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류계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

[유튜브 페이퍼] 강준혁 기자 = 유튜버 <석봉이>가 화류계에 빠지는 여성들의 특징 5가지를 영상으로 올렸다.

화류계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

화류계의 '화'는 '불화', '류'는 '흐를유'를 사용하여 '불처럼 떠돌다'라는 의미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여성들이 화류계에 빠지는 이유 첫 번째, 쉽게 돈을 벌고 싶다

이런저런 일을 하다 업소일을 하면 돈 많이 준다는 말을 듣고 시작한다. 처음에는 성관계를 하지 않는 퇴폐업소에서 시작하지만 고수익의 맛을 알고 나서는 점점 더 높은 수위의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두 번째, 어리버리 하게 빠지는 여자

일자리를 알아보다 높은 시급의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그런 일에 빠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술만 따라주면 된다'라는 업주의 말만 믿고 시작하는데 그러다 결국 화류계에 눌러 앉는다.

세 번째, 친구의 권유 아닌 권유로 빠지는 여자

화류계에 있는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다. 호기심 반,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한거 반, 등의 이유로 발을 들이게 된다.

네 번째, 말도 안 되는 사정 때문에 빠지는 여자

동생이 불치병이고, 부모님까지 없어서 당장 큰 돈을 벌어야 하는 여성들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환경의 여성들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다섯 번째, 사치가 심한 여자

주변의 잘 사는 친구들처럼 살고 싶어 화류계 일을 시작한다. 비싼 명품 가방, 해외여행 등, 품위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해 더욱 수위가 높은 일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석봉이>는 요즘은 하루 한탕 뛰는 업소도 있다고 하는데, 직장 다니면서 하루 한 번만 관계를 맺는 걸로 돈을 버는 급 높은 여성들도 있다고 하였다.

이에 네티즌들은

[ 소성국 ]  "4번 이유로 빠지는 여자가 있을 수는 있지. 근데 그게 창문녀자를 대표할 만큼 흔한 비극은 아니니까 욕을 먹는 거고. 설령 그 이유라고 해도 범죄임에는 틀림없다는 건 분명하다."

[ 아가밤비 ]  "몸 파는 인간들이 스스로 성 노동자라고 하는 것도 역겨워요. 돈 받고 아무에게나 몸 파는 게 왜 노동임?"

[ 딱이뚝 ]  "쉽게 돈 벌려면 편의점에서 알바 하면됨 개 꿀임 ㄹㅇ 지금 알바 중인데도 휴대폰 보면서 앉아만 있어도 시간이 가는 게 행복하다. 화류계는 몸을 희생하면서 까지 일 하잖슴 편의점은 일하는 시간의 반 이상을 앉아있음"

[ THOMAS WOO ]  "어렴풋이 그럴 거라는 것을 명확히 해설 잘 해주셨습니다. 석봉이님 화이팅~ 결혼 적령기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남알콩달콩 ]  "대부분 진짜 카드빚이나 사채 빚 계모임서 곗돈 들고 튄 여자 또는 남편 먼저 사별 후 할게 없어서 돈을 쉽게 벌기 위해서 거의 이럼.. 남자 화류는 없나요 ㅎㅎ 일명제비"

[ 빛별 ]  "눈가 주름 ㅋㅋ 팔자주름 ㅋㅋ 이마주름 ㅋㅋ 그 다음은 늙어서 어디 가서 일하나요? 그분들은 나이 먹구 무슨 일하시나 궁금. 힘든 노동은 못 하실 거 같은데.."

[ 둠밈 ]  "오늘 알바하면서 이 생각 했는데 석봉 쌤 영상보고 정신 차려야지 ㅠㅠ 근데 주변에 토킹 바 시작한 동생 있는데, 예전의 저 같으면 하지 말라고 했었을 텐데 제 삶이 힘들어지니까 그 일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 들어서 아무 말도 못 해줬어요 ㅠㅠ 이 영상 보니 죄책감도 들고 걱정되네요."

[ 번개라면 ]  "석봉 님 창문여자가 꿈이 국회의원이 되겟다는 정신 나간 자신을 성 노동자라고 불러달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 해피 ]  "남녀 불문 성매매는 위험합니다. 얼마 전 사망한 폐렴 증상 포항 성매매 여성의 최종 사인이 에이즈더라는.. 그래서 포항 보건소 불났다고.. 성병 걸렸을까 봐 걱정하며 에이즈 검사받는 줄에 서고 싶지 않다면 평소 몸가짐을 조심해야겠죠."

[ TV파랑새 ]  "화류계나 연예인이나 텐프로 룸싸롱이나  연예인이나 매한가지.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슴당. 접대문화도 한몫ㅋㅋ 수요를 없애야 합니다 ㅋㅋ "

[ River Moon ]  "너무 잘 안다. 젤 많은 케이스가 1번,5번.. 그리고 투잡은 좀 됐는데 요즘은 대중화 된 거 같음.. 개인적으로 우리나라도 창문녀 일본이나 유럽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다고 생각이 안 듦."

[ 오승준 ]  "석봉이 님, 앞부분에 앞 방송에 대한 코멘트 넣으신 것은 진짜 좋은 구성 같습니다."

[ 이정미 ]  "어쩜 저렇게 시원시원하게 말을 잘 할까~ 틀린 말 하나 없네요"

[ 재영 ]  "마지막 말 띵언.ㅠ 당연히 안되는 거 아는데 말대로 내 주위에 돈 많은 사람이 많으면 나도 걔네만큼 가지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아여 ㅠ 지금 딱 그 생각 잠깐 들었는데 바로 해결!"

등의 다양한 댓글이 달렸다. 위 영상은 아래의 URL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rfBJWu7V2c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장편)]

젠틀우먼

김은주


   01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의 딸이었다. 그 아이가 지금 내 곁에 없어서 다행이다. 그녀는 자신의 두피가 뜯어지도록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그의 관심이 혹시라도 딸에게로 옮을까 봐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끌려가는 동안 어떻게든 아픔을 덜기 위해 두 손으로 그의 오른팔을 더듬으며 허우적거렸다. 몸에 눌린 잡초들이 짓이겨지면서 싱그러운 풀 냄새가 피로 막힌 콧속으로 훅 밀려들어 왔다. 아직은 살아있다. 모든 것이 망가졌지만 그래도 아직, 죽지 않았다. 하지만 팔꿈치와 무릎, 어깻죽지와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그의 오른팔을 잡는 걸 포기하고 싶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
   감색 원피스가 둘둘 말려 허리까지 올라왔다. 허리에 묶어둔 리넨 앞치마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종아리와 허벅지에는 그에게 짓눌려 생긴 멍과 상처가 선명하다. 근육이 파열됐는지 통증이 밀려온다. 아픔보다도, 원피스가 신경 쓰인다. 이렇게 밝은 태양 아래 상처로 가득한 몸뚱이를 그대로 내놓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그가 보기 전에 원피스를 내려 자줏빛 멍이 든 몸을 가리고 싶다. 이미 욕망을 모두 발산한 그는 다행히 드러난 몸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머리통이 타는 것 같은 화끈거리는 열기가 성한 곳 없는 몸뚱이를 감쌌다. 맹렬한 불길 속에 통째로 내던져진 것만 같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 그녀는 퍼덕거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의 오른팔을 붙잡으려 애쓰는 것도 그만두었다. 대신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흰 나비를 바라보았다. 나비는 땀으로 번질거리는 그의 다리에 붙어 날개를 펼쳤다.


   나를 구해 줘.
   도와줘.
   내 딸에게 어서 도망치라고 말해 줘.


   숨을 깊이 들이마시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코피가 흘러 입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얼굴 가까이 끌어당겼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했던 남자는 이제 없다. 짐승처럼 커다란 육체를 지닌 남자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게임으로 여기는 것 같다. 아니면 보기 좋은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주말마다 치는 테니스 같은 것으로. 얼굴은 땀에 번들거렸지만 지친 기색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출 생각이 없다는 듯 희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왜 몰랐을까. 왜 의심하지 않았을까.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좌절감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 그가 부러뜨린 이빨과 손톱으로 그를 물어뜯고 할퀴고 싶다. 피가 말라붙은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멀게 만들고 싶다. 그가 폐부 깊숙이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 싶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을 것이다. 너무 늦었다. 이곳에서 그녀가 당한 일은 세상 누구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맥이 풀렸다. 그가 그녀를 향해 뜨겁고 역겨운 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구역질을 못 이기고 피와 위액을 남자의 가슴팍에 토해 냈다.


   너 같은 년은 쌔고 쌨어.


   그는 그 한마디만 내뱉고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두 남자가 그녀의 머리와 양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물속에 처박았다. 곧 그녀의 무덤이 될 곳이었다.
   순식간에 찐득한 피로 막혔던 코와 입으로 미지근한 담수가 흘러들어 왔다. 그녀는 물을 먹지 않으려고 숨을 참았다. 그리고 머리를 물 밖으로 빼려고 다리를 세차게 휘저었다. 뭐라도 발에 닿기를 바랐지만 발은 무언가에 걸렸다가도 금세 빠져나왔다.
   서서히 힘이 빠졌다. 물을 공기처럼 들이켰다. 공기 대신 물이 혹은 물과 뒤섞인 공기가 한꺼번에 코와 입으로 들어왔다. 물은 꼴깍꼴깍 잘도 넘어왔다. 잠이 오듯 편해졌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어디선가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쏟아지는 햇빛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어떤 날이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을 벌렸다. 앞으로 영원히 부르지 못할 그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젠 끝이다. 눈앞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빛 속에서 딸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암흑으로 변했다.


   02 복직 심사


   여자는 태어난 지 백일도 안 된 아기를 때린 남자를 옹호하는 중이었다. 희주는 뱃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 같아 오른쪽 눈썹 위에 붙인 밴드 아래에서 뛰고 있는 맥박 소리에 집중했다. 우윳빛 유리창 너머 옆 회의실에서 남자들이 웅성댔다. 아마도 희주의 복직 심사 결과를 엿들을 요량으로 모인 동료들일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나온 여자는 빔 프로젝터 리모컨을 조작해 회의실 스크린에 사진을 띄웠다. 병원 응급실 CCTV 동영상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정희주 경위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네.”
   희주는 짧게 대답했다. 그날 이후로는 휴대폰 전화벨만 울려도, 누가 이름만 불러도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단조로운 멜로디의 전화벨에도 자지러지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은 덤이다.
   “피해자는 우측 광대가 함몰되고 눈가가 찢어져서 실명할 뻔했습니다.”
   피해자.
   인권위에서 나온 여자는 그 남자를 ‘피해자’라고 지칭했다. 또다시 뱃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희주의 목울대를 쳤다.
   “사진상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고막도 심하게 다쳤습니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 중지가 부러졌습니다. 회복까지는 최소 한 달 이상 걸릴 겁니다.”
   사진 여러 장이 스크린 위로 빠르게 등장했다. 총 다섯 장의 사진이었다. 희주가 남자를 향해 주먹을 뻗는 순간부터 주먹에 맞은 남자가 얼굴을 감싸 쥐고 응급실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장면, 너스 스테이션의 간호사들이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는 장면까지. 마지막은 남자의 망가진 얼굴 사진과 깁스를 한 오른손 사진이었다.
   “한밤중 병원 응급실에서 형사가 시민을 때린 최악의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 하이라이트에 쓸 법한 순간을 제대로 골라 내셨네요.”
   희주는 여자의 사진 선택 솜씨를 칭찬했다. 여자는 희주를 힐끔 보고 다시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그게 칭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는 시선.
   희주는 응급실에서 그 남자를 처음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행색이 거칠고 남루했다.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이상했다. 형용할 수 없는, 푸르기도 하고 검기도 한 눈동자의 광채가 무엇인가 어긋나고 틀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화면에 띄운 사진 속 남자의 눈은 제법 선량해 보였다. 지하철, 마트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누군가 남편,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아들…. 순간 죄 없는 시민을 때린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경위님, 뭐 느껴지는 거 없으세요?”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희주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희주는 깁스를 한 남자의 손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저 손을 못 쓰게 되면 제 얼굴을 기억했다가 찾아와서 저를 죽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무섭네요. 정말로 찾아올까 봐.”
   여자는 한숨을 쉬면서 스크린 전원을 껐다.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몇 명인 줄 아세요? 기사화가 크게 되는 바람에 저희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인권위 게시판에 항의 글이 수백 개가 올라오고, 담당자가 욕설 섞인 전화를 하루 종일 받아 내느라 곤욕을 치렀고요. 경위님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듣지 않아도 될 비난을 받았어요.”
   월요일 오전 9시.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구형 에어컨이 신통치 않아 공기에서 걸레 냄새가 났다. 회의실에는 시민을 때린 정희주 경위와 희주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 국가인권위원에서 나온 여자, 그리고 희주의 상관이자 강남경찰서 강력6팀 팀장 오치상까지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희주는 유난히 좁고 에어컨 성능이 후진 회의실을 심사 장소로 잡은 오치상을 노려보았다. 저 여자한테 동정심이라도 유발해 보라는 건가. 이렇게 낙후된 환경 속에서도 시민의 안녕을 위해 뺑이 치는 형사의 실수 따위는 좀 넘어가 달라고 애걸이라도 하라는 건가. 평소 그의 언행으로 짐작건대 피해망상은 아닌 것 같다.
   젊었을 때 범인을 잡다가 부러졌다던 오치상의 콧잔등 가운데가 툭 불거져 있었다. 그 코가 왕년에 좀 날리는 형사였다는 분위기를 더했다. 그 나이쯤 되면 옆으로 몸집이 퍼지는 팀장들에 비해 오치상은 50대 후반인데도 몸집이 탄탄했고 허리띠 위로 늘어진 뱃살도 없었다.
   오치상이 월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여기 앉아 있는 건 일반인 폭행죄로 정직 처분을 받고 오늘 복직 심사를 위해 3개월 만에 경찰서에 나타난 부하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희주가 개소리를 지껄이지 않도록 감시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본청으로 발령이 나는데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독이 될 만한 이야기가 희주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그래서 희주 옆이 아니라 인권위 여자 옆에 앉아서 희주에게 압박의 눈빛을 보냈다. ‘허튼소리 하면 가면 안 둬.’ 오치상의 눈은 희주가 입을 열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널따란 운동장에 같이 있기도 싫지만, 이 좁아터지고 더운 회의실에서 더더욱 같이 있기 싫은 타입의 인간이다.
   희주가 여자 형사였기 때문에 복직 심사 역시 여자가 맡았다. 처음에는 같은 여자끼리니 어쩌면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여자는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희주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 위의 빔 프로젝터와 연결부터 했다. 인권을 다루는 직업이지만 사람보다는 일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하마터면 큰 소리를 한숨을 내쉴 뻔했다. 희주는 피로한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아직도 이런 충격적인 폭행 사건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걸 저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여자의 힐난에 희주의 표정이 변하자 오치상은 문제견을 다루는 개 훈련소 교관처럼 고개를 짧게 저으며 눈을 부라렸다. 차라리 대답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혹은 헛소리를 지껄이면 독방에 가둬 놓고 싸구려 개밥도 안 주고 굶길 거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희주는 입을 열었다. 난 저 인간의 순종적이고 듬직한 셰퍼드가 아니니까.
   “혹시라도 저 남자가 절 죽이러 집으로 찾아올까 봐 제 인권은 걱정되지 않으신가요? 물론 앞으로 3년 내에는 못 오겠지만요. 하지만 모르죠. 반성문을 매일 백 장씩 쓰는 모범수가 되어 더 빨리 나올지.”
   “정희주 경위님.”
   여자는 학생을 혼내는 담임처럼 딱딱하게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서류를 내밀었다.
   “경위님의 정신과 소견서입니다. 읽어 보셨겠죠.”
   “물론입니다. 하지만 제 상태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저는 처음에 저 영상을 보고 경위님이 혹시 분노조절장애가 아닌지 의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니더군요. 대신 그 일 이후 심각한 수준의 폐소공포와 공황장애를 진단받았다고 주치의한테 전달받았습니다. 그 부분은 좀 어떠신가요? 정말 현장에 복귀해도 지장 없을 정도인가요? 약은 제대로 복용하고 계신가요?”
   “그럼요. 약이 아주 잘 들어요. 효과가 아주 좋아요. 한 알만 먹으면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던 기분이 좀 나아지고, 한 알을 더 먹으면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전부 껴안아 주고 싶어지죠.”
   여자는 말없이 희주를 응시했다.
   “저는 다시 일하는 데 아무 문제 없는 상태입니다.”
   “글쎄요. 그건 경위님이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뇨. 충분히 제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정말 분노조절장애였으면 그 남자를 죽였을 테니까요.”
   남자가 손톱으로 할퀸 오른쪽 눈가 위쪽 상처가 욱신거렸다. 다행히 큰 흉터는 생기지 않았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라 희주는 집요하게 흉터를 살펴보곤 했다.
   “여기 오치상 팀장님과 강력팀 동료분들의 탄원서를 참작했습니다. 그분들께 감사하세요. 조건부로 업무에 복귀하시는 걸로 내부 협의했습니다.”
   일단 결론이 났다. 어찌 됐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형사 생활은 희주에게 거의 전부에 가깝다. 그 사실이 씁쓸할 때도 있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다행히 이 여자가 그걸 뺏어 가진 않을 것 같다. 희주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반드시 동료를 대동하고 현장에 나가셔야 하고,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안 됩니다. 정신과 상담은 계속하고 계시죠? 3개월 뒤에 폐소공포와 공황장애에 대한 재진단을 받아 주세요. 그리고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경우 오늘처럼 시간을 내주셔야 합니다.”
   희주는 여자의 모욕을 그냥 넘겼다. 똘기 넘치는 문제 형사의 기를 죽이고 앞으로는 좌우 양옆을 둘러보고 신중하게 행동하게 만들기 위한 전형적인 수순이니까.
   “피해자 또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반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매주 접견 중인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뒤로 마음이 편안해졌다며 신부님 말씀이 인생의 빛이라고 하더군요. 나가서는 깨끗한 인간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겠답니다.”
   “…정말 기가 막히네요.”
   “네?”
   “왜 요즘 미친놈들은 전부 종교가 있죠?”
   “그게, 무슨 말씀이죠?”
   “정신이 제대로 박힌 나 같은 형사는 신 따위가 있을 리 없다고, 만약 있다면 아주 지독한 악마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사이코패스 같은 놈들이 망할 신 따위를 운운하냐고요.”
   여자는 팔짱을 낀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요. 경찰도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됩니다. 피해자가 어떤 짓을 저질렀던 간에요. 요즘은 그런 세상이에요.”
   그게 당신 아기였어도 똑같이 말할 거냐고 되묻고 싶다. 하지만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역지사지는 먹히지 않는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땐 경위님이 그간 쌓아 온 업적이 아무 소용없을 거예요. 3개월 정직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10여 년의 형사 생활을 굴욕 속에서 끝내고 싶진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저도 더는 경위님을 도울 수 없고요.”
   그녀 딴에는 희주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여자가 한 말 중에 유일하게 희주 입장에서 한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 현실성이 희주의 심사를 긁었다.
   “비틀스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상황이 대충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오치상은 여자들의 이야기에 흥미를 잃고 휴대폰을 꺼냈다. 여자는 그런 오치상을 힐끗 보고 희주에게 말했다.
   “living is easy with eyes closed. 두 눈을 감으면 사는 게 쉽다, 대충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네요. 인생의 많은 부분이 그렇습니다. 많이 살아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 경우엔 그렇더군요.”
   여자가 바란 것은 어렵사리 경력을 사수하며 지금껏 버터 온 같은 여자로서의 공감이겠지만, 희주는 일격을 준비했다. 적어도 저 여자가 다시 아기를 때린 남자를 만났을 때 조금은 불편한 감정을 느끼길 바랐다. 당신이 두 눈을 감은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길 바랐다.
   “…형사는 분노 담당입니다.”
   “네?”
   “살인, 강도, 성폭행. 범인의 목적이 뭐든 남는 건 그 처참한 장면을 보는 형사의 분노와 피해자뿐이죠.”
   희주는 계속 말했다. 뱃속에서 시큼하고 뜨거운 분노가 관자놀이까지 단숨에 올라왔다. 머리에 붙은 벌레를 털어 내듯 머리를 흔들고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 남자를 때린 이후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이 운전하는 차에 탈 수도 없었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지도 못했으며, 버스가 터널 안에 들어가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발작했다. 그날 이후로 정신과에서 처방해 준 약이 없이는 외출할 수 없었다.
   희주는 고개를 들어 회의실 천장 한구석에 생긴 거미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언제 저런 게 생긴 걸까.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여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주는 앉은 채 말했다.
   “가해자에 대한 선생님의 직업적인 사명감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는 아시죠?”
   여자가 테이블 위 자신의 노트북을 정리해 가방에 넣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동학대중상해죄로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사례입니다. 그리고 가정폭력 혐의도….”
   희주는 빔 프로젝터 리모컨을 들었다. 그리고 리모컨으로 자기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그 남자는 TV를 보다가 옆에 있던 아기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서 이걸로 세상에 나온 지 고작 3개월 된 아기 머리를 후려쳤습니다. 두개골이 깨지고 쇄골 양쪽이 두 토막 날 때까지요.”


   03 뜨겁고 위험하고 매력적이고


   “좀… 떨리네요.”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 의외네요.”
   “희주 씨를 만날 때마다 필사적으로 자제하는 걸 모르는군요.”
   희주는 주웅의 말에 피식 웃으며 진료실 책장 뒤에서 나왔다. 복직 심사 때 입고 있었던 땀에 전 정장 바지와 블라우스를 벗고 미리 챙겨온 청바지와 검정색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복직 심사를 마친 다음 경찰서에서 갈아입을 수도 있었지만 그대로 병원까지 걸어왔다. 경찰서에서 법원 근처에 있는 병원까지는 도보로 1시간 30분. 운전을 못 하는 상황이니 택시든 버스든 도심에는 터널도 없으니 아무 차나 타고 왔으면 됐지만, 걷는 걸 택했다. 인권위 여자를 만나고 경찰서를 나와서도 남자의 얼굴이 유령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역겨운 얼굴을 떨쳐 내고 싶었다. 그래서 굽이 있는 구두를 러닝화로만 바꿔 신고 걸어서 주웅이 근무하는 병원까지 왔다.
   경찰들이 정장을 입는 건 주로 나쁘고 불리할 때다. 알량한 밥그릇을 뺏길 위기에 처했을 때 제발 그것만은 빼앗지 말아 달라고 빌기 위해 입는다. 희주는 이런 자리에 나갈 때 어떻게 입어야 좋은지 경찰대 동기이자 전남편인 정현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정현은 동료로서든 친구로서든 언제나 좋은 의논 상대였다.
   전남편에게 복직 심사 때 입을 의상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고 말하면 주웅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희주는 폐소공포와 공황발작에 시달리는 환자와 연애를 시작한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진료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환자는 희주 씨가 처음이에요. 아,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진료를 보는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 줘요.”
   “그 과감한 환자가 애인인데, 별로예요?”
   “조금 솔직하자면 두 팔 벌려 환영입니다. 물론 난 예의 바른 신사이니 두 손을 무릎에 놓고 얌전히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임주웅. 편안하고 차분하게 환자들을 대하면서도 전문가다운 태도를 잃지 않는 의사. 모든 의사가 다 그렇지는 않기 때문에 그의 첫인상은 특별했다.
   “기분은 좀 어때요?”
   주웅이 물었다. 그는 오늘이 희주에게 어떤 날인지 잘 알고 있었다.
   “최악이에요.”
   “그래도 잘 끝났잖아요.”
   “알아요. 불평할 처지가 아니죠. 하마터면 책상 앞에서 서류나 만지다가 형사 생활 종 칠 뻔했으니까.”
   “잘 참았어요. 잘 했어요.”
   흡사 비행을 저지르고 가출했다가 돌아온 위기의 청소년을 대하는 듯, 사려 깊고 다정하고 일순 애 취급하는 듯한 저 말투. 하지만 희주에게 지금 필요한 건 공감과 이해지 채찍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주웅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여자 앞에서 정말로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형사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실패한 것 같아요. 돌아가서 욕할 거예요. 구제 불능이라고.”
   “하라고 해요. 어쨌든 희주 씨가 바라는 대로 됐으니까.”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웅의 책상 앞에 앉았다. 불편하고 땀에 전 옷을 벗으니 한결 편해졌다. 정장 바지와 블라우스는 10년 전에 백화점 여성복 브랜드에서 꽤나 비싸게 주고 샀다. 정현이 직접 골라 준 이 옷은 정현과 이혼하고 나서도 결혼식과 장례식 같은 경조사용 단골 의상이 됐으며, 오늘처럼 성질을 죽여야 하는 자리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희주는 복직 심사에 통과한 행운을 전남편의 섬세한 안목에 돌렸다.
   주웅은 환자 파일을 집어 들었다. 희주는 응급실에서 남자를 때리고 동료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발작하면서 기절했다. 주웅은 기절한 여자가 형사라는 사실에 놀라고, 방금 전 사람을 폭행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그날 이후부터 그는 희주의 전담 정신과 주치의가 되어 그녀의 폐소공포와 공황장애를 집중적으로 치료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자신과 남녀관계로 만나 볼 생각 없냐고 물었다. 쌍욕을 섞어 가며 세상과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던 희주는 주웅의 고백에 벙쪘다. 그리고 의사 중에서도 정상 아닌 인간이 많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만으로 그치진 않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 희주의 말에 주웅은 파안대소했다.
   “환자와 연애를 하니 좋은 점도 있네요.”
   주웅은 희주의 손목을 잡고 맥박을 쟀다.
   “뭔데요?”
   “환자는 의사에게 100% 솔직하지 않아요. 진실을 감출 때가 더 많죠. 고작 20분 정도 주어지는 상담 시간 동안 피곤에 절어 있는 얼굴의 의사에게 자기가 정말로 힘든 이유를 털어놓는다는 거 어렵잖아요.”
   맥박을 잰 다음에는 혈압계를 희주의 팔에 두르고 혈압을 쟀다. 가까이 다가가니 희주에게서 옅은 땀 냄새가 난다. 땀에 젖은 잔머리가 붉게 상기된 볼에 붙어 있다. 이렇게 보니 서른세 살의 강력계 형사가 아니라 스물두어 살쯤 된 대학생 같다. 화장기 없는 얼굴. 무늬 없는 무채색 티셔츠, 길고 마른 다리를 감싼 청바지. 나이키 러닝화. 희주는 매번 그 모습으로 주웅의 진료실에 나타났다. 매번 같은 옷을 입은 여자가 매번 새롭게 보일 줄은 몰랐다. 이 여자보다 10년을 더 살았는데 이 여자 앞에 서면 꼭 풋내기 스무 살 청년이 된 것만 같다.
   “3개월 전과 비교했을 때 어떤 상태인지 애인이기 때문에 더 잘 알 수 있어서 다행이랄까.”
   주웅은 혈압을 재고 나서 말했다.
   “체중이 얼마나 빠졌어요?”
   “5,6킬로그램 정도?”
   “더 잘 자야 해요. 식사도 좀 더 성의 있게 하고요. 이 얘기 벌써 여러 번 한 것 같은데, 전혀 지키고 있지 않은 거죠?”
   주웅은 미묘한 선을 잘 지켰다. 의사와 환자 관계를 넘어 연인 사이가 되었지만, 그는 연애 전과 다름없이 조심성 있게 희주를 대했다. 결혼 생활을 해 보지 않은 남자가 가지기에 드문 미덕이었다. 짧고 단정한 머리에는 나이에 비해 일찍 서리가 내렸지만 희주 눈에는 오히려 보기 좋았다. 좀 더 긴장을 풀고 주웅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병원에서 희주를 대할 때 그는 철저히 의사로 행동했다. 자신감 있으면서도 상냥하게. 아마도 다른 환자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쏟아지기 일보 직전인 감정을 떨리는 손에 쥔 채 자신의 진료실을 방문하는 환자들에게 그는 결코 건성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희주는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지금 희주에게는 중심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혹은 전속력으로 낭떠러지를 향해 달리는 것을 막아 줄 사람이. 혹은 휴식을 위해 돌아갈 장소가.
   병원이 아닌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첫 데이트를 하던 날, 두 사람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경찰이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주웅은 경찰공무원의 트라우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희주는 의사라는 재수 없는 인간들이 어떻게든 병 이름을 붙여서 멀쩡한 형사에게 정신병이라는 나약하고 자존심 상하는 굴레를 씌우려 한다며 반발했다. 그리고 주웅의 의견에는 주제가 무엇이든 반대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다. 악취미라는 걸 인정하지만, 그와 입씨름을 하는 게 즐거웠다. 도대체 언제까지 주웅이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의 궤변을 들어줄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주웅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반격을 기다렸다.
   “전 솔직하다가 전남편에게 차였어요.”
   “그거참 무서운 말인데요? 전 차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주웅은 환자 파일을 미뤄 놓고 희주에게 집중했다. 주웅은 희주의 실패한 결혼에 대한 경험담을 들을 때마다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녀에게 여자로서 아내로서의 삶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이런 상태의 형사가 거리를 활보한다는 게 걱정되는 수준이에요.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버스 정류장에서 노인을 밀며 새치기하는 사람만 봐도 화가 치솟을 것 같거든요. 공황 증상이나 발작도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어요. 꼭 차 안이 아니더라도 엘리베이터나 좁은 회의실에서도 폐소공포를 느끼고 발작할 가능성도 있고요.”
   “끔찍해요. 내가 이렇게 약해빠진 인간이 될 줄은 몰랐어요. 멘탈만큼은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인간은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어요. 그걸 받아들이는 게 치료의 시작이에요.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는 것.”
   “아뇨. 난 인정 못 해요. 고칠 거니까. 동료들 앞에서 또다시 발작하고 기절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죽는 것보다 나은 선택 같은 건 없어요.”
   주웅은 짐짓 꾸짖는 투로 희주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곧바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그렇게 몰아세우면 안 돼요. 지치고 힘들면 무너지고 쓰러질 수도 있어요. 좀 우스워 보이면 어때요. 비웃고 싶으면 비웃으라고 해요. 살면서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죽는 것보다는 그게 백배 천배 나은 일이에요.”
   “난 그러면 안 돼요. 이해해요? 난 살인범, 강간범 잡는 형사예요. 형사가 범인 잡으러 뛰다 말고 기절한다는 게 말이 돼요?”
   주웅은 희주의 손을 잡았다. 의사로서가 아닌, 이제 막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의 손길에 희주는 움찔했다.
   “그러니까 쉬어야 해요. 형사니까요. 위험한 상황에서 오히려 본인이 더 위험해질 수 있어요. 범인이 무기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공황 발작이 일어나면 어떡할 거죠? 지금 당장 휴직계를 내고 쉬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이라고 당신 상관한테 보고서를 올리고 싶어요. 필요하다면 수술도 권하고 싶고요.”
   희주는 주웅을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녀의 표정에 주웅도 천천히 미소를 지웠다.
   “정말 우스운 일이에요. 세상에 어떤 형사가 차를 못 타요? 운전도 못 하고. 이래서는 순찰차도 못 끌고 도로 경찰도 못하죠. 책상 앞에서 서류나 끼적거리는 내근직은 상상도 안 해 봤어요. 그냥 화가 많아서 주먹이 먼저 나간 인간 정도로는 안 되는 거였어요? 꼭 그렇게 맥 빠지는 병명을 나한테 붙여서 그 재수 없는 인권위 여자한테 줘야 했어요?”
   “그게 제 일이에요.”
   “참 거지 같은 일이네요.”
   “그래도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아요. 그날 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어때요?”
   희주는 주웅에게 잡혀 있는 손을 빼냈다.
   “…머릿속이 피범벅이 되는 느낌이에요. 실제로는 현장에 혈흔은 없었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요. 피가 난자한 현장 한복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아요. 그 남자는 분명히 똑같은 짓을 저지를 거예요. 짖는 개를 묶어 둔다고 짖지 않는 건 아니까.”
   주웅은 책상에서 일어나 희주가 앉은 소파에 걸터앉았다.
   “사명감이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 좀 더 일에 거리감을 둘 필요가 있어요. 지금 상태는 정상이에요. 희주 씨는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에 제대로 반응했어요. 다행히 이인증이나 해리증상, 무감각 증상은 없기 때문에 자신과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어요. 다만 분노와 불안 수치가 높을 뿐.”
   “아까 말한 수술은 무슨 의미예요?”
   “트라우마 삭제 수술이요.”
   희주는 그 말을 듣고 입을 살짝 벌렸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수술로 그날의 내 기억을 지우라는 거예요?”
   “정확해요.”
   “그게 가능해요? 뇌를 끄집어내서 물에 씻기라도 하는 거예요?”
   “정확히는 두개골을 일부 열고 기억이 저장된 부위에 칩을 삽입하는 거예요. 그 칩이 지우고 싶은 기억을 지워 주죠.”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어떤 미친 사람이 자기 머리통을 열고 기억을 지워요? 무슨 공상과학 영화 찍어요?”
   “이미 원하는 기억만 정확히 삭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술이 발전했어요. 영화로 나와도 이젠 아무도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준이죠.”
   주웅은 이제 연인보다는 의사에 더 가까운 태도로 말했다.
   “효과는 이미 충분히 입증됐어요.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상용화가 충분히 이루어졌어요. 한국도 도입은 이제 막 1년 정도 되었지만 긍정적인 수술 사례에 대해 이미 학회에 넘치도록 보고되고 있어요. 국내에서는 ‘빅’이라는 뇌 공학 연구센터가 선두에 서 있고요. 범죄 피해자들을 돕는 해바라기 센터와 연계해서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와 아동들을 대상으로 시행 중인데 성과가 좋아요. 평범한 사람들이 다시 평범한 삶을 살도록 돕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이해가 안 되네요. 남이 자기 머리통을 열어서 기억을 지우게 하다니.”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 의사가 직접 집도해요. 그 의사, 학회에서 얘기 나눠 봤는데 인상적이었어요. 아주 스마트하고, 무엇보다 절대적으로 피해자 편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젊은 의사인데 사명감이 대단했어요. 듣기로는 유명 기업에서 상당한 액수의 시드 머니를 받았다고 해요. 그만큼 사업적으로도 전도가 유망한 분야라는 의미겠죠.”
   “그 의사는 피해자를 위해 일해도 미친 사람 취급받지 않겠죠.”
   “희주 씨.”
   주웅은 희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인간의 인생은 대부분 평범한 일상으로 채워지잖아요. 즐거운 이벤트는 아주 가끔일 뿐, 직장에 나가 돈을 벌고 파트너와 가정일을 상의하면서 충돌하고 화해하고 아이를 키우고…. 그러니까 일상이 망가지면 인생이 무너져요. 희주 씨가 10년 넘게 하던 운전을 그날 일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처럼. 트라우마 삭제술은 그런 평범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수술이에요.”
   “그런 얘긴 관둬요. 뭐가 뭔지…. 혼란스러워요.”
   환자의 이런 반응은 특별할 것이 없다. 주웅은 희주를 위해서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할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식욕 부진, 수면장애, 불면증, 피로감, 분노와 불안이 희주를 지배하고 있어요. 그러다 한계에 도달하면 발작이 일어나죠. 그렇게는 일상을 제대로 살아 낼 수가 없어요. 희주 씨 말대로 그래서는 범인을 제대로 잡을 수도 없겠죠.”
   희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웅의 입을 통해 현재 상태를 듣고 나니 정말 나약해 빠진 인간이 된 것 같다. 다시는 살인범을 쫓는 일은 하지 못할 무능한 형사.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다. 아직은.
   “…그게 인생 아니에요?”
   “뭐가요?”
   “불안하고 두렵고. 그런 감정 때문에 누구나 힘들 때가 있잖아요.”
   “물론이에요. 하지만,”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에요. 항상 편안하길 바라는 건 도둑 심보구요. 게다가 난 나쁜 놈들 잡아넣는 형사예요.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살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든. 언제든 범죄를 저지를 수 있죠. 심지어 당신조차도. 난 그런 생각을 밤낮으로 하는 게 직업이에요.”
   주웅은 희주의 손을 잡았다. 뜨겁고 위험하고 그렇기에 더 매력적인 이 여자의 손. 당장 끌어안고 싶다. 두 사람 사이를 진작 눈치챈 간호사들이 진료실 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테지만.
   “자, 지금부터는 좀 더 애인 사이에 가까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지금까지 참은 인내심에 경의를 표해야겠군요.”
   “알아줘서 고마워요. 설마 복직 첫날부터 일을 하려는 건 아니죠?”
   “그러면 안 되나요?”
   “복직 기념 파티라도 열어야죠. 특별한 날이잖아요. 오늘 밤에 어때요?”
   주웅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해요.”
   “또 거절이에요? 난 희주 씨한테 거절만 당하다가 노인이 되겠어요.”
   희주는 주웅의 손을 빼고 땀에 전 정장이 든 백팩을 메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 안에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쌓인 사건 파일이 가득해요. 오늘은 이걸 읽을 거예요.”


   04 판사와 망치


   “늦어서 죄송합니다.”
   희주는 호텔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방은 살인 사건 현장을 조사하러 나온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식반원들과 경찰들로 혼잡했다. 흰 조사복 차림에 파란 마스크를 쓴 감식반원 하나가 지나가다가 희주와 부딪혔다. 종종 현장에서 마주친 적 있는, 거의 코 위만 알고 있는 베테랑 감식반원이었다. 감식반원은 희주를 알아보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름의 인사 방법이었다.
   감식반원들과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마주치기 때문에 매번 마스크 위 얼굴만 보다가 마스크를 내리면 몰랐던 사람처럼 낯설다. 눈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하관이 불협화음을 내면 재밌기도 하다. 아까 마주친 그분도 그랬다. 눈은 매섭지만 코 옆에 제법 큰 점이 있어서 마스크를 벗으면 날카로운 인상이 갑자기 친숙하게 느껴진다.
   희주는 테헤란로 사거리 한복판이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이는 호텔방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오랜만에 현장에 나타나니 불청객이 된 것 같다. 누군가 희주에게 푸른색 라텍스 장갑을 내밀었다.
   “희주 선배.”
   남자가 말했다.
   “너 이번 주는 로또 사지마.”
   “왜요?”
   “운이 꽝이잖아. 월요일부터 살인 사건에, 파트너는 정직 먹고 쉬다가 온 꼴통, 게다가 그 꼴통이 또 사고 못 치게 쫓아다니면서 감시도 해야 하고. 그랜드슬램 축하한다.”
   “네, 정확합니다.”
   희주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원하게 대답을 한 건 강력팀 4년 차 무원이었다. 희주는 이 호텔 프론트에 세워 놓으면 젊은 여자 투숙객들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갈 게 분명한 이무원의 대답에 빙그레 웃었다. 무원은 희주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대충 뭉개지 않고 늘 깍듯하게 선배 대접을 했다.
   “나 없는 동안 신나게들 씹어 댔겠지?”
   “언젠가 선배가 한 건 할 줄 알았다고 하던데요.”
   “아무렴.”
   “다친 데는 괜찮으세요?”
   무원의 시선이 희주의 오른쪽 눈가를 향했다.
   “멋지지 않아?”
   강남서 여형사들 중 제일 키가 큰 희주보다 한 뼘 이상 큰 무원이 고개를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 희주의 찢어진 눈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어때?”
   “선배답고, 형사답네요.”
   희주는 장갑을 끼고 노란색 작은 번호판을 따라 슬라이딩 도어 안쪽 침실로 들어갔다. 감식반원들이 증거물을 채취하고 세워 놓은 번호판이었다. 침실 안에도 마스크를 쓴 감식반원들이 증거물을 수집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번호판을 세우고 있었다. 희주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오치상에게 목례를 하고 쓰러진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옷장 안 여행 가방 선반 옆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술에 취한 채 사각 트렁크와 흰 러닝만 걸친 채 잠이 든 것 같다. 번호판이 거기서 멈춘 것을 보니 남자는 옷장 앞에서 죽은 게 분명했다. 옷장에 걸려 있는 두 벌의 하얀 목욕가운에 혈액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오치상은 휘어진 콧등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어이, 죽다 살아난 정희주. 한 번만 더 사람 치면 잘릴 줄 알아. 연금도 없이 늙어 죽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잘해.”
   그 말에 침실 바닥에서 혈흔 샘플을 채취하던 감식반원이 고개를 들고 희주를 흘끔 보았다. 그리고 사람 친 형사 얼굴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희주는 대답 없이 죽은 남자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오치상이 피해자 신상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름 이덕식. 나이는 63세. 전직 판사.”
   지긋한 중년의 전직 판사와 강남 한복판 트렌디한 부티크 호텔이 잘 연결되지 않았지만, 희주는 대꾸 없이 오치상의 말을 들었다.
   “객실을 청소하러 들어온 여자가 12시 30분에 시신을 발견했고, 현장에서 망치 한 점이 발견됐어. 요즘은 조심성이 없는 건지 대범한 건지.”
   “뭐가요?”
   “살해 도구. 현장에 버렸어.”
   “초범이거나 당황했을 수도 있잖아요.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피해자가 너무 빨리 죽어 버렸다거나.”
   “소설은 이따 네 파트너랑 써.”
   오치상이 비아냥거렸다. 자신을 대외적으로 물먹인 희주에 대한 분이 안 풀렸다는 의미였다. 희주는 무시하고 계속 물었다.
   “사망 추정 시각은요?”
   “어젯밤 11시부터 오늘 새벽 3시 사이. 밤 11시에 호텔로 들어오는 게 입구 CCTV에 찍혔어. 그 뒤로는 나가지 않았어. 호텔 내에 있는 술집, 식당, 편의점에도 가지 않았고. 그 시간에 피해자를 봤다는 호텔 관계자도 없어.”
   희주는 시신을 살펴보았다. 남자의 왼손과 팔뚝 곳곳에 붉고 검은 멍이 들어 있었다. 찢어진 상처도 보였다. 상대가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왼손을 들어 방어한 듯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오른손은 깨끗한 편이었다. 그리고 양손 어디에도 결혼반지는 없었다.
   “왼손잡이였나? 주로 왼손으로 방어를 한 것 같은데.”
   희주의 말에 무원이 대답했다.
   “오른손은 상대를 붙잡으려고 뻗고 있었을 수도 있죠. 오른손으로 상대를 잡고, 왼손으로는 날아오는 망치를 방어하고.”
   희주는 다시 시신으로 눈을 돌렸다.
   남자의 양쪽 광대는 망치에 맞아 함몰되었다. 주름진 좁은 이마에도 망치에 맞은 흔적이 있었다. 앞니가 거의 부서져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목덜미와 하얀 러닝 앞부분에 주로 혈흔이 집중됐다.
   “어떤 미친놈이 판사를 망치로 때려죽인 거야?”
   유리창 너머 9층 아래 발밑에서 차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던 오치상이 말했다.
   “전직 판사가 젊은 애들 들락거리는 호텔방에서 속옷 바람에 망치에 맞아 죽었다? 최대한 빨리 용의자 특정해. 피해자 쪽에서도 기사가 먼저 나길 원치 않을 거야. 경찰이 늦어지면 기자들이 설친다고. 더 길게 설명할 필요 있어?”
   “알아들었어요. 원한 관계부터 파 볼게요. 과거에 맡았던 사건에서 뭔가 실마리가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판사 때문에 빨간 줄 간 인간부터 뒤져 볼게요.”
   “여자 문제야. 딱 보면 몰라? 협박당했을 수도 있고, 함정에 빠진 걸 수도 있어. 아니면 늙은이가 이렇게 비싼 호텔에 뭐 하러 왔겠어? 와이프 소행일지도 모르지. 바람피우는 걸 알아채고 사람을 샀을 수도.”
   “그것도 확인해 볼게요.”
   “기사 지저분하게 나기 전에 처리해. 지금은 쓰지도 않는 판사 법봉에 비유하면서 망치의 심판을 받았다는 둥 이런 식으로 헤드라인 안 나게.”
   희주는 오치상이 내심 이 일이 크게 기사화되길 바라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강남의 고급 호텔에서 사법 권력의 끝에 서 있던 전직 판사를 망치로 때려죽인 살인자는 과연 누구인가. 오치상이 바라는 건 그런 그림이 아닌지 궁금했다.
   “사람이 죽는 건, 작은 사건이야.”
   “…네?”
   희주는 귀를 의심했다.
   “매일 일어나는 흔해 빠진 일이라고. 사람들은 자기 집 주변에서 일어난 일 아니면 신경도 안 써. 내 말이 틀려? 하지만 판사가 죽은 건 좀 다른 문제야.”
   “판사 죽음이 더 값어치 있다는 의미에요?”
   오치상은 휘어진 콧등을 찡그리며 희주를 노려보았다.
   “슬슬 기가 살아난 모양인데, 착각하지 마.”
   “뭘요?”
   “이 사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옷 벗을 각오해.”
   오치상은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아마도 손수 희주의 멱살을 잡아 감사팀에 집어넣고는 뒤도 안 돌아볼 게 분명했다.
   희주는 호텔방을 나가는 오치상 뒤통수를 갈기고 싶은 걸 꾹 참고 증거품 봉투를 들었다. 겉봉에 목록이 적혀 있었다. 현금 35만원,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명함 4장. 희주는 봉투 안에서 명함을 꺼냈다. 명함을 차례로 확인하다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빅.”
   특별한 것 없는 흰 직사각형 명함에 ‘빅’이라는 한 단어가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영문으로 빅이 어떤 글자의 머리글자를 딴 조합인지 알 수 있도록 풀어 써 놓았다. 뒷면에는 빅의 주소가 한글과 영문 두 가지로 적혀 있다.
   “브레인 임플란트 칩.”
   무원이 다가와 빅 아래 적힌 영문을 읽었다.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뇌 공학 연구소네요. 피해자 머리에 수술 자국이 있는지 확인하고 거기도 가 봐야겠어요.”
   “너도 그 기괴한 수술에 대해 알고 있어? 세상이 도대체 왜 이렇게 변했지?”
   “선배 쉬는 동안 경찰스트레스장애학회에서 강의를 나왔어요.”
   “그게 뭔데?”
   “최준석 서장님이 작년에 퇴직하고 창설한 학회에요.”
   강남서 경찰서장 출신인 최준석은 과거 강력반 팀원이던 오치상의 직속상관이기로 했다. 지역 조직폭력배 소통에 공로를 인정받아 재작년 총경 자리에 올랐다가 1년 임기를 마치고 은퇴했다.
   “설마 나 때문에 그런 귀찮은 일이 벌어진 거야?”
   “올 초에 옆 지역 경위가 자살했잖아요.”
   “기억나. 심하게 훼손된 사체를 보는 일 때문에 형사 생활 내내 힘들어했다던데. 자기가 형사로서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생전에 동료한테 토로했다는 기사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았어. 도대체 어떤 형사가 그걸 보는 걸 좋아하겠어. 어떤 날은 온몸을 다 씻어도 시신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돌아 버릴 것 같은데.”
   “그분 동료가 그 일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데요. 동료 형사가 자살했으니 다들 충격이 컸던 거죠. 그게 기사화가 되면서 경찰공무원들 스트레스 관리가 이슈가 됐고요. 선배 말대로 이젠 세상이 변했으니 외면할 수만은 없는 문제가 되었죠.”
   “남의 일 같지가 않네. 넌 내가 죽어도 그러지 마. 산 사람은 살아야지.”
   “….”
   무원은 찐득한 피와 숱 없는 머리카락이 뭉쳐진 이덕식의 뒤통수를 살펴보았다.
   “근데 선배라면 누굴 죽일 때 망치를 쓰겠어요?”
   “그건 왜?”
   “기술자가 아닌 이상 한두 번 휘둘러서는 급소를 정확히 때리기 힘들잖아요. 빨리 죽지도 않고 액션이 크니까 불필요하게 본인 흔적이 남을 가능성도 크죠. 머리카락이나 분비물, 섬유 조각, 바지에 묻은 담뱃재 등등.”
   무원은 희주를 향해 망치를 쥔 것처럼 오른손을 흔들었다.
   “현장을 보면 피해자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쫓아다니면서 때린 것 같은데, 아마추어일까요? 아니면 아내? 애인?”
   “너 같으면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는 인간을 이런 좋은 데서 불러내고 싶겠어? 없던 애정도 싹틀 것 같은 분위기 좋은 호텔에서?”
   “이런 데니까 피해자가 경계심 없이 나타났을 수도 있죠. 뭔가 좋은 일을 기대하면서.”
   희주는 감식반원들까지 전부 사라진 침실 안을 휘 둘러보았다.
   “경치 정말 좋네. 네 말대로 절로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공간이야.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망치를 들고 이런 좋은 데서 사람을 죽였어. 그리고 저 밖엔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하게 걸어 다니는 놈들이 섞여 있을 테고.”
   커다란 통 창을 가려 주는 블라인드가 천장까지 말려 올라가 있어서 테헤란로 뷰가 끝내줬다.
   “욕실도 통 창이라 블라인드를 걷고 욕조에 앉아 있으면 저쪽 건물에서 다 보이겠어.”
   욕실을 보고 나온 희주가 말했다. 피해자가 쓰러져 있는 슬라이딩 도어를 밀면 자쿠지가 있는 욕실이 나왔다.
   “범인은 블라인드를 내리고 피해자를 죽였을까? 반대편 건물의 누군가를 의식해서? 보통 체크인할 때 블라인드 상태가 어때? 난 이런 데 와 본 지 너무 오래돼서 모르겠어.”
   “…저도 뭐 딱히.”
   “맨 처음 방에 들어오면, 이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지 아니면 올라가 있는지 궁금하네.”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의 블라인드들, 건드리지 말고 전부 지문 채취하라고 해. 혈흔도. 범인이 조심성 있는 인간이라 블라인드를 내리고 피해자를 공격했길 바라자고. 그러면 이 블라인드 어딘가에 뭐라도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네.”
   “솔직히 지금,”
   “네?”
   “속으로 감탄했지?”
   “….”


   두 사람은 현장을 빠져나와 호텔방 앞에서 경찰과 함께 서 있는 호텔 메이드를 만났다. 50대 중반에 약간 몸집이 크고 노안 때문에 안경을 쓴 메이드는 객실관리부 소속 룸 어텐던트였다. 희주와 무원이 나오자 호기심을 못 이긴 투숙객들이 문을 열고 복도와 이쪽을 내다보다가 문을 닫았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유, 이런 일 처음도 아닌걸요. 근데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되나요? 퇴근 시간이 다 돼서.”
   희주는 재빨리 수첩과 펜을 꺼냈다.
   “이미 다 진술하셨겠지만, 처음 피해자를 발견하셨을 때 상황을 한 번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마스터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지요. 당연히 손님이 나갔을 시간이니까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들어갔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기분이 맞았던 거지. 아니나 다를까 침실에 들어갔는데 그 양반이 쓰러져 있는데, 난 죽었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하고 그저 술이 덜 깼나…”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이드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평소랑 달랐던 점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피해자 말고 그 객실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는지, 복도에서 무슨 소리를 듣진 않으셨는지.”
   잠시 생각하던 메이드가 콧방울까지 내려온 안경을 손등으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음, 키 큰 남자가 초저녁 무렵에 들어가는 걸 본 것도 같고. 그래, 웬 남자가 하나 들어간 게 이제 생각이 나네.”
   “네?”
   희주는 볼펜을 고쳐 잡았다.
   “죽은 양반은 한 60킬로나 나갈까 싶잖수. 근데 그 양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아 뵈는 남자가 그 방으로 들어가더라고. 옆방에서 저녁에 수건을 더 갖다 달라고 해서 문을 열고 수건을 주는 사이에 그 방으로 들어가는 걸 봤지.”
   메이드는 말을 마치고 자기가 한 말대로 옆방 문 앞에 가서 문을 여는 시늉을 했다. 그 말대로라면 메이드가 수상한 남자를 본 건 아주 일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객실은 직선이 아니라 뱀처럼 고불고불하게 배치되어 있어 다른 투숙객과 마주칠 일마저 극도로 적다. 게다가 이 호텔은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CCTV를 아주 최소한으로 설치한 것으로도 입소문을 탔다. 사실 거의 없다시피 했다. 대신 모든 입, 출입을 15층에 위치한 로비 층을 통하도록 했다. 즉 1층에 가기 위해서는 내가 어느 층에 머물든지 상관없이 15층에 일단 먼저 간 다음, 1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로 바꿔 타야 했다. 약간의 번거로움만 받아들인다면 객실 복도와 객실은 지켜보는 눈 없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었다. 적어도 손님 중에 살인마가 섞여 있기 전까지는.
   “그때가 몇 시쯤인지 기억하세요? 혹시 사진이나 CCTV를 보면 그 남자를 알아보시겠어요?”
   “그때 하필 안경을 안 써서… 아무튼 키가 훌쩍 컸어. 그건 확실해. 검정색 모자를 푹 쓰고 있어서 얼굴을 못 봤지만 늙은이 같진 않더구만. 그럼 젊은 사람이겠지? 젊은 애들이나 쓰는 모자를 썼으니까. 하지만 시간은 정확히 기억해. 7시. 어느 층이든 붐비는 시간이거든. 식당 예약 시간에 맞춰서 손님들이 외출을 나가는 시간이라.”
   희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렀다. 야구 모자를 쓰고 토요일 저녁 7시쯤 죽은 이덕식보다 먼저 904호로 들어간 남자가 범인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말이야, 그 망치 보고 깜짝 놀랐어.”
   “왜요?”
   “우리집에 있는 거랑 똑같아서. 남편이 언젠가 마트에 갔다가 웬 공구 세트를 들였는데 그게 그렇게 비쌀 줄을 몰랐지. 그게 남자의 로망이라나. 근데 그 망치로 사람을 죽였다니 갖다 버리고 싶네. 소름 끼쳐.”
   여자는 이제 됐다는 희주의 말을 듣고 카트를 밀며 복도 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향해 갔다.
   “저분 진술을 믿어도 될까요?”
   무원이 여자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 물론 나이에 대한 건 맞지 않을 가능성이 커. 어쨌건 범인은 피해자보다 먼저 호텔방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고 CCTV의 위치나 이 호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해. 자, 이제.”
   희주는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이 층에 있는 9개의 문을 다 두들겨보자고. 무슨 소리를 들었고 무엇을 봤는지 물어보는 거지. 물론 한창 재미 좋을 토요일 밤 11시에 다른 방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알아? 잘나가는 연예인 불륜 커플을 볼지도 모르고. 만약에 보면 아는 기자한테 팔아. 요즘엔 얼마 주려나?”


   05 개싸움


   “어떻게 봐도 우린 이 아파트에 살 만한 사람들로는 안 보이나 봐.”
   “왜요?”
   “그렇지 않고서야 단지 입구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 번이나 경비원한테 붙잡혔겠어? 잡상인 같은 걸로 보이나? 아니면 도를 아느냐고 묻고 다니는 사이비 전도사 콤비?”
   무원은 어깨를 으쓱하고 내렸다.
   경비원들은 희주와 무원이 잡상인이나 사이비 전도사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는 혹시 기자가 아닌지 의심했다. 여자 리포터와 남자 카메라맨 조합이 아닌지 매서운 눈초리로 있지도 않은 카메라를 찾아 댔다. 하지만 청바지를 입은 키 큰 젊은 여자가 강력팀 형사이고 그 옆의 멀쩡하게 생긴 놈보다 직급이 높다는 걸 알고는 하나같이 주름진 눈두덩을 들썩였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희주를 높게 쳐주는 게 아니라 무원을 한심하게 보는 눈초리였다.
   경비원들의 집요한 마크를 뚫고 아파트 1층에 입구에 선 희주와 무원에게 한 여자가 다가왔다.
   “담당 형사님이시죠? 서울지법 이덕식 판사 살해사건 담당.”
   희주는 대꾸하지 않고 여자를 향해 등을 돌렸다. 무원은 이런 상황에서 희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친구가 저 앞 동에 살아서 이쪽을 보고 있다가 두 분이 오시는 걸 보고 바로 나왔죠. 형사님 맞으시죠? 그 정도는 대답해 주실 수 있잖아요.”
   여자가 오른쪽 어깨에 멘 큼지막한 쇼퍼백 안에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찢어진 가방 바닥 모서리에서 빨간 불이 반짝이는 걸 보니 카메라는 이미 작동하는 것 같았다.
   “이덕식 판사님 아내 분도 용의자인가요? 제 친구 말로는 두 분이 같이 외출을 하거나 같이 다니시는 걸 본 적이 없다던데, 평소 부부 사이가 나빴나 봐요?”
   희주는 떠들어 대는 여자를 무시하고 세대 호출 패드에 다가갔다. 무원은 여자가 보지 못하게 패드를 누르는 희주를 등으로 가리고 섰다. 희주는 호출 패드 카메라에 형사 신분증을 가까이 댔다. 잠시 후, 공동 현관이 열렸다. 여자가 무원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데일리뉴스 김은정 기자예요. 잘 기억 안 나는 이름이죠? 학창 시절에 한 반에 꼭 두어 명은 있는 흔해 빠진 이름이죠?”
   그 말에 희주가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자, 여자는 때를 놓치지 않고 쇼퍼백을 희주 쪽으로 돌렸다. 여자는 아주 노련했다.
   “보복 범죄라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떠돌던데. 이덕식 판사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대중들의 여론이 꽤 강성이었던 것 아시죠? 혹시 과거 판결에 앙심을 품고 복수한 게 아닌지 벌써 소설들을 써 대고 있어요. 중국 격언 중에 ‘삼십년불보구 불시남자한’이라고 30년 전의 복수라도 하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어떠세요? 힘없는 대중들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혹시 원한에 의한 보복 범죄일까요? 아, 경찰이 개인적인 복수를 옹호한다는 의사 표현을 하면 곤란하시겠죠?”
   희주는 끝까지 여자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아무리 점잖게 대응을 해도 일단 말을 하는 순간 저 여자 입맛대로 가공되어 쓰레기장 같은 인터넷 뉴스판에 뜬다는 것을. 여자는 계속 말했다.
   “제가 취재한 바에 의하면, 판사님께서 여자 나오는 술자리를 유독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아시겠지만, 원래 많이 배운 사람들이 뒤로는 지저분한 유흥을 즐기잖아요.”
   희주는 공동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무원은 여자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끝까지 주시했다. 여자는 결국 한마디도 듣지 못한 채 두 사람이 문 안으로 사라지자 카메라를 꺼내 전원을 껐다.
   “떼어 내는 솜씨가 능숙하네.”
   “상식선에서 생각하는 거죠. 전 그보다.”
   “그보다 뭐?”
   “혹시라도 선배가 여자를 때릴까 봐 긴장했어요.”


   주말 동안 남편이 살해당한 60대 초반 아내의 자태는 꼿꼿했다. 여자는 오전 8시에 형사를 맞이하면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저런 여자는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희주는 문득 궁금했다. 그대로 외출을 해도 전혀 손색없을 고상한 차림과 그에 버금가는 당당한 태도. 흰 머리를 감춰 주는 적절한 컬러의 염색까지. 일생을 법조인의 아내로 살아온 여자라고 해도 남편이 살해당했다면 좀 더 망가진 모습으로 나타날 거라고 예상했으나, 그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경황이 없으실 텐데 빨리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른 시간에 찾아왔습니다.”
   “시간은 상관없어요. 남편은 5시면 일어났죠. 저도 그렇게 30년을 그렇게 살았고요.”
   여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투리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표준어. 서울, 어쩌면 지금 이 집이 있는 지역구의 어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는 이 사건을 맡은 정희주 경위고 이쪽은 이무원 경사입니다.”
   여자는 희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주에 대해 조금 흥미를 느낀 눈치였다.
   “제가 드릴 말씀이 더 있을까요? 두 분이 오시기 전에 이미 왔다 가셨는데.”
   “네, 오치상 팀장님이 다녀가신 걸 알고 있습니다.”
   “제 DNA도 채취해서 가져가셨어요.”
   “그건,”
   “저도 압니다. 저를 용의 선상에서 배제하기 위함이겠죠.”
   판사의 아내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저랑 이야기를 나누시다 보면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이 생각나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실례가 아니라면 경위님 나이가 궁금하네요. 제 딸과 비슷한 것 같은데.”
   “서른셋입니다.”
   “그렇군요. 첫째가 이제 서른이죠. 전 스물다섯에 결혼해서 서른에 교사 생활을 관뒀어요. 첫 아이가 늦게 들어선 덕에 사회생활을 조금이나 길게 했죠. 그때는 법조인의 아내가 밖으로 도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커피 드실래요?”
   “네, 감사합니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주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눈에 고급임을 알아보게 하는 가구들이 적절하게 거실을 채우고 있다. 거기에 꽃과 나비를 그린 유화 몇 점, 삼 남매와 부부가 같이 찍은 가족가진, 집안에 감도는 은은한 향기까지. 희주는 이 집의 모든 걸 만든 건 이 여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죽은 이덕식은 이 집에 뭘 기여했을까.
   여자가 커피를 준비하러 주방에 간 사이 조그마한 개가 희주와 무원에게 다가왔다.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와도 짖지 않는 녀석이라. 일생을 편안한 이 집에서 간식 먹고 낮잠 자며 그 무엇도 지킬 필요도 경계할 필요도 없이 살아온 녀석답다. 시추는 희주가 내민 손등을 킁킁대더니 안아 올려 달라는 듯 크고 둥그런 눈으로 희주를 응시했다. 소파에 올려 주자 시추는 희주 무릎에 앉아 큰 눈을 감았다. 여자가 쟁반에 커피 세 잔을 받쳐 들고 왔다.
   “농담처럼 이 집에서 가족은 저 녀석뿐이라고 말했는데, 아이들은 전부 출가했고 남편도 죽었으니 정말로 가족이라고는 저 녀석뿐이네요.”
   “곤란한 질문을 좀 드리겠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 분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요?”
   “저도 포함인가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커피를 마셨다. 여자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금색의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덕식의 손에는 없었던 결혼반지. 희주도 커피를 마셨다. 커피 맛은 참 좋았다.
   “아까도 같은 질문을 받고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어요. 빚도 없고 제가 알기로는 도박을 한다거나 주식에 손을 대지도 않았어요. 애초에 그런 건 좀 못 미더워하는 성격이라….”
   “지인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곤란한 전화를 받는 눈치라거나.”
   “판사들은 자신과 남들을 철저히 구분해요. 친구 사귀는 걸 사위, 며느리 들이는 것만큼 까다롭게 구는 사람들이죠.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해요, 지나칠 정도로. 남편은 그렇게 고르고 고른 위인들하고만 어울렸어요. 그래서 인간관계가 좁았지요.”
   “혹시 판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한테 협박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남편은 항상 자신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괘씸해했어요.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해서 자기가 판결한 건에 달린 댓글을 읽으며 화를 냈죠. 그중에서도 판사 딸이 몹쓸 일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댓글에 가장 크게 화를 냈어요.”
   그 일은 그녀한테도 충격이었던 듯 평온하던 표정이 흔들렸다.
   “의심이 늘었어요. 만나는 사람들을 죄다 의심했죠. 다들 자기한테 앙심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앞에서는 판사라고 치켜세우지만 사실은 그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고 자길 무시하는 건 아닌지, 정말로 우리 딸이 그런 일을 당하기를 바라는 건 아닌지…. 점점 사람 대하는 걸 싫어하게 되었죠. 집착적으로 자기 판결에 대한 기사를 읽었어요. 제가 말려도 듣지 않았죠. 하지만 남편이 히스테리를 부린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돼요. 10년 전쯤엔가 법원에서 나오던 길에 날달걀을 맞았거든요. 하필이면 가슴팍에 제대로 맞아서 양복 앞부분이 아주 엉망이 된 채로 집에 왔어요.”
   “그때가 정확히 언제쯤인지 기억하시나요?”
   “카드 결제 기록을 보면 날짜가 나올 거예요. 그날 밤에 혈압 때문에 응급실에 다녀왔거든요. 그때부터 남편이 좀 변한 것 같아요. 좀, 안 좋은 쪽으로.”
   “괜찮으시면 병원에 다녀오신 날짜 좀 부탁드립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이덕식은 과거 자신의 판결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마다 마치 지금 그런 상황이 일어난 것처럼 반응했던 것 같다. 격분하고 타인을 의심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는 생각에 수치심을 느꼈다. 즉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이 감정의 폭풍이 지나가면 원망할 대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벗어나기 위해 보통 술, 이성, 약물에 의존한다. 이덕식은 어디서 위로를 구했을까.
   “혹시 남편 분께서 우울증을 앓으셨나요?”
   “우울증이라…. 진단을 받진 않았지만, 그럴지도 몰라요. 별일 아닌데도 감정 기복이 심해져서 기분을 맞춰주기 점점 힘들었어요. 정신과 상담을 같이 가 보자고 그랬지만 그럴 때마다 불같이 화만 냈죠.”
   “그러다가 트라우마 삭제술을 받으셨나요?”
   “이미 아시는군요.”
   “네, 남편 분 지갑에서 빅의 명함이 나왔습니다.”
   “그건 기록에도 남지 않고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는 말에 남편은 수술을 결정했어요. 이해가 안 되시죠? 판사가 감정 하나 컨트롤을 못했다는 게.”
   “아뇨.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저도 어떤 사건 때문에 머리가 좀 이상해져서 차도 못 타고 엘리베이터도 못 탑니다. 항상 상비약을 가지고 다녀야 하고요. 사모님을 뵈러 올 때도 22층까지 걸어 올라왔습니다.”
   여자는 희주의 말에 놀라지 않았지만, 무원은 움찔했다.
   “사람은 약한 존재죠. 남편도 다 늙어서 무슨 의처증 환자처럼 행동했어요. 젊어서는 저한테 관심도 없던 사람이. 제가 외출을 하면 누굴 만나러 가냐고 캐물었어요. 남편도 처음에는 상담만 받아 보겠다고 하고 갔어요. 결국 수술을 받더군요. 그리고 좋아졌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보다 더 나빠졌지요.”
   “누구 소개로 갔는지 아시나요?”
   “최준석이라고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이라고 했어요. 어디 명함이 있을 거예요.”
   익숙한 이름이 등장하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좋은 신호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여자 문제에 대해 물어보려는 거군요.”
   “네.”
   “저도 호텔에서 죽었다기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모르지만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남편을 찾는 사람이 많았어요. 어디서 만나서 뭘 했을지 뻔해요. 지금은 전부 불법이지만. 사실 그때도 그건 불법이었죠. 그래도 다들 그렇게 했지요.”
   “부부 사이에 문제는 없으셨나요?”
   “없었어요.”
   답변이 너무 빠르게 나왔다.
   “남편 분께서 혼자 호텔을 방문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건가요?”
   “아뇨. 남편을 가장 잘 아는 건 아내니까 여쭤보는 겁니다.”
   “경위님은 미혼인가요?”
   “한 번 갔다 왔습니다.”
   “얼마나 살았나요?”
   “1년 정도.”
   “그렇군요. 시작하기도 전에 끝냈군요.”
   “그런 셈이죠.”
   “부부 사이에 모든 걸 다 알 필요는 없어요.”
   “….”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동기를 이해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이해보다는 포기에 가깝죠.”
   “이제 좀 말이 통하는 것 같네요.”
   무원은 여자들의 대화에 끼지 않았다. 애초에 두 여자는 무원이 없다는 듯 대화 중이었다.
   희주 무릎 위에서 눈을 감고 있던 시추가 무원의 무릎으로 이동했다. 무원은 시추의 느긋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여자는 일어나서 거실 장식장 맨 밑의 서랍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명함 2개를 집어내고 다시 상자를 서랍에 넣고 닫았다.
   “그이 사무실에서 일하던 사무장 연락처에요. 남편은 판사에서 물러난 다음에 고향에 내려가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어요. 하지만 일이 없어 그마저 접었죠.”
   여자는 희주에게 사무장의 명함을 내밀었다.
   “이건 남편에게 빅을 소개한 최준석이라는 사람 명함이에요.”
   희주는 명함 2장을 전부 챙겼다.
   “뭔가 밝혀내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진전이 없더라도 저희가 범인을 잡기 위해 뭘 하고 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없었던 피로한 기색이 눈가에 역력했다. 희주는 문득 여자가 혼자 집에 있다는 사실이 걸렸다. 물론 개가 한 마리 있지만 가족사진 속 삼 남매 중 누구도 비통함을 감추고 있는 모친 곁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
   무원이 얄팍한 책자 하나를 내밀었다.
   “혹시라도 나쁜 생각이 든다거나 자녀분들에게 말씀하기 어려우시면 여기로 연락하시면 도움을 드릴 겁니다. 익명으로 상담이 가능한 기관입니다.”
   무원이 내민 것은 각종 범죄,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해바라기 센터’ 안내 책자였다. 희주는 놀랐다. 솔직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는 큰 기대는 없다는 듯 책자를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
   “남편은 나쁜 기억을 지우고도 죽었어요. 남편은 그것만 해결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전 그게 마음에 걸려요.”


   06 마트료시카


   “아까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뭐가요?”
   희주와 무원은 이덕식이 살던 아파트 단지 입구가 정면으로 보이는 길 건너 패스트푸드점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아까 내가 그 집을 나와서 계단으로 내려갈 때.”
   “아.”
   “넌 그냥 엘리베이터 타. 나 때문에 매번 계단을 이용할 필요 없어.”
   희주는 공황장애 약을 입에 넣고 콜라를 마셨다. 그리고 감자튀김을 쉬지 않고 10개쯤 집어 먹은 다음 말했다.
   “파출소에 피해자 신변 보호 요청 넣어. 똥파리 같은 기자들이 당분간 계속 이 근처에서 죽칠 테니까.”
   “네. 근데 굳이 여기서 점심을 먹자는 건….”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혹시라도 아내 분이 외출을 한다면 이 자리에서 보이겠지.”
   “용의 선상에서 아예 배제하는 건 아니네요?”
   “범인 잡을 때까지는 전부 범인 후보잖아.”
   무원이 막 햄버거 껍질을 까려는 순간, 희주는 이어폰 한쪽을 끼고 다른 쪽을 무원에게 내밀었다.
   “그 총무라는 사람한테 전화해 봐.”
   무원은 햄버거를 내려놓고 이어폰을 꼈다.
   “점심시간 전에 해 보자고. 변호사들은 7시에 출근해서 11시면 점심 먹으러 나가던지 회의실로 도시락을 시키니까. 만약 이 사람이 아직도 변호사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다면 사무실에 있을 때 통화하는 게 낫잖아.”
   희주는 무원이 전화를 거는 동안 자기 몫의 햄버거를 와구와구 먹었다. 무원은 상대편이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며 희주를 응시하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아까 이덕식 아내가 내준 것에 비해 맛은 형편없지만 그래도 충분히 뜨거운 커피였다. 마음도 훨씬 편했다.
   이덕식이 고향에 차렸다는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출신 여자는 한때나마 자신에게 월급을 주던 사람에 대해 거침없이 말했다. 점심시간 직전의 허기짐이 그녀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는지도 모른다. 희주는 기다란 베이컨을 씹으며 통화에 귀 기울였다.
   “대한민국 판사는 특별한 인종이에요. 그 양반은 자기가 큰소리 내면 세상이 멈추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역겨운 인간이었어요. 월급도 제때 안 주고. 그래놓고 본인은 여자 나오는 술자리라면 빠지질 않았죠.”
   희주는 ‘여자’ 부분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아파트 1층에서 죽치던 김은정 기자도 비슷한 소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망치로 때려죽이고 싶으세요?”
   무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했다.
   “어떤 사람은 그러고 싶겠죠. 전 충분히 이해돼요.”
   여자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30년 넘게 판사 생활을 했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적을 만들었겠어요. 얼마나 많은 개떡 같은 판결을 내렸겠냐 이 말이에요. 그런 거지 같은 판결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도 돈도 없고 뭣도 없으면 복수도 못 하죠. 그게 현실이잖아요.”
   “더 하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뭔가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그 인간은 현실 감각이 한참 모자랐어요. 사람들이 자기처럼 노력을 안 해서 가난하고 힘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죠. 본인은 자기 학비도 벌어 본 적 없으면서.”
   여자는 쉬지도 않고 말했다.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실마리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덕식이 살아생전 덕을 쌓은 인간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럼 사무장님은 만약 억울한 판결을 받으시게 되면 복수하시겠어요? 돈도 있고…”
   무원은 차마 뒷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자의 대답이 앞서 나온 덕에 대화는 별문제 없이 흘러갔다.
   “당연히 하죠.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전부 받아 내고 공개적으로 개망신 줄 거예요. 판사들 전부 AI 인공지능으로 바꿔야 해요. 물론 내 밥그릇도 온전치 않겠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그게 나아요. 안 그래요? 형사님은 살면서 송사 같은 데 휘말리지 마세요. 인생 아주 피곤해지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통화 감사합니다.”
   “저기요, 이미 죽었으니 할 말은 아니지만, 그 양반은 대중들이 자기가 내린 판결에 불만을 품고 욕을 한다는 것에 역정을 냈어요. 제 생각엔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존경받는 이 시대의 스승, 같은 게 되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니까 성질을 부렸어요. 존경은 아무나 받는 줄 아나. 암튼 유치한 인간이었어요.”
   여자는 이후로도 한참 동안 이덕식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덕식 판사가 아랫사람에게 존경심보다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쪽에 가까운 법조인이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여자 역시 특정한 사람을 용의자로 지칭하진 못했다.
   “요즘 사람들은 미국 범죄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가? 자기가 용의자로 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형사한테 막 하네. 알리바이가 있으면 용의 선상에서 벗어난다는 것까지 알고 그러는 걸까?”
   “그 정도 지식은 중고생들도 다 아는 상식이니까요.”
   “그렇군. 그런 게 상식이 될 정도로 세상이 썩었다는 의미로 해석되네. 넌 먼저 들어가. 내가 최준석을 만날게. 왠지 내가 혼자 만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알겠어요. 근데 그 사무장 여자의 말,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상적이네. 일정 부분 동의하고.”
   “씁쓸하지만 저도 그래요. 특히,”
   희주는 무원을 바라보았다.
   “특히 뭐?”
   “판사를 전부 AI로 바꿔야 한다는 말에는 100% 동의해요.”


   희주는 최준석을 길 건너 나무 그늘 아래에서 살펴보았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고용하는 학교 지킴이 보안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오후 1시, 그는 하교하는 저학년들을 위해 교통 지도 중이었다. 그는 보안관이라는 캐릭터에 충실하게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갈색 조끼를 입은 채 인자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그리고 캐릭터 때문인지 본인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콧수염도 길렀다. 아직까지 배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쉬는 날에는 등산과 골프를 꾸준히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떤 사람을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을 먼저 관찰하는 것은 희주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예고 없이 찾아갔다. 특히나 최준석 같은 경찰 출신을 만날 때는 더 그랬다. 보수적이고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여자를 얕보는 사람. 게다가 그는 시민 폭행으로 정직 처분을 받는 바람에 자랑스러운 경찰이 대중의 비난을 받게 만든 여형사를 노골적으로 싫어할 게 뻔했다. 그리고 그런 형사가 전직 판사 살인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도.
   최준석은 경찰 생활에서 은퇴를 하고도 여전히 제복 비슷한 걸 입고 타인을 통제하는 일을 선택했다. 희주의 경험상 여전히 자신이 현역과 다름없는 분위기를 타인에게 풍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즉 원하는 대답을 얻기에 별로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교내 1층에 위치한 외부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꾸며진 공간에 마주 앉았다. 원래는 양호실이 있었는지 침대 사이에 두는 커튼 파티션이 벽 한쪽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을 안내해 준 학교 교직원이 희주와 최준석 앞에 커피 잔을 놓고 사라졌다. 교직원은 존경받는 보안관을 찾아온 여자가 경찰이라는 사실에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렇게 갈 인물이 아닌데.”
   최준석은 이 공간이 자신의 개인 응접실이라도 되는 양 여유롭게 커피를 들었다. 그리고 반말로 말했다.
   “사건 관련해서 여쭤볼 게 있습니다.”
   예감이 좋진 않지만 희주는 직진하기로 했다.
   “피해자 소지품에서 서장님 명함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두 분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이젠 서장이 아니라 경찰트라우마학회 회장이야. 그 정도는 알고 왔겠지.”
   그는 즉답 대신 호칭부터 바로잡았다. 희주는 최준석에게 그런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짧게나마 후회했다. 그 바람에 대화의 우위를 점하지 못할 것 같아 조금 초조해졌다.
   “아, 죄송합니다. 그래서 피해자에게 빅을 소개하셨겠지요. 뭐 때문에 기억을 삭제하고 싶다고 말하던가요?”
   최준석은 짜증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출입문이 있는 뒤를 흘깃 돌아보고는 다시 희주를 바라보았다. 누가 듣지는 않는지 신경 쓰는 눈치였다.
   “이덕식은 옛 친구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이런저런 일들로 힘들다기에 조언을 조금 했을 뿐이야. 이제 그럴 나이잖은가.”
   “옛 친구가 왜 힘든지 이유에 대해서는 털어놓진 않던가요? 판사님께서 회장님에게 많이 의지했던 것 같은데요.”
   “그건 자네가 알 것 없어. 죽었다고 해도 프라이버시는 지켜 줘야지. 이미 이 세상 떠난 사람 명예에 흠집을 낼 셈인가?”
   건방진 년. 최준석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세상살이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애송이에게 일터에서 취조나 당하다니. 하지만 최준석은 이런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고 인자한 보안관의 얼굴을 유지했다.
   “혹시, 여자 문제였나요?”
   하지만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최준석은 자신이 모욕이라도 당한 양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흉터투성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직업이라는 게 그렇잖아. 좋은 일을 해도 좋은 소리를 듣기 어려워. 자네도 공감할 걸세. 요즘 젊은 놈들은 경찰은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로 바꿔 부른다며. 지들이 왜 발 뻗고 자는지도 모르고. 안 그런가?”
   최준석은 전략을 바꾼 것 같았다. 희주를 우리 편으로, 우리 쪽으로 끌어당기기로.
   “예전 일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고 했어. 별의별 사건을 다 맡았으니 그럴 수 있지. 그래서 우리 학회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빅을 소개해 줬어. 내 역할은 그게 다네.”
   최준석은 살살 달래는 어투로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네. 이덕식 판사님은 회장님 조언대로 빅을 방문했고 수술도 받았습니다. 수술은 효과가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아주 만족하더라고.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했지. 그 뒤로는 따로 만나지 않았고 연락도 없었어. 그게 벌써 1년 전이야. 안사람은 괜찮던가?”
   “괜찮아 보였습니다.”
   “음….”
   “해바라기 센터에 대해 안내 드렸습니다. 회장님께도 그 센터와 관계가 깊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최준석은 그제야 미간의 주름을 펴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불편한 질문과 그렇지 않은 질문에 대한 온도 차가 명확한 인간이었다.
   “센터는 20년 전 내가 강력팀 팀장이던 시절에 만들었지. 나도 창립 멤버로 이름을 올렸어. 센터는 피해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케어했어. 경제력이 없는 피해자들을 위해 직업훈련이나 일자리 소개까지 했으니까. 지금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굴러갈지는 미지수지만. 우린 이 사회를 위해서 젊음을 바쳤어. 이덕식도 마찬가지야. 그 친구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됐어.”


   그날 밤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을 열자마자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너무 맛있는 냄새가 집에서 나고 있었다. 희주는 햄버거가 들어 있는 종이봉투를 어디다 버리든지 안 보이는 데다 처박고 싶었다. 하지만 이사한 지 일주일이 다 되도록 뜯지 않은 이삿짐 박스가 살인 현장의 노란 번호표처럼 듬성듬성 놓아져 있는 집 어디에도 싸구려 햄버거를 버릴 데가 없었다.
   먼저 퇴근한 주웅은 희주가 도착할 때까지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희주는 선뜻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다. 대신 청결함은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혹시라도 청소를 했다가는 끝이라고 했다. 그리고 집에서 먹는 저녁도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주웅은 희주의 엄포에 유쾌하게 웃으며 부모님이 집을 비운 10대들처럼 밤을 보내자고 했다.
   희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음식 냄새가 나는 주방으로 갔다.
   “햄버거가 오늘 마실 와인이랑 잘 어울리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희주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주웅이 먼저 햄버거가 든 종이봉투를 받아들었다.
   공황발작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온 그날부터 희주는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퇴원은 그다음 날 했지만, 15층 아파트에 위치한 집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또다시 발작이 찾아왔다.
   결국 6인용 입원실에서 한 달여를 머물렀다. 입원한 동안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법의학자로 근무하는 친구 경은이 휴가를 내고 집주인 대신 이사를 했다. 그래서 지금 이 오피스텔, 1층은 상가이고 2층부터 주거를 위한 오피스텔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올 수 있었다. 군데군데 붙어 있는 낡은 CCTV에 노출될 약간의 각오나 눌러쓸 야구모자 같은 게 있으면 누구나 들락날락 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2층이기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필요 없다는 점, 경찰서와 도보 5분 거리라는 점, 무엇보다 복층이라 층고가 높다는 점 때문에 고민 없이 여길 골랐다.
   전남편과 1년, 혼자서 5년 동안 산 6년의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면서 집기 대부분을 처분했다. 버리지 않고 그대로 챙겨 온 건 그동안 모은 사건 자료들과 수사와 관련된 책들뿐이었다. 주방용품도 대부분 처분하고 식기도 한 세트씩만 남겨 뒀다. 경은은 희주의 지시대로 세간들을 버리면서 영원히 혼자 살 거라고 광고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집이 아직 썰렁하죠?”
   주웅은 가볍게 몸을 놀려 레스토랑에서 투고 박스에 담아 온 요리들을 렌지에 차례로 넣어 데우기 시작했다.
   “좋은데요? 대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고. 고양이 기르는 건 어때요? 희주 씨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 집에 온기를 더해 줄 것 같은데. 만약 고양이를 기를 거면 40대 중반의 충직한 집사도 같이 입양해야 돼요.”
   주웅은 렌지로 데운 것들을 식탁에 늘어놓았다.
   “그뤼에르, 에멘탈 치즈를 올려 그라탕한 어니언 스프, 수란을 얻은 리옹식 샐러드, 콩피한 오리다리와 리조또에요. 전부 렌지에 데우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것들이에요. 괜찮죠?”
   “일류 셰프가 왔다 간 것 같네요.”
   “요즘에 포장이 워낙 잘 돼서요. 파크하얏트 2층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거든요.”
   “삼성동 거기?”
   주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췄다.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미안해요. 실수했어요.”
   “뭐가요?”
   “거기 사건이 일어난 호텔이죠.”
   “맞아요. 근데 그게 어때서요?”
   “괜히 잊고 있는 걸 건드린 건 아닌가 해서요. 불쾌할 수도 있고.”
   주웅은 사과의 의미로 희주를 끌어안기라도 할 작정처럼 두 팔을 펼쳤다.
   “전혀요. 전혀.”
   희주는 포장한 음식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요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 좋아요, 좋은데.”
   “좋은데?”
   “이런 걸 먹으면서 내가 오늘 보자고 했던 범죄 프로그램을 봐도 되겠어요?”
   “크게 상관없을 것 같지만… 무슨 내용인데요?”
   주웅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편이 아내를 톱으로 토막 내고 손가락 끝마디를 모두 절단해서 시신을 유기한 사건이요.”
   “….”
   평온하던 주웅의 얼굴에 당혹감이 살짝 스쳤다가 사라지는 것을 희주는 놓치지 않았다. 주웅은 오늘 저녁 메뉴 중에 육즙이 뚝뚝 흐르는 육류 요리가 있었는지 잠시 생각했다.
   “국과수에서 일하는 제 친구가 여자의 오른쪽 다리와 오른팔을 부검했는데 나머지 조각은 아직 찾는 중이에요. 기동중대, 형사대 4개 반 200명이 넘는 인원이 오른쪽 다리와 오른팔이 발견된 도로변 갈대숲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나머지 조각을 못 찾았어요.”


   끝내주는 저녁 식사 후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 소리를 줄인 채 화면만 빛나게 둔 TV를 조명 삼아 대화를 나누었다. 주웅은 머그컵에 녹차를, 희주는 커피를 담아 마셨다. 주웅이 있는 것만으로도 공간에 윤기가 흘러넘쳤다.
   주웅은 희주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백하던 날도 주웅은 희주의 어깨와 팔꿈치 사이 어딘가를 부드럽게 터치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이성의 손길에 마음이 더 흔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나중에야 그게 정신과 의사가 상대와 라포르를 형성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걸 알았다. 어쩌면 주웅이 의도적으로 터치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동학대범 숨통을 그 자리에서 끊어 놓지 못해 아깝다며 울부짖던 희주였기에, 그의 다정한 터치가 더 좋았다.
   주웅은 의사라고 소개하지 않으면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진 남성들을 상대하는 유러피안 스타일의 편집샵 대표처럼 보였다. 병원 특유의 냉랭한 아이보리색 벽 앞에서도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주웅 역시 희주의 직업을 알기 전까지는 응급실에 실려 온 희주를 보고 은퇴했거나 오래도록 현역 생활을 하고 있는 핸드볼 선수라고 꽤나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주웅은 희주의 직업과 공황발작을 하게 된 이유, 그리고 얼마나 큰 죄책감을 떠안고 있는지를 알고도 데이트 신청을 했다. 주웅은 변명처럼 모든 여자 환자에게 이러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는 끝없는 관대함으로 희주를 대했다. 마치 마트료시카처럼 그의 관대함은 계속되었다.
   “그 호텔에서 남자가 죽었어요. 전직 판사고 나이는 60대 중반. 살해 도구는 망치인 것 같아요. 여러 번 공격당한 것 같아요. 아마 금방 죽지 않았을 거예요. 고통을 오래 느꼈겠죠.”
   희주는 사회면 뉴스로 나올 만한 선에서 사건에 대해 털어놓았다.
   “한창 외로울 나이네요. 자식들은 전부 자라서 제 갈 길 갔을 테고, 아내와는 자식들이 독립하면서 사이가 더 돈독해졌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곪았던 게 터질 수도 있는 나이기도 하죠. 판사였다면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거나 대기업 법률 고문으로 갔을 수도 있고, 그동안 못 간 여행이나 다니면서 그냥 쉴 수도 있겠죠.”
   주웅의 입에서 아마도 그가 환자를 보면서 수집했을 데이터가 흘러나왔다.
   “대체로 비슷해요. 피해자 소지품에서 빅 명함이 나왔어요. 한평생 부러울 것 없이 산 판사님이 도대체 무슨 기억을 지우고 싶었을까요?”
   주웅은 머그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건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스티브 블래스라는 선수가 있어요. 피츠버그의 투수였죠. 최고 기록을 낸 후 다음 시즌부터 형편없는 투구를 보이며 스트라이크존에 더 이상 공을 던지지 못하다가 은퇴했어요. 화려하고 잘 나갔던 과거에 사로잡혀 평범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걸 그의 이름을 따서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이라고 불러요. 의외로 남들이 보기에 멋진 삶을 살았던 이들 중에 말년이 불행한 경우가 많아요.”
   희주는 자신의 나이키 티셔츠를 셀린느의 실크 블라우스처럼 쓰다듬는 주웅의 손길을 느끼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희주 씨는 어때요?”
   주웅의 듣기 좋은 저음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뭐가요?”
   “트라우마 삭제.”
   희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냥 담석 제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엄청난 통증을 유발하는 돌멩이를 수술로 꺼내는 것뿐이에요. 한 보름 정도만 쉬고 나면 돌멩이의 존재는 굿바이예요. 얼마나 상쾌하고 산뜻하겠어요?”
   “그렇게 간단한 할 리가 없어요. 난 그런 복잡한 건 잘 모르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기억을 지운다는 게 아주 불쾌하게 느껴져요.”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계속 화가 나 있잖아요.”
   희주는 머그컵을 꽉 쥐었다. 이러다가 몇 번이나 싱크대를 향해 집어 던졌다. 주웅과 함께 있을 때도 그런 적 있었다. 머그컵이 깨질 때마다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화를 삭이지 못하고 고작 죄 없는 컵이나 집어 던지는 폭력적이고 무능한 형사라는 자기 성찰이 희주를 한층 더 괴롭게 했다. 주웅은 뜨겁고 검은 커피가 찰랑이는 머그컵을 부드럽게 빼앗았다.
   “그래요.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요. 난 다만,”
   “아뇨, 할 필요 없어요.”
   “끝까지 들어 봐요.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어요. 분노는 그것을 부은 것보다 담고 있는 그릇을 더 많이 훼손시키는 산과 같다고. 그 일이 희주 씨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돼요. 희주 씨는 나한테,”
   주웅의 말 사이로 희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2시. 이 시간에 오는 전화가 좋은 소식일 리 없다. 팀장이었다. 희주는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주웅의 팔을 빼며 전화를 받았다. 어쩐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살인이야.”
   오치상은 건조하게 말했다.
   “이번엔 변호사. 정확히는 검사 출신 변호사.”


   07 두 번째 살인


   안전벨트를 풀지 못하면 죽는다.
   눈앞으로 칼날이 날아든다.
   남자는 어두운 차 안에서 빛나는 칼날이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것을 막으려고 손을 뻗었다.
   칼날은 주저 없이 그의 왼손을 찔렀다.
   칼날이 차갑다가 돌연 불이라도 붙은 듯 뜨겁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하관 전체가 청테이프로 감겨 있어 비명이 새어 나갈 틈이 없다.
   남자는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길 바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들이 보인다.
   차가운 눈이 남자를 응시한다.
   그것은 자작나무의 얼룩이다.
   자작나무 몸통의 짙은 얼룩은 마치 반쯤 잠긴 초점 없는 피곤한 눈처럼 보인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그 눈이 남자를 따라온다.
   100개의 눈을 가진 거인 아르고스(Argos).
   자작나무는 거인의 이름에서 따왔다.
   아거스 나무가 죽어 가는 한 남자를 응시한다.
   남자도 한때는 저 자작나무처럼 죽어 가는 여자를 바라만 보았다.
   입을 막고 귀를 막고.
   그 벌을 이제야 받는 것인가.
   20년 전 유령이 이제야 방문한 거야.
   아니야.
   어쩌면 계속 문 앞에서 오늘을 기다리며 서 있었는지 몰라.
   이 모든 상황들을 두 눈으로 목격하는 사이, 칼날이 복부를 연속해서 찌른다.
   남자의 시야가 흐려진다.
   아거스 나무의 눈은 무심하다.


   “이번엔 칼이야.”
   오치상이 말했다.
   “이름 주용훈. 59세. 캠핑장 관리인이 발견했어. 초저녁부터 술에 꼴은 인간인 줄 알고 창문을 두드렸는데 꼼짝을 안 해서 경찰을 불렀다더군.”
   “동일범일까요?”
   마른침을 삼키고 희주가 말했다.
   “그럴지도. 근데 어떤 미친놈이 판사랑 변호사를 골라서 죽이는 거지? 공권력에 불만 가진 놈인가? 돌겠군.”
   현장은 서울 인근 교외에 위치한 자작나무 숲이었다. 인근 산자락 아래 자리한 숲은 하절기 동안 상시 개방했다. 숲을 찾는 시민들에게는 좋은 뉴스였지만, 살인사건 용의자를 찾는 경찰에게는 나쁜 뉴스였다. 숲을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용의자를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희주와 무원은 라텍스 장갑을 끼고 노란색 접근금지 띠로 막아 놓은 차로 다가갔다. 새까만 어둠 속에 서 있는 검은 세단 한 대. 마치 장례차처럼 슬프고 음산하게 보였다.
   감식반원들이 현장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노란 플라스틱 번호판이 차 둘레에 세워졌다. 새벽 3시라 구경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휴대폰 불빛이 보였다. 멀리서 이곳을 보면 영화라도 찍는 줄 알 것이다. 희주는 그나마 인적이 드문 숲에서 피해자가 발견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덕식은 호텔방, 두 번째 피해자는 외딴 숲. 묘하게 다른 듯 공통점이 느껴지는 현장이다.
   “이번에도 뚜렷한 목격자가 없어. 재수도 없지.”
   호텔방에서 망치에 맞아 죽은 전직 판사 사건에서 CCTV는 결국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15층에 위치한 로비층 CCTV 속에는 주말을 이용해 호텔을 찾아 체크인하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그 안에서 중년의 메이드가 진술한 18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상, 하의를 모두 검정색으로 입고 야구 모자를 쓴 20대부터 50대까지의 남자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변호사가 여길 왜 왔을까? 혼자 캠핑하러 온 것도 아닐 테고. 트렁크도 텅 비어 있던데.”
   오치상은 달려드는 날벌레를 손으로 쫓았다.
   “아마도 약속된 장소겠죠.”
   “그게 뭔 소리야?”
   “여긴 용의자와 피해자만 아는 장소일 거예요. 둘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일 가능성이 커요. 그러니까 카페나 술집이 아니라 남들은 생각 못 할 이런 데서 만날 수 있는 거죠.”
   희주의 말에 일리가 있는 듯 오치상도 별다른 트집을 잡진 않았다.
   “지난번 사건과 한 세트로 봐야 할 것 같아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럼 연쇄살인이라는 거야?”
   이덕식 사건만 잘 해결하면 본청 발령은 떼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한 명의 법조인 피해자가 나오자 오치상은 짜증을 냈다. 곧 기자들은 입을 놀릴 것이고, 서장과 청장은 오치상을 불러 압박할 것이다.
   “빨리 용의자 특정해. 없으면 그럴듯한 가설이라도 세워. 검사 출신이잖아. 주용훈 때문에 인생 조지고 빵에서 썩었다가 막 나온 놈들, 한 열댓 명 바로 안 나오겠어?”
   “이덕식과의 연관성도 생각해야 돼요.”
   “폭력 전과 있는 놈들 우선적으로 보라고. 연장질하다가 들어간 놈들 말이야. 일단 목록부터 뽑아서 가져와.”
   “왜 남자라고 단정 지으세요?”
   “네 입으로 동일범이라며.”
   오치상은 증거물 봉투를 희주 눈앞에 들이밀었다. 스위스아미 브랜드의 과도가 한 점 들어 있었다. 칼날의 크기는 13센티미터 정도지만 앞부분이 아주 날카로웠다. 가정용 과도가 칼등 부분이 둥글게 연마된 것과 비교했을 때, 이 칼은 사이즈만 과도 크기였지 훨씬 더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10년 동안 전국에서 살인 도구로 망치를 쓴 사건이 총 몇 건인 줄 알아?”
   “37건입니다.”
   무원의 입에서 즉답이 나왔다.
   “전부 남성 피의자였습니다. 칼도 가정폭력으로 인해 집안에서 벌어진 사건을 제외하면 전부 남성 피의자들이 선택한 살인 도구고요.”


   자작나무 숲 주차장 입구에 달린 CCTV에서 주용훈의 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밤 9시쯤 들어온 그의 차는 주차장 제일 안쪽 산자락과 가까운 곳에 차를 댔다. 그리고 숲 관리인이 그를 발견한 새벽 1시까지, 노회한 변호사는 에어컨도 꺼진 차 안에서 4시간 동안 혼자 있었다. 밤이지만 기온은 31도였다.
   희주는 차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머리를 넣었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비릿한 피 냄새는 8월의 습도와 만나 가공할 만한 역한 냄새를 만들어 냈다. 거기에 시신에서 풍겨 나오는 체취와 분비물 냄새 또한 훅 끼쳤다.
   지독한 냄새, 좁은 차 안, 불과 서너 시간까지 머물렀을 살인자의 존재, 그 모든 것이 한데 뭉쳐서 경보기를 울렸다. 당장 머리를 빼서 열기로 지글거리는 주차장 바닥에 아까 먹은 훌륭한 저녁 식사를 토하라는 신호. 희주는 식은땀 때문에 차가워진 손으로 주머니 속에 있는 플라스틱 원통형 약병을 매만졌다. 약통에는 주웅이 비상용으로 처방해 준 자나팜정 1밀리그램이 다섯 알쯤 들어 있었다.
   “…제가 볼까요?”
   무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넌 조수석 확인해.”
   희주는 시큼한 곤죽이 된 저녁 식사가 식도를 타고 올라오려는 것을 꾹 참고 시신을 확인했다. 청테이프로 입과 턱을 틀어막은 채 죽은 주용훈의 연회색 와이셔츠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특히 왼팔과 왼손, 복부 쪽이 심했다. 복부에서 흘러나온 피가 운전석 시트를 적시고 정장 바지를 다 적셨다. 발목 또한 청테이프로 정교하게 감아져 있었다. 부검을 해 봐야겠지만 여러 번 칼에 찔린 다음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 같았다.
   “치명상은 없어 보이지?”
   “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건 생각보다 어려워. 급소를 제대로 한 번에 공격하지 않는 이상. 보통 사람은 칼로 찌르려다가 오히려 본인이 다치기도 해.”
   “범인도 그래서 여러 번 찌른 거겠죠?”
   “근데… 정말 죽이려고 한 걸까?”
   “네?”
   희주가 무원에게 하는 질문도 아닌 혼잣말도 아닌 투로 말했다.
   “피해자는 완벽하게 제압된 상태였어. 청테이프로 입을 막았으니 구조 요청도 못 했을 거고 다리도 꼼꼼하게 묶었어. 정말 죽일 생각이었으면 깔끔하게 목이나 심장을 노렸겠지. 그냥 겁만 주거나 경고용으로 칼을 쓴 게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피해자가 강하게 반항하니까 복부를 여러 번 찔렀고. 안전벨트를 봐.”
   희주는 피가 묻은 안전벨트를 가리켰다.
   “피해자는 살아 있을 때 도망치려고 했어. 즉 공격을 당하고 바로 정신을 잃거나 하지 않았다는 거야.”
   무원은 희주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해바라기 센터 명함이었다. ‘여러분의 성실한 이웃’ 분홍색 스마일 로고 둘레에 노란색 꽃잎을 단 해바라기 위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주용훈은 해바라기 센터 내 전담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부유한 자들의 대변인이 아니라 지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 일하는 존경 받아 마땅한 변호사였다.
   “어떻게 생각해?”
   “선배 말대로 호텔 사건과 오버랩 돼요. 장소도 다르고 살해 도구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치명상을 입고 죽은 게 아니라 꽤 시간을 들여 실랑이를 한 흔적이 보여요. 만약 범인이 동일하다면, 엄청 신중한 사람일 것 같아요.”
   “내 생각도 비슷해. 그리고 피해자들은 일반적으로 존경받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잖아. 하지만 주변 평판은 좀 달랐지. 주용훈은 어떨까?”
   보조석에 놓인 가방 속에서 상담을 맡은 사건들의 서류가 나왔다. 전부 가정폭력, 성폭력, 아동학대 등 해바라기 센터에 주로 입소하는 피해자들 사건이었다. 그리고 원통형으로 생긴 흰 약통이 2개 나왔다.
   “뭔지 아시겠어요?”
   무원이 약통들을 내밀었다. 희주는 그게 뭔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하나는 지금 희주의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동일했다.
   “불안장애, 공황장애에 처방해 주는 약이야. 다른 하나는 수면제고.”
   가방 안에는 팩소주와 구강 청결제, 일회용 칫솔과 면도기도 나왔다.
   “변호사들은 전부 이래요?”
   무원이 주용훈의 소지품들을 보고 말했다.
   “뭐가?”
   “수면제, 술, 가글, 칫솔. 집에는 안 들어가는 걸까요?”
   “이것 봐.”
   희주는 명함을 내밀었다. ‘빅’의 명함이었다. 희주는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주용훈의 땀에 전 두피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중년 남자의 얇고 힘없는 머리카락이 끈적끈적한 땀과 피에 젖어 역겨운 체취를 풍겼다. 정수리 부근에서 희미하게 우둘투둘한 흉터 자국이 만져졌다. 순간 소름이 돋아 당장 손을 떼고 싶었다.
   “왜요?”
   희주의 기색이 심상치 않자 무원이 물었다.
   “주용훈도 트라우마 삭제술을 받았어. 첫 번째 피해자와 동일해.”
   희주와 무원은 피해자의 차에서 한 발 떨어져서 감식반원들이 범인의 흔적을 찾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30분 정도 뒤면 해가 떠오를 것이다.
   “두 피해자 사이에 최준석이 있어. 아마도 주용훈은 해바라기 센터라는 연결고리로 최준석을 만났겠지.”
   “혹시 그 전부터 이미 알던 사이는 아닐까요?”
   “그럴 수도. 네 말이 맞길 바라. 그래야 정의의 보안관을 다시 만날 핑계가 생기니까. 이번에는 그 늙은 여우가 뭐라도 털어놓겠지.”
   “피해자의 병원 기록 확인해 볼게요. 불면증과 알코올 중독 때문에 정신과 상담과 처방을 받은 이력이 있을 거예요. 피해자가 왜 트라우마 삭제를 했는지 상담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난 크게 기대 없어.”
   “왜요?”
   “수면제는 수면장애 진단만 받으면 줘. 불안장애도 크게 다르지 않아. 그 진단이라는 건 겨우 5분 내외의 상담이고 환자가 원하면 큰 문제 없이 처방전을 내준단 말이야. 의사는 이유를 몰라도 돼. 묻지도 않아. 정신과 약 처방전을 받는 건 일도 아니야. 주치의는 아마 자기 환자의 트라우마가 정확히 뭔지 모를 거야. 관심도 없겠지.”
   “그럼….”
   “이덕식과 주용훈은 단순히 기억을 지운 게 아니야. 트라우마에 시달렸어. 그 트라우마를 지워 준 의사는 알겠지.”
   “그럼 빅에 가 봐야겠네요.”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 실마리는 거기에 있을 거야.”


   08 부검(Autopsy)


   판결 논란이 끊이지 않던 전직 판사의 충격적인 죽음!
   타인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사법 권력에 대한 경고인가?
   담당 형사, 판사의 ‘은밀한 사생활’ 논란에 묵묵부답으로 일관.
   살해당하던 날 밤, 60대 전직 판사가 호텔에 간 이유는 무엇인가?


   무원이 보여 준 인터넷 뉴스 기사 요약 문구를 보고 희주는 욕이 절로 나왔다. 흔해 빠진 이름이라던 기자가 쓴 기사였다.
   “입도 뻥긋 안 한 결과 한번 대단하네.”
   희주와 무원은 그 옛날 호랑이가 나온다는 돌산 아래 자리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울지부로 들어갔다.
   “이경은 연구원은 처음 만나지? 보면 놀랄걸.”
   “왜요?”
   “전혀 법의학자 같지 않거든. 걔는 집에 사람들 초대하고 우아하게 브런치나 즐기면서 살 것 같은 타입이야. 그 집에는 사랑도 돈도 풍족해. 모든 게 여유가 넘치지. 걔를 보면 인간은 여러 종류로 나뉜다는 걸 깨닫게 된달까.”
   희주가 빠르게 걸으며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하루에 5구의 시신을 부검하는 베테랑이자 토끼 같은 딸을 키우면서 아직 교수가 못 된 마흔 줄의 공학박사 남편 뒷바라지를 하는 부지런한 워킹맘.”
   “선배는 어떤 타입인데요?”
   희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나? 난 결혼 같은 거랑 안 어울리잖아.”
   “본인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요?”
   “한 번 갔다 왔으면 답 나온 거 아냐? 난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어. 여유도 취미도 없고. 있는 건 각종 정신병 진단서뿐이야.”
   “그리고 깡도 있잖아요. 그럼 비긴 거 아니에요?”


   법의학자 경은은 두 사람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손님을 맞이하듯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부검실의 여주인. 경은은 푸른색 수술복을 홈드레스처럼 보이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희주와 무원은 세로로 긴 철제 테이블에 놓인 벌거벗은 두 시신을 바라보았다.
   “피해자 이덕식의 사인은,”
   경은이 판사복을 벗고 초라한 중년 남자의 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누워 있는 이덕식을 먼저 가리켰다.
   “두부외상이야.”
   희주와 무원은 이덕식의 머리 쪽으로 걸어갔다. 경은은 설명을 이어 갔다.
   “망치로 수회 가량 머리를 내려친 것으로 보이고 이로 인해 뇌진탕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머리 안에 혈액이 고인 상태로 사망했어. 방어하던 왼손이 골절상을 입은 것으로 보아 범인은 집요하게 머리를 노린 게 아닌가 싶어.”
   “칩은? 트라우마 삭제술을 받은 건 확실하지?”
   “확실해. 두개골을 여는 수술을 최소 1년 내로 받은 것 같아.”
   “1년이라….”
   “부검 결과 전전두엽에서 5개의 브레인 임플란트 칩이 발견되었어. 하지만 두부 손상이 워낙 심해서 정확히 어느 부위에 삽입되었던 칩인지는 알 수 없고.”
   “피해자는 월요일 낮 12시 30분에 호텔 메이드에게 발견됐어. 사망 추정 시각은 일요일 밤 11시부터 다음 날 새벽 3시 사이.”
   무원이 수첩을 꺼내 뭔가를 확인했다.
   “두 번째 피해자인 주용훈 역시 월요일 밤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피해자 모두 한밤에 살해당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살해 추정 시각이 큰 의미가 있을까?”
   희주가 말했다.
   “있을 수 있지. 만약 동일범의 소행이라면 패턴으로 볼 수 있으니까. 한밤에 피해자를 급습해서 살해하고, 날이 밝기 전에 사라지는 거지. 그건 낮 시간 동안 피해자를 지켜봤을 가능성이 크고 피해자의 동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용의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의미야.”
   경은의 의견에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저었다.
   “하지만 사망 시간은 추정일 뿐이야. 사망 시간은 특정 용의자를 용의 선상에서 완전히 배제 시킬 수도 있고, 한 사람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어. 함부로 단정 지으면 안 돼.”
   “그래. 네 말이 맞아.”
   “두 번째 피해자는 어때?”
   “주용훈의 사인 역시 과다출혈이야. 총 22개의 자상이 왼손, 왼팔, 오른손, 복부 등에서 발견되었어. 손과 팔에 난 상처는 대부분 방어흔으로 보여. 범인이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오른손으로 범인을 저지하고 왼손으로는 칼날을 막은 거지.”
   경은은 오른손으로 가상의 범인을 막는 시늉을 하며 왼손을 내밀었다.
   “두 피해자 모두 살기 위해 엄청난 의지를 보였을 거야. 이 경우도 앞선 피해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즉사를 시키겠다는 의지보다는 본보기나 경고성 폭행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넌 어때?”
   경은의 질문에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추가로 분노 또한 느껴져. 분노가 쌓이고 쌓여서 죽은 거야.”
   “동의해. 피해자들의 상처에서 감정이 느껴져. 단순히 사이코패스가 그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잔혹하게 찌른 것과는 결이 완전히 달라.”
   “만약 동일범의 소행이라면… 또 살인을 저지를까?”
   “음…….”
   “네 직감이 궁금해.”
   “내 대답은 예스야.”
   경은의 대답에 희주는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이미 다음 희생자 물색이 끝났을지도 모르지.”
   “최악의 인간쓰레기들. 그 쓰레기들은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뭔지 모를 거야.”
   “알려고 하지도 않겠지.”
   경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인간은 참 어떤 의미에서 대단해. 서로를 죽이는 일에는 이렇게 정성을 들여 집요하게 잘하면서, 사랑에는 이 정도 열정을 안 쏟는다는 게.”


   부검실을 나와 희주와 경은은 복도에 섰다. 무원은 살해 도구인 망치와 칼에서 나온 지문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과학수사계 담당자와 통화를 할 요량으로 밖으로 나갔다.
   “애인 얘기 좀 해 봐.”
   “뭐, 좋은 사람이야. 첫 만남부터 내 밑바닥을 전부 보여 준 덕에 그거 하난 맘 편해. 내숭 떨 필요 없는 거.”
   “쉰 소리 관두고 자세히 좀 말해 봐. 어떤 남자야? 정희주가 이혼하고 처음으로 연애한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설레서 잠이 안 오더라.”
   20대 시절 첫 남자친구였던 남편과 결혼한 경은은 항상 희주의 연애 스토리에 관심이 많았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 했다. 난 두 번째가 없잖아. 그게 경은의 단골 멘트였다. 거기다 대고 희주는 너만 원하면 두 번, 세 번도 가능하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음, 물을 달라고 하면 온수, 냉수, 탄산수 중에 뭘 주면 되냐고 묻는 남자?”
   “세상에.”
   경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잡아야겠네. 범인 잡듯이 놓치지 말고 꽉 잡아. 살짝 충격적일 정도로 괜찮은데?”
   “괜찮은 거 맞아? 난 좀 어리둥절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넌 그게 문제야. 즐길 줄 몰라. 매사에 너무 진지해. 그리고 그 뒤에 뭐가 더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경은은 종종 희주에게 여가 시간에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 소설을 읽는 대신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감상을 권했다.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잘 짜인 스토리 라인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불안 심리와 강박 심리를 가라앉히고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털어내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난 형사잖아. 처음엔 뭘 노리나 싶었다니까. 근데 너도 알다시피 나 개털이잖아. 내가 개털인 건 세상이 다 알걸?”
   “의사라며. 고작 형사 월급이 탐나서 너한테 대시했겠어? 연애할 때는 형사 말고 그냥 여자만 해.”
   “그럼 내가 여자지 남자야? 너보다 가슴 사이즈 작다고 그런 식으로 무시하는 거야?”
   “남자랑 있을 때는 사건 생각하지 말란 소리야. 그날 저녁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기껏해야 레드와인이냐 화이트와인이냐 정도만 하란 말이야.”
   “솔깃하네. 세상이 한층 더 싫어졌는데. 진짜 그렇게 한 번 살아 볼까.”
   희주는 진담을 조금 섞어 대답했다.
   “그리고 취미 좀 가져. 돈 잘 버는 의사한테 너의 모든 문제를 맡기고 넌 정신 건강에 도움 되는 취미 생활을 하는 거야. 얼마나 좋아. 남편도 자식도 없으니까 너 자신한테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유부녀는 부러울 따름이다.”
   “너까지 왜 그래? 다들 세상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어. 그게 문제야. 다들 진지하게 자기 일을 좀 하라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 취미 나부랭이 만들 시간에.”
   경은의 취미는 로맨스 소설 읽기였다. 경은은 매일, 1년 내내 거의 휴가도 없이 이 서울 변두리 산 아래 위치한 건물 안에서 죽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막장 설정이 난무하는 로맨스 소설 읽기였다. 경은은 로맨스 소설 독자용 망상 필터를 낀 채 희주의 연애를 관찰했다. 거칠고 잔인한 사건 현장에서 동료애를 쌓던 파트너와 한순간 뜨거운 눈빛 교환을 하고 키스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그럴 때마다 희주는 질색했다. 전남편 정현과 그랬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희주는 한숨을 쉬었다.
   “넌 3년 전에도 그렇게 말했어.”
   경은이 대꾸했다.
   “이제는 좀 기대고 싶기도 해. 자존심 상하지만.”
   “정말 힘든가 보네.”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기댄 적 없으니까.”
   “그래서 정현 씨가 속병 좀 앓았지.”
   경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정현의 이름을 꺼냈다. 헤어진 이후에도 정현은 희주는 물론 경은에게도 믿음직한 친구였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속병? 그 사람은 날 미워했어.”
   “그만큼 널 사랑했단 거야.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자길 안 믿어 주는데, 어떤 남자가 버티니?”
   “갑자기 보고 싶네.”
   “전남편?”
   “응.”
   “지금 있는 애인한테나 집중해. 그러다 놓치지 말고.”
   “잔소리 좀 그만해.”
   “넌 일에는 진심이면서, 사람 만나는 일에는 왜 대충 대충이야?”
   “일이 문제네. 이참에 확 은퇴할까? 서른셋에 은퇴하고 뭐 할 수 있을까?”
   “장담하는데 넌 현장 못 떠나.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아직도 우리 엄마는 시신을 만지던 손으로 어떻게 딸 먹일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냐고 하지만, 부검실만큼 편한 곳도 없어. 고인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잖아. 난 그분들을 살릴 의무도 없고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바랄 일도 없지. 그분들은 내가 할 일을 끝낼 때까지 불평 없이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줘.”
   “나랑 정반대네. 자려고 누우면 피해자들이 말을 거는 것 같아. 그리고 난 변명을 하느라 바쁘지. 약한 소리가 아니라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공황도 사실은 내가 바닥을 쳤다는 신호 아닐까?”
   “너같이 의심하는 인간들이 결국 이 바닥에 남아. 오히려 뼈 묻겠다던 인간들이 못 버티고 자빠지지. 넌 나보다 훨씬 강해. 공황장애는 지나갈 거야. 그저 길고 긴 이혼소송 같은 거라고 생각해. 언젠가는 끝나는.”
   경은은 시원스레 말했다. 경은은 항상 그랬다. 복잡하고 꼬인 문제도 간단하게 진단을 내렸다.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희주는 자신이 이 형사 생활 끝에 무엇을 남길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몇 명의 범인을 잡아넣고, 후배 몇몇을 형사 구실하도록 키울 것이다. 그게 다인가.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통화를 마친 무원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뭔가 큰 굴레 안에 빠져든 느낌이었다. 무원은 건물 안에서 나오는 희주에게 말했다.
   “칼에서 지문이 나왔어요.”
   “그래? 데이터가 있다는 건 잡을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칼에서 첫 번째 피해자 이덕식의 지문이 나왔어요. 그리고 망치에서도 지문이 나왔는데.”
   돌 바위산에서 까마귀가 울고 있다. 나쁜 소식을 알리는 예고편처럼.
   “주용훈 지문이 나왔어요.”
   첫 번째 희생자를 살해한 도구에서 두 번째 희생자의 지문이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 희생자의 지문에서 첫 번째 희생자의 지문이 나왔다.
   “동일범이야.”
   희주는 확신했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모두 아는 범인이 먼저 주용훈을 만나 어떤 식으로든 망치에 지문을 묻힌 다음에 그걸로 이덕식을 살해했어. 이덕식을 죽인 다음에는 당연히 칼에 이덕식 지문을 묻혔겠지. 그리고 그걸로 주용훈을 살해했어.”
   “그 망치, 가정에서 공구 세트로 쉽게 구입하는 세트의 일부라고 했어요.”
   무원은 호텔 메이드의 말과 망치가 사라진 공구 세트를 떠올렸다.
   “주용훈의 집에서 미리 가져온 것일지도 몰라요. 만약 이 가설이 맞는다면, 주용훈의 집에 범인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어요.”
   무원은 희주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희주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 그리고 확실해졌어. 이덕식 사망과 주용훈 사망은 한 사건이야. 두 사람이 모두 연관되어 있는 어떤 사건, 사람을 찾아야 해. 거기에 해답이 있을 거야.”
   “선배, 진정해요.”
   무원은 숨을 가쁘게 쉬는 희주에게 다가갔다.
   “그게 범인이야. 바로 그게 범인이라고. 다시 처음부터 살펴봐야 해. 살해 동기를 찾아야 해. 내가 뭘 놓친 걸까?”
   “알겠으니까 내 손 잡아요. 아직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어요. 선배, 지금 너무 흥분했어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범인은… 두 사람을 다 알아.”
   거기까지 말하고 희주는 쓰러졌다.


   09 마음은 뇌에 있다.


   “선배.”
   “….”
   “괜찮아요?”
   희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넘어질 때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골반 뼈가 뻐근하다. 등과 팔에서 느껴지는 온기. 아니 열기인가.
   “…너 지금 뭐 해?”
   희주는 계단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채 무원의 품에 안겨 있는 상태였다.
   “선배, 기절했어요. 순식간에. 기억 안 나요?”
   범인에 대해 미친 듯이 떠들다가 어느 순간 블랙아웃이 찾아왔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팔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이 막혔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아 가슴팍에 손을 갖다 댔는데. 그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머니에 비상약이 있다는 게 생각나서 입에 넣었어요.”
   희주는 몸을 일으켰다. 멀리서 보면 열정적인 연인들이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제 됐어.”
   무원도 어색하게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서 사람이 기절하는 거 처음 봤어요.”
   “별로 좋은 그림은 아니었겠지.”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예요? 당장 병원 가요.”
   희주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천천히 숨 쉬면 나아져. 약 먹였다며. 10분도 안 걸려.”
   “집에 데려다줄게요. 혼자 있는 게 불안하면 제가 같이,”
   “오버 하지 마. 괜찮으니까 넌 들어가서 일해. 뭐든 찾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
   희주는 휴대폰을 꺼내 주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무원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지금 집으로 가도 돼요?”
   희주는 주웅에게 물었다. 오늘 주웅은 진료가 없는 날이다.
   “지금 잠깐 호흡이 가빠져서 쉬는 중인데, 안정되는 대로 집으로 갈게요.”
   희주는 눈을 감았다. 무원이 여전히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잊은 채 자신에게 와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든 하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 말하라는 주웅의 말에서 묘한 관능적인 기분을 느꼈다.


   “지금 몇 시야?”
   희주가 괴로워하며 물었다.
   “6시야. 30분만 더 이렇게 있자.”
   주웅이 웅얼거렸다.
   희주는 주웅의 어깨뼈 사이 포근한 공간에 얼굴을 묻고서 지난밤에 꾼 꿈을 떠올렸다.
   “내가 처넣은 그 새끼가 가석방돼서 총을 내 입에 바싹 들이댔어. 총부리가 내 이에 부딪혔는데 실수로 젓가락을 깨물었을 때처럼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어. 그 맛이 지금도 느껴져. 젠장. 다리 근육도 아프고 등도 아프고. 어제 넘어져서 그런가.”
   어젯밤,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다. 둘 사이에 있던 몇 겹의 물리적인 장애물은 물론 체면, 망설임 같은 것을 모두 벗어던졌다.
   주웅이 희주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요즘 너무 몸을 혹사 시키고 있어. 팀장한테 당장 전화할까? 내 애인을 못살게 굴지 말라고?”
   “날 가만 놔두지 않는 건 그 인간이 아니라, 계속 일어나는 사건이야.”
   주웅은 희주의 오른쪽 눈썹 위 상처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상처받은 한 마리의 짐승 같은 여자. 그 상처 때문에 겁을 먹는 대신 분노로 활활 타버리기 직전인 위험한 여자. 이런 여자한테 미친 듯이 끌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마음을 조금만 편히 가져. 어제와 같은 일이 또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어. 위험한 순간에 당신이 발작을 할까 봐 난 진료 중에도 불안하다고. 환자들한테 미안할 지경이야.”
   “난 올림픽에 단독으로 출전하는 선수들이 좋아. 수영이나 마라톤 같은 종목에 혼자 나가는 선수들. 그들이 매일 새벽 4시부터 자정까지 속옷에 지릴 때까지 연습했다는 이야기만큼 날 감동 시키는 건 없어. 꼭 메달을 따겠다는 투지와 결의로 가득 차서 비인간적인 훈련량을 소화하잖아. 죽음도 거스르면서 싸우는 선수들의 경쟁, 순전히 이기기 위한 게임에 내던져진 그 사람들을 상상하면 동질감이 느껴지면서 전율이 일어.”
   주웅은 몸을 일으켰다. 잠은 완전히 깼다.
   “하지만 자기는 단독 출전한 선수가 아니야. 옆에는 파트너가 있고 위로는 상사가 있고 퇴근하면 내가 있어. 그걸 잊지 마.”
   희주는 주웅이 침실을 나간 다음에도 혼자 침대에 누워 방금 전에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반박하기 힘들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빴다. 뭐라고 다시 반격을 해 볼까. 희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침실을 나섰지만 금세 전투력을 상실했다. 식탁 의자에 희주의 청바지와 티셔츠가 깨끗하게 세탁된 채 건조까지 완벽하게 된 상태로 걸려 있었다.
   “바로 출근할 것 같아서 세탁해 놨어. 커피는 여기 있고, 렌지에 야채죽 넣어 놨으니까 데워 먹고 출근해.”
   주웅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흰색과 연한 하늘색이 교차하는 산뜻한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소매를 자연스럽게 말아 올렸다.
   “어제 우리 둘 다 엄청 마신 것 같은데. 난 그냥 대충 씻고 해장국이나 한 그릇 먹은 다음 출근할 줄 알았지, 이렇게 완벽한 아침이 준비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
   주웅은 웃으면서 현관 앞에 고정적으로 두는 출근 가방을 들었다.
   “그 말, 칭찬이지?”
   “물론.”


   무원은 거대한 계단 앞에 섰다. 마치 거인국에 불시착한 소인이 된 기분이다.
   뇌 공학 연구센터 ‘빅’은 3층짜리 건물만 한 계단 위에다가 투명한 얼음처럼 네모반듯한 정육면체 유리 건물을 씌운 형상이었다. 만약 4층과 5층이 없었다면 거대한 계단은 하늘과 연결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흡사 한번에 한 개의 층을 내려갈 수 있는 거인을 위해 설계된 것 같은 계단은, 유리창을 뚫고 무원이 서 있는 검은 아스팔트 도로까지 이어져 있다.
   건물 앞면은 전면이 유리로 마감된 덕분에 건물 안의 계단 구조물이 기괴한 설치미술 작품처럼 온전히 드러났다. 하지만 건물 뒷면은 전부 막혀 있었다. 외부로 향하는 작은 창이 나 있지만,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앞면은 모든 걸 보여 주고 뒷면은 완벽히 막은 극단적인 구조. 이 기묘한 계단이 ‘빅’의 상징이었다.
   희주가 무원에게 다가왔다.
   “음,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하네. 굳이 이렇게 건물을 지은 사람의 뇌 구조가 궁금해지는데?”
   “아이들이 레고로 만든 집에서 영감을 얻었대요.”
   “그게 무슨 뜻이야?”
   “아이들은 세 개의 블록만 있으면 계단을 만들어서 원하는 곳 어디에나 붙이잖아요. 미끄럼틀 아래도 붙이고, 집을 만든 다음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기도 하고. 마치 계단만 있으면 어디든 올라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무원의 말에 희주는 거인의 계단을 다시금 응시했다.
   “아이에게 계단은 아직 어른처럼 이동할 수 없는 자신들을 위한 보조 도구 같은 거죠. 자전거에 달린 보조 바퀴처럼. 그래서 집을 짓고 자동차를 만든 다음 계단을 만들어 붙이는 것으로 아직 미숙한 자신과 자신의 친구를 본능적으로 도우려 해요.”
   “그럴듯하네.”
   “브레인 임플란트 칩이 표방하는 것도 그런 의미겠죠. 혼자는 어딘가에 올라설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보조 도구랄까요.”
   “그런 좋은 말로 포장해봤자 난 절대 수술 같은 거 안 해.”
   “선배 애인은 선배랑 생각이 다를 것 같은데.”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무원은 대답 대신 희주를 바라보았다.
   “어제랑 같은 옷이네요.”
   “….”
   “근데 어제는 안 나던 좋은 냄새가 나네요.”
   희주는 재빨리 티셔츠 냄새를 맡았다.
   “너도 암튼 정상은 아니야.”
   “혹시 변태라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거절할게요. 전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강한 성인 남성이니까.”
   “집어치워.”
   고양이 한 마리가 희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삼색 고양이가 회색 계단에 앉아서 희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라보는 눈이 어딘가 좀 이상하다. 그리고 뭐가 이상한지 알아챘다. 고양이의 한쪽 눈이 없다. 고양이는 외눈으로 낯선 방문객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정말로 고양이를 키워 볼까.”
   “네?”
   “농담이야.”


   희주는 안내 데스크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신분증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1시에 뵙기로 한 정희주 경위입니다.”
   하지혁은 신분증을 확인하고 다시 희주에게 내밀었다.
   “저희 연구소에는 따로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이 없어요.”
   “그럼 그쪽도….”
   “네. 저도 남의 머리통을 열고 기억을 지우는 사람 중 하나죠.”
   “아.”
   “밖에서 계단 보셨죠?”
   하지혁은 인사와 본인 소개를 건너뛰고 바로 계단 이야기를 시작했다. 애초에 그는 안에서 희주와 무원이 계단 앞에 서 있는 것부터 전부 관찰한 것 같았다.
   “밖에서 보이는 계단은 일종의 장식장이에요. 실제로는 올라갈 수 없거든요. 실제 계단은 밖에서 보이는 계단의 뒤편에 존재합니다. 이따 2층으로 올라가실 때 확인해 보세요.”
   “아, 그렇군요.”
   하지혁은 낡은 청바지에 물 빠진 티셔츠 차림이었다. 유행 때문에 일부러 찢거나 찢어진 걸 산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낡아서 찢어진 청바지 같다. 그리고 검정색 티셔츠 앞면에는 Q.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라고 적혀 있고 이름 아래에 ‘chief researcher’ 라고 직함이 적힌 명찰을 달고 있다. 점심에 햄버거를 먹었는지 티셔츠 안에 옷걸이가 들었나 싶게 헐렁한 가슴팍에 양상추 조각이 붙어 있었다. 희주는 하지혁이 입고 있는 청바지가 아마도 학생 때부터 주구장창 입던 거라는데 이따 무원한테 내기라도 걸어 볼까 생각했다.
   “뒷면에는 뭐라고 적혔는지 궁금하시죠?”
   하지혁이 붙임성 있게 말했다. 침묵을 싫어하는 타입인 건지 아니면 그냥 말이 많은 건지 알 수 없지만, 답이 궁금했다. 하지혁이 뒤로 돌았다. 티셔츠 뒷면에는 앞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었다. A.뇌 안에!
   “그럼 그쪽도 의사인가요?”
   신경공학을 전공한 하지혁은 MIT에서 세하를 만났다. 그는 트라우마 삭제에 대한 세하의 굳은 믿음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그녀의 뛰어난 능력에 매료되어 빅의 채용 공고에 지원했다. 세하는 오랜 인터뷰 끝에 그를 빅의 유일한 연구원으로 채용했다.
   “전 신경공학 박사고 빅의 수석연구원입니다. 빅이 시작할 때부터 있었죠. 뭐든지 물어보세요. 손님 접대는 제 담당이거든요.”
   “신경공학이라는 게 대체 뭐에요? 신경은 의사들 소관이고 공학은 공학자들 소관 같은데 그게 왜 같이 붙어 있는 거죠?”
   하지혁은 희주의 다소 무례한 질문에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생체 신경 신호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추출해서 뇌 기능을 향상 시키는 학문이거든요. 뇌 질환 치유가 주요 목적이지만 인간의 뇌를 기본 세팅된 것보다 더 낫게 만드는 거죠. 기억력을 좋게 만든다든지, 생각만으로 로봇 팔을 움직인다든지, 수학 문제를 더 잘 풀게 만든다든지.”
   “기억을 지운다든지?”
   “빙고!”
   하지혁은 싱긋 웃고는 대답을 이어갔다.
   “전 15살 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가출을 한 다음에 혼자 월세방을 얻어 살다가 보름 만에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절 상담하던 소아청소년 정신과 의사가 사춘기 소년의 뇌는 비정상이라는 말을 듣고 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어그레시브한 청소년기를 보내셨군요.”
   “그런 셈이죠. 어떻게 봐도 평범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말라깽이였죠. 그전까지는 전 제 머리통 안에 뭐가 있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어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라는 인간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 뇌에 대해 공부하다가 여기까지 온 셈입니다.”
   희주는 하지혁이 마음에 들었다. 노인이 되어서도 소년 같을 남자였다. 하지혁은 안내 데스크 아래 모니터를 보고 희주와 무원에게 말했다.
   “2층으로 올라가세요. 이제 진짜 계단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진짜 계단은 밖에서 보이는 회색 계단 속에 숨겨져 있었다. 계단을 따라 자연스럽게 올라가면서 왼편 통로를 따라가면 아까 밖에서 본 전면 유리 쪽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였다. 밖에서 보이는 부분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밝고 오픈된 공간 뒤에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희주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분이 약간 이상해.”
   무원은 고개를 약간 숙여 희주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왜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약간 불편한 기분이 들어. 마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돼?”
   무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희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밖에서 보이는 계단이 타인 앞에서의 나라면, 지금 여기 이 숨겨진 계단은 내면으로 향하는 통로 같아요.”


   여자는 계단을 올라오는 희주와 무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줄곧 같은 자리에서 보고 있었던 같은 모습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세하입니다.”
   170센티미터인 희주의 눈높이에서 10센티미터 정도 아래에 있는 여자는 크림색 반소매 원피스를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형사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치 화장을 하지 않은 것처럼 정교하게 메이크업을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영선수처럼 짧은 쇼트헤어에 작은 귀 때문에 서른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더 어리게 느껴졌다. 명품 브랜드 원피스 대신 수수한 원피스를 입으면 이제 막 갓 입학한 대학생처럼 보일 것이다. 박세하는 수풀 속에 숨은 작은 새처럼 보였다. 실제로 상담실 안에는 수풀만큼이나 우거진 커다란 화분이 놓여 있었다. 수사 협조를 요청하러 온 게 아니라면 마냥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저희가 여기 온 이유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다면 멀리 돌아갈 필요가 없겠네요.”
   “형사님에게도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으신가요?”
   희주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네?”
   “생각만 해도 미쳐 버릴 것 같은, 문득 아무 때고 떠올라 날 집어삼키는 그런 기억 같은 것 말입니다.”
   땀방울이 굴러 희주의 오른쪽 눈썹 위 흉터에 맺혔다. 발작 전 식은땀일까. 희주는 순간 긴장했지만 가까스로 대꾸했다.
   “제가 필요한 건 피해자의 기억이지, 저에 대한 상담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아무것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네?”
   “그만 돌아가 주세요.”


   10 지우고 싶은 기억


   흥분을 하자 숨이 가빠졌다. 희주의 가슴팍이 눈에 띄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선배, 괜찮아요?”
   “난 괜찮아, 난 그냥 말하는 중이야. 난 그냥….”
   “숨 제대로 쉬고 있어요? 약 챙겨 왔어요?”
   희주는 자신의 팔을 잡으려는 무원의 손을 피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버려 둬.”
   “그게 아니라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그래요. 식은땀도 너무 많이 흘리고.”
   희주는 무원의 말을 듣기 전까지 자신이 발작 직전까지 왔다는 걸 전혀 몰랐다. 그저 깊고 푸른 바다처럼 차가운 눈의 저 여자를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무력감, 범인에게 농락당했다는 자괴감, 그리고 분노. 3개월 전 희주의 심장을 주먹으로 무참히 가격한 남자. 그리고 진짜로 그 주먹에 맞은 또 다른 존재, 작고 연약한 아기.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심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세하가 동요하지 않고 입을 뗐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시는 분들이 있죠. 그 어떤 증거도 목격자도 없는 상황에서도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전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그분들이 포기했으면 영원히 묻혔을 테니까요.”
   희주는 숨을 고르며 세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아주 작은 단서가 사건을 해결하는 트리거가 되죠. 처음부터 거기 존재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아주 사소한 단서. 그런 것들이 형사의 눈에 발견되어 사건 전체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도 하니까요.”
   “…그러니까 우릴 도와줘요.”
   희주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피해자에 대한 정보는 뭐든 좋아요. 그게 뭐든 난 절대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이래 봬도 난 꽤 유능한 형사거든요.”
   “경위님의 능력을 의심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겠죠.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할 수도 있고요. 게다가 지금 그런 상태로는 경위님이 먼저 나가떨어질 수도 있을 테고요. 그러면 여느 다른 사건들처럼 캐비닛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겠죠.”
   “내가 못 하면 이 친구가, 이 친구가 못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하게 만들 거예요. 난 절대 포기 안 해요.”
   희주는 창밖을 내다보는 세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외눈박이 고양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왠지 슬퍼 보였다. 사람들의 나쁜 기억을 너무 많이 알아서일까. 한 사람의 가장 나쁜 최후를 매일 보고 사는 형사인 자신과 그녀의 내면이 닮았을지도 모른다. 분노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는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발작 직전의 자신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저절로 진정되도록 기다려 준 건지.
   “밖에 고양이는 여기서 키우시는 건가요?”
   희주는 그제야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인체의 곡선에 맞게 설계된 의자에서 극도의 안락함이 느껴졌다. 희주는 의자에 몸을 맡겼다.
   “이런저런 사연을 지닌 고양이들이죠.”
   “연구 시설의 고양이는 대부분 실험용 아닌가요?”
   무원이 물었다.
   “물론 그렇죠. 고양이들은 넘버링이 되어 순서에 따라 실험에 사용되고 절차에 따라 안락사가 됩니다. 그것이 실험용 고양이의 운명이죠.”
   무원의 거북함을 눈치챈 세하가 덧붙였다.
   “저희 연구소에서는 동물실험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타 연구 기관에서 실험용으로 사용되었던 폐기 직전의 고양이들을 데려와서 행복한 집고양이의 기억을 브레인 임플란트 칩에 심어 뇌에 삽입했습니다. 여기 들어오시기 전에 눈이 하나뿐인 아이를 보셨나요?”
   “네.”
   “그 아이는 제가 직접 구조한 아이예요. 도로에서 다리가 부러지고 눈을 다친 채 누워 있던 아이인데, 그 아이에게도 좋은 기억을 심어 주었죠.”
   희주는 세하가 자신들을 당장 쫓아내지 않은 것을 긍정적인 신호로 여겼다.
   “최근 빅에서 트라우마 삭제술을 받은 두 남성이 살해당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둘 다 법조계 출신이라는 것과 이곳에서 기억을 지웠다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형사님한테 했던 질문에 대한 답, 들을 수 있을까요?”
   “네?”
   희주는 세하가 집요하게 답을 요구하는 목적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지우고 싶은 기억… 말인가요?”
   “네.”
   “제 대답이 중요한가요?”
   “형사님은 지금 여기 피해자들이 지운 트라우마 속에서 범인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곳에 오셨죠. 그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형사님에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을 수도 있고, 운 좋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있다면, 그걸 누가 알면 어떨까요?”
   세하는 차분하게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피해자들의 기억과 지금 일어난 사건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확신하시나요? 만약 결과적으로 관계가 없다는 게 드러난다면, 제 환자는 죽고 나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스스로 변명도 보호도 할 수 없으니까요. 감추고 싶은 비밀이 형사님 때문에 세상에 드러나서 남은 가족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면, 돌아가신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무원은 긴장한 표정으로 희주를 바라보았다. 희주의 반응이 궁금했다. 폭발 직전의 불같은 정희주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녹일 수 없는 얼음 같은 박세하. 극과 극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묘하게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네요.”
   희주는 깔끔하게 패배 선언을 했다.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네요. 인정해요. 아직까지 용의자에 대해 뚜렷하게 알아낸 게 없어요. 밤낮없이 피해자 주변을 캐고 있지만 나온 게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돌아가지 않으실 거죠?”
   “네, 절대요.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요. 또다시 살인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 절 미치게 만들거든요.”
   희주는 얼굴을 찌푸리며 안락한 의자에서 일어났다.
   “범인은 또다시 살인을 저지를 거예요. 절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예요.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낌이 그래요. 형사한테 느낌, 촉은 또 다른 파트너죠. 물론 절 망칠 수도 있는 위험한 파트너이기도 하고요.”
   “흥미로운 표현이네요.”
   “수사 중이라 더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현장에서 발견된 살해 흉기에서 두 피해자의 지문이 나왔어요. 마치 서로 죽인 것처럼. 하지만 절대 아니죠. 먼저 살해당한 피해자의 지문이 두 번째 피해자를 살해한 칼에서 나왔으니까.”
   “이런 경우가 흔한가요?”
   “아뇨. 이런 사건은 처음이에요. 아주 제대로 조롱당했죠. 범인은 피해자들을 농락하고 자신을 쫓을 형사도 농락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범인이 살인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시는 거군요.”
   “정확해요.”
   세하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또다시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희주의 확신이 그녀를 흔들었다. 끔찍한 사건 때문에 불행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피해자와 가족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브레인 임플란트 칩을 개발했다. 브레인 임플란트 칩은 이미 생긴 피해자를 도울 수는 있지만, 그 전에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순 없다. 그건 의사의 몫이 아니다. 형사의 일이다.
   “좋아요.”
   희주는 세하를 바라보았다.
   “두 피해자에 대한 상담 기록 일부를 오픈하겠습니다. 물론 비공식적으로요.”
   “여기서 들은 이야기들은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삭제한 기억은 여전히 기밀입니다.”
   “네. 그분들의 평소 심리나 행적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분명 어딘가 단서가 있겠죠. 그분들의 내면 전체를 형사가 알 필요는 없습니다. 알 수도 없고요. 형사가 알아야 할 건 오히려 범인의 내면이죠.”


   세 사람은 진료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진료실은 더 안쪽 깊은 곳에 있었다. 그곳에는 외과적인 수술을 위한 최첨단 수술실과 회복을 위한 1인실이 있었다. 희주는 호텔 스위트룸을 방불케 하는 병실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세하는 이덕식과 주용훈의 상담 파일을 불러왔다. 모든 상담 기록은 암호화된 파일에 저장되어 있다.
   “변호사님은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절 만나러 온 계기도 일주일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였습니다.”
   “일주일이요?”
   “네.”
   “일주일 동안 사람이 잠을 못 자면 어떻게 되나요?”
   “변호사님의 경우는 나흘째 되는 날 자택에서 환각을 목격했습니다.”
   “어떤 환각이요?”
   “처음에는 거미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침대, 이불, 얼굴 위에 거미가 가득하고, 집 안은 거미줄에 덮여 있어 나갈 수가 없다고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정상적인 성인 남성이고 저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며 이전에 정신 병력도 없는 상태였어요.”
   “뇌가 강제로 그렇게 만든 겁니다. 뇌가 수면이 필요한 상황이 오자 깨어 있는 상태에서 렘수면 상태를 일으킨 거죠. 변호사님은 일주일째 되는 날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토끼와 고양이가 집 안에서 뛰어다닌다며 살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게 전화를 하는 데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고 나중에 말씀하시더군요. 빅 명함을 찾아 휴대폰을 들고 숫자를 누르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휴대폰이 손에서 미끄러지고 숫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요.”
   “피해자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어요. 좋은 집, 좋은 차, 변호사라는 존경받는 직업.”
   “그런 걸로 한 사람을 다 알긴 힘들죠.”
   “피해자의 전화를 받고 어떻게 하셨나요?”
   “저희 간호사가 댁으로 찾아가서 모셔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트러블은 없었나요?”
   “심하게 발작하셨습니다. 그땐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죠. 간호사 얼굴이 벌레껍질처럼 보였다고 했으니까요.”
   “첫 번째 피해자는 어땠나요?”
   희주의 질문에 세하는 모니터에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상담 중인 이덕식을 녹화한 영상이었다. 이덕식은 의자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분석을 위해 모든 상담 과정은 환자 동의하에 녹화를 진행합니다.”
   영상 하단에 녹화일이 있었다. 2022-08-12. 이덕식은 울고 있었다. 처음에는 흐느끼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더니 얼굴이 흠뻑 젖었는데도 닦지도 않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웅얼거렸다. 세하는 사운드 볼륨을 올렸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전 완전히 무너졌어요. 완전히요. 아내한테는 말할 수 없어요. 죽고 싶어요. 이렇게는 살 수 없어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에 진절머리가 나요. 제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럽고 짐스럽습니다. 세상 누구도 날 도울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이 너무나 두렵고 숨고만 싶습니다….”
   울음 섞인 고백이 영상에서 흘러 나왔다.
   “저 이야기가 전부 트라우마 삭제를 받기 전이라는 말인가요?”
   세하는 영상을 중지하고 모니터를 껐다. 검은 화면에 세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그렇습니다. 일곱 번의 상담 중 가장 고통을 호소했던 날의 영상입니다.”
   “저게 다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거죠?”
   세하는 희주의 거듭된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이해가 안 되네요. 피해자는 판사 출신에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어요. 주변인들 증언도 공통점이죠. 자신에 대해 조금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이 있었어요. 인간미나 공감 능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신경과학자 폴 매클린은 이성적인 뇌와 정서적인 뇌의 관계가 다루기 힘든 말을 타는 것과 거의 흡사하다고 비유했습니다. 날씨가 평온하고 가는 길이 고르면 말을 타는 사람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죠. 그런데 어디선가 낯선 존재가 튀어나오거나 예기치 못한 장애물을 발견해서 말이 놀라면 어떻게 될까요?”
   희주는 난폭한 말 위에 올라탄 자신을 상상했다.
   “말은 소스라치게 놀라 날뜁니다. 그러면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은 목숨을 걸고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말에 매달리죠. 즉 극심한 분노, 고통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성적인 뇌의 목소리에 귀를 닫습니다. 피해자는 이성적으로는 난 판사 출신이고 엘리트이고 모든 걸 다 가졌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모든 사람을 의심하게 되고 분노를 느끼게 된 이상, 이성적인 판단은 아무런 힘이 없게 됩니다.”
   희주와 무원은 잠시 침묵했다. 한 인간의 겉과 속을 모두 본 기분은 착잡했다.
   “그 기억 삭제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복잡한가요?”
   “MRI를 이용해 뇌를 스캐닝해서 삭제하고 싶은 기억이나 트라우마가 저장된 뇌 부위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두개골을 잘라 칩을 삽입하고 해당 기억을 활성화 시킨 다음 전기 자극을 주어 삭제합니다.”
   “간단하네요. 제 예상보다 더 간단해서 당황스럽네요.”
   “실은 간단하지 않죠. 뇌수술이 동반되니까요.”
   “피해자들은 여기서 그 수술을 받고 만족했나요?”
   “물론이에요.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수술 이후에는 1년 동안 환자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부작용이나 이상 반응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살해당했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누군가 그들을 죽였습니다.”
   희주는 흰 벽에 걸린 액자 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액자 안 흰 바탕에는 검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읽을 수 없었다. 아주 오래전 인류의 조언이나 전언 같아 보였다.
   “이건 뭐라고 적힌 건가요?”
   “영어로 하면 Arise, shine,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정도의 의미랄까요. 구약성경 중 이사야 복음서의 한 구절입니다. 종교적인 해석은 따로 있지만 저는 저 구절을 볼 때마다 영혼의 빛을 잃지 않고 아름답게 살아온 한 인간이 고귀하고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상상합니다. 그렇게 죽기란 어려우니까요.”


   세하는 직접 희주와 무원을 배웅했다. 그녀는 잠시 회색 계단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경위님에 대해 조금 조사를 했습니다. 그저 기사 정도를 검색한 수준입니다만, 아까 경위님이 발작 직전까지 가는 걸 보면서 경위님이 3개월 전에 경험한 그 일을 의사로서 연관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기억을 삭제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눈이 하나뿐인 고양이가 희주에게 다가와 주위를 맴돌았다. 가까이 보니 뒷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분명 사람에 의해 눈과 다리를 잃은 그 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사람에게 다가왔다. 고양이는 희주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밤이 되면 좀 힘들어요. 제가 사는 집 전체가 흔들리면서 마음의 서랍 속에서 칼들이 덜컹대는 기분이에요. 칼의 뾰족한 날이 날 찌르고 또 찌르고… 그 칼에 상처를 입는 것 같아요. 지난 일이고 약도 계속 먹고 있는데 왜 계속 그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상처는 그때만 입는 게 아니라 매번 입기 때문 아닐까요?”
   “맞아요. 저렇게 다친 고양이를 보면 아기가 떠오르고 아기를 다치게 한 그놈이 떠오르고…. 그놈은 지금 교도소 안에서 나가서 새 삶을 살겠다고 기술을 배우고 있어요. 정작 놈이 용서를 빌어야 할 아기는 죽었는데. 그래도 머리통에 이상한 걸 박는 건 싫어요.”
   “뇌에 브레인 칩을 삽입하는 겁니다.”
   세하는 희주의 말을 부드럽게 정정했다.
   “앞으로는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실 겁니다. 무릎 연골이 닳은 노인이 인공 연골을 넣고 망가진 치아 대신 임플란트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누가 한 말인지는 잊었지만, 변화는 일어나고야 말죠. 하지만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어요. 두 명의 피해자 모두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뇌에서 그 기억을 지우겠다고.”
   “전 아닙니다.”
   “그럼 일단 그 분노를 간직하세요.”
   희주는 세하를 응시했다.
   “상처받은 사람한테 복수심만큼 잘 드는 처방도 없으니까요.”
   세하와의 만남은 거기까지였다. 희주와 무원은 건물 입구 벽에 걸린 게시판에 뭔가를 붙이고 있는 하지혁을 발견했다. ‘한국 뇌 공학 협회’가 주최하는 뇌 과학 심포지엄 홍보 포스터였다. 행사는 내일 오전에 치러질 예정이었다. 특별 강연자 목록에 낯익은 이름이 있었다. 전 경찰서장이자 ‘경찰스트레스장애학회’ 회장 최준석. 그리고 최근 미국 시장을 제패한 연예계 거물이자 국내 최대의 연예기획사 ‘스타리온’의 대표 강희건. 뿐만 아니라 유수의 대기업 회장님들과 셀러브리티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그야말로 돈 냄새가 물씬 나는, 그들만의 잔치일 게 분명한 이런 행사에 박세하 또한 특별 강연자로 이름을 올렸다.
   “영생?”
   포스터를 읽던 무원이 말했다.
   “영원히 사는 거 어때? 여기 쓰여 있는 것처럼 영원히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불멸의 인간이 된다면 말이야.”
   희주의 질문에 무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별론데요? 오래 살면 오래 일해야죠. 이 사람들은 일 안 해도 먹고 살 만한 분들이라 오래 살고 싶나 보지만, 전 아니거든요.”


   11 브레인 임플란트 칩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마흔 살의 C는 7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녀는 퇴근 후 어린이집에 들려 다섯 살배기 딸을 태우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차에서 계속 경보음이 삑삑 울렸다. 딸이 앉은 보조석 안전벨트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걸 알리는 알람이었다. 그날따라 딸이 뒷좌석 카시트에 앉지 않겠다며 심하게 떼를 써서 할 수 없이 보조석에 앉혔다.
   C는 경보음이 거슬려 딸의 안전벨트를 다시 채우기 위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는 것을 보지 못했고, 오른쪽에서 돌진해 오던 화물차와 충돌했다. 그 사고로 딸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C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도중 배 속에 있던 8개월 된 둘째 아이도 잃었다.
   이후 C는 변했다. 늘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었던 그녀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말을 잃고 어두워졌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더는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죽은 딸아이와 배 속의 아이 생각이 났다. 그녀는 학교 행정직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날의 기억을 촉발하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매일 다퉜다. ‘당신’이 그날 회식이 있다며 평소처럼 어린이집으로 딸을 데리러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이 돈을 많이 벌지 못해서 내가 만삭임에도 일을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딸아이가 원할 때마다 보조석에 앉혔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비난했다. 그녀는 스스로 뱉어 놓고도 놀랄 만한 말을 남편에게 퍼부었다.
   그러던 그녀는 ‘빅’을 찾아냈다. 자신처럼 아이를 잃은 부모들과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주고받던 중 원하는 기억을 삭제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걸 알고 수소문 끝에 빅을 찾아왔다. 그녀는 세하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을 삭제하기로 결심했다.
   “지금부터 한 시간 정도 혹은 그 이상 누워 계셔야 합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세요?”
   “….”
   “꼭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대로 돌아가셔도 돼요. 그리고 언제든지 다시 오셔도 상관없습니다.”
   세하는 C에게 물었다. C는 과거에 겪은 일을 기억할 때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하는지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촬영하기 위해 희고 커다란 관 같은 형태의 뇌 스캐너 속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누운 채 고개를 저었다.
   “남편도 저도 너무… 오래 참았어요. 오늘 꼭 끝내고 싶어요.”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겠지만 지금 이 과정은 지우고 싶은 기억이 저장된 곳을 찾기 위한 과정입니다.”
   “네.”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도록 이걸 작성했습니다.”
   세하는 A4 1장 분량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저와 상담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혁 수석이 작성한 대본입니다. 대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날 일을 자세히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C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았다.
   하지혁이 만든 ‘대본’은 7년 전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C가 그날의 특정한 장면과 소리, 느낌을 떠올리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C의 ‘느낌’이다. 시간 순서대로 정확히 타임라인을 만드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트라우마는 영화는 한 장면처럼 기억되고, 기억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마음속으로 한 번만 읽어 보세요.”
   “…지금요?”
   “네. 검사가 시작되면 스캐너 안에서 이 대본의 오디오 파일이 재생될 겁니다. 지금은 그저 이 종이 한 장에 적힌 일이 남의 일이다 생각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C는 떨림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하는 스캐너 바깥에서 모니터로 뇌 스캔 반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오디오 파일이 재생되었다. 전문 성우에게 의뢰해서 가능한 뉴스 기사를 읽듯 건조하게 녹음된 그날의 기억이었다. 재생이 시작되자마자, C의 심장박동이 급격히 높아지고 혈압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대본을 듣는 것만으로 7년 전 사고 당일 느꼈던 공포심과 극도의 불안한 감정이 되살아 난 것이었다. 세하는 주의 깊게 C를 관찰했다. 상황에 따라 당장 스캔을 멈춰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큰딸이 떼를 쓸수록 배 속의 둘째 아이의 태동이 심해집니다. 당신은 배 속의 아이와 땅바닥에 드러누운 딸을 동시에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당신은 딸의 바람대로 보조석에 앉도록 허락합니다.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까 짜증을 심하게 낸 탓에 아랫배가 당기지만 10분이면 집에 도착하기 때문에 애써 그 기분을 잊으려 합니다. 딸은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부르고 오늘 어린이집에서 그린 그림을 당신에게 보여 주려 합니다. 그런데 안전벨트가 채워지지 않았다는 알림이 울립니다. 당신은 보조석에 앉은 딸의 안전벨트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걸 알아챕니다. 당신은 가까스로 팔을 뻗으며 고개를 딸 쪽으로 잠시 돌립니다. 그리고 몇 초 후 오른쪽에서 달려오던 차가 당신의 차를 들이받습니다…”
   모니터 속 C의 뇌 우반구에서 반딧불이 같은 빛이 활성화되었다. 우반구는 직관, 감정, 시각, 공간, 촉각을 관장하며, 그 모든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합쳐진 ‘기억’이 저장된 곳이다. 세하는 환자들의 뇌 활동을 일종의 지도로 만들어 트라우마가 저장된 위치를 파악했다. 바로 그 자리에 지름 17.2밀리미터 두께 1.95밀리미터 칩을 ‘임플란트’했다.
   이번에는 뇌 우측 중심부에서 조금 아랫부분, 정서적 뇌인 변연계가 눈에 띄게 활성화되었다. 강렬한 감정이 변연계를 활성화 시키고, 특히 그 속의 편도체를 활성화 시킨 것이다. 편도체는 인간 뇌에 있는 위험 감지 경보기다. C는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경보기를 울린 것이다.
   C는 지금 뇌 스캐너 안에 누워 있지만, 그녀의 바이탈은 마치 싸우고 도망치기 직전의 사람과 같은 심장 박동수와 혈압, 산소 흡입량을 보였다. 7년이라는 세월이 무상하게도 말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를 피 흘리게 하는 칼이다. 세하는 자신의 일이 깊숙이 박힌 칼을 빼내어 치유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C는 기억을 삭제한 이후에도 매주 빅을 방문했다. 상담은 환자가 원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기억을 삭제했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금 그날 일이 떠오를 수도 있기 때문에 꾸준한 추적과 관찰이 필요했다.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마치 뉴스로 들은 ‘타인’의 일처럼 느껴져야 했다.
   기억 삭제를 원하는 사람은 수술 전에 그 기억과 관련된 사진이나 문서와 같은 물리적인 자료들을 모두 정리해야 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알려서 그들의 협력을 요청했다. 기억 삭제가 1년 사이 엄청난 속도로 대중들에게 하나의 트렌드처럼 퍼지면서 기억을 삭제한 사람을 올바른 방법에 대한 연구와 조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기억 삭제의 과정과 이후 적응이 어려워 이민을 택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 C는 세하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내일 예정된 상담을 취소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왜냐는 세하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했다.
   “모처럼 여동생이 같이 여행을 가자고 해서요.”
   “그러셨군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네. 예쁜 조카들을 본 지도 너무 오래된 것 같고. 저도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아서 가겠다고 했어요. 상담을 미뤄도 될까요?”
   세하는 당연히 괜찮다고 답변했다.
   그 주가 지나고 다음 주에도 C는 더 이상 상담 예약을 위해 전화하지 않았다. C는 이제 과거를 벗어났다. 그리고 현재의 자신을 위해 살게 되었다. 이것이 세하가 타인의 두개골을 여는 이유였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게 만들기 위해서. 현재를 살지 못하는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삼성동의 복합쇼핑몰 1층 세미나 홀은 매트릭스의 네오, 트리니티, 모피어스처럼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색 코스튬을 입은 인터넷 방송 BJ들과 제법 정교한 아이언 맨 슈트를 입은 채 자신을 찍어 대는 카메라에 포즈를 취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와우, 내가 지금 뇌 공학 강의를 들으러 온 건지 코스퓸 플레이 콘테스트에 온 건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뇌 과학 심포지엄이라고 해서 뭔가 무거운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전혀 아닌데요?”
   아이언 맨 슈트를 입은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인간의 뇌와 육체가 업그레이드될 날이 머지않았다며 떠들어 댔다.
   “저건 또 뭔 소리야?”
   “아이언 맨에서 토니 스타크가 슈트를 입고 자비스한테 조언을 받잖아요.”
   “그건 영화고.”
   “매트릭스에도 그런 비슷한 장면 있었던 것 같은데. 트리니티가 헬리콥터 조종 기술을 바로 뇌로 다운받아서 헬리콥터 조작하던 장면 기억 안 나요? 여기 오기 전에 찾아봤는데, 보스턴 대 과학자들이랑 교토 대 뇌 공학 연구소에 의하면 미래에는 새로운 지식을 그냥 뇌에 업로드할 수 있데요. 책상 앞에 앉아 달달 외울 필요가 없는 거죠.”
   희주는 무원의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뇌에 정보를 업로드가 가능하다는 건, 뇌에 있는 정보는 반대로 빼낼 수도 있다는 거 아냐?”
   “추출 같은 거요?”
   “그래. 업로드가 되면 다운로드도 당연히 되겠지. 미친 의사들, 미친 과학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의 비밀 같은 게 인터넷에 올라가는 건 일도 아닐 테고.”
   “말 되네요. 근데.”
   “근데 뭐.”
   “히지혁 수석이 말한 아이돌은 어디 있다는 거지?”
   무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희주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왜? 걸 그룹이라도 나올까 봐?”
   “혹시 모르잖아요.”
   “제대로 조사 안 했군.”
   “뭘요?”
   “강희건이 오늘 공개한다는 아이돌 말이야.”
   “설마 아는 거예요?”
   “미안하지만 5인조 보이 그룹이야.”
   무원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기대했어? 몰랐네. 걸 그룹에 진심인 줄은.”
   “걸 그룹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엄청난 인파가 세미나 홀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희주와 무원도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꽉 찬 홀 안으로 기자들과 인터넷 개인 방송을 켜고 라이브 중인 BJ들이 계속 밀려 들어왔다. 출입구에서 가까운 벽에 기대서 상황을 지켜보던 희주는 가슴이 답답해 심호흡을 했다. 부족해진 산소, 순환이 신통치 않은 실내 공기, 들뜬 사람들이 내뿜은 뜨거운 열기. 이 모든 게 희주를 압박했다.
   “무서울 지경이네. 이게 이렇게 유명한 행사였어?”
   “예상을 뛰어넘네요. 이 많은 사람들이 그냥 연예인, 유명인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근데 이 사람들이 전부 불로장생에 꽂힌 건가? 아니면 기억을 지우고 자기 뇌를 아이언 맨처럼 만들고 싶은 건가? 개중에는 우리 같은 의심병 환자들도 있겠지?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네.”
   홀의 조명이 깜빡이더니 어두워졌다. 행사장 직원이 무대 위 강연대로 가서 마이크를 조정했다. 그리고 이 자리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희주는 강희건을 보자마자 뜬금없이 해적을 떠올렸다. 떡 벌어진 어깨에 당당한 체격, 길고 탄탄한 하체는 청바지 속에 감춘 대신 깔끔한 피케 셔츠의 단추 3개는 잠그지 않았다. 그가 나오자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터졌다. 왠지 모르게 냉혈한 짐승 같은 면이 느껴졌다. 그런 점이 매력적이었다. 푸르고 탁하고 차가운 눈빛, 염색하지 않은 천연의 검은 머리, 얼굴 중앙의 넓적한 코, 5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정열과 힘이 느껴졌다. 그를 향한 여자들의 새된 환호성이 귀를 찔렀다. 마치 잘생긴 영화배우라도 나온 듯 여자들은 그를 향해 열광했다.
   “반응이 어마어마한데요?”
   “반하겠어.”
   “…네?”
   “애인이 있으니 망정이지. 매력이 철철 넘치네. 여유 있고 모든 걸 가진 남자. 20대의 애송이, 풋내기와는 차원이 다른 저 매력. 안 해 본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을걸? 모르긴 몰라도 모든 면에서 능숙할 거야. 뭐든 잘하겠지.”
   무원은 말없이 희주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배.”
   “왜? 아까 걸 그룹에 대한 복수 멘트라도 날리게?”
   “아뇨.”
   “그럼 왜?”
   “저도 잘해요.”
   “…뭘?”
   “궁금해요?”
   “….”


   12 아이언 맨


   강희건은 거의 태풍급으로 강력했다. 청중들은 그에게 푹 빠진 눈으로 그가 말하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VIP석에 앉은 셀러브리티들과 1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유명 BJ들이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 열성적으로 손을 흔들고 환호를 보냈다.
   한 중년 남성이 무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홀 양쪽에 서 있던 건장한 진행 요원 두 명이 남자의 팔을 한쪽씩 붙잡고 출구 쪽으로 끌고 나갔다. 출구 앞에 서 있던 희주와 무원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불필요한 소란에 말려들 필요는 없었다.
   강희건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진행 요원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 달라는 듯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때맞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가 말했다.
   “신사분, 절 화나게 하지 마세요. 제가 화나면 당신은 절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영화 헐크의 주인공 브루스 배너의 대사로 지금 이 소란을 정리하죠.”
   아까보다 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강희건이 미소를 지으며 발아래의 사람들을 매력적인 눈빛으로 굽어보았다.
   “능수능란하네.”
   “재수 없는데요?”
   “전부 연출 아냐? 일부러 드라마틱한 상황을 만들어서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연출이든 우연이든 효과는 확실하네요.”
   희주는 휴대폰을 꺼냈다. 아까부터 진동이 울리고 있는 걸 애써 무시하는 중이었다. 주웅이 보내는 메신저 알람이 계속 울렸다. 희주는 며칠째 주웅과의 약속을 깨고 그와 만나는 걸 차일피일 미뤘다. 참을성이 강한 주웅은 그 부분에 대해 이번만큼은 확실히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그는 조급한 풋내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능수능란한 남자였다. 연인의 일과 사적인 영역을 절대적으로 지켜 줬다. 함부로 터치하지 않았다. 왜 하루 종일 전화를 받지 않는지, 왜 같이 있을 때도 일 생각만 하는지 따지지도 불만을 표시하지도 않았다. 주웅은 남자에 대한 취향을 떠나 한심한 남자들에게 질린 대다수의 여자들에게 지지를 받을 만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 그걸 알면서도 희주는 자주 주웅의 연락을 무시했다.
   희주는 휴대폰을 다시 넣었다. 대신 오늘은 꼭 주웅에게 먼저 전화를 해서 최대한 다정하게 굴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의 인내심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그러란 법도 없다. 철없는 시절에야 여왕 대접이 당연한 줄로 알았지만 지금은 잘 알고 있다. 관심과 배려, 집중 모두 상대방의 성의와 희생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이 모든 걸 알면서도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부담감이 먼지처럼 차곡차곡 내려앉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에게 완벽하게 마음을 열 수 없는 걸까.
   “스타리온의 새로운 아이돌, 뉴키즈원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순서가 찾아왔다. 이 행사에 참석한 이들 중 대다수는 새로운 아이돌을 처음으로 보는 영광을 누릴 생각으로 여길 왔을 것이다. 방금 전의 중년 남자가 일으킨 예상치 못한 소란 덕에 청중들은 더욱 흥분했다.
   “뉴키즈원은 새롭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새로울까요? 세상에 아이돌은 넘치도록 많은데.”
   강희건은 청중들을 집중 시켰다.
   “뉴키즈원은 바로 인공지능 아이돌입니다.”
   일순 스크린에 완벽한 외모의 아이돌이 떴다. 5명의 소년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으로 구성된 그들은 그야말로 신화 속 남신들 마냥 완벽해 보였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 AI였다.
   “선배.”
   “왜?”
   “저게 뭔지 알겠어요. 뭘 하려는 건지.”
   “그게 뭔데?”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에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모델을 광고에 내보냈어요. 이름이 뭐더라….”
   “좀 이해가 안 되네. 가짜 모델이 브랜드의 이미지를 대표한다는 게.”
   “가상이긴 한데 무서울 정도로 리얼하고 매력적이에요. 그리고 새로워요. 생각해 봐요, 연예기획사에서도 매번 새로운 얼굴, 신인을 발굴하려고 하잖아요. 대중들은 변덕이 심하니까 계속 뉴 페이스를 찾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가상 아이돌이 등장한 것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 세계의 소녀 팬들이 컴퓨터로 만든 이미지에 열광하고 우리 오빠라며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야?”
   “사실 팬들도 아이돌을 실제로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잖아요. 물론 열성적으로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친구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휴대폰, 모니터 속 아이돌을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크게 문제없지 않을까요?”
   희주는 다시 스크린 속 뉴키즈원을 보았다. 잘생겼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제각각 매력이 달랐다. 유독 호감이 가는 얼굴의 멤버도 있었다.
   “뉴키즈원은 국내 최고 빅 데이터 분석가들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아이돌의 정보를 정교하게 분석하고 재조합한 결과물입니다. 최적의 멤버 수, 성격, 외모, 안무와 음악 스타일, 팀 내 역할, 매력 포인트, 개인기까지! 뭐가 더 필요할까요?”
   강희건은 충격적인 발표가 청중들에게 스며들 시간을 잠시 기다렸다.
   “제 말이 농담처럼 들리시나요? 가상의 아이돌을 사랑한다는 게 억지 같으신가요? 하지만 팬 사인회, 콘서트, 굿즈 수집, 라이브 방송, 대화, 채팅, 뉴키즈원은 여러분의 휴대폰 안에서 모든 걸 할 겁니다. 골치 아픈 사생활 문제, 팬들을 농락하는 비밀 연애, 난잡한 클럽 방문 같은 건 절대 안 합니다. 물론 마약이나 약물 문제도 깨끗하죠.”
   장난스러운 그의 멘트에 청중들의 환호를 보냈다.
   “전 장담할 수 있습니다. 100년쯤 뒤에는 진짜 아이돌 대신 이른바 뉴키즈들이 연예계를 장악할 겁니다. 그들이 영화, 드라마를 찍고 예능에 나와 몸 개그도 할 겁니다. 우리의 기술, 우리의 기계는 이미 우리 인류의 일부분입니다.”
   “여윳돈이 있었으면 스타리온 주식을 샀을 거예요. 이미 늦었나.”
   무원이 말했다.
   “한 천만 원쯤 빌려줘?”
   “농담이에요.”
   “표정은 진심인데?”
   “어쨌든 인상적이네요. 여차하면 정말 반하겠어요.”
   “여러분!”
   강희건의 연설이 이어졌다.
   “제 이야기 어디까지 믿으시나요? 허무맹랑하게 들리시나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글이 엄청난 돈을 가상현실에 투자하고 있다면 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실까요? 구글은 이미 7년 전에 가상현실 전문 기업에 5억 달러, 우리 돈 5천 6백억 원에 달하는 돈을 투자했습니다. 조만간 구글은 영화 매트릭스처럼 가상세계 속 활동이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실제 감각기관으로부터 전달돼 오는 정보를 차단 시키고, 가상현실 속 정보만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거죠. 그러면 더 이상 가상현실이 가상이 아닌 게 되는 겁니다.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여러분은 가상현실 속에서 신체를 갖게 될 것이고, 실제 몸처럼 움직일 수도 있게 됩니다. 뉴키즈원 팬 미팅에 참석해서 좋아하는 멤버와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포옹을 할 수도 있죠. 자, 이제 제 이야기가 좀 더 진지하게 들리시나요?”
   연설의 리듬이 점차 빨라졌다.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오늘 보도 자료 나온 거 보셨어요?”
   “스타리온이 빅에 액수를 밝힐 수 없는 돈을 투자했다는 오피셜 기사? 계약서 사인은 진작 했겠지만 행사에 맞춰서 빵 터뜨렸던데.”
   “오늘 기자들이 엄청 몰린 것도 결국 그것 때문이겠죠.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갑자기 요즘 의학계에서 가장 이슈인 뇌 공학 연구센터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거.”
   “누구 머리에서 나온 플랜인진 모르겠지만 제대로 먹혔네.”
   “이미 미국에는 뇌 저장 서비스가 출시됐다는데요? 전 세계 부자들 중 40여명이 비밀리에 그 서비스를 예약했다는데.”
   “그걸 믿어? 마케팅일 수도 있잖아. 투자받으려고.”
   “그럴 수도 있죠. 근데 뇌 공학자들 얘기는 흥미로워요. 박세하 박사가 개발한 브레인 임플란트 칩이 인류를 구원할 10대 도구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예측했어요.”
   “구원? 그거 광신도들이나 할 법한 얘기 아냐?”
   “브레인 임플란트 칩으로 나쁜 기억을 삭제해서 인간이 우울과 불안이라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만드는 거죠. 사이코패스나 조현병 환자들 컨트롤도 쉬워지겠죠. 공포심도 두려움도 없는 최강의 형사나 군인이 나올 수도 있고요.”
   “그걸 전부 믿어?”
   “그건 아니지만, 의사들이 말하잖아요.”
   “이거 봐.”
   무원은 희주가 내민 심포지엄 리플렛을 받아 들었다. 강희건 대표의 강연 타이틀은 ‘호모 데우스: 불멸의 신(神)이 된 인간’이었다.
   “네가 읽은 기사, 오늘 강연, 빅의 브레인 임플란트 칩, 의사들의 앞다투어 내놓는 전망. 뭔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아? 여론을 만들고 대중을 선동하고.”
   “선배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이미 세상에 나온 기술마저 부인하는 건 억지에요.”
   강희건은 악마도 울고 갈만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이 강연을 계기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의 추종자가 될 것인지 궁금했다.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서 유일하게 행복을 상상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습니다. 앞으로 인간이 뭘 더 해낼지 다 같이 지켜보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강연이 끝났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강희건은 그대로 서서 비를 맞듯 박수갈채를 흠뻑 맞았다. 잠시 후, 고개를 살짝 까딱하고는 무대에서 퇴장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게 안 믿어져. 다른 종 같아.”
   희주가 물었다.
   “너 같으면 뇌와 몸 중에 뭘 고를 거야? 예를 들면 너의 뇌를 넣은 불로불사 로봇 몸과 모든 게 리셋된 뇌가 달린 지금의 몸 중에서.”
   “선배는 대화가 잘 통하고 친절한 정신과 전문의 애인의 차가운 스테인리스 팔에 안기고 싶으세요?”
   “그렇다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정체불명의 뇌를 달고 있는 몸뚱이를 부여잡고 살 수도 없잖아?”
   “몸과 마음을 각각 개별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게 옳은 건지 모르겠어요. 둘 다 같이 있어야 하나의 인간, 그 사람 아닐까요? 성격 나쁜 정희주의 정신 상태와 주먹 힘이 좋은 정희주의 몸이 합쳐져야 비로소 형사 정희주가 완성되는 거죠.”
   희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동의해. 난 적어도 몸뚱이가 없는 아이돌을 사랑하진 못할 것 같아. 그래픽 모델이 추천하는 가구에도 흥미를 갖지 못할 것 같고. 어딘지 공허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음모론이라고 욕해도 상관없지만, 돈 많은 인간들이 시스템을 바꿀 힘도 없고 가난한 우리 같은 인간들이 시스템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음모를 꾸미는 것 같아. 생각해 봐. 200살까지 살 수 있는 실리콘 몸뚱이가 나온다고 쳐. 그걸 우리가 살 수 있을 것 같아? 우린 꿈도 못 꿀 정도로 비싸게 팔 거야. 돈이 썩어 나가는 부자들이나 사겠지. 넘쳐 나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주체 못 하는 인간들 말이야. 너나 나나 우린 100살도 못 살고 요양병원에서 외롭게 죽을 운명이야. 차라리 주식이나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적어도 요양병원 들어갈 돈은 있어야 하잖아?”


   13 패소 전문 변호사


   누군가를 죽인다면 그건 증오해서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희주는 살인 사건을 처리할 때마다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덕식과 주용훈은 왜 죽었을까. 범인은 그들은 증오한 걸까, 아니면 살려 둘 가치를 더는 찾지 못해서일까. 만약 후자라면 사건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들이 범인의 비밀을 알고 있던 건 아닐까. 세 사람은 공범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덕식과 주용훈이 우연히 범인의 비밀을 알게 됐을 수도 있다.
   희주는 해바라기 센터 앞에서 무원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박세하에게 들은 피해자들의 은밀한 사생활. 분명 그들은 어떤 ‘기억’ 때문에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게 대체 뭐였기에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거머쥔 채 달콤한 권력을 누리며 살던 그들을 밤새 잠 못 들게 하고 아이처럼 울게 만들었을까.
   문득, 3개월 전 그 응급실에서의 사건이 떠올라 뒷덜미가 뜨거워졌다. 그날 일은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을 찔러댔다. 희주는 오로지 사건만 생각하려 애썼다.
   무원이 주스 선물 세트를 들고 나타났다.
   “결국 그거야?”
   “오렌지주스가 어때서요.”
   “그걸 무기로 우리가 원하는 걸 얻어 낼 수 있겠어?”
   “모르죠. 어쨌든 누구라도 마시면 좋잖아요.”
   “너도 좀 이상한 인간인 거 혹시 알아?”
   “제가요?”
   무원은 손가락으로 탄탄한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 짓 10년 했지만 탐문 가면서 주스 사는 형사는 처음이야.”
   “잘 보이면 좋잖아요.”
   “만약 일 잘 풀리면 내가 주스 값 열 배로 줄게.”
   해바라기 센터는 연한 개나리 색깔의 건물이었다. 밋밋하고 실용적이고 무해한 디자인. 희주와 무원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벽면 가득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들의 새 출발을 응원하는 따뜻한 문구와 아이들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20년 전 개소식 당시 찍은 기념사진도 걸려 있었다. 희주는 10명의 추진 위원들 면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최준석을 발견했다. 그는 당당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어, 이거…”
   무원이 벽을 가리켰다.
   “이거 빅에서 본 거 맞죠?”
   희주는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 문구를 읽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너희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맞네요. 같은 구절을 다른 장소에서 보니 묘하네요. 누군가는 여기서 저 구절을 보고 용기를 얻겠죠.”
   “그럴 수도 있지.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포인트에서 살 이유를 찾곤 하니까. 봄에 보는 벚꽃이나 반려견이나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거 말이야.”
   “선배한테는 그게 뭐예요?”
   “뭐?”
   “선배가 사는 이유요.”
   희주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범인.”
   “…네?”
   “내가 아직 잡지 못한 이 세상의 나쁜 놈들.”
   무원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선배라는 사람은 제 예상에 한 치에도 벗어나질 않아서 이제 좀 무섭네요.”


   한윤숙 부소장은 주용훈이 변호를 맡았던 피해자 지원 사례 파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동안 정말 많은 형사님들이 센터를 찾아오셨지만, 손에 뭘 들고 온 분은 처음이네요.”
   한윤숙은 주스를 꺼내 두 사람 앞에 놓았다. 좋은 신호였다. 어딜 가나 수사 협조를 요청하는 경찰은 초대받지 않는 손님이다. 죄가 있든 없든 경찰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같은 경찰끼리도 경찰의 방문은 꺼린다. 혹시라도 저 인간 때문에 내가 묻어놓은 게 들춰지지 않을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경계심과 자존심. 상대가 원하는 정보를 못 찾으면 은근히 좋아하기도 한다. 치사하지만 이 바닥이 그렇다. 어느 바닥이든 나보다 더 부지런한 인간이 내 영역을 쑤시고 다니는 걸 반기는 사람이 있을까.
   희주는 만약 자신이 가정폭력 사건의 피해자 입장에서 이곳에 앉아 남편이나 동거인에게 당한 일을 털어놓는 장면을 상상했다. 부소장실은 책상과 손님용 테이블, 의자 서너 개가 집기의 전부인데도 빼곡했다. 한눈에 봐도 운영이 녹록지 않아 보였다. 특유의 갑갑한 분위기 때문에 숨쉬기가 살짝 힘들어졌다.
   한윤숙은 50대 중반이라는 나이와 특수한 기관의 책임자라는 자리에 걸맞게 수수한 차림이었다.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갈색 바지는 실제 나이보다 조금 더 들어 보이게 했지만 어쩌면 그건 그저 작업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게 다문 입과 살짝 처진 눈은 지친 사람들만 오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답게 인내심이 강해 보였다.
   “주 변호사님은 센터 운영에 한 줄기 빛 같은 분이셨어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센터는 상당한 곤란에 처했을 거예요.”
   일어나 빛을 발하라. 한윤숙의 말에 희주는 아까 본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식상한 관용구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요즘 세상에도 저런 칭송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 정도셨나요?”
   “여기 입소하는 여성들은 학력 수준도 그리 높지 못하고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분들이 대부분이죠. 살면서 변호사 한 번 만나기 어렵습니다.”
   “변호사 같은 사람들은 가능하면 안 만나는 게 제일 좋죠.”
   딱히 방어적인 대꾸를 하려던 것은 아닌데 그런 꼴이 되어 버렸다. 희주는 무원이 애써 딴 점수를 까먹은 게 분명하다고 자책했다.
   “주 변호사님은 이혼이나 양육비 소송에 대한 상담을 무료로 해 주셨습니다. 비용은 센터에서 공식적으로 나가는 교통비, 식사비 정도만 받으셨죠. 참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그렇게 돌아가시다니….”
   “좋은 분이셨다니 저희도 마음이 좋지 않네요.”
   희주는 아까보다 온순한 태도도 한윤숙의 말에 맞장구 쳤다.
   “혹시 변호사님께 앙심을 품거나 불만을 제기한 사람이 있었나요?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다거나. 혹시 변호사님께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말을 하신 적은 없나요?”
   “그분은 누구한테 앙심을 살 분이 아닙니다.”
   한윤숙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그런데 아시겠지만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요.”
   그래도 한윤숙은 고집스레 입을 닫았다.
   “부소장님께서도 그런 상황을 수없이 보셨을 텐데요. 겉으론 좋은 남편이지만 마누라와 자식을 패는 인간들 같은.”
   “…우리 센터를 찾아오는 분들은 전부 피해자입니다. 전 이분들이 변호사님께 나쁜 맘을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입니다. 저희도 이분들을 용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범인을 잡을 단서를 찾는 과정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희주는 잠시 한 호흡 쉬고 말을 꺼냈다. 좁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점점 힘들다.
   “피해자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네?”
   “변호사님은 두 번째 피해자입니다. 첫 번째 피해자는 전직 판사였습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 출신 변호사의 죽음. 뭔가 좀 이상하죠.”
   한윤숙은 주용훈이 맡았던 사건 파일을 공개하기로 했다. 부소장의 직권으로 열람만 허용했다. 두 사람이 파일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동안, 한윤숙은 꼿꼿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희주는 부소장실을 나오자마자 건물 밖으로 나가 후텁지근하지만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아까 본 내용들을 휴대폰에 녹음했다. 그동안 무원은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 메모를 했다. 녹음을 마치고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는 희주에게 낯선 여자가 다가왔다.
   “정희주 형사님… 맞으시죠?”
   “네?”
   희주는 본능적으로 여자를 경계했다.
   “병원에서 그 남자 때린.”
   여자는 말끝에 왼손 주먹을 슬쩍 수줍은 복서처럼 앞으로 내밀었다.
   “음, 네.”
   결국 일어날 일이었다. 시민을 때린 경찰로 저녁 8시 공중파 뉴스에 나왔고 인터넷 기사도 떴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여자가 기자가 아니기만 바랐다.
   “그런데 누구시죠?”
   “아, 죄송해요. 제가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전 여기 직원이에요.”
   일단 기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안심했다.
   “제가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 기사 보고 형사님 응원했어요. 솔직히 속이 다 후련했어요.”
   목 뒤쪽부터 볼까지 순식간에 빨개지는 느낌이었다. 희주는 여자에게 말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요?”
   세 사람은 센터 옥상으로 올라갔다. 해바라기 센터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주로 3차 병원 건물 내부 혹은 병원 근처에 자리했다. 의료 지원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이곳은 후자였다. 옥상에서 병원과 장례식장이 보였다.
   “보시다시피 경치가 이래서 센터에 입소하는 분들은 옥상에 못 올라오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딱히 뭐.”
   “네. 딱히 아름다운 경치는 아니죠. 직원들은 옥상에 올라와도 상관없지만, 다들 굳이 올라오진 않아요. 그래서 혼자 있고 싶을 때 여길 와요. 여기서 일한 지 6개월 만에 발견한 저만의 공간이에요. 옥상이 있어서 참 다행이랄까요.”
   여자는 두 명의 경찰 사이에 서 있으면서도 별로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희주는 여자에게 주용훈 변호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달라고 했다.
   “변호사님한테서는 항상 술 냄새가 났어요.”
   “대화를 나눈 적도 있으신가요?”
   “물론이에요. 휴게실에서 약을 드시는 걸 보고 어디 안 좋으시냐고 물었더니 수면제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수면제요?”
   “이상하죠? 저도 이상해서 그걸 왜 낮에 드시냐고 물었더니, 낮이든 밤이든 잠만 잘 수 있다면 상관이 없다고 하셨어요.”
   “그랬군요.”
   “그때 살짝 속마음을 얘기하셨어요.”
   “무슨 얘길 하셨죠?”
   “이 일을 하다 보면 결말이 안 좋은 경우가 있다, 밤에 그 일들이 생각이 나서 잠을 못 잔다, 우습지만 나한테 원한을 품은 처녀 귀신한테 잡혀갈 것 같다. 이런 얘기를 두서없이 하시더니 남이 알면 부끄러우니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셨어요. 변호사라면 많이 배운 사람들인데 그런 얘기를 하셔서 처음엔 좀 당황했어요. 근데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실제로 그의 결말은 나빴다. 불면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가 살해당했다.
   “변호사님이 변호를 맡았다가 중간에 그만두신 일도 있어요.”
   “어떤 사건인지 혹시 아세요?”
   “아뇨. 자세한 내용은 저도…. 그런데 회의실에서 언성을 높이는 걸 봤어요.”
   “변호사님과 여기 입소하신 분이요?”
   “네. 결국 여자분이 재판을 포기한 걸로 들었어요.”
   “재판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나요? 검사 출신에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변호사가 변호를 맡았는데 왜 포기하죠? 양육비, 생활비, 접근금지명령까지 다 받아 낼 수 있을 텐데.”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재판까지 못 가는 경우가 꽤 많더라고요. 대부분은 여자 쪽에서 포기를 하세요.”
   “아까 부소장님 말하고는 다르네요.”
   “당연히 이런 얘기를 외부인한테 못 하죠. 센터에서 피해자들과 문제가 있다는 게 이슈가 되거나 기사로 나면 정부 지원금이 날아가요. 여긴 지원금 없이는 안 굴러가는 조직이거든요. 그나마 해마다 축소되어서 고급 인력 뽑기도 어렵고…. 변호사님이 계속 센터에서 일하시는 것도 결국 더 나은 변호사를 뽑을 여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변호사님은 교통비 정도만 받으시거든요.”
   여자와 부소장의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변호사님이 피해자 남편 쪽을 몰래 만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요.”
   “피해자 남편을 왜요?”
   “사실 남자들은 위자료나 재산 분할을 안 해 주려고 해요. 가사노동도 재산형성 기여도를 인정받아서 30퍼센트 내외에서 받을 수 있는데 그게 아까운 거죠. 양육비를 주기 싫어서 자기가 친권을 가져간 다음에 아이를 버리는 남자도 있었으니까요. 아내한테 아이를 보내면 돈을 줘야 하니까 그냥 버리는 거예요.”
   여자는 옥상 출입구 쪽을 힐끔 보고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이 남자 쪽에서 돈을 받은 게 아닐까… 여자가 재판을 포기하게 만들어서 남자 쪽이 원하는 대로 재산 분할이나 양육비 지원 없이 친권만 가지는 조건으로 아주 불리하게 이혼을 하는 거죠. 성공하면 그 대가로 변호사님이 돈을 받고요.”
   “부소장님이 그걸 알고 있나요?”
   “아마 부소장님도 그 돈 일부를 받는 게 아닐지 저희끼리만 생각하고 있어요. 드러내 놓고 할 얘기는 절대 아니고요.”
   희주는 궁금해졌다. 여자의 이야기는 해바라기 센터의 근간을 뒤흔들 만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주용훈이라는 한 개인의 일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더 복잡한 사정이 이 센터 안에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원이 여자에게 물었다.
   “근데 왜 이런 이야기를 저희한테 하시는 거죠?”
   “….”
   “제 말은, 지금 이 이야기가 본인 직장 생활에 불리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거예요. 저희가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센터 비리에 대해 접근하는 걸 여기 사람들이 알고 내부 고발자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무원답지 않은 이야기였다. 한편으로는 무원다운 이야기였다. 그는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딘 여자의 미래를 걱정했다.
   “직장 생활… 그렇죠. 직장이죠, 여긴. 근데 형사님한테 경찰서를 그냥 직장이라고 부르면 충분하신가요?”
   희주는 피로감에 조금 충혈된 여자의 눈을 응시했다.
   “처음 여기서 일할 때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그분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다시 남은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자부심 같은. 하지만 지금은 피해자 한 명이 지원금 얼마 이런 식으로 보여요. 겨우 6개월 지났을 뿐인데. 다들 이 안에서 그렇게 소통을 하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양심의 가책 같은 게 느껴진 건가요?”
   “비슷해요. 저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지만 남들한테 이런 얘길 할 순 없죠.”
   “그래서 저한테 응원한다고 하신 거예요?”
   “아깐 좀 충동적으로 그랬는데,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전 형사님처럼은 못 하겠지만… 형사님을 꼭 나쁘게만 보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물론 그렇다고 사람을 때리면 안 되지만요.”
   “선생님은.”
   희주는 여자를 응원해 주고 싶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사람일 거예요.”


   주용훈은 6층짜리 고급 빌라 2층에 혼자 살고 있었다. 한 층에 한 가구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생활 보장이 철저하게 되는 구조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희주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단풍나무로 만든 야구방망이였다. 초록색 소주병과 가득 찬 대형 쓰레기 봉지가 거실로 향하는 통로에 늘어서 있었다. 3개의 방은 각각 서재, 드레스룸, 침실로 꾸며졌으나 정작 거실에 1인용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다. 벽걸이 TV와 매트리스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술이 제각각 남은 술병과 배달 음식 용기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그 틈바구니에 약봉지가 있었다.
   “주로 거실에서 생활을 했네요. 저렇게 좋은 방을 두고.”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이 집 전체를 활용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 버거웠겠지.”
   “몸싸움 같은 게 있었나. 이 집에 야구방망이는 뜬금없네요.”
   “그건 모르지만, 집에 방망이를 둬야 한다고 판단한 계기가 분명 있었을 거야. 거기다 술과 약. 절대 같이해서는 안 되는 것들까지 한 것 보면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아.”
   무원은 현관 신발장을 열고 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공구 상자를 꺼냈다.
   “일단 이덕식이 사망한 호텔방에서 나온 망치와 같은 브랜드에요.”
   “망치는 없네.”
   “우연 아닐까요? 자루가 망가져서 버렸을지도 모르죠. 범인은 피해자가 이 공구상자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일부러 동일한 브랜드의 망치를 범행도구로 골랐을 수도 있잖아요.”
   아드레날린이 심장을 휘감으면서 머릿속에 묘한 생각이 스쳤다.
   “범인은 이덕식을 호텔로 불러냈어. 직접 불렀든, 사람을 썼든 범인은 이덕식이 일요일 밤에 혼자 호텔방에 있길 바랐어. 주용훈은 숲에서 혼자 죽었고. 이게 뭘 뜻하겠어? 누군가 불러낸 거야.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어. 아니면 거절하지 못한 걸까?”
   “그건 모르지만 범인이 두 사람을 동시에 알고 있었다는 건 확실히 알겠어요.”
   “맞아. 두 피해자가 같이 엮인 사건을 찾아보자. 이덕식이 판사이고 주용훈이 검사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14 이 사건의 결말


   “오케이! 드디어 왔다.”
   희주가 휴대폰을 들며 말했다.
   “뭐가요?”
   “소중한 단서.”
   강력6팀 자리에는 희주와 무원뿐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희주에게 전화를 건 것은 주용훈 변호사가 사는 빌라 관할구역의 파출소 순경이었다. 주용훈의 집을 나와 경찰서로 복귀하기 전, 파출소에 들려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신고가 들어온 적이 있는지 물었다. 순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확인해 보고 연락을 해 주겠다고 했다.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 이 동네 유명 인사가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파출소는 사건과 관계가 있든 없든 몸살을 앓았을 터. 처음 찾아갔을 때 순경은 희주에게 뭔가를 말할 경우 혹시 기자들한테 정보가 새어 나가지는 않을지 경계했다. 희주는 언론과 접촉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뭐든 좋으니 연락을 달라고 했다.
   “변호사님께서 직접 신고를 하셨습니다.”
   순경이 말했다.
   “파출소로요?”
   “네. 날짜를 보니 한 달 전이네요. 시간은… 자정 무렵이고요.”
   “무슨 일이었나요?”
   “한밤중에 괴한한테 기습을 당했다는 신고였습니다. 자택 근처에서 벽돌로 뒤통수를 가격당했다고 했습니다.”
   “잡았나요?”
   “아뇨.”
   “CCTV는요?”
   “그게… 하필 근처 상가가 재개발 중이라 주차된 차도 없었고 감시카메라도 작동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사각지대였죠. 출동은 했지만 목격자도 없었고 주변 감시카메라에도 찍힌 것이 없어서 난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없어진 건?”
   “없습니다. 지갑도 그대로였고 시계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롤렉스였는데.”
   “그럼 그냥 벽돌로 뒤통수를 내려치고 튀었다는 건가요?”
   “네. 황당하지만 그게 답니다.”
   순경과의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목격자도 CCTV도 흔적도 없는 한 밤의 습격. 기대했던 단서 대신 남은 것은 거대한 의문뿐이었다.
   “그래서 집에 방망이를 뒀군요. 나 같으면 이사 갔을 텐데.”
   무원은 희주의 책상에 걸터앉아 한숨을 쉬었다.
   “경찰 맞아? 잡을 생각을 해야지.”
   “우린 뭐 목숨이 2개에요?”
   “피해자들 말이야, 더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남들보다 더 버는 만큼 잠도 더 잘 자고 건강도 더 챙기면서.”
   “특별한 직업을 가졌다고 더 특별히 행복한 건 아닐 수도 있잖아요.”
   “말 되네. 물론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 보면 낮은 데 있는 너희들의 정신 승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용훈은 일을 제대로 못 했을 거야. 무료로 이혼 상담이나 해주는 게 딱 적당했던 거지. 난 최준석이 주용훈이 썩어 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지 의문이야.”
   “알았으니까 박세하 박사를 소개했겠죠. 주용훈이 집에 방망이를 둘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졌다는 걸 분명 알았을 거예요.”
   “범인은 왜 두 사람을 죽였을까? 뭘 원한 걸까? 왜 두 사람은 기억을 지운 걸까?”
   “과거는 지웠는데 살인자는 못 피했네요.”
   “그런 걸 보면 내 기억과 과거가 내 것만이 아닌 것 같아.”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무원이 의자를 끌고 와서 희주의 앞에 앉았다. 두 사람의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선배는 그 기억 어떻게 할 거예요?”
   “나한테 관심이 많네.”
   “선배를 괴롭히는 그 기억 지우고 싶지 않아요?”
   “모르겠어. 혼란스러워.”
   “난 선배가 당장 수술하겠다고 할 줄 알았어요.”
   “왜?”
   “선배는 일이 최우선이잖아요. 일이 인생의 목적인 사람이니까 일에 방해가 되는 건 뭐든 없애 버릴 줄 알았죠. 현장에서 불안해 보이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는 게 아니라 불안해. 이게 무슨 형사야. 꼴이 한심하지.”
   희주는 철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근데 왜 당장 수술을 안 하냐는 거죠.”
   “너라면 하겠어?”
   “전 안 해요.”
   1초도 망설임 없는 무원의 대답에 희주는 실소가 나왔다.
   “엄청난 자신감이네. 절대 그런 일이 너한테는 안 생길 거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 그 기억에 내가 지는 것 같잖아요.”
   “난 우습게도 그걸 지웠을 때 동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싶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 세상에 어떤 경찰이 나약하게 보이고 싶겠어. 나쁜 놈들의 눈에든, 동료들의 눈에든. 난 남들 눈 신경 안 쓰고 사는 쪽이라고 자부했는데 실은 아니었나 봐.”
   “그럴 바엔 안고 가겠다는 거예요?”
   “현장에서 걸리적거리면 당장 옷 벗어야지.”
   “대책은 없다는 거네요.”
   “없어. 내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예 모르겠어. 이 분노를 암 덩어리처럼 계속 안고 살아야 하나?”
   “흉터.”
   “응?”
   무원은 희주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희주의 눈썹 위 흉터를 가리켰다.
   “흉터가 아직 그대로예요.”
   무원의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희주는 갑자기 무원이 낯설게 느껴졌다.
   “꽤 오래 갈 것 같아요.”
   “할 수 없지 뭐. 난 신경 안 써.”
   희주는 일부러 웃으면서 눈썹을 만졌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들 때마다 가장 먼저 흉터를 만졌다. 그리고 3개월 전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때의 분노, 경악, 슬픔을 매일 느낀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주웅조차도.
   “이 흉터는, 선배가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에요.”
   “사고 칠 궁리만 하는 형사 아니고?”
   “10년 형사 생활을 쓰레기통에 처박을 각오하고 주먹을 날린 거잖아요. 아기를 위해서.”
   무원은 희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희주는 왠지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무원의 눈을 피할 수도 없었다.


   그림 같은 2층짜리 단독주택의 문을 연 것은 4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름답지만 연약해 보였다. 타인이든 항우울제든 어딘가에 기대야만 이 세상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여자. 여자 곁에는 인상 좋은 남편이 있었다. 아내를 애지중지하는 게 느껴졌다.
   희주는 남편에게 말했다.
   “실례지만 저희끼리 이야기를 좀 나눠도 될까요? 정확히는 여자들끼리요. 제 동료도 밖에서 대기할 겁니다.”
   일부러 조금 딱딱하게 말했다. 여자는 남편이 곁에 있으면 절대 과거 일을 말하지 않을 터. 두 사람을 갈라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남편보다 자신이 위에 있음을, 남편에게는 경찰이라는 직업적 권위를 보여 주고 싶었다. 탐문 스킬 중에 하나였다.
   “혼자 괜찮겠어?”
   남자가 아내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난. 형사님 말대로 여자끼리 대화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오죠.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
   남자가 희주에게 말했다.
   “충분합니다.”
   무원은 집 주변을 둘러보고 들어오기로 했다. 여자는 창밖으로 남편이 멀어지는 걸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주용훈 변호사님 때문에 연락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어요. 꽤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라서요.”
   여자는 5년 전 전남편과는 재산 분할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혼하고 아이는 친정에 맡기고 재혼했다. 전남편은 폭행한 다음에 강제로 성관계를 맺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었다. 남편은 여자가 재산 분할을 포기한다고 하자 그제야 이혼에 합의를 해 줬다.
   “그 분은 센터 여자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여자들 입장에는 변호사가 먼저 나서서 자기 일에 관심을 가져 주니까 고마워했죠.”
   “근데 왜 다투셨나요?”
   “네. 무책임하고 정신 나간 여자처럼 보이겠죠. 변호사랑 싸우다니.”
   “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단지 이유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남편에게 맞은 다음에 어떻게 관계를 했냐고 물었어요. 여러 번 반복해서요. 제가 괴로워할수록 더 집요하게 물었어요. 제가 수치심 때문에 눈물을 흘려도 아랑곳하지 않았죠. 그리고 제가 경찰에 신고했다가 잘못 신고했다고 둘러댄 일을 물고 늘어졌어요. 저한테 불리한 증거가 될 거라며 재판을 포기하라고 채근했어요.”
   “그래서 결국 재판을 포기하셨군요.”
   “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남편이 변호사한테 천만 원을 줬더군요.”
   “그런 일이 센터 내에서 자주 있었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여자들은 당하고도 항의하지 못했죠. 전 그래도 싸웠어요. 애가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괜찮으시죠?”
   “네. 마음이 편안해요. 그거면 충분해요. 저는, 전남편을 용서했어요.”
   “…용서요?”
   희주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네.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리시죠? 이해해요. 하지만 그때의 전 빗속에 내동댕이쳐진 녹슨 화분 같았어요. 풀 한 포기도 흙도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새로운 희망 같은 게 자랄 기회가 내 인생에 아예 없는 것 같았죠. 그저 속수무책으로 내리는 비를 맞으며 붉은 녹이 날 갉아먹는 걸 지켜만 보는 기분이었죠. 그래서 그 사람을 용서했어요. 내 감정이 곧 내가 사는 세상인데 내가 괴로우면 그것만 한 지옥이 없으니까.”
   여자는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 감정은 참 이상해요.”
   여자는 젊었을 때는 더 아름다웠을 눈으로 희주를 응시했다.
   “전 지금 행복한데 금방 끝날 것처럼 덧없게 느껴져요. 하지만 전남편과 사는 동안은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느낌에 정말로 우울했는데. 행복은 왜 이렇게 불안하고 잡히지 않는 느낌일까요? 슬픔은 피 묻은 휴지처럼 눈에 선명한데.”


   무원은 경찰서로, 희주는 학교로 향했다. 무원은 이덕식과 주용훈이 과거 담당했던 사건을 더 뒤져볼 계획이었다. 희주는 만날 사람이 있었다.
   예고 없이 찾아간 학교에 최준석은 없었다. 대신 혼자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점심 도시락을 먹는 30대 초반의 기간제 교사가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여자는 희주를 상담을 위해 담임을 만나러 온 학부모 정도로 생각했다가 신분을 밝히자 깜짝 놀랐다. 학교 보안관을 만나러 왔다는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안관님은 친절하고 좋은 분이세요.”
   여자는 점심으로 먹으려던 샌드위치 절반을 희주에게 내밀었다.
   “저랑 비슷한 시기에 채용되셨으니 학교에 나오신 지 1년쯤 되셨네요. 경찰서장 출신이라고 하셔서 선생님들이 좋아했어요. 아무래도 안심이 되니까요.”
   “같이 근무하시면서 기억나는 일 있으세요?”
   “음, 제 또래 여성분과 대화하는 걸 우연히 본 적 있어요. 점심에 휴게실에 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거든요. 처음엔 따님이 찾아오셨나 했는데 나중에 퇴근길에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여쭤보니 현역이실 때 본인한테 도움을 받아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온 분이라고 하셨어요. 범죄 피해자들을 돕는 기관이 있는데 거기 출신인 것 같다고.”
   “그 여자가 누군지 기억하던가요?”
   “아뇨.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셨어요. 저는 이해가 돼요. 저도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근무를 하다 보면 졸업한 아이가 찾아올 때가 있는데 솔직히 누가 누군지 기억이 잘 안 나거든요. 다른 친구들은 다 추억이 돼서 아이들 얼굴 하나하나가 다 기억난다고도 하는데, 전 애들 얼굴은 다 비슷하게 보여서. 그래서 보안관님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나서 당황스러워 혼났다고 했을 때 공감이 됐어요. 그래도 무척 들떠 보이셨어요.”
   “그래요?”
   “종종 그런 경우가 있나 봐요. 은퇴한 경찰들의 노후나 업무를 지원하는 협회가 있는데, 사람을 찾는 문의가 자주 들어온다고 하셨어요. 대부분 신세를 진 경찰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협회에 연락을 한다고. 아마 그 여자분도 거길 통해서 학교엘 찾아온 게 아닌가 하셨죠.”
   “인상착의 혹시 기억나세요?”
   “아뇨….”
   여자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근데 그 말씀이 기억나요.”
   “네?”
   “그 여자분이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잘못 살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은 것 같다고. 그래서 기분이 정말로 좋다고.”


   병원은 드나드는 사람들로 혼잡했다. 병원에 올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 동안에도 이 세상이 돌아간다니. 주차장에 꽉꽉 들어찬 차와 접수와 수납을 위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세상이 망하지 않고 돌아가는지 궁금하다. 안쪽에서 주웅이 걸어 나왔다. 희주는 병원 밖에서 주웅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주웅은 희주에게 다가와 희주의 팔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보고 싶었어.”
   주웅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하도 퇴짜를 맞아서 만나면 짜증을 내려고 했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보고 싶다는 말이 나와 버렸네.”
   주웅은 솔직하다.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희주는 그것도 신기했다. 이 남자는 거절을 당해 본 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이성의 거절 같은 것에는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는 것일까. 어떤 삶을 살면 나이 든 남자가 매사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별일 없었어?”
   “아직도 용의자를 못 찾았고 두 사건의 연결고리도 희미해. 살해 흉기에서 지문이 나왔는데 피해자들 지문뿐이고. 실은 최악이야.”
   “화가 머리끝까지 났겠네.”
   “빙고. 더 강한 약으로 처방해 줄 수 있어? 운전해야 할지 모르니까 더 센 게 필요해. 칼 맞고 망치 맞아야 죽지, 공황발작으로는 안 죽잖아.”
   “맞아. 그걸로는 안 죽어.”
   “처방해 줄 거지?”
   “오늘 그것 때문에 온 거야?”
   희주는 잠시 망설였다. 꼭 약 때문만은 아니다. 그동안 주웅의 연락을 피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도 있었다.
   주웅은 희주의 눈가 흉터를 매만졌다. 그의 다정한 손길. 마음이 편안해졌다.
   “좀 우스운 말일 수도 있는데.”
   희주가 말했다.
   “뭔데?”
   “왜 자기를 만날 때는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내 삶엔 사건과 피해자가 남긴 것들, 그리고 내가 잡아야 할 범인들 뿐인데, 자기와 함께 있으면 거기서 한 발 멀어지는 기분이야.”
   “굉장히 감동적인데. 혹시 프러포즈야?”
   “미쳤어?”
   “농담이야. 그럼 오늘 데이트 해 주는 거야?”
   그 순간 희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희주가 휴대폰을 들어 주웅에게 보여 줬다.
   “물론. 그 잘생긴 파트너지?”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받았다.
   “선배, 내가 뭘 찾았는지 알면 놀랄걸요.”
   “뭔데?”
   아드레날린이 갑자기 솟구쳤다. 순식간에 다시 이쪽으로 넘어왔다.
   “이덕식 아내분 말 기억해요? 이덕식 판사가 생전에 퇴근하다가 판결에 불만을 품은 남자에게 달걀을 맞았다는?”
   “기억나. 그게 왜?”
   “그 사건에서 우리가 아는 이름 두 개가 등장해요.”
   “누군데?”
   “스타리온 강희건 대표.”
   희주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주용훈 변호사도 등장해요.”
   “뭐?”
   희주는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덕식에게 달걀을 던진 남자는, 강희건 별장에서 가사도우미를 하던 여자의 남동생이었어요. 그런데 여자분이 자살했어요. 남자는 누나 일 때문에 법원 앞에서 시위를 했던 거고요.”
   “그 습격 사건의 결말은 뭐야? 그래서 그 남자는 어떻게 됐고, 여자는 왜 자살한 거야?”
   “이제 알아봐야죠. 지금 어디예요?”
   “병원.”
   “애인이랑 같이?”
   희주는 주웅을 보았다. 오늘 데이트를 해 줄 거냐는 그의 질문에 아직 대답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응.”
   “지금 바로 올 수 있어요?”
   주웅이 다시 한번 가볍게 희주의 팔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함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부드러운 터치. 희주는 대답했다. 주웅과 무원의 질문에 전부 대답이 되는 딱 한 마디.
   “갈게.”


   15 고백


   남자는 10미터 높이의 크레인 위에서 거대한 돌망치로 초등학교의 벽을 내리치고 있었다. 희주와 무원은 남자가 벽돌로 된 벽 한 면을 부수는 모습을 밑에 서서 지켜보았다. 작업은 뙤약볕 아래서 계속되었다. 1시간 만에 땅으로 내려온 남자의 검게 탄 홀쭉한 뺨은 땀과 먼지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남자는 500밀리미터 페트병에 든 물을 한 번에 다 마시고 나서야 1시간 전 경찰이라고 10미터 밑에서 자기소개를 한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판사, 검사도 못 믿는 세상에 경찰을 뭘 믿고 말하라는 겁니까? 누나는 당신들 때문에 자살했어요. 당신들은 신경도 안 쓰겠지만.”
   남자는 희주와 무원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희주는 남자의 반응을 이해했다. 이덕식을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남의 아픈 가정사를 들추는 꼴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대체 이제 와서 궁금한 게 뭡니까?”
   “이덕식 판사에게 달걀을 던진 이유가 뭔가요?”
   “누난 살 수 있었습니다. 안 죽을 수 있었다고요. 근데 그 판사라는 인간이 누나를 망가뜨렸어요. 이런 얘기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죽은 누나만 불쌍하지.”
   “누님께서 어떻게 강 대표 별장에서 일을 하게 되셨죠?”
   “매형이랑 갈라서고 돈 때문에 고생하다가 자기 같은 여자들을 도와주는 좋은 경찰을 만났다고 했어요. 덕분에 숨통이 트이게 됐다고 좋아했죠.”
   “그러면 경찰이 별장 가사도우미 일을 소개한 건가요?”
   “네. 경찰이라는 것만 들었어요. 유명인이라 집도 좋고 결혼도 안 해서 어지르는 애도 없어 일이 편하다고 했어요.”
   “혹시 이 사람이 누님께 일을 소개한 경찰인가요?”
   희주는 최준석 사진을 띄운 휴대폰을 내밀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매형이 때려서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그때 출동한 형사라고만 들었어요. 누나 처지를 알고 나중에 일을 소개해 줬다고 했어요.”
   “확인해 보니 누님께서는 성폭행으로 신고를 하셨더군요.”
   “하지만 그 인간들은 순식간에 누나를 꽃뱀으로 만들어요.”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누님께서 오히려 고소를 당하셨죠.”
   “그쪽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누나가 예전에 술집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폭로했어요. 그때부턴 아무도 누나 말을 안 믿어줬습니다.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했는데 담당 검사는 누나가 찍은 게 맞느냐고 계속 몰아붙였어요. 남자들 앞에서 영상을 계속 돌려 보게 했죠. 그게 얼마나 기분이 더러울지 상상이 됩니까?”
   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캡처한 화면을 찾아 내밀었다.
   “주용훈. 그때 담당 검사였죠. 더러운 새끼.”
   희주와 무원은 마주 보았다.
   “결국 누나는 명예훼손으로 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어요. 그 판사, 검사 새끼 때문에… 누나 얘길 제대로만 들어줬어도.”
   희주는 이덕식 사진을 남자에게 보여 줬다.
   “보름 전에 사망했습니다. 망치로 맞아 죽었죠.”
   남자는 자신이 전부 손으로 깬 학교 외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 때문에 오셨군요. 전 아닙니다. 안 죽였어요. 그런 생각도 해 본 적 없어요. 전 그냥… 누나가 얼마나 분했을까, 술집 여자가 꽃뱀으로 한 재산 벌어 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원통했을까, 그 생각만 했어요. 그래서 달걀을 집어 던졌죠. 개망신이라도 주려고요.”
   “강희건 변호인이 누님 과거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내밀었다.
   “누나 팔아먹은 여자예요. 예전에 누나랑 같이 일하던 여자였어요. 저도 본 적 있죠. 같은 처지라고 서로 챙겨 주는 것 같았는데.”
   희주는 여자 번호를 저장했다.
   “그 인간이 죽었다니 누나가 좋아서 저세상에서 울겠군요. 판사님이 망치에 맞아 죽었다니 곱게는 못 갔군요. 누난 자기가 죽어야만 세상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어줄 거라고 가계부에 유서를 남겼어요. 그 밑에는 내지 못한 휴대폰 요금이 적혀 있었고요.”
   희주는 말없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누나가 죽고 나서도, 그 일을 다시 조사하겠다고 찾아온 경찰도 없고 기사도 하나 안 났습니다.”


   여자는 다세대 주택들이 늘어선 골목에서 백반과 분식을 파는 식당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기름때가 전 테이블에 앉아 맞은편에 앉은 희주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전 화류계 바닥의 룰을 어겼어요. 그래서 이 짓을 하는 거죠. 친구를 팔아먹은 년은 더는 그 바닥 일 못 해요.”
   “룰을 어긴 이유가 있으셨겠죠.”
   희주를 대신해 무원이 물었다. 여자는 다리를 꼬며 무원을 응시했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해석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는 여자였다.
   “세상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남자가 무서웠어요. 덩치가 굉장히 큰… 사실 덩치보다 인상이 더 무서웠죠. 친절한 듯 보이면서 잔인해 보이는 남자였어요. 여차하면 나 같은 건 아무도 모르게 파묻고도 남겠다 싶은 남자였죠. 친구 사진을 보여 주면서 술집 시절 사진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어떻게 생긴 남자였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무원은 녹음 중인 휴대폰을 여자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당시 30대 중반쯤? 더 됐을 수도 있고…. 입술이 얇아서 별로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구레나룻이 굵었는데 일부러 손질한 것 같았어요. 향수 냄새도 진하게 났고. 유독 인상적이었던 게 있는데.”
   “그게 뭐죠?”
   “형사님도 명품 셔츠를 입으시나요?”
   “네?”
   무원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되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자기가 뭘 입었는지 새삼스레 확인했다.
   “그 남자, 톰 브라운 셔츠를 입었어요. 남자 연예인 누가 입어서 유명해진 브랜드였죠. 손님을 받을 때 그런 걸 파악하는 건 기본이니까, 바로 알아봤죠. 형사 월급으로 저런 걸 사 입을 수가 있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무서워서 오줌이 찔끔 나오고 다리가 덜덜 떨리면서도 그게 눈에 들어오다니. 나도 정신 나간 년이지.”
   “그런 건 얼마나 하는데요?”
   희주가 불쑥 끼어들었다.
   “150만 원쯤?”
   “꽤 비싸네요.”
   “비싸죠.”
   여자는 말을 마치고 일어나 떡볶이 철판을 주걱으로 저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무서워요.”
   “뭐가 무서우세요?”
   “경찰 뒤에 더 무서운 사람들이 있다는 거요.”
   “그 남자에게 협박을 당하셨나요?”
   “아뇨. 절 협박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런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돼요. 형사가 나서서 술집 여자를 찾아왔잖아요. 그리고 조폭처럼 말했잖아요. 그럼 그 사람 뒤에 누가 있겠어요?”
   희주는 아무 말 없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미 10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여자는 혈색 없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시선을 살짝 떨어뜨렸다. 그녀의 시선은 빛이 바랜 미끄럼 방지용 주방 슬리퍼에 꽂혔다.
   “…친구가 죽은 거에, 제 탓도 있겠죠. 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나 때문에 죽은 거라고. 걔도 한 번쯤은 평범하게 살아 보고 싶었을 텐데.”


   무원은 빠르게 걸으면서 여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새로운 인물이 튀어나왔다. 이덕식, 주용훈, 최준석, 강희건과 연결되어 있는 제3의 인물, 거구의 형사. 명품 셔츠를 즐겨 입으며 위압감을 주는 체격과 눈빛.
   “10년 전 인상착의만 가지고 찾을 수 있을까요?”
   무원은 대답도 없이 뒤처져서 천천히 걷고 있는 희주에게 다가갔다.
   “선배, 어디 안 좋아요?”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일까? 하지만 착한 인간도 있잖아. 그러면 인간의 본성은 악한 걸까, 착한 걸까?”
   “인간의 본성이 악할 수도 착할 수도 있죠. 애초에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확실한 건 인간의 본성이 어떻든 간에 인간은 언제든지 악할 수 있다는 거예요. 결국 그것과의 싸움인 것 같아요. 악해지려는 자신과의 싸움.”
   희주는 무원의 말을 곱씹었다. 악해지려는 자신과의 싸움. 이덕식과 주용훈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다. 강희건 때문에 자살한 한 여자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다. 차라리 살면서 복수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아기 말이야… 결국엔 소아 중환자실에서 죽었어. 사실 내가 지우고 싶은 기억은, 남자에 대한 게 아니야. 아기가 죽었다는 거, 그걸 지우고 싶어. 아기가 죽지 않고 건강해져서 엄마 품으로 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런 결말은 안 되는 거야? 아기가 엄마와 함께 한국을 떠나 엄마의 고향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그런 평범한 결말은 왜 허락되지 않는 거야?”
   3개월 정직 처분을 받고 공황발작과 폐소공포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 희주는 매일 소아 중환자실로 아기를 보러 갔다. 간호사들은 돌아가면서 아기를 품에 안았다. 마치 그네들의 온기로 아기를 살릴 수 있다고 믿는 선한 천사들 같았다. 아기는 영양실조와 두개골 함몰로 고통받다가, 결국 죽었다.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고작 백일을 살다가 죽었다. 그 생각을 할 때면, 희주는 자신의 머리통이 부서진 듯 아픔이 느껴졌다. 그 상상의 아픔 또한 아이가 당한 고통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나면 심장이 옥죄어들었다.
   “아기 시신을 찾으러 온 사람이 없었어. 죽은 아기를 찾으러 올 만큼 아기를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었어.”
   병원 화장장에서 아기를 화장할 때, 간호사들이 분유와 간식을 같이 태워 달라고 화장장 직원에게 부탁했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세상에서 사는 내내 배고픈 아기였기에 간호사들이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아기를 찾으러 올 사람이 하늘에는 있으면 좋겠네요. 간호사는 마지막으로 소아 중환자실에 들린 희주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게 다예요? 선배가 기억을 지우고 싶은 건 아이가 죽었기 때문이고, 그 최악의 결말 때문이에요?”
   희주의 몸이 흔들렸다. 무원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숨이 막혔다. 이유를 알고 있다. 누가 붙잡고 흔든 것처럼 자신이 휘청거리는 이유를.
   “…아니.”
   “그럼 뭐가 더 있어요?”
   “아기를 때린 남자, 내가 아는 남자였어.”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는 남자라니.”
   무원은 희주의 말이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남자를 만난 적이 있어. 내가… 그 남자를 풀어 줬었어.”
   희주는 최초 신고를 받고 응급실로 출동했다. 그전에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 응급실 당직 의사였다. 늘 피곤하고 시니컬한 의사의 목소리가 그렇게 떨리는 건 처음이었다. 응급실 입구에서 희주를 기다리던 그는 희주를 보자마자 빠르게 말했다. 3개월령 아기예요. 아직 백일도 안 지난 것 같고요. 아기 머리통이 조각조각 나 있어요. 젤리 같이 몰캉거려요. 희주는 러닝화에 알코올을 뿌린 보호 덧신을 신으면서 그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의사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기를 보고 나서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의사가 설명한 그대로였다.
   희주는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는 베트남 아기 엄마에게 남편 전화번호를 물었다. 희주는 의사에게 남편이 오면 사실 확인 몇 가지만 하고 경찰서로 데려가 조사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혹시 아기 엄마에게도 폭행 흔적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옆집에 산다는 중년 여자가 아기 엄마와 함께 앉아 있었다. 여자는 집에서 가끔 뭔가 부딪히는 큰 소리가 났다며, 언젠가는 이 사달이 날 줄 알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생각을 했으면서 어째서 한 번도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은 걸까. 나중에 주변 이웃들을 조사한 담당자에게 들으니 소란한 소리를 들은 것은 중년 여자뿐이 아니었다. 이웃들은 경찰이 방문하자 그제야 반 친구의 비행을 이르는 아이들처럼 다투어 자신들이 보고 들은 폭력의 증거를 내밀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기의 집을 찾아가서 말리지 않았다. 아기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누구도 나와 보지 않았다. 남의 집 부부싸움에 끼어들기 싫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더워서 나가기 귀찮았던 걸까.
   희주는 중년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이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당장 신고만 했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 당신들이 못 들은 척했기 때문에 아이의 머리통이 박살 난 거야. 희주는 분노를 애써 눌렀다. 불길하고 불안한 기분이 등덜미를 타고 내려와 앉지도 못한 채 응급실 안을 서성였다.
   희주는 30분 뒤에 나타난 남자를 보고 놀랐다. 다음 순간, 남자를 때리고 있었다.
   “식당에서 무전취식을 하고 도망치다가 잡힌 남자였어. 신고를 받았을 때 마침 내가 근처에 있어서 현장에 갔거든. 지금 같은 세상에도 돈이 없어 밥을 굶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마음이 안 좋았어. 집에 어린 외국인 아내와 아기가 있다며 잘못했다고 빌기에 돈을 조금 줘서 돌려보냈어.”
   남자는 희주가 준 돈 10만 원으로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 아기를 때렸다.
   “내 어설픈 선의가 끔찍한 결말로 돌아온 거야. 내가 돈을 줘서 돌려보내는 대신, 평소대로 유치장에 처넣었다면, 그날 아기를 때리지 못했을 텐데. 내가 풀어 주는 바람에 그놈은 술을 마시고 집으로 갔어.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기 울음소리가 거슬린다며 리모컨으로 아기 머리를 갈겼어.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야….”
   희주는 말을 마칠 때까지도 무원이 자신이 쓰러지지 않도록 등과 팔을 받치고 있다는 걸 몰랐다.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온 세상이 하얗게 보였다. 희주는 가까스로 몸을 세우고 입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 만날 사람이 있어.”
   “미쳤어요? 지금 정상 아니에요.”
   무원은 한숨을 토했다.
   “이제 괜찮아졌어. 쓰러진 것도 아니고.”
   희주는 정신을 차릴 요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상태로요?”
   “명품 셔츠 입은 형사 찾아야 하잖아.”
   “그래서 누굴 만나려고요?”
   “전남편.”


   16 정보원


   희주는 카페에 들어섰다. 이곳은 정현이 좋아하는 오래된 카페다. 건물마다 하나씩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 같은 곳이 아니다. 정현이 학생 시절부터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는 여기서 파는 달콤하고 고소한 크림을 커피 위에 올려 주는 비엔나커피를 좋아했다. 그리고 늘 비엔나에도 이 커피를 팔까 궁금하다며 꼭 오스트리아 빈에 가 보자고 희주에게 말하곤 했다.
   정현은 한 소년과 마주 앉아 있었다. 열여섯쯤 되었을 소년의 앉은키가 정현보다 컸다. 정현은 분명 좋은 아빠가 되었을 것이다. 희주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두 사람 앞에는 뭔가를 스케치한 종이들이 펼쳐져 있었고, 소년은 정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소년은 종이를 모아 자신의 백팩에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의 시선이 팔짱을 끼고 있는 희주의 얼굴과 눈썹 위 흉터에 머물렀다가 재빨리 땅으로 향했다. 희주는 카페를 나가는 소년의 왜소한 뒷모습을 끝까지 보고 나서야 정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미술 과외라도 시작했나 봐? 지능범죄수사팀 경위 월급으로는 부족해? 연애라도 시작한 거야?”
   정현은 원래 여성청소년과 소속이었다. 그는 불량 청소년들을 계도하다가 미술에 관심과 재능을 보이는 아이가 있으면 따로 만나 진로에 대해 조언을 해 주곤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형사와 문제아가 아니라 삼촌과 조카로 볼만큼, 정현은 진심 어린 태도로 아이들을 대했다. 정현이 그럴 때마다 희주는 경고했다.
   “넌 분명 배신당할 거야. 걔가 맘 잡고 공부해서 미대라도 갈 것 같아? 그림은 SNS에 올릴 거고, 좋아요나 몇 개 받겠지. 그림을 미끼로 또래 여자애를 꾀어낼 수도 있고.”
   그러면 정현은 화내지 않고 나처럼? 이라고 되물었다. 미대를 나와 경찰이 된 정현은 유명한 몽타주 전문가로 활약했다. 프러포즈도 몽타주로 했다. 정현은 희주를 사기 전과 10범쯤 돼 보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조직의 여사장처럼 그렸다. 희주는 그 그림을 받고 결혼을 결심했다.
   정현은 희주 앞에 몽타주를 내밀었다.
   “아까 통화하면서 그려봤어.”
   정현이 그린 것은 식당 여자를 협박한 거구의 형사였다. 짧은 갈색 머리에 구레나룻, 가느다란 입술에 명품 셔츠를 즐겨 입는 50대 중, 후반의 형사. 희주는 몽타주를 집어 들었다.
   “지금 맡은 비리 사건은 어때? 진척은 좀 있어?”
   “산 넘어 산이야. 현직 경찰이 전직 경찰 비리 수사를 하는데 잘 될 리가 없지. 아무도 입 안 열어. 당연해. 본인도 언젠가는 옷을 벗고 퇴직할 텐데, 누가 전직 퇴직 경찰 협회 회장 비리에 대해 털어놓겠어.”
   정현은 퇴직 경찰들의 사조직인 재향경찰회 전직 회장의 자금 횡령 비리를 수사 중이었다. 재향경찰회 거액의 자금이 현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는 보수단체와 유흥업소 업주 모임 등에 흘러 들어갔다는 익명의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 중이었다.
   “주용훈 변호사에 대해 좀 알아봤어. 이름이 낯익더라고.”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희주 앞으로 비엔나커피를 내려놓았다.
   “주용훈은 검사 시절에 뇌물을 받고 몇 건의 일들을 무마했다는 의혹이 있어서 검찰청 내부에서도 조사가 있었어. 하지만 예상대로 흘러갔지.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때가 되자 검사를 관두고 변호사가 됐어.”
   희주는 습관처럼 티스푼으로 커피 위에 구름처럼 얹어진 크림을 떠서 입에 넣었다. 달콤한 크림이 식도를 타고 하루 종일 텅 비어 있던 위로 흘러내려 갔다. 안도감과 편안함이 뱃속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거기까진 일반적인 흐름인데, 변호사는 뭔가 비틀어졌어. 스텝이 꼬이면서 망가지기 시작했어.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좀 돌려 봤더니 다들 비슷해. 술에 우울증에, 거의 폐인 수준이었다는 거야. 그러다가 죽은 거야. 뭔가 있어.”
   “그걸 찾아야지.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현은 희주의 눈썹 위 상처와 눈, 코, 입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희주야.”
   “닭살 돋게 이름은 왜 불러.”
   “그 사건, 손 뗄 수 없는 거야?”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내 사건인데 내가 왜 빠져?”
   “느낌이 그래. 안 좋아. 분명 후유증을 남길 거야. 전직 판사와 검사가 연달아 살해됐고, 돈 많은 어떤 인간과 경찰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일개 경위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일개 경위?”
   희주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정현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처럼 정신이 온전치 않을 때는 맞는 말을 들어도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근데 어쩌지? 난 더러운 걸 보면 못 참잖아.”
   “…그래. 우리가 같이 살 때도 청소는 네 담당이었지.”
   “넌 그딴 거 대충하면 어떠냐는 주의였으니까.”
   “청소 같은 거 대충 대충하면 어때. 난 청소보다 모처럼 같이 비번인 날 너랑 더 재밌는 걸 하고 싶었어. 도시락을 싸 들고 공원에 가거나 한강으로 자전거를 타러 가는 일 같은 신혼부부의 데이트다운 거 말이야.”
   희주는 어디 계속해 보라는 듯 정현을 쳐다봤다. 정현은 졌다는 얼굴로 입을 닫았다. 어차피 희주를 말릴 수 없을 거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네가 정직 처분 받았다고 했을 때 난 다리 뻗고 잤어. 시한폭탄 같은 정희주가 집에만 있다니 정말 속이 편하더라. 근데 다시 현장에 복귀를 했는데 뭔가 재수가 나쁠 것 같은 사건을 맡았다니, 앞으로 발 뻗고 자긴 글렀어.”
   “여자 뒷조사 한 경찰을 찾아야 돼. 강희건은 절대 입 안 열거야. 느낌이 그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인간이야.”
   정현은 체념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정현이 퇴직 경찰의 비리를 수사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희주는 돌파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는 각종 첩보를 수집하는 중이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정보원이 되어주는 익명의 퇴직 경찰들과 은밀히 접촉하고 있었다. 희주는 정현이 알려주는 번호와 주소를 휴대폰에 저장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야? 얼마 찔러 줘야 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믿어도 되는 분이야. 속을 좀 긁는 소릴 해도 대들지 마. 그러면 아마 본인이 아는 선에서 전부 얘기할 거야.”
   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테이블에 양손을 짚었다.
   “커피 다 마시고 가. 언제 또 여길 오겠어.”
   정현이 말에 희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희주야, 우리한테 아이가 있었으면 달랐을까?”
   “또 그 얘기라면 갈게.”
   희주는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난 널 조금만 바꿀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널 그냥 뒀을 거야.”
   “일어나지 않은 일로 자학하진 말자. 네가 아무리 그래 봤자 정희주는 뭔가 트집을 잡아서 이혼하자고 했겠지, 라고 생각해 버려. 아마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니까.”
   정현은 피식 웃으며 쿠션이 다 꺼진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다른 여자 만날 때 써먹으면 되잖아. 드센 와이프 때문에 맘고생 하다가 헤어졌다고 그래. 어떤 여자들은 그런 말에도 넘어간다고 하니까.”
   희주는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마시고 일어났다.
   “조심해.”
   정현은 걱정을 담아 말했다.
   “너 늙었나 봐. 걱정이 늘었어.”
   “농담 아니야. 뭔가 찝찝하면 바로 발 빼.”
   “…알았어.”
   희주는 맥없이 대답했다. 정현 앞에서는 송곳 같은 까칠함을 오래 내세우기가 어렵다.
   “네 직감을 믿어. 정희주 촉 끝내주잖아.”
   “공황장애 약 때문에 그 촉이 무뎌진 것 같지만, 말이라도 고마워.”
   “천사와 악마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을 만난 후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성 안토니오가 말했어. 네가 마주하는 게 천사인지 악마인지 네 감각이 알려 줄 거야. 그걸 절대 무시하지 마.”


   희주와 무원은 2차선 도로 건너에 있는 금은방 ‘보성당’을 바라보았다. 한자로 적힌 보성당 간판의 불이 저녁 7시에 맞춰 들어왔다. 왠지 좋은 신호 같았다.
   “무슨 느와르 영화 주인공 같네요.”
   무원이 말했다.
   “30년 경찰 생활을 마치고 동네 금은방에 앉아서 탐정 노릇을 한다는 거잖아요. 우린 그 재야의 고수한테 한 수 배우러 가는 풋내기 형사들 같고.”
   “탐정업도 합법으로 통과된 마당에 나도 퇴직하고 탐정이나 할까?”
   보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익수가 앉아 있다가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눌린 코에 흰 코털이 삐져나와 있고 허옇게 센 머리와 염색한 머리가 뒤섞여 있었다. 희주는 이덕식 집에서 본 시추가 떠올랐다. 나이든 시추 얼굴을 한 엄익수는 회색 여름 양복바지에 회색 골프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별로 호감을 느낄 부분이 없는 늙은 남자에게 희주가 딱 하나 마음에 든 것은 시추처럼 슬픈 갈색 눈이었다. 엄익수는 희주와 무원을 재빠르게 훑어보고는 약간 애매한 얼굴이 되었다.
   “김정현 경위 소개로 왔습니다.”
   엄익수는 희주의 말에 헛, 소리를 내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어째 신혼부부처럼은 안 보이더라니.”
   그러면서 희주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김정현이랑 갈라섰다는 여자가 누군가 했더니.”
   무원이 희주를 힐끔 보았다. 예의 없는 노인네를 향해 희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희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귀금속들이 줄지어 누워 있는 유리 진열대 앞에 앉았다. 엄익수를 닮아 낡아빠진 등받이 없는 의자에서 쇳소리가 났다.
   “형사 은퇴하시고 금은방이라, 별 볼 일 없네요.”
   희주는 참지 않고 되갚았다. 하지만 엄익수는 희주의 도발에 꼼짝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
   “길 건너 골목 안쪽에는 은퇴한 마약단속반 형사가 중고 책 서점을 해. 가끔 만나서 둘이 막걸리 한잔하지.”
   무원은 진열장에서 반지 하나를 발견하고 손으로 짚었다.
   “이건 뭔가요?”
   “경찰 퇴직 기념 순금 반지. 강력팀도 은퇴하면 금반지를 해 주지?”
   “네.”
   “그거 여기서 하는 거야.”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연줄이야. 경찰 연금은 마누라 통장으로 들어가니 마누라가 관리하고, 가게는 내 막걸릿값이나 벌려고 열어 둔 거야. 그러다가 너희 같은 인간들이 와서 귀찮게도 하고.”
   “김정현 경위랑 어떤 사이세요?”
   희주가 물었다.
   “왜? 내가 김정현 물이라도 먹일까 봐? 걘 내 팀원이었어. 경찰만 아니었음 사위 삼고 싶은 놈이었는데, 왜 하필 경찰로 만나서는. 다 틀렸지. 지금은 언제든지 열리는 내 지갑 같은 놈이자 술친구야. 니들이 마음에 들어서 협조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 둬.”
   “저희를 싫어하시든 좋아하시든 상관없어요. 저는 여자 협박한 형사가 누군지만 알면 돼요.”
   “조정배.”
   너무 쉽게 이름이 나왔다.
   “세상 어떤 미친놈의 형사가 현장에서 가면서 기백만 원 짜리 남방을 입어, 시장 매대에서 3장에 만 원 하는 걸 사서 책상 서랍에 넣어 놓고 입고 버리는 게 강력팀 형사인데. 안 그래?”
   “그렇긴 하죠.”
   희주는 책상 밑에 처박아 둔 쇼핑백을 떠올렸다. 그 안에는 지금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검정색 나이키 반팔 티셔츠 3벌이 들어 있다.
   “조정배는 그때도 유명했어. 셔츠는 어디 거, 지갑은 어디 거. 우리는 들어도 모르는 명품만 갖고 다녔어. 그래서 전화 받았을 때 바로 그놈이 떠올랐지.”
   “솔직히 너무 금방 답이 나와서 맥이 풀리네요.”
   “그런 맛도 있어야지. 백날 길바닥에다 버리는 시간이 절반인데.”
   희주는 엄익수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현역 시절 엄식수는 한 놈이라도 더 잡아들이기 위해 자기 인생 절반을 기꺼이 길바닥 위에 바쳤을 위인이었다.
   “그때가 좋았지. 마누라가 보름에 한 번씩 내 자리 서랍에 새 셔츠를 채워 줬어. 밥숟갈이랑 이불 한 채 밖에 없던 쥐뿔도 없는 집안 살림이 좀 피고 나서는 홍삼도 같이 끼워줬지. 지금은 내가 여기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걸. 마누라는 내가 현역에 있는 동안 집에 안 와도 좋고 애들이 어떻게 크는지 몰라도 상관없는데 동료들이 집에 찾아오게만 만들지 말라고 했어. 어느 날 현관문을 열었는데 나 없이 내 동료들이 서 있으면 그건 분명 무슨 일이 난 거니까. 경찰관 마누라라면 누구나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물론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보낸 마누라한테 연금 통장 정도는 줘도 돼. 그 돈으로 옷을 사 입든 가방을 사서 들든 난 상관 안 해.”
   엄익수는 말을 마치고 목에 낀 가래를 내리려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 인간 얼마 전에 요트를 샀다고 자랑하던데.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인스타그램도 할 줄 아세요?”
   “할 수 있는 건 다 하지. 내가 남들 뒷구멍이나 캐고 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짓도 만만치 않아. 남들 하는 건 다 해야 돼. 아니, 남들 하는 것보다 배는 더 해야 좀 쓸 만한 소리가 귀에 들어와. 조정배 요트를 누가 사줬는지 확인해 봐. 조정배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고 다들 부러워했어. 다들 집에서 마누라들이 들들 볶잖아. 박봉에, 집에도 안 와, 애도 안 키워. 형사들이 은퇴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뭔지 알아? 이혼하자는 마누라 치마꼬리 잡는 거야.”
   “용케 잘 버티셨네요?”
   “나야 잘 버티지. 그게 내 일이었는데. 진작 김정현이랑 잘 헤어졌어. 어차피 늙으면 갈라설 거. 그놈이 사근사근한 맛은 있는데 여자 휘어잡는 맛은 또 없지. 보아하니 휘어잡을 수도 없는 여잘 골랐구먼.”
   “혹시 강희건 대표 본 적 있으세요?”
   엄익수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 라인 아냐.”
   “그럼 그 라인은 누가 잡았어요?”
   “맨 밑에 조정배. 그 위에는 지금 니 대가리.”
   “오치상 팀장이요?”
   “그래. 그리고 오치상 위에 지금은 팔에 시답잖은 완장 하나 차고 돌아다니는 최준석이 있었어. 그때 최준석이 팀장이었지.”
   엄익수의 입에서 여러 이름이 나왔다. 하지만 낯선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강희건을 위해 여자 뒷조사를 한 건 조정배고 그 위에는 오치상과 최준석이 있었다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별장의 가사도우미 일을 제안한 건 오치상과 최준석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정보원 일은 왜 하시는 거예요? 돈을 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돈? 돈 때문에 자네 같음 이걸 하겠어? 한때 동료였던 인간들 이름을 파는 이 일을?”
   “그럼 왜 하세요?”
   “생각해 봐, 나이가 들어서 총도 없고 배지도 없고 마누라한테 버림받은 경찰만큼 딱한 존재가 어디 있어. 인생 무의미해지는 거 순식간이야. 퇴직 경찰들 자살률이 엄청 높은 거 알아? 근데 더 슬픈 건 자살 시도를 저지르는 경찰들에게는 대부분 경고의 징후를 감지할 만한 가족이 없다는 거야. 대다수가 너처럼 이혼을 했지. 난 운이 좋아 살아있는 거고.”
   엄익수는 갈색 눈으로 희주와 무원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에게서 젊었을 때의 자신을 모습을 찾는 눈이었다. 갈색 눈동자가 빛났다가 다시금 어두워졌다.
   “조심해.”
   엄익수는 정현과 똑같은 소리를 했다.
   “그게 가능한가요? 범인 잡으러 다니면서 조심한다는 게.”
   “그게 아니라, 형사들 쑤시고 다니는 거 조심하라고. 은퇴한 입장에서는 갑자기 과거 일, 과거 동료에 대한 질문을 받는 것 자체가 비상이야.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거니까. 만약 네 윗대가리가 널 불러서 딴 사건을 맡기면 일이 복잡해졌다는 뜻이야. 그리고 켕기는 게 있으면 널 그냥 안 두겠지. 그걸 조심하라는 거야.”
   희주는 빨리 판사와 변호사를 죽인 놈을 찾아내라며 펄펄 뛰는 오치상을 떠올렸다. 오치상은 본청에서 퇴직하고 싶어 제대로 된 한 방에 목을 맨 인간이었다. 범인 검거가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달, 본청에서 할 감동적인 은퇴식과 더 높은 액수의 연금 때문이었다.
   “악은 가까이 있을 때 더 찾기 어려워. 가장자리가 흐릿해지고, 핵심은 보기 어렵지. 유다가, 선한 이스가리옷 유다가 배반자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제자들은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유다가 배반을 했다고? 결코 누구도 걔는 그럴 줄 알았다고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야. 우리 인간은 가까운 악을 외면한다고, 본능적으로.”
   엄익수는 희주에게도 무원에게도 아닌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잠자코 있던 무원이 입을 열었다.
   “저한테는 뭐 해 줄 말씀이 있으세요?”
   엄익수는 슬픈 갈색 눈으로 무원을 보며 말했다.
   “강력반 형사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직업이지.”
   “네?”
   “형사라는 직업은 말이야, 인생에서 투명 망토 같은 역할을 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하도 나와서 형사의 애환과 고뇌는 이제 코 찔찔 유치원 애들도 다 알지. 어디 가서 형사라고 하면 어지간하면 다들 술술 불잖아. 게다가 살림도 애 키우는 일도 전부 뒷전으로 미뤄도 누가 뭐래? 형사는 항상 나쁜 놈을 잡느라 불철주야 바쁜 사람이라는 걸 이 세상 사람이 다 안다고. 마누라도 그걸 아니까 바가지를 안 긁는 거야. 그러니까 불평 말고 즐겨. 더 열심히 하란 말이야. 한 번이라도 현장에 더 가 보라고. 이 나이쯤 되면 뭐가 제일 후회되는 줄 알아? 결국 뭐라도 더 해 볼걸, 하는 생각에 막걸리를 안 마시고는 버틸 재간이 없어진다고.”


   17 금고 속 권총


   경찰서로 돌아와 사건을 복기했다. 책상 위에서는 메모도 사건 파일도 없다. 누가 보면 희주가 자고 있거나 멍을 때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희주는 의자에 앉아 너저분한 책상에 발을 올렸다. 하루 종일 탐문을 다니고 돌아와서 한동안 그렇게 있는 것이 습관이었다.
   “팀장한테 말할 거예요?”
   무원이 30분째 같은 자세로 눈을 감고 있는 희주에게 말했다.
   “뭘?”
   “보성당 사장님한테 들은 거요.”
   “아니. 팀장이 몰랐으면 좋겠어.”
   “왜요?”
   희주는 눈을 뜨고 자신의 책상에 기대 서 있는 무원을 올려다보았다.
   “촉이 그래. 팀장이 몰라야 할 것 같아. 그 인간이 뭘 알든, 피해자들과 무슨 관계가 있든 우리가 자기에 대해 모른다고 믿게 하고 싶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날 싫어하니까 나한텐 안 물어봐도, 너한텐 뭐하고 돌아다니는지 물어볼 수 있어.”
   “생각하고 있을게요.”
   무원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팀장은 분명 강 대표하고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일 거야. 강 대표하고 조정배는 절친이었겠지. 비슷한 부류니까.”
   “보성당 사장님 말을 다 믿어요?”
   “난 그 영감님보다 전남편을 믿어. 그 사람이 소개한 사람이니까 믿는 거야.”
   “그럼 그 말도 맞아요?”
   “뭐?”
   “선배더러 휘어잡기 힘든 쪽이니 뭐니 한 거요.”
   희주는 뚱한 얼굴로 무원을 응시했다.
   “일 얘기 하다 말고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퇴근 시간 한참 넘었으니까 상관없잖아요. 오늘은 애인이랑 데이트 안 해요?”
   “선 넘지 말라고.”
   “데이트 없으면 저랑 밥이나 먹어요.”
   “…의외네.”
   “뭐가요?”
   “애인 있는 여자한테 밥 먹자고 할 타입으로 보이진 않는데.”
   “파트너랑 밥 한 끼도 못 해요? 그럼 거절하세요.”
   “….”
   “그런 타입 별로면.”


   다음 날 희주는 대전으로 향했다. 경찰스트레스장애학회 사무실은 대전의 모 대학 부속 건물 안에 있었다. 최준석은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오다가 희주를 발견했다.
   “저도 정년퇴직하면 회장님처럼 살고 싶네요. 될까요?”
   그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희주를 무시하고 학과 사무실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존경받는 교수님, 어린이들한테는 친절한 보안관, 학회에서는 경찰공무원과 피해자 인권 신장에 앞장서는 분.”
   최준석은 갑자기 멈춰 서 노기 띤 눈으로 희주를 노려보았다.
   “회장님 정년 퇴임하던 날 기억이 나네요. 자제분들이 감사패 만들어서 찾아오셨죠. 회장님은 그걸 받고 우셨고요. 내가 헛살지 않았다는, 한평생 괜찮은 경찰이었다고 확인받은 기분이 드셨겠어요. 제 예상이 맞나요?”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근데 존경받는 회장님을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까요? 조사해 보니, 존경받는 판사님, 검사님도 꽤나 악명이 높았던데. 회장님은 요새 편히 주무시나요?”
   신경질적인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드리워졌다. 희주는 학교에서 최준석을 처음 만났던 때보다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용건만 말하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피해자들의 문제는 뭐였습니까? 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했죠?”
   최준석은 대답하지 않은 채 건물을 빠져나갔다. 희주는 뒤를 쫓으며 계속 말했다. 최준석이 대답을 회피한다는 것이 어떤 신호로 느껴졌다.
   “주용훈 변호사는 살해당하기 전에 기습을 당했습니다. 벽돌로 뒤통수를 맞았어요. 범인은 못 잡았고요.”
   최준석이 우뚝 멈춰 섰다.
   “회장님이 강력팀 팀장이던 시절 만약 부하들이 일탈을 했다면 회장님은 모르셨을까요, 아님 알고도 덮으셨을까요? 예를 들어 형사가 돈 많고 유명한 연예기획사 사장의 사주를 받아서 뒷조사 같은 걸 했다면요.”
   “…나한테 이러는 거 아주 실례야. 자네 이러는 거 오 팀장도 알고 있나?”
   “곧 아시겠죠. 제가 사라지고 나면 전화하실 테니까요.”
   최준석의 반응은 예상보다 약했다. 만약 그가 정말 결백하다면 경비원을 불러 희주를 끌어내라고 하던지, 당장 오치상에게 전화를 걸어 저 화상 같은 물건을 치우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맥없이 희주의 공격을 받아 냈다. 희주는 그가 뭔가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의 자신감 없는 태도, 분노가 아닌 당혹감이 지배하는 그의 태도에서 그가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감청색 차고 문이 열렸다. 최준석은 차고 안으로 올 초 새로 뽑은 검정색 볼보 XC90을 천천히 주차했다. 한국에서 살 수 있는 차 중에 가장 안전한 차라는 젊은 딜러의 말에 두말없이 구입을 결정했다. 안전함. 차를 운전할 때마다, 평생을 위험 속에서 일하다가 이제야 안전한 노년을 보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텅 빈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내는 얼마 전 출산한 딸 때문에 집을 비웠다. 오전 시간에 가사도우미가 들려 청소와 빨래, 다음 날 아침 식사까지 해 놓기 때문에 집은 아내의 손길 없이도 늘 깔끔했다. 각종 감사패와 경찰 정복을 입고 은퇴 전에 찍은 사진, 딸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박사를 따서 한국에 돌아와 찍은 가족사진이 즐비한 장식장 안과 밖에도 먼지 하나 없었다.
   그는 서재로 들어갔다. 가사도우미에게 서재는 청소하지 말라고 일러둔 탓에 서재 문을 열 때마다 약간의 퀴퀴한 체취와 먼지 냄새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서재 안에 값나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금고를 들였다. 청와대에 들어가는 금고를 만들었다는 유명 금고업자에게 의뢰를 해서 6개월을 기다린 끝에 금고를 받았다. 장식용으로 꽂아 놓은 책을 몇 권 뽑자 책장 안쪽에 넣어둔 가로세로 높이 45cm 크기의 금고가 나왔다.
   매일 똑같은 밤이다. 인기척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 거실을 지나 서재로 들어와 시간을 보내다 혼자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오늘은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자주색 벨벳으로 감싸 놓은 권총을 꺼냈다. 권총은 퇴직 전 구했다. 이걸 쓸 날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현역 시절에도 진짜 총을 쏴 본 적은 없었다. 아내는 농담처럼 금고 안에 이혼 서류와 비상금을 넣어 두었냐고 물었다.
   최준석은 총을 들고 침실로 갔다. 그리고 침대 옆 베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현관문에서부터 서재, 거실, 주방, 부부침실, 딸이 쓰던 2층 방,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창고로 쓰는 방 등 집안 구조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시야 안에 집의 모든 공간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싫었다. 침실에 있으면 2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방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그의 마음 어딘가를 계속 불편하게 했다. 이 집의 주인은 바로 나인데 이 집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게 별로였다. 하지만 아내가 이 동네의 이 집을 고집했다.
   그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완벽히 차단하는 고급스럽고 무게감 있는 두툼한 에메랄드색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행인도 오가는 차도 없는 부촌의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밝은 가로등은 주민들의 요구였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지 알아보기 위해서. 하지만 자정을 넘긴 창밖이 이토록 환하고 머리맡에는 권총이 있다는 것이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는 커튼을 닫았다.


   전곡항은 썰물 때도 물이 빠지지 않아 요트 천국으로 불렸다. 무원은 엄익수가 알려 준 요트 사진을 들고 조정배의 요트를 찾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드론이 주말 동안 항구를 찾은 사람들과 요트 위를 날았다.
   “선배, 봤어요?”
   “뭘?”
   “방금 우리가 지나친 요트요.”
   “그게 왜?”
   “얼마 전에 유명한 재벌 2세 요트라고 TV에 나왔는데. 5억이라던가? 아무튼 국내에서 제일 비싸다던데.”
   “그거 사 놓고 타러 오기는 하려나.”
   “일단 샀다는 게 중요하죠.”
   무원은 금세 조정배 요트를 찾아냈다. 요트는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좋았다.
   엄익수의 평에 따르면, 조정배는 은퇴 경찰의 ‘표본’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동료들보다 조금 일찍 옷을 벗은 다음 논현동 한복판, 연예기획사와 성형외과, 명품 편집매장과 웨딩드레스 매장이 공존하는 알토란같은 곳에 보안 전문회사를 차렸다. 그가 설립한 회사는 각계각층 부유층들의 저택에 보안 시설을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사업체였다.
   20년의 형사 시절에 쌓은 인맥은 돈과 술과 여자를 통해 현재까지도 잘 이어져 왔다. 가진 게 많아 지킬 게 많은 사람들은 조정배를 불러 고가의 보안 설비를 자택에 설치했다. 조정배는 고객의 집을 방문해 정기적으로 직접 설비 점검까지 하는 열정을 보여 줬다. 2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VVIP 고객은 직접 관리했다. 특유의 깔끔한 성격과 경찰 시절에도 명품 셔츠를 입고 다닐 정도로 유난스러운 면이 오히려 고객들에게 장점으로 통했다.
   조정배의 요트에서 한낮의 샴페인 파티를 끝낸 여자와 남자들이 나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희주와 무원을 지나쳐 지나갔다. 알코올 냄새와 향수 냄새, 그것들을 모두 합친 돈 냄새가 그들이 지나가고 나서도 잔상처럼 남았다.
   희주는 요트에 올라가지 않고 허리를 숙인 채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안에 조정배가 있었다. 그는 요트를 떠난 사람들이 남긴 음식과 술을 혼자 먹고 있었다. 자기 식욕을 제어할 수 없는 사람처럼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기에 바빠 보였다. 마치 음식물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처박는 듯한 몸짓이었다.
   “강남서 강력팀 정희주 경위입니다. 잠시 나와 주시겠습니까?”
   조정배는 고개를 들어 희주를 바라보았다. 엄익수가 보여 준 사진에서 본 것보다 더 비대해져 있었다. 그는 희주와 무원을 번갈아 보다가 원래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잔에 남은 샴페인을 전부 입에 털어 넣고 은색 쟁반 위에 가득 놓인 작은 브로치 같은 핑거 푸드를 쉼 없이 쓸어 넣었다. 조정배는 테이블 위에 놓인 걸 다 해치운 다음에야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강희건 대표 잘 아시죠? 유명 연예기획사 대표와 전직 경찰이 형 동생 할 수 있는 비결이 뭔가요?”
   희주는 밖으로 나온 조정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략적 파트너십.”
   대답 또한 바로 나왔다. 풍채만큼이나 당당하고 여유로운 태도.
   “스타리온 보안 설비를 우리 회사에서 했으니까.”
   “현역 시절에는 강 대표를 위해 가사도우미 뒷조사도 하셨죠. 덕분에 강 대표는 혐의 없음으로 풀려났고요. 요즘도 그를 위해서 일하시나요?”
   조정배는 두툼한 손을 들어 술로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문질렀다. 마치 그 손으로 희주를 후려갈기려다가 방향을 트는 것처럼 손을 높이 들었다가 뒤통수로 가져갔다.
   “이덕식 판사님, 주용훈 변호사님과도 형, 동생 하던 사이인가요?”
   “고매하신 판검사분들이랑 무슨 대화가 통하겠어. 치상 형 밑에 있는 애군. 그 옆에 달고 온 건 뭐, 애인이야?”
   “이무원 경사입니다.”
   “날 찾아온 걸 형은 모르겠지?”
   “이제 아시겠죠. 저희가 가면 직접 전화해서 알리실 테니까요.”
   조정배는 거칠게 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 거야. 그리고 우린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희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덕식의 아내였다. 예상하던 일이었다. 희주는 그녀가 한 번은 다시 연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날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그녀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마치 남편을 잃은 여자를 연기하는 여배우처럼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가 있었다.
   희주가 만난 수많은 목격자, 피해자와 가해자의 지인들도 똑같이 행동했다. 누구나 자기 집 거실에서 경찰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다 보면 초조해지기 마련이다. 본인이 용의자이든 아니든 간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떠올리고, 혹시 경찰의 질문이 그 일을 캐내기 위한 유도신문은 아닐지 고민한다. 그러다 경찰이 떠나고 며칠, 심지어는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당시에는 미처 말하지 못했던 기억을 말하기 위해 연락을 했다. 이덕식의 아내도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 전화를 했을 것이다. 희주는 조정배를 무원에게 맡기고 자리를 피해 전화를 받았다.
   “…하나 걸리는 기억이 있어서요.”
   남편이 죽어도 꼿꼿하게 앉아 있던 여자의 목소리가 잔뜩 쉰 상태였다.
   “오래전 일이에요. 남편이 젊었을 때 TV에도 나온다는 유명인의 초대를 받고 별장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보나 마나 딸아이 또래도 되지 않는 여자를 끼고 진탕 마셨을 게 뻔해서 다음 날 집에 온 남편한테 화를 냈지요.”
   강희건. 별장. 여자. 파티. 판사. 그리고 가사도우미. 희주의 머릿속에 단어 몇 개가 일렬로 늘어섰다. 그것들을 합치면 뭐가 나올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런데 남편이 좀 이상했어요. 평소 같았으면 제 잔소리를 듣고 버럭 화를 낼 텐데, 그날은 다신 별장에 안 갈 테니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나오니 저도 더는 묻지 않고 처신 잘하라고, 어디 가서 약점 잡혀서 딸자식 앞길 막으면 참지 않을 거라고 하고 말았어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남편이 며칠 동안 잠을 잘 못 자고 힘들어 했어요. 혈압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우는 걸 보고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만 했어요. 묻지 않았어요. 솔직히 알 자신이 없더군요.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요.”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게 판사 사모님의 고매한 자존심을 지켜 줘서일까. 여자는 지난번보다 솔직했다.
   “사실 남편은 초대를 받고 엄청 들떠 보였어요. 애써 감추려 했지만 집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양반이 별장 주인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아느냐며 제게 자랑했죠. 드디어 자기와 급이 맞는 이들과 어울린다면서요. TV에 나오는 여배우를 보면서 저 애들이 바로 별장 주인이 공들여 만든 애들이라며 그게 마치 본인 일인 양 뿌듯해하기에 어이가 없었죠.”
   “별장에 다녀온 뒤로는 다시 강희건 대표를 만나지 않았나요?”
   “남편을 초대한 사람 이름이 강희건인가요?”
   “정황상 그렇습니다.”
   “또 만났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남편이 원하는 대로 제대로 그 사람들과 엮이질 못한 건지, 남편이 초대를 거절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희주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요트 앞에 서 있는 조정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까 요트에서 나온 늘씬한 여자들을 떠올렸다.
   “혹시 남편분께서 요트 이야기를 한 적은 없으신가요? 선상 파티라던가.”
   “…그 일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희주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의미로 침묵했다. 여자가 긍정으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남편은 여자가 있는 술자리를 참 좋아했어요. 판사 시절에도 마다하지 않았죠. 얼마 전에는 갑자기 낚시를 시작했다면서 낚시를 가르쳐 준다는 남자를 집에 데리고 왔어요. 친한 동생이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다 나중에 핑계를 대기 위함이라는 걸 알았죠.”
   “어떤 남자였는지 기억하세요?”
   “물론이에요. 명품 스카프를 하나 가져왔어요. 와이프 것을 사면서 제 것도 하나 샀다고 센스 있게 말하더군요. 몸집이 굉장히 커서 왜소한 남편이랑 나란히 서 있는 걸 보면 기가 막혔죠. 차고 있는 시계나 입고 있는 양복, 전부 다 고급이었어요. 그 남자 요트에서 낚시를 한다더군요. 남자가 가고 나서 남편이 스카프는 와이프 것이 아니라 애인 거라고, 회사 바로 옆 헬스장에서 일하는 여자를 애인으로 뒀다고 했어요.”
   “스카프를 들고 사모님 댁을 찾아간 건 조정배라는 전직 경찰입니다. 강희건 대표와도 물론 친분이 있고요.”
   “다 연결이 된 거군요. 은퇴하고 나서는 불러 주는 데가 없으니 술을 마실 핑계가 없었을 텐데, 낚시를 핑계로 젊은 여자들과 어울렸죠. 호텔에 간 것도… 누가 그걸로 불러낸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우습더군요. 어린애처럼 들떠서는 갔을 남편을 생각하니.”
   “다시 전화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아뇨. 그다지 고통스럽진 않아요. 다만 내 처지가 딱한 것 같아서 그게 힘드네요. 연애 시절에도 한 번 가 본 적 없는 호텔방에서 남편이 죽었다니. 자식들 마주하기 민망해요. 내 인생 전체가 우스워졌으니까요.”


   희주와 무원은 전곡항에서 출발해 논현동에 있는 조정배의 회사로 갔다. 목적지는 회사가 아니라 회사 옆 건물에 있는 헬스장이었다. 밖에서도 저 안이 헬스장이라는 걸 훤히 할 수 있도록 전면이 유리창인 헬스장에서 몸매 좋은 남녀들이 트레이드 밀 위에서 달리고 있었다.
   여자는 카운터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다가 희주와 무원이 들어오자 일어났다. 아이라인을 길게 뺀 여자의 눈이 희주를 지나 무원에게 멈췄다. 희주는 무원 뒤로 슬쩍 물러났다. 무원이 가진 장점이 이런 데서 발휘되는 게 흥미로웠다.
   “강남경찰서 강력팀 이무원 경사입니다.”
   여자는 무원이 경찰이라는 걸 알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원이 조정배 사장과 친분이 있냐고 묻자 바로 이쪽을 보는 다른 트레이너들을 힐끔 보았다.
   “…여기 찾아오신 거 사장님도 아세요?”
   “아니요. 마음에 걸리시면 사장님과 통화하셔도 됩니다.”
   여자는 고양이처럼 등을 구부려 어깨를 움츠렸다.
   “됐어요. 여기 찾아오셔서 저 만난 거 그 사람한테 말하지 마세요.”
   여자는 앞서서 헬스장을 나갔다. 그리고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무원은 희주가 음료를 사러 간 사이, 자신들이 왜 찾아왔는지 설명했다. 살해당한 이들과 관계된 여러 명의 사람들. 그 속에 조정배가 중요한 인물로 존재한다는 것까지.
   “사장님이 지난달에 자살 시도했던 거 아세요?”
   “네?”
   “처방받아 온 우울증 약을 한 번에 먹었어요. 두 달 치였는데.”
   희주는 아까 만난 조정배의 눈빛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 누구보다 생에 대한 의지가 넘쳐 보이는 정력적인 사내와 우울증 약이 곧바로 연결되진 않았다.
   “혹시 직접 발견하셨나요?”
   “네. 택배 기사한테 전화가 와서 알았어요. 사무실로 가끔 서핑 보드가 배달 오는데, 비싼 거라 웬만하면 본인이 직접 받아요. 근데 사장님이 전화를 안 받으니까 택배 기사가 저한테 전화를 한 거예요. 가끔 제가 받은 적도 있거든요.”
   “그래서 대신 사무실 문을 열어 주셨군요.”
   “네.”
   “언제부터 약을 먹었는지 아시나요?”
   “정확히는 몰라요. 오래됐다고 했어요.”
   “왜 먹는지 물어보셨나요?”
   “처음 만났을 때 물어봤어요. 겉으로 봐서는 전혀 그런 것에 의지할 것 같지 않잖아요. 지금은 살이 좀 쪘지만 처음 만났을 땐 몸도 좋았어요.”
   “근데 우울증 약을 먹어서 좀 놀라셨군요.”
   “네. 술도 매일 엄청 마셨고요. 한 번에 와인 서너 병은 순식간에 사라졌죠.”
   “이유를 말하던가요?”
   여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창밖을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헬스장 안에서 보이지 않던 여자의 눈가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여자가 아이라인을 세게 그리는 건 그 주름 때문인 것 같다. 속사정은 물을 필요 없지만 명품을 좋아하는 전직 경찰과 연애 중인 여자. 뭘 약속받았을까. 아내와의 이혼 후 제대로 된 집에서 함께 사는 인생 같은 걸 조정배가 약속했을까.
   “아주 예전에 뭘 봤는데… 그게 어떻게 해도 잊히지 않는데요. 옛날 일인데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난다고.”
   그러면서 여자는 자신의 양손을 활짝 펼쳤다.
   “이 손에 그날의 느낌이 생생하다고 했어요. 그게 자길 미치게 만든다면서요.”


   18 비틀스의 노래


   외과 수술용 라텍스 장갑을 낀 오른손이 최준석의 목을 단단히 잡아챘다. 새벽 3시, 냉장고에서 꺼낸 유리병에 담긴 물을 마시려는 순간이었다. 최준석은 물이 찰랑거리는 유리병을 놓쳤다. 유리병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맥없이 깨졌다. 텅 빈 집에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잠깐 울렸다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두려움에 떨 여유도 없다. 터질 듯 팽팽한 라텍스 장갑이 목을 조르는 순간, 거의 반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목을 죄던 손이 풀어졌다. 그리고 최준석의 횡격막에 짧고 매서운 주먹을 연타로 날렸다.
   “커헉….”
   저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이 밀려 나왔다. 두툼한 팔뚝이 그를 감싸 안은 상태로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최준석을 등받이가 달린 화장대 의자에 앉혔다.
   최준석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화장대 거울을 노려보았다. 침대 옆 베드테이블 위에 권총이 있다. 혹시라도 상대가 권총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양쪽 손목이 의자 뒤로 끌어당겨졌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이 그의 양 손목을 의자 등받이에 강력 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순식간에 양쪽 손목이 의자에 고정되었다.
   최준석은 괴한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눈을 부릅뜨고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려 애썼다. 그러자 두툼한 손이 최준석의 목과 경동맥을 또다시 조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흐려졌다. 손이 점점 목을 파고들었다. 눈알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극도의 공포감에 괄약근의 긴장마저 풀릴 것만 같았다. 눈앞과 머릿속이 암전 상태가 되자 목을 조른 손이 떨어졌다. 최준석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조정배의 애인이 카페를 떠난 후, 희주와 무원은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조정배도 트라우마 삭제를 했다는데 내 왼손을 걸겠어.”
   “동의해요. 분명 최준석 회장을 통해 빅에 접촉했을 거예요.”
   “그럼 최준석 회장은? 오치상 팀장은?”
   “음, 이건 그냥 제 느낌인데.”
   “말해 봐.”
   “두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는 부류 같아요. 그저 지나간 과거 취급 하면서 별로 맘에 담아 두지 않을 것 같은?”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해. 강희건도 마찬가지일 거야. 자기 자신을 미치도록 아끼고 사랑하는 인간이 울면서 기억을 지워 달라고 하는 장면은 전혀 상상이 안 돼.”
   “하지만 결국 세 사람이 핵심이겠죠.”
   “그리고 가장 난공불락이지.”
   “결국 죽은 사람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을까요?”
   “도대체 뭐 때문에 망가진 거지? 같이 잘 먹고 살 살던 사람들이 왜? 이게 전부 우연이라고 생각해?”
   “이덕식 판사는 노이로제에 가까운 의심병과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주용훈 검사는 약과 술에 중독된 상태였죠. 그리고 조정배는 파티 중독에 알코올 중독이고, 최근 자살 시도를 했고요.”
   “그 사이에 최준석이 있어.”
   “그럼 팀장의 역할은 뭐였을까요?”
   희주는 초조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담배 있어?”
   “선배 담배 안 피우잖아요.”
   “그냥 들고만 있으려고. 있어, 없어?”
   “없어요.”
   희주는 김이 샌 표정으로 무원을 바라보았다.
   “원래 피우지 않았어?”
   “선배 쉬는 3개월 동안 끊었어요.”
   희주는 놀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안 피우는 인간은 있어도, 중간에 끊을 수 있는 재수 없는 인간이 있단 말이야?”
   “참을 만해요.”
   “말도 안 돼. 넌 진짜 정상 아니야.”
   “선배랑 같이 다니는 동안에는 담배 생각 안 나던데요?”
   “형사한테 중독은 권장할 만한 습관이야. 물론 몸은 망가지지만 집요하지 않은 형사는 범인을 잘 못 잡으니까. 잘 나가는 야구선수 중에 도박에 중독되지 않은 인간이 없다는 거 알아? 같은 맥락이지.”
   “그럼 선배는 뭐에 중독되어 있어요?”
   “분노.”
   무원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화가 나 있는 상태는 정말 싫은데, 또 그게 내가 움직이는 동력이 돼.”
   “…차라리 담배를 시작하세요.”


   그날 밤, 희주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오피스텔 창문 밖으로 보이는 노래방 간판을 노려보았다. 노래방 간판 불빛 때문에 블라인드를 쳐도 집은 완벽하게 어두워지지 않았다. 노래방 간판은 새벽 3시가 되자 꺼졌다. 며칠째 그걸 지켜보는 중이었다. 새벽 3시. 먼 곳에서 들리는 앰뷸런스 사이렌이 불안하게 들리는 시간. 세하에게 전화가 온 것은 사이렌 소리가 한바탕 지나간 다음이었다.
   “이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나 해도 될까요?”
   “네. 무슨 얘기든 좋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빅을 설립한 직후였죠. 이십 대 초반의 아름다운 미대생이 절 찾아왔습니다. 기억을 지우고 싶다면서요.”
   희주는 세하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억 대본을 듣다가 혀를 깨물며 발작했습니다. 그걸 남의 목소리로 듣는 것조차 허락할 수 없었던 거죠. 그녀는 저를 찾아오기 전에, 작업실에서 세밀한 조각을 할 때 쓰는 갈고리 모양의 소형 조각칼을 삼켰습니다.”
   “….”
   희주는 심장박동이 빠르게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거부했습니다. 주치의는 강제 급식을 결정했고, 두 명의 남자 간호사가 그녀를 억지로 눕히면 다른 간호사가 고무 급식관을 목에 넣고 액상으로 된 영양물질을 위장에 흘려 넣었습니다.”
   “듣기 괴롭네요.”
   “그렇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왜 그렇게까지 물리적으로 그녀를 압박했는지 의사로서 이해할 수 없지만… 부모의 동의하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녀는 부모 앞에서 당장 퇴원을 시켜 주지 않으면 당신들이 돌아가고 나서 혀를 깨물고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퇴원하고, 절 찾아왔습니다.”
   “대체 어떤… 기억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거죠?”
   “우린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그녀는 눈이 하나뿐인 고양이를 특히 예뻐했죠. 그녀가 지우고 싶은 기억을 저에게 말하기까지는 6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뭐였나요?”
   강력계 형사 일을 10년 동안 하면서 고개를 돌려 버리고 싶은 사건이 아닌 적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사건들이 희주의 뇌리를 스쳤다. 전혀 무뎌지지 않는, 아무리 자주 접해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어떤 부류의 사건들이 있다.
   “그녀는 열두 살 때 이복오빠와 삼촌에게 동시에 성적 학대를 받았습니다. 정신병원에서 두 남자 간호사가 양쪽에서 그녈 힘주어 누르고 팔과 다리를 붙잡고 두꺼운 고무를 목 안으로 밀어 넣는 그 행위가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희주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 빌어먹은 놈들은 제대로 처벌을 받았나요?”
   “그녀는 기억을 지웠고 전 그 이상의 관심은 가지지 않았어요. 한 여자의 영혼이 산산조각 나 버린 사건에 대한 고백을 듣고 그녀의 기억을 삭제한 것까지가 제 몫이죠. 처벌에 대한 건 제 능력 밖의 일이죠. 그리고 전 사법 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건 철저히 피해자 쪽입니다.”
   “제게 이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물론입니다.”
   두 여자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희주 경위님을 돕고 싶어요. 살해당한 피해자들을 위해 불법을 저지를 생각이에요.”
   “저희에게 환자 기록을 오픈하겠다는 건가요?”
   “네. 의사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요.”
   “만일 환자 기록을 누설한 게 밝혀지면 곤란해질 텐데요.”
   “의사로서의 경력은 끝이죠.”
   “그럴 필요 없이 저희가 영장을 받아 오면 절차대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의료법을 위반하지 않고도 저희를 도울 수 있어요.”
   “아뇨. 그럴 경우 다른 분들의 정보 역시 노출될 가능성이 커질 거예요. 연구소가 언론에 불필요하게 노출될 것이고 기사가 나가면 빅을 거쳐 간 이들에게 득이 될 리 없어요. 환자 본인에게도 나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테고요. 전 그걸 원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차가운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면에서 당연히 그래야 하죠. 차갑지 않고서야 아까와 같은 환자의 경험담을 제정신으로 듣기 힘들 테니까요.”
   “제가 경찰이 된 이유는 아이와 노인, 여자들을 지켜 주고 싶어서였어요. 어릴 적, 동화책에서 읽은 용감하고 정의로운 창과 칼을 든 기사를 동경했죠. 보통 여자들이라면 기사의 품에서 미소 짓는 공주나 영애에게 감정이입을 했겠지만, 전 기사에게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친절한 기사를 꿈꾸던 소녀가 강력반 형사가 되었군요.”
   “그런 셈이죠. 사실 기사의 진짜 의미는 나중에 커서 알게 되었지만. 그땐 그림 속 정의로운 기사에게 반했어요.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사람. 선한 사람들에게는 부드럽고 다정한 젠틀맨이지만 무뢰한에게는 가차 없는 그런 사람. 하지만 진짜 경찰이 된 지금은 정말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전 피해자들만 생각해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살다가 결국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요.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떠올렸을 사람들이요. 그게 누굴까요?”
   “…가족이죠.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희주는 택시를 타고 빅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종종 희주를 힐끔거렸다. 희주는 허리를 숙이고 양손으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토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택시에서 내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손바닥을 흠뻑 젖은 티셔츠에 문질렀다. 건물 앞에서 희주를 기다리고 있던 세하는 희주가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희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앞장을 섰다. 희주는 자신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드세요.”
   세하는 얼음이 찰랑이는 물과 차가운 물수건을 나무 트레이에 내왔다. 그리고 희주가 그 물을 다 마시고 다시 한 잔을 더 청해서 마신 다음 물수건으로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을 훔칠 때까지 자리에 앉아 희주를 바라보았다.
   “형사님의 그런 점이 제 마음을 움직였어요.”
   “네?”
   “고작 20여 분 동안 택시를 타는 일이 기절할 것처럼 고통스러운데도 고집스럽게 기억을 삭제하지 않는 점이요.”
   세하는 맨얼굴이었다. 이 여자는 여기서 사는 걸까. 희주는 발작을 진정시키는 와중에도 그게 궁금해졌다. 세하의 볼우물 근처 갈색의 작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수영선수처럼 짧은 커트 머리가 살짝 흐트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세련되게 상대방의 심리를 읽는 여자. 이 여자가 일하지 않을 때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기억을 지우지 않는 건 스스로 해결하고 싶기 때문 아닌가요? 그래서 그 일 때문에 미칠 지경인데도 일단 그냥 두는 거죠.”
   “반만 맞아요. 일단 누가 내 머리통을 연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 돋거든요. 그러다가 뭐 다른 걸 건드릴 수도 있잖아요.”
   세하는 희주의 말에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저도 공감해요. 하지만 어떤 사람한테는 남한테 머리통을 맡기는 게 유일한 선택지일 수 있어요. 그게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입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수사에 협조만 해 주신다면 뭐든 다 약속하죠. 제 머리통을 열게 해 달라는 것만 빼고.”
   “아까 제가 조각칼을 삼킨 미대생 이야기를 했죠.”
   “네.”
   “제가 그 일을 통해 배운 건, 피해자를 도우려는 행위가 도리어 피해자를 지옥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만약 제가 범인을 잡지 못하면….”
   “피해자들은 억울할 겁니다. 자기 머리통을 저한테 맡긴 보람이 없을 테니까요.”
   “의사도 그런 표현을 쓸 줄 아는군요.”
   세하는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희주 형사님은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고민 없이 선을 넘을 스타일이죠.”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바로 그 점이 본인과 주위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 텐데, 형사님은 신경도 안 쓸 겁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
   “꽤 직설적이네요.”
   “불쾌하신가요?”
   “솔직해서 좋네요.”
   “파트너를 위험에 빠트리고 자기 자신을 던져 버리고 필요하다면 법도 어기고 분명 상관도 속이겠죠. 제가 우려하는 건 바로 그 점이에요. 형사님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어그러지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폐를 끼칠 수 있어요.”
   “장담할게요. 분명히 범인을 잡을 거예요.”
   “그런가요?”
   “물론이에요. 반드시 범인을 잡겠어요.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내 파트너 기억하죠?”
   “네.”
   “파트너를 시켜서 당신한테 점수를 따라고 할 참이었어요. 그 친구는 모르지만.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든 당신한테서 정보를 빼내라고요.”
   “그 방법을 쓰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희주는 세하의 뒤를 따라 3층에 위치한 연구실로 갔다. 파격적인 모던아트 작품을 전시해도 좋을 갤러리 같은 빅의 2층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신경외과 의사의 연구실은 마치 ‘하얀 사막’ 같았다. 희주는 순간 텅 빈 공간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책과 각종 자료가 빼곡한 서재와 집기들이 있는 벽면을 백색의 슬라이딩 도어로 가려 놓았기에 든 착각이었다. 때문에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보이는 것은 화이트톤의 책상과 의자, 그 위에 놓인 노트북과 모니터 정도였다. SF영화에서 봤음 직한 극도의 절제된 공간. 이 공간의 주인이 어떤 취향을 가진 인간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으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극도의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세하는 희주 앞으로 세 개의 얇은 폴더를 내밀었다.
   “기억 삭제를 한 순서대로예요.”
   희주는 파일을 들어서 확인했다. 조정배, 주용훈, 이덕식 순이었다.
   “순서가 의미심장하네요. 제일 먼저 사망한 건 이덕식 판사인데, 가장 먼저 기억을 삭제한 건 조정배라니.”
   “그분은 의사 입장에서 보면 실패한 케이스에요.”
   “왜죠?”
   “기억 삭제에 실패했어요. 두 번이나 두개골을 열었지만.”
   “그러면 결국 기억을 갖고 있다는 뜻인가요?”
   “네.”
   “그럴 수가 있나요? 성공률이 높다고 들었는데.”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기억을 지운다는 건 사실 굉장히 위험한 일이에요. 트라우마는 주로 우측 뇌에 저장돼요. 때문에 기억 대본을 들려주면서 뇌 스캔을 하면 주로 우측 뇌에서 뇌 활동이 포착되죠. 기억은 어두운 곳을 좋아해요. 해저에 앉아 있는 난파선처럼 뇌 가장 깊고 어두운 물길 곳에서 수십 년을 살아남죠. 그러다가 저 같은 신경학자가 그걸 끄집어내는 겁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어떤 기억은 제 손길을 거부하죠. 이 케이스가 그랬습니다. 그의 기억은 세상으로 나와 제 손에 삭제되길 거부했어요.”
   “도대체 어떤 기억을 삭제하고 싶었던 거죠? 대체 어떤 기억이기에 지워지지도 않을 만큼 뇌에 달라붙어 있었던 건가요?”
   세하는 흥분으로 달아오른 희주의 얼굴을 응시했다.
   “세 사람은 동일한 살인 사건의 목격자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따로 떨어져 있던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었다. 판사와 변호사, 형사가 목격자였다. 그것도 같은 사건을 목격했다. 그리고 각각 비밀에 부치고 살았다.
   “세 사람의 경험은 각기 달랐으나 결국 동일한 사건으로 귀결됐죠.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 여자가 죽는 걸 봤어요.”
   희주는 이덕식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강희건의 프라이빗 별장 파티.
   “주용훈 변호사가 어떤 파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나요?”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용훈 변호사는 가장 디테일하게 기억을 불러냈어요. 이덕식 판사는 별장에서 우연히 어떤 장면을 봤다고 했고, 조정배의 경우에는 극도로 그 얘길 꺼내는 걸 싫어했죠. 하지만 주용훈 변호사는 털어놓았습니다. 세 사람 중 불면증으로 가장 심하게 고통받았죠.”
   “절실하게 벗어나고 싶었군요.”
   “변호사님은 20년 전 그날 이후부터 괴로웠다고 진술했어요. 잠이 들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요. 초조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집에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어서 엄청난 양의 술을 매일 밤 마셨습니다. 공포를 잠재우고 싶었던 거죠. 자꾸 그 장면에 떠올랐지만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술을 마셔서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려고 했군요.”
   “하지만 그것도 실패했죠.”
   “그러다가 최준석 회장에게 조언을 구하고 빅을 찾아왔고요.”
   “네. 경찰스트레스장애 학회는 한국에 들어온 직후부터 저희와 업무 협조를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제가 가장 먼저 컨택한 곳이었죠. 학회를 통해 지원 요청이 오는 경찰과 소방관, 그리고 해바라기 센터에서 추천하는 피해자는 조건 없이 기억 삭제를 지원했습니다.”
   “피해자들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아닌 법조인임에도 수술을 해 준 이유가 뭐죠? 원칙에 안 맞는 거 아닌가요?”
   “이덕식 판사는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기부금을 약속했고, 주용훈 변호사는 해바라기 센터에서 무상으로 법률 상담을 맡았어요. 제가 제안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제안했어요. 아마도 최준석의 조언을 받았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피차 암묵적으로 비밀에 부칠 일이었으니까요.”
   “그 사람들, 돈으로 기억을 지운 거예요. 당신은 그걸 도왔고요.”
   “부인하지 않겠어요. 과격한 표현이지만 맞는 말이니까요.”
   “기억을 지워도 사실을 지우지 못해요.”
   희주는 세 개의 폴더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직 한 사람이 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맞아요. 그리고 그들도 그걸 나중에야 깨달았어요. 그 대가가 어떤 식으로든 찾아올 거라는 걸.”
   세하는 주용훈 파일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기억 대본. 주용훈과의 상담을 바탕으로 하지혁이 작성한 것이었다.
   “주용훈 변호사는 강희건의 별장에서 한 여자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꽤 오랫동안 지켜봤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 구역질을 참으면서도 끝까지 보았다고요.”
   “누가 여자를 죽였는지 말했나요?”
   세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하지 않았지만, 죽은 여자가 누군지는 알았어요.”
   “누구였나요?”
   “강희건의 가사도우미였어요.”
   주용훈이 강희건의 별장 파티에 간 것은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여러 차례 그곳에서 비밀스럽고 추잡한 그들만의 파티를 즐겼다. TV에서만 보던 여배우들이 남자들이 원하는 모든 행위에 자기 몸을 제공했다.
   주용훈은 죽은 가사도우미가 주방에서 일하는 걸 여러 번 봤다. 그러다가 위스키에 넣을 얼음을 가지러 혼자 주방에 들어온 그에게 여자가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이대로는 강희건이 자신을 죽일 거라며.
   “하지만 주용훈 변호사는… 여자를 돕지 않았군요.”
   희주는 무겁게 입을 뗐다.
   세 사람은 강희건의 별장에서 목격한 일을 깊은 바닷속에 침몰한 난파선처럼 기억 가장 깊은 곳에 묻었다. 자신을 위해서. 하지만 기억은 주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희주는 문득 세하가 궁금해졌다. 이 여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아기에 대한 죄책감과 아기를 죽인 것과 다름없는 남자에 대한 분노 때문에 길 한복판에서 발작을 해 대는 희주 입장에서는 눈앞의 이 작디작은 체구의 여자가 마치 신(神)처럼 느껴졌다.
   “무례한 질문이지만, 박사님에게도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나요?”
   희주는 흡사 백색의 사막 한복판에 앉아 있는 유령과도 같은 표정의 세하에게 물었다.
   “〈인 마이 라이프〉라는 비틀스 노래가 있는데 형사님과 들어 보고 싶군요.”
   세하는 음악을 재생했다. 3분가량 되는 네 남자의 노래가 끝나자 세하는 입을 열었다.
   “커트 코베인의 장례식에서 이 노래가 연주되었죠. 이 노래의 마지막 소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을 떠났고, 어떤 이들은 살아 있어요. 내 삶에서 나는 이들을 모두 사랑했어요.’”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요?”
   희주는 집요하게 되물었다. 대답을 꼭 듣고 싶었다. 저 완벽해 보이는 여자의 마음속에도 난파선 같은 기억이 있을까.
   “전 전자에만 동의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전부 죽었어요.”


   19 신원불명 용의자


   오치상은 희주의 뺨을 후려갈겼다.
   “넌 구제 불능 개 쓰레기야. 알고 있지?”
   희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들고 오치상을 노려보았다.
   “밤낮으로 뛰는 팀원한테 할 말이 그거뿐이세요? 뭐 좀 해 보려고 하면 수사 방해하는 팀장님 같은 윗선들 때문에 죄 없는 우리들이 욕먹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어진 오치상은 다시 한번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무원은 손을 들었다. 여차하면 팀장을 밀어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희주가 더 빨랐다. 희주가 오치상의 팔을 움켜쥐었다.
   “인권위 여자 기억하시죠? 남자 상급자가 여자 하급자한테 손찌검했다고 그 여자한테 전화 한 통 넣을까요? 그리고 제가 아는 입 가벼운 기자 몇 명한테 전화 몇 번 돌릴까요? 그러면 팀장님은 정년퇴임 전에 옷 벗고 우리 팀은 폭파될 텐데, 그 꼴 보고 싶으세요?”
   “…이런 개 같은.”
   오치상은 씹어 뱉듯이 말하며 희주의 손을 뿌리쳤다.
   “너, 당장 밖으로 나와.”
   오치상이 먼저 최준석의 병실에서 나갔다. 희주와 무원이 나오자 오치상이 희주의 팔을 붙잡고 거칠게 당겼다.
   “너 뭐야? 뭐 하는 인간이야?”
   “왜요, 뭐 켕기는 거 있으세요?”
   “뭐?”
   희주는 오치상의 팔을 뿌리쳤다.
   “넌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판단이 안 되지?”
   “이덕식, 주용훈 죽인 범인 잡으라면서요? 그래서 두 사람 과거를 파봤어요. 그랬더니 강희건, 조정배, 최준석 이름이 줄줄이 나왔고요. 전 원칙대로,”
   다시 한번 오치상이 희주의 뺨을 후려갈겼다. 희주도 참지 않고 달려들었다. 희주는 과거 강도 잡다가 부러졌다며 오치상이 훈장처럼 여기는 코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오치상은 코를 움켜쥐고 한발 물러섰다.
   “이제 비겼네요. 인권위 여자 연락처 알려 드려요?”
   무원은 오치상과 희주 사이에 섰다. 도대체 누굴 붙잡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둘 다 손 떼. 너희 말고 정신 제대로 박힌 애들한테 맡길 거야. 넌 별도 지시 있을 때까지 내근하고, 이무원 이 정신 빠진 새끼, 정희주가 또 설치고 돌아다니게 두면 너도 옷 벗을 줄 알아.”
   “팀장님도 기억 지웠어요?”
   사실상 모험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재앙을 불러올 트리거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희주는 오치상의 반응이 궁금했다.
   “…뭐?”
   희주는 한발 다가섰다.
   “팀장님도 최준석 회장 소개로 기억을 지웠는지 묻는 거예요.”
   오치상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희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만약 안 지웠으면 우리가 찾는 범인은 팀장님 머릿속에 있겠네요?”
   오치상은 대답하지 않고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돌아서 희주를 응시했다. 붉게 핏발이 선 콧잔등과 분노 서린 눈. 애써 침착하려는 손. 희주는 오치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적어도 희주에게는 그의 시선을 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최준석은 왼손 손목을 크게 다쳤다. 그는 유리 파편이 가득 박힌 오른손으로 직접 119에 신고했다. 다행히 오른손은 왼손만큼 상처가 심하지 않았다. 구급 요원들이 출동했을 때, 화장대 유리는 박살이 나 있었다. 그리고 최준석의 양 손목에는 의자에서 뜯어낸 접착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범인과 몸싸움 끝에 화장대 유리를 깬 것인지, 그전에 의자에서 어떻게 풀려난 것인지, 범인은 언제 도주했는지, 쇼크에 빠진 그는 무엇 하나 제대로 진술하지 못했다. 접착테이프에서는 최준석의 지문만 발견되었다. 범인은 이번에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총.”
   “네?”
   희주는 최준석이 누워 있는 침대에 다가갔다.
   “총이 사라졌어.”
   최준석이 핏기 사라진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붕대로 감은 오른손을 들어 이마에 댔다. 두툼한 붕대가 둘둘 감겼는데도 오른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침대 옆에 둔 총이 없어졌어.”
   희주와 무원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팀장이 두 사람의 수사 권한을 빼앗는 데까지는 아마도 이틀, 희망적으로 생각해도 사흘 정도. 주어진 시간은 그 정도였다.
   “총을 왜 집에 두셨죠?”
   “두려웠어….”
   “뭐가 두려웠어요?”
   “나도… 죽을까 봐.”
   “그러니까 말해 보세요. 강희건 대표가 뭘 숨기고 있는 거죠? 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이덕식 판사도 죽고 주용훈 변호사도 죽었어요. 사람 둘이 살해당했다고요.”
   희주는 세하에게 들은 죽은 여자 이야기를 일부러 숨겼다. 만약 최준석도 그걸 봤다면 그가 직접 털어놓길 바랐다.
   “난 상관없는 일이야. 난 그 일과는 관계가 없어.”
   하지만 최준석은 흐릿한 정신으로 과거의 ‘그 일’을 더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회피하시는 거예요? 상관없으면 죄도 사라져요?”
   “선배, 그만 해요.”
   무원이 끼어들었다.
   “넌 닥치고 있어.”
   희주는 계속 최준석을 몰아붙였다.
   “왜 강희건을 보호하는 거죠? 그 인간이 대체 뭔데요? 후배 형사들을 시켜서 강희건을 위해 뒷조사를 시키신 거예요? 그 대가로 뭘, 얼마나 받으셨어요? 따님 유학비를 내주던가요?”
   갑자기 최준석의 눈동자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체가 발작적으로 흔들렸다. 그에게 연결되어 있던 여러 개의 줄이 빠지면서 비상벨이 울렸다. 곧 간호사가 들이닥칠 것이다.
   “빌어먹을 범인은 또 찾아올 거예요. 그걸 바라세요? 모두 잠든 밤에 이 병실에 혼자 누워 있을 때 살인범이 찾아오길 바라냐고요!”
   “선배, 제발 그만 해요.”
   무원이 그의 몸을 붙들면서 희주에게 말했다.
   “뭘 그만해? 이 인간들 도대체 뭘 본 거야? 오래전에 여자가 죽었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는 인간들이 차례대로 죽고 있잖아. 이 인간이 입을 안 열면 누군가 또 죽을 거야. 진실 털어놓을 인간이 다 죽길 바라?”
   희주는 최준석의 얼굴을 붙잡았다. 차가워진 노년의 얼굴이 손바닥에 닿자 순간적으로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뭘 봤어요? 뭐 때문에 다들 과거를 지우려는 거예요?”
   검은 운동자가 흰자 뒤로 완전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최준석이 붕대로 감긴 양손을 들었다. 마치 희주의 목을 조르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팔이 힘없이 침대로 떨어졌다.


   주웅과 희주는 무원의 차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듯 섰다. 아까는 팀장과 희주, 이번엔 희주 애인과 희주. 그들 사이에 낀 무원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당신 지금 정상 아냐.”
   주웅이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완벽하게 정상이야.”
   “아니야.”
   “아니. 정상이 아닌 건 병실에 누워 있는 인간이랑 팀장 새끼고.”
   희주는 아까 오치상에게 맞아 부은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주웅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약이나 빨리 줘. 약속했잖아.”
   “팀장 지시대로 이 사건에서 손 떼. 그러면 약이든 뭐든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 테니까. 일단 내 진료실로 올라가서 얘기해.”
   주웅은 지금 희주가 가장 필요로 하는 고용량 공황장애 약을 빌미로 그녀를 길들일 심산이었다. 주웅의 의도를 읽자 심사가 뒤틀렸다. 이러면 전남편과 다를 바가 없다. 정현은 완벽한 동료고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희주가 강력팀이 아닌 내근직으로 업무를 바꾸고 아기를 가지고 엄마가 되길 바랐다. 주웅 또한 결국은 희주의 일을 들먹일 것이다.
   “그럴 시간 없어. 처음으로 피해자가 사망하지 않았어. 범인을 잡을 마지막 기회야. 분명 다시 움직일 거야. 난 그놈을 잡아야 돼. 그리고 남은 인간들한테 20년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볼 거야.”
   “그 상태로는 안 돼. 넌 지금 정신이 아파. 그래서 더 몰입하고 증오심이 불타는 거야.”
   “미쳤다는 말을 참 고급스럽게 하네. 그럴 필요 없어. 약이나 내놔.”
   주웅은 희주의 날 선 말에 한숨을 내쉬고 결국 약통을 내밀었다.
   “…하루에 3알 이상은 안 돼.”
   희주는 주웅의 말을 무시하고 차에 올랐다.
   무원은 병원 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운전석과 보조석, 뒷자리까지 창문을 전부 내렸다. 희주가 열린 창문으로 큰 숨을 토해 냈다.
   “복직하고 호텔에서 만났을 때 내가 한 말 기억해?”
   “저더러 재수 없게 걸렸다고 한 거요?”
   “내가 한 말을 실시간으로 확인한 소감이 어때?”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전 가끔 머리가 복잡하면 지방 같은 데로 훌쩍 가요. 적당한 데다 차 세워 놓고 골목길 같은 데를 걸어 다녀요. 낯선 동네에서 끼니를 때우고 옆 테이블에서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얘기도 엿듣고요.”
   희주는 말없이 무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원의 차분한 목소리가 자갈이 굴러다니는 것 같은 뱃속을 진정시켰다. 낯선 동네에서 혼자 걷고 있는 무원의 뒷모습과 식당에 혼자 앉아서 묵묵히 젓가락을 옮기는 모습이 상상됐다.
   “꽤 여러 번 그런 시간을 혼자 보내고 나면 그 기억들은 서로 분간이 안 될 만큼 비슷한 모양새로 남아요. 어디든 지방 소도시는 비슷하게 쇠락한 모습이고 동네 식당도 비슷하니까요. 사건 현장은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가 응축된 곳이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전부 나를 쥐고 흔들고, 나 역시 균형을 잃고, 그러다가 보면 그저 그런 형사가 되어 있고. 그런 기분이 들 때 나라는 인간을 점검해 보는 거죠, 낯선 곳에서.”
   희주의 기분이 딱 그랬다. 내면 어딘가가 못쓰게 망가지고 비틀린 게 확실했다. 주웅이 그걸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를 이용했다고 비난을 받아도 할 말 없다. 정신과 전문의가 애인이라면 빨리 이 엿 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무원, 너 정체가 뭐야? 사이보그야? 아님 수도사 같은 거야? 그냥 동네 걷는 걸로 그런 게 된다고?”
   “사이보그라니 좀 웃기네요. 오늘 밤에 확인해 보실래요? 사이보그인지 인간인지.”
   “…뭐?”
   “선배 애인이 싫어할 말인가.”
   희주는 전방만을 주시하며 운전에 집중하는 무원을 바라보았다. 무원의 말을 점점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의 말에 자꾸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팀장은 사건을 묻을 거야. 확실해. 해결할 생각이 없는 거야. 해결이라는 건 곧 옛날 일을 까발리는 게 될 테니까.”
   “그리고 우린 책상 앞에 앉아서 전화나 받고 지루한 서류 작업이나 종일 하게 되겠죠. 대기 발령 처분이나 받고.”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내가 범인 잡아다가 그 인간 코앞에 갖다 놓을 거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두고 봐.”
   무원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두 사람은 스타리온 본사 앞 카페에 앉았다. 아이돌을 보려고 죽치고 있는 여고생들 틈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스타리온 입구에는 경호원들이 서 있었다.
   “근데 지금 강 대표가 회사에 있다는 보장이 있어요?”
   “인터넷 뉴스도 안 봐? 그 인간이 매일 오후 3시에 이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회사 헬스장에서 운동한다고 기사 났잖아.”
   “그걸 믿어요?”
   “궁하니까 쓰레기 기자의 말이라도 믿어야지.”
   무원은 카페 통 창으로 건물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희주가 갑자기 무원의 팔을 잡고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옆 테이블에서 소곤거리던 한 무리의 여고생들도 벌떡 일어나 카페를 나가기 시작했다. 희주와 무원은 여고생들 꼬리에 붙어 카페에서 나갔다. 스타리온 앞에 밴 한 대가 멈춰 섰다. 대기하던 경호원들이 빠르게 밴을 감싸며 몰려드는 여고생들을 제지했다. 1층 안내 데스크를 지키던 남자 직원 두 명도 합세했다.
   그 사이 희주와 무원은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은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가 텅 빈 안내 데스크를 지나 비상구로 향했다.


   강희건은 트레이드 밀 위에서 달리고 있었다. 희주와 무원은 비서의 강력한 제지를 뚫고 옆에 섰다. 하지만 강희건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도 두 사람을 보지도 않았다. 비서는 안절부절못하며 대표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나갔다.
   “한때나마 돈독한 사이셨던 판사님과 변호사님이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나셨는데, 심경이 어떠신가요?”
   “알리바이를 묻는 거라면 출입국 기록이 내 알리바이입니다.”
   강희건은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리바이를 물은 게 아니라 심경이 궁금했는데. 알리바이는 물론 확인했습니다. 일본에 계셨더군요.”
   “해외 출장이 잦은 업계라 한 달에 절반은 한국을 떠나 있지. 그리고 두 분 죽음에는 내 나름대로 충분히 조의를 표했다고 생각하고.”
   “영장도 없이 왔고 녹음도 하지 않는데 좀 솔직해지면 어떨까요? 오프더레코드랄까요.”
   강희건은 트레이드 밀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하지만 멈추진 않았다.
   “판검사님들의 적절한 도움과 경찰의 긴밀한 협조가 없었다면, 이런 멋진 생활이 가능했을까요? 궁금하네요.”
   “몇몇 스캔들이 있었다고 해서 내가 무너졌을 것 같소?”
   “곤란하긴 하셨겠죠. 개인 별장에서 가사도우미와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킨 연예기획사 사장이 내놓는 아이돌과 여배우를 대중들이 보면 별로 좋지 않은 상상을 할 테니까요. 그런데 그걸 스캔들이라고 표현하시네요? 그것도 그 업계 용어인가요?”
   강희건은 고개를 돌려 희주를 응시했다. 강연 때는 철저히 감추고 있던 어딘가 짐승을 연상케 하는 눈빛이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거침없이 드러났다. 그는 트레이드 밀을 멈췄다. 뭔가가 그를 건드린 게 분명했다.
   “경위의 정신병은 좀 어떻소? 듣자 하니 반쯤 미쳤다던데.”
   “어떤 분들처럼 기억을 지우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걱정 감사해요.”
   “조만간 기억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감정 같은 것도 전부 삭제할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 잘 버텨 보시오.”
   “대표님한테는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이 불필요한 감정인가요?”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든다면.”
   “이덕식과 주용훈에게도 해당되는 말인가요?”
   “범인을 잡는다면 경위가 원하는 곳에 기부금을 내지. 액수도 경위가 정하고.”
   강희건은 다시 트레이드 밀의 속도를 올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꺼지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희주는 강희건의 뒤통수에 대고 한 마디를 더했다.
   “별장에서 멋진 파티를 연다고 들었는데, 저희도 초대해 주세요.”
   “뭐 주워 먹을 것 없는지 주둥이를 들이미는 들개가 파티에 오는 걸 누가 반길까.”
   “역시 그렇겠죠? 그래도 오치상과 조정배는 갔잖아요. 그 사람들은 들개가 아니라 충직한 반려견인가요?”
   오치상은 그냥 던진 거였다. 틀려도 상관없었다. 그저 강희건을 흔들어 볼 요량이었다. 희주는 강희건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섰다.
   비서는 남자친구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형사가 멋대로 헬스장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어쩌면 30분 뒤 샤워까지 마친 대표가 나와 내일부터 회사에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상상에 울상이었다.
   희주와 무원은 눈빛을 주고받은 다음, 희주가 먼저 계단으로 내려갔다. 무원은 데스크에 팔을 올리고 비서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울기 일보 직전인 비서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아깐 곤란하셨죠. 죄송합니다. 그런데 대표님 내일 스케줄이 어떻게 되시죠?”
   비서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본인의 업무 영역에 속하는 질문이 나오자 자동으로 달력을 집어 들었다.
   “1시간 뒤에 공항으로 가실 거예요. 밤 비행기로 대만에 가셨다가 3일 뒤에 돌아오세요. 근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또 찾아오시려고요?”
   완벽한 달걀형 얼굴에 볼록한 이마를 움찔거리며 비서가 물었다. 무원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이 출장에서 돌아오시면 제 휴대폰으로 연락을 주실 수 있을까요? 연락처를 알려 주시면 가끔 다른 일로 연락을 드릴 수도 있고요. 물론 업무적으로요.”
   무원은 휴대폰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비서는 무원이 정말로 그게 궁금해서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에게 호감이 있어서 일 핑계를 대는 것인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잘생기고 친절한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흔쾌히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20 저수지 괴담


   묵직하고 뜨거운 열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무원은 보조석 창문 밖으로 상체를 거의 다 내놓고 있는 희주를 힐끔거리면서 운전에 집중했다.
   “운전하는 제 생각도 좀 해 주면 고맙겠어요.”
   뜨거운 먼지바람이 코점막을 자극했다. 희주는 보조석 시트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난 오늘 어딜 가나 한 소리 들을 운명인가 봐.”
   “선배 애인 말이 맞아요.”
   “너까지 거들지 않아도 돼.”
   “지금 정상 아니에요.”
   “알아.”
   희주는 순순히 인정했다. 너무 쉽게 이성의 끈을 놓은 건 아닐까. 쓸데없이 폭탄만 던진 것일지 모른다. 앞으로 수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 정희주를 자폭시킬 폭탄. 어쩌면 오직 희주만을 터뜨릴지도 모를 폭탄.
   “…이 정도면 자폭이지.”
   “네?”
   “혼잣말이야. 신경 쓰지 마.”
   “선배.”
   “왜.”
   “트라우마 삭제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그 의사 제대로 인 것 같던데. 의사들 별로 신뢰하는 편 아니지만, 박세하 박사는 좀 달라 보였어요.”
   “그 핑계로 병가 내고 휴가도 좀 갔다 오고 술도 좀 줄이고?”
   “화만 내지 말고 지금 상황을 제대로 보자는 거예요. 정면 승부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고 피해 가고.”
   “그렇게 돌아가고 피해 가려다가 판사, 변호사 죽은 거 봐. 물론 그 사람들도 피해자야. 하지만 그 사람들 어떤 여자가 죽는 걸 보고만 있었어.”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럴 거예요. 누가 자기 목숨 걸고 남을 구해요. 특별히 그 사람들이 나쁜 게 아니라.”
   무원은 핸들을 톡톡 두들기며 항복 신호를 전송했다.
   “그냥 좀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형사가 돌아가고 피해 가면 범인을 어떻게 잡아?”
   “선배는 판사, 변호사 억울하게 죽은 거 풀어 주려고 이 일에 집착하는 것 같지 않아요.”
   “아니라고는 안 할게. 그 인간들이 죽기 전에 뭔 죄를 지었는지도 중요해. 죽는다고 있던 죄가 사라지지 않아. 더더욱 사과를 받아야 하는 진짜 피해자가 죽은 이 마당에. 난 그 죽은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선배도 잊지 마세요. 우린 이덕식, 주용훈 살해하고 최준석 죽이려다가 실패한 범인 찾는 중이라는 걸. 그게 우선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인간들의 과거를 파는 거잖아. 누가 그들을 죽일 만한지 알아내려고. 잊지 않았어.”
   희주는 무원이 자기 때문에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지 못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었다. 그만큼 그와 함께 이 뜨거운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우린 모두 조금씩 미친 것 같아요. 선배도, 나도.”
   “그래.”
   희주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는 무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옴폭 들어간 볼우물, 오후가 되니 조금 자란 턱수염. 불평하지 않는 것으로 반쯤 미친 선배를 배려하는 남자. 그와 같이 있는 게 편하다. 차 안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발작하지 않는 건 무원 덕분이었다. 희주는 어느 순간 주머니 속의 약보다 무원을 더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수사에는 도움이 돼. 조금 미쳐 있는 게 범인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 주니까.”


   강희건의 별장 출입문에는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높은 담장과 화물 운송용 철제 출입문이 별장과 농장 부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문 너머 키 큰 나무들이 시야를 전부 가렸다. 농장 입구에는 낡은 인터폰이 설치되어 있었다. 희주가 움직일 때마다 출입문 양옆에 달린 고성능 감시 카메라가 따라서 움직였다. 강희건은 어젯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여기서 그런 화려한 파티가 벌어진다고?”
   “밖에서 보기엔 인적도 드물고 가로등도 별로 없고 주변에는 빈 공장 터만 즐비하지만, 저 안은 딴 세상인가 보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감시 카메라도 별로 없었어. 별장 주변엔 아예 없고. 쇠락한 동네라 그렇다지만 서울에서 조금 떨어졌을 뿐인데도 좀 심할 정도네.”
   “왜 이런 데 별장을 지었을까요? 주변에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런 데니까 별장을 지었겠지. 비밀 많은 인간들은 프라이버시 중요하게 생각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젊은 시절 지은 별장인데 좀 의외랄까요. 주변에 매력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는데.”
   그때 커다란 택배 트럭 한 대가 이곳을 향해 달려왔다. 트럭은 철제 출입문 앞에 잠시 대기했다. 잠시 후, 안에서 출입문이 열렸다. 트럭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두 사람은 출입문에 달린 감시 카메라가 비추지 못할 곳까지 떨어져 있다가 별장 밖으로 나오는 트럭을 세웠다. 대화는 싱겁게 끝났다. 별장 주인 앞으로 온 물건은 ‘서핑 보드’였다. 이미 별장으로 서핑 보드를 실어 나른 것이 올해만 해도 세 번째라고 했다.
   “서핑이라…. 회장님의 또 다른 취미 생활인가?”
   “그건 모르겠지만, 저 안에 들어가는 건 포기해야 될 것 같은데요? 우리가 경찰인 걸 알면 문을 열어 주겠어요?”
   “꼭 저 안에 들어가야만, 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는 건 아냐.”


   두 사람은 낡은 마을회관 앞에 다다랐다. 마을 회관 입구에는 돌에 조각한 기념비가 서 있었다. 무원은 기념비에 적힌 글을 읽었다.
   “마을 회관을 강희건 대표가 세웠네요. 지역 발전 기금도 쾌척했고요. 강 대표 본적지는 여기가 아니던데 고향도 아닌 곳에 왜 이걸 세웠을까요?”
   그때 마을 회관에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노인은 희주와 무원을 발견하고 노골적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면 심심한 오후에 말을 걸 대상이 나타난 것이 반가운 것일지도. 희주는 후자이길 바라며 다가갔다. 그리고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신분을 밝히면서 별장주와 관계된 일로 동네를 둘러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노인은 말없이 희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희주의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노인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노인을 별장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희주는 인내심 있게 노인을 기다렸다. 외지인, 그것도 경찰이라는 존재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존재다. 하지만 노인은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노인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별장 안에는 오래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농업용수를 공급받는 저수지가 있었다. 별장이 생긴 뒤로는 출입문을 통해 진입로를 지나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왔다. 저수지는 철문 안쪽으로 약 5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별장은 그 저수지 100미터 뒤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별장에서 출입을 막았다. 사유지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껏 수십 년을 살아온 주민들 입장에서는 도의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라며 항의했다. 분쟁이 거듭되자 마을운영위원회 측은 강희건이 마을 회관 건립 기금과 지역 발전 기금을 내놓는 조건으로 주민들의 저수지 출입을 막았다. 일부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이 있었지만 돈이 통장에 들어오자 운영위원회 인사들이 오히려 주민들을 막았다.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몰라.”
   노인이 말했다.
   “뭐가요?”
   “저수지 못 들어가게 한 거.”
   “왜요?”
   노인은 흡사 나무껍질 같은 손을 들어 여자의 긴 머리 흉내를 냈다.
   “거기 저수지에서, 처녀 귀신이 나와.”
   “처녀 귀신이요?”
   희주는 귀를 의심했다. 노인이 자신을 놀리는가 싶었다.
   “그래, 얼굴이 허옇고 몸뚱이가 얄팍하다던데.”
   “어르신도 보셨어요?”
   노인은 설레설레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를 흔들었다.
   “난 아냐. 하지만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우리 아들이 이장할 적에 거기서 굿을 하려고 했어.”
   “왜요?”
   “아, 왜긴. 귀신이 자꾸 나오니까. 동네 뒤숭숭해지니까.”
   “그래서 굿을 하셨어요?”
   “못 했지. 별장 주인 놈이 길길이 날뛰면서 아들을 쫓아냈어.”
   “원래 오래된 동네에 있는 강가나 물가에는 그런 얘기가 흔하잖아요. 저도 형사 생활하면서 종종 들어서 알아요. 그거 애들 물 조심 시키려고 어른들이 만든 이야기잖아요.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처녀 귀신도 그런 거죠?”
   희주의 말에 노인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라니까. 답답하네. 본 사람이 있다니까. 흰옷 입은 머리 긴 여자가 물속에서 손을 뻗었다고 했어.”
   노인은 진지했다.
   “그 뒤로는 아주 더 출입을 안 하게 됐지.”
   “주인 입장에서는 그게 진짜든 가짜든 좋았겠네요?”
   “거참, 진짜라니까. 경찰이라면서 그렇게 남의 말을 못 믿어서 어떻게 죄지은 놈을 잡을 거야? 난 한평생 법 한 번 어긴 적 없는 사람이야. 내 말은 믿어도 돼.”


   “오래된 마을에 괴담 하나 없으면 섭섭하지. 안 그래?”
   희주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득 담겨있던 멸치와 막장으로 끓인 시래기 된장국을 마지막으로 훌훌 마시며 말했다. 희주는 깨끗하게 밥과 국을 비운 다음 아까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복기했다. 그리고 일과 별개로 최근 들어 가장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원은 별 대꾸도 없이 묵묵히 국에 밥을 말아 떠먹었다.
   그 사이 낯빛이 불콰해진 남자들이 가게를 나가고 가게 안에는 콩나물을 다듬는 주인 여자와 희주와 무원, 셋만이 남았다.
   “동네에서 보던 얼굴이 아닌데.”
   주인은 손님들이 다 나간 틈을 타서 혼잣말도 아닌 묻는 것도 아닌 애매한 말투로 물었다.
   “네, 이 동네 처음 와요. 처음 왔는데도 이 친구가 밥집을 잘 골라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희주가 시원스레 대꾸하자 여자는 아예 콩나물이 담긴 양재기를 들고 다가왔다.
   “어쩐지 외지인 같아 보이더니. 이제는 이 동네 공장들도 다 닫아서 젊은 사람들이 올 리가 없는데, 내가 속으로 그래 생각했다니까. 볼 것도 없는 이 동네에 뭔 일로 왔데. 데이트?”
   무원은 눈썹을 한 번 치켜세우고 국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희주는 피식 웃고 대신 대답했다.
   “아뇨. 일 때문에요.”
   “일?”
   “혹시 저수지 처녀 귀신 얘기 아세요?”
   여자는 희주 쪽으로 몸을 숙였다.
   “아니,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까 동네 어르신한테 들었어요.”
   “뭐 좋은 얘기라고 외지 사람한테 그런 얘길….”
   “옛날이야기 같고 재밌던데요?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흔한 스토리잖아요. 물에 빠져 죽은 여자가 처녀 귀신이 돼서 돌아왔다.”
   “그거, 진짜인데.”
   여자는 희주와 무원을 번갈아 보았다.
   “네?”
   희주는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잠깐 정신이 멍했다.
   “에이, 듣고 안 믿었구나. 그거 진짜야.”
   여자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여자는 희주와 무원이 경찰이라는 걸 알고 놀라워했다. 그 죽은 여자가 두 사람을 불렀는가 보네, 라고도 했다. 이 백반집은 시어머니 가게였다. 여자는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대신해서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물려받았다. 저수지 괴담은 그 무렵 이야기였다. 아니, 사건이었다. 어느 여름밤, 여자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에 잠을 깼다. 지독히 더운 밤이라 문이란 문을 다 열어 놓고 잠든 터라 사이렌 소리에 온 식구가 잠을 깼다.
   “군대 간 아들이 첫 외박 나온 날이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 우리 집 아저씨가 옷을 막 주워 입고 나가려는 걸 내가 막 말렸지. 무슨 일인 줄 알고 나서느냐고.”
   여자가 말렸지만 여자의 남편은 손전등을 들고 밤길을 내달렸다. 눈 감고도 훤한 길이라 금방 도착했다. 경찰차가 별장 출입구에 서 있었다. 구급차도 한 대 서 있었다. 남자처럼 손에 손전등을 들고 온 마을 주민 네다섯 명이 두런두런거리며 별장 안쪽을 기웃거렸다. 야밤에 싸움 구경이라도 할 줄 알고 반바지 바람에 달려온 남자들은 여자 하나가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는 별장 관리인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죽은 여자가 그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라, 저수지에 그 여자가 두르고 있던 하얀 앞치마가 둥둥 떠 있더래.”
   “그걸 정확히 보신 분이 있대요?”
   “난 모르지. 워낙 깜깜하니까 누구 하나가 경찰들 몰래 저수지에 가서 보고 여기저기 흘려서 나도 들은 얘기니까.”
   흰옷을 입은 처녀 귀신과 앞치마를 맨 채 죽은 가사도우미. 희주는 이 이야기가 20년째 주민들에게 회자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도 그 집으로 출근하는 여자가 있어. 그 집 주인이 여자 없이 혼자 사니까, 안살림 할 사람이 필요하지.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었어도 계속 여자들이 오는 거야.”
   “여자들이요?”
   “응. 가정부. 내가 볼 때마다 다른 여자더라고. 주인 성격이 별난 모양이지? 그게 아니면 가정부가 바뀔 일이 뭐가 있어?”


   백반집을 나온 직후 무원은 이 지역 관할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다. 소속과 직급을 밝히고 20년 전 저수지에서 익사한 가사도우미에 대해 물었다. 무원의 전화를 받은 경사는 머뭇거리다가 그 일에 대해 알 만한 사람에게 전화를 돌리겠다고 했다. 잠시 후, 휴대폰 너머로 큰 소리가 들렸다. 강희건을 성폭행으로 고소했다가 도리어 과거 유흥업소에서 일한 일이 밝혀지자 자살한 가사도우미 말고, 또 한 명의 가사도우미가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 하지만 20년 전 일은 기사화되지 않았다. 고인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 유족이 원했을 수도 있다. 희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거칠게 말했다.
   “잘 마무리된 사건을 무슨 의도로 쑤시는 겁니까? 뭐, 이제 와서 방송이라도 내보려고 하는 겁니까?”
   희주는 무원이 스피커폰으로 해 놓은 휴대폰을 들고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당시 일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담당자가 사건 파일에 기록한 정도의 피해자 신상과,”
   남자는 말을 끊고 거칠게 대꾸했다.
   “피해자는 무슨 피해자. 혼자 빠져 죽었는데. 익사로 인한 사고라고.”
   “네, 저희도 압니다. 그러니까 그 파일을 한 번,”
   “다 태워서 없습니다.”
   “네?”
   “오래된 거라 없다고요. 오래전에 폐기했습니다.”
   “돌아가신 분 성함과 유족 연락처라도 알려 주시면,”
   “폐기했다니까?”
   전화 속 남자는 희주의 말을 한 번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유족이 원하지 않아 조용히 묻고 넘어갔다고 했다.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전화를 받으신 분은 그날 현장을 보셨나요?”
   상대가 침묵했다. 희주는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날 일을 기억나는 대로 해 주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굳이 저희가 돌아가서 공식적으로 업무 협조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할 말 없소.”
   “그날 직접 출동하고 사건 파일도 직접 폐기했을 정도면 사건 담당자이셨을 것 같은데.”
   “오래돼서 기억 안 납니다.”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희주와 무원은 차를 세워 놓은 공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낡은 소나타 한 대가 달려왔다. 보조석 대시보드 위에 불이 꺼진 경광등이 놓여 있었다. 희주는 차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차가 멈춰 서고 운전석 창문이 반쯤 내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금곡 파출소에 근무하시나요?”
   희주의 말에 남자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차를 세운 사람들이 누군지 판단하는 눈치였다.
   “저희는 강남서 강력팀 정희주 경위, 이무원 경사입니다.”
   “아예, 안상호 경위입니다.”
   “2000년에도 금곡서에 계셨나요?”
   “네, 첫 부임지였죠. 1월부터 있었습니다.”
   “그해 8월 이 마을 저수지에서 여자가 익사한 사건 기억하십니까?”
   남자는 다시 한번 희주와 무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의 의도, 목적, 지금 대답이 미치는 영향력과 범위까지, 짧은 순간 남자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스쳤다.
   “지금 생각이 나지 않으실 수도 있으니 제가 연락처를 드리겠습니다. 기억이 나시는 대로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희주는 상대의 망설임을 읽었다. 이곳은 20년 동안 그의 일터였다. 누군가 외지인과 길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소문을 내면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런 마을일수록 소문은 빠르게, 아주 작은 것까지도 깊숙하게 돈다. 남자는 마지못해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희주는 휴대폰 번호를 입력하고 돌려주었다. 남자가 다시 운전석 창문을 올리고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아마도 방금 전에 희주에게 열을 내던 자신의 상관에게로 돌아가는 길일 것이다. 희주는 먼지를 일으키는 남자의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전화번호 지워 버리겠죠?”
   “그렇겠지. 뭐, 상관없어. 뭔가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알았으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행운에 기대서 일을 했다고.”
   희주가 앞장서서 무원의 차를 향해 걸었다. 무원도 곧 뒤따랐다.
   “그래도 문을 다 두들겨 보는 거죠? 그때 호텔에서처럼.”
   희주는 피식 웃었다. 어쩌면 우연히 진실을 마주할 수도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가능성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가 점점 마음에 든다는 것. 두 가지 예감 모두 마음에 든다.


   21 미행


   희주는 ‘절대 안정’, ‘면회 금지’ 팻말이 걸린 최준석의 병실로 들어갔다. 30분 전, 병동 복도에 서서 주치의가 병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15분 정도 더 기다렸다. 지금쯤이면 주치의 지시로 간호사가 놔 준 안정제가 효과를 발휘할 터였다.
   예상대로 최준석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손목 신경을 다친 왼손은 시트 밖으로 내놓고 비교적 멀쩡한 오른손은 시트 속에 넣어 둔 채였다. 희주는 잠시 병실을 둘러보았다. 최준석이 누워 있는 침대를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창이 커튼에 가려진 채 있었고, 왼쪽에는 각종 집기들을 올려놓을 수 있는 선반이 달린 서랍이 있었다.
   희주는 커튼을 젖히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1박에 70만 원쯤 하는 VIP 병실 창밖으로 보는 풍경은 제법 괜찮았다. 희주는 가방에서 준비해 온 벽에 부착하는 형태의 가정용 감시 카메라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라갈 정도로 앙증맞은 사이즈에 누리끼리한 병원 커튼에 파묻히면 별로 눈에 띄지 않을 아이보리 컬러. 희주는 최준석의 침대가 사선으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리고 커튼으로 살짝 가려 두었다. 최대 저장 기간은 일주일. 모든 상황은 감시 카메라에 녹화될 것이다. 그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누구시죠? 막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요.”
   희주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아, 형사님이셨군요.”
   안면이 있는 간호사가 희주를 알아보고 경계심을 풀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말씀드리고 들어와야 하는데.”
   희주는 지금 들어온 사람이 오치상이나 그 인간이 보낸 누군가가 아닌 성실한 간호사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조사 때문에 오셨군요.”
   간호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잠든 최준석의 혈압과 체온을 재며 말했다.
   “참 딱하세요.”
   “뭐가요?”
   “이렇게 혼자시잖아요. 얼굴도 점점 수척해지시고….”
   희주는 대답 없이 그녀가 선의를 담아 베개와 시트를 꼼꼼히 점검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 말대로 최준석의 얼굴은 눈에 띄게 망가진 상태였다.
   “혹시 그동안 찾아온 사람이 있었나요?”
   “글쎄요. 제가 근무할 때 딱히 방문객을 본 기억은 없어요. 동료들도 얘기한 적 없고요. 아마 누가 왔었다면 바로 알았을 텐데. 가족분들도 안 오신 것 같고. 아마 사정이 있으시겠죠. 병원에 계신 분들 중에 그런 사연 하나 없는 분은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형사님이 제일 자주 오시는 것 같아요.”
   “선생님, 혹시 펜이나 메모할 만한 종이 같은 거 있으세요?”
   “네?”
   간호사는 당황하면서도 유니폼 주머니에서 볼펜과 병원 이름이 새겨진 작은 메모지를 꺼냈다. 희주는 거기에 자기 전화번호를 적어서 간호사에게 줬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저한테 먼저 연락 좀 해 주세요. 경찰을 부르셔도 되는데, 그 전에 저한테 문자라도 먼저 한 통 보내 주실 수 있을까요?”
   간호사는 망설였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다른 경찰들은 바쁠 테니 한가한 제가 바로 달려오려고요.”
   “혹시… 위험한 일인가요?”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요. 지금은 아니지만.”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희주의 전화번호가 적인 종이를 집어넣었다.
   “범인 때문이죠? 또 이분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렇기도 하고, 혹시라도 간호사 선생님들한테 피해가 가는 일이 생길까 봐요.”
   “어떤 말씀인지 이해해요. 무슨 일이 생기면 형사님께 제일 먼저 연락드릴게요.”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고 나서도 희주는 잠이 든 최준석을 바라보았다. 보안관 모자도 잘 가꾼 콧수염도 없는 그의 얼굴은 그저 나이 들고 지친 중년의 그것이었다. 범인과 실랑이를 하면서 생긴 상처가 얼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기절한 최준석의 오른손에서 깨진 유리를 발견했다. 화장대의 대형 유리가 박살 난 상태였다. 최준석은 깨진 유리를 움켜쥔 채 범인을 위협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으음.”
   최준석이 눈을 떴다. 안정제 때문에 정신이 흐릿한지 멍한 표정이었다.
   “좀 어떠세요?”
   “보다시피 엉망이네.”
   “그날 일,”
   최준석은 붉어진 눈을 부릅떴다.
   “제발 날 좀 가만 놔두게. 당장이라도 누가 내 목을 조를 것 같아. 그게 무슨 기분인지 자넨 상상도 못할 거야. 내 목을 움켜쥔 그 손아귀의 힘이 지금도 생생해. 자네가 굳이 묻지 않아도 충분히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니 집어치우게.”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진 않으셨잖아요. 그러니까 범인을 잡아야죠.”
   “누가? 자네가?”
   최준석은 퀭한 눈으로 희주를 응시하면서 쏘아 붙었다.
   “내가 현역에 있을 때 내 밑에 자네 같은 오만방자한 여자 형사가 없었던 게 다행이군. 이미 자네 손을 떠난 사건이라고 알고 있네만.”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희주는 가까스로 화를 참았다. 원래 꼰대들은 남을 인정하는 걸 싫어한다. 이런 편견은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건드려봤다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너희들이 용써 봤자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경멸이나 돌아올 뿐.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싫었다.
   “병실 밖에 아무도 없다는 거 아세요?”
   “….”
   “만약 제가 이 사건 담당자라면 밖에 적어도 한 명 정도 앉혀 둘 거예요. 밤잠 없고 똘똘한 놈으로요. 그리고 한 시간마다 회장님이 괜찮은지 보고하라고 할 거예요.”
   노회한 남자의 눈동자에 잠시 불안이 스치는 걸 희주는 놓치지 않았다.
   “…신경 꺼.”
   “꺼야죠. 수사 권한도 뺏겼는데.”
   희주는 최준석이 눈치채지 못하게 감시 카메라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시간은 모든 일은 가볍게 만들어 준다고 했어. 시간이….”
   최준석은 시간이 마치 구원의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말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구절이지. 난 가끔 그 구절을 떠올려. 시간이 지나간 일들을 점점 가볍게 만들어 주길 바라면서.”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되셨어요? 모든 게 가벼워지던가요?”
   “….”
   “소포클레스도 놓친 게 있었네요.”
   “이제 그만 나가 주게.”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는 일이 있다는 거요. 10년, 20년이 지나도 가벼워지지가 않아서 담당 형사에게 범인을 잡았다는 전화가 오기 전까지 매일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떠올리고 슬퍼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요.”
   희주는 최준석을 두고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최준석의 양심을 건드렸기를 바랐다.


   희주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움켜잡았다. 손바닥이 흥건하게 흘러나온 땀 때문에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제 목숨은 선배 손에 달렸어요.”
   “입 닥쳐. 정신 사나우니까.”
   “거의 4개월 만에 아니에요? 운전대 다시 잡은 거.”
   “….”
   “정말 혼자 괜찮겠어요?”
   “입 다물고 앞이나 잘 봐. 여차하면 핸들 바로 꺾어 버려.”
   희주는 운전 연습 중이었다. 무원을 보조석에 태운 채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자그마한 공터를 몇 바퀴 채 돌았다. 새벽 4시. 누굴 칠 염려도 다른 차와 부딪힐 가능성도 제로에 가까운 시간과 장소. 이곳을 고른 건 무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말 많네, 정말.”
   “운전 연습할 장소 찾아내면 알려 준다면서요.”
   “조정배한테 연락이 왔어.”
   “선배한테요? 언제?”
   “날 만나고 싶대.”
   “단둘이서요?”
   “그래. 설마 날 덮치려고 불러내는 건 아니겠지.”
   희주는 가슴이 핸들에 닿을 정도로 상체를 최대한 앞으로 붙였다.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했다.
   “도대체 왜 선배랑 둘이 만나야겠다는 거예요?”
   “…나 한계야.”
   “네?”
   “내려야 할 것 같아. 눈앞이 캄캄해지려고 해.”
   희주는 가까스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이마를 핸들에 대고 연거푸 숨을 몰아쉬었다. 무원은 차에서 내려 운전석 쪽으로 갔다. 그리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매너 좋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희주는 군말 없이 차에서 내렸다.
   “타고났어요.”
   희주는 피식 웃으면서 문을 닫고 그대로 공터에 드러누웠다. 등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식은땀과 두려움, 공포 말고도 많은 것들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아 기분이 나아졌다. 무원은 희주 옆에 앉았다.
   “그래서 혼자 그 인간 만나러 가려고요?”
   “오전 7시에 만남의 광장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어.”
   “이유도 모르면서 만날 거예요?”
   “이유는 가면 알겠지.”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뭐가?”
   “일부러 자기 자신을 위험한 구렁텅이 같은 데 밀어 넣고 싶은 거냐고요.”
   “난 범인을 잡고 싶을 뿐이야. 그게 다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무원이 운전을 했다. 무원은 희주가 잠깐이라도 눈을 좀 붙이길 바랐지만, 희주는 진한 커피를 택했다. 흥분돼서 잠도 안 와. 희주는 태연하게 말하며 창문을 열고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무원은 희주를 오피스텔 앞에 내려다 주고 그대로 차를 몰아 만남의 광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차장 가장 구석에 차를 세우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2시간을 보냈다.
   오전 7시 정각이 되기 5분 전, 희주의 차가 만남의 광장으로 들어섰다. 무원은 조정배의 차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무원의 예상은 빗나갔다. 조정배는 휴게소 건물 안에서 걸어 나왔다. 언제부터 저기서 있었던 걸까. 무원은 혹시 조정배가 자신이 와 있다는 걸 눈치챈 건 아닌지 불안했다.
   희주의 차에 조정배가 올라탔다. 이제부터는 희주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냥 보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무원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진한 우디향 향수 냄새가 코점막을 강하게 자극했다. 바로 차를 버리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욕지기가 밀려왔다. 이미 창문이라는 창문은 전부 내렸지만 희주는 혹시라도 덜 열린 데가 있는지 백미러로 뒷좌석까지 확인했다. 조정배는 명품 브랜드의 여름 신상 상‧하의 세트피스를 깔끔하게 차려 입은 상태였다. 반면 희주는 어제 입은 옷 그대로였다. 잠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15분 정도면 충분하겠군. 그다음에는 같은 자리에 내려 줘. 블랙박스는 껐나?”
   조정배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려 블랙박스를 가리켰다. 동작 하나하나가 위협적으로 보이는 사내라는 걸 희주는 다시금 깨달았다.
   “녹음, 녹화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제 솔직하게 털어놓으시죠. 그런 일을 왜 한 거죠? 남의 뒷조사나 하려고 형사가 된 건 아닐 텐데.”
   “피차 예의 차릴 필요는 없지.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 그런 식이라면 언젠가 호되게 한 번 당할 것 같으니까.”
   “협박을 잘하시네요? 강희건을 위해 뒷조사를 하면서 그 여자들한테도 이렇게 협박했나요?”
   “비슷해. 구린 구석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효과가 좋았나요?”
   “늘 먹혔지.”
   “별장 저수지에 빠져 죽은 여자 뒷조사도 했겠죠. 그 여자는 어느 구석이 구리던가요?”
   “강 대표는 여자 약점을 하나 잡아 오라고 했어. 여자가 뜻대로 잘 안 움직인다고.”
   “그래서 뭐가 나왔죠?”
   “남편이 있어. 딸도 하나 있었던 걸로 기억해. 애는 죽었을 거야. 높은 확률로.”
   죽은 여자에게 딸이 있었다? 희주는 저수지 괴담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를 한 밥집 여자와 마을 회관의 노인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들 입에서 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었다.
   “어떻게 확신해요?”
   조정배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희주를 응시했다. 그 바람에 향수 냄새가 바로 코밑에서 지독할 정도로 진하게 났다.
   “좀 불안해 보이는군.”
   이번엔 희주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에 대해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안 나왔어. 재미없는 여자였으니까. 별장에 안 나오는 날엔 수녀원 같은 데 종일 붙어 있었지.”
   “수녀원?”
   “거기서 봉사를 하더군. 뭘 위해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천국? 그런 걸 노리는 건가?”
   “그래서 그 여자에 대해 결국 뭘 알아냈죠?”
   “시간이 얼추 됐군. 난 이제 곧 내릴 거야.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왜 날 만나자고 했어요?”
   “치상 형은 널 수사에서 제외시켰지만, 넌 움직이고 있을 줄 알았어. 뭔가 찾아낸 게 있는지 궁금했어.”
   “왜요? 이덕식, 주용훈, 최준석 다음은 본인일까 봐요?”
   갑자기 조정배의 왼손이 희주의 목덜미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희주는 그가 1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들보다 2배는 손이 크고 두툼한 그가 목덜미를 누르자 곧바로 숨이 막혔다.
   “이… 이거 놔요. 안 놓으면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버릴 테니까.”
   “바라는 바야.”
   조정배는 다시 한번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죽는 건 상관없어.”
   희주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운전에 집중했다. 주웅이 가르쳐준 대로 심호흡을 크게 서너 번 반복했다.
   “그 여자도 그랬던 것 같아.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어. 다만 딸을 아꼈던 건 기억나. 그래서 강 대표가 하라는 대로 했겠지.”
   “날 부른 이유가 뭐예요? 다 털어놓고 싶었던 것 아니었어요?”
   “착각 마. 네가 무슨 신부라도 되는 줄 알아? 한 가지만 말해 주지.”
   희주는 고개를 돌려 조정배의 옆얼굴을 보았다. 혈색 좋은 기름진 얼굴. 하지만 뭔가 빠진 것 같다. 아주 오래전에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은 텅 빈 얼굴.
   “피해자는 과거를 잊지 못하고 가해자는 발을 뻗고 잔다는 건 틀렸어. 가해자도 분명히 망가져. 본인만 모를 뿐. 이 복수극이 20년 전 일과 관계된 인간들을 전부 죽여야 끝나는 거라면, 도대체 누가 이 모든 일을 벌이는 거지? 돈 없고 비참한 가정부 따위를 기억하는 게 누구냐는 말이야. 난 그게 궁금할 뿐이야.”


   조정배는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사라졌다. 무원은 희주의 차 보조석 문을 열고 털썩 앉았다. 희주는 무원의 얼굴을 힐끔 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정배가 움켜쥐었던 목덜미에서 끈적끈적한 땀이 배어 나왔다.
   “…날 미행이라도 한 거야?”
   “그게 중요해요? 괜찮아요?”
   “보다시피.”
   “주차장을 빠져나간 지 채 20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얘길 한 거예요?”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희주는 무원도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날 못 믿어서 지키고 있던 거야?”
   “괜히 비비 꼬지 말아요. 나도 내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까.”
   무원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시키지도 않는 짓은 잘하네. 설마 나 납치라도 될까 봐?”
   “그거 알면 사람 고생 좀 시키지 마세요.”
   “….”
   “저는 이제부터 잘 거니까 깨우지 마요.”
   “뭐? 네 차는?”
   “졸려서 운전 못 해요. 집에 도착하면 깨워요.”
   무원은 보조석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너 목숨 서너 개 돼?”
   “하나뿐인 목숨 선배한테 맡길 테니까 책임져요.”


   22 드론


   조정배는 오치상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집, 사무실, 애인의 집 그 어느 곳도 편하지 않았다. 어딜 가든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반면, 요트는 작은 섬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섬과 다를 바 없었다. 조금만 먼 바다로 나가면 완벽하게 혼자가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만남의 광장에서 정희주를 만난 다음 이곳으로 왔다.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요트 앞에 오치상이 서 있었다. 순간 오치상이 자신을 미행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조정배는 이런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얼굴을 가리듯 손을 들었다.
   오치상은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치부를 아는 이들끼리 우리끼린 괜찮다는 의미로 하는 악수였다. 조정배는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원단으로 맞춘 양복바지에 문질렀다.
   “여전히 신수가 훤하네. 좋아 보여.”
   “형은 예전이랑 똑같아.”
   “나? 난 다됐지 뭐.”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는 걸 조정배는 잘 안다. 오치상은 자신이 여전히 현역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상당했다.
   “들어가서 얘기할까?”
   “덥네. 뭐 마실 거 좀 있어?”
   오치상은 조정배의 두툼한 팔뚝을 툭툭 치면서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조정배는 오치상을 따라 들어갔다. 갑자기 갈증이 심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좋지 않은 느낌이 엄습했다.


   “그건, 잘 있지?”
   오치상이 말하는 ‘그건’ 총이다. 최준석의 총.
   최준석은 총이 사라졌다고 진술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최준석은 경찰에 신고를 한 다음 오치상과 통화를 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총을 숨겼다가 오치상에게 전달했다. 오치상은 총을 범인이 가져간 걸로 오해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야 수사가 계속 혼선을 거듭하면서 시간을 끌 테니까.
   사라진 총의 소재를 찾아 정희주가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오치상은 도대체 누가 이 일련의 복수극을 꾸민 것인지 알아낼 계획이었다. 총은 조정배에게 맡겼다. 불법으로 입수한 총을 가장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은 바로 전직 형사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총을 구해 준 것도 조정배였다. 조정배는 흰 장갑을 끼고 침대 옆 장식장 서랍에서 헝겊으로 싸 놓은 총을 꺼냈다.
   “잘 보관해. 언젠가 제대로 처리해야 하니까.”
   “그럼. 제대로 처리해야지 물론.”
   조정배는 다시 총을 원래 자리에 넣어 두었다.
   “처리, 하니까 생각나는데 그 여자 딸 말이야. 기억나지?”
   “그 애는 그때 김재화가 데리고 갔잖아. 형이랑 내가 뒤처리하고 있을 때.”
   “그랬지. 그럼 예상대로 흘러갔겠군. 그 여자 때문에 꽤 애먹었지. 특히 우리 조 형사가.”
   “….”
   “우리, 뭐 좀 마실까? 오늘은 아침부터 내리쬐네. 이럴 땐 두어 군데만 들려도 셔츠가 흠뻑 젖는다니까. 차라리 겨울이 낫지.”
   조정배는 칠링 바스켓에서 잘 익은 레드 와인을 꺼냈다. 최근에는 아침이건 점심이건 가리지 않고 눈에 뜨이는 술을 모조리 마셔 댔다. 그래서 한동안 보트에 술을 싣지 않다가 오늘 정희주를 만나고 돌아와 한잔할 생각에 얼음을 채운 바스켓에 와인을 미리 넣어 두었다. 그는 와인을 두 잔 따라서 한 잔을 오치상에게 내밀었다.
   “덕분에 호사야. 이 좋은 배에서 이 좋은 와인을 마시다니. 근데 말이야, 아까 확인 못 한 게 있는데 그거 좀 다시 꺼내 보겠어? 이건 내가 들고 있지.”
   오치상은 자연스럽게 조정배의 와인을 받아들었다. 조정배는 말없이 다시 침대 옆 서랍장으로 갔다.
   그 순간, 오치상은 자신의 와인을 단번에 들이켜고 주머니에서 주사약을 꺼내 유리로 된 입구를 부러뜨리고 조정배의 와인 잔에 빠르게 부었다. 그리고 가벼운 스냅으로 와인 잔을 돌렸다. 조정배가 총을 든 채 돌아섰다.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타이밍이었다.
   “와인 좋네. 잘 익었어.”
   오치상은 총을 받아들면서 와인 잔을 내밀었다. 조정배는 잔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한 잔으로는 부족했다. 조정배는 병째 들고 마시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고마워. 별거 아니네.”
   오치상은 대충 살펴보고는 총을 다시 내밀었다. 조정배는 총을 받아 서랍에 넣었다.
   “요즘도 잠 설치고 그래? 소풍 전날 애들처럼?”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애초에 기억 삭제니 뭐니 역겨운 수술을 받는 게 아니었어.”
   “…맞아.”
   “나약해 빠진 인간들의 발버둥이라니까. 말이 돼? 자기 기억, 감정 하나 제대로 컨트롤 못 한다는 게. 판검사도 별 볼 일 없어. 책상에 앉아 펜대만 굴리던 족속들. 우리처럼 현장 체질들한테는 그저 우습지 뭐.”
   “그래. 그냥 잊었어야 했는데 내가 경솔했어.”
   “아니.”
   오치상은 정색하며 조정배를 응시했다.
   “잊지 말고 간직해야지. 그것도 아주 디테일하게. 그래야 누가 물어도 정확하게 틀린 대답을 해 주지. 안 그래?”
   “…그래.”
   “그래 봤자 사람 하나 죽은 거야. 이거 체 게바라가 총살당하기 전에 한 말이라는데 우리 상황에도 딱 맞지 않아?”
   오치상은 또다시 조정배의 경직된 팔을 툭툭 치며 보트 밖으로 나갔다.
   조정배는 침대에 앉아 멀어져 가는 오치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돌아보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에 단단히 걸린 족제비가 된 기분이다. 조정배는 와인 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목구멍을 열고 흘려보냈다. 식욕도 감정도 불안도 이젠 더 이상 제어가 되지 않는다.


   초저녁부터 불을 밝힌 고급 요트 주위로 여러 대의 드론이 날아다녔다. 희주는 선착장에서 서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은 이들이 하나둘 요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아예 휴대폰 속 자신의 팬들에게 오늘 입고 걸친 것을 보여 주며 떠들어 대는 여자도 있었다. 타인의 삶에 과도할 정도로 관심을 쏟고 또 거기에 기생하는 이들의 심리를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너무 노출한 탓에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되는 케이스가 점점 늘고 있기에 희주는 그들만의 유희를 마냥 좋게만 볼 수는 없었다.
   한 무리의 대범하고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들이 차에서 내려 요트가 줄지어 있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파리처럼 목적 없이 붕붕 날던 드론들이 여자들을 향해 다가왔다. 여자들의 목적지인 한 요트에서 남자들이 나와서 여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개중에는 휘파람을 부는 인간도 있었다. 어디서 터트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알 만하군.”
   희주는 이덕식이 뭘 좋아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내에게 낚시를 핑계로 즐긴 것도 미녀들과 대중들의 관심이었을 것이다. 판사님은 스타리온의 B급 여배우들과의 보내는 황홀한 시간과 그걸 질투하는 사람들의 시선 모두를 즐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판사라는 위대한 직업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 마음속 깊이 차올라 자신 말고 다른 사람들의 성실한 인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희주는 지나친 억측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덕식을 향한 악의를 제어하기 힘들었다.
   희주는 불을 밝힌 요트 무리에서 조정배의 요트를 찾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요트는 불이 꺼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여기 있는 건 확실했다. 그는 오늘 아침 희주와 헤어져 헬스장 카운터를 지키는 애인을 만난 직후 바로 이곳으로 왔다. 이걸 확인시켜 준 사람은 물론 그의 애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이 또 한 번 자살 시도를 하고 그 장면의 최초 목격자가 자신이 될까 봐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라고 했다. 그래서 희주가 조정배를 예의 주시한다는 것에 오히려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조정배의 사생활에 대해 묻지 않아도 털어놓았다.
   희주는 그를 한 번 더 압박할 생각이었다. 그가 먼저 만나자고 한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단순히 희주가 범인에 대해 알아낸 게 있는지 정도의 이유로 만나자고 한 건 아닌 게 분명했다. 그게 궁금했다면 오치상에게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정배는 희주에게 먼저 연락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강희건과 관계된 인물들 중 가장 심하게 죄책감에 시달린 인물이었다. 물론 주용훈도 과거 일에서 벗어나지 못해 술과 약에 절어 살고 트라우마를 삭제했지만, 적어도 자살 시도를 하진 않았다. 하지만 조정배는 좀 달랐다. 오히려 주용훈처럼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경고 메시지가 밖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조정배는 내면이 박살 난 상황에서도 깔끔하게 주름 하나 없는 옷을 걸치고 향수까지 뿌리는 남자였다. 희주는 잘 알고 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어느 날 깜짝 놀랄 만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을.
   요트 앞에 서서 조정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 같아선 무방비 상태의 그를 만나고 싶지만 그랬다간 트집을 잡으며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줄 것 같아 관뒀다. 벨 소리가 요트 밖으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전화 주인은 보이지도 않고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별수 없네.”
   희주는 성큼 요트 갑판 위로 올라갔다. 벨 소리가 계속 안에서 들렸다.
   “이건 뭐 변심한 애인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요트 내부로 들어가는 문손잡이를 잡으려다가 본능적으로 땀에 전 티셔츠 자락을 당겨 문손잡이를 감싼 다음 문을 열었다.
   “이 요트랑 어울리지도 않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 미안하지만 아까 못다 한…!”
   희주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밖의 온도와는 거의 10도 이상 차이가 날 만큼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타고 비릿한 쇠 맛이 코점막을 자극했다. 조정배는 요트 중앙의 암갈색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까 희주가 본 차림 그대로였다. 깔끔하게 접은 바짓단에 다림질이 된 리넨 바지, 하늘색 셔츠. 맨발에 신은 스웨이드 재질의 로퍼.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희주의 뒷덜미를 공격할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그는 죽어 있었다.
   희주는 패닉이 빠졌다. 빨리 신고해야 한다는 판단, 지금 이 자리에 그녀가 있는 것이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할 것인가 대한 계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오기 전까지 뭔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쳤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신경 쓰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몸싸움의 흔적은 없다. 바지 아래 드러난 발목과 팔에 긁힌 자국이나 묶인 흔적도 없다. 하지만 오른쪽 관자놀이 뒤쪽 머리카락은 피로 떡이 져 있다. 피가 오른쪽 어깨를 다 적시고 하늘색 셔츠 가슴팍을 물들이고 바지 앞부분까지 흘러내린 다음 말라붙어 있었다. 총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단서를 찾아낼 수 없다. 희주는 조정배의 오른손을 보았다. 손가락에 점점이 흩어진 화약 흔적과 피가 묻어 있었다. 희주는 재빨리 자신의 운동화 바닥을 확인했다. 외부 흙이나 바닥에 자국을 남길 만한 물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운동화는 깨끗했다. 요트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요트 갑판 위와 도로에 핏자국은 전혀 없었다. 조정배는 자신의 요트 안에서 죽은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자살이었다.
   희주는 경찰을 부르기 전에 요트 내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빈 와인 병 3개와 와인 글라스 하나, 그리고 휴대폰이 있었다. 희주는 요트 안 싱크대를 살펴보았다. 그 안에 와인 글라스가 하나 더 있었다.
   방문자. 누군가 희주가 오기 전 여기에 왔었다. 잔은 비어 있지만 잔 바닥에 붉은 와인의 흔적은 남아 있다. 티셔츠를 이용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통화 2건. 희주가 건 것이었다. 흔적이 남았으니 경찰 조사를 피할 순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동안 조정배를 집요하게 만난 걸 가지고 오치상이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심신이 미약한 은퇴 형사를 압박해 처참한 자살에 이르게 한 악랄한 여형사 프레임을 씌울 것이다. 그리고 엉덩이를 발로 차서 내쫓을 게 눈에 훤했다.
   희주는 문자 내역을 확인했다. 항공권 결제 내역이 눈에 띄었다. 이틀 뒤 인천을 떠나 뉴욕 JFK에 도착하는 편도행 티켓. 편도? 당분간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가? 조정배의 애인에게는 듣지 못한 이야기다. 다시 조정배의 시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범벅이 된 얼굴과 피로 젖은 셔츠와 바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제 누구에게 진실을 묻죠?”
   그제야 평화를 찾은 조정배는 말이 없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거죠?”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경찰에 알려야 한다. 만약 자살이 아니라 살인 사건이라면 용의자가 흔적을 지우고 도주하기 전에 추적을 시작해야 한다. 희주는 차라리 후자이길 바랐다. 그래야 전직 판사와 전직 검사가 살해당한 연쇄살인사건에 조정배 케이스를 포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결국 강희건도 더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오치상과 최준석 그리고 그 위에 누군가가 더 있어서 강희건을 보호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희주는 휴대폰을 꺼내며 요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여전히 여러 대의 드론이 찍을 만한 것을 찾아 후덥지근한 여름 하늘 위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희주는 고개를 돌려 조정배의 요트 주위를 날고 있는 드론의 주인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 남자는 캠핑용 장비들을 거하게 세팅해 놓은 채 드론을 날리는 중이었다. 바닥에는 아이스박스가 있었고 남자는 아이스박스에서 새 맥주를 꺼내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 캔이 두 개쯤 있었다. 적어도 한 시간, 혹은 그보다 더 길게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드론을 날렸다면 남자의 드론에 뭔가 찍혔을 것이다. 조정배의 요트에 누가 올랐다가 내렸는지 정도는 찍혔을 게 분명했다.


   23 데이트 강간 약물


   우리 각자 안에서 무언가 죽어 있었다.
   죽은 것은 바로 희망이다.
   -오스카 와일드


   희주와 무원은 서둘러 국과수 건물 앞 주차장에 차를 댔다. 혹시 눈에 익은 차가 있는지 주변을 한 번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경은에게는 딱 10분만 빼 달라고 미리 말해 두었다.
   희주는 시신을 부검하는 장소인 검시실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포름알데히드 냄새가 어딜 가든 공기 중에 떠돌았다. 죽음을 지우기 위해 사용하는 냄새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더욱 강력하게 연상시켰다. 늘 최대한 빨리 도망치고 싶은 곳이었다. 국과수 내부는 깔끔하고 평범한 연구실을 연상케 했지만, 오늘 새로 들어온 열 몇 구의 죽은 피해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잊기는 힘들었다. 반면 무원은 별로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확인했다.
   “우리 정말 괜찮은 거예요?”
   “뭐가?”
   “여길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요. 우릴 아는 검시관이 팀장한테 전화라도 하면요?”
   “농담해? 이 안에 그렇게 한가한 사람 없어.”
   희주는 무원을 무시하고 검시실의 스테인리스 스틸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경은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채 해부대 앞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현격하게 낮아진 기온이 느껴졌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벌써 1분 지났어.”
   경은은 턱으로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가리켰다.
   “9분이면 충분해.”
   희주는 대꾸하며 해부대로 다가갔다. 지나치게 밝은 검시실 조명이 남성의 시신을 비추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부터 발목까지 흰 천이 덮여 있었다.
   “조정배?”
   희주가 물었다.
   “응.”
   경은은 대답하며 조정배의 얼굴을 가린 흰 천을 가슴까지 내렸다.
   “두피를 절개하고 뇌부터 확인했어. 브레인 임플란트 칩 여덟 개가 발견됐어. 뇌는 총알 때문에 으깨진 상태라 그 칩들이 어디 붙어 있었는지는 확인 불가야.”
   희주는 가까이 다가가 시신의 머리를 살펴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뭐 더 알아낸 건?”
   “약물이 하나 검출됐어.”
   “약물?”
   “케타민이 나왔어.”
   “케타민?”
   희주는 바보처럼 경은의 말을 반복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였다.
   “케타민이 뭔지는 내가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돌겠군.”
   “왜?”
   “파티에 미친 20대도 아니고 중증 우울증에 걸린 남자가 그걸 왜?”
   “케타민이 우울증이나 양극성장애, 자살 징후가 있는 환자한테 종종 쓰이는 거 알잖아. 물론 효과는 미비하지만.”
   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일 대학교에서 케타민이 우울증에 의해 손상된 뇌세포의 연결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를 발표한 적도 있어요.”
   경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요트에 갔을 때 조정배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어. 본인이 직접 케타민을 먹고 권총 자살을 한 게 아니라 혹시 누군가 몰래 약을 먹이고 정신을 잃은 조정배를 쏜 거라면?”
   희주는 물었다. 케타민은 중추신경계에 진정 작용을 해 몽롱하거나 잠이 오게 만든다. 이 진정 작용 때문에 데이트 강간 약물의 일종으로 분류가 되어 있다.
   “가능해. 무미 무취라 술에 섞으면 구분할 수 없었을 테니까. 주사로 주입하면 45분 정도고 코로 흡입하면 1시간 정도 효과가 지속돼. 직접 복용했을 경우도 1시간 정도야.”
   희주가 방문하기까지 고작 1시간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드론은?”
   무원은 희주의 말뜻을 알아채고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요. 요트에 들어가거나 나온 사람이 확인하면 바로 전화 달라고 했어요.”
   “얼마나 급한 일인지 제대로 설명한 거야?”
   경은이 손가락으로 전자시계를 가리켰다.
   “일 얘기하는데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둘 다 이제 나가 줘야겠어. 성질 나쁜 형사님들의 멱살잡이 직관은 사양이야.”
   “성질 나쁜 형사에서 난 빼 줘.”
   희주는 대꾸하며 무원이 드론 주인에게 전화 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 상황에 적절한 질문은 아니지만, 요즘 애인하고는 어때?”
   경은이 슬쩍 희주에게 물었다.
   “우리 일에 적절한 때가 있긴 해? 안 좋아. 알고 물어본 거 아냐?”
   “물론 너 때문이겠지?”
   “알면서 왜 물어.”
   “잘 좀 해.”
   “난 틀렸어. 너라도 남편이랑 행복하게 살아 줘.”
   “난 행복해. 하루가 끝나고 침대에 누울 때 남편의 두툼한 엉덩이가 몸에 닿을 때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 오늘 하루가 정말 끝났다는 걸 남편 체온으로 확인해.”
   “무슨 느낌인지 난 잘 모르겠네.”
   “애인을 잘 써먹어 봐. 인간을 버티게 하는 건 결국 그런 거니까. 나랑 비슷한 온도의 체온 같은 거.”
   무원이 전화 통화를 마치고 희주에게 말했다.
   “선배 예상이 맞았어요. 조정배가 요트에 도착하기 15분 전쯤 전에 먼저 요트 갑판 위에 올라간 사람이 있었어요.”
   “누군지 알 것 같네.”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주는 오치상의 얼굴을 떠올렸다. 범인을 잡다가 부러졌다던 툭 불거진 그의 콧잔등과 늘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는 눈동자를. 케타민과 총. 어디까지가 오치상의 생각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두 가지 다 오치상이 손에 넣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전직 판사와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를 단번에 원하는 장소로 불러낼 수도 있었을까. 이 판에서 가장 강력한 카드인 강희건을 쥐고 흔든 것도 오치상이 아닐까. 이덕식, 주용훈, 조정배. 그리고 최준석. 희주는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최준석의 병실에 설치한 감시 카메라 영상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희주는 차 보닛에 걸터앉아 굳게 닫힌 별장 철제문을 바라보았다.
   “좋은 작전일까요?”
   “선택지가 별로 없잖아.”
   무원은 운전석 문을 열고 다리를 밖으로 빼 놓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뜨거운 정오의 햇빛을 가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달라진 건 없었다. 외지인이 거의 찾지 않는 쇠락한 동네. 빈 공장 터와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는 비닐하우스가 늘어선 곳. 그곳에 세워진 왕국과도 같은 별장. 마을 주민들에게는 귀신이 나온다는 저수지를 품고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밖에서 절대 알 수 없는 철옹성 같은 곳.
   희주는 철제문 우측에 붙은 낡은 인터폰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별장 안에서 빛바랜 검은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나와 철제문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희주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어쨌거나 별장과 관계된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긴 싫었다. 남자는 희주를 조용히 한 번 훑어보았다.
   “강남서 강력팀 소속 정희주 경위입니다. 이곳 관리인이신가요?”
   남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봐도 180센티미터는 넘을 법한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의 중년 남자는 먼지가 묻은 긴 장화와 작업용 바지, 땀에 전 등산용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잡초를 정리하다가 왔는지 낫을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개인 사유지입니다. 경찰이든 뭐든 남의 집 앞에서 얼쩡거리면 곤란합니다.”
   희주는 처음으로 열린 별장 문 너머 안쪽에 뭐가 있는지 재빠르게 스캔했다. 안으로 향하는 잘 닦인 아스팔트 도로와 양옆에 잘 손질된 정원수, 그리고 멀리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오두막 같은 단독 건물 한 채. 아마도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공간일 터.
   “혹시 별장 주인이 안에 계신가요?”
   “못 알아들었군요.”
   남자는 별장 안에 시선을 고정한 희주 앞을 막아섰다. 육체적으로 월등한 상대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희주는 한발 물러섰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게 제 일이라.”
   “당신들을 쫓아내는 건 내 일이고.”
   희주는 남자가 혹시 전직 경찰 출신인지 궁금했다. 어딘지 모르게 경찰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정‧재계 쪽 인사들이 경찰 출신을 자택 경비원이나 개인 보디 가드로 고용하는 경우가 별로 드물지 않았다. 단순히 별장의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관리인이라고 하기에 남자는 좀 별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게 뭘까.
   “따로 전달받은 사항이 없는 이상 경찰이라고 해도 확인해 드릴 수 없습니다. 계속 여기서 버틴다면 당신들을 치울 경찰을 따로 부르겠습니다.”
   남자는 차분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처럼 급작스럽게 형사들이 들이닥친 순간에도 차분함을 절대 잃지 않는 사람.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금방 가겠습니다.”
   “당장 차를 빼는 게 좋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희주는 남자를 두고 돌아섰다. 무원은 희주가 아닌 남자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낫을 든 남자의 손을 응시했다. 희주는 차로 돌아와 보조석에 앉았다.
   남자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차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지켜볼 생각인 것 같았다.
   “믿음직한 관리인이네. 주인의 비밀을 많이 알 텐데.”
   “하지만 절대 아무한테나 입을 열진 않겠죠.” 남자의 예상과 달리, 희주와 무원은 마을 회관 정도까지만 후퇴했다. 이쪽에서는 별장에서 나오는 차량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만 별장 철제문에 달린 감시 카메라에는 찍히질 않을 각도였다. 그리고 마을 진입로에서 차가 들어온다면 정체를 들키지 않고 관찰이 가능했다.
   “확실해. 강희건은 지금 저 안에 있어.”
   “팀장 차라도 저 안으로 들어가길 바라는 거예요?”
   “그럼 완벽하지. 만약에 팀장 차가 저 진입로에 나타나서 별장 안으로 들어가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안으로 들어갈 거야.”
   무원은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희주는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저길 봐.”
   빨간색 경차 한 대가 천천히 진입로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무원은 운전석을 주의 깊게 봤다.
   “여자예요. 나이는 30대 후반, 40대 초반?”
   차는 진입로를 따라 별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철제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갔다.
   “택배도 여배우도 아냐.”
   “가사도우미일까요?”
   “모르지. 정수기, 비데 코디네이터, 뭐든 가능하지.”
   “다시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죠?”
   “물론.”
   빨간 경차는 4시간 뒤 별장 철제문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희주는 드론 주인과 통화를 했고 그가 휴대폰으로 보내 준 캡처 사진을 보고 조정배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인간이 오치상임을 확인했다. 남자는 경찰서 출석 같은 건 절대 못 한다고 못 박았다. 아마 드론으로 찍은 이런저런 뒤가 구린 영상을 꽤 모아 둔 모양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요트를 세워 놓고 갑판 위에서 사랑을 나누는 커플을 몰래 찍다 걸린 드론 주인도 제법 많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따라갈게요.”
   무원은 경차가 지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시동을 걸었다.
   희주는 비상약으로 챙긴 공황장애 약을 물도 없이 한 알 삼켰다. 일종의 예방주사였다. 미행을 하면서 운전석, 보조석, 뒷좌석 창문을 전부 내리고 도심으로 들어갈 순 없으니까.
   여자의 차가 멈춘 곳은 어린이집 앞이었다. 여자는 주차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 잠시 후 남자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여자는 아이를 뒷좌석에 설치한 아동 카시트에 앉히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대형 마트로 향했다. 무원은 여자의 차를 계속 따라갔다. 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운 여자는 아이와 함께 마트 2층에 위치한 햄버거 프랜차이즈 가게로 들어갔다. 아까 먹은 약이 효과가 있는지 아직까지는 가슴이 답답하지 않았다. 희주는 무원에게 마실 걸 사서 적당한 곳에 앉아서 지켜보라고 지시한 다음 여자와 아이가 나란히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아이는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으며 놀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강남서 강력팀 정희주 경위입니다.”
   이럴 때는 신분을 최대한 빨리 밝히는 게 낫다. 안 그러면 잡상인 취급을 당한다.
   “네?”
   희주는 여자 앞에 앉으며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희주는 신분증을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놀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잠시 협조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자세하게 말할 순 없다. 적당히 애매하게 말하면 된다. 애매하게 말한다고 거짓말이 되는 건 아니니까. 희주는 입을 열었다.
   “강 대표 별장에서 일하던 가사도우미분이 오래전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그 일 관련해서 현재 조사 중입니다.”
   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제 개인정보를 해바라기 센터에서 알려 준 건가요? 저한테 동의도 안 구하고요? 그래도 되는 건가요? 아무리 형사님이라지만.”
   사실은 미행을 했지만 그걸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여자 입에서 해바라기 센터라는 말이 나오자 자동으로 주용훈과 최준석이 떠올랐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건이요?”
   “네. 별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혹시라도 그 일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거나, 별장 내에서 석연찮은 일이나 이야기를 들은 경험이 있으신지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고용주와 형사 둘 중 어느 쪽을 따르는 것이 이득일지 계산하는 눈치였다.
   “별장 주인을 직접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아뇨. 일을 시작한 지 겨우 삼 일째에요. TV에도 나오는 유명인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실제로 본 적은 없어요.”
   “그럼 별장에서 주로 하시는 일이.”
   “집안일이죠. 청소하고 빨래하고.”
   “어떤 경로로 그 일을 시작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소개받았어요.”
   여자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올 초에 이혼하고 돈 나올 구멍이 없었거든요. 갚을 대출금도 있는데 애 아빠가 양육비를 입금 안 해 줘서요.”
   여자는 말을 뱉어 놓고 옆에 앉은 아들을 힐끔 보았다.
   “해바라기 센터에 있을 때 거기 변호사님 소개로 이 일을 하게 됐어요.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을 돕는 경찰들이 있어서 일자리를 주선해 준다고요. 저도 언제까지 허덕이며 살 순 없으니까요. 이혼하고 아들 성도 제 것으로 바꾸고 이름도 바꿨어요. 전남편 흔적은 싹 지우고 싶었거든요. 주민번호도 바꿨어요. 혹시라도 그 인간이 애비랍시고 내 아들 찾아오는 일을 막고 싶었죠. TV에 보니까 떨어져 살던 애비가 성인이 된 자식 앞에 나타나서 돈 달라고 하고 빚 갚으라고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도 벌어지더라고요.”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번거로운 과정일 테지만, 여자는 그 방법이 아이를 지킬 최후의 보루라고 믿을 것이었다. 희주의 생각도 동일했다.
   “별장 일을 소개해 준 형사가 누군지 여쭤봐도 될까요?”
   “…기억이 안 나네요. 그냥 전화 통화만 몇 번 해서. 연락처도 따로 저장 안 했어요.”
   “별장에서 일하시면서 이상한 일은 없었나요? 수상한 사람들이 들락거린다거나.”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집은 조용했어요. 집주인이 없으니 당연한 거지만.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전 그냥 제 할 일만 정해진 시간 동안 했어요. 문단속도 할 필요 없었죠. 일 마칠 시간이면 관리인이 와서 확인을 했으니까요. 이제 가도 될까요? 애 씻기고 재울 시간이 다 돼서요.”
   여자는 희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갑작스러우셨을 텐데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죠?”
   “네?”
   “예전 그 가사도우미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익사 사고였습니다. 별장 안 저수지에서 일어난.”
   희주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더 묻지 않았다. 아마 여자도 저수지를 봤을 것이다.
   “혹시 더 생각나는 게 있으면 연락 주시겠습니까?”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희주는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돌려주었다.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사라지자 여자의 뒤에 앉아 있던 무원이 일어나 희주 맞은편에 앉았다.
   “진짜일까요?”
   “뭐가?”
   “소개해 준 형사 기억 안 난다는 거요.”
   “거짓말할 이유가 있을까?”
   “모르겠어요. 근데 저 같으면 가정폭력 때문에 이혼을 하고 센터 입소까지 했을 정도면, 형사 연락처 하나 정도는 저장해 둘 것 같아요. 혹시 모르잖아요. 전남편이 찾아와 난동을 부릴 수도 있고 게다가 일자리 주선까지 해 준 형사라면, 연락처를 꼭 가지고 있고 싶을 것 같은데.”
   “다 너 같고 우리 같지 않잖아.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어서 깜박했을 수도 있으니까.”
   희주는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너스 스테이션의 간호사였다. 희주는 간단히 통화를 마치고 끊었다.
   “병원에 당장 가야겠어.”
   “네?”
   “범인이 다시 나타난 것 같아.”


   24 기습


   하지만 최준석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목을 조르는 괴한을 피하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타박상을 입었다. 다행히 치명상은 없었다. 최준석은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모니터링 줄을 끊어 비상벨을 울려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가 병실로 달려왔을 때 그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침입자의 존재는 연기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병원 보안팀에서 CCTV를 확인하는 중이었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한 채 또다시 미궁에 빠졌다. 최준석이 유일한 목격자이자 피해자였다.
   병동 복도에 서 있는 희주를 발견한 동료 형사가 곧 오치상이 온다면서 자리를 피하라고 경고했다. 희주는 간호사에게 부탁해 병실에 설치한 감시 카메라를 받아 냈다. 영상이야말로 유일한 증거임이 확실했다. 희주는 영상 확인을 위해 오피스텔로 향하면서 무원에게는 상황을 좀 더 살펴본 뒤 오피스텔로 오라고 지시했다.
   “네가 있어서 든든해. 나 혼자서는 이 수사 못 했을 거야.”
   “웬일이에요, 그런 말을 다 하고.”
   “몰라. 죽을 때가 됐나?”


   희주는 걸어서 10분 거리인 오피스텔로 향했다. 1층에는 호프집, 식당이 성업 중이었다. 1층 비상구 계단을 걸어 2층 복도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은은한 곰팡내와 음식 냄새가 났다. 침침한 형광등이 하나 걸러 하나씩 켜져 있었다. 아마도 공용 전기요금을 아끼려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잠시 잠깐 하는 사이 휴대폰이 울렸다. 희주는 복도 제일 끝에 위치한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복도에 선 채 전화를 받았다.
   “안상호 경위입니다.”
   순간 머리가 맑아지면서 뇌 어딘가 저장되어 있던 ‘안상호’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부임한 첫해 마을 저수지에서 별장 가사도우미가 빠져 죽은 사건을 목격한 신참 형사. 희주의 번호를 지웠을 거라는 예상이 깨졌다.
   “형사님을 만난 다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도 책임질 가족이 있으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혹시라도 가족들에게 해가 될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위님께 들은 이야기는 수사에 참고만 하고 정식 증거로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증거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시 서류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제가 전부 불태웠으니까요. 윗선을 통해 그렇게 지시를 받았습니다. 지시대로 했으니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거 압니다.”
   희주는 말없이 20년 전 일을 고백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비상구 문을 닫고 천천히 집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그날 본 시신과 여자의 인적 사항은 잊혀지지 않더군요. 껌처럼 뇌에 딱 달라붙어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수없이 많은 사건을 접했지만, 유독 그 사건만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희주에게 죽은 여자의 이름과 당시 주민등록상 거주지 등 기억하는 것들을 전부 털어놓았다. 희주는 휴대폰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경위의 말을 전부 머릿속에 입력했다. 이제야 꽉 막힌 수사에 도움이 될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았다는 생각에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집까지는 고작 5미터 앞. 희주는 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통화할 생각에 현관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침침한 형광등이 꺼지면서 일순간 복도가 어둑해졌다. 그리고 누군가 희주의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우고 입구를 조였다.
   “…!”
   산소 부족보다 먼저 극도의 공포심이 희주를 덮쳤다. 순간적으로 감시 카메라가 든 가방을 복도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괴한은 가방에는 관심 없는 듯 비닐봉지로 감싼 희주의 목을 가차 없이 졸랐다. 괴한의 엄지손가락이 점점 더 깊게 목을 파고들었다. 괴한의 숨소리가 가깝게 들리자 배 속의 모든 걸 게워 낼 수 있을 것 같은 욕지기가 밀려왔다.
   ‘침착해야 해. 패닉에 빠지면 그땐 정말 끝이야.’
   희주는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길 바라면서 발을 뻗어 벽과 문을 찼다. 제발 한 명이라도 듣고 문을 열어 주기를. 활짝 열린 입과 콧속으로 침으로 축축해진 비닐이 말려 들어왔다. 희주는 괴한의 팔을 잡았던 손을 풀어 마구 휘둘렀다. 남자의 차가운 벨트 버클이 손등에 느껴지자 소름이 돋았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현실이라는 완벽한 자각. 땀으로 젖은 상체와 마구 버둥거리는 희주를 버티려는 단단한 하체 근육도 느껴졌다. 희주와 괴한의 운동화와 바닥이 마찰하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한낮의 오피스텔은 너무나 고요했다. 그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괴한은 한 번 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힘을 풀었다.
   희주는 그 자리에 끈이 잘린 마리오네트처럼 쓰러졌다. 물에 빠졌다가 죽기 직전에야 뭍으로 올라온 기분이었다. 몸을 덜덜 떨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빠르게 복도를 달려 비상구로 사라지는 괴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하지만 눈의 실핏줄이 터져 앞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검은 실루엣이 비상구 문을 열고 사라졌다. 격렬하게 몸이 떨렸다. 차가운 복도에 얼굴을 대고 누워 있는데 다시 비상구 문이 열렸다. 혹시 범인이 돌아온 걸까. 검은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희주는 휴대폰을 꺼내기 위해 가방으로 향해 기어갔다.
   “선배!”
   무원은 희주를 발견하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리고 차가운 복도 바닥에 엎어진 희주를 안아 일으켰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봤어?”
   “뭘요?”
   “방금 내려갔어. 빨리 확인해 봐.”
   무원은 희주를 복도에 기대 앉혔다. 그리고 재빨리 비상구로 향했다.
   공황발작이 찾아오지 않은 게 신기한 지경이었다. 목구멍으로 눈물과 콧물, 비릿한 피가 넘어갔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범인은 사라졌다. 애초에 희주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경고’만 하고 사라졌다. 마치 희주가 뭘 알게 되었는지 아는 것처럼. 저수지에서 죽은 여자 이름을 알게 된 것과 동시에 이런 일을 당했다는 게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딱 맞아떨어졌다. 희주는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피가 섞인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앞을 보는 데는 문제없었다.
   무원이 비상구 문을 열고 다시 희주가 앉아 있는 복도로 달려왔다.
   “1층에 감시 카메라가 한 대 있는데 고장 났어요. 관리인은 언제 고장 난 줄도 모르고 있고요. 일단 병원으로 가요.”
   “됐어.”
   “되긴 뭐가 돼요?”
   “최준석 병실 영상 확인이 먼저야.”
   “제정신이에요? 지금 죽을 뻔했어요.”
   “아냐. 날 죽일 생각은 없었어. 경고성 기습이야. 그건 우리가 진실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는 의미야. 내 목을 조른 남자는 최준석의 병실 감시 카메라가 든 가방에는 관심이 없었어. 그럼 거기까지는 아직 못 따라잡았다는 거야. 방금 전에 안상호 경위에게 전화가 왔어. 경위는 죽은 여자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어. 그 사람, 20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여자 이름을 잊지 못했어. 왜겠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거야.”
   “알겠어요. 설명은 나중에 해요. 선배를 혼자 보낸 내 잘못이에요. 우선은 병원에 가요.”
   “이 사건만 해결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아.”
   “…네?”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은 그 일도, 공황발작도 전부 말이야. 새 출발 할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멈출 수 없어.”
   “돌겠네요, 정말…. 그럼 내가 뭘 해 주면 돼요?”
   “같이 영상을 보는 거야. 그 영상에 누가 나오는지 확인해 보자고.”


   무원이 감시 카메라 영상을 노트북에 옮기는 동안, 희주는 화장실에서 괴한의 흔적이 남았을 가능성이 있는 옷을 증거물 봉투에 챙겼다. 얼굴을 감쌌던 비닐봉지를 다시 만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도 증거물이었기에 챙겨 두었다. 희주는 거울을 응시했다. 오른쪽 눈썹 위의 흉터가 채 아물기도 전에, 목에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팔뚝에도 멍과 상처가 생겼다. 몸 어딘가에 범인의 흔적이 남았다고 생각하니 당장 뜨거운 물로 씻어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빌어먹을 새끼…….”
   희주는 소파에 앉아 있는 무원 옆에 앉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공황장애 약을 한 알 먹었다. 아직은 무너져서는 안 된다. 아기를 때려 죽게 만든 남자가 여전히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아기는 죽었고 아무도 아기를 찾아오지 않았다. 선한 간호사들은 분유와 아기들이 좋아하는 간식과 장난감을 친부에게 맞아 죽은 아기와 함께 태웠다. 선과 악이 극명하게 공존한다. 그 사이에서 선한 이들을 지키는 것이 형사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쓰러질 때가 아니다.
   “병원은 어때? 현장에서 뭐 나온 건 없었어?”
   “아직은 없어요. 감시 카메라 확인하고 목격자 찾고 있어요.”
   “영상 틀어 봐.”
   최준석은 잠들어 있었다. 페이션트 모니터에서 불빛이 흘러나와 그의 얼굴을 비췄다. 잠시 후, 뭔가 불편한 듯 상체를 들썩였다. 시트 속에서 왼손을 뺐다. 그리고 신경 접합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왼손으로 스스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대체 뭐 하는 거지?”
   최준석은 괴로워하며 목을 조르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움켜쥐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왼손은 쉽사리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목을 졸랐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제 손을 떼어 내려 애를 썼다. 최준석의 몸이 점점 더 격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오른손은 왼손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그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왼손 대신, 오른손으로 페이션트 모니터에 달려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줄이 빠지면서 비상벨이 울렸다. 그리고 나서도 목을 조르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간호사가 달려 들어와 최준석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런 젠장! 말이 돼? 최준석을 공격한 건 본인 자신이야. 범인이 아니었어. 이게 가능한 일이야?”
   “그럼 설마 자택에서의 기습도 자작극일까요?”
   “확실하진 않지만 왼손 손목 신경이 끊어지고 오른손은 유리에 베인 상처가 가득했잖아. 그렇다면 자신을 공격하려는 왼손을 오른손이 저지하려다가 상처를 입은 걸지도 몰라.”
   “하지만 이걸 연기라고 보긴 힘들어요. 진짜 공격받은 사람 같잖아요.”
   “우리끼리 볼 영상이 아니야. 전문가한테 물어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희주는 주웅의 이메일로 당장 영상으로 보냈다. 그리고 전화를 해서 비공개로 영상을 분석해 줄 것을 요청했다. 희주의 사무적인 태도에 주웅은 마음이 상한 것 같았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현은 별 대꾸 없이 희주의 말을 들었다. 희주는 스피커폰으로 해 놓고 무원과 함께 정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거절해도 돼.”
   희주가 정현에게 부탁한 일은 불법이었다. 현재 희주와 무원은 수사에 배제가 된 상태라 신원 조회 시스템에 접속할 수 없다. 정현이 희주 대신 검색할 경우 기록에 남는다. 오치상이 그걸 문제 삼는다면 정현에게도 반드시 불이익이 갈 것이다.
   “잘못되면 형사 때려치우고 입시학원 미술선생이나 하지 뭐. 혹시 알아 정희주가 먹여 살려줄지.”
   “난 너 책임 못 져. 그러니까 안 해줘도 돼.”
   “뭘 또 그렇게 정색을 해. 이름이나 말해.”
   “이인애. 사망일은 2002년 8월 24일.”
   “남편 이름은 박창갑. 현재 이인애의 주민등록상 마지막 주소지에서 살고 있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박주희. 근데 주민번호가 말소됐어. 사망 같은데?”
   “이혼 가정이었어. 남편이 폭력을 휘둘렀고.”
   “그렇군. 아이는 여자가 사망한 다음 시설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네. 아이에 대해서는 좀 더 찾아볼게. 시설로 갔다면 분명 기록이 남았을 테니까.”
   “내 생각도 같아. 주소 좀 문자로 보내 줘.”
   “오케이. 사진도 같이 보낼게.”


   박창갑은 집이 아니라 근처 사설 요양원에 있었다. 그는 휴게실 의자에 앉아 TV를 힐끔거리면서 자신을 찾아온 두 형사를 응시했다. 병색이 완연했다. 정현이 보내 준 사진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박창갑은 붉다 못해 검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딸을 찾은 거요?”
   “네?”
   “내 딸 박주희 말이요.”
   “따님은 사망한 게 아닌가요?”
   “이렇다니까. 다들 같은 소리. 지난번 찾아온 형사한테도 딸 좀 찾아 달랬더니 죽었다는 말 딱 한 마디하고 가더니만.”
   “누가 찾아왔죠?”
   “그걸 어떻게 기억해. 10년도 더 된 일인데. 암것도 모르는 날 들들 볶다가 갔어. 귀찮은 경찰 나부랭이들.”
   “뭘 묻던가요?”
   “돈.”
   “돈이요?”
   “마누라가 죽기 전에 가정부 일하던 부잣집에서 돈을 훔쳤대. 그년이 그렇다니까. 겉보기엔 맥없어 보여도 깜찍한 구석이 있다니까. 딸년이 그 물건을 빼다 박았어. 근데 난 몰라. 그게 무슨 돈인지 얼마인지도 난 모른다고. 난 만 원 한 장 구경 못 했어. 그년이 어떤 놈팡이 밑에 죄다 갖다 바쳤을지 알 게 뭐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강희건이 분실물 신고를 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돈은 구린 구석이 있는 돈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받은 뇌물이거나, 누군가에게 줄 뇌물이거나.
   이인애가 그 돈을 훔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니면 딸을 보호하기 위해? 강희건을 협박하기 위해서?
   “따님이 아내분이 일하는 별장에 종종 따라갔다고 들었는데요.”
   “밥이나 차리고 집구석이나 치울 것이지, 꼭 지 어미를 따라나섰지.”
   박창갑은 억울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걔 좀 찾아 줘. 당장 간이식 안 하면 나 죽어.”
   “왜 따님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시죠?”
   “수녀가 그랬어. 딸년 찾지 말라고.”
   “수녀요?”
   희주는 조정배에게서 들은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조정배는 이인애라는 이름의 여자 뒷조사를 했다. 약점을 알아내려는 목적이었지만 조정배가 알아낸 것은 이인애가 별장으로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수녀원에 가서 봉사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박창갑의 입에서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왔다.
   “애 엄마가 봉사인지 뭔지를 다녔다고. 아마 수녀라는 여자가 순진한 마누라를 꾀어냈겠지. 돈도 안 주고 부려 먹으려고. 그 여자한테 아는 대로 털어놓으라고 했는데 입은 안 열더라고. 분명 뭔가 알고 있을 텐데. 마누라가 그 수녀 일하는 데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거기가 어딘지 아시나요?”
   “몰라. 마누라가 노상 끼적대던 공책에 써 놨을 수도 있지만.”
   희주는 다 타 버린 나무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진 박창갑을 쏘아보았다. 그가 아내와 딸을 어떻게 대했을지 상상이 갔다.
   “그 수녀라는 분이 따님을 찾지 말라고 하던가요?”
   “그렇다니까. 마누라가 수녀한테 뭔 소릴 했는지 모르지만 난 엄연히 걔 애비야. 애비가 아프면 딸년이 당연히 도와야지. 안 그래?”
   희주는 빨간 경차를 타고 별장 가사도우미 일을 다니는 여자를 떠올렸다. 여자는 폭력을 휘두르던 전남편이 혹시라도 성인이 된 아들을 찾거나 돈을 요구할까 봐 남편 성을 버리고 주민번호를 바꾸었다고 했다. 이 경우 친부라 해도 변경된 주민번호를 조회할 수 없다.
   “아내분께서 생전에 별장 일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던가요?”
   별 기대는 없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마누라 말로는 그 집 남자가 마누라를 건드렸다지만 난 안 믿었어. 다 가진 놈이 뭐가 아쉬워서 가정부를 건드려? 그년이 먼저 흘리지 않고서야. 분명해. 그년이 먼저 그 허옇고 볼품없는 몸을 놀렸겠지.”
   “그쪽에선 어떻게 나왔나요?”
   “이런 추잡한 일 알려지는 거 바라겠어? 찾아가서 돈 내놓으라고 했어. 위로금 말이야. 남의 걸 날름 받아먹었는데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아내 말은 믿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볼 이득에는 눈이 밝은 남편과 산 이인애. 그리고 하나뿐인 딸. 희주는 이인애가 지켜야 할 유일한 존재였을 딸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날 일을 목격한,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목격자일 수도 있는 아이.
   “경찰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뭐 밤에 몰래 술을 먹고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나. 개죽음이지 뭐야.”
   “아내분께서 평소 술을 즐기셨나요?”
   박창갑은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을 휘휘 흔들었다.
   “됐고, 딸이나 찾아 주쇼.”
   희주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질문을 이어 갔다.
   “아내분 물건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제 와서 뭘 확인해? 다 지난 일을 들춰서 뭐 하게?”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아내가 만취해서 남의 집 별장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는데 이상하지 않으세요?”
   “…뭐가?”
   박창갑은 흐릿한 눈동자로 희주와 무원을 번갈아 보았다.
   “말씀대로 따님을 찾아 보겠습니다. 대신 그 전에 아내분 소지품을 봐야 합니다.”
   “맘대로 하쇼. 마누라 물건은 따로 모아 뒀으니. 그 대신 딸년 찾으면 바로 연락 좀 해 주쇼.”
   희주는 박창갑의 면상을 한 대 갈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꾹 참고 돌아섰다.
   수녀와 사라진 돈의 존재. 그리고 이인애의 딸 박주희.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정보가 쏟아졌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오치상과 강희건의 손이 아직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희주와 무원은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희주의 상태는 당연히 최악이었다. 순간순간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심호흡을 계속해야만 했다. 괴한에게 졸린 목은 붉게 부어올랐다. 쏟아지는 정보의 타임라인을 줄 세우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머리에는 지끈거리는 두통이 계속되고 정신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듯 흐릿했다. 희주는 격하게 고개를 흔들다가, 목의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다.
   “선배, 정말 병원에 안 가도 돼요?”
   무원은 여전히 어이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지겨워. 그만 좀 물어봐.”
   “병원이 그렇게 싫으면 의사 애인이라도 집으로 불러요. 난 빠질 테니.”
   희주는 대꾸도 하지 않고 목에 손가락을 대고 맥박을 재 보았다. 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달리는 것도 아닌데 마치 전력 질주를 하는 것처럼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좋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만약 주웅이 옆에 있었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려 줬을 것이다.
   “난 오늘 죽을 뻔했어.”
   울고 싶지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눈이 타오르는 듯 뜨거웠다. 실핏줄이 터졌기 때문일 테지만 분노가 두 눈을 가득 채우다 못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가슴 어딘가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도대체 20년 그 일에 무슨 진실이 숨겨진 거지? 이젠 알아낼 엄두도 안 나. 왜 이 악몽이 끝나지 않는 걸까?”
   “역시 관두는 게 좋겠어요. 선배 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당분간 여길 떠나 있어요. 더는 안 돼요. 더는….”
   무원은 천천히 손을 들어 희주의 등에 댔다. 손바닥을 타고 등으로 전해 오는 열기가 예상보다 더 뜨거웠다.
   “선배를 위해서 그만두자고요.”
   “전부 죽었어. 조정배는… 나 때문에 죽을 걸까? 날 만나서? 날 만나고 돌아가서 죽었다고 생각하면 돌아버릴 것 같아.”
   “절대 그럴 리 없어요. 그건 지독한 우연일 뿐이에요.”
   “그놈이 조금만 더 날 오래 붙잡고 있었으면 나도 조정배처럼 죽었을 거야. 죽이고 싶었다면 죽일 수 있었을 거야.”
   “아뇨. 내가 발견했을 거예요.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겁니다. 선배가 잘못되면 난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절대로.”
   세포 하나하나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분노와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터져 나왔다. 그리고 증오심도, 지금 이 순간 무너져버리고 싶은 마음도. 희주는 억지로 눈을 뜨려고 애썼다. 눈물이 가득 차올라서 바로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무원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원의 체온은 느낄 수 있었다.
   “난… 오늘 죽을 뻔했어. 그런데 안 죽었어. 그게 너무… 기쁘고 슬퍼.”
   무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더 말하고 싶었다. 주저앉아 버린 눈앞의 여자를 일으킬 만한. 하지만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무원은 희주를 끌어안았다.


   25 미친 손


   무원은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어제는 하루가 너무 길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온몸이 부셔질 것처럼 뻐근하다. 이 일을 하면서 평정심을 잃은 적은 없다. 일이 인생의 전부였던 적도 없다. 무원은 일 때문에 약이나 술이 필요하지 않은, 주변에 몇 안 되는 형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파이 반죽처럼 뭉개진 것 같다.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그 소리가 너무 갑작스럽고 커서 몸을 움찔했다.
   무원보다 먼저 희주의 손이 휴대폰을 집었다. 희주는 알람을 끄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어제 일은 이미 잊었다.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죽을 뻔했다는 사실도, 입에서 구린내가 나는 죽은 가사도우미의 남편도.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이 맑다. 하지 못해 후회만 남은 일 대신 범인을 잡기 위해 해야 할 일로 맑아진 머릿속을 채웠다. 그게 가능하다는 게 조금 신기하다.
   “기분은 좀 어때요?”
   무원은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희주를 부드럽게 안고 여전히 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살인범의 손에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기분? 아니면 후배랑 잔 기분?”
   희주는 대답하며 자신을 감싸 안은 무원의 길고 강인한 팔뚝을 매만졌다. 순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희주는 무원의 몸을 스스럼없이 만지는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고작 하룻밤을 같이 보냈지만 이상할 정도로 친밀감이 솟아올랐다. 아주 오랜만에 꿈 없이 죽은 듯이 잔 덕분일까.
   “어떤 쪽이든 상관없어요. 그저 지금 선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뿐.”
   어젯밤 희주는 모든 걸 다 폭발하듯 터뜨렸다. 몸과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져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던 상처를 전부 드러냈다. 바로 무원 앞에서. 주웅 앞에서는 되지 않았던 일이, 무원 앞에서는 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주웅과는 단계적으로 가능하던 일이 어째서 무원과는 한 번에 가능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형사 일을 하면서 울어 본 적은 없다. 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남 앞에서 울 일은 절대 없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완벽하게 틀렸다. 울어야 했고, 화내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해야 했다.
   어젯밤, 무원은 격렬하게 흐느끼는 희주를 끌어안았다. 둘 다 거기서 멈추려 했지만, 두 사람의 감정이 그들의 지친 몸을 휘감고 돌았다. 두 사람은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행이에요.”
   “뭐가.”
   “이렇게 내 품에 있어서. 죽지 않고 있어 줘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워. 조만간 실업자가 될 선배를 안고 있는 소감치고는 꽤나 달콤하게 들리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어요. 그냥 살아만 있어 준다면.”
   희주는 몸을 돌려 무원을 마주 보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 그의 얼굴이 있다. 여전히 기름기 없이 담백한 눈빛. 하지만 생각보다 더 강하고 거친 구석이 있는 남자. 희주는 문득 무원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앞에서 작아지고 싶지 않았는데.”
   “선배는 여전히 나한테 넘지 못할 만큼 커요.”
   “나보단 네가 더 큰 것 같아.”
   “선배 앞에서는 작든 크든 상관없어요. 허세를 부리고 싶지도 않고 숨기고 싶지 않아요. 그냥 솔직하고 싶어요.”
   무원의 손이 희주의 귓불을 지나 뒤통수로 향했다. 그리고 희주의 뒤통수를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둘 다 선을 넘었어. 남들이 알면 뭐라고 할까?”
   “난 오래전부터 그 선을 넘고 싶었어요. 그게 어제였던 것뿐이에요.”
   희주가 반박하려 입을 열자 무원은 희주의 입을 막았다. 피로 때문에 조금 거칠어진 입술끼리 부딪쳤다. 무원은 희미하게 남은 희주의 눈썹 위 흉터를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이 여자의 상처를 천천히 오래도록.


   주웅은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희주를 응시했다. 만나지 못한 사이에 눈에 띄게 뺨이 들어간 것 같았지만 어딘지 모를 생기가 느껴졌다. 여전히 블랙진에 티셔츠를 걸치고 러닝화를 신은 모습. 희주 정도의 키와 몸매라면 자부심을 느껴도 충분하지만 희주는 그런 부분에 철저하게 무감각했다. 하지만 그런 점이 그녀의 매력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넘치도록 매력적인, 거기에 위험성까지 내포한 뜨거운 여자.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라 보였다. 그게 뭘까. 정답을 아는 데까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뒤따라 무원이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사랑하는 여자의 업무상 파트너이자 애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무원이라는 남자. 주웅은 자신이 본 것을 잊으려 안간힘을 썼다. 이성 문제를 가지고 연인을 볶아 대는 한심한 애인 역할은 딱 질색이다. 그럴 나이는 한참 지났다. 그건 20대의 사랑이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당장 차에서 내려 주먹을 이무원의 턱에 들이밀고 싶다. 흠씬 두들겨 패 버리고 싶다. 물론 의사이자 성숙한 남자로서 할 만한 생각은 아니다. 쉽게 화를 내는 성격도 아니다. 분노와 증오는 자기 자신을 더럽힐 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자신을 벗어던지고 짐승처럼 소리치고 싶다. 지금 당장 전화를 해서 정희주가 뭐라고 거짓말을 하는지 듣고 싶다. 하지만 무원과의 관계를 인정하며 당장 우리의 관계를 끝내자는 선언을 할까 봐 두려워서 차마 전화할 수 없다. 조금 더 젊었다면 가능했을까. 주웅은 무의미한 가정을 하며 자신을 괴롭혔다.
   보조석에는 감시 카메라 영상을 분석한 리포트가 놓여 있다. 밤새 해외 논문과 사례를 찾아 작성했다. 그리고 작업을 마치자마자 희주의 오피스텔로 차를 몰았다. 이걸 핑계 삼아 풋내기 후배 형사 말고 자신을 선택하는 게 좋을 거라고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단둘이 커피라도 마시면서 쌓인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다.
   “…젠장.”
   하지만 주웅은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저 두 사람이 오피스텔에서 나와 무원의 차를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희주의 미소를 응시했다. 역시 멋진 여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 앞에서는 저렇게 미소 지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뼈아픈 사실도.


   희주는 아이의 방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방에서 나는 냄새가 났다. 곰팡이, 책 먼지, 좀먹은 옷가지 냄새.
   “뭐가 좀 나와야 할 텐데.”
   희주는 푸른 라텍스 장갑을 낀 두 손을 쓰다듬었다.
   “근데 아이 방 같지가 않네요.”
   “무슨 뜻이야?”
   “아이가 그린 그림이나 놀이동산 같은 데서 찍은 사진 같은 거요. 일반적으로 아이 방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일상적인 흔적이 안 보여요.”
   희주는 무원의 말에 방 전체를 다시 한번 보았다. 낡은 책상과 의자, 3단짜리 작은 서랍장만으로도 꽉 차는 좁은 방은 가운데 요를 하나 깔면 남은 공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서랍장 위에는 라면 박스 2개가 포개져 있었다.
   “아버지라는 인간이 버린 것 같지는 않은데.”
   “애초에 그 사람은 딸 방에 뭐가 있는지 관심도 없었겠죠.”
   무원이 책상 위를 살펴보는 동안, 희주는 서랍장 위에 놓인 라면 박스를 열었다. 라면 박스 속에는 잡다한 것들이 들었었다. 학교에서 받은 조악한 상패와 각종 안내문, 연두색 필통, 빛바랜 인형이나 소라 껍데기 같은 것들. 다 쓴 크림통과 뚜껑만 남은 립스틱도 있었다. 여자아이가 소중하게 모아 놓았을 법한 잡동사니 속에도 사진이나 일기장 같은 건 없었다. 희주는 잡동사니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밑에 있던 두 번째 라면 박스를 열었다.
   “이것 봐.”
   희주는 사진을 한 장 집어 들었다. 사진 속 여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정현이 휴대폰으로 보내 준 이인애의 주민등록상 사진이 바로 떠올랐다.
   “이 여자야.”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면 박스 안에 우리가 찾는 게 들어 있었네요.”
   희주는 박스를 바닥에 내렸다.
   “아이에 대한 건 어쩌면 일부러 처분했을 수도 있어.”
   “딸을 숨기고 싶었겠죠.”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를 지켜 줄 사람이 없으니까. 오치상이나 조정배가 아이를 찾아내 괴롭힐까 봐 두려웠겠지. 게다가 여자아이니까. 이은애는 차라리 아이의 흔적을 전부 지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거야.”
   “돈 가방을 못 찾으면 분명 아이를 찾으려 하겠죠.”
   “맞아.”
   “뭔가를 일부러 처분했다면 일부러 남기는 것도 가능해요.”
   “그래. 우린 후자를 기대해 보자고.”
   두 사람은 박스 속 물건들을 전부 꺼내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오래전에 찍어 귀퉁이가 접히고 날아갔지만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여자와 수녀야.”
   무원이 사진 속 여자들 뒤에 있는 건물 벽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로사리오 성 루시아 수녀회.”
   “거기군.”
   사진 속 이인애는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채 웃고 있었다. 말간 얼굴에 해사하고 수줍은 미소. 이인애의 곁에 선 수녀 또한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이인애보다 조금 위일 테지만, 뒤에 서서 이인애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있는 수녀는 좀 더 명랑한 분위를 풍겼다. 닮은 구석은 없지만 마치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이 같았다.
   “이것 좀 보세요.”
   무원이 또 다른 사진을 한 장 내밀었다. 수녀원 내부 사무실 같은 공간에서 이인애 혼자 찍은 사진이었다. 소박한 뜨개 덮개를 덮은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는 성모상이 놓여 있고 이인애는 테이블에 한 팔을 올린 채 수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 글귀가 적힌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희주가 글귀를 소리 내어 읽었다.
   “해바라기 센터 벽에도 동일한 문구가 적혀 있었어요.”
   “그리고 또 한 군데가 더 있어.”
   “네?”
   “빅.”
   그때 희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깜박 잊고 진동으로 바꾸지 않은 탓에 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마치 방금 희주의 머릿속을 스치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옳다고 동조라도 하듯 벨 소리는 절묘한 순간에 적막을 깨부쉈다. 그 적막을 깬 것은 주웅이었다.
   “나야. 영상 분석 결과가 나와서.”
   “지금 현장에 나와 있고 파트너도 같이 들어야 하니까 스피커폰으로 들을게.”
   희주는 주웅과의 불편한 대화를 회피할 심산이었다. 게다가 어제 무원과의 일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주웅과 무원 사이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물론 이 모든 고민과 결정에 대해 주웅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병명이 나왔어. 나 혼자 판단한 건 아냐. 사건과 접점이 없는 신경과 교수들 의견도 듣고 싶어서 외국에서 일하는 동료들에게만 보여 줬으니까 이 일에 대해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거야.”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근데 병명이 나왔다는 게 무슨 뜻이야? 쇼가 아니라는 거야?”
   “미친 것도 아니고. 에어리언 핸드 신드롬. 외계인 손 증후군이라고 통상 번역해.”
   “지금 외계인이라고 했어? 외계인?”
   희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원을 바라보았다. 무원도 들어 본 적이 없기는 매한가지였기에 고개를 저었다.
   “국내에서도 뇌졸중, 뇌진탕 혹은 알코올성 치매의 후유증으로 외계인 손 증후군이 학계에 보고된 적이 있어. 뇌 좌반구와 우반구를 연결하는 코퍼스 칼로섬이 파괴되거나 수술로 제거된 경우, 한쪽 팔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게 돼.”
   희주는 잠시 대답하는 걸 잊고 주웅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듣고 있어?”
   “물론이야. 그 코퍼스 칼로섬이라는 게 대체 뭐야?”
   “뇌들보, 뇌량이라고도 해. 말 그대로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다리 같은 거야.”
   “그 다리가 그게 끊어지면, 사람이 기절할 때까지 자기 목을 조를 수도 있단 거야?”
   “이론적으로는. 쉽게 말해서 한쪽 팔에 다른 영혼이 들어간 것과 비슷해. 정상 손이 재킷 단추를 채우면 외계인 손이 그걸 푸는 거지. 정상 손에 오렌지를 쥐어 주면 이게 오렌지인지 즉각 알지만, 외계인 손에 쥐어 주면 그게 주사위인지 컵인지 구별하지 못해. 눈으로 보고 나서야 오렌지라는 걸 알게 되는 거야. 외계인 손이 입속으로 비린내 나는 생선을 강제로 욱여넣은 사례도 있어.”
   “내 손과 손이 싸운다….”
   희주는 조금 전까지 이인애의 사진을 들고 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뇌 어딘가가 망가져서 직접 목을 조르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런 셈이지. 최준석의 경우 왼손이 외계인 손이 되어 스스로를 공격하는 거였어. 오른손은 그 손을 뜯어말리려 했던 거고.”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뭔데?”
   “방아쇠도 당길 수 있어? 자기 관자놀이에 총부리를 겨눈 상태에서.”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하지만 그냥 맨 손일 때보다는 좀 더 강력한 요인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외계인 손이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심을 이겨야 하니까.”
   “예를 들면, 약물 같은 것?”
   “알코올일 수도 있고.”
   희주는 요트로 조정배를 찾아갔을 때를 떠올렸다. 빈 와인 병. 그리고 부검 결과 나온 데이트 강간 약물 케타민. 조정배의 뇌들보 역시 제거되거나 파괴된 상태였을까.
   “그건 그렇고, 따로 할 말이 좀 있어.”
   주웅이 말했다.
   “나중에 해.”
   “우리 얘기야.”
   “지금은 곤란해.”
   “우린 이대로 끝이야?”
   더는 무원과 같이 들을 수 없었다. 희주는 스피커폰 설정을 해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 말해.”
   주웅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파트너와 가까운 사이야? 우리 사이보다?”
   “아직은 모르겠어.”
   “아직은… 아직이라는 건 곧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야?”
   “전화로 할 얘기 아닌 것 같아. 어제 많은 일이 있어서 머리도 좀 아프고.”
   “당신한테 일어났다는 그 많은 일에 대해 난 아는 게 하나도 없어. 그저 당신이 시키는 대로 밤새 영상 분석을 하고 결과만 갖다 바칠 뿐이지.”
   희주는 얼굴을 찌푸렸다. 결국 희주가 선택할 일이었다.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오늘 아침에 당신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두 사람을 봤어.”
   순간적으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희주는 볼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도 어제 일어난 많은 일들 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당신 애인인 나한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일이야?”
   주웅을 탓할 일이 아니다. 애인이 언제고 연인의 집을 찾는 건 당연하니까. 아마도 직접 영상 분석 결과를 알리기 위해 오피스텔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심한 남자는 두 사람 앞에 나서는 대신 신사답게 참았다.
   “나중에 얘기할게. 전부. 지금은 일하는 중이야.”
   “당신은… 요즘 일하지 않을 때도 날 찾지 않잖아.”
   주웅의 말투에 비열함도 분노는 없었다. 오히려 슬픈 기색이 느껴졌다. 희주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날 좀 알아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미안해. 시간을 좀 줘.”
   “물론이야. 난 당신을 이길 수 없으니까. 당신 앞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배운 무수한 이론이 적용이 안 돼.”
   무원이 또 다른 사진 한 장을 들어서 말없이 희주 앞에 내밀었다. 수녀도 이인애도 아닌 소녀를 찍은 사진이었다. 생일 초를 꽂은 케이크를 앞에 두고 환하게 웃는 하얀 얼굴의 아이. 흡사 작은 파랑새처럼 작은 체구에 파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미안해. 끊을게.”
   희주는 전화를 끊고 사진을 응시했다.
   “이 아이가.”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이인애의 딸이에요.”
   희주는 사진 뒷면에 적힌 짧은 메모를 읽었다.
   “사랑하는 우리 주희 열 번째 생일. 아이가 살아 있다면 삼십 대 초반 정도겠지.”
   “통화하는 동안 로사리오 성 루시아 수녀회 위치를 찾았어요. 간간이 봉사자들의 관련 글이 검색되는 걸 보면 여전히 운영되는 것 같은데. 여기서 1시간 정도 거리에요.”
   “거기에 우리가 찾는 게 있을까?”
   “두드려 봐야죠. 늘 그래왔듯이. 그리고 이거 가지고 다녀요.”
   무원은 호신용 최루액 스프레이를 희주에게 내밀었다.
   “나 그 정도로 최악이야?”
   희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선배 살해한 범인을 잡으러 다니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렇긴 해.”
   “가지고 다닐 거죠?”
   희주는 스프레이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내가 이걸 쓸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게 제가 바라는 일이에요.”


   로사리오 성 루시아 수녀회는 붉은 벽돌로 지은 납작한 2층 건물이었다. 비와 바람을 맞으며 깎이고 바래진 세월의 흔적이 건물에 여실히 남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검박하지만 의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이었다. 따로 경비원은 없었다. 우연히 만난 봉사자에게 물어보니 2층에 원장 수녀실이 있다며 자신이 직접 원장 수녀에게 불러올 테니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사진 속 밝게 웃는 명랑한 수녀는 편안한 얼굴의 중년이 되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우리 봉사자한테 경찰에서 오셨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희주는 인사를 하고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무원도 신분증을 내밀었다.
   “로사리오 성 루시아 수녀회 원장 수녀님이신가요?”
   “네, 맞아요. 루시아라고 불러 주세요.”
   수녀는 갑작스레 찾아온 두 형사를 보고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좁은 제 방보다는 저기 앉아서 대화를 나누면 어떨까요?”
   루시아 수녀는 웃으며 건물 밖에 놓인 나무 벤치를 가리켰다. 벤치 뒤에는 커다란 참나무가 있어 제법 큰 그늘이 드리워진 상태였다.
   희주와 루시아 수녀가 나란히 앉고 무원은 두 사람의 뒤에 섰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곳 분위기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혹시 저희 수녀회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희주는 손바닥을 비볐다. 손바닥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옆에 앉은 수녀를 어디까지 믿어도 될까. 루시아 수녀는 시종일관 온화하고 차분했지만, 어딘지 모를 강단이 느껴졌다. 이 벽돌 건물만큼 긴 시간 동안 세월의 갖은 풍파를 견딘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이곳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이인애라는 분을 기억하시나요?”
   희주는 챙겨 온 이인애의 사진을 내밀었다.
   루시아 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레지나는 항상 성심을 다해 이곳 살림을 돌봐 주었어요. 저희는 레지나에게 큰 도움을 받았지요.”
   “그럼 이후의 일에 대해서도….”
   “네, 알고 있습니다. 주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안식을 되찾고 편안할 겁니다.”
   “이분의 따님도 기억하시나요? 종종 같이 이곳에 왔다고 들었는데요. 당시 나이는 열 살 언저리로 알고 있습니다.”
   “네, 총명한 아이였죠.”
   “그분께서 돌아가시고 따님은 어떻게 되었나요?”
   “형사님, 왜 그걸 알고 싶으신 거죠?”
   루시아 수녀가 희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눈 안에 상대의 진심과 목적이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뚫어져라 응시했다.
   “최근 여러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 중에 그분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신 것으로 알고 있으나, 죽음의 이유를 정확히 조사하지 않고 서둘러 덮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때문에 사망 당시 같이 있었을 거라 추정되는 따님을 찾아 그날 일에 대해 정확히 알아보려고 합니다.”
   “전 그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아이가 평온한 삶을 살았길 바랄 뿐입니다.”
   수녀는 고개를 돌렸다. 수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성모상이 있었다.
   “아이의 친부는 아이가 죽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희한테 이곳, 원장 수녀님의 존재를 알려 준 것도 친부입니다.”
   “루시아라고 편하게 불러 주세요.”
   “네. 아이에 대해 뭔가 아시는 게 있다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네?”
   희주는 당황한 채 되물었다.
   “만약 아이가 살아 있다면요. 살아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과거 일 때문에 아이를 찾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형사님들의 입장과 의문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제 좁은 소견으로 지나간 일을 들추는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있는 곳이 어디든, 설령 그것이 주님 곁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니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힘없고 가난한 여자가 가족을 위해 남의 집에서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근데 다들 서둘러 사고를 덮기에만 급급했죠.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미 가정폭력 때문에 고통을 당한 분들이 경찰을 믿었다가 또다시 폭력의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도 있습니다.”
   희주는 밝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이인애를 가리켰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혀내야만, 죄를 지은 자들에게 죗값을 물을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처벌받지 않은 자들이 세상을 활보하고 있잖습니까? 그러니 만약 그날 일이나 딸에 대해 아시는 게 있다면 제발 말씀해 주세요.”
   루시아 수녀는 고개를 저었다.
   “전… 아는 게 없습니다.”


   희주와 무원이 돌아가고 루시아 수녀는 원장 수녀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고 지루한 한여름 빛이 제법 물러간 시간이었다.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젊은 형사들은 오래전 판자를 덮고 누름돌로 막아 둔 우물 안으로 들여다보고자 했다. 루시아 수녀는 물이 말라 더 이상 우물이라고 부를 수 없는 구덩이의 밑바닥을 떠올렸다. 짐승의 시커먼 아가리처럼 음습하고 냄새나는 그곳. 그녀는 책상 뒤에 앉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냥 그대로 둬야 할까요. 아니면 그들을 허락할까요.”
   루시아 수녀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어 습관처럼 성경을 가져다 펼쳤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육신을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한 번 더 그 구절을 되새기려는 순간, 노크도 없이 원장 수녀실 문이 열렸다. 루시아 수녀는 방문자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읽고 있던 구절보다 조금 더 뒤에 있는 구절이 잘 보이도록 펼쳐 놓은 채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또다시 젊은 형사들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손이 떨리는 것 같아 다른 손으로 떨리는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봉사자들이 오늘따라 경찰이 자주 찾아온다며 원장 수녀가 지금 어디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 주더군.”
   오치상은 원장실 문을 닫으며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잠갔다.
   “무슨 일이죠? 다시 찾아올 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다시 이 지겨운 곳을 찾을 일이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 다시 왔네. 아까 왔다 간 형사들 말이야.”
   “오래전 일을 묻기에 모른다고 하니까 그냥 갔습니다. 할 말도, 아는 것도 없으니까요.”
   루시아 수녀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랬어? 오래전 일 뭘 물었는데?”
   오치상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죽은 딸에 대해 묻기에 죽은 애를 왜 나한테서 찾느냐고 했죠. 그게 다예요.”
   “근데 말이야,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닐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
   루시아 수녀는 몸이 휘청하려는 것을 가까스로 견뎠다.
   “왜? 조금 놀랐어? 그 애 시신을 본 사람이 없잖아. 사실 나도 못 봤거든.”
   오치상은 천천히 책상 뒤에 굳은 채 서 있는 루시아 수녀에게 다가갔다. 루시아 수녀는 고개를 숙여 아까 펼쳐 놓은 성경 구절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실 그 아이가 뭐가 중요해. 돈이 중요하지. 이인애가 얼마나 위험한 돈을 훔쳤는지 우리 수녀님은 모를 거야. 그게 누구 돈인지 알면 오줌이 찔끔 나와서 못 훔쳤을걸. 근데 그 여자가 자기 남편한테도 말 안 했으면 도대체 누구한테 그 얘길 했겠냐는 말이야.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세상에 달린 끈이라고는 남편 하나뿐인데, 그 남편이 등신 같다면 말이야. 응? 별장에 출근하지 않는 날은 종일 이 재미없는 수녀원에 붙박이가 되는 여자라면 말이야. 응? 참고로 난 솔직한 사람을 제일 좋아해. 결국에는 솔직한 게 제일 낫잖아.”
   두 사람의 간격이 점점 좁혀졌다.
   “백번 천번을 물어도 난 할 말 없어요.”
   오치상은 실눈을 뜨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오치상은 재빨리 손을 뻗어 수녀의 신성한 검은 베일을 움켜쥐고 거칠게 당겼다. 루시아 수녀는 오치상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치상은 베일을 벗기고 늙은 수녀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아까 원장 수녀실에 들어올 때부터 오른손에 들고 있던 깜찍한 크기의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빼 들어 수녀의 목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조금 급하게 가져다 대는 바람에 목을 찔러 피가 배어 나왔다.
   “재미없게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면 곤란해.”
   루시아 수녀는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해가 떨어지고 있는 창밖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려 애썼다. 오치상은 코웃음을 치며 왼손으로 커튼을 잡아당겼다.
   “간단해. 알고 있는 걸 말하는 거야. 1분도 안 걸릴 거야. 그치? 돈 가방 어디에 있어? 이인애가 분명 말해 줬을 텐데. 기억을 잘 떠올려 봐.”
   “나는 몰라.”
   “물론 모를 테지. 하지만 기억해 봐.”
   루시아 수녀는 입을 다물었다.
   오치상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루시아 수녀는 눈을 꼬옥 감았다가 떴다. 어떤 결심이 섰다는 듯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오치상의 눈을 응시했다.
   “너 때문에 죽은 죄 없는 여자들과 주님이 네 놈을 용서하지 않을 거다.”
   “정말 무례하군. 그게 수녀 입에서 나올 말인가?”
   오치상은 루시아 수녀의 목에 댄 칼에 힘을 주었다. 선명하게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수녀복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말이야. 요즘 이상한 일이 있어. 예전에 여자들이랑 재미 좀 본 내 친구들이 죽어 나가는 거야. 마치 누가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그날 일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없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아차차, 그날 일을 아는 사람이 여기 또 하나 있긴 하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듣게 된다고 해서 얌전히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괜한 기대는 접어 둬.”
   루시아 수녀는 오치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였다.
   “이인애가 너한테 뭘 남겼어? 죽기 전에 복수해 달래? 대체 돈은 어디다 숨긴 거야? 이 건물을 통째로 불에 태워야 입을 열거야?”
   루시아 수녀는 이미 목을 찌르고 있는 칼날을 향해 체중을 실었다. 칼날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피가 오치상의 손을 적셨다.
   “자, 자, 수녀님. 빨리 죽고 싶으세요? 안 될 일이지.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 얼굴을 쉽게 영접하게 내가 둘 것 같아? 진정하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세요.”


   오치상은 타고 온 SUV의 트렁크를 열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뭐야?”
   강희건이 깜짝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시아 수녀는 팔과 다리를 청테이프에 묶인 채 트렁크 바닥에 누워 있었다. 양쪽 눈가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코뼈는 부러진 상태였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어요. 오히려 늦은 바람에 들개들한테 냄새만 풍겼죠.”
   오치상이 말했다.
   강희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처리할 일이 많군.”
   “그래도 할 일은 제때 해야죠.”
   강희건은 잡초를 베던 낫을 들고 이쪽을 보고 서 있는 별장 관리인 김재화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김재화가 다가오자 강희건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오치상은 감자가 담긴 자루를 꺼내듯 거친 손놀림으로 수녀를 끌어내는 김재화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날 말이야, 여자애.”
   김재화는 말없이 돌아보았다.
   “확실하게 처리한 거 맞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한 게 좋잖아.”
   김재화는 잠시 감정을 드러내려다가 순식간에 건조한 얼굴로 돌아왔다. 오치상은 자신을 빤히 보는 김재화의 얼굴을 응시했다. 개처럼 부림을 당하고 있지만 실은 늑대에 가까운 사내. 잡부답지 않은 신중함과 반듯함이 오치상은 늘 마음에 늘지 않았다.
   “내가 묻잖아.”
   모든 걸 녹일 것만 같은 강렬한 햇빛이 두 남자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오치상은 땀이 흐르는 콧잔등을 쓸어 내렸다. 김재화는 피가 묻은 검은 수녀복 차림의 중년 여자를 끌어내 땀으로 번들거리는 어깨 위에 얹었다.
   “정 궁금하면 저수지를 뒤지던가. 그 안에 모든 게 다 있잖아.”


   26 재회


   그녀는 웅크린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포근한 침구의 감촉이 뺨에서 느껴졌지만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따스한 불빛이 느껴졌다. 바람은 없다. 청결한 공기가 핏덩이로 꽉 막힌 코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살아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죽었다. 죽어서 주님 앞에 누운 것이 분명하다.
   오치상의 차 트렁크에 던져졌을 때가 떠올랐다. 온몸의 뼈마디와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보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 머잖아 더 지독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자 영혼이 산산조각 났다. 따뜻하고 비릿한 피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 갔다. 얼굴을 세게 맞아 입안이 찢어졌고 코뼈도 부러졌다. 오치상은 노련한 경찰답게 어디를 때려야 고통이 배가 되는지 잘 알았다. 그는 마지막 반항을 하는 그녀의 등 뒤, 신장 부위를 주먹으로 때렸다. 칼에 찔린 듯 엄청난 고통이 엄습했지만 이내 모든 것이 새카매졌다.
   루시아 수녀는 눈을 뜨기 위해 애를 썼다. 머릿속은 자욱한 안개가 낀 듯했고 몸은 조금이라도 뒤척이려고 하면 조각난 관절이 비명을 질러 댔다. 온몸을 바늘로 구석구석 찌르는 것처럼 고통이 촘촘하게 느껴졌다. 죽은 게 아니라면 이 고통은 대체 뭘까. 차라리 다시 정신을 잃고 싶을 만큼 아프다. 이가 딱딱 맞부딪쳤다. 기절한 채 덜컹이는 어둠 속에서 제발 이대로 목숨이 끊어지길 빌었던 때처럼 고통스럽다.
   “…수녀님.”
   세하는 루시아 수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눈사람처럼 녹아 버릴까, 설탕 과자처럼 부서질까. 차마 수녀의 몸에 손을 대는 것도 망설여졌지만, 세하는 그녀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괴물로부터 살아남아 자신 앞에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난 늙고 약한 여자가 무사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두 손과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다. 수녀를 끌어안자 세하가 입은 주름진 흰색 블라우스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수녀는 그 소리에도 온몸을 떨었다.
   김재화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하는 천사처럼 수녀를 안고 있었다. 흰옷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님의 가련한 종을 거두러 오는 천사. 하지만 그 천사는 눈을 감는 대신 두 눈을 크게 뜨고 선한 자에게 벌어진 일을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 김재화는 이 일의 결말이 곧 다가올 것임을 직감했다. 무섭도록 강력한 직감에 온몸이 뻣뻣해졌다.
   “수녀님, 이제는 제가 지켜 드릴게요.”
   루시아 수녀는 눈물을 흘렸다. 세하의 손길이 눈가를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많은 것을 인내한 아이. 내가 가져 본 적 없는 아이. 하지만 내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아이. 죽어서도 지키고 싶었던 나의, 소중한 딸 주희.
   “곧 의사들이 들어와서 돌봐 드릴 거예요. 안심하세요.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꼭 지켜 드릴게요.”
   루시아 수녀는 애써 뜨려던 눈을 다시 감았다. 주님 곁은 아니지만 천사의 음성을 들으니 고통스러운 마음이 차츰 가라앉고 고요가 찾아왔다. 루시아 수녀는 세하의 말을 믿었다. 단어 한 음절까지 완벽하게.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마태오 복음서 25장 13절.”
   세하는 성경을 펼쳐 김재화 앞에 놓았다.
   “그건 수녀님과 저만 아는 약속이었어요. 만약 수녀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구절을 펼쳐 놓기로요.”
   김재화는 오치상이 별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루시아 수녀를 강희건의 별장 저수지 앞에 있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데려갔다. 준비한 구급상자를 이용해 빠르게 응급조치를 한 다음 차에 태워 우선 로사리오 성 루시아 수녀회로 향했다. 세하의 지시였다. 수녀회로 가는 동안 세하에게 루시아 수녀의 상태를 알렸다. 세하는 짧게 원장실 벽시계 안을 확인해 보라고 했다.
   루시아 수녀는 언젠가 닥칠 일에 대비해 세하의 조언대로 벽시계 안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 원장 수녀실 전체가 담기는 각도였기 때문에 오치상이 루시아 수녀의 칼로 목을 찌르고 기절시키기 위해 얼굴과 가슴, 복부를 무차별적으로 발로 차는 장면이 모두 녹화되었다. 김재화는 영상을 보면서 몸에 한기가 드는 것을 느꼈다.
   “결국 이런 날이 오네요, 아저씨.”
   김재화가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언제 끝이 날까요. 그들에게 끝이란 게 있을까요?”
   세하는 가만히 김재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그만 가 봐야겠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어.”
   “엄마는 돈 때문에 별장에 계속 갔어요. 난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엄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요.”
   “네 엄마는 널 지켜 주려 했어. 내가 아는 건 그뿐이다.”
   “난 정말 거기가 싫었는데.”
   괴물의 저택. 그 집에는 좋은 것들이 많았다. 아름다운 무늬의 홍차 잔과 티팟, 올리브그린 색깔의 폭신한 양탄자, 이름 모를 화가가 그린 풍경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커튼마저도 고상하고 우아한 패턴이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엄마를 따라 저택을 감상했다. 하지만 거기에 사는 건 공주나 요정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그만 가 보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사랑해요.”
   세하는 김재화의 등에 대고 말했다. 작은 파랑새 같던 열 살 소녀는 이제 없다. 김재화의 시큼한 땀에 젖은 품에 안겨 그날 저수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지켜본 그 소녀는.
   “…나도 마찬가지야.”
   “알아요. 엄마를 사랑한 건 나만이 아니었죠. 우린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었어요. 아저씨도 그렇게 믿었나요? 그래서 날 목 졸라 죽인 다음 저수지에 버리지 않았나요? 하지만 엄마가 죽는 건 봤겠죠.”
   “…그만 가겠다.”
   “아저씨, 그를 데려와요. 완벽하게 제압된 상태로 내 앞에.”
   김재화는 절대 세하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절대.


   오치상은 어둠에 익숙해지려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팔과 다리는 묶여 있었다. 묶인 채 의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개를 내려 발을 보려고 했지만 어둠 속이라 흐릿하게 형체만 구분이 될 뿐이었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가 들이쉬었다. 청결하고 차가운 공기가 어둠 속을 흘러 다녔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별장에서 강희건과 와인을 마셨다. 루시아 수녀 일 때문에 기분이 찜찜해서 그냥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노고를 충분히 치하받고 싶었다. 강희건은 오치상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달콤한 소리를 해 댔다. 강희건이 권하는 대로 피처럼 붉디붉은 적포도주를 들이켰다. 한 잔도 아니고 한 모금에 30만 원쯤 한다는 강희건의 말을 들으면서 조금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게 루시아 수녀 때문인지 앞에서 호방하게 웃는 이 남자의 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늦은 밤 직접 SUV 운전대를 잡았다. 아내에게 전화가 오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맞은편에서 차가 한 대 달려왔다. 라이트가 강해서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차는 오치상의 SUV 앞에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려 창문을 두들겼다. 평소 같았으면 창문을 내리지 않았을 텐데, 오치상은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었다. 남자는 깊고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말했다. 제대로 들리지 않아 고개를 조금 더 내밀었다. 그다음 순간, 정신을 잃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자 분노와 좌절감이 솜씨 좋은 복서처럼 그의 복부를 주먹으로 갈겼다. 단단한 바위 위로 몸을 던진 것처럼 미칠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또다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어둠 속, 팔다리가 묶인 채였다. 오치상은 꼼꼼하게 묶인 몸을 힘껏 비틀었다. 더이상 이대로 버티기 힘들었다.
   “……저기, 도대체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조명이 들어왔다. 지나치게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오치상은 눈을 감았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눈이 아팠다. 어느 정도 불빛에 적응이 되자 눈을 떴다. 오치상은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눈앞에 대형 모니터가 있었다. 검은 모니터 화면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잠깐 동안 꿈이 아닐까 했던 헛된 기대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공포였다. 공포에 짓눌리다 못해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잠시 후, 모니터가 켜졌다. 그리고 영상이 재생되었다. 오치상이 루시아 수녀를 폭행하는 장면이었다. 오치상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수녀의 베일을 끌어당겨 칼로 그녀의 목을 찌른 다음 잠깐의 대화 후에 쓰러진 수녀를 무차별적으로 주먹으로 내려치는 것까지 전부 녹화가 된 영상이었다. 영상의 화질이 아주 선명했다.
   “잠, 잠깐…”
   곧바로 다른 영상이 재생되었다. 오치상의 얼굴은 놀라움과 분노로 검붉어졌다. 놀랍게도 아내였다. 약간 흐릿한 영상 속에서 아내는 울부짖었다. 아내는 두 손을 모아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지고 옷은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문득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돈을 노리고 아내를 납치한 놈의 전화였던가?
   “안 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내는 죄가 없어! 당장 풀어 줘!”
   오치상은 너무 놀라 제대로 말도 못 했다. 말라붙은 목구멍에서 힘없는 신음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용서해 줘! 원하는 게 뭐야? 모든 걸 말할게!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말하겠어. 아내를 놓아줘. 제발!”
   또다시 오치상이 루시아 수녀를 폭행하는 영상으로 바뀌었다. 오치상은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다. 두 영상은 12시간 동안 반복 재생되었다. 그동안 오치상은 물끄러미 영상을 보다가 울부짖기를 반복했다. 얼굴은 온통 눈물과 침,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세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치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인 것이 고작 저 여자라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오치상은 숨을 죽이고 여자를 관찰했다. 여자니까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지금 여러 가지 생각이 다 들겠지만, 지금 무슨 생각을 하든 틀렸어.”
   세하의 목소리는 자못 부드러웠지만 얼음처럼 차가웠다. 엎드려 있는 오치상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당신은 여기서 죽을 거야.”
   “너 누구야….”
   “내가 누구인지는 궁금해하면서, 두 아이의 엄마이자 사랑하는 아내는 괜찮은지 궁금하지 않은가 봐?”
   “아내는 풀어 줘. 그 여잔 아무것도 몰라. 모든 걸 다 자백한다고 했잖아. 그걸 원하는 거 아냐? 아니면 돈을 원하는 거야?”
   “여기서 나가게 해 주면 모든 걸 털어놓겠다?”
   “원하는 게 그거라면 그렇게 할게.”
   “난 진실에 관심 없어. 하지만 강희건은 관심이 꽤 있을 것 같은데. 당신이 모든 걸 털어놓으면 강희건이 당신을 그냥 둘까? 그 사람 꽤나 철저한 스타일이잖아.”
   오치상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그러면 이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누구인가.
   “어때, 뭔가 깨닫는 바가 있는 것 같은데.”
   “설마….”
   오치상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뱉듯 말했다.
   “김재화가 우릴 속였군.”
   오치상의 눈은 충격과 분노로 벌게졌다.
   “넌 이인애의 딸이지.”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덕식, 주용훈… 전부 너야.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다 죽였어.”
   세하는 오치상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세하는 외눈박이 고양이를 떠올렸다. 털의 감촉, 말랑한 분홍과 회색의 발바닥, 곁에 와서 몸을 비빌 때의 온기. 그 아이는 좋은 점이 많았다. 물론 그 아이의 눈을 파내고 한쪽 다리를 다치게 한 인간은 관심이 없었겠지만.
   “나도 죽일 건가?”
   “물론. 하지만 쉽게는 안 돼.”
   “…그렇겠지. 이은애도 쉽게 안 죽었어.”
   오치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세하를 응시했다.
   “아주 독했지. 저수지에 아무리 머리를 처박아도 포기 안 했어. 살려 달라고 울더군. 넌 아마 못 들었겠지만.”
   세하는 당장 저 개자식의 뱃가죽에 칼을 쑤셔 넣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가 모든 걸 전부 털어놓을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그날 김재화가 널 살려 둔 이유가 뭐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뒤처리는 나와 조정배, 그리고 김재화 담당이었으니까.”
   세하는 순간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몸을 돌렸다. 갑자기 그날 비명을 지르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던 김재화의 더럽고 뜨겁고 거친 손의 감촉이 떠올랐다. 그는 세하를 둘러업고 오두막으로 데려갔다. 세하는 오치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음속으로 격렬한 비명을 질렀다.
   “조정배도 자살한 마당에 이젠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귀찮은 존재가 하나 있었지. 어쩌면 너도 정희주를 만났겠군. 그년은 강희건 주위를 쉬지도 않고 킁킁대고 돌아다녔으니까. 난 걔한테 제대로 된 ‘경고’를 날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정희주가 루시아 수녀를 찾아간 걸 보고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지.”
   세하는 고집 센 여형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희주는 거의 진실 문 앞까지 온 셈이었다. 이제 문을 열고 박주희를, 아니 박세하를 발견하는 일만 남은 상태였다.
   “넌 정희주 형사에게도 별로 친절하게 굴지 않았겠지?”
   오치상은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당신 아내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마음껏 떠들던 오치상은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실감한 듯 세하를 노려보았다. 세하는 천사와도 같은 표정으로 오치상을 굽어보았다. 곧 닥칠 일을 조금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을 내려다보는 섬뜩하고 환한 미소.
   “대체 어쩔 셈이야!”
   오치상은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감금된 아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아? 상상이 돼?”
   “…대체 어쩌려는 거야.”
   오치상은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보여 주려는 거야.”
   “대체 뭘.”
   “당신처럼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말이야. 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을 제일 혐오해. 동물도 자신의 동료나 자식이 죽으면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는데, 어째서 당신 같은 인간들은 그렇지 못하지?”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당신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냐. 내 아버지라는 인간도 그랬으니까. 그 인간은 엄마를 모욕했어. 강희건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고 온 엄마를 의심하고 더럽다고 욕을 했어. 아내의 말을 믿지 않고, 믿고 싶은 걸 믿었어. 그게 상상력이 부족하고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들의 공통점이야.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지.”
   “그런 얘긴 집어치워. 내 마누라를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만약 당신이라면 어떨까?”
   “뭐?”
   “만약 당신 아내가 내 어머니처럼 그런 일을 당하고 돌아온다면 말이야. 그 대가로 제법 큰돈을 받았다면 말이야, 그 인간처럼 그냥 잊으라고 말할 거야?”
   “….”
   “강희건의 지하실 취향에 대해서는 나보다 당신이 더 속속들이 잘 알 테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세하의 말이 끝나자 꺼져 있던 화면이 다시 켜졌다. 오치상의 아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잘 안 되겠지만, 한 번 상상해 봐. 그 고통이 잊힐까? 잊고 싶다고 잊혀질까?”
   “제발 부탁이야! 부탁할게. 시키는 건 뭐든 할게. 강희건을 죽이라면 죽이겠어. 당장 가서 쏘아 죽일게. 자수를 하라면 당장 하겠어. 빌라면 평생 무릎을 꿇고 빌게. 개처럼 네 발을 핥을게. 그러니까 제발 아내는 그냥 풀어 줘. 아내는 아무것도 몰라, 죄가 없다고….”
   “아! 강희건 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세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한테 용서를 빌 필요 없어. 당신이 용서를 구할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안 그래?”
   오치상은 훌쩍거렸다. 눈물과 콧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아내가 어떤 일을 당하는지, 그걸 보면 그날의 내 기분을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이렇게 하는 날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지.”
   세하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갔다. 오치상은 불안한 얼굴로 화면 속에 쓰러져 있는 아내를 지켜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쳐 나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찝찔한 눈물 맛을 보자 살고 싶다는 의지가 맹렬하게 발동했다.
   “제발, 제발!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했잖아! 제발 이 엿 같은 짓거리를 끝내. 아내를 가만둬. 아내를 해치면 널 찢어발겨 죽일 거야!”
   오치상은 소리를 질렀다. 분명 어디선가 지켜보는 게 분명했다. 화면 속 아내가 꿈틀댔다. 잠시 후 정면에 있는 문이 열리고 검은 복면을 쓴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들어왔다. 아내는 남자를 보고 발작하듯이 벌벌 떨었다.
   “안 돼… 제발….”
   남자는 여자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단추가 반쯤 풀어진 상의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남자는 반항하는 여자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여자는 얼굴을 얻어맞고 젖은 수건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엎드린 여자의 다리를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안 돼!”
   오치상은 눈을 감았다.


   세하가 오치상에게 보여 준 영상은 가짜였다. 오치상의 휴대폰 속 아내의 동영상과 사진 데이터를 이용해 만든 일종의 ‘페이크 영상’이었다. 다소 해상도가 흐렸지만 판단력을 상실한 오치상을 속이는 데는 충분했다.
   김재화는 탈진한 채 정신을 잃은 오치상을 끌고 나와 수술대 위에 눕혔다. 오치상의 입에서 게거품과 피가 흘러나왔다. 아까 발작을 하면서 혀를 깨문 모양이었다. 그리고 소변을 지렸는지 암모니아 냄새가 났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을 거야. 여기서 멈춰도 말이다.”
   김재화는 수술대에 다가온 세하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미리 준비한 염화칼륨 주사를 집어 들었다.
   “주희야.”
   “이 상황을 끝내야죠.”
   그리고 김재화를 응시했다.
   “거의 다 왔잖아요.”
   세하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오치상의 팔에 망설임 없이 정맥주사를 놓았다. 동물실험을 하는 연구소에서는 실험용 고양이에게 염화칼륨 주사를 놓아 안락사를 시킨다. 물론 그 전에 마취를 먼저 시킨다. 그게 법으로 정해진 방법이다. 마취 후 염화칼륨 정맥주사.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소는 마취라는 번거롭고 돈이 드는 과정은 생략하고 바로 염화칼륨 주사를 놓아 고양이를 죽인다. 고양이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지독한 고통에 몸부림친다. 세하는 이 방법을 택했다. 내 어머니의 숨통을 끊은 자에게 딱 알맞았다. 오치상도 대부분의 실험실 고양이처럼 고통스럽게 죽고 쓰레기봉투에 담겨진 채 소각될 것이다.


   27 타임 투 킬


   눈을 뜬 최준석을 맞이한 것은 희주와 주웅이었다. 최준석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다. 페이션트 모니터 줄을 잡아당겨 간호사를 불렀던 그날 밤, 최준석은 죽음을 예감했다. 연쇄살인마의 손에 죽은 전직 경찰서장. 이런 뉴스 기사 타이틀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바싹 말라 버린 입을 달싹였다.
   “얼음 좀 드릴까요?”
   주웅은 얼음이 담긴 종이컵을 최준석의 입가 가까이 댔다.
   “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은 뇌수술을 받으실 겁니다. 다음 주 정도가 될 것 같군요.”
   “내가 왜 뇌수술을…. 뇌출혈입니까?”
   “아닙니다. 뇌들보 재건 수술입니다. 현재 왼손이 환자분의 의지대로 컨트롤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환자분의 목을 조른 건 살인범이 아니라 환자분 본인입니다.”
   최준석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럼 내가 미친 겁니까?”
   “아닙니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다리가 부러진 겁니다. 재건 수술은 그걸 다시 붙이는 수술이 될 거구요.”
   “내가 내 손으로… 내 목을 졸랐다는 겁니까?”
   최준석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는 듯 중얼거렸다. 자조 섞인 미소가 삐져나왔다.
   “결국, 이렇게 돌아오는 건가….”
   “왜 트라우마 삭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겼죠?”
   희주가 물었다.
   “죽은 이덕식과 주용훈에게 박세하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수술을 받았죠?”
   “또 자네군.”
   “왜 숨겼나요?”
   “내가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는 걸 누가 알길 원하지 않았어. 아내에게조차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말할 수 없었네. 인정할 수 없었어.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어. 여자들이 자꾸 죽었지만, 내겐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정말로 그랬으니까. 난 승승장구했고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잘 컸어.”
   “정말 뻔뻔하네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죠? 수술을 마치는 대로 경찰 조사를 받으실 겁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겠네.”
   “피할 수도 없을 겁니다. 제가 똑똑히 지켜볼 거니까요.”
   최준석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서장님이 여자들을 외면하고 오치상과 조정배를 내버려 둔 바람에 죄 없는 희생자가 계속 발생한 겁니다.”
   희주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결국 그 잘난 돈 때문인가요?”
   “이제 그만해. 아직은 환자야.”
   결국 주웅이 희주를 말렸다.
   “…정식 조사 때 모든 걸 말하겠네.”
   최준석은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희주는 더 퍼부으려다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었다.
   “오치상 팀장이 사라졌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
   “일주일째 가족들한테도 연락이 없어요. 잠적이라고 보기엔 가족들한테조차 언질이 없었다는 게 찜찜해요. 혹시 짐작 가는 거 있으세요?”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네?”
   “하지만 오치상은 트라우마 삭제술을 받지 않았어.”
   “그럼 스스로 총으로 관자놀이를 겨누거나 목을 조르진 못하겠군요.”
   “아직 끝나지 않은 거야.”
   최준석은 울고 있었다. 천천히 흐느끼던 그는 어느새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더 기대할 것이 없었다. 권위 넘치던 보안관이던 그는 완벽한 무방비 상태로 무너졌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아내와 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비록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가족이지만 그래도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문득, 죽은 여자들이 죽기 직전 무슨 생각을 했을지 벼락처럼 깨달았다.
   “경위, 날… 혼자 있게 해 주게. 제발 부탁하네.”


   세하는 입을 벌린 채 휴게실 TV를 보고 있는 박창갑을 응시했다. 한때 자신의 아버지였던 남자는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아주 초라해져 있었다. 병 때문인지 나이보다 족히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의 유전자의 절반이 몸을 구성하고 있다는 자각을 할 때면 스스로가 더없이 역겹게 느껴졌다. 박창갑은 세하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주희, 너냐?”
   박창갑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세하는 천천히 걸어갔다. 죽는 날까지 다시는 아버지를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여기에 와 버렸다.
   “내 눈이 정확하다니까. 너라는 걸 딱 알아봤지.”
   박창갑은 이제 더 이상 열 살 소녀가 아닌 성인이 된 딸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기쁜 기색을 숨기진 못했다.
   “그때 찾아온 그 여자 형사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 준 모양이지? 경찰 놈들은 일 안 하고 노는 줄만 알았더니 제대로 하는 것도 있군. 네 엄마가 우릴 갈라놨지만 우린 그래도 한 가족이야, 안 그러냐?”
   박창갑은 요리조리 세하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검은색 원피스는 고급스러운 윤기가 흘렀다. 어깨에 걸친 가방은 아주 비싸 보였다.
   “아주 좋아. 이젠 너만 믿으면 되겠다. 이 세상에 혈육이라고는 너와 나 둘뿐 아니냐. 우리 둘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지.”
   세하는 말없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박창갑을 만나러 오기 전 이미 간이식에 적합하다는 의사 소견서를 받았다. 박창갑는 눈을 찌푸리고 열심히 서류를 읽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는 활짝 웃었다.
   “됐다. 이제 살았어. 이제!”
   세하는 의사 소견서를 빼앗아 찢어서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뭐 하는 짓이야?”
   박창갑은 화들짝 놀라 쓰레기통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찢어진 서류 조각을 꺼냈다.
   “살고 싶어요?”
   세하는 입을 열었다.
   “뭔 소리야?”
   박창갑은 세하를 쳐다보지도 않고 종잇조각을 맞추려 애썼다.
   “엄마도 살고 싶었을 거예요. 엄마도 행복을 느끼고 싶었을 거구요. 엄마는 그럴 자격이 있었어요.”
   “왜 다 지난 일을 들먹여? 그런다고 죽은 니 엄마가 살아 돌아와?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거 새로 가져와서 의사한테 갖다줘. 알아들어? 하여튼 지 엄마 닮아서 한번 말하면 듣질 않아. 애비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세하는 순간 어릴 적 그 집이 떠올랐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손에 닿는 대로 뭔가를 집어 던질 때면, 엄마는 세하의 방에서 세하를 안아주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울지 않았다. 마치 절대 울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라도 한 것처럼. 울면 모든 게 끝난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게 아빠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무리 때리고 윽박을 질러도 울지 않는 엄마에게 아빠는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느꼈다. 그럴 때면 더욱 고약한 말을 모녀에게 퍼부었다. 그리고 그 끝엔 항상 별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조롱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울지 않았다.
   “이젠 내가 당신을 버릴 차례야.”
   “뭐? 당신?”
   박창갑은 충격을 받고 입을 뻐끔거렸다.
   “당신이 엄마와 날 버린 것처럼, 나도 당신을 버리겠어.”
   “그, 그게….”
   “당신은 죽을 거야. 혼자, 쓸쓸하게.”
   “수, 수술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내겐 당신을 위해 수술대 위에 누울 이유가 없어.”


   세하는 외눈박이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세하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오로지 이 아이에게서만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루시아 수녀를 떠나 혼자 세상에 남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타인을 믿은 적은 없다.
   김재화가 세하에게 다가왔다. 세하가 박창갑을 만나는 동안, 김재화는 빅을 정리했다. 전문 업체를 불러 의료기기와 연구소 내 집기들을 정리해 서울 근교 모처에 위치한 컨테이너로 보냈다. 컨테이너는 일종의 대형 금고 역할이었다.
   그간 빅에서 트라우마 삭제술을 받은 환자에 대한 기록은 하지혁에게 맡겼다. 그는 빅을 설립한 세하의 목적과 비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원칙적으로 의료 기록은 3년 동안 보관을 해야 하지만, 브레인 임플란트 칩을 삽입하는 트라우마 삭제술에 대해서는 환자가 완벽하게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고 세하와 하지혁 두 사람이 모두 동의를 하는 케이스에 한해서 기록을 삭제했다. 그건 6개월이 될 때도 있었고 3년이 될 때도 있었다. 세하는 하지혁을 믿었다. 하지혁은 자신을 대신해서 트라우마 삭제를 한 환자들을 계속 추적해 그들이 정말로 일상생활에 적응했는지 판단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뇌에서 꺼낸 난파선 같은 기억을 소중하게 대할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제 끝났군.”
   김재화가 말했다. 세하는 고양이를 안은 채 서 있었다. 세하가 입은 복숭앗빛 스커트가 바람에 날렸다. 세하를 보면 이은애가 떠올랐다. 특히 저 투명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과 무심한 눈빛이 닮았다.
   세하는 고양이를 내려놓고 가방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김재화에게 내밀었다.
   “미국행 비행기표에요. 출발은 이틀 뒤구요.”
   김재화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직감이 스쳤다.
   “믿고 지낼 수 있는 분의 주소도 같이 넣었어요. 제가 떠나고 나면 루시아 수녀님을 보살피는 분께서 아저씨 생활비를 보내 주실 거예요. 수녀님도 회복하는 대로 미국으로 가시게 될 거고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이제 끝났어요. 정확히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요. 결말은 저 혼자 내는 걸로 충분해요. 아저씨는 필요 없어요.”
   “뭐?”
   “곧 수사가 시작될 거예요. 이제 남은 건 강희건뿐이니 전부 그쪽을 주시하겠죠.”
   예상대로 세하는 강희건을 잊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를 가장 나중에 먹는 숙녀처럼 아껴두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분명 경찰들이 찾아올 거예요. 그 여자 형사 기억해요?”
   “…주희야, 이제 그만둬라.”
   김재화는 세하의 본명을 입에 올렸다. 그게 세하의 신경을 긁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김재화에게 세하는 여전히 열두 살 작은 파랑새였다.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 전 이 구절을 닳도록 외우면서 이 지옥 같은 시간을 버텼어요.”
   “알고 있어. 그래서 널 말리고 싶은 게야.”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이 지옥에서 떠나야 하는 건 너야. 난… 그럴 자격이 없다.”
   김재화는 강희건이 별장 지하실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폭력을 못 이긴 여자들이 죽으면 그걸 처리하는 게 김재화의 일이었다. 그걸 차마 ‘일’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김재화는 강희건에 붙어 기생하는 오치상과 조정배를 혐오했지만, 사실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실 가장 오랫동안 강희건에게 기생한 건 자신이었다.
   “아저씨가 절 루시아 수녀님에게 데려다준 덕분에 전 살았어요. 살아서 복수할 수 있었죠.”
   루시아 수녀는 세하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바꾼 다음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세하는 돌아와 가장 먼저 김재화를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에 그를 합류시켰다.
   “이 손으로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넌 상상도 못 할 거다. 난 떠날 수 없어.”
   여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이 없었다. 고통 없이 편안하게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싶었다.
   “하지만 절 죽이지 않았잖아요.”
   “난 그럴 수 없었어. 네 엄마가 우릴 보고 있었어. 그리고 말했어. 널 보호해 달라고. 널 데리고 도망가 달라고.”
   “엄만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러기엔 너무 많이 맞았으니까요.”
   “아냐. 난 들었어. 불쌍한 그 여자의 목소리를….”
   김재화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20년 만에 성인이 된 세하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는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려 했다. 하지만 세하는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정말로 죗값을 치르길 원한다면 자길 도와달라고 했다.
   “이제 거의 다 끝났어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떠나요. 살을 에는 것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요. 그리고 조금은 새로운 삶을 살아 보는 거예요.”
   세하는 조금 미소를 지었다.
   “난 두렵다. 너마저 잘못될까 봐.”
   김재화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이미 많이 잘못되었어요.”
   “난 널 말리고 싶었어. 그래서 네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어. 언젠가는 널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어. 이젠 그만둬.”
   “알잖아요, 아직 남은 사람이 있다는 걸.”
   “전부 죽일 순 없어.”
   “아뇨. 전 끝을 낼 거예요. 죽는 사람이 있어야 사람들은 비로소 돌아보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요.”
   “강희건과 똑같은 인간이 되는 거야.”
   “소용없어요. 그런 쓸데없는 고민은 열두 살에 이미 끝냈어요. 오래전에 배운 바에 따르면 강희건 같은 작자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남의 인생, 남의 감정에 관심 따위 없어요. 그런 사람한테 뭔가를 제대로 보여 주지 않으면 계속 다른 여자를 고통에 빠뜨릴 거예요. 그걸 계속 그 별장에서 보고 싶어요?”
   이덕식과 주용훈을 호텔과 자작나무 숲으로 불러낸 건 김재화였다. 그들은 김재화를 신뢰했다. 강희건이 은밀히 만나길 원한다는 말을 전했을 뿐인데도 그들은 흔쾌히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두 사람에게 수면제를 탄 음료수를 먹인 다음, 손에 망치와 칼을 쥐어 주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최준석에게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다. 그는 앞의 두 인간들보다 신중한 타입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기습을 노렸다. 자신의 집에서 경계심을 풀고 있던 최준석을 기절시킨 다음 의자에 묶었다. 하지만 왼손은 느슨하게 묶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손을 감은 테이프가 풀어지게 했다. 최준석은 그 손으로 자기 목을 졸랐다. 그것이 세하가 바라는 복수였다. 자신보다 약한 타인의 목숨은 파리 취급하는 인간들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스스로의 육체를 제 손으로 망가뜨리고 목숨을 끊는 것으로 속죄하길 바랐다.
   “복수가 널 망가뜨릴 거다.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20년 전 그날, 이미 난 죽었어요.”


   별장의 철제문은 열려 있었다. 철제문에 달린 감시 카메라 전원이 꺼져 있었다. 비상벨이 울리면 10분 내로 가장 가까운 파출소에서 경찰이 출동하는 보안 장치 또한 꺼져 있었다. 김재화가 미리 손을 써 둔 덕이었다.
   세하는 철제문을 밀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20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왔다. 엄마가 잠들어 있는 저수지가 저 멀리 보였다. 마치 붉은 해가 저수지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1시간 정도 후면 어둠이 내릴 것이다.
   지금 저 안에 강희건이 있다. 세하는 천천히 걸었다. 이곳 내부는 누구보다 잘 안다. 매일 이 길을 걸어 엄마와 함께 별장으로 갔으니까.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다리에 스치자 소름이 돋았다. 잡초 위로 끌려가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에도 엄마는 아름다웠다. 그 기억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절대 바래지 않았다. 오히려 놀랍도록 선명해졌다. 인간의 기억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쁜 기억일수록 극명하다. 하지만 엄마를 끌고 가던 오치상과 조정배가 떠오르자 구역질이 밀려왔다. 정신 차려야 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진짜가 남았잖아. 오늘을 위해 돌아온 거잖아.
   세하는 가방에 든 물건들을 떠올렸다. 빅에서 사용하던 대부분의 집기들은 전부 창고로 보냈지만, 수술 도구는 그대로 두었다. 김재화는 의아해하다가 세하가 뭘 하려는지 깨닫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김재화는 관리인들이 드나드는 통로를 알려 주었다. 직원용 비밀번호를 누르면 별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직원용 출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희건의 지하실이 있었다. 지하실은 여러 개였다. 아주 평범한 용도의 지하실부터 아주 특별한 용도의 지하실까지. 강희건은 그때그때 구미에 맞게 장소를 택했다. 그 안에서 모든 일이 벌어졌다. 세하는 별장 청소를 하던 엄마가 강희건의 지시로 지하실에 내려가면 한동안 올라오지 못하던 일을 떠올렸다.
   세하는 직원용 출입구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제 괴물과 조우할 시간이다. 하지만 세하는 얼어붙었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세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28 사막에서


   슬픔을 말하시오.
   비탄이 입을 못 열면 미어지는 가슴에 터지라고 속삭이는 법이니.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
   세하는 텅 빈 자신의 방으로 하지혁을 불렀다. 하지혁도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오늘도 평소에 입던 마음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 하의는 찢어진 청바지 대신 베이지색 치노 팬츠 차림이었다. 항상 미소가 걸려 있는 입가에는 미소 대신 약간의 긴장감이 걸려 있었다.
   빅의 집기를 처분하는 일은 김재화가 맡았다. 아마도 영원히 컨테이너 창고 속에 보관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앞의 일보다 더 세심하고 신중하게 처리되어야 하는 일. 트라우마를 삭제한 환자들을 관리하는 일. 세하는 그 일을 하지혁에게 맡겼다. 하지만 혼자서는 무리였다.
   “누군데요?”
   세하는 노트북을 하지혁 쪽으로 돌렸다.
   “엘리. 새로운 파트너야.”
   화면 속 여성이 하지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래픽과 실사의 경계이면서 이른바 ‘불쾌한 골짜기’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편안한 조형미를 갖춘 여성이었다.
   “인공지능?”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공지능 심리 상담사.”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에서 이런 모델을 만든 적 있어요. 군인들의 우울증, 트라우마 징후를 파악하기 위해서요.”
   “동일해. 진짜 심리 상담사와 다른 건 모니터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뿐.”
   세하는 엘리는 30대 중반의 전문직 여성으로 설정했다. 장밋빛 피부에 갈색 눈동자, 눈동자와 어울리는 진갈색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묶었다. 그리고 파란색 반소매 원피스를 입고 알이 자그마한 진주 귀걸이를 한 모습으로 설정했다.
   “이 친구가 제 새로운 파트너인가요?”
   “응. 일상적인 상담에는 엘리를 이용해 줘. 환자 데이터는 완벽하게 반영했어. 상담을 하면서 새로운 이야기, 환자의 언어 특징 같은 건 자동으로 업데이트될 거야.”
   인공지능 상담사는 인간보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정보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일에 찌든 정신과 의사 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는 것을 종종 불편하게 생각한다. 의사들은 진단을 하고 처방을 내리는 데 급급해서 환자의 이야기를 대충 듣거나 편견에 사로잡혀 환자를 재단하는 일이 흔했다. 불성실한 태도로 환자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다.
   “엘리는 환자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줄 거야.”
   20분의 상담 시간을 넘겼다고 눈치를 주지도 않고, 어렵사리 털어놓은 비밀을 가벼운 사건 취급하지도 않을 것이다. 때문에 환자들은 엘리에게 더 많은 걸 털어놓을 것이다. 세하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였다. 환자들의 회복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내밀한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줄 유능한 상담사가 필요했다.
   “난 환자들이 더 많은 걸 털어놓고 더 빨리 자유로워지길 바라.”
   하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스의 이야기에 완벽히 동의했다.
   “그런데 이름이 엘리인 이유가 있나요?”
   “물어봐 줘서 고마워.”
   세하는 싱긋 웃었다.
   “영화 콘택트의 여주인공 엘리 애로웨이에서 따왔어. 마음에 들어?”
   “난 당신을 좋아해요.”
   세하는 무심결에 말을 잃고 하지혁을 응시했다. 떠나는 날까지도 그 티셔츠 차림인 남자. 세하는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는 질문이 적힌 하지혁의 티셔츠를 볼 때마다 발을 허공에 내딛는 것 같았다. 과연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걸까. 마음이라는 게 남아 있기는 한 걸까.
   “당신이 앞으로 어떤 일을 저지를 것인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라는 거 알지만.”
   세하는 하지혁을 응시했다.
   “만약 경찰에 신고를 한다면 내 친구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아요.”
   “일이 끝난 뒤에도 당분간은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만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니까.”
   덫에 걸린 쥐처럼 절망적인 심정으로 하지혁은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 날 좋아해 줄 필요 없어.”
   세하는 고개를 돌렸다.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편이 나아.”
   갑자기 실내 온도가 적어도 3도는 내려간 듯했다. 하지혁은 기분 나쁜 서늘함이 느껴지는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이별 인사치고는 꽤 강력하네요.”
   세하는 그 말에 아주 살짝 웃었다.
   “난 당신의 그 솔직함이 좋아.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는 소년 같은 면이. 당신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안심이 됐어. 적어도 당신은 날 속이지 않을 것 같아서.”
   세하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두꺼운 사진집을 하지혁 앞에 내밀었다.
   “이별 선물이라도 주는 거예요?”
   “비슷해. 화이트 샌즈 내셔널 모뉴멘트. 세계에서 가장 큰 석고 언덕 사막 사진을 모아 놓은 거야. 서울 면적과 거의 맞먹는 크기에 달하는 하얀 사막이야. 미국에 있을 때 이곳에 갔었어.”
   하지혁은 사진집을 펼쳤다. 땅도 길도 벌판도 언덕도 온통 흰색이다. 마치 흰색 도화지를 펼쳐 놓은 듯 거대하고 새하얀 모래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혹은 구름 위, 혹은 천국, 혹은 꿈같은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뭘 봤어요?”
   “…나의 내면.”
   하지혁은 세하를 응시했다. 그녀의 쌍꺼풀 없는 길고 반듯한 눈을. 자신을 좋아하지 말고 두려워하라는 여자. 세하가 자신의 마지막 계획에 그를 포함시키겠다고 해도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세하에게 매혹당했다. 마음속에 거대한 사막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매혹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막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어. 일행을 잃고 혼자 고립된 거야. 다시 일행들을 만나 합류하기까지 5시간이 걸렸어. 죽을 뻔한 그 5시간 동안, 나는 이 세상을 사는 기쁨을 그때 처음 느꼈어. 그전까지는 단 한 순간도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그전까지 나한테 삶이란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거라고 믿었거든.”
   사실이었다.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아픈 곳 하나 없이 젊고 건강하다는 것이 치욕으로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막상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니까 살고 싶어졌어. 너무나 강렬하게. 그리고 깨달았어. 인간은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끔찍한 트라우마와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결국은 살고 싶다는 걸 말이야. 다른 사람처럼 이 세상 모든 걸 느끼며 살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어.”
   세하는 단숨에 뱉어 냈다.
   “심지어 우리 엄마마저도.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살고 싶었을 거라는 걸. 인간의 그런 가장 절실한 의지를 함부로 빼앗은 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어. 난…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깨달았어.”
   그게 ‘복수’라는 것을 하지혁은 이제 잘 안다. 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가 원하는 것이 끝끝내 파멸이라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여자에게 빠져나올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밀려들었다.
   하지혁은 화이트 샌즈 사진집을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만날 기회도 이유도 없을 자신의 차가운 여왕을 둔 채 돌아섰다.


   희주는 계속 울리는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대체 어디냐고 묻는 무원의 문자가 화면에 떴다.
   “파트너?”
   아일랜드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주웅이 물었다. 주웅은 오전 진료를 마치고 예고 없이 오피스텔을 찾아왔다. 그때 희주는 리볼버와 별장 주변이 최대한 자세하게 나온 지도를 챙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단도를 하나 챙기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일전에 무원이 준 최루액 스프레이는 서랍 안에 던져 넣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주웅의 방문에 일단 모든 것을 미뤘다. 주웅은 가볍게 샌드위치를 만들겠다며 장을 봐 왔다. 온기가 채 날아가지 않은 식빵과 질 좋은 햄 두어 종류와 양상추, 피클까지 가져왔다. 희주는 그 모든 것이 든 쇼핑백을 보며 할 말을 잃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희주는 무원에게 연락할 때까지 대기하라고 짧게 문자를 보냈다.
   “컨디션은 어때? 병원에서든 집에서든 내가 좀 챙기고 싶은데.”
   주웅의 태도는 늘 똑같다. 담백하고 솔직하다. 말에 저의가 있지도 넘겨짚지도 않는다. 그걸 인정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죄책감을 들게 하는 그 태도가 종종 거슬렸다. 상대방의 선의가 잘못은 나에게 있다는 뼈아픈 사실을 일깨우기 때문일까.
   “나쁘지 않아. 그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야. 사실은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 아직 해결 못 한 일이 있거든.”
   “알아. 근데 이런 시간이 나한테 필요했어. 이렇게 당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당신의 불안하고 초조한 표정을 읽으면서 당신의 진심을 내 나름대로 짐작해 보는 시간이 너무나 간절해. 당신을 귀찮게 할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을게.”
   희주는 주웅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후 말했다.
   “난 처음부터 모든 걸 목격했어. 호텔방에서 이덕식이 죽었을 때부터. 그리고 이젠 피해자들 두개골을 열고 미친 짓을 한 여자를 잡아야 해. 그 여자가 어디로 향할지는 뻔해. 그 여자를 내가 먼저 잡지 않으면 이 사건은 끝나지 않을 거야.”
   “당신은 이 사건에 너무 깊게 빠져들었어.”
   “당연해. 내 사건이니까.”
   주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는 편도체와 내측 전전두엽피질의 균형이 급격히 깨지면서, 감정과 충동 조절이 훨씬 힘들어져. 편도체는 화재경보기고, 전전두엽피질은 감시탑이야. 화재경보기는 아무 때나 마구 울려 대고, 감시탑은 판단력이 흐려져서 지금 이게 화를 낼 일인지 그냥 넘어갈 일인지 제대로 판단을 못 해.”
   “…지금 내가 그런 상태라는 거야?”
   “그래. 응급실에서 사람을 때린 이후부터 당신은 내내 그래 왔어. 옆에 있는 사람을 불안하고 힘들게 만들 정도로 최악의 상태야.”
   희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사라고 잘난 척하는 거야? 아님 넌 환자니까 얌전히 내 말이나 들으라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맘대로 지껄이지 마.”
   “쉬어야 해. 사건에서 손을 떼고 멀리 가 버려야 해.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어. 안 그러면 당신은 당신을 미치게 만드는 그 일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해.”
   “내가 사는 게 어때서? 난 형사야. 이건 내 사건이야.”
   “사건은 당신이 맘대로 화를 내도 되는 면죄부 같은 게 아니야. 당신은 사건을 핑계로 여기저기 분노를 터뜨리고 다니는, 분노조절장애 환자일 뿐이야.”
   희주는 주웅의 뺨을 때렸다. 쓴 액체가 위에서 식도를 타고 올라와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
   주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가 줘.”
   “마지막 말은 사과할게.”
   “당장 여기서 나가 줘.”
   주웅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실수했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없었어. 미안해.”
   “사과하지 않아도 돼. 이미 우리는 끝났어.”
   “파트너 때문이야? 당신을 가르치려 들지도 않고 당신 분노에 순순히 동조해 주는 그 파트너를 나 대신 선택하기로 한 거야?”
   “….”
   희주의 입에서 곧바로 아니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주웅은 빌어서라도 희주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희주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그건 곧 대답과 같았다.
   “어리석은 건 나야. 이미 오래전에 그걸 알면서도 당신을 그냥 뒀으니까. 그게 멋진 애인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애써 괜찮은 척한 내 탓이야.”
   주웅은 천천히 걸어서 현관으로 향했다.
   희주는 주웅을 외면했다. 자책하는 주웅에게 그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국 나쁜 건 나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정말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주중을 내버려 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것만 빈자리에 끼워 넣으면 퍼즐은 완성되고 인생은 충만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퍼즐은 완성되지 않았다. 여전히 빈자리가 남아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널 기다렸어.”
   어둠 속에서 희주는 말했다. 세하를 향해 리볼버를 겨눈 상태였다. 여전히 세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끔찍한 것이라도 본 듯 놀란 표정이었다. 마치 뭉크의 절규처럼.
   뭉크는 일찍이 어머니와 누이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뭉크는 고통스러웠다. 불행한 시간은 어린 뭉크를 마치 채찍처럼 매정하게 때렸다. 그는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뭉크의 내면은 침잠했다. 그리고 병들었다.
   세하는 뭉크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병든 아이’였다. 모친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부친의 폭력과 무관심에 시달렸다. 루시아 수녀의 보호를 받았지만, 그래도 결국 아이는 혼자였다. 혼자 모든 걸 감당했을 것이다. 천재 의사의 내면에 아픈 아이가 산다. 그 아이를 구하지 않으면 살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희주는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이 어쩌면 형사로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희주는 참담한 마음에 눈물이 솟구치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아직, 20년 전 그 일이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눈물은 그때 흘려도 충분했다.
   “결국 여기서 만날 줄 알았어.”
   희주는 천천히 세하에게 다가갔다. 두 손으로 리볼버를 고쳐 들었다.
   “네가 뭘 하려는지 알아. 난 그걸 막을 거야.”
   세하는 희주를 응시했다.
   “…막아?”
   “그래. 더 이상 살인은 안 돼.”
   “거짓말.”
   “뭐?”
   “당신이 더 좋아하면서. 내 덕에 즐거웠잖아. 죄지은 나쁜 놈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기쁘지 않았어?”
   “헛소리하지 마.”
   “칭찬해 주고 싶어.”
   “뭐?”
   “정희주 형사님은 우등생이군요.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오늘 길이 순조롭진 않았을 텐데 무사히 만나게 되어 감동이 밀려오네요.”
   세하는 왼손으로 오른손 손등을 살짝 쳤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작은 박수.
   “복수는 여기서 끝내. 내가 제대로 이 사건을 파헤치고 마무리하게 해 줘. 그다음에는 온 힘을 다해 널 도울게.”
   “그 말, 진심일 거라고 생각해.”
   “그래, 진심이야.”
   “하지만 당신은 몰라.”
   “뭐?”
   “달라지는 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삶은 이미 끝나 버렸어. 세하는 이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하려던 일을 했다.
   “조금 번거로운 일이 생겼지만, 상관없어.”
   세하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메스로 리볼버를 쥔 희주의 손을 그었다.


   29 패닉, 룸


   희주는 왼손을 움켜쥐었다. 세하가 휘두른 메스가 왼손 손등을 스쳤다. 메스는 살덩이를 버터처럼 자르고도 남을 만큼 잘 벼려진 상태였다. 다행히 메스는 그저 스치기만 했다. 선홍빛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넌 미쳤어.”
   희주는 숨을 들이마셨다. 당장 밖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들이켜고 싶었다.
   “당신은 돌았어. 성격파탄자에 사회 부적응자의 대표잖아.”
   “돌았으니까 네가 여기 나타날 걸 예상할 수 있었겠지. 강희건만큼은 네가 직접 나설 거라고 생각했어. 나쁘지 않아. 좀 돌은 채로 형사 생활을 하는 거.”
   세하는 쿡쿡 웃었다.
   “역시. 난 당신이 좋아. 그 고집스러움과 경주마 같은 면이 마음에 들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거나 말거나 앞만 보고 달릴 테니까. 우린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아.”
   “알아주니 고맙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온 건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테고.”
   세하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여기서 죽으면 당분간은 아무도 못 찾겠군.”
   희주의 등에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더 이상 아무도 죽지 않을 거야.”
   “그래?”
   세하는 천천히 희주 쪽으로 걸어갔다. 희주는 뒷걸음질을 쳤다. 아직 이 공간에 대한 파악이 덜 됐다. 희주의 예상보다 세하가 더 빨리 나타났다. 손등에서 쉬지 않고 피가 떨어져 마룻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을 가장 잘 아는 건 당신이니까, 이쯤 되면 내 일의 목적과 의미 또한 가장 잘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희주는 재빨리 손등을 닦았다.
   “살인자가 되기 위해서 의사가 된 거 말이야?”
   “내 노력을 깎아내리지 마. 동양인 고아 주제에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덕식, 주용훈, 최준석의 두개골을 열고 장난질한 기분이 어때?”
   “정희주 형사님, 조금 신중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희주는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세하를 불필요하게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무척 정교한 시술이야. 뇌들보를 제거한다고 해서 전부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거든.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때에 제대로 미친 손이 활약하는 게 중요하지.”
   “너희 어머니는 똑똑한 딸을 낳았다고 좋아했을 텐데, 지금 이런 널 보고도 똑같이 생각할지 궁금하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아는데 그만둬. 불쌍한 우리 엄마 얘길 한다고 내가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메스를 떨어뜨리길 바라는 거야?”
   “…인정할게.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었어.”
   희주는 순순히 인정했다. 평범한 이들보다 월등하게 머리가 좋은 박세하를 상대하기에 적당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 인간들은 더 심한 일을 당해도 싸. 난 그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이 별장에서 여자들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똑똑히 봤어. 당신도 그걸 봤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우리는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렸을 테니까. 아마 우린 끝내주는 한편이 되었을 걸? 당신은 형사, 난 의사. 우린 아름답고 능력도 있어. 죄 없이 죽은 이들을 위한 최고의 파트너가 되었을 거야. 우린 불친절한 세상에 엿을 먹이는 친절한 악당이 되었겠지.”
   “그래도 이건 아냐.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해야 해. 이렇게 끝이 나면 대중들은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해. 그러면 똑같은 일이 또 반복될 거야.”
   “아니. 교훈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럼 이 세상이 엉망이 된 게 교훈이 없어서라는 거야? 그게 아니야. 인간은 원래 교훈 같은 걸 얻지 못하는 우둔한 존재일 뿐이야. 자기 일이 아니면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고 무시해 버린다고. 중요한 건 교훈이 아니라, 본보기야.”
   “넌 이미 망가졌어. 정상이 아니야.”
   “나도 알아. 하지만 그보다, 엄마가 강간당하는 걸 본 열두 살짜리가 멀쩡히 살았다는 게 더 대단하지 않아?”
   희주는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죽고 난 루시아 수녀님한테 보내졌어. 수녀원에 숨어서 살다가 1년쯤 뒤에 혼자 미국엘 갔어. 그때 난 고작 열세 살짜리 여자애였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혼자 살았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나 혼자 깨우치고 배웠어. 엄마처럼 죽지는 않았지만, 세상에 버림받은 건 확실했지.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았어. 죽는 건 너무 쉬운 일 같았으니까.”
   “결국 널 살린 건, 선한 마음이야. 루시아 수녀는 널 지키려 애썼어.”
   그 순간, 세하는 복도 왼쪽에 있는 문을 열고 희주를 밀었다. 거긴 집주인은 물론 별장 손님들은 절대 들어가지 않는 잡동사니 창고였다. 업소용 대형 세탁기와 건조기, 각종 저장식품이 들어 있는 박스와 포대 자루들이 있었다. 그리고 8칸 남짓의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희주는 계단으로 굴러떨어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통증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발목이 부러진 것 같았다. 세하는 바닥에서 움찔거리는 희주를 내려다보았다.
   “오만했어.”
   희주는 약한 뇌진탕 때문에 머리를 들 수 없었다.
   “날 그깟 말로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그만둬.”
   “뭐라고?”
   “그만두라고.”
   “아직도 착한 척이야? 이젠 좀 솔직해졌으면 좋겠어. 아기를 때려서 결국 죽게 만든 남자 말이야. 잊지 않았잖아? 그 남자가 출소할 날만 이를 갈면서 기다리고 있잖아? 당신도 보는 눈이 없고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 남자를 죽이고 싶잖아.”
   “모든 사람이 너처럼 복수심 때문에 미쳐 날뛰는 건 아니야.”
   “정말이야? 정말 그 남자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기술 훈련을 성실하게 받는 모범수가 되어 조기 출소해도 괜찮아? 그래서 다시 또 순진한 여자 하나를 꾀어서 아기를 갖게 만들고, 또 그 아이가 시끄럽게 운다고 리모컨으로 말랑말랑한 아기 머리를 내리쳐도 돼? 아기 머리통이 얼마나 부드럽고 말랑한지 당신은 모르지? 난 알아. 손가락으로 조금만 힘을 주어도 쑤욱 들어갈 만큼 연하다고. 정말 괜찮아? 복수하고 싶지 않아? 자신을 속이지 말아요, 형사님.”
   “인정해. 그런 생각을 안 했다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 전부 생각한 대로 행동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
   “나처럼 되겠지. 나처럼 생각한 대로, 계획대로 죽어야 할 인간들을 차례로 죽이면서 이 세상을 조금은 살 만한 곳으로 만들겠지.”
   “…강희건을 도대체 어쩔 셈이야?”
   “강희건은 애 딸린 가정부들을 좋아했어. 물론 그들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기 때문만은 아니야. 그녀들은 독했어. 그게 강희건을 만족시켰어. 아름다운 여배우나 모델들은 그런 면이 없었어. 그녀들은 연약했으니까. 그래서 쉽게 포기했어. 살겠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어. 하지만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독했어. 강희건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 그 짜릿함.”
   희주는 정신을 차렸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통증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발목은 부러지지 않았다. 희주는 저만치 굴러간 리볼버를 몰래 다시 쥐었다.
   “그런 독한 여자들이 처절하게 몰락할 때의 짜릿함은 특별했을 거야. 강희건은 거기에 중독됐어. 그리고 우리 엄마는, 다른 어떤 여자보다 독했어. 엄마는 방음 장치와 각종 변태적인 도구들이 완벽히 갖춰진 강희건의 지하실에서 매일 지옥을 봤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았어. 엄마는 나를 지키려고 했어. 강희건은 엄마를 농락하고 협박했어. 만약 여기서 일어난 일을 발설할 경우 나한테도 똑같은 짓을 하겠다고 했어. 아직도 강희건이 걱정돼?”
   “하지만 네 어머니는 죽었어.”
   희주는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세하는 계단 중간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둘의 거리는 고작 2미터 남짓.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그래. 결국은 참지 못하고 도망쳤거든.”
   “이제 그만해 줘.”
   희주는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아니. 가장 중요한 메인 디쉬가 남았어. 메인을 먹지 않은 채 이 긴 식사를 끝내는 건 식사를 준비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제발….”
   “그가 살려 달라고 비명을 내지르는 걸 듣고 싶지 않아?”
   희주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세하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희주의 목에 팔을 휘어 감았다. 숨이 턱 막혀 손에 쥔 리볼버를 떨어뜨리고 목을 부러뜨릴 듯이 옥죄는 팔뚝을 움켜쥐었다.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죽을 뻔한 지난 일이 떠올랐다. 상대는 더욱 강하게 목을 졸랐다. 극도의 공포심에 다리가 풀리려 했다. 본능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때 무원이 준 최루액 스프레이라도 있었다면.
   희주는 간신히 세하를 응시했다. 도대체 누구인지 세하가 알려 주길 바랐다. 그 순간, 목덜미가 따끔해졌다. 주삿바늘을 타고 정체불명의 약물이 혈액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목을 조이던 팔뚝이 서서히 풀어졌다. 희주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술에 취한 것처럼 온 몸에 힘이 풀렸다. 두툼한 손이 리볼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계단에 서 있는 세하를 겨누었다.
   “감동적인 이야기 잘 들었어.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군.”
   희주는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취제겠지. 이 정도로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는 거라면 꽤나 고용량 주사였겠지. 여기서 이렇게 쓰러져선 안 돼. 그러면 우리 둘 다 위험해지는 거야….
   “하지만 조금은 뿌듯하군. 내 별장이 아름다운 두 여자의 만남이 장으로 활용된 것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겠지만, 난 이쪽과 할 일이 있어서.”
   강희건은 계단 위로 올라갔다.
   세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강희건의 스케줄은 완벽하게 파악했다.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면 별장으로 개인 트레이너를 불러 한바탕 땀을 빼고 마사지를 받고 잠을 자는 게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오늘도 개인 트레이너가 약속한 시간에 방문했고 30분 전 별장을 나갔다.
   세하가 선택한 시간은 강희건이 무방비 상태로 달콤한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다. 별장 안에 사람이라고는 강희건뿐이고, 별장 밖에서는 김재화가 휴식을 취하는 주인을 위해 사냥개처럼 지키고 있을 시간이었다. 물론 김재화는 지금쯤 세하의 지시대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테지만.
   “깜짝 선물은 언제나 환영이야. 난 아직 애들처럼 선물을 좋아해. 그중에서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받는 선물만 한 게 없지. 오치상이 루시아 수녀를 데려왔을 때도 즐거웠어. 오늘은 그날보다 열 배 정도 더 기쁘군.”
   세하는 계단을 다 올라간 다음 출구를 향해 몸을 틀었다. 강희건이 고개를 저었다.
   “그쪽이 아니지.”
   세하는 이를 악물고 또 다른 지하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옳지. 우리가 재미를 볼 동안 용감한 형사님은 여기서 자게 두자고.”
   강희건은 창고 문을 닫은 다음 잠갔다. 그리고 리볼버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건 좀 유치하잖아?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난 좀 전통적인 걸 선호하는 편이라.”
   강희건은 복도에 세워 놓았던 낫을 집어 들었다.
   “내 충직한 집사가 항상 잘 갈아 두는 편이라 아주 날카로워.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그 가소로운 메스는 바닥에 내려놔. 물론 들고 있고 싶겠지만, 내가 그게 거슬려서 이 낫으로 너의 그 연한 뱃가죽을 한 번에 그어 버리면 곤란하잖아. 게다가 네가 발 딛고 서 있는 대리석은 정말 비싼 거야. 대리석을 더럽히긴 싫어.”
   세하는 강희건을 노려보면서 메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계속 걸어. 아주 천천히. 손님이 왔으니 내가 가장 아끼는 공간에서 특별한 대접을 해야겠지?”
   세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강희건의 특별한 지하실. 완벽한 방음 시설과 갖은 도구들이 갖춰진 곳. 은색 스테인리스 수술대와 다양한 용도의 메스들. 그리고 자물쇠가 달린 수갑…. 엄마의 손목이 항상 붉고 푸르게 멍들었던 이유.
   “천재 의사의 방문이라…. 정말 상상도 못 했어. 그리고 그 의사가 나의 오래전 가정부 이인애의 딸이라니. 정말 짜릿해. 모처럼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군. 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에게 묘하게 호감이 갔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어쩔 셈이지?”
   세하는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강희건과 마주하는 장면을 수만 번 상상했는데도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약자의 고통을 에너지로 삼아 더욱 잔인해지는 강희건에게 먹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세하는 최대한 흔들린 없이 몸을 똑바로 서 있으려 애썼다.
   “널 좋아하는 형사는 지금 창고에서 쿨쿨 자고 있고, 나의 충직한 집사는 보이지 않지. 아, 너의 충직한 집사던가?”
   세하의 등 뒤로 지하실 문손잡이가 느껴졌다. 차가운 쇠가 손에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김재화는 오랫동안 날 위해 여자들을 처리했어.”
   강희건은 슬쩍 낫을 들었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한 번 보라는 듯.
   “난 그를 위해 부지런히 서핑 보드를 사서 날랐지. 그거 꽤 비싸. 그러면 김재화가 알아서 모든 걸 깔끔하게 처리했어. 난 그를 믿었어. 난 원래 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데, 내 충직한 개만큼은 정말 믿었다니까.”
   강희건은 보이지 않는 김재화를 향해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 유머러스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이은애한테 흑심을 품고 있는 건 미처 몰랐지. 깜찍한 노인네 같으니! 세상일이라는 게 항상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그건 상관없어. 하지만 그가 널 위해 비상벨 전원을 꺼 버린 것도 모자라 박살 낸 걸 보니까 배신감이 밀려오더군. 그 문제는 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 해결할 생각이야.”
   “당신은 괴물이야.”
   “나도 알아. 그런데 말이야.”
   강희건은 세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도 괴물이야.”
   “당신을… 죽일 거야. 메스로 한 조각씩 잘라 내면서 아주 천천히.”
   “그거 아주 재미있겠네. 역시 우린 취향이 비슷한 것 같아. 네 이야기만 들었을 뿐인데 방금 아랫도리가 묵직해졌어.”
   세하는 욕지기가 밀려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해. 당신 같은 인간들 때문에 세상은 지옥이 돼.”
   “오, 가련한 작은 아이! 넌 아직 세상을 몰라.”
   “뭐?”
   강희건은 싱긋 웃으면서 낫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의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지옥은, 항상 네 머릿속에 있어. 앞으로 지하실에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상상해 봐. 약속하지. 아주 긴 시간이 될 거야.”
   “상상은 당신이나 해. 조만간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경험하게 될 테니까.”
   “아주 기대되는군. 역시 이인애 딸다워. 그년도 말할 힘이 있을 땐 한 마디 지지 않고 대꾸했거든. 그럼 난 더 흥분됐고.”
   “그래?”
   세하는 이렇게 대꾸하고 재빨리 주저앉았다.
   그 순간, 강희건 뒤에 있던 김재화가 골프채를 휘둘렀다. 강희건은 머리를 맞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리볼버가 저만치 굴러가자 김재화는 골프채로 리볼버를 멀리 날려 버렸다. 강희건은 신음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바닥에 쭉 뻗었다.
   “대화 즐거웠어. 좀 지루했지만.”
   세하는 엎어진 강희건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희주는 눈을 뜨려고 애썼다. 마취 주사의 효과가 점점 물러나는 중이었다. 고개를 들어 계단 위를 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도대체 불을 켜는 스위치는 어디에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보다 좁은 창고에 갇혀있는 것이 더 괴로웠다. 가슴이 답답했다. 마치 작은 관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다. 온몸이 옥죄어 들었다. 혀가 목구멍 안으로 말려들어 가는 것 같다. 희주는 그 생각을 떨치려 애썼다. 그 생각에 잠식당하면 여길 나가기도 전에 폐소공포와 공황발작 때문에 또다시 기절할 것이다. 습관적으로 항상 비상약을 넣어 다니는 바지 뒷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었다. 약은 없다. 패닉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면 아무도 구할 수 없다.
   머리가 빙빙 돌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강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아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집중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온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두 발로 휘청거리지 않게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별장 관리인? 오치상? 강희건? 누구라도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리고 그게 누구라도 해도 박세하를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희주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 상황에서도 휴대폰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통화 목록에서 무원을 찾았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하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희주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밖으로 향하는 작은 창이나 환풍구라도 있길 바랐다.
   “젠장….”
   조금 전에 또 한 번 죽을 뻔했다는 사실보다 전화가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여기 갇힌 채로 이 끔찍한 복수극의 희생자가 될 순 없었다.
   희주는 머릿속 톱니바퀴를 최대한 빨리 굴리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나무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진 않았다. 예상대로 문은 잠겨 있었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문고리를 흔들었다. 발로 수차례 차면 망가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희주가 깨어났다는 걸 상대방도 알아챌 것이다. 리볼버도 없다. 희주는 다시 내려가 야구방망이나 무기로 쓸 만한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철제 바구니에 가득 쌓인 세탁물과 출렁이는 세제 더미, 통조림 따위뿐. 희주는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었다.
   희주는 다시 계단 위로 올라와서 최대한 문 가까이 붙어 섰다. 문에 귀를 대고 밖의 소리를 들어 보려 집중했다. 밖은 고요했다. 이미 모두 떠난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박세하를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제발 딱 한 번만. 제발….”
   희주는 전남편 정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결혼 생활은 고작 1년을 채우지 못했지만 그 이후로도 둘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그건 전적으로 정현의 덕이었다. 정현은 더 이상 자신의 법적인 아내가 아닌 희주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희주를 인정했다. 그리고 같이 사는 동안 그렇게 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그는 꼴사나운 허세도, 괜한 자존심 싸움도 모르는 남자였다. 그리고 더는 지긋지긋한 결혼 생활에 대해 들추지 않았다. 대신 현재의 희주를 응원했다. 형사로서의 희주의 능력을 인정했다. 정현의 노력 덕분에 두 사람의 마음은 더 이상 다치지 않았다. 결혼 생활을 이어 가지 못한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혐오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했더니 서로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졌다. 정현은 목숨을 내놔도 아깝지 않은 친구였다.
   온갖 최악의 불운이 닥친 지금 이 순간 정현이 떠오르다니. 돌이켜 보니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여기서 죽으면 영원히 그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희주는 눈물이 솟으려는 것을 꾹 참았다. 하지만 더는 참기 힘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답답해졌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피가 말라붙은 왼손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휴대폰을 떨어트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인정할 때가 온 것 같다.
   “…선배!”
   희주는 놀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가 터졌다.
   “선배예요? 괜찮아요?”
   “여기… 강희건 별장이야.”
   목이 멘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별장 뒤쪽 관리인 출입문이 열려 있어.”
   “괜찮아요? 무사한 거죠?”
   “난 괜찮아. 출입문으로 들어와서 왼쪽이야. 지하 창고에 갇혔어. 별장 안에 박세하 말고 누군지 모르는 인간이 있어. 그 인간한테 당했어.”
   “당해요?”
   “마취 주사 때문에 기절했어. 지금은 깨어났고. 그것 말고는 괜찮아. 이 빌어먹을 지하실에 갇혔다는 것 빼고는.”
   “이런 젠장! 절대 나오지 말고 기다려요.”
   “어차피 나갈 수도 없어. 밖에서 문을 잠갔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갇혀 있는 동안 박세하가 강희건을 죽일 수도 있어.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선배, 가만히 있어요. 절대 나가면 안 돼요.”
   “미쳐 버릴 것 같아. 박세하가 이미 당했을지도 몰라.”
   “그래도 혼자서는 안 돼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약도 없는데.”
   “다친 데는요?”
   “괜찮아. 그보다 빨리 와 줘. 사이렌도 헬기도 안 돼. 괜한 자극은 오히려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 거야. 가능하면 혼자 와.”
   “죽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빨리 오기나 해. 숨이 막혀 미칠 지경이니까.”
   “견뎌요. 꼭 구하러 갈 거니까. 선배를 구하고 나면, 절대로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강희건은 눈꺼풀을 한참 떨었다. 그러더니 눈을 뜨고는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손과 발과 몸통은 자신이 애용하는 스테인리스 수술대 위에 묶여 있었다. 직접 주문한 가죽 벨트가 온몸을 압박했다. 세하는 그의 목에 메스를 들이댔다.
   “잘 잤어요?”
   강희건은 눈동자를 위로 굴려 자신의 머리맡에 서 있는 세하를 보려 애썼다. 하지만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았다. 뇌진탕인 것 같았다.
   “난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라 소리를 지르면 목을 찌를 거예요. 그걸 원하면 지금 바로 비명을 질러 보세요.”
   강희건은 입을 다물고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좋아요.”
   “날 어쩌려는 거야?”
   “좀 기다려요. 지금 설명하려던 참이니까.”
   강희건은 신음 소리를 냈다. 가죽 벨트가 가슴을 너무 세게 조여서 숨쉬기가 불편했다.
   “거기 누워 있는 기분이 궁금하네요.”
   “나쁘지 않아.”
   “그래요?”
   세하는 강희건의 목에 댄 메스를 슬쩍 눌렀다. 붉은 피 한 줄기가 가늘게 흘렀다. 강희건은 미동도 없었다.
   “이런 다정한 시간을 꽤 좋아했죠.”
   “즐기는 편이었지.”
   “지금도 예전처럼 즐기는 마음이 드나요? 한번 말해 봐요. 1시간 전에 날 죽이지 못한 걸 후회하나요?”
   “우리 거래를 하지.”
   “거래?”
   “너에게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주겠어.”
   강희건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빛났다. 투자자들을 설득하고 여자를 매혹시키는, 항상 성공을 보장하는 눈빛.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세요.”
   “네 아버지가 되어 주겠어. 네가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위대한 아버지. 내가 가진 걸 너에게 전부 다 주겠어.”
   “과연 개자식의 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네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널 사랑하겠어. 물론 네 엄마 역시 내 방식대로 사랑했어. 물론 좀 폭력적인 방식이긴 했지만. 그 덕에 네가 세계 최고의 의사가 된 걸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강희건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혀를 놀렸다.
   “…닥쳐.”
   “네 엄마가 죽은 건 너 때문이야.”
   세하는 강희건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살인자가 될 딸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 그냥 널 버리고 별장을 나갔으면 저수지에 처박히지 않았을 텐데. 네 엄마는 내가 널 데리고 있다는 걸 알고 다시 이곳으로 왔어. 제 발로. 그래서 죽은 거야.”
   “엿 같은 소리 하지 마!”
   세하는 챙겨 온 수술 도구들을 늘어놓았다. 가장 중요한 브레인 임플란트 칩은 멸균 캡슐에 넣어 가져왔다.
   “네 엄마 목숨값으로 잘 먹고 잘산 기분이 어때? 넌 네가 그토록 혐오하는 네 부친과 다를 바가 없어.”
   세하는 강희건의 입에 말아 놓은 붕대를 거칠게 집어넣고 테이프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메스로 강희건의 두피를 단숨에 그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밀려오자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눈알이 빠져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가죽 벨트로 묶인 몸이 요동을 쳤다.
   “아직 쇼크에 빠지진 말아 줘.”
   세하는 김재화가 미리 가져다 놓은 수술용 소형 전기톱을 집어 들었다. 주로 외과 수술이나 뇌수술에 사용되는 모델이었다.
   “이걸로 두개골을 절개할 거야. 물론 아까처럼 마취는 없어. 당신이 그런 호사를 누릴 자격은 없잖아?”
   강희건 입 안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아마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를 지나치게 세게 깨문 탓인 것 같았다.
   세하는 브레인 임플란트 칩이 담긴 멸균 캡슐을 강희건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보여? 당신이 좋아한다는 깜짝 선물이야. 앞으로는 병원에 가는 게 쉽지 않을 거야. 치과 의자에 앉기만 해도 오늘 일이 떠오를 테니까.”
   강희건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보통 사이코패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트라우마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혀 아니야. 당신 같은 사이코패스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 당신도 감정이 있고 자기보호본능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 있어. 그걸 내가 당신을 통해 이 세상에 증명해 보이려고 해. 수술 뒤에는 완벽하게 봉합할 테니 걱정 마.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 전문의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돼.”
   세하는 전원이 꺼진 전기톱을 강희건의 두개골 위에 갖다 댔다.
   “내가 가져온 선물은 그거야.”
   세하는 고개를 숙여 눈물을 줄줄 흘리는 강희건의 붉은 눈을 응시했다.
   “트라우마.”
   강희건은 식도로 넘어가려는 붕대를 뱉어 내려 애를 썼다.
   “탈출구가 없는 생지옥이 뭔지 이번 기회에 느껴 보면 좋겠어.”
   세하는 캡슐에 든 브레인 임플란트 칩을 강희건의 동공 위로 가져갔다.
   “당신을 위해 브레인 임플란트 칩에 가장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의 기억을 넣었어. 고문, 성폭력, 가정폭력, 집단 괴롭힘. 아, 그리고 돼지를 도축하다가 죄책감에 자살한 도축업자의 기억도 넣었어. 이걸 당신 뇌에 삽입하면 당신은 이 모든 걸 전부 자기 기억이라고 믿게 될 거야. 뇌를 속이는 거지. 가해자일 때는 몰랐던 피해자의 고통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거야. 숨 쉬고 있는 동안, 단 한 순간도 편안한 기분을 느끼지 못할 거야. 트라우마라는 건 그런 거니까. 그래도 절대 자살하지 말고 버텨 봐. 사이코패스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사니까.”
   세하는 전기톱 전원을 켰다.
   강희건의 눈이 더욱 커졌다. 이젠 정말 튀어나올 지경으로 도드라졌다. 붕대가 밀려 나오면서 피와 깨진 이가 함께 밀려 나왔다.
   “박세하! 그만둬!”
   세하는 얼어붙었다.
   “이제 그만해.”
   희주는 두 손을 들고 세하에게 다가갔다.
   “무기는 없어. 난 지금 맨손이야. 난 그저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진정하고 그거 내려놔.”
   세하는 순순히 전기톱을 내려놓고 메스를 강희건에 목에 겨눈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형사야. 이 쓰레기를 살리려고 목숨을 걸다니.”
   “아냐. 난 널 살리려는 거야. 그 인간은 죗값을 치를 거야. 꼭 그렇게 만들 거야. 그러니까 죽일 필요 없어.”
   “벌은 내가 내려.”
   “우린 그런 권한이 없어. 그건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할 거야.”
   “다른 경찰들 혹은 판사, 검사들은 당신처럼 부지런하지 않아.”
   세하는 메스로 반쯤 벗겨진 강희건의 두피를 헤집었다. 강희건이 고통과 쇼크 때문에 몸을 벌벌 떨었다.
   희주가 말했다.
   “죽이는 건 아주 쉬운 복수야.”
   “맞아. 그래서 죽이지 않을 거야.”
   멀리서 사이렌이 울렸다. 세하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희주를 응시했다. 그리고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했다.
   “…죽이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정말이야?”
   “불쌍한 우리 엄마를 걸고. 내 방식대로 처리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지금 당장 이 인간의 목을 긋고 내 목도 그을 거야. 그럼 당신도 나도 이 인간도 허무해지지. 그걸 원해?”
   “아니, 제발.”
   “당신 파트너 생각은 당신과 다른 것 같은데.”
   희주는 고개를 돌렸다. 무원이 세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무원, 총 내려.”
   “선배, 이리 나와요.”
   “총 내리고 저리 가.”
   무원은 황망한 표정으로 희주와 세하를 번갈아 보았다.
   “선배!”
   “내 말 안 들려? 당장 나가라고!”
   무원은 세하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물러났다.
   “냄새보다 더 효과적으로 과거를 되살려 주는 기억은 없다는 말 들어 본 적 있어? 『롤리타』를 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한 말이야. 사람들은 냄새로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잖아. 이곳에서 나는 피 냄새, 고통의 냄새, 각종 분비물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여기서 이 냄새를 맡으며 공포에 질렸을까….”
   세하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우리 엄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희주는 자신도 모르게 세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치 곧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너도 무서웠겠지. 겨우 열두 살이었으니까.”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인 세하가 희주를 바라보았다.
   “정말 미안해. 널 너무 늦게 찾아와서….”
   “시간이 별로 없어. 아직 선물이 남았거든. 나중에 내가 이 개자식한테 어떤 선물을 줬는지 알게 되면 당신도 내 마음을 이해할 거야. 어쩌면 그 선물을 아기를 때린 남자에게 주고 싶어서 날 찾고 싶을지도 모르고.”
   희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세하를 두고 돌아섰다.


   30 지옥은 여기에


   해결되지 않고 마음에 남아 있는 모든 것에 인내를 가지고, 그 의문들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그 의문들이 현재를 살도록 하라.
   훗날 언젠가,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 조금씩 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선배?”
   내 파트너의 목소리. 지하실에서 날 꺼내 줬지.
   “정신이 좀 들어요?”
   희주는 눈을 깜빡였다. 여기는 집인가?
   “여기가… 어디야?”
   몸에는 한 줌의 힘도 남아 있지 않다.
   “병실이에요.”
   무원이 대답했다.
   “강희건은?”
   “괜찮아요. 대신 쇼크가 심해서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이에요.”
   희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무원을 보았다.
   “박세하는?”
   별장에서 있었던 일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아직은 그 조각들을 제대로 맞출 힘이 없었다.
   “조사받는 중이에요. 의료법 위반, 살인 미수.”
   희주는 이제야 긴 싸움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끝났어.”
   무원은 희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박세하는 정말 강희건을 죽이지 않았어. 나랑 한 약속을 지켰어. 그리고 난 또 죽을 뻔했어. 하지만 또 죽지 않았어.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느껴진 것은 처음이야. 살아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네 얼굴은,”
   희주는 무원을 응시했다.
   “환상 같아. 꿈같고.”
   “환상도 꿈도 아니에요. 난 선배 옆에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아요.”
   “박세하는 선물을 준다고 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강희건에게 선물을 줄 거라고 했어. 나중에 알게 될 거라고.”
   “선배가 자는 동안 선배 애인이 왔다 갔어요. 강희건의 상태를 알려 주려 왔다가 선배가 자고 있으니까 그냥 갔어요.”
   “…이젠 아냐.”
   “뭐가요?”
   무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희주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 이젠 애인이 아냐. 헤어졌어. 내가 다 망쳤어.”
   “지금, 그게 중요해요?”
   무원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희주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 보았다.
   “박세하가 강희건의 뇌에 브레인 임플란트 칩을 삽입했어요. 이덕식, 주용훈처럼. 그런데 굉장히 까다로운 곳에 삽입을 해서 섣불리 두개골을 열고 제거하기 힘들 것 같다고 해요. 앞으로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현재로서는 경찰 조사도 쉽지 않은 상황이에요.”
   “역시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박세하가 미친 손을 선물했을까요?”
   “그게 아닐 거야.”
   “네?”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닐 거야. 박세하는 강희건에게 피해자들의 고통을 느끼게 해 주겠다고 말했어. 그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무원은 붕대를 감은 희주의 왼손을 쓰다듬었다.
   “강희건은 회복하는 대로 죗값을 치르겠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네?”
   “넌 강희건이 지은 죄에 상응하는 충분한 처벌을 받을 거라고 믿어?”
   무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을 고쳐야겠죠.”
   “그런 날이 오긴 올까? 난 이 일을 하면 할수록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어. 그럴 때면 내가 하는 일에 회의감이 들어. 우린 대체 뭘 위해 이러는 걸까?”
   “오겠죠. 우리가 못 보더라도. 그렇게 믿어야죠. 그리고 계속 요구해야죠. 우리 뒤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날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팀장 소식은 없어?”
   “전혀요. 여전히 소재가 불분명해요. 강력3팀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탐문 조사를 하고 있어요.”
   “박세하가 알 거야. 물론 쉽게 입을 열진 않겠지.”
   희주는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지만 순간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맙소사. 몸이 완전 엉망이야.”
   “무리하지 말아요. 최소한 일주일은 병원 신세라고 하니까.”
   “일주일? 미치겠네.”
   무원은 희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웃음이 나와?”
   “그 지하실에서 선배를 찾았을 때 깨달았어요.”
   “뭘?”
   “선배를 좋아해요.”
   희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게 적절한 대사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애인 있는 여자한테 고백한 것도 아닌데.”
   무원은 희주에게 다가갔다.
   “아직 처리할 일이 산더미야.”
   “알아요.”
   희주는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무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장 위험한 순간이면 항상 나타나는 이 남자.
   “죽다 살아나서 듣는 고백은 좀 특별하게 들리네.”
   “받아 주는 거예요?”
   “이제는 쉬고 싶어. 정말 지쳤어.”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고 싶어. 이렇게 좋은 병실 말고 좁아터진 내 오피스텔로 돌아가고 싶어. 이번에는 꼭 이삿짐을 전부 풀 거야.”
   “일주일만 버텨요. 그다음에 내가 데리고 갈게요.”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내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
   “이젠 절대 혼자 안 둬요. 절대.”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따뜻한 그의 입술이 희주의 거칠어진 입술을 부드럽게 누르는 게 느껴졌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괜찮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물을 뺀 저수지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이 여러 구 나왔다. 강희건은 시신이 떠오르지 않도록 3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서핑 보드에 시신을 매달아 버렸다. 김재화의 오두막에서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서핑 보드 2개가 발견되었다. 시신 발굴에는 무원만 참여했다. 참담함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장면을 희주가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희주는 휴직을 신청하고 본격적으로 심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물론 주웅과의 관계는 끝이 났다. 하지만 주웅은 업무상 재해에 가까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희주의 심리 치료를 담당할 유능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를 추천해 주었다.
   처음에는 주웅의 호의가 부담스러워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남녀관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여전히 정희주라는 형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애초에 의사와 환자라는 관계에서 시작한 자신의 잘못이라고도 했다. 희주는 성숙한 이 남자를 버리고 무원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게 과연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결국 똑같은 결말을 또다시 자초하는 게 아닐지 걱정됐다.
   희주는 이런 걱정을 무원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무원에게는 유치한 질문을 해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사건으로 인해 파트너와 남녀관계로 엮이는 것은 너무나 고리타분했다. 극적인 감정 때문에 충동적으로 결정했을 거라는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였다. 무원은 괜찮을 거라고 너무 쉽게 대답했다. 분명 괜찮을 거라고, 설령 똑같은 결말을 보게 되더라도 자신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이 고리타분한 관계에 자신은 진심을 걸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하는 교도관 동행하에 정신 감정을 위한 상담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상담은 매주 금요일에 이루어졌다. 심리분석가는 세하에게 판에 박힌 질문을 던졌다. 세하는 대부분의 시간에 침묵을 지켰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불행한 유년 시절 때문에 사회 적응에 실패하고 정신병에 시달리는 여의사 프레임이었다. 그가 무슨 결론을 내리던 세하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지 못할 테니까. 그에 비하면, 세하는 전부 보았다. 인간의 가장 악한 부분과 가장 연약한 부분 모두.
   담당 교도관은 상담을 마친 세하를 독방이 아니라 면회실로 데리고 갔다. 처음에는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재화가 눈앞에 있었다. 김재화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 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오랜만이구나.”
   김재화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들어 미동도 하지 않는 세하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3개월 만인가요?”
   세하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어릴 적 좋아하던 먼 친척 아저씨를 만난 것처럼. 두 사람에게 떨어져서 지켜보던 교도관의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잘 지내고 있니?”
   “덕분에요. 조용하고 편해요. 가끔씩 정원을 걷기도 하는데 들고양이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져요. 몇 번 손을 뻗어 보았는데 다가오지는 않더라고요.”
   김재화는 목을 살짝 움츠렸다. 세하의 대답은 안타까울 정도로 움푹 볼이 팬 그녀의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상처 받은 작은 새처럼 작디작았다.
   “며칠 전에 꿈을 꿨어요. 난 오두막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아저씨는 내가 나가지 못하게 내 팔을 잡았어요. 꿈이었는데도 팔이 아프더군요. 난 눈으로 엄마를 찾고 있었어요. 분명 저 밖에 있어야 하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아서 불안했어요. 계속 엄마를 찾았어요. 소리를 내서 부르고 싶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죠.”
   세하가 말하는 것은 별장 저수지에 있는 김재화의 오두막이었다. 김재화는 그곳에서 강희건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했다.
   “그때 나비 한 마리가 오두막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어요. 하얀 나비는 엄마가 일할 때 매던 앞치마에 달린 레이스 같았어요. 하늘이 비칠 정도로 아주 얇은 날개였죠. 난 엄마를 찾으려던 걸 잊고 나비를 향해 손을 뻗었어요. 아저씨도 내 팔을 놔 줬죠. 난 나비를 보면서 알았어요. 엄마가 죽었다는 걸. 이 나비는 엄마가 보낸 거라는 걸.”
   그날은 따스한 봄날이었다. 온갖 들꽃이 잘 다듬어진 정원을 수놓았다. 꽃은 벌과 나비를 불러들였다. 오치상과 조정배는 윙윙대는 벌과 팔랑이는 흰 나비들 속에서 이은애를 저수지에 처박았다.
   “…네 엄마는 나비처럼 예뻤어.”
   “맞아요. 엄마는 내 눈에도 정말 아름다웠어요.”
   “20년이 지났지만 기억이 생생해.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청소를 할 때면 난 가끔 넋을 놓은 채 네 엄마를 보곤 했다. 내 더러운 손으로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 같았지. 그래서 지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어. 난….”
   “아저씨.”
   김재화는 이제 그때의 이은애만큼 나이를 먹은 소녀를 응시했다.
   “왜 돌아왔어요?”
   “그날 별장을 빠져나간 다음, 컨테이너 창고에 숨어 있었어. 거기야말로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했지.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으려 했어.”
   “왜 떠나지 않았어요?”
   “난 떠날 수가 없었다.”
   김재화는 그날 강희건의 머리를 골프채로 갈긴 다음, 세하를 도와 수술 준비를 마치고 별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즉시 컨테이너 창고로 향했다. 품속에는 비행기 표가 있었다. 그는 비행기표를 밤새도록 노려보다가 찢어 버렸다.
   “널 두고 떠날 수 없었어.”
   김재화는 세하를 바라보았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할게요.”
   “그런 소릴 듣고 싶어서 돌아온 게 아니다. 난 그저 내 할 일을 마무리하고 싶을 뿐이야.”
   김재화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네 부친은 죽었다. 밀린 입원비를 치르고 병원에서 쓰던 물건은 네 집에 가져다 두었다.”
   “거긴 내 집이 아니에요.”
   “이제 그만 화내라. 이제 다 끝났잖니. 이제는 다른 생각 말고 너 자신만 생각해라.”
   김재화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낡은 철제 의자가 바닥에 끌리면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났다.
   “다시 오마.”
   세하는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없다. 세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아저씨를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나만 더 물을게요.”
   김재화가 세하를 응시했다. 김재화는 문득 깨달았다. 세하와 이은애가 정말 많이 닮았다는 것을. 김재화는 죽기 직전 자신과 자신의 딸을 응시하던 이은애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때 이인애는 자신을 바라보는 김재화에게 이쪽을 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혹시라도 강희건의 관심이 딸에게 갈까 봐 이인애는 두려워했다. 김재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세하의 눈을 가린 채 돌아섰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포기해 버린, 한 사람의 영혼과 영혼을 지켜 주던 빛이 빠져나가기 직전의 눈빛. 김재화는 지금 세하의 눈빛이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뭘 말이냐.”
   “왜 날 버리지 않았죠? 죄책감 때문인가요?”
   김재화는 고개를 저었다.
   “주희야, 넌 더 행복해도 되는 아이야. 지금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어. 모든 걸 잊길 바란다. 그저 없던 일이라 생각하고 살아 주면 안 되겠니. 모든 걸 잊되, 네가 충분히 이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건 잊지 말아다오. 그리고…”
   제발 살아다오. 김재화는 마지막 말을 삼키고 돌아섰다. 아마 세하를 다시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역시 최준석과 강희건처럼 손에 피를 묻힌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는 세하를 만나기 전 자신을 안내한 교도관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교도관은 면회를 마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얼마 전 새로 이전한 구치소는 흡사 도심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연상케 했다. 주황색이 섞인 건물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업무용 사무공간이 밀집한 빌딩으로 오해할 만했다. 아마도 철조망이나 감시탑 같은 구치소에 어울리는 뭔가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만 800개가 넘는 감시 카메라가 수감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층간 내부 이동은 엘리베이터로만 가능하다. 형사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자주 온 곳이지만 이번에는 좀 남다른 기분이 들었다.
   세하는 번번이 희주의 면회 요청을 거부했다. 원칙적으로 수감자는 경찰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지만, 세하는 집중적인 정신 감정을 받고 있는 수감자였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담당의의 판단에 따라 거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담당의도 면회를 허가했다.
   “왜 마음을 바꿨는지 물어봐도 될까?”
   희주는 단도직입적으로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어차피 두 여자 모두 의미 없는 안부 묻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외눈박이 고양이 기억해요?”
   “물론 기억해. 사람을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세하는 희주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고양이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희주는 알고 있다. 못 본 사이에 눈에 띄게 혈색이 나빠졌지만 반짝이는 총기만큼은 두려울 정도로 변함없이 빛나는 저 여자는 절대 희주의 질문을 잊지 않을 거라는 것을. 분명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할 거라는 것을.
   “그 아이에게 브레인 임플란트 칩을 삽입했다는 말 기억해요? 그 작디작은 두개골을 열고 칩을 심었죠. 아주 까다로운 수술이었지만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서 그 어느 때보다 뿌듯했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아이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 주고 싶었거든요. 가족들 곁에서 천수를 누리다 죽은 평온한 고양이의 기억이었죠.”
   희주는 세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챘다. 그녀는 강희건에게 저지른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비교적 행복하게 지냈어요.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죠. 천진난만하게 나를 따르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어요.”
   “그럼 강희건에게는?”
   세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지옥을, 선물했죠.”
   마치 어린이날이라 로봇을 선물했다고 말하는 듯한 산뜻한 대답이 돌아왔다.
   “형사님 가슴속에 있던 지옥은 어떻게 되었나요? 여전히 잘 타오르고 있겠죠?”
   “그걸 묻기 위해 날 만나겠다고 한 거야?”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심은 잘 있나요? 설마 벌써 내다 버린 건 아니죠?”
   “그 일은 내 머릿속에 잘 있어. 억지로 머리통을 열고 기억을 지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군요. 형사님이 증오하는 그 남자에게 내가 강희건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옥을 선물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필요 없어.”
   “왜죠?”
   “그 남자는 언젠가 자신만의 지옥을 맛볼 테니까. 난 믿어. 그러니 너도 지켜봐.”
   희주의 대답에 세하는 빙긋 웃으며 이번에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요? 친구 사이에 그 정도 일은 해 줄 수 있어요. 솔직하게 말해 봐요.”
   “그건 내 방식이 아니야.”
   “악은 도처에 깔려 있어요. 덤불 속 잡초처럼 무성하죠. 우리가 전부 손볼 수 없을 정도로 넘치고 넘치죠.”
   “그래도 내 분노 때문에 날 망가뜨리지 않을 거야. 그래서야 네가 말하는 것처럼 도처에 깔린 악을 잡아들일 수 없어. 난 내가 할 일이 뭔지 알아.”
   “…난 늘 궁금했어요. 엄마가 그런 일을 당한 건, 엄마가 나약했기 때문일까요?”
   세하가 처음으로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냈다. 땅속에 묻힌 기분. 산 채로 매장이 되어 이미 무덤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 죽어서도 땅속에 묻히지 못한 가련한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혼미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수많은 의학 서적 어느 곳에도 유년 시절의 끔찍한 기억을 잊는 방법 같은 건 나와 있지 않았다. 세하는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자신처럼 무덤에서 사는 사람들을 구원했다.
   희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유를 피해자에게서 찾아서는 안 돼. 애초에 상대방이 나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그들이 악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어. 피해자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가해자들이 악하기 때문이야. 그걸 잊지 마. 그리고 엄마가 당한 일 때문에 널 증오하지마. 애초에 네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더 빨리 너와 엄마를 구하지 못한 우리들 잘못이야.”
   세하는 잠시 침묵했다. 희주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자신의 좋은 두뇌에 희주의 말에 제대로 스며들길 원했다.
   한때는 자신과 자신의 딸까지 나락에 빠뜨린 엄마를 원망했다. 왜 주방에 즐비한 그 많은 칼과 가위로 강희건을 찌르지 못했는지, 왜 아내를 멸시하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그건 그들이 ‘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엄마의 희망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인생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죽기 직전까지 쥐고 있던 엄마가 틀린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달라지는 건 없지만. 그래도… 훨씬 낫네요.”
   세하는 자신을 돌아보던 엄마를 떠올렸다. 아주 잠깐 눈을 마주치고 엄마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땐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어째서 엄마가 자신을 외면했는지.
   희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기억을 지우지도 복수하지도 않을 거야. 계속 현장에서 싸울 거야.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작고 약한 존재들을 단 한 명이라도 지킬 거야. 그게 내가 기억을 지우지 않는 이유야. 난 피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화류계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
작가소개 / 김은주 

2018년 한국콘텐츠진흥원 지원 사업에 선정, 장편소설 『녹색섬광』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 시작. 장편소설 『구구 아저씨』출간.

   《아르코문학창작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