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작가 김승옥은 왜 무진을 이런 특징을 가진 공간으로 설정했을까

  <무진기행(霧津紀行)>

【해설】

   김승옥이 1964년 10월 [사상계]에 발표된 단편소설로, 자기 존재 이유의 확인을 통하여 지적 패배주의나 윤리적인 자기 도피를 극복해 보려 하는 작가 의식을 담고 있다.

   안개로 상징되는 어린 시절의 고향 ‘무진’에 다녀오는 한 인간의 체험을 통해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의식을 해부하고 있는 작품이며, 불안하고 답답한 분위기와 무책임하고 비굴한 인물의 행동이 아무런 주저 없이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60년대 독자에게 충격을 가했으며, 더욱이 외적 사물에 예민하게 변화 있게 반응하는 작가의 감성과 이국적인 문체는 그를 60년대의 주목받는 작가로 만들었다.

【개관】

▶갈래 : 단편소설

▶성격 : 서정적, 몽환적

▶배경 : 시간 : 1960년대 / 공간 : 아침이면 짙은 안개로 덮이는 무진(霧津)

 ☞ 자주 안개가 덮히는 무진은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는 아름다운 시골읍과는 거리가 먼 권태와 단조로움, 절망의 추억만을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동시에 안개가 걷히는 무진은 재생의 의미를 지니며, 그것은 주인공의 서울로의 회귀로 나타난다.

▶무진기행의 무대 : 전남 순천 대대포구 갈대밭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문체 : 강건체

▶의의 : '안개'라는 배경을 단순한 자연 현상 또는 기후로서가 아니라 주인공의 의식의 한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새로운 감수성(感受性)을 성공적으로 표현함.

▶특징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인생의 보편적인 갈등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갈등을 속물 근성을 지닌 세무서장과 순수한 성격의 중학 교사 사이의 대립, 서울의 아내와 고향에서 만난 음악 교사 하 선생 사이의 대립으로 바꾸고 있다. 또한 이러한 불화와 대립의 구도를 서울과 고향의 경계에 놓인 이정표, 무진 마을 명산물인 ‘안개’라는 상징을 빌려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주제 

  - 안개로 상징되는 허무로부터 벗어나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한 젊은이의 귀향 체험.

  -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

  - 안개로 상징되는 ‘허무’로부터 벗어나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한 젊은이의 모습

  - 일상의 부정을 통한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삶의 모색

【등장 인물】

▶나(윤희중) : 33세. 장인이 경영하는 제약 회사의 전무직에 오르게 되어있으나, 이를 달갑지 여기지 않고 주주총회를 앞두고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고향인 무진으로 향한다. 하지만 허무만을 느낀 채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위선적. 허무적 인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이 빚어낸 창백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하인숙 : 무진중학교 음악 교사. ‘나’를 만난 후 ‘허무’를 벗어나기 위해 무진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인물. 그러나 그런 삶을 수용하며 머문다. 다소 자조적인 여자로서 등장 인물 중 가장 허구적인 인물이며 ‘나’의 젊은 날의 초상과 비슷하다.

▶조 : ‘나’의 시골 중학교 동창생. 고시에 합격하여 무진의 세무서장으로 근무. 속물적 인간의 전형임

▶박 : ‘나’의 중학교 후배이며 교사. 하인숙을 사랑하는 순정형의 인간. 등장 인물 중 가장 순수한 인물로서 독자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안개의 상징성】

   안개는 물과 공기의 중간 상태이다. 비도 아니고 공기도 아니고 땅에 떨어지지도, 하늘에 속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순수한 인간적인 마음에서 나타나는 이상적인 지향점과 자신을 안정과 성공만을 지향하는 속물로 만드는 현실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모호한 이중적인 상태에 놓인 나의 번민에 찬 젊은 날이기도 하고, 근대화에 이끌려 속물화되고 있는 고향의 모습이기도 하다.

   여기서 안개는 소설의 전체적 분위기를 이끄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안개란 사전적으로는 지표면 가까이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부옇게 떠 있는 현상이지만 모든 것을 감추어 버려 제대로 보이지 않게 한다. 안개의 모호함과 비구분성은 자연을 배경으로 해 자아를 외부와 차단하는 장애물이면서도 그 모호성으로 인해 체념이나 단절보다는 갈등과 아득한 그리움을 유발한다.

   안개는 또한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을 상징하며 자아가 존재하는 하나의 상황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불안한 자아를 위협하는 갈등 상황이며, 동시에 필연적인 극복 대상이 안개가 가지는 현대적 의미이다. 현대인은 안개 속에서 탈출하려고 하지만 결국 안개에 묻히고 만다. 그 안개는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제공하지만 결국 현실의 한 연장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주인공의 혼미스러운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무진 기행'에서의 '무진'의 의미】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는 '무진 기행'은, 환상적 기준과 결별하고 현실 원칙에 순응해 가는 김승옥의 소설적 여정을 모두 함축한 문제작이다. 주인공 윤희중이 삶의 어떤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찾아가게 되는 무진이란, 지도상에 존재하는 현실적인 지명이 아니라 흔들리는 자아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근본적인 반성을 행하는 순수 의식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골방 안에서의 공상과 불면을 쫓아 보려고 행하던 수음과 곧잘 편도선을 붓게 하던 독한 담배꽁초와 우편 배달부를 기다리던 초조함" 따위의 연상과 관련되어 있는 그 곳은 질식할 것 같던 젊은 날의 쓰라린 추억과 동시에, 이제는 잃어버린 과거의 삶에 내포되어 있던 매력을 모두 갇고 있다.

   본래 고향이란 윤희중의 자기 의식을 소멸시키려는 전근대적 인륜성의 표상에 다름아니었다. 그는 무진에서 벗어나 스스로 서기를 간절히 원했고, 마땅히 그렇게 했으며, 적당한 타협을 통해 안정된 현재의 삶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5ㆍ16 이후 본격화된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배경으로 고향을 떠나 도회로 탈출하여 '출세한 놈'들의 자의식 속에는 사랑과 모성과 고향을 배반했다는 자책감이 뿌리 깊게 박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룩한 삶의 안정성을 좀더 확고하게 만들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을 때, 잃어버린 과거의 고향이 뿌리칠 수 없는 매력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자기 보존의 본능은 언제나 자아 상실의 맹목적인 충동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무진 기행’의 공간 미학】

   이 작품은 ‘무진으로 가는 버스’, ‘밤에 만난 사람들’, ‘바다로 뻗은 장죽’,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같은 제목이 붙어 있는 네 토막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이야기들 중 첫째와 넷째 토막의 제목이 ‘무진으로 가다’, ‘무진을 떠나다’와 관련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도 이 작품이 얼마나 배경, 그 중에서도 공간의 미학을 구축하는 데 부심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편지'와 '전보'의 상징성】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편지'와 '전보'의 상징성이다. '나'는 하인숙에게 절절한 편지를 썼다가 찢어버린다. 그리고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는 서울로 다시 올라간다. 그 순간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기행'은 '편지'와 '전보' 간의 갈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편지와 전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편지가 개인간의 내밀한 내면과 정감을 의사 소통하는 것이라면 전보는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의사소통 수단이다. 편지를 매개로 한 나와 하인숙의 관계와 전보를 매개로 한 나와 아내의 관계를 펼쳐 보이면 다음과 같다.

  ① 나는 하인숙을 버리고, 아내에게로 돌아간다.

  ② 나는 편지를 버리고, 전보에게로 돌아간다.

  ③ 나는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돌아간다.

   그것은 인용된 부분에서는 생략되었지만, 하인숙이 술자리에서 현실적인 처세술로 클래식을 버리고 대중가요인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것과 상통한다. 이 작품에서 나와 하인숙이 내밀한 감정의 교류를 느끼는 것을 서울과 무진 사이에 있는 나와, 무능하지만 인간적인 사람과 현실적인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는 하인숙의 처지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인숙과 나의 선택은 모두 '이상과' 순수'를 버리고 '현실의 속물'이 되어가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구성】

▶발단 : '나'는 서울을 떠나 고향 '무진'으로 내려감.

▶전개 : 동창과 후배와의 술자리에서 하인숙을 만남. 그녀의 허무주의적 태도에 이끌림.

▶절정 : 하인숙과의 정사(情事). 그러나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음.

▶결말 : 아내의 전보. 몽환에서 깨어나듯, '나'는 무진을 떠남.

【사건】

   이 작품은 네 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진으로 가는 버스→ 밤에 만난 사람들→ 바다로 뻗은 긴 방죽→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로 사건의 진행을 따라 순행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떠남→ 체험→ 돌아옴’의 패턴으로 보이는 구성이다. 괴로운 일상을 벗어나(떠남) 추억과 옛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만남을 경험한 다음(체험)→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는 것(회귀)이 작품의 골격이다.

【줄거리】

  『아내의 권유로 ‘나’는 무진으로 떠났다. 휴식차 떠나는 것이지만, 무진에서는 항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과거의 경험 때문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버스가 무진에 거의 다다르자 과거의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짙은 안개, 한(恨) 서린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은 안개가 떠올랐다.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안개는 무진의 명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진은 청년 시절의 ‘나’의 고향이었다. 6ㆍ25때 의용군의 징발도, 그 후의 국군의 징병도 모두 기피해 버리고 무진의 골방에 처박혀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좀 나이가 든 뒤로 무진은 항상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의 도피처로 찾았던 곳이었다.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 ‘나’는 무진에 오곤 했다. 그렇다고 무진에서 새로운 용기나 새로운 계획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진에서의 ‘나’는 항상 처박혀 있는 상태였었다. 늘, 어두운 골방 속에서 불면과 공상, 수음, 편도선, 담배꽁초와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는 초조 등으로 뒤엉키곤 했었다. 이번의 무진행도 다를 바가 없었다. 멀지 않아 ‘나’는 제약 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똑똑한 아내는 내게 무진행을 권했던 것이다.

   무진에 온 날 밤. ‘나’는 후배의 방문을 받고 그와 함께 중학 동창 조의 집으로 향했다. 조는 세무서장이 되어 비교적 윤택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하인숙이라는 여자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음악 대학을 나와, 무진에서 음악 선생을 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연주회 때 ‘어떤 갠 날’을 불렀던 기억을 과거에 대한 끈으로 애타게 붙들고 있지만, 술자리에서는 별 부담감 없이 유행가를 부르고, ‘나’에게는 미칠 것 같은 무진에서 자신을 구출해 주기를 간청하는 그런 여자였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런 그녀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이튿날 ‘나’는 서울로 데려다 달라는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한다. 이슬비가 내리는 아침에 ‘나’는 근처 산에 있는 어머니의 산소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은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 자살한 술집 여자의 시체였다. 갑자기 이 여자가 ‘나’의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간밤에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던 것은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 선생과의 약속 시간이 됐을 때 ‘나’는 그녀와 만나기로 한, 바다로 뻗어가고 있는 방죽으로 갔다. 그녀와 함께, ‘나’는 1년간 폐를 씻어 내던 바닷가의 집에서 정사(情事)를 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하지는 않았다. 다음날 아침, 아내로부터 온 전보를 받게 되었다. 서울에서 온 아내의 전보는 자신의 어두운 기억 밑바닥에서 되살아나 과거의 의식에 빠져 있었던 ‘나’를 일깨워 놓았다. 무진의 의식과 일상적 의식이 교차하면서 ‘나’는 무진을 이제는 영원히 의식의 저편으로 묻어두기로 결심한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한다.

   ‘나’는 인숙에게 사랑하고 있다는 편지를 쓴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 자신이기에, 적어도 내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나’의 모습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편지에 쓰지만 곧 편지를 찢어 버린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무진을 떠나 다시 서울로, 일상 세계로 돌아간다.』

   『아내의 권유로 '나'는 고향 무진(霧津)으로 떠난다. 젊고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을 했고, 얼마 후 제약회사 전무가 될 서른세 살의 '나'는 어머니의 묘가 있고 더 젊은 날의 추억이 있는 무진으로 간다. 짙은 안개, 그것은 무진의 명물이었다. 과거에도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면 무진에 오곤 했었다. 그러나 늘 어두운 골방 속에서의 화투와 불면과 수음(手淫), 그리고 초조함이 있었을 뿐이다.

   무진에 온 날 밤, 중학 교사로 있는 후배 '박'을 만난다. 그와 함께 지금은 그곳 세무서장이 된 중학 동창 '조'를 만난다. 그는 '손금이 나쁜 사내가 스스로 손금을 파서 성공했다.'는 투의 얘기에 늘 감격해 하던 친구다. 거기서 '하인숙'이라는 음악 선생을 소개받는다. 대학 졸업 음악회 때 '나비 부인'의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는 그녀는 술자리에서 청승맞게 유행가를 부르고 둘만이 함께 있을 때, 무진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나'에게 간청한다. '나'는 그녀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다.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한다.

   이튿날, 어머니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방죽 밑에서 술집 여자의 시체를 본다. 바다로 뻗은 방죽, 거기 '나'가 과거에 폐병으로 요양했던 집에서 하인숙과 정사(情事)을 갖는다.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끝내 말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아내로부터 온 급전(急電)이 과거의 의식에 빠져 있던 '나'를 일깨운다. 하인숙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쓰지만 곧 찢어 버린다. 이제는 영원히 기억의 저편으로 무진을 묻어 두기로 결심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곳을 떠난다.』

 『▶(1장) 무진으로 가는 버스

   나는 아내의 권고도 있고, 현실에서 실패를 맛볼 때의 의례적 습관으로, 이번에도 무진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짙은 안개는 무진의 명물이었다. 그러나 무진은 나에게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득한 장소일 뿐이며 어둡던 청년 시절을 보낸 그러한 곳이었다.

▶(2장) 밤에 만난 사람들

  순박한 후배 박 선생을 만나서 세무서장이 되어 거들먹거리는 중학교 동창 조가의 집에 밤중에 같이 가게 된다. 거기서 성악공부를 했다는 하인숙이라는 여선생이 주위의 청에 못 이겨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것을 보고는 ‘우리 나라에서는 대학을 다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서글픔에 잠기기도 한다. 그것은 곧 나의 젊은 시절 방황하는 모습의 편린이었다고 생각하고 하인숙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3장) 바다로 뻗은 방죽

   하인숙은 나를 서울로 데려다 줄 구원의 존재로 보고 접근하였고, 무료한 나는 곧 하인숙과 깊은 관계에 빠지지만, 결코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순간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4장)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서울로부터 아내의 전보를 받고는 과거의 의식에서 깨어나게 되었고, 하인숙에게는 이별과 함께, 다시 만날 기약의 편지를 쓰지만 곧 찢어 버리고, 무진을 영원 속에 묻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상경한다. 순간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감상】

   이 작품은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보편적 인간 심성을 기본 줄기로 한다. 주인공인 ‘나’가 서울을 떠나 무진으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는 <떠남 → 추억의 공간(고향) → 복귀>의 여로(旅路) 구조이다. 그 여정에서 ‘나’는 더 젊었던 시절의 고뇌를 다시 만난다.

   즉 무진의 골방에서 불면의 밤과 수음(手淫), 담배꽁초와 편도선, 6ㆍ25전쟁의 상처,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던 초조 등 어둡던 청년 시절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무진에서 ‘나’는 하인숙이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녀 역시 과거의 ‘나’가 그랬듯 서울행을 목표로 무진 탈출을 꿈꾸고 있는 존재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나’에게 과거를 떠올리는 끈이요, 감상(感傷)의 실체였다.

   그러나 그 의식의 다른 끝에는 시민과 책임이라는 상대적 가치가 놓여 있다. 그것을 일 깨워 놓은 것이 아내의 전보(電報)이다. 그리하여 ‘나’는 한 귀향자의 마음에 안개처럼 축축히 배어드는 센티멘탈리즘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작가의 표현을 빌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고 ‘나’는 되뇌지만, 이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이라는 조건으로 인하여 사실은 무진과 그 체험을 부정한다는 의미이다.

                                         -<현대소설의 이해와 감상>(문원각)에서-

   이 작품의 ‘나’라는 인물은 자기 존재 이유의 확인 속에서 정서적 아나키즘, 지적 패배주의, 윤리적인 자기 도피를 극복해 보려는 작가 의식의 한 산물이다.

   바람, 햇빛, 안개는 이 작품의 밑바닥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진’이라는 땅이 가지는 시간과 공간적인 의미와 긴밀히 연결된다. 즉, 주인공은 그것을 통해 6ㆍ25의 골방 시절로 돌아가고 좌절의 시간에 찾곤 했던 저 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회억(回憶)과 감상(感傷)이라는 의식과 시민과 책임이라는 의식으로 구분된다. 주인공의 ‘무진’으로의 여행과 ‘무진’에서의 떠남은 그의 그러한 두 가지 의식이 긍정과 부정에로 옮아가는 모습으로 연결된다.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꼭 한번만”

   무진의 부정은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쓴 하인숙에게 보내는 편지를 찢어버리고 드디어 그곳을 떠남으로써 완결된다. 이러한 ‘무진’이라는 구체적 지명이 내포하는 의미는 인간 의식과의 연결에 있다. 즉, 기후로서의 안개가 아닌 사물로서의 안개를 의미한다. <무진 기행>은 6ㆍ25와 그것에 이어 벌어지는 도시와 시골의 격차와 함께 의식의 허무주의를 그리면서, 이렇게 안개 속에서 그것을 벗어나는 한 젊은이의 드라마를 통해 상황을 극복하는 한 개인의 능력을 보여준다.

   아무에게나 발견되지 않았던 안개라는 소박한 자연을 발견하고, 그것을 작중 상황으로 꾸밈에 성공했다는 것이 이 작품을 우리 나라의 단편문학의 한 높은 성과로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것을 일컬어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에 대한 확인으로서의 트리비얼리즘의 개가라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김윤식 : <한국 현대문학 명작 사전>(1982)-

   이 소설에는 두 가지 공간이 있다. 아내가 있는 서울은 세속적이지만 현실적 가치의 공간이다. 이에 반해 무진(霧津)은 나른하고 축축한 몽환의 세계이다. '나(윤희중)'는 회억(回憶)에 이끌려 무진에 갔다가 2박3일의 여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다. 즉, 감상(感傷)을 떨치고 시민이 있고 책임이 주어지는 현실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보편적 인간 심성을 기본 줄기로 한다.

   주인공인 '나'가 서울을 떠나 무진(霧津)으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는 '떠남→추억의 공간→복귀'의 여로(旅路) 구조이다. 그 여정(旅程)에서 '나'는 더 젊었던 시절의 고뇌를 다시 만난다. 즉, 무진의 골방 안에서의 불면의 밤과 수음(手淫), 담배꽁초와 편도선, 6.25 전쟁의 상처,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던 초조(焦燥) 등 어둡던 청년 시절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무진에서 '나'는 하인숙이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녀 역시 과거의 '나'가 그랬듯 서울행을 목표로 무진 탈출을 꿈꾸고 있는 존재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나'에게 과거를 떠올리는 끈이요 감상(感傷)의 실체였다. 그러나 그 의식의 다른 끝에는 시민과 책임이라는 상대적인 가치가 놓여 있다. 그것을 일깨워 놓은 것이 아내의 전보이다. 그리하여 '나'는 한 귀향자(歸鄕者)의 마음에 안개처럼 축축히 배어드는 센터멘털리즘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작가의 표현을 빌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고 '나'는 되뇌지만, 이것은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번만"이라는 조건으로 인하여 사실은 무진과 그 체험을 부정한다는 의미이다.

   특히,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쓴 하인숙에게의 편지를 떠나기 직전에 도로 찢어 버림으로써 무진은 또다시 추억의 공간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현실로 회귀한다.

   이 작품은 '무진'이라는 특정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무진은 언제나 안개에 싸여 있어 사물들이 늘 흐릿하게 보이는 곳이다. 이 흐릿함 속에 묻혀 사람들은 자기 기만과 자기 위안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진이라는 지역은 당대 사회의 한 특성을 함축하도록 설정된 공간이다. 주인공은 정신없이 바쁘게만 돌아가는 서울 생활을 벗어나 휴양차 잠시 이 곳에 내려온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모르는 척 합류하게 된다.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투명한 의식을 지니고는 있지만, 자기의 과거를 잊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들 전쟁에 참가할 때 이 곳으로 도피하여 어두운 골방 속에서 지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이 늘 자신을 괴롭히는 과거이기에, 이번 기회에 완전한 탈출을 시도한다. 그가 무진에서 맞이하는 사건들은 그런 탈출의 도구이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무진을 도망치듯 떠나면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대목에서 자아의 본모습은 그러한 작위적인 탈출로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작자는 이런 의식의 단면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문체는 그 섬세한 인간의 의식이 가감 없이 드러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스쳐 지나가듯 묘사하면서도 본질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서술 기법, 등장 인문들의 화법 등이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언어 예술로서의 소설이 지닌 묘미를 느낄 수 있다.(김대행ㆍ김동환 : <문학>)

   서울은 일상의 공간이고 무진은 일상을 벗어난 공간이다. 아내가 있고, 직장이 있는 서울은 세속적이지만 현실적인 가치가 존재하는 곳이고, 무진은 안개와 바다가 있고 자살한 여인의 시체와 하인숙의 노래가 있는 꿈의 공간이다.

   꿈의 공간인 무진은 현실의 공간인 서울보다 아름답지만, 사람은 꿈 속에서 살 수 없다. 여정 속에서 ‘나’는 어두운 과거와 현재의 비속한 삶을 되돌아보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아내가 보낸 전보를 받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라며 현실에 타협하게 된다. 결국 ‘나’는 무진을 떠나기 전 하인숙에게 쓴 사랑의 편지를 찢어버림으로써 무진은 또 다시 추억의 공간으로 사라지고, ‘나’는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주인공이 편지를 찢어버리고 아내가 보낸 전보의 내용대로 행동하는 것은 현실을 따르는 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적 배경의 하나인 ‘안개’가 지닌 의미이다. 여기에서 ‘무진’이란 지명이 나타내는 안개는 주인공의 의식에 깊숙이 관여하는 소설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즉 ‘안개’는 출구가 막힌 듯한 답답한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나 윤희중은 왜 하필 ‘무진’에 가게 되었으며, 그곳의 지명은 왜 ‘무진’인가? 안개 도시 무진에서 도대체 ‘안개’의 정체는 무엇인가? 안개는 단순한 사물, 자연 현상만은 아니다. 4ㆍ19혁명과 5ㆍ16 군사 쿠데타를 겪은 직후 이 작품이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작품 전체에 짙게 깔린 안개는 4ㆍ19에 의해 움트던 역사가 5ㆍ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꺾이면서 젊은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방황과 허무 의식이며, 당시 전염병처럼 번져 사회 곳곳에 스며든 세속적 출세주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1960년대의 방황과 허무, 출세주의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인물은, 빽 좋은 여자와 결혼한 ‘나’와 무진을 탈출하고 싶어하는 음악 선생 하인숙이다. 나는 어릴 때 살았던 가난한 어촌 무진에 복잡한 회사 문제를 피해 휴양차 내려온다. 거기에 옛날의 자신과 비슷한 하인숙이 있었다. 나, 윤희중에게 무진은 어떤 곳인가? 항상 쓸쓸하고 외로웠던 청춘의 조각들이 널려 있는 곳이었다. 그 옛날의 내가 하인숙을 통해 되살아나고, 몸을 섞음으로써 안개에 파묻힌다.

   그러나 그는 유능한 생활인이었다. 아니, 그 자신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을 보장해 주는 아내와 장인이 있다. 그는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타협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 그가 내놓은 타협안이었다.

   김승옥은 <무진 기행>에서만이 아니라, <서울, 1964년> 등에서도 줄거리 위주의 소설 전통을 거부하고 감각적인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 이는 작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혼란스럽고, 어디가 어딘지 전혀 방향을 분간 못하는 어둠 속에서 살았던,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20대의 정신적 고향의 상실과 방황을 그런 식으로밖에 그려낼 수 없었을 것이다.

   김승옥은 새로운 감수성(感受性)의 혁명을 일으킨 1960년대 문학의 선두 주자로 평가받았다. 이 작품에는 도시 사회 속에서 겪는 개인의 내면적인 갈등이 탁월한 문체와 구성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게 펼쳐진다.

   이 작품은 서울에서 고향인 무진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기행(紀行)'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은 서울에서 속물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고향인 무진에 와서도 삶의 순수한 가치를 되찾을 수 없다. 출구가 막힌 듯한 답답한 상황은 '안개'라는 상징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드러난다. 고향 '무진(霧津)'은 안개 마을인 것이다. 아직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후배 '박'과 속물이 되어 버린 친구 '조' 사이에서 망설이는 젊은 음악 선생 '하인숙'에게서 '나'는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순수한 삶과 타락한 삶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젊은 시절의 '나'와 흡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잊고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아내의 전보를 받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가는 바로 찢어 버린다.

   그 편지는 이제 '무진 기행'을 읽는 독자들의 가슴 속에 전해질 것이다. 편지와 전보, 안개와 수면(睡眠) 등의 이미지를 서로 연결시켜 가며 작품을 감상하면 훨씬 깊은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일상을 벗어나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러한 충동은 이유 없이 발동하는 선험적(先驗的)인 것이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허무와 회의를 느낀다든가,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을 때 특히 강렬하게 나타난다. 여기에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어떤 구원의 빛을 던져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의욕의 회복, 정력의 재충전 등을 위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이 일상으로부터의 분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욕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욕구는 완전히 일상으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대부분 복귀를 전제로 하는 잠시 동안의 일탈(逸脫)이고, 또 그럴 때 그 분리는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 어떤 경험을 통해 힘을 얻고 다시 돌아와서 새로운 의욕으로 삶을 영위해 나간다는 것이 이 분리(떠남)의 참다운 의미라 할 수 있다.

   <무진 기행>은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 심성을 극화시켜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윤희중이 서울을 떠나 무진으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거리이다. 떠나 보았자 아무런 구원도 의미도 없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떠나 있는 동안 서울의 생활이 지니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여행의 구조와 동일한 구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윤희중의 떠남은 도피가 아니라 발견을 위한 탐색 여행인 것이고, 그 탐색 여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다음 다시 자기의 세계로 돌아올 것을 전제로 한 떠남이다.

   윤희중이 그의 고향인 무진으로 가서 몇 사람을 만나고, 또 몇 가지 체험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무진을 다시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한다. 특히 하인숙을 통해 그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주인공 자신의 인간적 욕구의 실현이 가능한 장소는 서울이라는 깨달음이다.

   이 작품은, 인간은 자신을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한 가지 이 작품은 1960년대적인 삶에 대한 회의와 허무 의식을 그 제재로 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의식 내부에서 조작된 세계를 산다는 일은 무의식적으로 세계를 살아나가거나 아니면 가상(假想)의 관념세계 속에서 허위적대는 재래의 인간형에 대한 날카로운 도전(挑戰)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의식 내부에서 조작된 세계를 갖는다는 것이 개인의 성격을 뚜렷이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이 사르트르류의 표현을 빌면, 소위 ‘개 같은 놈’으로 사람이 변모해 가는 양태(樣態)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성 잇는 인간, 당위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당위와 현실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동시에 그것은 그 개성이 얼마만큼의 자기기만을 통해 형성된 것인가도 파악하게 해 준다. 이 두 가지 점은 당위만에 얽매어 생활하는 당위인(當爲人)이나, 혹은 수동적인 상황 속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짓눌려 사는 수동인(受動人)에 대한 날카로운 항변이며, 바로 이것을 통해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이 점쳐진다.

   의식 내부에서 조작되어 개인의 성격을 뚜렷이 하는 예를 우리는 그의 소설 곳곳에서 만난다. 가령, 한 예를 들면 이렇다.

   [‘옛날에 손금이 나쁘다고 판단받은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자기의 손톱으로 손바닥ㄷ에 좋은 손금을 파 가며 열심히 일했다. 드디어 그 소년은 성공해서 잘 살았다.’

   조는 이런 얘기에 가장 감격하는 친구였다.]

   이 구절은 <무진기행(霧津紀行)>에서 윤희중이 조(趙)라는 ‘출세한’ 친구를 설명하는 대목인데, 그 의식 내부에서 조작된 진술을 통해 우리는 발자크의 저 지루한 사설(辭說)에 접하지 않고서도 단번에 조(趙)라는 사람의 전모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파악된 인간이 얼마나한 자기기만을 감수하고 있느냐에 대한 침통한 진술을 작가는 <무진기행(霧津紀行)>에서 극명히 해 보여준다. 이 소설은 시골서 실의와 실망에 가득차서 상경했다가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여 일약 ‘출세(出世)’를 하게 된 윤희중이 휴양차 시골로 내려가 여학교 선생과 정서(情事)를 벌이고 상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정사(情事)가 행해지는 과정 속에서 윤희중은 소위 태도의 희극을 너무 잘 보여준다.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안개만이 유일한 명물인’ 도시에서, 마치 바닷가에서 모두를 떠나서 산 일 년 동안 내내 열심히 ‘쓸쓸하다’라는 ‘천박학소, 이제는 사람의 가슴에 호소해 오는 능력도 거의 상실해 버린 사어(死語)’를 편지 속에 써 보내던 윤희중처럼, ;바보라는 이름의 혈액형‘ 일을 고백하는 인숙에 대해서, 희중이 느낀 것은, 결국 그가 써 보낸 편지를 받은 사람이 그의 심정에 공명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것을 그가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가 알았던 것처럼, 인숙의 고통 역시 그로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으리라는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준다. 그것은 그의 오래 전의 절망을 그 여자를 통해 빼앗아 버린 것과도 같다. 그 여자란, 희중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괴롭고 쓸쓸하던 옛날의 한 편린(片鱗)에 지나지 않는다. 무진(霧津)의 그 틉틉한 안개 속에서 희중은 옛날의 자기와 무척도 흡사한 한 여인을 만난 것이다. 아니 무진(霧津)이라는 이 고장 자체가 그러한 착각을 유발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희중의 의식 속에서 무진(霧津)은 항상 쓸쓸하고 괴로웠던 청춘의 편린 같은 것이고, 그 편린의 가련한 육화물(肉化物)로서 희중은 인숙을 만난 것일 따름이다.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과는 다른, 좀 더 무지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 ‘어떤 갠 날의 그 높은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한’,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狂女)의 냉소가 스며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가는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있는’ <목포(木浦)의 눈물>을 노래하는 여선생에게서, 서울로 가고 싶다고, 바다로 가는 긴 둑에서 희중에게 매달리는 여자에게서, 자기 자신이 싫어질 때도 있다는 그런 여자에게서, 그는 동거하고 있던 희(姬)를 일어버렸을 때의 자기 자신을, 모두가 전쟁터 \로 몰려갈 때, 골방 속에 숨어서 수음(手淫)을 하고 있던 때의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의 의식 내부에서, 그의 쓰린 과거가 되살아나온다.

   그는 마치 그 과거를 소생시키기 위해서인 듯, 그녀와 정사(情事)를 맺는다. 완전한 의식의 조작이다. 그러나 그는 영리한 생활인이다. 그에게는 그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그의 아내와 그의 장인의 후광이 있다. 그는 이미 그의 과거를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열한 타협안을 작성한다. 그것으로 그는 그의 그 쓰라린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려 한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지독한 태도의 희극이다. 그는 이러한 타협안의 뒤에 얼마나 진한 자신의 과거가, 인간의 고뇌가, 절망에 이르도록 고독한 개인의 절규가 웅크리고 있는가를 잘 알 것이다., 결국 그는 무진(霧津)을 도망치듯 떠나면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부끄러움은, 그가 다시 무진(霧津)으로 돌아와서, 그의 과거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술집여자의 자살을, 진실한 인간의 고뇌를 이해하지 않는 한, 끝내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진실한 고뇌의 밖, 의식으로밖에는  조작할 수 없는 그런 가상((假想)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것을 수락함으로써, 자기 세계를 갖게 되는 사람이 내보여 주는 이러한 태도의 희극은 <생명연습(生命演習)>에서부터 시종일관되는 작기의 제재(題材)이기도 한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소설은 계속 독자의 가슴을 찌르고 할퀸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그런 자기기만의 세계에서 빼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  김현(金炫) : <한국단편문학대계.(1969) 발췌 -

【작자의 말】

   <무진 기행>의 착상은 우연히 얻어진 것이었다. 어느 날 고향 거리를 우울하게 걷고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사람들은 객지에서 실패하면 고향으로 가고 싶어지는 것일까? 귀소 본능이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데 뭔가 크게 작용하는 요소가 아닐까?’ 또, 한 가지 우연히 얻은 소재는 어느 사사로운 모임에 갔더니 서울에 있는 모 음악 대학을 나온 여선생님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유행가를 부르는 모습을 문득 ‘우리 나라에서는 대학을 다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서글픔에 잠시 잠긴 일이 있던 거였다. 당시는 대학을 나와 취직자리 하나 변변찮던 암울한 시대였다. 안개가 낀 듯이 미래가 보이지 않던 시대, 6ㆍ25 전쟁으로 전통적인 재산도 가치도 다 파괴되어 버리고 너나 없이 속물이 되어 버린, 속물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것 같아 보이지 않던 불투명한 시대가 바로 1960년대였고 젊은 날의 상황이었다.   ― <무진 기행을 쓰던 무렵>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