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절 왜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미국 리서치기관에서 18세 이상 교인들에게 왜 예배에 참석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중 80퍼센트가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싶어서라고 답했습니다.

한 주간 더위와 일터에서 지치고 힘들었는데 오늘 왜 예배에 나오셨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돌아가면 예배를 드렸어도 왠지 심령이 허전하죠.

그런데 하나님을 느끼려면 하나님이 실제로 임재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느낌을 가지려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끼고 싶은 마음으로 예배에 나오셨다면 잘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20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고 예배하는 곳에 반드시 하나님은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제물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진실 된 마음으로 d 시간 예배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곳에 임하셔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예레미야서에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 말씀 이후 역시나 회개하지 않은 남유다에 멸망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들이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했더라면, 제사장들이 정직하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쳤더라면 그들의 운명은 달라졌겠죠.

예배드리는 이 시간 이곳에 임재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느끼고 새 힘과 믿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던 예레미야는 결국 체포되어 시위대 뜰에 갇혀 있습니다.

본문 앞 32장을 보면 현재 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들은 이미 처참히 짓밟혔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유일하게 이 예루살렘 성입니다.

그런데다 대고 이 성이 망할 것이다, 항복하라고 외쳐대는 예레미야선지자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완전히 국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반역자인 것이죠.

게다가 마지막왕 시드기야에게 당신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왕이 잡아다 왕궁 시위대 뜰에 가둬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는 게 참 힘든 일입니다.

살아가며 점점 더 깨닫게 되는 것이 사람들은 바른 말 듣기를 정말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뭘 잘못하고 있는지 조언하는 것도 점점 피하게 됩니다.

자식들도 어릴 때나 잘못을 엄하게 꾸짖지 나이 들면 지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릴 때 잘 가르치시길 권고드립니다.

저도 가능하면 성경 중에서 편안한 부분을 골라서 설교하는 편입니다.

성경엔 사실 우리의 잘못을 책망하는 부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도 그러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믿지 말고 스스로 성경을 펴서 책망하는 말씀을 많이 들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이스라엘이 당하는 이 뼈아픈 실패를 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왜 예레미야선지자를 시위대 뜰에 가두고 비난과 수모를 당하게 하셨겠어요?
예레미야의 입장에선 야속한 처사이지만 하나님은 망해가는 자기 백성들 귀에 끝까지 옳은 말을 들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당하는 이런 극한 고난은 사람들이 그만큼 악하다는 것과 그런 중에도 하나님이 끝까지 노력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성 중에 갇혔던 관계로 예루살렘성의 멸망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통한 심정의 예레미야애가를 기록한 것입니다.

불신앙과 죄의 종말을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교훈을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위로도 경고도 모두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어떤 말씀이든 겸손히 받고 자신을 고쳐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예레미야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두 번째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말씀이 있었겠죠.

첫 번째 말씀의 내용은 바로 앞장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숙부가 찾아올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숙부가 찾아오는 데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한테 자기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좀 어이없는 사람이죠?

예레미야는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인데 땅을 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말씀대로 감옥에 앉아 증서를 쓰고 땅을 매입합니다.

시위대 뜰에 둘러선 사람들이 이 희한한 광경을 보고 있었겠죠.

그날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은으로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신 바 되었나이다

나라가 망했는데 이 땅문서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이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 이전처럼 땅을 사고 팔며 살게 할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민족이 지금 망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세우실 것을 예고하시는 것이죠.

본문2절은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만들고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그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위기가 바벨론제국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힘과 지혜를 모으면 살아날 구멍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단지 바벨론이 강하고 이스라엘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들만은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망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내가 나의 노여움으로 그들을 죽이고..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이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워서 얼굴을 가리고 지켜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을 징계하려고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실제로 함락되기 전 이미 성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계로 기근과 전염병이 돌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징계하고 연단하기 위해 시련을 주셨다면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을 다 써도 일이 해결이 안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을 대항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암석 산 위에 자리 잡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으면 공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군사들이 성벽을 넘기 위해 밖에서 토성을 쌓으며 올라옵니다.

밖에서 점점 높아지는 토성을 보며 이스라엘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넘어오면 다 죽는 거잖아요?

안에서도 성벽을 더 높이 쌓아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집과 왕궁을 헐어서 그 돌을 썼겠습니까?

이들이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어떤 문제상황은 하나님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인간적인 방법을 총동원해서 막아보려 해도 안됩니다.

때로 사방에서 일이 터지고 하나를 틀어 막으면 다른 데가 또 터집니다.

삶의 은혜가 부족하고 고충이 점점 더 심해진다면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방이 포위 된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생각해야 했잖아요?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경고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이 불신앙이고 종말의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내가 그 길을 올바로 걷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일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만들어 내시고 결국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성경에서 배운 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 선한 일을 이루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복된 얼굴을 늘 우리에게 향하시고 우리를 축복하며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뜻하시고 주관하시는 일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3절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부르짖어 구할 때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철칙입니다.

우리 같이 무정한 사람이라도 누가 절박하고 애타게 도움을 구하면 마음이 좀 움직이잖아요?

하물며 하나님이 귀중하게 보시는 성도들의 기도를 외면하겠습니까?

부르짖으라는 것은 사태가 절박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벼랑 끝의 심정으로 부르짖을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기도가 평온할지 모르지만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언제 또 부르짖어야 할 기도의 제목들이 생길지 모릅니다.

지금 간절히 부르짖는 마음으로 사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부르짖으라는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심을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준다는 확신도 없는데다 대고 부르짖는다면 좀 이상한 사람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예루살렘성은 사방으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믿고 부르짖었다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분명히 살았을 것입니다.

천주교의 타락이 최악으로 치닫을 때 마틴루터가 그 부패와 죄악을 공개하며 카톨릭에 맞서 종교개혁을 시작합니다.

영적 싸움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마틴루터는 가장 든든한 동역자였던 프레드릭 미코니우스에게서 죽을 병에 걸렸다는 유서와 같은 편지를 받습니다.

그가 없이 이 싸움을 끝까지 해 나갈 것을 생각하니 루터는 말할 수 없이 낙담했습니다.

그리고 종일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주시는 강한 확신을 얻고 프레드릭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사랑하는 친구 프레드릭이여,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다시 살 것을 명령하노라 너는 반드시 다시 살아서 이 일을 완수하라.’

이 편지를 받고 프레드릭은 거짓말 같이 병이 나아 루터와 끝까지 종교개혁을 완수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죽은 뒤 두 달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부르짖으면 삽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이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은 부르짖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훗날 다니엘은 이 예레미야서를 읽었습니다.

70년 뒤에 돌아오게 하신다는 말씀과 부르짖으면 응답하신다는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다니엘은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들은 말씀을 그대로 믿고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하시려고 가브리엘천사를 보내십니다.

당시 에스겔도 똑같이 하나님이 다시 포로들을 본토로 돌려보내 주신다는 약속을 예언합니다.

그때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여기서도 기도에 대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모든 축복들은 기도를 통해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가 그래서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기도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는 각종 은사와 축복을 받는 통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기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기도로 아버지께 나와 구하라고 우리를 권하십니다.

다시 마음을 굳게 결심하고 기도의 자리에 앉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부르짖으면 보여 주실 크고 은밀한 일에 대해서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나는 더 은밀한 계획이 있다 네가 부르짖으면 내가 그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급 비밀, 그러나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다 가르쳐 주고 싶은 은밀한 비밀이 무엇이겠습니까?

포로귀환에 대한 말씀은 이미 첫 번째 말씀에서 약속했기에 이 비밀이 단지 포로귀환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포로에서 다시 돌아오면 뭐하게요?

애굽포로에서 데려왔더니 결국 다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잖아요?

실제로 바벨론 포로에서 데려왔더니 또 범죄 해서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고, 나중엔 나라도 없이 이천년간 세계를 떠돌던 게 유대인들이잖아요?

이스라엘이 지금처럼 다시 그 땅에 돌아가 나라를 세운게 불과 칠십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애굽포로에서 가나안, 다시 바벨론포로, 또 가나안, 다시 세계의 유랑자, 그리도 지금 다시 가나안땅인 것입니다.

이게 계속 반복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앞 장에 보면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 가운데 있는 감옥에 앉아 자기 민족에 대한 실망과 절망을 쏟아 놓습니다.

이들이 다시 돌아온 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탄식인 것입니다.

사람을 어떻게든 가르쳐보려고 한 사람들은 때로 이런 벽에 부딪힙니다.

사람이 잘 변합니까, 잘 안 변합니까?

안 변합니다.

예레미야선지자는 40년째 이들을 향해 외쳤기에 너무나 잘 압니다.

그의 말대로 하나님께 돌이켰던 사람을 한 명도 얻지 못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탄식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걱정하지마라, 그때는 내가 아예 다른 마음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이죠.

그러니까 아무리 용을 써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고도, 은혜를 입고도, 결국 하나님을 등진다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을 안 믿고 등을 돌렸겠어요?

그냥 마음대로 죄 지으면서 사는 게 좋아서 그랬을까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도 마음대로 죄 지으면서 사는 게 좋은 사람들이잖아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편하고,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이상한 존재가 하나님입니다.

사람에게 세상에서 이해 못할 일은 없습니다.

세상 살이가 마음대로 안되서 그렇지 어렵고 모호한게 아닙니다.

세상 사는 것 다 빤하잖아요?

사람도 우리가 이해 못 할 만큼 깊고 신비로운 사람 없습니다.

사람도 만나보면 다 빤합니다.

다 죄인일 뿐이죠.

자연종교도 다 들어보면 이해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종교를 보면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게 훤히 보이거든요.

불교도 들어보면 잘 살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낸 종교라 아주 실용적이고 실생활에 더 잘 적용됩니다.

사람에겐 하나님만 가장 이해가 안되고 이상한 존재인 것입니다.

안 믿는 분들이 지금 그런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국으로 데려 갈라고 해도 답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꿔 놓으시는 것 밖엔 방법이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것을 지금 진행시켜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본문8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항상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깨끗하게 하고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이 행하실 크고 은밀한 일이 무엇인지 눈치채시겠죠?

15절에 그 비밀을 한 겹 벗겨 보여 주십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다윗의 후손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셔서 그 몸을 대속제물로 드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구원과 심판이 반복되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영원한 의를 입혀주시고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태생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감동하고 있는 범고래 이야기기 있습니다.

어미 범고래가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 범고래를 버리지 못하고 계속 데리고 헤엄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끼가 죽은 것을 슬퍼하는 어미 범고래가 차마 버리지를 못하는 거예요.

계속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죽은 새끼를 몸으로 들어 올리며 17일간 바다를 헤엄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쉬지 않고 새끼를 밀어 올리다 보니 어미가 점점 기력을 잃어갈 수 밖에요.

연구원들이 강제로 새끼를 떼어놓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새끼라면 당연히 혼자서 헤엄치며 어미를 따라다니고 건강하게 성장했겠죠.

자꾸 밑으로 가라앉는 죽은 새끼를 억지로 들어 올리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특히 예레미야서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죽은 새끼 인간을 어떻게든 들어 올리려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노력이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꼭 그런 느낌입니다.

영적으로 생명이 없기에 하나님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계속 세상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것이죠.

영적인 생명이 없으면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먼저 생명을 주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이죠.

하나님은 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생명을 줄 그 크고 비밀한 일을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속죄하심을 믿고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도 은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우리를 지금 그렇게 밀어 올리시며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끄셔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크고 비밀한 일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떤 위기와 낙담의 순간에도 부르짖으면 삽니다.

하나님은 응답을 약속하셨고 크고 은밀한 계획도 보여주신다고 했습니다.

살다보면 무엇이 정말 좋은 길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결정을 해야 하는 데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분명치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도 부르짖으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길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삶이 평탄하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매일 운동하듯이 꾸준히 신앙의 근력을 키워가시기 바랍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 그리고 삶에 적용을 꾸준히 하는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 집에 심겨진 백향목처럼 아름답게 성장해 갈 것입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태생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르짖어 구할 때 예수그리스도라는 크고 은밀한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2018년8월12일 남수연목사