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내고 싶을 때 어떻게 찾았나

사표내고 싶을 때 어떻게 찾았나

스테파노 라바리니

학교폭력 문제로 코트를 떠난 쌍둥이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까. 한국 여자배구대표팀이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VNL선 부진…도쿄올림픽에 초점

스테파노 라바리니(사진)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현재 이탈리아 리미니에서 열리는 VNL에 참가하고 있다. 16개국이 1주일에 3경기씩 5주간 풀리그를 벌인 뒤, 4강 토너먼트로 우승팀을 가린다. 한국은 4일까지 1승 5패(승점 4)로 14위다. 1주차에 대회 직전 코로나19 감염으로 선수를 대폭 교체한 태국을 3-1로 이긴 게 유일한 승리다. 일본과 중국에는 졌다. 2주차에는 폴란드·도미니카공화국·벨기에를 만나 전패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이번 대회보다는 올림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번에는 2019년 주전 7명 중 4명이 빠졌기 때문이다. 김수지·김희진이 부상으로, 이재영·다영 자매가 학교폭력으로 빠졌다. 김수지는 올림픽 때 합류한다. 대표팀의 핵심이었던 쌍둥이 공백의 최소화가 과제다. 이재영은 공수를 겸비한 레프트였고, 이다영은 대표팀 주전 세터였다.

우선 레프트 쪽 공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강소휘가 발목 수술로 빠졌지만, 이소영이 잘 해주고 있다. 이소영은 팀 내에서 가장 많은 공격 득점(63점)을 기록하고 있으며, 성공률도 40.9%로 무난하다. 김연경도 최고 컨디션은 아니지만, 공격과 수비에서 안정감이 여전하다. 벨기에전에서 두 선수는 50점을 합작했다. 이소영은 라바리니 감독 뜻에 따라 공격적인 스파이크 서브로 바꿨다. 올림픽에서도 김연경과 이소영이 주축 레프트로 뛰고, 표승주가 백업을 맡을 전망이다.

세터는 보완이 필요하다. 라바리니 감독은 이번 대표팀에 염혜선, 안혜진, 김다인 등 3명의 세터를 뽑았다. 염혜선과 안혜진은 과거 라바리니 감독과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김다인은 처음이다. 2019년 월드컵 때 대표팀에서 활약한 염혜선은 2월 손등과 손가락을 다쳤다. 회복한 지 얼마 안 돼, 경기력이 완전히 올라오지는 않은 상태다. 안혜진은 라이트 박정아 활용도를 높였지만, 속공 활용도가 낮았다. 태극마크가 처음인 김다인이 오히려 빠른 발을 활용한 플레이로 눈길을 끌었다.

문제는 세 세터 모두 키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염혜선이 1m 77㎝로 가장 크고, 안혜진이 1m 75㎝, 김다인이 1m 71㎝다. 장신(1m 79㎝)에 점프력까지 좋은 이다영과 비교해 블로킹에서 좀 떨어진다. 상대 팀은 한국 세터가 전위에 있을 때 그쪽을 노려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토스 워크에 있어 공격수와 호흡도 좀 더 맞추는 것도 과제다.

김효경 기자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인간은 모두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추구하고 그 결과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 있게 살고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얻지 못하고 텅 빈 삶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허다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헤밍웨이 같은 위대한 문인인 것입니다. 노벨문학상까지 탔으면서도 불구하고 그는 극단적으로 불행을 느끼고 자살했습니다. 왜 우리가 외면적으로 볼 때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다 달성한 것같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에 공허와 좌절과 절망을 느끼고 자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까?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삶의 기쁨과 행복의 핵심요소인 사랑의 결핍증에 걸려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든 외면적인 환경을 봐서 완벽하다고 할지라도 내면적인 사랑의 결핍증에 걸리면 결코 행복을 가질 수 없습니다.

<본론>
1. 사랑이 없는 성취의 무의미
첫째로, 사랑이 없는 성취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 1~ 3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여러분 귀 기울여 들어봐 주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오늘날 사람의 방언을 많이 말하면 굉장히 자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다 자녀들에게 영어공부를 시키려고 조기유학을 시키고 또 한국에는 영어마을이라는 것이 생겨나서 입소하여 그곳에서는 한국 내에 있으면서도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세계적인 언어인 영어를 다 잘 구사하기를 원합니다.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자랑입니다. 저는 신문광고에 보면 한주일이면 입이 열려 영어를 말하게 한다. 한 달이면 자유롭게 영어를 말하게 한다.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적어 놓은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영어가 필요한 사람은 여기에 속아 넘어간다구요. 저는 40년을 영어를 말해도 지금도 잘 못합니다. 결코 외국어는 쉽지 않습니다. 어머니 젖꼭지를 물고 배운 모국어처럼 그렇게 유창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외국어를 몇 달 만에 잘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방언을 많이 말하는 것은 굉장히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뿐 아니라 천사의 말을 한다. 천사처럼 말을 잘합니다. 슬픈 사람은 천사처럼 말로써 위로해 주고 기쁜 사람은 더 기쁘게 해주고 낙심한 사람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얻게 해주고 암울한데 있는 사람은 지혜를 주는 천사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외면적인 것이고 내용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많은 나라 방언을 말하는 것도 자랑스럽게 되고 천사처럼 잘 말할 수 있는 것도 큰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것은 순수하게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3:18~19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지식을 통달하면 대단한 사람같이 여기지 않습니까? 더구나 요사이같이 경쟁이 심하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예언하는 능이 있어 정치적으로 미래를 내려다볼 수 있고 경제적으로 어떻게 될지 알아서 투자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군사적인 미래를 알아서 나라의 국방을 튼튼하게 할 수 있고 혹은 사업을 미래를 잘 읽어서 잘 투자해서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다면 그러한 능력은 정말 놀라운 축복입니다. 오늘날 미래학이라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언하는 능이라는 것은 정치, 경제, 군사, 산업 모든 분야에서 미래에 일어날 것을 미리 예측해서 말할 수가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 놀라운 사람 아닙니까? 무일푼으로 허허벌판에 거대한 기업을 일으키고 사업을 일으켜 수천, 수만 명을 고용하고 나라를 부강케 하는 이러한 일들은 놀라운 일이요, 그러한 사람들은 신념의 사람으로 칭찬을 받고 박수를 해줘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예언하는 능을 가진 사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굉장히 위대한 사람같이 보이지만 실제 하나님이 볼 때는 사랑이 없는 예언하는 능력이나 위대한 믿음은 한 푼어치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 값이 나가지 않아요. 너무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과 우리가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를 번제물로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내게 유익이 없는 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구제하는 운동은 사랑 없이도 많이 합니다.사회적인 요구에 의해서 요사이 보면 소이 재벌기업들이 사회적인 지탄을 피하기 위해서 거액의 돈을 구제합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지탄과 압력에 의해서 할 수 없이 큰돈을 구제하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는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사랑이 없이 자기를 번제물로 내어 줄지라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요사이 자기 몸을 번제물로 내놓은 사람 많습니다. 소이 말하는 테러리즘, 자기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테러리즘. 911사태 이후로 테러리즘은 온 세계에 염병처럼 퍼져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몸을 폭탄과 함께 내어 던져 버려서 산산조각이 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동기가 아니고 미움의 동기로 복수의 동기로 할 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에서는 그렇게 자기를 희생하고 폭탄과 함께 산산이 쪼개지면 그 영혼이 천당에 가서 말할 수 없는 낙을 누린다고 하는데 새빨간 거짓말인 것입니다. 미움의 동기로 사는 모든 일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구제나 사랑 없는 희생제물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가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만 진실한 만족을 느낄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사람만이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한다. 그들은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를 몸에 지니고, 함께 아멘하고, 함께 할렐루야 노래하며, 함께 세례를 받고, 함께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이 내용입니다. 사랑 없으면 사람의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있는 것으로 다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는 내어 던질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유익이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다 크리스챤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도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녀의 구분은 사랑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사랑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빠진 능력과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프랑스의 속담에 “돈도 음악도 예술도 사랑이 없이는 남을 감화시키지 못한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영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2. 내게 사랑이 있으면
둘째로, 내게 사랑이 있으면 사랑하는 이 앞에서 그 진실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리트머스지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정말 내가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사람들은 그 질문을 해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의 가슴속에 무엇을 보고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그것을 시험해 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바로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볼 수 있고 부부간에 사랑, 이웃 간에 사랑이 있는가를 이 성경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 가슴속에 일어나는 것입니까?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있으면 오래 참고 사랑이 없으면 오래 참지 못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오래 참습니다. 대변, 소변 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고 손발이 다 닳도록 돌보아 주고 못된 짓 하는 것 오래 참고 오래 견디며 오래 기다립니다. 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똑같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오래 참고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동정하려고 애를 쓰고 참습니다. 참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동정하지 못하고 성을 버럭 내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게 사랑이 있으면 이해하고 동정하고 오래 참습니다. 사랑과 인내는 언제나 함께 가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면서 버럭 성을 내고 오래 참지 못하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증거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2: 3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인들의 거역함을 오래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5: 7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한 것입니다.
오래 참고 길이 참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어떠한 사람과 교제할 때 그 사람을 사랑하느냐, 안하느냐 알아보기 원합니까?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이해하고 동정하고 오래 참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알아보십시오. 오래 참을 수 있으면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지 못하고 이해하고 동정하지 못하면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온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얼마나 온유하게 대합니까? 부드럽게, 부드럽게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하지 않습니까? 왜,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함이 같이 따르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해 주는 것,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해주는데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이 없이 강하고 완악하게 대한다면 사랑이 없지 않습니까? 이웃을 따뜻한 마음으로 부드럽게 대할 수 있으면 사랑이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 2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우리 사랑하기 때문에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를 알려면 내 마음이 상대에 대해서 따뜻하고 부드러운가, 그렇지 않으면 차고 매서운가, 이런 것으로 분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질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하는 부모가 자식이 잘되는 것 투기합니까? 자식이 잘되는 것 시기해서 모함과 중상을 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요, 절대 시기하지 않습니다. 남편도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아내가 잘되는 것 시기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출세하고 잘되는 것 남편이 시기하고 질투하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요. 이웃이 잘되는 것 향해서 박수를 치고 격려해 주면 좋은데 오늘날 세상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지요. 남이 잘되면 온갖 중상모략을 다해서 끌어내리려고 하지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속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를 살펴보려면 내가 이웃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느냐 안하느냐 이것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잠언 17: 9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자기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을 자꾸 하면 그것을 듣는 남에게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혼하기 위해서 저에게 신앙상담을 온 신랑, 신부의 이야기가 늘 기억이 납니다. 30대 초의 젊은 신랑, 신부인데 신랑은 신부를 꾀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신부는 결심하고 이혼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둘이 와서 저에게 신앙상담을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신랑은 재벌의 아들입니다. 신부는 아주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고학으로 대학을 공부하고 직장에 다닐 때 이 신랑을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적인 계층이 다르고 자라온 과거가 다르기 때문에 둘이 인생경험이 나누어지지가 않아요. 신랑이 살아온 인생과 신부가 살아온 인생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물과 기름같이 이야기가 되지 않고 서로 경험이 일치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신랑이 신부를 사랑해 가지고서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고급음식을 대접하면서 꼭 하는 말이 “너 옛날에 못 먹어봤지? 이 음식 너는 못 먹어 봤지?”라고 신랑은 의미 없이 말합니다. 그 아내를 사랑해서 아주 좋은 음식점에 가서 대접하면서 꼭 “너 이 음식 옛날에 너희 집에서 못 먹어봤지?” 하니까 신부는 그것이 가슴에 멍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 숟가락 던져 버리고 일어나 “그래, 못 먹어봤다! 어떻게 할래?” 왜,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 신부가 하는 말이 “철철이 옷을 해주는 것은 고마운데 옷을 해주고 입혀 놓고 난 다음 ‘너 옛날에 이것 못 입어 봤지?’ 이 말에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고약한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나를 모욕하기 위해서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습관적으로 그렇게 늘 나를 비하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가지고 살수가 없으니 나는 이 남자하고는 이별해야 되겠다. 이 남자는 자기와 생활수준이 맞은 여자와 재혼을 하는 것이 행복할 것이고 나는 나와 생활경험이 같이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행복하게 살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 신랑의 자기자랑이 이 신부에게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을 가져온 것입니다.
잠언 27: 1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말했고, 야고보서 4:14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했으며, 16절에는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써 지금까지 살아왔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또 은혜로 매일매일 신앙생활 하다가 은혜로 천당 갈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된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이 있으면 자식들 앞에서 부모님이 “나는 젊을 때 이렇게 아니했다.” 그런 자랑을 합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거짓말 많이 해요. 애들이 공부 못하면 “나는 너희만할 때 공부 참 잘했는데… 나는 너희만할 때 정말 순종 잘했는데… 깔끔하게 잘했는데…” 이는 대다수로 거짓말입니다. 자녀들에게 그런 허튼 자랑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자기 의시대려고 자랑하면 아내는 속으로 비웃습니다. ‘허! 웃기는 소리하네. 지가 뭐 잘났다고…’ 또 부인이 남편에게 자기 자랑할 것도 없어요. 둘이다 손 털어 놓고 솔직하게 인생을 사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하면 자랑하여 남을 열등의식을 갖게 만들지 않습니다. 또 사랑하면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만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 이만하면 되었다. 나만한 사람 없다. 나 같이만 되어라.’ 자만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자식보고 “나만큼만 되어라. 나 정도면 훌륭하다.” 그렇게 자랑하지 않지요. 남편이 아내보고 “나 같은 사람하고 결혼한 것 행복하게 여겨라. 나는 당신의 분에 넘친다.” 그런 소리 하면은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또 부인이 “허! 내가 당신하고 살아주는 것도 고맙게 여겨라. 당신 어디 가서 나 같은 여자 얻을 생각하지도 말아라.” 그러면 얼마나 마음속에 수치심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사랑하면 절대로 교만하게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점점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언제나 높여주고 상대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잠언 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빌립보서 2: 3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항상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우리는 이웃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높여주고 칭찬해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 5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내가 사랑이 있으면 겸손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교만합니다. 오늘 내가 상대편에 대해서 우월감을 느끼고 교만함을 느낀다면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랑이 있으면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여러분 무례히 행한다는 것 참 고약한 일입니다. 예의범절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오만불손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말도 무례한 말을 하고 행동도 무례한 말을 할 때 상대에게 굉장한 타격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아주 건방지게 허리를 쭉 펴고 반말하는 것 아주 나쁘지요. 오늘날 주의 종들이 이런 죄를 많이 짓습니다. 저도 TV를 틀어서 주의 종들이 설교하는 것을 많이 듣는데 주의 종들이 설교하면서 교인들보고 “안 그래? 아멘 해!” 굉장히 제가 들을 때 기분이 나쁩니다. 지가 내 선생이냐, 내 아버지냐, 내 할아버지냐? 왜 나보고 반말하느냐? 그런 생각이 마음에 올라오는 것입니다. 제가 늘 주의 종들에게 말하기를 “네가 강단에 설 때는 하나님의 사자로써 하나님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지 사람들보다 우월해서 선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반말하지 말라.” 더구나 신앙상담을 한다든지 심방 가서 성도들 모아놓고 남자 주의 종이 여자 성도들 앞에서 반말합니다. “이렇게 해! 저렇게 해!” 그리고 우쭐거리고 잘난 듯이 말하는데 우쭐거리고 잘난 것이 아니라 아주 못난 자식이 그런 소리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언어, 심사, 행동을 예의 바르게 해야 사랑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잠언 14:21에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이웃을 업신여기면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까? 로마서 15: 2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항상 덕을 세우는 언어, 심사, 행동을 해야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례히 행하는 사람 보면 저사람 사랑이 없고 그리스도가 그 속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무례히 행하는 주의 종, 무례히 행하는 장로님 혹은 안수집사, 권사, 지구역장들이 있으면 아직까지 한참 신앙에 멀어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예의 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예절바른 것과 신앙과는 큰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절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닌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식이 먹을 것 다 자기가 빼앗아 먹고 부인이 가질 것 다 자기가 가진다면 그것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처자를 다 버리고 난 다음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여러 번 이 말을 했지만 또 한 번 하고 싶은 것은 제가 서대문에 있을 때 주의 종을 모집한다고 하니까 한사람이 저에게 주의 종 모집에 신청해 와서 상담을 하는데 내가 “처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니까 나를 보고 허허 웃더니만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그러더라고요.
너무나 놀랐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처자를 분토와 같이 버린 사람이 주의 종이 되겠다고 저에게 상담을 하러 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자기 개인주의고 이기주의입니까?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가 책임진 처자를 분토와 같이 버리고 어떻게 주의 종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의 친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악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와 자기 처자는 자기 목숨을 바쳐서 돌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책임이요,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것도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돌보아 주는 것입니까? 내 처자도 돌보지 못하면서 누구를 돌볼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까? 그러므로 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 사람이 멀리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사랑을 베풉니까? 옛날에 보면 자기 처자는 굶주리게 해놓고 저 멀리 있는 이웃 사람에게 있는 것 다 갖다 주는 사람 제가 많이 보았어요. 처자가 굶주리고 있는데 이웃 사람에게 다 갖다 나누어 주고 나는 선한 사람이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착각을 해도 보통 착각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일에도 충성합니다. 가까운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먼데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유익을 구하는 그러한 삶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자기 가까이로부터 시작해서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남을 잘되게 돌봐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남을 잘되게 한다는 것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남을 잘되게 하면 먼 훗날에 보면 그것이 자기를 잘되게 하는 첩경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고 한 것입니다. 주면 돌아오는 것입니다. 내가 움켜쥐면 사라지고 말지만 자꾸 주면 자꾸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랑도 자꾸 주면 자꾸 사랑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랑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사랑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을 많이 사랑하면 나도 많이 사랑을 받게 되고 사랑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3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랑이 있는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대학을 다니던 시절 캠퍼스에서 한 아름다운 유태인 여학생을 본 순간 교수가 학생에게 그만 활짝 반해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프로포즈해서 결혼했습니다. 수재로 알려졌던 그는 졸업 후에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되어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또 너무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독일에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의 가정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국가에서 “유태인 아내와 이혼을 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대학을 떠나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곤혹스러웠습니다. 그가 대학의 교수가 된 것은 자신 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었고, 아내를 만난 것 또한 자기 인생에 최대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치 독일 하에서 유대인을 박멸할 때였습니다. 대학 당국에서는 대학교수로 남기 위해서는 유대인 아내와 결별을 하든지 유대인 아내와 살기를 원하면 대학 교수직을 사표 내라. 너무나 선택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야스퍼스는 아내를 택하고 교수직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유태인 아내를 두었다는 이유로 그의 저술 활동, 강연, 여행 모두를 봉쇄했습니다. 야스퍼스는 이런 상황 속에서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아내를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수용소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하루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바깥에 초인종 소리만 나도 진땀을 흘렸습니다. 8년 뒤에 마침내 독일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 부부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그 아내가 그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든지 왜냐하면 가문에 영광이요, 일신의 출세인 독일대학의 철학과 교수직도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서 헌신짝같이 내어 던지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아내의 안전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위험하게 내놓은 그 남편을 사랑했습니다. 왜 야스퍼스가 교수직까지 포기하고 모든 불이익을 감수했습니까?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 보다는 상대방의 유익을 구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을 내면 그 성은 자기에게는 간단한 것이지만 이웃에게는 비수로써 찌르는 상처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내면 상처 입혀요. 요사이 많은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대항하고 부모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부모는 지나가는 말로써 성을 내지만 자녀들의 가슴에는 상처를 입은 성은 양날가진 칼과 같습니다. 적게 성내는 것은 적게 찌르고, 크게 성내는 것은 크게 상처를 내는 것입니다. 성은 반드시 상대방이 상처를 입게 되어요. 그래서 성을 내면 이웃에게 상처를 입힐 뿐 아니라 또한 자기의 자존심이 상합니다. 점잖고 사람 됨됨이 올바른 사람은 성내지 않잖아요. 점잖게 말하고 행동하잖아요. 깊이가 없고 경솔한 사람이 성을 잘 내잖아요. 그러면 나중에 성내고 난 다음에 크게 후회하지요. 부부간에 성을 내면은 그 부부의 화합을 다시 이루는 데는 상당한 기간이 걸립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성내고 난 다음에 그 아내의 상처가 아무는 데는 상당한 기간이 걸리고 아내가 남편을 욕하고 성을 내면은 그것이 상처를 고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은 백해무익인 것입니다.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지 못하고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잠언 16:32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야고보서 1:19~20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성 안내는 것이 참 좋은데 인생을 살면서 성을 안낼 수 없지요. 저는 젊었을 때 성을 잘 냈습니다. 성 잘 내기로 유명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성내고 난 다음 저의 마음속에 굉장한 자괴감을 느끼고 열등의식과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난 다음에 성 나려고 할 때마다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을 자꾸 외우면 그 다음에는 성이 가라앉습니다. 얼마 있지 않다가 생각해 보면 ‘야! 성 안내기 잘했다. 성을 냈으면 뒷수습 하려면 얼마나 혼이 났겠나.’ 여러분 성내는 것은 사발에 물을 엎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끌어 담지도 못하고 뒷수습하기가 얼마나 곤란한지 몰라요. 참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성을 내면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성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랑이 있으면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악이라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이 있는데 왜 부모가 자녀를 고통스럽고 괴롭게 하겠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고통스럽고 괴롭게 하면 악한 남편입니다. 남편을 악하고 괴롭고 고통스럽게 하면 악한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악한 이웃을 만나면 쉬지 않고 그 이웃을 고통스럽고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왜 악한 생각을 품겠습니까? 선한 생각을 품어야지요.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이웃을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게 하는 마음이 생기면 사랑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움에서 나온 것이요, 사탄에게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 9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야고보서 1장 21절에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사랑이 있으면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불의란 뭡니까? 바르지 않는 삶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사랑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에 먹칠을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있으면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바른길을 가지 비뚤은 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비뚤어지게 가고 아내가 남편이 이웃이 비뚤어 진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좋다고 박수치는 사람은 사랑해서 나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정당한 길을 가는 것을 좋아하고, 정당한 삶을 사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 4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리를 기뻐합니다. 진리는 뭡니까? 예수님이 진리인 것입니다. 진리는 바로 하나님인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예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기뻐하면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전도하는 것은 진리를 전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 9에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라고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5: 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3:10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사랑을 마음속에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내가 사랑이 있으면 언제나 진리를 따라 살고 진실하고 착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 불의, 추악, 저주, 절망 속에 있으면 진리를 내던진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이 마음속에 있으면 모든 것에 참고 모든 것에 믿고 모든 것에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정말 놀라운 성품이지요?
베드로후서 3: 9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모든 것에 참고 모든 것에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다 벌써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을 행동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참으시고 우리가 잘될 줄 믿고 바라고 견디면서 성령을 보내셔서 또 회개시키고 또 용서하시고 회개시키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 490번이라도 회개시키고 용서해 주어서 우리를 바로 세우는 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힘입지 않았으면 오늘 우리는 이 교회당에 와서 예배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벌써 심판을 받고 버림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언제나 깨닫고 우리도 이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35, 37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이기는 것은 사랑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거기에 대한 지식이 없고 확신이 없으면 우리가 일생에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트리니티 신학교 교수인 존 우드 브릿지 목사는 16대에 걸쳐 목사를 배출한 집안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3,4대 계속된 목사도 아니고 16대를 이어가면서 목사직을 계승한 집안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집 안에서 늘 경건의 시간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속으로는 늘 가정예배가 끝나기만 하면 도망쳐 놀겠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자신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브릿지 목사가 대학에 들어간 후 비로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신앙도 전혀 없고 부모가 시키기 때문에 억지로 가정예배 보고 교회에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은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를 가기를 원했지만 브릿지 목사는 거절했습니다. 아버지가 이유를 묻자 “저는 예수를 믿지 않아요. 그러므로 저는 아버지 대를 이어서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아주 까놓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브릿지 목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대로 목사를 배출했던 가문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아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적대적인 태도도 보이지 않고 아들이 예수 안 믿고 목사 안 되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큰 이해와 동정과 인내와 사랑을 베풀고 기다렸습니다.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아들을 위해서 주야로 기도를 했습니다. 훗날 브릿지 목사는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때문이다. 당시 부모님은 나에게 실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나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부모의 그 인내와 사랑에 감동해서 나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가서 16대째 목사가 되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 사랑을 하기 위하여
셋째로, 우리가 이제 사랑을 알았은즉 사랑하고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사랑을 하고 살기 위해서는 사랑의 원천이신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를 모셔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태양이 없이는 빛이 있을 수 없습니다. 태양이 빛의 모체가 되지 않습니까? 태양이 없이 우리가 앉아서 빛을 아무리 받아도 소용없는 것처럼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고 살기 위해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랑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와 성령께서 내 마음을 점령할 때 내 마음에 사랑의 샘이 솟아 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 7~ 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입니다. 사랑하면 하나님께로 나왔고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종교는 가지고 있고, 의식은 가져 있어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친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이끌기 위하여 33년 동안 계시고 마지막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처형 되었습니다. 로마시대에 가장 흉악한 죄인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형벌하는 것이 십자가 처형인 것입니다.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리면 한 1주일동안 내내 피를 흘리고 서서히 빈혈이 오고 탈수가 일어나고 호흡곤란을 일으켜서 죽는데 지옥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그분이 내 죄 때문에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원수들이 그를 향하여 고개를 흔들고 모욕을 하고 침을 뱉으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 도다. 하하”하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군단 되는 천사를 명하여 내려오게 할수도 있었으나 끝까지 참았습니다. 사랑 때문에… 내가 죽으면 네가 살고, 내가 살면 네가 죽으니 나죽고 너 살리자. 그래서 주님은 끝까지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신 그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가복음 23:34에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이 놀라운 사랑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로 사랑의 원천이요, 사랑의 태양인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셔야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요한일서 4: 9~10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나요?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나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재물로 주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난 다음 우리를 찾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멀리멀리 도망치는 우리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찾아 오셔서 우리를 회개시키시고 값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와 의로움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만들어 주셨으니 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한없이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에 감화, 감동을 받고 감사해 맞이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늘 구해야 될 것은 성령님의 은혜로 사랑이 마음속에 부음 바 되도록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 5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그냥 큰 그릇에 사랑을 담아 확확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한 사람은 성령이 오므로 사랑이 싹트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사랑의 강물이 흘러 내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리하면 너희 배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 제일 처음에는 샘물같이 중생하면 사랑이 샘물처럼 솟아납니다만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무엇이 다릅니까? 안 믿는 사람의 동기는 미움이지만 믿는 사람의 동기는 사랑인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 속에는 공중에 권세 잡은 영이 잡고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 마음을 점령하고 있으니 아버지와 아들은 바로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는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주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것 좋지만 열심히 나오는 그 자체가 크리스챤이라고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신자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 9에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말씀했으며, 데살로니가후서 3: 5에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을 해야 됩니다. 무엇이든지 마음에 작정을 해야 돼요. 비장한 결심으로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각오를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한발자국 내밀어 놓아야 두발자국, 세발자국을 주님이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단강이 갈라질 때 법궤를 짊어지고 물속에 들어갔을 때 요단간이 갈라졌습니다. 요단강 언덕에서 바라볼 때 갈라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실천의 한발자국을 떼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을 하고 오늘부터 부모 여러분 자식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십시오. 자식 여러분 오늘부터 부모님을 사랑하기 시작하십시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 시작하십시오. “아이고, 나는 사랑하기 싫은데요.” 싫어도 억지로라도 한번 하십시오. 사랑한다고 하고 한번 포옹하고 뽀뽀를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밉쌍스러운 남편도 오늘 한번 사랑한다고 말해 보십시오. 그리고 남편에게 좋은 음식 만들어서 대접해 보십시오. 한번 출발하면 그다음부터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티끌모아 태산이요, 눈물모아 한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은 일부터 시작하기로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35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 예수님의 제자구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2~14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 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 나는 목사님 사랑할 수가 없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그것이 어떤 자매님이 내게 신앙 상담한 것입니다. 자기는 “시부모와 시누이, 시동생을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집을 큰 대가 집에 와서 종처럼 부려 먹고 너무나 구박을 받았기 때문에 시집 식구들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몸이 병들었어요.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스트레스 받으니 병들 수밖에 없어요. 제게 여러분 안수를 받았습니다. 병이 낫지를 않고 고통은 점점 더 심해져요. 그래서 제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 주라”고 할 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목사님 나는 죽어도 시집식구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죽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내 처지에 한번 와보세요. 사랑하겠는가! 목서리치는 고통을 내가 당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중에 한말이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거든 그러면 미워는 하지 말고 용서는 해줄 수 있습니까?” 한참 있으니 “사랑은 못해도 용서는 해줄 수 있다.”고 그래서 “용서부터 출발하자.” 그래서 그날 그 시아버지, 시어머니 이름을 부르고 시집 식구의 이름을 부르고 용서한다고 말하자마자 얼마 있지 아니하여 성령이 오셔서 통곡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고 “용서합니다. 하나님 그 모든 것을 용서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한 것처럼 용서합니다.” 그렇게 실컷 울고 나더니만 나중에 “목사님, 사랑도 조금 할 수 있어요.” 그러더라고요. 용서가 사랑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으면 용서부터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나면 사랑이 다가오고 그다음 사랑으로써 넘치게 되면 모든 마음에 병도 고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은 마귀의 성품이기 때문에 마귀가 오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지 않습니까?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면 생명이 얻되 넘치게 얻는 역사를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10:12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남 허물 자꾸 들춰내는 것 이것은 미움이요, 마귀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제 지방선거가 다가오니까 입후보 하면은 상대편 너무 허물을 드러내는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있는 죄, 없는 죄 다 들춰내고 있는 허물, 없는 허물 다 들춰내서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악한 자에게 속하였으며 세상이 미움에 속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공정하게 경쟁을 해야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 8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허물도 덮고 죄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32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한 것은 수천만 번인데 우리는 이웃을 한두 번도 용서 안하려고 하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에 주님이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도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나는 남의 죄를 용서 안하면서 내 죄는 용서하여 주옵소서. 용서하여 주옵소서. 철면피하게 짝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망령되이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허물을 덮고 용서하고 남의 허물은 까발리고 남의 죄는 폭로시키며 사는 것이 어떻게 진실한 크리스챤인 것입니까? 사랑은 남의 허물도 덮어주고 남의 죄도 용서해 주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 허물도 사하시고 내 죄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참사랑인 것입니다.

<결론>
고린도전서 13: 8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주님 오시는 그날에는 예언이 다 이루어졌으니 폐하지요. 주님 오셨는데 방언할 필요 있어요? 다 아는 말로 하지요. 주님 오시는데 무슨 성경지식이 필요합니까? 눈으로 주님을 직접 만나 뵙는데 지식도 다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세세무궁토록 계속합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사랑의 동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이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모든 것은 형식이요 내용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영원하고 무한하지 않습니다. 사랑만이 삶의 진실한 내용이요,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우리의 삶에 내용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돈도 사랑이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권력도 사랑이 있어야 빛을 내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집, 화려한 옷, 맛있는 음식도 사랑이 있어야 그것이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게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부터 여러분 사랑의 원천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시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고 그 사랑이 성령으로 내 마음에 부음바 되기를 원하여 기도하고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하십시오. 한걸음이 천리를 만드니까 오늘부터 나는 적은일부터 시작해서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을 하시고 사랑으로써 실천하여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되고 행복한 일생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오늘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사랑이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요, 모든 형식 중에 내용인 것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리트머스지로 우리가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참으로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여러 번 살펴보고 우리는 사랑이 없는 것을 회개하고 자복하고 사랑으로써 실천하며 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이것이 남을 살리고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