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놈에 자식 무슨 신분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 시기에 전면적인 경제 발전이 이뤄지게 된 역사적 배경을 짚을 차례다.

서중석 : 지금까지 박정희 집권 시기의 경제 정책, 경제 발전과 관련된 여러 사안을 다뤘는데, 박정희 18년 동안에 대단한 경제 발전이 이뤄지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난 더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역사적 배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고, 그것에는 실질적으로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한국 경제가 발전하는 데 기본 동인으로 작용하는 것들이 있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한국 경제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한국 경제에는 근면하고 값싼 노동력이 대량으로, 산업예비군까지 포함해서 존재했고 그것이 외부 자금, 즉 차관하고 결합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데, 바로 이 부분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평준화다. 한국 사회가 놀랍도록 빨리 평준화가 됐고 그 평준화와 짝을 지어 교육열이 엄청났다. 이 두 가지 사항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그런 경제 발전을 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이렇게 평준화되고 교육열이 높은 나라는 선진국을 빼놓고는 한국이 최고라고 보면 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것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평등화라고 딱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평준화라는 말이 난 더 적당하다고 보는데, 평준화가 뭐냐 하면 한마디로 그 사회에 소속된 사람들이 모두 높고 낮음이 없이 같은 수준에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이런 반문이 나온다. 조선 후기에 그렇게 양반, 상놈을 찾고 노비가 많았는데 어떻게 그런 놀라운 평준화 현상이 일어났느냐 하는 물음이다. 그런 문제 제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상놈에 자식 무슨 신분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지독한 신분제 사회이던 한국, 놀랍도록 빨리 평준화

프레시안 :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서중석 : 조선 후기의 양반 지배 체제, 노비 체제를 살펴보면 조선 전기에는 그렇게까지 심한 양반 지배 체제는 찾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또 중국의 경우 양반 신분 비슷한 걸 적어도 송나라 때 이후에는 찾아낼 수 없다고들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송나라 이후의 진신층이라는 것은 양반하고는 다른 것이었다.

한국과 같은 형태의 노비가 있지도 않았다. 중국에 노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중국과 달리 한국의 노비는 세습되는 것이었다. 미국이나 중남미처럼 노예 시장 같은 것이 형성돼 거기서 사고판 건 아니지만, 노비도 매매되는 성격이 있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부모가 가난해서 또는 갑자기 가뭄이 들어 살 수가 없을 경우 딸을 노비로 팔아넘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도 당대에 한했다. 그 사람이 결혼해서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가 노비가 되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문제를 가지고도 얼마나 많이 싸웠나. (양인과 천인 사이에서 자식이 생겼을 때) 아버지가 노비일 경우 자식이 노비여야 하느냐, 어머니가 노비일 경우 자식이 노비여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른바 종부법(從父法), 종모법(從母法)이라는 것인데 역대 여러 정권이 이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갔다가 저렇게 갔다가 그랬다. 숙종(재위 1674∼1720) 전후 시기에 우리나라에 노비 숫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미국의 유명한 한국학자인 제임스 팔레 교수는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다고까지 주장했다. 한국인들은 (노예제 사회였다는)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있지만, 그만큼 노비가 많았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양반 체제가 영·정조 때 이미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19세기에 들어가면 크게 흔들리고, 신분으로서 노비도 약화돼 공노비 같은 경우 19세기 들어가면서 바로 해방된다', 보통 이렇게 배우지 않나.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 이전에 이미 노비를 해방시키는 건 대부분 이뤄졌고 노비 신분 문제는 갑오개혁 때 법적으로 해결됐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건 법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몽양 여운형을 비롯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명한 분들의 글을 보면 자기 집에 있던 노비를 1910년 직전에 해방시킨 얘기들을 많이 한다. 그리고 아무리 양반들이 갑오개혁 이후 권력에서 이전처럼 세를 펼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양반 위세가 대단한 데에서 그게 하루아침에 약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프레시안 : 노비 문제를 되짚어보면,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그 자손을 노비로 삼으면서 조선 사회에서 노비가 늘어나고 세금과 부역을 담당하는 양인은 줄어들었다. 이에 더해 신분제가 흔들리자 조선 정부는 1801년 공노비 중 왕실과 중앙 관청에 속한 이들을 해방시켰다. 1886년에는 노비 세습과 매매를 금지하고, 빚을 못 갚은 사람을 노비로 만드는 것도 막았다. 그 후 갑오개혁 때 법제적으로는 신분제가 폐지되지만,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변하고 노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반이 결정적으로 힘을 잃는 건 언제인가.

서중석 : '한국에서 양반이라는 것이 제대로 존립할 수가 없게 됐다. 양반, 상놈 찾기가 참 어렵게 됐다', 이렇게 만들어놓은 건 일제의 지배다. '일제가 잘한 게 있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건 잘한 것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의 지배가 독일 귀족 사회를 크게 약화시키지 않았나. 그래서 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데 한 역할을 했다. 사실 나치 게슈타포(비밀경찰)에는 무식한 자들도 많지 않았나. 그와 비슷한 것으로, 역사에서는 자신이 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가도록 역사가 구조적으로 돼버리는 경우가 있다.

'일제 시기에 그렇게 철저할 정도로 양반이 위세를 부릴 수가 없게 됐다. 노비라는 것도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실상 해체의 길에 있었다', 이렇게 된 건 일제의 지배 정책 때문이다. 양반이 자기 마을에서, 지역에서 힘을 가지려면 높은 벼슬을 한다든가 재산이 많다든가 해야 했다. 대개는 이 두 가지가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그게 집안, 가문으로 또 돼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 때 이런 걸 용납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조선총독부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길이 거의 막혀 있었고, 그렇게 올라가는 방식도 옛날에 양반 식으로 올라가던 것과는 달랐다.

1936년 통계를 보면, 교육청까지 포함해서 조선총독부의 전체 관리가 8만7552명인데 이 가운데 40.3퍼센트인 3만5288명이 조선인으로 돼 있다. 그 경우도 고급 관리의 80퍼센트, 중급 관리의 60퍼센트, 서기의 50퍼센트는 일본인이었다. 한국인은 고급 관리 중 일부일 뿐이었고, 그 외에는 대개 하급, 낮은 상태로 고용된 관리들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도지사가 되더라도 힘을 못 썼다. 그 바로 밑에 일본인을 뒀는데 그자가 오히려 더 힘을 쓰는 식이었다. 이건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가 인도나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을 지배한 방식과는 대단히 달랐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 지역들에서는 대부분 간접 지배 형식이었다. 토호 세력이라고 할까, 기존 세력과 야합하는 방식으로 식민 지배를 했다. 그런데 한국은 그게 아니라 일본이 직접 지배를 해버렸다. 그러니까 양반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면 경제적 지위는 어땠느냐. 대지주의 경우 이미 1910년대에 기존 양반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지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지주는 일본인이 많았다. 예컨대 100정보 이상 소유자를 보면 1921년에 한국인은 426명, 일본인은 490명으로 나오는데, 1935년으로 가면 한국인은 360명으로 줄어버리고 일본인은 545명으로 늘어난다. 대토지 소유자 중 한국인 숫자가 계속 줄어든다. 한국인은 대토지를 소유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그러면서 일본인과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을 비롯한 일본 회사들이 큰 소작지의 대부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소 지주는 계속 몰락했다.

자본가의 경우는 더 심했다. 1940년 말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공칭(公稱) 자본이 100만 원 이상인 회사 중 일본인이 소유한 것이 94퍼센트이고 한국인은 6퍼센트밖에 안 됐다. (공칭 자본은 은행, 회사 등에서 정관에 적어 등기한 자본의 총액을 말한다. '편집자') 그리고 화학 공업, 가스·전기 공업, 요업 이런 것들은 100퍼센트 다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진출할 수 있는 회사는 제한돼 있었던 데다가, 회사를 운영한 이 사람들은 대개 양반, 그러니까 전통적인 명문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 그런데다가, 몰락하던 중소기업이 일제 말 전시 체제에서 더 몰락해간다. 1939년 국가 경제 통제 조치가 취해지고 1942년에 전시 기업 정비 조치가 취해져서 그야말로 빈사 상태로 들어간다고 이야기하지 않나. 이처럼 일제 시기에, 짧은 세월도 아니고 35년을 당했는데, 양반이 세를 펼 수 있는 지위, 경제적 위치 같은 걸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양반들이 몰락 일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놈에 자식 무슨 신분
▲ 조선 후기에 지독한 신분제 사회이던 한국은 그 후 놀랍도록 빨리 평준화를 이뤘다. 평준화는 한국 사회가 활기차고 역동적인 사회로 가게 한 기본적인 힘이었다. (이미지는 조선 후기 노비 추쇄를 소재로 한 KBS 드라마 <추노>.) ⓒKBS


해방, 농지 개혁, 전쟁과 지주의 몰락

프레시안 : 일제 강점기에 일본과 밀착해 행세깨나 한 한국인들도 있지 않았나.

서중석 : 한국인 가운데 일제에 붙어서 지위가 높았다든가, 대지주로서 상당한 행세를 했다든가 하는 자들이 그럼 그렇게 큰소리만 치고 살 수 있었느냐. 관료든 군인이든 경찰이든 법조계에 있던 자들이건 또 김연수, 박흥식 같은 기업가들이건, 이런 자들은 친일파로 지목받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보니까 그자들도 사실은 사회적 영향력, 즉 일반 한국인들한테 영향력을 갖기가 어려웠다.

이런 식이었던 것에 더해, 해방은 정치적 혁명, 시민 혁명이고 문화적 혁명이자 경제적 혁명이고 사회적 혁명이라고 하지 않았나. 우리 사회가 폭발적으로 변했다. 예컨대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만들어져 300만 명이 거기에 들어가 있었다고 돼 있지 않나. 300만 명이라는 건 과장된 것으로 나는 보고 있지만, 하여튼 수많은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조직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3.7제(소출의 3할만 지주에게 소작료로 주는 제도) 같은 것도 시행되고, 그러다 보니까 미군이 한국에 와서도 3.1제(소출의 3분의 1만 지주에게 주는 제도)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지주들은 두 가지 때문에 그다지 힘을 못 썼다. 하나는 이런 사회적 혁명, 혁명적 변화였다. 농민들이 큰소리치는 세상이 된 것 아닌가. 또 하나는 옛날처럼 소작료 같은 걸 많이 받아먹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일제 때도 1930년대 이후 지주의 힘은 약화된다고 보고 있지 않나. 농촌 진흥 운동에서 일제는 할 수 없이 지주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9년 발생한 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대 들어 조선 농촌은 급격히 무너져갔다. 많은 자작농과 소작농이 몰락했고, 소작 쟁의도 늘었으며,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적색 농민조합 운동을 전개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농촌 진흥 운동을 실시했다. 농촌 진흥 운동은 농촌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편집자') 또 일제 말에는 공출 등 여러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이 지주 세력이라는 것이 해방 직후에는 힘을 못 썼다. 그러면서 북한에서 토지 개혁이 일어나버리는 것이고 남쪽에서도 토지 개혁 외침이 계속해서 강하게 나왔다. 그 때문에 한민당조차 토지 개혁을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1948년 5.10선거가 치러질 때 너 나 할 것 없이 후보자들이 토지 개혁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러니 지주들이 겁나서 토지 방매를 많이 했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러고는 농지 개혁이 이뤄진다.

거기다가 전쟁이 나버렸다. 전쟁이 나니까, 단순화해서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머슴을 하던 사람들, 옛날에 소작인을 하던 사람들, 빈민들 이런 사람들이 큰소리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북한군의 점령 기간이) 불과 3개월밖에 안 됐다고 하더라도 지주가 망해가는 사회에서는 지주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 것 같더라. 이렇게 전쟁 때문에도, 그전에 마을이나 지역에서 큰소리치던 세력들이 아주 약화된다. 그리고 전쟁 말기쯤부터 군대에 많이 간다. 군인 숫자가 그때 막 늘어나서 60만 명이 되고 한때는 72만 명까지 가고 그랬는데, 이 군대에도 대개 농민들 자식이 많이 갔다. 힘없는 사람들이 많이 갈 수밖에 없지 않았나. 그런데 군대에 가면 새로운 것도 많이 배웠다. 그리고 또 하나, 군대는 계급 순이었다. 병장이 위에서 '줄빠따'를 치면 졸병들은 맞기만 하면서 '내가 빨리 일등병 되고 상병 올라가야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군대 자체는 (계급에 따른 구분을 기본으로 하지만) 어떤 면에서 굉장히 평준화된 사회였다. 이건 다른 나라 군대하고는 또 다른 면이었다. 다른 나라 군대는 꼭 그렇게 돼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리 군대에는 '빠따' 같은 게 있다 보니까 그런 식으로 또 군대가 평준화돼버렸다.

어쨌건 이런 방대한 군대가 있었고 전쟁 중에 피난살이 같은 것도 많이 해야 했는데, 이런 것들이 한국 사회를 놀라울 정도로 평준화 사회로 가게끔 만들었다. 사실 해방 직후에 다들 가난했고 극소수 친일파와 모리배를 빼놓고는 못살았다는 점에서도 한국 사회는 많이 평준화돼 있었다. 이런 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은 힘, 평준화…하향 평준화에선 벗어나야

프레시안 : 경제 발전 과정에서 평준화가 중요했다고 앞에서 얘기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나.

서중석 : 평준화는 한국 사회가 활기차고 역동적인 사회로 가게 한 기본적인 힘이었다. 가장 중요한 기반이고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모두 출발점에서 같이 뛰는 것이었다. 친일파를 비롯한 기득권 세력이라는 게 있긴 했지만 그 수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큰 방해물만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가 잘만 하면 저자들을 앞설 수 있다. 저자들을 누르면 된다', 이런 식의 사고를 많은 한국인이 가질 수가 있었다. 이게 좋은 말로 하면 역동적인 사회로 갈 수 있는 그런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이 1950년대 한국 사회를 눈에 보이지 않게 변화시키고 있었고,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를 만들어낸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하향 평준화가 이뤄졌다. 난 이 점을 강조하는데, 말하자면 정말 모든 인류가 꿈꿔온 평등한 사회로 가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었다. 그 때문에도 평등이라는 말을 쓰기가 좀 그런데, 그렇게 된 데에는 친일파가 해방 이후 득세한 것이 작용했다. 친일파는 일제 때 욕을 얻어먹고 존경을 못 받았지만, 해방 후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모든 부문에서 지도층 행세를 하고 기득권 세력으로서 힘이 좋았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는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나쁜 놈들인데 뭐하고 결탁해 저렇게 힘이 세진 것이다', 이런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인격적으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자들이 못 된다.

그다음에 1960∼1970년대를 보면 물신숭배 분위기, 그러니까 성장 만능주의, 성장 제일주의라는 게 이른바 조국 근대화 논리와 얽혀 한국 사회를 풍미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도 배제된다. 적나라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정의, 성실, 근면, 정직 같은 것이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가 1950년대에도 못 됐고 1960년대에도 못 됐고 1970년대에도 못 된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 전체의 질이 많이 떨어진 것이다. 그런 속에서 평준화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건 평등하고는 차이가 나는 것이라고 난 본다.

거기다가 권력의 최고 상층부를 봐라.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자들, 부정 선거로 권력을 잡은 자들, 걸핏하면 군을 풀어놓고 또 권력을 잡은 자들 아닌가. 이런 자들이 존경받을 수 있느냐, 이 말이다. 인격적인 존경을 못 받는다. 나중에 가서 (박정희) 신드롬 같은 것이 생기고 하는 것이지, 그 시기에는 그렇게 존경받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재벌들, 이른바 경제인들에 대해서도 1960∼1970년대에 한국인 대다수는 '정상적인 기업 논리에 의해 경제적으로 머리를 잘 써서 저렇게 된 사람들이 아니다. 권력과 결탁해 저렇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많이 생각했다. 물론 1980년대에도 그런 현상이 많았다.

프레시안 : 평준화 이야기가 나오면,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장애물로만 여기는 이들이 일부 있다. 역사적으로 평준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고려하면 이는 적절치 않은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 평등과 정의를 말하면, 시쳇말로 그것이 나라를 망칠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는 이들도 있다. 시장의 자유만 내세우는 무분별한 시장주의가 판을 치고 '종북 칼춤'에 사회가 뒷걸음질 치면서 그런 태도가 더 도드라진다. 그러나 역사를 찬찬히 되짚으면 그것이 억지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요소 중 하나인 농지 개혁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극심한 격차를 지양하고 평등을 지향한 농지 개혁을 제대로 실시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차이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하향 평준화의 문제점은 극복해야겠지만, 그것이 평등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어쨌든 하향 평준화를 비롯해 앞에서 지적한 문제들 때문에 한국은 제대로 된 지도층을 찾아보기 어려운 사회가 됐다.

서중석 :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존경할 수 있는 층이라고 할까, 이게 별로 없게 된 것이다. 모두 '무슨 무슨 놈'이라고 하는 참 못된 말들을 누구나 입에 담고 다니는 사회로 한국이 가버린 것이다. 이건 한국 사회에 치명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경쟁 사회에서는 이것이 한국 사회를 역동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굉장한 힘이 될 수 있지만, 그걸 한 단계 넘어서서 그야말로 우리가 선진 사회로 가려면 인간에 대한 존중, 인간의 가치관에 대한 바른 평가 같은 것들이 돼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건 지식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회에서는 깊은 지식, 전문 지식이 별로 대우를 못 받는다. 껄렁껄렁하면서도 겉으로 잘 보이는 사람들이 더 출세하기 쉽다. 그러니까 사회에 깊은 지식이 잘 축적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기술 측면 등에서 타국에 종속되는 현상을 보여줬다. 그래서 요새 유행하는 말로 우리 사회가 업그레이드되려면 천박한 하향 평준화 현상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성장 제일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든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