편지가 아니니까요.
   당신은 글자가 적힌 몇 장의 종이를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활자를 통해 만나고 있는 거죠.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랍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소설가라는 직업을 기억하십니까?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판단과 창조적 역량, 감성이 필요한 직업만 살아남을 거라는 전망이 있었는데, 작가라는 직업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 아닙니까? 당시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가벼이 넘겼지만, 결국 예측은 현실이 되었고 픽션은 세계에서 사라졌습니다. 하긴, 당신도 알다시피 그즈음 대부분 사람이 워낙 책을, 특히 문학이라는 장르를 멀리하기도 했었지만 말입니다.
   이 문서를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신의 길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우연히 사라진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될 운명! 그렇게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긴 누구나 처음에는 그런 반응이니까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특별히 할 일이 있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맞습니까? 어쩌면 백수, 전문용어로는 잉여 인간이고 하죠. 감히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당신의 삶,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그런 삶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누군가 누리는 끗발 날리는 삶은 아예 꿈꾸기도 힘들죠. 평범하게 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어, 정도의 자의식으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렇게 불쾌해할 필요는 없어요. 다 이해합니다. 알잖아요, 우리 뜻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 일단은 견디고 보는 게 상책이라는 거.
   대충 감이옵니다. 불합리한 세상살이에 관한 푸념을 일삼고 불만과 불평과 불신으로 가득한 말들을 머리에 떠올리죠. 그렇지만 한편으론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며 나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자학하죠. 그러다가 지난 시대의 문학을 읽으며 자꾸 불필요한 지혜나 얻으려 하고, 특히 재미도 감동도 새로움도 없는 소설 따위를 몰래 읽으며 불순한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하죠.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죠?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픽션을 그리워하느냔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당신의 삶이 불안하게 여겨진다면, 당신이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미심쩍다면 당신은 내 이야기를 경청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을 거부하는, 당신은 거부할 수 없는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니까요. 자, 왼손으로 은근한 희망에 두근거리는 당신의 가슴을 진정시키세요. 그리고 마음을 활짝 열고 편안한 자세로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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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마땅한 취직 자리를 얻지 못해 지하 월세방에서 빈둥거렸던 무렵이었다. 아버지 세대에 있던 직업이 사라지고 로봇과 관련한 일자리가 새롭게 생기며 수백만 명의 추가 고용이 생겨났지만, 아버지에 이어 나 역시 직업을 부여받지는 못했다. 정부는 나 같은 무직자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었으나, 지금껏 살아오며 나는 소일거리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몇몇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선물처럼 주어진 일하는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료함을 극복하고자 습관처럼 취직 준비를 했다.
   나를 포함한 비슷한 부류의 무직자들은 모두 어릴 적 독서를 좋아했다는 취약점이 발견되었다. 특히 소설 같이 지어낸 이야기에 매료되는 이상하고 편협한 성향을 가지고 있어 유달리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뒤를 이었다. 결국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하급의 사람들은 당연히 불필요했고 정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일으키는 적지 않은 소란을 잠재우고자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주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소설을 읽으라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말은 듣는 게 아니었고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어릴 적 스승의 스승의 스승의 말 따위는 개나 줘버렸어야 했다. 문학이 자아 성찰을 돕는다고? 그 말보다 더 웃긴 말을 나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죽을 때까지 작가가 되고자 문학 운운하며 살았다. 소설에 영혼을 불태우겠다는 무모한 열정과는 달리 책 한 권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의 아들답게 구닥다리 컴퓨터 앞에서 시간만 죽이기 일쑤였다. 실제로 나의 일상은 소설적 영감과 깊은 주제의식을 안주 삼아 모니터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목구멍에 소주를 털어 넣는 게 전부였다. 이제 와 문학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라고. 어디라도 직장에 다니며, 그에 걸맞게 늘씬한 애인 하나만 있었으면. 어릴 적 몰래 읽던 소설책에서처럼 진짜 여자랑 한번 자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상상해보아도 그 느낌을 떠올리기란 불가능했다. 섹스돌을 빼곤 무직자에게 몸을 내어줄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종일 집에 처박혀 있는 것도 지겨웠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걸 때려치우고 다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다. 차라리 온 세상이 전복되어 버린다면. 산꼭대기와 바다의 심연이 제 위치를 바꾸듯 모든 사회적 질서가 파괴되는 거야. 그렇다면 나도 지금의 바닥 신세를 벗어나 조금은 위쪽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이 제발 오늘이었으면 좋겠다. 곰팡이 핀 격자무늬 벽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버지도 늘 무언가를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모니터 뒤에 있는 금이 간 벽을 한동안 쳐다보곤 했었다. 결국 가장 늦게까지 픽션의 최후를 지켜내고자 한 사람들이 세계의 빈민으로 전락한 것처럼 나 역시 대를 이어 심드렁함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댈 뿐이었다.
   그러다 어제가 그제 같고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눈을 뜬 날, 나는 금이 간 벽이 한층 가까워진 기분에 휩싸였다. 자다 깨서인지 모서리에 핀 곰팡이 역시 푸른 이끼처럼 평소보다 넓게 퍼져 보였다. 부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귀찮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확인을 해봐야 했다. 책상으로 다가갔다. 마우스가 건드려지자 절전 상태의 모니터가 빛을 밝혔다. 가까이에서 보니 벽에 간 금이 벌어져 틈이 생겨 있었다. 틈은 예상보다 넓게 벌어져 있었고 나는 조심스레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만져지는, 틀림없이 전해지는 손끝의 감촉. 잘하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맞아, 비좁은 곳도 머리만 들어가면 몸이 다 들어간다고 하니까. 언젠가 봤던, 위급상황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다룬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나는 옆으로 서서 한쪽 팔과 다리 그리고 어깨와 머리를 차례로 그 틈으로 집어넣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몸을 구겨 넣으면 될 것도 같은데.
   몇 분 뒤, 나는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숲속 어딘가에 주저앉아 있었다. 한쪽 테가 없어진 검정 뿔테 안경과 오래 입어 목이 늘어난 회색 면티, 잠옷으로 입던 반바지까지 방에서 자던 그대로였다. 주머니에 있는 구겨진 담뱃갑과 백 원짜리 동전 몇 개가 현실의 묵직한 궁색함까지 온전히 증명해내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숲이었다. 온몸으로 기지개를 켜는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퍼레이드 행렬처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담담하기만 했다. 원래 뭐든지 스스로 자각하기 전까지는 호기심이나 궁금증이 생겨나지 않는 법이었다. 그저 빡빡한 눈을 부릅뜨고 숲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내 팔을 툭 건드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한 여자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오리걸음으로 다가와 내 정면에 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날개 달린 노란색 운동화에서 삑삑 소리가 났다. 그녀가 수상한 눈초리로 자신을 관찰하는 나를 향해 씩 웃었다. 나는 차마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잠자코 그녀를 따라 입에 경련이 일 듯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하얀 얼굴을 가진 체구가 아주 작은 여자였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흐릿한 인상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눈썹 위로 저만치 올라간 짧은 앞머리와는 달리 부스스하게 긴 갈색 머리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치렁치렁하게 끌렸다. 분홍색 입술이 달싹거리더니 다짜고짜 반말이 튀어나왔다. 왜 그러고 사니?
   보아하니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한심한 족속 같은데. 말하는 중에도 그녀는 계속 손톱에 바른 보라색 매니큐어를 벗겨내는 데 열중했다. 사는 게 힘드니? 나는 괜히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그러다 나보다 족히 열 살은 아래로 보이는 그녀가 대책 없이 반말을 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 알아, 네 얼굴에 쓰여 있거든. 나! 살! 기! 싫! 어! 그녀가 내 얼굴에 대고 말을 탁탁 끊어 강조할 때마다 삿대질을 해댔다. 그녀의 무례함에 슬슬 화가 나려 했다. 내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는 게 느껴지지 않는지 그녀는 벌떡 일어나 먼 곳을 응시하며 머리를 북북 긁었다. 따라와, 신기한 거 보여줄게. 그녀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삐익 삐익 삑.
   그녀는 길도 나 있지 않은 숲을 잘도 헤치며 빠르게 걸었다. 나는 그녀의 발을 눈으로 쫓으며 숨이 차도록 뛰다시피 걸었다. 숲을 헤치고 걸어 들어가면서도 내가 왜 이 이상한 여자를 따라가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그녀에 대한 묘한 이끌림에 힘입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발이 움직임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보니 정면에는 거짓말처럼 작은 목조 건물이 서 있었다. 꼭대기에는 도서관이라고 적힌 표시판이 비뚤게 걸렸고 허름한 외양에는 창문조차 나 있지 않았다. 영화에서 보았던 그런 멋진 도서관이 아니었다. 다 쓰러져가는 흉가에 가까웠다. 그녀는 익숙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등 뒤로 무수한 먼지들이 빛을 받아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색 바랜 책들이 삼면의 벽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천수만 권은 넘어 보였다. 낡은 책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방 한가운데, 타자기 앞에 웅크리고 앉은 노인이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은빛 머리칼을 가진 허름한 행색의 노인은 타닥타닥, 군청색 철제 타자기를 두드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우리가 들어온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가 방안을 가로질러 노인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서로의 혀를 음미하는 진한 키스를 나누면서도 노인의 얼굴에는 작은 동요 하나 없었다. 어쩐지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녀에게 품었던 은근한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럼 그렇지, 인생 뭐 있어.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야 할지 아니면 그냥 밖으로 나가야 할지 주저되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인사해, 내 늙은 애인이야.
   아, 안녕하세요? 나는 노인을 향해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저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노인은 여전히 나란 존재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노인이 치는 타자기 소리만 경쾌하게 귓가를 때렸다.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내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이 사람 앞을 못 봐. 어차피 욕해도 못 들어, 귀도 먹었거든. 뜻밖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조만간 죽음을 맞이하겠지.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 그녀의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튀어 나왔다. 그러나 엷게 미소 띤 얼굴과는 달리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제 음을 잃었다. 지상의 마지막 소설가가 사라지는 거야.
   왠지 모르게 휑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속으로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에게 뭐라 말을 건네고 싶었으나 자격도 없는 유치한 위로가 덜컥 튀어나올까 봐 겁이 났다. 그렇게 놀랄 건 없어. 세상을 기록해야 한대, 더 많은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오히려 그녀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저렇게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쓰지. 그러고 보니 노인의 웅크린 자세가 꼭 아버지 뒷모습과 닮았다. 그녀와 그녀의 늙은 애인을 향한 나의 반감이 무장해제 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꽤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몇 달이 흐른 건지 몇 년이 흐른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집으로 가야 할 필연적인 이유 따위가 없었을뿐더러, 그녀도 노인도 나에게 집에 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과 함께 오두막에서 생활하는 게 어쩐지 덜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들도 나의 존재를 그리 성가셔하는 것 같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녀가 나에게 알려주겠다던 신기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으나, 그 호기심마저 꼬리를 감추었다. 현재 상황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신기했다. 나의 내부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희망과 두려움이 함께 솟아나는 듯했다. 그럼에도 나는 왠지 그녀를 성가시게 재촉하기보다는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대신 집안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그들을 관찰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애초에 기인 같았지만 은빛 머리칼의 노인은 정말 기묘했다. 노인은 언제나 부동의 자세로 타자기 두드리는 일에 열중했다. 은빛 머리칼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책장에서 갖가지 책을 꺼내 바닥에 드러누워 읽곤 했다. 밤이 되면 그녀는 노인을 뒤에서 그러안고 그의 등에 코를 박고 누웠다. 그러곤 듣지도 못하는 노인을 향해 꽤 오랫동안 이야기하다 잠들곤 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린 시절 내가 잠들 때까지 옛날이야기를 해주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들을 향한 나의 관찰은 지칠 줄 몰랐다. 소설을 쓴답시고 주변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버릇이 되어서인지 나는 하루가 다 가도록 그들을 관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지루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오두막 안에서 내 존재는 마치 그들의 그림자처럼 차츰 익숙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노인의 타자기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엄청난 양의 글자가 노인의 손끝을 타고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보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때론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를 쓰고 있는 거야? 짐짓 나도 글쟁이 아버지를 뒀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노인의 글을 읽고 있는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넌 말해줘도 몰라. 그녀가 잘라 말했다. 그래도 내가 일반인보다는 독서력도 풍부하고 상식도 많은 작가 지망생 아닌가. 아주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읽던 심리학이나 철학 서적도 몇 권쯤 읽은 적이 있었다. 괜히 화가 났다. 나의 불만 어린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해하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래. 무한의 실제 세계가 따로 있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의 학습장에 불과한 거야, 실제 세계를 제대로 살기 위한.
   그녀의 표정은 사뭇 진지함을 넘어서서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이게 어디 사이비 종교에서나 통할 개똥철학인가. 이런 이야기를 듣자고 내가 이곳에 여태 머무른 것인가, 순간 당혹스러운 배신감이 밀려왔다. 세상 어쩌고저쩌고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경외를 담은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 늙은 애인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오가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으려고도 하지 않아. 참 단순한 족속들이야. 진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은 그의 노고를 알지도 못한 채 앞으로도 쭉 무지하게 살아갈 텐데. 그래도 그는 인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무한의 세계를 지어내는 중이야.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어딘지 모르게 애절했다. 그녀는 노인을 바라보며 담담하고 낮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머잖아 떠날 것 같아. 조금씩 영혼이 사그라지는 게 보여. 아프리카에는 이런 말이 있대. 노인이 죽으면 그 마을의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똑같다는. 내 애인, 세상의 진실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어. 점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그녀는 자신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너더러 이해해달라는 게 아니야. 너라면 믿을 줄 알았어.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그녀의 말투 속에서 그녀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급기야 은빛 머리칼의 노인이 쓰러지고 말았다. 정말이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그녀가 읽어보라고 권해 준 보르헤스의 소설 ??알렙??을 읽고 있었다. 언제나 끊이지 않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군청색 타자기 소리가 한순간 멈췄다. 노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달려가 노인의 몸을 바로 눕혔다. 그러나 더 이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쓰러진 노인보다도 군청색 철제 타자기로 몸을 날렸다. 노인이 쓰고 있던 문서를 타자기에서 꺼내 활자들이 보이는지 확인했다. 그녀는 문서를 보물 다루듯 소중히 어루만졌다. 내 품에서 노인의 숨이 멎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이 죽는 순간을 이만큼 가까이에서 보긴 처음이었다. 노인의 육체는 서서히 온기를 잃었다. 그녀가 다가왔다. 묘하게 평온한 빛을 띤 얼굴을 한 채였다.
   그녀가 노인의 옷을 천천히 벗겼다. 마른 장작개비같이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노인의 알몸이 드러났다. 그녀는 노인의 곁에 몸을 눕히더니 노인에게 키스를 했다. 마치 영혼이 이승을 떠나가는 것을 축복이라도 하듯. 그녀의 입술은 노인의 얼굴에서 목으로 가슴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심장에서 피가 뻗어나가 말초신경까지 닿는 듯 새끼발가락 끝까지 그녀의 입맞춤은 계속되었다.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생경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만 그것이 애인의 죽음을 맞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의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노인의 육체는 식어갔지만 은빛 머리칼만은 제 빛을 잃지 않고 반짝였다. 그녀는 의식을 끝내고 차츰 몸을 일으켰다. 혈색은 파리했지만 그녀에게서 강한 에너지가 발화되는 듯했다. 그녀가 일어나 몇 발자국 걷더니 마룻바닥에 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언젠가 내가 멋대로 손을 댔다 그녀에게 제재를 당한 것이었다. 그녀 곁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하를 향해 끝없는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알렙??의 한 장면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였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내게 보여주겠다던 신비로운 것이 아닐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녀의 뒤를 따라야 했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정확히 열아홉 칸의 계단을 밟은 뒤 지하 공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눈이 멀어버릴 만큼 강렬한 빛이었다. 어둠 속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가히 폭발물이라도 본 것처럼 앞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눈을 감고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나듯 오묘한 빛이 감은 눈 안으로 투사되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대로 지상으로 올라가지 못할지도 몰랐다. 내가 내쉬는 날숨소리만이 공허하게 들려왔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정체를 보았다.
   우주가 있었다. 빛을 발하는 작은 원구 안에 온 우주가 들어 있었다. 더는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세상을 들여다보는 거울처럼 수많은 장면이 동시에 존재했다. 모든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각기 다른 형상으로, 그러나 선명히 보였다. 성난 군중을 보았고 가라앉는 배를 보았고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사람을 보았고 무너지는 다리를 보았다. 낡은 상상을 보았고 익숙한 묘사를 보았고 진실 없는 변명과 비굴한 침묵을 보았다. 무용지물인 철학을 보았고 하릴없는 희망을 보았고 사라지는 소설가를 보았다. 아버지를 보았고 어린 나를 보았고 동시에 아버지가 나를 무릎에 앉힌 채 책을 읽어 주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숲이 노인이 군청색 타자기가 지식의 총체가 그녀의 모습이 수천 권의 책들이 사랑의 본연이 앉은뱅이책상이 모니터가 활자들이 내가 내 모습이.
   나는 거의 네발로 기다시피 하여 지상으로 올라왔다.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내게 그것을 보여주고는 홀연히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내가 사람들이 평생 경험하지 못할, 아주 대단한 무엇인가를 경험했음을 느꼈다. 그리고 두려웠다. 모든 광경이 한순간 기억 너머로 사라질까 봐. 조바심이 일었고 자꾸만 두려워졌다. 자세를 옮겨 앉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는 동전 소리를 들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구겨진 담뱃갑이 만져졌다. 문득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예감은 현실감각을 빠르게 일깨웠고 집으로 가야 한다는 위기감이 몸을 움직이게 했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문가로 다가가 나무문을 열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낯익은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 생이 기거했던 지하 자취방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고 나는 어떻게 이곳에 돌아온 것일까. 그러나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갈색 앉은뱅이책상과 전원을 켜둔 컴퓨터 모니터에서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구겨진 A4용지, 마시다 만 소주병과 몇 알의 커피 땅콩까지. 꿈을 꾸었던 것인가. 변한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모든 것이 기억 저편에서 어렴풋해지는 것 같았다. 시간의 경과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숨을 쉬듯 몸을 들썩이며 붉은 적요를 내뿜던 숲을 떠올렸다. 복제해 놓은 듯 똑같이 생긴 나무들을 헤치고 앞을 향해 걸었던 기억을. 처음 내가 그녀와 만났던 순간과 타자기를 치던 노인과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소리와 우리가 함께한 얼마간의 시간을. 나는 모니터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키보드 자판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하얀 도화지 같던 화면이 검은 활자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
   이 문서가 쉽게 이해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 스스로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면 한낱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지요. 뭐든 원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생겨나기 마련인 것을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대부분 사람은 이 문서에 담긴 이야기를 알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늘 숨어 있기 마련인 삶의 진실에 관해 궁금해하는 소수만이 문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무엇인가 느껴지는 게 있나요, 아주 조금이라도?
   그녀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어쩌면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던 걸까요. 그렇다면 사라진 세계를 보여준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녀를 만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습니다. 그녀를 찾고 싶지도, 찾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도, 수면 위로 선명히 고개를 내미는 것도 실은 모든 게 두려운 까닭입니다. 다만 이 문서에는 그때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몸에 생긴 상처가 시간이 흐르면 희미한 흉터로 자리하듯 아주 선명하진 않지만 그것은 분명히 내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삶이 변했다는 게, 그 변화를 받아들였다는 게, 소설을 쓴다는 게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곳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 숲의 존재를 믿고 싶습니다. 돌이켜보면 가닿을 수 없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걸 깨달을 만큼 지겹게 계속했던 기억의 반추 역시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발견하면 그녀가 내게 가르쳐주었던 것을 고스란히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녀에게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한 사람 한 사람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도록. 징검다리를 건너듯 익명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것이 존재하도록.
   이 문서를 끝까지 읽은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게, 아니 믿게 된다면 머지않아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일단은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부디 당신이 바로 내가 찾고자 한 그 사람이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진실이라 믿었던 허구와 허구라 믿었던 진실에 관해서. 먼 옛날 서로의 등에 코를 박고 누워 이야기의 온기를 나누던 기억에 대해서. 무엇보다 그 시간이 영영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