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루시안 왜그랬어 왜 네가

레티시아 파로트는 수업을 끝내고, 고등학교 친구들과 담소하면서 교문을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싹싹하고 쾌활한 그에게는 친구가 많다.

오늘은 마지막 수업이 단체구기(球技)였기에, 고교생인 그들은 모두 맹렬하게 배고파 하고 있었다. 도저히 저녁식사까지는 기다릴 수 없다. 어딘가에 들리자고 상담하고 있었던 때, 레티시아가 갑자기 엉뚱한 목소리를 내었다.

?!”

친구들이 놀라서 일제히 그를 본다.

무슨 일인가 물어 보기 전에 레티시아는 당황한 듯이 말했던 것이다.

- 그게, 미안. 용건이 생각났어.”

뭐야, 수상한데?”

데이트냐?”

아아, 그런 거. 미안.”

어이없어하는 친구들을 슬쩍 바라보고, 레티시아는 웃으며 손을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그 장소를 벗어났던 것이다.

한편, 반츠아 파로트는 도서관에 있었다.

명문 프라이치히 교에는 시의 도서관에도 뒤지지 않는 전문적인 장서를 자랑하는 도서관이 있어, 우수한 생도들은 자주 여기를 이용하고 있다.

반츠아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한눈도 팔지 않고 전문서를 열람하면서 연구과제에 힘쓰고 있었지만, 그런 그가 드물게 묘한 소리를 내었다.

!”

재채기를 억지로 삼킨 것 같은 소리였다.

옆에서 보기에는 반츠아가 갑자기 기괴한 소리를 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가 이런 추태를 보이는 것은 극히 드물다.

도서관 이용은 조용히── 라는 것이 상식이므로 주위의 생도들이 가벼운 놀라움과, 나무라는 눈빛을 보내온다.

반츠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짐을 정리하여 일어서더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서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지?”

레티시아도 걸어가면서 작게 불평을 하고 있다.

“……시간과 장소를 생각하라고.”

두 사람 모두,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란 것이다.

잠깐 손을 빌려줘.’

바로 귓가에서 말하는 것 같이 가까웠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밖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이런 짓을 할만한 사람으로 짐작 가는 것은 한 사람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강렬한 접촉은 드물다.

그렇기에 두 사람 모두,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불평을 꺼낸 것이다.

생각만으로 대답하는 습관이 없기 때문이지만, 옆에서 보면 중얼중얼 말하고 있는 기분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서둘러 사람들에게서 떨어진 것이다.

그것을 예측한 것처럼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해 왔다.

감시장치가 없는 차단된 공간으로 가.’

?”

무슨 일이지?”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지만, 두 사람 다 재빨리 지시에 따랐다. 이 목소리를 무시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다. 꾸물거리고 있으면 상당히 곤란한 일이 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반츠아는 인접한 영상도서관으로 향했다.

마침 진저의 영화 신작이 나온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낯익은 사서가 놀려댔다.

슬슬 올 때라고 생각해서 킵(keep) 해 뒀다구.”

농담일 테지만, 반츠아는 조금도 웃지 않고 지정된 감상용 부스로 향했다.

감상용 부스는 완전히 차단된 개인 공간이고, 감시장치도 없다. 이상적인 장소였다.

한편, 곤란해진 것은 야외를 걷고 있었던 레티시아다.

차단된 공간이라고 말해도 말이지…….”

기숙사의 자기 방이 가장 좋을 테지만, 엑서스 기숙사까지 돌아갈 시간은 없다고 레티시아는 직감하고 있었다.

드물게 초조해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마침 좋은 것을 발견하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이번에 비명을 지른 것은 대형부부의 차례였다.

!”

?!”

다이애나도였다.

잠ㄲ── 뭐죠?”

무리도 아니다. 돌연히 자신들의 눈 앞에── 즉 <팔라스 아테나>의 거실에, 두 사람의 인간이 출현했다가── 그리고 사라진 것이다.

반츠아와 레티시아가 이쪽을 눈치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두 사람 다 굉장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은 그저 한 순간이었다.

서로 무언가 말하기 전에, 두 사람의 모습은 신기루와 같이 소실하여 버렸던 것이다.

켈리는 저도 모르게 루를 추궁했다.

설마 지금 그 두 사람을── 브라시아로 보낸 건가?”

그래요. 그들이라면 적임이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사해 주는데 딱 좋아요.”

재스민이 놀라서 말했다.

하지만, 브라시아는 너도 볼 수 없었지 않나? 어떻게 보낸 거지?”

장소라면 호랑이 씨가 알고 있어요. 저택의 구석구석까지 말이죠.”

켈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불평했다.

“……너무 내 배를 이런 <게이트>로 쓰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천사.”

루는 침묵하고 있다.

그 눈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몸은 여기에 있어도 마음은 명백히 어딘가로 날아가 있다.

하지만, 3만이나 되는 인간과 동시에 접촉할 수 있는 루가, 켈리의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의도적으로 대답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재스민이 켈리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살짝 속삭였다.

“……이런 엄청난 규정 파괴를 할 정도면, 강제로 벽을 때려부수는 편이 훨씬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뿐인가, 해적?”

아니, 나도 동감이야.”

갑작스런 주위의 변화에 레티시아는 경악했다.

고작 몇 분전까지 자신의 머리 위에는 오후의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는데, 지금은 새까맸다.

시각은 명백히 밤이다.

그리고 자신은 야외에 서있다.

거기까지 자각하고, 레티시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기온은 낮지 않은데 오한이 든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불쾌감이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것이, 발 밑에서 꿈틀거리며 기어 올라오는 듯하여 레티시아는 작게 혀를 찼다.

몸 안의 경계신호가 즉시 이 장소에서 떨어지라고 경고하고 있지만, 그럴 수는 없다.

하필이면 보내도 이런 기분 나쁜 곳으로 멋대로 사람을 날려 버리지 말라구…….’

맹렬히 원망의 말을 되뇌면서, 레티시아는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밝은 곳에서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이동한 탓에 아무리 레티시아라도 갑자기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어둠이야말로 유력한 실마리였다.

밤인데 인공적인 불이 전혀 없다.

연방대학혹성(티라 본)의 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올려다보면 밤하늘을 빽빽이 메우고 있는 무수한 별이 빛나고 있다.

모르는 사이에 꽤나 밝은 밤에 익숙해져 있었던 듯 하여, 이런 쏟아질 듯한 별 하늘은 오래간만에 보는 기분이 들었다.

또 하나, 중요한 실마리가 냄새였다.

이것은 처음에 느낀 불쾌감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축축하게 습기 찬 땅의 냄새, 숨막히는 녹음의 냄새, 독특한 동물의 냄새도 난다.

어느 것이나 다, 레티시아가 잘 알고 있는 냄새였지만,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땅이나 녹음에는 청정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이곳의 냄새는 명백히 후자였다. 그리움보다 불쾌감을 강하게 느낀다. 추잡하다고 해도 좋다.

자기자신에게 의식을 돌려 보니, 아까까지와는 옷이 다르다. 그리움조차 느껴지는 검은 옷을 몸에 걸치고, 허리에는 소도(小刀)가 있다. 여러 가지 장비의 감촉도 있다.

자신의 모습도 변해 있다는 것을 싫든 좋든 깨닫고, 레티시아는 쓴웃음 지었다.

지금의 자신은 열일곱 살의 고등학생이 아니다.

거울을 보면, 몸집은 작아도 엄연한 이십 대의 남자 얼굴이 있을 것이다.

잠깐 가만히 서있으니,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와서 주위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있는 것은 저택의 뒤뜰인 것 같다.

오른쪽은 마구간이다. 말들의 기척이 난다.

왼쪽에도 오두막이 있지만, 이쪽에는 생물이 있는 낌새가 없다. 아마도 창고 같은 것이리라.

그 창고의 그늘에서,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레티시아는 감지했다.

하인이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었나 생각했지만, 다르다. 이 어둠 속을 걷고 있는데 불을 들고 있지 않다.

게다가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다.

기척을 없애고 걷는 훈련을 받은 사람의 발이다.

반사적으로 자세를 취한 레티시아였지만, 상대의 반응도 같을 정도로 빨랐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서로의 얼굴을 인식하자, 레티시아는 어안이 벙벙하여 말했던 것이다.

너였던 거냐…….”

그 감상은 반츠아도 완전히 같았던지, 이십 대로 보이는 그는 신음하듯이 저주의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영상도서관에서 시청 중이었다고.”

그나마 낫잖냐. 난 변기 위라구.”

“……변기?”

그래. 너도 들었겠지? 감시장치가 없는 차단된 공간으로 가라고.”

레티시아는 커다란 공원 앞을 지나가다가, 마침 잘 됐다고 공중 화장실로 향했던 것이다.

개별 화장실로 들어가 앉은 순간, 이 꼴이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레티시아는 맹렬히 불평했다.

그 녀석, 치명적으로 말이 부족하지? 이쪽에 뭘 시키고 싶은지 확실히 말하라고.”

동감이지만, 그 불평은 아무리 해도 소용없어. 그것과 제대로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것은 왕비 정도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자신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 보내, 원래의 세계로 보낸 것에는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실마리는 눈앞에 있다. 훌륭한 저택은 신분이 높은 사람의 주거지라고 한 눈에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그림자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은 눈앞의 건물을 공략하기 위해 들어갈 수 있을만한 곳을 찾아서 건물의 모퉁이를 도니, 위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2층의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이다.

마침 잘 됐다고 가까이 다가간 두 사람의 발이 멈췄다.

의외인 것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두워서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거대한 묘석이었다.

대대로 이어지는 저택의 일각에 묘지가 있는 것은 드물지 않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그러면 어째서 의외라고 생각했냐면, 우선은 묘석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쪽에서는 고귀한 신분의 사람은 부모형제라도 다른 묘를 세우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묘 차체는 좀더 아담하게 하고 있다. 아무리 지면에 여유가 있다고 해도, 커다란 묘를 몇 개나 세웠다가는 끝이 없다.

하지만, 이 묘는 마치 국왕의 묘처럼 크다.

그런데 다른 묘가 보이지 않는다.

저택의 주인의 묘라면 가까이에 친족의 묘가 있을 텐데, 이것 하나만이 호화로운 철책에 둘러싸여 쓸쓸히 뒤뜰에 세워져 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도 보였지만, 그런 것 치고는 묘석도 부지도 너무 훌륭하다.

묘라는 것은 누가 참배해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이건 사람 눈에 띄게 하고 싶은 건지 숨겨 두고 싶은 건지, 뒤죽박죽이다.

묘 한두 개로 놀랄 그들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위화감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두 사람 다 묘는 무시하고 저택의 벽에 달라 붙었다.

옛날에 익힌 솜씨로 손쉽게 벽을 올라, 사람의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2층의 창에서 저택 안으로 침입했다.

복도에는 촛불이 켜져 있다.

걷기에는 불편하지 않지만, 레티시아는 왜인지 발을 내딛는 것을 주저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반츠아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기척에는 민감하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긴 시간 동안 기른 육감이 끊임없이 이상을 호소하며, 여기에서 떨어지는 편이 좋다고 경고하고 있다.

문제는 왜 그런 것을 느끼는가 이다.

산이나 강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때때로 이런 장소가 있다.

가까이 가면 오한, 현기증 등을 느끼고, 숨 쉬기가 어려워 지고 고열이 난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일도 있다.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다.

원인은 주로 땅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독한 물질이 지표에 고여있기 때문이다. 그 고장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산의 독기에 당했다라고 표현한다.

이 저택은 왜인지, 그런 심신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독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것이다.

내키진 않지만 지독히 기분 나쁜 두근거림을 참으며 저택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니, 저택 내부를 탐색하는 선객과 마주쳤다.

두 사람과 완전히 똑같은 검은 옷을 걸치고, 역시 기척을 감추고 걷는 사람이다. 특징적인 은발은 눈에 띄지 않도록 검은 천으로 숨기고 있다.

거의 동시에 상대방도 두 사람을 눈치 채고 눈을 부릅떴다.

────!!”

셰라도 프로로서의 오기가 있다.

큰 소리를 내는 것은 겨우 참았지만, 노기로 가득 찬 말투로 두 사람을 힐문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심코 말했지만, 스스로 우문이라고 셰라는 생각했다. 지금의 두 사람은 처음에 만났을 때의 이십 대의 모습이고, 자신과 같은 검은 옷을 걸치고 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다.

역시나, 레티시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가 뭘 하고 있는 지는 이쪽이 묻고 싶다. 우리들에게 한 마디의 양해도 없었다고.”

애초에 여기는 어디지?”

세 사람은 재빨리 그늘로 몸을 숨겼다. 이 세계의 밤과 건물은 이럴 때에는 실로 고맙다.

귀찮은 감시장치도 없다.

두 사람의 질문에 셰라는 목소리를 낮춰서 대답했다.

여기는 브라시아의 저택이다. 지금은 오론 왕의 거점이 되어 있어.”

브라시아?”

아직 기억하고 있는 머릿속의 지도를 검색해 보고, 반츠아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레티시아도 의심쩍은 듯이 말했다.

델피니아의 북쪽의 영지지? 그게 왜 오론의 거점이 되어 있는 거냐.”

보통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셰라는 지금까지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쪽에서는 십 년이 지나 있는 것, 오론 왕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델피니아로 침공을 개시한 것, 앞으로 한 발짝일 때까지 월을 몰아넣었지만, 그것을 리가 뒤집어 엎은 것.

특히 리가 왕비의 모습으로 이곳에 돌아와 있다는 것을 듣고, 레티시아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을려나아. 꽤나 규정을 어겼는데.”

동감이지만……. 왕비의 파트너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다.”

반츠아는 이미 자신들을 끌어들인 것을 화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럴 때가 아닌 것이 불길한 무언가가── 불쾌감이 물밀듯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불쾌감에 관해서 레티시아는 솔직히 셰라에게 물었다.

, 이 저택,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냐?”

네가 그런 말을 하니 끝장이군.”

내뱉은 셰라였지만, 표정은 긴장되어 있다.

내가 이 저택에 잠입한 것도, 이유는 불명이지만……. 브라시아가 원인이 아니냐고 그 사람과 폐하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말해. 목적어는?”

셰라는 험악한 얼굴이 되었다. 레티시아에 대해서 화를 낸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군대의 상태가 이상해. 브라시아로 다가가면 갈수록……. 명백하게 사기가 올라가지 않게 되었다.”

왕비 씨가 있는데도?”

그래. 모두 기력은 충분한데── 그것과는 반대로……. 어째서인지 상태가 나쁘다. 명확히 컨디션 불량을 호소하는 병사도 나오기 시작했어.”

레티시아도 반츠아도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요술인가?”

그걸 확인하러 온 거야.”

건너편의 세계에서는 비과학적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되어 버릴 일이지만, 이쪽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오론 왕은 과거에 요술사를 이용해, 리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던 경위가 있다.

레티시아와 반츠아는 얼굴을 맞대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걸 우리더러 탐색하라고?”

왕비 이상으로 사람 부리는 게 거칠군.”

불평을 하면서도 두 사람 다 이미 올라탄 배에서 내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등을 돌려도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셰라도 이 두 사람과의 해후는 짜증스러움과 동시에── 결코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마음 든든하기도 했다.

화톳불에 드러난 이 저택을 본 순간,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찌푸렸을 정도인 것이다.

그 때의 인상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저택의 주위에 파라스트 군이 몇 겹이나 포진하고 있지만, 그것이 무서운 것은 아니다.

살벌한 공기도 피 냄새도 전장에는 으레 따라다니는 것이고, 셰라에게 있어서는 특히 드문 것은 아니다. 익숙한 것이기조차 한 것인데, 어째서 이렇게나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건지 혀를 차고 싶은 기분이었다. 스스로를 질책하면서 필사적으로 어둠 속을 나아가, 경비인 병사들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진영을 돌파하여, 겨우 저택으로의 잠입을 성공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몸이 무겁다.

저택의 구조는 발로에게 자세히 들었다.

오론 왕이 사용한다고 생각되는 안쪽 거실이나 주침실의 위치도 머릿속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쪽으로 발을 향하려고 하면 육감이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레티시아도 반츠아도 같은 상태였지만, 어쩔 수 없다. 세 사람은 거의 억지로 안쪽을 향했다.

요염한 음악이 들려 왔다.

어쩐지 고혹적인 향기도 풍기고 있다.

이런 향과 음악의 발생원은 바로 그 안쪽 거실이었다.

거실의 입구는 크게 뻥 뚫려 있을 뿐이고 문이 없다. 세 사람이 살짝 훔쳐 보니, 거기에서는 주연이 한창이었다.

파라스트의 주요한 장수들이 모여 있다.

꾸밈 없고 강건한 탄가와 달리, 파라스트는 국가 특색이 향락적이다. 전투가 한창일 때라고 하는데도 맛있는 술과 음식들을 늘어놓고 향을 피우고, 무장들도 편안한 모습으로 담소하며 술을 따르는 여자들을 끌어안고 있다.

주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한층 호사로운 의상으로 몸을 감싼 오십 대쯤의 사내였다.

틀림없이 이게 오론일 것이다.

약간 통통한 체구로 혈색이 좋은 얼굴을 하고,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오론이 곁에서 시중들게 하고 있는 것은 남방에서 데려온 여자들인 듯, 대담하게 피부를 노출한 의상을 걸치고, 또렷하고 짙은 화장을 하고 있다.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들이었다. 피처럼 붉게 물들인 입술에 음란한 교태를 떠올리며, 나긋나긋한 동작으로 오론에게 아양을 부리며 기대고 있다.

전투가 한창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문란한 국왕의 모습에, 셰라와 반츠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두드러졌던 것은 레티시아의 반응이다.

그 레티시아가 오론의 모습을 언뜻 보자마자, 뒤로 펄쩍 뛰어 물러섰던 것이다.

셰라는 놀랐다. 반츠아도다.

두 사람 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레티시아는 온몸의 털을 세운 고양이와 같이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몸짓으로 물러날 것을 재촉했다.

두 사람 다 기가 막혀 하면서도 레티시아를 따랐다.

이 남자가 이렇게 새파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셰라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된 반츠아도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있다.

레티시아는 거실에서 떨어지자, 작은 목소리로 셰라에게 물었다.

, 왕비 씨의 진영에서 온 거지?”

그래.”

안내해.”

셰라는 한 순간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레티시아의 표정을 보고 하고 싶은 불평을 삼켰다.

소리도 없이 저택을 빠져 나온 그들은, 셰라의 안내로 오만의 군대 사이를 누비며 나아갔다.

브라시아의 저택은 성채가 아니다.

저택을 지키는 해자도 담벼락도 망루도 없다. 알몸인 성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방어전에 능한 파라스트 군은 저택의 주위를 몇 겹이나 되는 가시나무 울타리로 둘러싸, 즉석 담으로 삼고 있다.

셰라는 화톳불이 닿지 않는 어둠을 노려 가시나무 울타리 사이를 빠져나간 것이다.

도중에, 자연히 파라스트 군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레젠스쿨 공의 참패는 전해져 있을 텐데, 병사들 사이에는 특별히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밤이 깊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잠들어 있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델피니아산세베리아 연합군은 대략 3. 파라스트 군은 그 배에 가까운 5만의 병력이다. 올 테면 와보라는 여유로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몰랐다.

진형을 머리에 넣은 셰라는 돌아가는 길도 같은 곳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마침 횃불을 든 야경(夜警) 병사가 다가왔기 때문에, 멀리 돌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화톳불과 횃불을 피하면서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는 장소를 찾고 있자니, 강렬하고 자극적인 냄새를 느꼈다.

문자 그대로 코가 썩는 것 같은악취였다.

발생원은 가시나무 울타리 바로 안쪽에 놓여진 커다란 나무통으로, 판자로 뚜껑을 덮고 있다. 뚜껑은 벌레를 막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안은 분뇨이다. 무기로서는 대단히 유효한 것이지만, 이것은 분뇨의 냄새가 아니다.

훨씬 꺼림칙하고 불결한 것이다.

그러자 무엇을 생각했는지, 레티시아가 큰 나무통으로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정수리를 관통하는 듯한 악취가 대번에 심해졌지만, 레티시아는 상관하지 않고 큰 나무통 속을 들여다 보았다.

델피니아와 산세베리아 군은 브라시아까지 12 카티브인 거리에 육박해 있었다.

하지만, 기습을 걸든 정공법으로 공격하든 조금 너무 멀다. 우세하게 전투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가까이까지 군대를 전진시켜 두어야만 했지만, 국왕의 판단으로 굳이 이 거리에 머무른 것이다.

왕비가 진영에 가담하고 나서 3일이 지나 있었다.

병사들의 흥분과 열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코앞으로 다가온 오론과의 결전에도 기세는 충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상태가 이상하다.

싸울 의지는 충분한데, 반드시 이기겠다는 결의에도 거짓은 없는데, 어째서인지 행동에 생기가 부족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덤불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것 같이 말이다.

그것도, 대부분의 병사들은 자신이 그런 상태라고 눈치재지 못하고 있다.

국왕은 이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병력이 같다면, 기력이 충만한 병사와 기운이 빠진 병사의 어느 쪽이 이길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에 더해 파라스트 군은 이쪽의 배에 가까운 병력이다.

위기감을 느낀 국왕은 신뢰하는 장수들에게 부탁하여, 병사들 사이에 무언가 불만은 없는지 살피도록 했다.

병사들의 기세가 올라가지 않는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지휘관에 대한 불만이다.

다음으로, 처음부터 패배할 것이 보이고 있는 경우이다.

하지만, 현세의 전쟁의 여신을 맞이하여 기적의 승리에 들끓고 있는 델피니아산세베리아 연합군은 어느 쪽도 들어맞지 않는다.

단 하나, 브라시아가 가까워 짐에 따라, 위화감이 점점 커졌다.

무엇 때문인지, 컨디션 불량을 호소하는 병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국왕은 진군 정지를 고하고 왕비는 셰라에게 은밀히 브라시아의 저택을 탐색하고 오도록 명해, 지금은 국왕의 천막에서 그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항상 국왕의 곁을 떨어지지 않는 시종들도 눈치 있게 자리를 비우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 두 사람이라면, 부부의 단란함과는 거리가 멀다.

브라시아에 나쁜 병이 유행하고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국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왕비도 근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 거리까지 영향이 나온다는 건 이상해. 우선 그렇다면 브라시아에 포진하고 있는 파라스트 군은 어떻게 돼? 가장 먼저 쓰러졌을 거 아냐.”

확실히.”

국왕은 말할 것도 없이, 왕비의 표정도 굳어 있다.

적과 조우하기 전에 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것과 대치하는 꼴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보고도 있다.

왕비의 귀환을 알리는 파발마가 온 나라를 달린 결과, 타우는 단번에 힘을 되찾아 서쪽도 동쪽도 나란히 공세(攻勢)로 바뀌었다고 한다. 페노아의 질은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 가까운 시일 안에 그쪽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 왔다.

페노아의 두목이 참전해 왔을 때 답보 상태여서는 말이 안 된다. 기세는 완전히 이쪽에 있는 만큼 답답함이 심해진다.

왕비가 일어섰다.

밤 순찰을 돌고 올게.”

아아, 부탁해. 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병사들은 힘을 얻을 거다.”

둘이서 가면 훨씬 더 효과적이지만, 낮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밤이다. 국왕은 예측할 수 없는 사태에 대비하여 남았다.

왕비가 천막을 나서, 군대를 돌아보려고 했을 때이다.

어둠 속에서, 몰래 말을 걸어온 목소리가 있었다.

…….”

왕비도 총명한 사람이다. 발을 멈추거나 하지 않았다.

왜 바로 보고하러 오지 않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뒤돌아보거나 말을 걸거나 하지 않고 되돌아갔지만, 국왕의 천막은 아니다.

그 바로 옆에 설치된 자신용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왕비는 거의 국왕의 천막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보초도 서있지 않다. 내부도 암흑이었다.

어둠에 섞여 한 발 먼저 들어왔던 셰라가 촛불을 켜자, 예상 외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기에 왕비는 놀랐다.

왜 너희들까지?”

불평은 당신 파트너에게 말해라.”

반츠아는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왕비의 모습을 보고 남몰래 안도한 것도 분명하다.

그 저택에 날려졌을 때부터 달라붙어 있었던 불길한 느낌이, 이 사람의 옆에 있으면 깨끗이 사라진다.

레티시아도 마찬가지로, 풀어진 모습으로 말했다.

있잖아, 왕비 씨, 술 없어?”

셰라는 왕비의 시종이기도 하다. 싫어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두 사람에게 술잔을 대접해 주었다.

그런 셰라에게는 왕비가 직접 술을 권했다.

얼굴색이 나빠. 무슨 일이 있었지?”

셰라와 반츠아는 말 없이 레티시아를 보았다.

자신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었지만, 레티시아도 드물게 말을 고르는 데에 주저하고 있었다.

왕비 씨. 이 싸움, 조금 불리하다구.”

그 근거는?”

오론이야. 아까 보고 왔어.”

레티시아는 술잔을 들이키고, 그답지 않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전에 오론과 만난 적이 있어. 당신의 암살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러 갔을 때였는데, 그 때는 아직── 인간이었어.”

뭐라고?”

그 녀석, 보통이 아니라고. 당신과는 다른 의미로──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어.”

예상 외의 말에 리는 녹색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 눈빛을 받은 셰라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전의 오론 왕을 모릅니다. 판단할 방법이 없어요. 당신과 함께 아비용 성에 잠입했을 때에도 가까이에서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의 오론 왕을 보고,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합니다.”

나도다.”

드물게, 반츠아가 스스로 입을 열었다.

요술이나 주술은 내 관할 밖이지만, 이쪽에서는 예전부터 때때로 있는 일이다. 정상적이었던 사람이 무언가 나쁜 것에 영혼을 팔고, 무언가에 홀려서 이상하게 되는.”

오론이 그렇다는 건가?”

모르겠다. 판정할 수 없어. 나도 이전의 오론을 본 적이 없으니까.”

의미 심장하게 말을 끊은 반츠아의 뒤를 이어, 레티시아가 무척 진지하게 말했다.

보자마자 생각했어. ‘위험해!’라고 말이야. 나도 이래봬도 스스로의 직감에는 꽤 자신을 가지고 있어. 실력에는 훨씬 더 자신이 있지. 죽일 수 있는 녀석과 죽일 수 없는 녀석의 구별 정도는 간다고.”

레티시아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일이었다.

반츠아도 셰라도 그렇지만, 레티시아 이상으로 그 기량이 뛰어난 사람은 없다고 두 사람 다 인정하고 있다.

그런 내가 벨 수 없다고 느낀 거다. 실력이 모자라서 죽일 수 없는 게 아니라고. 보통의 검으로는 안 되는 거야. 이 녀석은 어디까지나 내 감이니 확증은 없지만…….”

레티시아는 주저하는 기색으로 말하며, 점점 더 그답지 않게, 조심스레 고했던 것이다.

그 녀석, 당신 검이 아니면 벨 수 없다고 생각해.”

리는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사실이라면 확실히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리가 알고 있는 다른 사실이 있다.

내가 봤을 때의 오론은 틀림없이 보통 사람이었다고. 그게……. 네가 벨 수 없다?”

벨 수 없어.”

단언한 레티시아였다.

나는 이 세계에 살아 있는 사람만이 전문이야.”

무서운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지금의 오론은 그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고 그는 말한 것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답답한 공기가 그 장소를 채웠다.

레티시아가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불평했다.

이런 건 원래 당신 파트너의 영역일 거 아냐. 왜 스스로 오지 않는 거야?”

반츠아도 동의했다.

우리들에게 탐색시키는 것보다 빠를 텐데.”

그건 셰라도 신경 쓰이고 있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리를 살피니, 리에게는 무언가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녹색 눈동자를 빛내면서 말했다.

루퍼가 오지 않는 건……. 너 한 사람의 인상으로는 아마도, 부족한 거겠지.”

약간 의미가 통하지 않는 대답이었으나, 레티시아는 그 점은 건드리지 않고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 나도 그런 건 처음 봤다고.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되어 버린 직접적인 원인은, 역시 당신이랑 임금님에 대한 상도(常道)를 벗어난 원망인 거 아냐? 앞으로 한 발짝이면 대화삼국의 패자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그런데, 당신들 때문에 모든 걸 다 잡쳐 버렸어. 이 쪽에서 십 년이 지났다면 더욱 더, 그 사이에 정도를 벗어난 원망과 미움을 썩은 내가 날 정도로 실컷 숙성시켰겠지.”

리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원망인가.”

아마도 말이지.”

“……그것 만으로 사람이 이매망량(魑魅魍魎)으로 둔갑하는 건가.”

반츠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기에 무언가의 술법이 결부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저 원망이라면 보통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짜증스럽게 혀를 찬 왕비였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번거롭다고 통감했지만, 정말로 자신의 검이 아니면 벨 수 없는지 어떤지는 실제로 보고 확인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썩은 내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셰라가 굳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 파라스트 군이 독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반츠아도 아름다운 얼굴을 혐오로 찡그리고 있다.

그런 추잡한 수를 사용하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오론이 상도를 벗어나 있다는 충분한 증거다.”

그는 가시나무 울타리 안쪽에서 본 큰 나무통의 이야기를 했다.

보통은 그 내용물은 분뇨다. 더러운 수단이기는 하지만, 부대가 모이면 대량으로 나오는 것이고, 옛날부터 유효한 무기로 사용되고 있지. 허나…….”

통의 내용물은── 썩은 고기였어. 분뇨보다 심해. 뚜껑을 덮지 않았으면 바로 파리가 꼬였을 걸.”

그건 충분히 독입니다. 화살촉이나 창 끝에 묻혀서 던지면, 명중했을 때의 치사율은 현격하게 뛰어 오를 겁니다.”

──그거, 무슨 고기라고 생각해?”

리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이 세 사람으로도 입에 담는 것이 꺼려지는 고기라면── 답은 하나 밖에 없다.

레티시아가 기분 나쁜 얼굴로 계속했다.

적당히 잘라서 물을 담아서, 일부러 썩게 하고 있어. 그런 큰 나무통이 가는 곳마다 있었다구.”

“……내용물은 어디에서 가져 온 거지?”

레티시아는 말 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동작이었지만, 그것은 그의 전문분야이기도 했다.

보통은 병사들의 시체겠지만, 군대가 아닌 것도 꽤 섞여 있었어.”

확실한가?”

그래. 여자 뼈가 있었거든. 그것도 꽤 많은 수가.”

아무리 리라 해도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건 의학생으로서의 견해냐?”

레티시아는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왕비 씨. 너무 나를 얕보지 말아 줬음 좋겠는데. 남자의 뼈인지 여자의 뼈인지의 구별 정도는 이쪽에 있을 때부터 틀리지 않았어.”

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네 역량을 의심한 적은 없어. 다만, 이쪽에서는 여자의 유체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무리 전쟁이라도……. 오히려 전쟁이기 때문에 남자들에게는 꽤나 저항이 있었을 거라고.”

확실히. 보통 남자라면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 명백하게 상도에서 한 발짝 벗어나 버렸어.”

반츠아도 깊이 생각하며 말했다.

파라스트라는 나라는 내가 아는 한, 나라의 특색이 어느 쪽인가 하면 품위가 있다오론은 물론 파라스트 인인 병사들도, 그런 무참한 독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지금의 그들은 그 독의 바로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코를 골고 있더군.”

셰라가 몸서리쳤다.

그 신경을 나는 믿을 수가 없어. 그런 탁한 공기 속에서 왜 태연한 거지?”

오론 녀석의 독기에 당해버린 거 아냐?”

왕비가 말했다.

레티. 그 병사들은 어떻지? 분명히 인간이었나?”

예상외의 질문을 듣고 레티시아는 생각에 잠겼다.

“……어떠려나. 솔직히 그렇게까지 주의해서 보지 않았어. 그 섬뜩한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에게서 한 시라도 빨리 떨어지고 싶었다고.”

이 남자가 그렇게까지 경계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상하다.

──알았다. 뒷일은 내 일이로군.”

조용한 결의를 불태우는 왕비에게 반츠아가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왕비로서, 이대로 여기에 남는 건가.”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웃으며 부정한 리였다.

나는 냉큼 오론을 정리하고 건너편으로 돌아갈 거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너희들은?”

리와 달리, 두 사람은 이쪽 세계에서 태어났다.

이대로 남을 의사는 있는지 물은 것이지만, 두 사람 다 관심 없는 태도로 어깨를 움츠렸다.

내일은 재미있을 것 같은 실험이 있다구. 고등학교 녀석들과도 약속이 있고 말이지.”

나는 영화 시청 중이다.”

1년 전이었다면 다른 대답을 되돌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두 사람은 연방대학에서의 생활에 나름대로 정이 들어 있는 것이다. 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셰라도 이 세계에서 태어났지만, 셰라의 경우에는 자신은 리의 옆에 있는 것이라는 흔들림 없는 신념이 있다.

동요하지 않는 세 사람에게 만족하며, 리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 전에 이쪽의 내일이 문제지. ──어떻게 할 거지?”

어떻게 라니?”

아마도 이매망량과 결전을 벌이게 될 거다. ──너희들은 어느 쪽에 붙을 거냐?”

암살자 두 사람은 참으로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느 쪽이냐고 말해도 말이지이…….”

레티시아의 행동원리는 단순 명쾌했다.

재미있을 것 같은 쪽에 붙는다. 그것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판별이 어렵다.

이매망량에 가세하는 것은 논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델피니아 군에 가세해서 싸우는 것도── 뭔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선은 강 건너 불구경이란 거면 안될까?”

괜찮겠지.”

왕비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셰라에게 말했다.

치수가 맞는 병사의 옷을 두 사람 분 준비해 줘. 이 검은 옷은 낮에는 너무 눈에 띄어.”

셰라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고, 레티시아는 진정으로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왕비 씨. 사람 말 좀 들으라고.”

듣고 있어. 구경하더라도 가까이에서가 아니면 볼 만하지 않을 것 아냐. 만반의 준비를 해주지.”

씨익 웃으며 왕비는 말했다.

, 절대로 월 앞에 얼굴을 내밀지 마. 특히 레티, 너는 말이야.”

주의할게.”

심야이긴 했으나, 왕비와 국왕은 주요한 장수들을 은밀히 국왕의 천막으로 불러 모았다.

최전선에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었기에, 소집에 응하여 모두 바로 찾아왔다. 도라 장군, 발로, 이븐, 나시아스, 가렌스, 아스틴, 다섯 명의 군단장, 로자몬드와 샤미안도 있다.

오르테스는 부르지 않았다. 밤이 깊다는 점도 있어, 일국의 국왕을 이런 시각에 부르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실례일 것이라는 월의 판단이었다.

오르테스에게는 내일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기로 하고, 월은 모인 사람들에게 파라스트 군이 독화살을 쓸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고했다.

다만, 그 독의 정체에 관해서는 일부를 감췄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여성의 유체가 섞여 있다는 부분이다. 그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사체를 독화살에 사용한다고 들은 일동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신음했던 것이다.

그건── 모독입니다!”

이 무슨 비열한……!”

허나, 그만큼의 시체를 어디에서…….”

도라 장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꺼림칙한 예측밖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지만, 국왕도 같은 의문을 느낀 것 같았다.

전투가 있으면 시체 같은 건 마음껏 주울 수 있지만, 브라시아는 한 번도 전화에 휩싸인 적이 없어. 적군 병사의 시체를 주워 모았을 리는 없었을 거다. 그 지방 사람이 저택으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는데…….”

답답한 공기가 군사 회의 장소를 감돌았다.

왕비가 일부러 밝은 말투로 화제를 돌린다.

적의 의도가 명확해진 것만이라도 좋다고 치자고. ──가렌스.”

!”

살짝 스친 상처라도 치명상이 돼. 네 몸집이라도 완전히 숨길 수 있을 만한 방패가 필요하다. 그것도 대량으로 말이야.”

국왕도 왕비의 의도를 읽고 용맹하게 말했다.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민가의 문을 제공 받도록 하지. 짐마차의 바닥 나무 판이나 책상도 쓸 수 있을 거다. 공출(供出)[1]하기에는 조금 기묘한 물건이지만.”

회의 장소에 조금 웃음이 일어나자, 국왕은 힘있게 일동을 둘러보며 단언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가지 않는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무언가의 예감이었을 지도 모르지. 허나 이렇게 계략이 명백해진 이상,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은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를 꺾는다. 내일 아침, 진격한다.”

!”

가능하면 내일 점심때에는 브라시아에 도착하고 싶군. 아침까지 준비할 수 있나?”

마지막 말은 다섯 명의 군단장을 보고 한 것이기에, 그들은 용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주십시오.”

내일 아침, 방패가 준비가 되는 대로 진격이라고 정해지자 군사회의는 해산하게 되었지만, 왕비가 발로를 불러 세웠다.

단장, 조금 남아주지 않겠어?”

허어, 비밀이야기입니까?”

어느 쪽이냐 하면 비밀이 아닌 이야기지.”

헤에? 그럼 나도 듣기로 할깝쇼.”

호기심에서 이븐이 말을 꺼냈고, 나시아스도 남았다. 로자몬드도. 발로의 부관인 아스틴도 물론 머물렀다. 거기에 천막의 주인인 국왕도 있다.

그 멤버의 앞에서 왕비는 약간 주저하면서도, 분명하게 발로에게 물었던 것이다.

──아에라 공주는 왜 죽은 거지?”

천막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븐은 냉큼 돌아갈 걸 그랬어!’라고 통렬하게 후회하면서, 힐끗 소꿉친구를 보았다.

그 국왕도 무섭게 씁쓸한 얼굴로 역시나 왕비!’라고 혀를 내두르고 있다.

발로에게 이 화제를 꺼낼 용기는 자신에게는 없다.

물론 이븐에게도 없다.

로자몬드는 새파란 얼굴로 남편과 왕비를 번갈아 바라보았고, 나시아스와 아스틴도 표정을 굳히고 있다.

무리도 아니었다. 언제나 호쾌한 미소를 끊이지 않는 발로의 얼굴에서 일체의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나 역전의 무장이기도 했다.

결전을 내일로 앞둔 이런 때에, 왕비가 의미도 없이 이 화제를 꺼낼 리가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리라.

그는 어울리지 않는 얼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반대로 묻고 싶군, 왕비. 지금 상황과 그 여자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오론이 왜 브라시아를 거점으로 선택했는지, 그게 마음에 걸려서.”

오론 왕은 이미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레티시아의 그 의견을 밝히기에는 아직 빠르다고 왕비는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에라 공주가 지내고 있었던 것은 성도 아니고 요새도 아닌, 여성이 좋아할 만한 귀족 저택이지? 도적을 경계해서 입구 정도는 도개교를 설치했다고 해도, 담도 성벽도 없다고 들었어.”

그 말대로요.”

이상하잖아. 오론은 굳건한 수비전을 특기로 하는 왕이야. 적어도 나와 싸웠을 때에는 그랬어. 거점으로 삼는다면 좀 더 다른 방어력이 높은 성채나 요새가 있을 텐데, 어째서 브라시아였지?”

이것은 사실은 델피니아 군대 안에서도 가끔 화제로 올랐던 것이지만, 그 때에는 특별히 이렇다 할만한 이유를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다.

결국, 그 저택은 사치를 좋아하는 오론 왕의 취향에 맞았던 것이리라고 결론지어졌다.

오론과 브라시아에 무언가 접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다지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브라시아에 살고 있었던 아에라 공주도── 오론과 마찬가지로 월을 죽을 만큼 미워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인데.”

바로 그 말 대로요. 왕비.”

진지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발로였다.

그 여자가 죽은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은 당신이 지금 말했소. ──원한사(怨恨死).”

“……단장. 원한으로는 사람은 죽지 않아.”

그 여자는 예외요.”

여기서 국왕은 입 다물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이상, 사촌 동생을 자극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쓰면서 신중하게 끼어들었다.

아에라 공주가 돌아가신 것은 작년이다. 갑작스런 병이라고 나는 들었는데……. 종제님. 원한사라니?”

이븐이 눈치 빠르게 (사실은 이 장소에서 한 시라도 빨리 달아나고 싶어서) 한 손을 들었다.

- 저기, 그럼 난 실례하겠슴다. 여하튼, 사보아 공작가의 집안 사정과 관계된 것 같으니까 산적의 귀에 들어가게 할 순 없겠죠.”

그런데, 의외로 발로가 그것을 저지했다.

아니, 있어 주실까, 독기장. 귀공도 들어 주시지.”

이븐은 입안에서 그엑…….”이라는 묘한 소리를 흘렸다.

왜 자신을 끌어들이느냐고 원망스러운 눈빛을 발로에게 향했으나, 발로는 모르는 척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년, 돌아가신 숙부님의── 뒤르와 폐하의 법회를 치렀을 때의 일이지. 탄가의 비파스 왕이 가족을 동반하여 우리나라를 조문하셨소. 극히 이례적인 일이야. 코랄 성에 체재하시는 사이에 그쪽 전하들과 형님의 아이들이 사이가 좋아져서 말이오. 그 모습을 보신 비파스 왕이 장차 위의 왕녀를 페르난의 아내로 삼으면 어떻겠냐고 형님에게 제안하셨던 거요.”

왕비는 놀랐다.

비파스와 루시안나에게는 왕녀도 있나?”

물론이오. 두 사람이 있지.”

서쪽 탑에는 없었는데.”

당연하지. 공주로는 인질이 되지 않소. 본보기를 위해 죽일 필요가 닥쳐왔을 때,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이 왕녀라면 반란군의 비도(非道)를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 받으니까 말이지.”

그렇다고 해서 자유롭게 둘 수는 없다.

그것이 전쟁의 엄격한 현실이었다.

두 사람의 왕녀의 신병은 루시안나의 친족에게 맡겨져, 금후에는 거기에서 지내도록 결정되었었다고 한다.

그 왕녀들도 아마도 지금쯤은 부모와 형제들과 재회하고 있을 것이다.

위의 왕녀는 아홉 살이 되오. 만약, 비파스 왕이 앞으로 5년만 더 유폐되어 있었다면── 아마도 반란군의 손에 의해 반란군 유지의 아들이나 손자에게 시집가게 되었겠지. 부모와 형제를 인질로 잡혀있어서는 거절도 할 수 없어. 그리고 왕가의 피를 이은 남자아이를 낳게 하면, 그 아이를 정당한 탄가 국왕으로 앉힐 수가 있소. 왕비, 당신 스스로는 몰랐던 것 같지만, 탄가 구국의 영웅인 거요.”

월도 바로 이어 말했다.

그것도 두 번 구한 것이 되지.”

형님. 남의 일처럼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애초에 비파스 왕이 서자인 페르난에게 왕녀를 시집 보내겠다는 과감한 제안을 하신 것도, 비파스 왕이 형님을── 우리나라와의 국교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왕비가 물었다.

, 그 이야기를 거절한 거냐?”

월은 어깨를 움츠렸다.

마음만 감사히 받았다. 페르난은 아직 아홉 살이었어. 혼약이라니……. 너무 빨라.”

발로가 날카롭게 추궁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형님. 델피니아 왕가를 잇는 후계자라면 전혀 빠르지 않습니다. 받아들여야만 했던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종제님…….”

월에게는 발로에게 결코 할 수 없는 한마디가 있다.

자신의 뒤를 잇는 국왕은, 발로의 아들인 유리 쪽이 걸맞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발로는 발로대로, 그것만은 국왕이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왕비가 또다시 솔직하게 국왕에게 물었다.

너 자신은 어떤데?”

“………….”

페르난은 너의 장남이야. 국왕으로 만들고 싶은 거냐, 만들고 싶지 않은 거냐? 어느 쪽이지?”

발로를 위시한 충실한 신하들은 일제히 국왕을 바라보았고, 국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솔직히, 모르겠다.”

왕비는 묵묵히 국왕을 보았다.

아직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냐고, 뒤를 재촉하는 시선이었다.

그 눈빛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났다.

이 에메랄드 빛 시선은 언제나,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자신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아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너도 아는 대로, 왕위와는 인연이 없이 자란 남자다. 왕관을 쓰고는 있지만, 마음은 지금도 스샤의 촌뜨기였던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그래서 좋은 거다.”

라고 왕비는 말했다.

말해 두겠지만 말이다, 네가 왕좌에 당연한 듯이 으스대며 앉아 있는 지배자 같은 게 되어 있었다면, 나는 손을 빌려주지 않았을 거라고.”

국왕은 조금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이다, . 지금의 나는 왕관의 무거움을 알고 있는 것도 분명해. 동시에 왕관을 가지지 않는 자유를 기억하고 있지. 스물두 살에 왕관을 억지로 떠맡은 나와 달리 페르난은 아직 어려. 지금 어느 쪽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가 조금 더 크면 본인의 의사를 확인할 생각이었어.”

뭐니뭐니해도 일국의 운명과, 한 사람의 소년의 장래가 걸려 있다. 중대하면서도 미묘한 문제인 만큼, 왕비도 지금 이 장소에서 남편에게 결단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국왕의 사촌동생에게 물었다.

──유리는 어때? 페르난이 왕위를 잇지 않겠다고 말하면, 그 때에는 대신에 국왕이 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나?”

로자몬드가 거의 절망적인 표정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녀의 남편은 완전히 사람의 형태를 한 호랑이로 변하여, 불온하게 이빨을 갈면서 신음하고 있다.

나에게 반역의 죄를 쓰고 처형되라고 하는 건가, 왕비. 그런 것을 아들에게── 미래의 사보아 공작이 될 글래스메어 경이 알아 듣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왕가에 대한 모반의 의지가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고. 아들에게는 왕위를 잇는 것은 페르난이라고, 너는 장래에 그 오른팔이 되어 일하는 거라고 항상 훈계하고 있소.”

아에라 공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군?”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에도 발로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생각할 리가 없지. 그게 작년의 사건과도 이어진 거요. 비파스 왕이 페르난에게 위의 왕녀를 시집 보내고 싶다고 제안했다는 것을 듣고, 그 여자는 완전히 눈이 뒤집혔다더군. 그 영예는 유리야말로 받아야만 하는 것이라는 거요. 자초지종을 보고 있었던 시녀가 말하기로는 저택 안에 울려 퍼지는 저주의 말로 계속해서 악을 써댄 후, 갑자기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온몸을 경직시키며── 마치 막대기가 픽 쓰러지는 것처럼 벌렁 나자빠졌다고 하더군.”

일종의 괴담이다.

“……머리의 혈관이라도 끊어진 건가?”

그런 거겠지. 그런 무서운 모습인 채, 숨을 거뒀다고 들었소.”

뇌출혈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아도, 이 세계의 사람들은 그것이 원인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알고 있다.

공주의 유체는 어떻게 했어?”

브라시아의 저택에 매장했소.”

레티시아와 반츠아가 본 하나만 있던 묘가 그것일 테지만, 왕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브라시아에? 분명── 사보아 공작가에는 전용 묘지가 있지 않았던가?”

물론이오. 바로아에 대대로 내려오는 묘소가 있지. 나도 언젠가, 거기에 들어가게 될 테고.”

왕비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이 되어, 상대의 얼굴색을 살피면서 이번에야말로 쭈뼛거리며 물었던 것이다.

“……단장. 설마, 어머니랑 같은 무덤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까, 다른 곳에 매장했다거나 한 건 아니지?”

국왕을 선두로, 일동은 이번에야말로 비명을 삼켰다.

어느 얼굴도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라고 여실하게 호소하고 있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호랑이의 이빨이 이쪽을 향해 버린다.

그저 마른침을 삼키며, 성난 호랑이와 검을 찬 작은 토끼의 대결을 지켜볼 뿐이다.

발로는 다시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검은 안광만이 격렬한 불꽃을 담고, 연약하고 작은 토끼를 노려보고 있다. 이 토끼가 아니었다면 시선만으로 심장이 멈췄을 것이다.

──나는 그 여자는 무척 싫지만, 사람으로서의 예절은 분별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전 사보아 공작부인은 전 공작의 옆에 잠드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여자는 유서를 남겼소. 거기에는 자신의 유해는 공작가의 묘지에는 매장하지 말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단 말이오. 죽은 자의 유지는 존중해야만 하는 거겠지.”

당황해 버린 왕비였다.

다른 사람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전 사보아 공작부인이 공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묘지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니, 왕비가 아니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대신에, 브라시아의 저택에 매장하도록 써있었던 거야?”

발로의 얼굴이 엄청난 노여움으로 일그러졌다.

원래부터 커다란 몸이, 지나친 격정으로 인해 불룩하게 한층 더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였다.

──평생, 입밖에 내선 안되오. 아시겠소?”

그 박력에 주춤거리면서도,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꽤나 무서운 걸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단장과의 약속을 깰 만큼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정말 그 말대로라고 동감하여, 이븐조차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발로는 씨익, 사납게 웃었다.

자조의 기색이 섞여있었으나, 동시에 어딘가 시원해 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감사하오, 왕비. 잘 돌아와 주었어. 내 평생, 입에 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지상의 법과 인연이 없는 곳에 살고 있는 당신이라면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오.”

무엇을 들어도 동요하지 말자고 왕비는 각오했지만, 발로의 말은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 여자는 말이오, 그 여자는 하필이면── 왕가의 묘소에 자신의 유해를 매장하라고 써놓았단 말이오! 오라버니의── 지금은 돌아가신 뒤르아 폐하의 옆에서 영원한 잠에 들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이오!”

이븐과 나시아스가 나란히 파랗게 질렸다.

국왕도 얼굴색이 변해 숨을 삼켰다. 왕비도.

, 자신을 왕족으로서 취급해라라고 아에라 공주는 유서 안에서 공언했다는 것이 된다.

아에라 루신다는 확실히 왕족으로서 태어났지만, 동시에 국내 필두공작에게 시집간 사람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여성으로서의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왕녀로서 지냈던 처녀 시절의 영광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사보아 공작부인으로서가 아닌, 왕족으로서 매장하라고 유언에 적었다──.

왕가에 태어난 자였기 때문에 더더욱,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반역죄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왕가를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강가(降嫁)[2]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신분을 분별하지 않는, 거들먹거리는 오만한 행위인 것도 명백하다.

로자몬드는 혈색을 잃은 입술을 공포로 떨며, 매달리는 듯한 눈으로 남편을 보았다.

그 얼굴색을 보면 그녀도 몰랐던 것이리라.

다만 한 사람, 사정을 들었던 것이 아스틴이다.

고개를 떨구고, 불쑥 중얼거렸다.

가여우신……. 쓸쓸하신 분이십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 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런 유서는 도저히 공표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발로는 아내인 로자몬드에게조차 밝히지 않고, 심복인 아스틴에게만 은밀히 고하고 친어머니의 사망을 그저 사무적으로 처리한 것이다.

신음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발로는 말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분수를 모르는 어리석은 여자였소. 그런 여자의 배에서 태어난 것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유일한 내 오점이야.”

친어머니의 소행에 분노하면서, 그 이상으로 한심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말투였다.

틀렸어. 단장.”

그런 발로에게, 왕비는 진지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거라면 아에라 공주는 단 한가지만 좋은 일을 해준 거야. ──단장을 낳아 준 거지.”

발로는 검은 눈을 크게 뜨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로 그 여자의 죄가 상쇄가 되려나?”

되고말고.”

쉰 목소리로 말한 것은 월이었다.

그 점에 관해서 나는 대단히 숙모님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할 정도야. ……종제님, 용케 털어놓아 주었네.”

아니요. 저야말로, 말씀 드리지 않았던 것을 사죄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말 말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세.”

형님. 그런 것은 이미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게 아니라…….”

발로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이시라면 그런 정신 나간 유서를 보셔도, 저에게는 모반의 뜻 따위는 없는 것도, 사보아 가의 충절에 거짓이 없는 것도 믿어 주시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친어머니가 죽었는데도 슬프지 않을 뿐 아니라, 저는 진심으로……. 안도했던 겁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여자가 번거롭게 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수미(愁眉)를 편다[3]는 것은 이런 걸 말하는 것이라고, 정말로 상쾌한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사람으로서는 어떤지……. 저 같은 인간이라도 느끼는 바가 있어서 말입니다.”

발로는 일부러 밝고 사나운 얼굴로 뒤돌아 보았다.

──그런 고로, 아시겠나, 독기장. 구외불출(口外不出)[4]이외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이븐은 씹어 뱉듯이 말했다.

나는 분명 자리를 비키겠다고 했다굽쇼. 왜 듣게 만든 겁니까?”

물론, 그 정도로는 신용하고 있기 때문이지.”

고마운 건지 고맙지 않은 건지──라고, 이븐은 입안에서 중얼거렸지만, 표정은 진지했다.

나시아스도 마찬가지로 표정을 굳히고, 복잡한 마음으로 오랜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분도 용모도 재능도 모든 것을 타고난 발로에게도, 단 한가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 있다.

친어머니의 애정이다.

두 사람 다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주어졌기 때문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심정이었지만, 발로 본인은 그런 것을 원하고 있지는 않다.

언제나와 같은 대담한 미소로 왕비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습니까, 왕비?”

왕비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처음의 의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에라 공주를 섬기고 있었던 사람들은, 공주가 죽고 난 후에는 어떻게 했지?”

어떻게라 할 것도 없이, 계속해서 저택에서 일하고 있었소.”

주인이 죽었는데도?”

발로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저택은 금방 상해 버리니 말이오. 그렇다고 해서 사용인들만 두게 되면 집안의 공기가 해이해지지. 전 주인이 주인이었던 만큼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권할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다행히도 취향이 별난 먼 친척 노인이 내가 살도록 하지.”라며 제안해 주었어. 그 때, 다소 사람을 줄이기는 했다고 생각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사치스러운 저택이었기에 손은 아무리 있어도 모자라서 말이오. 거의가 그대로 계속해서 일하고 있었을 거요. 노인에게서 몇 번인가 편지를 받았지만, “역시 자존심이 센 여성을 섬기고 있었던 여자들이었던 만큼, 다루기 어렵구만.”이라고 빈정거림을 섞어서 써있었으니까.”

빈정거림과 독설은 사보아 가의 특징이냐고 생각하면서, 왕비는 물었다.

파라스트가 공격해 왔을 때, 노인은 어떻게 됐지?”

. 파라스트의 침공이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피난이 늦어져서 말이지. 한 때는 포로가 되었었지만, 파라스트도 늙은이 같은 걸 인질로 삼아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저택에서 추방하는 형태로 해방되었소. ──그 얘길 들었을 때는 한 숨 놓았지.”

저택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람들도 해방된 건가?”

그야 그렇겠지. 그 저택을 오론 왕의 거점으로 정한 이상, 자국 사람들 밖에 곁에 두고 싶지 않을 테니까. 델피니아 사람인 하인들은 말하자면 쓸모가 없으니까, 전원 다 내쫓았을 거요.”

왕비는 무언가를 거리끼는 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거, 확인한 건 아니지?”

왕비?”

발로는 미심쩍은 듯한 얼굴로 왕비를 보았고, 왕비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 사람들이 독의 정체야.”

뭐요?”

아까 이야기한 나무통 속의 독 말이야. 여자들의 뼈가 꽤 섞여 있었다고 해.”

일동의 입에서 눌러 죽인 비명이 새어 나왔다.

바보 같은!”

여자의 유체(遺體)?!”

가장 얼굴색이 변한 것은 국왕이다.

──설마, 숙모님의 유체인 건 아니겠지?!”

그건 아냐. 죽은 것이 작년이라면 지금쯤은 이미 뼈밖에 안 남아있을 거니까. 다만, 커다란 저택이라면── 코랄 성도 그렇지만── 꽤 많은 수의 여자들이 일하고 있었던 거 아닌가?”

로자몬드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어머님의 몸종만으로도 스무 명은 있었을 겁니다. 그 자들을……. 설마 전원?”

역전의 무장인 그들에게서 혈색이 사라져 있다.

하인이나 하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전투원이다.

말려들어서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해도, 처음부터 독으로 쓰기 위해서 죽여서 유체를 이용하다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의 짓이 아니다.

국왕은 노여움을 참지 못하여 신음하고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미 사람의 소행이 아니다. 귀축(鬼畜)[5]과 같은 짓이야.”

왕비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은 그런 게 상대다. 각오하고 싸우라고.”

다음날, 정오──.

델피니아산세베리아 연합군은 브라시아 공략을 개시했다.

해자도 담도 없는 브라시아의 저택이지만, 지금은 그 주위에 무수한 가시나무 울타리가 축조되어 있다.

잘 보면, 그 가시나무 울타리는 저택을 중심으로 삼중의 원을 그리는 배치로 점재되어 있다.

각각이 제 1, 2, 3의 방어라는 것이다.

그 방벽의 안쪽에는 병대가 꽉 들어차 늘어서 있다.

오만이라는 병력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짓이었다.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파라스트 군은 어째서인지 스스로 치고 나오려고는 하지 않는다.

저택의 주위에 포진하여 요격하려는 태세를 보이고 있다.

실은, 공격하는 델피니아 군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형태였다.

어중간한 평지라 전망이 좋은 만큼, 은밀하게 병력을 진격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크는 병사를 나누지 않고, 저택의 정면을 향하여 삼만의 군세를 엄숙하게 나아가게 했다.

완전 정면승부를 건 것이다.

일정한 거리에서 진격을 멈추고, 신호를 보낸다.

그에 응해 차례차례 장수들의 지시가 날아다녔다.

기마병들은 뒤로 물러나라!”

투석대! 보병대! 앞으로!”

투석구는 발사에 시간이 걸리지만, 위력은 절대적이다.

대열을 짠 그들의 주위를 지키듯이, 보병대가 배치된 곳으로 행했다.

이 보병대는 색다른 방패를 가지고 있었다.

크기도 형태도 제각각 인, 떼어낸 민가의 문, 분해한 짐수레의 판자, 거기에 해체한 헛간의 벽 등을 급조하여 이어 붙여 방패로 꾸민 것이다.

이 방패는 뒷면에 가죽 손잡이를 붙임으로써, 사람의 모습을 완전히 숨길 수 있게 하였다.

겉보기는 때가 때인 만큼 아무래도 좋다.

확실하게 온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볼품 없지만 효과적인 방패가 줄을 딱 맞추어 바싹 달라붙어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인 투구벌레와 같아, 그 껍질을 꿰뚫기 위해 파라스트 군은 빗발치듯이 화살을 퍼부어 왔다.

스친 것만으로도 치명상이 되는 맹독 화살이다.

델피니아 군의 투구벌레는 전방과 머리 위를 빈틈없이 껍질로 굳혀 그 공격을 막고, 껍질의 틈으로 끊임없이 투석구를 퍼부었다.

강력한 투석구는 가시나무 울타리를 꿰뚫고 병사들을 쓰러트리는 위력이 있다.

꽤나 명중하였지만, 뭐라 해도 파라스트 군의 수는 많다. 몇 명이 쓰러져도 상관하지 않고 계속 쏘아 온다.

어느 쪽이 먼저 손을 드는지 끈기 싸움을 하는 것 같았지만, 투구벌레의 진형이 어느 정도 가시나무 울타리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즈음, 파라스트 군은 가시나무 울타리 사이에서 돌격을 감행하여 왔다.

보병만이 아니다. 기마병도 있다.

이것을 알아차린 델피니아 군은 투구벌레의 진형을 해제했다. 파라스트 군의 병사가 전장에 나온 이상, 독화살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라스트 군은 전쟁의 상식을 무시하는 전법으로 나왔다.

아군 병사가 적과 격렬하게 뒤섞여서 싸우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독화살의 비를 퍼부어 온 것이다.

뭣이라?!”

투구벌레의 진형을 해제했던 델피니아의 병사들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표적이 된 것은 델피니아 병사들만이 아니다.

맞으면 치명상이 되는 독화살은 파라스트의 병사들에게도 용서 없이 덮쳐 들었던 것이다.

눈 앞에서 아군이 털썩털썩 쓰러지고 있는데도, 파라스트 군은 그런 사정은 상관도 하지 않고 계속 쏘아 온다.

근위병단의 군단장들은 이런 적의 이상함에 얼굴빛을 잃었다. 견디다 못해 철수 명령을 내리려고 했을 때, 퇴각을 알리는 징이 울렸다.

마침 잘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여 외친다.

물러서라──!!”

화살을 맞은 자는 서둘러 치료를!”

강으로 달려가라! 빨리 독을 씻어내는 거다!”

당황하여 도망쳐 돌아오는 병사들을 맞이한 델피니아의 본진에서는 자초지종을 보고 있었던 월이 신음하고 있었다.

적과 아군의 구별도 하지 않다니…….”

아침나절에 월으로부터 독화살의 이야기를 들은 오르테스도 얼굴빛을 잃고, 마찬가지로 신음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저런 짓을 여봐란듯이 보이면 좋든 싫든 병사들의 사기는 식을 겁니다.”

아군이 자신들의 화살에 쓰러지고 있는 것이다.

보통이라면 이런 짓은 명령을 받아도 할 수 없다.

가령 할 수 있다고 해도, 이런 끔찍한 전술을 명령한 지휘관에게 반발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이 세계의 병사들은 비록 주군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복종 따위는 하지 않는다.

불합리한 명령에는 반발한다. 졸병이라면 도망치기도 하고, 장수 격인 사람에 이르면 시시비비의 판단에 어두운 주인이 가망 없다고 판단하면 미련 없이 다른 주인에게 붙어 버린다.

지휘관에게는 병사들을 통솔하여 승리로 이끌 만큼의 기량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이 국왕이라면 더욱 그렇다.

부하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군주는 병사들이 따라오지 않고, 국왕이 그런 말을 꺼내면 병사들의 동요와 당황은 피할 수 없다.

사기도 전의도 싹 날라가야 할 텐데, 파라스트 군의 병사들에게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보통 신경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파라스트 군은 아군의 시체를 회수하려고도 하지 않고, 다시 방어를 굳히고 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무서웠다.

투구벌레의 진형으로 적을 동요시키려고 했던 것이, 반대로 겁에 질려 버린 것은 델피니아 군 쪽이다.

위험했다. 바로 무언가 효과적인 수를 쓰지 않으면, 싸움은 교착상태로 빠져 버린다.

파라스트 군이 지구전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면, 보기 좋게 그 의도에 빠져버리게 된다.

국왕은 어디까지나 태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나, 다른 장수나 군단장들은 그럴 수는 없었다.

모두 동요하고 있었다. 은근히 초조함도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의 델피니아 군에게는 이 곤란한 상황을 타파할 사람이 제대로 있는 것이다.

그라이아.”

왕비는 자신의 옆에 선 애마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너는, 화살보다도 빨리 달릴 수 있지?”

흑마는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왕비를 바라보며, 즐겁게 울어 보였다.

왕비는 군대를 뒤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내가 가서 저 화살 장막을 무너뜨리겠다!”

병사들은 펄쩍 뛰었다.

비전하?!”

기다려 주십시오!”

혼자서는 위험하십니다!”

당연하지. 위험하지 않은 전투가 어디 있다고.”

말하자마자, 왕비는 맹렬하게 뛰쳐나갔다.

간 떨어지게 할만한 일격을 가하지 않으면 이 군대는 공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옆을 흑마가 노도와 같이 달린다.

왕비가 기승하지 않은 것은 쓸데없는 짐을 태우지 않는 편이 그라이아는 빨리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전력 질주하는 말과 나란히 사람이── 그것도 젊디젊은 왕비가 조금도 뒤쳐지지 않고 달려, 적진으로 육박해 간다.

이 광경에 델피니아 군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놀라 자빠졌다.

그 중에서도 열렬한 왕비의 신자들은, 왕비의 앞에서 겁을 먹은 자신을 맹렬하게 부끄러워했다.

이 이상 뒤쳐지는 불명예를 뒤집어 쓸 수는 없다.

각각 수제 방패를 들고 과감하게 뛰쳐나갔다.

비전하를 혼자 가시게 해서는 안 된다!”

커다란 방패는 혼자서는 무거워서 지탱하기 어렵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같이 지탱하면서 나아가야 하는데, 이 상태로는 걷는 것은 어쨌든, 달리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에에이! 거추장스럽다!”

고함친 것은 가렌스였다. 부하에게서 방패를 빼앗아 들자, 완력에 의지하여 혼자서 들고 돌진했다.

비켜비켜! 비켜라!”

이 모습에 자극 받은 것이 틸레든 기사단이다.

라모나 기사단은 수비전을 특기로 하고, 틸레든 기사단은 돌격을 특기로 하는 도식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눈 앞에서 라모나 기사단의 부단장에게 특기를 빼앗겨 버려서야 돌격부대로써 체면이 서지 않는다.

가렌스 부단장에게 뒤지지 말아라!”

진격──!!”

틸레든 기사단원은 경장(輕裝) 보병용의 방패를 들고 뛰쳐나갔다. 이 방패라도 충분히 상반신은 막을 수 있다.

적이 사용하는 것이 독화살이라, 만에 하나 손가락이나 발에 맞는 것을 경계하여 민가의 문을 방패로 사용한 것이다.

익숙한 방어구인 쪽이 몇 배나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왕비는 그 방패조차도 들고 있지 않다.

독화살이 빗발치듯이 왕비의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하나라도 피하지 못하면 목숨을 잃는다.

그것이 전투의 현실이지만, 왕비는 보통 사람과는 동떨어진 다리힘과 좋은 시력으로 독화살의 비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었다.

그라이아도다. 보통 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빠른 발과 탄력을 구사하여, 춤추듯이 뛰고 있다.

이 모습을 보고 분기한 것이 로아 사람들이었다.

흑왕을 따르려는 듯이 용맹히 일어섰으나, 도라 장군이 그것을 막았다.

기다려라! 우리들은 흑왕과 같은 일을 할 수는 없어!”

로아 사람들의 진가는 기마전에서 발휘된다.

지금은 아직, 그 때가 아니다.

눈 앞에서 이런 것을 여봐란 듯이 보이자 이를 갈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동시에 자랑스러웠다. 저것이 우리들의── 로아의 흑왕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나이가 젊은 조디는 모두의 마음을 대표하여, 감동에 가슴을 떨면서 그 기분을 입에 담았던 것이다.

보라고! 저것이 흑왕이다! 로아의 주인이다!”

한 사람과 한 마리가 질풍과 같이 화살의 비 아래를 달려서 빠져나가, 상처 없이 가시나무 울타리에 도달하여 그 안쪽으로 뛰어 들었다.

동시에 왕비는 허리의 검을 휘둘렀다.

단신으로 뛰어 들어온 왕비에게 파라스트 병사들도 기겁했다.

접근전에서는 화살은 쓸 수 없다. 당황하여 활을 버리고 검으로 바꿔 들었으나, 그 검도 셰라가 말했던 큰 나무통 속의 독을 듬뿍 적신 것일 것이다.

어느 칼에서도, 지독한 냄새가 난다.

왕비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부정(不淨)한 무기를 나에게 향하느냐!”

단 혼자서 군함 두 척을 가라앉힌 사람이다.

격노한 왕비의 검은 용서가 없었다.

귀찮게 들러붙는 파라스트 병사들을 허수아비처럼 베어 버리며,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그 근처에서는 흑마도 개미떼처럼 꼬이는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흩트리고 있다.

거기에 가렌스를 비롯한 보병대가 뒤쫓아와, 왕비를 지원하러 가시나무 울타리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적과 아군이 뒤섞여 격렬하게 싸우는 중에, 왕비가 큰 소리로 명령했다.

불을 붙여라!”

장수 클래스인 자들도 격문을 띄웠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불태워라!”

이것은 미리 결정해 두었던 것이었다.

불은 독을 정화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델피니아 군은 가시나무 울타리를 노리고 불화살을 쏘았다.

마른 가시나무 울타리는 금방 불꽃에 휩싸여 타기 시작했고, 큰 나무통도 삼켜버렸다.

그토록 완강한 파라스트 병사들도 여기에는 견디지 못하고, 기가 꺾인 태도가 된 것이다.

월 그리크는 이 기회를 놓칠 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바로 소리쳤다.

공격하라!”

대기하고 있었던 기마군단이 일제히 돌격한다.

파라스트 군은 손 쓸 도리도 없이, 우왕좌왕하면서 제 2 방벽까지 군을 물렸다.

한편, 뛰어올라간 델피니아 군의 병사들은 불탄 가시나무 울타리를 때려 부수며 소화에 힘썼다. 당장 끄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 지도 모른다.

많은 병사들이 움직였기 때문에 금방 불을 끌 수 있었다.

진화한 후에도 연기가 올라 굉장히 탄내가 났지만, 그 지독한 악취보다는 훨씬 나았다.

삼중의 방어 중 제일 바깥 테두리를 함락시킴으로써 델피니아 군은 기세가 붙었다.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시나무 울타리는 아직 두 개가 있지만, 이 기세로 다음 방벽을 목표로 진격하려고 했을 때, 저택의 정면에 변화가 일어났다.

항상 끌어올려져 있는 도개교는 지금은 외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내려져 있다.

거기에서 오백 정도의 부대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두 가지 색으로 나누어 칠해진 방패── 파라스트의 문장을 그린 깃발을 드높이 내걸고 있다.

오론 왕이다!”

좋았어!”

이중의 가시나무 울타리의 건너편이긴 했으나, 적의 지휘관을 본거지에서 끌어 내었다는 것에 델피니아 군은 좋아서 날뛰었지만, 그 기세는 급속히 사그라들었다.

어젯밤 레티시아가 느낀 것을 델피니아의 병사들도 느낀 것이다.

딱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저택에서 나타난 부대는 굉장히 기분 나쁘고 꺼림칙한 인상을 이쪽에 주고 있다.

오백 기의 대열은 엄숙하게 나아와 제 1 방어의 안쪽에 포진했다. 거리가 있으니 얼굴까지는 분간되지 않지만, 유달리 화려한 갑주를 입은 사람이 오백 기를 뒤따르게 하는 형태로 여유 있게 걸상에 걸터앉았다.

오론임에 틀림 없다.

방어의 하나를 무너뜨렸다고는 하나, 병력은 압도적으로 파라스트 군이 이기고 있다. 진지도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도 적극적으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델피니아의 본진에서는 주요한 장군들이 국왕의 곁으로 자연스럽게 모여, 군사회의가 열렸다.

오론이 어떤 적인지 누구보다도 정통한 오르테스가 살짝 월에게 진언한다.

주의하십시오……. 반드시 무언가 함정이 있을 겁니다.”

.”

오론은 신중한 왕이지만, 겁쟁이는 아니다.

이런 승기를 놓칠 리가 없다.

무언가 이쪽에 타격을 줄 한 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얌전히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파라스트의 본진을 보는 월의 표정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호되게 괴롭혀 왔던 적의 모습을 드디어 눈 앞에서 보게 된 것도 컸다. 긴장과 동시에, 격렬한 투지가 부글부글 끓어 올라온다.

오르테스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는지, 중얼거렸다.

──십 년만입니다.”

이번 전쟁 동안, 오론 왕과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나?”

.”

일국의 왕끼리다. 좀처럼 얼굴을 마주칠 기회는 없다.

파라스트에게 조력하라는 강요도, 마레바에 옮기라는 명령도, 오르테스는 모두 오론의 사자로부터 들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생각하면, 여기까지 몰려온 것이다.

절대로 뒤로 물러날 수는 없다.

동시에 오론의 책략에 걸릴 수도 없다.

왕비도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뭘 할 생각이지?”

싸움터는 전망이 좋은 들판이다. 병사들을 숨길 만한 산은 멀리 있어, 이 지형에서는 복병을 숨겨두는 것은 어렵다.

이쪽이 돌격하도록 만들고 싶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설마, 함정 구멍이라도 파둔 건가?”

왕비의 의문을 이븐이 농담으로 받아 쳤다.

그런 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는 것은 중앙이 넓다고는 하지만 타우의 자유민 정도겠죠. 왕관을 쓴 임금님에게 같은 짓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뎁쇼…….”

발로가 즉시 단언했다.

가능할 리가. 체면을 구기는데.”

적의 목적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 꺼림칙했으나, 여기서 제자리걸음을 할 수는 없다. 전진이 있을 뿐이다.

월 그리크는 불에 타서 굳은 제 1 방어진의 바깥에 본진을 차리고, 다시 투구벌레의 진형을 명령했다.

파라스트의 계략을 알아내려는 의미도 있었다.

방어를 굳히고 신중하게 나아가는 것으로 예상 외의 사태에도 대응할 수 있다고 예상한 것이다.

수십 마리나 되는 투구벌레가 한발한발 제2의 방어진으로 육박했으나, 파라스트 군은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독화살도 날아오지 않는다.

국왕이 돌격을 명령하려고 한 그 때였다.

투구벌레의 진형의 배후, 델피니아 본진의 눈 앞에서 가공할 만한 이변이 일어났다.

게엑!!”

──시체가?!”

격렬한 전투 뒤인 싸움터에는 병사들의 유해가 무참히 구르고 있다.

그 시체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의식을 잃고 있었던 자가 되살아난 것은 결코 아니다. 얼굴을 크게 베인 시체, 가슴이 짓눌려 피를 토한 시체, 무수한 화살을 맞아 고슴도치가 된 시체, 창으로 꿰 뚫려 지면에 고정된 시체는 그 창을 스르륵 빼면서 기어오르고, 불에 타 숯 검댕이가 된 시체까지도 무너질 듯한 무참한 모습으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델피니아산세베리아 군사들 모두의 입에서 혼비백산한 비명이 울렸다.

소생한 것은 파라스트 군대의 시체만이 아니다.

델피니아, 산세베리아 군대의 시체도였다.

바로 조금 전 목숨을 잃은 동료들이 공허한 눈으로 검을 들고, 피투성이의 팔로 창을 꼬나 쥐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오는 것이다.

국왕은 퇴각을 알리는 징을 울리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후퇴────!!”

이런 적과는 도저히 싸울 수 없다.

하지만,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만은 막지 않으면 안되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눈 앞에서 일어난 것이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이성도 투지도 싹 날라가 버렸다. 어디까지라도 곧장 달아날 것 같지만, 여기서 패주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다.

국왕은 강한 의지를 담은 목소리로 외쳤다.

처음 진지로 돌아가라! 대열을 다시 정비하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후퇴라고 의연하게 명령하고, 왕비도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는 늠름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디로 가는 거지?! 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실로 효과적이었다.

공포심에 질려 있던 병사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왕비의 이 말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쏜살같이 도망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고 원래의 장소에서 대열을 정비했으나, 어느 병사도 혈색을 잃고 부들부들 떨면서 싸움터를 살피고 있다.

움직이는 시체는 지금은 멈춰 있지만, 저것이── 저 망령들이 자신들에게 닥쳐 온다면, 도망치지 않을 자신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것은 일반 병사들에 한정된 일은 아니다.

역전의 용사들까지 얼굴색을 잃고 있다.

어중간하게 밝고 맑은 푸른 하늘과, 무참하게 움직이는 시체의 대비는 너무나도 강렬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리가 굳은 얼굴로 말했던 것이다.

. 나중에 나를 때리거나 차도 돼.”

──그런 무서운 짓을 할 수 있겠냐!”

뒷일이 무섭다고! 라고 국왕이 고함치자, 왕비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얼굴의 땀을 닦으면서 신음했다.

저건 네가 상대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냐. ──실수야. 이쪽 영역이다.”

완전히 겁먹고 있는 델피니아 군 속에서 왕비만이 조용히 투지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오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어. 저건 이미 보통의 검으로는 맞설 수 없다. 벨 수 있다고 한다면 내 검뿐이야.”

단언한 왕비는 애마에 훌쩍 기승하여, 국왕을 돌아보며 말했던 것이다.

너는 여기에 있어.”

잠깐! !”

오지마. 이건 내 싸움이야.”

델피니아에서는 왕비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반론할 수 없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지만.

하지만 아내인 폴라와는 전혀 다른 종류라고는 하나, 왕비에게 진심으로 깊은 애정을 쏟고 있는 국왕이 순순히 따를 리가 없다.

하지만 너 혼자 가게 할 수는──!!

말 위의 왕비는 뒤돌아보며 웃었다.

빛이 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혼자가 아냐.”

흑왕에게 걸터앉은 왕비의 머리 위를 가로지르듯이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구름 하나 없는 그 하늘에 돌연히 번개가 쳤다.

오오!”

청천 벽력이라고 말하듯, 그야말로 창공을 선명하게 가르는 칠흑의 번개였다.

하늘의 푸르름을 두 동강으로 가르며 달리는 검은 번개에, 삼만의 병사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놀라, 숨을 들이 삼켰던 것이다.

, 무슨 일이냐?!”

이것도 오론 왕의 요술인가?!”

거기에 무시무시한 굉음이 울린다.

동요하는 그들의 눈앞에서 천둥이 떨어졌다.

섬광을 동반한 칠흑의 천둥이었다.

검은데도 눈부시다니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삼만의 군대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쭈뼛거리며 떴을 때, 거기에는 예상 외의 광경이 있었다.

화려한 검은 전투복을 걸친 검은 천사는, 경악하는 병사들 앞에서 웃으며 파트너에게 말을 건 것이다.

되도록 화려하게 등장해 봤는데, 어때?”

지금은 델피니아의 왕비인 금색 천사도 웃으며 불평을 했다.

좀 너무 극적이네.”

<팔라스 아테나>의 멤버들은 33색으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옆에 앉아 있었던 루의 모습이 사라지고, 지금은 내선화면 안에 있다.

기계인 다이아나까지도 어이없어하면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이거?”

대형부부도 간담이 서늘해져 있었으나, 재스민은 보통 여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튼튼한 신경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의문을 내뱉었다.

“……어째서 영상이 끊어지지 않지?”

혼잣말과 같은 중얼거림에 켈리가 대답한다.

끊어지면 오히려 위험할 걸. 이 회선을 통해서 돌아올 생각일 테니까.”

회선이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자신의 어휘로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재스민은 켈리 정도로는 루와 오래 알지 못한다.

이 이상한 상황에서, 비교적 태연하게 보이는 남편에게 놀라 어이없어 하며, 조금 감탄한 듯이 말했던 것이다.

네가 여성에게도 남자에게도 인기가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천사까지 꾀어냈군…….”

오해 살만한 소리하지 말라고. ──굳이 말하자면 꾀어진 건 내 쪽이야.”

“……그건 그거대로 불온한 말이군.”

화면 안에서는, 루가 월에게 다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걸고 있다.

임금님. 나중에 나를 때리거나 차도 되요.”

왕비에 이어, 검은 천사까지 이런 말을 하기 때문에, 국왕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그러니까 어째서 그런 무서운 일을.”

당신을 죽게 만들어 버릴 참이었어요.”

입을 딱 벌린 월에게 루는 탄식하면서 말했던 것이다.

임금님이 막다른 곳까지 몰린 게 당연해. 당신은 인간이고, 저건 육신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여기 사람들의 <왕비님 사랑>에 감사해야겠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에디가 있는 곳으로 날려진 거에요.”

검은 천사는 가여워하는 눈빛을 싸움터로 보냈다.

죽은 사람들을 저런 식으로 쓰면 안 되요. ──덕분에 이쪽으로 올 수 있었지만.”

무슨 의미지, 라비 경?”

내가 이쪽 세계에 간섭하기 위해서는 명백하게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은 힘이 작용했다는 증명이 필요했어요. ──저건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어. 죽은 사람은 보통, 일어 서서 무기를 쥐거나 하지 않으니까.”

국왕은 진지한 얼굴로 루에게 물었다.

라비 경, 가르쳐 주시게. 우리 군의 병사들은── 요술에 더럽혀져 버린 것인가? 싸워서 죽은 그들에게는 편안한 잠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인가?”

괜찮아요. 저 사람들은 조종당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오론만 쓰러트리면 흙으로 돌아갈 거야.”

국왕은 커다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할 수 있겠나?”

루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온 걸요.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임금님의 말, 빌려도 되요?”

국왕은 쾌히 자신의 말을 루에게 제공했다.

일국의 군주의 애마인 만큼 흑왕에게는 뒤떨어지지만, 당당한 흑갈색 말이다.

그라이아에 걸터앉은 왕비는 파트너가 옆에 나란히 서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천사는 왼쪽 손으로 검을 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말을 왕비의 왼쪽에 세웠다.

그렇게 빈 오른손을 뻗는다.

왕비도 왼손을 뻗었다.

말 위의 두 사람은 한 번, 서로의 손가락을 꼭 쥐고 그것을 신호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오론은 이중의 방벽의 또 그 안에 머무르고 있다. 덧붙여 파라스트 군은 움직이는 죽은 자들 외에, 육체를 가진 오만의 병사를 가지고 있다.

단 두 사람의 돌격은 바로 파라스트 군에게 가로막혀, 무수한 적병에게 둘러싸여 버렸던 것이다.

보통 기사라면 단번에 삼켜져 끝날 테지만, 왕비는 황금빛 회오리바람과 같이 격렬하게, 검은 옷차림의 천사는 아까 전의 번개와 같이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 다 겉보기를 배반하는 강력함으로 개미떼 같이 꼬여 드는 파라스트 병사들을 쫓아내고 있지만, 끝이 없다.

끝도 없이 바퀴벌레처럼 솟아 나온다.

보고 있던 국왕은 낮게 신음했다.

종자가 끌게 하고 있던 예비 말에 뛰어 오르자마자, 군대를 뒤돌아보며 목소리를 드높여 소리쳤다.

들어라! 용맹한 델피니아의 병사들이여! 그리고 이 궁지에 달려와준 산세베리아의 사람들이여!”

힘있는 목소리는 낭랑하게 전쟁터에 울렸던 것이다.

저기에 쓰러진 것은 우리들의 동료이다. 승리를 위해 용맹하게 싸워, 고귀한 희생을 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괴이한 주술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 편안한 잠에 드는 죽은 자로써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겨, 무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 우리들의 형제를! 친구를! 유령으로써 방황하게 둘 수 있겠느냐!”

공포에 지배당하고 있었던 병사들의 눈에 힘이 돌아왔다.

국왕은 계속해서 말한다.

저 적의 요술은 반드시 왕비가 깰 것이다! 우리들의 임무는 왕비를 오론 왕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사의 긍지와 기개가 있는 자는 나를 따르라!”

국왕의 말은 훌륭하게 병사들에게 기합을 넣었다.

자신들의 눈 앞에서 전쟁의 여신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손가락 물고 바라보고 있어서는 사내라고 할 수 없다.

사령(死靈)은 벨 수 없어도 살아있는 병사라면 쓰러뜨릴 수 있다!”

비전하를 방해하게 만들지 마라!”

저 사람을 지킨다는 건방진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움을 드리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할 수 있다.

발로도 틸레든 기사단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폐하를 따르라──!!”

이븐도 로아의 사람들을 이끌고 뛰쳐나가고 있다.

여기가 일생일대의 승부처다, 인석들아!”

물론 오르테스도 지고 있진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산세베리아 기사의 의지를 보여라!”

삼만의 군대가 하나의 생물이 되어 돌진했다.

사령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싸움터만은 자연히 피해, 델피니아산세베리아 연합군은 파라스트 군에게 노도와 같이 덤벼들었던 것이다.

대혼전이 되었다.

이래서는 아무리 파라스트 군이라도 독화살을 쓸 수는 없다.

왕비와 루는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거기에 주요한 장수들이 달려왔다.

비전하! 여기는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나시아스가 외치자, 발로가 고함쳤다.

피라미들은 우리가 처치하마! 가라! 왕비!”

아아!!”

왕비와 루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병사를 베어서 떨쳐버리며, 2의 방벽을 돌파하여 파라스트의 진영으로 육박했다.

오론은 마치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민첩하게 지휘하여, 오백 기가 돌격하여 왔다.

단 두 사람과 오백 기는, 1과 제 2의 방벽 사이에서 격돌했던 것이다.

이 오백 기는 국왕을 지키는 정예이니만큼, 무서울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무 강했다.

왕비와 그 파트너는 얼굴색이 () 변했다.

루퍼!”

서두르자!”

이런 대화만으로 끝나 버린다.

두 사람 다 일반인과 동떨어진 기량을 자랑하느니만큼, 그것을 눈치챈 것이다. 이 기사들의 강함은 사람으로써의 한계를 명백하게 뛰어넘어 버리고 있다.

위급한 상황에 순간적으로 괴력을 발휘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상태로 싸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무모한 힘을 계속 내고 있으면 몸이 망가져 버린다. 그런데도 기사들은 그런 사정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무턱대고 공격해 온다.

그 때, 리와 루의 등뒤에서 화살이 날아와, 적병의 얼굴에 직격했다. 게다가 싸움터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희한한 무기가 차례차례 파라스트 병사들을 덮쳤다.

어느 틈엔가 두 사람의 뒤에 말 세 필이 따르고 있다.

화살을 쏜 것은 셰라고, 단검을 던진 것은 반츠아, 납구슬을 뿌린 것이 레티시아이다.

엄청 중노동이구만!”

종횡무진으로 납구슬을 투척하면서 레티시아가 쾌활하게 말하자, 반츠아는 연속해서 적을 쓰러뜨리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이런 거친 일은 성질에 안 맞아.”

그들의 본업은 암살자이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점은 변함없지만, 그 나름대로의 무대를 준비하여 비밀리에 실행하는 것이 본업이지, 힘만 믿고 베어버리면 된다는 전투의 싸움방식과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그래도 월등히 강하다는 점은 문제가 없다. 마음 든든한 엄호였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거 아니었어!”

리의 물음에 레티시아가 대꾸했다.

지금은 이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 그보다 저 녀석을 확실하게 처리해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구!”

그는 어지간히 지금의 오론이 기분 나쁜 듯 하다.

말하지 않아도 오론을 처리하려고 두 사람은 돌진했으나, 웬걸 상대 쪽에서 이쪽을 향해 왔다.

오론은 측근 중의 측근을 열명 정도 주위에 남기고 침착한 태도로 걸상에 앉아 있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모습을 모두 내팽개쳤다.

시동이 끌고 있던 애마에 뛰어 오르더니, 창을 낚아채어 왕비를 향해 돌격해 왔다.

오론은 번쩍번쩍 빛나는 것만 같은 호화스런 갑주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투구나 갑옷의 팔 부분에는 황금 장식이 붙어 있고, 말에 씌운 마구에도 호화로운 장식이 달려있다.

그야말로 화려함을 좋아하는 오론다운 전투복이지만, 이런 갑주는 본진에서 지휘를 하는 데는 걸맞아도 더할 나위 없이 싸우기 어렵다.

애초에 오론은 무용(武勇)과는 담을 쌓은 국왕이다.

군대의 가장 뒤에 버티고 앉아, 전투 전체의 움직임을 파악하면서 지휘를 하는 것을 특기로 했을 텐데 단신으로 무턱대고 돌격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 기세가 장난이 아니다.

그린디에타 라덴!”

사내의 것 치고는 기묘하게 높은, 째지는 목소리로 소리치고는, 오론은 리를 목표로 창을 내리쳤다.

무서운 위력을 가진 일격이었다. 물론 빈틈없이 막아낸 왕비였으나,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팔이 저릴 정도의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인간이 내는 힘이 아니다.

레티시아가 느꼈던 기색은 틀림이 없었다고, 절실히 전해져 온다.

이전의 오론은 간사한 지혜를 가진 왕이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 계산도 없다. 그런 머리는 아마도 남아 있지 않다.

정체 모를 사악한 것에 씌어, 아마도 본래의 오론은 이미 예전에 죽은 것이다.

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아직 본래의 오론이었다── 혹은 아직 냉정한 두뇌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오르테스를 마레바 성채에 넣는다는 전략을 생각해 낼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얼굴을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왕비의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던 이성도 영혼조차도 놓아버렸는지, 지금의 오론은 그저 원한으로 움직이고 있는 악귀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처리가 어려웠다.

(밉다!)

오론이 발하는 검은 파동이, 델피니아 군의 용사들에게까지 전해져 온다.

격렬하게 리와 무기를 맞부딪히는 오론의 옆에서 루가 문답무용으로 덤벼들었다.

절대로 빗나갈 리가 없는 일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론은 있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이것을 막았다. 전광석화와 같은 빠르기로 창을 끌어 당겨, 한 손으로 루를 노린 것이다.

창술의 이론도 사람의 신체 구조도 완전히 무시한 움직임이었다.

루는 리에게 검을 가르친 스승이다. 그 두 사람이 전력으로 공격하고 있는 데도 오론은 아직 쓰러지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두 사람을 밀어 붙이고 있기 까지 하다.

격렬한 난투에, 따라 잡은 델피니아 군의 용사들도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주위에 흩어진 무서울 정도로 강인한 오백 기를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긴 했지만, 국왕은 초조하게 외쳤다.

! 라비 경!”

그 목소리가 무언가의 자극이 된 것인지, 오론의 모습이 갑자기 흔들렸다.

갑옷을 걸친 오십 대의 남자인 오론의 얼굴에, 추악하게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이 흔들리며 겹쳤던 것이다.

(용서 못한다!)

저주로 가득 찬 목소리가 확실히 들렸다.

(서자인 주제에……! 용서 못한다! 밉다!)

국왕은 숨을 들이켰다.

명백하게 육신을 가진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이상으로 창백해진 것이 발로였다.

지금 그것이 누구의 얼굴인지, 누구의 목소리인지, 진저리 날 만큼 그는 알고 있었다.

틸레든 기사단장인 발로가 말 위에 있으면서, 싸우는 것을 잊고 검을 축 늘어뜨렸다.

그런 발로의 옆에서 싸우고 있었던 나시아스도 입을 딱 벌리고, 창백해져 있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은 여자로서의 전성기는 지났으나, 고혹적인 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숨을 삼켰으나, 나시아스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말의 배를 걷어차서 발로의 곁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에게서 발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일개의 기사단장인 자신과 국왕의 사촌동생인 발로라면 어느 쪽이 살아남아야 하는가,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되는가, 나시아스는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발로가 기력을 되찾아, 낮게 신음했던 것이다.

“……원령이 되어서까지 형님을 저주하는가, 어머니여!”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검을 꼬나쥐고, 발로는 애마를 걷어차 오론을 목표로 돌진했다. 그 오론과 격렬한 칼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왕비가 외친다.

오지마! 단장!”

무슨 소리를 하는가! 저 여자가 원인이라면, 내가 이 손으로 결말을 짓겠소!”

안돼, 역효과야!”

루도 날카롭게 외쳤다.

에디가 말하는 대로야, 떨어져요!”

루는 자신의 말을 발로의 말 앞으로 끼어 들게 하여 억지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

유감스럽지만, 저 사람은 호랑이 씨를 봐도 기뻐하지 않아요. 화나게 만들 뿐이지.”

저 여자가 화를 내고 있지 않았던 적 따윈 없어!”

발로도 죽은 어머니의 지나친 모습에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죽은 어머니가 사촌 형에게 복수하고 싶기 때문에, 적국의 왕에게 씌어있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보아 가의 명예를 걸고, 이런 것을 방치할 수 없다. 자신의 손으로 정리하려고 벼르고 있었으나, 루는 발로의 말의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의 가는 팔인데, 발로도 뿌리칠 수 없는 굉장한 힘이었다.

호랑이 씨. 저 사람은 이미 죽었어요. 알겠어? 어머니의 의지로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바보 같은……!”

일그러진 조소를 띄운 발로였다.

그럴 리가 없어. 저 여자가 형님을 미워하고 미워하여 원한 속에서 죽은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루는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에게는 이미 의지가 없어요. 그저, 남겨진 원한이 너무 강해서── 거기에 좋지 않은 것이 들러붙은 거야. 저 사람의 사념이 이용당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저 여자라는 것에는 틀림이 없어.”

그렇다고 한다면, 호랑이 씨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뭐라?”

조복시켰으면 좋겠어? 아니면── 구하고 싶어요?”

발로는 가벼운 놀라움을 느끼며 루를 보았다.

물론 조복이다── 라고 순간적으로 말할 뻔 했지만, 그것은 힘으로 억지로 퇴치한다는 뜻이다.

정말로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국왕이 말한 것처럼 죽은 자로써의 당연한 권리를, 편안한 잠조차 빼앗겨 조종당하고 있다고 한다면…….

발로는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신음하듯이 말했다.

구할 수 있다면 구해줬으면 한다. 아들로써…… 내가 어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다.”

고마워요.”

검은 옷차림의 천사는 미소 지었다. 왜 감사를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아름다운 미소였다.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 사이, 리는 혼자서 오론을 상대하고 있었다.

오론이 싸우는 모습이 상도(常道)를 벗어나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명확했다.

그 왕비가 방어 일변도로 내몰리고 있다.

주위의 구경꾼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가세하려고 했지만, 자신들이 손을 댈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유일하게 끼어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국왕 단 한 사람일 테지만, 저건 자신의 검이 아니면 벨 수 없다고 왕비는 말했다. 아무리 속이 타도, 전전긍긍하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왕비는 냉정했다.

상식을 벗어난 힘으로 밀어붙여 오는 상대에게 정면에서 힘으로 대항해도 소모될 뿐이다.

보통 인간이라면 몸통을 일도양단 당할 만한 공격을 능숙하게 흘려 받아내고, 결코 결정타를 조급해 하지 않으며, 끈기 있게 오론에게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흑왕이 그런 왕비에게 힘을 빌려 주었다. 다른 말이라면 이미 예전에 밀렸을 테지만, 로아의 흑왕은 역시 대단했다. 고삐도 걸지 않고 있는 기수와 호흡을 맞추어 인마일체(人馬一體)의 공방을 펼치고 있다.

거기에 루가 달려왔다. 왕비가 오른쪽에서, 루가 왼쪽에서, 번갈아 교대하며 황금의 섬광과 검은 번개가 불꽃이 튈 정도의 예리함과 격렬함으로 오론을 공격한다. 이 두 사람을 혼자서 상대하고 있는 지금의 오론은 그야말로 <광전사(狂戰士)>라고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계기를 만든 것은 루였다.

오론의 뒤를 노리고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으나, 그 순간, 오론의 목과 상반신이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각도로 홱 돌아서 이 일격을 막았다.

그 결과, 정면의 방어가 소홀해 졌다.

불과 한 순간이었지만, 그 틈을 놓칠 왕비가 아니다.

바로 말의 배를 걷어찼다. 흑왕도 동시에 반응한다.

순식간에 검의 간격을 좁혀, 왕비는 비스듬히 옆을 향한 오론의 몸통이 이쪽을 향하기 전에, 힘껏 그 몸통을 잘라 버렸던 것이다.

충분한 일격이었다.

그런데, 치명상의 깊이로 베었는데도 불구하고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는다.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퍼졌다.

이런 현장은 몇 번이고 목격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기괴함을 바로 눈치챈 것이다.

왕비의 일격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 하고 지면에 쓰러진 오론의 주위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발생했다.

토필(土筆)[6]이 쑥쑥 지면에서 얼굴을 내밀듯이, 기분 나쁜 검고 흐물흐물한 것이 오론의 몸을 감싸듯이 솟아올라온 것이다.

구경하는 델피니아 군의 병사들은 이번에야말로 비명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왕비는 크게 얼굴을 찡그렸다. 루도다.

두 사람은 오론이 쓰러짐과 동시에 말에서 뛰어 내려, 빼어 든 검을 든 채로 오론에게 가까이 걸어 다가갔다.

“……어느 쪽이 할까?”

동시에. 그 편이 확실해.”

두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게 되어 버린 오론의 몸통에, 다시 한번 검을 찔러 넣었던 것이다.

그 순간, 오론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뼈도 남지 않고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남은 것은 지면에 꽂힌 두 자루의 검뿐이다.

그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리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다.

엄청 애먹이네…….”

무척 피곤한 목소리였다.

얼굴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떠올랐고, 가슴이 파도치고 있다.

월등히 뛰어난 전투능력을 자랑하는 이 사람이라도, 상당한 체력을 소모하는 싸움이었음이 틀림없다.

검은 지면에 꽂은 채, 리는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격렬한 호흡을 반복했다.

언제나 태연한 검은 천사도 숨을 헐떡거리며, 하얀 얼굴에 배어난 땀을 닦고 있다.

오론의 시체가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을 눈 앞에서 목격하여, 델피니아 군의 용사들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 외의 기괴한 결말에 왕비의 승리를 칭송하는 것도 잊은 채 망연히 서있었던 것이다. 단 한 사람, 월은 이 전쟁을 시급히 끝내는 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칠 새라 소리쳤던 것이다.

검을 거둬라! 오론 왕은 전사했다!”

이 우렁찬 목소리를 듣고, 델피니아 군 병사들이 활기를 되찾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큰 목소리로 떠들며 돌아다녔다.

오론 왕은 죽었다!”

우리들의 왕비님이 오론 왕을 쓰러뜨렸다!”

이 이상의 싸움은 무익하다!”

투항해라!”

권고는 했지만, 오론의 측근을 맡았던 정도의 기사들이니 마지막까지 충의를 세워서 저항하는 일도 생각할 수 있다.

델피니아의 기사들은 한번 더 일전을 벌일 각오도 했으나, 의외로 파라스트의 정예들은 순순히 권고에 따라 투항하였다. 정확히는,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오론의 유체가 소실함과 동시에, 그들을 강제로 이끌고 있던 정체 모를 충동도 사라진 듯 하다.

제정신을 차린 그들은 말에서 내리는 것도 겨우겨우 인 모습으로, 말에서 내림과 동시에 쓰러져버린 자조차 있었다.

장 시간 동안 계속해서 한계를 넘은 육체를 혹사시켜온 ()()()이 돌아온 게 틀림없다. 조금만 더 싸움이 길어졌다면, 그들은 아마도 말 위에서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문득 정신이 드니 주위가 묘하게 조용해져 있었다.

싸움터는 꽤 넓어져 있다. 오론의 이상한 죽음을 다른 파라스트 군대가 눈치챘다고도 생각할 수 없는데, 월이 있는 곳으로 헐레벌떡 전령이 달려왔다.

폐하! 적이── 적이 사라졌습니다!”

뭐라?”

전령이 새파란 얼굴로 말하기를, 자신들과 싸우고 있던 파라스트 군대의 실로 절반 이상이 돌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것도, 그 사실에 같은 파라스트 병사들이 놀라고 당황해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국왕은 귀를 의심하는 기분으로 그 보고를 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루를 보았다.

“……라비 경. 이것도 요술인가?”

그래요. 큰 몸통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 여파도 사라진 거야.”

루는 지면에 꽂힌 검의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옆에는 리가 있다. 팔짱을 끼고, 지면에 꽂힌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 있다. 어째서인지 빼려고는 하지 않는다.

루도 마찬가지였다. 꽂혀있는 검 주변의 지면을 조사하듯, 땅을 만지고는 일어섰다.

임금님이 싸우고 있었던 십만의 파라스트 병사들 중, 진짜 병사는 오만도 되지 않았어요. 나머지는 전부── 파라스트의 임금님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것들이야.”

국왕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이런 요술을 누가 건 것이냐?!”

아무도 아니에요.”

?”

루는 말 위의 국왕을 올려다 보며 고개를 저었다.

주모자를 찾고 있다면, 이 건에 범인은 없어요. 파라스트의 임금님과 호랑이 씨의 어머니가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 세계에 자연적으로 생긴 뒤틀림 탓이에요. ── 그뿐이야.”

바보 같은! 그것만으로 십만의 병사는 동원할 수 없어!”

월의 목소리가 거칠어졌으나, 루는 전령에게 물었다.

그 사라진 적은, 당신들과 싸우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모습이 사라진 건가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아름다운 얼굴에 전령은 눈을 크게 뜨고, 이 사람은 누구인지 의아해하고 있었으나, 국왕과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이다. 경어로 대답했다.

아니요. 저희들과 싸우고 있던 군대의 배후 부대입니다. 틀림 없이 수천의 병사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대부대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루는 그쵸?”라고 국왕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임금님도 깃발만 성대하게 걸고, 실제로는 없는 병사가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전술을 쓰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야.”

기마술의 달인인 월이 안장 위에서 저도 모르게 자세를 무너뜨려, 말 등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자신의 발로 서 있었다면 힘이 빠진 나머지 무릎을 꿇었을지도 모른다고 실감하면서, 낮게 신음했다.

──위병(僞兵)인가? 오만이나 되는 위병에게 속아 내 백성들은 나라를 잃을 뻔했단 말이냐…….”

아네요. 그것 만이 아냐. 육신을 가진 병사들도 파라스트의 임금님에게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게 틀림 없어요. ──당신들과 싸우고 있었던 적은 어떻죠?”

루가 묻자, 전령은 곤혹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그것이 갑자기, 전투 중지를 요청해 왔습니다. 아무래도 간사한 지혜로 알려진 오론왕인지라, 이것도 무언가의 계략일지도 모른다고 조심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습니다.”

현재, 각 방면에서 전투는 중단되고 있다고 한다.

어쩐지 아까부터 함성소리도 말발굽의 울림도 들리지 않고, 묘하게 조용해져 있다 했다.

움직이는 시체도, 이제 움직이지 않게 됐죠?”

. 하지만 저…….”

전령은 정체불명의 미인에게, 매달리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또 움직이거나 하는 건?”

괜찮아요. 요술을 사용하고 있던 오론왕은 사라졌어요. 그 죽은 자들은 술법에서 해방되었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전해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중에 평범하게 매장할 수 있어요.”

!”

전령은 한숨 놓은 듯한 얼굴로 떠나버렸다.

예상 외의 결말에 국왕은 망연자실해 있었지만, 훨씬 얼굴색이 바뀐 사람이 있다.

──그 여자가 원인이었나?”

발로는 그답지 않은, 공포로 굳은 새파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상식을 벗어난 원한 탓에……. 이런 사태를 일으켰단 말인가?”

아니야. 당신 어머니는 원인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유감스럽게도 이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않은 듯, 발로는 재빠르게 말에서 내려 말 위의 국왕에게 진지한 얼굴로 다가간 것이다.

형님. 저를 마음껏 때리고 차 주십시오.”

종제님……. 무리한 말씀 마시게.”

아니요. 제 책임입니다. 그 여자가 형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방치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 책임입니다.”

격렬한 후회에 커다란 몸을 떨고 있는 발로의 뒤에서, 더욱 새파란 얼굴을 한 로자몬드가 끼어 들었다.

그녀는 아까 전의 남편과 루의 대화를 들었던 것이리라. 마찬가지로 말에서 내려 월의 앞으로 나아왔다.

폐하. 사보아 공보다 먼저 부디 저를 마음껏 때리고 차 주십시오. 부탁 드리겠습니다.”

어깨를 털썩 늘어뜨린 월이었다.

“……벨민스터 공. 나에게 평생, 성의 여자들에게 원망 받으며 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

진지한 로자몬드는 표정을 굳히고 있다.

저는 시어머님과 편지 왕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려고 한 일이었습니다만, 어머님이 폐하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사보아 공 이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면 상이라고는 하나, 어머님이 폐하에 대하여……. 얼마나 무례한 문구를 늘어놓고 있었는지, 그것을 알면서도 간하지 않았던 겁니다.

본래라면 보고할 의무가 있는 것을, 가여우신, 불우한 분이라면서 동정조차 느끼고 있었습니다.”

국왕은 양손을 들고, 이 닮은꼴 부부를 어떻게든 달래려고 했다.

그걸로 되었네. 자네의 대처는 틀리지 않았어. 물론, 종제님도다.”

하지만 형님!”

폐하!”

그걸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며 이구동성으로 호소하는 두 사람 앞에, 검은 천사가 나아왔다.

호랑이 씨.”

씁쓸한 표정의 발로를 바라보며, 루는 미소 지었다.

다음에,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 성묘를 와요.”

로자몬드가 퍼뜩 놀라며 남편을 본다.

발로는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고, 비꼬는 듯한 시선으로 상대를 마주보았다.

그것은 명령인가, 루퍼스 라비?”

당신에게 명령할 수 있는 건 임금님 한 사람뿐이잖아요. 이건 내 부탁.”

“………….”

당신의 어머니는 그다지 현명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건 틀림 없지만, 극악무도한 사람이었던 것도 아냐. 정말로 그저, 불쌍하기만 한 사람이었어요.”

“………….”

어머니를 용서하라고는 하지 않아. 사랑하라고도 하지 않고. ──그래도, 가엾이 여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코웃음을 친 발로였다.

그거야말로 그 여자가 가장 싫어할 만한 일이라고.”

하지만, 당신은 그것 조차 해주지 않았잖아요. ──혐오만 하고.”

멸시하기도 했지.”

루는 조금 달래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호랑이 씨. 어머니는 이제 없어. 당신에게도, 당신의 아이들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에요. ──그보다는, 아버지가 언제까지나 돌아가신 할머니를 송충이 보듯 싫어하는 편이 아이들의 교육상 좋지 않은 거 아녜요?”

발로는 아에라 공주가 존명인 중에는, 한 번도 아이들을 공주에게 만나게 한 적이 없다.

발로로써는 만나게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종제님. 나도 부탁하네.”

월이 말을 내려, 발로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숙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종제님의 태도가 완고했던 것을 간과해 온 나에게도 잘못이 있어. ──설마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네. 하지만, 숙모님은 돌아가신 거야. 이 이상, 종제님이 언제까지고 숙모님에게 구애 받을 필요는 없네. 이제 슬슬, 자네의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게.”

발로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형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할 수 없지요. 확실히 성묘 정도라면 가도 해는 없을 테니까요.”

로자몬드가 겨우 안도하며, 감사의 눈빛을 루와 월에게 보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월 그리크는 파라스트 군의 주요한 장수들을 모아 협의에 착수했다.

본래라면 파라스트까지 가서 종전 후의 조건 등을 정하고 싶었지만, 파라스트에게 있어서 이번 패배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국왕인 오론이 전사한 것이다.

패배 중에서도, 가장 심한 대패(大敗)이다.

우선은 오론 왕의 장례를 치르고, 차기 국왕을 즉위시키지 않으면 안되겠지. 모든 일은 그 다음이다.”

델피니아로써도 배상금을 지불해 줄 책임자가 빨리 정해지지 않으면 곤란한 것이다.

차기 국왕의 즉위 후에 전쟁의 배상에 관해서 다시 의논하고 싶다고 월은 제안했고, 남은 파라스트의 장수들은 감사하며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오론이 죽었다면, 파라스트의 누구도 월 그리크와는 싸울 수 없다.

승부를 걸어 보았자 승산이 없다.

그것은 제정신을 차린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델피니아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도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들로써도 전혀 설명할 수가 없다고 한다.

주군의 갑작스러운 결심에 의해, 델피니아로의 침공이 결정되어…….”

월 폐하와 싸워도 우리나라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고, 불이익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주군이 그런 결심을 하셨는지…….”

델피니아와는 적대의 길이 아닌 친교를 맺어 두어야만 한다고 의회의 의견도 일치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저희들에게도 뭐가 뭔지…….”

흐름이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말씀 드려야 할까요. 정신을 차리니 이 땅에서 월 폐하와 싸워, 패배하고 있었습니다…….”

국왕과 함께 그들의 주장을 들었던 발로는 벌레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농담 같은 주장이었으나, 당사자들이 정말로 곤혹스러워 하며 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만큼 불평도 할 수 없다.

발로도 왕좌의 바로 옆에서 태어나 자란 사내이다.

전쟁뿐 아니라 정치가 일종의 생물이라는 것도, 때로는 군주의 의사조차 무시하고 폭주해 버린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어쨌건, 델피니아는 승리한 것이다.

파라스트의 장수들도 후일, 패전국으로써 협의를 할 것을 받아들였지만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신속하게 나라로 돌아가, 국왕의 붕어를 국내에 알리고 새로운 국왕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데, 장례식을 치르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오론의 유체가 없다.

국왕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그래서는 너무 겉보기가 나쁘다.

관을 하나 준비해 줄 수 없겠냐고 그들은 고개를 숙여 부탁했고, 월도 이것을 승낙했다.

군주의 죽음을 애도하는 증거로서 무언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있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관이 빈 채이면 멋이 없다고 하여, 오론이 죽은 장소의 흙을 관에 채웠다.

이것은 루의 제안에 의한 것이다.

이 때까지 루와 리는, 자신들의 검을 지면에 꽂아 놓은 채였다. 사람들을 가까이 다가오지 않도록 명하고 보초까지 세우고 있었지만, “슬슬 괜찮으려나.”라며 검을 뽑고 날에 붙은 흙을 닦았다.

파라스트 진영에 있어서도 오론의 유체의 소실은 이해할 수 없는 괴기현상이었다. 하지만 그 장소에서 오론이 죽고, 유체가 사라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제안에 따라, 현장의 땅을 관에 채워 넣고 조국으로 가지고 돌아가기로 하였다.

이런 일들을 정하고, 월은 측근들을 데리고 브라시아의 저택으로 행했다.

여기에서는 비전투원이 몇 명이나 일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머나먼 남쪽 나라에서 끌려온 여자도 있다.

주인이 패배함으로써 자신들은 어떻게 될지, 모든 얼굴들이 겁을 먹고 파랗게 질려 떨고 있었다.

월은 파라스트 사람인 하인들은 그 자리에서 해방하고, 여자들은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수배를 했다.

여자들이 울면서 감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저택 안은 오론이 가지고 온 보물들로 넘치고 있었다.

파라스트의 금화는 물론, 금은세공된 잔과 향로, 보석으로 상감(象嵌)된 태도(太刀), 갑주 등,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저택의 주인인 발로는 그것을 그대로 전리품으로써 거두어 달라고 월에게 요청했다.

저는 이 저택만 돌려주시면 충분합니다.”

셰라는 리를 따라 머뭇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왔는데, 솔직히 당황했다. 어젯밤과는 달리 밝은 태양빛이 비추고 있는 탓인지, 오론이 없는 탓인지, 그 기분 나쁜 느낌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젯밤과는 꽤 상태가 다릅니다.”

변명 같은 말을 살짝 리에게 속삭인 정도였지만, 리도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나도 그렇게 나쁜 기운은 느끼지 않아. 다만…… 냄새가 지독하네.”

어젯밤, 셰라도 느꼈던 향냄새이다.

최고급의 향이지만, 리에게는 불쾌한 것 같다.

발로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적국의 왕의 흔적이 농후하게 남아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리라. 바로 저택 안의 창문을 열어 젖히도록 시종들에게 명했다.

안쪽의 거실에도 오론이 가지고 온 호화스러운 가구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악기도 몇 개 있었다.

루는 악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마침 잘됐네. 뭔가 노래할까?”

리와 셰라가 얼굴을 빛냈다.

월도 환히 웃었다.

라비 경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건가?”

아아, 각오하라구. 그렇게 자주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도 불러올게.”

왕비가 분주하게 당장 와!”라고 소집을 걸었기에, 다들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한 듯 하다.

도라 장군을 선두로, 발로, 이븐, 나시아스, 샤미안, 로자몬드, 그 부관들도 얼굴 색이 변해서 모였던 것이다.

그 때에는 셰라가 응접실에 의자를 늘어 놓고, 리와 월은 정면의 특등석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로가 이상하다는 듯 물어왔다.

형님, 무슨 일이 시작되는 겁니까?”

우선은 앉게. 그 다음엔 귀를 기울이고.”

모두 어리둥절해 했지만, 악기를 고르고 있는 루를 보고는 납득한 듯 했다.

하지만 동시에 맥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저택 바깥에서는 전투가 막 끝난 참이라, 시체도 아직 들판에 버려둔 채이다.

이 살벌한 상황에서 연주회라니 참 별나다고 누구의 얼굴에도 나타나 있었지만, 이 검은 옷의 사람은 왕비와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이다.

십 년 전에는 루를,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종류라 그다지 탐탁지 않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던 로자몬드가 가장 먼저 국왕의 뒤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삼가 듣도록 하지요. 천계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요.”

로자몬드의 말에 모두 납득하고 자리에 앉았다.

가렌스와 아스틴, 타르보 들은 입구의 옆에 눈에 띄지 않게 서있다.

루는 악기 하나를 골라내어 의자에 앉았다. 악기를 안고, 조율하며 현을 튕기니, 경쾌하고 맑으며 요염한 음색이 울린다. 과연 풍류를 알았던 오론의 소유물답게, 꽤 좋은 명기인 것 같다.

그 음색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루가 미소 지으며, 청중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말했다.

임금님의 승리를 축하하며. 그리고, 이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진혼가를 한 곡 부르겠습니다.”

하얀 손끝이 화려한 음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숙련된, 훌륭한 솜씨였다.

이 연주만으로도 충분히 귀를 기울일 가치가 있었지만, 그 음에 얹어 루는 가사가 없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목소리이다. 반짝반짝 빛나며 졸졸 흐르는 개울 소리나 상쾌한 산들바람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이다.

모두 호오…….”라고 감탄하며 눈을 크게 떴지만, 그 가벼운 놀람은 곧 커다란 경악으로 바뀌었다.

검은 천사는, 맨 처음만은 힘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울이 흐르는 소리는 금방 큰 강이 되었고, 산들바람은 드높이 울려 퍼지는 황금의 악기로 변모하여 간다.

등골이 오싹하게 떨리는 것을 셰라는 느꼈다.

이 사람이 노래하는 것을 듣는 것은 처음이 아닌데도, 온몸을 맴도는 감동은 지금까지와는 격이 틀렸다.

도저히,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셰라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청중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지고(至高)한 목소리에 아연해했다.

사람은 뛰어난 기량에는 솔직하게 감동할 수 있지만, 예상을 아득히 넘은 충격에 마주치면 반대로 반응할 수가 없다.

혼을 움켜 잡혀 버리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그 목소리로 루가 노래하기 시작한 것은, 청중들 중 그 누구도 모르는 언어로 된 노래였다.

그래서 의미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관계 없다.

말은 이해할 수 없어도, 그 말을 발하는 목소리의 교태와 표정, 노래가 나타내는 언령(言靈)은 그 무엇보다도 웅변적으로, 힘차게, 듣는 사람의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다.

청류(淸流)의 상쾌함, 고동하는 대지의 압도적인 박력과 중후함, 바람에 흩날리는 가랑 눈의 청명함, 정화의 불꽃의 사납고 장엄한 춤── 그런 상반되는 요소가 차례대로 나타나 청중들을 채간다.

누구 한 사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황홀히 넋을 잃고 듣는다기 보다는, 그저 한결같이 숨을 삼키며, 전율하며, 이 노랫소리 앞에 넙죽 엎드리고 싶어지는 듯한── 그 정도로 매력과 기백으로 가득 차있다.

국왕도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전에 들었을 때에도 훌륭한 목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 때와는 박력의 격이 다르다. 이 사람이 이 정도의 역량의 소유자였다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지만, 이것은 더 이상 노래라는 기예(技藝)의 틀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신의 영역이라고 실감하면서, 월은 그 노랫소리에 순순히 몸을 맡겼던 것이다.

이 때, 저택의 뒤뜰에서 레티시아와 반츠아도 이 노래를 듣고 있었다.

오론이 소실되고 저택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호기심에 확인하려고 했더니, 저택 안에서 노래가 들려왔던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멈춰 섰더니,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노랫소리에 놀라 눈을 크게 뜬다는 난생 처음의 체험을 맛보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렇게나 불쾌했던 뒤뜰의 흙과 녹음이, 공기까지가 순식간에 정화되어 싱싱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마음속까지 노래가 물밀듯이 차오른다.

노래 따위에 동요하는 자신이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또 불쾌하지 않은 것이다. 불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좀더 듣고 싶다고, 언제까지나 이 노래 속에 있고 싶다고 느껴 버리는 자신이 더 믿을 수 없었다.

목소리가 잠깐 끊긴 간주 시간에, 레티시아는 신음했다.

“……어처구니가 없구만.”

“………….”

이런 걸 방치하는 건 위험해서 안되겠네. 이쪽 세계였다면 마물 취급 당했겠는데. 왕비 씨가 고삐를 쥐고 있는 정도가 딱 좋아.”

반츠아는 자신의 목소리에 감동이 담기지 않도록 최대한으로 주의하며── 즉 억지로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그 왕비의 고삐를 쥐고 있는 게, 이 가수다. 확실히 딱 좋군.”

보아하니, 푸른 하늘에 몇 줄기나 되는 하얀 연기가 올라가고 있다.

그 큰 나무통이 불태워지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것처럼 보여도, 이 저택까지는 그 지독한 냄새도 닿지 않는다.

이 노래는 바람에 실려, 저 연기와 함께 하늘까지 올라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지에 내리 쏟아져, 주술의 영향을 받은 토양을 치유하고 청정한 상태로 되돌릴 것이다.

불우한 최후를 맞은 죽은 자들을 떠나 보내는 데에는, 이 이상의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여운을 머금은 노랫소리가 끝나고, 현의 울림이 사라져도 청중들은 움직이는 것을 잊고 있었다.

바늘이 떨어져도 들릴 만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왕비가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다.

꿈에서 깨어난 듯한 심경의 국왕을 필두로, 전원이 즉시 일어서서 아낌없는 칭찬을 검은 천사에게 보낸 것이다.

비꼼의 명수인 발로조차 감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지금의 노래를 극구 칭찬했던 것이다.

훌륭해── 실로, 훌륭하였소!”

드물게 전력으로 노래한 루는 조금 숨을 몰아쉬며, 기쁜 듯이 미소 짓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리가 앞으로 나아가, 연주할 동안 맡아두고 있었던 파트너의 검을 건네주었다. 루가 받아 들어 허리에 찬다.

국왕과는 가벼운 대화가 많은 왕비이지만, 이 사람과는 무언인 채 대화가 끝나 버리는 것 같았다.

그 두 사람의 모습에 무언가 느낀 것인지, 도라 장군이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루에게 말을 걸었다.

비전하를 마중 나오신 것인가…….”

.”

일동, 서로 마주 보았다.

너무나 극적인 등장과 오론과 싸웠던 훌륭한 솜씨, 게다가 지금의 숭엄한 노랫소리를 들은 후에는, 누구나 이 검은 옷의 사람에게 불만은 말할 수 없다.

하물며 항의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용감하게도, 국왕이 앞으로 나서는 것보다 빨리 로자몬드가 왕비에게 호소했던 것이다.

코랄에도 비전하의 귀환은 이미 전해져 있을 겁니다. 그런데 비전하가 코랄에 모습을 보이시지 않고 천계로 돌아가셨다고 사람들이 알면……. 최악의 경우, 폭동이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싸움이 끝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마음을 일상으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로자몬드는 나라를 대표하는 공작으로서 성실한 의견을 늘어놨지만, 본심은 조금 달랐다.

그 본심을 샤미안이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

비전하를 모시지 않고 코랄로 돌아갔다가는, 저희들은 평생, 폴라 님과 라티나 님에게 원망 받아 버릴 겁니다. 아란나 님에게도요.”

바로 그겁니다.”

로자몬드도 무섭도록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 분 모두 실로 숭고한 숙녀이십니다만, 그만큼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남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격한 태도로 임하십니다. 라티나 기사단장의 여동생 분에 이르러서는 사보아 공조차 한 수 접어 두는 진정한 용사입니다.”

대가(大家)의 주인인 로자몬드는 검과 활로 해결하는 전쟁 이외에도, 미소와 언어를 구사하는 어려운 싸움도 특기이지만, 그런 그녀가 그 세 명의 여성을 적으로 돌리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고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시아스도 이 사람치고는 드물게 푸념을 흘렸다.

저도 부탁 드리겠습니다. 이런 일을 여동생이 알면……. 절연을 선언 당할 겁니다. 여동생만이라면 또 몰라도, 아내까지도 가세한다면, 부끄럽지만 승산이 없습니다.”

홀의 입구에서 캐리건도 조마조마해 하고 있었다.

발로가 이쪽을 돌아보며, 너도 무언가 말하라고 몸짓으로 지시해 왔으므로, 신분이 높은 분들의 앞이기는 하지만, 머뭇머뭇 앞으로 나서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비전하. 누이는 지난 십 년, 비 전하를 누구보다도 그리워해 왔습니다. 어린 조카들도 누이에게 비전하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어, 누이와 마찬가지로 비전하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부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초상화로 밖에 비전하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모습을 보여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이것도, 진심은 조금 다르다. 그의 누나는 원래 화내면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왕비가 얽힌 일이 되면 생각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는다. 자기 혼자만 왕비와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고 폴라가 아는 날에는, 어떤 꼴을 당할지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물론, 누구보다고 열심히 꼬신 것은 국왕이었다.

제발, . 너를 데리고 돌아가지 않으면, 이 검을 걸어도 좋지만, 최저 앞으로 십 년은 이어질 가정 내 불화의 원인이 될 것은 자명해. 부탁한다.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코랄까지 와 줄 수 없겠어?”

필시 떨떠름해 할 것이라고 생각했더니, 왕비는 분연히 말했다.

말 할 필요도 없어. 일단 코랄로 간다.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산처럼 있으니까 말이야.”

[1]공출(供出) : 국민이 국가의 수요에 따라 농업 생산물이나 기물 따위를 의무적으로 국가에 내어놓는 것.

[2]강가(降嫁) : 지체가 높은 집안의 딸이 자기보다 낮은 집안으로 시집감. 주로 왕족의 딸이 신하의 집으로 시집가는 것을 이른다. 이 경우, 여자의 신분은 시집간 집안의 신분으로 내려간다.

[3]수미(愁眉)를 펴다 : 찌푸렸던 얼굴을 펴다. 상태가 호전되어 안심하다.

[4]구외불출(口外不出) :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뜻으로, 비밀을 지킴을 이르는 말.

[5] 귀축(鬼畜) : 아귀(餓鬼)와 축생(畜生)을 아울러 이르는 말. 야만적이고 잔인한 짓을 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6]뱀밥. 쇠뜨기 홀씨의 줄기. 빛깔은 희고 연하며 마디진 줄기 꼭대기는 붓 모양으로 생겼다. 약용하거나 식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